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학

from 칼럼 2021. 6. 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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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조사]
    일본 내 "왕릉 발굴 절대 금지"에 대해서는 앞서 칼럼에서 밝혔는데. 즉 캐내면 캐낼수록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반면 불리한 건 시간을 정지시켜놨으면, 유리한 걸 찾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당연히 한다. 바로 발해 지역 발굴. 발해는 699년~926년 동안 지속된 나라로써. 지금의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이 국토. 그러면 왜?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일본 제국주의의 명분을 되찾기 위해. 당시 발해와 일본 모두 신라를 적대국으로 설정했는데.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느슨한 동맹국 성격이 발생했고. 실제 발해는 건국 후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알림. 또 발해는 존속 기간 약 220년 동안  일본에 사신을 34차례, 민간인을 1회 파견. 150년 전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지금도 근대사 및 고대사 왜곡을 위한 명분 삼아 뭔가 유리한 걸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됨. 이러한 동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지금도 일본은 발해 현지 발굴에 최선을 다함. 그럼 당연히 일본 산업계에서 막대한 후원. 아울러 러시아에서도 발해 연구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데. 일본 자금이 또 알게 모르게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중. 만약 KGB 부활하지 않으면(물론 현재도 이름만 다른 극외..부가 있긴 하나 옛날 수준으로) 그러면 알래스카는 돈이라도 받고 팔았지, 야금야금 시베리아랑 야쿠츠크랑...연금도 늦게주는데 일본 자본력이 넘보지 못할 건 또 뭔가. 걔네들 마초협회만 믿고 있다가 나중 큰코다칠 것임. 분명 경고했음!

   [백강전투]
    날짜: 663년 8월 27일~8월 28일
    장소: 백강 부근
    교전국: 나당연합군 VS 왜, 백제 부흥군
    내용: 660년 사비성이 함락 → 이듬해 일본에 있던 백제 의자왕의 동생, 여풍장(余豊璋)은 왜병 5천명을 이끌고...지원병을 모두 합산하면 대략 3만~6만 추정. 당시 인구 감안하면... (계산 쉽게) 1억에서 100만 대군. 그러면... 일본 내 예비군과 현역군 단 1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백강전투에 총력했다는 얘기인데. 심지어 가까운 육지도 아니고 당시 기술 감안했을 때 먼 바다 건너... 총력전 원정경기? 현지에는 주민보안대 임시로 최소 인력만 민간인 구성하고, 싹 다 동원이었다니...! 그 정도였다는 말은 뭘까? 일본서기는 이 전투 결과에 대해 기록을 남김. "오늘로써 백제의 이름도 끝이로구나, 과연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 2001년에 단지 말 한마디요, 2004년에 당숙만 보내서 허수아비가 코빼기만 비춘 셈. 상왕들 눈치보며 사느라 뒤늦게 후손 행세? 그러니 만년 뒤통수요 언제나 어디서나 뒤끝 끝장. 결국 통상 결과는 항상 기습, 항상 은혜를 원수로 갚음. 일찍도 예를 갖추는 속내가... 양다리? 통과. 
    다시 말하지만 663년 백강전투를 비롯해 저게 30년 전쟁인가 그 정도로 동아시아 전체가 들썩거린 역사였는데. 663년에 대략 5만 병력을 (기술 감안해서 배로 말과 병력을...). 일본의 권위적인 인류학자에 따르자면 나라시대(710~784년) 인구를 약 530만명으로 추정하는데. 그보다 앞선 663년 약한 중앙집중 체계 감안하여, 약 400만명. 도시 집중인 현대와 달리 흩어져 살고, 중앙집중적인 체계도 부족하며, 느슨한 각각 개별 부족 시대였을 건데. 그러면 400만 ÷ 5만 = ? 실병력은 바다 건너로 모두 출정한 셈.
     지금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국운을 걸고서 우방을 도와줄 수는 없다. 아무리 절친한 동맹이어도 모든 걸 동원하여, 더군다나 먼 전투에, 심지어 불리한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건다? 그건 동격이 아님을 뜻함. 곧 당시 왜나라의 사회지도층과 왕족 부족들 기반이 어디라는 얘기. 그러니까 백강전투에서 패전하던 중에도 백제인 최소 10만명을 실고서 왜나라로 퇴격한 것임. 지금 해외뉴스를 봐도 아무나 이민을 받아주지 않는다. 난민이라면 더더욱. 더군다나 오래 살아도 시민권과 투표권 등 다 단계가 있고 끼리끼리가 있다. 게다가 우방이어도 비상시에 자국행이 보장될 수 있는 황금카드는 비밀 리에 해외 거주 자국민, 또는 프리패스에게만 해당. 그런데 특권층 단 몇 명도 아니고 사정 감안했을 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듯이 더 못 구해서 안달인 심정으로. 대규모 망명? 당시 왜나라 역사, 아마도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대폭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걸로 봤을 때 불리한 걸 감춘 게 도대체 얼마이길래...! 예를 들어 유럽과 아시아 등 미국 바깥에서 전쟁 발생시, 작전명과 미리 작성된 명단이 다 있다. 즉 최우선은 해외 거주 자국민, 2번째는 기타 등등. 이걸로 다음 3가지 구분을 가정해볼 수도 있다. 
    첫째, 흩어지냐? NO! 스페인 내전/미국 남북전쟁...등 (내전-다국전 관계없이 인구구성 변화없음)
    둘째, 흩어지냐? YES! 아프리카/중동.../팔레스타인... (먼저 싸우고 나중 재건이 아니라/처음부터 흩어짐)
    셋째, 특수성! 유럽 유대계 대거 이스라엘 이주/러시아 유대계가 북미로 대거 이주/유럽이 남미로...등등!
    아무리 호주와 캐나다가 우방이라고 할지언정. 북유럽 전쟁 발발을 가정하자면, 가령 독일이 자국민을 약 1600년 전에 최소 1%에 해당할 정도의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도와준 예는 세계사에서 거의 없다. 그걸 현재로 감안하자면, 우방이 위기에 처했다고 하여 예비군 동원해서 자국민 10%에 해당할 정도로 군대 편성하여 모든 걸 걸고 원정경기를 떠나는 건 말이 안됨. 하물며 승산 가능성도 없어. 가면 질 게 뻔해. 그런데 옛날에 그랬다고? 당시 백제 의자왕의 아들은 여풍장, 근데 여풍장은 당시 왜나라에 있었는데. 백강전투가 발발하자 여풍장은 약 5만 병력을 이끌고 이지스함 전단을 모조리 동원해서 끌고 오는데. 왜 대마도 문화재가 어디를 향해 있고. 무엇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회지도층의 묘소가 하필 어떤 지방인지. 사람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면 몰라도, 아니면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인지 묻힌 땅 이름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다 답 나옴. 그런데 그런 예가 전세계 모래알처럼 많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역사를 가짜고 만들고, 꾸미고, 왜곡하는 것. 캥기는 게 그래서 많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아닌 척... 속으로는 천황가가 백제 조상들을 위한 제사 꼬박꼬박 다 지냄. 백제계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한국계 조상 관련 신사도 겁나게 많음.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이치. 즉 백강전투에 대한 결론은 당시 백제와 왜. 우방도 아니고. 백제가 단순히 위고 왜가 아래냐 그 역시도 아님. 그럼 그 말은 곧 뭐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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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요 그 근방이 갈길이 멀 텐데. 일단 한국에서 BC 25세기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으로 발굴된 공식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일부분) 비툴어진 식민지사관 자료에 적지 않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는데. 시간 없어 자세히 조사는 못한다만, 한국 일본 모두 역사교과서 대부분 들어엎어야 할 정도로 구식이라는 말이잖아? (물론 과거인의 노고는 인정하오나, 틀린 부분이 나왔을 때 그건 당신이 옳다 내가 틀렸다 그게 안되니까). 그래서 대공사는 싫고, 틀린 거 불인정이요, 고로 결국 덮자. 그냥 한마디로 외면이구만. 학계에서 다양성을 포용하고, 그에 따라 진위를 가리며, 차근차근 옳은 학설을 중용하며...그렇게 발전 및 개선해가야 하는데. 100년 넘도록 안 바뀌는 건 뭐지? 특히 애초에 기준 설정도 잘못 됐는데도 불구하고 변화 0에 가깝다니. 완고한 가부장지수가 이럴 때 제몫 톡톡히 한다는 것. 뭘 인정을 안 해 인정을! 이미 실존하는 역사서와 문화재 고증에 따라 뻔뻔함은 하늘을 노하게 만드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고서, 분명 어딘가 있을지도 모름. 소실되고 사라졌을지언정 어딘가 몰래 비장되어있을 가능성 다분. 그거 하나둘 공개되면 차마 얼굴을 못 들고 다니실 분들... 하긴 그 정도 낯 두꺼운데 나중 일이 뭔 걱정. 
    그런데 그게 다 근대사 식민지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 식민지 운영을 위한 명분 만들기. 치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섬세함의 극치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영혼을 세뇌시키는 일. 선발주자들이 미처 시도하지 못했던 부분을 후발주자(일본)이 식민지 운영에 적용한 부분들이 이것임. 단순히 역사 왜곡 정도가 아니라 놀랍도록 섬세하기 때문에 그게 외국(일본 바깥)에서 100년 이어지고, 일본 내에서도 100년 150년 내내 일관됨. 그게 당시 대성공이었기 때문인데 그 말은 곧 무서울 정도로 대성공이란는 점. 그러므로 가령 (비유하자면) 나치가 독일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기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 물론 역사적으로 베를린은 미국&연합군 VS 소련이 분할 점령했는데(당연히 소련은 당시 그만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 제2차 세계대전 결과 소련이 우리랑 나눠서 일본을 분할 통치하자 라고 제의, 미군정은 딱 거절. (당연히 미군정&연합군이 주역이니까). 근데 불똥이 옆동네로 튀어 하필 북한을 소련이, 남한을 미군정&연합군이 통치하게 됨. 이럼 또 스탈린까지 얘기 길어지니까 넘어가고.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 역사라는 억지에 대해서. (고구려를 BC 37년 ~ AC 668년으로 보냐, 창건을 BC 277로 보냐는 논외) 중국의 소 혓바닥 주장처럼 공산주의 특유의 억지는 현대 문명과 역행. 그 예는 차마 셀 수 없음. 그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이 1980년부터 '일사양용'이라는 좌우명으로 고구려가 한국사에 포함된다는 내용을 비판하기 시작. 당시 고구려의 번성이 모두 현재 중국 영토에서 발생했으니 중국사에 속한다는 논리. 마치 유럽이 로마제국사를 불인정한다는 식인데. 현재의 중국은 과거 소련 연합처럼 다민족 구성 국가이자, 공산주의 발상이기 때문에 그런 억지가 가능. 그래서 중국 내 개별 다민족들은 개별 언어를 앞서 역사 왜곡처럼 1980년 전후로부터 서서히 못 배우도록 억압. 그 때문에 북한도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 이게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없는 이유. 만약 중국이 민주주의를 일찍 받아들이면 소련처럼 다 쪼개질 거 뻔하기 때문. 다 자기들 언어와 문화가 따로따로인데 절대로 좋을 리가 없거든. 그 뿐만이 아니라 국경만 봐도 맞닫은 국가가 몇 개인데. <다민족/다국경> 환경은 실질적 대국으로 성장하기에 굉장한 악조건이 분명. (즉 미국처럼 다양성/소국경 환경과 정반대) 하여 레닌 사상과 기타 등등으로 억압된 사회인 중국? 전세계인이 굳이 논평 길게 하지 않는 이치. 단언컨대 다민족 국가인데 공산당이 단일성만 세뇌한다? 중세 시대 발상. 
    실제 중국은 1당제 국가로써 공산당 당원은 전국민 가운데 비율이 얼마던가? 10%? 그렇다고 아무나 공산당원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레닌주의 사상, 스탈린 통치 방식들이 그대로 지켜지는 사회이므로. 고로 공산당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좌지우지하며 통제하는 사회임. 말 그대로 중세시대. 역사만 봐도 중국은 왕조시대가 길게 간 적이 단 1번도 없음. 게다가 다민족 구성. 그런데 미국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 통제. 그래서 전세계 평판이... 좀 그렇게 된 것. 중국이 굴욕의 100년이라고 일컫는 기간 이전. 즉 500년 전1500년 전 조공 받던 사실과 현대 문명을 일부분 착각하므로 역사 왜곡도 발생. 그래서 중국은 한국의 과거, 즉 한국사까지 모두 자기들 역사라고 우김. 좋은 평판을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인데, 정반대로 나쁜 평판을 굳히는 게 공산당의 생각. 
    요컨대 이게 모두 다민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일. 몽골, 티벳, 위구르, 한족, 조선족...모두 자기들 언어와 문화와 전통이 개별적인데. 그거 다 못 배우도록 억압. (그거 엑셀파일로 모아보면... 입이 떡 벌어짐) 문명사에서 명백한 악역임을 자처하는 결과. 안 그러면 소련 연합이 쪼개지듯 흩어질까 봐, 몽골, 티벳, 위구르, 한족, 조선족...을 모두 식민지 개념이 아니라 역사와 뭐든지 억지써서 우기는 형식. 그러니까 남중국해 여러 나들이 치를 떠는 이치. 말로는 대국이라지만 실제로는 옹졸. 그러니까 중국-베트남 전쟁, 중국-인도 유혈분쟁 등만 가능. 더더군다나 중국 역사를 통틀어 500년 이상 오래 지속된 왕조가 단 1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역사 왜곡을 일삼는 것임. 그러니까 결국 중국도 일본처럼 불리한 문화재 발굴에 매우 민감한 형세. 양쪽 다 사극에 대해서라면 절대로 지기 싫어하는 원리. 그리고 문화재 발굴 기술도 비과학적. 막 그냥 대충 시멘트 때려바르고... 흔히 알듯 선진국과 영 다름. 로마제국의 문화유산이 전유럽에 지금 온전히 남아있고, 유럽인들 인식은 일반적인데. 지구 반대편은... 사정이 완전히 다름. 
    이렇듯 1980년~2000년까지 20년 동안 억지 역사를 주장했으니, 2000년에 북한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 등재를 시도했을 때. 중국이 방해했음. 왜? 1980년~2000년까지 20년 동안 억지 역사 주장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 물론 2000년 당시 중국이 문화부 부부장을 평양에 급파하여, 중국 영토 안에도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두 나라의 유적을 공동으로 신청하자고 제안. 그래? 허나 북한은 거절. 딱 거절. 그러다 2002년 북한 문화재가 유네스코에 거의 등재될 뻔 했는데, 중간에 방해 공작이 발생해서 실패. 그러다 2004년엔가 북한 대 중국 = 9:1 비율로 유네스코 등재 성공. 이와 같은 사실들은 뭘 말하냐? 유럽 나라들이 로마제국 역사를 불인정하는 꼴. 로마제국 역사를 현재 서유럽 북유럽 남유럽 모두 개별 나라 영토이니까, 따라서 로마제국 역사는 그냥 자기들 나라 국사에 속한다. ~라는 게 중국의 주장! 실제 고구려 국가 존속 기간이 로마제국와 유사. 
    끝으로 고구려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속셈! 왜냐? 왜냐하면 자존심 상하니까. 사실은 한국사인데 일본에 대한 사고체계를 분석하면서 뭐랬나. 인정 불인정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시부족은 즉각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돌변하는 이치. 가까운 역사 즉 속된 말로 뽕으로 조졌던... 굴욕의 100년인가 150년인가. 그처럼 가까운 역사도 아니고 무려 2000년 전 역사. 고구려는 강국으로써 기원전 277년부터 기원후 688년까지. 대략 700년 존속한 강국. 그런데 중국사를 통틀어봐도 400년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단 1개도 없음. 그래? 길어야 300년. 그게 굴욕이라는 거네. 중국 역사서에 숱하게 나와 있음.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에 대해. 그런데 뜬금없이 고구려가 중국사다? 말이 안됨. 그래서 수치심과 굴육 없던 걸로 하자, 라면서 고구려를 자국사로 우겨넣고자 하는 것. 역사를 보아하니 이를 테면 골목대장이었다가, 갑자기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래서 뒤늦게 뒷북. 그렇다고 중국이 과거사를 놓고 베트남, 티베트, 몽골, 위굴,,,,에 사과하나? 안한다. 못하지. 어떻게? 싫어해. 공산주의거든. 일단 말이 안 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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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일본서기]
    1900년대 초반 한국은 일본 식민지였는데. 당시 한일합병 명분을 위해 만들어낸 게 바로 임나일본부설. 말 그대로 머머설! 약 서기 500년쯤 한반도 남부에 임나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걸 조선총독부처럼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는 설. 처음에는 4세기~6세기 그렇게 200년 총독부로써 지배. 나중 근거 없으니까 100년으로 낮춤. 다시 50년으로. 말도 안되니까 10년 아니 1년까지 낮춰짐. 일본 국보 1호를 1910년경에 성형 조작해서 그거 숨기고 지금까지 자국민 교육시키듯. 당시에 만들어낸 게 바로 식민사관. 물론 국보 1호 성형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 낙랑 유물을 계속 발굴하여 '신의 손'이라 불렸던 세키노 다다시. 그의 일기를 보면 베이징 골동품상에서 한나라 때의 골동품을 다수 사들인 사실이 명백히 알려짐. 그 외 대표적으로 
    첫째, BC 1세기~ AC 4세기 현재 북한에 한나라 군현 설치로 관리
    둘째, AC 4세기~ AC 6세기 현재 남한에 일본총동부 설치로 관리 
    중요한 건,  일본 역사학계는 150년 전부터 현재까지 별로 변한 게 많지 않다는 것. 사실과 허구가 많이 뒤섞인 일본서기에 나오기로도, 임나는 여지없이 지금의 대마도. 더구나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7세기 말에서야 생김. 근데 5세기에 머머설? 게다가 '임나=가야'를 주장하려면 562년 이후로 임나든 가야든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지 않아야 하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는 신라에 망한 걸로 나오는데 일본서기에는 신라에 멸망했어도 임나가 계속 나옴. 무슨 판타지 소설 같음. 이런 명백한 근거는 한도 끝도 없음. 그래서 결국 허황된 머머설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본 극우파, 역사학계는 나중 입장을 바꿈. 처음에는 200년 지배했다 → 아니다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했다 → 아니다 한반도 남쪽은 우리 꺼다 → 그러다...그러다... → 아마도 200년 직접 지배는 힘들었을 것이다 → 1980년대 이후에는 임나가 지배했다는 기간을 대폭 축소하여 30년 → 다시 10년 → 심지어 1년(530~531년)밖에 안되다는 설까지 나옴. 침략 정당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없는 얘기를 지어냄. 합병국이 원해서 그렇게 됐고 어쩌고. 한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머머설일 뿐임. 또 저 첫째도 중국 자료들이 쉼없이 추가되기 때문에 다 개 뻥으로 밝혀짐. 
    그런데 사실은 (역으로) 일본 천황가 족보가 초기 한국계가 약 25대 지배이므로. 옛날에 대충 일본이 몇 백년 한국의 식민지였음. 그거 감추려고 갖은 모략이 난무. 그러다 1900년 전후로 일본은 아시아를 꿀꺽하게 되는데. 아니, 어떻게 그처럼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치밀했을 수 있냐? 왜냐하면 단지 30년 임차하기 위한 침략이 아니라 영구 지배를 노렸기 때문. 그래서 다각도로, 전방위적으로, 총체적으로 식민지 역사관을 주입시켰던 것임. (저속한 표현으로 영혼을 탈탈 털어 세뇌. 그렇게 정신개조 당한 사회지도층이 전사회를 쥐락펴락하니까...그 물이 빠지는데 오래 걸릴 수 밖에). 당연히 1900년 전후로 전국을 돌며 불리한 자료는 죄다 소각하고, 유리한 물품들은 빼돌리고 그랬음. 그 살벌한 식민사관의 영향은 지금까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고, 이완용 손자뻘인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고. 한국 사학계 태반이 한국 사학계를 100년 연속 병들게 했음. 일본인보다 한국인의 입을 통해 식민사학이 전파되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건 뻔한데 그게 무려 100년 연속. 유학 당시 영향받고 대체 뭘 받았는지 김현구는 또 임진왜란이 약 1000년 전에 대규모로 실제 있었대. 그 훌륭하신 양반들 때문에 100년 연속 고대사를 대폭 축소해서 거짓을 배움. 전남 영암군 주거지 유적 관련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BC 2630~2365년이라는 근거를 제시해도 꿈쩍도 않음. 이병도, 신석호,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김현구 이놈들 싹 다 지옥행 특급 예약.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고대 사료는 무시하고. 1,400년 또는 그 이후 자료만 가지고 100~150년 전에 식민사관 자료만 그대로 유지하려는 학자의 양심. 지들 말이 법인 줄 알아. 틀린 걸 지적하면 반기고, 인정하며, 새롭게 연구를 해야 하는데. 1번 말하면 끝. 일례로, 
    A. "수경" 및 "한서" "지리지"의 관점
    B. "독사방여기요"의 관점
    C. "조선총독부"의 관점.
    이렇게 ABC의 관점이 모두 대척된다면 아무 사료 근거 없는 C가 옳다? 뭐지 그게! 그 근방 학계와 업계는 역사를 바로잡기 바람. 아니면 말년이 매우, 아주 매우 괴로울 것임. 아마 일찍 사후세계 보러가신 분들이 부럽게 될 걸! 일본 사학자들 대다수 학설을 들어 봐 봐. 일본사기는 100% 사실이다, 따라서 어쩌고저쩌고. 놀고 있어요. 다 판에 박은 억지. 다 똑같은 우김. 학문을 전공하면 뭐가 사실에 가까운 역사서이고, 뭐는 허구가 많은 대하드라마인지. 어떻게 모를 수 있나. 도쿄 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사 전공 일본인. 그 냥반 한국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그대로 100년 내내 이어옴. 학계의 권위자들이... (절레절레) 서울대 사학과 교수들, 고려대, 성균관대, 동북아역사재단 전신인 고구려연구재단의 김정배. 또 고려대나 성균관대는 신석호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 식민사관 관련해서는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지당해? 위당 정인보 선생을 버리고 백낙준을 선택한 연세대도 각오해. 초기 역사관 설정은 뭐가 잘못됐는지 공부해볼 시도도 안함. 역사적 고증도 별로 하지 않고 기존에 잘못 만들어진 역사관만 고집. 무슨 새로움이 들어갈 빈틈이 없음. 그런 고리타분한 양반들이 역사계와 명문대 태반을 장악. 그러니 천관우 같은 비주류, 학위 없이 논문 300편 쓰다 새로운 학설 주장하다 주장하다 조용히 사라진 학자들만 불쌍.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할 시도도 안해요, 기존 역사에서 어떤 오류가 있는지 공부도 안해요. 무슨 역사계도 베껴쓰기와 짜집기만 남았나? 그게 장사꾼이라거나 학계에서 업계로 넘어갔으면 말을 안하는데. 그 구식탱탱묵은 냥반들이 학계를 꽉 쥐고서 대하드라마 카르텔 형성. 무슨 학자들도 마피아 흉내내? 그게 뭡니까, 네? 그럴려면 무역업을 하던지 학원 강사를 했어야지. 아니면 부동산업을 하던가. 명예와 돈만 밝히는 거잖아? 또 서울대 출신의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태식. 식민사학 정통 계보를 이어받아서 노태돈-여호규-임기환 등 주장을 짜집기해서 박사학위. 말년을 기대하시기 바람. 
    일본서기는 사실을 근거로, 상당량 허구가 가미된 대하드라마 역사서인데. 말 그대로 역사서일지언정 소설에 가까운 책인데. 심지어 일본역사서. 그런데 도대체 왜 한국 관련 내용이 그렇게나 많아? 무엇 때문에! 왜냐하면 캥기는 게 많으니까. 그래서 일본 왕릉을 발굴하다 다 시급히 금지시킨 것임. 캐내면 캐낼수록 불리하니까. 권위적인 자국 역사서인데 왜 남의 나라 일들 내용들이 훨씬 많냐고! 뭔 벌써 그때부터 관음증? 일본서기에서 일본 관련 내용은 그냥 시시콜콜한 내용들과, 신화를 각색하고 만든 부분들. 나머지는 죄다 한국 내용들. 그럼 그게 과연 일본 역사서야, 아니면 과장된 외국추종 역사서야? 아니, 어? 그러니까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자는 이 대목에서 자신있게 추론할 수 있다. 어째서 자국 역사서인데도 불구하고 죄다 외국 관련 내용들 뿐이냐고? 왜냐하면 다음 2가지 이유 때문. 
    첫째, 몇백년 동안 일본이 식민지배 당했기 때문 (대략 추정치임/또 천황가 족보 초대~약25대는 한국계 관련)
    둘째, AC 700년 일본서기 편찬 당시에 자국사에 대해 쓸 내용이 별로 없었기 때문
    자, 반론 있으면 당당히 줄서주세요. 얼마든지 상대해드리겠음! 허허허허허. 하오나 당연히 찬성하기 싫어야 정상. 고로 선수(先手) 떠넘기는 책략은 불을 보듯 뻔함. 아니면 외면. 이와 같은 가설 또는 연구 성과에 대해 드물게 일본 역사학자가 의견을 제시한 적이 간혹 있긴 있음. 절대로 솔직할 수 없는 전통, 죽어도 솔직해서는 안되는 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불인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런 사실에 대한 추정값을 제시하는 현지인도 있긴 있는데. 그분들께서 뭐라 하시냐? 바로, (대략 의견을 요약하자면) "제 의견이 학계에서 조금이나마 조명을 받으려면 아마도 30~50년은 걸릴 것입니다." 물론 조명만 받는데 반세기요, 조명 받아도 무시 당하다 그냥 묻히는데 그 뭐든지 걸 수 있음. 왜냐하면 천황이 (현지인들 속마음을 투명히 반영한 표현대로) 정신나간 발언을 하자마자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어떠했던 전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좌우지간 "일본서기"는 사실을 거의 반영한 역사와는 달리, 고대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편찬된 즉 꾸며진 역사서임. 그런데 이런 역사서에도 고대 야마토 왜가 백제계가 건너가서 세운 것이라는 사실은 못 감춤. 또 일본에 왜,왜,왜...들이 많았고 한국계가 넘어가서 뭐야 식민지배를? 일본이 이미 고대에 식민지였다는 말인데. 그러자 일본 사학계는 고민에 빠짐. 어떻게 하면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유리한 건 전부 사실 100%, 불리한 건 죄다 허구라고 결론내림. 물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사회지도층 전부 대략 뭐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긴 앎. 왜냐하면 일본서기보다 연대가 앞서는 한국 공식적인 역사서를 어디다 숨겨놨기 때문에. 근데 왜 공개 못하냐? 하면 전부 다 뒤집어 엎어야 하니까, 그래서 못하는 것임. 
    아울러 저 첫째 즉 초대부터 약 25대를 외국계 천황으로 추정하는 근거. 발굴 금지된 왕릉들만 봐도 무척이나 의뭉스럽다는 점. 그 가운데 규수 지방. 1세기부터 ~ 5세기까지 5000여 기의 다양한 고분이 있음. 이 중에서 3000여 기가 국가 또는 지방 문화재. 특히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약 300기는 '특별사적'으로 분류. 그런데 절대로 발굴 금지! 단, 유리한 거 어떻게든 찾아내야 하니까... 나중 두고 봐도 불리한 건 싹 다 감출 게 뻔함. 또 세계 3대 무덤으로 알려졌던가.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다이센 고분. 언젠가 이 닌토쿠 황릉이 폭풍우로 무너지게 됐는데, 당시 능을 복원하면서도 부장품은 일절 공개하지 않음. 다만 복원 당시 내부를 들여다본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샤쿠 일본사 교수 왈, "그 안에는..." 쉿!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1914년, 1915년, 1917년 세 차례에 걸쳐 경주와 김해 일대 고분을 발굴하여 밀반출. 그럼 그걸 다시 자기네 땅에다 묻음. 그걸 다시 캐내면? 일본산이 됨. 일본 국보 1호 성형도 똑같음. 물론 고고학계는 부여 기마족이 369~505년까지 130여 년간 일본을 통치한 걸로 보는데. 거기다가 천황가 족보 캐내면... 무려 일본이 고대 5세기를 식민지배 받았다고? (←사실 / 거짓→) 식민지배할 명분을 위해 역으로, 임나일본부라는 머머설을 만들어내게 된 것임. 
    아무튼 일일이 실명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적반하장으로 잘잘못을 인정치 않고 동료 학자를 고소까지? 너네들은 디졌어. 안 디진 애들은 두고두고 말년이 괴롭게 되어 있음. 어디 말년만 괴롭게? 사후세계 가면 놀라운 게 기다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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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전투 Ⅱ / 삼국시대: 백제-고구려-신라]
   (본 칼럼 뿐만 아니라 인용처와 참고서적 밝혀야 하는데,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겨우겨우 끌려가느라 미처 그러지 못하는 점 양해를 구함. 자꾸 시간 없다는 핑계 남발해서 송구스럽긴 하다만.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남 학설을 마치 내 것인 양...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초능력이 내게 생겨버린 걸 어떡하나! 마치 남 얘기도 내 얘기인 것처럼, 남 개그도 내 개그인 것처럼. 말 뺐기 주도권 더 빼앗기 말 끓기 말 맞받아치기 말 돌리기... 말이라면야 어눌하니 이거라도 잘해야 난 먹고사는 건가? 모르겠다. 알 수가 있어야지 내일을. 한 치 앞도 예상못함. 넘어가고)
    660년 사비성 공방전에 패해 의자왕과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2,807명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물론 사비성 함락 당시 무열왕의 아들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은 백제 태자 부여융을 말 아래 꿇어앉히고 그의 얼굴에 침 뱉음. "예전에......" 그렇게 나당 연합군의 승리 연회가 백제 부여성에서 열리고 의자왕과 왕자, 귀족들이 적군 신라의 장수들에게 술을 따르는 수모를 당하는 동안 백제인들은 눈물 바다. 백제 임시 지휘자가 왜왕에게 원병 요청, 20년간 야마토에 머물고 있는 의자왕의 동생 여풍장의 귀국과 지원 요청. 그래? 왜왕은 즉각 지원군 파견 선포, 661년 여풍장은 왜병 5천명 데리고 돌아옴. 당시 왜왕인 여왕 사이메이는 직접 수군을 이끌고 출격 결정, 지휘부 차리고, 작전본부 설치. 그러다 북규수 본영에서 왜왕이 죽음. (남동생 효덕왕이 죽자 재위에 오른 사이메이는. 400척 배 만드는 시간과 전쟁 준비 외에, 또 이혼녀임에도 여왕을 2번이나 역임하는 등 연로한 탓) 다음에 그 아들 태자가 지휘권 물려받음(이 태자가 바로 후일의 덴무 천황임). 그렇게 백제 지원군 편성하여 663년에 약 32,000명 파견. 참고로 당시 백제 인구는 약 380만 명으로 왜 인구에 육박. 그러다 백제 부흥군은 9월 7일 항복, 여풍장은 고구려로 원병 구한다면 떠남. 그렇게 왜병이 퇴격하며 당장 10만명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고, 나중 결산 총 20만 명 이상으로 일본 역사학자가 추산. 
    전쟁의 승산은 꽤 짙어져서 당나라가 고구려를 제압하고 신라&백제까지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백제 태자한테 침 뱉고 술 따르게 했던) 문무왕이 당에 사죄하여 신라 국토 보전됨. 이 이후에 (통일)신라는 당에 사대하고 군사력 축소 / 반면 왜나라는 신생 일본국 수립이자 개혁과 부국강병 노선 실현. 이때부터 그래프선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이어짐. 당시 (통일)신라의 백제 차별은 향후 조선시대...한국시대..로 계속 이어짐. 그걸 민족성 (단점)이라 못 부를 거 없음. 아니면 지역적 성향에 불과할까? 아무튼 계속~ 그냥 계속 판박이처럼 되풀이 됨! 결국 좌하귀 망하니까 임진왜란과 한일합병 불렀고. 좌하귀 차별하니까 조선시대 정여립의 난과 동학운동, 한국 1980년 518로 이어짐. 현재 많이 좋아졌으나, 무수한 폐해와 말도 안되는 모순들은 그와 같은 사연에 기인함. (통일)신라가 영 머시기한 통일을 한 대가 때문에 식민사관도 심고...식민지배 뒤탈 극복도 힘들었고...역사학계마저 아직까지...언론계는 물론...그렇게 됨. 그후 일본은 천황이 몇 번 바뀜. 그런데 총리가 몇 명 금방 바뀌듯 왜 그랬냐? 왜냐하면 그 이유에 앞서 당나라의 행보 먼저 설명.
    다음으로 나당 연합군은 백강전투에서 대승했으나 고구려 제압한 다음 또 둘이(당나라 VS 신라) 싸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됨! 그러다 적당히 마무리된 다음 당나라 사절단은 일본을 달램. 664년 곽무종 사절단이 일본 방문, 665년 유덕고 사절단이 일본 방문. 다시 이어서 669년 당나라 곽무종은 2천명 공작대와 사절단 이끌고 일본 또 방문. 계속 머 보내고 계속 방문. 왜냐? 일본 정권의 반당 노선을 친당으로 바뀌기 위해서. 당시 신라가 처음에는 당나라와 우방이었다가 어정쩡하니 삼국통일 되어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어제의 우방이던 당나라와 싸우다가 문무왕이 싹싹 빌어서 적당히 마무리됐는데. 그래서 당나라와 신라는 척지는 사이로 바뀌고. 다시 당나라와 일본이 친해져가는 걸 보니. 결국 (통일)신라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 당시 (통일)신라 입장이 지금의 굳건한 미일동맹을 보는 것과 흡사. 아무튼 당나라가 보낸 곽무종 정치 공작대는 방일한 목적인 달래기 외에도, 부추겼는지 선동했는지 AD 672년 진신의 난에도 가담. 그럼 672년 진신의 난이란 무엇이냐? 그걸 알려면 다시 백제를 구하기 위해 백강전투로 달려가느냐 마느냐, 기로에 섰던 왜나라의 정세를 알아야 함. 바로, 
    (A) 덴지(형)  : 백제 구원군 파견 찬성 및 지휘
    (B) 덴무(동생): 백제 구원군 파견 반대
    한편 (A) 덴지 천황이 죽자 그의 아들인 고분 천황이 왕좌에 앉았는데. (B) 덴무가 자신의 조카인 고분 천황을 죽이고 자기가 천황이 됨. (형의 아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조선시대 세조의 난과 비슷). 다시 말해, 바로 이 덴무 천황은 백강전투를 비롯한 백제측 전쟁 중에 활동이 전혀 없었음. 따라서 자료를 모아보니 백제 구원군 파견의 반대파로 사료됨. 그렇게 덴무 천황 세력이 일으킨, AD 672년 진신의 난...즉 쿠데타 발생. (근데 왜 또 672년이야... 672과 뭔가 했더니...) 한편 저속한 표현으로 뻠프질이라고도 하는데. 당나라는 고구려 80% 합병이요, 나중 672년 진신의 난까지 한몫 톡톡히 배역 맡았던 셈인데. 그 결과, 
    결국 당나라는 큰그림 그리기 대성공. 반면 신라는 그저 코앞의 이익 즉 백제 병합&고구려 10%정도 취득만 성공. 게다가 자칫 잘못하다 당나라한테 몽땅 삼국이 먹힐 뻔했는데. 역사교과서와 구식탱탱묵은 역사학계는 삼국통일? 당나라는 눈엣가시였던 고구려 없애고, 고구려 땅 80~90% 취득, 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우방. 그러므로 (통일)신라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니라 이제 언제 먹히느냐 라는 위협속에 살아가게 되었음. 그게 이름하여 (통일)신라가 발생한 줄거리. 더군다나 위아래 협공당해서 멸망한 고구려. 나중 당나라가 특별 거주지로 몰아서 감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발해라는 나라로 재건함.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발해(구 고구려)는 일본에 사절단까지 꼬박꼬박 파견. 근데 당시 (통일)신라는? 긴밀한 우방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방에 죄다 적들만 남게 됨.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731년에 일본은 군선 300척 동원해서 신라 땅에 또 침략. 복수전이라 그거지. 물론 큰 성공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일본은 끈질김. 배후인지 핵심 브레인지 뭔지 백제계가 있거든. 앵글로 색슨 멋쟁이들 가운데서도 유대계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엇그제 뉴스 보니 넷플릭스랑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랑 손잡음. 그처럼. 아무튼 그 뒤 일본은 759년에 신라 침공을 위해 군선 500척 건조했고, 762년에 대대적 공격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하필 발해가 당나라와 평화 체제를 구축했으므로 칼을 거둬 들임. "너 두고 보자..." 그렇게 앙심만 더 독해지게 됨. 그게 다 당의 책봉 체제라는 우산 속으로 신라가 기어들어갔기 때문. 일단 앞서 왜의 신라 공격은 대규모만 손꼽은 것. 즉 신라는 왜(지금의 일본)을 침공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왜는 신라를 대략 32차례나 공격했음. 물론 그 앙심은 나중 임진왜란과 한일합병으로 화려한 꽃을 피움. 그 뿐만이 아니라 5세기 전후 오랫동안 심하게 백제가 일본의 전신이자 주류였는데, 나중 그걸 지금까지 아마 언제까지... 불인정. 부정. 왕짜증. 억지. 왜곡. 이걸로 봤을 때 "고구려-백제-신라"에서 하필 제일 속좁은 신라가 어떻게 어떻게 삼국통일해서. 더 속좁은 일본한테 나중 제대로 당하게 됨. 속좁은 대가는 물론 겁나도록 길게 감. 어마어마함. 무슨 뒤끝 길기 대회라도 있는지 어쩐지 (절레절레)! 어? 
    여담으로 가정법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역사학에 여담이 웬말이냐마는 말 그대로 여담이니까. 태평양 전쟁을 만약에 이겼다면, ~라면서 일본도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지 않나. 근데 그와 달리 내전이요 먼 역사인데 공상 못 할 건 또 뭔가! 말하자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신라가 어정쩡한 통일을 했는데.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만 일단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고구려 국경선이 최고 길다. 또 식량 생산으로 세 나라 가운데 최고로 불리. 게다가 고구려는 대륙쪽으로는 당나라요, 더 위쪽으로는 머머족들, 아래로는 백제와 신라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곤란. 물론 학자들 중론에 귀기울여보니 가능했을 것도 같다. 고구려가 상대했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강적들이었으니까. 즉 흉노족, 돌궐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바로 그 척박한 환경. 그래서 그 머머족들을 비롯해 중국사에 나오는 나라 단위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중원 진출을 노렸다. 왜냐,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위해서. 그래서 북방 민족들은 다 똑같이 남쪽으로 향했던 것임. 그렇듯 고구려가 만약 삼국을 통일했다면 좋았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 다음. 그 정답은 현재의 중국처럼 자치령 이름은 독립적일지언정 개별 민족과 문화와 머머족들의 자유는 매우 제한. 중국사를 통틀어 4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단 1개도 없는 이유처럼. 고구려도 얼마 못 갔을 게 뻔하다. 만약 그랬다면 한국도 지금 중국인처럼 말하고, 읽고, 살았을 테고. 중국의 변방 머머성으로 불리게 됐겠지. 듣자하니 중국사를 봤을 때 중국의 공격을 받아 사라진 나라는 1개도 없다고 한다. 의견 수렴하면 숫자 조정은 가능할 테나 대체로 양상이 그렇다. 다 중국 중원의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위해 먼저 중국을 공격했다가 지금 남아 있는 건 0. 그러면 가정법에서 남은 건 백제. 패색이 기울어져서 백강전투를 기점으로 움직일 게 아니라, 만약 선제적으로 암울한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백제가 움직였다면 어쨌을까? 답은 가능한 그림. 허나 그랬다면 (통일)신라한테 패배한 좌절감이라는 연료가 없으니, 아마 나중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하여, 가정법 없이 역사를 현명하게 바로 알면 그만. 허나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함.
    물론 재미를 전재한다고 아무 영문 없이 무턱대고 결과값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즉 앞 문단 요점은 가정법인데, 단순히 줄거리가 어땠고 근거는 무엇이며 형편이 어떠하니 고로 머머했을 것이다? ~라고만 추정치를 내놓는 게 아니라. 그렇게 똑같이 국사가 진행되어 제국주의 열강들 식민지가 된 예가 실제로 있다, 없다? 고구려가 어쨌다면...만약 백제가 통일했다면...지금의 남아메리카 가운데 그와 완벽히 똑같은 예시들 겁나 많다. 만약 고구려가... 지금의 동남아시아 각 나라들 국사를 보면 된다. 그외 세계사에서 그와 같은 예시들 차고 넘칠까 아닐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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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
    통일신라 때 내실을 다지고 장점도 많았을 테나. 역사적 연상선 그 흐름을 봤을 때. 나중 외향이 아니라 고립, 독립보다 의존, 개혁보다 쇄국을 고집하게 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일단 결과는 불운. 불행. 굴육. 바로, 분열과 차별도 그때부터 시작됨. 50~70년을 식민지 지배에 협조적이었던 변절자와 기타 등등은 나중 겁나게 호강하고. 독립운동 했던 집안은 3대가 지질이 못먹고 못살게 됨. 그 뿐만이 아니라 (통일)신라의 저주는 계속 이어짐. 그러므로 우하귀가 非우하귀, 특히 좌하귀를 무지막지하게 차별함은 물론 우하귀가 영구집권과 사회지도층 및 모든 걸 장악. 그게 무려 100년! 
    그리고 저명한 학자 의견대로라면 당시 백제는 국력을 반도와 열도로 양분한 게 결정적 패착. 그렇게 어정쩡한 (통일)신라가 이겼으니 찝찝한 승리에 취해있을 때. 백제계가 기반이 된 일본은 전국 통일에 성공. 그대로 탄력받게 됨. 반면 (통일)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 그 후 8년간을 더 싸워야 했음. 또 통일해봤자 여전히 약소국. 평소에도 외부 침입 위협에 부들부들. 팔만대장경도 고려 때던가 나중 그래서 만든 것임. 그렇게 (통일)신라는 수도인 경주도 그대로요 당나라 눈치보며 살았는데. 당나라가 손해본 게 뭐야? 별로. 아니 잭팟! 그럼 (통일)신라는? 신라는 좌하귀 제압에 이어, 핍박, 차별...결국 나중 백제를 본국으로 여기던 왜한테 복수당할 국운이 기다리고 있는데. 나중 (통일)신라가 고려로 국명이 바뀌고. 그나마 고구령 옛 땅 찾아준 것도 싸움 하지 않고, 소손녕과 담판해서였음. 속된 말로 말 몇마디 털어서! 어쨌든 백강전투 이후 신라는 당나라에 사대한 반면, 일본은 당과 별도로 중국 황제와 동등하게 '황'자 돌림이 시작됨. (통일)신라는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승리만 했지 당시 주변에서나, 지금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 반면 당시 일본은 모국 백제가 망하고, 신라한테 원정경기 가서 패배한 기억을 땔감으로 전국통일이자 향후 계속 발전. 또 그 열등감을 바탕으로 720년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도 만듬. 물론 역사서인데 이상하게 신화를 엄청나게 포함시켰고, 그걸 지금까지 사실로 미화하며, 전국민 교육이자 세뇌. 그런데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무슨 삼국통일. 괜히 백제계와 구원 반대파의 앙심을 부추겨서, 나중 임진왜란과 조선 식민지 정벌론은 물론 역사왜곡까지 기름을 끼얹게 됨. 이게 모두 백강전투의 결과로 빚어진 숙명. 
    국사교과서 보면 화랑 정신...삼국통일... 성과도 많았을 테나. 못생긴 남자의 근거 있는 자신감. 연애 잡담에서 말하는 그 근자감이 연상됨. 물론 기반 모두 파괴된 내전 후 노력해서 그나마 좋게 좋게 포장하려는 건 뭐 그렇다만. 그래도 최소한 차근차근 개선하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근데 노력은 커녕 식민지 사관대로 대충대충이거나, 새로운 학파가 옳은 소리하면 무턱대고 힘으로 눌르고 왕따돌림 시키던가. 학자가 공부를 하고 논문 쓰면서 그러는 가운데 취미생활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무슨 접대받고 공부 안하고 형님형님...마피아 놀이하는 게 학자야? (절레절레)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 상당한 구습과 폐해가 무려 100년이나 꽤 지속지니까 하는 말. 영향력 끝장. 그럼에도 학계 업계에서 개선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 때문에 그나마 행복지수가 많이 올라간 것임. 
    그렇게 663년 백강전투 다음에 57년이 흘러, 일본에서 720년 일본사기를 편찬하여 이와 같은 이야기에 사연을 담아 후세에 알림. 그게 로마제국도 보면 기원전 0년 전에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게 옹졸하게 골목대장 응애응애 삐악삐악 그러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로마제국의 후예인 이탈리아, 全유럽이 세계 90%를 소유할 동안 (통일)신라처럼 그냥 자기 동네에서(만) 놀다가 마피아를 탄생시켰음. 악명 높은 독재자 무솔리니도 왔다 갔음! 사정이 그렇게 됨. 고로 전세계에서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쓰는 나라들은 겁나게 많은 반면. (아프리카 빼고)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 있나? 없다. 없어요. 아프리카 뒷북 얘기는 넘어가자. 일본 뒷북 얘기 또 하면 분명 짜증날 테니까. 좌우지간 시야 좋은 미드필더로 피구, 지단...많았는데. 컴퓨터 세터의 볼배급이 예술적인 것처럼 바둑에서 반집승 만큼 환상적인 것도 드문데. 골목대장? 소꿉장난식으로 응애응애? 그런데 지금도 우하귀 일부인지 상당 부분인지의 사고체계는 어떠한데. 봉건주의로써 아름다운 전통을 보존하는 거야 좋은데. 무슨 사고체계가 구식탱탱묵은 게 자랑인가? 세뇌는 물론 인터넷 없던 세상 힘으로 다 되니까, 골목대장 놀이식으로 우리가 마음 먹으면 안될 게 없어요...라는 드라마 대사. 단지 영화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라. 현재 사람들 몸짓 하나 눈빛 한번만 봐도 사고체계 훤히 읽혀지는 원리. 통합했으면 사회 체계를 새롭게 개선하고, 멀리 보며 큰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왕조시대를 그대로 흉내내서 마피아랑 닮아가? 좌하귀를 차별할 게 아니라 뻔한 말로 화합하고, 드라마 교훈처럼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데. "착한 척"조차 싫고 "착하기"는 더 짜증나고. 오직 물개박수만 좋아라 하기 때문인가! 물개박수 안치면 쟤네들 핍박, (필자 군부대 파견가서 겪었던 분대장 그 냥반처럼) 야~ 쟤네들 (왕)따시켜...홍해가 갈라지듯! 아니면 무대에 오르면 끌려내려가지 않는 이상, 코흘리개 꼬마가 되어서 정신 못차리거나! 안 그런가? 친구들끼리 으쌰으쌰 놀 때나 그래야지, 대극장인지 마당극인지 구분조차 못함. 아니 오히려 잇속에 역이용. 뒤통수를 대체, 얼마나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까? 안 그런가? 밖이냐 안이냐, 원리와 이치도 모르면서, 아니 알면서 나만 특별 대우 받아야 한다 심보잖아? 안이냐 밖이냐, 원리와 이치 알면서 훤히 알면서, 나만 예외로 인정받고 싶다는 논리잖아? 왜냐하면 
    (1) 원래 그럴 수도 있고
    (2) 원래 그렇지 않은데 변해서 (변치 않을 거라 믿었는데...권력 쥐어주면 본색 드러남)
    (3) 욕심! 과욕이 문제. 1등급에 등극했는데도 불구하고 작은 정부 예찬론 펴서 더더욱..다 가지고 싶기 때문에? 
    이유는 많다. 그게 졸부 심보. 내 재산 증식을 위해서는 부자 증세는 절대 안됨. 내 행복을 위해서는 만인의 슬픔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 그걸 위해서라면 나라를 판다? 얼마든지 가능. 외국계 기업사냥꾼한테 내 권한으로 할 수 없는 것까지 하면서, 내 이익 조금 얻자고 막 다 팔아버림. 작은 정부도 딴 게 아님. 물론 부자들이 뭔 걱정! 그러니 권리만 남고 의무는 없어. 그러니까 아무리,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을 몰라. 응? 도대체 얼마를 더 가져야 성이 차는데! 어쨌든 남들은 천리안으로 저 멀리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는데. 타인은 선명한 행복을 논하며 밝은 내일로 전진하면서 치밀한 작전을 실행시키는데. 응애응애 삐악삐악 노란 깃발 꼽았다 나 잘났다? 파란 깃발 그거 솜사탕이라 바꾸자! 거 생각 좀 합시다 생각 좀! 네? 이게 뭡니까? 네? 거 굳이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거... 됐다. 말 너무 많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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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 / 통일신라 2]
    주제가 자꾸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데 흥분을 가라앉히고 논점을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일례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의 학설에 따르자면,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505년까지 100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봄. 곧 고대사로 보건대 약 150년 식민지 지배냐 약 400~500년 동안 백제의 양국 운영이냐로 나뉘는데. 앞서 소상히 밝혔음에도 재차 반복하자면. 삼국 및 당나라와 왜까지 근방 모두가 참여한 몇 십년 전쟁, 그 가운데 663년 백강전투로 말미암아. 일본은 나중 180도 거꾸로 역사왜곡을 일찍부터 시작하게 된 것. 즉 시작은 일본서기를 필두로 하여 무려 지금까지 양국에서 명맥이 이어져온 실정. 명맥 정도가 아니라...통과. 물론 일본도 최초 역사서가, 한국도 최초 역사서가 모두 심하게 편향적으로 시작. 초기 설정만 그랬으면 모르는데 문제는 그게 지금까지 일관되도록 이어져온다는 점!
    A)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 물론 많은 사실 포함이자 배경 기반/문제는 이때부터 역사왜곡
    B) 1592년 임진왜란: 목적은 500년 전후 일본의 본국(한국)을 정벌 / 한자 전파한 중국을 정복 / 약탈-야만성
    C) 1900년 전후 한일합방: 침략 정당화를 위해 없던 역사를 만듬 / 그게 지금까지 발전했고 변화 미비
    D) 1950년~지금까지: 학문 개선 약함/초기 설정도 심각 (전쟁 전후 차이 없던 사회지도층과 기반 때문)
    그래서 500년 전후 당시 왜나라의(현 일본)의 본국(한국)을, 역으로, 왜나라가 그 근방을 지배했다! ~라는 게 바로 임나일본부설. 그 180도 거꾸로 머머설은 우기다가...우기다가...왕릉 발굴 금지이자 그 모든 것으로 이어짐. 1000년경 노르망디가 영국과 프랑스등 서유럽을 지배한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영국이 노르망디 등등을 지배했다? 그게 임나일본부설. 로마제국이 유럽과 잉글랜드&웨일스를 식민지 운영했는데. 그게 아니라 잉글랜드&웨일스가 반대로 로마제국을 지배했다? 그게 바로 임나일본부설. 차마 얼굴 못 들 사실들 부지기수. 그런데 부끄러움을 당최 모름. 오히려 역으로 짜증냄!
    예를 들어 영국 왕조 역사를 논하자면 영국왕들 가운데 자국 언어를 쓰지 않고, 프랑스어만 고집하고 프랑스말만 사용하고 죽을 때조차 모국 프랑스에서 영면한 영국왕들. 있을까, 없을까? 겁나게 많음. 영국왕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현직 왕인데 외국 프랑스에서 살며 원격으로 편지를 사용해서 자국 정치하며, 섬나라가 아니라 유럽 귀족들과 친교를 살찌웠던 영국왕들. 그래도 그분들은 역사를 바로 알고, 거꾸로 사기치지 않았으니까 괜찮음. 그게 바로 역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죄다 불인정, 둘째 역으로 (방송용어로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어쩐다...말 들어주면 안된다..징징거림 받아주면 안된다..등등), 셋째 불리한 건 싹 다 감춤이자 유리한 거만 빡빡 우김. 아시아 발전과 평화를 앞당겼다 등등. 그게 바로 일본정신이자 의무, 의리, 노민폐, 원시부족 문화. 
    그리고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 원시부족 습성도 상당수 여전한 게 뭐냐? 통일 전 신라, (통일)신라는 삼국통일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대라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2/3를 우크라이나한테 헌납하자마자 우리 스웨덴이 위대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라면서 자평할 수 있을까? 낯짝이란 낱말을 모르지 않는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2/3를 러시아한테 강탈당한 게 아니라 러시아 명령대로 순순히 고분고분 따랐을 뿐인데, 당장 우리가 삼국통일 자화자찬? 사람이 금수가 아닌데, 자존심이라는 단어한테 미안해져서야 쓰나. 자존심 상하게 그게 어떻게 자랑할 일인가? 못하지. 그래서 정상이라면 안해. 응? 하기 싫다고. 왜냐하면 정신나가지 않는 이상 해서는 안되니까. 
    그런데 식민지배 받고 독립군은 가난이요 반대로 변절자와 간신배가 오래도록 득세했기 때문에, 삼국통일? 통일의 뜻이 뭔데. 삼국사기를 봐도 661년 6월 국상 중이던 신라한테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 참여"를 명령했다. 원래 국상 중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 법! 나라의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아무리 대하드라마라도 예법이라는 게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 무열왕이 사망한 직후인데 저속한 표현대로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물론 당시 태종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이 당나라에 체류중이었고, 고려 왕들 일부도 몽고와 혼맥 맺어져 몽고계일 뿐만 아니라 고려왕인데도 불구하고 인접국에서 편지로 정치했던 역사 있음. 공로도 있었겠으나 봉건제 구시대성 감안하면 역사라는 게 그렇다. 또 당시 중국 황제 즉위식 때 사신을 파견했는데, 3번 무릎 꿇고 9번 절하는 공식 예법을 따르지 않음. 참여한 타국 외교관들 벙찌고, 중국 황제 웃고. 왜냐 물으니까 어쩌고저쩌고! 아예 불참하면 될 걸 뭐 하러 즉위식에 참여해서 찬물을 끼얹어? 제발 쳐들어와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멜로드라마가 애용하는 속칭 엿 먹이는 건가? 새롭게 왕좌에 앉은 황제 체면은 뭐가 되고! 그게 바로 구시대성. 정치를 모르니까. 고지식한 구시대성이란 게 그러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즉위한 중국황제가 약소국 외교관한테 따지겠나 화내겠나. 그냥 조용히 웃으면서 대인배처럼 보물과 선물과 편지 챙겨서 사신을 보냄. 그렇게 당시 기준으로 자존심 챙겨서 사신 역할 톡톡히 하고 왔는데, 또 고생하고 돌아왔더니 칙서를 받자마자 찢어버리지 않았다고 그 사신들을 유배 보냄. (목숨 걸고 완고한 범생이& 꽉 막힌 봉건주의 의중에 딱 알맞도록 평타를 치고 왔는데. 그런데 결과는 귀양. 칙서 받자마자 확 찢어버려야 마땅했다? 만약 그랬으면! 사극이 이래서 재밌음. 코메디 저리 가라!) 그게 바로 구시대성 기준. 그게 여전한 게 뭐다? 대표적인 예로 역사를 거꾸로 우기고, 가짜로 꾸미며, 막 왜곡하기. 660년경 신라의 김유신이 말하기로 "당나라는 주인, 신라는 개"라고도 비유했는데. 막 주인을 따르다가 개 다리를 밟으면 물고 어쩌고 기록은 많고도 많음. 그래서 창피함을 아니까, 신라인은 야만인이 절대로 아니니까 삼국통일을 결코 말하지 않은 것임. 김유신 왈, 고구려는 삼한이 아니다! 만약 신라가 통일이 자랑스러웠다면 통일 군주로 당연히 문무왕을 칭송해야 했음.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안 함. 그래서 삼국통일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삼한 통일이라 부르고 태종 무열왕을 칭송. 
    그런데 대충 1500년 지나고 보니 큰 선심 써서 세계전쟁 종전해준 것처럼 평화주의자인 척하고, 큰 업적을 달성한 것처럼 삼국통일...절레절레. 문무왕이 뭐라고 읍소했는데? 풀어보면 "백제 땅만 주세요." 더군다나 문무왕이 671년 당나라 설인귀에게 보낸 글에서 "당태종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며 국경선 협상 내력은 명명백백. 하여 당시에는 삼국통일은 운운조차 할 수 없고 하지 않아야 하는 게 마땅했는데. 이상하게 문무왕은 임종시 유언에서는 자기 업적이 삼국통일과 다름없다는 유언을 남김. 더불어 672년 당나라 고종 황제에게 보낸 표문에서 문무왕은 '모든 잘못은 백제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라는 태도까지 기록으로 다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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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구습을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습 → 전통으로 계승 (바뀜없이 온전히 보존 등등)
    둘째, 구습 → 차근차근 개선 (보수와 진보는 어디까지나 이 부분)
    셋째, 구습 → 악습. 나중 알고나면 상욕 얻어먹을 수 있음 (이 셋째는 절대로 보수가 아님)
    바로 이 셋째 때문에 칼럼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것임. 시간표를 통째로 퇴보랄지 100년 그대로 별로 변한 게 없다랄지. 물론 첫째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뀌는 게 거의 없어야 잘했다 라는 평가가 가능한데. 그게 아니라 셋째는 바껴야 하는데 통 변화가 없어. 가령 1970~1980년에 경찰 수사를 어떻게 했나? (개개인 노력자들도 많고, 초심은 좋았는데 관례와 문화에 못 이겨 그저그렇게 적응하는 예시들 평균을 내어보니) 무전유죄 유전무죄.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했나. 여지없이 역사학계 고고학계까지 정확히~ 비례했다는 점. 그래서 국립박물관장과 명문대 교수들...핵심 권위자들이 몇 있을 테고. 그 최고 수장이 꽉 막힌 사람이라면, 그 학계는 그 냥반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못했음. 그 꽉 막힌 냥반이 죽기만 기다리는 거 말고 방법이 없었기 때문. 단순히 학계에서 비주류 평가만 받으면 그나마 다행. 따돌림이 아니라 왕가 족보 캐면 협박, 위협, 불이익, 고문...등등. 어른들 말씀 들어보시라. 1960~1970년대가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냐? 그 원리 누가 모를까. 고고학계 역시나 1980년에 탄소 연대측정이 어딨어, 문화재 발굴해도 대장이 그냥 대충 때려짐작해서 대충 200~500년 쯤이라고 확정. 그래서 숱하디 숱하게 막 300년 손해봄. 그 고지식한 대장이 죽기를 기다리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음. 탄소연대측정? 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캐내다 그냥 묻어버림. 금관, 토기, 보석, 옥말... 대충 때려짐작해서 얼마로 해! ~라고 명령. 탄소연대측정? 심증으로 확정. 질문 안 받음. 기자들 말 안들으면 사장한테 전화 1통이면 끝. 발로 뛰고 땀흘리는 노력파,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직위 해제. 지금이야 매스컴 있고 인터넷 활발하니까, 서구사회처럼 1주일 안에 발표하고 떳떳히 언론 공개. 근데 옛날에도? 옛날에 국립미술관은 물론 유명미술관 고대 박물들은 단 1번도 과학적 측정 같은 거 없었음. 탄소연대 측정 지금이나 되니까 드라마 보고 알게 됨. 왕릉에서 뭐가 많이 나온다고? 골치아프게 생겼네... 야, 덮어! 뭐 해 말 듣지 않고. 어? 이러니 유럽 도시들은 문화재가 나오면 환영하며 적극 협조하는데, 집값 영향받는다 변명하고 어쩌고. 그러다 초심은 일찍부터 있지도 않고, 관례 이상해지고, 고로 역으로 관현악단원들이 애초에 고분고분한 지휘자만 반김. 악장마저 찬조금 잘 걷는 인물만 유력. 
   (일례로 최근 사건도 공개적으로, 합당하도록, 성과 있다 없다 무리하다 유익했다 결론내면 그만인데. 주류 학계 수장이 죽기를 기다려야 관례를 눈꼽만큼이나마 개선 가능한 예시는 다음과 같음)
   <2005년 11월 강동구와 하남시 사이에 거대한 전방후원분 10여기 발견 → 기존 학설을 180도 엎는 대이변...만약 드러나면 100년 동안 날조한 전과가 명백히 드러나는데... 당신 그럴려고 사학자가 되었소? ~라는 자문이 무색할 일 → 2005년 발견마저 비주류가 10년간 노력한 성과 → 기존학계와 문화재청은 덥기에 급급. 계속 무시 → 확증만 짙어감 → 황산고분(770m)과 민둥산고분(680m) 발굴을 땅값 하락과 100년 무변화가 탈로날까 봐 긴급 파괴 → 2012년 4월 12일 문화재청, 2013년 5월 11일 청와대에 민원 제기 → 무성의한 답변만 → 은폐, 조작, 뇌물, 언론 통제... → 학계 고발과 동시에, 학계와 문화재청은 동시에 몰래 파괴 시작 → 검찰 고발 → 공방 2년 중단 → 2015년에 야금야금 슬슬 파괴 재개 (평생 연구하고 인생을 바친 업적이 모두 헛것임을 덮는 게 중요할까, 그건 내가 틀렸소 당신이 옳소 라는 합당함이 중요할까.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예가 한두 개여야 말이지. 너 그럴려고 머머됐냐? 식민사관 정말 뿌리깊음 → 결국 나중 흐지부지 → 그런 일이 있었는지 결과는 어땠는지도 모름. 만약 무리한 추정이었다 라면 딱 마무리하면 그만인데. 그냥 흐지부지. 아니면 대충대충. 그러니 돈봉투면 다 되던 시절이 불과 언제였지. 이래서 독립군 운동 후손은 3대가 지지리 가난하게 산다 라는 말이 나오지>
    설령 저런 의혹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물증이 부족할지언정 적어도 시간은 우리편 아닌가! 그런데 합리적인 검토와 타당한 과정 없이 언제적 방식으로? 스포츠를 봐 보자! 야구계에 타율 7~8할 타자들이 평균인가? 아니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봉건제 관례의 입맛에 맞춰줄 순 없는 일. 1달 평균 100개, 1년이면 1200개를 검토하여 어떻게 하고 무엇을 참고한다 등등. 그게 아니라 100년 전에 완성한 학설에 어긋나는 학파는 입도 뻥끗 해서는 안된다니. 설마, 그걸 혹시 보수로 알고 있을까? 언제부터 보수가 그렇게 건강했을까. 이러니 진보는 꿈도 못 꾸지. 안 그런가? 나중 불합리한 추측으로 판명날지언정 중간에 훌륭한 건의로써 배우고, 집단지성을 행복하게 살찌워야 마땅한데. 언제적 사관의 틀에 어긋나는 의견은 꺼내서도 생각해서도 안되는 법이라도 있냔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법이 없지만, 마치 정말로 있는 것처럼 돌아가는 세상. 정말 신기하지 않나? 뒤를 돌아보자. 대략 20~30년 전이 과연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었나. 멀리까지 보지도 말고 딱 10년만 시간표를 돌려보잔 말이다. 그런가, 안그런가? 이게 뭡니까, 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거 참... (절레절레) 그러니 후발주자권 학생들이 유학가서 수업을 하면 통 질문을 안해. 그냥 로보트처럼 카만히 차리엿. 주입식 교육도 장점이 굉장히 많을 텐데, 이처럼 꽉 막힌 관례가 바지끄댕이 잡고서 멜로드라마를 더럽게 만드는 것만 같다. 물론 차근차근 점차점차 각계각층 노력하며 좋아진다마는. 유독 뒤떨어지는 분야 없지 않으니 하는 말. 여러분~ 제 말이 틀립니까? 말도 안됩니까? 이게 뭡니까, 네? 워 워 워. 
    초기 설정이 잘못된 사회지도층과 역사학계가 옛날에, 잘못된 초기 설정에서 벗어나는 게 더뎠던 이유. 앞서 말했듯 훨씬 고대로 올라가서 1500년 전부터 꼬였기 때문에, 그게 계속 이어져서 150년 전에도 또 100년 전부터도 잘못 설정해서 출발을 했으므로 역사학 발전이 더뎠던 것임. 말하자면 백제계가 바다 건너가서 나중 제대로 복수해주니까, 그걸 다 아니까 더더욱 신라를 과장. 그걸 절대로 모르지 않으니까 학계와 사회지도층에서 시대적으로 100년 내내 신라가 삼국시대에 성장하게 된 계기를 깎아내렸던 것임. 즉 당시 한국은 삼국시대가 주로 부각되는데 그게 아니라 기마민족인 부여를 비롯해 500년 이전에 여러 부족들이 존재. 즉 고구려-백제-신라는 국가라는 체계라는 성과에 더 집중했다면, 반면 기마민족인 부여 등등은 실권과 세력확장에 더 몰입했기 때문으로 볼 여지도 있다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님. 고고학으로 발굴해낸 기록은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 그러므로 그 기마민족이 일본까지 건너가서 집권했던 것으로 추정. 물론 그 기마민족 부여의 원류는 당연히 몽고. 신라는 562년 대가야를 병합한 뒤에 비로소 어정쩡한 (통일)신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 것임. 근데 학계에서 그 부분은 최소화. 또 과학이 만약에 매우 더디게 발전했거나 거의 평행선이었다면 당연히 몽고계 기마족들 중국 북부 막 머머족들이 더 강세를 오래도록 유지했을 것임. 허나 나머지 지식은 아시다시피. 
    그런데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통 듣지를 않음. 알면서도 모른 척! 아니, 오히려 거꾸로 머머설, 어? 묘비명과 사적지와 역사서...엑셀파일 목록 1천개 1만개 1억개 1조개...를 검토해보면 답은 뻔히 나오는데. 100년 동안 대체 뭐가 바꼈지? 얼마나 역사계는 발전했을까. 개선되긴 했다만... 도대체 누가 바지끄댕이 잡고서 차근차근 전진하려는 젊음의 행진을 막는건지. 점차점차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게 보수의 역할인데. 어떻게 된 게 150년 전 시대로 돌아가려는 건가? 제발 그러고 싶어서? 정 원한다면! 미술사학계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해주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학자 에른스트 H.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서양 미술)는 모두 그리스인의 제자"라고. 그런데 어떻게 노르만, 게르만, 앵글로색슨, 슬라브, 유대계, 켄트, 바이킹족...이 반대로. 응? 거꾸로 그분들이 그리스로마 신화도 만들고,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문명을 일깨워주며 식민지배했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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