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5살과 12살의 세대 차이, 당연한 거다.

Spafinale 2018. 12. 5. 22:24

    동물 소리를 내며 천방지축 종횡무진 무대 위에서만 살기. 그건 인생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무대의 성격만 다르지 우리들 생활 반경이 곧 우리들 자서전인 것이다. 복음서를 읽든 인형극을 찍든 이미 영원한 현역이자 행복한 자유인인 것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까.
    그런데 왜 나는 뭘 해도 재미없고, 기발한 영감은 감감무소식일까? ~라고 NB는 상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까. <아니면 말고>, <어쩌라고요!> 카드는 딱 기용해야 할 최적의 시기가 따로 있으니까 말이다. 아낄 땐 아껴야 한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들볶거나 내일은 없다-식으로 막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는 거지. 왜냐하면 내일은 오니까 사랑은 오니까. 친구의 허세에 맞서 툭하면 거짓말, 숙녀의 허영심에 감흥하여 뻥을 심하게 남발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날 얼렁뚱땅 그렇게 된다. 어떻게? 하루는 양치기 소년, 하루는 벌거벗은 임금님.
    그러나 한마디로 세상이 변했다. 변한다. 변할 것이다.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네 마음도 그러니까 당연한 소리. 유행도 너무 자주 바뀐다. 섭렵해야 할 유행가는 일단 양으로 승부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이에게 그랬다. 공과 인형과 놀이터와 장난감과 만화영화도 좋지만 얘야, 동화책과도 좀 친하게 지내지 않으렴? 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핸드폰 하나면 끝이다. 핸드폰, 끝! 어른들 얘기로 애들도 속은 다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벌써 어린이는 반틈 어른인 것이다. 어차피 큰 돈 벌려고 공부하는 거 아니냐, 사랑하는 부부가 행복도가 높아지는 4~5시부터 재회를 기대하는 기쁨을 누리려고 오전에 떨어지는 거 아니냐, 어린이는 다 어린이들 사정이 있다구요, 12살이 5살을 보며 세대 차이 난다는 둥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냐 못가냐는 부모에게 기나긴 꼬리표이지 않냐는 둥.
    그러므로 바쁜 세상, 오락산업도 발을 맞춘다. 머머해, 머머하지 마, 뭐는 뭐다 라고 종용하는 인문교양서는 그렇게 말한다. 미쳐야 한다느니 웃겨야 산다느니, 몰입할 수 있는 내 분야를 찾는 게 최고다, 양치기 소년이 되라 벌거벗은 임금님의 1인자가 되면 연수익이 얼마다 라고. <가설─실험─결론>과 인생 경험과 판례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유니콘 같은 새로움을 동경해야 좋은데, 자꾸 튄다마에 혹하고 바람둥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며 때로는 사기꾼에게까지 속는다. 말 재간과 최면과 상술도 어차피 우리네 인생과 똑같은 '먹고 살기'다.
    때문에 유행의 선도자는 세태를 이끌고 대중은 따라간다. 설득되고 동화되며 부정하지 않는다. 괜찮은 걸 갖기 힘들면 나쁘지 않은 걸 찾게 된다. 약간 다르고 많이 비슷한 정형이 반복된다. 그 패턴을 산업이랄지 경제라 부르고, 그 소비 행위가 곧 인생이다. 자신감 수업, 자존감 화장품, 자존심을 고급으로, 대충 살자 라는 동기 부여 운동. 그리고 신제품. 그러나 앞서 가도 어차피 시간 지나면 구식탱탱 묵은 복고풍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하고 흉내냈는데 남는 건 작심삼일이나 삼류가 태반이다. 당시에는 새롭고 놀라우며 신기했는데 지나고 보면 구닥다리 유물로 잊혀진다.
    그래서 그래프는 자연스럽게 분포가 나뉘게 된다. 유일한 파랑새, 전설의 족제비, 날마다 계절의 여왕 5월인 것처럼 뭐가 그렇게 재밌고 기쁜지 쉬지 않고서 노래 부르는 꾀꼬리. 기생 오라비 같은 제비. 그리고 합리주의. 상류층에게 검소함이 빈자에겐 사치. 뭐니 뭐니 해도 형편에 알맞는 소비. 닭과 늑대와 양들의 잔치. 낭만파는 로맨스를, 매력파는 여행을, 기분파는 으쌰으쌰로. 주색파는 NC에서 나오며 실망감을, 무소속은 인터넷에서, 범인은 그냥 TV로. 그렇게 시간을 보낼 때 어느 화가는 사후에 유명해진다. 생전에 행복해지기 위해 무명 예술가는 꿈을 키운다. <사람 이름 = 브랜드명> 일색이던 시절, 색다르게 과일 이름이 최고의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다녀들이 말한다. 여자의 사고 체계는 애플 OS요, 남자의 두뇌는 안드로이드 시스템이라고. 그건 믿거나 말거나 농담이고. 아무튼, 뛰는 놈 위의 나는 놈 또 그분들보다 월등한 고수는 미리미리 발 빨랐던 그분들이다. 바로, 신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신제품 주식을 일찍 사서 나중 버크셔 헤더웨이 같은 펀드식 종목으로 갈아탄 철새. 단타 매매로 짱돈이 생겨서 친구에게 공짜술을 베푸는 덕망의 주인공은 텃새일 테고. 그러니 선동가는 으쌰으쌰 현장에는 없을 수도 있고─물 들어왔을 때 노 저었다가 분위기 달아올랐으니 빠진 것일까?─관찰자는 나이트클럽 사장실에서 화면으로 친구를 만난다. 알고보면 비리비리한 관망가 가운데 예언가도 있고 두더쥐도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있는 집 부모들은 일찍부터 미리미리 아동님들께 탁월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행을 타지 않는 글씨체. 가령 고전음악. 이왕이면 황금 마네킹 상점 같은 그림. 매체도 딱 1개만 선호. 이를 테면 20세기 중반 이후의 문학은 대부분 영화와 드라마로 대체. (너무 방대하고 제어가 힘들어서 그렇지 TV와 인터넷만 해도 꽤 괜찮은 선생님감이다) 잔소리와 잔재주와 우연과 행운이 혼재된 예술, 그 교양스런 예술에 대한 안목에 대해서 어깨넘어로 배우기. 나는 만인이 아는 누구를 좋아하고 덜 유명한 누구를 사랑한다, 같은 말하기와 나서기에 대한 감별법 전수. 말 한마디와 문장 1줄 같은 최소 정보로써 선거 출구조사와 흡사한 직관력 키우기. 독학으로 가능하다면 내꺼 하자, 내 꺼랑 늬 꺼랑 바꾸자, (우리) 아들하자.
    하지만 인생이 어디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쟤네랑 놀지 마 라면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타이르겠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쟤는 나거든. 뭐 나랑 놀지 말라고? 누군 뭐 좋은 줄 아시나! ~라면서 침을 튀기시는 분들을 말하는지도. 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야, 어?......) 정해진 동선과 고품격 취향, 무난한 1.5가 모범일 테지만 사랑만 해도 1.0이하가 나타나면 나 혼자 뜨끔하며 생각은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게 여자, 아니 아니 우리네 인생이거든. 상상은 자유니까. 저렴한 본능도 찡한 연민도 가식과 위선과 차선 어디쯤에서 왔다 갔다 할 테니까. 그러니 순진한 꿈나무가 약속한 으쌰으쌰 장소에 나가보면 아무도 없을 수 밖에. 뿐이던가! 카페 이름은 아빠한테 물어보렴. 나이트클럽 이름은 엄마한테 말하지 마! 질리지도, 지겹지도, 닳아지지도 않는 드라마 명대사 그 반복─부흥─재유행의 제왕은 바로, 아무도 믿지 마! 왜, 대체 왜, 왜 그럴까요? 묻지 마세요! 뭘 자꾸 '머머하지 마'라면서 매번 날 가르칠려고만 해, 어? 그래서 만난 아가씨 이름은 <행진해>! (옛날에 내가 이름만 보고 혹해서 만나자고 했거든) 그런데 만나보니 내 안색이...... 커피포트 부글부글! 그러다 <그냥 해>라는 포지셔닝에 세뇌되서 어느 날 나이키 운동화를 사. 그렇지만 남들도 다 신자나? 흔해 빠졌자나? 그냥 하긴 뭘 그냥 해! 즉 하나도 특별하지 않네? 그러다 뚱한 표정으로 인터넷을 보니 괜찮은 글이 보인다.
   「너, 왜 힙합이 요즘 좀 뭐한 줄 아니? 왜냐하면 그 때문이지. 힙합의 문제는, 힙합의 제일 큰 문제는 그거야. 아무나, 다, 힙합한다는 거! 응? 개나 소나! 진입 장벽이 최저니까 어찌 보면 최고의 유행처럼 보이지만 말하자면 전문용어로 키치라고. 누구나 숟가락 올리기 쉬워졌으니, 피라미드의 저점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평평한 이치에 가까우니 좋은 현상인 듯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야. 응? 키치의 뜻이 뭐야,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이거든. 미술 사조처럼 순수히 화가라는 직업 1가지로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이해는 해. 이해가 된다고. 띠리리리리리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현재의 CM송을 먼 옛날의 공작과 백작 수하 봉급쟁이들이 모두 장악해버렸다는 점, 좋아. 괜찮아. 그게 뭐가 나쁘니! 가까운 과거로 봐도, 앤디 워홀 때까지는 키치가 좋았어. 새로웠다고. 그러나 지금은? 천박함과 신선함이 별로 차이가 없지 않나. 힙합과 코메디, 정치와 개그, 대중예술과 오락산업. 그거 구별이 되긴 되는데, 때로는 힘들 때도 있지 않니? 그거거든. 인터넷이 일상화된 2000년 이전에는 삼류들 좋은 세상이었지. 그렇지만 지금은? 기술은 혁신 전과 후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만 바꼈지 세상은 재밌어. 웃기다고. 누구나 예술가요 아무나 유명인이고, 뭐 별 구분도 없어. 의미도 없어. 나 잘나고 나 행복한 게 최선의 가치야. 그래서 아예 순수예술이라면서 어디 문학 전공자들은 자기들끼리 정식 상을 받아야지만 등단했다는 식으로, 괜히 엄숙하고 괜히 심각하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다리 긁기 선수들을 양산한다니까. 고전이라는 기반이 어떻게 비교하자면 미미한 채로 말이야. 아무말 대잔치, 허풍 대회, 자랑 대회, 허세 파티까지. 응? 물론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별이 애매해졌다라고나 할까? 진짜로 화나서 힙합하는 거나, 화난 척 연기하며 노래부르는 거나. 응? 구별이 안돼! 물론 심하게 말해서 그렇다는 거고, 덜 심하게 말해도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까 파랑새와 팔색조와 카나리아와 기린에게 힙합은 외면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안 그래? 꽤 괜찮은 힙합도 상업적이지 않으면 철저히 외면돼. 그러니까 오락산업과 호형호제할 수 밖에 없다고. 힙합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좋든 싫든 여력도 시간도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말이야. 심하게 과장하자면 말이지, 하이에나와 뱁새와 촌닭과 쪼다들이 전문적인 장르를 이상한 애들 장난처럼 만들어버렸다고. 때문에 힙합 하면 뭐가 힙합인지 잘 모르거나, 힙합 공연장에 단 1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힙합이 잘못 인식되게 되는 거라고. 안 그래? 힙합의 주류 즉 힙합 선발주자와 힙합 후발주자 시장도 그래. 대부분은 1부 리그에서 스타로 사는 이상 7부 리그까지 어떻게 신경 쓰겠나. 그런데 1부 리그도 뭔가 예전만 못한 부분이 분명 있듯이 7부 리그의 뭔가 어떤 괴리감도 없지 않다, 이 말이라고. 안 그래? 경주마로만 길들여지니까 야생마로 돌아갈 수가 없다네. 아니 그런가?」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확고한 줏대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행동주의, 성과 위주, 때로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때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까지. 좋다. 다 좋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모두 다 내가 최고이자, 경쟁은 극심하며, 친구들만 해도 서로 우기느라 정신이 없는 걸로도 모자라 세상은 어찌 보면 요지경. 벗겨먹으려고만 덤벼든다느니 눈 뜨고 속눈썹 떼어간다느니. 그래서 '머머하지 마'와 '머머해'라는 과도한 주장이 난무하여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유부단한 주관의 소유자들은 정신이 없다. 뭐가 지킬이고 뭐가 하이드인지조차 헤롱헤롱해져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세월이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바로 그 과정을 수없이, 수없이 반복해야지만 내 고유한 정체성과 유별난 개성, 유난 떠는 정서와 무난한 성격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제사 말이다. 엥? 뭐? 아니다 아니다 나는 절대 아니다? 뻥이다. 그거 다 뻥이다. 나는 처음부터 알았다 나는 외계인이다 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뻥이다. 그거 다 뻥이다. 아니다. 나는 아니다. 절반은 인정하지만 절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의 비밀이든 사랑의 진리든 인생이 알려주지 싫어하는 가치관이든, 내 우주론은 그 모든 걸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고? 뻥이다. 뻥. 뻥. 싹 다 모두 다 뻥이다. 다 뻥!
    고로 결론은 이렇다. 유희의 인간 호모 루덴스니 도구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니 그도 좋지만. 인간은 뭐니 뭐니 해도 변덕쟁이라는 것. 어른도 절반은 애다. (전체 정량의 반틈이 아니라 개체라는 단위 1개 성정의 반틈이) 개구쟁이, 응석쟁이, 투덜이, 까불이, 엉뚱이, 울보, 먹보, 잠보, 안다박사, 잘난척왕, 나대기왕, 조증왕, 허언증왕, 자뻑왕, 침묵왕, 쪼잔왕, 이중인격왕, 비명왕, 염장왕, 째려보기왕, 오바왕, 초딩왕, 귀찮게하기왕... 등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