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06

from 소설 2017. 10. 15. 22:08

   1

   송별식.
   시작은 송별식이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나였다. 우리는 어느 문학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고, 그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당시 나는 출퇴근하는 사무실 즉 일하는 외부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살롱에 가서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럴 목적으로 그 친구들의 아지트인 예술관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술관에 100일을 다녔지만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색다른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예술관 친구들한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우리는 짧다면 짧은, 사랑하기엔 아쉽고 행복하기엔 부족한 백 일 동안 정이 들었던 것일까? 친구들은 날 고이 보내줄 수 없다고 했고, 나는 말끝을 흐렸으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송별회 당일이 되었다.
   우선 친구들의 이름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바비, 아론, 마이클, 소피아, 앨리, 비치, 그렇게 여섯. 나까지 일곱. 그 중에는 뭔가 슬픈 눈빛이 매력적인 친구도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들뜬 친구도 있었으며,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은 딱 한 명에 꼭 맞는 위인도 계셨다. 그러나저러나 우리가 먼 미래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든 시기를 놓쳐버린 고백을 하든, 지금은 각자 일에 열중할 시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송별식으로 오늘을 기념하고 내일의 희망을 얘기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물론 그날은 기쁨과 동시에 정결함의 기조를 이뤘고, 깜짝 발표랄지 일기장 수여식 같은 행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편안하고 예스럽고 상식적이며 고상한 분위기를 추구했다. 누군가 나서서 자기 과거 비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도 않았고, 발랄한 노래도 귀여운 춤도 깜직한 애교도 선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를 제외한 그 친구들 모두가 사라졌을 뿐.
   그렇다. 즐거리를 친구에게 얘기해 주듯 말하자면 그건 전개부터 시작하는 영화였다. 또는 이미 시작된 영화의 앞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헐레벌떡 극장에 당도한 청춘이거나.
   우리는 송별회에서 건전한 지성인이자 신비한 예술가답게 그런 놀이를 즐겼다. 마치 범생이가 어린애일 때 즐겨하던 놀이를 약간만 변형해서 그대로 재현하면서 정말 재밌다는 듯이 놀았다. 술래는 1명 나머지는 술래 뒤에서 술래를 향하여 전진. 그런데 술래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동안만 전진할 수 있고, 술래가 말을 마친 후 돌아봤을 때 모두 정지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이때 움직인 사람은 술래가 되든 옷을 벗든 벌칙을 받아야 함.
   그런데 술래는 나였고, 내가 돌아봤을 때 친구들은 사라졌다. 그것도 모두 함께. 즉 나만 빼고 모두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 친구들의 묘연한 실종과 딱히 긴밀한 관계는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그 주문을 소개하자면 이와 같다.
   밝은 미래를 간구하고 젊은 내일을 희망한다.
   뭐라고? 그러게 말이다. 툭하면 첫눈에 반하고 걸핏하면 포근한 향기에 취하는 TV 연속극의 촌스런 주인공 대사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이를 근거로 추론된 간접사실은 우린 모두 허당이고, 친구들의 사라짐은 불가사의라는 것.
   그래도 그렇지 마술도 아니고 과학도 아닌데, 녀석들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꽤 당황스러웠던 데 비해서 난 쉽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이별할 운명이었고, 나는 판타지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지만 장난스러웠고, 온전한 놀이의 경지에 이른 송별회 깜짝쇼쯤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송별회는 비정상적으로 막을 내렸고,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했던 예술관 아지트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2

   그 뒤로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내게 연락이 왔다. 나는 그곳으로 더 이상 출퇴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바비가 혹시 연락이 되냐, 아론의 소식을 아느냐, 마이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아시나요 등등. 전화와 메일도 받았고 심지어 어떤 탐정은 우리 집까지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건 아마 비치 집안이 쟁쟁했으니 비치를 찾는 탐정일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고, 완곡어법으로 포장된 끈질긴 추궁을 받기도 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아는 대로 얘기해 주라며. 나는 할 말을 잇지 못했고, 이때부터 슬슬 돌아가는 정황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사라진 친구들을 내가 일부러 고립시킨 건 아니지만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하나 짚이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0에서 그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아직 흥분이 극에 달하지는 않았고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허나 늘 순결한 상상도 재미없었기 때문일까, 허황된 꿈을 청산할 좋은 호재라는 느낌이 왔다. 잘만 하면 사건 해결 그리고 창작 소재 획득. 두 마리 토끼는 나의 키스 마크를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나는 예술관 멤버 중 나와 가장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앨리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나는 앨리의 단짝을 만나서 앨리에 대해서 듣게 됐다.
   「앨리요? 항상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친구죠. 한 번 부르면 싫어하고 한 세 번 정도는 불러줘야 느릿느릿 조용조용 대꾸하죠. 그래도 맹한 것 치고는 꽤 똑똑하구요. 애도 착해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과 사랑도 아름답기를 바라고. 특히 메모와 낙서광이에요. 또 만나는 남자마다 다 그 남자가 첫사랑이래요. 어쩐지 연애에는 영 재주가 없어보여요. 전적도 별로구요. 게다가 툭하면 그런다니까요. 나 또 차였어 라고. 더구나 한번 마음을 주면 오래간답니다. 최근에 무슨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라고 항변하는 듯한 표정의 어느 가난한 무명 소설가를 짝사랑하나 보더라구요. 가시내, 미쳤어 정말!
   그리고 앨리는 어려서부터 꼬박꼬박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정들만 하면 헤어졌어요. 그래서 지금 앨리 친구는 저 말고는 없어요. 설마 앨리가 저를 우정의 2인자로 떠밀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럴 꺼에요. 아니 그런데 앨리는 어디 갔어요? 그리고 아저씨는 누구시구요? 혹시 앨리의 그 말썽쟁이 삼촌? 한세상 내내 놀기만 한다는 바로 그... 아닌데. 앨리가 형언했던 수다랑 닮지 않았어. 어떤 환상가의 얄미운 솜씨일지는 몰라도 앨리는 아마 잠깐 기분 전환할 겸 여행을 떠났을 꺼에요. 하염없는 공상 성난 허풍, 그런 건 이제 질렸을 테니까요.」 
   「저는요 공주님,」 
   「공주님? 어디서 수작이에요? 지금이 그럴 때에요? 어머, 어딜 넘봐? 어이없어. 흥! 호호호, 농담이구요, 다음에 앨리 통해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시면 그때 봐서 생각해 보겠어요. 지금은 참으시구요. 즉흥적인 거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있지만요 준비를 좋아하는 숙녀도 있으니까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앨리랑 무슨 사이구요? 어설프게 거짓말하시거나 숨길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나? 나는, 내가 하는 일은 연극도 있고, 난 환상 문학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야. 앨리와는 작업실을 같이 쓰는 동료일 뿐이고. 내가 앨리를 귀찮게 하거나 뭐 어떻게 한번 해 본다거나 내내 시달리게 만든다, 그런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게. 모르긴 해도 내 평판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나중에 앨리한테 들어보면 알 꺼야.」 
   「어머, 그러니까 소설가? 어련하시겠어요. 아저씨. 우리 친하게 지내요.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 그런데 아저씨 나중에 유명해지면요. 설마 벌써 탐욕스러운 호기심 순진한 감수성 극성의 마성으로 저명하신 건 아니겠죠? 그럼 됐어요. 아저씨는 어깨뽕 들어간 블라우스도 입지 않으셨고, 뭐 그런대로 싱겁고 어리숙하게 생겼으니까요.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음... 아저씨는 사기를 당하면 당했지 절대 남에게 사기칠 얼굴은 아니에요. 그럼요. 제게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시면 안된다구요. 아시겠어요?」 
   이렇게 나는 앨리의 단짝이란 친구와 통성명도 나누지 않은 채 헤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처음에 미리 어디식 인사라도 시도해 볼 걸 그랬나? 어디식 인사는 무슨.
   어쨌든 나는 예술관으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임대료를 연체해서 작업실에서 쫓겨난 가난뱅이 예술가는 아니지만 난 조촐하게 송별식 후에 새로운 변화를 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가 예술관을 통채로 빼앗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오전에는 예술관에서 내 일을 하고, 오후에는 탐정처럼 활동했다. 친구들의 주변인을 심문하고 그들의 행선지를 탐방하며 녀석들의 숨겨진 비밀을 탐색하는 일. 아마도 즐거운 내일의 탐정을 꿈꾸는 소년이라면 이런 내 생활에 궁금증을 느끼며 조금은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나도 그 친구들에게 어른으로써 할 말은 있다. 나도 잘 음 어, 세세히는 모르지만 명탐정, 대배우, 혹시라도 어느 예술계 천재 신인이라면 몰라도 이 생활 역시 어렵고 따분한 생활고나 긴긴 무명 시절을 버텨야 할 것이라고.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 현실은 내연남의 뒷조사나 고혹적인 정부의 재산 내역 파악이 아닐런지. 정신과 의사의 교묘한 언변과 탁월한 최면술의 실체처럼 상상과 현실은 도시의 걸인 해변의 미녀만큼이나 동떨어진 가정이다. 대개는 그것이 올바른 추정이고, 그러므로 추리소설과 정신 병원을 현명하게 분간하는 것이 뭐든 이로우면 이롭지 절대 해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처럼 이상한 송별식 때문에 결론 도출이 불가능한 작가 생활은 시작되고야 말았다. 오전에는 예술가 오후에는 탐정. 그 사이에는 심란한 마음도 풍부한 정감도 모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그래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동심도 존재했다. 이 수상한 허영심과 진땀 빼는 긴장감이 어떤 성취감과 환상적 신비에 대한 심한 반발을 불러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게임은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남의 장단에 맞추어서도 안되었고, 따라서 나는 타인의 사랑에 격앙해서는 아니 되고 이 삶을 즐겨야만 했다. 절망 흥분 싫증 재미, 다 모르겠고 우선은 흡사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대 예감 선망에 따라 나는 새로 부임한 미술관 관장이라도 된다는 듯 예술관에 새롭게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3

   내일은 뭔가 재미난 일이 있을 것이란 기대는 살면서 끝없이 반복된다. 그것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무엇일까? 인생이다! 곧 우리 삶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결과는 매번 실망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법. 체념은 변절한 단꿈에게, 상심도 변심한 애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무엇보다 열을 가라앉혀야 한다. 평소에 열이 좋은 당신이란 건 알겠다만. 습관적인 추측의 적정성을 떠나서 대체 왜 항상 기대는 실망으로 판명나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근본적인 재검토니 뭐니 추론의 보강이 어떠니, 인문교양서와 자기계발서에서 하는 얘기는 거의 이런 얘기다. 그러니까 상업에 많이 휘둘렸고 끝없는 유혹을 참아냈으며, 인생의 거친 파도를 체험한 결과 나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오나 내가 새롭게 창안한 그런 거창한 신조를 설파하는 권위자는 아니다. 그래도 전문가인 척 헤헴 아는 척 한말씀 읊자면 그것은 곧, 지금을 즐겨라다.
   그렇게 나는 인간, 현대, 시간, 우주, 헬레네의 아름다움과 율리시스의 생애가 내가 기억하는 그 생애인가를 골똘히 심려하던 순간, (딱)! 나는 예술관에서 소피아의 일기를 발견했다. 무슨 비밀 금고도 아니고 소피아의 책상에서 그것을 찾아낸 것이다. 한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인생이 녹아있는 무엇과 그분의 인생관이 반영된 뭔가를 들여다보면 된다. 그래도 정녕 의뭉스러움으로 똘똘 뭉쳤다면 답은 하나다. 음흉함! 나는 소피아가 응큼할지 응큼하지 않을지는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친구들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었을 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소피아의 허락없이 대의를 위해 그녀의 일기장을 열어봤다.
   10월 8일 재미있는 개꿈을 꿈. 그런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음.
   「라디오 시대에 '세상은 언제나 옳다'라는 문장은 내용에 포함됐다. 내용에. 그러나 TV 인터넷 핸드폰 시대인 지금은 그처럼 솔깃한 문장이 튀지 않는 행인1에 만족하게끔 절대 가만 놔두질 않는다. 따라서 '세상은' 대신 '나는'이 포함된 문장은 제목으로 쓰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유별나지 못한 혹자는 궁금할 것이다. 왜일까 라고. 왜냐하면 자극적인 세상이자 유혹의 시대에 황금과 오락이 이끄는 오로라빛 쌍두마차에 탄 승객은 철학자와 사색가나 이방인 맞어 그냥 촌부일 수도 있지만, 역시나 세이렌과 판도라와 메두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월 9일 날씨 맑음.
   「재주가 변변치 못했던 고대의 어느 신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깨닫는 건 뭘까? 만약 그런 가정이 이루어진다면 당사자는 그 일을 하나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으로 거동하고 인간의 육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본능은 신성함보다 보편적인 인간성에 근거를 둘 것이다. 그러니까 요정 천사 악마 유령 외계인이 인간으로 환생한다, 환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모두는 상상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처럼 누군가 인간이 되어 경험하는 경이감과 희노애락 가운데 좀 더 가치 있는 철학적이며 특별한 통찰이 하나 있다면 그건 정말 무엇일까? 지구는 아름답다? 사랑은 위대하다? 인생은 재미있다? 미래는 현실이 된다? 타임머신은 여행과 만남이다? 사랑과 우정은 거짓일까? 그건, 정말, 뭘까! 그런데 답은 알고 싶지 않다. 하오나, 내가 만약 그렇다면, 라고 감정이입을 시도해 보는 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됐어. 했어. 답 나왔다. 결론은? 와~ 인간은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하며 사는구나~! 라고 느낀다면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오! 나는 아차-했다. 혹여 타락한 허영심에 유린당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닌가 사뭇 걱정스럽던 소피아가 평소에 이런 진지한 고찰을 떠올릴 줄이야. 나는 부끄러워졌다. 유복하냐 가난하냐, 유쾌하냐 불쾌하냐, 행복한 사랑을 그리워 할 것인가 불행에 발목잡힐 것인가. 난 그처럼 즐거운 진력 설레는 타성의 단계에 머무른 삶을 사는데, 그런데 소피아는... 아아 나는 반성에 반성을 거듭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책을 펼쳐서 나도 소피아를 따라해 봤다.
   「여심에게 가장 해묵은 감정은 무엇일까. 언제나 최상이어야 한다는 것. 언제 (사랑의) 최후일 것인가, 혹시 모르니 모든 것의 최하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창조와 파괴니 잊혀진 소망이니 철학적인 통찰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소피아 흉내내기는 나중에 하고 내게 주어진 과제인 탐방 탐험 탐구생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때 당시 나는 혹시라도 친구들이 먼 낙원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행여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란 말인가 라는 두려움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나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예술관 친구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사라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똑같다. 미래 기술이라는데 과학의 발전을 눈부시다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건 과학이 아니라 내겐 거의 마술이었으니까. 곧 나는 친구들의 귀환을 믿고 있었고, 그들의 사라짐은 아마도 믿지 못했다. 내가 쏜 큐피트 화살에 대해서 누군가한테 사랑할 것을 재촉할 수도 없고, 나는 예술관 멤버의 우정 회복을 위해서 친구들 찾기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나는 그렇게 오전 오후 두 가지 업무에 안간힘을 썼다.


   4

   그러다 나는 금새 지쳐버렸다. 푸르른 창공을 떠다니는 환상을 잡을 기미는 보이지도 않았고, 추적 탐방 탐색 추리에 대한 조과도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을 봤고 앨리의 단짝을 만나봤으니까, 이제는 비치의 친구 조이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런데 조이라는 숙녀는 콧대가 높았다. 잘 만나주지를 않았다. 내가 이런 애들을 잘 아는데,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감수성에 대해 견적을 낸 다음 그녀의 청순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명랑한 허영심을 유발했을 텐데 때가 때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곧 나는 꽃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고,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비치의 친구, 조이를 만나게 됐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왜 그걸 저한테 물으시죠? 비치와 저는 서로 남자가 없을 때만 연락하는 친구였어요. 우린 그런 사이였거든요. 기구한 팔자 꾸준한 삼류 인생, 사랑은 애청하고 우정은 애송하라구요? 우리가 무슨 사춘기 문학 소녀인가요? 클럽도 가고 또 가고 비키니 입으려면 살도 빼고 각종 준비가 필요하죠. 뿐만 아니라 유혹술을 연마해도 될까 말까인데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다 뭐냐구요? 안 그래요? 네, 아저씨? 아저씨도 잘 아실 거 아녜요. 제 눈에는 아저씨가 물고기로 보이는 게 어째 우리 처지가 좀 난처하군요. 아저씨가 생각해도 그렇죠? 그동안 살면서 체험이 물어다줬던 교훈, 실망이 가르쳐준 절규. 그게 어디 한둘인가요?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며 사진 찍고 돌아다니는 거, 그게 인생 아니냐구요. 아저씨 같은 남자들은 그러잖아요. 친구들끼리 으쌰으쌰할 때 하시는 말씀이 뭐냐구요. 인생 별 거 있냐고 하시잖아요. 안 그래요? 주위를 봐 보세요. 누가, 어느 누가 아저씨처럼, 음, 뭐, 관대한 우정 헐떡이는 네, 순수한 사랑을 고민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 친구들은 안 그래요. 왜요? 설마 그런 질문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이를 테면 그런 말요. 사랑은 평생 세 번이면 족할까? 족하다? 족하다는 말은 어감이 좀 그러니까 풍족하다가 낫겠군요. 아저씨 생각은 어떤가요? 사랑은 평생 한 번이면 행복이고, 두 번이면 낭만에, 세 번이면 풍년인가요? 그럼 남복 아니 여복이 좋다는 말은 대체 뭐죠? 네? 아시면 좀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딴청만 피우시지 마시구요. 전 있잖아요. 복고풍 삼류 드라마 챙겨볼 시간도 없답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듯 했다. 얘는, 얘는 너무 노련했다. 좀 노는 친구라기 보다 많이 노는 친구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인성은 괜찮아보였다. 그래도 나는 얘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이 친구는 어쩌면 그런 부류일 것만 같았으니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느니라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도사님이 딱 그랬고, 그녀가 산에서 내려오니 동화 속의 양치기 소년마저, 하물며 피터팬조차, 심지어 톰 소여까지 아마도 막 감탄하면서 그러지 않을런지. 멧돼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비치의 친구인 조이와 헤어졌다. 그런 후 나는 며칠을 사무실에서 작전 수립하느라 힘을 썼다. 열정을 쏟고 심도 깊게 집중했다. 그 결과 이런 결론이 나왔다. 장기전이라 생각하고 급하게 마음 먹지 않기로.
   그러던 어느 때 앨리의 단짝한테 연락이 왔다. 그녀가 뭐라 했을까? 그녀는 날 보고 싶다고 했다.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혹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난 거짓일지라도 이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아! 언제였던가 내가 사랑을 시작했을 때가! 나는 혹시 불순한 청춘 반짝이는 권태일지 몰라도 의외의 환희를 만나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갔다. 준비물도 있었다. 부케에 준하는 단아한 꽃다발. 그리고 나는 단추 많은 옷을 입고 나비 넥타이까지 포함해서 최신 유행하는 향수도 뿌렸다. 그런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어머나!
   나는 명색이 환상가라면서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다니, 이럴 수가! 앨리의 단짝은 바로 조이를 만나고 있었다. 장소는 나이트클럽. 애로 사랑? 있었다. 복장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꾸 저쪽에서 또 입구에서 여러명의 웨이터분들이 날 자꾸 쳐다보는 것이다. 나 여자 좋아하요, 지는유 여자 환장헙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앨리의 단짝과 조이의 목적은 그랬다. 내가 바로 술값을 계산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많이도 먹었다. 비싼 것도 시켰다. 평소에 내가 맛도 보지 못한 고급 꼬냑까지? 오 저런! 정찰제라서 술값을 깎아달라고도 못할 꺼 아냐. 아휴 증말, 비견할 데 없는 희열은 무슨, 꿈 깨고 속 차리란 무언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걔네들을 알게 돼서 말이야, 아휴 이런 무슨 아뿔사 같은 일이라니!
   그 친구들과 헤어진 후 나는 집에 가기 싫어졌다. 그러나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의 아지트 예술관으로 갔다. 고달픈 인생 팍팍한 절망감, 괜히 혼자 분위기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그런데 어머나 글쎄! 예술관에 불이 켜 있네. 출입 카드는 잠적한 친구들과 내게만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누구지? 누굴까? 얘들이 돌아왔나? 설마 벌써? 나는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심호흡 후 운명의 사슬을 확인하기 위해 예술관으로 들어갔다.


   5

   처음에 나는 망설였다. 들어갈까 말까. 들어가지 말까 들어갈까. 이건 아마 올해의 기억할 만한 사건에 오를 테지만 만에 하나 운수 사납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에 휩쓸릴지도 모르니 일단 조심하기로 했다. 저곳에 들어가니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탈출하면 된다. 그전에 빠꼼히 몇 가지 신호를 보내서 반응을 살펴본 후 다음에 발생할 장면이 가녀린 떨림일지 거친 숨결일지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허영심 이상의 동경을 채워주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에 못지 않을 만큼의 이상은 뭘까. 하수에겐 허세와 허풍과 공상이고, 고수에게 음 고수에겐... 사랑과 예술? 나도 이제 지쳤다. 무표정한 속마음으로 거짓말하기는. 그러므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떠오르는 그대로 가까운 장래에 유망한 감정은 어쩌면 경이감일 것이다. 그러나 허탕일 가능성 역시 농후했다. 그러든 어쩌든 매한가지다. 거룩한 감동이든 잠정적인 광란이든 나는 못 올 데 온 게 아니었으니까. 드디여 올 것이 왔다. 나는 예술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술관에는 웬 마네킹만 여섯 명이 있었고, 다른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의 구부러짐도 공간의 왜곡도 없었다. 마네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누군가가 내게 보낸 신호라면 난 그 반짝이는 너와 나의 주홍빛 라이트모티프를 모른 체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왜 모른 체 하냐고? 왜냐하면 사랑의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느꼈다. 그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꿈꾸고 만나기를 기다리며 우리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독한 여정에서 난 혼자가 아니란 것까지.
   이때부터 또 그분들 즉 마네킹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아가 첫째 날은 무변화 둘째 날까지도, 그러나 셋째 날부터 마네킹들은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걸 어떻게 멋드러지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딱 거기서부터는 나만 알고 싶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고 난 왠지 그 마네킹들이 혹시 예술관 친구들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상징일 수도 있고 말이다. 말도 안되는 추측인 걸 잘 안다. 그게 다 예언과 계시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예상 추산 추정 추론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지성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헛된 상념일 뿐이고 친구들을 찾으려는 규칙적인 탐정 생활의 성과가 미천해서 빚어낸 몽상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어느 배달업체에서 그 마네킹들을 모두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잘못 배달됐다나 어쨌다나! 참 나 이거 원, 난 이 부적절한 형편이 우스웠고 이 난감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너무도 엉성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연신 송구스럽다면서 정들었던 마네킹을 회수해 갔고, 난 그 모두를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난 아마도 아직 소년인가. 마지못해 사랑을 갈망하고 하는 수 없이 행복을 희구한다, 그런데 인생의 비밀을 난 아직 모른다?
   나는 다시 송별회의 순간을 애써 기억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으며, 꿈의 부재에 대한 식어버린 애정을 새롭게 했다.


   6

   예술관 친구들의 행방을 알아내서 그들과 조우해야 터무니없는 총천연색 행복감을 맛볼 텐데 아직까지는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런 희망하는 미래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으로썬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앞에 새로운 우정이자 사랑이요 요정 같은 천사처럼 해맑은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고 반말로 말하자면 난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난 있잖아, 인공지능 추리소설가가 활약하는 전성 시대가 올 것이라고 긍정해. 왜냐하면 '용감하다 낙천적이다 엉큼하다, 사랑 행복 쾌락' 이것만 해도 벌써 최소 9개니까. 그런데 예술관 친구들의 묘연한 사라짐을 어떻게 수사해야 하는지 그건 쉽게 긍정할 수 없다구. 그렇다고 부정적이란 말은 아니야. 그나저나 긴 흥미와 큰 환희가 가득하진 않았으나 그런대로 기분 좋았던 송별회. 파티 중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다... 사라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게 가능하나?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승전결없이 그냥 연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걸 너라면 믿겠냔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나 같아도 못 믿겠다. 하지만 어떡하니, 사실인데.」
   나는 뜻 모를 궁금함과 희소한 이상향에 대한 눈물겨운 애착 같은 건 모르겠고, 녀석들과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성과야 어떻든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고 어떻게 해서 만난 다음 나는 그런 문장을 적고 싶었다. 염세주의에서 즐거운 삶으로 회심했으나 인생 최고의 행복을 찾지 못했다 같은. 나는 요령을 몰랐던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기쁘고 편하고 즐겁게, 그러면서도 바라는 인생에 대한 최적화와 풍요와 멋을 그저 추구함이 아니라 뭘 해도 가뿐히 획득하며 사는 그런 요령을 몰랐나? 정말로? 누가, 내가? 응. 몰랐다. 몰라도 많이 몰랐다. 그런데 요령과 철든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몰라. 모른다고.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 아무래도 난 벌써 지친 것 같았다. 탐정 아무나 하는 거 아닐 테니까. 어려운 일은 전문가들한테 맡기고 나는 뜬구름잡는 공상이나 할까? 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내일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절대로. 간혹 이상한 사이비 운동이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일 예술관 친구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과 예술관을 오가는 생활이 무료해지던 무렵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예술관 친구들이 어렸을 때 모습인 듯한 인상착의로 보이는 아동 여섯 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어린애부터 말했다. 나는 바비의 할아버지, 다음은 아론의 손주, 다음은 마이클의 전생에서 찐하게 사랑했던 여인 쩜쩜쩜. 나는 곧바로 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러자 꼬마들은 네가 정녕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이 믿게 만드는 수 밖에 없다면서 모두들 뒤통수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른으로 자라나서 진짜로 친구들 모습으로 변했다. 그건 마치 식물이 성장하는 영상을 초고속으로 재생한 다큐멘터리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웃으며 포옹할 수도,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인 해우에 대해서 정담을 나눌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의 이마 정중앙에 큼지막하게 눈이 하나 생겨서 얼굴에 눈의 개수가 총 3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즉시 까무러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 외계인 같은 친구들에게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탄 다음 3탄으로 이야기가 계속 길어지지는 않았다. 곧바로 회심의 하이라이트는 시작됐으니까. 그 절정의 장면에서 친구들은 기절한 내 안면에 그것도 이마에 하나 턱에 하나, 그렇게 눈 2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백안의 신이 신기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신화에서 조연이었고, 내 이마와 턱에 눈이 생긴다고 귀신 같은 직감으로 깨우쳤기 때문일까? 나는 녀석들이 작업에 착수하던 바로 그 찰나 곧바로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개꿈에서 깼고, 책상 위에 널려있는 문학 서적─1740년작, 1833년작, 1927년작, 1992년작─에 침을 가득 흘린 광경을 지켜보며 잠시 정신을 차리느라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 맞다. 깜작 놀라면서 깨는 바람에 팔꿈치를 의자의 뾰족한 부분에 찧는 바람에 아흐흑, 팔이 몹시 저려왔다. 더구나 생생했던 꿈의 그 이상한 내용 때문에 너무도 아찔했으므로 예지몽이 아닌가 두려웠던 데다 이 꿈에 대한 활용 방안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다리가 저렸고 팔도 찌릿찌릿했는데 바로 앞에는 내가 흘린 침으로, 아니 이게 무슨 초딩도 아니고 말이야, 어렸을 때 꿈의 말미에서 느낀 뜨듯함과 포근함의 대가는 엄마의 꾸중이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괜히 무슨 연구랍시고 논문이라도 쓴다는 듯이 책을 다 펼쳐놔가지고 이 무슨 추태를...! 지하철 안에서 침을 흘리고 잠들던 기억이 났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저린 다리로 절둑거리며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서. 아무리 신들린 듯 꿈꾸고 상상해도 그런 기괴한 단꿈은 결코 조우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인생 최대의 쾌락과 최선의 희망은 멀리 있어도 마음이 편했고, 그러므로 기대 예감 예고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사랑은 다음으로 연기하기로 했다.


   7

   로또 복권의 결과는 별들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집 사무실 집 사무실. 여기서 사무실은 예술관이다. 그리고 오전에는 내 일 오후에는 탐정 노릇. 아직까지 추정의 무효는 발생하지 않았고, 구축한 사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섣부른 성과가 있냐 없냐, 가능성은 크냐 적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냉혈한일지도 모르는 이성적 펀드매니저도 아니고, 그대의 눈부신 젊음과 찬란한 미모가 그 언제까지라도 변함없기를 바란다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서 언제 어디서나 게다가 누구한테나 립서비스를 남발하는 호색한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했다. 큰 걸 바라지는 않았다. 굳이 등 떠밀려서 문란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오락과 사치에 빠져야만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지만 일단은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는 친구들 찾기.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무실에 들렀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무실에서 아론의 책상에 웬 아리따운 소녀가 어느 고전음악을 틀어놓고서 혼자 마주르카를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했다. 얘는 누구지? 쟤는 설마 심부름 센터 직원? 게다가 신입? 아마 아닐 것이다. 어느덧 난 뭔가 장밋빛 숙명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당황하지 않고서 그녀의 눈빛은 물론 오렌지색 마음을 읽었고, 자연스럽게 어떻게 왔는지 물어봤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간접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떠봤다. 그녀는 아론의 동생이었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예술관 친구들 중 항상 밝고 쾌활하고 사뭇 심려 깊기까지 했던 아론, 바로 그 아론의 동생. 게다가 여자. 심지어 아마도 버릇이 장기로 변한 공상이 주특기일 미녀. 이름은 데이지. 그녀의 옷차림과 몸짓에서 풍부한 정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나중 열애를 알게 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 우린 열애를 닮은 우정을 키워나가면 그만이었다.
   데이지와 나는 무엇보다 말이 통했다. 지금이다. 전후좌우 사정은 설명했고 경계심은 무마되었고 호감은 상승했다. 지금이다. 나는 떠나겠다면서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그녀는 냉정했다. 가지마...세요? 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녀가 맹한 허당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난 그것까지 감안했고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녀는 어떤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봤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잔잔한 어조로 들려주었다. 분주한 무도회장과 즐거운 사교 모임의 변천사랄지 멋진 남자의 종류와 사랑의 변화 과정까지 그 모두를. 당연히 최신 연예계 소식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내가 아는 최신이 진짜 최신이냐고 능청스럽게 스윽 물어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더없이 친절하게 호호호 웃으면서 언제적 얘기를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기뻤다. 이 즐거움이 그 언제까지라도 계속될지는 몰라도 이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젊음의 행복임에 틀림없었다. 이건 분명 내게는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호사스러운 영광임이 분명했다. 맞다. 그렇다. 뭇사내들의 시샘하는 듯한 환청이 진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나이트클럽에 갈 수는 없었다. 가기도 싫었다. 우리의 공감대는 쾌락과 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데이지를 마틸다로 착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연애편지의 모범 사례와 어떻게 사랑을 고백받고 헤어져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난 잠깐 봤을 때 의젓한 어른이기는 하지만 뭐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든 어쩌든 데이지 인생의 꽃다운 시절이 길게 이어지고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동안 만큼은 행복해야 할 텐데, 그런 내 마음을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와 드러날 듯 말 듯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은 데이지의 기분에 난 그저 동조할 뿐. 그거면 됐다.
   데이지는 전공은 현대무용에 부전공은 정치외교학이라고 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내가 신문방송학과 교수라고 거짓말이라도 해버릴까, 무책임하게? 아니다. 그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속수무책으로 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상냥함과 섬세함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어쩌면 그런 남자가 진짜 있냐 없냐는 몰라도 그건 아마 그냥 짐승일 것이다. 늑대 곰 맹수 하이에나, 많다. 그러나 그건 동물이고 자고로 남자라면 그녀에게 반한 척 연기라도 선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게 맞고 그게 옳다. 당연히 첫눈에 반해도 홀딱 빠져야 정상일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1년간 쉬기로 했고 인생을 알고 싶다고 했으니, 우리는 매일 예술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너무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고, 여성잡지 1과 2의 차이점 정도만 알려줬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데이지와 나는 연인처럼 사내 연애를 흉내내는 생활에 들어갔다. 만난지 첫째 날 우리는 빵을 사먹고, 모차르트를 들었으며, 어떻게 일류 배우로 활동하는 어느 여자 연예인의 미모를 함께 흉봤다. 솔직히 라는 수식어도 아깝네, 완전 못생긴 쟤는 왜 저렇게 유명하지, 게다가 저 허당은 왜 그처럼 자발이 심한거야 설마 자기가 허당이라고 광고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는 건가? 발악? 광기? 열정? 대망? 그런 거? 막 그러면서!
   그리고 우리는 둘째 날 야외 데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양말도 사주고, 시집도 선물하고, 에르메스 매장에 겁도 없이 그녀를 데려갔다. 그나마 페라리 매장에 데려가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다행은 (피식)! 그렇게 셋째 날 넷째 날 연인 흉내내는 삶은 계속 이어졌다. 진짜 연인이라고 해도 뭇남성과 고상한 숙녀들은 철썩같이 믿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출은 밑 빠진 독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중 아론에게 다 청구하면 되니까. 아론이 쉽사리 아 그러냐 하면서 주란다고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갈 데를 가고, 할 말도 했고, 서로 많이 웃었는데, 그런데 그녀는 내게 계속 뭔가를 더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깨달았다. 아 이래서 개그맨과 영화배우와 예술가들이 사랑이란 주제만 나오면 딴청을 피우는구나 라고. 실상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미 진도를 뽑았어야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난 누가 뭐래도 무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천상의 음률과 황홀한 카덴차가 들리던 것만 같던 기쁨의 시간은 금새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프리허그네 어디식 인사를 가르쳐준다는 둥 어설픈 수작이 앞장설 수는 없으니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좋은 방법이었다. 힘찬 파도와 평화로운 야자수와 분홍색 비키니, 푸른색 컨버터블과 함께 새파란 바다를 보기 위해서.
   데이지와 나는 야호 외치면서 하트 뿅뿅을 남발하며, 콧노래와 발랄한 환호에 지치지도 않은 채 일광욕도 하고, 휴양지에서 낯선 타인을 누가 먼저 꼬시나 내기라도 하자면서 해변으로 떠났다.


   8

   그러나 꿈 같은 추억 만들기는 시도하자마자 끝나버렸다. 그 여행기만으로도 시네마 한 편과 장편소설 하나는 뚝딱 나왔을 텐데, 시도하자마자 끝나버렸다. 왜냐하면 내 통장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인생의 허무는 이런 젠장, 바로 내 전공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한가득 받을 꺼라 예상하면서 좋아했지만 내게 부과된 선물은 다름 아닌 절망이었다. 가용 현금에 대한 판단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우량 주식이나 안정적인 채권을 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원래 계획은 환상 문학상의 조촐한 상금을 생활비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허나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흘러가더냐.
   그야 어쨌든 나는 데이지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챙피하게 그걸 어떻게 말하나. 초라한 내 청춘 위신까지 초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은 합리주의와 실용성, 낭만을 추구하지만 이상하게 우리는 여자 옆에만 있으면 약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그렇게 말한다. 남자는 폼이라고. 그런 말이 몇 가지 있다. 남자는 직진이네 어쩌네 같은. 맞다.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핑~하면서 미쳐버린다. 들뜬 인생 설레는 연정 애절한 애모 기쁜 질투심 뭉클한 감정까지 모두 바빠지는 거다. 오빠? 오빠! 우리는 오빠란 말만 들으면 말이다. 오빠란 말은 누군가에게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신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나와 데이지는 이렇다 할 활약도 없이 사무실 예술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나!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웃기지도 않은 일이,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술관 친구들이 사무실에서 태연하게 각자 일하고 놀고 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여행에서 복귀할 거라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러다 예고도 없이 녀석들이 깜짝 놀랐지 하면서 본색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느낌이 괴상했으니까. 믿어야 하는데 왜 믿기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내 찾았는데 이렇게 스스로 나타나면 힘 빠지니까. 대체 녀석들은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거고 뭘 하다 이제야 돌아왔는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 모두를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주저리 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가움도 잠시였다. 왜냐하면 이번엔 데이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시 아이스크림이나 사러 갔겠지 생각했고 난 다시 얼굴을 돌려 얘네들한테 따졌다. 물어봤다. 도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그리고 어떻게 감쪽같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냐고. 그거 과학이냐 요술이냐 라고. 혹시 내게 그 비법을 전수해 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런데 녀석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일단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왜 갔냐, 어떻게 사라졌냐, 왜 연락이 없었냐, 하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대충 육감으로 하나의 답은 얻었다. 사라지는 것은 가능한데 되돌아오는 기술은 아직 습득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서 늦었을 것이라고. 현 상황을 정리하자면 열정을 바치고 찬미로 칭송할 대상이 없어졌으나 그렇게나 바라던 재회는 맞이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그 둘 가운데 어떤 게 진짜일까. 너무 아리송했다.
   좌우지간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기다려도 데이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물어봤다. 데이지를 처음에 만났을 때 그녀는 그랬으니까, 전 아론의 동생이에요. 나는 아론에게 물어봤다. 너가 없는 동안 네 동생 데이지가 다녀갔다고. 그런데 아론은 뭐라 했을까? 그렇다. 자기한테는 동생이 없다고 했다. 자기는 성장기 내내 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그러면, 그럼 대체 데이지는 누구고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나를 잊지 말아요 같은 눈빛을 나누지도 못했는데, 정식으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물론 예술관 친구들과 재회한 건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기쁨 하나와 서운함 하나는 비등했다. 아니다. 데이지의 사라짐이 최소한 내게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형편이 그랬다. 회복된 우정은 장래 점점 아름답고 덕망이 두터워질 텐데, 그녀의 빈자리는 너무나 아련하고 커져만 갈 테니까. 이렇게 그녀가 허무하게 가버릴 줄 알았다면 난 데이지와 맛난 음식이라도 실컷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한 송로버섯과 림부르그 블루치즈! 퐁~ 소리가 경쾌한 스트라스부르그산 거위간 통조림까지. 아니다. 맞다. 내 통장잔고가 바닥난 걸 깜박했다. 그럼 그 대신 오색 들꽃이나 칸나를 안겨주며 에스토니아식 우울증이 치료된지 얼마 안된 듯한 안색을 감안하더라도 그대는, 당신은 더없이 아릅답소 낭자, 라며 그녀를 떨리게 만들어 줄 걸 그랬나? 그렇다고 들뜰 그녀인가 확인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나중 만나면 보고 싶었다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되고 일단은 떠난 그녀보다 반겨야 할 예술관 친구들과 못 다한 얘기가 더 중요했다.


   9

   「난 너네들을 혼내는 게 아니야. 그냥 알고 싶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사라졌다가 지금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응?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 일이니? 왜 말을 안 해? 심술이야? 누가 시켰어? 말할 수 없다는 무슨 그런 열의를 져버릴 수 없는 이유 때문이니?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것도 있을 수 있고, 떠올려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아픈 기억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됐다, 대충 줄거리만이라도 얘기해달라는 게 응? 친구끼리 심한 요구는 아니잖니. 상투성이든 연민이든 너네들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안 그래? 내가 얼마나 기다렸고 찾아 헤맸는데. 내가 투시력이 있는 초인이냐? 아니야. 독심술은? 없어.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냐? 빈털털이야. 허나 너네들이 없는 동안 내가 내내 비몽사몽 탄식으로 일관했다는 말은 아니야. 왜냐하면 중간에 하나의 탄성이 있었으니까. 난 데이지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거든. 그런데 내가 지금 고백을 왜 하고 있지? 실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
   「아 나 이런 미치겠구만. 여서일곱살쯤 됐나. 어렸을 때 동네 형이랑 썰매를 탔는데, 엄마들 삼총사처럼 그 엄마들 아들도 친했는데 썰매를 같이 탔던 형은 나이가 나보다 좀 많았어. 난 엄마3의 아들인데 엄마2의 아들 둘과 내가 삼총사였지. 그 형은 엄마1의 아들이었고. 아무튼 그 형이 준 초록색 장갑이 썰매를 탈 때 난 왠지 투박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뭐랄까 남들 보기에 챙피했다고나 할까, 어린 마음에 그런 여러 감정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장갑을 버렸어. 아니, 보라색이었나? 에잇 기억나지 않네. 그래서 그때 그 장갑을 구비했준 동네 형이 물었지. 그 장갑 왜 버렸냐고. 버린 건 버린 거니까, 헌 장갑 하나 없어졌다고 큰 일은 아니지만 왜 버렸는지 이유나 알자, 그 의미로 물어봤는데 난 정말 대답하기 싫었나 봐. 재차 형은 수차례 물었지. 대체 왜 버렸냐고. 왜 버렸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난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냥 난처하게 고개를 숙였을 뿐. 오줌이나 싸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아무 말도! 지금 이게 혹시 그런 상황과 비슷한 건가? 그런 거니? 응? 말 못할 사정 그런 거 말야. 아 됐고,
   그러니까 너네들이 두려워하는 게 어떤 현상이니 아니면 존재니, 것도 아니면 무슨 신비스러운 요술이니? 그것만 말해 봐.
   (......침묵......)
   아 얘네들 진짜 과묵하네. 너네들 원래 그처럼 내성적인 사람이었어? 송별식 기억 안 나? 어? 참으로 답이 없는 무기력한 정서로군. 하긴 모르긴 해도 보통 일은 아닌 듯 하니 나도 분위기를 일부러 산만하게 주도하고 싶지는 않네 그려. 나도 억지로 핑계처럼 뭉뚱그려진 답변은 듣기 싫다구. 일단 기다려보자. 기다려서 응? 기다려서 만나게 될 손님이 행운이든 청춘이든 아니면 꿈꾸기, 로맨스, 어둠의 세력과의 야합, 어? 존엄성, 농담이든 뭐든 일단 기다려 보세나. 어쩌면 지금으로썬 그게 최선인 듯 하니까 말이야.」
   나는 포기했다. 우리 오빠는 궁금한 건 못 참아요, 그이는 게임 밖에 몰라요, 우리 남편은 도무지 포기를 몰라요, 난 그런 말 듣는 남자는 아니니까. 나는 포기했다. 친애하는 사연 같은 건 들을 수 없었다. 하긴 그 신출귀몰한 공간 이동만 해도 아마 미래의 기술일 텐데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나도 과학에 대해서 대충은 안다. 알만큼 안다고. 음성, 영상, 가상 현실로 거의 모든 환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계는 거미줄보다 훨씬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난 거의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디든,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1 대 1로 만나고 통할 수 있다는 점. 매우 짧은 순간일지라도. 인터넷에 있는 정보? 이론적으로 모두 취득 가능하다. 큰 웹사이트 뿐만 아니라 이미 신제품을 발표하고 상업용 산업제를 팔고 예술적 작품을 퍼트리고 이미 그 단계에서 소인은 실재하고 내재한다는 것. 거의 모든 기계에는 극소한 환상머신이든 뭐든 소인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나도 알고 있다. 뭔가를 구입하면 그걸 사는 순간부터 내 절반을 어딘가에 넘겨준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영상과 사진, 거의 완벽하게 편집할 수 있다. 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는데 그건 참일까? 최신 유행가 순위는, 참일까 거짓일까? 게임 회사와 제일 밀접한 산업은 무엇일까? 흥행작의 인기와 판매량도 믿을 수 있는 건가? 맞다. 오락산업이 이 정도인데 그 어딘가에 인기 공장 같은 게 있을까, 없을까? 머쉰 앞에 아무 단어를 붙여도 된다. 그런 낱말과 어휘들 많지 않나. 유행도 그렇고. 일단 영상 통화만 해도 이미 기술적으로 로봇이 인간의 감성에 근접했다. 영상, 사진, 가상 현실을 거의 완벽하게 만들고 편집할 수 있다. 유리창의 떨림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적지 않다. 친구와 내가 음성 통화나 영상 통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진짜 내 친구일까? 호호호, 아닐 수도 있다. 가능한 일이다. 놀라운 정밀도로 아무나 통화해도 음성과 영상을 중간에 조작해서 송출할 수 있다. 풍향계처럼 바람만 가지고도 지름 얼마의 공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론 자동차가 석유 냄새만 맡아도 갈 수는 없다. 그 대신 많은 변화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태양계 내에서 무선으로 에너지와 중력파와 시간 에너지까지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 역시 모두 읽을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1년과 10년까지는 아니지만 1초─1분 정도까지는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도 가능하다. SF 영화의 절반은 현존 기술이고,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 50은 상상이고 50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첫키스를 못해봤지만 예술관 친구들의 비밀을 알아내기로 했다. 첫키스와 예술관 친구들의 비밀을 알아내는 게 뭔 상관이 있냐고? 상관 있다. 내가 첫키스를 해 봤다면 그 친구들의 비밀쯤은 알면 좋고 모르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숫자와 싸워야지 시덥잖은 어? 애들 장난 같은 비밀? 내가 무슨 고스터 버스터즈인가? 그럴 리는 없다. 보시라. 첫키스와 비밀, 밀접한 관계가 있나 없나? 아무튼 세기초에 사는 그 친구들이 어떻게 벌써 아마도 금세기 말에 해당할 공간 이동 기술을 습득했는지 알아내고야 말 테다. 그들의 정서 기분 의식 분위기 사상 그 모두를 내 손에 올려놓고 쥐락펴락 들었다 놨다, 까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오직 하나인 것처럼 내게 그리고 지금 유일한 목표가 생겨버렸다.


   10

   조사 결과 환상 숭배 경향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술이나 속임수도 아니고 바로 과학이었다. 발단은 바비부터였다. 왜냐하면 아론과 연관된 데이지, 소피아의 일기장, 앨리의 단짝 그리고 비치의 친구 조이등으로부터 이미 정보를 입수한 결과 녀석들은 다 허당 중의 허당이라고 결론 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둘 뿐이 없다. 바비와 마이클. 먼저 바비를 얼르고 달래고 다독이며 북돋아줬다가 다시 겁박했다. 우정과 의리는 물론 사랑도 들먹였다. 나는 바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비는 숙녀를 미소 짓게 하는 재주가 탁월하지만 의외로 이런 달변가들이 최면술에 잘 걸려든다. 나는 바비가 첨예한 논점을 피해서 핑계를 둘러대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뻔한 변명은 금새 바닥났고, 그의 천진난만한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래 버티는 바비의 굳은 고집에 개의치 않고 나는 그를 더더욱 밀어붙였다. 정말로 내가 고삐를 더욱 바짝 당기면 바비의 입이 실룩거리는 것만 같았다. 히힝 히히힝~! 그러다, 우리 사이가 결국 이거 밖에 안 되냐는 말에 바비는 딱 한마디 하고 말았다.
   「마이클. 마이클이 비밀 통로야. 그 이상은 절대 말할 수 없어. 내일 해가 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OK~! 이제 거의 구분 능선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다. 마이클은 뚝심이 대단한 녀석이니 괜히 섣불리 정면승부를 펼치면 안된다. 나는 그래서 나의 해킹 실력이 녹슬었나 녹슬지 않았나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시도했다. 녀석들이 모두 퇴근한 무렵 밤 12시에 나는 마이클이 놓고간 노트북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다. 달콤한 자유와 뼈저린 노력을 투자한 결과 나는 아주 중대한 자료를 발견했다. 거의 완벽한 정보를 찾아냈기 때문에 황홀한 사교계니 밤의 황제니 뭐니 그런 몽상은 모조리 필요 없었다.
   내가 찾아낸 자료는 바로 1급 기밀 아니, 특급 비밀이었다. 그것은 바로 송별회를 하던 바로 그 순간을 모두 녹화한 영상이었다. 그런데 파일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즉 온도별, 시간별, 이온 균형별, 초음파 반응별, 에너지 파동에 따라 정밀하게 똑같은 영상이 수없이 나뉘어 있었다. 그 모두를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시간별에 해당하는 몇몇 파일만 보고 나서 나는 녀석들이 순간 이동 기술을 습득한 걸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0분의 1초, 1000분의 1초, 10000분의 1초를 훌쩍 뛰어넘는 천문학적 단위까지 세분화된 영상을 살펴보니 나는 그 짧은 찰나 했던 일이 거의 없었는데 녀석들은 뇌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뇌혈류 및 초감각과 기타 여러 기능들이 아주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딱)! 이거다.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나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이 비밀을 아무 데나 토로할 수는 없었다. 이건 절대 하찮고 소박한 일이 아니니까.
   그러므로 나는 녀석들이 이 고급 기술을 어떻게 익혔는지, 이제 그걸 알아내고 싶어졌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녀석들이 순간이동 기술을 이미 숙달했다면 그러면 유체이탈의 경지까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투명인간? 여심 한두 개, 단순히 여탕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고, 나도 미친 게 아니었다. 이건 그야말로 판타지 2.0이 아니라 외계인이 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예술관 친구들의 스승을 찾는 일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닌 듯 했다. 일단 너무 막막했고 너무 막연했다. 어떻게 찾는담? 어떡하지? 신기술을 전수한 스승을 찾는 건 좋은데 그러니까 아 글쎄 대체 어떻게 찾냐고. 잠깐, 혁명적 미래파 스승을 찾는 일이 합리적인 일인가 그거 먼저 검토해보자. 일단 그 방법이 맞냐 틀리냐를 따졌을 때 그건 맞다. 왜냐하면 예술관 친구들이 미래로 갔다 왔을 리는 없고, 독학으로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따라서 그들과 연결된 도사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은 타당하다. 음... 이 일을 어쩐다? 일단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11

   나는 액자를 보면 그림도 그림이지만 액자가 혹시 무언가를 가린 건 아닐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그렇다. 중증이다. 그런 내가 미술관에 가면? 호호호. 그래서 난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농담이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처럼 내 고품격은 허영심 때문에 순전 허당으로 낙인찍혔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얼굴을 찾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목소리, 오빠 오빠? 두 번째 농담이고, 송별회로 시작된 사건의 전개를 어떻게 하면 절정까지 끌어올릴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꼼짝없이 떠안아야 할 다정한 행운은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기쁨을 희롱하는 신비가 제발로 주인님 하면서 넙죽 찾아올 리는 없다. 새로운 꿈이 춤을 출려면 다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다. 걷고 생각하고 자고 놀고. 아, 먹고! 먹어? 뭘 먹어? 날름 아님 우아하게, 신선한 과일과 순수한 우유 향긋한 커피를! 그처럼 쉬면서 걸으면서 그러다 무의식에서 뭔가가 피어난다. 그렇게 하여 잠정적인 영감이 반짝반짝 빛나는 실체로 거듭날 것인가? 모르겠다. 일단 기분 전환할 겸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생각했다.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 연애의 천재처럼 키스했다. 누구와? 사랑 밖에 모르는 인형 같은 숙녀와! 그런데 그 상상은 틀렸다. 난 아직까지 첫키스를 못해봤으니까. 어젯밤 개꿈이 달콤해서인지 시큰둥한 소망을 경험으로 착각한 거다. 그게 다다. 내 친구 중에, 아마도 모두 훌륭하고 뛰어날 테지만 최근 겪은 시련 때문에 근래 가장 멍청한 친구가 혹시나 내 일기를 읽는다면 그분은 내 속마음을 금새 꿰뚫어볼 것만 같다. 머머 하고 싶다, 나는 머머를 좋아한다, 그런 동심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쓰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헛생각을 물리치는 데 꽤 괜찮은 방법이고 그 방법이 내게도 효과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난 지금 당장은 막 써야 한다. 맞다. 이건 일기고 나만 읽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얘기나 막 써도 된다.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내가 천사다. 일기장은 낙원이고 지금은 행복이자 내 마음은 천국이다. 더불어 일기장 발표회는 딱 1번만 열릴 테고, 그 행사의 초대권은 딱 3000매만 발부할 것이다. 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마구 아무 내용이나 쓰는데 아직 기승전결에 대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이런 덜떨어진 허접한 글을 쓰는 것이지 내가 맹랑한 개구쟁이도 아니고 어른인 내가 이런 투정에 응석으로 일관된 저급한 글을 쓰며 좋아할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꼭 교양과 기쁨과 고급스러운 욕망만을 갈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한 기쁨 짜릿한 쾌락 미지의 흥분 끊이지 않는 재미만 추구할 나이도 지났다. 사랑도 들을 만큼 들었고 할 만큼... 그건 아직 할 만큼은 못 해봤다. 뭐 사랑? 어쩌면 사랑은 마구잡이일까? 아니다. 사랑은 하나다. 사랑은 단 하나! 누군가 새로운 인생의 최신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아아 거짓말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했더니 무척 쑥스럽다. 난 항상 내내 발단뿐인 남자였는데 어쩌다 전개를 만났다. 그런데 대체 그걸 어떻게 절정으로 발전시키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건 혹시 내가 모르는, 어쩌면 남모르는 대본에 의해 빈틈없이 움직이는 건 아닐까? 아니다. 한치의 방심도 허용할 수는 없다. 열쇠는 나한테 있다. 아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 하면서 아하~ 해야 하는데 아직이다. 좀 더 헛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멍멍 멍멍멍 어떤 개 짓는 소리를 해야 하지. 컹컹 컹컹컹! 나는 탐욕이다. 나는 쾌락을 좋아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초현실주의를 동경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OK~! (딱) (쉭─쉭─쉭)!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지금이라도 생각해냈으면 된 거다. 맞다. 송별회가 있었고, 파티 중 친구들이 사라졌다. 난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친구들의 행적을 묻는 연락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건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탐방 탐험 탐구로도 모자라 탐닉 탐색 탐미의 시절이 시작됐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마네킹인가 척키 인형인가는 그냥 해프닝이었고, 감미로운 단꿈도 속임수였으며, 아론의 동생이라는 데이지와의 데이트는 음... 그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오오, 아, 그만. 그만. 그렇게 데이지는 떠났고 예술관 친구들은 돌아왔다. 그 중간에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그 친구들은 철저히 함구했다. 그럼 난 그동안 뭘 했냐. 뭔가 하긴 했다. 1급 기밀도 알아냈고.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그 다음이! 머머해야 한다 머머해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새로움 2.0을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다음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났다. 좋은 생각이 났다. 녀석들이 없는 동안 바로 소피아의 책상에서 발견한 소피아의 일기장을 읽은 일! (딱) 어렸을 때 누나가 학교 가면 난 누나 책상을 열어보며 막 구경하며 신기해 했다. 소피아의 일기장을 그 뒤로 읽지 않았다. 거기에 뭔가 이 난국을 파헤쳐갈 비밀이 적혀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데도 쓸데없는 헛된 공상을 글로 옮긴 보람이 있었다. 음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오스카! 그는 누구일까? 오스카는 점쟁이다. 아, 오스카는 내가 소피아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알아낸 문제의 인물이다. 거기 다 나와 있었다. 오스카는 빼도 박도 못하고 내게 찍혀버렸다. 흐흐흐흐흐. 오스카는 미래에서 왔고, 사라지는 마술도 가슴 절절한 사랑도 고급스러운 농담도, 못 하는 게 없는 성인이라고 한다. 내가 아마 미스테리아 문학 잡지 편집장과 만나기 위해 도시에 갔던 날 오스카가 예술관에 찾아왔다고 한다. 오스카는 당연히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예술관 친구들의 모든 장래의 영광과 행운과 어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불행과 몇몇 불가피한 비운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고 한다. 오스카는 승부사인가? 아니면 해결사? 아마도 전문가가 맞을 것이다. 그는 선수다. 만만히 보면 큰코다친다. 그 친구들은 오스카에게 홀딱 빠져버렸고 그 즉시 미래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미래교? 그 허상을 낫낫히 파헤치고야 말 테다. 하지만 오스카는 완전 사기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예술관 친구들한테 공간 이동? 순간 이동 기술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수는 아니란 말이군. 게다가 오스카는 일종의 멘토랄지 지인으로 남고 싶어했다고 한다. 오스카?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이 인간을 내가 가만 놔두나 봐라.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에 적혀진 주소로 찾아갔다. 액션 영화처럼 똘만이를 대동하고 어쩌고 그런 법석은 필요없이, 나는 당당히 오스카와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12

   미래 철학관.
   뭐야 오스카란 작자는 여기서 조수? 아니면 관장? 뭐 어쨌든 그를 만나러 왔으니까 만나야 한다. 순 엉터리기만 해 봐라, 내 이 녀석을 가만두나 봐라. 빨가벗겨서 아주 그냥 혼쭐을 내주고 말 테다. 그러나 일단 복비부터 점검하고 견적을 뽑아보기로 했다. 아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이 오스카야? 미래 철학관? 촌스럽게 말이야 이름 누가 지은 거야? 요즘 그렇게 이름 짓는 사람이 어딨어? 안 그래? 미래는 무슨! 여기 관장 어딨어? 어딨냐고? 거기! 너 말이야 너. 그래 너! 너가 오스카야? 너가 우리 예술관 친구들을 꼬셔서 혼을 쏙 빼놓았냐? 어? 맞어 틀려?」
   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단지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에 나오듯이 선생께서 존함이 혹시 오스카냐, 그대가 우리 친구들한테 순간 이동 기술을 전수해주었냐, 라고만 물어봤다. 그런 즉 그분의 답변이 명언이었다.
   「아닌데요. 전 오스카가 아니라 저스틴입니다.」 
   뭔스틴? 헉? 그래? 나는 실례했습니다 그러고서 철학관을 나왔다. 번지수를 잘못 알았나보다. 하지만 처음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난 솔직히 매우 놀랐으니까. 이마와 턱에서도 눈빛이 빛났기 때문에 눈이 총 4개라는 걸 알고서 나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착시였다. 헛것을 본 거다. 그건 그렇고 오스카는 철학관 관장이 맞아보이는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한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스카는 어떤 경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적한 시골 다방의 에이스라고나 할까 어떤 화려한 분장의 아가씨를 불러서 손금을 봐 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이 양반은 아닌 것 같아서 선뜻 이름을 물어보니 그는 친절하게도 자기는 오스카가 아니라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성과없이 예술관으로 돌아갔다.
   신기술에 대해 알고 싶은 지고의 욕망과 미지의 유혹, 그건 어쩜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일 것이다. 낑낑대든 어쩌든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새로운 유희에 빠져들어 믿지 못할 체험을 잊는 도리 밖에 없었다. 천재적인 미래는 내 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런 씁쓸한 공상을 하다가 나는 예술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무실은 불꺼진 예술관이었다. 설마 혹시 또 얘네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예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환하게 불이 밝혀지고 짜잔 하면서 폭죽이 터졌다. 이번에는 진짜 송별회였다. 저번에는 그럼 뭐 예행 연습이었단 말인가? 결과는 그런 셈이네. 그냥 아무 생각없이 흠뻑 취하고 신나게 놀면 그만인가? 뭔가 너무 척척 지나가는 느낌이다. 맞다. 난 살짝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상황이 그렇지 않나. 내가 언제 이번에 진짜로 송별회를 열어주라고 요청한 것도 아니지 않나. 억지로 등 떠밀려 나가라는 종용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이젠 우정은 종식되고 새로운 4번 타자를 맞이하시겠다? 어디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 지켜봅시다. 하긴 나도 생떼 쓰며 남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언제 떠라더라도 떠날 생각은 내게도 했었다. 이상한 발단에 황당한 전개까지만 발생했기 때문에 나도 감은 잡고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전개까지만 이라고. 아마도 예술관 친구들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 했다. 녀석들도 날 보낼 듯 말 듯 망설이는 숙고는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생각날 것이다. 잊지 못하겄지. 지네들이 이젠 나만 쏙 빼놓고 마음껏 신나게 노시겄다? 그러든가 말든가! 특별한 추억과 각별한 사랑 찐한 애정은 드물다 못해 희박했지만, 또 몰라 잘 찾아보면 나중 기억날지도, 하오나 뭔지 모를 애틋한 석별의 정이 느껴졌다. 고운 정 미운 정 짝사랑 첫사랑 막 그런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고 다정한 사람들인데 여기서 각자 인생의 길로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꽤나 섭섭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식상한 인사말과 정겨운 대화는 하나도 옮기지 않겠다. 실은 살짝 눈물이 감돌긴 했지만 눈물 방울을 흘리지는 않았다. 꾹 참았으니까. 뚜렷한 의혹과 선명한 고백은 없을 테니 우린 그만 조금은 냉정하게 헤어지기로 했다. 아, 맞다. 그런데 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미처 이처럼 갑자기 서둘러 방출될지는 몰랐으니까, 그러나 친구들은 뭘 좀 아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걔네들은 선물을 내게 건넸고 나는 빈손을 진짜로 보여주며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어서 경황이 없다보니 말로 때운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뭐 그래서 그런 다음 우린 이별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행복하자, 어쩌자, 인생이 어떻고 그런 건 모르겠고 거부할 수 없는 검푸른 의혹에 휩싸이는 건 드라마로 만족하고, 우린 언제까지라도 놀라운 판타지와 신기한 환상 기발한 신비를 끝까지 추구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딱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안 그랬다간, 질질 끌다가 녀석들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는데 나만 펑펑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13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잠자리에 누웠다. 오오, 깜빡했구나. 나는 예술관 친구들한테 받은 선물을 가지러 갔다. 볼보 웨건 트렁크에 실려있는 선물은 감히 누가 건드리지 않았다. 설마 중간에 누가 더 비싼 물건으로 바꿔치기할 리는 없고, 지금 다시 전화해서 녀석들한테 007 가방으로 바꿔주라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포장된 선물을 가지고 침대에 앉았다. 긴장됐다. 흥분됐고 대체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했다. 이 긴장감을 길게길게 이어가고 싶었지만 설레고 두근거렸기 때문에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눈부신 5월의 신부가 수줍게 기다리는 옷고름? 드레스 뒷 자크? 아하~ 면사포를 들어올리듯이 포장된 선물의 연분홍색 리본을 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빰빠라밤 빰빠빰 빰빠밤~! 그건 그냥 기분이고 딱히 특별한 선물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반다이크의 마돈나였다. 앤써니경이던가 내 상식으로 아는 건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초상화가로 손꼽힌다는 정도.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은 바로 루벤스에 버금가는 플랑드르파의 대가란 말씀. 이 작품이 진품이면 얼마일까? 내가 그걸 알아서 뭐하겠나. 나는 이 작품을 새 사무실을 얻으면 그곳에 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이 됐다. 나는 선물도 받았겠다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고 거짓으로 감성에 젖었다. 낯설게 까마귀가 진짜로 집앞에서 놀면서 울고 있었지만 난 그걸 파랑새와 앵무새, 팔색조, 백문조, 꾀꼬리등 예쁜 새가 잠깐 변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개구리로 변한 왕자님처럼 말이다. 그렇게 바로크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멀더와 닉의 도움으로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아 훌륭한 사무실을 턱없이 싼 값에 얻게 됐다. 일단 개인 사무실이 생겨서 기뻤다. 나는 사무실로 가서 청소를 하고 어쩌고저쩌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사무실에 고혹적인 자태의 수영복 아가씨가 나오는, 커다랗고 선명하고 요염한 사진 밑에 요만~하게 숫자가 써진 달력은 걸어놓지 않았다. 사무실은 완벽하게 정리됐다.
   다음 날이 되어서 이제 정식으로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날따라 왠지 책상 건너편 소파 위 비스듬히 살짝 옆에 걸려있는 그림, 반다이크의 마돈나가 멋져보였다. 그래 유별나게 말이다. 나 혼자 외롭게 예술혼을 불태워야 하는데 유난 떨 일 있나, 어색한 수상함은 모른 체 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내가 직접 벽에 걸었지만 난 바보처럼 슬쩍 그림의 뒷면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 뒷편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일을 했고, 쉬었고, 놀기도 했다. 그 가운데 인터넷 뉴스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구경했다. 어디 골동품점에서 400파운드에 산 그림이 반다이크의 진품으로 드러나 소유주에게 1천배 이상의 횡재를 안겼다나 뭐라나. 1천배? 그럼 4만인가, 아니 40만 파운드? 오 좋아 좋아! 그렇지만 그건 남의 일이고 내 껀 모조품이다. 게다가 그 인터넷 뉴스는 내가 심심해서 인터넷으로 억지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옛날 옛날 뉴스를 찾아낸 거였다. 할 일도 없었나 복권을 살 걸 그랬나. 그래도 재밌기는 했다. 즐거운 상상이니까. 간혹 뉴스에 오르내리는 고급 주택 100채나 빛나는 노란색 페라리 마크가 붙여진 최신 페라리 웨건형 모델을 100대 살 수 있는 그림이 팔렸다더라 어쨌다더라,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는다. 실상 미술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름 들으면 알만한 사람들 작품도 저렴한 게 무척 많다. 그래 봐야 최저가 스케치가 아닐 바에야 월급쟁이의 봉급이나 연봉에 해당하겠지만 말이다. 좀 무리하면 스포츠 중견선수의 주급에 해당하는 작품을 평범한 일반인이 10년 일한 거 몽땅 투자해서 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으로써든 투자 목적이든 그 정도 관심과 호감은 없다. 다만 뭐 어떻게 어떻게 창고에서 천대받던 그림이 알고 봤더니 뭐였더라, 까지는 아닐지라도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작품가 정도면 오오, 아아, 룰루랄라 랄랄라 룰루랄라 랄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올 텐데. 왜냐하면 6개월에 한 번씩 그림을 공개할 필요도 없고 완전 딱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재산은 부담스럽고, 세계적인 부호 몇 위? 눈총 엄청 받는다. 재계에서 유명하다? 일복 터진다. 대외적으로 유명하지 않지만 단순히 돈만 억수로 많다? 일명 마초계에서 유명해진다. 그 말들을 직접 들어봐서 안다. 아아, 장난 아니다. 으아, 그건 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오오, 그 호들갑 직접 들어보지 않으셨으면 말을 마시라! 그렇다고 복권 당첨이랄지 뭐 어떻게 불로소득?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행운이 따라준다면 왜 마다하겠냐마는 일단은 그렇다. 따라서 한마디로 안소니 반 다이크의 작품이면 이런 공상과학 영화 같은 상상에 최적화된 브랜드다, 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뭐 그건 그렇고, 그런데 바로 이때 일이 터졌다.
   예술관 친구들의 순간 이동 기술에 대한 비밀을 끝끝내 캐내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능력 밖의 일일 테지만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으니 저 높은 곳에 계신 어떤 섬광에 의해 내게 뜻밖의 선물의 의미로다 행운이 따라준 것일까? 아닐까? 순전 거짓말 같은 축복일까? 아니면 가짜 뉴스? 결혼식장에서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며 신부로 신랑으로 등장해야, 당장은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향후 어떤 가치를 불러올지 모를 주식이라 할지라도 재화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말 그대로 우리 집에 있는 금송아지일 뿐이다. 그런데 이 믿지 못할 소식을 난 정말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연히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되지 그럼.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저 소파 바로 위도 아니고 45도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비스듬히 걸려있는 반 다이크? 바로, 안소니경의 마돈나가 진품이 아니라는 뉴스가 발표됐다.
   하지만 그거야 남의 일 아닌가. 전문 수집가의 착오일 수도 있고, 영화처럼 중간에 도난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설령 그런 가망성은 있지만 내 사무실에 걸려있는 바로 저 물품이 진품일 승산은 거의 희박했다. 아니 전무했다. 믿거나 말거나도 아니고 괜히 허파에 바람 들 일 있나. 뭐 펄럭펄럭 만화영화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귀로 창공을 날아서 희망을 노래하고 이상을 동경하며 사랑의 씨앗을 뿌리라고? 그냥 아무 데나 막 뿌리라고? 때로는, 아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논리든 법칙이든 그 때문에 나는 팔랑귀라고 당당히 인정할 수는 있으나 그건, 정도가, 지나친 일이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나!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나는 몰래 감정을 의뢰해 봤다. (딱)!
   결과는?
   이거다. 이거여. 아따 이거시랑께. 바로 이거라고! 이거라니까~!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기쁜 인생 신나는 세상 즐거운 예술 놀라운 우주 아름다운 지구 끝없는 사랑, 그 가운데 반다이크의 마돈나가 있다. 소녀들의 우상 여심을 뒤흔들다, 그거였다. 꿈과 이상과 행복과 3000개의 황금 막대가 내 손안에 쥐어지게 생겼단 말이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하트 뿅뿅 반짝반짝 나야 나~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기분은 삼박자 왈츠와 이박자 클럽 음악을 들으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룰루랄라 나는 마법사고 좀비고 외계인이며 내가 전에 친구에게 지어준 별명도 다 내 차지가 됐다. 바로, 큐피트 황태자! 뿐인가? 나는 새로운 진공청소기다. 나는 환상머신이고 언더그라운드의 해리 포터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무인도에 꼭 데려가고 싶은 1인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상상력 씽싱 창의력 솔솔 흥미진진 쑥쑥! 더 나은 미래를 직면했다. 동경하는 희망이 코앞에 보였다. 얌체처럼 나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않을 테다. 타인에게 행복과 사랑과 자신감을 샘솟게 할 수 있는 동기 부여의 신성이 되고 싶고, 그렇게 될 것이다. 멋진 인생을 알게 됐으니 아름다운 세상에 일조하겠다는 거다. 선행적으로 내 인생이 풍요롭게 됐기 때문에 꼭 선심을 쓰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아, 뻐근하다. 초능력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했더니만!
   그런데 이때부터 고민의 나날은 시작됐다. 과연 예술관 친구들과 다시 우정을 재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뭐 딱 잡아떼겠다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느낌이 쎄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난 당장 내일 예술관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14

   통장잔고 그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선물을 잔뜩 사들고 예술관으로 향했다. 뭐야 차 타이어가 빵구났나? 아 선물을 너무 많이 실었더니 자동차가 조금 힘들어하나 보다. 나중 차 바꿔? 아니다. 지금 이 차가 나는 딱 좋다. 한 5년은 더 탈 테다. 그래도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뚜껑이 열리는 기분을 느껴봐야 하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사랑은 하나지만 좋아하는 작품이나 브랜드는 하나가 아닐 수 있으니까. 재미, 폭소, 감동과 기쁨은 매일 넘쳐날 것이다. 행복과 사랑을 양쪽에 꿰찬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그렇게 예술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사무실을 내놨다는 부동산 광고가 붙여졌다. 차차 연락하고 우정은 회복하면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 깜짝 뉴스를 들었다. 반다이크의 마돈나! 바로 그 명화의 진품을 찾았다는 뉴스였다.
   이런, 젠장! 망했다. 완전 망했다. 많이 망했다. 꽝이다.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이럴 수가! 맙소사, 이럴 수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무시무시한 요술도 아니고 뭐야 이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다니, 어머머 나 어떡해!
   이건 한마디로 꽝이다. 괜히 미술품 감정비용을 아낀다고 허접한 업체에 감정을 의뢰한 게 화근이었다. 진품은 개뿔. 이런, 젠장!
   그러나 마음을 고쳐 먹자. 원래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허황된 꿈은 그만 잊자. 새로운 악마의 책동은 사양하고 한 권의 고전을 읽자. 지금은 가을이니까 내일은 비발디의 사계 가을을 듣자. 매혹적인 사랑 환상적인 호사 그 황홀한 격정이 몰아칠 날이 아마 당신께도 언젠가 올 것이다. 불행이네 질투네 고통과 좌절 같은 개념들일랑 모두 다 에메랄드빛 상금이 걸려있는 청록색 비누향이 떠오르는 청소년 문학상 도전에 밀어넣자. 꼭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많다. 공도 있고 연애도 게임도 있다. 사랑은, 온다! 사랑은, 있다! 미래는, 밝다. 꽝도, 재밌다.


   15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이제 진짜 기다리고 기다렸던 SF 장르가 대타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서 멀거니 바보처럼 멀뚱멀뚱 삼구삼진을 당하든 어쩌든 중요한 건 그거다. 이제 진짜로 흥미로운 절정이 기다려진다는 것. 하늘을 봤고 별을 딸 뻔, 정말 거의 완전 거의 내 손에 쥘 듯 탐나는 샛별을 거즘 딸 뻔 했는데, 바로 그런데 못 따 봐라. 상냥한 숙녀께서 좋아하시겠다. 퍽이나! 물론 사나이도 마찬가지. 질투로 유혹하고 굳이 교태 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 신비주의자는 원래 권태를 멀리하고 희망을 반기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폭삭 스타일 구겨졌던 허영심께서 되살아날 조짐이 엿보였다. 꿈은 믿고 상상력은 실현시키면 그만이다. 어제 오늘 내일 내내 허당일지라도 어쩌다 그 허당이 일낼지도 모른다. 막판 끝내기 홈런, 종료 5분 남기고 선수 교체해서 터트린 역전 결승골 같은 거. 뭘로 그렇게 확신하냐구요? 왜냐하면 예술관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기억났어. 우리가 사라진 다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기억이 났단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전화로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순서란 게 있고 법도도 있으며 회심의 일타처럼 드라마틱함을 우리는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이제는 마법 같은 판타지의 간곡한 간청을 들어줄 차례인 것이다. 일단 만나서 바람 빠지고 실망할 때 하더라도 지금부터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 바로 그것이 숨 막힐 정도로 재밌고 기쁜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만약 만나서 그 다음이 예감에 부응하고 기대를 구박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예술관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만났다. 녀석들은 멀리 가지 않고 그 근처에 사무실을 얻었다. 친구들이 내게 알려준 건 정결한 열락도 비밀스런 마술 극장도 아니었다. 당연히 욕망의 환락도 유쾌한 안락도 아님. 그건, 음 그건 분명한 실체였고 확실한 증거였다. 친구들과 나는 당장 비밀 장소라는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 나는 설명을 찬찬히 들었다.
   「우린 애초에 낭만적인 꿈도 신비스런 환상도 바라지 않았어. 그런데 어쩌다 그 일에 휘말려들고 말았지. 결과적으로는 말이야. 물론 아직도 그 모두가 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본다면 말이야 우린 아직 그 미스테리 드라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우린 정말 어떤 마성에라도 사로잡혔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겠지. 그럼 지금은 불타는 모험심에 대한 격정은 가라앉았을까, 가라앉지 않았을까. 당연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탐구욕이 부풀어오른 셈이지. 핀란드식 수증기와 함께 말이야. 가만 있어 봐. 망고의 주 원산지가 어디더라. 에잇 넘어가고. 우리가 경험한 미쳐버린 새로움과 미지의 추상적 전율감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해줄께. 우리는 말이야 송별회가 있던 날 정신을 잃었어.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최대한 생각해낸 걸로 봤을 때는 그래. 당시 기억을 잃었다가 어디서 기억을 되찾았는가? 저기 보이는 저 거대한 농장 시설의 별관이 위치한 곳이야. 저기는 바나나나 항산화 요소가 풍부한 토마토 같은 싱그런 과일을 키우는 말 그대로 농장이야. 그런데 그건 다 위장이라고. 우리가 깨어났을 때 우리는 봤어. 그 뭐야,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 같은 거. 모두 다 진짜였거든. 거대한 투명 통에 사람이 들어가 있고, 알로에 성분이 포함된 점성을 띤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뇌에 반구 모양의 관이 씌여져서 뭘 뽑아내는 것 같았단 말야. 정말 그대로 똑똑히 봤다구.」  이때 나는 계속 듣기만 하다가는 완전 제대로 세뇌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재빨리 바비인지 아론인지, 오스카의 분신인지 모를 누군가의 말을 가로챘다. 바로 이렇게 트집 잡기 위해서. 「혹시 수제 맥주집에서 곤드레만드레하게 코가 빨개져서 뭘 잘못 본 거 아니니?」  「아 진짜라니까 그러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응? 그러다 우린 관리자가 들어왔을 때 기절해 있는 척 했어.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야, 그때 그냥 잠든 척만 한다는 게 진짜로 잠이 들어버렸다는 거지. 바보스럽게도 말이야.
   그 후 2차로 어디서 깨어났느냐? 어디지, 어디였더라? 이번에는 무슨 담배 공장인가 주류 공장인가 그런 곳이었어. 우리 체내의 무슨 이온 농도에 맞는 어떤 성분을 추출해서 그걸 주성분으로 어느 신비한 생명수를 만드는 것 같았어. 그러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우린 풀려났고 당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실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우리의 기억만 지워서 발로 엉덩이를 뻥 걷어차서 내쫓은 거지 뭐. 일종의 방생이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어떻게 보면 윤리적인 덕성의 실천에 해당되는 일일 꺼야. 관점의 차이가 그래.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어. 음. 그래.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란 거야? 뭐야 절정이 이제 진짜 시작될려나 보다 했더니만 다시 전개도 모자라 발단으로 주저앉아버렸잖아? 아 나 정말 이거 원! 너네들을 믿은 내가 미친 놈이지.」 
   「아 마네킹! 마네킹을 봤어. 우리의 정신을 뽑아내서 그걸 환상머신에 이양시켜놓은 다음 우리의 육체는 마네킹과 결합해서 우리가 일하는 예술관으로 보낸다고 했어. 그 대화를 들은 건 확실히 기억해.」
   「뭐라고? 마네킹? 어, 진짜 마네킹이 예술관에 있었어. 누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걸 가져다놨더라고. 나도 당시 마네킹이 살아있었다는 느낌을 분명 받았고, 기분도 분위기도 모두 이상했었는데 다음 날이던가 무슨 국제적인 택배회사, 가짜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아저씨가 와서 잘못 배달됐다면서 그냥 가져가버렸어. 최소한 그때 내가 두 가지 중 하나는 내가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첫째 왜 그걸 가져가냐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를 물어봤어야 하고, 둘째 그걸 왜 가져가냐 그건 내 꺼다 라고 따지는 거. 바로 그 둘 중에 하나는 물고 늘어졌어야 해. 그렇지만 그 뭔가 이상한 카리스마에 짓눌려서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
   바로 이때 우리는 어느 농장인지 공장인지 커다란 산업 시설에 몰래 침입해서 뭔가를 탐지할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저기 저쪽에서 아론의 동생, 아론은 불인정했지만, 난 그렇게 들었던 데이지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반가웠기 때문이다. 인사도 못하고 떠나지 않았는가.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도 없고 말이다.
   「데이지!」 
   그 말을 듣고 데이지로 추정되는 여인은 도망쳤다. 그녀는 어쩜 데이지가 아닐 수도 있고, 내 부름을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쫓아갈 의지를 상실했다. 어딘가 그녀와 닮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그곳에서 무슨 특별한 시설이나 정황을 발견한 건 하나도 없었고, 친구들에게 색다른 기억이 새롭게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허무하게도 새로 이사한 예술관으로 되돌아갔다.
   사무실에서 친구들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성의껏 선물한 그림은 잘 받았니?」 
   「어. 고마워. 너무 마음에 들어. 최고야. 옛날부터 꼭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인데 어떻게 알았니? 반 다이크의 마돈나! 뭉크의 사춘기나 다른 유명한 그림들도 좋지만 마돈나. 분위기 좋자나?」 
   「뭐라고? 아닌데. 우리가 선물한 건 1800년대 소품과 1900년대 유화 한 점인데. 모두 진품이고 작가는 누구였더라. 아무튼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하고 싶어하는 작품이야. 은둥형 재력가의 눈독과 인상파 환상주의자의 흑심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으로 말이야. 물론 모두 진품이고. 어머 그런데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대체 뭔 말이니?」 
   「뭐야 그럼. 중간에 물건이 바뀐 거네? 그림이 무슨 007 가방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큰 작전을 펼칠 만큼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거도 아니잖아?」 
   「그렇지. 맞아. 그런데 있잖아~ 방금 전에 했던 말. 그거 다 뻥이야!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깜빡 속았지? 메~롱! 오랫만에 네가 당황해하고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 그치만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라구. 다음 번엔 괜찮은 추상화가의 진품을 진짜로 선물할 테니까 말이야.」
   「뭐야 그럼. 아바타 영화에 나오는 그거랑 뭔가 기억났네 어쩌네 그거도 다 거짓말이었어? 그럴려고 일부러 날 부르고 어디 갔다 오고 그랬냐고?」
   「응.」
   「어허~ 저런! 흐흠. 나도 알고 있었어. 이미 눈치챘다고. 처음부터 말이야. 그냥 속아준 척 했을 뿐이라구.」
   「에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야. 진짜라고.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아휴 증말 속아주는 것도 진짜 재미없다. 아 맞다. 그런데 사라지는 요술은, 그건 정말 어떻게 가능한 거니?」
   「아 그건 너한테는 가르쳐주지 않을 꺼야. 그리고 몇몇만 거짓일 뿐 나머지는 다 진짜야. 모두 사실이라구. 엄정한 사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 같은 거. 거대한 투명 통에 사람이 들어가 있고, 알로에 성분이 포함된 점성을 띤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뇌에 반구 모양의 관이 씌여져서 뭘 뽑아내는 거. 모두 진짜였어. 마네킹까지 말이야. 뭐 나중 차츰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궁금함은 끝내 미스테리로 남게 될 꺼야.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라구. 아무튼, 둘 중에 하나 선택해. 금세기 최고의 마술사에게 불가능한, 미래의 환상가가 습득하기 꽤나 어려울 요술을 배울 꺼냐, 아니면 몇몇 진품을 선물로 받을 꺼냐. 너무 비싸지도 않고 아예 무명도 아니고 그런 괜찮은 작품들 많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대충 세어 봐도 한 4만점 되나? 못 잡아도 그 정도는 되겠군 그래. 근데 왜 4만이지? 너 혹시 4만이란 숫자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 부여라도 알고 있는 거 있니? 없으면 넘어가자. 아무튼 말이야, 꽤 구미를 당기고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고 그래, 갖고 싶어지는 거 그런 작품들 말이야. 베르나르 뷔페, 잭슨 폴락, 로스코, 워홀, 드 쿠닝 진품도 몇 점 이미 구했다네.」 
   그 뒤로 우린 헤어졌고 지금까지 연락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앞으로도 서로 인생을 살면서 굳이 시간내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무얼 수집하고 짐이 많고 그런 거 싫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옷도 많으면 귀찮고 약속도 많으면 번잡스럽다. 그걸 바꾸어 말하면 뭘까? 그렇다. 최고가 아니면 싫다는 말이다. 일부러 내 안목이 드높다 그런 말이 아니라 온갖 호사품 쇼핑 가방을 모두 한 손에 들 수도 없고, 온갖 과장 광고들을 믿을 수도 없으며, 동물농장을 TV로 보는 게 편하지 호피 무늬 입은 숙녀를 찾아 NC에 가는 것도 이젠 체력이 뒷받침되기 힘들다 그런 말이다. 마네킹이라면 딱 1개 사서 가터벨트를 입혀볼 수는 있다. 그 이상의 괴상한 취미는 사양하고. 아마 나는 영원한 허당인 듯 하니까 굳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것만 같다. 변명 같지만 그게 다 예술관 친구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난 예술관 2.0 블로그 3의 새로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숙명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 어떤 독특한 새로움을 기다리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다리는 행사가 있다면 그 축제는 아마도 이런 이름이지 않을까?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 대신에 말이다.
   환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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