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2
어느 봄날, 날씨가 어떠한 기분이 뭐한 상태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강아지나 고양이와 약속된 것처럼 눈빛을 맞추고 싶은 어느 봄날, 먼지 쌓인 책상에 놓여진 시집을 펼쳐 보면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있다. 바다코끼리, 버찌, 무지개...같은 단어 만으로도. 하지만 J는 긴장을 풀 수 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독자를 꼴보기 싫은 직장 상사라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는데?" 독자가 이 문장을 응용하지 않게 해야만 독자와 작가 모두 불이익을 감소할 수 있다.
J는 집에서 집필에 또는 집필 구상에 열중하고 있으면서 소셜 네트워크에 가뭄에 콩나듯 컨텐츠를 업데이트한다. 어느 날 Instagram에 '좋아하는 축구 선수의 이미지를 인쇄한 사진'을 사진 찍어서 올려놓았다.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 "아이마르, 프리메가에서 멋졌는데... 이 친구 나중에 이쪽에서 잠시 뛰어 주면 좋겠다!" 그런데 어느날 거짓말처럼 아이마르가 그곳 축구팀으로 이적하여 활약을 할 것이라는 스포츠 뉴스가 발표되었다. 물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또 꼭 기적과도 같은 일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SF에 사는 어느 축구팬이 캔맥주를 야금야금 마시면서 트위터에 첼시 누구 우리팀으로 오시는 게 어떨까..라고 글을 남겼는데 그 일이 진짜 그냥 우연히 벌어졌어. 옛날 베컴 사례도 있고 원래 스포츠 업계의 속성이 그러니까 전혀 문제될 소지는 없다. 선수들이 벤치 멤버보다는 주전으로 뛸 수 있도록 나이와 비례해서 몸값이나 장소를 바꾸는 게 보통이지만 다만 그 행선지가 약간만 쌩뚱 맞은 것만 이상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다.
소설은 강아지다.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울 때도 있지만 혼수상태에 빠질 만큼 몰입하도록 소설이 당신을 깨물기도 한다. 심지어 그것도 퍼포먼스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J가 틈틈히 구독하는 블로그를 통해서 그 블로그 운영자가 새 손그림 기념엽서를 발간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 기념엽서를 주문했다. 제품 주문 방식은 e메일이었다. J는 메일을 보냈다. "머머머 엽서 주문합니다. (입금액, 입금자, 입금일)"라고. 그런데 주문상의 착오가 있었다. 곧 제품을 보낸다는 답신 후에 제품을 보낼 주소가 적혀있지 않았다는 e메일이 다시 왔다.
블로그 운영자: 어? 보내려고 했더니, 주소를 안적으셨어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알았네요
혹시 메일 일찍 보신다면 제게 문자로 넣어주시겠어요?
어차피, 나가는 길이라.
(전화번호) xxx-xxx-xxxx
J가 보낸 답신은 이랬다. "ㅎㅎ 죄송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는데 우스운 상황이 연출됬군요. 네 문자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그림 많이 그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딱히 별 사건은 아니지만 이런 주제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써볼까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평범한 듯 해서 다른 구상을 떠올려 보려고 Tumblr와 Blog, Flickr, Twitter, Facebook등을 더 살펴보았다.
여태 J의 행적에 대해서만 썼는데 왜 S가 J를 만들어 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남자들은 이상향을 썰로 푼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원래 그렇기 때문에 평생 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정말 돌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서, S는 그 이상향을 말 할 상대가 없어서 글로 적기로 한 것이다. 남 얘기만 듣다가 소셜 네트워크만 읽다가 고품격 소설만 선정하다가 인생이 급작스레 종칠 것 같다는 절박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달라스 3대 말빨,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고 퍼뜩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S는 자신의 소설에 왜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섬이라고만 했을까? 뭐하고 뭐한 어떤 섬, 그냥 섬. 그건 왜 그러냐면 거의 모든 독자를 주인공으로 착각하게끔 홀리기 위한 전략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음도 비슷하다. 섬, 썸.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면 어딘가에서 정확한 스킬을 전수받거나 터득한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세상을 관찰하니까 그냥 여기저기서 보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물론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도 허다하고 실제 대부분은 여자쪽에서 먼저 미끼를 던진다, 95%― 말빨로 여자를 꼬시는 것이 아니라 말빨로 여자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세뇌시켜서 결국엔 마취되어 넘어오는 연애사가, 그 모든 사랑 타령의 시초가, 드라마가 전개될 내용을 예상하는 어른들도 그렇다. 설령 "여자는..."이라는 독백을 시작하시는 독자가 있다면 세상을 썩 그렇게 오래 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고매하신 독자의 관심을 S의 직업으로 옮겨본다. 왜 S의 직업을 그렇게 설정했냐 하면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변호사라거나 수의사, 큐레이터, 서점 주인, 개패 사장, 동사무소 직원인 것 보다는 작가 또는 소설가 지망생, 시나리오 작가 겸 주부, 창의력 개발연구소 소장, 영화감독, 학생, 강사, 백수, 예술가, 탐정, 탐정에게 쫓기는 사람, 요원으로 설정하는 것이 훨씬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가기에 쉽고 편리하면서 유리하다. 즉 소설가 초년생이 1인칭으로 소설을 쓰는 게 더 낫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막 쓰는데도 적절한 쓰기의 패턴이 있는 것이다. 치밀하고도 숨막히게 그런 설정을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쓰다보니 일상생활에서 여행지로, 주거지에서 휴양지로 가뿐히 공간이동한 것 뿐이다. 글쓴이든 누구든 절대 그걸 싫어하지 않는다.
J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직업 외에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고민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뭔가 자기도 모르는 웃음의 숫간이 찾아오기 때문에 또 왜 그런가에 집중했다. 웃는 표정이 참 희한했다. 마치 여배우가 그 부위를 가리는 테이프를 손에 들고서 "감독님, 그냥 이거 떼고 하면 안되요?"라고 말하면, 그 핀잔을 듣는 사랑씬 촬영장에 있는 에로영화계 추장의 안면 근육의 꿈틀거림과도 닮았다. 다른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기, 연출, 창작, 영감등의 단어를 떠올리는 가운데 불현듯 필연을 우연으로 바꾸는 그 놀랍도록 이상하게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한 화두를 잡고 늘어지면 뭔가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멋진 영화배우가 말한다. 청소년들이, 젊은 친구들이 스타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 어느 정도나 쉽사리 따라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가끔씩 때로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도 조심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슈퍼스타들이 그렇듯 당신이 리처드 브랜슨이 아니더래도,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때려 잡아 주라는 클라이언트에게 복제 분신으로 가장한 인형을 꽂고 찔러서 괴롭히는 주술사가 아니더래도 자신이 쓰고 적고 말하고 바라만 보아도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면, 그렇다면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고뇌하며 인상 찌푸리고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술 한잔 하는거도 그리 처량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겠지.
참고로 S는 J에게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를 읊게 했지만 그가 정작 20여 년 전 현실에서 외웠던 시는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가운데 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