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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7. 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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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신한 소재 어디 없나. 기발한 아이디어 그런 거. 뻔한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니까 그거 하나 가져다가 베껴서 마지막만 틀까? 하긴 그래야 어떻게 해서 어쩔 것이다 라는 추측이 틀리게 되니까 막판 반전의 묘미가 갖추어진다. 실상 반전이란 게 다른 게 아니다. 관객은 보는 동안, 독자는 읽는 동안 추리할 수 없다. 절대 못한다. 한번에, 단박에 분석하는 천재는 그리 많지 않다. 전문가조차 수차례 보고 또 봐야 그나마 이름값 하는 평론을 쓸 수 있다. 창작자조차 분석하라고 만들지도 않았고. 적당히 관심만 끌고, 살짝 흥미만 돋구고, 궁금증과 호기심만 잠깐씩 간지럽히면서 추측과 유추와 뻔하디 뻔한 예상을 하게 만든 다음, 마지막에 딱 빈손을 내미는 거지. 돈 다 썼다고. 주머니 비었다고. 설레는 예감과 들뜬 기대, 설마 그런 환상적인 과정이 있을 줄은 저 역시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내가 제일 많이 알아 내가 최고야, 그런 컨셉은 흔하니까 달리 가야 한다. 난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아니다, 내 허풍은 그저 최저점만 면하고 싶어,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며 꿈 많은 청춘과 꿈이 없는 젊음과 사랑보다 황금이 어쩌면 더 낫지 않나 라는 의구심에 괴로워하는 중년과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어르신까지 모두 밑밥에 걸려들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이거다. 글을 읽으면 작가가 되고 싶다, 노래를 들으면 나도 저처럼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춤을 보면 와 나도 저렇게 멋지게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를 보고 우와 나도 영화감독이 되야겠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요리사로 꿈을 바꾸고 제빵학원에 등록하고 내일 당장 가죽점퍼를 사게 만드는 기술. 그렇다. 맞다. 작풍에도 포지셔닝이란 게 있다면 그 비밀은 이와 같을 것이다. 뜨내기 손님이든 단골이든, 독자를 바보로 만들어서 애독자 엽서를 쓸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사랑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여 애인이 되듯이. 흔한 말로 글이 음악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그림에 살아있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 그런데 그게 말은 쉬운데 실천이 어렵다. 어쩌면 말도 어렵다. 아마도 글은 더 어려울 것이고. 안 그런가? 안 그렇다! 일단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도해봐야 하니까.
   내 인생은 명작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로 치면 돈 주고 보기 아까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왜 명작이 될 수 없었나 장래 명작이 될 가망성은 있는가, 그것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고로 일기를 쓰든 어쩌든 뭐든 해야 했다. 그런데 10년, 20년, 30년 내내 일기를 쓴 사람의 글을 읽어보거나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보물이야 응당 그분께는 유의미하고, 내게는 재미없기 쉽상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산 인생과 내가 보고, 듣고, 읽은 전체 분량 가운데서 최고만을 엄선하여 거기에 살만 조금 붙여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천재처럼 꽤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 그 욕망에 내가 적절히 부응하는가 그건 여실히 아닐 테지만 남들처럼 좋고, 우수하고, 예쁘고, 뛰어나고, 재밌는 걸 고르는 재주는 중간은 간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였고,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는 꾸준히 지속할려고 노력했으며, 따라서 블로그는 내 인생을 영원한 삼류로 만들었다. 쓰고 보니 아, 유치하다. 완전 시시해서 못 봐주겠다. 급히 포장한 느낌 때문에 뭔가 짠하고 찡하며 안타까운 기분마저 든다. 내 글은 역시나 B급이구나. 그러나 뭐 그거라도 하다 보면 A를 능가하는 B급 글쓰기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듣거나 읽기에 따라 좀 거북할 수도 있는 일반인들의 지나가는 표어도 어떤 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님 말고 같은. 닥치고 공격 일명 닥공이 어느 축구 클럽의 표상인 것처럼. 그렇지만 그러다 빵집 점원께 핀잔을 듣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빵) 찔러 보면 안되요 라고. 그래도 어디까지나 내 인생 철학은 가만 있는 벌통을 건드리거나 일부러 다채로운 꽃밭과 향기로운 과수원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홀딱 반할 만한 호박들을 스스로 구르게 만드는 신비로운 요술을 터득하는 것이다. 천운으로 마법사가 된 일도 잘 찾아보면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지망생이다. 영원한 지망생. 나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게 소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블로그를 계속 하기는 하는데 따지고 보면 저속한 유머, 심심한 팝콘 같은 인생, 예고편이 전부인 사랑 이야기 말고는 내 블로그에 올라오지 않는다. 저예산 영화 같은 인생이니까. 하지만 저예산 영화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역시 고예산 영화로 옮겨질 소설을 쓰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잔잔한 감동과 마법에 걸린 사랑,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 동심과 흑심 그 중간을 모른다는 거, 그거 문제 심각하다. 그럼 나도 다변은 아니고 다정함을 베풀 상대도 없으니 이제 슬슬 다작으로 가는 건가? 글쎄다! 결론은 나왔다. B급에서 더 내려가지나 말자 라고.
   애타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전개와 짠하고 등장하기를 바라지만 망설이며 나올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 절정과 실망스러운 결말까지. 차라리 괜찮은 발단 언제까지나 발단이 그나마 낫겠다. 나올 듯 말 듯, 나올 듯 말 듯? 그냥 속시원히 등장하시라! 간지럽히며 애태우지 말고. 아 이거 진짜 참 나, 사람 환장하겠네. 웃을까 말까 행복할까 말까, 뭐 그런 건가? 정말 웃기면 고민하지 않고 즉시 웃는다. 진짜 행복하다면 이러지 않는다. 난 행복해 라고 소셜 네트워크에 쓰고, 난 불행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 라며 친구에게 말하고. 정말로 행복하면 행복의 삶을 사는 거다. 진짜로 사랑한다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도는 사랑을 하는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 실제부터는 개인적으로 사석에서 말할 것. 그러자. 그러는 게 좋겠다. 어쩜 무책임해 보여도 조금은 그래야 한다. 뭔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이다? 그거 다 순 뻥이다. 거짓말 선수의 호평일 뿐이다. 뭐 소름이 돋는 공포 영화라고? 그거 지은 마케팅 담당자가 옆에 있으면 때리고 싶어질 거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자, 내 꿈 이야기를 해볼까? 꿈에서 나는 학교에 갔다. 내가 학교에 가서 뭘 어떻게 했다, 가 내용이 아니라 학교까지 가는 이야기가 꿈의 전부였다. 나는 꿈에서 하의를 하나도 입지 않고 등교했다. 집에서는 피노키오였고, 밖에서는 일평생 거짓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름 목적과 명분은 있었다. 당시 꿈에서 나는 편견을 깨고 상식을 뒤집어서 교훈을 찾자 라는 의도 때문에 바지를 입지 않고, 팬티조차 안 입은 상태로 집을 나섰다. 물론 시내버스에서 사람들이 막 쳐다보는 데 엄청 창피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어금니 꽉 깨물었다. 좋은 일을 위해서-니까. 다행히 그 어 뭔가가 커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게 끝이다. 개꿈이었으니까. 복권을 사기에도 돈 아까운 꿈이었다. 내용 형편없었다. 그외에 장조가 있다면 꿈은 단조도 있었다. 어떤 꿈에서 나는 물 위를 걸었다. 그 전날 검은 책을 잠깐 보다 말았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꿈에서 나는 물 위를 걸었는데, 그런데 진짜 기적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 표면 바로 아래에 돌이 있어서 그 위를 걷는 것처럼 물고기나 개나 막 그런 동물의 사체 위를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개꿈이었다. 아니 악몽이었다. 오오, 저런!
   때로는 사람들이 전생과 후생은 생각하지 않는 듯이 사는 것 같은 일들이 간혹 세간에 알려진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효과는 오뚜기 캐릭터와 척키 인형과 신나는 축제와 한잔 술에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어제는 기쁨 오늘은 행복 내일은 사랑이라고 거짓으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거짓으로라도. 차일 거 가정하고, 바람 맞을 것 각오하고.
   내 블로그 유입 검색어 가운데 하나가 눈에 띈다. 그것은 '남친 싫증나게 하는 법'. 왜일까? 당사자는 왜 무엇을 알고 싶어서 그런 검색을 했고, 내 블로그는 호쾌한 해명도 하지 못할 꺼면서 그분을 낚았을까? 내 마음 편하자고 내가 찰 수는 없고, 그래서 내가 차이기 위한 뭐 잔머리 그런 건가? 혹시 정말로? 그럴지도! 다른 검색어도 있었다.
   나이트클럽 다니는 남편.
   마세라티 여자꼬시기.
   텔레비전을 10년 끊어보니까.
   새 짝짓기.
   양 발정기.
   조증 특효약.
   호색한 관상.
   남자 구워삶는 재주.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법.
   그외 수다의 소재로 삼을 만한 게 꽤 있었다. 인기 TV 프로그램 홈페이지 게시판에 등장할 만한 얘기들 말이다.
   발단에서 전개로 진행이 어려워서 소설을 쓸려다가 일기를 썼다. 즉 <소설을 쓰자>는 <일기를 썼다>로 바꼈다. 그래도 시작이 절반이라고 이야기는 시작됐다. 달콤한 연애소설이 될지 인기 없는 드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시점의 내 삶은─소설을 읽고 계시는 그대의 삶은─갈 곳은 없어도 오라는 곳은 많다일까, 갈 곳은 많아도 오라는 곳은 없다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둘 다 아닐까? 그 답이 뭔지는 불명확해도, 어떤 게 나을지는 몰라도 전자와 후자는 같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보기는 왜 둘 뿐이 없어?


   2

   최근 나의 일상을 소개하자면 별거 없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수영장에서 일광욕하기, 친구 만나기, 책 읽기, 운동하기, 우유 마시기.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계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도박으로 한밑천 탕진하지도 않았고, 자칭 해결사라며 동네에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빈둥빈둥 놀러다니지도 않았다.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느라 논리적인 사고와 비논리적인 사랑을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새로운 일이 있었다. 아 세 가지다.
   첫째, 새 컬러텔레비전과 새 노트북 구입. 노트북은 신제품을 샀다 치고, 소형 컬러텔레비전? 내 친구가 만일 내가 쓴 글을 읽었다면 신선한 내 행동 때문에 의아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친구가 NC라 부르는 습관을 버렸나 하면서. 그리고 컬러텔레비전이라니, 그럼 전에는 흑백 TV를 본 건가 그러면서. 아무튼 그리고,
   둘째. 나는 새 친구를 사겼다. 인터넷에서 어느 경영학자의 글을 읽고 따라한 건 아니다. 난 쭉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20년 전에도 그랬다. 친구들한테 연락처 엄청 받았고, 넌 알던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 인터넷에서 본 경영학적 충고는 이것이다. 만나던 사람만 만나다 보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원한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는 것. 새로운 장소에 가보라, 일단 행동하라, 그런 얘기들과 같은 맥락의 글이었다. 아무튼 최근 자주 만나는 친구를 세어보니 모두 여섯 명이었다. 처음에 영화감독 파블로를 찻집에서 일하다 새롭게 알게 됐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파도타기로 알게 됐다. 우리는 보면 바로 친구가 된다. 우리는 만나면 금새 친해진다. 우리는! 파블로가 맥을 소개시켜줬고, 맥은 콜린을, 콜린은 폭스를, 폭스는 수잔을, 수잔은 다시 딩맨을.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 6인의 친구들은 알고 지낸지 꽤 오래된 친구들이었고, 나만 후발 주자로 그들의 우정에 뛰어든 뭐랄까 난 그들에게 낯선 사교가나 외교관 타입의 새로운 친구였다. 친구들 얘기는 다시 하면 되고,
   마지막 셋째. 최근의 새로운 일 세 번째는 신작 소설을 일기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거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써야 하는 차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별한 우여곡절 없이 우연히 정한 일하기 규칙이었다. 양처럼 순하게 일만 하다가 언제 늑대처럼 분홍색 양에게 덤벼들지 모르지만 일단 관례를 바꾸기 전까지는 뚝심 있게 혼자 정한 일종의 목표 같은 거였다.
   그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아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서 묘사할 시간이 돌아왔다. 생계와 지루함, 따분함, 하기 싫다는 부정적 감성이 연상되기 쉬운 일과 공부였다면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파일이나 파워포인트로 문서를 작성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근래 은연중 정한 좌우명은 <행복한 일하기>였고, 따라서 나는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에 관한 최적의 매체로 소설을 택했다. 말로야 모차르트처럼 뚝딱 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메모를 모으고 자료 조사는 귀찮아서 하지 않고 엑셀 파일과 다양한 독서와 검색을 비롯해서 어렵게 어렵게 완성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거의 쉬지 않고 완성한 듯 하다. 그래도 살짝 작업 과정을 엿보자면 질투와 경계, 오리무중, 티격태격, 앙숙과 애증,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인물 관계도 같은 건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흥미로운 드라마가 아니라 그저 내 일상이고, 내 현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부담없이 친구들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를 거쳐간 100명의 여인에 대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여자는 막 그러면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나 고민하게 만들며, 주마간산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영웅담으로 유난떠는 것보단 그게 낫겠다.
   친구들은 이렇다. 파블로─맥─콜린─폭스─수잔─딩맨까지 6명. 골상학 및 다수의 인상에 근거한 관상으로는 차례대로 이렇다. 말상─개상─척키상─고양이상─요정상─여우상. 말상이나 개상은 드물지 않으니까 넘어가고 척키상, 음 내 친구 척키가 생각났다. 그리고 요정상은 수잔의 귀가 커서 요정상이다. 긴 생머리인데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수잔은 정말 귀가 크고 뾰족했다. 물론 나는 인간상이다. 그리고 파블로와 맥과 콜린은 남자, 폭스와 수잔과 딩맨은 여자였다. 그 다음으로 직업. 파블로부터 딩맨까지 영화감독─프리랜서 프로그래머─개인 투자자─가수─연극배우─경영학자 및 컨설턴트. 물론 나는 소설가다.
   그런데 이미 소설의 발단이 시작됐는데 왜 아직도 발단인가. 이러니 영화사에 판권이 팔릴 리가 있나. 일을 해도 해도 내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런 건 비밀 축에도 못 든다. 내가 너무 과거에 허랑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고 보니 완전 질펀한 사연이 있었다더라 잘 살다가 타락했다더라, 그런 영문 때문에 전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일까? 그래도 나중 완전 재미있을지, 심하게 재미없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 역시 소녀의 꿈과 귀여운 상상력, 사랑에 빠진 순정남의 배짱과 일면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해줄께, 언제까지라도 너만을 사랑하겠다, 우리 같이 살자, 또는 말없이 그냥 꽃 한 송이를 그대에게, 그처럼.


   3

   픽션의 종류는 다양하다. 스파이 스릴러, 현대극, 코메디, 고전, 문학적 허구, 역사소설, 마술적 사실주의, SF, 판타지, 스릴러, 기타 등등. 그것의 여러 분류 가운데 발견도 있다. 발견. 발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어쩌다 신세계를 발견. 둘째, 탐험과 탐색과 탐구에 매진하나 결과는 헛소동. 1번은 흥행이고 2번은 허당이다. 1번은 황금이고, 2번은 전망은 좋았는데 결과는 깡통이다. 떠들썩한 추측과 개봉 박두라며 선전은 요란하지만 결국 성과 없음으로 판명나는 거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을 증명하는 일이겠지. 맞다. 신세계를 발견할 뻔 하다가 마는 건 한마디로 떨떠름한 느낌일 것이다.
   그러면 이 얘기를 왜 꺼냈을까? 그러니까 어쩌다 신세계를 발견했냐고 못했냐고! 나는 의도치 않게 놀라운 신세계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단정짓기도 퍽이나 애매한 그런 뭔가 헛스윙 같은 일을 체험했다. 진짜로? 진짜로!
   나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두 분으로 똑똑히 보고 나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발단은 모두 파블로부터 딩맨까지 6인의 친구들이 나를 제7의 멤버로 합류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은 우리끼리만 돌리 동물원에 놀러갈려다가 널 빼놓고 가기에는 미안하기도 하고, 또 신기한 발견을 하더라도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듯 해서 너와 함께 이곳에 당도한 거야.
   사람은 세 유형으로 나뉘지. 첫째, 사랑을 믿고 싶은 사람. 둘째, 사랑에 빠지는 사람. 셋재, 사랑은 없어 까지. 그런데 이 사랑에 관한 세 가지에서 사랑의 자리에 사랑 대신에 신비나 환상, 기적, 신기루를 넣어도 말이 된다는 점, 당연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꽤나 놀랍거든. 보통은 어린애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지식이 늘고, 사회성이 발달하며, 괜찮은 인생관이 확립되는 대신 상상력은 빈약해지지. 왜냐하면 동심은 반납해야 하니까.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 거라고. 역시 사람은 어린애가 어른으로 크면서 겪는 큰 변화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아는 게 많아지고 경험도 늘어나기 때문에, 사랑을 믿는 쪽에서 사랑은 없어 쪽으로 옮겨간다는 점이야. 그놈이 그놈이더라, 그런 관용구 같은 거. 알라딘의 요술램프, 천일야화, 이솝우화, 백설공주, 신데렐라, 돼지 삼형제 같은 동화를 보고 읽다가 어른이 되면 그런 현실적이지 않은 일을 말로 바꾼다고. 응? 말로! 뭔가를 믿지 않거나 잘 믿거나, 웬만해선 속지 않거나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굉장히 과묵하거나 허풍 대회 출전 자격을 어렵사리 따내거나. 그러나 소녀는 사랑을 믿겠지. 역시나 남자는 친구와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다네. 그럴 수 없으니까. 아이는 신비를 믿고, 어른은 신비는 허구란 걸 아미 알아. 알아도 안다고 말하지 않을 뿐. 응, 하늘을 나는 산타클로즈와 루돌프 같은 거. 그래서 어른들은 사람이 아닌 숫자를 믿는다면서 혹시 당할 수도 있으니까 사기꾼을 경계하면서 살게 되지. 또 아이는 환생을 믿고, 어른은 환상을 만들고. 아이는 신기루를 꿈꾸고, 어른은 신기루 대신에 복권을 사고 말이야. 즉 그 중간은 사랑에 빠지듯 자네처럼 이렇게 환상의 세계를 목도하며 넋을 잃는 지경에 이르는 것일 테야.
   자, 보라구!
   이 푸른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저 해맑은 동물들. 다 진짜야. 어 저기 있군. 양말. 양과 말을 교배한 동물이야. 하하하하하. 이제야 모습이 보이네. 봤지? 어! 소마. 소와 말이 하나야. 소의 머리에 말의 몸. 그 외에도 많아. 아, 조심해! (7인의 친구들은 깜짝 놀라며 피한다) 방금 우리의 개새님이 뭘 좀 누셨네 글쎄. 저기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군은 새의 몸에 개의 머리를 하고 있다네.
   하하하하하. 아직 긴가민가하겠지. 밝고 어둡고 울렁이는 울트라마린빛 바다를 건너왔더니 에고머니나, 루사이트 그린색 초원 위에 웬 이상한 동물들이 놀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보고도 믿지 않을 수 없는데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쥬라기 공원이라고 있었지 않나. 그거랑 비슷해. 다만 공룡 대신에 보시다시피 새로운 동물이 있다는 거. 차이는 그거 밖에 없어. 아! 그건 허구고 이건 현실이란 것도. 얼룩말인데 어머나 글쎄 머리는 기린이네? (딱) 저기 보이지? 그거야. 뭐야 캥거루인데 다시 보니 코알라 같네. 그 둘이 하나라고. 하지만 이건 신화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된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네. 진짜라고. 현실! 이미 엣날부터 다 성공했고, 만방에 알려진 실제일 뿐이야. 그거, 그래, 라이거! 또 뭐가 있을까? 그래, 복제양 둘리! 또 뭐가 있을까? 유전자 조작 곡식! 사람도 인공수정을 하지 않나, 대리모. 윤리적인 문제나 그런 인습 때문에 아직은 구현 가능한 일을 봉인시킨 일이 꽤 된다고.
   우리 삼촌이 여기 골프장을 중고로 사셨을 때 처음에는 그거 할려고 하셨대. 늑대와 양과 사람과 어? 막 배를 타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는 방법. 그런 거 실제로 만들까 하시다가 중간에 계획이 변경된 거야. 보시는 바와 같이. (이때 파블로는 내게 망원경을 주면서 곰양과 당나귀하마를 구경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동물들을 살펴보며 꿈에 부풀었다. 왜냐하면 돌아가서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하면서 멋진 판타지를 쓸 기대에 코끝이 시리며 가슴이 뭉클해졌기 때문이다)
   어때, 우리 카페에서 꼬냑 한잔 하지 않겠나? 향기만 맡자고. 그게 원래 그런 용도를 위한 음료이기도 하고. (우리들은 무슨 거물이나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실내로 이동했다) 1900년대 초반에 씌여진 어느 고전 문학에서는 그런 내용이 나오더군. 씌여진 이름을 지우거나 사선을 그으면 그 존재가 책에서만 없어지지 않는 일. 대하드라마를 보면 나오지 않나, 살생부라고. 그와 더불어 2000년 전후로 발간된 인문학에서는 적고 기록하고 쓰고 숙지하고 꿈꾸고 소원을 빌라고, 그러면 이루어진다고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사소하든 창대하든, 물건이든 명성이든, 확실하게 콕 찝으라고 말이야. 두리뭉실하게 흐지부지 그냥 한번 해봤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포크로, 빛나는 삼지창으로 꿈을 푹 찌르라고!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응? 잘 알지 않나. 그런데 뭔 생각하시나? 어허! 설마 피노키오를 모르지는 않겠지? 이쪽을 보시게나. 내 코를 보라고. 이 모두를 증명하지 않는가, 이 코가. 게다가 눈으로 보고도 못 믿나? 저기서 뛰노는 동물 친구들을 보게나. 저게 어떻게 거짓말일 수 있겠나. 안 그런가? 안심하시게. 믿어도 된다네. 혹시 모르는 속임수, 그런 거 없어. 사랑은 없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사랑을 믿든 사랑에 빠지는 유형이든 사랑은 없다건, 사람들은 사랑을 하게 되면 명시적으로 얼굴에 딱 써지는 법이지. 난 사랑에 빠졌어요 라고. 그러다 봄-여름-가을-겨울이 한 바퀴 돌고 돌고 또 돌면 그 사랑은 애상으로, 미련으로, 시련과 우수와 애증으로, 보통은 권태로, 이상적으로는 금혼식, 때로는 이혼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하겠지. 곧 만나서 드라이브를 하고, 차를 마시고, 쇼핑도 하고, 영화를 봤다가 꽃길을 걷다가 앞집 사는 여인에게 불륜 현장을 딱 들키는 불운일지 오히려 다행일지 모를 그런 비운의 요행. 응? 처음만 가장 크게 기분 더러운 호시절이 있을 수도 있는 게 어른의 인생이야. 그런데 자네는 뭔가 달라. 이를테면 머리가 빡빡 스타일이거나 키가 훤칠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전하게 사는 사람도 있겠으나 뭔가 운명적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수프만으로 배를 채운다거나 일주일 내내 스파게티만 먹거나 푸딩광인 사람이 있어. 뭐야, 푸딩이 그 푸딩이 아니라고? 아 됐고, 뭔지 잘 모르겠고, 롱테일 말고 평범함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거 말이야. 집에서 녹차를 밖에서 콜라를, 아침에는 커피를 밤에는 주색으로 아 술로. 그처럼 하루는 이성으로 시작해서 감성으로 마무리되지 않나.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드라마를 보고.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도 집에서 공부하고. 응? 아침에 눈을 뜨면 동심으로 시작해서 낮에는 남 주기 아까운 그녀를 떠올려봤다가, 본전 생각나게 하는 연애는 고의가 아니라 우연히 거리에서 눈에 띈 어떤 인상 때문에 회상한 다음에, 저녁은 낭만이나 오락과 유희로, 밤에는 아마도 흑심을 거쳐서 꿈나라로 떠날 테지. 뭐, 뭐라고? 아침에 의식이 깨자마자 흑심으로 시작한다고? 아 나 이런, 사는 게 뭔지!
   좌우지간 자네한테 뭐라고 설명하기 곤란한 그런 거, 남들에게 없는 그런 분위기, 형언하기 어려운 인과론적 사색가이자 엉뚱한 상상으로 도가 튼 타고난 몽상가인 듯 보여서, 꿈과 모험으로 가득한 이곳 환상의 세계로 초대한 거라네. 아직 극비니까 혹시라도 실수로 어디에 발설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말이야. 허허허. 허허허허허.」
   내가 파블로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이런 돌리 동물원이 실존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나? 상상은, 할 수 있겠군. 호색증과 조증과 다몽증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말이야, 뭐 하나가 아니라고? 왜 하나냐, 나는 셋 다 꿰차야만 한다? 상남자군. 괜히 옆길로 새지 말고 다시 정리하자면 그땐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황홀한 예감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은 채 행복한 기분으로 변했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한 희망자나 외로운 여행가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나는 말귀도 알아듣고, 글귀도 제법 선별할 수 있는 자질이 출중하다고 혼자서 좋아했다. 이 사람은 파브르 곤충기 타입일까 조류 대백과 관련 학자 타입일까, 존경의 대상이 사람일까 인생 유형일까, 그것을 알아맞출 수 있는 혜안이 내게도 생겼다고 기뻐했으니까.
   그러나 무성한 소문과 다양한 추측과 숱한 가설과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파블로는 결국 은근 허당으로 밝혀졌다. 왜냐하면 개새, 마양, 치타곰이 사는 돌리 동물원은 끝내 사기꾼의 소행으로 탄로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개냥이, 개말, 개양을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결과가 그랬다. 그 이상한 동물들은 다 가짜였고, 그곳은 폐쇄된 골프장일 뿐이었다. 돈은 물론 파블로가 제일 많이 뜯겼다. 나도 액수는 자세히 밝히지 않겠지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 치고는 작게 당했다. 불충분한 베팅이 복을 불러온 셈일까? 답하기엔 영 석연치 못한 질문이다. 이로써 <어쩌다 신세계를 발견>이라는 발견의 종류1에서 <어쩌다 신세계를 발견할 뻔 하다가 맘>이라는 종류2로 왁자지껄한 꿈결 같은 환상은 마무리되었다. 뭐 아침에는 흑심 밤에는 동심? 혹시 시대를 앞서가나 했드니 기쁨과 환희와 흥미진진의 진상은 역시나 불길함과 체념과 절망으로 드러난 꼴이었다.
   벌 나비가 꽃 보고 날아드는 격이라는 둥, 희망과 꿈을 위하여 전진하라는 둥, 오늘의 운세는 순 엉터리다.


   4

   판타지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실적인 판타지, 둘째 허구. 첫째 현실적이라는 것은 곧 환상의 깨짐을 뜻하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은 국어인 환상보다 외국어인 판타지나 영화와 문학에 주로 쓰이는 전문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쉽게 말해 판타지는 꿈이고 불가능이며 초현실이다. 판타지와 SF의 차이는 과학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다. 심도 깊게 들어가면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쉽게는 그렇다. 판타지는 후덕하다. 때문에 그것은 이상주의도 신비주의도, 아이스크림 같은 사랑도, 펌프질되는 끝없는 기쁨마저 포용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것은 꽁꽁 언 만인의 마음을 녹여주고, 따라서 인기가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판타지는 어디까지나 일상, 생활, 공부, 일, 놀이, 인생과 양립할 수 없는 덕목이다. 이 역시 심도 깊게 들어가면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쉽게는 그렇다.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식이다. 아,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백조하자를 아시는 고고한 그대도 아시고, 미천한 소생도 아는 기정사실일 뿐입니다. 판타지는 말 그대로 공상─상상─몽환─망상이자 꿈이다. 즉 현실 부정이다. 인문학적 통찰에서는 잘 정의된 일은 동사와 명사 둘 다로 표현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랑과 사랑하다 처럼. 그러면 판타지는! 판타지-하다? 어딘지 모르게 백조-하자 처럼 들린다. 맞다. 저 둘째인 허구 판타지는 흔하디 흔하다. 그래서 첫째인 사실적인 판타지가 아마도 더 고급일 것 같다. 그렇다고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이 저급이란 말이 아니다.
   내게 있어 판타지는 '이런 기분 처음이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즉 나는 환상을 만났다. 그것은 환멸 다음에 오는 축복을 착각해서 느끼는 그런 환상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것은 내게 판타지였다. 어쩌면 사랑 같은 경험. 아마도 그 경험은 애인과 첫눈 그런 낱말들과 손에 땀나도록 경합을 벌여야 할 것만 같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뜻밖의 새로움이었다. 그러니까 그 판타지가 대체 뭐냐고! 그것은 내 친구 딩맨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딩맨은 남자 이름 같지만 외모나 성향이나 기호, 하는 행동과 말과 반응등 뭘로 보나 여자다. 완벽한 여자. 그러나 그건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적이 드문 해변가에서 알게 됐다. 머리 속이 복잡할 때 내가 혼자 즐겨찾는 나만의 비밀 장소가 있었는데, 난 그곳에서 몰래 나체 수영을 즐기곤 했었다. 인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딩맨, 그것도 딩맨의 부풀지 않은 위와 튀어 나온 아래를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유력한 심증도 필요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확증이었다.
   「오 딩맨,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 가만히 파도를 바라보며 우유를 마시자꾸나. 아님 뭐 요구르트? 가서 사 올까?」
   「아,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더 이상 숨기기도 싫었고, 그럴 수도 없었고, 참을 만큼 참았어. 견딜 만큼 견뎠으니까. 이젠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나 봐.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안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너에게 먼저 말할까 말까 고민했어. 다른 친구들은 너무 오래 뭐랄까 속았다고 하면 이상한가, 그래서 친해진지 얼마 안됐으니까 너한테 먼저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어. 정말이야. 게다가 넌 나와 관심사가 많이 일치하더라고. 그래 맞아. 통하는 게 있었어. 나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있잖아.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뉘지 않을까? 첫째, 프란츠 카프카를 읽는 사람. 둘째, 눈 한 번 껌뻑하면 카프카니 소냐니 르 클레지오의 조서니 조지 오웰이니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뭘까 헷갈리게 만드는 남자. 그 뿐만이 아니라 영화에서 누가 마셨던 어떤 와인, 중절모는 어떻게 벗고 어떤 날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향수는 뭐다, 난 글 쓰는 남자와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남자는 절대 사절이다 질색이니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누구에게 끌리며, 요즘 누구 음악에 푹 빠졌고, 데미언 허스트는 식상하고 차라리 어설픈 추상파 화가들이 훨씬 낫더라는 둥 할 말이 많은 남자. 종이 한 장 차이로 한대 때리고 싶은 남자. 그러나 본인이 깨달아서 리듬만 좀 타면 얄미우면서 귀여운 남자. 넌 무엇보다 2번 할 말이 주체할 수 없도록 많은 남자가 아니라 클레이턴 크리스텐슨의 할 일 이론에 따라 색다른 소비재를 고용하고, 책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모든 게 너무 시적이기 때문에 인생 내내 카프카를 즐겨읽는다는 내실이 탄탄한 한 시인의 권고를 믿고서 포기하다, 외면하다, 노력했다 포기하다, 다시 도전해서 뒤늦게 카프카 읽기라는 꽤 근사한 취미를 알게 된 남자, 마음에 드는 쾌적한 속옷 같은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촌스럽게 하고 다니니? 신경쓰지마 농담이니까. 설마 정말로, 그래? 장난인 거 알지? 하하하. 내 농이 좀 심했네 친구.」
   「하긴 요즘 세상은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서는 자기가 배우거나, 따라하고, 힌트를 얻기에 유리한 부분만 재빨리 습득하는 추세가 없을 수가 없겠지. 바쁜 세상이니까 말이야.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니까 당연한 거겠지. 정보가 방대하고 즐겨야 할 예술과 즐겁게 몰입해야 할 놀이와 만나야 할 새로움들은 정말 끝이 없어. 고전적인데 현대적이다, 현대적인데 고전이다 그런 묵직함과 건실한 중량감보다 수박 겉 핥기식 합리주의와 값싼 웃음을 유발하는 호사가, 적당한 시간 때우기로 좋은 저질도 아니고 고급도 아닌 어중간한 오락물들, 마치 거울을 보는 게 아닌가 환각에 빠지게 만드는 스탠드업 코메디의 제왕! 라~고 모두 다 똑같이 웅변하고 판에 박은 듯이 주장하지만, 제왕이 아니라 대부분 앵무새인 것만 같아. 그래야 더 잘 팔리는 세상이니까. 밀란 쿤데라도 이젠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런 냉소 섞인 투정과 자조 섞인 미소도 한때 유행이었을 뿐이야. 차라리 그런 얘기들이 보이고 들리던 때가 더 낫더라는 기분도 들어.
   아무튼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 난 말이야, 사랑 받지 못하다 인기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처럼 일기를 쓰고 싶어만 하고 정작 일기를 쓰지 않는 남자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로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네 어쩌네, 일기가 밀렸네 소설을 쓰자네 내가 오빠 이럴려고... 그거 다 허영이라고. 투정 같은 거. 뭐 어쨌든 그래도 기분은 이상하다야. 딩맨은 내게 살짝 끌리는 여자였는데. 아니 많이...였을까? 그럼 이제 맥과 콜린의 구애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뭐야, 브로맨스로 바껴야 하는 건가? 반대로 폭스랑 수잔은 딩맨을 두고서 연적이 되어야 하냐고. 잘하면 꽤 멋진 삼각관계 하나 나올 것도 같은데. 그러지 않을까?」
   나는 딩맨의 비밀을 알게 됐다. 살짝 무안했고, 적당히 적나라했다. 그러나 선정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동적이었다면 모를까. 무엇보다, 나는 딩맨의 정체성을 발설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내가 심하게 야무니까. 판타지의 종류 2가지에서 딩맨은 어쩜 둘 다를 내게 안겨주었으니까.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인생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다. 해와 지구와 달, 해와 달과 지구, 지구와 해와 달이 일직선 상에 놓이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더라도 알 수 있다.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인생이 교차할 수는 있어도 완벽하게 딱 맞아덜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여기서 멋진 남자는 새롭게 남자로 환생한 딩맨이고, 아름다운 인생은 우리의 우정이다. 더 쉽게 설명할려면 할 수는 있는데 뭔가 더 설명하기는 싫은 그런 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우정이 6명을 뜻하는지 나까지 7인일지, 아니면 앞으로 딩맨의 컴백 여하에 따라 새로운 이합집산이 발생할지 정밀한 예측을 하기엔 무척 역부족한 실정이다. 다만 문학적 발견이 나왔고 영화식 판타지가 나왔으니, 이제 분명 어디풍 그 다음이 있을 것이란 기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됐다. 솔직히 그 모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기 썩 어렵다는 난점은 쉽게 예상된다. 이때 필요한 건 귀납적 추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쯤부터 뭔가 재미있는 일이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의 풍선과 두근두근 콩닥콩닥 썸타는 호기심이 추론도 잠재우고, 추리도 억누르며, 기쁘게도 추측을 무대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첫키스, 첫경험, 첫사랑, 독무대, 시험대, 신고식 같은 거. 그렇다면 지금 절실한 건 무엇일까? 지금은 놀라운 느림의 미학을 알아야 한다. 운을 타고, 희망을 마시고, 여복을 꿈꾸며─뭐 숙녀가 꿈꾸는 남자복?─현재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빗대어 설명하는 게 좋겠다. 게임으로. 지금은 블랙잭의 규칙을 몰라도 상관없다. 표정 관리 안 되면 어떤가. 지금 잃고 나중 대성하는 게 낫다. 그 반대라, 아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듯 하다. 포커페이스 역시 장단점이 있다는 걸 살다보면 알게 된다. 액면이 좋은들 어떻고 나쁜들 어쩌겠나. (다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를 가난한 예술가나 더 가난한 냉철한 이성주의자에게 듣게 되는 상황은 썩 반갑지 않음) 우리는 지금 당장 승부사인 척 여유 부리며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이 하나만! 딱 그거만. 중간에 받는 한 장의 카드를 놀랍도록 느린 속도로, 긴장감을 최대한 살려서, 애타게 내 님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살며시~ 그 하나를 서서히, 서서히 확인할 것! 마네킹 옷을 벗기듯 바나나 껍질을 까는 듯이 덥썩 다음 타자를 확인할 게 아니라 향긋한 꽃이 피는 속력과 동기화를 이루듯이 그렇게.
   나는 이제 어떤 신선한 역경이랄지 전혀 새로운 미스테리, 대결 구도든 수수께끼 해결이든, 우정이냐 사랑이냐 남남이냐를 결판내지 않을 수 없다는 운명의 서막이 열리는 걸 감지했다. 난 떨었다. 또 난 떨렸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다. 뭐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최선을 다하지는 않겠다고. 앞서 나가지도 않겠다고. 허튼소리를 일삼지도 않을 것이라고. 부디, 나는 그냥 묵묵히 분위기를 따라갈 것이라고. 나는 내심 마음을 정한 것이다.


   5

   사실 딩맨은 뭇남성이라면 어쩔 수 없이 멈칫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쭉쭉빵빵 아가씨였다. 그래서 나는 유능한 숙녀를 한 명 잃었고, 새로운 우정을 기구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골백번도 더 할 수 있다. 오늘 같은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오늘 나는 일이 있어서 번화가에 들렸다가 딩맨의 가족을 만났다. 그런데 아시다시피─아시다시피? 모를 수도 있음. 관심조차 없거나─딩맨은 여우상이다. 그래서 나는 여우 가족을 보는 듯한 꿈 같은 환영 때문에 잠시 아찔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혼미함 때문에 하마터면 이성적 기분파 라는 내 지위를 잃어버릴 뻔 했다. 예술에 대해서라면 나는 언제가지라도 꿋꿋하게 주둥이를 쭉 내민 표정의 반항아라야 하고, 기쁜 삶에 있어서도 철들면 안된다 언제 철들래 라는 명제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그런데 나는 잠시 정신을 놓을 뻔 했다. 그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란 게 왜 그러냐면, 우리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만일 거리나 어디서 우연히 콜린 가족을 만난다? 콜린은 척키상인데 뭐 척키 패밀리? 지금 영화 찍나? 어? 그렇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안심했다. 그건 그렇고, 
   한편 오늘은 바로 발단만 있는 하루가 아니라 전개가 납시신 길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무슨 돌리 동물원 사기 사건 때문에 파블로가 책임을 통감하다 못해 이제 우리들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잠적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혹시 모르니까 상서롭지 않은 일을 사전에 차단하고 걱정하는 의미에서 파블로를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모두들 개인 사정과 일정을 취소하고 미루며 이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나는 이쯤 되면 모험이나 구출이나 여행이 다음 순서일 꺼라고 나름 예견했다. 그러나 예견은 예견일뿐. 결국 떨구어진 지령은 바로 추적이었다. 뭐라고, 추적? 그게 정말 흔하디흔한 소재라서 쉽고 재밌을 것 같지만 또 실제는 다르다. 그래도 수업시간 제목이 그것이니 일단 추적에 대해 알아보자. 살짝만.
   자, 추적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개연성 있음, 있을 법 하고 의미도 있음. 둘째 설득력 없음, 납득이 안됨. 1번은 추적하는 이유가 합리적인가 아닌가에 따라 요컨대 말이 된다. 반면 2번은 앞뒤 연결이 안되는데 억지로 연결한 설정이고, 밑도 끝도 없이 쫓고 쫓기는 거다. 답답한 노릇이지. 한마디로 무모함, 모험, 광기, 젊은 같은 거.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미친 사랑. 그런 거. 그러면 우리가 파블로를 찾는 것은 합리적인가 아닌가. 음, 그건 이렇게 하자. 1.5라고!
   꿈에서 내가 아기 돼지+코끼리와 조우한 날, 우리들은 모였다.
   「그런데 대체 어디 가서 파블로를 찾지?」
   「파블로는 일기도 쓰지 않고, 블로그도 안 하고, 소셜 네트워크도 일절 하지 않아. 자기 생각과 정보는 극도로 제한적으로만 노출하고, 반대로 밖에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할려고 하는 친구야. 그래서 그동안 우리들도 파블로와 친하게 지내긴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많지 않을 거란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군 그래.」
   「그렇지만 걱정할 건 없어. 왜냐하면 우리에겐 맥이 있기 때문이지. 맥은 우리 가운데 유일한 파블로 전문가거든. 안 그러니, 맥?」
   「음... 부정하진 않겠어. 나도 먼저 나서서 말할까 하다가, 이처럼 순서를 기다리느라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주면 좋겠고 말이야. 실은 뭔가 망설여지는 느낌 때문에 개운치 않았거든. 왜 그런가 생각해봤어. 혹시 우리 중에 돌리 동물원을 억지로 좋아했던 사람, 있니? ...... ...... 없을 꺼야. 나는 아직도 믿고 싶어. 그 신기한 존재들을. 그리고 그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인정하기도 싫어. 지나고 보니까 그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 않을까? ...... ...... 우선 파블로는 거의 광적으로 몰입할 정도로 기뻐했고, 난 극도로 흥분했으며, 콜린은 대하극에서 왕이 왕후가 아닌 여러 조연들을 두루두루 아끼다가 특정 조연에게 마음을 주듯이 돌리 동물원을 더없이 총애했고, 폭스는 맹목적인 애착을, 수잔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게다가 딩맨은 판타지를 만났다는 듯이 들떠있었고, 얘는 승부사처럼 베팅할 준비를 했잖니? 다들 인정하지?
   콜린의 말마따나 난 파블로를 잘 알아. 그가 사는 집, 친한 친구들, 녀석의 일중독과 취미, 생활상, 알려지기 싫어했던 악습, 만났던 여자와 지금 만나는 여자는 물론 파블로의 부모님과 형과 동생들도 모두 알지. 그런데 파블로가 개상이니까 음 정말 그렇더군. 아~ 말 말어. 파블로가 우리 중에서 유독 많은 돈을 투자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아마 그럴 꺼야. 녀석은 돌리 동물원에 존재하지 않았던 닭백조와 개말에 퍽 이해하기 힘든 집착을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고.
   아마도 파블로는 실연당했을 때처럼 여행을 가지는 않았을 꺼야. 다음 작품에 전념하며 어디 숨어서 희곡을 쓰고 있지도 않을 테고. 낯선 여행지에 가서 거기 있는 거의 모든 여자를 꼬시는 기행은 그와 전혀 동떨어진 일일 꺼라고.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한 게 말이야, 파블로는 그곳으로 간 거 같아.」
   「......」
   「그곳은 설마... 돌리 동물원?」
   「빙고!」  이건 거의 절묘한 화음의 합창이었다.
   2편, 3편, 감독 특별판, 드라마 종결을 앞두고 억지로 추가 편성을 해서 분량을 늘리듯이 추적 과정을 늘리지 않고 결과만 밝히겠다. 개연성은 이미 포기했고, 성과가 있었냐 없었냐, 그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점이니까. 지금 이 상황에 파블로의 심복을 새롭게 등장시켜서 돌리 재단의 비밀이 드러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다. 뻔한 수순이라면서 그럼 그렇지 라고 할 것이다. 파블로의 은신처는 어디이고, 은닉된 비밀은 무엇일까? 예고는 전개 없는 발단이다. 파블로가 기쁠 땐 상태가 어떻게 바뀌고, 슬플 땐 어디를 찾는가. 관객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구태의연하게 그 식상함을 고집하면 그분들로부터 좋은 소리는 듣기 글러먹은 거다. 파블로가 주로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관심 없다. 중요한 건 결론이니까.
   결론은 얘네들이 우정 하나는 끝내준다는 거다. 그들은 돌리 동물원에 갔고, 염탐을 했고, 텐트 치고 거기 사는 파블로를 발견했으며, 그를 잘 설득해서 그의 오만관 편견과 아픔을 다독거려주어서, 그를 홈그라운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것은 행복감의 전조일까, 불운의 징후일까?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다음 편이 기대된다. 기대까지는 아니지만 작가 혼자 잘 노나, 애쓴다며 조롱할 준비나 해야겠다. 작가 역시 작가이자 독자라는 1인 2역이니까. 아무튼 추적은 결국 맥없이 끝나버렸다. 나이라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자꾸 머머증, 머머증도 늘어나는 것만 같아서 걱정인데 말이다. 행운은 모르겠고 사랑은 정체, 재산은 하락─곤두박질? 설마 늘어날 기미가 전혀 없는 건가?─하락도 모자라 내내 바닥인데 반해 머머증은 점점 늘어나는데, 그게 정말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구나. 


   6

   친구들은 돌리 동물원에서 파블로를 데려왔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함께 소풍도 가고, 따로 개인 일정을 소화하기도 하면서 돌리 동물원을 몰랐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아무 문제 없는 듯 보였으나, 잔잔한 우정은 어딘가 미심쩍은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친교는 어색했고, 사교적 태도는 적잖이 가식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딩맨이, 멀쩡한 여자였던 딩맨이 남자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재밌든 재밌지 않든 이와 같은 환상의 심술 때문에 그들의 우정과 사랑 사이의 평평하고 팽팽한 균형이 무너진 듯 했다. 이건 뭐랄까 명작 오페라를 보다가 중간에 오페라 극장을 뛰쳐 나온 느낌? 그런데 오페라를 실제로 본 적이 한번도 없음. 곧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러는 듯 가장하면서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가슴 나오고 향수 뿌리며 치마를 입고서 교태를 함께 선보였던, 같은 여자였던 폭스는 어느 날 애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랬다.
   「난 사랑 안 해.」 폭스.
   「뭐? 사랑 안 해? 뭘 사랑 안 해?」 콜린.
   「뭐라고, 사랑 안 한다고? 이게... (웬 떡이냐 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좋아해도 될까? 딩맨을?」 수잔. 표정만 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보다 그 행간에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듯 했다. 오, 땡큐! 오, 땡큐?
   순간 나는 느낌이 왔다. 얘네들은 오래 만났기 때문에 의외로 무언가에 둔감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즉시 내게는 딩맨이 더 이상 딩맨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딩맨은 쌍둥이 오빠와 동생으로 나눠지는 것 같았다. 느낌이 왔다. 일란성 쌍둥이는 동일한 성별만 가능하다는 게 의학적 상식이다. 하지만 다운증후군인 사람이 있으면 얼굴만 다운증후군인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드문 이론적 가능성을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직감은 날 가만놔두질 않았다. 맞다. 추리와 직관과 동물적 본능은 나를 약간 붕 뜨게 만들었다. 짜잔, 공중부양! 물론 내 추측이 틀릴 수도 있다. 꿈도 야무지다 그랬는데 꿈 같은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이미 딩맨이 남자라면서 더 이상 여자 화장실에 들르지 않고, 이제부터는 남자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판타지였다. 때문에 난 하나의 의혹을 좀 더 뚜렷한 가설로 발전시켰다.
   그러면 딩맨은 왜 동생(또는 오빠) 아바타를 불렀을까? 그 답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적합한 설정이니까 잠시 해명은 유보하겠다.
   나는 돌리와 딩맨 뒤에 숨겨진 서사의 전말이 궁금했다. 애초에 알고 싶었지만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딩맨의 사생활을 캐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기가 많냐 적냐>와 <사생활이 건실한가 문란한가>가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판 난다는 직접 대칭의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 일기와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에 등재된 내용이 허울뿐인가 아닌가를 말해준다. 나는 내가 평소에 관찰하고 겪어 봤던 딩맨의 언행과 습관과 옷차림과 성향과 감수성 같은 전반적인 딩맨 정보를 재점검했다. 차근차근 분석에 들어갔다. 그리고 딩맨의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도 세세히 살펴봤다. 그 결과 딩맨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거라는 총명한 예지가 도출됐다. 딩맨은 지금 돌리 동물원에 있고,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딩맨을 연기하는 딩맨 아바타는 돌리 동물원을 고용한 게 분명했다. 즉 돌리 동물원의 새 주인이 딩맨 아바타다. 동생이든 오빠든 남자 딩맨은 사기꾼이 어항에서 사라졌으니까 돌리 동물원을 헐값에 인수했을 것이다. 딩맨은 거기서 놀고 있고, 딩맨 아바타는 여기서 가장 무도회를 즐기는 것 아니겠나, 그림이 딱 그려졌다.
   아아, 때가 됐다. 다시 장고에 들어가야 할 때가.


   7

   우정은 둘로 나뉜다. 몰려다니냐, 단둘의 친교냐로. 사랑 역시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찐한 사랑이냐 풋사랑이냐로. 파블로, 맥, 콜린, 폭스, 수잔, 딩맨은 몰려다니는 우정이었고 그 중에서 사랑이 탄생하지 않은 관계였다. 아마도 사랑이 싹틀 뻔 하다가, 할 듯 말 듯 하다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딩맨은 파블로와 맥과 콜린을 놓고 미세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있었을 테고, 따라서 딩맨은 <가지 마오─떠나지 마─내 곁에만 있어줘요─내 사랑을 받아주오>라는 확실한 고백을 받지 못해서 토라졌을 가망성이 컸다. 그래서 당시 딩맨은 사랑의 조력자와 많은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이때 조력자는 사랑의 큐피트 그 낭만적인 역할을 절대 마다하지 않느냐, 내 앞가림도 힘들다 '오 땡큐' 어디 없나 라면서 두리번두리번, 그 둘로 나뉠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어쩌면 딩맨은 변했을 것이다. 마음을 튼 거다. <나 꽃이야>에서 <넌 호박이야>로. 원래는 꿀벌도 베짱이도 개미도, 거북이와 토끼까지 구애하며 예찬해야 정상인데, 자칭 새라는 파리나 백조로 보여지고 싶은 촌닭만 꼬였기 때문에 살짝 기분 나빴을 것이다. 사람의 사랑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일도 똑같다. 가게에 파리만 날리는 거나 외로운 들장미나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딩맨은 많이 상심했을 수도 있다. 마음 확 상한 거지.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 그래서 딩맨은 그 자리에 아바타를 앉히고 자기는 떠난 거다. 지적이든 다비드과든 뭘 좀 아는 남자건, 꿀벌이 화사한 꽃에 앉아 단물을 아아, 달콤한 아카시아 꿀을 쪽쪽 빨아먹다가 사랑의 본드 때문에 산만한 동물의 세계는 행복한 러브 스토리로 바껴야 했다. 원래는. 그러나 그건 헛된 기대, 짧았던 설레임, 미래를 위한 감미로운 회상에서 쓰디쓴 기억으로 강등, 꽃을 든 남자에 대한 평범한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남녀의 우정? 있을까요! 적어도 거의 없다 라는 노신사식 혜안보다, 가능하다고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는 애기다. 속은 시커멓든 가식적이든 어쩌든 겉으로야 무례와 실례와 결례를 범할 수야 없지 않겠나. 안 그런가?
   돈 없고 나이 들었고 눌변이래도 늙다리라 얕잡아 보여질지라도 분명 숨겨져 있을 노련미, 이분과 똑같이 연로하지만 돈 많고 정신 연령 젊고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이 부자인 허풍 대회 입상자의 관록미, 역시 어느 노로한 범인의 노회한 성숙함, 그건 이미 어디 가서 무슨 성금 모금함에 들어가버렸다.
   <사생활이 건실한가, 문란한가>는 몰라도 <인가가 많냐, 적냐>는 대체로 당신을 한두 번, 두세 번 사랑하도록 절대 가만 놔두질 않는다. 무던히도 귀찮게 한다. 뭐, 뭐라고? 자그만치...... 워─워─워! 그건 모두 사랑은 모름지기 유행가 가사 같은 인생과 한 짝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드라마의 기획 의도 같은 교훈이다. 고로 답은 나왔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가 아닌가에 관한. 답은 허무하게도 이렇다. 그것은 심하게 유동적이라고. (그 어떤 몸짓 아아)!


   8

   나는 최근 함께 노는 친구들인 파블로부터 딩맨, 아니 딩맨 쌍둥이까지 녀석들이 좀 헤매고 있으니까 잠시 떨어져서 시간을 갖기로 했다. 왜냐하면 딩맨의 휴가가 막 상상되고, 딩맨 아바타의 어색한 연기가 너무 웃겼던 데다, 거기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다른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딩맨이 나타나든가, 딩맨 아바타가 전말을 밝히든가, 또는 우정과 사랑의 관계도가 어느 정도 정리되든가, 그에 대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들과 잠깐 거리를 두기로 했다. TV로 스포츠 경기를 보는데 응원하는 팀이 내내 지고 있길래 TV를 껐다가 잠시 후 다시 틀었더니 아 글쎄 역전했다더라, 같은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는 기대가 깔려있는 의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집에 가서 몇일 쉬고 왔다. 본가 말이다. 엄마와 아빠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오랫만에 만났으니 가족애를 공고히 하고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설명은 진부하고 음 가만 있자, 나는 엄마와 아빠의 미소를 보고 싶었다. 웃는 모습. 웃을 때 드러나는 아빠의 앞니. 나이가 들어 발생하는 노화 현상 때문에 인공적인 앞니일 수도 있으니 유명인들을 TV로 보는 것처럼 멋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감정은 애처로움 반, 정다움 반이다. 그래도 봐야 했다. 엄마를 웃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아빠를 웃길 수 있는 방법은 훨씬 적다. 아빠가 환하게 웃을 때는 주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외식할 때 무엇을 고를까 망설이다 맛난 음식을 고르는 순간. 둘째, 저 나무의 이름은 뭐다 이 별자리에 얽힌 전설은 어떻다 라는 틀린 정보를 내가 슥 흘리면 그걸 수정하시면서 가녀린 기쁨을 느끼실 때. 셋째, 명절이랄지 그런 날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다과를 내놓고 나름 융숭히 대접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낸 후 손님이 돌아가신 다음, 가난한 아빠는 어눌한 화법의 소유자이신 아빠는 한량 예술가와 성실한 농부 성향을 반반씩 닮으신 아빠는 그러신다. 저번에 선물로 들어왔던 딱 하나 밖에 없던 값비싼 독주는 아껴놨다고 하시며 살짝 식 웃으신다. 뭐 그렇게 도시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낸 다음 나는 내 시골 작업실로 돌아왔다.
   어쨌든 나는 집에서 잡다한 생각을 했다. 나는 평소에 할 말이 없다가 언제 말이 많아지는가. 일기, 소감문, 감상평, 소셜 네트워크 게시물, 블로그, 친구와의 대화등에서 나는 왜 어떤 분량에 대해서 유독 어려움을 느끼는가. 내가 그렇게 유별난 존재인가, 아니다 난 지극히 평범하고 난 정상이다. 나는 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드물까. 그런 의문은 결국 흔한 인터넷 게시글을 보고 이론과 실제에 관한 문제로 관심이 집중됐다. 학교에서는 세상은 아름답다고 배웠는데, 왜 사회에 나오니 문학적 사랑보다 찐한 사랑과 풋사랑이 무엇보다 돈과 인기와 재미가 제일이더라 라는 문제. 학교 다닐 때는 싫지만 따라갔는데, 졸업하고 나선 내 세상이고 내 인생이니까 싫었던 공부 세계에서 발을 뺐으니까, 학업의 당사자인 학생이 아니라 일과 꿈이 모두 노는 것인 자유인이랄지 일이 본분이고 놀이가 여가인 학부모로써 숲과 나무를 보게 된다는 그런 얘기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국어와 문학 수업이 우리 때는 이랬는데 저쪽에서는 왜 그럴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자,
   국어와 문학, 예술 과목에 대한 교육 방식은 크게 나눠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다를까? 곧 국어-문학-예술 과목에 대한 교육 방식은 이상적인 방법도 있을 테고, 현실적인 방법도 있을 것이다. 흔한 말로 주입식 교육이라는 방식이 그 첫째고, 둘째는 개성을 다듬고 창의성을 키우며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 그것이다. 1번은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 곧 효율이 좋고, 방법에 따른 결과의 다양성이라는 측면 즉 효과 역시 이론적으로는 만점이다. 2번은 현실적인 방안인 1번 교육에 비해 훨씬 이상적인 방법으로서 그에 대한 환경과 토양이 완비된다면 미래인이 꿈꾸어 버릇하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돈보다 행복을 추구하고, 꿈과 사랑을 노래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고품격의 교양과 언제 어디서든 빈축을 사지 않을 상식을 언제 어디서라도 구비하고자 한다는 것. 간단히 비교해 봐도 2번이 월등히 좋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나는 2번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으나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2번 교육을 받고서 사회에 나오면 이상적인 2번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규칙과 질서와 안락과 어떤 풍요로움에 대해서 누구나 만족할까 라는 것. 과연 정말 그럴까? 누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이상적인 2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회는 더없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즐거울까 라는 것. 잘은 모르겠으나 꼭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점, 세상을 조금 살아보면 썩 그렇지 않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입장권이나 마표를 사듯 어른이 나이를 그냥 먹는 게 아니고, 머리 또한 개상과 말상을 구분하기 위한 장식물이 아니듯이. 2번 교육의 요지는 이렇다. 책을 한 권 읽고 나서 수필을 쓴다. 그것을 서로 말하고 듣고 토론하며 다음 책을 고른다. 다른 게 아니라 그게 국어와 문학 수업이다. 오, 좋지. 멋져. 훌륭해. 뭔가 있어 보인다. 인성은 물론 품위와 함께 인생을 대하는 낭만적 준비가 절로 갖추어질 것 같다. 그렇게만 십대를 보내고 나면 누구나 로맨티스트가 되는 거지. 어디 그뿐인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토의를 하고 논쟁을 한다. 다정하게 또 전문가처럼. 와아~ 영화평론가가 따로 없고, 한 사람은 언론인에 한 사람은 예술가요 선생님은 뒤집혀진 피라미드 때문일까, 막 우리의 쫄자이자 어리광부리는 조수로 보인다. 졸업만 하면 우린 그야말로 지상 천국의 시민인 거지. 멋진 인생아 신나는 모험과 최고의 사랑이여 딱 기다려주시라, 그거다. 그럼 정말 그처럼 2번 교육만 받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까? 그건,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통찰과 사유와 철학 같은 개념이 아니라 세상을 적당히 살아본 어른이라는 통빡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는 의견이다. 2번이 진짜 1번보다 월등하게 완벽하다면 우리가 영화에서 드물게 봤던 장면은 모두 현실이 되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지당하다. 거 왜 그런 장면들 있지 않나. 논술형 시험 시간이 딱 닥쳤어, 내내 놀기만 하며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다 게임에 여행에 술집만 전전하다가 시험 당일이 됐으니 답답할 테지 오죽하겠나, 그러나 시험지를 딱 받자마자 에라 모르겠다 그러면서 쓱쓱 답을 쓰고서 제일 먼저 시험을 끝마치고 나가는 거다, 머머는 머다 때문에 뭐가 어때서 어떻고 고로 머머는 논할 가치가 없다, 결론은 교수가 100점 만점을 주는 거다. 더더군다나 영화에 나오는 천재 주인공처럼 어디 가든 복이 따르고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며, 죄를 짓고 자주 드나드는 법원에서 판사마저 말로써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 그래서 습관적으로 법망을 빠져나감. 2번이 1번보다 어떤 어중간한 뛰어남의 기준으로 월등하게 완벽하다면 이런 사람이 현실적으로 밥 먹듯이 많이 나와야 맞는 거다. 영화상에서만 그럴 게 아니라.
   나는 (대개 딴짓만 하고 허튼 공상을 주로 했지만) 1번 교육을 받고서 어른이 됐고, 2번 교육에 대해 멋지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정보 입력하듯이 저장해온 관찰자였다. 1번 방식의 단점을 비판하고 2번 방식의 장점을 동경한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당연히 좋지 왜 나쁘겠나, <또 그 얘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판에 박은 듯한 얘기를 반복적으로 본다는 데서 발생하는 피로감이 있다는 거다. 그렇다. 사는 동안 내내 1번이 2번을 동경하는 모습에 익숙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꿈 같은 세월 관찰한 만큼에 상응하여 내게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있더라도 식상했을 것이다. 왜? 나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없으니까. 마침내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됐다. 내가 얼마나 제대로 된 어른 역할을 하며 사는가 자신할 수는 없지만, 2번 교육의 장점이 많긴 하겠지만, 나는 2번 교육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과거를 생각해보면 즉 내가 2번 교육을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난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랬다. 내가 쓰는 삼류 소설에 툭하면 스무 살은 애라고 했다. 응애응애 스무 살은 애라면서 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랬다. 내가 썼던 산문에 수다와 말수와 글과 말에 대해서 틈만 나면 쓰고 또 쓰고 지겹게 썼다. 엄청 지겹도록. 아조(아주) 신물이 난다. 나는 그랬다. 내가 스무 살 때 난 정말 애였다고. 그때 나는 필경 책을 한 권 읽고 나서 멋진 산문을 쓸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절대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2번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할 얘기란 게 없었다. 당시 사촌형이 삼류 대학 1학년으로써 동아리에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어서, 배운 화술이 있어서 내게 말했다. 어떤 영화를, 어떤 주제를 놓고 대화를 하자고. 대화? 뭔 대화? 난 할 말이 없었다. 큰 관심도 없고 복습하기도 싫은데 얘기를 하기는 뭔 얘기를 해? 얘기 그런 거 하기 싫었다.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고 했을 때 내가 2번 교육을 받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만약 내가 여자를 사겼더라면 난 아마 금새 차였을 것이다.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말하라는 친구도 있었고, 기회는 틈틈히 있었던 데다 지구 반대편과 남쪽에 사는 소녀와 펜팔도 했다. 실험실용 쥐 몇 마리로 옷을 만들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했다는 기행은 내 간접 경험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연애를 시도하고 직접 만났다면 난 분명 차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여자 앞에서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돈도 없었다. 항상 부족했다. 또 여드름도 났고, 인터넷에 보면 전쟁을 경험한 한 군인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얼굴에 나 행복하지 않음이라고 써 있었다. 잘생겼냐 못생겼냐, 보다 여자들과 사람들에게 더 우선시되게 느껴지는 것 곧 인상이 좀 그랬다. 괴로운 젊음 그런 거. 남쪽에 사는 소녀는 내가 연락을 끊으면 안 되었고, 내 군대 친구를 편지로 소개시켜줘서도 안될 일이었고, 내가 만나러 갔어야 옳았다. 갈까 말까 망설였다. 고민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가난했고, 자신감이 부족했고, 그러다 연락이 끊겼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소녀 역시 내 우중충한 사진을 보여준 게 화근이었다. 그건 괜찮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실제 나도 그렇게 살았다. 원래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다. 그리고 그땐 인터넷이 아예 없었으니까 그냥 재미로 해본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즉 당시 나는 원대한 포부는 물론 꿈도 없었고, 자주 바꼈고, 그냥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후로도 어느 정도 응큼한 심미안을 갖추게 되기 전까지는 똑같았다. 그 때문에 어떤 기회를 많이, 허허허 아니 조금은 놓쳤을 것이다. 하하하 하나도 재미 없다. 웃기지도 않는다. 2번 교육을 시키고 받는다고 없는 특별함이 얼마나 커지고, 고유한 개성이 어느 만큼 뛰어나게 바뀌고, 있을까 말까 예측하기 어려운 창의성이 그 얼마나 드높아질까. 난 실상 그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언어학적으로 인문교양서에 적합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과 함축적인 운문보다 비교적 긴 산문과 유려한 문학에 어울리는 언어를 쓰는 지역, 둘 중에 어디가 몇 번 교육에 어울리는지 내가 거기까지 알만큼 역량도 안되고 주제도 안된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 있다. 그건 무엇이냐? 이거다. 나는 지금도 책을 한 권 읽고 나서 수필을 쓴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토론을 한다, 어느 전시회를 보고 나서 꽤 괜찮은 감상문도 아니고 간단한 방명록을 쓴다, 난 그런 거 못한다. 절대 못한다. 그림은 내 전공이 아니고, 낙서도 내 취미가 아니다. 노래도 분위기 때문이라면 모를까, 춤도 술 마시며 기분이 들떠서 저질 댄스를 흐느적거린다면 모를까, 별로 소질도 없고 즐기지도 않는다. 일단 거장한 글과 장황한 말은 자신 없고 하기도 싫다. 하물며 거창하지 않은 글과 뭔 말을 하는지도 종잡을 수 없는 역삼각형 글? 말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는 할 말이 많지 않다. 만약 그런 내가 불현듯 종알종알, 또박또박, 조곤조곤, 쑥덕쑥덕 말을 많이 한다면 그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던가, 아니면 내 안의 다른 내가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러면 나는 속절없이 SF 영화에나 나오는 숙주로써 날 온전히 내주는 것일 테고, 따라서 난 필경사가 되는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내가 2번 교육을 받았더라면? 모르긴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말은 곧 1번이냐 2번이냐의 차이보다 개인이 세상을 마주보며 인생을 대하는 자세와 실제 어떤 생각으로 살면서 차근차근 뚜벅뚜벅 삶에 임하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따라 내일은 별명왕에 생애 최고의 날 그 기록을 틈만 나면 갱신하는가가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단순히 1번 교육을 받았냐 2번 교육을 받았냐, 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물론 차이가 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의지보다 적어도 부차적인 사안이다. 모든 일들을 어떻게든 냉소적으로만, 비판적으로만 볼려고 하면 인기는 멀어져간다. 그러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비록 행운의 구름을 탄다는 보장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 과정에 따른 의미는 찾는다. 그 차이다. 이론과 실제가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듯이 학생 신분으로 배우고 전공한 학업과 업자 신분으로 활약하는 상업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자, 지금까지는 단순히 비교했으니까 이제는 약간 비약해볼까? 만약 허락하신다면. 오 땡큐! 성은이 만극하옵나이다.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1번 교육은 차라리 상업에 가깝고, 2번 교육은 뭐랄까 살짝 동화적이다. 곧 2번이 고급스런 방법인 만큼 그 당초 목적을 달성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이 모두 내 삐툴어진 인생 때문인가는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중 그 생각이 변할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철회할 마음이 없고.
   어차피 스무 살 때 결심한 꿈이 나중 얼마나 바뀌고 어떻게 변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스무 살은 사랑이 영원하다고 큰소리칠 수는 있지만, 당시의 사랑이 진짜 영원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유부남들은 하고 싶은 조언이 많을 것이다. 아아 절대 적지 않겠지, 오오 결코 적지 않아. 유부녀라고 침묵하고 싶을까? 흐흠. 하물며 스무살 이전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 교육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 그걸 전적으로 교육 방식 탓으로 돌리기에 인생은 그리 길지도, 너그롭지도, 친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1번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장 쉬운 대응법은 1번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부를 안하면 할 일이 없으니까 책만 읽던가, 예체능에 심취하던가, 어른 흉내를 내면서 조숙해지던가 그런 방법이 있다. 1번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공부 하기 싫으니까 딴일을 한다? 썩 세련된 반응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생산적인 대응법이다. 그렇다고 과도하게 조숙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어른이 되면 반기거나 걱정하면서 또는 한눈팔면서 의무방어전을 치르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조숙해서 성공할 수도 있지만 섣부른 방황에 인생이 꼬이는 예도 있다. 근사한 개성과 고상한 창의성이 당장 발휘되기 어려울 것 같은 학생 뿐만 아니라 의외로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어차피 1번이냐 2번이냐 그 차이는 정작 덜 중요하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공부를 안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일을 못하는 것의 주요 원인 역시 1번 교육의 장점이라는 효율과 효과에 반하는 일하기를 하기 때문이다. 곧 그건 결과적으로 일에 대해서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고, 왜 그런가 라는 원인을 따져봤을 때 동기 부여가 부족해서 열의가 부족했을 것이며, 뭐니 뭐니 해도 공부나 일은 놀이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에 뜨겁게 열정이 생기거나 시원하게 욕구가 샘솟기 어려운 것이다. 1번 교육은 지옥 2번 교육은 천국, 정말 그럴까? 요컨대 절대 그렇지 않다. 1-1 종교면 천국, 1-1 아니면 모두 줄을 잘못 서는 것이라고 하면 듣고 보기엔 썩 불편한 것처럼. 모든 과학적 잇점과 삶의 자유와 침해받기 싫은 사생활과 번역식 교리만 내게 유리한 쪽으로 취하고, 종교의 구시대적 과오와 세상의 불합리는 온통 외면한다? 채식주의도 그렇다. 소극적인 채식주의자냐, 채식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채식주의 예찬론자인가, 전자와 후자이면서 동시에 환경 운동과 뭐와 뭐를 다 해야 하니 자기 인생을 살기 힘든가, 그래도 그게 진짜 좋으면 그렇게 사는 게 정답임. 보너스도 있다. 밖에서는 채식주의 집에서는 육식주의. 선이란 게 그렇다.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인생도 똑같다. 괜히 2번이 좋아보이기 때문에 다양한 게 정상이에요 라고 하지만, 1번 교육의 목표는 다양한 게 비정상이라고 하지 않는다(않았다). 다양한 게 정상이에요? 이 양반이 지금... 농담이고, 다양한 게 정상이라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며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상식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1번 교육 방식이 바라는 이상은 절대 그런 꽉 막힌 목표가 아니다. 이쯤 해서 사람의 얼굴로 비유해서 연역해보자. 그럼 이해가 더 재밌겠다. 1번 교육의 포지셔닝은 이거다. 사람의 얼굴은 사람마다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눈은 2개가 맞지만, 눈이 이마 정중앙에 하나 더 달려서 눈의 개수가 총 3개인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각종 분야와 학문과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제일 뛰어난 핵심을 간출여서 제시한다는 게 1번 교육 방식의 교육론이다. 이론적으로 꽤 괜찮다. 그러나 체계와 교육적 도움과 멋은 덜 괜찮을 수도 있음. 1번 교육에서 상위에 해당하는 사람과 2번 교육에서 상위에 해당되는 사람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정도가 일정 부분 비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쉽게 장담하겠나. 동서고금 미적 기준은 달라도 미의 관점 그 근본을 이루는 시각과 피라미드의 모양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1번이냐 2번이냐 그 차이보다 내 의지가, 코끼리 날개 때문에 휘둘리더라도 내 생각이, 화려한 마케팅 기법과 시대의 소음에 흔들리더라도 내 마음이 먼저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처럼 나는 썼던 글을 쓰고 또 썼다. 역시나 스무 살은 응애응애 애라고 했다. 어른들은 안다. 스무 살이 향기로운 아기 냄새가 나는 응애응애 똥싸배기라는 것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을. 쉽게 말해 사람은 10살까지는 놀고, 그 이후로 사람에 따라 평균 20살 초반까지 공부하고, 다시 반세기 동안 일한 다음, 인생의 후반기에는 다시 논다. 순환이 그렇다. 놀고, 공부하고, 일하고, 다시 논다는. 그 수식에 따르면 응애응애 스무 살 이전은 공부하는 시기다. 1번 교육 방식은 말 그대로 공부고, 2번 교육 방식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공부보다는 차라리 놀이에 가깝다. 그래서 2번이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NDJM 10살까지 놀았는데, 참새 짹짹 오리 꽥꽥 20살까지 또 놀겠다고? 놀아도 된다. 놀자. 놀아보자. 놀자꾸나. 아무 걱정 없이 놀자. 안될 건 뭔가. 단, 집에 돈이 아주 많다면! 단, 다른 특출난 재능이 있거나 무엇를 하고 싶다는 확고한 욕구가 있다면! 그런데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역시 남의 일만 같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데다 말수도 그만그만하며, 무엇보다 할 말도 별로 없는데, 그런데 응애응애 스무 살까지 내내 놀기만 하겠다고? 10살까지 놀았고, 20대 중반까지 공부했고, 그때부터 오래 일했던 어른이 하고 싶은 말 가운데 무작위로 딱 하나만 뽑아보자면 이와 같다. 자기가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이걸로 저걸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거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특정한 목표가 없다면, 만약 그렇다면 말수가 어느 정도 되고 뭔가를 알고 말이 좀 통하고 인기가 많거나, 그러지 않는다면, 우선은, 우선은 젊음이라 칭하건 청춘이라 예찬하건 그 당시에는 입력이, 입력이 먼저라고! 수박 겉 핥기일지라도 그렇다고. 왜냐하면 그게 쌓이면 어쩌다 호박이 제발로 굴러올 것이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호박마차에 응~ 아니 타라는데 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처럼 살았던 삼류 인생은 희박한 확률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1번은 이만 됐고, 2번 교육 방식의 단점은 무엇이 있을까를 알아보자. 당신이 만일 2번 교육 방식으로 교육 받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평가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머나 내가? 그래도 된다. 그렇게 됐다. 내게 만일 그와 같은 평가 권한이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1번 교육 대상에 대해 상위 부분이 정해지듯이 2번 교육의 수혜자 가운데 상위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글발이 있고, 말발 좋고, 심지가 굳고, 표현에 음악성이 있고, 일단 뭔가 있어 보이고, 튀고 반짝이며, 포장을 잘하는 사람이. 진흙 속의 진주를 알아보기가 어디 쉽겠나! 꼬끼요 꼬꼬꼬꼬꼬, 백조 연기하시는 우리 영심이와 촌닭의 적극성을 높게 사지, 미운 오리 새끼의 희망 찬 미래를 알아보는 건 어쩌면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무엇보다 이건 정말 2번 교육의 취약점이 아닐까 라는 대표적인 의문은 그것이다. 학생의 학업 능력을 2번 방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수가 많은 친구에게 금상, (장)타율과 홈런과 선구안과 도루와 수비와는 별개로 적극적으로 타격에 많이 들어서는 친구는 은상, 말수가 없는 친구는 동상이나마 감지덕지가 아닌가, 그럼 정말 어떡하냐는 것이다. 골프를 보시라. 골프는 정신적인 스포츠라고 하지만 골프는 기본적으로 거리와의 싸움이다. 여러 조건이 대동소이하다면 장타자가 장땡일 수 밖에 없다. 여러 조건이 대동소이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추어는 핸디캡 감안하고 친구끼리 내기를 하며, 여러 조건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레슬링처럼 체급이 없는 골프는 기본적으로 거리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그건 스포츠고 이건 교육이다. 더군다나 그 꼬리표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후세에까지 전해진다. 개인차가 클지라도 말발이나 말수는 대체로 천성과 나이와 비례한다. 그런데 인생의 전-전반기에 단순히 말수에 따라 나머지 기간이 상당히 좌지우지 된다면 허허허, 그것은 물론 지나친 비약이다. 허나 그런 우려는 오히려 값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론합시다 감상평을 말해주세요 무엇을 논하라'의 대상이 모두 학생의 취향과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으로만 선정된다는 점으로도 모자라 피교육자가 의욕이 낮고 말수까지 적다면? 그러면 참 뭐라 말하기 곤란하다. 절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1번이냐 2번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탁월한 안목, 지적 감수성, 상상력-창의성-성장 가능성, 동조성과 소심한 성격과 진중한 말수, 고유성-특별함, 자존감 자존감, 일과 공부의 성취도와 '일과 공부를 즐길 수 있는가'의 상관관계가 큰가>와 <기교적인 글발 솔깃한 말발, 지식의 양, 뚜렷한 주관, 말수 또 말수, 구시대적 기준, 자존심 자존심, 일과 공부에 유능한 유형인가>. 2번 교육 방식이라고 해서 전자와 후자를 모두 챙겨서 평가할 수 있는가, 내가 만약 평가자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솔직히 자신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 평가자라고 친다면 언제 전자를 낱낱이 다 따지고 있겠나, 한두 명도 아니고 후자 기준으로 평가하고 일을 마친 후 나도 쉬고 놀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노동자다. 성직자도 노동자다. 회사와 브랜드가 복지재단이 아니듯이. 교육자도 성직자도 돈에서 자유롭지 않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있다. 교육도 일이란 말이다. 교육은 신선놀음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다. 사람도 선량하지만 동시에 고지식한 사람이 있듯이 분야 역시 고루한 분야가 있다. 교육 같은 경우는 대체로 덜 전위적이거나 덜 개방적인 분야다. 날 밝고 올라서라 나를 뛰어 넘으세요, 에 대한 통념조차 시대적으로 달랐다. 지구가 태양을 1년에 1번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주 먼 옛날이 아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라는 경구를 현대인은 더 이상 직역하지 않는다. 곧 밑에서 위로 뭔가 상납되는 관례는 권력 관계상 없을 수가 없다는 뒷북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경향이 학과를 놓고 봤을 때 예술학과가 타-학과와 다른 그런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스승과 제자'는 '학생과 선생'과 느낌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 말은 논점에서 약간 벗어난 얘기이긴 한데 1번 교육 방식과 2번 교육 방식의 발생 배경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입력이 먼저냐,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고 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게 먼저냐. 인문학적 교양에 대해서 전공자 중심의 전문 기술을 위주로 양성할 것인가, 기초 학습이자 개성의 표출 측면으로 볼 것이냐. 그 차이인 듯 하다. 그렇긴 하나 그대가 만약 평가자라고 하더라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기교적인 글발이 돋보이고,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서론-본론-결말이 확실하며, 예시를 들어서 주장을 뒷받침하고, 논리에 감성까지 챙긴 글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란 점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스승의 은혜 역시 찬양해야 마땅하나, 내 기억으로는 긍정적 측면의 선생님과 그냥 중간만 가는 선생님과 언짢은 기억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다. 그분의 사소한 말씀이 기억난다. 자기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도 그 모습이 아주 생생하다. 눈에 선하다. 고1때 자퇴했던 우리 반 1번 친구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고 고맙다 라고 들었고, 원해서 학교 밖으로 나왔는데 어떻더라 라는 얘기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당시 우리보다 2배 3배 4배 많은 삶을 살았던 선생의 인생, 선생님의 개인적 소견과 사적 의견이 뭔가 더 인상적이었다. 명대사는 찾기 힘들고, 꿈이 아마 변경되었을 평범한 봉급 생활자 도시인들이지만 말이다. 약간 짠한 분위기로 흐를 뻔 했지만 다시 분위기 띄우자. 
   게다가 살짝 과장하자면 말발은 흑심이고, 글발은 팝콘이다. 만선은 장비발이고, 여복은 천운이듯이.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빚어지는, 못 말리는 지식 자랑은 푼수의 재롱이자 허풍 대회 예선 탈락감이다. 어이쿠~ 땡! 어디 그것만? 니케는 상표고 아마존은 상업에다, 이 시대의 뮤즈니 뭐니 해도 대체로 새로움보다는 전형성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2번 교육 방식도 온전히 모든 것을 2번 방식으로 가르치지도 않을 것이다. 분야도 다양하고, 시대별 유행도 다르고, 훌륭함의 기준 역시 변한다. 그와 더불어 1번 교육 체계에서도 이미 2번 방식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가르친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영화를 보고 논하며, 그림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궁극의 학습? 궁극은 무슨. 뭘 읽고 보고 감상하는 선을 넘어서서 이미 1번쪽에서도 작곡을 하고, 조각을 하며, 연극을 연출하고, 영화를 만드는 학업을 주로 하는 10대 친구들이 모여서 특별한 학교에 다닌다. 옛날부터. 교복을 벗으면 학문과 멀어지고, 지엄한 주례사와 함께 사랑을 맹세하나 그 사랑이 얼마나 지켜지는가.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작 병원을 움직이는 건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날의 조건이랄지 크레스텐슨 박사의 파괴적 혁신 이론에 따른 경제 원리다. 아니 정말 궁금하지 않으신가? 2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인데 왜 그런 세상은 천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처럼 꼭 거창한 궁금증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가까이를 보면 되니까. 내 주변의 무엇을? 2번 교육을 받은 내 주변의 어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시는지를. 가까이에 없으면 TV와 인터넷을 보면 된다. 사랑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거나, 가족 장르 영화나 애들이 열광하는 판타지 영화를 보면 왜 우리 아빠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주무시는지를.
   작가여, 당신 작품에서 이 부분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전체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요 부분만은 꼭 우리 다 함께 알았으면 싶다오. 그랬는데 작가왈, 난 싫소 저는 보물찾기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오? 하나의 보기가 주어졌을 때 대번에 핵심을 파악하고, 장단점은 물론 대충이나마 놀랍도록 이해가 쏙쏙 되고 흥미로운 한편의 논설에 대한 개요가 즉각 머리 속에 삐리리리, 삐리리리 그려진다면 그건 둘 중 하나다. 첫째, 영악한 악마적 재능. 둘째, 전문가의 요건. 예술품이 시작부터 끝까지 통채일 때 의미를 갖는다나 뭐라나, 그런 논리도 존중받아야 하고 의의가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층위에 도달한 작품이 좀처럼 흔하냔 말이다. 그걸 알아보는 안목은 왜 높여주지 않는 거고. 무엇보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촌닭 보고 촌닭이라고, 촌년 보고 촌년이라고 하면 대체 왜 표정 관리가 안되는 건데!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평생 광고하며 홍보하고 다닌다. 나 촌닭이라고. 그건 더 이상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창피한 일 역시 아니다. 본능인데 뭐 어쩌라고, 그처럼 절규하는 듯 하니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고상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 사립 유치원과 명문 학교를 나왔는데, 왜 그렇게나 촌스럽냐고! 아주 그냥 꽉 막혔어! 멋진 백조 옷차림이길래 딱 뒤집어봤더니 어머나 글쎄 촌년왕이라니. 그런데 그분들이 귀는 막혔는데 비해 말은 또 좀 많나. 그래서 다수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저 웃는다. 믿으니까, 속으니까, 그들 노는 게 귀여우니까, 웃기니까, 한편으로는 예뻐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예회 같으니까. 귀에서 피가 나도록 말이 많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린 친구들이 보봐리 부인을 읽는 게 아니라 푹 빠져서 감상할 수 있는가, 그분들 중에 전쟁과 평화 1-2-3편까지 찬찬히 읽고 촘촘히 감흥한 친구들이 대체 몇 명이냐는 말이다. 그분들은 능히 그럴 수 있다? 글쎄요... 깔보는 게 아니라 둘 중 하나라는 말이다. 옷이 복고풍이거나 신발이 크거나. 어차피 적지 않은 사람들이 40살 50살 되어서 또는 학교만 졸업하면 만화책과도 담을 쌓고 살게 될 텐데 40살 50살 어른이 난 하루에 하나만, 1달에 1권, 1년 목표는 뭐라는 듯이 정하는 그런 대상에 걸맞는 작품의 감상문을 당장 서술하라? 그건 한마디로 모순이다. 딜레마를 안고서 그래도 현존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이지 그게 만고의 진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나 2번식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내 감흥을 말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중에 롤리타 정도 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왜 찾아보기 힘든데? 도대체 왜 지금 이 세상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오지 않는 거냐고? 왜냐고요? 왜냐하면 나올 수 없으니까요! 뿐더러 푸르른 17세가 시간은 많냐, 아니다. 청초한 16세가 책만 읽고 영화만 보고 고리타분하게 옛날 그림이나 보면서 천편일률적으로 평가자 마음에 드는 주관식-논술식 답안을 제출하라구요? 그 친구들, 그분들 목에 턱 하고 걸린 말이 뭔지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 어른들은 모두 잘 아시지 않는가! 그건 혹시, 지금 장난해? 난 그처럼 쉬쉬하는 비밀들일랑 알고 싶지 않다. 집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식 현시대의 드라마를 보고, 밖에 나와 친구와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하거나 단짝과 놀러가는 게 아니라 독서감상회와 영화토론회에 들라는 말인가? 취미가 뭐냐며 가만 있는 사람 붙잡고 다짜고짜 물어볼 수도,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하고 싶다며 그림일기를 작성하지도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어찌어찌해서 어떻게 됐다면서 애청자 엽서를 쓸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나 소셜 네트워크를 하지만 남 일에 큰 관심 없다. 언뜻 따라하는 것도 있을 테지만 타인의 삶은 대부분 내게는 '하거나 말거나'다. 학생이 교과목을 배우며 연예계에 대해 얘기할 때 어른들은 빈말과 거짓말과 허풍과 허영으로 삶의 권태와 타성과 끝없는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을 달랜다.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인생이다. 아빠, 판도라의 상자는 누가 처음으로 열었어요? 응 그건 엄마한테 여쭤보렴! 왜냐하면 엄마는 천재니까. 졸업했으면 낮에는 우유를 마시고 밤에는 당당히 칵테일을 마셔도 된다. 교복을 벗기 전에도 도서관의 먼지만 털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비트겐슈타인 경구 인용? 아아, 또 그 얘기! 되묻고 싶다. 그대는 또 읽고 싶나요 라고.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일 때 의미를 갖는다? 그럼 삼류라는 말이 왜 있겠나. 광대와 마법사와 아티스트, 그 모두가 하나의 범주란 말 아닌가. 에로 비디오도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극장에서 감상한 다음에 평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구나. 포르노까지! 게다가 각자 정의 내리는 장르도 다르고. 예술이라고 스티커만 붙이면 다 끝나는 문제다. 찍찍 겉에 매직펜으로 쓰기만 하면 만사형통. 예술이라는 옷만 입으면 무조건 시작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 거네. 그럼 예술도 수학이자 사랑의 방정식이라고?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님.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수식이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은 다양성이란 뜻. 그런 개인적 의견이 구조화되어 표출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예술은 예술일 뿐이다. 그러므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처럼 다양한 게 정상이듯이 나에게 예술은 타인에게 예술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서 하나의 예술이 예술이냐 아니냐 그것은 상투적이니 지금 논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어떤 작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의 답은 명쾌히 후자라는 것이다. 고로 그것은 A─B─C 세 가지 경우로 나뉜다. 먼저 A. A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에 따라 하고 싶은 데로 하면 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듣고─경험하고─확실히 아는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통쾌하게 함구해야 한다. 가령 지금까지 10,000권을 읽었고 1000편을 봤다? 딱 그 1000편과 10,000권 작품에 대해서만 말해야 합당하다. 딱 거기까지만! 나머지를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머지를 말하는 것은 부정이고, 만약 나머지를 말하고 싶어진다면 앞서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변덕과 변심과 변절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A는 딱 거기까지니까. 실정법으로 치면 이를 불법이라하고, 불문법에서는 불명예라고 하며, 풍습에서는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어 놓는다 라고 한다. 불륜 같은 거. 언제는 사랑을 속삭여놓고는 말이지. 또 다른 새로움을 탐하는 거다. 저 아름다운 꽃밭에서 이렇게 좋은날에... 그거라고. A가 시인을 격하게 거부하면 푼수고, 순순히 패전을 받아들여도 바보다. 웃는 건 불쾌하단 뜻이고, 찡그려도 짜증난다는 거다. 아무런 말없이 아무 표정이 없다는 건 불만족이자 그래도 내가 최고라는 거다. 그게 A다. A의 요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다>다. 정말 그러라고? '처음부터 끝까지'일 때만 의미 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라고? 잘 모르면 의사 표현을 일절 하지 말라는 거다. A는 제목도 말하지 말라는 거잖아? TV드라마, 코메딩 방송, 유행가, 연애도 최소 1년, 우정도 단짝만,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았으면 명문대를 아는 척 해서도 안되고, 어디서 20년 살고 온 사람은 조용하신데 3박 4일 갔다와서 친구에게 열변을 토하는 사람처럼 어설픈 직접 경험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고, 페라리를 보기만 한 사람과 운전대만 잡아본 사람도 괜한 허세는 자제해야 한다. A는 뭐 거의 수도승으로 살란 말이군. 너무 심했나? 그러니까 왜 처음부터 끝가지 통째일 때 오직 그것만 의미가 있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B. B는,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다>에 반대하는 사람. B는 문제의 이해와 측정과 가능성과 변수에 대한 시야를 좁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에 해당한다. B는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한다. B는 알고 싶은 것은 알고 싶다고 한다. B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고 말하는 거다. B는 내가 틀렸으면 내가 틀렸고 당신이 맞다고 한다. 친구에게 명분이 있고 허세가 컸다면, B는 내 허영을 후퇴시켜서 실리를 챙길 수 있다. B는 숨기지 않고 말한다. 늬가 나보다 많이 안다고. 나보다 늬가 말발이 더 좋다고. 나는 빵 마리다, 머머계를 떠날란다고. 내가 촌닭할께 너 백조해라 라고. B는 감추지 않는다. 그게 B다. B는 자세히 알아보고 난 다음에 말하겠다는 거다. B는 다수의 관람객과 독자와 작가의 마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지 않았으면 일절 침묵하라구요? 난 그렇게 못하겠소, B의 요점은 그거다. 다음으로 C. C는 잘 모르겠다임. 여기까지. 이 A를 강조하신 분, 내기에 임해야 마땅하다. 비겁하게 복권 한장 값만 걸면 실망이고. 딱 걸렸어! 어쩌다가. A, B, C에서 베니스의 상인 등장 인물에 누가 누구에 적합할지 그건 각자 생각하는 걸로.
    반세기를 살아보니까 적지 않은 대중예술은 매체를 영화나 드라마로 바꾸지 않으면 안 봐진다. 도저히 시간이 부족해서 못 보겠다. (달리 말하자면 안팔린다, 이젠 쿤데라도 잘 읽히지 않는다, 심하게는 고역, 사석에서 마초는...... 아아 그만 그만) 나 초딩4, 사촌형 초딩5, 누나 고3일때 누나가 그랬다. 헤밍웨이 문고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고. 난 찌푸렸다. 뒤부터 보지 말라고? 나는 싫었다. 사촌형처럼 책을 읽으라고? 나는 싫었다. 그건 감상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니라, 그저 할 일 없어서 하는 일이니까. 내가 집안의 막내이자 귀염둥이인데 하루 아침에 난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버렸으니까. 어려서 읽었던 동화의 교훈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 어린 나이에 설마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에 해당되는 급을 생각했을까? 퍽이나! 제발 참아주시라. 그러나 나는 줄거리 먼저 보고, 혹시 있다면 작가의 말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글쓴이의 겸손한 자랑이든 예상되는 비판에 대한 변─변명─변호론이든. 주로 어른들 말이 그러니까 누나도 따라했을 것이다. 줄거리 먼저 보다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전형적인 어른들 말씀의 재생. 물론 그건 좋다. 입바른 이론. 교육이 타 분야보다 덜 급진적인 것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확고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그러나 장점이 하나 있으면 단점도 하나 있다. 일장일단. 습관이 먼저고 모범을 알고 교양을 쌓고 상식에 대한 균형 잡힌 주관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정한 분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도, 옳소이다. 동의한다. 그러나 조용조용한 분위기에 익숙하고, 고상한 가정교육을 받고, 집에 고전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아빠는 조류 대백과를 쓰고, 엄마는 오 헨리를 읽으며, 거실에는 마티스가 걸려 있다면 모를까, 아동기부터 청춘까지는 학문의 설득보다 상업의 환각에 매혹당하기 쉽다. 곧 좋게 말했을 때 매료. 어린이님이 동요와 유행가 중에 무엇을 들을까? (딱)! 교과서야 어쩔 수 없이 때가 타는 거고, 인기는 연예인과 만화책이 증명한다. 힙합을 듣지 말라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단점은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독버섯처럼 겉은 화려한데 속은 쓰레기'를 현대에는 더 이상 예술이냐 아니냐 라고 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말은 참 애매하게 변해버렸으니까. 미래까지 예상하지는 말자. 과거에야 금서니 뭐니 라며 주홍글씨였다면 지금은 자율이다. 인공지능도 절반은 현실이요 절반은 (깐죽깐죽) 대기중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작품은 모두 예술이다. 어쩜 부러우면 진다고 생각하니까 딴따라란 말이 생겼을 수도 있고, 사극에서나 광대였지 지금은 만인에게 추앙받고 자존심을 굽힐 수 없는 예술가다. 작품만 내면 누구나 예술가고, 일단 유명하면 싹 다 예술가다. 반칙왕, 험담가, 호사가, 돌아이, 푼수, 에로영화 감독, 모두 예술가다. 일명 아티스트! 그러나 유명인이 예술가로 수렴됐다고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티스트는 그때부터 연예인으로써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100만명 당 1명뿐이다. 한번 유명해지면 절대 무명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한번 인기를 알고 나면 제발로 내려오는 사람은 아마 한명도 없을 것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어쩐다? 부자의 선행에 관한 권고라는 그 유명한 말의 직역은 바로 이에 해당하고, 의역은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오다. 왜냐하면 제발로 내려오지 않아야 맞는 것이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라며 가짜 코끼라를 넣거나 진짜 코끼리를 넣을 수 있는 모형 냉장고를 짓거나, 그건 넌센스다. 불가능이자 농담에 초현실이고 전설일 뿐이다. 춤추는 요술 구두를 신었는데 난 춤을 추지 않겠다? 한참 잘나가는데 돈 싫어 명예 싫고 인기도 싫어 존경도 싫어, 그냥 멀리서 조용히 혼자 좋아하겠다는데 타인의 그런 소소한 권리마저 싫다고? 글쎄요! 한마디로 그건 죽는 소리다. 투정과 응석은 꼬마들만 부리는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한다. 호들갑과 눈치로 치면 애들은 실은 어른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어린 동심이 조롱과 흑심과 수법에 대해서 어떻게 어른의 농익은 숙련미를 능가할 수 있으리오. 새로운 꿈이 생겼거나 회의도 들고 편하게 살고 싶어졌거나 영감이 예전 같지 않거나, 그래 시대가 변했거나 그 때문에 내려올 수는 있어도 제발로 클라우드 나인에서 내려가고 싶다? 그건 평범한 회사원의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라는 말과 똑같다. 역사책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의 폭군과 시대상의 독재자와 부정적 의미의 독선적 성향 1인자, 제2의 인생을 살며 전혀 다른 삶을 산다거나 덤비는 상대 선수의 달려드는 모습에 괜히 귀찮아서 퍽을 그냥 줘버려 라는 생각이 언뜻 들기 시작하는 아이스하키 선수의 시점이 아니라면 영원한 현역으로서 최소 근성이랄지 뭔가 하나로는 팬에게 작은 인상이라도 선사할 것. 전자와 후자는 악명과 성실한 인생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과 내전 즉 안이냐 밖이냐 라는 작은 비유의 고찰도 안겨준다. 최소한, 제발로 내려오지 않는다 제발로 내려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점은 큰 차이가 없다. 드물게 뒷모습이 아름다운 유례가 남기도 하지만 앞모습이 영원하다고 꼭 불미스럽지는 않고, 무엇보다 내 길을 가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다. 사랑을 예찬하고 행복을 동경하지만 인기와 돈과 호사와 풍요와 명성에 대한 예우는 사랑과 행복보다 적어도 천시받지는 않겠지만 살짝 뭔가를 장담하기에는 멈칫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차라리 사랑과 행복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딱 여기서부터는 글이 아니라 말로, 유명인은 연예계 일반인은 사교계 그런 열린 장소가 아니라 정말 친한 사람을 만나는 사석에서 논할 일. 우리 남자들은 바로 그래서 친구와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전반기에는 꿈이 없거나 꿈이 자꾸 변한고, 중반기에는 현실과 타협하며 복권 구입이 취미가 되고, 뒤늦게 후반기에 이상을 외치며 모험을 떠나는 돈키호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인생이라면 그 어딘가에서 딜레마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생 전반기에는 꿈이 없었고, 어른이 되서 꿈이 생겼는데 나는 나인데, 내 인생은 내 것인데, 나는 내가 아니니까 제약이 따른다는 거다. 책임이 생기고 어깨가 무거워진다는 점. 가정이 생기고 내 이름이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평탄한 삶을 새로운 꿈의 여정으로 물들게 하기는 쉽지 않다. 풍운아나 자유인이 아닌 이상 일정한 제약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돈과 인기가 골든 리트리버처럼 귀엽게 날 따르는데, 귀찮으니까 좀 따라오지 말라고 극구 사양하는데도 난 가만 있지만 지들이 따라오는데, 그래서 제발로 내려오고 싶다? 그건 말만 챔피언이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젖지 않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니까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허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거짓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진담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개인의 자유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유명세라는 환희,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친구의 허세만 간지럽혀도 그런다. 내 아내... 이쁘냐, 난 별론데 라고. 립 서비스인지 진담인지 구분 못한다. 당장 헷갈린다. 딸랑딸랑! 예술가는 연예인이 되고, 다시 그분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되는 것, 정해진 수순이다. 말을 듣고 글을 읽어보면 한명은 셰익스피어고 한명은 나보코프다. 브랜드 포지셔닝이 처음의 예술가가 견지한 초심이냐 연예인으로 변한 임금님이냐, 에 따라서 그 흔한 예술의 그래프는 45도일 것인가 삐툴빼툴일 것인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편견이 어떻고 상식과 교양을 따지지만 주홍글씨, 당시에는 어쩌면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진보라는 게 그렇다. 그러나 진보가 있으면 퇴보도 있다. 문명의 혜택은 저질의 총량과 정확히 비례한다. 완벽하도록! 그런데 비평가와 출판업자가 사석에서 만나 토로한다. 처음에는 우려나 걱정 같다. 저속한 표현으로 개나 소나 D.H. 로렌스인 줄 안다며. 작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코카인이니 맥심이니 뭐니 막 그러면서 어디 글을 말처럼 쓴다고. 그러나 초반에 올바른 기본을 살포시 깔아놨으니 레드카펫 위에 누군가 쓱 나타나야 한다. 옹호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 차례겠지. 쥐꼬리 만한 봉급 때문에 우리는 장단을 맞추는 것 뿐이라고. 누가 지들이 이뻐서 그러겠냐고. 그게 학예회인지 세계3대 영화제 시상식인지 통 분간이 안된다면서. 세계3대 후라이팬으로 콱 그냥, 그러면서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웃고 자기가 박수친다. 책임을 피해가고 면피를 넘어 경제 생태계에 대한 뒷맛을 남긴다. 열린 결말이나 다른 작품과 통하는 힌트를 결말에 남겨놓는 것과 똑같다. 실재 작품에서 그런 게 없었다고 할지라도 억지도 만들면 그만이다. 그건 일도 아니다. 딸랑딸랑 간질간질, 한쪽을 진공청소기로 한쪽은 커피포트로? 그건 일도 아니다. 꼴불견이네 가관이네? 돈만 벌고 인기만 챙기면 끝나는 거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렇다 그래라 라는 게 아님) 이 세상이 그렇다. 너 그럴려고 프로그래머 됐냐? 뭐 어쩌라고,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너 설마 자랑할려고 소설을 쓰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유, 차마 고개를 들지 못 허겄시유! 아기 돼지가 어찌 귀엽지 않으리. 우직한 소를 어디서는 신성시한다. 고양이나 강아지는 귀찮고 어떡하다 병아리 형제를 맡게 됐어, 어머나 글쎄 후라이드와 양념이라고 부르네? 작명가로써의 애들 소질을 꽤 어정쩡다고 야단쳐야 할까 칭찬해야 할까. 그 어떤 탐스러운 아가씨의 상냥한 여심도 남의 집 귀한 딸이자 장래의 그 찡한 단어 엄마다. 도도한 엄마도 있고, 응큼한 엄마는... 상상하지 말자. 합리성의 건너편에는 고결함이 있다. 고품격이 왜 싫겠나. 처음부터 숫자로 갔을 뿐. 길은 하나로 정해져 있으니까. 인생 직진인데 살면서 사랑에 대해 담소를 나눠본 적은 한번도 없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딘가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표적 난봉꾼인 내 친구1도 결국 딸을 낳아 한 딸아이의 아빠가 됐다. 또 다른 친구2는 그런다. 내가 봤을 때 재수씨는 바보라고 바보 같다고. 그보다 앞선 나의 단짝은 하소연했다. 어떻게 한번 해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엄마가 딸아이 손을 잡고 나왔으니까. 딸아이는 그 기억을 평생 간직한다. 나중 엄마처럼 살지 엄마랑 닮았다는 말을 싫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익살꾼이신 친구1께서 모든 숙녀를 남의 집 귀한 따님으로 보실까? 제 버릇 개 줄까.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여든이 뭐야, 손가락 까딱 숟가락 까딱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철들면 안되는 것. (우리는) 부러우면 지는 것.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여기서는 사랑의 송가 저기서는 사랑은 없어. 그렇다고 그분께서 가만 있을 위인이 아니다. 뛰는 촌닭 위에는 나는 촌년이 있으니까. 드라마에서 마샤가 말한다. 뭐, 껄~떡? 너도 예술가 나도 예술가, 그 위에 연예인, 다시 개그맨은 자연스럽게 자칭 아티스트 즉 순수예술의 대가이자 마에스트로! 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그러나 단꿈은 결국 의무방어전으로 귀결된다. 밖에서는 으쌰으샤 안에서는 비실비실. 대개는 말만 챔피언이니까. 적재적소에 쓰일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허세와 허영과 허풍, 어른들에게는 일도 아니다. 그분들은 심지어 동화도 쓰고 동시도 짓고 동요도 작곡한다. 대체로 고전음악을 전공하고 대중음악으로 넘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젊었을 때 헤비메탈 그룹의 드러머가 훗날 신학대학생이 되는 사례도 있듯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동화작가가 성인용 예술품을 내놓기도 한다. 온갖 전문가와 권위자와 선량한 업자와 상도덕의 틀을 바꾸는 신흥 세력과 침묵하는 원로들과 변덕이 심한 독자들이 득실거리는며, 변화가 심하고 복안과 비책이 난무하는 기성 베스트셀러업계에 겁없이 말이다. 스승의 은혜, 고고한 학문, 인간의 존엄성보다 심판이 손을 들어주는 쪽은 결국 경제 논리임을 잘 알기에. 심사위원도 관중도 협회도 동물농장도 모두 그 위에는 그분이 계시다는 상업성에 경종을 울리지는 못할지라도 너 나 없이 숟가락은 올라오고 또 올라온다. 잔치상은 이미 차려졌으니까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처럼 역시나 대중예술가가 뒤늦게 동화를 쓰고, 동시를 짓고, 인기와 돈과 여심을 공략하지 않은 채 동심을 되찾고 싶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즐거움이고 기쁨이자 도전이니까. 바로 그게 인생이니까. 그 모두가 어른들께는 일도 아니다. 업계 생리와 업자의 형편에 관한 대화, 어른이니까 가능한 거다. 그렇다고 청소년은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고.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안되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은 좋은 시대다. 예술의 지평은 우주 만큼 넓혀졌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은 달콤한 천국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뛰어나고 훌륭하지 않아도 돈과 인기만 챙기면 끝난다. 실제 그렇다. 바야흐로 지금만큼 인류에게 껍떼기가 중요했던 시절은 없었다. 그럴 것이다. 누구나 예술가이자 누구나 연예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은 좋은 시대다. 현대에 사는 평범한 일반인은 중세의 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풍요를 누린다. 옛날 분이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지금은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답변은 각자 속으로만 하자. 그래도 그 흔한 예술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은 아름답다고 하시니까, 그 모두를 살펴보니 지금은 좋은 시대가 맞는 것 같다. 아이쿠 예술가가 한 말씀 하신다. 그런데 대체 뭔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통 모르겠다. 가수는 원래 노래를 외워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다. 그건 까마득한 옛날 얘기니까. 지금은 자막 보고 노래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예술가니까. 하나를 깊이 알고, 하나에 심취하며, 하나의 사랑에 깊이 빠지기 힘드니까. 그래도 지금은 좋은 세상이다. 반짝 신인으로 혜성처럼 스타가 되기만 한다면 더 이상 일반인이 아니니까. 사람의 마음을 꼬실 수만 있다면 희대의 사기꾼이든 만담가든 명상가든 선지자든 술꾼이든 아무런 상관 없다. 뜨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예술의 이상, 예술을 하는 목적, 예술을 즐기는 관점은 애완견께서조차 듣기 싫어하신다. 유명해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일견 시시하다는 평이 도대체 뭔 상관이란 말인가. 아 됐고, 뜨면 끝이다! 무명에서 유명인─예술가─연예인─다시 아티스트! 때문에 지금은 좋은 세상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천국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다운 예술이 아니어도 괜찮고, <처음부터 끝까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그게 진짜 그러더냔 말이다. 신화에서는 세이렌의 음률을 듣지 않기 위해 솜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돌아보면 돌이 되니까.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모두 핸드폰만 보고 있고, 오락산업과 상업의 합리주의가 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 설교조의 작품이 나오면 뭐하나, 바로 묻힌다. 나온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우르르 탈출한 그것들을 단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이제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못 봐서 견디기 힘들면 뚜껑이 열린다. 목말라 한다. 아무튼 지금은 좋은 세상이니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숫자를 세자. 하나, 둘, 셋! 잠이 오지 않으면 양들을 상상하며 숫자를 세듯이. 하나, 둘, 셋! 지금은 좋은 세상이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의 단점이 나왔나, 안 나왔나? 단언컨대 <처음부터 끝까지>의 단점은 아동기부터 청춘까지는 전자로 시간을 때우기 쉽다는 것이다. 아! 전자는 겉만 에르메스이자 페라리, 후자는 진흙 속의 진주. 응애응애 참새 짹짹 오리 꽥꽥. 나 잘난 맛에 사는 인생, 동창회 증후군만 조심하면 된다. 늬 남편 뭐하니? 절교가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안 그런가? 고양이나 개나 양이나 나비나 다 자기는 백조라 하며, 백조-하자가 싸구려 농담이 되는 이승 아니던가. 옛날식으로 검열 같은 단어, 1이든 2든 과거든 미래든 방식만 다를 뿐이지 그런 성격의 행위는 없을 수가 없다. 스무 살 너머서부터는 그 모든 일은 온전히 자신이 100퍼센트 감당해야 한다. 어항 밖의 거친 세계를 겪어 보면 목장에서의 평화롭고 즐거웠던 시절이 생각날 것이다. 그 중간의 완충 지대가 없을 수도 혹독할 수도 있고, 셋 다 조증으로 허언증으로 일관할 수도 있는 그 미지의 삶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책을 읽다 말고, 영화를 볼까 말까, 괜히 본 어떤 장면, 우연히 듣게 된 무슨 얘기.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될지 이제부터 삶이 점점 더 재미있어질지, 그건 알 수 없다. 우연을 불운으로 때로는 성공으로 연결시키는 자질은 많은 부분 공통점이 있을 테지만 남자와 여자는 많이 다르다. 그 둘이 만난다. 처음에는 맞춰준다. 사려 깊게. 다정하게. 그리고 포근히.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서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간직한 그녀는 자상한 아빠 같은 남자와 나중 결혼할 꺼라고 그랬을 테니까. 엄마 아빠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본 건 커피포트였고, 키우던 앵무새가 1인 2역으로 그 다툼을 따라했던 모습은 그나마 진공청소기였던 나와 다른 그녀일 테니까. 그런데 만나 보니 시간이 갈수록 부딛히고 다투기도 하지만, 다시 봐도 그녀는 항상 사랑스럽다. 왜냐하면 실제 그녀는 사랑스럽고 난 행운아여야 하니까. 그처럼 취향과 습관과 여러 성향은 애인끼리 서로 다른데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일 때만 의미가 있으니, 그녀라는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고 알며 사랑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내내 모든 것을 다 맞춰주라고? 언제까지나? 바로 그러니까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줄 꺼다. 그렇다고 여자가 잡은 물고기란 말도 아니고. 여자는 원래 그런 남자를 좋아함. 왜냐하면 그녀는 천동설이니까. 왜냐하면 여자는 숙녀니까.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를 아껴야 하니까. 여자는 원래 그런 남자를 좋아함. 첫사랑인 여자와 첫사랑인 남자가 만난다면 몰라도 초보자 딱지만 뗐다 하면 여자는 차라리 좀 놀아본 남자를 선호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처음과 좀 놀아본, 보기가 달랑 둘 뿐이라면 그녀는 후자를 훨씬 선호한다. 이게 딸랑딸랑인지 간질간질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남자는 답답헌 일. 쿵-쿵-쿵-쿵 2박자 음악을 듣고, 가죽점퍼나 입어야지 뭐 어쩌겠나. 다시 사랑한다면? 여자를 모르는 남자에게─좋게 말하면 순정남, 다른 말로 쑥맥, 시작은 누구나 첫사랑─바람둥이는 그거 따져 본 다음에 연애를 시작하라고 권고할 것이다. 숙녀가 사랑을 하고자 하는가, 돌쇠를 원하는가를. 실행력이든 직관이든 포용력이든 감이 딸리는데 소 귀에 경 읽기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그 사랑이 그 사랑? 오오, 저런! 모든 작품은 예술이다, 예술은 전체로써 가치가 있다, 고로 모든 작품은 오로지 <시작부터 끝까지>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허허허 글쎄요! 아직도 헷갈리니 다시 한번 검토해봅시다. 작품을 인생으로 치환해서요. 한 사람의 인생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롤러코스터를 탄다. 때로는 힘든 시절도 있을 테고, 사람에 따라 막 살기도 한다. 돌아온 탕자의 인생도 인생이니, 그의 인생은 아름다웠고 모든 작품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천 번 만 번 그거 다 사랑이라는 말이군. 당시에는 사랑, 30년 지나서 회상했을 때 아 그때 그 남자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며 한 여자는 슬퍼할지 모르지만. 연애하면서 막 그래 보시라. 미술관에서 작품 하나 하나 모두 세심히 관찰하며 심각하게 감상하고, 기획 의도 따진 후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를 헤아려서 여자친구에게 가방 대신 꽃 대신 책을 선물해 보자. 아, 그녀는 얼마나 기뻐할까? 오, 그녀는 대체 얼마나 좋아할까. 아마도 세상 어디서도 그 짝을 찾기 힘들만큼 그처럼 반색할까? 혹시, 설마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 남자는 악역을 내게 양보한다는 거네, 난 마음이 약하니 늬가 날 차라는 말인가, 이거 이거 돌려서 훅 들어오는데, 그만 헤어지자는 말이군, 만나기 싫으면 만나기 싫다고 말을 해 이 삐─삐─ 라고.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일부분만 툭 떼서 안다는 것, 찬성한다. 왜냐하면 일부분만 툭 떼서 아는 것 역시 바로 지식이기 때문이다. 아는 게 힘이니까. 그런 반면 부작용도 있다. 앞뒤 맥락 없이 요기만 뚝 떼서... 음 잘 아시지 않는가. 허나 예술, 표현의 자유, 범죄, 인정과 놀이와 장난에 대한 정의는 절대 깔끔하지도 않고 결코 쉽지도 않다. 청자와 화자의 의사 소통이 매끄럽냐 아니냐, 뿐만 아니라 친구끼리 대화를 하는데 서로 딴 얘기를 하는 일도 흔하다. 덤 앤 더머! 서로 딴 얘기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또 궁짝은 맞고 우정은 파탄나지 않는다. 바빠서 못 만나거나 서서히 멀어지기도 하지만. 법적으로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시기인 대충 십대 후반이나 스무 살쯤부터 나를 멋지게 가꾸든, 내 인생을 아름답게 꾸미든, 예쁘게 화장만 하든, 그도 아니면 그냥 막 살든, 모두 자기 자유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더니 글쎄 코카인, 음란물, 폭력, 진짜 합리주의, 그 합리주의, 사치, 쾌락, 퇴폐, 염세주의, 마성, 낭만, 콜라, 우유, 뭐, 뭐...! 첫 번째 남자는 자기가 최고라 하고, 두 번째 남자는 자칭 세이렌에, 세 번째 남자는 오리온, 그 다음부터 만났던 알았던 남자는 헤어스타일이 메두사에 옷은 에르메스-풍이요, 다음 다음 이기주의자 마마보이 개상 말상, 하도 많아서 생각도 나지 않을 꺼다. 그래, 말이나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흑심이 아니라 동심이니까. 마지막 남자는 그러겠지. 엄마, 엄마 난 그녀가 무서워요! 알면 알수록 미스테리니까요. 왜 그러냐면 원래 남자는 부풀리고 여자는 감추니까 그럴 것이다. 그럼 뭐야? 남녀 공히 평균 하면 100명이구만. 오 맙소사! 
   교육 방식에 관련되거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분은 제 맡은 역할을 하고 자기 인생을 살며 인기를 구가하고 경제력을 획득하는 것일 뿐이니 청춘이시여, 그분들은 그대의 인생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분들께 합리주의에 대해서 책임지라고 요구해서도 안되는 것이겠지요.
   1번 교육은 2번 교육에 비하면 독학에 가까운데 참고서도 많고, 선생님들이 도와주며, 당장은 몰라도 스무 살 너머서부터는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지 그 모두가 그대의 자유다?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1번 교육도 어느 만큼 그런대로 역할은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교육적 의미 때문에 일부분만 뚝 떼서 영특하게─약삭빠르게? 간사하게? 계산적인?─학습의 소재로 삼는 데 대해서 이의를 재기하는 건 자유지만 그게 절대적으로 옳다면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오는 유명인의 명언, 소설 인용문, 드라마 명대사, 3초-30초-3분 편집 영상등은 모두 취소해야 마땅하다. 어른들이 뭐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나 지식에 민감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시간과 인류의 IQ는 일정 부분 비례하는데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그렇게나 지식에 민감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만난지 1년이 된 날 남자가 말한다.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자 아마데우스가 저 하늘나라로 떠나간 날이야!」  여행을 가서 딱히 심심해 하지는 않는데, 똘망똘망 뭔가를 추측하는 그녀를 보면서 남자는 말한다.   「세상은 최고와 최대와 최선의 가치를 값지다고 하지만 꼴지도 의미가 있어. 전직 축구 선수이자 소방대원이던 누군가는 어떤 사연을 겪은 다음, 무게가 59킬로그램이나 되는 심해 잠수복을 입고서 마라톤을 완주했어. 5일 8시간 29분 음 몇 초였더라... 아 46초. 잠수복 무게 때문에 400미터에 한 번씩 쉬면서 숨을 골라야 했으니까. 그걸 기념하는 축제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더 인상적인 건 그런 도전이 몇 번 더 이어졌다는 거야. 그 가운데 하나는 네스호 수중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거고. 네스호에는 아마도 괴물이 없나 봐.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알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어릴 적 환상이 깨져버렸으니 난 슬퍼해야 맞는 거고. 그렇지만 그건 이론이고, 우리는 이 경이로운 한 순간을 기념하자고. (축배를 들고서) 만남과 운명과 사랑과 사소한 순간들도 모두 기적이자 행복이니까 말이야.」 
   겉으로는 지혜로워야 한다네 어떤 양서를 읽고, 무엇을 보고, 어디를 가 봐야 한다면서 말이다. 속없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는 하나 이거 정말 뜬구름 잡는 얘기를 너무 남발했더니 상당히 피곤하다. 몹시 피로함. 처음에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자 했는데 말이다. 나중 따로 교육론이라고 수필집 하나 내면 된다. 그건 뭐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설마 설마 했는데 아마도 나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어떤 게시물에 매료됐고, 어쩌면 그 매혹적인 떡밥에 낚인 것 같다. 아주 제대로! 맞네 맞어 딱 낚였어. 아 나 이거 정말 어허 아니 글쎄 나 원 참, 오 저런 맙소사!
   결론은 이렇다. 10살까지 놀고, 20살쯤까지 공부하고, 다시 수십 년 일하고─이때 위로 올라가기 위해 남보다 더 노력하고 일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며 사는 게 어른들 모습임─노을이 가까와지면서 다시 논다. 그리고 인생의 3분의 1은 잠이다. 잠잘 때 뭐하나? 꿈꾼다! 그럼 낮에는 뭘 할까? 놀고, 공부하고, 일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꾼다. 딴생각, 공상, 예감, 추측, 상상, 저녁 약속 준비와 주말의 할 일, 선물 고민 같은 거. 몸이 어른이 되고, 다시 마음까지 어른이 되어 청춘의 시를 쓰고 사랑의 설을 풀면서 얼마 만큼 자기 성에 차도록 노느냐, 그것이 아마도 멋진 인생의 관건인 듯 하다. 즉 살면서 가꾸는 인생과 자식 농사라는 농부의 마음과 사회적 소양을 갖춘 어른이라는 표면적 성과 외에 내적으로 내 마음에 쏘옥 들도록 얼마나 기쁘도록 놀고, 재밌게 즐기고, 행복하게 또 노느냐 그에 대한 만족감에 대해서 자기 합리화는 두 가지 구분이 있을 것이다. 첫째, 내 환경 탓에 난 불행했어 난 그리 썩 흡족하게 놀지 못했어, 목구멍에 턱 걸리는 그 어떤 말까지. 설마 그건 묘비명? 둘째, 난 놀 만큼 놀았고 노는 게 지겨워, 하지만 아직 그래도 노는 것 만큼 좋은 게 없어, 난 여전히 노는 이론을 좀 더 알고 싶어, 그래서 그 이론에 따라 행복론을 보완하며 사랑학을 더 꾸미겠어, 빈곤의 종말까지는 아직 모르겠고 말이야. 첫째는 1번 교육 방식의 장점을 취하지 못했고, 알록달록 아름다운 꽃밭을 우회했으며, 인터넷 유머를 조금은 싫어했을 것이고, 탐스러운 열매를 충분히 따먹지 못했던 데다 꿀벌로써 성실히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너무 일찍 정착했거나 어떤 타고난 조건이랄지 재능이 부족한 문제 때문에 꽃가루를 A에서 B로 옮기거나 몇몇 단물을 쪽쪽 빨아먹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행운이 턱 없이 부족했던 거지. 그분이 촌닭이 아니라 촌년이면 아아, 설명 피곤하고 내용 뻔하다. 둘째 역시 1번 교육 방식에 익숙하고 2번의 장점을 동경하는 면모를 너무 많이 봐서 그건 너무 식상하기 때문에, 이제야 뒤늦게 신비의 기원을 궁금해하고, 깨알 같은 정성으로 블로그를 손이 아니라 발로 쓰며, 내일의 날씨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지만 오늘의 운세는 점쳐볼 것이다. 1이든 2든 인생이 불행했건 지옥이 재미있건 어차피 물 반 컵을 어떻게 보느냐, 그런 관점의 차이는 놀랍게도 자주 저평가된다. 그러나 왜 그런가는 묻지맙시다. 그냥 넘어가자구요.


   9

   나는 파블로부터 딩맨까지 요즘 어울려다니는 친구들과 거리 두기를 마치고 다시 우정에 합류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름이 없었다. 영화, 신비, 나이트클럽 같은 평범하고 단순한 이름도 좋고 엄마한테 말하지 마, 혹성탈출, 내 인생 책임져 같은 촌스럽고 풋풋한 복숭아 같은 작명법도 나쁘지 않을 텐데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나중 상황 봐서 내가 한번 건의해봐야겠다. 어렵게 건넨 제의가 너무도 쉽게 묵살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친구들과 다시 만났을 때 과연 내 예상이 들어맞았냐, 틀렸냐가 제일 중요한 일이다. 거의 그게 유일한 관심사다. 그래서 결과는? 결과는 뜸 들일 필요 없이 즉시 밝히자면 내 예측이 맞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아니 맞으면 맞은 거고 틀리면 틀린 거지, 맞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라고? 아 나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구만. 좀 더 품위 있는 수사법을 동원할려고 했다만 내가 봐도 살짝 힘 빠지는 대답이었기 때문에 그만 저급한 표현을 참지 못했다.
   각설하고 육하원칙도 필요 없고, 어떻게 됐냐는 결과만 말하자면 이렇다. 원래의 딩맨이 나타났고, 내 예상대로 원래 우리의 친구였던 여자 딩맨과 나중 컴백한 남자 딩맨은 혼성 일란성 쌍둥이였다. 즉 딩맨 오빠가 다른 친구들에게 사실대로 고백했고, 애들도 흔쾌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남녀 일란성 쌍둥이는 무슨 증후군이나 간성이나 그런 염색체 이상으로 드물게 발생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고 실제 현존하지만, 딩맨 오빠와 동생은 꼭 무슨 만화처럼 염색체 이상 없이 완전한 성별을 갖춘 극히 드문 경우라고 했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만 거의 기적이라나 뭐라나. 아니 그런데, 예상이 적중했는데 대체 나는 왜 기뻐하지 않냐고!
   「이제 그만 믿어라. 왜 너만 그렇게 의심하는데? 도대체 뭐가 의심스럽냐고. 딩맨맨이랑 우리들끼리 남자 목욕탕에 갔다 왔어. 게다가 폭스랑 수잔이랑 딩맨걸까지 셋이서 호텔 수영장에도 갔다 왔고. 그러면 된 거잖아. 안 그래? 너 혹시 돌리 동물원 투자금 회수건 때문에 아직 파블로한테 뭐 앙금이라도 남은 거냐? 아니지? 너 돈 많다며? 아닌가, 아 넌 그런 말 한 적 없지. 콜린이 손해금에 0이 하나 붙을 정보를 제공했다는데,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 돈 많은 친구들이잖아? 이 가운데 가난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니? 없잖아. 삶이 재미없고, 따분하고, 지루한 사람은...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없어. 우리 중에는. 있니? 없잖아. 없어! 그래 없다고. 다 모두 사는 게 즐겁고, 재밌고, 기쁘며, 저 봐. 웃고 있잖아! 우린 행복해. 신나는 인생이라고. 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딱)! 딩맨맨이랑 딩맨걸이랑 너네와 같이 만난 적이 있냐가 궁금하다는 거야. 있니? 그 둘을 한 자리에서 봤냐고!」
   「그건... 없었네. 그래서 뭐? 늬말은 혹시 1인 2역이냐고? 허허허. 그게 말이 되냐? 얘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너무 많이 봤어. 인문교양서를 읽고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어야지, 그렇게 드라마를 기다리고 무슨 판타지에 인터넷 유머나 찾아헤매고,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 봐, 허허허! 직업병 뭐 그런 거니? 아니야. 아니라고. 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응?」
   「야. 야야. 야야야. 딩맨 온다. 쉬쉬. 그만. 그만.」
   그때 딩맨, 아니 딩맨걸이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쳤나 어쨌나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딩맨맨과 딩맨걸의 훈훈한 존재와 막중한 실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애들 앞에서 그처럼 믿는 척 못 이긴 척 연기한 것 뿐이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내 예감이 들어맞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내 그 절묘한 추측은 저명한 미래학자나 미래전망가에 버금갈 정도로, 아니 노스트라다무스를 능가할 만한 예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눈부시게 예측이 적중했는데,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사랑학에서는 이를 변심이라고 한다. 냉혹한 시대였다면 변절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진단은 아무래도 변덕일 것이다. 그렇다. 맞다. 그렇게 나는 딩맨이 댕맨맨과 딩맨걸로 나뉜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왜냐하면 딩맨은 우리 앞에 둘이서 한번도 같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봤을 때 딩맨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딩맨은 우리 위에서 놀았고, 우리는 딩맨 밑에서 웃었다 울었다 믿었다 불신했다, 막 그러고 있었다. 나는 응당 불신쪽이었다. 딩맨맨과 딩맨걸 그런 건 없다. 가짜다. 거짓말이다. 딩맨이 삶이 따분하고 지겨웠고 재미없기 때문에 벌인 연극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내 예리한 직감은 틀린 적이 단 한 번도... 있긴 하겠지만 이번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아직 증거는 없었다. 뭔가 확실한 물증은 발견하기 어려울지라도 내 이 게슴츠레 간질간질 뭔가 느껴지는 수전증 같은 직감과 추리력을 뒤받침할 작은 행동이나 어떤 판단 근거가 필요했다. 물론 그게 쉽게 드러날 리는 없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딩맨맨과 딩맨걸의 허와 실을 밝혀내는 게 어느새 내 할 일로 정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나는 지금과 달리 경험이 먼저고 쓰는 게 나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허구를 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직접 경험을 했거나, 그것이 판타지든 미스테리든 스릴러든 내가 직접 일을 만들어서 경험한 다음에 글을 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딩맨맨의 실수와 딩맨걸의 헛점을 파고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10

   그때가 내 호시절일지 암울한 삼류 작가의 한때일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압축해서 내 노력의 결실에 대한 성과를 즉시 밝히겠다. 뜸들이고 어쩌고 그럴 때가 아니다. 난 그때 딩맨의 숨겨진 비밀을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달아오른 상태였으니까. 끝끝내 내가 밝혀낸 단 하나의 증거는 이랬다.
   그것은, 그것은 딩맨걸이 어느 날 내게 메롱이라는 몸짓을 노출한 것이다. 그것은 고의였다. 날 놀리는 처사였다. 그럼 딩맨걸은 나를 왜 놀렸을까? 파블로, 맥, 콜린, 폭스, 수잔은 모두 딩맨맨과 딩맨걸의 존재를 믿는데 나만 의심을 거두지 않으니까 그래서 놀렸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딩맨걸은 딩맨맨과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오직 나만 그 개탄할 만한 길몽을 꿰둘어봤기 때문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재수 없다. 얄밉고 오그라들고, 안 그래도 멀어지는 진공청소기는 더 멀어진다. 따라서 자기의 본색을 아는 유일한 왕관 쓴 여우인 나를 경계한다는 바로 그런 하나의 확증에 해당되기 때문에 딩맨걸은 내게 메롱~ 그랬던 것이다. 이제 보니 딩맨걸 입장에서도 충분히 그럴 만 했겠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그 메롱은 모종의 하트 뿅뿅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 같았다. 날 알고 싶죠? 날 안고 싶어요? 내 매력에 깜빡 넘어갔다면 날 유혹해주세요! 뭐 그런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 그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다. 분명 그랬다. 호기로운 청량감을 바탕으로 당당함에 올인할 수 없다면 일말의 반전이나 꿍꿍이나 뭔가가 있을 것이란 게 내 복안이었다. 나의 그 영험한 천리안과 입에서는 화염방사기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험담까지 들리는 이 놀라운 청취력이 그 모두를 증명한다.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그 어떤 낌새와 미묘한 직감이 내게 베팅을 명령한 것이다. 그렇다면 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예의상 그래 줘야 한다. 날 알고 싶죠? 알고 싶다. 알아낼 것이다.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비밀은 없으니까. 날 안고 싶어요? 그건... 전후좌우 상황과 뭔가 살아온 행적과 인성과 별명등을 참고해서 결정할 것이다. 내 매력에 깜빡 넘어갔다면 날 유혹해주세요? 글쎄요 꺼뻑이라니... 어딜 넘봐랄지 살면서 드러내는 몇몇 공통적인 대사를 언급하는 유형인가 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인가를 참고한 다음에 결정할 것이다. 내가 한눈을 팔아도 들킨다는 보장이 있는가 없는가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자, 그래서 난 그 다음에 어떻게 했을까? OK! 나는 다시 그 친구들과 잠시 거리를 두고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즉 제2의 가택 감금에 들어가기로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도 등장해야 할 대단한 성과는 그 기간과 비례하고, 뭔가를 끈질기게 파헤치는 내 노력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일 것이란 예측은 꽤 괜찮은 승부욕을 불러왔다. 고로 나는 일종의 승부사로서 이 사건을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탐정역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11

   코메디는 두 가지가 있다. 고급과 저급. 딩맨은 내게 고급 코메디를 요구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결은 시작됐고, 경기 규칙은 바텐더 맘대로-일 것이다. 난 자신 있었다.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가난하지만, 나는 동심을 반납하지 않았고 그로 발생한 연체료가 내 창작의 원천이기 때문에, 고로 딩맨은 날 속일 수 없고 막판에 내게 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나중 헛소동으로 판명나거나 내 쓸데없는 호기심이 부른 흥행 실패작으로 결론날지도 모른다. 스탠드업 코메디라며 내가 작품을 발표했으나 독자는 그냥 스탠드업 까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쿵저러쿵 이러쿵저러쿵, 웃기지? 맞고 싶냐! 하지만 이미 나의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최소의 희생은 불가피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그 접고 꺾고 신나고 재밌는 추리극은 비극으로 변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막판 반전으로 승부를 뒤집으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난 누가 뭐래도 승부사니까. 그러나 수수께끼를 끝내 밝혀내지 못하거나 게임에서 내가 진다면 나는 별명이 바뀌는 거다. 해결사에서 허당으로. '은근'이란 수식어조차 아깝겠지. 하지만 이미 학교 종은 울렸고, 사랑은 시작됐으며, 그건 더 이상 져도 되고 무를 수도 있는 연습 경기가 아니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와 같은 (야한) 사랑놀음도 아니었다. 따라서 내 머리 속은 베고니아 핑크색 상상력으로 물들었고, 딩맨걸의 로코코 레드빛 립스틱보다 반짝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예언이 등장할 차례였다.
   나는 금빛 받침대로 장식된 지구본을 어디서 공수해왔다. 그것을 사지는 않았고 문구점 사장 데이비드에게 빌려왔다. 나중 술 한잔 산다고 하면서. 마술계의 쟁쟁한 거물들을 뒤로 하고, 내가 선두에 나섰으므로 영화로운 낭만과 신기한 사랑의 단꿈과 놀라운 요술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욕구였다. 왜 그런가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혼자만의 기쁜 탐구에 빠져버린 희대의 탐사를 벌이는 탐험가요, 행복한 탐정이자, 추리와 연구에 탐닉하는 열정의 예언가였기 때문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다음을 얘기하겠다.
   이 지구본을 미녀로 뿅 하면서 변신시킬까? 다음에! 저 푸르른 호수를 분홍색으로 변환시킬까? 이미 그런 호수가 실존한다. 인터넷에 잊혀질 만 하면 나오는 게 아니라 훨씬 자주 등장하는 진실일 뿐이다. 천재 탄생이나 궁극의 비책이니 그런 약장수의 요설로 뺀질뺀질, 일기와 블로그와 소설과 인생을 점철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내게는 착실한 목표가 있고, 나는 명확한 할 일이 있으며, 무지개 너머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스피노자니 베르디니 안델센은 그만 괴롭히고 딩맨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아~! 드디여 떠올랐다. 장고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혹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황홀함이 엄습하면 그땐 정말 어떡하지? 딩맨걸은, 아무리 생각해도 물건이었고 딩맨은 장난이 아니었다. 변신은 두 가지가 있다. 인간으로 변하는 것과 괴물로 정체가 밝혀지는 것. 전설의 사극은 전자고, 좀비 영화는 후자다. 지금은 딩맨이 쌍둥이로써 거의 드라큘라급 희소 확률로 각광 받고 있지만 곧 있으면 다음엔 뭐라 뭐라 하면서 꽁무니를 뺄 수 밖에 없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SF도 두 가지로 나뉜다. 말이 되는 SF와 말이 안되는 SF로. 어쩌면 딩맨은 이런 구분을 모두 만족시키는 거물일지도 모른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딱 그 기분이었다. 뭔가 놀랍고 신기한 체험이 이어질 것만 같은 모험심마저 느껴졌다.
   나는 지구본을 놓고서 세 지점을 찍었다. 첫째 지중해, 둘째 하와이, 셋째 태즈매니아섬. 이 세 지점은 어떻게 선출됐을까? 그것은 바로 버뮤다 삼각지대를 지구본 상에 삼각형을 그리고, 다시 그 삼각형의 꼭지점이 선변의 중간이 되는 삼각형을 그리고, 그걸 반복하니 저곳이 나왔다. 처음에 좌표를 잘못 지정했거나 삼각형이 약간 모양이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충 근사치에 해당하는 위치다. 그러면 왜 버뮤다 삼각지대일까? 그건 다 꾸며진 이야기이자 초딩들도 짜증내는 가짜 미스테리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는 있다. 뻔한 신비도 신비고, 식상한 낭만도 낭만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소설을 읽어서 알게 된 조세 회피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드라마를 보다가 장래 희망이 바뀌며, 호의가 남발되다 마누라까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꼭 버뮤다섬에 가볼 것이다, 자 손 한번 들어보세요! 한 명, 두 명, 세 명, 이런 젠장! 그 수를 도저히 셀 수가 없다. 차마 그 숫자를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다고. 이거다. 이거라고. 그런데 왜 하필 갑자기 버뮤다인가? 빙고! 삼류 작가가 또 예술 한다고 창작의 소재를 찾아헤매는데 놓칠 리가 있겠나. 무엇을? 우리 동네에 그 정체가 불분명하고 기원이 암만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3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뒷산에 있는 배. 둘째, 동네 입구에 있는 대형 테트라포트. 셋째, 초등학교와 우체국 중간에 있는 대형 (머머라 씌여진) 컨테이너. 누가 배를 나무 중간에 끼워놨는지는 몰라도 단순히 모양만 봐서는 꼭 물에 떠다니다가 딱 정박한 모습이다. 대형 테트라포트가 무슨 동네의 상징물도 아니고, 그 역시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동네에 없었다. 그리고 작은 컨테이너면 몰라도 큰 컨테이너가 우리 동네에 웬 일로? 내 말이! 하지만 생업을 뿌리치고 그 일에 매달리지는 않더라도 그 세 지점을 연결해 볼 수는 있다. (딱) (쉭─쉭─쉭) 그건 정삼각형이었다. 바로 그래서 그것은 버뮤다로, 다시 그것은 지중해와 하와이와 태즈매니아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떠나자 지중해로' 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렸고, 지중해와 하와이와 태즈매니아로 진짜 떠났다. 그건 술값 내기에서 지고 다른 게임에서 이길려는 소심한 복수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일단 갔다 온다면 복권 당첨 같은 일생일대의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없이 바로 떠나기로 했다.


   12

   나는 그 머나먼 세 지점에 갔다 왔다. 그러나 진짜로 갔다 오지는 않았다. 그걸로만 상영작 하나 나오겠네. 돈이 많이 들겠고.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싱겁게도 말이다. 나는 다시 들뜬 흥분 대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탐구욕과 모험심과 동경심을 만족시키는 대신에 평정심을 웃도는 심심함이 바로 내몫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녕 돌리 동물원에 가서 꼭 직접 확인을 해야 한단 말인가 라고. 그곳에 도착해서 단안경으로 정탐하면 뭐 딩맨이 돌리 동물원을 재개장 준비하는 장면이라도 보게 될까? 또는 박물관 개장 준비를? 박물관 이름은 딩맨 신드롬 뭐 그런 거! 설마 그 일대를 다 딩맨이 산 건 아닐까?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친구들과 노는 일상에 접어들었다. 나의 2번째 칩거는 여지없이 실패로 판명났다. 그건 판정패도 아니고 KO패였고 흥행은 무슨, 다행히 알려지지 않았으니 욕을 얻어먹지 않았으면 된 거다. 그런데 못내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나는 파블로가 진두 지휘하는 영화 촬영장에 놀러갔다. 재미없었다. 개상인 맥과 나이트클럽에도 다녀왔다. 맥의 친구들은 대체로 개상이 많았다. 여자들도 역시나. 그런데 미녀는 어디 갔는지 모두 선녀뿐이었다. 맥은 그런 놈이다. 나를 경계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알고 보면 그는 호인이다. 어쨌든 맥과 같이 놀았는데 재미없었다는 거. 음. 그리고 콜린의 투자사무실에도 놀러갔다. 재미있었겠나. 게다가 콜린은 척키상이다. 내 인생을 통틀어서 내가 만난 척키상은 누구 누구였더라, 내 경험에 따르자면 원래 척키상은 웃겨야 정상이다. 여기 잠깐 저기 잠깐 방정맞고 자발없을지라도 가짜 웃음과 허허실실 말발은 되야 모름지기 정상적인 척키상이다. 그런데 콜린은 롱테일이었다. 곧 재미없는 척키상. 그 다음에 여자 친구들은 왠지 1 대 1로 만나기에는 어색했다. 만날 수는 있었다. 만나자고 연락도 틈틈히 온다. 아니 러브콜 쇄도했다. 다만 내가 거리를 두는 것일 뿐. 그래서 폭스와 수잔과 딩맨-걸을 모두 함께 만났다. 역시나 재미없었다. 그리고 딩맨이 언제부터 딩맨맨과 딩맨걸로 나뉘게 된 거지? 헷갈린다. 너무 산만하다. 이젠 왜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방심하던 틈을 타서 판타지는 도망갔고, 신비는 날 폭삭 낙담시켰으며, 딩맨스에게 모든 주도권은 넘어가버렸다. 내가 고수고 딩맨이 하수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 반대였다. 내 입지는 안 그래도 좁은데 더 좁아졌다. 저런! 그래서 나는 지난 일을 회상했다. 추억을 떠올렸다. 꿈을 꾸고 공상과 상상과 몽환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난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한 마리 개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결국 나는 요즘 함께 노는 친구들과 다시 세 번째 거리 두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택 감금을 택하지 않았다. 앞 번과는 다르게 가기로 했다.


   13

   나는 끝끝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곳으로 떠난 것이다. 베낭에 야영 도구와 망원경과 노트북, 공책, 나침반등을 챙겼고 돌리 아일랜드까지는 하워드에게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하워드가 어디 내 부탁을 거절할 인물인가. 내 쓸데없는 고집은 다 사연이 있고, 내 사소한 몸짓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미있다고 암암리에 분석하는 친구가 바로 그 녀석이다. 참고로 하워드는 원숭이상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돌리 동물원에 도착했다. 그곳이 무슨 특수부대 훈련장이나 보이스카웃 캠핑장, 재개장한 골프장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대로 폐쇄된 돌리 동물원 그대로였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서 첫날은 독서, 산책, 낚시, 게임, 명상, 음악감상, 술 마시기, 별자리 관찰,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둘째날부터 본격적으로 돌리 동물원 본부를 정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째 날 내가 엎드려서 단안경으로 본부를 관찰하며 새로운 동물을 찾고 있을 때 뭔가 묵직한 게 내 엉덩이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발이었고, 그 발은 바로 딩맨의 발이었다. 딩맨도 하필 딩맨맨이 아니고 딩맨걸이었다. 딩맨걸의 뒤에는 아니나 다를까 파블로, 맥, 콜린, 폭스, 수잔, 딩맨맨이 있었다. 오 이럴 수가! 이런 개뿔! 나도 할말이 없었고 녀석들도 유독 지금은 말수가 없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나 보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러나 느낀 점은 많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랬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순수한 경외감이었을 테고.
   나는 어린 시절의 어떤 향수를 떠올렸다. 만일 그걸 향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아빠가 꼬마인 나의 엉덩이를 발로 지긋이 누르셨던 기억이다. 무슨 운동? 비밀이다! 아니 그런데 왜 그때 그 시절 상황이 지금 되풀이되는데? 알 수 없었다. 딩맨 보고 따질 수도 없었다. 늬가 내 아빠라도 되냐고! 딩맨은 내 아빠가 아니었고, 나는 딩맨의 오빠였다. 지금은 친한 오빠지만 다른 데서는 그저 아는 오빠일지, 나중에는 그 인간 그 녀석 막 그러면서 안면만 있었다고 할지 그건 모를 일이다. 게다가 딩맨의 친오빠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있다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로는 혼자서 1인 2역에 열중하는 것으로 난 아직까지 찰떡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전에는 내 예상이 적중하니까 난 불안했었나 보다. 반전을 원한 거였다. 반전? 기쁜 반전 슬픈 반전? 아니나 다를까 반전은 바로 지금 목도하게 됐다. 드디여, 오오오 마침내 내 엉덩이를 밟은 인간은 딩맨걸이었고, 뒤에 서 있는 친구들 가상에 딩맨과 똑같이 생긴 남자 딩맨이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맙소사! 어이쿠, 심지어 딩맨의 성정체성이 어떻게 되는지 막 궁금해졌고, 난 정말 모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게 아닌데, 그런 기분에 젖어들었다. 진짜 이건 아니었다. 그럼 뭐였냐? 나도 모르겠다. 뭐 어떻게 되긴 되겠지만 일단은 느낌이 세했다는 건 분명했다.
   시간을 돌려서 줄거리를 읊자면 그 모두가 녀석들의 계략이었다. 계략은 곧 꾀나 모략을 뜻하는데 녀석들이 그런 일을 왜 꾸몄을까? 그 녀석들은 다 그럴만 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 딩맨이 오빠 딩맨과 동생 딩맨으로 나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니?」
   「그렇지.」
   「그러면 파블로가 사기꾼한테 거액을 뜯겼다는 것도 다 짜고 벌인 일이야?」
   「그럼.」
   「게다가 내가 일절 관심 없는 채권과 선물과 또 그 뭐야, 지수가 떨어지면 반대로 돈을 버는 그거, 전문용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그걸로 내가 떼돈...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목돈을 벌게 만든 것도 다 너네가 판을 짠 거야?」
   「그건 좀 오해가 있어. 살짝 퉁쳐서 술값만 톡톡히 건져야 맞는 건데 그게 좀 이상하게 튀었어. 중고차 1대 값으로.」
   「뭐라고라? 이 자식들이 이왕 선심 쓸 꺼면 새 차나 새 집, 건물값, 아니 아니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그림값으로 할 것이지. 이 친구들 이거 이거 수준하고는. 우리 우정이 겨우 그거 밖에 아니었냐, 어? 넌 딱 거기까지야. 아니다. 내가 딱 거기까지겠다. 허허, 허허허허허! 그리고 또 뭐야, 커밍아웃했던 딩맨의 연기를 보고서 수잔과 폭스가 신경전을 벌인 일들도 전부 가짜겠네? 모두 여우상인 딩맨 가족들은... 진짜일 테고. 파블로에 대해 아네 모르네, 찾자 말자 떠나자 그거 다 미리 계획된 일이었군 그래. 허허허. 허허허허허. 그럼 너네들 우정은 진짜고 나와의 우정은 가짜냐? 허허허. 허허허허허. 내가 오빠 딩맨과 동생 딩맨을 의심한 거 보고 꽤나 재밌었겠다? 허허허. 허허허허허. 그래도 지금 확실하게, 속시원히 확인은 했다. 딩맨이 1인 2역을 하지 않았다는 거. 그럼 개말, 개새, 양말, 소말, 말기린, 치타곰, 당나귀하마, 곰양. 그건 다 어떻게 만든 거지? 오, 궁금한데.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봐도 그건 진짜였는데...!」
   「아 그건 진짜도 있긴 한데 대부분 홀로그램과 그런 신기술을 이용한 것일 뿐이야. 하지만 이미 옛날 옛날에 라이거와 돌리양과 GMO식물이 일반화된 것처럼 그 가운데 몇몇은 진짜고. 그래서 실제 나중 돌리 동물원을 개장할까 역시 차차 검토해봐야겠지.」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찌 됐든 얘네들은 처음에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나를 그들의 우정에 합류시켰고, 여기까지 나 스스로 오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각본은 정해진 거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다. 파블로, 맥, 콜린, 폭스, 수잔, 딩맨걸과 딩맨맨까지. 그들은 내 삼류 소설의 애독자라는 것. 으잉, 내 삼류 소설의 애독자라고? 내 삼류 소설 애호가라면 다 해서 총 10명이나 될려나? 많아 봐야, 그래 대충 한 50명은... 무리고, 눈대중으로 셀 정도. 딱 거기까지. 그래, 내가 최고다. 됐나? 안 됐다. 그래, 내가 최저고 그대가 최고다. OK!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따라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뭐야 난 갇힌 거네! 완전 독 안에 든 생쥐구먼. 것도 비 맞은 생쥐꼴.
   탈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대탈주와 소탈주. 나는 탈주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어중간한 중탈주는 왜 없냐는 그런 뚱딴지 같은 공상은 이미 내다 버린지 오래 됐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들의 의도대로 글을 쓰기로 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니까. 좀 황당할지라도 주제와 전체 이야기 구조는 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당상이었다. 난 거기에 숟가락만 얹으면 그만이었다. 여기서부터 진짜 문체가 어떻고 글발이 어떠하며 신선함과 색다름은 거의 악마적이라는 그 간지러운 말도 안되는 수식어들을 얻느냐 마느냐, 바로 지금이 내 역량이 평가되는 판국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어설프게 국면 전환할 필요가 없었고, 그냥 떠먹여주는 수프를 먹고, 뽀글뽀글 수프를 끓이는 가가멜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서 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떨렸고 떨린다. 또 확인하고 싶다. 폼을 잡고서 이렇게 묻는 거지. 나 떨었니? 라고. 난 들떴고 설렜고, 제2의 스티븐 킹이 되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고전 소설이야 옛날 사람들을 쳐주고, 순수 예술쪽에서야 작품성을 따지겠지만 영화화 즉 소설을 영화로 그렇게 매체를 바꾸어도 괜찮냐에 대해서는 대중 예술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유명 작가들은 모두 입 다물고 고개를 푹 숙여 반성해야 한다. 값싼 글발로 턱없이 많은 돈을 버니까. 오히려 드라마 작가 협회에 회비를 꼬박꼬박 성실히 납부하는 명성이 잔잔한 희곡 작가들이 진짜 저평가됐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가 진짜 드라마였다. 구출에도 두 가지가 있다. 전혀 새로운 미스테리와 전례가 있는 것. 지금 일은 그 둘에 해당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그거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 곧 낯선 장소와 시간과 환경. 심지어 이미 이 친구들이 판은 다 짜놨다. 이건 완전 거저다. 여기서 내가 글을 못쓰면 난 진짜 바보임을 증명하는 거다. 그렇게만 되면 난 정말 밥통에 머저리에 꼴통에 쪼다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는 거겠지. 그렇게만 되면 미련 곰탱이란 별명은 내가 독점하게 될 것이다. 험악한 애칭은 따논 당상이라구. 내놓으라 하는 장안의 걸출한 악동들의 놓칠 수 없는 표적이 될 테고, 그러다 어떤 물망에 오르게 되는 수순을 밟을 것이며, 그래서 쟁쟁한 해외파 험담가들에게까지 좋은 먹잇감으로 소문날 테고 말이야. 약하게는 넌 기본이 안돼 있어 늬가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밥을 떠먹여줘야 하냐 늬가 애냐 어, 강도를 높이면...... 오오, 커피포트의 수증기는 마침내 내 것이 되겠지. 아, 부담감 장난 아니었다. 난 원래 가짜 웃음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인데, 가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난 실소와 썩은 미소의 권위자가 됐다. 일전에 찾을려다 못 찾은 무슨 스파르타식 창작 아카데미가 따로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원래 구태의연한 이야기였다. 이를 테면 역경이나 여행과 귀환 같은 거. 역경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가난뱅이에서 부자로, 둘째 삼류가 겪는 평범한 역경, 셋째 일류가 되기까지의 특별한 역경. 여행과 귀환 역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갔다 돌아옴, 둘째 계속 가기만 함, 셋째 새로운 정착 후 다음 이야기로.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한담? 
   난 녀석들에게 작품 구상을 해야 한다면서 핑계를 댔다. 잘 놀아야 잘 일할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같이 한동안 놀기로 했다.


   14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작품이 바로 이 이야기다. 하긴 녀석들 아니면 내게 이런 작품의 작자라는 호칭은 걸맞지 않다. 어디 숟가락을 얹을 곳 없나 하면서 귀신 같이 그에 최적화된 남의 집 잔치만 잘 찾는 잔머리를 재주라 부르기는 퍽 곤혹스럽다. 하지만 숟가락을 얹어야 할 때는 얹고, 멍석이 깔아지면 춤을 추고 뛰어 놀고, 빼야 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알며, 할 말을 해야 할 때 하는 것. 그것은 어른들의 본분일 수도 있다. 말랑말랑한 놀라운 학업 능력과 신기한 상상력과 유치한 장난끼를 애들이면 모두 가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나 역시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상상력을 내주고 사회성을, 모든 것을 놀이로 바꾸는 소질이 공부와 일을 하기 싫어하는 수동성으로 바꼈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상상력 하니까 기억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명품을 하나 만들어오라는 방학 과제가 있었다. 그때 신발 한짝보다 살짝 큰 크기의 나무판자를 구해서 바둑판처럼 줄을 긋고, 바둑알 대신에 아빠한테 못을 박아달라고 했다. 방학이 끝난 후 그걸 들고 가서 숙제라고 제출했다. 용도는 신발 바닥 털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서 잊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때 왜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린지 알겠다. 아아! 바로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학우가 발바닥에 압정이 박혀서 엉엉-펑펑 울었던 장면을 초딩5는 과제로 응용한 것이다. 오오 저런! 중간에 나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갔으니까 초1과 초5 모두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직접적으로는 이 일을 아무도 모르고, 난 차라리 무덤까지 이 일을 안고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편지는 많이 썼던 데 비해서 일기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작은 슬픔쯤으로 기록하고 넘어간다. 작은 슬픔? 와, 상상력 대단하다. 아아, 바로 이런 사람이 부족한 자제력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포장하는 사람이다. 오오 진짜 눈물겹다. 그건 정말 바늘로 찔르면 피가 나는 아프고 따가울 만큼의 정상적인 윤리적 소양도, 매몰찬 응용력도, 생활 아이디어도, 상상력도 뭣도 아니었다. 정말 난 꼴통에 머저리가 되기 싫어서, 정황상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요정에게 강압적으로 빼앗은 숟가락을 얹어서 과제를 끝마친 느낌이다. 그것도 겨우겨우.
   그리고 그 친구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향후 전망은? 녀석들이야 나름대로 소원을 풀었으니 이제 각자 사랑의 늑대로 살지 행복한 양과 사는 게 너무 즐거운 말이 되었을지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와 같은 행위 예술을 재차 시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막 2편, 3편 이어지는 데 딱히 취미가 없는 듯 하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내쪽에서 2편, 3편을 기다리는 것. 하지만 아직은 열린 결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관객 입장에서는 허탈하게 웃으며 없는 감동을 탓하거나 그렇게 마음을 놓고 뒤돌아서야 하는데, 원래 그게 정상인데 왠지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본 것도 아닌 무척 떨떠름한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뻔한 패턴이라도 마지막에 희뿌연 기대감이랄지 추정의 실마리나 내기 하기 딱 좋은 힌트는 제공하고 1편을 마쳐야 그게 모종의 예의다. 그래야 부족한 작품성이 조금이나마 벌충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픽션과 다르다. 따라서 그 보너스 영상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또 기다려진다. 무슨 이런 문제적 문제가 다 있단 말인가. 결점이 측정은 되는데 해결 방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측정할 수 있으면 원래는 수행 가능해야 맞는데, 측정할 수 있는데 수행 불가능했다. 저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애가 타고, 입이 바짝바짝 타며, 케찹이 마를 일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사라는 바로 도박사들의 본게임일까? 이 발끈함의 정체는 진공청소기인가 커피포트인가. 왜, 대체 왜 깔끔한 보너스가 나타나지 않는 거냐고. 뭐 아차상 그런 건가? 아 이런 나 원 참!
   딩맨스 일당은 내게 추억을 안겨줬고 돌리 동물원은 짭짤한 기쁨을 선사했지만, 그 체험에 대한 행복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인지 나는 그 다채로운 드라마에 대한 경쟁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잔꾀 같은 발견과 우정과 변신과 모험이 남긴 과제는 아직까지 기분이 그리 나쁘지도 성과가 알맹이 없는 선물 같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에 그림일기를 쓰는 어린이가 된 듯 했고, 블로그에 살아 숨 쉬는 글을 쓰며 틈틈히 그때를 회상하니까. 살아 숨 쉬는? 아 목표가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최근 나는 하나의 착상을 떠올렸다. 어느 날 인터넷을 떠돌다 어떤 독립 영화를 내려받았는데 그 영화 속 주인공의 활약은 내 행적이었고, 주인공의 방황은 내 과거였으며, 주인공의 사랑마저 나의 미완성 사랑이었다는 이야기를. 아,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나는 서핑을 구경하러 해변가로 간다. 그러나 서핑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그것을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광욕도 하고 미녀들에게도 공평하게 눈길을 나눠줘야 하며 나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뭔가를 마시고 싶어진다 싶어진다. 앗 저기 보인다 보인다. 자판기가 보인다 보인다. 그곳으로 간다 간다. 자판기에서 적당한 음료를 뽑는다 뽑는다. 그런데 옆에 있는 다른 자판기에 눈이 간다 눈이 간다. 눈독 들인다 눈독 들인다. '가짜 일기와 진짜 블로그'라는 제목의 소설에 대한 느낌이 특이하길래 나는 자판기에서 그걸 뽑는다 뽑는다. 그리고 해변가에서 바로 읽지는 않고, 주변을 겉돈다 겉돈다. 산책하다 낚시하다 강아지를 따라가다 어느 낯선 숙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여러 번 실패했다 실패했다. 그래서 일광욕을 하기엔 좀 싸늘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구석자리에 팬티만 걸친 채 책을 펼친다 펼친다. 그것은, 그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였다. 작가는 파블로 파블로. 집으로 돌아와서 검색을 하다가 맥이 만든 영화를 알게 됐고, 콜린이 연출한 연극도 보러가기 위해 일정을 잡고, 폭스와 수잔과 딩맨이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전설적인 테너가 부르는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들었다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파블로를 먼저 만났다 만났다. 그런데 그런데, 파블로는 그 파블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알던 파블로의 아들이었다 아들이었다. 이런, 젠장! 뭐시여, 그게 다야?
   과연 이렇게 쓰면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개연성 빵점에 억지 설정의 미친 공상인가. 아름다움은 너무 멀리 있고, 사랑은 어렵기만 한가. 순수를 논하고 행복을 노래하자 라면서 우유와 카스테라빵보다 성적 판타지에 대한 헛된 몽상은 무슨. 몹쓸 상상은 그만두자. 그러니까 그렇게 쓰면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잘 모르겠다. 일단 모르니까 낙서나 끄적거려봐야겠다. 그러는 게 좋겠다. 그래야 한다. 미지의 세계가 혹시 내게 손짓할지 모르지 않는가. 누드 수영장은 천국이 아니고, 답답한 도시도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자주 들러야 할 곳은 NC와 술집이 다가 아니다. 괜한 시적 감흥 때문에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신낭만주의를 외면했다. 우리 동네의 세 가지 명물말이다. 산 속의 나룻배, 동네 입구의 테트라포트, 들판의 대형 컨테이너. 떠나자 사랑하자 머머해라, 응석도 이젠 지겹다. 그러나 그 어떤 새로움은 항상 궁금하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만날 사람은 없다. 점쟁이는 다 약장수로 보인다. 그나저나 하워드한테 둘 중 하나는 내놓으라고 따져야겠다. 요트를 헐값에 넘기든, 소설 J를 어떻게 썼냐고 혼자만 아는 창작 아카데미에 나도 제발 데려가 달라고. 이제 나도 꽃집이나 찻집을 운영해보거나 아니면 여행가가 되야 하는 걸까. 아직 조류 대백과 연구도 미진한데 그건 과욕이다. 나는 마침내 혼자 있을 때 다변이 됐고, 과찬을 꿈꾸게 됐다. 빈말도 덥썩 믿어버릴 테다. 언제 어떻게 얻어걸릴지 모르니 과작도 사양하지 않겠다. 환상감 과잉이다. 늦잠, 만취, 일중독 뭐 하나 중간이 없구나. 나는 대관절 언제나 열화와 같은 갈채와 환호와 응원에 손사래를 치며 부담스러운 칭찬이라며 겸양을 뽑낼 수 있을까. 이참에 아예 목표를 미녀에서 선녀로 바꿔 볼까. 아니다. 나는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저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이 아니란 것도 안다. 조증과 수다쟁이와 카리스마 넘치는 사나이를 만나면 그분의 용모를 감상하고 열정에 영향을 받고 기쁘고 좋긴 한데, 기나 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지어 그분들은 일절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친해질까 말까 고민 먼저 하다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여전하네. 잘 하는 짓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러지 말고 이러는 게 낫겠다. 연필 한 자루와 고급 만년필과 새하얀 종이가 곱디고운 공책 두 권을 사는 게 좋겠다. 하나에는 연필로 사랑의 시를 쓰고, 다른 하나에는 만년필로 환상소설을 쓸 수 있도록. 그렇다고 꼭 그것이 천 번 만 번 고민하고 결심한 사안은 아니란 거. 뭘 해도 어차피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개구멍 아니면 뻔트. 바이브레이션이냐 샤우트 창법이냐 처럼. 배부르게 욕을 좀 듣더라도 차라리 뻔한 열린 결말로 갈 걸, 하면서 나는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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