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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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행복감에 대한 적극적 욕구, 닥치는 대로 공상하는 습관. 전자는 후자한테 매번 졌다. 여지없이 완패. 그래서 하는 수없이 그 씁쓸한 패배감을 덜어내고자 나는 무척 이례적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뜬구름 잡는 단꿈의 뒤꽁무늬만 쫓느라 허비한 정력과 시간과 노력을 어퍼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작정 동네 똥개를 자빠트릴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우리도 걔네 인생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시간도 없다. 그렇지만 뭐랄까 나는 곧바로 중도 포기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안 그럴 수가 있나. 왜냐하면 재미없음과 심심함을 오리가 물을 떨어 내듯 털어내기, 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느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발동이 저절로 걸리기를 기다릴까, 새롭게 판짜기를 감행할 마술을 익힐까. 다 쓰잘데기 없는 잔소리일 뿐. 내버려 두어도 지 혼자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사랑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 어차피 사랑이 인생이고, 꿍꿍이가 묘책. 그게 그거. 이거나 저거나. 그러든가 말든가.
그래서 나는 저번에 사무엘이 건넨 제의를 덥썩 수락하기로 했다. 사무엘이 건넨 먹잇감 쫓기 그 겁나는 액면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니라 레너드가 주인인 카지노 사장실에 놀러가자는 거였다. 별거 아니었다. 현실 속에 사는 동네 아저씨들인데 무슨 초현실감과 친할 일 있나.
그렇게 사무엘과 나는 만났고, 이동했으며, 도착했다. 어디에? 바로 레너드가 주인인 카지노 사장실에 말이다. 어떻게 만났고 시시콜콜한 얘기는 뭐였고 그거 다 얘기하다간 날샌다.
짜잔~! 의례적인 관계자들과의 대화, 건너뛴다. 우리도 화상통화, 걔네도 무전기와 전화와 기타 등등 확인 과정은 철저히 거쳤으니까. 하여 이곳은 카지노 사장실. 다만 레너드는 어디에 잠시 볼일 보러 갔으니 우리는 기다리면 그만. 그리고 사무실에 틀어진 음악은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오페라 <돈 죠반니> - “내 사랑하는 여인이 위로받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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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있잖아, 난 레너드 같은 장르 업자면 말이야 끈적끈적한 음악을 들을 줄 알았거든. 아니면 막 뉴에이지, 아니면 바로크 이전 훨씬 이전 고음악. 그도 아니면 클럽음악. 그런데 얘 감성 은근 말랑말랑하네. 얘 요즘 연애하니?」
「레너드가 연애를?」
「왜 레너드는 연애하면 안되니?」
「안되긴 누가 안돼. 다만 레너드가 진한 사랑을 하냐 마냐는 걔 인생이고. 타인의 애정이고 자시고, 진한 사랑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코가 석잔데 그걸 알아서 뭐하게?」
「하긴 늬 말도 말은 된다.」
「그럼 내가 말도 안되는 잔소리나 늘어놓는 허풍쟁이인 줄 아니?」
「너 못 보던 새에 약간 까칠해졌는데?」
「나 원래 카리스마 좀 있어.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싱겁게 보일 수는 없는 거 아니니? 그래서 센 척해봤지.」
「그래? 그럼 난 카리스마 없냐?」
「너도 있어, 카리스마.」
「재미없다. 누가 들으면 잘들 논다 그럴 거 아니냐고.」
「레너드 걘 손님들 심심하게 자리를 비우면 어떡한다니. 우리 기다리기 심심한테 저 금고나 열어볼까?」
「금고? 무슨 금고? 저 구식 금고?」
「저게 구식인지 신식인지 늬가 어떻게 알아? 얘가 뭘 좀 모르네. 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액자 뒤에 설치된 금고는 그냥 눈속임이야. 시간 벌기 위한 거라고. 그리고 저기 저렇게 보이는 허름한 금고. 아마추어들이 뭐 독학으로 갈고 닦은 기량 연습하러 낑낑대며 여기서 애쓸 일 있니? 혹시라도 온다면 전문가 중의 전문가들이 납신단 말이야. 응? 너 뉴스에서 어쩌다 봤지? 싯가 얼마짜리 명화를 그분들이 감쪽같이 들고 튀었다더라 어쨌다더라. 저렇게 보이는 게 원래 정말 센 거라니까.」
「너 말 많은 거 보니 열 줄 모르나 보구나.」
「내가 저거 못 열 줄 알아? 얘 은근히 뽐뿌질하네. 너 내기할래?」
10분 경과 후.
사무엘은 어떻게 어떻게 정말로 그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혹시 했는데 역시나였던 거지.
그런데 문제는 사이렌이 울렸다는 거.
그렇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당도한 덩치들은 센 놈들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일이 크게 될 줄 알고 덜컥 세한 표정으로 어정쩡하니 서있었는데 그분들 왈,
「아 또 저게 말썽이네. 겁먹지 마세요 손님들. 저거 원래 주기적으로 열리게 되어 있어요. 일종의 속임수죠.」
뭐라고? 얘네들 정말 지독한 놈들이구만 그래. 그런 다음 그분들은 철수하고 한 30분 정도 지나는 동안, 사무엘과 나는 소파에 자빠져 잠시 졸았다.
그렇게 딱 레너드가 도착했다.
「친구들.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그런데 너 헤어스타일 바꼈네?」
「너 또 옆길로 세는 화법?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기본으로 세바쿠 반 돌린 다음에 슬쩍 간만 보는 화법. 응? 내가 여자냐? 너 나랑 뭐 단둘이서 비밀스럽게 무슨 해야 할 일이라도 있니? 그게 뭔데 도대체?」
「야 야 야. 흥분하지 마. 넌 왜 아무 데서나 흥분하고 그래? 그러니까 늬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힘 빠지는 거 아니야. 응? 방금도 그래. 너 또 친구 기다리기 따분하니까 TV 틀어서 보다 끄고, 핸드폰 뒤적거리다 잠들었지? 누가 모를 줄 아니? 늬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야. 꼭 보면 너 같은 애가 여자랑 대화하면 재밌다고 느끼는데, 그럼 뭘 해. 금새 기 빨리는데. 정작 정력은 몽정기 때만 좋았던 거야? 이러니 이러니」
「그만 하자.」
「그래. 잘 생각했어. 뭐 그건 그렇고. 아무튼 내가 나중에 여자 소개시켜줄께. 걱정 마 얘. 나만 믿어. 어? 너 나 아는 동생들 많은 거 알지? 아니면 뭐, 뉴 페이스? 말만 해. 형이 다 꼬셔줄께. 알았어? 어쨌든 그건 그렇고. 너네들 그 소식 들었니?」
「뭔 소식?」
「우리의 친구 제라드.」
「제라드 주니어? 제라드는 걔 아빠잖아.」
「걔 개명했어. 걔 아빠가 딴 이름으로 바꾸자마자 걔는 주니어 떼버렸다고.」
「그래서?」
「제라드가 있잖니 이직했데.」
「이사도 아니고 이직?」
「그럼 걔가 무슨 전학갈 나이니? 그러니까 크리스가 한 3번 갔다 올 동안 넌 여태 총각 꼬리표도 못 뗀 거 아니야. 하여간 (절레절레)」
「갔다 와? 3번? 어디를?」
「말 말자. 응?」
「쟨 신경쓰지 말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제라드가 뭐 어쨌는데?」
「제라드가 말이야, 이제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하고 싶은 일들도 거의 해 봤겠다. 사랑도 알겠다 부족한 거도 없겠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데.」
「무슨 도전? 지명 방어전으로 누가 걜 찍었데?」
「찍긴 뭘 찍어? 하여튼 넌 꼭 잘나가는 판 깨는 데 뭐 있어. 응? 들어 봐. 제라드가 말이야, 그 연구자가 됐데.」
「무슨 연구자?」
「모스맨 연구자.」
「모스맨?」
「그래 모스맨. 모스맨에 대한 목격담. 증언. 연구자와 면담. 노스트라다무스의 방계 후손과 직계 수제자까지 어쩌면 조사했을 수도 있겠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나방맨. 사랑은 나비야.」
「너 온 생각이 항상 코끼리한테 가 있으니까 상태가 이 모냥이지. 야! 뿔은 귀보다 늦추 자라지만 더 길다 너. 모스맨 연구가로 변신한 제라드? 걔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유니콘이었어. 얘가 얘가 제라드를 잘 모르네. 응?」
그렇게 나&사무엘&레너드, 우리는 다음 날 함께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를 만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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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무엘&레너드는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긴장됐다. 설마... 긴가민가... 으쌰으쌰해서 오긴 왔는데. 정말 들어가는 게 맞는 것일까? 의문이었다.
안중에도 없던 정말 뜬금없는 모험 어디 없을까? 없다.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다. 그게 다 뒷전으로 밀린 사랑에 소홀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아니었는데 어떡하다 이렇게 됐단 말이다. 그럼 새로운 인생에 관한 초미의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작업? 관심없음. 무관심이었다만 지금 여기 있다니까 그러시네. 건수 없음, 사실은 사실이었는데. 그 거짓말 같은 투정 다 뒤로한 채 우리 세 친구는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
「정말 들어가도 될까?」
「그러니까. 혹시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가 우리를 반기지 않으면 어쩌지?」
「무엇보다 말이야, 혹시 제라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떡하냐.」
「어떻게?」
「나 모스맨 연구 때려쳤어. 몰랐니? 라고 말이야.」
「그럼 여기까지 애써 찾아온 우린 뭐가 되니?」
「그러든 어쩌든 나 깜빡했어. 여자친구랑 걔네 부모님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거든. 어떡하지? 일단 난 철수했다가, 서둘러 일 처리한 다음, 나중 다시 합류할께. 알았지? 나 갈께.」
그러면서 사무엘은 가버렸다. 물론 우리 셋은 각자 자동차를 따로따로 타고 왔으니까 가는 것도 쉬웠다.
「제가 선수치네. 얘 나도 있잖아...」
「어서 가. 필요없어. 듣기도 싫어. 난 혼자가 편해.」
「왜 또 그래? 너가 지켜보라니까. 사무엘이랑 나랑 누가 더 빨리 합류하나. 내기할래? 어? 못할 거 읎다니까. 응?」
「그냥, 조용히, 가. 결과는 나중 알려줄께. 여기서 말 많아지면 넌 천해지고 난 비참해져. 알아?」
「이 사람이 갑자기 진지하게 왜 그래? 너 정말 이러기야? 내가 뭐 의리도 없는 쫌팽인 줄 알아?」
「」
「알았어. 일단 상황 봐서 이따 바로 전화할께. 알았지?」
그러면서 사무엘에 이어 레너드도 가버렸다.
그럼 나 혼자 어떡하라고?
물론 아까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마침 제라드의 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전화해봤는데 제라드가 받지 않길래 우리들은 망설였던 거고.
그리고 걔네들이 가기 전에 또 날 북돋워졌던 말이 자꾸 여운으로 남았다.
제라드랑 나랑 옛날에 친했다나 뭐래나. 그렇지만 딱히 즐거웠던 기억, 사연 깊은 우정, 상쾌 유쾌 통쾌는 커녕 불쾌한 줄거리마저 빈약이 아니라 없었는데.
걔네들은 왜 나랑 뜬금없이 제라드를 엮으려는 거지? 뭐 어영부영 으쌰으쌰 들떴는데, 아마도 전망은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울 거 같고, 그래서 비전 없으니까 튀긴 튀는데 살짝 미안했던 게지. 뭐 그건 그렇고. 어차피 문도 열려 있겠다, 모스맨인지 부시맨인지 뭐 제라드가 연구 제대로 하고 있나만 확인 후 돌아가면 그만. 그렇게 나는 제라드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J. S. Bach / <마태수난곡>BWV 244. 소프라노 아리아 “내 마음 당신께 드리리”
제라드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제라드의 연구실로 보이는 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무슨 화면이 있네?
그건 다름 아니라 CCTV 실시간 영상이었다. 그런데! 뭐야 이거?
앞문 바깥 즉 우리 셋이 있던 장면이 보였다. 그럼 이건... 모스맨의 신통방통한 요술 때문에 빚어진 도플갱어 1인도 아니고 3인?
아니, 정말로 앞서 우리가 말장난하고 어쩌고 그러다 사무엘이 먼저 갔고, 다음으로 레너드가 떠난 장면이 화면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들어오고.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건 실시간이 아니라 실시간과 몇 분 간극이 있었던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난 그러려니 하고서 소파에서 쉬면서 모스맨 제라드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그래서 바깥을 보니 웬 열댓명 인원이 우르르 몰려오네?
순간 멈칫. 근데 그게 보아하니 다들 똑같은 얼굴.
가까이 다가오니 진짜로 모두 다 전원 똑같은 얼굴.
그건 다름 아니라 모스맨 제라드였다.
그럼 정말로 제라드가 모스맨을 연구하다 권위자가 됐거나, 아니면 그놈 자신이 모스맨이 된 건가?
그 황당함 때문에 난 곧바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실상 현장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 영화 보면서 중간에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 다 딴지 걸면 드라마 못 본다. 뭐 적당히 그러려니. 그건 그거고. 이건 실제 상황이고.
그렇게 뾰로똥 엿보며 걔네들이 차근차근 집으로 들어와 거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봤다.
그건 정말 칙칙폭폭 칙칙폭폭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정말로 제라드 1 제라드 2 제라드 3......
그래서 걔네들이 총 몇 명인가 세다가 까먹었다. 한 12명? 15명? 대충 그쯤 되는 거 같은데.
이 요상한 장면을 똑똑히 지켜본 나. 여기 나 말고 누가 있어?
나중 사무엘과 제라드한테 물어보면 걔네들이 믿겠어?
그렇다고 증거가 있나 뭐가 있나.
아하~! 핸드폰 영상으로 찍으면 되지?
하여 핸드폰으로 딱 찍으려고 했는데 글쎄 배터리가 떨어졌네.
이건 뭐랄까, 버티고 대치하며 그 뭔가를 기다려도 내겐 아마 유리할 게 없을 것만 같았다.
따라서 나는 서슴없이 결론을 도출했다. 그건 뭐냐, 도망치기.
그렇게 나는 일단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다.
아마 나도 내가 헛것을 봤는지 진짜를 봤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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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끊기로 했다. 아니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럼 뭘 끊지? 어차피 커피를 끊은 상태. 나중 때 되면 향긋한 에스프레소부터 카푸치노든 뭐든 막 마시겠지. 그럼 일기나 써볼까? 이미 많이 썼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이참에 그 뭐야 그래. 남녀의 우정을 끊을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사교계에서 팽당한 지가 언젠데 쯧쯧쯧. 아는 동생들로부터 홀대 받는 느낌. 그건 그냥 기우가 아니라 그 인간은 걔네들한테 차갑게 잊혀진 것일뿐. 그렇다고 두 마리 개 사이에 뼈다귀를 던져줄 수도 없고. 어쩐담? 어쩌긴 뭘 어째! 일단 기다려 보는 거지. 그런데 뭘? 내 말이. 내 말이 그거라니까. NB는 또 그렇게 곧잘 혼잣말인지 정신착란인지 정신분열인지 뭔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공이 이름난 선수를 찾아낸다고, 그는 아마 명사가 아닌 게 분명했다. 누가 뭐래도 허당이니까. 행운은 거의 올 듯 말 듯 올 듯 하다 비켜가고. 여심을 거의 딸 듯 말 듯 거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 아득히 멀어져가고. 어? 에잇. 말하자면 그저 어쩌다 보니 현업이 천직. 그래서 또 일하기만? 사극에서 검집을 버린 배역 마냥 미련없이 올인 베팅을 하고 자시고, 오란 데가 없으니 하는 수 없지. 그렇게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는 깜빡하고 있었다. 바로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의 집에서 본 헛것을 말이다.
설마 내 시력에 일시적으로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해서 나는 안과까지 가서 검진도 받아봤다. 문제 없단다.
그럼 정신이? 정신과... 못 갈 거 없다.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집 근처에 정신과 병원이 없었다. 그럼 저명한 심리학자를 소개받는 걸 어떨까?
하여 나는 아지트로 향했다.
도착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것일까?
마침 아지트에는 사무엘과 레너드가 있었다.
「야. 너넨 나만 쏙 빼놓고 여기서 뭔 밀담을 나누는 거냐. 설마 남자끼리 밀애? 그야 내 일이 아니라 남 일이긴 하다마는.」
「뭔애? 너 나 모르냐? 나 여자 환장한다.」
「그럼 여자도...?」
「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야. 그랬어. 그랬다고. 지금은 다 지겨워진 거 뿐. 사교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복귀 가능. 복귀하자마자... 그만하자.」
「지금 그 얘기가 아니라.」
「아, 저번 일?」
「그래.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는데. 뭔가 걸리면 대충 생략하고, 제끼고, 밀쳐놓고, 미루고 넘어가는 일. 대부분은 괜찮은데. 간혹 가다 정말 그래서는 안될 일. 그게 나중 꼭 발목 잡는 법이거든.」
「미안하다. 저번에 우리가 도망갔던 거. 실은 솔직히 말해서 좀 겁도 났고. 어? 그렇게 무작정 찾아가서 무슨 시트콤 찍는 거도 아니고. 우리가 뭐 하이틴 로맨스물에 나오는 한량도 아니고. 안 그래 친구?」
「친군데 도망가?」
「누가 너 뒤끝 긴지 몰라서 이러니?」
「넌 뭐 남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거 일가견 없는 줄 아냐? 왜! 폭로전 한번 하자 그거냐? 못할 거 없지.」
「아~ 그래? 우리도 질 수 없지!」
「야 야 야. 왜 또 그래? 정말 너네 이럴래? 그럼 나만 쏙 빠져서 아는 동생들이랑 논다. 너네들 나 아는 여동생들 많은 거, 알아 몰라?」
「이 자식이... 우리 우정이 겨우 그 정도냐?」
「야.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나 지금 심각해. 어? 진짜라니까.」
「심각해? 왜 심각한 줄 아니? 너 몽정기라서 그래. 아니, 발정기. 너 그거 화난 상태잖아. 것도 항상.」
「아 나 이거 증말. 아 진짜라니까. 너네들 도망간 다음에 나 혼자 들어가서 그 모스맨 뭐야, 집에 막 장식된 그 드라마 설정 장면 그거 다 보고. 모스맨 그 인간 누구냐, 제라드도 봤는데 제라드가 한 명이 아니었어.」
「그럼 제라드가 몇 명인데?」
「많았어. 일단 10명은 넘었어.」
「제라드가 10명 넘게 있다고? 무슨 모스맨 대역이라도 쓴다는 거니?」
「그게 아니라 도플갱어랄지 뭔가 어떤 요술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보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좀 쉬어. 너 이러다 상사병 생겨 인마. 어?」
그러면서 사무엘과 레너드는 가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건 무엇이고 하니, 바로 사무엘과 레너드의 뒷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의 집에서 봤던 그 장면. 사람 뒤에 사람 뒤에 사람...... 점차 옅여지다가 0.
그 자리에서는 그렇고, 그 뒤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누구는 그랬고 누구는 아니었다. 기준이 불분명했다.
설마 나 미친 건가? 난 미치지 않았다. 그럼 걔네가 미친 건가? 미치긴 누가 미쳐. 아니다. 이건 진짜다.
그렇다고 흥분하면 안 된다는 거. 값비싼 수업료 지불하고 얻은 깨우침. 아직 철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건 아니까.
따라서 나는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당장 뭐 어떻게 아무 데나 막 가서 들쑤시고 나불대며 들이대고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거고.
누가 믿는다고? 그래서 진정한 다음 나는 집으로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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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신디를 만났다. 신디는 아는 동생이다. 내가 신디에게 어떤 존재, 어떤 의미, 무슨 오빠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신디에게 선사해줄 자신이 있다. 무엇을? 바로, 불순한 사심 가득한 호의가 아니라, 다양성은 쾌적의 원천이자 젊어서 우정은 인생의 비밀일까 라는 의문점을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시나 신디는 팔랑귀 분과였다. 아닐 수 없지. 딱 봐도 숙녀. 그래서 우리가 친해졌냐고? 아니다. 우리는 누가 됐든 만나면 금방 친해진다. 그녀들은 우리를 만나면 만나자마자 쬬갤 수... 아니 웃을 수밖에 없거든. 여자는 웃으면 끝이다. 어? 남편 팔짱 끼고 있으면 뭘 하나 이미 마음을 우리한테 빼았겼는데? 농담이고. 진짜 농담. 그렇게 우리는 찾집에서 만났다.
「신디. 너 어쩜 그럴 수 있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야.」
「어? 뭘 오빠.」
「너 어쩜 그렇게 못 본 새에 몰라볼 정도로 이뻐질 수 있냐고. 아니 내 말은 원래 이뻤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그 말이라고. 안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해?」
「이 오빠 또 보자마자 사람을 들었다 놓네. 그럼 나야 쥐락펴락 그냥 분위기 봐서 새로운 인생의 이상한 목적을 간파하면 되는 건가? 그게 그러니까 흑심? 군침? 눈독? 아니면 뭐 개침?」
「하여튼 너는 꼭 잘 나가다 옆길로 새더라. 어? 내가 너한테 소개시켜주고 싶은 남자가 대체 얼마나 많은 줄 알긴 아니? 모두 거짓말처럼 특 A급이야. 알아? 너 사람 보는 눈 없니? 어? 이거 왜 이래? 어?」
「오빠. 흥분하지 마.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고 여기도 흥분할 장소가 아니야. 알지? 알면 됐고.」
「아무튼 그건 그거고. 신디. 레이디 신디.」
「무슨 할 말 있어? 말해. 들을께. 다정히. 나 부드러운 여자야. 뭐 해 어서 말하지 않고. 나 뜸들이는 거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어?」
「재촉하지 마. 안 그래도 다 말 하려고 했어. 어?」
「잔소리 그만 하고 얼른 말 안 해? 어?」
「따박따박 넌 그렇게 갑자기 신경질 모드로 변신하는 게 문제야. 애교도 좋고, 내숭도 문제 없고. 남자들이 하나같이 귀엽다 그러고. 머릿결? 딱이야. 그런데 누가 널 보채는 거니? 늬 안에 누가 있기라도 한 거니?」
「아 증말. 어서 말 안 해?」
「알았어 알았어. 있잖아 얘. 얘 신디. 신디 얘. 나 있잖아. 그게 그러니까...」
「OK~! 여자 문제지? 오빠가 좋아하는 촌년이 누군데? 어? 언년이야? 나보다 순번 빨라? 어? 이년이 어디서 번호표도 안 뽑고. 내 그년 가만 두나 봐라. 어?」
「아 농담하지 말고. 그게 아니라. 너 있잖아, 들었어?」
「어?」
「들었어? 들었냐고.」
「들어? 듣긴 뭘 들어. 누가? 내가 왜! 이 오빠가 뭐 사람 간보나? 듣긴 뭘 들어. 어?」
「아하~ 안 들었네.」
「아 뭔데?」
「넌 원 그래프에서 어떤 부류구나. 딱 넘어간 다음 레이다 가동하고 추문 모으고 사안 따져서 나중 혼자서 조용조용 결론내는 똑순이는 아니라는 점.」
「그럼 뭐 내가 헛똑똑이야?」
「이번엔 네가 흥분할 차례구나.」
「아 그러니까 뭘 들었냐고? 어?」
「안 들었으면 뭐 나중 들으면 되고. 아니면 내가 직접 귀뜸해줄 수도 있어. 소곤소곤. 자, 귀 이리 갖다대 봐. 뭐 해, 그 팔랑귀 어서 이리 갖다대지 않고. 듣기 싫어? 그럼 딴 데 가서 듣던가.」
「나 팔랑귀 아니야. 누가 나 팔랑귀래? 나 여우귀야. 이 꼬리 안 보여? 이거 아무한테나 흔드는 거 아니다.」
그렇게 3분 경과.
나는 모스맨을 봤다고 그녀한테 솔깃한 사실을 얘기했다. 물론 그녀는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냐하면 그럴싸 했으니까.
「모스맨? 무슨 찜빵맨도 아니고 모스맨?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에이~ 장난이지? 그렇지 오빠?」
「얘가 얘가 속고만 살았나. 내가 어디 실없이 아무 얘기나 아무한테나 막 떠벌리고 발설하고 나불대는 그런 얼간이인 줄 아니? 나 찌질이 아니야. 나 머저리 아니야.」
「누가 오빠한테 바보라고 놀렸어? 왜 그렇게 설레발? 몹시, 수상한데? 아까부터 호들갑 떠는 거 역시나 그렇고. 이거 믿을 만한 정보야?」
「그럼 내가 증거도 없이 이런 얘기를 너한테 쓱 흘리겠니?」
「심증 아니고?」
「일단 증인부터 보여줄께.」
그러면서 나는 사무엘 사진을 핸드폰으로 그녀한테 보여줬다.
「와, 나 이 오빠 알아.」
「왜, 반했어? 벌써? 보자마자? 너무 이른 거 아니니? 좀 고민하는 척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래? 뭐 아무튼. 얘가 얘가 이래뵈도 꽤 잘나가. 어? 잘생겼지? 그런데 허당이야. 그리고 축구 좋아해. 하지만 개 발. 공격에서 선봉 서면 개 발, 수비 맡았다 하면 구멍. 푸하하하하. 말하자면 하는 거 말고 보는 거 좋아한다고. 아, 증인 2호 또 있다.」
그러면서 나는 제라드 사진을 신디에게 보여줬다.
「이 오빠 여자친구 있어?」
「왜, 관심있어? 잘생겼지? 난 잘생긴 친구 아니면 상대를 안 해. 그런데 왜 내가 소개를 시켜주면 하나같이 여자들이 연락을 끊는지 몰라. 아무튼 얘도 잔재주 잔기술 잔근육까지 뛰어난 걸로도 모자라 여자 말 잘 들을 거 같지? 여자의 잔소리 견디는 대회에서 1등할 거 같지? 그럼 뭘 해. 얘도 허당! 어? 허당계에서 알아주는 권위자. 사교계에서 저명한 허당. 허당 중의 상허당. 푸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그런데 이 오빠들이 모스맨과 뭔 관계인데.」
「관계? 상관 있지. 강력한 연관관계 성립되지 왜 아니야? 역학관계 알려줘? 자, 봐 봐. 사무엘은 모스맨의 후계자로 손꼽혔다가 퇴짜맞았어. 그리고 제라드는 모스맨의 제자들 가운데 실세로 알려졌는데 역시나 팽당했지. 그런데 그 둘의 차이점이 뭔 줄 아니? 사무엘은 에잇 못해먹겠다 그러면서 탈퇴했고, 제라드는 꾹 참고서 다시 후계자로 복권한 다음 곧바로 모스맨 전도사로 활동 중이야.」
「오빠. 뻥이지?」
「왜 증인으로 안돼?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너랑 같이 갈 데가 있어.」
「가긴 어딜 가? 이 오빠 안 되겠네. 어? 오빠가 이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구나. 오빠가 이러니까 아는 동생들이 다 떨어져나가지. 안 그래? 그러니까 오빠가 여자가 없는 거라고. 어? 알아?」
「여자와 이게 뭔 상관인데? 이거 왜 이래? 원래 모스맨이 후계자로 찍은 사람은 나야. 알아?」
결국 신디를 만난 성과, 요약하자면 이랬다.
나는 신디에게 모스맨 얘기를 슥 흘림. 그러나 신디는 꿈쩍도 안 함.
그건 그거고 같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든 맛난 식사를 하든 해야 할 텐데. 신디는 도망감. (절레절레)
6
원하는 전부가 단지 돈이냐 사랑이냐 아니면 그 모두냐. 딱 꼬집어 이거다 장담하거나 아님 애원 소망 야망 아무것도 없거나, 그 가운데 최고는 변심. 이사. 이직. 재혼? 난봉꾼이 살림꾼으로 개심? 그야 어떻든 수다대회에서 1등감인 다변가의 변덕을 어떻게 요리할 것이냐가 문제 아닐런지.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고.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해님 지면 달님이 뜨고. 들었으면 놓고 쥐었으면 펴고. 그런데 무슨 연애를 어디서 잘못 배웠는지 쥐락펴락하랬더니 계속 당기기만 해? 져줄께 져줄께요 참다 참다 사랑의 시소에서 내 님은 내려버리시는 것. 딴 게 아니라 이별은 그렇게 떠나버리는 것. 등 돌리면 어차피 남남. 언제부터 알았다고? 볼장 다 봤는데? 누가 아쉽고, 누가 미련이 진하며, 누가 뒤끝 작렬일지는 나중 두고 보면 아는 것.
그런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아마도 품위 유지비가 간당간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낙이 뭐랄까 조마조마하다면 이상하고. 그래 뭘 해도 재미없으니까. 색다른 관심사가 어딨나. 그래서 나는 어딘가에서 힌트를 얻어 예사롭지 않은 일거리를 찾았다. 그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새로운 취미는 www.spacetelescope.org 에서 사진 구경하기. 허나 다큐멘터리처럼 오래 못감.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여심을 회상하고. 뭘 하든지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 제라드 1 제라드 2 제라드 3......그 잔상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차처럼 쭉 이어지다가 점점 옅어져 잔상이 희미하게 마무리되는 현상. 그 불특정 패턴으로 연구 논문을 쓸 수도 없고. 그렇지만 너무 신기하고. 뚜렷이 보이는 사람은 강아지를 키우고, 약간 일렁이는 잔상이 이어지는 쪽은 고양이를 키우나? 아니면 동성애자랄지 무성애자? 뭐지? 대체 뭐지? 아님 그게 보이는 사람은 얼마 후에 일확천금을 얻게 되나? 또는 잔병을 앓게 되나. 최소한의 표본으로 그 비밀을 대충 파악했다 치고, 그렇다고 그걸로 점쟁이로 나설 수도 없는데. 그래? OK~ 일단 미뤄. 끙끙대며 끝장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될 사안이므로, 고로 관망. 그렇다고 완전히 뒷짐은 아니고 찬찬히 생각 또 생각. 그럼 그 다음은? 뭐긴 뭐겠나. 아는 동생들 불러내서 물어보는 거지.
「내가 말이야 어디서 들었는데 쩜쩜쩜.」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들었어?」
「지적인 행복감을 동반하는 사랑의 감정. 그야 물론 좋다만 사랑이 왜 나쁘니? 그런데 있잖니, 너 들었니?」
「임자 없는 숙녀에 대한, 굶주린 늑대의 번득이는 눈빛. 너 그런 눈빛 뭔 줄 알지? 그 능글맞은 명태 동태 생태 눈동자랑 라섹한 눈, 구별 가능해? 그러든가 말든가. 들었어? 응? 들었어?」
자, 오늘은 누가 누가 <들었어요?>의 행운아이자 잔소리의 노예로 낙찰됐을까? 그런데 그렇게 스트레스 풀고 기 받으려다가, 있는 정력 없는 정력 아주 그냥 기 쪽쪽 빨려버리면 어떡하지? 그야 그때 가서 판단하고. 그렇게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불러냈다.
몇 시간 경과 후. 카페. 샐리는 카페라떼 나는 에스프레소.
「너 들었니?」
「나? 오빠는 들었어?」
「따라하지 말고. 너 정말 들었어?」
「따라하는 게 아니라. 오빠는 들었냐고. 들었어?」
「듣긴 뭘 들어. 아 들었냐니까. 어? 들었어 안 들었어?」
「누가? 내가? 오빠가 먼저 판돈을 키워야 내가 받을지 콜만 할지 정할 거 아냐. 응? 왜 내 액면 이 얼굴로 부족해?」
「너랑은 말이 안 통해.」
「오빠가 꽉 막힌 남자라고 의심해보진 않고?」
「그러니까 난 뭘 좀 모르는 남자다? 그러니까 늬가 남자가 없는 거야. 어? 남자를 만나도 까탈스럽게 고르고 고르다 탐색전 펼치다 남자가 도망가기 바쁘다고. 알아? 어? 그래서 늬가 남자가 없는 거라니까.」
「무슨 내가 남자에 환장한 년인 줄 알아? 어? 뭐가 어쩌고 어째?」
「진정해 샐리. 너 그런 모습 너한테 안 어울려. 넌 고상하고, 도도하고, 세련되며, 우아하게, 뭐라고나 할까 근사한 그 어떤, 뭔가 있어 보이는, 무슨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그 뭐랄까,」
「언제까지 할 꺼야? 1절만 해. 응? 본론 꺼내려다 그렇게 한심하게 옆길로 새니까, 응? 그래서 오빠한테 여자가 없는 거야. 알아? 그러니까 오빠는 여자가 없는 거라고. 어? 다 나나 되니까 오빠랑 시간 보내주지, 어? 나 아니면 누가! 나 아니었어 봐라. 오빠 오늘도 일할 거잖아. 오빠 일중독 아니야? 아님 아니라고 말을 하던가. 말 못하지? 그치?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오빠를 모르니? 응? 오빠. 응? 오빠. 들었어? 나한테만 조용히 말해 봐. 응? 오빠. 들었어? (조용조용히) 들었어?」
「듣긴 뭘 들어?」
그렇게 줄다리기 30분 경과 후.
나는 어떻게 어떻게 그간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를 만나러 간 일부터, 환시, 환청, 기타 등등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어머!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그럼 나는? 내 뒤로 그 잔상 안 보여?」
「너는... (게슴츠레 뭔가를 관찰하는 듯) 안 보여.」
「그런데 그게 보여야 좋은 거야 안 보여야 좋은 거야?」
「그건 아직 불분명해.」
「아직 불분명해?」
「응.」
「분명하게 해 줄까?」
「뭐?」
「보여야 좋은지, 안 보이면 나쁜지. 알게 해 줘?」
「아아. 왜 남자들이 버티다 버티다 견디다 견디다 너한테 나가떨어지는 줄 알겠다.」
「뭐? 이 인간이 지금 듣자 듣자 하니까...!」
「진정해 진정해.」
그 다음 수다는 생략하는 걸로.
나는 이런 소득없는 시간 낭비 당분간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진득하게 모스맨에 대해 검색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뭐 들었어? 어? 뭐가 어쩌고 어째? 어? 진정하자! 진정하고 자시고 지금 진정이고 나발이고... 진짜 진정.
'아냐, 봤냐'야 남녀 공히 구사하는 거고. 최근 귀에 못이 박힌, 들었어?
여자의, 들었어? = 남자의, 만져 봐!
뭐라고? 알 게 뭐야.
7
새콤달콤 쾌감에 대한 다급한 갈망. 굶주린 열망. 허나 꿈과 달리 현실은 야멸찬 '애정 없음'. 무정. 매정. 무지. 불행. 무능력? 지지리궁색. 연민. 도대체 속 시원한 사랑 그 화끈한 쾌락마는 언제 탈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애마는 알고 봤더니, 시디신 포도? 그래서 능글맞은 복숭아가 알고 보면 인기일까 아닐까. 능금과 더불어 알게 모르게 벌레 먹은 사과에 대한 수요는 영원한 건가? 그러니까 말이야, 패배주의 권태 타성 지루함 재미없음 약속무 건수 없음 심심함을 단박에 초전박살 낼. 궁극의 대체제는 아닐지라도 아쉬운 대로 쓸 만한 대타, 그 절묘한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없었다. 있을 턱이 있나. 바랠 걸 바래야지.
무슨 개꿈 만도 못한 헛소리는 재미없고. 딱 집어치우고. 모든 항아리에는 제각기 맞는 뚜껑이 있다. 그거만 알면 된다. 희망찬 미래와 행복한 사랑, 그 야심 찬 기대는 그대를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큰소리 뻥뻥 치며 자신있게 예언했는데 가짜로 들통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서쪽에서 뜬 해 동쪽으로 져물어가니, 그러므로 나는 퇴근해야지. 헤헴.
그렇게 나는 퇴근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나른한 오후쯤에 먹었던 간식 때문에 속도 더부룩하니 저녁식사 생각도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인터넷 검색 조금만 더 하다 가기로 했다.
일단 지적인 척하며 말러를 듣다가 졸지도 모르니 음악은 이렇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오페라 <알바의 아스카니오> K.111 서곡과 몇몇 아리아 위주로 편성.
자, 모스맨인지 무스맨인지 뭔지에 대해 알아볼까?
모스맨은 일단 1966년과 1967년에 집중적으로 나타탔고. 에 또 보자. 2003년에, 2013년에 칠레에도 등장한 적이 있네?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니란 소리군. 영화 모스맨 (2002)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거고. 포인트 플레전트에서는 해마다 모스맨 축제가 열린다는데 거기나 가볼까? 바쁜 시절 한풀 꺾여 휴가 때 되면 생각해보지. 어차피 그전에 갈까 말까 하다가도 미루면 다 귀찮아질 테니까. 돈도 아끼고 좋지 뭐.
그 순간 사무엘이 핸드폰 앱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 사진을 페이스북, 어디 어디에서 본 걸 알려준 것이다. 그 사진을 가만 들여다보니 제라드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써진 글씨가. 12 X 12 = 144. 그런데 제라드는 거꾸로맨이니까 144를 뒤로 읽으면 441? 이 자식 또 어디서 모범생들 시험보는 데 쪼르륵 동참한다면서 막 자기도 따라가서 시험봤구만. 꼭 보면 학교 다닐 때 공부해야지 뒤늦게 말이야, 어? 그래도 그 사진으로 실버 브릿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됐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옛 친구 믹에게 메시지가 왔다. 앱을 보니 어디로 놀러가서 고기 구워먹는 사진. 가만 있자 믹이 나와 단짝이었는데. 걔가 군입대해서 배치받은 부대가 11사단. 당시 면회갔던 해가 95년? 96년? 또 조금 있다가 친구 폴한테도 메시지가 왔다. 스키장에서 폼잡고 찍은 사진. 가만 있어 봐, 폴이 시골 대학교에서 자기가 축구단 창단했다던 때가 대충 2000년 전후쯤일 텐데. 그 축구단 이름이 11. 그럼 11 X 11 = 121? 그게 어쨌다고. 몰라. 몰라 몰라. 모른다고. 어? 됐고. 아니 잠깐만. 내 출신부대 표식은 그대로지만 부대번호는 바뀌기 전 당시에 사단은 7371 대대는 401. 모스맨 영화에서 36번째인가 37번째 어쩌고저쩌고 그랬던 거 같은데. 내 티셔츠에 숫자 써진 게 736... 몰라. 머리 아퍼. 그렇게 난 뭔가를 찾다 포기한 채 퇴근했다.
8
보슬비도 계속 맞으면 젖는다. 축축히! 잔뻔치가 그래서 중요한 것. 그런데 더 중요한 것? 진공청소기와 커피포트 원리. 잔소리는 듣다 듣다 나가떨어지기 쉽고, 잔재주에 여심과 팔랑귀는 솔깃하다는 것. 여자의 마음? 우리한테 혹할 수밖에 없음. 비온 뒤에 땅이 굳을 것이냐 버섯이 자랄 것이냐. 딱 보면 듣는 유형 읽는 유형, 구분되며 자연스럽게 간파됨. 척하면 척. (멈칫)...! 그래?
아아 아직 부족하다. 이 정도로 허세대회에서 입상, 허풍대회에서 인기상? 어림도 없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차라리 개 풀 뜯어 먹는 공상이 백번 낫지. 그럼. 그러니까 카페 수다대회에만 가도 기 빨리기 십상이지. 안 그러게 생겼나. 안 듣고, 우기기 좋아하고, 나서기 대장에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분들. 남자는 <그러니까 내가 저분께 질문하지 말랬잖아>라는 부류. 여자는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래?> 분과. 걸려들면 우리는 찍소리도 못함. 어? (절레절레) 맥이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력 바닥남. 웬만하면 포커페이스 되는데 잘못 걸리면 표정 썩음. 그러게 립서비스 좀 털어서 어떻게 좀 어떻게 걔 좀 자빠트려볼 궁리 하면서 잔꾀 부리다, 지갑만 털리는 일. 있었나? 어떻게 좀 해 볼려다가 주량이 주량이, 어? 각 나오고 견적 보이면 도망가는 게 상책. 무슨 여자가... 말 말자. 그런데 전적 얘기가 왜 또 갑자기 나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모르는 게 뭐 자랑은 아니지만 즐거운 상상 아찔한 흑심 달콤한 몽상과야 다음에 또 조우하면 그만이고. 쾌감과의 재회는 꿈만 꿔야 하니 말이다.
하여 나는 오늘 이브와 향긋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9
우리는 만났다. 어떻게 어쩌고저쩌고 상황설명은 다 건너뛰고.
「오빠. 커피 끊었잖아?」
「나? 아 커피 끊었지. 오늘만 마실 거야. 평소에는 안 마셔. 일절. 입에도 안 댈 꺼야. 마시고 싶지 않아. 안 댕겨. 차라리 콜라라면 모를까. 왜냐, 난 커피랑 안 맞는 거 같걸랑. 커피는 말이지 그 뭐랄까 약간 쌀쌀한 날씨에 해변가 모래사장 고운 그 멋진 정경에서. 바람이 약간 애매한데 홀랑 벗고서 일광욕하는 선그라스맨이 비키니 입은 애인 수건으로 살작 덮어주는 장면. 그처럼 몸에 열이 엄청 많아야지 커피가 몸에 잘 맞는 거 같아. 나 같은 약골은 딱 식기 전 먹을 동안만 좋고. 그 뒤로는 겔겔하고. 꼭 내가 봤을 때 그런 것 뿐만 아니라, 혹시 지루...와도 관계있을지 모르고 말이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줘. 허허. 헤헤헤.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혹시...! 설마, 늙어서? 난 늙지 않았어. 영원한 젊음. 맨발의 청춘. 어? 우리는 야행성 맹수과. 어? 우리가 뭐 9시에 체력 방전되서 10시 11시만 되면 졸리고 그러는 줄 알아? 우린 달이 떠 있으면 무조건 눈빛이 초롱초롱해. 알아? 우리는 커피를 안 마시면 아무것도 못해. 커피가 무슨 장난인 줄 알아? 지금 장난해? 커피는 예술이야. 어? 야, 커피 사발로 주라 그래. 커피가 아까워서 이러는 거야 뭐야. 큼직한 대접에다 따라줘도 시원찮을 판에, 어? 이건 뭐 코에 붙이라는 거야 볼에 칠하라는 거야. 컵이 이건 뭐 개미가 마시라는 거야 뭐야? 컵이 뭐 이렇게 작아? 어? 이거 대체 뭐하자는 거야? 어? 내가 커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긴 알어? 어? (몸짓)
얘 좀 보소. 커피광을 띄엄띄엄 아시나. 응? 우리는 커피 없으면 못 산다니까요. 아시겠시유? 이 사람아, 허영심 여신들도 다 우리를 피해가. 어? 아시겠시유 모르시겠시유? 네? 괜히 남녀가 오래 만나면 말수 줄고, 부부끼리 5미터 떨어지는 줄 아시나. 나는 이 뼛속까지 커피 매니아란 말이오. 그저 심심하면 커피 찾으시는 애호가들랑 우리랑 비교를 말어 이 양반아. 그분들 취향은 말 그대로 취미에 가깝기 때문에 뼈 근처도 아니고 그냥 애무도 아니고 뭣도 아니야. 어? 어디다 명함을 내밀어 내밀긴? 내겐 커피가 곧 삶이란 말이오 낭자. 숙녀여, 들으셨소? 이 내 몸에 새빨간 피 대신 향기로운 커피가 흐른다는 소문을. 진짜야. 진짜라고.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못 믿겠어? 내기 할까? 그래? 에잇, 하지 말자. 내가 언니 돈 따서 뭐하게. 이겨도 얻는 거 없고. 지면 져서 창피하고.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원래는 말이야, 사귀는 여자들이 종종 그랬어. 그냥 왕왕 그랬던 정도가 아니라, 그 얘기 어디 한두 번 듣나? 내 피부에서 애기 냄새난다고. 그런데 어느 날 바뀌더라니까. 어떻게? 내 피부에서 커피 냄새가 난데. 걔네 향수보다 내 피부향이 더 그윽하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오. 안 그렇소? 아, 맞다! 너 나 커피 수필집 낸 거 모르지? 모를 꺼야. 굳이 알 필요는 없는데 알아도 뭐 말리지는 않겠다 그거지. 왜 검색해보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절판됐으니까. 너무 구식이라서, 새롭게 또 한 7권 정도 쓰는 중이야. 나오면 제일 먼저 너한테 선물해줄께. (윙크) 오빠 알지?
그런데 누가 이렇게 내 속을 박박 긁는 거지? 너니? 그럴 리가 없는데. 너 혹시 친구들이랑 내 얘기 했니? 그럴 턱이 없잖아. 내가 너네들 사랑의 순위에서 뭐 상위권도 아니고. 12위 근처에도 못 가잖니. 12위가 다 뭐야 2부 리그면 그 나마 낫겠네. 그런데 대체 누구야, 어? 아 나 이거 정말 귀 간지러워. 내가 지들 똘만이나 되는 줄 알아? 몇십 년 한 이불 덮고 산 마누라나 된다면 또 몰라. 어? 한 7미터 떨어져서 걷고, 모임 가서도 멀찍이 근처에서 떨어져 앉는 여편네나 된다면 또 모른다고. 안 그래? 웬만치 트집을 말아야 말을 안 하지. 너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렇다니까. 뭐 안 그렇다고? 안 그렇긴 뭐가 안 그래. 늬가 그러니까 남자가 없는 거야. 알아?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어? 남자? 사랑?
오빠가 정리해줄께. 딱 정리해줄께. 잘 들어. 늑대는 말이야 안개를 좋아해. 어? 우리 같은 양치기 스타일은 주제를 뭘로 정하든 말은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그러시네. 응? 방금 오빠가 뭐랬니, 늑대는 안개를 좋아한다. 자, 늑대가 안개를 왜 좋아할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여자의 '들었어요'를 남자가 어디 좋아하니? 그거거든. 남자의 '(내 근육) 만져봐'를, 여자가 듣고 알고 보면 피식 웃잖니. 좋아서? 웃겨서! 그처럼 늑대가 안개를 그냥 좋아하겠니. 다 그 다음이 있기 때문이지. 안 그래? 느그적느그적 행군하듯이 근방을 수색하다가 늑대가 안개 속에서 막 낭자처럼 아리따운 양을 딱 때마침 만났다고 생각해보오 그대여. 레이디 이브! 응? 그럼 늑대는 웃겠지. 흐흐흐흐흐. 허허허. 그런데 그게 아니라, 웬 자칼? 하이에나? 곰? 반갑지 않거든. 걔네들은 가는 길이 달라요. 오빠가 또 다큐멘터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거, 알랑가 모르겠는데. 막 표범이 치타를 잡아먹고 맹수들끼리 싸우고. 그런 장면은 드물어. 물론 드물기 때문에 관찰자들한테 좋은 촬영감일 테고. 즉 육식동물은 어디까지나 초식동물을 좋아한다고. 육식동물들끼리는 첫째 롱테일, 둘째 정말 정말 굶어죽을 듯이 배고플 때, 셋째 영역처럼 서로서로 침해하지 않는 어떤 불문율. 딱 그 3가지를 제외하고서는 대체로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이야. 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오빠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라고. 늑대는 아무리 길들여도 숲만 바라본다 너?! 그런데 커피 얘기 잘 하다가 왜 갑자기 또 늑대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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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넌 왜 웃어? 오빠 말이 우스워? 웃겨? 코메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거 왜 이래! 어? 그러고 보니 말이야, 늬가 그동안 웃긴 남자를 안 만나봤구나. 훈남, 미남, 성우, 재력가, 순정남, 진지남, 수다파, 품격남, 고전파, 미래파, 초현실파, 인상파, 낭만파, 야수파, 기분파...등등은 만났을지 몰라도. 얘가 얘가 우리 같은 만담가는 또 처음인가 보네. 뻥뻥~ 터지는 유머? 얼굴 근육 실룩실룩 따로놀 정도로 배꼽 빠지는 일? 오빠 만나면 날이면 날마다 배꼽 빠지도록 웃겨 줄께. 응? 무슨 유명 코메디언이니 개그맨이니 걔네들 우리한테 어림도 없어. 알아? 오빠가 너 웃음 빵빵 터지게 만들어줄께. 어? 내가~ 어? 내가~ 어? 잠깐만. 가만 있어 봐. 그런데 너 그 진홍색 립스틱, 나쁘지 않아. 스타킹도... 좋은 선택이야. (엄지 척)! 아무튼 그 립스틱 몇 호니? 스타킹 커피색 3호 막 그처럼 립스틱은 그런 거 없나? 뭐 차차 알아가면 그만이고. 아무튼 너 커피 마시고 싶으면 오빠한테 말해. 커피 그거 얼마나 한다고. 어? 커피가 최고로 비싸봐야, 웬만한 소비재는 물론 가격과 비례하긴 하나. 경제가 이렇게 발전했는데 품질이 기본이 된지는 옛날. 그래서 커피 애호가들이 우리 같은 커피광들한테 안 된다는 거지. 우리는, 어? 땀을 흘려도 그 땀에서조차 커피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라고. 알아? 내가 진짜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할려고 했는데 말이야, 정말 커피 얘기라면 무정차로 3박 4일 내내 잠도 안 자고 말할 수 있어. 어? 우리가 뭐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니? 응? 그리고 저 쿵쾅거리는 2박자 음악. 주인장 어디 갔어? 음악 바꿔주라 그래. 뭐가 좋을까? (딱) 그래, 모차르트의 미사 C단조 K.427 그런 걸로 말이야.
정신 사나우면 커피 맛이고 뭐가 배가 산으로 가. 블라인드 테스트와 판매량, 비례하니? 아니거든. 커피? 나한테 물어보셔. 커피? 오빠랑 마시자. 응? 그게 좋겠다. 허허허. 우리 이브라면 말이야, 이 오빠가, 어? 평생 먹을 커피 다 사줄께. 너 오빠 알지? 오빠 그렇게 쪼잔한 아니다 너. 네 친구들 가운데 커피 좋아하는 애들 있으면, 언제라도 오빠 불러. 너든 네 친구든 누구든 커페만 좋아한다면 몽땅. 오빠가 다 살께. 20명 30명? 다 데려와. 안 그래도 아는 동생들 떨어져나간 지도 오래됐는데, 아 농담이고.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는 딸랑이랑 깔깔이만 챙기는 그런 얍삽 소심한 남자가 아니야. 어? 다 너가 착해서. 어? 우리 이브 심성이 곱기 때문에. 어? 무슨 오빠가 번호표 받고 줄서는 심복과 오다가다 이합집산하기 바쁜 중간 보스랑만 쿵짝 딱딱 맞는 그 막 드라마 속 악역인 줄 아니? 아니야. 여자들한테 호감 사고, 애정에 둘러쌓여 흠모에 선물에 짝사랑에 입이 귀에 걸리는 일? 우리랑 머나먼 얘기. 관심 없어. 인기 그거 다 거품일 뿐이야. 그와 별개로. 희망찬 미래 오빠랑 너랑 각자 어떤 인생을 살던. 내가 너 뿐만 아니라 아는 동생들 커피라면 얼마든지 사줄께. 어? 다, 언제나, 얼마든지, 누구나 사줄께. 어디서건 말이야. 응? 이 형이 다 꼬셔준다고.
(멈칫)
뭐? 아, 마지막 말은 촌닭들 깐족깐족 으쌰으쌰할 때 얘기니까 신경쓰지 말도록. 깐죽의 달인들 누군지 알잖니. 허허. 흐흠. 허험. 흐흐. 딴 건 몰라도 너 이건 꼭 알아둬. 다 나나 되니까... 나 생색내는 거 싫어해. (인상 팍) 누가 나 생색내는 거 좋아한다 그러든? 어? 아니야. 너야? 너가 그랬어? 아니지? 그럴 리 없어. 그래서는 안되니까. 너처럼 고운 요정이 어찌! 너도 그렇겠지만 오빤 남 얘기하는 거 결코 좋아하지 않아. 딱 질색. 질색 팔색. 어? 음. 그렇지. 그렇고 말고. 누가 나 보고 막 애교에 녹는다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헛소문 퍼트린 거? 그거 다 뻥이야. 뻥. 다 뻥. 개 뻥. 그런 거 몽땅 헛소문이라고.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절대 뒤돌아보지 마. 좌우지간 이건 알아두시게.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상남자도 다 두 가지로 나뉜다는 걸 말이야.
첫째, 나처럼 커피사주기 자체가 좋은 사람.
둘째, 다 반사이자 거울 이치로 돌아올 그 뭔가를 은근히 바라는 남자.
아무튼 말이야. 이거 하나는 분명하지.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의 표상인 이 오빠가 그 얼마나 이타적 천사인가,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나. 그러든 아니든 자랑할 거 많고 귀찮아서도 우린 안 해. 못 해. 하면 안돼. 싫다고. 어? 뭐하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일이 대체 뭔데. 친한 동생들 커피 사주기거든. 실상 난 그만큼 커피를 좋아하고. 우리는 커피라면 아주 그냥 미쳐버려. 어? 식사? 안 먹어도 돼. 커피만 마실 수 있다면. 어? 잠? 안자. 나 원래 잠 거의 없어. 시간낭비야 그거. 왜 자. 뭐하러 자. 단, 커피만 마실 수 있다면. 어? 이 바닥 좁은 거 너도 잘 알 거야. 왜 모르겠니. 아는 동생들 곧 너네 친구들한테 다 물어봐. 아는 오빠들 가운데 커피 사주기로 누가 최고냐고. 누가 역대급 1등이냐고. 어? 나는 몰라. 어? 나는 모른다고. 그 찌질한 여심 스틸러가 대체 누군지 난 모른단 말이야. 알 게 뭐야? 몰라. 커피 그까이 꺼 대체 얼마나 한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아 글쎄 오빠 별명이 대체 몇 개인 줄 알기는 아니? 가만 있자. 자, 커피머신. 환상머신. 디머나이저. 더미네이터. 또 뭐였더라? 뭐더라? 내 입으론 말 못해. 안돼. 해선 안되니까.
흐흠. 너도 알다시피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모를 수 있어. 어쨌거나 저쨌거나. 응? 이래뵈도 오빠가 남자들 세계에서 또 덕망이 두터워. 오빠 의리를 알아주니까, 오빠의 남자 후배들이... 그런데 뭔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뭔 재미난 얘기가 있었는데 딱 까먹네. 중요한 순간에 말이야. 아무튼, 오빠 연봉 절반이라도 감수할께. 어? 그럼 됐지? 아니다. 그러지 말고 아예 커피 전문점 뭐 카페 하나 열까? 아님 커피 회사를 차릴까. 그러지 말고 일단 집에 커피나무부터 심는 걸로 하세나. 허허.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고 도니제티가 말하지 않았나. 허허허. 난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내가 이처럼 말이 많아진 이유도 다 알고 보면 커피 때문이야. 들뜨거든. 괜히 좋아. 너도 알긴 알 테지만 커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어요. 정말 꼭 그렇단 말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허허허. 허나 우리가 누구야. 딱 관상 보면 답 나오거든. 레이디 이브? 법 없어도 살 수야 있는데, 남자 30명이 너한테만 줄 서면 너도 너딴엔 미안하잖니. 허허허.
근데 넌 아까부터 왜 계속 웃기만 하니? 너 나 좋아하니? 오빠야 좋다만, 난 걱정이다. 내가 널 실망시켜드리면 어떡할까 라는 점 말이야. 허허허. 오빠 좋아하지 마라. 오빠가 다 생각이 있어. 어? 뭐 그러든 어쩌든 나 말 줄이기 실천중인데 오늘 시작부터 말 너무 많이 했는데. 일단 커피 얘기 그만하고.」
11
(나 혼자 속으로 재빠른 두뇌 회전)
잠깐만. 잠깐. 잠깐. 좀 전에 뭐라 그랬지? 그까이 꺼? 까짓껏? 아아, 어언 20년 전쯤이구나. 택시운전수 하기 전 런닝머신 팔 때. 그때 다시 고딩 친구들을 하나둘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생이 꼬였어. 아주 그냥 꼬여도 제대로 꼬였지. 그 헬스마트 근처 사거리 술집 '묻지 마'. 술집 이름이 하필, 묻지 마. 묻지 마? 묻지 말긴 뭘 묻지 마! 괜히 삼류대학교 졸업도 안 했는데 신용카드 2개 만들어서 허덕이던 때. JCB랑 VISA 그 2개 신용카드로 할부 긁기 시작하면서 허영심 채울 수 있다 값으면 그만이다 그럼 된다면서 막 허덕이기를 1년 가까이. 딱 그때. 그 묻지 마 술집. 비싼 술 먹던 날 딱 친구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그날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이 미쳤어. 어? 그날 하필 술값도 엄청 많이 나왔어. 원래 좀 아저씨들 어쩌고저쩌고 비싼 술값인데. 그렇게 딱 친구가 계산하려고 지갑 열고 어쩌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내가 도움닫기를 하더니, 제대로 날라차기로 녀석을 넘어트려버리고.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아니 그걸 왜 내가 계산하냐고. 한두 푼도 아니었는데.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 탈이라면 탈이지. 그때만 아니었으면... 좀 덜 꼬였으려나. 그 뒤로 고등학교 후배들 어쩌다 보면 하는 말,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형. 저도 날라차기 맞고 싶어요.」
뭐? 이런 젠장! 무슨 내가 무술감독이야 뭐야? 어?
'나는 나는'을 인생 뒤늦게 깨우쳤다면. 난 정말 '나도 나도'에 뼈아픈 기억이 있다는 거. (절레절레)
그런데 어찌된 일인 것일까? 시간은 어떡하다 정지되어버렸던 것이다.
나 혼자 속으로 재빠른 두뇌 회전 중. 그걸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모두. 시간이 정지되었으니까 다 가능한 일. 이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얘도 촉 좋기로 어디서 썩 빠지지 않을 텐데. 지가 당대 최고의 뭐 내놓으라 하는 영심이도 아니고. 지도 다 속이 있고 이상향이라는 게 없지 않을 텐데. 에이~ 나한테 무슨 억한 심정 품어서 말이지. 어? 일부러 빈말에 홀딱 넘어가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미친 척하자. 아니. 차라리 잘됐다!> 막 그러면서 진짜로 1주일에 막 안친하든 친하든 막 이 사람 저 사람 막 막 그냥 막 한 200명 데려오면 어떡하지? 아니 정말로! 그럼 (몸짓)... 수지타산 맞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빚더미에 않게 생겼잖아? 에이~ 설마! 지도 다 말귀 알아듣고 귀동냥으로 얻은 풍월이 얼만데. 그동안 습득한 배경지식과 겪은 세상사가 어딘데. 막말로 내가 지금껏 얘 커피 사준 게 대채 몇 잔인데. 그 돈 모았으면... 아니지 아니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얘도 다 날 괜찮은 오빠로 각별히 아껴. 그럼 된 거야. 어? 그까이 꺼 커피 그거 얼마나 한다고. 어?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일부러 쨰 지가 막 막캥이나 된다는 듯이 나한테 진짜로 막 미친 척 지 지인부터 친구까지 1주일에 한 200명 데려오면 어떡하지? 그럼 난 파산 직전에 피자집에서 10대들이랑 피자를 나르든, 햄버거집에서 유니폼 입고 콜라 원액을 나르든. 인생 새출발 해야 하잖아? 이 나이에? 이 나이? 이 나이가 뭐 어때서! 어? 진정하고. 어쨌든 난 큰소리 뻥뻥 쳤는데. 그때 가서 꽁지 내릴 수도 없고. 이처럼 신나게 떵떵거렸는데 쪽팔리게 내뺄 수도 없고 말이지. 에이~ 아무리 그런다고 지도 다 사람 속내 간파하고 의중 떠볼 줄 아는 어른인데. 어? 지도 다 사심 떠보고 흑심 꿰뚫어볼 줄 알 텐데. 어디 일부러 내 미친 허세, 허세대회 아차상감 허세, (개)허세에 딸랑딸랑 응원한다면서 또 듣고 싶다고 내게 뽀뽀라도 할 거야 어쩔 거야 지가. 어? 그럼 난 파산인데. 이거 정말 이민이라도 생각해봐야 하나. 낯뜨거워서 증말 참, 했던 말이 있는데 생깔 수도 없고.
아니 근데 왜 말이 없어? 어? 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조용한 숙녀였다고. 어? 대체 언제부터? 어? 사람 식겁하게 말이지, 지금 나랑 기싸움하자는 거야 뭐야? 그거였어? 그래? 내가 질 줄 알아? 아아 지고 싶다. 참패. 완패. 필패. 석패. 대패. 어? 왜 지가 질려고 말을 안 하냐고 안 하긴, 어? 아 나 거 참 나 이거 원 증말 못 해먹겠네. 봐 봐 벌써 등에 식은땀 쭉나잖아. 허언증, 적당히 진정됐어. 수전증? 거의 나아가. 망상부터 시작해서 헛것이 보이지를 않나, 다 치료됐는데~ 얘가 얘가 사람 또 미치게 만드네. 말해. 어? 말하라고. 왜 말 안 해? 얘 설마...!
아닐 꺼야. 아니기를! 얘 진짜로 미친 척 들이대지는 않겠지? 에잇~ 지도 숙년대. 사람 무안하게... 그렇지만 혹시... 만약 잘못되면 이거 나 큰 실수하는 건데. 아니기를. 제발 이거 현실이 아니라 어떤 허접 쓰레기가 쓰는 소설이기를. 부디, 간절히 바란다. 애타게 기도드린단 말이다.
12
뭐 적당히 분위기 전환됐다 치고.
「그건 그거고. 너 페넬로페가 누군지 알아?」
「페넬로페? 그거 무슨 초코릿 선전에 나오는 이름 아닌가? 로페스. 머머스키. 언제 TV로 축구 보는데 덴마크팀이던가 어디던가 3분의 2가 킴이던가 뭐던가. 뭐 스미스처럼 흔한 이름 아니야?」
「넌 숙녀가 되가지고 페넬로페도 모르면 어떡하니? 페넬로페는 말이야, 오빠가 알려줄께. 어? 이런 일반상식 다 오빠나 되니까 너한테 알려주는 거야. 나중에 멋진 남자 만나면 너가 먼저 걜 떠봐. 오빠 페넬로페 아냐고. 아 나 이거 증말,」
「오빠. 그만 해라. 어서 말 안 해? 어? 오빠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야.」
「또 또 또. 알았어. 말할게. 하면 될 거 아냐. 흐흠. 페넬로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아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의 아내 이름이야. 오디세우스가 오래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정절을 지키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구혼자들을 재치 있게 따돌렸던 여인. 그래서 광고든 어디든 가끔 페넬로페 페넬로페 하는 거지. 그런데 요즘 애들은 말이야, 어? 나 때는 말이야, 어?」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빠가 꼰대대회 나간 셈 치고 일단 들어나 보자. 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즉각 말해 기회 줄 때. 어?」
「알았어. 하긴 꼭 요즘도 아니지. 시간과 관계 없는 거니까. 유행도 아니고 세태도 아니고. 단지 사람에 따라 연애관 다르고, 드라마 취향 다르고, 운명이 얄미운 것일 수도. 곧 무슨 말이냐면 말이야 진도, 어? 진도! 왜 가수들 배우들 방송 관계자들 기타 등등. 그분들 인물관계도. 즉 자동차 기업들처럼 페라리가 테슬라 주식 1.3%. 어디 얼마 어디 얼마 어디 얼마. 또 폭스바겐도 어디 얼마 어디 얼마... 아주 그냥 거미줄이거든. 그와 똑같이 1번째 남자는 누구, 2번째는 뻔트, 3번은 드디어 멀쩡한 놈, 4번은 풋사랑, 5번은 단지 진한 사랑, 6번은 간만 봤던 그놈, 7번은 공개연애...... 그러니까 그 줄거리 다 아니까. UFC처럼 전적남 전적녀 매번 마주치고, 일 때문에 친하고 어쩌고. 그럴 자신이 있으면 그년, 아니 그분과의 연애 진행하는 거고. 나중 감당할 자신 없으면 일반인 만나는 거고. 그런데 시작부터 양다리? 세다리? 문어다리? 뿐만 아니라 반대로 시작하는 거. 그거 원래 남자와 여자, 즉 시트콤 멤버들 친구들 지인들과 남녀가 공통으로 아는 숫자가 0일 때 진행하는 게 플레이보이의 불문율이다 그 말이지. 서로 인맥 교집합 완전히 0일 때 말이야. 몰래 만나는 게 딴 게 아니거든. 몰래한 사랑이 크게 2가지인데, 단둘이 몰래한 사랑인데 단둘만 아는 사이냐, 아니면 넘어가고.
그런데 여자 세계 불문율도 있는데, 그런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례. 얼굴 팔리는 게 딴 게 아니거든. 괜히 그분들이 손 잡기 건너 뛰는 게 아닌데. 진한 사랑 먼저하고, 순서가 바껴서 썸타고 사귀고 장기 연애까지 가고. 그야 뭐 백년해로 한다면야 좋은데, 그게 어디 쉬울런지. 그야 그분들 인생이고. 우린 우리 식이란 게 있고.」
「아 나 이거 정말, 이 오빠 또 시작했다.」
「」
「오빠 나한테 모스맨 이야기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뭐? 너 들었어?」
「들었냐고?」
「어. 들었니?」
「오빤 들었냐?」
「목이 매인다. 어? 울컥 한다고.」
「좌우지간 오빠 나 알지? 나 조신한 여자야. 나 그런 여자 아니라고. 어? 나 같은 일편단심 순애보 스타일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런데 들었어?」
「그래 들었다. 됐니? 넌 들었어?」
「그래 들었어. 됐냐? 그런데 뭘 들었냐는 얘긴데?」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누가? 내가? 아님 네가? 요즘 유행이 그래. 들었어? 그냥 인사말이 그거야. 상점 이름도 그거고. 하다 하다 상표까지 나왔어. 사람 이름이라고 왜 없겠니.」
「그런데 내가 오빠를 오늘 왜 만난 거지? 겨우 이런 얘기 들으려고? 고작? 어디서 감히 수작이야? 어? 어디서 감히 개수작! 어?」
「그러지 마. 진정해. 참으라고. 어? 너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오빠. 말 나온 김에 하던 얘기나 계속 하자. 하다 말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 오빠. 들었어? 어? 들었어?」
「들었어? 들었어?」
「따라하지 말고. 들었어? 들었어?」
「」
「오빠. 이제 따라하다 지친 거야? 그럼 딴 거. 오빠. 오빠도 그래? 응? 오빠도 그래?」
「이런~ 젠장!」
「오빠.」
「」
「오빠. 아 오빠. 그냥 가면 어떡해? 응? 오빠?」
「」
「오빠. 다음에 만나. 전화해. 아니 내가 전화할께. 오빠. 나 남자 언제 소개시켜줄 거야? 응?」
「」
「오빠. 진짜 가? 야. 멸치. 돼지. 개. 소. 말. 생쥐. 두더쥐. 오빠. 다음에 같이 영화 보자 오빠. 밥도 먹게. 차도 마실까? 오빠. 오빠!」
13
거울은 금테를 둘러도 역시 거울. 금... (절레절레)! 장미에 가시가 있으면 어떠랴. 오히려 없으면 삼류요 모르면 바보. 그런데 탐스럽지만 맛없는 열매? 설익은 열매 아무리 문질러도 익은 열매 안된다. 정답은 기다림. 아니 어~ 아 글쎄 그러니까 언제까지 기다리냐고요! 아 증말 거 참 나 미치겠구만 그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인생이 재미없다는 거. 아니 어쩌다 이렇게 심심한 삶 무료한 일상에 난 물팍 꿇고 좌절하는 거지? 왜? 어째서? 아니 뭐 때문에? 자, 가만 있자. 보자.
CPU: 3500X
메인보드: ASROCK AB350M PRO4
그래픽카드: RX580
램: ESSENCORE KLEVV DDR4 8G PC4-21300 CL19
파워: ANTEC NE650C 80PLUS
SSD: WD250
인문교양학적으로 인지심리학이든 뭐든 많은 게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CPU? 업그레이드 가능은 한데 천성은 안 바뀜. 다시 말해 가능만 하다뿐 어렵다 그거지. 메인보드? 괜히 가족마, 부부마, 친구마, 재능마, 취미마, 적성마...에 따라 성공 가능성이 확연히 나뉘는 게 아님. 부모 잘만난 유전자발이 최고 중의 최고인데. 아니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냐고? 뭐긴 뭐겠냐 컴퓨터 케이스지! (절레절레) 사는 낙이 어디 나만 이렇겠나. 그럼 설마 벌써 갱년기가 서둘러 찾아온 건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에잇 설마. 그럼 어떻게 아쉬운 대로 잔꾀를 부리자면 뭐냐 그 그게 그러니까, 내 CPU가 AMD 거라서 문젠가? 이를 테면 인텔 최고급 사양, 즉 천동설 사고체계로 이번 참에 확 그냥 바꿔 말어? 어? 그래픽 카드 곧 있는 돈 없는 돈 싹 다 끌어모아서 번쩍번쩍 명품으로 휘감아? 최소한 말끔한 수트발만? 귀찮아. 품위 유지비조차 허덕이는데 수트발은 무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야, 어? 초청객이 백이라도 자리가 있으나 불청객은 하나라도 자리가 없다는데. 갈 데는 많은데 오란 데가 없고. 이건 뭐냐고! 진짜로 시트콤 멤버들 다 해체되고 아는 동생들 다 떨어져나가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라고. 어?
따라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칼럼니스트로서의 밥값과 문인의 평타가 문제가 아니라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를 엿본 환시 때문에 나는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오늘은 릴리와 만나기로 했다. 물론 아는 동생들이 거의 다 지들이 날 먼저 찾았지 내가 먼저 연락한 일은, 있나? 없는지 몰라도 일단 넘어가자.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릴리. 너 왜 호박이 제 발로 굴러가는 줄 아니?」
「어쩜 오빠의 구변이 꽤 흥미로울 것 같은 주제인데. 아마도 내 기대가 실망 아니기를 바래.」
「'몰라 왠데?'라고 받으면 되지. 넌 꼭 드라마 주인공처럼 말하니? 너 그거 어디서 배웠니?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얘. 응? 그래서 늬가 남자가 없는 거야. 어쨌든, 안 들었어?」
「안 들었냐고?」
「응. 왜 호박이 제 발로 굴러가는지를.」
「오빠. 나 읽는 부류야. 듣는 영심이 스타일 아니라고. 어? 나 안 들었어. 그럼 오빤 들었어? 아, 읽었을 수도 있구나. 아님 생각해냈든지. 응?」
「그러니까 안 들었단 말이지?」
「」
「알았어 알았어. 말할게. 말 하면 될 거 아니야. 왜 그 고운 눈에 불을 켜고 그래? 너도 눈에서 레이저 나오니? 너도? 너도 그래?」
「오빠도 그래? 오빠도? 들었어? 뭐 들었어? 아 증말 안 들었다니까 그러네.」
「알았어 알았어. 안 그래도 말 하려고 했네 했어. 응? 넌 왜 사람을 자꾸 보채고 그래. 응? 숙녀가 진득하니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응? 그러니까, 말할게. 그래. 말하자.」
「뭐 해 말하지 않고? 오빠.」 그러면서 그녀는 냉수가 담긴 컵을 들어 나에게 쏟으려는 시늉을 보인다.
「어헛! 진정해 숙녀. 차분하시오 낭자. 왜 그러시오 사람 무안하게. 응? 혹시 그대도... 동자승 민머리에 덥썩 맨손바닥을 가져다 댔던 기억이 있소? 그럼 맨손이지 무슨 장갑 끼고 가져다댈 일 있나. 어쨌든, 그러오? 혹시 당신께서도 첫경험과 첫키스와 첫사랑이... 일치하지 않는...」
결국 릴리는 물컵의 물을 나에게 끼얹었다. 물론 물이 가득 담겨 있지 않았기에 난 몹시 서운할 뿐이었고. 그 역시나 웃음을 꾹 참는 연기력 둘 다 출중하니까 가능한 일일 테고.
......
......
......
한 호흡에 쭉 화염방사기 그 정열적인 화염을 내뿜는 긴 대사.
말 그대로 한꺼번에 가니까 그건 칼럼으로 따로 떼어냈음.
바로 그렇게 <칼럼: 호박론>을 쉬지도 않고 무정차로 끝까지 갔음.
......
......
......
나는 대화로 <칼럼: 호박론>을 무멈춤으로 연설했다. 그러다 목 시었다. 정력 바닥났다. 기 몽땅 짜냈다.
그랬더니? 요컨대, 릴리는 내 옆자리로 와서 내게 뽀뽀를 해주었다.
물론 볼뽀뽀! 살짝 고개를 돌릴 걸 그랬나?
그 아찔한 찰나. 시간은 정지되었다.
아직까지 붕붕 떠다니는 내 기분으로 판단하건대,
지금도 느려졌던 시간은 제 본분을 게을리하는 게 분명하고.
좌우지간 내 허언증? 치유됐다. 내 환시? 치료됐다.
그 다음 절정감? 아직이다. 아직이라고. 이런 젠장.
14
나는 사무실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음악을 들었다.
J. S. Bach / 칸타타 BWV 51
그러면서 생각했다. 만에 하나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의 집에서 내가 본 환시가 진짜라면 그땐 어떡하지 라는 점을.
그래? 정말로 어떡한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제라드한테 따져야지. 설마 녀석이 날 쏙 빼놓고 뭐 레너드를 후계자로 점찍을 리야 있겠어?
그렇지만 말이야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녀석을 만나야 결단을 내던 끝장을 보던 마무리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곧장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를 찾아가려고 했다.
바로 그처럼 공상에서 결심 후 행동에 곧장 옮기려던 찰나 사무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 뭐 해? 들었어?」
「들었냐니? 넌 인사말이 왜 하필 '들었어?'로 시작하니?」
「못 들었구나.」
「뭘 못 들어?」
「나와라. 너네 사무실 앞 카페야. 나오면 아마 깜짝 놀랄 걸?」
10분 후.
카페에 가니 사무엘과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너는...!」
「친구. 오랫만이야. 어떻게 지냈나?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 아니란 거 알지? 자넨 어떤 빈말을 준비했나. 벗이여, 어서 말씀해보시게.」
「이렇게 깜짝 놀랐는데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
「사무엘과 또 다른 몇몇 친구들한테 얘기 들었어. 네가 요즘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얘기 말이야.」
「누가 그래? 나 상태 좋아. 아 누구야 그 녀석?」
「진정해. 그렇게 흥분하면 안 좋던 상태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친구. 안 그래?」
「나 상태 좋다니까 그러네. 어?」
「그나저나 들었나?」
「뭘 들어?」
「아 네가 아니구나. 착각했네. 사무엘. 이제 너가 대화해. 나 힘빠졌어.」
「넌 애가 정력이 그모냥이라서 어따 쓰니? 그래서 모스맨 연구자라고 자부할 수 있겠어?」
「나 때려쳤어.」
「뭐?」
그 자리에서 내가 봤던 환시 얘기를 했는데, 제라드는 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하긴 내가 들어도 그게 말이 되나. 아무리 진짜라고 할지라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난 진짜지만 남들이 듣기에) 공상을 얘기하면 그걸 누가 믿겠냔 말이다.
「자네 실망할지 모르지만 내가 이 연구에 그렇게 썩 오래 매달린 거도 아니고, 나도 이제 지쳤어. 연구하는 데까지 하긴 했는데 성과도 그저 그렇고. 진행도 더디고. 그런데 있잖나. 자네 혹시... 혹시...」
「혹시 뭐?」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음 사냥꾼은 사냥하는 꿈 꾼다지 않나...」
「왜 말을 하다 말어, 사람 궁금해지게? 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속 시원하게 좀 말해 봐. 어? 나 안 들었으니까 지금 당장 말하라고. 어?」
「자네 있잖나. 음. 있지? 음. 있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 뭐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있잖나, 자네 누구한테 혹시 쫓기나?」
「쫓기냐고? 내가 왜 쫓겨! 누가 날 쫓는데? 걔 뭐하는 놈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러니까 쫓겨, 안 쫓겨?」
「날 쫓는 쪽이 뭐 쫓는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쫓을 일 있겠나? 날 쫓는 자가 만약 있다면! 그럼 우리가 널 쫓을께 당신은 도망가소. 임자. 아시겠소? 그처럼 뭐 걔랑 나랑 사랑싸움 할 일 있니? 그래?」
「아니. 쫓는다 안 쫓는다. 기다 아니다. 예 아니요. 딱 한마디면 되는데 너 참 말 길다. 너 혹시 아침에 코도 길어지니?」
「아침에 내 코가... 내 코가 왜 길어져야 하는데. 내가 무슨 피노키오니?」
「설마, 지금 코끼리 팬티 입었어?」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허허허. 농담이고. 자네가 너무 긴장한 듯 해서 말이야.」
「뭐야? 좀 전에 하던 말은? 뭐 물어볼려다 말았잖아?」
「내가?」
「아 나 증말 이거 진짜 뭐하는 거야? 이거 왜 이래? 어? 너네 진짜 이러기야? 어?」
「워 워 워. 저번에 너네 셋이서 우리집에 왔다는 거 들었어.」
「그래? 들었어?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그냥 들었다 그거지.」
「뭐야. 그게 다야?」
「설마 겨우 그 얘기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 아니실 테고. 이제 그만 숨긴 패 드러내자. 어? 베팅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 패 까자. 어?」
「콜. 내가 듣고 싶었던 게 그거야. 바로, 그거.」
지금까지 제라드와 내가 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침 사무엘이 끼어든다.
15
사무엘은 말했다.
「우리가 널 모르니? 너 또 그랬지?」
「내가 뭘?」
「뻔하지.
첫째, 너 혼자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를 독대하러 간다.
둘째, 제라드네 동네 인근에서 길을 잃는다. 어쩌다 갑자기 이명이 들리고, 두통이 일더니, 핑~하다 쓰러진다.
셋째, 깨어나보니 제라드의 집이다. 그런데 집주인 제라드는 없고 웬 미모의 여인이 섹시한 실크 원피스 차림으로 널 지켜보고 있다.
넷째, 그렇게 그녀와 둘이서 기다리는데 제라드는 포인트 프레전트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섯째, 그녀와 둘이서 포인트 프레전트까지 갔어. 그런데 제라드는 중간에 마음이 바껴서 2007년 캐나다 몬트리올주의 주택화재 당시 목격됐다던 현장으로 갔다.
여섯째, 그녀와 둘이서 캐나다 몬트리올까지 갔어. 그런데 제라드는 중간에 마음이 또 바껴서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현장 근처로 갔다.
일곱째, 그녀와 넌 짜증나서 제라드 접선을 포기한다. 그래서 제라드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네게 고백한다. 물론 가면을 벗으면서. 알고 봤더니 그녀는 제라드였다.
여덟째, 그걸 보는 순간 넌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나중 깨어났는데 너네 동네 근처인 거지.
아홉째, 넌 또 시트콤 찍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아는 동생들과 즐겁게 지내다가. 딱 누군가가 네 간을 만지는 관통 마술을 너에게 선보이자. 너는 예전에 말했던 그 환시 현상이 사라짐을 경험한다. 그러다 물론 어떤 계기로 병이 도진다. 허언증까지?
아홉째 반, 뭐 아홉째 반? 그만 하자. 그게 좋겠다.
너 또 소설 쓰려고 했지? 아니. 아예 진짜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라드집에 혼자 가려고 했지? 우리가 널 모르니!」
「너 나에 대해 많이 연구했구나. 이왕 하려면 아리따운 숙녀를 연구할 것이지, 왜 하필 나를? 그야 물론 심심해져일 수도 있고, 굳이 꼭 연구가 필요할 가치가 없이 대충 뭐 늬 말발이면 뭐가 문제겠니.」
「아네. 알면 다행이고.」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나도 눈치 있어. 내가 뭐 남자의 육감 그런 거 없을 줄 아니? 어? 나도 직감 엄청나게 발달했어 인마. 이거 왜 이래? 잠깐. 이거 왜 이래?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시끄럽고. 있잖아. 제라드가 그 일 그만 둔데. 모스맨 연구 말이야. 그래도 성과도 톡톡했어. 캐낸 결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고. 또 있잖아 레너드가 지금 어디 갔는 줄 아니?」
「어디 갔는데?」
「두 가지 일을 하려고. 오늘은 소설'나방인간의 예언'의 작가인 존 A. 킬을 만나러. 그리고 내일은 그 뭐야. 2002년 작 마크 펠링톤 감독으로 영화 모스맨, 거기 주연으로 출연한 리처드 기어를 만날 거래.」
「아 그 영화? 봤긴 봤나? 그 영화 주연 혹시 해리슨 포드 아니었니?」
「아니야. 리차드 기어야. 늬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착각일 수 있어. 이해해.」
「그런가?」
「응. 좌우지간 나 혼자였으면 그랬겠지. 뭐라고? 뻥이야! 라고 말이야. 그렇지만 너 보다시피 오늘 난 혼자가 아니잖니. 여기 이렇게 모스맨 연구의 권위자이신 제라드가 떡하니 버티고 계신데. 내가 설마 거짓말이라도 하겠니? 너가 속아넘어가서 내가 얻을 게 뭔데. 안 그래 친구?」
아 자식들이...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순간 잔꾀는 바닥났으나 잔머리 엄청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소식 알렸으니 우린 갈께.」
「벌써 가?」
「그럼. 남자들끼리 뭐하게? 으쌰으쌰 노는 거? 이젠 그만 철들 때도 됐잖아 친구.」
「만나서 반가웠어 딕. 갈께. 아 맞다. 이거.」
그러면서 제라드는 웬 USB를 내게 건넸다.
「어차피 난 그거 필요없어.」
난 그때부터 비상한 호기심이 날 들었다 놨다 했기 때문에, 내 청력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난 걔네들이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네며 가는데 이상한 오르간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16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단 맨정신으로는 어려울 거 같으니. 저번에 사놓은 초록색 술을 따라놓고. 그건 싸구려라서 보기만 하고.
꽤 괜찮은 포도주를 따라셔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오페라 <후궁탈출> 2막 -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려면 상냥하고 친절해야지”
USB! Universal Serial Bus. UFO도 아니고 ABS도 아니고 USB.
도대체 이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혹시 제라드가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의 신상정보? 꼬신 방법? 에잇~ 아닐 꺼야. 그럴 리가 있나.
아니면 뭐 사무엘이 쓴 일기? 그러니까 굶주린 하이에나 풀 뜯어먹는 소리? 밑도 끝도 없이 사무엘이 일기를 왜 써. 나라면 또 모를까.
그렇게 난 뜬금없이 손에 쥐게 된 USB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왜 아니겠나.
(초식동물처럼) 풀을 먹는다면 늑대를 왜 안 기를 텐가. 늑대가 야성이 장난 아니니까 인간은 개와 친구가 된 거지.
이 USB는 그처럼 뭐가 튀어나올 줄 모르거든.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그게 말이다, 난 그냥. 아아. 황홀감에 후끈 달아올라 여지없이 환상에 흠뻑 젖어버릴 신비한 경험. 꿈도 못 꾸고 있는 처지...까지는 아니고.
뻥이다. 그래. 뻥. 그냥 눈 딱 감고 보자.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게 나는 USB를 열었다.
캬~!
와우~!
뜨아~ 와!
그 안에는 무슨 야한 사진과 야한 동영상이 가득 들어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거기엔 웬 엑셀 파일이 있었다. 작성자 누구__작성 날짜__업데이트 날짜___기타 등등. 파일 정보는 그랬다. 아마도 제라드 말이 맞는 거 같았다.
그렇게 엑셀 파일을 열어봤더니... 와...!
1966년 11월 12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렌데닌의 묘지에서 모스맨을 목격한 사람들이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A 이름
B 생년월일
C 태어난 시각? 빈칸도 꽤 있는 걸 모른 사람이 많거나 잊었거나일 테고. 또 혹시 고인이 되었으면,
D 사망일 (물론 대부분 빈칸)
E 주소
F 직업
G............... 그처럼 군인 출신은 입대일과 제대일. 행정기관에 기록된 호적사항. 여권내용. 기타 정보기관에서 조사할 수 있는 전부. 사설 탐정이 캐낼 수 있는 모든 것.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참사 직전, 1951년 시카고대지진, 1933년 중국 댐붕괴, 1978년 독일 탄광사고, 2007년 캐나다 몬트리올주의 주택화재까지도 목격자 모두.
체르노빌 사고만 해도 날짜 1986년 4월 26일, 시간 오전 1시 24분 (UTC+3)...
그렇게 엑셀 파일의 가로는 ABCDEFG...... 세로는 12345678910......!
물론 앞서 제라드의 말처럼 아무래도 많이 힘들었을 테니 중간에 포기했으므로 빈칸이 많았다.
특히, 2003년에도 어딘가, 2013년에 칠레. 1945년 8월 6일과 9일. 2001년 9월 11일 오전 8:46분... 현대사 큰 사건들 사이의 숫자 관계도 다른 엑셀 파일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암호학의 기초, 중급, 고급, 최고급 외에 일반인이 쉽게 살필 수 있는 것. 바로,
ABCDEFGHIJKLMN......
12345678910......
EF =56년을 뜻하고 어쩌고저쩌고 별의별 내용들이 다 들어있었다.
제라드가 무슨 천문학적 부자도 아니고. 지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무래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규모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다음 타자 다음 타자... 막 전달하는 게임도 놀이도 아니고. 왜 이 물건을 내게... 이상했다.
그리고 내가 제라드랑 그다지 많이 친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점도 그렇고.
저번에 사무엘이랑 레너드가 갑자기 제라드 얘기를 꺼내길래 약간 이상하긴 했는데.
뜬금없이 막 분위기 조성을 하질 않나, 안 하던 뻠쁘질을 하질 않나. 걔네들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내가 이 일을 이어받아서? 아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느낌 세했으니까. 왠지 모르게 음침하고. 어딘가 켕기고 찔리고 뒷맛이 개운치 않고.
공포. 독기. 광기. 똘끼. 살기. 불운. 조짐. 불길. 그 배후에 있는 풍운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혹시, 광마? 나방? 나방인간? 나방인간의 예언? 계시? 암시? 묵시?
지들이 무슨 노스트라다무스의 방계 후손이야?
나방인간? 사랑은 나비인데... 가만 있자. 자, 사랑이 나방? 이건 느낌 쎄하다 그거지.
그래서 나는 깔끔하게 구석지에 USB를 방치했다. 그냥 잊었던 것이다.
간단하네. 깔끔하군. 좋다고. 됐어. 이 쉬운 걸 왜 몰랐을까. 허허.
17
희망찬 내일로 전진. 닥치고 일하기? 우리가 무슨 탱크도 아니고 말이야. 꼬마들도 이젠 세발자전거 보면 짜증낼지도 모르는데. 비효율적으로 아무 데나 갔다 돌아올 생각을 하면... (절레절레)! 그렇게 까먹은 돈은 얼마고 정력은 또 어떻고. 그러니까 열정적인 행진이 뭐가 나쁘겠냐마는, 아니 그러니까 그 사춘기 시절에 뭐하러 탱크 게임 서적을 훔쳤냔 말이지. 여심을 훔쳐도 모자른 마당에 말이야.
여심? 여자의 마음 뻔해. 자, 한번 그녀들의 마음을 알아볼까? 9시 방향, 꺼져. 10시 방향 아가씨가 뭘 생각하는지 훤히 보인다 보여. 짧네. 닥쳐! 11시? 나가! 12시는 자, 보자. 또 반했네. 또 반했어. 아조 그냥 툭하면 홀려. 다음으로. 12시 반, 개자식. 12시 40분, 어딜 넘보녜. 1시? 목소리 달콤한 남자들만 환영한다 그거지. 2시, 거울 보고 알아서 주제 파악 좀 해주면 안되냐 그 생각 중이라고. 3시, 똥파리만 꼬인다고 짜증내시며 친구랑 통화하시는구만. 4시 비켜 5시 저리 가 6시 이라 와!
여자랑 대화하면 재밌기야 재밌지만, 남자의 인생에서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란 바로 그거. 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기 위한 연기일 뿐. 아니 그런가? 초반에야 다 서로서로 맞춰주고 동의하며 호들깝 떨기 바쁘지. 시간 쫌만 지나봐, 어? 사랑과 행복과 쾌감과 이상까지. 하늘, 바람, 별과 멜로드라마. 다 뻥. 몽땅 뻥. 허세 대 허영심의 대결일 뿐. 지 할 말만 하고 전화 뚝 끊는다는 둥, 지가 세상 최고인지 안다는 둥. 지 밖에 모른다거나 남 생각 요만큼도 안 한다거나. 우리는, 사랑에, 취미 없다. 그럼 뭐에 관심이 있을까? OK~ 새로움! 그런데 무엇에 관한? 라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
레너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 뭐 해? 너 혹시 끊었던 커피 마시고 있니?」
「어떻게 알았어?」
「진짜야?」
「응.」
「너 일하기 싫지?」
「넌 뭐 학교 다닐 때 공부 재밌었냐?」
「그건 그렇고. 얘기 들었지?」
「또, 들었어요? 너도 '들었어요'남이구나. 난 전염시키지 마라 제발.」
「아 농담하지 말고. 지금 어렵게 섭외하신 분이 옆에 계서서 그래. 들었어?」
「무엇을? 누구한테? 너 또 뻥치는 거 아니야?」
「모르는 척하지 말고. 들었지? 사무엘이 저번에 너 만났다던데. 제라드랑 같이.」
「뻥 아닌가 보네. 그럼 다행이고.」
「들은 게 맞네. 사무엘이 말했다 했으니까 걔 말마따나 들었네.」
「들었냐는 물음 빼고 말하면 안 되니? 제발 좀!」
「들었냐가 뭐 어때서! 귀가 있는데 어떻게 안 듣니. 어?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망사 스타킹에 반하지, 뭐 망사? 망사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봤니?」
「뭘 봐? 스타킹? 내가 스타킹을 왜 봐야 하는 걸까? 안 보면 안 될까? 뭐야. 말 꼬이게 바람 넣지 말고. 됐고. 너네 사무실 앞이야. 안 그래도 너 퇴근할 시간 됐자나. 나오게 친구. 보면 아마 깜짝 놀랄 사람이 있을 테니까.」
「깜짝 놀랄 사람?」
「어. 깜짝 놀랄 사람. 너 깜짝 놀라서 바지에 오줌 싸지나 마라.」
「여자야?」
「(멈짓) 어...어.」
「말 더듬는 거 보니까 남자구나.」
「그래도 완전 깜짝맨이라니까. 혹시, 사무엘이 살짝 귀뜸해주지 않든?」
「무슨 브래드 피트라도 데려왔니? 데려오려면 주가 최상가치는 세끈 매끈 후끈, 어? 내가 흠뻑 젖을 수 있는, 어? 내가~ 어? 내가~ 어? 됐다.」
18
약 16분 후 카페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레너드가 데려온 인물은 다름 아니라 리차드 기어였기 때문이다.
「인사해 서로. 이쪽은 제 친구 딕, 이쪽은 아시다시피 리차드 기어.」
「안녕하세요. 전 리차드 기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뻥치지 마요. 댁이 리차드 기어면 나는, 나는, 어? 나는, 캘빈 클라인이요.」
「네? 지금 입고 계신 팬티가 캘빈 클라인이라구요? 유머가 남다르신 분이군요. 저 그처럼 약간 경박한 듯 하지만 한 3시간 후에 터지는 유머 좋아합니다. 연마되고 발동걸리면 그게 바로 고급스러운 농담이니까요. 허허허.」
「야 너 왜 그래? 내가 어렵게 만든 자리야. 이 녀석이, 너 왜 그래? 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너 어디 아프니? 열 있어?」
「넌 더 안 좋아 보여. 알아? 야 레너드. 내가 너 뒷조사한 거 알아 몰라?」
「너 내 뒷조사 했니?」
「아니. 뻥이야.」
「하여튼 증말...」
「야.」
「뭐?」
「내가 늬 속 모를 줄 아니? 미스터 리차드? 아, 미스터 기어. 기어?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거 대역을 부를 거면 적어도 B++급을 불러야지. 어? 야 레너드. 늬가 무슨 C++ 코딩 연습하는 프로그래머냐?」
「나 대학 때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한 거 늬가 어떻게 알아?」
「말 돌리지 말고. 너 또 그럴려고 그러지?
저번 USB는 복사본 일부였다.
그래서 연구를 하려면 자금이 더 필요하다.
너한테만 긴밀히 알려주는 건데 다른데 절대 발설하면 안된다.
그건 무엇이냐, 바로 모스맨 연구를 완성해서 펀딩 조성하고 드라마 연작 들어간다.
이미 드라마 연작 시나리오 거의 완성됐고 캐스팅 단계 들어갔다.
따라서 펀딩 조성 중.
잔말말고 딱 3장만 투자해라?」
「너 그동안 어려웠니? 너 원래 안 그랬잖아. 이 친구 때타기 전에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너 능글맞은 거 알아 몰라?」
「설마, 내 말이 진짜니?」
「진짜겠냐. 약간은 비슷할 수도 있는데. 그냥 오랫만에 만나서 회포나 풀자 그거지.」
「남자끼리? 여자는?」
「너 아직도 여자 좋아하냐?」
「그럼 넌 뭐 남자 좋아하냐?」
「친구분들 심각한 대화 중에 끼어들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전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근처 극장식 카바레부터 바 개업식까지 갈 데가 많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래뵈도 저 A급입니다. 허허허. 그럼 이만.」
그렇게 리차드 기어인지 기아인지 그 아저씨는 도망갔다.
「넌 저분 대체 왜 불렀어?」
「내가 불렀냐?」
「늬가 안 불렀으면?」
「지가 그냥 따라온 거야.」
「그래? 저 사람 자리에 없다고 책임 떠넘긴 거 아니고?」
「아니라니까.」
「」
「야. 나도 갈께. 널 만나도 통 즐겁지가 않다. 내가 널 왜 만났는지 모르겠다. 늬 꺼벙한 표정을 보니 내 인생이 더 허접해진 기분이라고. 알아? 안 그래도 원래 재미없었는데 널 보니까 더 재미없어졌어. 알아? 어? 늬가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어? 늬가 그러니까 안된다고.」
「내가 아니라, 늬가~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어? 그러니까 늬가 여자가 없는 거라고.」
「친구. 나 여자친구 생겼어. 지금 여자친구 만나러 갈 꺼야. 따라서 이제 더 이상 너한테 '늬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야'라는 말 듣지 않게 됐다는 점. 굳이~ 축하받고 싶지는 않다. 허허. 아주 그냥 징글징글했다. 어? 지겹지도 않은지 나도 모르게 똑같이 따라하고. (절레절레). 야. 나 갈께. 다음에 보자. 아니. 한동안 나 볼 생각 접어라. 나 보기 힘들꺼야. 왜냐, 연애하느라 바쁘거든. 푸하하하하하하하.」
「저 자식이...!」
19
늑대는 양의 꽁무늬를 쫓는다, 는 인류 역사상 사랑의 가장 오랜 공식이자 공리. 그러나 남녀 공히 상대의 본심과 환상을 알고 나면 여지없이 꿈은 깨지기 마련. 그래서 간질간질 빈말과 딸랑딸랑 칭찬, 새콤달콤 아양 아부 교태 내숭은 부득불 불가피한 것. 그렇긴 하나 나이 들면 새벽에 눈이 번쩍 뜨이고 늙으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게 순서. 때문에 못 해본 일과 달콤한 연애에 대한 탐구를 내일로 미룬다는 것은 기가 막힐 노릇. 시간이 없다. 인생은 딱 1번. 2번은 없다. 사랑도 없다. 뭐?
좌우지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봄은 때 되면 돌아온다. 짝사랑복도 끝이 없다. 그렇긴 하다만 즐거운 미래에 대한 예감 좋은 전망은 내내 불투명하고. 또 그렇다고 생각 없이 한량처럼 마냥 새콤달콤한 쾌락마를 탐닉할 수도 없고. 그의 인생에서 지루함은 맹공을 펼치고 따분함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아주 그냥 섬뜩할 정도, 어? 요란한 탐욕도 바닥났지 품위 챙길 판돈도 간당간당하지. 행운은 아름다운 숙녀의 아찔한 고갯짓처럼 깐깐하게 굴지,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빠른 생애사 전략의 달콤한 셈법. 지나고 보니 영웅담도 뭣도 없고. 소싯적 정식 연애가 어딨어. 행운아의 여복에 적잖은 타격을 논하기도 초라한 현실만이 끙끙 앓는 시늉. 대책 없음. 이 무슨 낙심한 풍운아 신세냐고.
잘 생각해보니 레너드와 난 원래 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사무엘도 마찬가지. 모스맨 연구자 제라드도 그렇고. 그 일이 있었던 뒤로 환시는 모두 치유됐다. 그러던 중 어쩌다 거울을 볼 때, 내가 아니라 타인이 거울을 보고 있는데 그 거울 속의 타인 모습과 내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런 일을 겪고 나면 한동안 저번 그 환시는 재발되곤 했다. 그러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내 인생은 역시나 더럽게 심심했던 것이다. 곧 차별화가 안되는 은행권 주식처럼 맹숭맹숭 심심한 남자. 주가는 내내 평행선일 텐데, 언제 대체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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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물론 거기서 끝이면 재미없지. 한가지 더. 먹고사는 게 뭔지. 일만 하며 사느라 재미없는 건 둘째치고, 만나는 사람이 뻔했는데. 환상문학잡지 편집장 마라와 여성환상 1.5 대표 사라. 그런데 언젠가 마라와 대화하던 중 난 정말 이상한 말을 듣게 됐다.
「사라는 왜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드니?」
「너 아직 못 들었니? 하긴 사라가 너한테 말하지 말라면서 드라마 관계자부터 심리치료센터장, 정신의학계, 요가학원 등 안 다녀본 데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지.」
「걘 잡지나 잘 만들면 될 것이시 왜 자꾸 딴짓을 한데니? 걔 남자한테만 한눈 파는 게 아니구나. 걘 계획이 다 있구나. 어?」
「왜긴 왜겠어? 그게 다 너 때문이지.」
「나 때문이라고?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너가 걔네 사무실 들려서 자꾸 직원들한테 찝쩍거리고. 사라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넌 알면서, 걜 실제로는 밀어내고 겉으로는 늬가 사랑의 약자인 것처럼 껄떡대고. 그게 뭐니 남자가. 하여간에 누가 쪼잔하다고 안 할까 봐서... 쯧쯧 잘한다 잘해.」
「그건 너가 잘 모르는 일이나 본대 다 우리끼리 좋게 돼 가고 있어. 내가 걔한테 남자 한두 명 소개시켜준 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뭔가 문젠데?」
「사라가 널 볼 때마다 환시가 생긴데. 네 뒤로 너랑 똑같은 도플갱어가 겹쳐서 보인다나 뭐라나.」
물론 마라를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측근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마라도 사라와 똑같은 증상으로 한동안 휴직했다는 걸.
그럼 정말 그게 나 때문일까? 나는 실의에 빠졌으나.
또 모르지 사라가 어디서 여자말 역번역기를 개발하는지도.
그래도 꽤나 걸리는 일이란 걸 부정할 순 없고.
도대체 왜 그랬는지 더더욱 의뭉스럽긴 마찬가지고.
따라서 그는 최근 폭식에 빠졌다. 왜냐, 왜일까! 왜냐하면, 이유는 다음 문단으로 떼서 가는 걸로.
21
왜인고 하니 사나운 개도 개밥 앞에서는 온순해진다고 일단 배가 부르면 잡념이 없어지니까. 일단 먹고 봐야지. 다 먹고살자고 허는 일. 아닌 게 아니라 식욕이 충족되냐 아니냐에 따라 관계되는 일이 알고 보면 상당히 많다. 식욕, 스트레스와 큰 관계.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게 만족스러운면 나머지 웬만한 만족-불만족 사항들, 욕구불만 쾌감만족들 거의 1~2단계는 이득. 가령 식욕이 평범에서 극도로 만족이라면, 식욕만 변화를 주었을 때 수치는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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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 불만 불만없음 만족 대만족
놀기 D-- D++ C++ B++
일하기
건강
열정
의욕
사랑
미소긍정
친절자상
짜증지수
기분전환
문화생활
연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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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 해소만 변화를 주어도 나머지 전부 영향 받음.
그래서 미리미리 신경쓰고, 면밀한 관찰, 노련한 베팅이 필요. 그게 비즈니스면 접대&로비스트&승부사. 즉 초반에 통 크게 1번 만찬 대접하면 끝날 걸, 어쩌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게 됨. 말하자면 뻔트부터 홈런까지. 틀을 경양식으로 짤 것인가, 아니면 속된 말로 초반에 비싼 술로 조지고 일찍 끝낼 것인가. 어영부영 폼잡고 풀코스로 갈려다가 죽도 밥도 안됨. 풋사랑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걸 스스로에게 알뜰&세심하면 책략가&자기관리. 친한 사이면 티격태격. 나도 뽐낼 줄 안다, 누군 뭐 짠돌이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냐는 둥. 마초들이 미리미리 칭찬해주지 않으니까 생색내는 것. 어디 여자만 관심받는 것 좋아하겠나. 조련사로 사랑을 듬뿍 배풀어줘도 모자를 마당에 주인공병도 다 초반에나 신부들러리 서주는 것. 허세에 헛바람 넣기냐, 허영심을 들었다 놓기냐. 주도권 밀고 당기기. 초장에 잡으려다가 역공에 어퍼치기 당하느니 개에게는 개뼉따귀를. 송아지는 쓰다듬어주는 사람의 손을 핥는다. 개한테 개뼉따귀 던져줘 봐,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아주 그냥 미쳐버리지! 아무튼, 그래서 채찍과 당근 작전을 반대로 하면 안됨. 어? 이러니 이러니 거꾸로맨과 숙녀는 사랑의 시소 잘 타다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샛길로 빠지지 말고. 하던 얘기인 배불리 먹기. 배 터지게 폭식하기로 돌아가서.
또 음주 역시나 식욕이 만족되느냐, 그럭저럭 입에 풀칠만 하냐에 따라 나뉜다. 평소 금주 절주 잘하는 사람들이야 예외라 치고. 개인적 이유와 원인 거론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알콜 의존 부류. 음주 욕구를 참는 수많은 방법이 있겠으나 딱 2가지.
A. 당일 저녁 폭식: 흡족 이상. 풍족 초과. 배 터지게!
B. 내일 아침 특식: 아침식사를 만족스럽게 억을 준비.
술 끊고 싶은 사람들이야 각자 찾고 끊고 각자 책이라도 몇 권 쓰실 수 있을 텐데. 끊는 방법 원 그래프에서 피자 조각 가운데 하나. 저녁 식사를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어쩌고. 그럼 밤에 별로 술생각이 없어진다는 것. 물론 말 그대로 원 그래프에서 사람들이 먹고 남긴 피자 겨우 1조각일 뿐이지만. 부페든 뭐든 맛난 사진 보면서 오늘 저거 먹기로 딱 찍는 일 역시나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말 그대로 먹고 싶은 거 배 터지도록 먹으면. 여러 명이서 피자 한두 판 금새 거덜내겠으나. 그러다 입 짧은 숙녀들이 남긴 피자 1조각, 그 정도는 충분히 되는 방법이라던가 아니라던가. 그래도 최소한 그 1조각에 해당하는 정말 괜찮은 방법이든 말든, 살 잘 찌는 사람이야 몰라도 먹고 싶은 거 맘껏 먹는 게 정말 어딘데. 식욕이 만족되냐가 또 거기까지 촉수를 뻗치는데.
그렇긴 한데 그 방법이 더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약발 받는 부류. 없지 않다. 정말로. 고급스럽지 않다 뿐이지 먹힌다는 게 어딘데. 그래도 뭐랄까 좀 비겁한 방법이라고나 할까. 왜냐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단하랄지 권태롭다랄지, 괴로운 또는 재미없는 삶에서 시소 저울의 양쪽에 값싸게 도파민 얻는 방법에서 자기의 취미 말고 달리 양질의 재미랄지 색다른 쾌락, 그게 형편이 뭐하니까, 고로 주신 디오니소스의 도움을 받는 거 아니겠나. 그렇지만 것도 다 팔자 편한 얘기. 당장 품위 유지비도 빠듯한데 버는 돈 식비에다 절반을 쓰기엔 재산 증식이고 뭐고 정말로 먹고살기 빠듯해져서 큰일이란 말이다. 뭐 아무튼.
환자가 우유를 먹고 싶어 하는데 의사의 처방도 우유. 뺨 맞고 싶은데 누군가 철썩 부드럽게 연기하듯 싸대기를 쳐주었다? 그런데 무슨 여체의 신비와 여심의 부드러운 홍조도 아니고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무슨 어쩌고저쩌고 하면 잡생각이 없어진다는 웬 뚱딴지 같은 절반 조작된 글을 읽었던 기억이 쓱 급부상해서 기분 상해버리게 말이야. 그러나 저러나 시간이나 때우자는 식으로 무턱대고 방황하던 몽정기 시절, 지금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닌가? 그러든가 말든가.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으로 막 그냥 떡밥 뿌리면서 방탕마를 타냐 마냐 단짝과 떠들던 그 옛날이 그 언제냐 그거라고. 뒤돌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과 즉 행동해야 하는 인생. 그래서 NB, 아아, 내가 결정한 전술이 무엇인고 하니 뭐였더라? 줄을 늘리고 줄이고 감고 묶어서 휙휙~ 돌려서 쓱 던져 애마의 목에 거느냐. 아니면 잔머리 굴려 치즈에 실을 달았는데 먹이에 미끼가 숨겨진 줄도 모른 채 거기에 혹해서 끌려가는 생쥐가 되느냐. 바로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