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Blog - 57

Spafinale 2015. 9. 30. 11:52

   「오실 때는 자유롭게 들어오셨지만 가실 때는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마음대로 떠나실 수 없습니다. 심각한 결례에 가까운, 명백히 실례라고 볼 수 있는 발언이지만 그만큼 귀한 주빈이신 손님을 고이 보내드리지 않겠다는 예우이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태도요, 편의를 더 아낌없이 선사해드리지 못했다는 판단 때문에 빚어진 과도한 무례에 가까운 처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민법이 아니라 형법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손님께서 머무르신 객실은 무척 특별한 어떤 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보통의 시장 규칙과는 반대로 운영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머무르신 손님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특수 규정에 따라, 몇 년도 언제 그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떤 영화를 찍었다드라, 바로 그 장면, 무슨 작품을 완성했다드라, 그와 같은 업계의 전설적인 기록을 남겨야만 하는 진부한 숙명이 뒤따르게 되죠. 호텔은 호텔대로 과업에 대해 할 건 해야 한다는 그저 일상적인 업무과 업계 철학과 예술적인 전망, 그것이, 이 문화가 손님께도 사르륵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이런 특별한 사회 규범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지방에서 거의 유일한 관습이자 대대로 이어져온 이 지역 문물과 뭔가 암묵적으로 조약되고 공통으로 인정하는 약조이며 규범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서 다른 직원이 가로 세로 두께 1m 정도 되는 육중한 책을 가져오드니 밑줄쳐진 어느 한 면을 펼친다) 여기 나와 있다시피 본령과 내규로 준엄하게 정해진 이곳 호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시고 선뜻 무슨 얘기인지 그 말의 목적과 숨겨진 의미와 드러나는 본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리라고 짐작합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암요. 당연한 일이죠. 생면부지의 쌍둥이를 어른이 되어서야 처음 만나게 되는 일처럼요.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존빈께서 떠남에 있어 우리 호텔측에서 그동안 축척된 숙박비를 모두 계산해드리기 전까지는 귀빈의 호텔 생활은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될 것입니다. 객실 이용 종료는 그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유예되어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정말로 어이없는 일을 겪거나 실없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품격을 갖추어 심각하고 차분하며 도톰한 음성으로 단추가 많이 달린 수트를 입은 남자에게 듣는다면 할 말을 잃게 될 것이다. 방금 말 한 사람은 총지배인이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올백이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얼굴과 격식, 몸짓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 없다. 바늘로 찔러도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사람, 청록색 피가 나올려다 멈출 것 같은 인물이다. 별명이 있다면 원칙맨?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듣게 되게끔 하는 행동을 뭐라 하나, 연기력이라고 한다. 로비 한쪽에서 여직원들끼리 수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그게 무슨 이상한 말씀인가요? 그러니까 지금 저 보고 계속 머무르라는 뜻인가요? 그런 얘기인가요? 그게 무슨... 아니 이건······ 뭔...」
   「이해합니다. 저희도 얼마 만에 특별실 손님을 받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이사회 긴급 회의 소집과 이사회의 특별 승인과 함께 호텔비 정산이 가능하게 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날이 서둘러 오길 바라시거나 좀 늦추어져 천천히 다가오길 원하신다면 그건 안타깝지만 퇴실 절차의 진행과는 하등 아무런 영향이 없는 별개의 개인적인 심리이자 사안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특별실 운영을 겪어본 직원은 아마 지금 근무하는 직원 중에 한 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몹시 흥분되는군요. 사실 떨려요.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날, 그때까지는 불편하시겠지만 적을 이곳 섬에 두셔야겠습니다. 물론 인근 관광지를 구경하셔도 되고, 요트를 타고 좀 멀리 갔다오셔도 괜찮습니다. 하루나 이틀, 더 오래되어도 괜찮지만 전화로라도 제게 또는 이곳 안내처에 손님 안부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꼭 그러셔야 합니다. 좀 답답하시다면 해변가 풀밭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잠깐씩 호텔에 들르셔서 인기척을 하시든 눈인사를 하시든 호텔 직원이라면 누구에게든 눈도장만이라도 최소한 맞추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디를 가시든 누구를 만나시든 소리 소문없이 어느 엉뚱한 소식통이 사소한 일 하나하나 모두 이 책상으로 첩보와 희소식을 전해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단 직원들 불편을 초래하시면 그 친구들 젊은 혈기에 사표를 쓰고, 애인과 헤어지고 그러다 정신이 이상해져 다시 유치원에 갈지 정신병원에 갈지도 모를 일이니 부디 너무 멀리 가시거나 너무 오래 떠나가 계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만 하지 않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이사회인가 승인인가 그건 모르겠고, 호텔비 정산을 도리어 제가 받는다뇨?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긴지 모르겠네요. 나 이거...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어쩌면 좋죠? 어떡하란 말씀인지... 그냥 그 무슨 호텔비 정산인가 뭔가 그거 안 받을께요. 됐죠? 그냥 갈께요. 네. 그럼 이만······」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그는 서둘러 인사를 남기고 떠날려고 한다. 그가 뒤돌아서자마자 부드러운 말이지만 뭔가 일침을 놓는 것처럼 무언의 암시와 경고에 가까운 어감이 아주 살짝 느껴지는 친절한 도움말이 건네와 그의 옷깃을 잡는 것 같다.
   「귀객께서는 어디든지 가실 수 있습니다. 그건 자유죠. 이 땅에 태어날 때 누군가 미리 앞으로 넌 어떻게 살게 되고, 어떤 일들을 할 수 있고, 나중 어디를 찾아가거라, 때가 되면 누구를 만나거라, 그런 걸 미리 정해놨다고 한다면 마땅히 인간의 도리와 별개로 또는 철학적으로 보면 그에 앞서 자유의지와 행동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는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죠. 운동선수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는 모습보다는 "돈, 개나 줘버려. 스포츠 정신없이 이 일을 하라고? 때려쳐, 이런 젠장." 마치 이렇게 할 땐 하더래도 지난 날을 돌아보면 적어도 비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뭐 이런 생각처럼요. 어디든지 마음데로 갈 수 있다, 평범한 선수로 은퇴했다, 전자와 후자가 뭐가 비슷하냐고요? 별로 상관없는 얘기죠. 그러나 어떤 선을 넘는다, 선을 긋는다, 나중보니 그건 선이었다, 뭐 그런 의미로 본다면, 그래요, 아시죠? 중의법, 환유법 그런 비유말예요. (좀 전 운동선수에 관한 경직된 발언을 그는 실제 현역 감독처럼도 아니고, 구연동화처럼도 아니며, 딱 초딩이 책 읽듯이? 초딩이 방송 인터뷰하듯이? 로봇 연기 비슷하게 대사를 읊었다. 그 부분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언제든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게 마련이죠. 아시겠지만 이 일이 손님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저희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아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네 그렇죠. 맞아요. 생각났습니다. 손님께서는 떠나실 수 있습니다. 이 곳이 무슨 감옥도 아니고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곧 신부와 수녀님, 수도승과 랍비들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답니다. 매일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기타도 치고, 단편영화도 찍고, 홍차도 마시고, 연극무대에도 슨답니다. 정치가도 만나겠죠. 우주비행선에서도 거하게 만찬이 이루어진다죠. 그렇듯 당신께서도 오롯하게 자유로운 몸이자 영혼일 것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이해합니다. 이곳에 최장기간 근무했던 직원들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까요. 더군다나 TV를 사면 TV 값을 손님에게 준다, 케익이나 소파와 원피스를 사면 그 정식 가격을 소비자가 판매자에게 지불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파는 사람이, 어이쿠, 하면서 돈까지 쥐어준다, 무슨 천국도 아니고, 재밌는 지옥도 아니고, 어디 만화에나 나와야 될 일이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실제인데요. 현실요. 믿어야죠. 받아들이세요. 도로를 주행하면 자동으로 충전되는 차,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겠죠. 그러나 지금은 가능한 일입니다. 노르웨이던가 캐나다? 에콰도르던가 옛날에 심장이 멋은지 12시간 후에 깨어난 사례던가 그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죠. 관에서 1주일 누워있다 깨어난 사람도 있어요. 정지된 심장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환경을 만들어 다시 뛰게 만든 다음 그것을 이식하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 이식 수술 뉴스도 나오는 세상이죠. 나중에는 은하계의 원점과 끝점의 중간이 은하철도 기차역이 될지도 모르죠. 떠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퇴식 절차는 종료되지 않을 거에요. 그뿐입니다. 몸은 떠나보내드리지만 마음만은 영영 고이 보내드리지 않겠다는 시골 아낙네의 성화처럼 저희 입장은 그렇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참고로 지금 이사회의 중요한 위원이신 호텔 대표님은 본사에 출장가셔서 안타깝지만 이 일을 손님께 직접 설명드리지는 못한답니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연락을 드리고 경사를 알려서 나중 영상 통화를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머무르시면서 불편하신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구요.」
   「승인인지 뭔지 서류상 절차가 남았고, 캐시백? 호텔 비용 정산해서 호텔 측에서 제게 돈을 지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지연되고 있어서 퇴실이 미루어져야 한다. 요약하면 이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원 참. 뭐지? 뭐야 이거? 계속 여기서 놀고 먹으라면 내가 못 할줄 알아? 제발 보내달라고 빌기라도 할 줄 아냐고.」
   「네?」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아, 예.」
   「돈은 됐어요. 그저 악수나 합시다.」 이렇게 영화처럼 대충 마무리 할려고 했는데 차마 이 말은 성대에서 발성되어 입술로 발음되지 않는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말하는 성량보다 곱절로 두텁고 중후하게 딱 끊어서 대답 못 한다. 돌아이를 보면서 쟤 뭐야, 그렇듯이 힘없이 답한 말이다.
   「외출하고 올께요.」 눈빛 보내고, 잘 다녀오시라는 화답의 눈인사 그리고 그는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혼자서 허공에 대고 나불거린다. 화는 아니지만 뭔가 이상한 감정의 상태다.
   「야 이 멍충아, 미련 곰탱아. 넌 왜 그렇게 사람이 갑갑하고 답답하냐. 뭔 헛소리를 그렇게 나불거리냐고, 지금 장난하냐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혼쭐을 내놓던가, 아니면 네가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논리적으로 딱딱딱 설득하면서 어제 마신 술 아직 안 깼냐고, 고백하라고, 들어오라고, 드루와, 말 해, 실토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란 말야, 통쾌하게 호통치면서 왜 그렇게 실없는 말을 그리 짓껄였냐고 혼구멍을 내줄 것이지 가만 서서 멀뚱멀뚱 뭐했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벌 슨거야? 늬가 초딩이야? 아, 뚜껑 열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막 이렇게 식식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그 총지배인, 매니저? 그 인간이 아무래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1마디 하면 10배로 답하고, 2마디 하면 2시간의 연설을 돌려주며, 3번째 이해할 수 없다는 의중을 내비추면 3박 4일이든 남은 인생 걸고 30년이라도 설득하고 다독이며 책을 쓸 인간이라는 것을. 붙잡히면 무척 곤혹스러운 피곤한 타입. 그러나 그 분도 딱 필요한 일에 대해서만 그러시지 매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인생, 그것이 피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이 정말인가, 믿어야 하나, 호텔 안내처에 열쇠만 툭 던지고 도망 나올 껄 그랬나, 대체 뭔 일이지, 이런 호텔에서 사기칠 것 같지는 않은데, 설사 그렇더라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내 행색이 이러한데, 하면서 상당히 난감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호텔에서 머무르고 체크 아웃, 계산 끝내고 인사, 안녕, 끝. 그렇게 떠났어야 했는데 이게 다-인데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무슨 1인 연극을 코앞에서 본 것 같다. 아까 총지배인 말을 돌이켜 보면, 퇴실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왜냐하면 첫째 이사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숙박비 총금액을 돌려드려야 하는데 아직 그것이 정산되지 않았으니까, 지금 지불할 수 없는 사정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이게 뭐야?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그 무슨 장난 같은 얘기냐고, 뭔 개떡같은 소리야, 수작부려, 지금 나와 동화를 얘기하자는 것이냐며 미쳤냐고 따지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 화법에 빠지면, 아 이건 진짜구나, 오 그렇구나, 아 인생은 사랑이 다가 아니구나, 라는 착각에 휩싸여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기어이 생물학적 귀는 만화 속의 코끼리 귀보다 커지고 천마 페가수스의 그것보다 아름다운 아아, 드디어 날개가 된다. 펄럭펄럭 날아오른다. 힘차게. 지평선 너머 수평선 멀리가 보이도록. 이카루스를 떠올리며 조심히. 
   어차피 그는 간소한 짐을 가지고 나왔으니까 퇴실이고 어쩌고는 모르겠고, 해변 도로를 타고 공항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서. 해수욕장이 나오면 쉬었다가 바다를 구경하고 음료수를 사 마신다. 사진도 한두 장 찍는다. 핸드폰에 작품 구상에 대한 메모도 입력한다. 맨손 체조도 했다. 할 건 다 했다. 다시 출발.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기상 여건이 안 좋아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단다. 호텔 퇴숙 절차, 아까 들은 그게 진짜였나? 그럴 리가. 다시 되돌아올 거라고 그 사람이 정확히 말했던가 돌려서 암시했던가? 두더쥐도 심어놨다고 했나? 컨버터블 타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지만 배는 가능하다. (바닷물이 많아지는 거 말고 바닷물이 쫄아서 줄어들거나 마르는 재난영화 나오면 재밌겠다) 그는 지금 여객선 터미널로 간다. 그런데 기상여건이 안 좋아 배가 뜨지 않는단다. 그럴 수 있다. 정상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다. 오, 이런! 여기서 필름을 빨리 돌리면 그는 이 절차, 공항과 여객선 터미널에 가보는 일을 3번 반복한다. 거의 한달에 걸쳐서 다시 필름을 원위치 시키면,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총지배인 얼굴을 마주치면 왠지 모르게 뜨끔할 것 같았는데 다행이 그 분은 보이지 않는다. 특별실에 올라가 짐을 풀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눕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인간, 로댕이다. 아니, 로댕이 조각상 이름인가 조각가 이름인가. 아무튼 여기서 잠깐, 그가 묵는 방은 2층에 있고, 호실은 숫자가 아니라 알파벳 J다. 쌍 J? 어쨌든 알 게 뭐야. 뭔가 시무룩하고 덤덤하다.
   하루는 금새 지났다. 그냥 이대로 눌러 앉아? 이런 생각 안 해 본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입버릇처럼이랄지 사람들 상호간에 약속한 듯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말하고 듣고 바래야 하는 꿈 같은 생활이지만 이런 일이 진짜 닥친다면, 당신께 벌어진다면, 이건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남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까 슬쩍 예상해 보자면 그럴 것이다. 왜 그럴까? 잘 해야, 복권 당첨되면 그 다음에, 돈이 좀 모이면 그땐 어떻게, 나이 들어서 그나마 여건이 된다면 나중에는 머머할 것이다, 대개는 이 정도다. 수치로 따졌을 때 그에게 닥친 지금의 실제 상황과 보통 사람들의 공상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전자가 더 알뜰할 것 같지만 또 따져보면 그 생활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금전이 펑펑 샐 만큼 그 층위는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수 있다. 때문에 어느 만큼 나이가 들면 더도 필요없고 얼마면 돼, 라면서 실현 가능한 수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상의 범주를 좁히는데, 그걸 거꾸로 뒤집어 본다면 액면으로 제한하는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작은 차이점에 대한 조명을 다른 데 비추어야 한다. 외부화, 편의 생활, 아웃소싱 그런 것. 그게 아니라면 돈 때문이 아니라, 뭐랄까, 영화같은 삶과 주인공 같은 인생을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쉽게 말해 나이나 가족, 자기가 살아온 여정과 재능등 그런 인간의 굴레 때문에라도 생각하기 귀찮아진다고 할까, 동화와 판타지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뭔가 어중간 하다, 이게 더 알맞는 대답일 수 있다. 아니면, 지구를 떠나거라?
   어떤 날, 즉 이렇게 머무른지 2일째 되던 날 또 총지배인을 만났다. 그가 말한다.
   「안내 말씀 드리자면 호텔 내 모든 이용료는 기존 금액에 합산되지 않습니다. 호텔측에서 정산해 드릴 금액은 객실과 기본 서비스 금액만 해당되고, 다른 카페나 수영장 같은 서비스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계산은 계산이니까요. 다만 이용하시는 데는 모두 지장없이 그 횟수와 사용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나 궁금하신 의문점이 있다면 언제라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네, 그러죠. 그런데 이건 뭐랄까 꼭 맥주 공장 견학가서 맥주를 무제한 마시라거나, 시골 축제나 운동 대회에 가서 그 지역 생산 토속 과실주를 무한정 먹는 혜택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그 보다는 훨씬 반가운 소식인 건 분명합니다만.」 딱히 응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인지 총지배인은 한쪽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리면서 웃음을 띄우고 인사 후에 유유히 사라진다. 의뭉스러운 사람.
   손님 J는 호텔 생활 1주일이 되던 무렵 지배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 연봉은 얼마냐,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지 않고, 내 재산은 얼마다, 라고 밝히지는 않으면서 에둘러 내 처지가 조금 어떻다, 어서 돌아가 생업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데, 글이 잘 써져서 고료 얼마짜리 환상문학상에 당첨되야 할 텐데, 같은 까다롭고 어려운 얘기를 질끈 마음 먹고 까지껏 한-번, 1년에 딱 1번 내리는 첫눈처럼 흘려나 보자 라면서 말했드니 총지배인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객실 J에는 TV 옆에 갑 티슈 상자가 있다. 그 상자를 뒤집고 종이 마개를 따면 또 다른 화장지가 나올 것이다. 총지배인은 그럴 것이다, 라는 왠 이상한 말을 하였다. 서로 딴 맘 품고 있으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상한 선문답이 되어버렸지만 객실에 가서 확인해 봐도 손해볼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방에 가서 확인해 보니 이럴 수가, 아니나 다를까 그 티슈는 종이 화장지처럼 고액권 지폐를 1장씩 뽑아 쓸 수 있게 된 발명품? 특수 장비였다. 게다가 객실을 청소할 때 미리미리 바닥나면 재충전도 된다고 한다. 그걸 청소할 때마다 매번 교체하고, 마구잡이로 써서 청소 안 할 때도 생떼를 부려 티슈를 바꿔달라는 손님은 애시당초 특실에 받지 않을 것이니 그러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이건... 좋은 일이다. 길운!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이랬다. 보통 홈그라운드가 아니래도 연락해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친구는 외지에 있게 마련이다. 급하게라도 술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일이고, 실패하면 홀로 독배를 들 수도 있다. 그도 이 섬에 사는 옛 친구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고, 만나고, 그래서 기분 좋았는데 친구가 만남의 자리에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같이 나와서 셋이서 데이트? 그런 묘한 놀러가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미리 서로 좋은 선에서 헤어지게 된 거다. 아무 일도 아닌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면 안될 것 같은 일상이지만 이건 뭐랄까, 꼭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렇듯이, 마치 청춘 연애담처럼, 뭔가 있을 듯 하다가 멈추고, 연정의 불이 붙을 듯한 조짐이 보일려다 끝나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겠지, 살아 보면 뭔가 있겠지, 10년 20년 후에 너와 나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만 하다가, 그 다음에 딱 마침 등장하는 신인은 정작 미스터 실망? 그런 것과 비슷하다. 그랬다. 지금 그렇다. 색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원래 사람 사는 게 그런 것이다. 지금은 별 거 없지만, 앞날은 누구도 모른 것. 그럼 미래에도 그렇다는 말인가? 남들도? 그래 그거야. 삶의 비밀은 바로 헛된 기대라고. 막 부족한 데로 갖다 붙이면 9번 내내 그냥 이상하고(이상하기만 해!) 10번째는 신기하게 이상해, 느낌이 막 변해 계속 바뀌면서 그게 뭔지 모르겠어. 다 알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 부딪혀 보기, 뻔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기,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 못해도 본전이고 타율왕 한 명과 홈런왕 한 명 빼고는 나머지는 평균이야. 그렇다니까.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그런 말일랑은 하지 말기.
   언제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가는 곳이면 이상하게 인적이 끊기거나 사람들이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뭔가 관찰자 시점과 추리 감각을 끌어올려주는 동인과도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령, 어떤 날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서 바텐더와 독대를 하며 마티니를 마시려는데, 다른 손님들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슥 인파가 빠져나가거나, 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닐면 배구하거나 놀거나 선탠하는 사람들이 모두 스르륵 멀찍이 가버린다. 전부 다는 아니다. 남았던 사람 가운데 어느 연인이 있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앞서 뛰어가는 남자와 뒤 따라가는 여자가 있다. 뛰어가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서 제자리 폴짝 뛰기를 하면 쫓아가던 여자는 얼굴이 남자의 엉덩이에 쾅, 하며 부딪힌다. 그외 파도타던 서퍼들 모두가 또 홍해가 갈라지듯이 쏴악 빠져나가고, 무슨 관광지나 유원지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인기 영화배우나 연예인이나 예술가가 나타나면 보통은 웅성웅성, 무관심, 다른 데 가지 여긴 왜 왔데, 난 쟤 별로 그런데 알고 나니 좋아졌어, 반갑다, 사인해달라, 사진 한 번 같이 찍자, 멋져요, 먼발치서 구경, 사랑해요, 에잇 실물로 보니 별로네, 누구야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난리야 하면서 유명인의 뒤에서 쑥 다가오더니 유명인의 얼굴을 보면서 "에잇~ 난 또 뭐라고.", 싸이클 선수가 경기 끝나고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Don't Touch My Body."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통은 유명인 주위에 인파가 몰리게 된다. 전성기를 지났더라도 또 그에 맞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리학 법칙에도 이걸 가르키는 용어가 있다. 그런데 이 인간에게 닥친, 그가 체감한 일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삶의 공백, 망상? 풍상, 불길도 아니고, 어딘 한번 보자, 이건 어떤 감정과 비슷하냐 하면 빼어나게 예쁜 아가씨가 자기가 남자들이 마음에 안 들면서 틈만 나면, 잊혀질만 하면 "나 또 차였어!"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누가 뭐래도, 왜 비슷하고, 왜 그를 모두들 피하는지, 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재미난 일 없나, 하면서 두리번 거리고, 오늘은 낚시를 할까 아니야 독쇼(개 대회)에 가보는 게 좋겠어. 그보다 먼저 지리적으로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고지대와 전망대를 찾아가 봐야지, 아니야, 운동도 규칙적으로 해야 하니까 등산을 할까? 새로운 친구를 사귈까? 여자로? NC? 이와 같은 잡념의 전단계로 우선 왜 그렇게 우연치고는 뭔지 모르게 짜고 움직이는 듯한 낌새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궁금중을 해소하기 위하여 섬 외곽의 주변부가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내, 축구장, 젊은이들의 열기로 들썩거리는 대학가와 카페가 많은 곳과 소란스럽고 불빛도 밝은 술집이 많은 동네를 찾아다녔다. 이동수단은 군내버스와 시내버스, 자전거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총지배인이 흔쾌히 건네준 전기차, 총지배인이 구입한 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전기차를 이용했다. 그리고 처음 돌아다닐 때보다 두번, 세번 돌아다니니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성과를 거둘 것인가, 그것을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쓰잘데기 없는 왜, 어떻게, 무엇을, 그걸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까먹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영화 보고, 미술관에 들렸다가 서점과 지역 축제를 보러 싸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유명인이 온다는 지점을 찾아다니게 된다. 동서남북 멀리 어딘가에서 건너온 작가와 새 영화를 홍보하러온 배우, 헤비메탈 공연장 같은 장소를 돌아다녔으나 시장 경제가 휘청일 정도로 여기서도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상한 군중 동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깨달았다. 그렇게 흩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나 호기심보다는 뭔지 모를 막연한 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기 어려운 꽤 불가사의한 매력이 분명 어디쯤에 굳건히 자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제나 항상 혼자 놀아, 친구가 없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다, 그것과는 다른 왠지 모를 초자연적인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걸 지칭하는 전문용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어떤 때는 발생하고 어떤 때는 발생하지 않는가,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미해결 문제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지적 욕구 하나를 그 정도까지만 해소하고 나니 그럼 이제 무얼 할까, 그것을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가, 소인국 공원에 놀러갔다가 그는 총지배인의 추천으로 제안 받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근처 해변으로 이동한다. 해변쪽에 위치한 언덕이나 봉우리쯤 되는 야트막하면서 좀 높은 호텔 옆과 뒤 산자락의 중봉과 해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가까운 섬, 그곳의 또 다른 언덕이자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휴게소를 연결하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어느 날 마음을 정한 것이다. 그곳에 가서 보니 그런데 이상하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상학적으로 이유가 있겠지만 A와 B 봉우리 모두 도넛 모양으로 구름이 형성되어 있다. A에서 B로 가는 케이블카가 무슨 알프스의 그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B가 마의 산도 아니다. A는 역시 부다페스트 호텔도 아니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닮았다. 케이블카 밑으로는 대교도 있다. 바다를 대교로 건널 것이냐 케이블카를 타고 건널 것이냐, 그 중에서 후자를 권유받았고 올때는 아마도 전자를 이용할 것이다. 섬에 와서 만난 할아버지와 물물교환한 카약을 할아버지가 싫증나서 택배로 호텔 특별실에 보내주었지만 지금은 그건 호텔 앞에서만 타고 노닥거린다.
   호텔에서 그곳까지는 분홍색 컨버터블을 타고 이동했다. 이 차는 호텔의 단골 손님이 총지배인에게 한사코 갑자기 문득 자기는 이런 색깔의 지붕없는 차를 지금 타고 싶다고 하여 총지배인은 지인과 수완을 총동원하여 즉시 그 차를 단골 손님에게 대령하여 지금은 전기차 대신 자신이 간혹 이용하니, 그후로 그에게 대신 사용하라고 위임한 것이다. 호텔 지배인 생활을 오래하면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자기는 꼭 신선한 어떤 요리가 먹고 싶으니 어떤 경력의 요리사를 바로 초빙할 수 없냐, 어 그러냐, 그럼 그건 곧바로는 어렵지만 대신 육지에서 최고급 음식을 헬기로 반나절만에 공수하겠다, 그렇게 손님은 감동하고 호텔의 꾸준한 팬이 되었으며, 총지배인도 보람을 느끼고,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예술이 아닌 일을 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바로 그 느낌을 겪곤 한다는 것이다. 호텔에서 피둥피둥 놀고만 있는 그 인간만 나중 멋지게, 소설 쓰기가 내 인생을 바꿨다, 블로그가 내 삶을 바꿨다, 라면서 팔짜 좋은 소리를 하고, 부푼 꿈을 안고 파랑새가 지저귀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총지배인이라는 직업인에게는 현재 묵묵히 현실의 벽돌을 신실하게 쌓아가면서 누군가가 꿈꾸며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를, 그것을,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로 가져와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는 쩔쩔매는 앞날이 당신의 전-여자친구(전-남자친구, 전-부인, 전-남편)에게는 점잔하게 음악을 듣고, 창밖을 보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지금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괜히 정말, 아~ 하면서 기분 이상해진다. 따라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표를 끊는 J가 떠나려는 공간으로 앵글을 돌린다.
   그는 표를 끊고 케이블카를 탄다. 케이블카의 이름은 <내일로 가는 마차>다. 케이블카는 출발 대기 시간이다. 사람들이 탄다. 현지인도 있고 관광객도 있고, 학생도 있고 백수도 있다. 친구들로 보이는 이제 막 화장술을 익혀나가는 데서 엄청난 즐거움을 깨닫는 것 같은 여중생쯤으로 보이는 애들도 탄다. 애? 어른? 뭐가 애고 뭐가 어른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는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로 먼 바다를 쳐다본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꼭 속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누가 물어보면 다음 영화 구상을 하고 있었어요, 라고 대답할 듯한 그런 모습이다. 그가 잠시 보기에 농부와 여대생과 포도주 감별사, 학자, 유치원 선생님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케이블카에 승선한 줄 알았는데 한번 빙 둘어보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장난치고 종알거리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즐기면서 사는 것 같은 친구들 뿐이 없었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모두에게나 똑같은 24시간은 아니다. 괜찮은 거 보면 다 따라하고 싶고, 한순간도 마음이 진득히 머무르지 못하며, 줄곧 확확 바뀌니까 누가 뭐하면 다 멋져보이는 친구들. 춤, 나도. 노래, 나도. 사진, 나도. 글? 나도. 명대사와 내면연기,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왜 그런 것일까? <나도>와 <나는-나는-내가>는 뭐가 다른가? 뭐가 뭘 감싸냐, 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둘 다에 해당되니까. 그러나 잘 모르겠다. 그건 누구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다 가끔 뭘해도 재미없다고 하니까. 궤변! 그러나 우껴. 그렇게 케이블카에는 그 친구들과 아저씨 한 명만 있다. 유달리 그는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면서 피식 냉소를 흘리며 다시 창문을 바라다 본다. 머머 한다, 머머 한다, 꼭 '머머한다'체를 보아하니 이건 희곡에서 대화 전에 설명하는 그런 느낌이다. 이제 대화가 나와야 하는데 대화가 무슨 개 이름도 아니고, 사건이라도 터져야 하는데 사건이 무슨 풍선껌도 아니고, 정말 괜히 썩은 미소가 나올 듯한 논리이자 상황 전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그렇게 허당 폼을 잡고 바다를 하염없이 시인처럼 물끄러미 쳐다볼 때, 케이블카에, 아저씨와 소녀들,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810번 죽음과 소녀? 아저씨는 저승사자? 아니 불행한 건 안 돼, 해피엔딩이 좋아, 그러다 은연중 그녀들 가운데 가장 발랄하고 쾌활할 것 같은 친구 하나가 아저씨 옆자리에 와서 잠깐 앉는다. 그러자 다른 애들이 모두 속닥속닥 하면서 엄청 웃는다. 그 즉시 주력이 좋았던 그 소녀는 다시 자기들 무리로 흡수해 들어간다. 아직 케이블카는 출발하지 않는다. 잠깐 쉬었다가 이번에는 다른 소녀, 공주풍으로 옷을 입고 머리에 티아라를 썼으며 하얀 면사포에 하얀 면장갑을 낀 다른 친구가 다시 아저씨 옆자리에 앉고─웃고─떠난다. 주력이나 의지? 결단? 상상력? 아, 주력과 실행력, 둘 가운데 하나가 그들 가운데 2번째로 좋을 것 같은 친구가 처음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녀간 것이다. 이쯤되면 그도 모른채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니지만 미학을, 예술을, 철학을, 연극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 친구들에게 웃음을 줄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기회의 끈을 잡고 애처로운 눈빛이라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크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썩 지나치지 않는 정도로 괜찮은 반응일 것 같다. 오, 그런데 그가 정말 그렇게 눈빛을 보낸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저씨와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는 말만 대화만 시작하면 되는데, 데이트만 한 번 하면 되는데, 먼저 연락하고 못 미더운 척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 작은 고개를 넘지 못하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뭐 괜히 분위기 잡고 있어 보일려고 한 얘기는 아니다만 대화를 잘 살리지 못하는 소설가,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만 찍어대는 영화감독,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시인, 뭔가 비슷한 구석을 애써 찾을려면 꼬투리는 잡힐 것 같은 얘기다. 자, 그들은 대화를 시작한다.
   「아저씨 혼자오셨어요?」
   「어어, 이 케이블카 혼자 타면 반생을 홀로 보내게 된다는 불길한 전설이 있는데, 아저씨 큰일 났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에요? 광고쟁이? 석공? 어촌 계장? 영화관 매표소 직원? 국립공원 수렵 관리원?」
   「기집애, 그게 뭐니? 넌 아저씨 어딜 보고 그렇게 평범한 추측을 하는 거야? 상상력 하고는. 딱 보면 답 나오잖아. 내가 봤을 때 아저씨는 작곡가야. 그런데 대필 작곡가. 뭔가 사정이 있어서 생계와 노후용 재산은 대중곡을 써서 할당하고, 어떤 낭만적인 대교향시를 쓰실 것 같아. 생전엔 엄청 쪼들리고 더럽게 가난하게 살다가 사후에 빛 제대로 볼 것 같은. 어, 아닌가? 아저씨는, 과학자 같아. 그냥 그런 것 같아.」
   「그래? 재밌는 예측인데? 꽤 설득력 있어. 뭔가 믿게 만드는 매력이 있단 말야.」
   「아저씨! 여기 사람 아니죠? 어디서 오셨어요? 미래? 과거? 막 이래.」
   「그런데 말이야. 이 아저씨 상당히 유별나. 딱 스캔하니까 어, 신발 테스토니 운동화야. 스카프는 20세기풍에 안경은 나사가 없고 티타늄 소재야. 청바지, 엄청 낡었어. 구멍나고 헤졌어. 새치도 조금 나고 한 30대 중반, 후반? 하지만 50대의 중후함과 스무살 청년미까지 겸비했어. 미스테리야. 난해해. 저기 섬에는 뭐하러 가시지?」
   「우와 정말 테스토니네. 그런데 36개월 할부에 납입은 2회째야. 음 있잖아. <왜 사지도 않을 꺼면서 구경만 해> 어쩌면 이거가 <구경만 하고 안 사>보다 슬픈 거 같아. 무턱대고 구경만 할려다가, 구경만 하다 빠져들고, 빠졌으니 사고 싶고, 그러다 지름신이 내려오시고,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그 다음 그 다음, 툭하다 반복이 이어지면 인생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헤어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것에는 눈길을 주면 안 돼. 그런데 상품이야 싫증나면 바꾸면 되고 부담되면 애초에 구경만 하고 안 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자나. 남정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자꾸 싫어져서 바꾸고 싶지만 의리? 미운 정 고운 정? 자녀와 가족애... 차마 그러지는 못해, 여편네를 바꿀 수는 없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소리칠 수도 없어 '이 여인을 데리고 살꺼냐고' 또는 친구에게 "늬가 데리고 살래?" (오, 땡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만날 수 없어, 고귀하게 날 가꾸고 꾸미면서 바르게 커왔는데 어떻게 쉽사리 어느 층위에 날 이양시켜, 그런 소 도둑놈 같은 놈한테? 이 몸매를 유지할려고 내가 얼마나 온갖 배고픔과 유혹을 물리치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1주일에 6일 7일 땀 흠뻑흘리면서 운동하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일단 사귀고 나중 실망하라고? 그러면 남자 만나기 힘들어. 사람을 정말 잘 알려면 극단적으로 보자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단 말야. 만에 하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당신이란 사람을 모르겠어요, 이럴 수 있단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좋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어울리는 그런 환상같은 도플갱어 연인은 거의 없을 꺼야. 비슷하고 잘 맞으면 좋겠지만 최상을 찾을려고만 하거나 기다리기만 하다 보면 사람 사귀기 힘들꺼야. 그래도 다가옴과 시작을 기다리는 여자의 운명이란 어쩔 수 없어. 그니까 유혹의 기술이 발달하지. 하지만 오히려 나이들수록 더 사람을 보는 기준선이 까다로워지는 것도 다 나름 장점이 있을 꺼야. 늦게 만나면 아무래도 나중 끝까지 함께하지도 못할 꺼면서, 책임지지 못할 꺼면서 왜 날 택했냐는 애매한 면책성? 순진한? 순수한 발언은 덜 하지 않을까. 아무튼 너무 깊이 생각하면 안 돼.」
   얘들은 꼭 사춘기 소녀가 아닌 것 같다. 그 나이에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나? 있으면 있을 테고, 없으면 이 긴 얘기 한마디로 정리할 사람 손들어 보라고 외쳐볼까. 쓸데 없는 짓이다. 당연히 이런 얘기 하겠지, 왜 안 하겠어. 꽤 수준 높은 말도 아니잖아. 그냥 흔한 얘기들, 그거야. 이 정도는 노래 가사 밖에 안 돼. 이 정도는? 가사, 밖에? 너가(늬가) 아주(아조) 욕을 얻어 먹고 싶어 발악을 하는구나. 환장했어. 물 올랐어. 바싹 독이 오른건가?!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래나.
   「아저씨 여자친구 없죠? 없을 꺼야. 보통 이런 스타일 아저씨들은 작품 구상 하느라 바빠서 여자친구 잘 안 만들어. 깊이 사귀지를 안는다고. 숨겨진, 만나서는 안 될, 지금은 볼 수 없는 연인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이런 꽈는 "남자는 절대 집에 있으면 안 돼. 무조건 밖에 나가야지. 남자는 밖으로 돌아야 돼." 라면서 나는, 남자는, 우리는, 그런 말 자주 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서늘하게 젖은 눈매, 뭔가 아쉬워, 너무 젖었어. 옷 너머로 음음 순수함 속의 관능미? 부족해. 뭇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타입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어떤 염문이 느껴지는데. 이 남자는 우리를 반드시 우껴줄 수 있는 남자야. 그건 분명해. 뭔가 있어. 확실해.」
   「얘 넌 애가 왜 그렇게 촌스럽니? 고상하지 못하게 말야. 아저씨가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인 거 같아? 아저씨가 무슨 에로영화 촬영스텝이야? 감독은 되야지. 촬영스텝이 어때서? 촬영스텝이 이 얘기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우리 아저씨가 무슨 욕망의 화신인 줄 알아? 한 여자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그러니까 느닷없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명언이 생각나잖아. 세월이 인내심을 길러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살 날이 줄어들수록 더 오래 기다릴 수 있게 되다니. 이 아저씨는 화려한 사생활이나 밑도 끝도 없는 스캔들, 희대의 바람둥이, 난삽한 연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느낌 온다니까.」
   「우리······ 아저씨?」
   「아저씨? 친구 없죠? 어딘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네. 막 그런 느낌이 확 다가와. 날 덮쳐. 왜 친구가 없어요? 혼자인 게 좋은가? 자신이 일부러 속세를 멀리하는 그런 건가?」
   「맞아. 아빠 아니 오빠, 아 이상하다. 아저씨 친구 없는 게 분명해. (앞뒤 안 보고 들었다 놨다) 남자 기준으로는 물론 친구 없지 않겠지. 그러나 여자들 기준으로 보면 친구, 하나도, 없어. 절대. 맞아. 그래. 완전. 정말. 진짜로. 확실해. 틀릴 수가 없어. 빼도 박도 못해. 의외로 그런 사람들 많아. 더군다나 여자라면... 음. 그래프로 다 그려져. 우리는······ 다른 건 모르겠고 미래를 속단하지 말며,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 현재가 흐리멍텅하면 예언, 안 먹혀. 미래, 까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어떻게 살고, 누구를 만나며, 무엇을 하는가, 여기까지만.」
   「아저씨는 말이야, 한 사람과 오래 갈 스타일인데 느낌이 이상한 게, 여자에게 꽃다발을 한 번도 선물해주지 않았을 꺼 같아. 못했거나. 그런데 꽃집에서 일은 해 봤어. 그러다 꽤 괜찮은 단골 손님이나 뜨내기를 눈여겨만 봤을 꺼야. 그러다 끝나. 막 이래.」
   「혹시 꽃 알레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가족끼리 또는 누군가 집에서 외롭게 서 있는 화병에 꽃을 채워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꽃을 사러 오는 단골 손님이 있었을 꺼야. 퇴근 후 집에 가면서 꽃을 사들고 가는 남자라면... 아! 우리 아빠는 꽃 대신에 술을 사오셔.」
   딱히 답을 하지 않아도 밉상으로 찍히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깨고 소녀 중 누군가가 약 2분쯤 플루트를 분다. 어느새 케이블카는 운행을 시작했고, A와 B의 중간 어딘가에 떠 있다. 공중에. 하늘에. 구름과 구름 사이에. 소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플루트 협주곡 E단조 작품번호 57번 3악장이다. 그런데 뭐 그런 옷이 다 있지? 유행인가? 뭐 이런 게? 소녀들 가운데 누군가는 어깨 위에 파랑새가 앉아있다. 진짜 같다. 정말.
   「에에, 으으, 그만 할래. 지겨워. 재미없어. 플루트 그만두고 클라리넷 시작할래. 그건, 이유가 다 있지. 히히.」
   「그럼 그렇지. 오래간다 했어. 그래도 플룻으로 오늘 로맨스를 이뤘어. 됐어. 괜찮아.」
   「얘들아, 아저씨 왠지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니? 차마 말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그런 사연 말야.」
   「이 아저씨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아. 반전, 많을 것 같아. 알면 알수록 신기한, 까도 까도 계속 뭔가가 나올 것 같은 신비함,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아저씨가 가난하다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래도 낭만을 알아, 뭘 좀 안단 말야. 무엇보다 그는, 여자를, 알아. 그럴 꺼 같아.」
   「내 말이~.」
   「그래. 얘 혹시?」
   「너도?」
   「너도 그 생각했어?」
   「너도, 너도? 그럴까? 그래?」 ······ 「아저씨! 우리 모임 들어오실래요? 우리는 막 기자회견 할려고 난리치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불량 청소년도 아니며, 마약 이런 거 안 친해요. 무분별한 연애 우리 얘기 아니죠. 나름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열심히 하고, 아직 이런 말 하긴 이르지만, 우린, 인생을 알죠. 사람을 보면, 딱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여요. 아저씨를 보아하니 아저씨의 벌거벗은 몸이 상상되지는 않지만 (웃음) 아저씨의 미래가 보일락 말락 하네요. 우린요, 음, 우리 모임은요, 인파에 눕는 사람들이에요. 들어보셨어요? 인파에 눕는 사람들, 일명 인파 서퍼. 당연히 비밀모임이죠. 실패 동영상, 즉석 비디오, 놀라운 영상, 재미난 도전, 이런 거 찍는 애들이랑도 친하죠. 그렇지만 우린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많이 안 해요. 우린 십대잖아요. 그 가운데서도 드문 종족이구요. 쟤 봐봐요. 쟤 귀. 귀 위쪽이 뾰족한 게 꼭 요정같죠?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요정 말예요. 어때요? 인파 위에서 고무보트 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콘서트장에서 언제까지 뒷좌석에서 맥주만 홀짝거리고 배 내밀고 핸드폰 쪼물딱 거리기만 하실 꺼에요? 쪼물딱? 스탠딩 인파 제일 앞에서 누워 보면, 클럽 분위기에 클럽 음악에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그들 위로 돌아 서서 팔 벌리고 한 번 누워 보면 이 세상이 달라져 보일 껄요? 한 번도 그래보신 적 없죠? 그거 아무나 못해요. 그럼요. 저희가 아저씨를 특별히 특별회원으로 받아들일께요. 회칙은 차차 정하구요. 뭐 정하지 말죠. 그딴 거 없어도 되요. 어때요? 생각있어요? 이건 첫째, 돈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고 둘째, 극히 희소한 일이라서 첫째 때문에 둘째인지, 둘째가 첫째에 선행하는지 아니면 때때로 다른건지 제각기 다르겠지만 그 둘의 합집합? 교집합인 건 분명해요.」
   「아저씨!」, 「오빠!」, 「다시 아저씨!」
   「아저씨, 사랑, 해봤어요?」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 뭔지 아세요?」
   「우린 몰라요.」 키득키득.
   「육체적 사랑?」 들썩들썩.
   「행복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야, 여기 철학자 나셨네.」
   「우리, 환상을 찾으러 떠나볼까?」
   「아, 회전목마 타고 싶어라.」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그런데 있잖아. 아저씨 제인이랑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니?」
   「어, 맞어, 정말. 진짜!」
   「와, 그러겠다. 오.」
   「오우, 대박!」여기서 소리내어지지 않은 한 마디가 있었다. 「아저씨... 그분을 아세요?」 그분? 그분이 누구야?
   이런 모습은 꼭 비슷한 또는 정반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남자 친구들 7명? 여럿이 술집에 갔어. 마담? 괜찮아. 많이 괜찮아. 이 술집 누가 들어오자고 했어, 그 녀석 안아주겠어. 아니다. 마담을 재빨리 덥썩 껴안아버리겠어. 뺨 맞아도 좋아. 다른 녀석들이 선수치면 어떡해. 이런 하이에나 같은 놈들. 딱 거기서 마담에게 물어보는 거지. 이 가운데 제일 잘 생긴 사람은 누구냐?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돈이 많을 것 같냐? 그외 누가 더 뭐, 누가 더 뭐란 말들. 대화 요점이 아니라 대화 당사자가 바껴도, 남자 대 남자라거나 여자들이라거나 이렇게, 모든 예의와 가식 사이 어딘가에는 있을 사람에 대한 말들. 너무 포괄적이다. 멈춰야 한다. 그렇게 그와 같은 물음이 있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 다음 마음에 안 드는 답변, 신경쓰이는 되물음, 결코 결코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소, 화나는 호칭, 괴성과 야유, 고함, 호통, 세계 3대 후라이팬, 불이? 물이 끓는 주전자, 결코 사소한 일희일비라 부를 수 없다. 어이없어, 얼척없단 말야. 버럭, 맹력한 분노, 목청껏 소리지르기, 울화통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하나는 한편으론 침착하며 겸연쩍은 조증 한다발을 꽃 피울 것이다. 안개꽃으로. 이유는 묻지마세요. 왜 그런지, 더 이상의 동기는 필요치 않아요. 막 분위기 달아오르고 갑자기 재밌어진다. 완전 막 흥분돼. 흥미진진해지지. 곧바로 말이다. 남자들 이렇게 발동 걸리면 완전 (개)웃겨! 물론이다. 뭐가 물론이냐 하면, 이것은 그들이 얼마만큼 친한가, 그 우정이 얼마나 지고지순하냐, 그것을 판별하고 측정할 수 있는 더없이 엄격한 지표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그만한 기막힌 리트머스 시험지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앞서 케이블카의 대화와 술집이나 술집 바깥 어딘가에서의 남자 다수에 여자 한둘의 정황, 비교될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이 이런 경우에 처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물론 모두 꼭 이처럼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반대 의견을 완곡하게 제시하거나 다른 자리에서 부드럽게 말하거나 아니면 그걸 (타인이 읽으라고) 블로그에 쓸 수도 있다. 문학과 노래와 만화와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즉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은 하게 된다. 비밀은 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그런 간편한(애잔한) 말은 하지 않겠다. 비밀은 그냥 비밀일 뿐이다. 그건 진짜 비밀이 아니라 희미한 안개 같은 걸 가리키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이며 말이고 그냥 표현 수단의 하나다. 나이 먹고 모든 게 귀찮아지고, 세상에 닳아져서 뭘 해도 재미없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소멸하지 않은 뭔가는 아직 표출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속속들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겠냐마는 혹 그렇다면 그건, 그건 말이다, 그들이 안 친한 거다! 뭐? 친한데, 많이 친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그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 아닐까? 이런 때 거짓말 탐지기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육지에 살고, 새는 하늘에, 돌고래는 바다에 산다. 남자와 여자는 과장하자면 그만큼 다른 존재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서가 절반쯤 달라. 문화도 약간은 조금 그렇다. 그러니까 세상사가 신기하지. 세상에는 이미 멋진 말들이 너무 많으니까 여기까지만.
   나중 그가 정말 소녀들과 함께 인파에 드러누웠는지, 그랬다면 그걸로 끝인지, 또 다른 섬에서의 모험은 없었는지 그리고 A섬에서 B섬으로 갔다가 다시 A섬으로 돌아왔는지, 새로운 C로 튀었는지 그건 공개할 수 없다. 분량은 있지만 일단 비공개다. 너무 많이 밝히면 독자와 작가, 양측 모두 낮 뜨거워져 탈 날 수 있다. 탈 난다. 탈랄라! 그러나 그가 묵었던 호텔의 경영자는 일선에 복귀해서 총지배인과 어떤 밀담을 나눴을지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어디서 저런 꺼벙한 촌닭 코흘리개 얼간이 똥싸배기 같은 놈을 특별실에 들여놨냐며 화자와 청자 게다가 엿듣는 사람까지 모두 화들짝거리게 만드는 험악한 험담이 된통 오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설마, 여기서? 이제 드디어 말이 필요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렇다. 바로, 당신은 독서의 신이다. 책읽기의 귀재, 그것이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