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학 2

from 칼럼 2021. 7. 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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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 등장 계기]
    뜬금없이 섬나라가 로마제국을 지배했다, 그리스-로마신화는 EU(유럽연합) 비회원국이 심어준 것이다. ~라는 헛소리가 왜 뜬금없이 튀어나왔냐. 그에 대해 앞에서 또 다른 칼럼에서 사고체계 때문이라고 누누이 밝혔는데. 그래도 더 자세한 근거를 조목조목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 유무와 엑셀파일 목록에 넣고 빼고는 차후 미래의 숙제로 남기는 걸로 하고. 참고로 한중일 일본 최고(最古) 역사서에 대해서.
    일본 최고(最古) 역사서: 712년 고사기     / 720년 일본서기
    한국 최고(最古) 역사서: 414년 광개토대왕릉비* / 1145년 삼국사기 / 1281년 삼국유사 
    중국 최고(最古) 역사서 : BC 500년경 서경(상서尙書) - 작가는 공자(BC551~479) / **
    * 한국 역사서 가운데 "백제기"가 있었다고 일본서기에서는 나와 있음. 일본서기 내에서 그 백제기를 인용했다고 인정. 즉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서기의 편저자들은 백제기를 많이 인용했다는 뜻. 백제기는 600년 전후에 씌여졌을 것으로 추정. 더불어 일본서기가 백제인과 신라인에 의해 씌여졌다는 증거는 역사학계에서 부정할 수 없도록 내용 즐비. 즉 일본서기의 저자는 순수한 백제인 주류와 일부 비백제계.
    * 1938년 6월 발행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따르자면 1910년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은 51종 20여만 권. 1923년~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조선 역사 사료가 무려 4,950종. 그 두 기간 빼고 나머지는 집계에서 제외. 그 두 기간만 해도 한국-중국-일본 일대에 분포한 한국 역사서를 닥치는 대로 수거해 불태움. 그 외 고문서와 지도와 고기록류 들을 포함하면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따져도) 10만 ~ 100만 종 자료를 불태웠음. 그럼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 모두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자료로만 감안했을 때, 그것만 가지고도 본 칼럼은 여실히 증명됨. 물론 불태운 자료가 100만점이면 당연히 해외 반출 자료 역시나 100만 1000만 점이라고 보면 됨.
    ** 그외 기원전후 자료 즐비. 그건 뭘 뜻하냐? 첫째 전성기, 둘째 나중 거짓말을 할 래야 할 수가 없음. 금수가 아닌 이상! 

    * 광개토대왕릉비: 청의 봉금제도가 1880년대에 해제된 뒤에야 광개토왕릉비를 비로소 발견.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짐. 그외 최고(最古)를 제외한 비최고 역사서는 숱하게 많은데. 거기다가 각종 비석, 문화재, 유적지 자료들을 합산하면 엑셀파일은 방대해짐. 더더군다나 일본왕실서고에 비공개로 숨긴 한국 역사서만 해도 상당함. 물론 일본궁내청도서관 비공개 자료 외에도 일본과 세계에 흩어진 한국역사서를 추산보면? 집단지성만 모아봐도 임나일본부설 같은 거짓말은 할 래야 할 수가 없음. 인간은 달에 가지 않았다... 천문학은 가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천동설이 진짜다...라는 말과 똑같음. 여전히 100~150년 나치 독일시대와 동일한 게 바로 일본. 평화니 과거 반성이니 그런 말 모조리 다 뻥. 개 뻥.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 완성. 총 1,802자 중 260여자가 판독 불가 → 이걸 빌미로 침략 정당성을 부여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만듬 → 비문 내용 삭제/변조/왜곡/창작. 학계 연구부족과 당시 어법에 관한 자료도 부족. 이래서 필자 조카 이름이 서경으로 지어진 것이구만. 필자가 친구랑 아르바이트했던 호프집, 그 호프집 이름이 WAVE. 거기서 V 빼면 왜(wae)! 천하의 악마들이 바로 걔네들이었어. 일본서기에 따르면 10대 왕 수진(崇神). 본 이름은 '하쯔구니 시라수 수메라 미고도' → 가야-드라비다어의 어원으로 뜻은: 첫 나라를 열어 통치하신 국왕 → 일본 역사책에도 '미마기 수메라 미고도'로 쓰여 있음 → 해석하면: 가야의 김해성의 왕이었던 하늘의 아들. 물론 수진은...필자가 괜히 대타로 소개팅 나갔다가...통과. 
    뿐만 아니라 동경대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저서 '기마민족국가'에서 이렇게 주장. "왜의 출발점은 가야국 '임나가라'였으며 그곳에서 수진(숭신)을 주역으로 한 외래민족인 천신들이 한반도에서 북구주로 진출하여점령한 가야인이 '미마기 수메라 미고도'였다". 이 발음 수진은 앞서 말했고, 숭신 발음도... 통과. 역사학자들 연구 결과도 똑같음. 3세기말~4세기초 실존 인물로 수진 5년에 수진이 '야마도'로 와서 이미 이주한 신라계 '이즈모'의 기성세력과 충돌...먼저 외지인으로 터잡고 산 신라계와 상호간 알력 해소 및 화해. 반면 학자에 따라 왜의 출발점은 수진(숭신)이 아니고 백제계 16대 인덕왕으로 보기도 함. 곧 백제유민은 2세기 구주 휴가에 침입 → 구야국(國) 창건 → (열도 전체에 부족 많은 상황에서) 구야국은 점점 커짐 → 결국 구야국은 히미코 여왕국을 멸망시켜 구주를 통일 → 구야국의 왕인 응신이 5세기초 난파(오사카)로 들어갔으며 → 16대 인덕왕이 대화(나라) 야마토에 들어가 기마민족 출신자들과 통일국가를 건설. ~라는 게 일부 학파의 주장. (다만 일본 인덕왕릉의 무덤형태가 한국 전라도에서 발견되니, 고로 일본이 한국을 당시에 지배했다...그게 임나일본부설임. 그건 백제 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새긴 백제 정벌비만 봐도 뻔함. 그런 예는 한마디로 엑셀파일. 손바닥을 태양을 가리는 일. 곧 누워서 침 뱉기에 불과)
    다음으로 고대 왜(倭)의 발음이 야마도, '왜'나 '야마도'는 고대 한반도 남쪽 국가명인 가야(伽倻)의 이름. 그러다 562년에 대가야를 마지막 신라에 병합되자, 멸망한 가야는 왜로 진출(물론 이미 전성기 때부터 진출). 즉 본국 가야(伽倻)의 별칭 '왜'가 가야 멸망과 함께 본격적으로 열도의 나라명이 됨. 그 뿐만이 아니라 백제 역시나 국력을 총동원할 정도의 역사였던 "백강전투" 때 결과를 보듯. 全일본을 좌지우지하다 결국 40대 진무 천황이 조카였던 39대 고분 천황을 죽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건 싹 다 감춤...이 아니라, 역으로 짜잔~ 임나일본부설! 
    또 712년 고사기에 따르자면 <천황은 또한, 백제국에 "백제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명령한 것처럼 나와있는데. 신라에 패망한 백제를 모국이자 본국으로 아는 문화권에서. 왜 하필 자국 국사가 아니라 외국 역사에 집착했냐. 당연히 그 까닭 때문에 과장과 역술이 섞였는데. 실제는 왜왕 응신의 요청으로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임. 즉 백제 14대 근구수왕(서기375~384)때 32살이던 왕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문명 전파. 당시 왕인은 왜나라 태자의 스승이 됨. ← 물론 이건 일본서기 해석에 의한 추정이고. 실제로는... 흐름에서 벗어나니까 다음 문단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걸로.
    고대사 비교언어학으로 따져도 사실뿐. 왜나라 발음은 가야어와 드라비다어로 '거북'을 뜻함 → 고대 가야시대를 상귀국(上龜國)이라 부르며 '거북의 나라'란 뜻을 가졌던 것에서 유래 → ...... → 3세기 고대일본에 있었다는 히미꼬 여왕의 후계자인 '이요'를 ...로 표기 → 야마이는 거북의 나라였던 가야. → '칸나다'어에서 거북을 아베(ave)라 했는데. 이 'ave'가 전와되어 'wae'인 倭가 됨. 정리하면 ave → awe → oe → we(wae). 다시 말해 가야도 일본으로, 백제도 일본으로! 그냥 모국도 아니고 본국 정도가 아님. 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음. 결과는 개새끼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 새끼. 맹수들한테 산닭을 제물로 주어 야성을 잃지 말라면서 문명 전파한 결과가 결국 역사 이래, 한국인 1,200만명을 사살. 한국인 제외하면 800만명에서 5,000만명 사상?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만 봐도 야비하기가 이를 데 없음. 그런데 창피함을 몰라! 거꾸로 떼씀. 유럽인 4,000만명을 살해한 독일은 규칙적으로 사과와 사죄하며 보상-배상, 또 분쟁지역 영토를 폴란드와 프랑스에 조건없이 양보. 근데 내 땅은 내 꺼 늬 꺼도 내 꺼? 사고체계 분석하면 세계평화 다 뻥. 건국 신화까지 단군신화와 가야 근방 신화들을 죄다 베껴쓰고 응용. 일본 신도랑 똑같구만. 경도대학 사학과 교수 상전정소씨도 옛날에 지적했음. 거의 모든 게 이런 식. 일본 신화에 대해 재차 말하지만, 그건 절대로 독자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게 왜냐?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강림 신화는 원래 북방계(기마유족민)의 고유한 특징이기 때문. 한국에서도 특히 신라가 일본과 비슷한 점은 바로, 난생신화와 천손강림이 섞여있다는 점. 즉 이들이 남방계와 북방계 민족이 융합된 집단이었음을 뜻함. 
    다음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듯 15대 응신왕이 270~310년까지 재위하였다는 기록도 거짓. 왜냐하면 백제 13대 근초고왕(또는 백제 20대 비유왕)이 백제 후왕인 백제인 야마도 왕 응신에게 하사한 칠지도 칼(74.9cm), 거기 명시된 금석문에 나온 내용 때문. "태화4년(429년) 5월 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에게 주노라(칼 앞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세자(나중 개로왕, 455~475년)는 성스러운 말로써 왜왕을 위해 만들었도다. 후세에 까지 잘 전하라(칼 뒷면)". 그럼 칠지도도 공개, 비공개? 당연히 비공개. 물론 초기에는 공개되어 고의로 깎아낸 자취도 고고학자들한테 다 들킴. 고의로 훼손한 장본인은 이소노카미 신궁의 총책임자였던 궁사 스가 마사토모(1824~1897). 이래서 비공개 자료가 쑤두룩. 이건 뭘 뜻하냐? 실제 왜 역사의 시작은 위례성 백제왕 응신(백제 곤지왕)이 야마토 왜를 열도에 건국한 270년이 아니고, 곤지가 왜에 건너간 5세기부터 시작된 것! 그러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서기 670년경부터, '천황'이라는 칭호도 668년부터 사용하기 시작. 이와 같은 사실과 또 날조와 거짓과 뻥을 일본 전문가들은 죄다 알고 있음. 전부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음. 단, 그걸 말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의 운명이요, 직과 명을 걸고서 말하는 극소수도 있긴 있다는 거. 
    이걸로 봤을 때 15대 응신왕 재위기록부터 거짓이란 말인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조하게 됨. 즉 일본측에서는 응신왕의 망명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앞서(또는 왕국 국왕 겸업, 백제가 양국 동시 운영) 신공황후가 세운 야마타이국이 멸망하는 년도(AD 269년)에 연결시켰고, 그래서 응신을 신공황후의 아들로 편입시켰고(실제로는 남매지간으로 추정). AD 270년에 일본에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역사를 왜곡. 각각 연도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서기 외 수많은 자료들과 병합하여 검토해보면 자명해짐. 다시 말해서 실제 응신 원년(AD 390년)보다 120년 앞선 인물로 조작함으로써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여 왜열도로 도망간 사실을 감추려 함. 참고로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를 견주어 특정 연도가 1년 차이가 발생할 때, 고고학계에서는 비문을 신뢰하는 게 관례. 더더군다나 왕릉 비문이라 함은 곧 왕의 공적을 찬양하는 게 목적.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비문을 얼토당토 않토록 태평양 섬나라 '공적'을 주로 받들기 위한 목적이다? 말도 안됨. 동네 꼬마들도 그런 장난은 않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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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인 박사] 
   왕인(王仁, ? ~ ?)은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백제(百濟)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학자로서, 왜국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전해지는데. 일본서기에 나오기로 "...... 아직기에게 뛰어난 학자에 대해 묻자 왕인을 추천했다." 라는 구절에 따르자면 아직기와 왕인이 동시대 인물인가?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오직 사실만 기록했다면 동시대 인물이 맞겠으나. 그러나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소설이기 때문에, 따라서 아직기와 왕인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고 학계는 말한다. 아무리 오래된 옛날일지언정 집단지성도 우리 편이고, 고고학은 거짓말을 할 수 없고, 거기에 언어학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므로. 고로 필자 같은 아마추어도 역사학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지 않나! 뭐가 사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문제는 완전된 허구가 너무 많다는 점.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왕인 박사가 위인전에도 나오고 누구나 알도록 유명해졌을까? 왜냐하면 그게 다 (150년 전 치밀히 설계되고 시작된) 식민지 정책이었기 때문!
    다음으로 일본서기는 왜 왕인이라는 인물을 창작해냈을까?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 일단 일본서기에서 15대 응신왕이 270~310년까지 재위했다고 가짜로 설정했으므로, 응신 원년(AD 390년 또는 405년)이라는 사실을 기록하면 안되기 때문에, 고로 왕인이라는 조연을 만들어냄. 즉 전혀 엉뚱한 배역이 나타남. 그렇게 근구수왕=쇼토쿠 태자, 응신=왕인... 꼬고 꼬고 꼬고... 그렇게 뭐가 사실인지 모르도록 뒤죽박죽되고 오히려 거꾸로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하게 됨. 그런 와중에 역사학자 김영달이 일본에서, 왕인이 일본서기에서 조연이요 전혀 사실무근인 허구라고 밝히자. 김영달은 2000년 5월 8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泥岐市]의 자택에서 살해당함. 즉 일본계 사학자는 파면, 벌금, 미행, 감금...에 그치는 반면 한국계 사학자는 또 다른 양상. 김영달 사학자는 전라남도 영암군에 만들어진 왕인 탄생지 조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음. 또 하나 첨언하자면 필자가 태어난 곳, 바로 옆동네가 왕인박사 유적지임. (손차양) 불과 승용차로 5분 10분, 아니 산책삼아 걸어서 얼마! 다음으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 역사적 배경
    전제부터 말하자면 당시 백제는 백제&왜나라 그렇게 양국을 운영. (이게 사실인데 일본에서 이거 말하면 왕따돌림. 역사적으로 솔직하면 그냥 죽었음. 성씨 없던 대부분 일본 전국민, 그래도 1800년대에 봉기와 반란이 많았음. 백제&왜나라 양국 운영? 다른 칼럼 참조) 또 서기 300년대에 백제는 온조계파와 비류계파 등 왕권다툼 파벌이 나뉘던 실정. (침류왕만 봐도 엄마와 왕비가 모두 진眞씨)
    (A) 온조계파: 백제 13대 근초고왕/14대 근수구왕/15대 침류왕/침류왕의 아들 아신태자
    (B) 비류계파: 백제 12대 계왕     /계왕의 아들 진정(眞淨)      /진정의 아들 응신! 
    현왕 근초고왕을 비롯해 온조계파한테 밀려서 비류계파인 진정&응신은 한반도 남부로 밀림 → 그렇게 진정은 가야왕이 됐고, 응신은 現전라남도 영암지역에서 담로왕이 됨 → 이때 (A) 온조계파에서 근구수 태자가(왕좌에 오르기 이전) 남부에 정착한 (B) 진정&응신을 추적하고 위협 → 그에 쫒겨 369년에 진정&응신은 바다 건너 왜나라로 도주
    * 당시 배경: 온조계 VS 비류계 다툼은 왜나라 왜열도 담로섬(현 아와지 섬)과 난파(현 오사카)를 사이에 두고 수년간 승패없이 공방전을 치르던 시기
     → ...치열하던 공방전 가운데 분투하던 15대 침류왕을 구하기 위해, 백제에서 아신태자는 17,000명 병력을 이끌고 담로섬까지 건너감 (이걸 일본서기에서는 은유적으로 아직기...등 관련 내용으로 변조) → 그 후 어떻게 어떻게... 백제15대 침류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아신태자가 왕위에 올라야 하나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가 16대 왕좌에 오름(침류왕 친동생인가 이복동생인가 그럼) → 그에 분노해 AD 390년 담로섬&난파 일대에 있던 아신태자와 응신은 결탁 → 일본에 있던 응신은 군대를 이끌로 다시 한반도로 진출 → 그렇게 응신을 한반도로 불러들여서, 결국 아신태자는 숙부(또는 작은아버지)인 16대 왕을 죽이고 백제 17대 왕이 됨 → 그러다 백제 17대 아신왕은 고구려를 공략하다가 광개토태왕에게 연패당하고, 함께 참전했던 응신은 AD 396년 결국 일본으로 또 도주 → 그렇게 일본 나라 지역에 강원궁을 짓고 AD 405년 경 야마토 왜국(大和倭)을 세우는데. 그 시기가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건네준 시기와 일치. 
    이와 같은 사실 + 일본서기에서 그려낸 허구 = 왕인이라는 비사실적 배역이 새롭게 등장? 일단 응신만 봐도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정신없음! 자, 보자. 응신은 처음에는 백제 본진에 있었는데 한반도 남부로 밀려내려갔다가 → 왜나라로(일본으로) 건너갔다가 → 다시 백제로(한국으로) 복귀했다가 → 광개토왕한테 연패당해서 다시 왜나라로(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토 왜국 건립! ↘↗↘↗. 천황가 족보는 그렇게 시작됨.
    곧 천황가 성씨는 (매우 중요) 계보가 명확해짐. 다음 화살표는 편의상 표시한 거고 그보다 자동차 산업 주식보유 거미줄처럼 정리가 필요. 또 중국의 사서인 수서, 신당서, 북사, 통전 등에 나오듯이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곧 백제 7대 귀족 성씨가 천황가의 기원. 후지와라, 미나모토는 다 나중...묻어간 성씨들. 다시 말해 백제 대성팔족은 중국 성씨 조상이 일부 망명, 이주, 이민도 했을 테고 또 성씨만 부여받았을 테나. 일본은 백제인들이 전부 다 천황가에 그대로 상류를 차지했다는 점.
    진씨 → 부여씨 → 사택(沙宅)씨 ......소가, 후지와라, 미나모토, 아시카가, 도쿠가와...!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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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인 실제/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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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00년 ~ 현재      실존인물
일본 700년 ~ 1870년    허구인물
일본 1870년~1945년    실존인물
일본 1945년 이후         허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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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일본에서 갑자기 왕인에 대한 학식이 정반대로 바꼈을까? 왜냐하면 이용가치가 없어졌기 때문. 허구였다가, 다시 실존인으로 바꿨다가, 다시 허구로 원위치! ↘↗↘. 한국에서 왕인을 실존인물로 알도록 조장하고 뒤에서 조정한 게 바로 총독부. 곧 어디까지나, 천황폐하 만세 → 황은(皇恩) → 황민(皇民) 이라는 가치 사슬을 위해서 그랬던 것임. 그렇게 조선인을 아프리카 동물처럼 먹이사슬로 옭아매고, 지배자 집단인 일본은 다큐멘터리를 찍음. 물론 기간 제한없이 영원을 위해서 그렇게 치밀한 작전이 시작됨. 그건 역사 기록만 봐도 증명된다. 
    A. 1899년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B. 1927년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 
    C. 1930년 왕인신사 건설 봉고제 및 지진제 거행
    D.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
    E. 1940년박사왕인비 건립         
    F. 1941년 왕인신사건설의 제일보로서 왕인묘에 담장 조용
    G. 1941년 도쿄 '우에노'공언에 박사왕인 부비 건립
    H. 1942년 오사카부 협화회가 왕인신사 건설 결정
    그러므로 왕인 관련 자료를 10개 국어로 조사해서 논문을 써보면 알 수 있다. 세계3대 과학잡지에서 공인받을 정도로, 10국어로 철저히 조사를 해보시라. 일본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라는 정도로만 사당 부수지 않고, 인터넷에서는 허구 인물로 알고. (즉 일본서기에서 유리한 건 사실, 불리한 건 허구). 즉 당시 식민지 통치관, 역사관, 지배관...을 위해 치밀히 진행된 정책. 영혼말살, 사상지배를 위해서 일종의 당근 책략에 해당했던 일이 왕인 박사 띄우기. 121대 고메이 덴노 천황도 암살하고, 이미 600~700년대부터 역사 왜곡은 멈추지 않고 메이지 유신까지 달려왔는데. 일본서기에 등장한 조연, 왕인 박사 하나쯤 만들어내는 게 무슨 대수. 일본의 고대 문명에서 한국 영향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인데.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도록 급속히 성장한 배경은 곧 180도 전환을 비롯한 칼럼 내용들인데. 그처럼 서양의 모든 걸 따라하고 베끼며 추종하는데 (서양의) 비밀결사대를 어떻게 빼먹을 수 있겠나. 관련된 슈퍼데이터는 그야말로 눈부심. 그래서 1900년대 초반에 착착 진행했던 왕인박사 띄우기에는, 천황부터 정치계 군부계 학계 행정계 귀족계...모든 계통의 최고 수장들이 전부 다 전폭적인 지지를 했던 기록 다 남아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왜 그랬을까? 총독부, 육군 별4개, 동경시장, 구청장, 궁내대신, 문부대신,후생대신, 한국내 시장 도지사 권력자.......건립 후원자 명단 1번은 바로 당시 일본 수상. 천황 빼고 일본 1인자. 또 축사를 남작이 읽고 동경시 교육국장이 병풍 맡고 학교교장에 박수치고.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많은 축전들이 쇄도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조선어 폐지,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국민징용령, 성노예, 대량학살, 인간 취급 미만....그와 정반대로 왜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만약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이겼더라면... 그러면 아마도 여전히 왕인 박사를 훌륭한 위인으로 존경했을 것이다. 왜? 좀비를 길들이기 위해서. 일본이 실존인물로 떠받들다가, 갑자기 정반대로 태도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 말은 다 가짜로 그랬다는 뜻. 만약 진심으로 떠받들려면 이순신을 띄우면 되지 뭐 하러 일본서기 허구 인물인 왕인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됨! 그래서 지금도 일본 내 이순신 입지는 튼튼. 이순신 깎아내리면... 이순신한테 당했던 대상들을 더 깎아내리는 이치 때문에 절대로 할 수 없음. 이해되심?
    그러나 세계사는 패자에게 야속했다는 점. 따라서 패전으로 소멸된 왕인의 이용가치에 따라. 가짜로, 의도적으로 헛바람을 주입시켰던 연기를 계속 이어갈 필요는 전혀 없어져버렸다는 점. 돼지 꿀꿀 농축산 가축들 꿀꿀꿀 식사하듯이 배급 줘서 먹고살게끔(만) 만들어주고. 단 효율적으로 국통 1개에 숟가락 10개가 동시에 첨벙! 다 그렇게 세뇌받으니까 그게 100년을 가도 씻겨지지 않음. 그래서 왕인 박사를 가리켜 일본 일부 지식인들은 이렇게 비꼰다. "한국과 일본 합작의 가짜역사"라고. 한일합작은 웬만하면 끝이 좋지 않음. 2002 월드컵? 공동 개최까지는 좋았는데. 한쪽은 예선 탈락 한쪽은 승승장구 그러다 결승전까지 진출할 동 말 동...속만 뒤집어짐. 그때부터 더더욱 혐한 기승 탄력받음. 게다가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들고 일본에 가서...?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쓴 책인데 책이 씌여지기도 전에 어떻게... 왕인 박사가 뭐 미래에서 왔나! 그러게 자국 역사서인데 대체 왜 남의 나라 역사로만 절반을 할애하냐고. 역사서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게 다 서기 300~660년 동안 한국의 일본 지배를 없던 일로 만든 일본서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1,500년간 역사 조작 때문.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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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사학 학맥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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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케
               ↓
              리스        나카 미치요
                      ↓
               시리토리 구라키치
                      ↓
          (A) 쓰다 소우키치/이케우치 히로시        (B) 스애마쓰 야스카즈        (C) 이마니시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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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이병도(와세다대-조선사편수회-서울대)                                         신석호(경성제국대-조선사편수회-고려대)
2세대   이기백/김철준/최몽룡/한우근 등            김원룡(경성제국대-서울대..)   김정배 등
3세대   노태돈/이기동(이병도 수제자)/조인성 등  배기동/안휘준/이선복/조유전..  최광식(신석호 수제자)..
4세대   송호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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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내용을 어째서 말할까! 왜 수도 없이 반복할까? 무려 1,500년 연속 역사왜곡을 뭐 심심해서 할까! 원시부족의 특성에 대해서 대체 몇 번을 말하도록 만드나. 왜냐하면 원시부족 문화는 절대로 문명화될 수 없기 때문. 저 하늘이 괜히 무시무시한 악마를 배정했을 리는 없다.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일본 군부에서도 뱀으로 통했고, 지모가 구렁이를 닮았고, 처세가 살모사와 비슷하다는 그분. 비정함이 독사와 같다고 붙여진 별명. 그럼 원숭이 빼닮은 풍신수길이라고 빠질까? 독일 나치 아돌프 히틀러가 노란 원숭이새끼들이라고 꼬집자 → 조선 총독왈, 인도를 다스리는 영국 식민정책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음 → 러시아 군함을 기습으로 박살내자, 영국언론은 광분하면서 격찬! 러일전쟁으로 알려진 전쟁, 실상 전투와 비슷했는데. 러시아가 하도 넓으니 지원군을 보낼 수도 없고 전투가 역사적으로 전쟁으로 과장되니, 그래서 지금처럼 러시아 핵잠수함이 몸을 푸는 것임. 실존 인물도 아닌데 쇼토쿠 태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일본 고액권 중액권 지폐에 괜히 7번 등장했을까? 조작된 일본서기대로만 알고 살며 우기는 일. 
    300년 백제 영토 → 중간에 가야 지배 → 사회지도층 100% 백제 독점 → 그러다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대전환 →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뺏어야 속이 시원함 → 역사를 정반대로 조작한 일본서기 탄생 → 헤이안 시대(794~1185)에 궁정강의와 세뇌와 섬세한 대조작 시작 → 석일본기(1274년)로 집대성 → 천황가 족보는 신분세탁에 완벽 성공/지금도 만세일가 황통으로 인식 → 임진왜란 → 한일합병 → 원자폭탄 사과해라 사과해라~ → 성노예는 없었다 없었다~ → 난징대학살도 없었다 없었다 → 全총리가 착한 척하면 역적/매국노 → 천황도 착한 척하면 협박/위협 → 일본 사학자가 옳은 소리하면 겁주고, 한국계 사학자가 직언하니까 결국 살해 → 기타 등등.
    한번 생각을 해보자. 제발 제대로 존엄한 인간으로서 찬찬히 생각을 해보자구요.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일일까? 만약 사람이라면 그렇게 비인간적일 수는 없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다 정도가 아니라... 야만인이라는 게 이렇다. 그게 다 원시부족 문화 때문! 한두 번 말하나? 이건 말이 안된다! 응? 말도 안되다고. 이게 꼭 일일이 조사하고, 연구하고, 지적해야 할 일일까? 말 같지도 않은 일이지 않나. 안 그런가? 오죽하면 너 그럴려고 머머됐냐 라는 떠밀림. 멜로드라마에서 등떠밀려 차마..그런 짐작을 할 수는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등떠밀린 거고, 이건 원래부터 자발적으로 식인종인 거고. 사극처럼 전쟁은 할 수 없다고 하여 스포츠 같은 대리전 성격만으로 만족? 역사전쟁부터... 말 말자니까요 증말.
    그걸 근거로 지금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나, 안 가리나? 따라서 식민지국 마지막 총독이 조선을 떠나면서 했던 말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걸 없었던 일로 반박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되면 신의 지구 데뷔도 없었던 것이고, 인간은 달에 가지 않았으며, 뭐든지 머머설만 남게 되기 때문. 
   "우리 대일본제국은 패전하였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100년 뒤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론 신빙성 없는 소문에 지나지 않을려나 몰라도. 충분히 그런 각오를 했을 것 같지 않나? 미항공모함에서 물 한 컵 주지 않았다며 속으로 앙심을 품었는데. 결국 모든 걸 남탓으로 돌리는 데 대성공하지 않았나? 1,500년 내내 노력한 끝에 어디 천황가 족보만 신분세탁에 성공했나? 아니다. 역사는 망가졌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바껴버렸다. 결국 문명인 위에 야만족이 올라간 것이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야성을 잃으면 살 가치가 없기 때문. 기회만 보이면 머리꼭대기로 올라가는 동물은 사람과 다르다. 초식동물 코끼리, 기린, 코뿔소, 하마한테 맹수가 당하는 다큐멘터리 영상도 많지만. 결국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을 먹지 않는다. 먹을 수도 없다. 허나 그 반대는 성립한다는 점. 제2차 세계대전의 연승을 일본 전국민이 올림픽 금메달, 월드컵 우승, 세계 스포츠 대회 석권...처럼 들썩들썩 승전보를 들으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하지만 단박에 패전 선언. 심지어 인간선언? 그 굴욕감이......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건 상상불가! 미시마 유키오는 왜 할복했을까? 그래서 원시부족 사고체계로 봤을 때 경제로써 세계를 제패한 全SONY 회장처럼. 고국으로 돌아가 극우서적을 출판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정하는 것. 우리도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1,500년 전부터 그랬는데? 그럼 또 너네는 NO라고 말하지 말라 → 우리만 YES다 → 내 꺼는 원래 내 꺼 늬 꺼도 내 꺼 → 나는 되고 너는 안되고 →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사랑 → 무능한 남편이 다 원인제공했으니 부인 바람나도 다 남편 탓......계속 이어짐. 





    3

   [부여기마족의 일본 정벌설]
    앞서 임나일본부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음과 동시에 날조에 기인한 억측인 반면. 부여기마족의 일본 정벌설은 엑셀파일 목록에 따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고고학적 증거에 따른 학설이라는 점. (역사적 자료를 총망라한 역사학과 달리, 물증이라는 고고학 자료에 기반한 학설) 그 둘은 하늘과 땅처럼 확연히 구분되는 걸 전제로 하고 본 주제를 시작한다. 일단 미국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의 학설에 따르자면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505년까지 100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하는데. 존 카터 코벨(1910~1996) 학자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르다. 
    세계 역사적 근거:

  • 기원전 1만 5000년에서 기원전 1만 년에 이르는 구석기시대에 지금의 베링해협은 대륙으로 연결. 그 통로를 따라 아시아에서 미대륙으로 이동
  • 15세기 코르테스 기병대는 단250기 말로써 멕시코 전역 정복
  • 피자로는 그보다도 훨씬 적은 50기만으로 페루 정복
  • 기원전 102년에 암종마 3000필이 한나라에 귀속되어 부대 예속됨
  • 기원전 141년 재위에 오른 한 무제의 영토 확장. 곧 말의 전파에 따른 영향
  • AD 120년과 136년 부여국의 왕 위구태가 중국 황제를 만난 기록......패망한 부여가 남하하여 기존 부여족과 합류

    일본 문화재 근거: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하니와 토기 배 
  • 규슈 후쿠오카현 다케하라 고분벽화 그림
  • 부여족이 도래한 다음인 400년 이후 일본 고분에서 마구 집중 출토 (대구 근교 가야 출토품과 완벽히 동일)
  • 윤색된 일본서기를 고고학, 유적지, 문화재 자료와 비교해서 합리적인 해석 결과
  • 6~7세기 일본 아스카 문화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 또는 가야인 조상 후세

    부여기마족의 일본 정벌설은 무엇을 뜻하냐? 
    첫째, (엑셀파일) 고고학적 자료가 뒷받침된 사실
    둘째, 일본서기처럼 윤색하거나 역사학계 평균이 날조와 가까운 것과 달리. 고고학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점. 
    한편 일본서기에 이렇게 나온다.
   "우리 백제와 임나(가야)는 예부터 부자, 형제 관계임을 굳게 약속한 사이다."
    이 말은 백제와 임나(가야)의 외교관계도 뜻하지만. 역으로 (오래전부터) 왜나라는 친백제-친가야인 반면, 신라를 적국으로 설정이라는 뜻. 물론 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전에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기도 했음. 
    참고로 고고학을 빼고는 먼 역사일수록 역사학을 논할 수는 없는 법. 만약 고고학을 제외한 체 고대 역사를 얘기한다면 그건 역사가 아니라 딴 게 되버림. 즉, 왜 고대사 유물이 동일본보다 서일본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가? 왜냐하면 육지에서 문명이 건너왔기 때문. 그 증거에 따라 옛날 (현)도쿄 일대는 아이누족과 야만인들이 거주했을 게 뻔하다. 일본 내 발굴된 고대 유물을 봐 보자. 대부분 쓰시마, 규슈 등 동쪽보다 서쪽이 전부. 그 동진이라는 흐름에서 독자적으로 전환된 계기, 다른 문단에서 설명하겠지만 약 800년 경 일본에서 금광이 최초로 발굴된 시점. 그 훨씬 이전에는 신라처럼 금광도 없고, 제조기술도 제한적이며,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 문명. 그런데 으쌰으쌰 독자적 노선이 1000년 동안 탄력을 받으니, 고대사를 거꾸로 왜곡 및 날조. 미술사에서 용의 손가락과 발가락만 봐도 훤하다. 중국은 5개 한국은 4개 일보은 3개.
    그런데 그런 세뇌가 절정에 달했던 20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한문화교류전 같은 전시회를 열면.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 중에서 하필 우주수목 가지가 3,4개 달린 금관만 전시하고, 일본 금관은 꼭 5개 가지의 우주수목 달린 것을 전시했음. 그건 대체 뭘 뜻하겠나? 가령, 불교도 정통파에서 점점 시대적으로 분파됨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우나. 극적으로 말도 못하게 변형되는 사례, 그래서 스님들이 결혼하고 첩을 거느리니까 일본 천황도 아들과 첩을 공유했던 역사. 그게 바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니까 가능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 그 모든 게 외부에서 섬으로 유입됐는데 하필 원시부족이 그걸 이상하게 변형, 국보 1호도 원본이 기괴하니까 성형, 전국민 사고체계부터 기형적으로 못 변하도록 고정. 그것에 반항하며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마디로 그게 태평양 원시부족 문화. 
    과거 유럽이 아메리카로 서진했고.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고대 그리스가 이탈리아 남부를 포함한 유럽 여러나라를 직접 식민지 지배, 또는 분국 운영했다. 당시 그리스는 지금의 터키를 포함해 일종의 그리스 제국이었는데 중요한 건 그 다음에. 그 다음 타자로 등장한 게 바로 로마제국. 물론 그리스는 뺏는 지배가 아니라 문명을 전파한 지배. 실제 뺏을래야 뺏을 것도 없었던 시대.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로마 문명을 유럽에 심었는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나중 터키제국, 오스만제국, 게르만 나치... 막 제국 제국 계속 등장함. 무대도 전세계로 넓힘. (이 때문에 필자 중학교 농구단 이름도 제국, 나중 친구 이름도 제국). 그게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불교가 동쪽으로, 몽고 기마족도 동남쪽으로, 중국 문명도 동쪽으로. 그게 사실인데. 어떻게 된 게 거꾸로 태평양 원주민이 무려 200년 동안이나 과거에도 한국을 지배했다니. 아 글쎄 이게 뭐지? 500년대에 백제에서 왜로 금동석가불상, 번개(의례용 장식깃발), 한문으로 쓴 불경, 성왕이 친히 쓴 불교예찬론, 불교용품, 달력, 언어, 건축가, 화가, 장인, 박사... 모든 게 동쪽으로 갔는데. 삼국유사에 따르자면 그래서 백제 건축가들이 그토록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라 최고의 절 황룡사도 백제 건축가를 초청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시에 일본에서는 제조 불가능한 물품들이 근대 일본에서 발굴되었는데. 연구해보니 죄다 고대 한국산 아니면 중국산. 20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한비교유물 전시회에서, 한국 유물은 회색 비단에 좀 허접한 유물들을 추려서 전시. 그 옆에 일본 유물은 베이지색 비단에 다양,화려,고급만 선정해서 전시. 그럼 거꾸로 일본 문명이 반도로 건너간 것처럼 인식. 사고체계가 변한 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좀비 세뇌는 나날이 발전하기만 하니. 설마, 그래서 주기적으로 틈틈히, 꼬박꼬박, 자주자주, 끊임없도록 지진과 태풍과 해일과 화산폭발과 기상이변이 어딘가에 끊이질 않는 건가? 아마도 그런 듯. 그리스 로마 문명은 듣기도 싫고 짜증나니까. 뭔 반도를 빼놓고는 얘기도 뭐도 아무것도 안되니까. 그래서 전국에서 한국 관련 동종 서적을 모두 모아 800년 당시에 몽땅 불태워버렸던 감정이, 지금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실정. 
    그래도 6~7세기에 백제의 왕궁이나 절 건축은 한국 땅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백제 역사서도 전해지다가 소실되어버린 점 등등. 혹시 지금을 위해서인가? 
    아무튼 고고학과 역사학에 기반하여 왕릉과 귀족 무덤은 철저히 궁내청 소유로 옛날부터 지정되었던 것만 봐도 너무도 예절바르다. 과거 한국인 왕들이 편히 쉬시게끔 배려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역사적으로 사실은 그렇다. 당시 왕 뿐만 아니라 귀족, 관리, 사회지도층, 권력자, 기타 모든 중요한 직책은 전원 한국인. 그게 100%에서 점점 낮아지다가 1868년 메이지 천황 때 수도 이전. 이게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고. 또한 그 때문에 일본 정부와 궁내청은 고고학자들이 규슈나 도쿄 북부지역 정도를 파보는 것은 허락하나, 에도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의 지역을 발굴하는 건 철저히 금지시키는 것. 서기 500년 대만 해도 한국계가 아니면 거의 출세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무려 몇 백년...아니 천년 내내 백제계가 천황가 자체라니. 더불어 14세기에는 왕권 다툼이 가장 치열했고, 오사카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가난하게 살던 왕실 가계에서 적손 찾기도 외면받았던 사실. 그걸 어떻게 인정하고 싶겠나. 중국 문명을 1천년 이상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서구문명도 놀랍도록 습득한 건 모두 인정하나. 유독 한반도에서... 그거 만큼은 왕짜증. 자존심 훼손. 그리스가 이탈리아 남부&터키&유럽 상당수 지배. 다시 로마제국이 전유럽과 영국지배. 오스만 제국도 으쌰으쌰. 그런데 사실은 일본이 고대사까지 한반도를 지배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함. 아니면 속뒤집어짐! 





    4

   [일본의 초대신]
    왜에서는 아마테라스가 처음에는 오히루메노무치(大日靈貴)라 했는데 이는 무녀로 오히루메노무치(大日巫女)가 오히미코가 된다. 아마테라스 = 태양신, 히미코는 그 태양신을 제사지내는 무녀로써 태양신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존재. 즉 히미코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로 아마테라스=히미코=신공왕후. 그렇게 됨. 정리하자면 태양신을 섬기는 무녀에 불과했는데 토속신앙으로 유명해져서, 처음에는 태양신을 섬겼다가 나중에는 태양신이 된 격. 
    근거는? 송나라의 범엽(398년 ~ 445년)이 정리한 역사서인 후한서! 후한서에 따르자면 '한나라 환제와 영제 연간(132~189)에 왜국에 서로 싸워 주인이 없는데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 않고 귀신도를 숭상하고 요술로 능히 대중을 현혹할 수 있어 히미코는 왕이 되었는데 시비는 1천명이요 음식을 시중드는 남자 1인이 있었다'라고 함. 
    그 외에 알고보면 아마테라스는 원래 가야의 신. 언어학적으로도 
    히(고대 한국어로 해) + 미코(님 또는 무녀) = 히미코! 야마토는, 
    야마(고대 한국어로 '하늘' '산' 또는 '신성한 마을') + 토(터 또는 밑) = 해 뜨는 하늘 밑 마을
    그런데 여기까지는 신화적인 해석일 뿐이고. 역사 연구로 세밀히 들어가면 얘기는 또 다름. 어떻게 다르냐? 
    자, 또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해볼 수 있다. 그에 앞서 아주 중요한 2가지를 먼저 알려드리고 출발한다. 
    (A)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천황)은 총 4명
    (B) 일본 역사에 있어 가야인(또는 신라) 왕(천황)도 총 4명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은 1대 신무(神武)왕, 10대 숭신(崇神)왕, 신공(神功)왕후(14.5대 즉 정식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음), 15대 응신(應神)왕 이렇게 단 4차례에 불과. 이들은 모두 건국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 그리고 중국의 삼국사기를 보면 나와 있음. 참고로 중국 삼국사기는 BC 109년 ~ BC 91년 편찬 역사서로써 일본서기와 속된 말로 끕이 다름. 어디... 그렇게 됨. 그렇듯 삼국사기 <남사>와 <양서> 왜전에 보면 “진 안제 때 왜왕 찬이 있었고, 찬이 죽자 동생 미가 섰고, 미가 죽자 아들 제가 섰고, 제가 죽자 아들 여가 섰고, 여가 죽자 동생 무가 섰다.(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與, 與死 立弟武)”는 기록이 있다. 더불어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다. 따라서 왜왕 찬은 응신왕을 뜻함. (참고로 맨 마지막 立弟武의 무는 무녕왕을 지칭) 
    또 <일본서기 신대 하의 제11단 신황승운>에 보면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狹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협야는 ‘사노’로 발음되며 바로 찬(讚)의 음인 ‘산’에서 온 것이고, 이 찬(讚)을 훈독하면 응신의 이름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일치한다. 즉 왜왕 찬(산)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1대 신무왕의 협야(사노)가 되고, 훈으로 읽으면 호무다의 호무 즉 응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응신(應神)의 일본식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815년 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에 보면 진(眞 또는 眞人)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1대 신무왕은 바로 15대 응신왕으로 보아야 한다. (아니다, 10대로 보아야 한다...는 하단에 서술). 상게서에 따르면 숭신왕은 담담허존이고, 신공왕후 이후 120년은 공백기(실제로는 백제왕의 직할통치기)이며 응신왕이 곧 시조인 천무왕이라는 추론은 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왜(일본)의 고대사 역사는 매우 짧다. 중국 고대 역사서와 비교해서 일본 역사서가 가난한 이유와도 일맥상통. 결국 일본서기의 응신 이전의 9명 또는 14명의 왕은 허구의 왕이던가, 아니면 조그만 부족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일본(왜)의 역사를 길게 하기 위해 조작된 걸로 추정. (충분한 사료 검증에 따르자면 14명보다는 1대부터 9대까지가 허구인 쪽이 믿음직)
    응신(應神) = 호무다(譽田) = 진(眞)씨의 시조! 
    ~라는 부분을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다. 아주 중요하니까. 
    요컨대 왜 왕실 연구자들은 15대 응신(應神)의 성을 진(眞)씨 라고 하는데, 이는 백제 왕실의 외척 가운데 주요 성씨의 하나이고 대고구려 강경파의 대표적 세력이기 때문. 근초고왕의 직계 후계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하여 진씨왕후시대를 열었을 수 있다. 이건 뭘 뜻하냐? 이때부터 백제는 왜(倭)에 왕자를 파견. (고려왕이 현직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거주하며 편지 정치했던 것처럼). 요컨대 백제와 왜는 대왕국과 후국 즉 황제와 제후의 정치적 관계. 그 모두는 온전히 일본서기에 나와있는대로. 그래서 백강전투에 국력을 총동원하여 무리한 모험을 감행했던 것임. 즉 당시 백제와 왜와의 명령체계는 백제대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왜왕). 
    참고로 소가씨도 한국계. 한국계 소가노 에미시는 당시 왜의 실권자였는데. (일본서기에 앞서) 620년 최초의 역사서를 쇼도쿠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노 우마코가 시도했으나 결과물은 미완성이자 극히 일부만 전해짐. 소가노 우마코가 당시 왜국의 최고 군사권력자이자 한국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 자료는 비공개. 극비리에 불리한 걸 감추기 위한 목적 때문. 한편 645년 6월 12일 한반도 3국에서 온 사신들을 영접하는 궁의 연회석상에서 살해당했는데. 그걸 645년 소가노 이루카가 살해당한 뒤 다음날 소가노 에미시가 자살한 것으로 윤색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상태. 왜냐하면 소가노 우마코는 가야계인데, 소가노를 살해한 세력은 한국 삼국(고구려-백제-신라)와 일본 내 삼국 친세력이기 때문. 소가노가 백제계인가 가야계인가는 몰라도 일단 한국계. 그렇게 소가노 우마코라는 강력한 실권자이자 총사령관은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힙겹게 승리. 그게 587년 7월.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하필이면 왜 반역자들의 동생을 새 천황으로 옹립했을까? 살해당한 아나호베 왕자의 생모를 위안하려는 뜻도 담겨있다는 게 사가들의 통설. 그러다 스슌을 천황으로 옹립시켜준 게 소가노 우마코인데, 스슌 천황이 그만 자기도 모르게 실언을 하자, 스슌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충복에 의해 살해당함. 그리하여 소가노 우마코는 왜나라 최초의 여왕, 즉 백제 여인 스이코를 천황으로 등극시킴. 여기서 소가노 우마코가 당시 얼마나 최고 실권자였는지를 알아볼까? 즉 일본 33대 여왕 스이코(추고여왕)이 사망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소가 가문 사람들이다. 어르신께서 분부가 있으시면 비록 밤이라 해도 낮에 하는 것처럼 그 분부를 따라야 할 것이며, 또한 낮에 내리신 말씀은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로 지켜야 한다."
   "부상략기"에 따르자면 당시 그분들 의복은 죄다 백제 의복. 조선과 흡사. 즉 당시 왜에서는 한국계가 모조리 최상층을 장악했는데 당파간 세력 다툼이 매우 치열했던 걸로 추정.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뒤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후지와라 천황가의 먼 조상. 1985년 6월 소가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일본 나라현 호류지 남쪽의 후지노키 고분이 발굴되었음. 여기서 수많은 한국식 유물들이 부장돼 있다가 드러나자, 당황한 일본 당국은 궁내청에 통보. 일본 왕가 계보의 시조는 지금의 후지와라 가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음을 극비리에 지적. 따라서 많은 증거물들에 대해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 무덤을 1년간 폐쇄. 물론 증거들은 비밀 리에 추려서 감춤. 
    더 자세히 말하자면 646년 때까지 왜를 지배하던 소가 가문은 순수 한국인 혈통. 반면 후지와라 성씨는 절반의 한국인 혈통. 그렇게 후지와라 가문이 소가 가문을 살해하고, 왜국 정권을 탈취했음. 그리고 후지와라란 이름은 현 일본 왕실의 성씨. 당연히 사이호지(西芳寺)의 원소유자도 원래 한국인이었음.





    5

   [왜 일본서기는 거짓이 많이 섞였나?]
    첫째, 기반/기원이 죄다 한국이니까 윤색
    둘째, 신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기반
    셋째, 672년 진신의 난에 대한 미화/합리화/죄의식/역사왜곡을 위해 682년 3월 아들 천도에게 역사조작 명령*
    * 그렇게 탄생한게 바로 720년 일본서기. 즉 왜국 최초 역사서를 40대 천무왕이 기획, 41대 천도에게 명령.
    * 당연히 과거 일본사 기록은 전무. 또 자국어 없다보니 중국 포로(속수언과 살홍각)과 망한 백제 관료 출신 이주민을 동원. 물론 대부분 백제계. 백제 빼고 일본 고대사에서 아무것도 논할 수 없음. 전국에서 각종 자료 수집하여 짜집기. 요점은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 명분을 위해 탄생한 역사서. 

도표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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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 작성 이전          일본서기 작성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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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종주국)        백제 (가야...)                 일본       
분국(번국)           왜                              신라 (통일신라)
국호                  왜                              일본 (정확히는 율령체제 구축인 690년경 이후부터)
왕격                  왕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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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 사실 왜곡 예시 (712년 고사기 포함)]

  • 신공황후의 신라정복설은 허위
  • 역대 일본 천황가 족보 연구 절대 금지
  • 역대 일본 왕릉, 귀족릉 발굴 절대 금지
  • 중세시대 유럽처럼 왕실 모독에 관한 헌법과 불문법 등등
  • 간지(60년간) 2바퀴(120년)을 윗쪽으로 늘리고 바꿔, 왜국 역사를 실제보다 길게 변조 
  • 백제 13대 근초고왕부터 19대구이신왕 시대까지 치세에 뜯어맞추기 위해...조작..처음부터 계획
  • 초대부터 9대왕까지는 허구. 조작. 학파에 따라 20~30대까지 허구다 들쑥날쑥. 공통점은 일단 1부터 40대 상당 이전까지
  • 역대 일본서기를 비판하고 (불리하게) 분석한 학자를 금고역과 벌금-감시-지위 박탈 예시들 다수. 3대 재산 몰수
  • 백제 성왕의 왜국왕 겸임 사실을 거꾸로 뒤집기 위해서, 백제 성왕이 역으로 금동불상을 바쳤다...등으로 기술
  • 백제 불교 전파가 서기538년인 것을 은폐하기 위해, 흠명(킨메이) 등극을 1년 뒤인 539년으로 조작
  • 각종 고대 문헌들과 엑셀파일들이 양 나라 동시 경영을 뒷받침하는데. 거꾸로 식민지 지배 명분을 위해 조작
  • 신라왕이 80척에 이르는 조공을 바쳤다...이미 서기 200년에 한국을 침략했다...지배했다...정사 포함한 소설
  • 칠지도를 바치고 칠자경도 바치고, 여러 진귀한 보물은 물론 황해도 곡성군 철광석산까지 바침
  • 사실 기반 + 가짜로 꾸며진 역사서 일본서기. 그걸 명치유신시대 왜 통치자들은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세뇌 시작. 그렇게 일본은 정신과 사고체계가 지금까지 거의 변한 게 거의 없는 실정
  • 당시 왜 조정 실정은 한문 해독자 거의 없었음. 가능자는 죄다 백제인. 즉 조정과 사회지도층 그 모든 걸 백제계 장악. 물론 이때 이후로 문인 → 무인으로 국가 체계 중심이 바뀜. 가령 조선은 그걸 반대로 해서 뒤끝이 안 좋았음. 또 당시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위해서 참고한 자료는 백제 3서와 여러 씨족기, 묘기, 사찰기 등이었음. 다시 말해 수많은 집필진, 향후 넣고 빼고 화려한 편집본. 그 당사자들은 분명히 여러 역사서들을 읽고 또 읽고 빠삭히 참고하여 일본서기를 수없이 편집했다는 증거. 일례로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양서, 수서, 예문유추, 문선, 금광명최승왕경, 회남자, 당고조실록 등을 읽고 알고 연구한 다음에 일본서기를 수없이 편집. 특히, 임진왜란의 명분 목적으로 풍신수길 명령 하에 무수히 편집됐을 거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원본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대륙 정벌이라는 목적은 무색해지고, 구실도 없으며, 위신만 망신살 게 뻔하니까. 보아하니 백제인 주도로 씌여졌다는 사실은, 일본 국사는 쓸 거리가 부족하여 한국쪽 자료를 대거 복사 및 응용. 일본 바깥 해외사는 과거 신라 복수심 바탕으로 과장
  • 일본서기는 다른 일반적인 역사서와 다름. 통상 역사서는 정치, 군사, 외교, 내정, 자연현상, 사회...가 주요 내용임. 그러나 일본서기는 왕족의 연애,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암투. 유력 씨족의 시조 전승 등 왕가 족보를 열등감 배제, 지는 비교 빼고, 나머지를 부풀리도록 작성됨. 그마저 몇 백년 동안 퇴고하여 완성됨. 몇 백년 동안 퇴고? 아니 어떻게! ↓
  • (매우 중요) 일본 서기는 단1권으로 인쇄된 책자가 아니라, 붓글씨로 쓴 필사본. 필사본이라는 말은 원하기만 하면 통치자 마음대로 내용을 언제라도 바꿔 쓸 수 있다는 뜻. 마음에 안드는 부분? 삭제. 흡족한데 약하다? 추가로 부풀림 얼마든지 가능. (참고로 1234년 고려가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찍어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는데, 왜 나중 국력이 쇠퇴했냐? 좋은 하드웨어를 일찍 발명하면 뭘 하나, 소프트웨어인 소설 배포 발간 금지요, 컨텐츠를 왕성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환경이었기 때문) 
  • 붓글씨로 쓴 필사본이라는 말은 편찬 연도는 712년, 720년일지언정. 일본이 국보 1호를 얼굴 조작하고 성형해서 공개 후, 그 사실을 비공개로 감추는 것처럼. 그 이후 숱하게 고치고...고치고...또 고치고...불리한 거 빼고 유리한 거 추가하고...그랬다는 뜻임. 따라서 고사기-일본서기는 애초에 인쇄본이 없었음. 인쇄기계도 인쇄기술도 없었음. 그래서 고사기 필사본으로 최고 오래된 것은 1371년판, 일본서기 고활자본이 가장 오래된 것은 1610년판. 그후 목판 인쇄본으로 최고(最古)는 1644년판임. 물론 필사본과 목판 인쇄본은 내용 상에 별 차이가 없음. 그럼 일본 사학자들이 이런 내용을 다 아느냐? 100% 앎. 빠삭히 꿰고 있음. 거의 100% 일본 사학자들은 초대부터 9대,10대까지는 허구라는 거 죄다 앎. 다만. 1~10대까지는 허구, 11~30대까지도 허구냐 아니냐 등등은 의견 분분
  • 15대 응신왕의 아버지인 14대 신공(神功). (물론 일본 천황 족보에서는 신공神功을 정식 천황으로 쳐주지 않음.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 14대 신구왕후의 업적은 백제 13대 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 300년대 초~375년)과 거의 동일. 그게 Ctrl+C ~ Ctrl+V 마치 복사한 것처럼 똑같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단언컨대 일본 14대 신공(神功)왕 = 백제 13대 근초고왕! ~라는 얘기임. 물론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현역 왕인데 일본으로 건너가서 겸임을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파견직을 보냄. (3141이라는 죄수번호...이제야 불가사의가 섬세해짐). 근거는? 가야사를 검토하면 답이 나옴.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설의 근거는, 모조리 백제의 역사가 왜 야마토 왕조의 역사로 개변된 것에 불과하다는 명백한 증거. 神功은 4세기 중반 사람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정벌하는데 4세기 중반에 신라, 가야, 고구려를 정벌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근초고왕(300년대 초~375년). 이로써 근초고왕 업적인 신공의 업적으로 둔갑한 셈






    6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Ⅰ]
    손바닥을 태양을 가리는 행동을 1천년 지속했기 때문.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행동에 반기를 들면 안되는 문화이기 때문. 특히, 일본서기의 근간이 된 역사였던 약 700년 이전. 즉 200~700년 동안 왜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실권은 교묘히 이동했는데. 어떻게 이동했나? 
    가야계에서 → 백제계로, (백제가) 종주국에서 지원국으로! 전자와 후자가 무려 몇 백년에 걸쳐 全열도를 좌지우지했기 때문. 그래서 백강전투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는 것임. 왜냐하면 300, 400년 본국이자 모국인 백제는, 500년을 넘어가면서부터 그래프가 오르락내르락, 즉 고구려&신라와의 관계에서 힘에 붙일 때 왜에서도 파워가 오르락내르락한 걸로 보여지니까. 즉 때에 따라, 
    백제 위상(位相)↗ 대화왜(大和倭) 위상(位相) ↘
    백제 위상(位相)↘ 대화왜(大和倭) 위상(位相) ↗
    (그렇지만 300~700년은 백제계가 모든 것이고. 800년 이후도 상당) 그와 더불어 백제 내에서도 온조백제계가 집권하냐 구태백제계로 교체되냐, 에 따라 오르락내르락. 그러다 의자왕(義慈王) 20년(A.D 660년)에 백제는 위기에 처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왜(大和倭)가 국력을 총동원할 정도로 백제는 그만한 존재였는데. 그때 이후로 서서히~ 점점~ 그러다 역사왜곡은 1,500년 동안 계속된 정도가 아니라 코메디가 됨. 바로 그 때문에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 무려 1,500년 동안 치밀하게 꾸며댔는데, 그게 싹 다 밝혀지면 얼굴 들고 어떻게 살아? 아무리 뻔뻔해도...그래도 잘 삶. 그게 바로 원시부족 문화와 관습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가야계와 백제계가 전부냐? 하면 또 아님. 드물지만 신라계와 고구려계도 비교적 초중반에는 힘 깨나 썼던 형세. 그래서 더더욱 과거사를 꼭꼭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임. 더더욱 당시 신라가 어정쩡하니 삼국을 통일한 형세가 되자, 지금까지 한국사학계는 신라 위주로 역사를 포장했고. 일본도 역사적으로 친백제였기 때문에 일본서기부터 反신라적 기술이 상당했는데. 이상하게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을 계기로 가야, 백제, 나머지 한국계의 영향을 모조리 꼭꼭 감추고 숨기는 방향으로 돌변한 것임. 관련하여 신사의 기원도 연관되는 배경지식. 신라 15대 기림 이사금(298~310년)시대에 신라의 신궁제도와 보물은 왜로 전파됨. 신사가 모시는 보물과 신의 정체는 신라신. 오사카에서 발굴된 금석문등 증거는 비일비재. 당시 한국계가 왜를 분할 점령한 걸 구분해보자면 이렇다. 
    신라계: 시네마현 이즈모, 오우미, 교우토, (당시) 야마시로
    백제계: 구주를 정복한 다음 → 왜 내해의 세도나이카이 지역으로 동진 → 4세기경 하내(카와치/오사카)의 나니와에 정착 → 이때 왕이 백제계 응신왕
    부여계:
    고구려계: 
    다음으로 천황가 제사, 일반 제사들에도 한국계 신들을 모시는 경우가 즐비하기 때문. 가령, 백제 성왕을 신주로 모시는 4월 2일 히라노신사. 이 사당의 첫 번째인 제1신전의 신주는 바로 백제 성왕. 거기에 성왕의 위패가 처음으로 봉안된 것은 794년이요, 봉안한 사람은 50대 환무 천황. 근거는 797년 편찬한 속일본기. 물론 제1 신주 뿐만 아니라 제 2신전은 백제인 온조왕, 제 3신전은 백제 비류왕이며, 또 백제 5대 초고왕도 있고, 제 4신은 비매신으로 백제 공주신이며 무령왕 손녀이자 환무의 어머니인 고야신립이 신주.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황가는 1,200년 동안 끊임없이 제사지냄. 그런 예시들을 궁내청은 당연히 비공개, 사회지도층도 극히 민감. 역대 천황들은 거의 빠짐없이 직접 제사 지냄. 왜냐하면 천황가만의 특권이자 의무이기 때문. 심지어 일제치하 1940년에도 123대 다이쇼 천황도 직접 히라노 마쓰리 제사에 참석. 당시 현인신 자격인데도 불구하고! 그때 히라노 신사의 경내에다 직접 소나무를 기념식수하기까지 했음. 
    더불어 3대 신기. 또 나라현 천리시 이소노카미 소장 중인 일본 국보 칠지도. 칠지도에 새겨진 음각 글씨가 무엇을 말하느냐?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준 것을 밝힌 것이며, 칼에 새겨진 글투는 윗분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 칠지도에 각인되었기로는 369년에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 라면서 하사한 기록이 남아있었는데. 아마 1910~1945년 사이에 이 칼의 명문을 의도적으로 파괴. 당연히 파괴 전 명문 역시나 비공개로 남음. 일본은 거꾸로 속국은 백제로, 종주국은 야마토로 해석하고 싶으나. 수많은 사료가 그걸 결코 허락치 않음. 일단, 
    첫째, 369년 백제는 군사&정치적으로 정점에 오른 시절. 백제 근초고왕(346~375년)은 평양에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임
    둘째, 남제서(537년에 소자현이 편찬한 것으로, 남조 제나라(479년~502년)의 역사를 담음) 기록에 따르자면 백제가 당시 5개의 속국을 거느렸다고 명시됨. 그 5개 속국에 왜도 물론 포함.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그걸 숨기고자! 또 응신왕의 신주 하찌만신을 제사 모시는 스다하찌만 신사. 화상경에 세겨진 글씨를 판독하면, 백제왕이 왜를 지배한 사실을 입증. 인물화상경도 제작 연도가 503년경인데 일본 사학자가 263년으로 날조. 왜나라 계체왕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 타카하시는 연대를 240년(60십자 4바퀴)이나 고대로 끌어올림. 곧 날조의 날조의 날조의...역사조작 역사만 무려 1,500년~2000년. 것도 오차없이 일관되도록. 
    또 810~823년에 씌여진 홍인사기弘仁私記에 보면, 환무왕(50대 간무 천황)은 당시 왜 각지의 관가에 칙명을 내림. 한왜 동종 관계의 모든 책자들을 불태우도록! 일단 분서사건에 대한 고증만 있고 이유는 없는데. 왜 불태웠냐 라는 영문을 추리하자면 이렇다. 50대 간무 천황은 수많은 농민들의 조정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큰 일을 지시했음. 그건 784년, 794년 두 번씩 왕도를 옮기면서 백성들 원성이 높아졌으므로. 785년 도성 축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어 온 농민은 자그마치 31만 4천명. 대략 전체 인구 10%에 근접? 그래서 784년 왕도 옮김, 785년 도성 축성, 794년 왕도 옮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라면서 원성은 들끓음. 세계사에서 이런 예는 흔하디 흔함. 이집트 피라미드는 물론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렇다. 607년 여름 만리장성을 쌓던 200만 명 부역자들 중 절반이 더위로 사망. 중국사 기록에 보면 수 양제(569~618) 때 대운하 걸사 때 무려 550만 명이 투입됐는데 200만명 넘은 인원이 행방불명 처리됨. 그처럼 환무왕(50대 간무 천황)은 그걸 가라앉히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추진했을 테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을 성공시킴. 또 속일본기에 따르자면 제50대 간무천왕은 백제왕족들과 백제계를 중심으로 조정 인재 발탁. 50대 간무천황이 현직에 백제계만, 전직 백제신만 추종한 사실은 스가와라노 미치사네가 892년 편찬한 "유취국사"에도 여실이 기록됨. 심지어 간무 천황 후궁 가운데 7명 역시나 백제계 후궁. 백성이 백제인 천황가의 통치를 받으며 위화감과 열등감 등으로 불만 고조, 고조...그걸 억제하고자 한왜 동종  관계의 모든 책자들을 불태우도록 지시. 지금 요약하면 한왜 관련 서적 분서사건! 그건 무엇을 뜻하냐? 50대 간무 천황 시절만 해도 660년 백제가 망한지 무려 백여년이 지났다는 얘긴데. 물론 이 분서사건에는 50대 간무천황 관련 서적도 포함되는데. "일본후기"의 (50대) 간무 천황조는 모두 13권임에도 불구하고 4권만 전해지고 나머지 9권이 결권이란 말은 <한일동족론 분서사건>에 나머지 9권도 포함되기 때문으로 추정. 학자에 따라 진신의 난 때 분실됐을 걸로도 보는데, 어쨌든 불리한 현재 일본정신에게 역사인 건 분명하고, 과거 일본 백성들도 적개심을 품었던 자료인 것 역시나 분명. 당연히 이와 같은 사실은 810~823년 홍인사기, 892년 유취국사 외에 14C 발간된 신황정통기에도 명백히 나와 있음.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모순일 발생한다. 즉, 
    천황가와 조정 요직은 모두 백제계가 지배! 그렇게 사회지도층 백제계는 (통일)신라와 (통일전)신라를 싫어함. 그런데 피라미드 최상층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 피라미드 최상층을 백제계가 지배한 데 대한 원성이 드높다? 따라서 제50대 간무천황이 지시한 분서사건을 계기로, 바로, 그때부터 피라미드 전체는 옆동네 전체를 싫어하기로 작정하기 시작.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그와 같은 응력이 뜬금없이 생겼을 리는 없으니까, 15대부터~50대까지 내내 그랬다는 게 반증됨! 아울러 15대부터~50대까지 내내 그랬다는 얘기는 또 무엇 뜻하냐? 당연히 15대부터~50대까지 뜬급없이 갑자기 그랬을 리는 절대로 없다는 말. 요약하자면 BC 3세기 ~ AC 3세기 내내 점진적으로, 서서히 한반도 세력이 넘어가서 국가 체계 없는 원시사회 상층부를 장악했고. 그게 결실을 맺어 15대부터~50대까지 내내 천문학적 증거를 남기게 됨. (일본)국립민속학박물관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죠오만 말기에서 야요이 시대로 즉, BC 3세기~ AC 3세기 그 동안 인구가 5만에서 50만으로 폭발적 증가했다고 밝힘. 기원후 3세기 중반에 50만이었다가 일본서기 제작 연도인 약 700년쯤에 500만으로 폭발적 증가는 뭘 뜻하는냐? 단순히 언어, 체계, 의복, 무기, 도예 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구등 모든 게 이주됐다는 뜻. 그처럼 이와 같은 피라미드 최상층과 나머지의 물리고 물리는 접전은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게 뭐냐? 바로, 당시 피라미드 최상층은 역사 왜곡을 감행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짐은 물론, 피라미드 최상층 나머지는 지금까지 천황가의 신분세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함. 그런데 그런 합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지 혼자만 착한 척을 한다? 궁짝 안 맞도록 옳은 얘기를 한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님. 
    헤이안시대(794~1192년) 중기인 10세기경 이루어진 율령의 시행세칙을 연희식이라 부르는데. 연희식에 따르자면 왕실에 관계하는 신은 모두 285명의 신이 있으나, 왕이 직접 제사를 받드는 것은 3분의 한국 천신 뿐. 연희식에 다 기록됨. 물론 지금도 큰 변화는 없음. 왜 왕실의 한 왕자인 조향선언은 아키히토의 허락을 받고 2004년 8월 3일 한국에서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에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고 돌아감.
    근데 왜? 무령왕은 곤지의 친아들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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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Ⅱ]
    물론 이유는 찾아도 찾아도 끝이 없다. 엑셀파일을 뒤져보니 기원전 2,333년이 한국의 시초임을 일본이 역사적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기원후 369년 부여 기마족의 일본 정벌을 → 기원전 660년 신화로 윤색함. 다음으로 일본 천황가의 만세일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하냐? 15대 이전을 막 짜맞추고 조작하고 그러지 않으면 안됨.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두 숨기기 위해. 또 만세일계라면 총 125 무덤 가운데 35대 황극과 37대 제명은 합장되었고, 40대 지통은 39대 천무의 부인으로 합장되었는데. (정확한 통계에 앞서 대략) 그 125개 다 열어봐서 탄소연대측정 해 보면 될 거 아닌가? (없어진 거... 알려지지 않은 거... 빼고도 많음. 더구나 왕가, 왕족, 귀족...너무도 많음. 그러나~ 절대 금지! 왜? 아니 왜?) 내전 없기로 세계 1급이요 식민지 수탈 없기 역시나 말끔히 0. 그런데 안 해. 응? 바로 그처럼 죽어도 해서는 안될 일이 바로 그것. 왜냐? 왜냐하면 9대 또는 15대 이전은 허구로 만들어냈으니까 없고, 10대 15대 이후는 캐내봐야 죄다 불리한 것만 나오기 때문에. 물론 그걸 전국민에게 가르치냐? 전부 다 숨김. 싹 다 감춤. 오히려 임나일본부설 같은 거 만들어냄! 다시 말하지만 (정확한 통계에 앞서 대략) 그 125개 다 열어봐서 탄소연대측정 해 보면 될 거 아닌가. 근데 안 해! 왜일까? 무덤형식과 무덤내 보존품이 불리한 증거로써 매우 불쾌하기 때문. 
    더불어 원시부족 특징에 대해 숱하게 칼럼을 써댔는데. 그걸 읽어보시니까 어떻습디까? 옆은 없고 수직만 있다는 점. 그건 명백히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호족의 신들을 모두 중앙권력의 천황이 갖게 되는 것. 심지어 한반도에서 새로 건너온 신기까지 중앙권력이 수탈. 또 이즈모의 신보를 강탈. 그 다음 천황 숭인도 나머지 신기를 빼앗음. 그래서 천황 이외의 누구도 신기를 못 가지도록 했다는 기록. 현재 천황가 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는 비공개인 것처럼. 일본이 꼭꼭 숨기고 알면서도 극구 떼쓰면서 외면하는 사실들. 철면피로써 극구 부인하는 역사. 극렬히 만세일계만 주장하는 특징들. 바로 그래서 일본은 곧 사극 지상천국. 그렇다고 얼굴마담이 쫌만 경거망동해 봐라. 궁내청에 협박 전화 들끓는다. 좀비들 미쳐버리니까. 실제로 일본사를 통틀어 그렇게 명을 달리한 사건들. 엑셀파일로 기록을 해 보면 안다. 
    자, 원시부족이 광분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게 뻔하니까 그분들께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 아니겠나. 즉 백강전투 이전에는 일본에 한국인/일본인 구별이 없었거나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국인이 일본을 지배했다. 일본인은 일본 내 사회지도층도 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질 거 뻔한 전쟁에서 후방 부대 역할마저 맡고. 국운을 거는 전투까지 참전해야 했다. 당연히 통역도 필요없었지. 왜 언어 수순이 비슷하고 언어학적으로 95% 똑같은데. 죄다 한국계 한국..이거든. 그럼 원시부족이 그걸 인정하라고? 속 뒤집어짐. 그래서 약 800~1000년 사이에 일본은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 독립 뿐만 아니라 1500~1600년 임진왜란과 향후 기타 등등. 그런데 결과는 당하고 당하고 엉망진창 엄청나게 당했기 때문에 해군을 강화한 영국은 전세계에 연방을 많이 거느렸는데. 영연방과 극우방이 많은 반면 일본은? 그게 바로 뒷북. 문명인 대 원시부족. 그런데 원시부족은 뭐라고 말한다? 우리는 겉은 황인종이지만 속은 백인이다. 아시아의 유일한 유럽. 짜잔~! 
    그리고 일본 10 천황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다름 아니라 "처음 나라를 다스린 왕"~라는 뜻이다. 그건 뭘 뜻하냐, 1대 = 10대 천황! 라는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쫙 깔린 신사들, 표지판을 읽어보면 기원전... 기원전...! 죄다 뻥. 나폴리는 기원전 470년경 그리스 정착민들이 네아폴리스라는 도시로 건설되었으니까, 나폴리를 비롯한 유적지 안내판은 사실. 그냥 말 그대로 사실일 따름. 그런데 일본 신사 표지만에 있는 기원전... 기원전...? 죄다 뻥. 오스트리아, 벨기에, 포르투갈... 성당과 벽화와 조각상과... 그 안내판들에서 말하는 기원전. 그냥 온전히 사실. 그런데 일본 신사들이 말하는 기원전? 그걸 전부 다 대공사해서... 안한다. 싫다. 짜증낸다. 외면하지. 방관. 거꾸로 우김. 임나일본부설. 역사 왜곡. 백제계...발언하면 1차 협박. 2차는 죽임. 아예 조용히 마이크 꺼버림. 조용히 실종. 소련 스탈린 공포통치부터 레닌주의...별의별 몽땅 짜집기 통합되어 있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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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Ⅲ]
    이처럼 일본 역사에서 38~40대 천황도 중요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 15대~30대도 중요한데. 무엇을 봐도 어떻게 해석해도... 죄다 불리한 역사. 그래? 정말 그래? 그러므로 에라 모르겠다 라면서 초대를 BC 660년으로 끌어올림. 뭘로 봐도 불리하니까, 죄다 뒤집을 수도 없고.... 따라서 역사 = 만화영화가 됨. 이걸 제50대 간무천황을 기점으로 구분해서 얘기하는 거 얼마든지 가능하다. 간무천황(737년 ~ 806년) 집권기에 <한일동족론 분서사건>. 한일동족론...말이 좀 그렇다만. 한국계가 왜나라 사회지도층 점령...쯤으로 해석하면 되는데. 일단 그걸 기점으로 삼으면 된다. 즉 대략 700년을 기준선으로 끊고. BC 300~ AC 700년. 그렇게 무려 1,000년 동안 일본 민초는 짜증의 끝을 경험했기 때문에, 고로 그 후 1,400년 동안 또는 완충지대 포함하여 1,500년 일관되도록 내내 합심하는 것. 무려 15세기를 내내 초지일관 복수! 응? 일본 고대사에 기록으로 다 남아있는 사실이 뭔가. 불상을 처음 일본 땅에 들여왔고, 일본 내에 처음으로 절 건축을 준공한 것도 한국에서 온 건축가와 건축자재, 언어를 전파하고 문명을 알려주며... 그 모든 것. 허나 은혜를 원수로 갚아야 속이 시원한 걸 어떡하나. 단언컨대 필자의 분석이 무슨 말도 안되는 억측인가? 정말 그런가?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심? 진짜로? 네? 참고로 덧붙이자면 식민지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A) "수탈/지배" (예: 유럽의 세계지배를 비롯해 지구촌 식민주의 역사)
    (B) "문명전파" (예: 백제의 왜나라 장악)
    첫째인 (A)는 누구나 알다시피 주권 상실, 제국주의 팽창, 영구 집권을 위해서. 그리고 (B)는 그와 달리 수탈이 아니라 문명의 전파! 여기서 A&B 모두 앞선 문명을 전파한다는 점을 맞지만 A&B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건 아프리카 부족의 명언이 알려준다. "처음에 그들이 올 땐 그들이 성경을 들고 있었고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었답니다. 그런데 나중 보니 우리가 성경을 들고 있고 저들이..." 성경만 쥐어주고 그 외 모든 걸 가져갔다 라는 사실. 사실일까, 거짓일까? 100% 사실. A는 B와 달리 토속민에게 거의 모든 실권 박탈, 탄압, 자유 억압, 수탈. 속된 말로 단물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고 더 빨릴 단물이 없으면 철수. 그렇다고 철수해서 깔끔하게 끝나냐?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건 지금 아프리카를 보면 된다. 유럽 열강이 원탁회의해서 반듯하게 줄 긋고, 현지에서 측정해서 나눠서 갖고. 민족, 언어, 문화 구분 없이 그때 정해진 국경선. 그거 때문에 지금도 아프리카는 싸우는 중! 영국이 철수하자 인도 근방이 나라 5개로 조각났나, 10개로 찢어졌나? 근데 또 재밌는 게 일본이 A를 따라했다는 점. 모방의 천재들은 하필 좋은 점보다 나쁜 걸 배우기 좋아하는데. 그래서 하필 과거 모국에 해당했던 나라들부터 정복해나감. 그러던 중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정부 부처에서 긴급히 채권 발행하고, 어음 무더기로 찍어내서 이미 쥐어짤 만큼 짜냈는 데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경제 망하는 조건으로 모든 걸 빼내감. 그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50년 심어놓은 식민지 사관, 잘못된 사상과 노예근성, 뿌리깊은 구시대성 봉건주의와 원시부족 문화. 그 더러운 땟물을 빼는데 아무리 빨라도 완벽히 제거는 불가능. 지구 상에서 그걸 완전 깨끗하게 제거한 사례는 완전무결하도록 딱 0. 즉 개선조차 무려 100년이 걸림. 개혁은 꿈도 못 꿈. 단,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정도로 노력하면 가능하긴 가능. 그렇듯 A가 아니라 B로써 BC 3세기부터 ~ 약 700년까지. 1천년간 빼앗고 약탈해간 게 아니라 주기만 하며 사회지도층을 장악했는데. 물론 뺏어갈래야 뺏어갈 뭣도 없으니까 그랬겠지마는. 사실만 따져서 주기만 했음!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사람 마음을 다른 법. 따라서 받기만 원없이 받았는데 받을 만큼 충분히, 더 못 받을 정도로 죄다 받아버렸기 때문일까? 이제는 (피라미드 최정상층에 있는 백제계) 그 자리를 원시부족이 차지하고 싶네...?! 그래서 서기 700-800년년 이후 지금까지에 이르게 됨. 이 모든 원리와 이치는 입도 뻥끗해서는 안될 살벌한 불문율이 된 것임. 내 말 틀렸나? 틀렸으면 당당히 나와서 반박하시든가. 네? 
    반복하건대 저 A&B가 보통 차이일까? A는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10만명~1,000만명. 기본으로 대량 살상. 임진왜란만 봐도 전국민 1/3 ~ 1/4에 해당하는 몇 백만명을 대량학살. 무기가 발달하는 19세기 20세기로 들어오면 100만명 기본으로 5,000만명을 서서히 대량학살. 단박에 최대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듯이 볼링공 놀이도 펼침. 또 스탈리 시대처럼 그게 안에서 이루어지면 그냥 조용히 실종...최소 500만명 가버림.
    전세계 잘사는 나라들을 봐보자. 예외 없이 100년 통계 국민총생산 전부 늘었다. 200년 통계 인구도 전부 몇 갑절 늘었다. 300년 통계 수명 역시나 당연히 늘 수 밖에. 그런데 예외인 러시아? 1991년 소련연합이 해체되면서 유대계 러시아인 200만명인가 300만명 대거 이주. 또 러시아인들이 대거 남아메리카로 이주. 또 비유대계 러시아인들이 북미로 대거 이민. 그래서 러시아는 150년 통계 인구가 그냥 수평선. 그거면 끝? 수명까지 지평선. 심지어 알래스카도 돈 받고 팔아버렸음. 그런데 연금은 간당간당할 때 준대. 왜냐하면 세계적 추세가 그렇기 때문. 세계적 추세가 그렇다면 평균 연령도 세계와 발맞춰 나갈 때 얘긴데. 그러든가 말든가 평생 (저렴한 표현으로) 연금을 부었는데 하라는 대로 믿고 따르고 그랬는데, 간당간당 해도 안 줘? 이게 뭡니까? 그래서 러시아 마초들이 이따금 들고일어서든가, 아니면 들고 일어서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일상적으로 소극적으로(만) 으쌰으쌰하는 것임. 다혈질이 알고 보면 재밌음! 또 배경지식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땅덩이로 세계 1등인데 그래 봐야 지형과 기후 감안하면 도시화 가능하고, 실제로 거주하는 지역은 국토 최좌측에 몰림. 또 러시아 부자들은 런던으로 파리로 다 빠져나감. 물론 러시아 정부를 못 믿으니까 어차피 연금 간당간당할 때 줄지 안줄지도 모르니까 막 빼돌림. 그런데 정치를 보면 또 세계언론지수 상위권으로 올라가기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나발니는 밀리고 제2의 푸틴, 푸틴 주니어, 푸틴 뉴차르, 푸틴 7세...계속 기다림. 아예 KGB가 나중 상왕 노릇하는 걸 점치는 점쟁이도 있음. 좌우지간, 1900년에 못살던 나라들이 지금은 잘 살게 변했는데. 인구도 2배 3배 막 늘어나고 윤택한 삶이 평균이 되어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사는데. 그런데 러시아는 인구도, 수명도, 삶의 질도 수평선. 왜? 러시아 국사를 보면 답이 나옴. 그런데 아직도 레닌사상에 따라 사고체계가 움직이고, 스탈린 향수에 젖어서 사는 권위자와 전문가들이 많다, 적다? 독재자 무솔리니를 사랑하는 꽉 막힌 분들이 어디 한두 명이어야 말이지. (절레절레) 언제 어느 시절이 혁명의 시대라고 평하는 건 틀리지 않은데. 사실을 신화에다 연결하면서 창피함도 모름. 그럼 단지 어떤 데뷔와 중고신인 때문에 연예계가 단지 일시적으로 신화의 시대냐? 그걸 위해 각본과 모든 건 그냥, 미리 정해져 있는 대로! 어쨌든 러시아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시라. 필자 말이 맞나 틀리나를! 어? 옆길로 잠시 샜는데 돌아와서. 
    물론 저 B도 이윤 추구, 사익 추종, 권력욕 만족을 누렸으나. 적어도 B는 A가 아니라는 점. 그 증거가 무엇이냐? 고대 일본 문화재는 전부 다 한국산이거나, 제작자가 한국인이라는 점. 그래서 더더욱 일본은 1900년쯤 일본 국보 1호를 원판 그대로면 짜증나니까 통째로 깎아서 성형조작해버렸음. 국보 1호만? 1000년 내내 그 이상 역사 왜곡은 물론 왕가를 신화화. 역사도 신화화. 그냥 문화 자체를 만화영화화. 원시부족의 끝판왕.
    받기만 원없이 받았는데 받을 만큼 충분히, 더 못 받을 정도로 죄다 받아버렸기 때문 변심한 사례. 요컨대 백강전투 때 OX로 완벽히 갈림. 즉 500년대만 해도, 500년대까지만 해도 조정요직과 사회지도층은 거의 100% 백제계 또는 한국계였는데 그 이후로 점차 비율이 낮아졌을 걸로 추정. 그 후 사이메이 천황은 당시 연로한 데도 불구하고 백제 지원군 전투단 위원회를 설치하고. 400척 배를 건조하는 3년 동안 중간에 사망. 그때 백강전투를 기점으로 장조는 단조로 완벽히 전환했다고 볼 수 있음. 백강전투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 단순히 내전이 아니라 근방 모든 나라, 강대국-중간국들 그 모든 나라들이 다 참전했던 역사적 전쟁. ~의 하나가 백강전투! 그런데 백강전투에 대한 배경지식을 민초들이 알면 알수록 구식탱탱묵은 기득권(기득권이란 말도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만들어낸 것만 같음...아무튼 흑백TV). 그 흑백TV들한테 불리하니까 백강전투 같은 지식은 최소화. 더 불리한 배경지식은 싹 다 빼버림. 아예 거꾸로 왜곡. 
그런가, 안 그런가? 
    현재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왜 뭐든지 바꾸고, 왜곡하며, 날조하는가? 1900년 전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사관은 당시 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 모든 것에 공통되기 때문. 즉 약 1,400~1,500년 전에 한국과 일본은 통역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대화를 나눌 정도였는데. 당시 백제어와 신라어가 건너간 후 그거에 더해 한자를 복합시켜 "일본어"가 창시된 다음. 드디여 1900년 전후 현일본의 사고체계는 완성됐다고 보면 된다. 그 1900년 전후 식민지 사관이란 무엇이냐?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들어서 조선의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시키도록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그때와 지금, 과연 바뀐 게 뭐가 있을까? 많다. 고대 문명사 전파는 없애고 깎아내리며 감추는 반면, 천황가 족보는 신화와 연결시켜버렸음. 그 때문에 전국에 쫙 깔린 신사들 태반은 기원전... 기원전... 죄다 뻥만 남음. 이 모든 게 에도시대(1603~1867년)부터 빚어진 일 때문. 기원전부터 700년 전후 1000년 전후까지는 천황가는 백제가였으며, 그렇게나 존중했는데. 에도시대에 왜 갑자기? 한국은 신화가 BC 2333년인데 일본은... 무려 차이가 1,673년 차이가 난다고? 실제 일본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은 에도시대(1603~1867년), 또는 분서사건 즉 800년부터로 봐야하기 때문. 즉 에도시대(1603~1867년) 바로 이전에 도요토미 정권기인데. 일본 중세인 1185년~1568년. 그 일본 중세시대 이전을 일본인들이 독자적으로 이룩한 문명이냐? 거기에 답할 수도 없고, 대답하기는 더더욱 싫은 게 사실이기 때문. 바로, 그래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 
    그러니까 1985년 7월 6세기에 지어진 후지노기 고분을, 현립 가시와라 고고학연구소가 발굴하다가. 그러다가.... 이런 젠장 막 그러면서 서둘러 발굴 중단이요 석관을 다시 흙으로 덮어버림. 당연히 아무런 언론 발표 없음. 그러다 왕실 주무 관청인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분을 공개하라는 여론에 떠밀려 마침내 1988년 10월 8일 덮었던 흙을 걷어내고 크레인으로 2톤 무게의 돌관 뚜껑을 개관하기에 이름. 그러나 언론 발표문은 통상 "한반도와 중국에서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다는 점에서......" 어쩌고저쩌고. 그 후 1988년 일반에 공개됐는데. 석관 외관만 보여주고 내부는 일절 비공개. 이런 예는 숱하디 숱하게 많음. 
    더더군다나 한자 뿐만 아니라 일본어에서 한자를 뺀 가나. 일본 고대어 역시나 백제어와 신라어에 기반하여 현대 일본어까지 이르렀는데. 그럼 일본 독자적으로 만든 게 뭐가 있지? 물론 옛날에는 '히라가나'도 여자 글씨라고 천시 당했음. 달력도 모르고 살았는데 600년대에 그마저 일본으로 전수됨. 즉 서기 1000년 이전은 순전히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게 일본 역사인데. 그런 가운데 1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서서히 중국 문화를 수용하고. 그때부터 신라인들은 철저히 배척, 백제계도 서서히 배척. 그러다 사회지도층을 제외한 국민 대다수, 즉 19세기 말에 들어 처음으로 일본 국민 대다수는 자기 집안 성씨를 만든 평민들인데. 사회지도층이 아시아를 정벌하자 그러자 나머지도 죄다 좀비가 됐음. 1875년 2월 성씨를 지으라는 명자필칭의무령을 포고 하자마자 일본 국민 대다수는 마침내 성씨를 최초로 갖게 되는데. 그게 하와이 진주만 기습까지 이어지고, 경제가 세계 2위로 부흥하니 저런 미개한 것들...지금까지 속마음은 그렇게 됨. "조선과 중국은 악우......일본은 아시아를 떠나서 유럽에 들어가야 한다......나쁜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는 자는 함께 악명을 받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 그처럼 여전히 천황폐하 만세요 사회지도층한테는 암말도 못하면서, 밖을 향해서는 거꾸로 쟤네들 또 우리 험담하는 거야...! 근데 임나일본부설, 신라정복설...죄다 거꾸로 날조. 현천황도 현인신, 초대 천황도 우주신. Ctrl+C, Ctrl+V! 
    (1875년 명자필칭의무령 발령으로 일본인 대부분이 성씨를 최초로 갖기 이전에는, 일본인 대부분은 성씨가 없었음. 고대 한국인 지배자들을 주축으로 사회지도층, 왕족, 귀족, 무사들만이 자기 가문의 성씨가 있었는데 천황가도 한국계이기 때문에 모두 성씨가 있었음. 다음 A-B-C를 연구해보면 또 신기한 논문 주제에 해당할 수도 있음. 물론 이미 연구 성과를 확인했으나, 사정 상 배포하지 못하거나. 즉, 
    (A) 815년 왕실 편찬 신찬성씨록
    (B) 1875년 2월 명자필칭의무령
    (C) "근친혼&4촌 이내 결혼"으로 일본은 세계에서 상중하의 상 또는 최상급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무엇보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700년대에 일본서기를 백제계가 썼기 때문. 물론 일본 신화 역시 고구려-백제-부여-신라 신화가 많이 내포해있는 것 또한 백제계 사학자들이 옆나라들 신화를 염두에 두고 작성. 천황가 기원도 옆나라. 모든 게 옆나라. 물론 한국 신화도 어원 분석해보면 몽고어 기반 등등이 추정되는데. 그걸 거짓으로 꾸미고, 반대하거 싫어하지 않는 반면. 태평양 원시부족은 광분한다는 점.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참고로 포르노 애니메이션으로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게 일본인데 그마저 일본 신화와 매우 흡사한 장면들이 등장한다는 점. 진짜로 일본 포르노 애니메이션은 일본 신화와 판박이! 더불어 천황가가 만세일계가 아니듯, 천황가 성씨도 백제인들과 부여인과 신라인들 성씨가 다 있었는데. 일본서기부터 ~ 메이지 유신 전까지, 그 중간에 다 없애버림. 하긴 중국의 정사를 기록한 수서 신라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 "신라왕의 조상은 백제인이며 바다로 도망, 신라에 들어가 신라왕이 되었다". 그게 썩 유쾌하지 않다고 해서 그걸 부정도, 왜곡도 하지 않는다는 거)
    자, 질문 받겠습니다. (손차양) 왜 아무도 없지? 긍정도 부정도 하기 싫다는 말인가! 무조건 외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긴데. 그처럼 반론받을 수 없는 주제를 건드렸다 그 말인가? 이건 뭐 거의 잠자는 사자의 꼬리를 밟은 게 아니라, 낮잠자는 고양이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네. (절레절레)





    9

   [임진왜란 정탐]
    임진왜란을 위한 사전 작업. 즉 100% 완승을 위해 면밀히 추진한 자료 조사, 그건 바로 탐정 타견이었는데. 그마저 탐정들은 책으로 그 기록을 남겼다. 거기에도 보면 300~700년 백제를 주축으로 他한국계 국가들의 영향을 최소화&역전화했던 일본서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렇게 약 700년 이후 全일본은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를 사이비 종교의 경전처럼 여기게 됨. 코란 경전 창시 년도 추정은 610년~632년. 일본서기는 최초 기획 단계는 682년 3월 시작하여 720년 완성. 단! 금속 또는 목판인쇄가 아니라 손글씨 작업. 그러므로 넣고 빼고, 유리하게 윤색 불리한 거 삭제 등등 숱하게 작업. 그래서 임진왜란을 위한 탐정도 이렇게 남김. 
   "가야라는 국호: ......바다를 낀 이 지역은 우리나라(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진구(神功)황후가 삼한을 정벌하기 위해 보낸 군대는 틀림없이 여기에 상륙했을 것이다....한국은 비록 쇠미해지기는 했지만, 4천 년이나 된 오랜 나라다(집필 시기가 1800년대 후반). 우리나라 상대의 개화를 이끈 나라라고 하면......(1800년대 후반에 4,000년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은 곧, 200~600년대에 문명 전파해서 배경지식을 알게 된 걸 뜻함.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삼국 세력들에 의해 단군이 BC 2333년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고로 15대 응신왕 재위 기록 위로 계산기 두드려 무려 약 1,000년을 끌어올려 일본의 기원을 허구로 창설) 한인은 정직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인종이다. 그들의 희로애락은 자못 현금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앞에서는 은혜에도 감동하고 또 위엄에도 복종한다. 그렇지만 조금 있으면 모두 잊어버려 알지 못하는 것 같다...매우 제어하기 힘든 인종이라고 할 수 있다......국운이 망할 징조이다......"
    혼마 슈스케(1869~1919)가 쓴 조선잡기라는 보고서 양식의 책인데. 진짜 무엇으로 보든 엑셀파일 무색해지도록 1,500년 내내 역사왜곡 및 세뇌는 완벽! 가히 놀라울 정도. 그 외 신황정통기, 우관초, 독사여론 같은 3대 사론서를 보아도 역사 왜곡은 1,500년 일관됐다는 건 확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신기할 지경. 굳이 탐정 통계까지 엑셀 파일화하지는 않았음. 
    그런데 이와 같은 명탐정이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는 뼈아픈 실수 그건 무엇일까? 그렇지요 하와이 진주만 기습. 100% 대승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로 꿈쩍하지 않는 국민성인데. 민족 전통이 임진왜란처럼 완벽의 완벽이 보장되기 때문에 미리미리 (임진왜란) 기습 날짜를 1차례, 2차례, 우회적으로 3차례, 직접적으로 4차례, 외교관을 통해서 5차례, 무역상인을 통해서 6차례, 귀족을 통해 7차례, 대마도 사신을 통해 8차례... 수도 없이 귀뜸하고 알려줬음. 왜? 왜냐하면 쟤들이 원정경기 날짜를 통보해줘서 만반의 준비를 하더라도 무참히 대패할 게 뻔하기 때문. 압승이 전제되지 않는데 장난감 데리고 놀듯이 알려줄 수 없는 이치. 괜히 대마도 사회지도층이 중간에서 자신들이 왜 정부와 천황가인 것처럼 사기를 쳐 조선통신사를 이용해먹은 일. 나중 그걸 알고서도 일본 정부와 천황가는 손해본 게 없었기 때문에 관대. 다만 2등 국민 이하, 미만 취급받다가 급기야 자존심 훼손을 보다 보다 못해서 장기전 승산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진주만 기습. 왜냐하면 단기전으로 협상 걸어올 거라 분위기상 예단했기 때문. 판을 키워서 길게 가봐야 쌍방 손해는 당연하니까. 이처럼 무려 1,500년 동안 천황가를 위해 완벽히 신분세탁을 해주었는데. 그런데... 백제와 어쩌고저쩌고? 돌아버림. 속 뒤집어짐.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사고체계를 한두 번 말하나. 사람이 될래야 될 수 없는 문화라는 걸 대체 몇 번을 말하게 만드냐고요. 
    끝으로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 중에 극히 중요한 하나는? 천황의 혈통이 1번도 단절된 적 없이 2,000년~3,000년 이어져 왔다고 억지쓰기 위해서. 학계에서 기본적으로 9대까지 거짓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단 1명도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천황가 계보는 거짓이 많이 섞여 날조된 연도가 들쑥날쑥한 반면. 주변국 계보는 최소한 그렇게 역사를 날조하지는 않는다는 것. 더더군다나 그 당시 천황가 계보만 계보일까? 
    고구려 왕조 계보: BC 37 ~ 668년 (시작을 BC 277로 보기도 함)
    백제 왕조 계보   : BC 18 ~ 663년 
    신라 왕조 계보   : 
    춘추전국시대     : BC 771년 ~ BC 221년
    진나라 황제 계보: BC 9세기 ~ BC 206년 (나라 연대/자세한 황제 계보는 따로)
    한나라 황제 계보: BC 202년 ~ AC 220년 (나라 연대/자세한 황제 계보는 따로)
    당나라 황제 계보:
    ......자료 모으면 천문학적임. 속일 걸 속여야지! 근방 다른 나라들도 왕조를 신화와 연결하나? 15대 응신 이전의 고분 가운데 인위적으로 조작한 빈 무덤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역사적으로 일본이 일본 바깥의 고분을 한국만 전국적으로 최소 2000여기, 대동강변에 1400여기, 중국에 1만여기? 기타 등등 1백만~1천만 보물을 수집해가서 분석을 해보니. 이거 이거 이거 우리 꺼(일본 거) 열어보면 절대로 안되겠나! ~라는 게 결론. 일본 내 왕족들 무덤만 3,400~ 몇 만기가 있을지 몰라도. 답은 뻔함.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가장 큰 차이]
    712년 고사기 작가는 태안만려다. 성씨는 태 이름은 안만려. 그리고 출신은 백제. 결국 고사기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백제계였기 때문에 그 암호문에 애증을 담지 않을 수 없었을까? 고사기는 정격한문으로 기술된 게 아니라, 정격한문과 이두문을 혼합한 형태인 것. 그건 뭘 뜻하냐? 중국어와는 전혀 다른 한국어를 기재했다는 말. 대표적으로 신라의 향가. 반면 일본서기는 전체가 정격한문! 또 초판 이후 변조의 흔적도 두 역사서는 상반된다. 즉 일본서기는 빼고 넣고 바꾸고...편집이 너무 많았을 테나. 고사기는 아니라는 점. 왜? 왜냐하면 고사기는 8세기 만엽가나로 된 부분이 많은데, 후세인은 만엽가나로 글을 짓는 게 힘들기 때문. 즉 편집을 하면 전체가 엉망이 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 그처럼 변작이 불가능하니까 넣는 건 못해도 빼는 건 가능. 그래서 인현왕부터는 아무런 행적 없이 단순히 가계만을 기재. 그리고 일본서기 첫머리 = 회남왕 유안(기원전 179년 ~ 기원전 122년)이 쓴 회남자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 베낀 건 물론 여기까지. 





     10

   [칠지도 하사 배경]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제왕&왜왕이 겸임이냐, 따로냐 차이! 

  • 겸임일 때       : 왜나라에서 총독과 왕의 구분 없음
  • 겸임이 아닌 때: 왜나라에서 총독과 왕의 구분 있음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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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                             왜-총독                            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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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13대 근초고왕        → 왜 총독에 근구수태자 임명 / 왜왕은 14.5대 신공(神功) (천황계보 비공인)*
백제 13대 근초고왕        → 왜 총독은 근구수태자       / 왜왕은 15대 응신(應神), 이때 칠지도 하사**
                                                                       / 왜왕 15대 응신(應神)은 백제 13대 근초고왕 처남
                                    왜 총독-왜왕 구분에서 단일화로 바뀜. 고로 근구수태자 = 왜 15대 응신왕
                                 ↙
백제 14대 근구수왕(응신) → 왜왕에 침류태자 임명 (왜15대왕이 백제 14대로 갔으니 왜왕 자리 공석이니까)
                                ↙
백제 15대 침류왕          → 왜왕에 아신태자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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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총독과 왜왕이 구분이자 공존 상태. 그건 뭐냐? 백제왕&왜왕은 겸임이라는 뜻. 
    * 그 때문에 총독과 왜왕이 구분된 시기임. 따라서 백제 13대왕 = 일본 14.5대 신공(神功)
    ** 칠지도 하사일: 태화4년(429년) 5월 11일
    ** 아무리 양국을 운영하던 실정이더라도 격식과 예절을 벗어나 하사하는 문장이 새겨진 건 왜냐? 왜냐하면 친한 혈족이기 때문. 즉 기본적인 예의를 생략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친근한 관계라는 뜻. 다만 왜왕 15대 응신이 백제 13대 근초고왕의, 친동생인지 처남인지 조카인지...등등은 사료를 더 모아봐야 함. 이게 바로 일본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의 사연. 
    ** 칠지도 뿐만 아니라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일본 15대 응신왕에게 삼종신기를 하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음. 신빙성 완전 듬직. 이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그걸 거꾸로 바꾸어 암호문처럼 조작한 것임. 
    왜 15대 응신왕 이후에도 겸임 사례는 적거나 많거나. 일단 그 가운데 하나로, 백제 24대 동성왕이 백제왕과 왜왕을 겸임했음. 즉, (A) 또는 (B)
    (A) 백제 24대 동성왕 = 일본 25대 무열왕(489~507년).
    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에 보관된 보물, 백제 무령왕이 왜왕에게 보낸 구리거울에 명시된 문장을 비롯해 근거는 많음. 이걸 일본 사학계에서 남제왕을 계체왕으로 잘못 인식. 허나 그건 근거가 없음. 왜 그렇게 잘못 인식하냐? 왜냐하면 계체의 왜풍시호가 남대적이기 때문. 한자로 적혀 있다고 해서 '남제왕'으로 읽으면 안 되고, 이두식으로 풀이를 해야 함. 일단 두 사람 성씨가 '남'으로 일치하고, 계체천황의 이름인 '대적大迹'과 남제왕男弟王의 이름인 '제弟'를 일본식으로 발음해 보면 발음이 똑같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하지만 대벅大迹'은 '오-도'로 발음되고, 제弟는 '오토-토'로 발음되어 발음이 같지 않음. 일단 왜 남자동생과 여자동생을 구분하여 쓸 필요도 없는 고대에 굳이 '사내男'를 더 붙여서 남제왕으로 해야 했을까? 여기서 직관력을 학자는 마다하면 안된다. 눈치 빠른 학자는 그걸 이렇게 판단한다. 바로 '男'이 부여의 왕 성씨라고 말이다! 백제의 왕성인 여餘는 '남을 여'이니까 男의 음독인 '남' 내지는 '나믈'에서 '여'를 챙김. 제弟를 지금 우리들은 '제'로 발음하지만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데' 내지는 '대'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예상. 그러므로 男弟는 '남제'라고 읽으면 안 되고 '여대'로 읽어야 하는 것. 이렇게 되면 백제의 왕성인 '부여' 또는 '여'에 '대'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 찾아내면 되는데, 그럼 그게 많냐? 딱 1번 빼고 없음. (딱~) 그게 바로 동성왕! 
    (B)  백제 24대 동성왕 ≠ 일본 25대 무열왕(489~507년) 즉, 무열왕은 동성왕 친동생!
    아니다. (A)는 503년에 백제 25대 무령왕이 (백제 24대왕이었다가 일본 25대왕인) 무열왕에게 장수를 축원하면서 (현재 隅田八幡 신사에 보관중인) 인물화상경을 선사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무령왕이 동생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기 때문. 요약하면 사마는 바로 무령왕의 휘 즉 이름임.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 새겨진 왕의 휘와 그 표기가 완벽히~ 일치!  무령왕은 서기 523년에 서거하였으므로 계미년은 503년이 됨. 그런데 '일십대왕년'이라는 구절의 해석이 무척 난해함. 이 때문에 온갖 학설이 난무하게 됨. 고로 여태 정설이 없음. 후일 성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게 이 부분인데. 물론 이와 같은 전후사정을 예리한 일본학계가 절대로 모를 리 없음. 다만 솔직하면 안되는 문화이기 때문에 단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못할 사연만 애석할 따름. 한자 문화권에서 역사 전공인데 훈독과 음독을 모른다? 말이 안됨. 거울의 남제(男弟)와 일본서기의 '남대적(男大迹)'은 일견 비슷해 보이나 사실은 전혀 다름. 이건 고대어 분석, 언어학 연구가 개입하면 빼도 박도 못함. 그래서 일본서기에 남제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임. 이렇듯 (B)에서는 당시 왜왕을 무령왕의 동생으로서 백제의 담로였던 걸로 추정. 
    그 외에 백제왕 또는 백제왕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이 된 사례는 굳이 거론할 필요 없을 정도. 일례로 곤지 역시나 백제에서 건너가 왜왕이 된 사례. 수많은 문화재로 판단컨대 어쩌든지 겸임, 친동생, 조카, 아들......그 중에 하나로 무조건 걸림. 고고학,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뭘로 봐도 죄다 백제로 낙찰. 





     11

   [일본 분국 Ⅰ]
    서기 0년 전후에 일본에 국가 체계가 없었다는 사실. 일본 고대사를 지칭하는 용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러면 기원전은 빼고나도 0년부터 ~ 700년까지. 全일본이 1개로 통일된 국가였는가? 아니다. 여러 여러 부족의 총합 형태라는 사실을 부인하며 왜곡할 정도로 일본 역사학계가 학자의 의무를 방기한 것은 아님. 그것은 일본에서 제사가 일본 천황가 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와, 천황가 외에도 재낼 수 있는 제사로 구분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음. 즉 천황가에서는 백제와 신라계의 신을 따로 모심. 
    후한서-동이전 AD 25년의 기록에 따르자면, 왜노국이 조공해 오기에 인수를 주었다." 일본 서쪽 일부 바다신을 모시는 아쓰미족과 무나카타족이 연합한 세력이었을 것. 또 0년~300년 내내 전란은 틈틈히 있었고. 문명을 감안하자면 당시 비교적 넓은 땅이었기에, 인디언들처럼 개별 종족들이 듬성듬성 포진하여 생활. 중국왕이 왜왕에게 사대한 나라 임을 인증한 인장, '한위노국왕'이라고 새겨진 인수 등 증거는 엑셀파일임. 또 송나라 때 범엽(398년 ~ 445년)이 정리한 후한서에도 나와 있음. 2세기 중엽 왜에 전란이 발생하고 남자 왕으로는 도저히 수습되지 않아 여왕 히미코가 등장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고. 그게 히미코를 여왕으로 삼은 가야계의 연합국가가 성립됨. 물론 지역적으로 일부분에만 해당. 다른 지역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당연히 신라계 세력인 나가쓰내족도 위세가 무시할 수 없는 실정. 특히 이들 지역에는 초기 남방계 농민 특유의 지석묘 유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북규슈지역보다 시간차를 두고 뒤늦게 정착한 것으로 추정. 이들 신라계 무리는 농산물로 식량이 풍부한 반면, 가야계는 다른 사정 때문에 나중 천황가 족보에 오를 수 없었을 것임. 
    당시 야마토국이 규슈에 있었냐, 기내에 있었냐 라는 논쟁은 일본에서 이따금 논란이 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규슈설이 설득력 큼. 이동거리, 이동경로, 발견된 유적, 역사적 사료만 봐도 확실. 바이킹족처럼 규슈 해변 위주로 해적이 활동했던 때가 BC 1세기경이면. AC 3세기 초 부족연합체인 야마토국와 구노국이 각각 형성되고 이들은 가야와 백제의 분국 성격을 지니기 시작. 물론 야마토국의 히미코와 그의 양녀 토요가 중국 북조의 위에 3번이나 조공사를 왜 보냈냐? 왜냐하면 이미 중국 남조와 맥을 같이하는 백제, 구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 사서에 기록이 남지는 않지만 결국 야마토국은 구노국에 패망한 것으로 판단됨. 그래서 AD 270년 경 그 패전세력 일부가 일본 1대 진무 천황을 앞세워 중원에 진출하여 선착했던 신라세력을 타도하고 또 다른, 또 하나의 야마토국을 수립한 것으로 보여짐. 여기서 일본 1대 진무 천황이 BC660년이라는 것은 뻥연비처럼 거짓이고. 일본 10대 천황을 뜻함. 일반 신(神)자 돌림은 단 4번 등장하는데 이름만 분석해봐도 훤함. 즉 270년부터 약 100년간 부여계가 족장에 해당했고, 300~400년부터~ 서기 1000년까지 백제계가 천황가와 사회지도층을 지배. 이래서 일본 고대사 명칭이... 애매한 것임. 인정-불인정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가 체계와 권력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 
    여기서 백강전투처럼 중대한 사건이 뭐냐? 바로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 이건 머머설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 역사. 간무왕(50대 간무 천황)이 주도한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을 기점으로 독립적인 일본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됨. 그게 서기 800년 전후! 그 후 무사집권 즉 무사가 전면에 나섰다가, 나중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고, 그 후 지금까지 사회지도층이 상왕노릇을 하게 된 흐름. 보아하니 일본중심주의 노선 서서히 시작된 거 다시 말해 800년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 그리고 270년경 원시부족 형태로 듬성듬성 사는 일본에 부여계/백제계가 진출한 것은 세계사에서 찾을 수 있음. 
    가령, 1066년 프랑스 노르만족에 의한 영국 정복! 제2차 세계대전 때야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을 필두로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했으나. 그보다 약 천 년을 거슬러올라가면 사정이 다름. 1066년에는 노르망디에 있던 기마민족 출신 프랑스 귀족 노르망디공이, 노르망디에서 영국 섬에 침입해서 모두 점령. 싹 다 정복. 그렇게 영국 왕으로 군림. 서양사상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로써 앵글로색슨의 나라에서 프랑스 노르만이 지배하는 나라로 변한 계기. 지금 영국 왕가도 그래서 족보를 따지면... 영 뭐하다는 거. 1066년 이후 영국왕들이 죄다 프랑스어만 사용했던 것처럼 300,400,500년 당시 백제왕자들이 왜나라에 거주했던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 또 영국군과 유럽 열강들이 미국에 진출했기 때문에. 그래서 미국 지명들에 뉴잉글랜드, 뉴욕...다 그래서임. 그런데 노르망디가 영국을 지배한 게 단순히 이벤트였느냐? 1066년부터 시작해서 14세기가 되어도 요지부동. 프랑스계 영국왕들(백제계 일본왕)은 프랑스에 지분 소유. 그러다 프랑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은 여왕과 인척관계라는 명분으로 로마교황에게 프랑스 왕위를 인정해주라며 요구-요청. 그렇게 시작된 게 백년전쟁! 일본 일본 26대 계체왕에서 대가 끊겼으나 평화적으로 여전히 백제계가 대를 이어간 것과 약간 다름. 물론 이탈리아 교황청을 당시 중국 황제로 비유해볼 수도 있음. 그게 영국과 프랑스에 명확한 국경 개념이 생긴 건 백년전쟁 이후의 일인데.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이와 비슷한 일이 무엇이냐. 수차례 말하지만 백강전투, 또 한일동종 서적 분서사건. 그럼 프랑스가 정말로 영국을 500년 지배했다고? 모른 사람들 태반. 대충 알긴 알아도 무관심. 오히려 일본 천황가 계보가 증명하듯이 고대 일본을 대충 500년 장악했던 게 사실인데, 역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만드는 게 바로 원시부족 습성임. 물론 500년 지배는 세계사를 따져보면 결코 드물지 않다.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400년 놔주지 않았던가? 터키는 그리스를 700년 부려먹었음. 그 외 예시는 엄청나게 많음.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가 뭐랬나. "외국과의 관계를 제외한 영국사는 의미가 없다"라고 기록했다. 영국이 왜 全세계에 식민지를 만드는데 앞장섰을까? 왜냐하면 다른 이유들도 많겠으나 그에 앞서 영국부터 선험적으로 식민지배를 수도 없이 받았기 때문. 로마제국이 영국을 전성기 감안하면 200년, 기타 사항을 고려하면 그 이상 식민지배. 그럼 바이킹족이라고 빠질 수 있나. 바이킹족이 런던과 웨일스를 비롯해 심심하면 쑥대밭을 만들고, 강간하며, 죽이고, 고문에, 전리품들 수거해 감. 물론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지배. 그럼 프랑스 노르망디 왕조가 영국을 겨우 500년 지배? 정말로 중요한 점은 그렇게 지배당할 당시 전후로 영국왕들은 영어 쓰기를 극혐했다는 점. 왜? 자기들은 낭만적인 프랑스어만 써야 하거든. 나폴레옹이 다녀가든 말든 전유럽이 역사적으로 프랑스병을 앓았다는 사실. 현재 세계 관광객 1등이 프랑스인 이유. 인구야 중국이 1등이지만 스페인어만 알아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혀 불편할 일 없다는 점. 어족 연관되니까 당연히 스페인어 알면 공부 전혀 안해도 일단 50% 먹고 들어감. 손만 까딱 조금만 학습해도 금새 통역까지 가능. 그게 바로 언어학! 어원 분석하면 빼도 박도 못함. 그런데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누군가 필자한테 일 많이 하라고 다 그림을 그려놓은 것만 같음. 도대체 사후세계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길래... 도무지 모르겠음. 





    12

   [일본 분국 Ⅱ]
    어쨌든 일본 1대 천황부터 ~ 50대 천황까지 연속 백제계 지배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1~9는 날조, 10~50은 사실) 그래서 125대 천황이 인터뷰에서 실수하면 全일본이 격분하는 것임. 뿐만 아니라 50대 천황에서 깔끔하게 끝나냐? 그러니까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이여 왜 인간임을 선언하셨습니까 ~라면서 할복했던 것임. 짙냐 옅냐, 겉으로 드러나냐 아니냐 차이만 있다 뿐이지. 사회지도층은 몽땅 미시마 유키오와 판박이. 단, 할복은 하지 않음! 사회지도층만? 사고체계와 주입된 상식과 세뇌시키는 방식으로 봤을 때.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고 한국 이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한국계랄지 일부 양심적인 역사학자등을 제외하고) 全일본인은 미시마 유키오와 사고체계가 별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다음으로 일본사 요약! 

    고대: 쉽게 말해 10~100개 부족 형태에서 분국으로 형식을 갖춰나감
    270년 제1대 천황(실제로는 10대 천황) 집권기 ← 이게 일본 시초!
    369년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400년 백제 왕자들이 왜에서 기거. 백제 양국이자 분국이기 때문
    663년 백강전투: 백제계...
    710년 수도 이전: 후지와라쿄(藤原京) → 헤이조쿄(平城京) (710년~784년 수도)
    710년 이후부터 일본 종교건축은 백제식에서 → 중국식으로 180도 전환 (무조건 중국식으로 바뀜)
    752년 세계최대 금동불 완성 (물론 백제계 주도에 의해/일본 독립 의미)
    784년 수도 이전: 헤이조쿄(平城京) → 나가오카(長岡市)   (784년~792년 수도) 
    792년 수도 천도 / 나라 → 교토 / 1,200백년 교토 시대 시작됨 *
    800년 간무왕,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 **
    1000년 천황가 족보는 여전히 백제계
    1200년 무사집권 시작

    (다르게 정리하면)
    366~391년 약 26년간 백제 영토 (전국통일이 아니라 가야계가 동쪽으로 밀려남)#
    392~478년 약 87년간 가야 영토 ("찬왕/진왕/제왕/세자 흐/무왕"라는 왜5왕이 중국기록)#
    479~660년 약 182년간 백제 영토#

    #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니까 왜왕 찬은 응신왕이요, 무왕은 무령왕을 뜻함.
    # BC 300~ AD300은 수많은 세력들 분파로 나뉜다 치고. 대략 366~660년을 백제가 양국을 운영한 셈인데. 백제가 그처럼 양국 운영이자 예술 부흥정책 탓에 군사력에 소홀한 탓으로 멸망. 근데 366~660년 백제&가야 제국 치하 기간을 거꾸로 천황가 1대를 BC 660년으로 날조. 물론 AD 660년에서 깔끔하게 끝날 수 없다는 점. 그 때문에 일본학자에 따라 천무 천황을 668년 멸망한 고구려의 장군인 연개소문으로 보는 학설도 많음. 664년에 연개소문이 일본으로 망명했고, 672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문무천황이 되었다는 학설. 근거는 다카마쓰 고분벽화와 고구려-백제의 고분벽화에서와 같은 사신도가 발견되는 점을 들어 다카마쓰 총은 고구려 고분의 양식이고, 이 무덤 피장자는 고대 일본의 왕족일 개연성이 크다는 뜻. 곧 뭘로 보든 어떻게 따지든, 고구려-백제-신라-부여. 궁내청이 무조건 발굴 불허하고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치. 

    * 천도 이유는? 나라 지역은 죄다 백제인-백제계였기 때문. 이전은 서쪽 중심이었다면 이때부터 동쪽 개척 시작됨(아이누족 정벌). 즉 일본 독립이자 통일이며 중국 황제와 동등한 중국언어 '황'자 돌림 전통 확립.
    ** 간무왕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혈통 부정. 모국 관련 서적을 모두 불태운 건, 영국왕이 1900년쯤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단박에 바꾼 사건과 흡사. 그땐 러시아왕이 옆나라 왕한테 도와주라...꺼져 그랬던 시기임. 서기 800년 이전에 이미 천황이 출신과 혈통을 부정하니, 당연히 따라서 귀족들도 똑같이 성씨를 바꾸는 계기. 그런데 나중 보니 완전히 독립에서 멈추지 못하고, 세계정복까지 꿈꾸게 되어버림. 그래서 "천황=백제계"에서 천황은 현인신으로 바뀌게 된 것임. 이게 바로 사극의 최고봉.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전 천황이 죽으면 죽은 천황의 시신 옆에서 후계 천황은 목욕제계를 마친 후 신의(神衣)를 입고 누워 그 영을 인계받음. 12...몇 대던가. 장례 관련 행사에서 옆에서 무엇을 하니까, 또 뒤와 옆에서 도와주고, 돼지머리처럼 그걸 떼어서 어떻게 한 후...레고가 그냥 보통임. 묘지를 봐도 제사 음식을 평등하게 놓는 게 아니라. 고구려 장군총의 상부에서 거행한 의식을 일본에서는 고분 전방부에 옮겨놓는 식. 전방후원의 전방부는 한국묘의 상석에 해당되는데, 전방부에서 신인동식(神人同食) 의식을 일본에서는 집행 전통. 그 때문에 전방부 규모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었고, 세계 최대 무덤에 포함되며, 결국 전방후원형으로 굳어짐. 멕시코에 피라미드가 많은 것처럼 일본에 대형 무덤이 많은 건 그 만큼 원시부족 문화가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져온다는 걸 증명함. 즉 같은 세계인과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지만 사고체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 현재도 오직 천황가 만이 독점적으로 지낼 수 있는 제사가 많은 것처럼. 궁내청이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제사. 그건 곧 특정 제사에 대한 독점권, 대형무덤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걸 봐도 물에 대한 왕권의 독점. 이집트 피라미드 시대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이치. 
    다시 말해 752년 세계최대 금동불 완성 (물론 백제계 주도에 의해/일본 독립 의미), 800년 간무왕, 한왜 동종 서적 분서사건. 그 즈음에 일본 최초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래프는 달라졌으므로, 1900년대 초반 소나무 송진까지 강제노동 시켜서 전쟁물자를 빼내간 것임. (자원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배경지식 때문) 역사적으로 고대 한국&일본 출토품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금! 한국 출토품은 금이 풍부하게 쓰인 반면 일본 출토품에는 금이 드물다는 것. 이 때문에라도 궁내청은 점잖은 척하는 것임. 본 문단의 연도표가 왜 중요하냐? 단언컨대 몇 백년 동안 피라미드 정점을 장악하던 한국계가, 800년 이후 서서히...서서히...그렇게 피라미드가 뒤집어졌다는 점. 800년 이전에는 일본 전국민은 성씨 자체가 없었고, 귀족층만 성씨가 있었는데. 그 피라미드를 뒤집기 위해서 815년에 성씨편찬록도 편찬한 것인데. 그렇다고 한국계가 지금만 고집스럽게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걸 거부하느냐? 당시에도 그랬다. 800년 이후 1900년대 초반까지도 무려 1,200~1,300년 내내 그랬단 말이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예를 들면, 
    668년 고구려 패망 후, 일본 나라 시대에 사이타마로 정착한 고구려 왕족 고약광. 그의 후손인 일본 고려신사의 당주 코마 스시오씨가 1970년쯤인가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렇게 인터뷰함. "우리는 같은 한국인끼리만 결혼함으로써 혈통을 지켜왔다." 다름 아니라 이런 게 관습. 태평양 원시부족 야만적 문화 속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당연히 모두 그럴 수는 없으니 마치 유대인처럼 유대인끼리만 결혼파, 그냥 포기파, ½, ⅓, ⅔, ¼......로 나뉘게 됨. (물론 ½, ⅓, ⅔, ¼...걸 따져 독일 나치가 유대인 학살도 실행시켰던 것임) 당연히 일본 밖에서만 박해와 강압과 망동의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그랬다. 가령, 1800년대와 그 이전 1,000년 동안은 물론이요 1900년대 내내 그랬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없애버리기로 하고 고마군을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시켜 히타카마치로 부르게 했고,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시켜 '천황신'에게 제사지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 신사는 일본 각계의 거물들이 이 신사를 참배를 하고 난 다음에 출세했다는 소문이 퍼져, 출세 신사(出世神社)로 더 알려져 역효과를 나중 일으킴. 일본 내 고구려 후손들은 역시나 실향민임에도 자부심이 강하고 지금도 고향을 위해 제사를 꼬박꼬박지내며 행사도 규칙적임. (행정구역상 도시 이름을 기업명과 사이비 종교명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데, 외부 혈통에게 유독 냉대하는 게 원시부족 인습).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이치. 물론 탄압과 박해와 차별은 지금도 마찬가지. 싫어? 싫으면 떠나라 주의. 겉으로는 예스럽게 수줍수줍 부끌부끌 적극적 검토 어쩌고저쩌고, 속으로는 꺼져!





    13

   [백제왕 (일부) 계보]
    백제 13대 근초고왕 → 파견 보낸 총독 근구수태자 VS 일본 14.5대 신공(神功)왕 (공존)
    백제 14대 근구수왕 → 왜왕 또는 왜 총독에 침류태자 임명
    백제 13대 근초고왕/14대 근구수왕이 왜의 응신(응神)과 결전하다 현지에서 붕어? 둘 다 백제인 고로 와전된 지식
    백제 15대 침류왕    → 왜왕 또는 왜 총독에 아신태자 임명
    백제 15대 침류왕이 붕어하자, 백제에서는 아신태자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숙부가 왕위에 오름
    참고로 아신태자는 백제15대 침류왕 아들, 왜의 응신(응神)은 백제 13대 근초고왕의 처남
    왜 현지에서: 이에 격분한 아신태자는 응신(응神)과 결탁 = 왜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모국) 침략 (침략? 지원)
    만약 성공하면 아신은 백제의 왕에, 응신은 왜의 왕에 오른다는 밀약 공고
    결국 아신왕은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17대 왕위에 오름
    그 후 백제 17대 아신왕은 고구려를 공략하다가 광개토태왕에게 연패당함
    당시 백제군에 남아있던 응신은 전세가 자기한테 불리하게 돌아가자, 변복하여 가야로, 다시 왜로 돌아감. 
    일본서기에서는 이걸 16년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다.”라고 남기는데. 여기서, 응신(應神)과 왕인(王仁)을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음. 곧, 응신(應神) = 왕인(王仁) ( ? ). 응신은 백제로 돌아갈 꿈을 접고(광개토대왕 때문), 아신왕이 붕어하는 해 인 405년 왜 땅에서 독자적으로 야마토국 건립. 각종 머머설과 사실로 밝혀진 배경지식들이 산만한데, 전문가들이 정리하기 바람.

   [천황가 계보]
    도표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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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     재위 기간        출생~사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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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대~9대:              허구
일본 10대 숭신(崇神)왕   가야(또는 신라)
일본 11대 수인(垂仁)왕   가야(또는 신라)
일본 12대 경인(景行)왕   가야(또는 신라)
일본 13대 성무(成務)왕   가야(또는 신라)                      천황가 계보에서 非백제계는 10~13대까지 총 4명뿐
* 백제와 가야의 지배계급은 같은 진왕계 출신/뭐든지 기원이 중요/이때부터 백제&가야는 일본의 모국
일본 14대 중애(仲哀)왕   백제인
일본 15대 응신(응神)왕   백제인 390~402년?  ? ~ 410년?  일본 14.5대 (비공식왕인) 신공과 친족관계
일본 15대                   백제인                                    백제13대 근초고왕의 처남 (조사 필요/한국계는 분명)
일본 15대                   백제인                                    진(眞)씨의 시조 (단, 일본 내에서만)
일본 16대 인덕(인덕)왕  백제인                                    응신왕의 아들 
↑ 인덕왕은 지금 닌토쿠천황이라고 호칭하는데. 이 왕릉이 바로 진시황릉과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3대 무덤. 그 가운데 최고로 면적이 넓음. 전세계에 현존하는 세계 최대 면적 무덤. 백제계인 16대 인덕왕을 위해 뭐 하러 그렇게 크도록 지었을까? 당시 추정 연 140만 인구가 동원될 정도로 대공사였는데, 당시 인구를 300~400만명으로 잡아도, 총인구 가운데 대충 1/2~1/3 가 매달려야 할 정도의 대공사. 바로 이 인덕(닌토쿠)왕이 백제인이기 때문에 왕릉 소유자인 궁내청은 발굴과 조사를 일절 금하는 것. 더더군다나 닌토쿠왕릉에서 과거 일부 발굴된 유품들은, 1971년 한국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물품들과 거의 복사판. 이건 뭘 뜻하느냐? 백제 무령왕이 6세기 후반(523년) 사망이니까 닌토쿠천황릉 축조는 600년일 수도 있고, 닌토쿠 왕릉에 잠자는 그분은 결국 닌토쿠가 아닐 가능성도 매우 크다는 것. 물론 전문가들은 전부 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함구. 그냥 쉬쉬하는 배경지식일 뿐. 그래서 문화시설 안내문에서 흔히 보이는 설명도 "...신사는 숭신천황 7년(기원전 90년)에 창건된 것으로...".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등에 가면 그런 설명이 사실인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게 뻥. 1700~1800년대에 이미 전국 신사 10만개? 지금 전국에 100만개 되나 모르겠는데 그 전국 방방곡곡에 쫙 깔린 신사가 100% 저처럼 기원전 건립, 기원전 어쩌고저쩌고 다 유리하도록 거짓. 반면 문화유적지에서 불리한 건 모조리 빈칸. 역사 교육도 똑같음. 결국 지어낸 게 진지하게 사실이 된 예. 뭐가 사실이고 아닌지 구분이 안됨. 전국 모든 문화재, 역사서, 전국민 사고방식에 입력된 지식...그 모든 걸 바꾸는 게 쉽겠나, 아니면 그대로 사극을 유지하는 게 기쁘겠나. 전자가 쉽다면 애초에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 
일본 18대 반정(反正)왕  고구려계
일본 19대 윤공(允恭)왕  백제계                                       신라계라는 학설 있음
일본 20대
일본 21대 웅략(雄略)     백제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BC 18 ~ AD 27) 제사를 지냄
일본 22대
일본 23대
일본 24대
일본 25대
일본 26대 계체(繼체 백제인. 백제24대 동성왕 아들/백제25대 무령왕 친동생/곧 26대 계체=곤지! (쿠데타 왕조)
일본 27대
일본 28대
일본 29대 흠명(欽明)    백제인                             백제 무령왕 친조카? 친왕자/왕궁 명칭을 백제궁으로 명명
일본 30대 민달(敏達)    백제인                                         백제 무령왕 외손/백제 대정 땅에다 새 왕궁 건립
일본 31대 용명(用明)    백제계                                         백제 무령왕 외손
일본 32대 숭준(崇峻)    백제계                                         백제 무령왕 외손
일본 33대 추고여왕      부여계                                         백제계? 부여계?
일본 34대 서명(舒明)    백제인                                         30대 민달왕 친손자
일본 38대 덴지 (天智)   백제인
37~40대 국력을 총동원해서 백제 지원군단을 추진...백강전투까지 참전. 나중 쿠데타 발생*

* 40대 진무 천황이 조카였던 39대 고분 천황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게 또 의미 깊음. 일본서기에 나오는 40명 왜왕 중 중국풍 시호에 하늘을 뜻하는 '천(天)' 이라는 한자가 사용된 것은 38대 천지와 39대 천주, 딱 2명 밖에 없음. (중국풍 시호가 아니라 일본풍 시호로 따져도 저 둘 외에 29대 흠명왕 밖에 없음) 그런데 백제 구원군 파견 반대파였던 40대 진무 천황이...(상징적 의미로) 하늘을 죽였다? 주다스 프리스트네. 일본서기의 마지막 왜왕인 40대 진무 천황의 중국풍 시호는 지통(持統), 왜풍시호는 고천원광야희. 고천원광야희는 무얼 뜻하냐? 고천원은 높은 하늘 벌판이니까 백제를 뜻함. 일본서기 저작자들이 아무리 반대로 바꾸고, 거꾸로 꾸몄어도 비밀 들을 후세에 캐내라고 다 암호문에 암암리에 힌트를 내포시켰음. 이와 같은 기록의 총체인 일본서기. 그런데 일본서기를 쓴 목적은? 바로,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왕들이 왜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기 위해서!
.................모두 기록하기 귀찮을 정도...........................50대 간무천황은 물론이요............
    * 제21대 유랴쿠 천황이 죽은 후 혈통이 끊기는데. 기록에 보면 전 왕조 주아이 천황의 5대손 야마토히코를 왕으로 모시려 했지만, 야마토히코는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도망가버렸다는 기록. 물론 이 또한 만세일계를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주아이 왕조는 이미 오진 천황에 의해 무력으로 타도되었기 때문에 혈통을 생각한다면 오진 천황계를 선택하지 굳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주아이 천황 혈통을 찾을 일은 없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됨. 그 후 후보에 오른 게 오진 천황의 5대손 게이타이 천황이라는데 직계의 5대손이 아니라 한성 백제계. 게이타이 천황은 이름 뜻이 '체제를 계승한다'. 곧 뜻을 보니 오진 천황의 5대 손이라는 것도 허구. 왜냐? 왜냐면 만약 혈연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게(繼)'가 아니라 '사(嗣)'자를 적용했을 것이기 때문. 
    즉 게이타이 천황이 왕에 추대되기 전가지 근 10년 동안 왕통이 끊겼다는 건데. 천황의 존재가 후세처럼 절실하지 않았고, 한편으로 호족들 사이의 이해가 엇갈려 천황 선출이 쉽지 않았음을 시사. 또 백제와 왜나라는 당시 본국와 분국 형태였으므로 국경 개념조차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혈통이 분명치 않은 인물보다 가까운 문명국의 혈통인 백제왕자를 천황으로 추대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을 것임. 그게 정통성. 게이타이 천황 이후 5백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건 진왕계의 핏줄이라는 가치 때문. 당연히 중간에 열도 내에 적당한 인물이 없으면 백제왕계 인물을 택하는 건 지극히 합당. 또 당시 왜왕들은 10명 정도의 왕비와 후궁을 거느렸기 때문에 많은 후손들이 기내에 살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백제왕자를 추대했느냐? 그 특별한 이유는 재차 반복하지만 모국 백제와 분국 왜의 관계 때문. 미국 독립전 뉴잉글랜드 지역 명망 높은 가문이 영국 귀족출신을 선호했던 것과 같은 이치. 더더군다나 인근 지방조차 제대로 다스리냐 못 다스리냐 그보다, 중국 북조 남조와의 관계까지 부드럽게 조율하고 주변국 정세에 밝은 인물을 추대하는 건 지극히 합당. 
    그로 말미암아 옛날에 소가 가문에서는 배우자를 한국 땅에서 직접 데려오거나 왜국 내의 다른 한국인 가문에서 선택했다. 이 역시 고대사 문명은 수입이 아니라 이입이란 뜻. 더불어 일본역사를 통틀어 손꼽는 쇼토쿠 태자, 길이길이 숭상받는 스이코 여왕 역시나 순수 한국인 혈통. 근데 쇼토쿠 태자의 얼굴이 1만엔 권 지폐에? (지금은 어떤가 잘 모르겠는데 과거) 1백엔, 1천엔, 5천엔, 1만엔 등 일본에서 지폐 도안에 들어간 횟수가 가장 많은 사례로 기록됨. 결국 모순으로 대체 어떻게 꼬인지 모를 지경. 
    참고로 쇼토쿠 태자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쇼토쿠 태자는 백제 14대 근구수왕을 그대로 베껴 이름만 바꾼 것이 분명. 또 일본 학자들도 수도 없이 그렇게 검증. 1939년 쓰다 소키치/1992년 이시와타 신이치로/2001년 오야마 세이치/2004년 다니자와 에이이치...... 모두 쇼토쿠 태자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판단하는 학파가 제일 많지만... 더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문화이기 때문에 차마 자기들 입으로 백제 14대 근구수왕을 입에 담지는 못함. 거의...거의...목구멍까지 넘어왔던 쇼토쿠 태자의 정체는, 거기까지만 밝힘. 다음으로 드물게 쇼토쿠 태자를 소가노 우마코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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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158년 대초자, 1648년 원본 '대초자'를 필사했다는 히라노어가의 해설문에 따르자면,
    일본 29대 흠명(欽明) = 백제 성왕. 즉 백제 성왕이 왜29대 흠명왕을 겸임했다는 걸 지적. 당연히 나중 일본서기는 백제 성왕의 왜왕 겸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흠명이 즉위 연도를 8년 윗대로 끌어올림(조작). 이로써 백제 불교의 왜 전파와 포교도 장장 14년이나 나중으로 끌어내려짐. 일본 고대사학자의 연구에 따르자면, 성왕 18년(540년)에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한 백제 성왕은 곧장 왜국으로 망명하였다고 주장. 물론 당시가 숭불파와 배불파, 작은 종교 전쟁의 참상이 발생했고 왕위 계승이 치열했던 점, 또 다른 역사서를 참고해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 더더군다나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 이나메가 숭불파였다는 점. 이어서 그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도 숭불파, 그때 마침 천연두 창궐에다 배불파가 상소문 올린 다음 왕 허락도 없이 절을 불태우는 사건 발생.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그렇게 백제 성왕은 야마토 왜 29대 흠명왕이 됨. 단, 백제 성왕은 백제왕을 포기한 게 아니라 겸임. 또 일본 15대 응신(응神)왕 아들이 바로 동성왕자(5째 아들). 동성왕자는 일본 21대 웅략(雄略) 치하 왕실에서 백제 22대 문주왕의 친동생. 일본 15대 응신(응神)왕이 죽자, 동성왕자는 21대 웅략왕 시대에 5백명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여, 그렇게 백제 동성왕이 됨. (혜왕자가 백제로 귀국시는 1천명 호위). 참고로 백제 동성왕 다음이 무령왕인데,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음. 즉 1145년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 720년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백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대. 자, 그럼 무엇이 옳냐? 여러 가지 정황상 아마 <일본서기>쪽이 사실에 가까울 걸로 보여진다는데, 단순히 OX 문제가 아닌 건 분명. 그리고 드디어 감격의 증거들은 무더기로 쏟아져나오게 된다. 즉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 발굴. 그날은 1448년간의 오랜 침묵이 깨진날. 발굴 결과 무령왕의 휘가 '사마'라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쾌거, 빛나는 성과를 얻음.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또 무령왕의 휘호가 사마라고 증명됐으므로 곤지의 아들이 아닌 것은 확실. 따라서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아버지가 동성왕(모대왕)이 아니고, 한 대(代) 올려서 무령왕의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바꿔놓았음이 증명됨. 
    (여기서 역대 천황 가운데 독살로 죽은 배경지식 잠깐 언급. 일본사에서 천황 암살 사건은 크게 3가지.
    32대 숭준(崇峻)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지시)
    110대 고코우묘우 천황
    121대 고메이 덴노 천황)
    이것만 봐도 한일 고대사는 지금까지 코끼리 뒷마리를 만지고서 추측만 했던 셈. 저속한 표현으로 들어엎어야 할 정도. 관련하여 488년 편찬된 송서(宋書)에도 곤지는 등장. 일단 곤지 즉 부여곤지(扶餘昆支, ? ~ 477년 7월)는 백제의 왕자이자 왕족, 정치인인데 백제&왜 모두에서 비중있는 인물인 건 분명. 예를 들면 곤지는 백제나 일본 어디에서도 왕으로 즉위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를 일관되게 곤지왕으로 언급. 결국 학계에서는 곤지를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변신시킴.
    모 일본 역사학자는 곤지 = 일본 15대 응신(응神)왕이다...
    모 한국 역사학자는 곤지 = 일본 21대 웅략(雄略)왕이다...
    뭐지? 아니 대체 왜 곤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곤지는, 어? 곤지 즉 부여곤지(扶餘昆支, ? ~ 477년 7월)는 백제의 왕자이자 왕족, 정치인인데 백제&왜에서 또 옛날에나 지금이나 왜들 그러냔 말이다. 일단 알면 알수록 일본 역사학계는... 全일본은 1,500년 내내 그랬듯 감추는 거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만 알면 됨. 그런 의미에서 천문학적 슈퍼 컴퓨터를 돌려보면... 정답이 나올까, 안 나올까? 그 말은즉슨 전문가들은 알면서 모른 척한다 그 말 밖에 안됨. 
    참고로 <응신왕 = 백제인>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일본은 한국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엄청난 투자! 그런 이유로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응신왕 부분은 완전히 누락됨.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대왕을 꼽으라면 단연 13대 근초고대왕(초고대왕)과 24대 동성대왕인데. 4세기 중반에 신라, 가야, 고구려를 정벌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근초고왕. 그런 사실을 일본서기는 왜곡하여 응신왕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를 정벌한 것으로 씀. 허나 알고보면 응신왕의 정체는 백제 13대 근초고왕임. 그처럼 근초고왕의 업적에는 당연히 왜(倭)를 식민지화에 성공. 끝으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필자는 일본 천황가의 윗대 즉 15대 전후를 백제계라고 통칭했는데. 무수한 문화재를 바탕으로 연구한 고고학 고증에 따르자면, 일본 천황가의 윗대 즉 15대 전후를 부여족으로 추정. 
    또 참고로 <게이타이 = 곤지>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일본은 일본서기에 연도를 조작. 결국 곤지가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시실 만큼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는 뜻. 당시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통과. (반면 신라 입장에서 기술한 역사서에도 곤지는 나오지만. 신라 입자에서 곤지는 존재감이 미미할 뿐. 고로 신라 위주로 과장해서 기술하는 게 중요하지, 타국을 위해서 자국 역사서를 당시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그건 지금도 열도 역사 교육을 보면 일맥상통)

   [천황가 계보 요약]
    도표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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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조         계통      영토            중심지                시조                 왕조 성격         무력 기반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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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착세력   신라계   나라            야마토                나카스네히코       무당적/주술왕   청동기
2   스진        가야      기내(나라)     야마토(이하레)      스진=진무           정복왕조         철기
3   오진        백제      기내 일대      기내(가와치/나라)  오진                  정복왕조         철기/기마
4   게이타이   백제     기내/서일본    아스카               곤지=게이타이      쿠데타
* 게이타이는 한성 백제계인데 웅진 천도후 일본으로 건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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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일본 역사계/고고학계/사회지도층의 방기(외면)]
    이유는 논외로 치고 마치 완벽하도록 짠 것처럼 전체가 외면하는 사항들 일부만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 일본서기─신찬성씨록─충구발(1700년대 고증학자의 저서)에 따르자면 왜왕과 사회지도층은 모두 백제인 의복을 입음 
  • 일본의 불교 도입 이전 무속적 통치자들의 백마 숭배 사상과 관련하여 연구 논문은 0 (뭐가 두려워서?)
  • 천황가 족보 연구 엄금 / 왕릉 귀족릉 발굴 금지 엄금 / 국보 성형 조작 및 그런 사실들 은폐
  • 국사와 자국사 관련 세계사를 도대체 얼마만큼 왜곡하여 교육하는지...포기함
  • 일본 최고(最古) 신사인 이즈모 신사에서 한국 관련 배경지식은 절대 언급 금지
  • 일본 신사 서열 no.1인 이세 신사. 한국의 무속신앙 복사판이냐... 함구도 불분율
  • 영국영어가 미국영어로 분화된 특징으로 스타카토 발음이 유연함으로 바뀐 걸 들 수 있는데. 약 1,500년 전후 백제말/고구려말/신라말/부여말 등이 일본에 전해졌을 텐데. 그래서 통역자 없이도 의사소통이 원활했을 테고. 그렇게 현재 일본어에서 한국말의 원형을 무수히 찾을 수 있는데. 영국영어 → 미국영어 변천 특징처럼. (고대)한국어 → (현대)일본어 특징도 뚜렷. 즉 대표적으로 '게으른 현' 현상! 북미 영어가 발음을 영국영어처럼 똑똑 끊지 않고, 술술 부드럽게~! 그처럼 고대 한국말이 일본어에 녹아들면서 발음 없어지는 특색이 발생. 또 "영국영어/미국영어"는 교류가 많고 영국과 유럽은 가까웠던 반면, 교류 적고 쇄국도 많았고 기술 감안 훨씬 멀었기 때문. 일본서기에도 통역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음. 이런 배경지식은 절대 배포 금지
  • 약 170만년 전부터~1만년 전까지. 즉 기원전 1만년 전후하여 빙하기와 간빙기. 그 즈음에 아시아 대륙과 일본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음.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100미터 낮았으므로 지금 더 깊은 바다는 곧 육지 내 호수였음. 즉 그때 육로로 대륙 문명이 전파된 것만 인정. 그 뒤 기원전후로 넘어온 건 불인정. 그래서~ 천황가 계보를 신화로 억지로 끌어올려 연결시킴. 단, 전국민이 알면 안됨. 일절 발설 금지. 말 했다간 뺨 맞음. 침 뱉음. 왕따돌림시킴. 줬던 지위와 재산도 박탈
  • 일본인 스스로 만든 고대 유작이나 유물이 거의 없다는 점. 교육 절대 금지. (해적/전쟁/구입/식민 수탈 등 입수 경로도 빈칸)
  • 7세기 이전 백제 및 한국계 문명 전파에 대한 사실 누락. 일절 없음
  • 본 칼럼에서는 백제를 유독 가장 비중 높게 언급하는데. 실상을 따지고 보면 왜나라, 즉 고대 일본에서는 크게 여러 세력권으로 나눠진 분국 형태임이 분명하다. 즉 고대 일본 내 원시부족 족장계, 이누이족처럼 더 원시부족 족장, 각각 부락 단위 족장을 신으로 모시는 촌락들. 그 외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부여계가 가장 큰 세력권을 형성. 거기서 결국 백제계가 가장 큰 영역과 영향력을 거머쥐었기 때문에 본 칼럼에서 백제를 비중있게 다루는 것임. 즉 나머지 신라계, 고구려계, 부여계도 고대 일본 내에서 막강한 실세를 누렸음
  • 일본 최대 자료집인 〈군서유종〉,〈속군서류종〉에 기록된 자료를 전국민이 알면 안됨. 참고로 〈군서유종〉,〈속군서류종〉는 1700년대 후반 완성. 왜냐? 일본서기와 달린 신뢰도가 훨씬 순수한 〈군서유종〉,〈속군서류종〉에 따르자면. 당시의 신라왕이 훗날 세습지방관이 되고 지방행정관이 되었다고 나와 있음. 그 말은 곧 신라계 도래인 집단거주지도 많았고 당시에 이미 신라인들이 (지금 용어로) 시장, 주지사, 군단장, 추기경, 대주교, 지방법원장을 숱하게 연임했다는 증거. 가령, 1970년대 말 발굴허가가 떨어져 시작한 다카마쓰 고분. 그곳 양식은 거의 100퍼센트 고구려 양식에 따른 무덤. 이 고분은 재위 697~707년의 일본 42대 몬무 왕릉과 인접. 그걸로 보아 왕의 비빈이나 후궁들 중 막강 실세로 추정. 8세기 정도면 일본은 당나라 영향권에 들어간 상태인데 일본 고고학계는 8세기에도 무덤조차 한국식이란...짜증은 극에 달함. 뭐든지 조작하고 거짓으로 곡해할지언정 이미 발굴된 외국 양식 무덤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왕짜증..속 뒤집어짐
  • 일본서기에서 명시한 사료를 바탕으로 검토하면 서기 500년경 26대 계체왕은 5만 병력으로 신라에게 빼앗긴 가야의 땅을 되찾으려했다는 점. 그 말은 곧 현일본이 당시에 신라 영토, 백제 관할, 가야계...등으로 분할되어 있었다는 걸 증명. 쓰쿠시(규수 북부 후쿠오카 근처)의 호족 이와이가 신라의 분국 형태였는데, 그걸 진압했다고 일본서기는 '이와이의 반란'으로 과장해서 표현
  • 자국과 인접국들의 굴욕감, 자존심 훼손, 사실 무근, 인본주의와 다른 야만성을 통합하여. 근거 없는 원한(さかうろうみ)...도덕적 우위...같은 말 만들어내기 바쁘니까. 상대하지 않겠다(相手にせす) 라고 선언하고 싶은데. 실상 상대하지 않을 수 없거든. 인정하기도 싫어. 늬 꺼는 내 꺼 내 꺼는 원래 내 꺼니까. 물론 이걸 자국민들이 모르냐? 절대로 모르지 않음. 단, 솔직하면 죽음 뿐이라는 인습이 1만년 동안 DNA에 각인됐을 뿐. 고로 이대로 지구 멸망 때까지 그대로 가는 방법 말고는 없음. 빙하기, 간빙기는 가버렸을지언정 그분들께서 아시아 싫어하니까, 자기들 만큼은 유럽인이니까 진짜로 땅덩이도 아시아로부터 점점 밀려나는 중. 뭐든지 조작하는 거 싫어? 너 일본에서 나가. 이와 같은 원리를 인정한다고? 너 여기서 빠져. 그래도 착한 척 어떻게 안되겠냐? 꺼져!
  • 장장 1200년 이상 이어온 유서 깊은 명소, 쿄우토시에 있는 히라노 신사. 그곳에 모셔진 신사의 제신들이 백제신이라는 건 절대 발언 금지. 매해 4월 2일이면 역대 천황가의 황태자며, 공주, 조정 대신 이하 고관들이 총집합. 물론 그게 1900년 후반 때까지 1200년 이어졌는데. 지금은 어떤가 모름. 









    16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는 판타지 역사 드라마다. 방영기간은 2007년 9월 11일부터 ~ 2007년 12월 5일까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태왕사신기가 본 칼럼에 끼어드는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중차대하기 때문.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멜로드라마 요소를 극적으로 사극 반영하여 흥미진진하게 그렸을 텐데. 하필 그게 일본 천황가/일본 역사와 연관되었으므로, 어딘가에 아주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는데. 따라서 한국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이례적으로 일본 자본력이 대거 투입되었음. 물론 각종 산업계를 보면 세계 자동차업종 주식 보유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게 실정이나. 말 그대로 매우 이례적으로 발빠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는 건 뭘 뜻하냐. 숨길 게 많다는 얘기. 그건 곧 무려 15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 중국 농부에 의해 발견된 광개토대왕비부터 일본에 불리한 사실이 많았다는 걸 뜻하는데. 즉 광개토왕릉비 비문 훼손, 곡해, 역사왜곡... 본 칼럼을 비롯해 배경지식이 무더기로 연결됨. 참고로 광개토왕릉비는 1880년 중국 농부가 발견/1881년 일본군이 비공개 1차 탁본 뜸/참모본부 해독...시찰...재검토...대책 강구/1895년 일본군이 공개적으로 최초 탁본 떴다면서 언론 공개(언론 공개전 이미 조작할 가능성 농후/나중 일본역사계에서도 1900년 전후에 이미 조작했을 걸로 인정)/1907년 프랑스 학자 샤방느가 현지에서 입수해 사진 찍음/1913년 일본 학자가 조사했을 때 이미 비문 조작. 즉 광개토왕릉비에서 불리한 건 석회로 바르고, 그 위에 유리한 한문 새김. 물론 증거는 겁나게 많음. 그래서 광개토왕릉비가 왕의 업적 요약이 아니라 먼 섬나라 역사왜곡을 변호하는 내용으로 일부 변조됨. 그렇다면 단순히 광개토왕르비만 조작했느냐, 하면 아님. 예를 들어 한국사 최고(最古) 역사서 2권 중 하나인 삼국유사. 현존하는 삼국유사의 원본은 2가지로 나뉨. 
    (1) 고려시대 정덕본(正德本): 고려 충렬왕 1년(1275년)에 일연이 쓴 고려시대 원본
    (2) 조선시대 정덕본(正德本):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행
    여기서 (2)는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소에 있는데 그걸 열람 및 검토해보면 원본과 일부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음. 당연히 불리한 거 빼고 유리한 내용으로 조작했음. 그리고 일단 드라마 제작 당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 야마토 왜국의 응신왕. 전자와 후자가 밀접한 관계이므로, 일본에 금기시된 천황가 족보 즉 응신왕에 대한 부분을 드라마에서 쏙 빼버리게 압력을 가함 → 그래서 최초 백제 아신왕 역으로 캐스팅되었던 송일국씨가 도중하차됨 → 18회에서 직접적으로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대사가 방영됨 → 그런데도 언론계든 오락산업계든 길들여진 좀비들은 뭘 모름 → 그래서 드라마에서 광개토왕은 역사와 사실에서 멀어지고, 신의 힘과 연결됨 → 그건 곧 천황가 족보처럼 신화와 연결되는 이치(주인공도 그래서 배용준이 맡게 됨) → 한중일 삼국에서 고대사는 일본이 제일 후달리니까 먼 역사는 무조건 신화로 연결시켜야 됨 → 당연히 역사가 가깝든 멀든 죄다 왜곡. 날조. 뻥 → 태왕사신기 드라마에서 백제 아신왕과 왜왕 응신 내용을 전부 빼버림 → 근초고왕에 의해 전성기를 이룬 해양제국 백제를 깎아내림 → 끝이 없음.
    역사 배경: 고구려는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음. 한때 강국이었던 것 옳지만. 실제 고구려가 중국 북남조를 넘볼 정도 국력은 전혀 아니었음. 당시 중국 북남조도 북조 남조 통일이 본 목적이니까, 고구려를 굳이 적으로 몰아붙일 이유가 없었음. 실제 고구려가 때로는 조공을 바치고, 때로는 우월한 입장에 있는 등 들쑥날쑥. 중국사를 보면 왜 긴 왕조가 1번도 없고, 어째서 당시에도 5호16국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을까? 왜냐하면 크니까. 고구려도 마찬가지. 더불어 내부 분열. 부패. 국경도 길고 넓으면 그 반대보다 절대적으로 불리. 인접국도 적은 게 절대 유리. 그래서 고구려는 수나라를 대적해 승리하는 전투에서는, 정면 대결이 거의 없었음. 식민지배 당한 역사와 (통일)신라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드라마 뿐만 아니라 과장된 게 너무 많음. 석굴암의 수학적 비례미 역시나, 무슨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날조. 그 정도 황금비? 유럽만 봐 봐. 응? 천황가 족보에서 BC 660년과 억지로 연결됐다고 우기는데, 이집트에서는 맘모스가 걸어다니던 시절보다 무려 1000년 일찍 피라미드를 지었음. 그냥 공룡과 사람이 공존했다고 봐도 될 지경. 유럽사만 봐도 성당들 벽화, 천장, 조각상... 비교가 되나? 물론 원시부족 문화도 좋긴 좋다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냔 말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 증거, 자료, 방만한 게 아니라 천문학적? 그분들은 좋겠다. 별명만 계속 늘어나니까. 하여 이번에는 뭐다? 조작대국!
    역사 왜곡: (한국사 왜곡) "고구려-신라-백제"라는 삼국이 통일된 후, (통일)신라는 주변국에 비해 약소국으로 살아남았는데. 그게 역사 기록에 수도 없이 기록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흑백TV 세력에 의해 (통일전)신라&통일신라를 띄우기 위해 무려 100년 동안 역사학계마저 괴상하게 발전이 없었음. 또 당시 역사에 따른 열등감과 여러 이유 때문에 <삼국사기>같은 역사서 역시 일본서기처럼 많은 부분이 들쑥날쑥. 일본에서 인디애나 존스 사건이 발생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1992년 거북선에 장착했던 총포라며 언론을 들었다 놨던 총통사건. 결국 최근에 만든 가짜였던 것으로 순천지검이 밝혀냄.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유난히 '우리'라고 끊임없이 표현했는데. 과연 왜 그랬을까? 그건 흡사 오늘 날 한국역사학계에서 100년 발전 및 개선을 더디게 만드는 구식탱탱묵은 흑백TV와 판박이처럼 똑같은 현상이다. 그분들은 엑셀파일 목록들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 치밀한 분석, 신들린 연구를 거치지 않고. 자기 입맛에 유리한 대로 역사를 해석했으니 필자만 더럽게 일복이 넘칠 수 밖에. 더불어 한국 고대사 역시나 대폭 수정이 필요. 국가 체계가 한반도에서 기원 0년에 약했을 테고, 그 말은 중국쪽에서 삼국(백제-신라-고구려)일 밀려서 내려왔다는 해석도 가능함. 일본사를 캐면 캘수록 한국이듯, 한국사 역시나 캐면 캘수록 중국과 통하는데. 이 말은 곧 삼국 고대사를 통채로 
들었다 놨다 들어엎어야 한다는 얘기. 
    역사 왜곡 정말 심각하다. (일본사 왜곡) 일본은 350~400년 쯤에 역사가 시작된 게 사실. 그 이전은 국가 체계가 없었다는 뜻. 그런데 한중일에서 역사 주제로 일본이 꼴등이다? 꿇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음. 따라서 첫째 천황가 족보를 BC 660년으로 끌어올리고, 둘째 천황가 족보를 신화와 연결시킴. 그 때문에 전국민도 잘못된 지식이 진짜인 줄 알게 됨. 가령, 태왕사신기 드라마의 역사 배경을 이렇게 인식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 당시 중국은 5호16국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태왕사신기 드라마에 일본이 맹수처럼 조심스럽고, 먹잇감에 달려드는 식으로 최선을 다한 것 왜일까? 왜냐하면 25명의 왜왕의 혈통 문제이기 때문. 2001년 당시 125대 천황의 백제 관련 발언 때문에 全일본 매스컴은 물론 열도의 모든 사회지도층이 들썩거린 일. 그와 판박이처럼 닮은 게 바로 태왕사신기 제작 개입 사건. 일본서기에 따르자면 1대부터 14대까지 나오고 다음에, 15대 응신왕 집권으로 고대국가 야마토왜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와 같은 천황가 족보가 알려지면 날조된 그림은 모두 드러나고. 그러면 임나일본부설도 탄로나고. 1500년 역사왜곡도 들통날 뿐만 아니라. 백제의 분국이었던 왜가, 혹시, 당시 일본이 아니라 지금 중국 내 어딘가는 아닐까? ~라는 연구 분야까지 만들기 때문에 골치아파짐. 자, 딱 1개 질문을 생각해보자. 과학적인 가설을 단 1문장으로 간결히 정리해보잔 말이다. 일본은 지진으로 그 어디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다. 그래서 일본 역사서, 문화재, 유적지 비문들에 지진 관련 내용들도 많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일본서기에는 지진에 관련된 내용이 단 1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왜냐, 왜냐하면 혹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일본(왜)은 현재의 일본 땅이 아니라, 다른 곳을 가르키기 때문에? 의혹은 깊어질 수 밖에. 즉 당시 백제는 본국이자 모국 개념이었고, 일본(왜)는 백제의 분국 형태였는데. 일본서기에 지진 내용이 일언반구도 없단 말은... 백제가 오른쪽 분국(일본=왜) 외에도 왼쪽 분국도 운영했다는 뜻? 정답은 <삼국지 동이전>과 <진서> <남제서> 등등 역사서 엑셀파일을 분석해보면 아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곧 이미 다 알면서 모른 척하거나, 왜곡한다는 말 밖에 안됨. 앞서 말했듯 왜 일본서기에는 지진에 관련된 내용이 단 1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반면, 일본서기에 일식 기록 분석은 수도 없이 등장한다. 가령, 
    ㄱ)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
    ㄴ) 710 ~ 792년의 나라시대의 일식 36개
    ㄷ) 794 ~ 1,183년의 헤이안(平安)/후지하라(藤原)시대의 일식 132개
    ㄹ) 1,189 ~ 1,326년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일식 38개
    ㅁ) 1,343 ~ 1,599년의 일식 80개
    ㅂ) 1,600 ~ 1,899년의 일식 119개
    이 6개의 시대구분 중 ㄱ)의 결집 위치는 남지나해상인가? 일단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임. ㄴ) 일본의 전 역사기간 중 가장 결집도도 낮고, 결집 위치도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관측에 의한 자료로 보기 어려움. ㄷ) 만주 지역에 약간의 집중이 되고 있으나 결집도가 아주 낮음. ㄹ) + ㅁ) + ㅂ) 시대는 결집도도 높고, 정확히 일본 열도나 가까운 곳으로 결집위치가 나타남. 
    지진과 일식 얘기는 집중력 떨어질까 봐 꼭 꺼낸 얘기는 아니다만 그냥 그런 게 있다 정도로 넘어가고. 어쨌든 응신왕이 광개토대왕한테 패배한 다음, 일본으로 도망 및 망명가는 게 역사요 사실인데. 그걸 만인이 알게 되면 일본한테 뭐가 좋겠나. 그래서 태왕사신기 드라마에 일본이 적극 개입하게 된 것임. 가까운 역사만 봐도 전쟁성노예와 전쟁남자노예들이 1천만 명 끌려갔는데, 그런 일 없었다 외면 일색. 가끔 유감스럽다 등등. 그런데 옛날 옛날...역사를 신화로 연결시킴. 
    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중국 국적인이 현재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에 가서 국왕과 총리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없다. 절대 불가능. 그런데 옛날에 일본은 백제인이 무려 몇 백년 동안 그랬다. 그 뿐만이 아니라 쿠바계가 현 미국 대통령은 물론 주요 정부 요직과 사회지도층 태반을 장악하는 일. 지금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옛날에 일본에서는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백년 내내 그랬다는 것. 그게 바로 본 칼럼의 주제다. 국가 체계가 없던 시절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교양, 토속신앙 등 모든 것을 전파는 물론 바이킹족이 영국 고대사를 몇 백년 내내 장악. 그러니 500년 내내 스칸디나비아 왕족들 무덤을 영국 내에 100기, 200기 등을 전국민 총동원해서 건립.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의 모국이 위기에 처했다 해서 국력을 총동원해서 3년 내내 군수품 생산해서 화살 10만정, 배 400척 만들어 거기에 전국의 군인을 총동원해서 출동. 그렇지만 아아 옛날이여, 그걸 거꾸로 해석하고 전국민을 좀비처럼 속이기만. 세뇌의 끝판왕도 이걸 보면 항복하고 기권할 게 뻔한 일. 얘기가 곁가지로 흐를 수 있으니 돌아와서. 결국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살펴보니 일본서기가 만들어질 당시 왜는 현재의 일본 지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데. 또는 일본열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여지도 있다는 얘기고. 그처럼 일본은 기원후 350~400년 이전의 역사가 없는 게 사실이고(물론 역사는 있는데 국가 체계 없음), 대만도 1,600년 이전 국가 체계가 원시부족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 허나 일본은 아시아 정벌과 세계대전을 일으켰는데 그걸 어떻게 인정해? 자존심 팍 상함. 그러므로 역사를 왜곡할 수 밖에.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태왕사신기는 한국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실속은 일본드라마가 되어버린 결과라는 것. 이래서 일본이 일개 드라마에 사력을 다해서 달려들었던 것임. 마치 파리가 송장에 달려들듯이! 그런다고 똥파리가 산짐승에는 달려들지 않느냐? 아님. 절대로 아님. 닥치는 대로!





    17

   [일본 국보에서 非일본 제작]
    도표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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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공개/비공개         제작자/제작지               모셔진 신 또는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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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                                                     나고야/보생원      백제 왕족 안만려 (판본: 1644년판)
일본서기                                                                          백제/신라계 (안만려 포함)/향후 몇 백년 동안 편집
국보 1호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공개(제작..비공개)  신라인/신라
칠지도                                                     비공개                백제13대 근초고이 왜15대 응신천황(근구수태자)에게 하사/백제
인물화상경                                               비공개                백제인/백제 
와카야마현/하시모토시/스다하치만 신사
호우류우지/백제관음상**                              공개                  백제인/백제
호우류우지/구세관음상***                                 1년중 1달       백제인/백제
성덕태자의 초상화                                      비공개                백제의 아좌태자
토우다이지의 대불전/비로자나대불 금동 불상                            백제인 국마려
호우류우지 금당 벽화 12면 글미                                             (왜나라로 건너온) 고구려 학승 담징
호우류우지 오중탑                                                             
호류지 한국 미륵불상                                                         
호류지 사천왕                                                                   
호류지 옥중추자 
호류지 금당벽화
호류지 금동석가삼존불
호류지 금동약사여래불
호류지 소형 미륵반가상
호류지 소형 금동보살입상
호류지 소형 미륵삼존불
코류지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사이호지(西芳寺) 선(禪)정원                                                  설계:백제인
호코지 대불                                                                      
신라선신당                                                                                                       신라명신
나라/아스카/아스카베 신사                                                                     백제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
사이타마현/이나리야마 고분/쇠칼                           칼 주인을 비롯 7대 조상이 백제를 섬긴 명문새겨짐
(수많은) 불화들                                                                  백제/고려
코마견(고구려개) 조각상*          

*코마이누(고구려개)는 시베리아 늑대와 개의 혼혈/이걸 고대에 한국을 지배한 증거라고 세뇌
** 백제관음상의 조성 연대를 상당기간 뒤늦춰 공개함으로써 일본인이 제작한 것처럼 보이게 함. 사실은 백제인 제작! 곧 완곡히 왜곡, 아니면 통채로 빼버리거나, 거꾸로 등등. 물론 유물 이름이 백제인 건...그거까진 못 바꿔서 아쉬움. 극히 유감! 이걸 뻔뻔히 일본 제작이라고 우겼던 기록이 얼마나 많았을까? 허나 이름부터 백제관음상이기 때문에 말 못할 사연만 많을 뿐. 
*** 호우류우지/구세관음상은 제작자 뿐만 아니라 모델도 백제인. 모델은 쇼토쿠 태자인데, 쇼토쿠 태자=백제 성왕=순수 백제인. 불상 외양만 봐도 북방계 특징이 뚜렷, 전형적인 일본 (평균) 남방계와 뚜렷히 대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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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                                                                         단군 신화 + 삼국 신화 베껴씀
그 외 A~Z까지
* 코우류우지(廣隆寺)를 세운 신라의 진하승을 일부 일본 학자들은 그가 한국 살마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날조.
* 토우다이지의 대불전 건립 당시 일본 전체 인구는 약 500만명. 그 가운데 절반이 투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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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교과서, 안내문, 유적지에서 이걸 명시하냐?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요. 만약 그렇다면 이런 칼럼을 왜 쓰겠는지를. 

   [지명(地名)]
    도표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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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명칭들(일본어)                            어원 분석                 기원(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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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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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일본어)                                    어원 분석                 기원(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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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神)                                          곰=고미                  곰
오오기니(감사하다는 교토 방언)                                         오지다(크다는 전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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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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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어원 분석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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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 모시는 신/신사 내 모셔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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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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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견(고구려개) 2마리                             일본의 모든 신사 (희박한 예외만 빼고)
* 모든 신사를 지키는 개가 고구려개라는 사실을 대부분 일본인은 모름. 극히 일부 아는 사람들도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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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보의 시대와 전화가 일상화된 시대. 적잖은 차이처럼 TV 탄생 전후 차이가 보통 일인가. 말탄 부족이 전세계를 휩쓸 때 몽고족이 세계 최고였으나. 무기의 발달로 말미암아 판도는 전혀 딴판이 되었듯이. 대략 2000년 기점으로 인터넷이 점점 발달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하지 않을까? 집권당이 바뀌면서 무슨 행정 파일 양식을 모두 지워버리고 가면, 새로 오는 사람들은 그 양식 만드느라 일도 제대로 못 할 거 아닌가. 구식탱탱묵은 기수 문화처럼 언제까지 흑백TV들 관례대로 그분들 응석에 병풍서드려야 하냔 말이다. 집단지성이 저와 같은 엑셀파일들을 누구나 쉽게 보고, 찾고, 관리하며, 업데이트 기록도 투명하고. 그래서 그에 따라 취미에 그칠 것인가 그 정도 관심사로는 만족 못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걸자! ~라는 결정이 다른 말로 꿈 아닌가? 그런데 시간낭비는 시간낭비대로... 고지식한 것 자체만으로 나쁜 건 아닌데 꽉 막힌 학계 원로가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한다니! 요즘 세상에도 그래야 하나? 위키리스트가 뭐 하러 있나! 논문도 그냥 혼자 최선만 다해서는 어렵다는 게 사석에서 말하기로 일머리 라고 하듯이. 어떤 가설이 문득 떠오르면 그에 따른 검색어 10만개 추려서, 그거 10개국어로 검색결과 PPT, WORD, EXCEL...파일들 양식을 업체로부터 받아. 집단지성들이 노력해서 모아놓은 자료와 비교해보고. 그러면 이런 칼럼 훨씬 쉽게 나오지 않을까? 이미 이처럼 허접한 칼럼 애초에 쓸 필요가 없지 않겠냔 말이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본 문단에 양식 대충만 끄적거려놨는데 꼭 전공 분야 전문가들끼리만 공유하는 양식 말고, 아마추어들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Google DOCS가 무슨 비밀이도 되냐 그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도 다듬고 정리하여 쓸모 있게 만들어 놓아야 값어치가 있단 말이다. 서기 1,234년에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공적이야 귀감이며 좋은 일이지 왜 아니겠나. 그러나 그러면 뭘 하나! 당시 악용될까봐 저작물 출판 자유는 최소화됐고, 그와 비례하여 다른 분야가 발맞추어 발전하는 거 더뎠는데. 뛰어난 하드웨어도 좋다만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무시하겠나. 더더군다나 환상기계를 만들면 그걸 써먹어야지, 환상기계 만들어만 놓고 아무것도 못하는데?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잇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필자만 봐도 본 칼럼 자료 찾느라고 속된 말로 개고생. 대상, 연도, 최초 발견자, 차기 출판 연도, 필사본인가 인쇄본인가, 판본의 신뢰성, 학계 신뢰도, 중간에 훼손-조작 여부, 반대론, 반대론자들 파일, 연관 자료, 인용 지수, 관련 파일, 날조 이유, 근거 합리성......그걸 모두 모아놓은 자료를 만인이 공유하면 안된다는 무슨 이상한 불문율이라도 있나?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없다. 적어도 그래서는 안되니까. 고로,  
    비문 목록_버전_업데이트 날짜.xlsx
    역사서 소실 파일_버전_업데이트 날짜.xlsx 
    역사서 분실 파일_버전_업데이트 날짜.xlsx 
    적극적 역사 왜곡 슈퍼데이터 (Public API and Database)
    소극적 역사 왜곡 슈퍼데이터 (Public API and Database)
    역사 관련 협박.탄압.파직.방화.고문 슈퍼데이터 (Public API and Database)
    일본 보물과 문화재 관련 비공개/이유/사실 목록  (Public API and Database)
    일본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잘못된 상식/세뇌받은 배경지식 목록  (SUPER DATA)
    일본 내 문화재 표지판에서 소극적으로 숨기는 사실 목록 (SUPER DATA)
    일본이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거짓 사실 목록 (SUPER DATA)
    일본 내 문화재 표지판에 명시된 거짓 목록  (SUPER DATA)
    이와 같은 파일들을 손쉽게 찾고, 보고, 연구하며, 업데이트 하면서 시간낭비를 최소화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왜 마치 그런 불합리한 묵시록인지 율법이 있는 것처럼 인터넷을 활용하지 않는 건데!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을 따름. 안 그런가? 더더군다나 중복된 내용들을 헤치고, 모순을 조사하고, 꼬인 거 비교하고, 찾고, 추리고... 시간 다 가버림.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서, 거북이가 시간낭비하면서 근처만 배회할 동안, 토끼는 벌써 저 멀리... 보이지도 않게 되는 이치. 1위 그룹과 펠로톤 후미 3진 4진...골인 지점에 가까와 갈수록 왜 점점 격차는 벌어져만 가는 걸까? 왜냐하면 당장 생각해봐도 다음과 같은 3세가 이유 때문. 그 명징한 까닭 때문에 필자 칼럼이 이처럼 써도 써도 한도 끝도 없는 셈. (앞서 어떤 칼럼에서 세계적 제약사가 자국인 나라와 아닌 나라를 비교한 도표, 그거 읽고서 뭘 느꼈을까?)
    첫째, 전공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게 기본...이 아니라, 시간낭비(빅데이터 정리-공유가 기본인데...)
    둘째, 공사(公私)구분과 우수 교습법 뒷받침...이 아니라, 시간낭비(꽉막힌 원로 심부름,이삿짐,접대,뇌물,아부...)
    셋째, 새로운 학설을 반기고 실력위주&논문...이게 아니라, 꽉막힌 권위자가 정한 100년전 학설만 고집. 조금만 새로운 걸 제시해도 쟤 따시켜! 건너건너 재계 정계 오락산업까지 불이익. 심지어 꽉 막힌 꼰대와 병풍들만 승승장구인데 반면 신선한 학설, 양심적인 학자는 후세까지 가난과 빈곤과 불행. 
    이것 말고도 넷째 다섯째...이유는 많고도 많음. (물론 비교적 과거에 그랬다는 말인데 여러 분야를 놓고 봤을 때 유독 뒤쳐지는 분야가 없지 않으니 하는 말). 악기 배워봤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악보에서 막히는 부분에 충분한 시간을 투입해서 집중적으로 연습하면 30분이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막히는 부분까지, 다시 처음부터 막히는 부분가지. 또 정말 악기를 잘 다루고 싶은 열의가 있냐 없냐, 확고한 목표가 있냐 없냐에 따라 천차만별. 게다가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한 이유는 의자에 앉아만 있지 늘상 딴짓하니까. 참고서도 보면 표지부터 앞부분만 닳아지고 중간 근처에도 못감. 바로 이래서~ 필자 칼럼이 길어지는 것 아니겠나. 안 그렇습니까? 역사학계, 고고학계만 봐도 제 말이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관계자들 있습니까? 단 1명도 없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가마 속의 콩도 삶아야 먹는다. 그렇다고 잘난 분들 천지인 세상인데 밥을 떠먹여줄 수도 없고, 그건 당신이 옳고 내가 틀리요 라는 말하는 거 좋아하지도 않고. 어쩌라는 겁네까, 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게 뭡니까, 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네? 워 워 워. 워 워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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