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58
안녕, 애들아. 어떻게 지냈니? 잘 살았어? 옷 괜찮은데? 얼굴 좋아보이는데? 요즘 누구 만나는 거 아니야? 처럼 만나서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오고 간다.
「왜 내가 웹 시상제에 초대받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잠시 하고 있는 일에 관해 누가 말했다.
「거기서 널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
「누구 뭐 새로운 소식 없어?」
「영화제를 가볼까? 그러면 시간표랑 행사 일정이랑 누가 오고 어떤 영화 하는지 미리 알아보는 게 좋은데. 그냥 딱 가서 즉흥적으로 놀고 와도 괜찮지만. 그거 말고 다른 거 뭐 없나?」
「그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저 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저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까, 그런 궁금증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뭔가 새로운 무엇. 바로 그런 것 말야.」
「예를 들면, 어떤 거?」
「글쎄, 그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지. 그냥 말로 대신하자면 첫눈에 반할 수 있는 신천지?」
「뭐가 있을까? 100년 전이나 후. 아니면 바로 지금의 아프리카? 그렇지만 멀지 않은 곳, 어디 없을까?」
「미인대회? 헬스클럽에 갈 수는 없잖아. 아님 요가수업? 그래 NC. 하지만 클럽이라면 들어갈 때는 좋은데, 나올 때는 괜히 조금은 욱한다니까.」
「우린 잡담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거 같아. 인생이 매순간 째깍째깍 줄어들고 있단 말야. 이러쿵저러쿵, 시시콜콜, 어쩌구저쩌구, 궁시렁궁시렁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재미있으면 좋겠다.」
「넌 뭐 그렇게 사춘기 애들 같은 얘기를 하니?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에게 불평하는 법이야.」
「그거 뭔 얘기야?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말이야? 그럼 꿈이 있는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에게 불평하는 건 뭔데? 꿈이 없는 사람은 즐거우면 안되나? 실은 꿈 없는 사람이 걱정없이 무사태평이니까, 삶의 목표가 꿈이 아니라 재미난 일 찾기,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더 즐겁게 살 것 같은데. 어, 진짜 그런 거 같아. 많이 그러잖아. 뭐 거창한 꿈 꼭 있으란 말도 지겹잖아.」
「다들 꼼짝마.」
「뭘 꼼짝마? 뜬금없이 누구보고 말한거야?」
「여기 봐봐.」 알렉스가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에 뜬 어떤 장소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거기 한번 찾아볼까.」 케빈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본다.
「여기에 가면 누구든 동화 주인공으로, 주위를 판타지 시공간으로 만들어준다는데. 농담 아니고 정말이라네.」
「특별대우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갔다온 사람이 그렇게 써놨어. 그곳을 다녀온 후로 자기 인생은 그곳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그러는데.」
「여기...는 이름이 환상관인데? 뭐지?」
「환상관? 뭐야. 미술관이나 음악회, 마술 공연, 디너쇼, 박물관, 과학관은 들어봤지만 환─상─관?」
「여기서 멀지 않은데.」
「관람평과 사진과 동영상들 언뜻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밑도 끝도 없이 환상관? 환상관? 뭐지?」
「환상관이라. 듣도 보도 못한 건데. 뭔가 우리를 오라고 잡아 끄는 기운이 느껴지기는 한데 또 선뜻 확 결정은 어렵네.」
「그래? 환상관에 갈꺼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고. 가, 말어? 갈 사람? 아니 안 갈 사람 있으면 말해봐. 자, 거수.」
「어? 없네.」
「그럼 가자.」
「바로 그거야. 도시에서 벗어나 시간을 좀 보내야 돼.」
「항상 이런 식이야. 환상이 우릴 조종하는데. 소비자의 환심은 이렇게 사야 하나봐. 정석이야. 교묘하다구.」
「따라해봐. 이렇게 해보란 말이야. 삐리리리 삐리리리.」 환상관을 소셜 네트워크에서 처음 발견한 알렉스가 로보트춤을 추면서 케빈과 친구들의 눈짓을 받는다. 한두 명 막 따라하기 시작한다.
실제 공간에서는 그들이 시간을 들이고 중간에 배도 고팠다가 한눈도 팔았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곳에 도착하지만 소설 지면에서는 또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는 사람 입장이라면 그럴 필요없다. 무거운 카메라와 조명기구 옮기고 무대 만들고 그럴 필요 하나도 없단 말이다. 벌써 그들은 환상관에 도착했다. 간판에 그렇게 써 있다. 환상관이라고. 환상관 건물의 건축 모양에 대해서는 딱히 특이한 건 없고 딱 하나, 커다란 등대가 있다는 거다. 여기가 육지인데 등대가 있다. 그냥 모양만 있는 게 아니라, 진짜다. 그리고 이곳의 입구는 고래가 방긋 벌린 입 안에 있다. 오, 요나? 오우! 뭐가 있을까, 저 너머에는? 당신 인생의 다음 행보는? 내일 할 일은 그리고 다음 사랑은.
입구를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매우 단정하게 카펫이 깔려있고, 썩 큰 미술관이나 극장처럼 지나가면서 하나씩 또는 한곳에 머물며 작품을 감상하는 그런 구조를 띄고 있다. 사람이 나타나서 안내하는 광경은 없고, 어딘가에서 인조인간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것 같다. 이곳에 와서 환영한다고. 꼭 1,000명의 성우 목소리를 완벽하게 합성하여 특이한 느낌을 터득하도록 만들어진 그런 목적으로 탄생한 로봇의 음성같다. 뭐 일단 들어왔으니 처음 보이는 곳에 들어간다. 들어간 1번째 내부 공간은 어둡다. 그런데 점점 밝아진다. 계속 밝아진다. 바깥이 보인다. 벽면들이 유리로 되어 있나 보다. 바깥으로 눈이 내린다. 자세히 보니 눈이 아니다. 그건 구름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새떼가 벽면 바깥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새는 가만히 날고 있고, 1번 내부 공간은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듯이. 게다가 토네이도인지 태풍인지 그런 비와 바람과 눈과 솜사탕이 보인다. 하늘의 도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중 그들은 붕 뜬다. 마음이 붕 뜬게 아니라 몸이 붕 떴다. 기분이 날아오른 것과 별개로 육신이 공중에 띄워졌다. 그곳은 우주공간은 아니지만 또 그들이 우주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곳에 들어온 후 살며시 문이 닫히고, 뭐 어떤 작동 원리에 의해 발을 땅에 딛고 있을 수 없게 된 거다.
「뭐야,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믿기지 않아.」
「오, 이런 신발.」
「도대체 뭐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이런 일이 사실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어. 누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줄래?」
「하나도 몰라서 오히려 다행인데.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해서 빠져들었던 거 같아. 아닌데. 이건 분명 알고도 확실히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확 몰입되는 건데.」
「알 도리가 없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전혀 예측도 못하고, 감도 못 잡고,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단 말야. 그지?」
「그래. 알 길이 없어. 그건 아무도 몰라. 딱히 뭐라고 하지 못하겠어. 정말 할 말을 잊게 만들어. 진짜로.」
「숨을 쉴 수가 있어.」
「말도 할 수가 있어.」
「공중에 떠 있는 거 말고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그렇지?」
「어 맞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야. 이게 가능한 일인가? 누구 과학원리 아는 사람 있어?」
「거기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데. 혹 아는 사람 있어도 알려주지 말래?」
「소름 끼쳐.」
「뻔한 거 아냐? 그냥 즐겨!」
「어쨌든 정말 놀라워. 굉장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번째 내부 공간에서의 유희를 즐기고 나와서 또 어딘가로 이동한다. 처음에 환상관에 입장한 이후로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이상한 복장의 사람을 보니 버럭 겁을 먹고 긴장한 채로 약간 경계를 한다. 뭐든 말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뭔가 물어본다. 장난스런 말은 조용하게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고, 명확한 용건이나 이를테면 활자화해서 문서로 남길 가치가 있는 말은 좀더 또박또박 말을 한다.
「당신 마약상이나 뭐 그런거야?」 이건 장난스러운 말이다.
「누구지?」 이것도 장난스러운 말이다.
「그러게 말야.」
「여기 설계자랄지 운영자? 감독? 쟤 팔에 주사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될 꺼 같아.」
「왜 말이 없어? 우리 말을 못 듣는 거 아닐까?」
「혀 끝에서 뱅뱅도네, 생각이 날듯 말듯해... 저번에 나이트 클럽에서 봤던 웨이터 닮았는데, 아닌가? 의문의 여지가 없어. 확실해. 아니야.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 NC 사장 말이야, 사람들 평이 그가 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는데.」
「브라질 수도가 어디지? 리오데자네이루? 브라질리아?」
「뭔 소리야?」
「아, 난 긴장하면 수도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잘 떠오르면 행운이 따르고, 틀리면 그래도 행운이 따라와. 이 습관, 버리면 안되겠지?」
「내가 봤을 때 우리 얘기는 어디 3류 촌극이나 인기없어서 중간에 서둘러 종영되는 시트콤에나 나와야지 이거 원, 소설로 남으면 큰일날 꺼 같다. 뭔 험담을 얻어들을지 모르겠단 말야.」
「그래도 악명은 높여주겠지. 그것도 잘 하면.」
「넌 뭔 실존하지도 않을 작품 걱정을 다 하냐? 가능하지도 않은 상상을 다 하고 그래?」
「내겐 그게 징크스야.」
「어 그래, 어련하시겠어.」
「난 이런 거. "자기야, 난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이 안가." 상상속의 연인과의 대화? 그런 거.」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저 아저씨 그냥 가버리는데? 우리가 한 얘기 들었나? 사이보그, 기계인간 뭐 그런걸까?」
「쉿! 저 소리 들었어?」
「뭔 소리?」
「네 거짓말에 안 속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뭔데?」
「아, 맞다. 나 여기 알꺼 같아. 옛날에 어렸을 때 여기 와 봤어. 옛날에 여기는 바다에 있던 등대였는데, 여기 주변은 바다였어. 그래, 바다. 데자뷰 현상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리 속단하지 말자구.」
「얘들아. 이건 뭔가 이상해. 여기 혹시 정자은행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드러나는데. 여기 딱 보니 부도난 거 같아.」
「음. 아직 시설을 확충하거나 뭔가 준비가 늦어지는 뭐 그런 단계 같은데.」
「우리 짐작이 빗나갔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어쩐지 처음에 들어올 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했어. 정말 값어치가 있다면 그럴 리 없잖아. 개장했는데 중간에 잘 안돼서 주인 바뀌고 한물갔는지도 몰라. 아마도 부흥을 일으킬려고 안해본 일이 없을 꺼 같은데.」
그 순간 공중 어딘가에서 또 확성기인지 시설 전체 방송인지 모를 음성이 들린다.
「좋은 의견입니다. 의견? 마땅히 해볼만한 생각이죠. 서비스 제공자라면 꼭 자문해 봐야 할 물음이죠.」
「뭐야? 우리가 잘못 들은거야?」
「정확히 듣긴 들었는데 이것까지만 준비된 거 아닐까?」
「그럴꺼야.」
「뻔할 뻔자지.」
「혹한거야. 그게 다야.」
「그냥 흔한 일이야. 그래도 좀 어리둥절하네.」
「다들 그렇게 말하겠지. 어디서나 항상 들리는 얘기, 뭐 새로 나왔다고 하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들. 그런 거.」
「왜 그래? 뭔가 나올려다 안 나오니까 실망한거니? 괜찮아. 다른데 가거나 딴 거 찾아보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차라리 잘된 일이야. 그럼.」
순간 벼락같이 화재경보가 울린다. 삐~요, 삐~요, 삐~요!
「안 봐도 비디오다.」
「그래도 화재경보에는 자동반사가 정답이야. 잘못 울렸을 거라고 절대 미리 짐작하면 안되는 일이지.」
「그럼. 당연해.」
「얘들아. 뛰어.」
뛰면서 얘기한다.
「뻔하지 않아?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네가 알긴 뭘 알아.」
「그럼 넌 감 잡았어?」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하여간 쥐뿔도 모르겠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얘들아 그런데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러게.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뭐야. 나가는 출구가 안 보여.」
「몰라. 전혀 모르겠어.」
「맙소사! 정말이야?」
「늬들 제정신이야? 미쳤니?」
「네가 만들어낸 이야기지?」
「그럴 리가 없어.」
「어쩐지 첨부터 이상하다고 했어. 누가 오자고 한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도시로 가야할 꺼 아냐. 여기서 나가야 한다구.」
「난 내일이나 이번주 약속 하나도 없는데.」
「여유있어. 멋져! 비상경보음도 이제 멈췄네. 좋아.」
「오랫동안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어. 너희는 어때? 짜릿해?」
「이제 슬슬 게임을 해볼까? 컴퓨터나 게임기로 하는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다른데.」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게임하는 게 시시한지 이 상황이 미련한 건지 통 모르겠다.」
「두고 봐야지.」
「모든 점을 고려해볼 때 일단 침착해야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좀 보자고.」
「여기서 못 나가면 어쩌지? 그런 생각 든 적 없어?」
「너무 신경쓰지마.」
「누가 이 같은 일들을 꾸미고 만들어서 실행할 수 있었을까 궁리를 해봤는데 뭐가 하나 떠올랐어. 혹시... 이중에 한명이 그 사람 아닐까?」
「용의자가 이 안에 있다고? 설마.」
「뭐야 벌써 특수용어 나왔네. 용의자.」
「얘들아 좀 창의적으로 생각해 봐.」
「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데 약해.」
「뭔가 직감이 오지 않니?」
「어. 안 와.」
「직감보다는 과학적 증거를 다르겠어.」
「아니면 육감?」
「영화 생각 많이 나게 하네. 참나. 뭐 엑소시트트? 스릴러, 공포?」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잠시 분위기가 설명할 수 없는 만큼의 차이로 덜컥 그 모양을 달리한다.
제임스: 그거 주문이야? 다음으로 넘어가다,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그럼 주문이 이루어졌네? (자신의 핸드폰이 혼자 노는 걸 바라보고 있다.)
닉: 뭔 소리야?
하워드: 내 핸드폰이 혼자 놀고 있잖아. 봐봐. 혼자서 트위터가 켜졌어. 그리고 글을 내려서 누군가 보고 있어. 내 터치는 말을 안들어. 누군가 내껄 작동하고 있다고.
마크: 그거 해킹? 아니 탈옥? 기계적으로 하나의 계정에 두개의 기기가 연결된 증상 그런 거 아니야?
알렉스: 나도 제임스랑 하워드 핸드폰이 그와 같은 이유로 혼자 논다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내꺼도 그래. 내껀 페이스북이 혼자 켜졌어. 막 사진보고 동영상 보고 혼자 댓글다네. 누구야? 뭐야 이거.
케빈: 내껀 자기 혼자서 인터넷 검색하는데. 여기에 대해 검색어를 계속 달리해서 찾아보고 있어. 환상관,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기피대상같아.
조니: 이런 젠장. 차라리 내꺼 핸드폰도 너네들처럼 막 혼자 켜지고 움직이면 좋겠다. 내껀 그냥 기계 고장난 거 같아. 아까부터 핸드폰 플래쉬가 혼자 켜지더니 통 말을 듣지 않아. 꺼지지가 않는다구. 다른 버튼도 통 듣지를 않고. 이런 삐─ 삐─ 삐─. (속임수라도 좋으니 작은 환상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고 심술부리는 꼬마처럼 투덜거린다.)
조니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내부의 조명이 모두 꺼진다. 바깥 태양광선은 하나도 유입되지 않기 때문에 실내가 즉시 어두워졌다. 다만 조니의 핸드폰 플래쉬 때문에 떠들석한 법석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들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깜빡 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 뭔 일이냐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조명이 켜진다. 그러더니 내부공간의 측면부가 열린다. 옆의 어느 즈음에 있는 보통 크기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측면 공간 전체 커다란 눕혀진 직사각형이 통채로 열린다. 옆으로 들어가고 위로 말리고 그런 방식으로 반원을 그려 가운데 부분이 그 중심점이다. 그렇게 문이 열린 후 바깥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경비업체 차량과 직원이 보인다. 업계 상위권 회사로 그 상표만 보고도 뭔일인지 알듯하다. 경비업체 직원의 말로는 아까 화재경보가 울렸기 때문에 출동했는데 오작동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얘기한데로 환상관의 정식 개업은 미루어졌고 계속 미뤄져서 비공식적으로 간혹 관계자만 왔다갔다하지 평소에는 이곳에 행인도 뜸하다고 한다. 간단히 대화를 하고 그들은 이제 건물바깥으로 나왔으니 인사를 나눈 후 경비업체 직원들은 차를 타고 떠났다.
「것봐. 별일 아니라니까.」
「길어졌으면 정말로 영화찍는 건데 지나고 보니 아쉽구먼.」
「그러게 말야.」
「어디가서 가볍게 레모네이드 마시고 싶어.」
그러면서 그들은 같이 타고온 대형 밴 차량이 주차된 쪽으로 갈려는데 갑자기 땅이 움직인다. 그러면서 그 어느 정도 범위의 구간, 그 땅은 그들을 다시 내부공간 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건물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커다란 한쪽 면이 다시 닫히기 시작한다. 뛰어도 소용없다. 런닝머쉰처럼 제자리 뛰기만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경비업체 직원이 와서 문을 열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네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름부터가 이상했어. 수족관도 아니고 수목원도 아닌 환상관. 에잇.」
「우리 외계인한테 걸린 거 아냐? 뭐지?」
「차라리 어디 댄스파티에나 기웃거릴껄 그랬어.」
「내 삶은 왜 이런 거지?」
「그만 좀 해. 우리에겐 모두 각자의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는 거잖아. 그걸 이겨낼 때 기분이 어떻겠어. 그냥 태풍속을 헤쳐나가는 과정 그것과 함께 하면 돼.」
「그쯤 해 둬.」
「기다려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구. 게다가 우리가 딱히 위험에 빠진거도 아니잖아.」
「그래. 좀비가 나돌아 다니지만 않으면 된 거지.」
「얘들아. 어쩌면 바깥 세상이란 없는 게 아닐까? 아마도 탈출할 방법이 없는 거 아닐까?」
「진정해. 이제 시작이라구.」
「살살 좀 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살짝 적기를 놓친 것 같아. 놀랐지~ 속았지롱! 이런 거 말야.」
「지금 이 순간. 마요르카 외딴 해안가의 울퉁불퉁한 바위에 기대 서 있다고 상상해 보면 어떠니?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바다 위에 솟은 낮은 절벽 위에 있는 남자 한 명이 양손을 쭉 뻗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와. 멋진데. 태극권 수련중인가 봐.」
「얘 왜 이래?」
「뭔 소리야?」
「어? 아닌데 저기 봐봐. 정말이야.」
「삐─.」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아름다운 해변, 파노라마 촬영중인 관광객, 백사장, 환상적인 미녀와 뛰노는 강아지들. 여기는, 여기는 진짜 마요르카 같은데. 오 이런.」
「거기보다는 핀터리스트에서 봤던 흑백사진으로 봤던 아일랜드 해변 같은데. 자, 봐봐. (핸드폰 앱을 켜서 사진을 보여주며) 똑같잖아.」
「정말. 어쩜, 이런 일이...」
「나 방금 전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백사장을 상상했는데 설마 그게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건 아니겠지?」
「그럼 좋겠다.」
여기까지만 좋았던 것일까? 진짜 거기까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웃으면서 좋아하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 ‘나는 이렇게 좋은 데 갔다 왔다’ 라면서 소셜 네트워크에 날마다 쏟아지는 사진과 같은 정경, 바로 그것이 꼬부라져서, 지표면이 꼬부라져서 그들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아마도 제일 비싼 책으로 1% 안짝에 포함되는 책인데, 크고, 화려하고, 반짝이고, 종이가 두껍고, 실제 사진들이 인쇄된 그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처럼 지표면이 종이도 아닌 지표면이 꼬부라져서 그들쪽으로 점점, 차츰차츰,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웅장한 영화 배경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악한 중간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미친 상황을 마주하면 사람은 일단 둘로 나뉘는 건가. 시간의 정지같은 침묵과 삐─? 온다 온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가까지 온다 가까이 온다. 왔다 왔다. 드디어 드디어. 바로 앞까지. 멈추지 않는다. 연속 동작이다.
그런데, 그런데.
지표면 꼬부라짐 현상은 그들을 지나쳐 갔다. 옆으로 비켜간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들을 통과해서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무슨, 운동 뭐 그런 원리 그대로 움직이던 방향대로 그들을 통과해 갔다. 홀로그램이나 가상현실, 몇 년 후에는 이럴 것이다 그런 영상을 테스트해서 만들고 크기만 확대한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진짜로 그처럼 그들을 통과해서 지나갔다. 지표면이. 오, 지표면이!
「이거 뭐냐?」
「글쎄다. 뭘까?」
「이제 왜 이곳의 이름이 환상관인줄 알겠다.」
「아직 인정하기엔 이른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언제 공인받을 수 있지? 환상관이라고. 그래 믿어주지. 환상관. 하지만 아직은 절반쯤? 아니 절반의 절반, 절반의 절반의 절반? 알아 맞춰 봐.」
「가능한 한 늦게, 가 어떨까?」
「그 시기를 맞춰보기로 결정했어. 그건 아마도 몇 번 더 겪어봐야 알 수 있겠어. 그래야 짐작이라도 해볼까?」
「일단 좀 더 출구를 찾아보는 게 어때?」
「그래 우선 저쪽으로 가보자.」
「그럼. 좀 걷는 게 좋겠어. 눈 땡그랗게 뜨고 마술사가 속임수 쓰나 안 쓰나, 판돈 몽땅 걸었는데 카드패 돌리는 사람이 밑장을 빼나 안 빼나 잘 보려면 냉철한 이성과 건강한 신체, 건전한 사회? 아니 이건 여기서 할 말이 아니군. 어쨌든 그러려면 좀 걸어야 해.」
「그래.」
한 블럭,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환상관 내부공간에서 대충 감으로 한 블럭쯤 지났을 거라고 예상하는 순간 그들 앞으로 벼랑에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쥐때들이 보인다. 당연히 광활한 바다도 눈 앞에 있다. 이건 좀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가. 왜? 짠내가 느껴지지 않아. 아직 매장을 정식 개장하기엔 일르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레밍 쥐, 죽음의 행진. 어렸을 때는 마치 12월 거리에 그 음악이 울려퍼지는 시기가 오면 아빠와 엄마, 간혹 삼촌? 이모? 큰 오빠가 들려준 산타크루즈가 진짜로 와서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는지 말짱 거짓말인지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그와 같은 애써 끝끝내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동하지 않는 궁금증, 나중 커서도 어른이 되어도 계속 몰랐으면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화들 바로 그것이 아무 이유없이 떠오른다. 레밍은 왜 바다로 뛰어드나? 왜 뛰어드는지 안다고? 모른다고? 관심없다고? 그건 거짓이라고? 그런 물음들과 별개로 여기서 서술자는 지구 반대편이나 집필 공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 나라, 앞 나라, 인근 시골, 관광하기에 그나마 제일 싸게 먹히는 섬에 사는 깡섬 처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왜 단체로 바다에 빠져 죽는 나그네쥐 얘기를 차라리 선호하냐고? 작품 속에서, 사람이 죽는 드라마와 소설과 영화보다. 얘기가 꼬인다. 때문에 그건 레밍 딜레마가 아니라 독자의 난해한 글읽기가 된다. 뭔 말도 안되는 레밍 신드롬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할리우드 영화에서 배운 대표적인 '거짓말' 8개는 잊어버리자. 너무 많이 알면 재미없다. 어쩔 땐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다. 재미없지만 정말 재미없지만 사회성 높은 글을 쓰며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고, 교육적인 영상을 만드는 어려운 길을 가는 어떤 분들께 감사하자. 그런 작품들이 재미는 없지만 그분들이 있어서 세상은 굴러간다. 입바른 말을 언젠가는 하고 넘어가야 했는데, 이젠 그 부담감을 떨쳐버리게 되었다. 짝짝짝! 자, 자, 자 간다. 즉 그들의 앞에 보이는 화면에 거대한 바다와 레밍쥐떼들이 보인다. 그 행렬이, 그 움직임이, 그 시간의 확장이.
「뭔줄 알겠니?」
「아니 모르겠어.」
「이건 뭘까, 뭐라고 해야하나. 뭐랄까, 환영? 최면? 그런게 아니야. 극사실에 기초한 이 환상관의 인공지능과 우리의 전두엽과 측두엽, 후두엽등 고등행동을 관장하는 연합영역의 느슨한? 아니 엉터리지만 예술적인 동기화, 그것일 꺼야.」
「뭔 소리야?」
「이쯤에서 저번에 모히토 요트 탔을 때 만날 뻔 하다 못 만난, 아니 만났나 안 만났나, 헷갈리게 만드는 수상쩍은 NC 사장이 우리 앞에 떡 나타나서 그리고 그 주위에는 치어리더들이 큰 경기에서 응원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막 막 그러면서 딱 묵직한 음성으로 대사를 건네겠지. 자기가 이 환상관을 인수했다고. 아직은 준비가 미비해서 시범 테스트중이라고. 어땠냐고. 뭘 보완해야 할지 알려주라고. 여기 음료수 한잔 하라고. MONSTER 캔을 마시라고. MONSTER 캔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캔 겉표면의 촉감이 마음에 드냐고. 그곳으로부터 협찬받았다고. 머머했다고. 머머하다고. 그리고 저쪽으로 나가면 강으로 나갈 수 있는 협곡이 있다고. 또 그리고 그대들은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고.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라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릴 수 있지만 썩 마음을 끌지 않는 교향시와 악극의 찬미. 그곳으로 가서 준비된 조정 보트를 타고 노를 저으라고. 그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노을이 질 것이라면서. 오 이런! 뭔 헛소리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지?
「그게 바로 환상관일 꺼야. 표절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거. 지금 우리가 쓰는 핸드폰도 수많은 기기와 제품들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그 디자인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거.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식으로 글을 쓰는 누군가도 자기 입으로 말했어. 대놓고 남의 글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다고. 언제 말했지? 게다가 항상 그러기만 하는 것도 아니야. 기필코 그걸 조금은 이용해서 예술인지 뭔지 말이 되는 뭔지 모를 어떤 뭔가를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마치 글렌 굴드의 음반 제작 과정처럼. 마치 앤디 워홀의 깡통 수프나 그런 수많은 작품들처럼 말이야.」
「너네들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거 알겠니?」
「하긴 일리 있는 얘기야. 기계적으로 작업하는 직업인과는 다르게 제정신으로는 절대 작품을 양산할 수 없는 사람들 있잖아. 그걸 미쳤다고 하든 뭐라 부르든. 사랑도 그런거지. 주위에서 보면 술이나 담배나 각종 유희와 기호품들을 전혀 취하지 않는 사람들 보기 힘들잖아. 인간세계가 원래 맨정신으로 살기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날 홀라당 다 밝혀버리면 전부 모든 것을 드러내버리면 어 그건 말로하기 힘든 희극이자 동시에 비극일 수도 있어.」
「오오 좋아.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상관은 살아있다?」
「여긴 어디? 우린 누구?」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어때?」
「그럴까?」
그들이 감지하지 못한 수준으로 바닥이 움직이는지 공간이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주변 상황이 바뀌어 있다. 그 환경이란 게 딱 두어 번만 바뀌어도 꼭 하도 많이 바뀐 듯이 정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즉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들과 똑같이 생긴 7인의 행인이다. 저만치 대형 스크린인지 진짜 사람인지 모를 그들이 그들과 똑같이 환상관의 내부공간을 헤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영상 기기나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어보면 그걸 촬영할 때는 기록해서 기계에 기록물을 남기는 거다. 그리고 전자제품 판매점 같은데 가보면 실시간으로 행인의 모습을 그대로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은 실시간이다. 또 A지역을 실시간으로 B지역에서도 볼 수 있고, C의 상황을 동시간으로 D에서 주시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어나 저기서 살거나 일하러 멀리가거나 여행하러 대륙을 건너가기도 한다. A에서 디자인하고 B에서 조립하고 C에서 마케팅한 제품을 D에서 사용한다. 저곳의 소식들에 대해 여기저기서 매일 논설을 쓰고 읽는다. 비교적 과거에 비해 현대는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문명이란 단어 같은 거. 옛날 세상에 비해서 놀랍도록 뒤섞이고 관계-역학적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 세계 주식시장은 모두 독불장군처럼 홀로 외롭게 벌스지 않는다는 것. 기타등등. 실시간이 좋을 때가 있고 녹화가 더 나을 때도 있다. 지금같은 경우는 녹화를 어떻게 변형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후자다. 완전 이상한 모습이다. 지금 보이는 영상은, 영상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놀라고 있다. 저쪽에 있는 친구들 말이다. 그런데 잠깐 언뜻 갸우뚱하면서 잘 들여다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매우 정밀한 마네킹이다. 그걸 눈치채고 그들은 또 한 번 놀란다. 저쪽에서 그들이 놀란 모습을 보고 이쪽에서 얘들이 아차, 한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왠지 이쪽 사람들은 저쪽에 있는 그들에게 모자이크 처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평정심을 잃게 만든다. 눈밑의 살결이 파르르 떨린다. 다짜고짜 도플갱어, 여러명의 도플갱어가 나타나다니 이게 뭔일이란 말인가. 도플갱어가 아닌가? 녹화된 게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가 기고 뭐가 아닌지도 흐릿한 가운데 그들은 묵상에 잠기고 모든 일이 우스꽝스러워지면서 그저 친한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데 안도감을 느낀다. 몸놀림은 둔중해졌지만 정신은 청명하리 맑아졌다. 말수도 줄었다. 뭔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너른 벌판으로 뛰쳐가고픈 울렁이는 동심이 고동치는 것도 느껴진다. 도대체 이렇게 절율케 만들고, 분위기를 난장판(?)으로 이끌며, 환상에 탐닉되어 홀리고, 꿈결같은 현실에 미혹시키는 이짓을 부리는 속 좁은 괴짜인지 운영체제인지 그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정체란 게 있기는 있나. 몇몇은 침을 꿀꺽 삼킨다. 뿅, 하면서 지금 이곳이 클럽으로 바뀌고 클럽의 스테이지에서 수많은 인파에 휩싸여 발바닥을 열심히 비비며 부비부비, 오 부비부비, 아가씨들과 몸을 스치면서 클럽 음악을 듣고 춤추고 술을 마신다면, 그렇게 바뀌는 기적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부도덕한 것인가? 그대는 진정 복장도착자가 아니란 말인가? 뭔 생각과 설명이 이렇게 진척없이 머뭇거리기만 하나. 하나의 의문부호만 뇌리 속에 남게 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더 이상해지기 전에 이곳을 나가야 한다. 가급적 출구를 늦지않도록 찾아야 한다. 탈출? 아하!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려다 말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감각만 예민해진다.
조니: 얘들아 제임스가 안 보이는데. 뭔 일인지 상황 판단하느라 얘기하느라 몰랐는데 그녀석 여기 없어. 어떻게 된거야?
케빈: 어 진짜네. 어디갔지?
알렉스: 그러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뭐야?
마크: 잘 생각해 보니 안 보인지 10분 넘은 거 같은데. 금새 어디로 가버린 거지?
하워드: 기다리면 올까? 우리가 찾으러 가볼까?
닉: 제임스 녀석 꼬마도 아니고 어딜 간거야? 찾으러 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여기 길이 워낙 종잡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건물 내부구조가 정말 이상해. 꼭 미로같아.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 그들은 모두 눈을 땡그렇게 뜨며 놀란다. 아니 이럴수가, 그런 표정. 그리고 그들에게로 제임스가 걸어온다. 모두들 어디갔었어? 뭔 일 있었니? 어디 이상한데 없나 봐 보고, 말을 시켜보고, 볼도 꼬집어 본다. 그러던 중 뒤늦게 지금의 제임스와 행방불명 이전 제임스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그의 머리카락이 모두 새하얗게 변해버린 거다. 실제로 있었다던가 옛날에도 지금도?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왕비 이야기가 왜 하필 지금 여기서? 그것보다 기록을 단축한 건가. 그런 이야기로 그나마 가장 유명한 일화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마리 앙투와네트는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극심한 공포로 하룻밤만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하던데.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한 유태인이 다음날 처형당한다는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백발이 되었다는 일화, 그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극소수로 간혹 발생할 것이란 예측은 가능하다. 게다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한다. 뭔 근거로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딱히 설득력은 부족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불과 몇개월 만에 백발이 된 사례 또한 없지는 않다는 건 뉴스와 해외토픽과 인터넷을 통하여 삽시간이면 퍼지고 찾으면 다 나온다. 진짜든 가짜든, 하루가 걸리든 1년이 걸리든, 믿거나 말거나 지금 친구들의 앞에 서있는 제임스의 머리카락은 완전 백발이다. 글로 읽은 얘기도 아니고 어디서 남에게 들은 얘기도 아니다. 직접 현장을 보고 있고,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 그렇지만 그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는 여기 저기 구경하느라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뚤레뚤레 하다가 저만치 보이는 안락 의자를 보니 퍼뜩 거기 몸을 누이고 싶다는 어떻게 태몽했는지 모를 욕구가 발생했다는 거다. 그래서 거기로 가서 딱 앉아보니 잠시 5분인지 10분인지 대충 사르륵 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자는 안락의자는 맞지만 기능이 하나 추가된 의자였다는 거다. 그럼 그 기능이 무어냐? 미용실에 있는 무인 모발 세정 기계라고 한다. 그 기계는 로보트로 상당히 정밀하게 매끈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깜빡 속아넘어갔다나 뭐라나. 대략 독자 10명? 인심썼다. 100명 가운데 최소 1명은 그런 기억 있을 것이다. 10살쯤에 미용실에 가서 의자에 앉았는데 미용사가 앉아 있는 꼬마의 높이를 올릴려고 의자에 장착된 페달, 미용사가 페달을 쑥 밟으면 의자 높이가 싹 그리고 꼬마는 싱글벙글 배꼽 빠지게 웃기. 반복하면 페달 쑥, 의자 싹, 킥킥킥. 그게 왜 웃기지? 별 의미도 없는데 대체 그게 뭐가 웃긴단 말인가? 참나 알다가도 모를 무의식의 세계 같으니라고. 또 그 특급 미용사는 속으로 뭔 생각하셨을까, 얘는 상당히 조숙한 거야 아니면 천재야, 설마 바보? 하여간 제임스는 거기서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머리카락이 감겨지고 염색이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대단히 약한 염색인 거 같고, 길어야 1주일? 짧은면 반나절이나 하루쯤 갈꺼 같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갑자기 사라졌던 사람이 불쑥 백발로 나타나니 대략 3초쯤은 얘가 좀비가 됐나, 라는 썩 불경스럽지 않은 신통방통한 상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잠깐 행복했다. 하기야 옛날 세상에나 문신한 사람을 보면 멋지거나 위압감도 풍기고 그랬지 요즘은 그게 문신인지 스티커인지 분간도 안되고, 피어싱에 가죽잠바에 험악한 입담등 사람을 쫄게 만드는 방법은 쌔고 쌨다. 또한 괴팍한 취향의 이색적인 그대는, 젊은이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당신은 여자친구의 손톱 발톱에 뭐 절대 못 바르게 하거나, 호르몬 분비량에 따라 그거도(살짝만 매니큐어 하는 거도) 흐름을 타야한다고 주장하는 똘아이도 있다. 그렇게 별의별 사람이 다 있듯이 이곳 환상관도 하여간 참 이상하기로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어느 흔들의자 옆에서 설을 시원스레 풀었다가 흔들의자를 번갈아 가면서 탔다가, 계단을 올라갔다가 직진에 좌회전 하고, 봉타고 한 층을 내려갔다가 우회전에 후진을 해서 어떻게 출구를 찾긴 찾았다. 또 뭔 속임수와 위기가 닥쳤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차분하게 출구를 나와서 고지대에 위치한 그곳 환상관의 앞으로는 멀리 도시의 전경이 보인다. 이제 갈까? 하던 찰나인데 어머나! 하워드가 핸드폰을 놓고 온 것이다. 흔들의자 옆에 있던 고전적인 탁자에 그것을 놓고 와버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어쩌긴 뭘 어째. 다시 가지러 가야지. 환상관이 좀 불안정했지만 딱히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길을 찾기가 쉽지도 않고 막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좀비들이 우글거리면서 쫓아오지도 않았다. 그냥 다시 그곳으로 갔다가, 핸드폰 찾아서 챙기고, 다시 출구로 나오면 끝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꺼림직하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약간 오싹하다.
조니: 하워드, 내가 핸드폰 하나 새로 사주면 안 될까? 나도 모르게 환상관 내부 공간을 날아다니는 용을 만날 것만 같은 그런 몽상을 지워버릴 수 없단 말이야.
케빈: 어? 너도야? 나도 뭔가 저 도시에서 나를 막 잡아끄는 염력이 느껴지는데.
알렉스: 갔다 오는 건 문제가 아닌데, 뭔가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어. 지금 표정 안 좋은 사람은 어제 집에서 잠을 잘못 잔거니 아니면 최근 생활이 온통 욕구불만 투성인 거니?
마크: 갔다 올까? 아니 다시 들어갔다가 못 나오면 어떡하지? 가지 말까? 어, 그러면 하워드 핸드폰 새로 사야 하는데, 웹 계정과 동기화되서 뭐 자료 따로 잃을 걱정은 없겠지만 새롭게 만난 어떤 여인의 연락을 기다릴 수도 있고, 또 당장 없으면 서운하잖아. 새거 장만하기도 귀찮고.
하워드: 그러게 말야. 어쩌면 좋지? 어떡할까?
제임스: 괜찮겠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닉: 왜, 누구? 입담 좋은 조니랑 요즘 컨디션 좋은 마크만 보낼까? 제임스는 음 가기 싫은가 보구나. 아니면 뭔지 모를 정체불명의 뭔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너네들은 뭐 그리 생각이 많니? 생각이 너무 많으면 결정을 못해. 결정을 못하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어.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사랑은 떠난다니까.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을 해야할 꺼 아니야.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를 가고 싶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런 거 그냥 하진 말고, 해야 한다, 머머일 것이다, 라는 느낌이 들면 해야지. 그럼. 연주자가 되고 싶다? 슈퍼모델이 되고 싶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 하루 아침에 기분만 느껴보는 방법도 있지. 거울을 보고 그 복장을 갖춰 입는 것, 그거 말이야. 하긴 그게 말이 쉽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어. 나도 전에는 남들이 '나는 뭐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하거나 소셜 네트워크에서 타인의 글을 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술 A와 안주 B의 조합, 그 둘을 같이 먹고 취해서 행복하게 꿈나라로 가는 것'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흔한 일상적인 말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해. 와 저분은 어떻게 <나는 무엇을 제일 좋아한다> 그 말을 그렇게 쉽게 하나, 그런 표현을 남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딱 끊어서 간결하게 선언? 표명? 그냥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슴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야, 라는 소심한 10대나 조금 외로운 20대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 나도. 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듯, 편하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이런 일을 신기해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건가? 이렇게 말야. 그대신 남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기분 맞춰주느라 일평생 <나는 무엇을 제일 좋아한다, 뭐가 제일이야, 최고야> 그런 말은 또 쉽게 했어. 같은 표현을 참 다르게도 사용한 거지. 지금이라고 확 달라지지는 않았어. 하지만 속마음에 대한 걸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쓰거나 생각을 더 한다고나 할까, 점차 그렇게 바뀌는 거 같아. 그러면, 그렇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하다, 라는 말 또한 쉽게 못하거나 글로 남기지 못한다는 일관성 또한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별 얘기는 아닌데 그냥 생각나서 말했어. 음 아무튼 하워드 핸드폰 찾으러 다시 환상관 내부로 돌아가는 거 무서워 하지말자. 뭔 일 있겠어? 무서운 괴물 나타나면 엉아가 지켜줄께. 함께 가보자!
조니: 얜 사람들 동기부여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그리고 남자만 잘 다루는 게 아니야.
마크: 사람들 얼굴에 술을 끼얹어보지도,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그걸 당해보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물러나면 안될 것 같지 않니?
제임스: 사람 얼굴에 술 끼얹기, 결혼식 없이 결혼기념일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다가 불화를 겪는 연인이 술집에서 마주 앉아 술을 거의 동시에 퍼붙는 걸 코 앞에서 보기는 했어. 그땐 친구로서 중재 아닌 중재의 역할이랄 것도 없고 그냥 옆자리에 있다가 재미난 구경한 거지. 재미난 구경? 그거 좀 이상하네. 뭔가 그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말 많고 한 사람이 다 맞고 그거 다 뻥이야. 현실에서는 확-확 순식간에 이루어져. 파파팍! 아, 맞다. 저번에 누가 말했니? 엇그저께 그 뭐야, 긴 명대사, (한 손으로 엄지를 중지와 마주했다가 검지로, 딱!) 그거 따라했다가 뺨 맞을 뻔 했잖아. 진짜 한 대 맞을 뻔 했어. 그래서 막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무섭다고, 화를 가라앉히라고 달랬단 말야. 나도 긴 명대사를 현실에서 써먹어야지, 라는 생각에 딱 했어. 내가 따라한 명장면은 대략 이런 거였어. 이를테면 "마실 걸 물어보지? 뭘 주든 간에 고급으로 골라. 커피나 차 드시겠어요? 차로 부탁합니다. 수제 레모네이드나 소다수 드시겠어요? 레모네이드로 하죠. 감사합니다. 왜요? 왜냐하면 우리는 싼 값으로 후려치지 않으니까. 우리도 최고여야 해. 고객이 느끼기를, 아니, 확신하기를 '최고만 추구하는구나' 그러니 뭐라뭐라 어쩌겠지. 그리고 견적을 보여준 후엔, 장기적으로 절약되는 액수를 제시하면서,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문제는 우릴 고용하면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는 거지. 고객 입장에서도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까 수치들을 보여주고, 고객을 향해 빤히 바라보고 있어. 필요 이상으로 오래. (침묵, 침묵) 웃을 일이 아니야. 영업 실적이 없으면 바로 해고니까. 내 유일한 관심사는 이 회사의 성장이야. 그 고객들도 힘들게 번 돈이야.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벗겨먹으려 들지. 그러니까 고객들 눈을 바라볼 땐 우리는 다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 사실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바라보면서, 진실되게 말하는 거지. (침묵)" 그거 보고 응용했지. 딱 보니까 침묵이 중요하더라구. 차분하게 말한 다음에 최선을 다해 말없이 바라보는 것과. 똑같이 따라했어. 똑같이 따라했다구. 멋져 보였으니까. 정말 그렇게만 하면 사랑이든 일이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당신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다. 가능성이 보였지. 그렇게만 한다면 금새 또는 좀 더디게라도 뭔가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누군가가 일부러 내비치는 속옷처럼 엿보였어. 마음이 여린 사람들에게, 나이게 걸맞는 적절한 교양을 비춰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비교적 여자들에게 따라하기가 왜 중요할까? 그들은 왜 남을 따라할까? 그냥 남이 하면 멋져보이니까, 난 별로인 것 같아서, 학자들이 말하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흔한 답변말고 하나를 들자면 실생활과 연기가 그들에겐 신중한 사람보다는 그것의 구분이 매우 흐릿하다는 거지. 태생적으로 원래 그래. 행복이란 게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서 사는 것이라면 잠시 설을 풀어서 그런 체 할 수 있고, 선수용 모터사이클을 못타도 그 전문가용 옷만 입어도 그걸 착용한 그 순간 즉시 외관상 선수와 구분되지는 않고,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에 내 꿈은 뭐다, 난 나중 이렇게 살고 싶다, 라고 글로 써서 알려도 바로 미래와 현재는 일직선이나 꽈배기 모양일지 몰라도 같은 곡선상에 위치하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따라해. (최선을 다해 바라보면서 침묵) 봐, 시선을 건네고 침묵하면 너네들은 기다려 줘. 이어가자면, 꿈에 근접하여 다가가 보니, 꿈을 화끈하게 이뤄보니 즉 실제 직접경험으로 겪어 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가 꿈꿔온 그것과 좀 달라, 그러면 꿈을 재수정하면 되고 또 다른 뭔가를 찾거나 기다리거나 평소처럼 남들처럼 책 읽고 대화하고 영화보고 여행하고 사랑도 하면서 그냥 사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허황된 꿈을 찾아 살아던 걸까. 꿈, 자면서 다 이뤄. 얼마나 좋은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그게 꿈이야. 그게 꿈이라구. 잡지에 나오는 그 흔한 인터뷰에 나오는 말이 글로 바뀐 지면에 나온 꿈은 대부분 이룰 수 있는 꿈이야. 그래서 이룰 수 없는 꿈보다 어쩌면 더 짠한거야. 슬프면서 그러니까 더 기쁜거라구.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말로 쉽게 툭 '그거'하고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 꿈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이룰 수 있는 게 꿈이라고? 누가 그래? 혼자 생각해 봤어? 책에서 하나 같이 다 동기부여하고 지겹게 듣고 또 듣고 평생 들으니까 그게 진짜 꿈인 거 같지? 넌 커서 뭐가 될래? 그게 꿈인 거 같지? 한 권의 자서전과 파란만장한 인생이 꿈인 거 같지? 그렇지? 잘 생각해봐, 휘둘리지 말고. 그게 꿈이라고 생각해? 대답해봐. 대답해. 아무 생각없이 말하지 말고, 생각을, 하고, 나서, 말을, 하란, 말야. 생각, 안 하고, 말하지 말고. 다 다시 간다. 자, 다시 시작해. 그게 꿈이야?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얼마만한 단위를 들여서 이룬 게 그게 꿈이야?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그렇지만 과거 일평생, 지금도 온통 그 얘기 천지고, 미래에도 죽을 때까지 계속 또 계속 듣게 될 말, 하면 된다고 듣던 말, 그렇게 성취한 것, 못 이뤘을지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 노력을 해봤다는 것, 그게 꿈이야? 그게 꿈이냐구. 그건 남이 말하는 꿈이야, 늬가 생각하는 꿈이 아니고. 그건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라구. 차리리 허풍을 떨거나 낮이나 밤에 잠자면서 만들어지는 그 꿈이 낫지. 그래. 정말 그래. 이룰 수 있는 건 꿈이 아니라구. 남 얘기만 듣고 그게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꿈이 아니라는 생각은 평생 못하게 되는 거야. 그거라구. 이룰 수 있다면 그건 그냥 조그만 소망일 뿐이야. 하나만 명심해. 너의 바깥에서 말하는 꿈은 모두 <그럴 것이다>야. 잊지마. 누가 꿈은 뭐다, 드라마에서 내 꿈은 뭐였어, 책에서 꿈이란 무엇이다, 자 그것은 뭐라고? 전부 이렇게 바꾸란 말이야. 우렁찬 목소리로 손짓을 곁들이며 멋지게 휘젓는 말을 듣든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건 뭐다 저건 뭐다라는 글을 읽든 그건 모두 <그럴 것이다>로 순화해서 받아들이란 말야. 알겠어? (말없이 최선을 다해서 바라보기) 이 말도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래. 나도 그걸 아직도 썩 그리 잘 한다고 할 수 없지만. (침묵. 눈빛. 침묵. 얼음땡) <그럴 것이다>로! 최선을 다해 내면을 바라보는 거지. (침묵), (침묵) 뭐 그런 생각이 들게 되겠지. 엥?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아 따라하기, 흉내내기 그 얘기하고 있었구나. 오늘은 왜 삼천포로 빠지지 않나 했어.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 거울 보고도 연습했고 거울 안 보고도 연습했어. 곰인형한테도 여동생한테도 연습해 봤단 말이야. 말과 행동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니까 만족감이 슬며시 찾아오더라니까. 그래서 아 때가 됐구나, 하면서 실전에 돌입하게 된거지. 여기서 배웠으면 저기서 써먹어야지. 그런데 그게 한 번에 잘 안 되나 봐. 그녀를 찾아가서 똑같이 따라했어. 거래처와 영업 상대를 찾아가서 똑같이 따라했어. 상대방에겐 다르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선 분위기 잡고, 몸짓 살며시 보여주고, 그러다 갑자기 뭘 물어봐, 그리고 쉬었다가, 침묵하고, 말하고, 상대방이 웃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말하고, 눈빛 보내고, 시선을 유지하면서... 어, 흠, 알지? 그런데 듣는 사람은, 긴 명대사, 그게 긴 명대사가 맞다면, 그것을 길게 늘여서 한 호흡에 뺄 여유를 주지 않아. 자꾸 못 참고 딱, 딱 끊는단 말야. 짜증나게 말이야. 긴 명대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싶게 만들어. 에잇, 삐─ 해도 안돼. 따라해도 안된다고. 새침한 기집애 같으니라고. 판 다 깨버려. 언제는 분위기잡는 게 좋다드니만. 딱 보니까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어. 순전 놀러만다니고. 노는 거도 제대로 못했을 꺼야. 그런 친구가 옛날에 좀 놀았을지 누가 알겠어. 차라리 그냥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며 어줍짢게 말하는 게 백번 나을 뻔 했나. 그래도 그저 작은 일이라서 다행인 게 그 친구가 계집애가 아니고 악당이나 다단계 사업체 간부였다면 그것에 잠시 내 생각의 어디가 막혀서 설득당하고, 세뇌되어 강력한 최면에 빠지고, 감성적인 충동을 참지 못해 그쪽으로 계속 빠져들었으면 한동안 어떤 음지에서 계속 살아가야 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됐다면 인생의 행로는 목적없이 어딘가로 부유하고 정처없이 어느 어두운 곳을 떠돌기만 했을 꺼야. 새로 만나게 될 사람과 잠깐만 알게 될지 아니면 오래도록 손잡고 더 오래도록 두손을 꼭 잡게 될지 가늠하는 능력까지도 잃어버렸을지 누가 알겠어. 카리브해나 인생의 무게와 언어의 정원, 백조의 호수,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겠지. 근데 뭘 보고 백조의 호수라 하지? 그건 실존하는 오아시스 같은 건가? 꼭 말하다가 난 퉁명스럽게 딴 길로 빠지는 게 문제야. 그래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잘 몰라. 에잇, 몹쓸 흉내내기!
닉: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잊어버려. 다 그런거지.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케빈: 초현실주의!
알렉스: 야수파 아닐까. 표현주의 같기도 하고. 어쩜 미래주의일 수도 있어. 팝컬쳐? 포스트모던!
조니: 그래 제임스, 말로 다 날려버리지 말고 기억했다가 그걸 소설에 쓰라구. 아 맞다. 다음 번 블로그에 자기 작품들 올리는 거 모두 잊지마. 나름 기대하고 있으니까. 이제 다시 슬슬 그곳으로 가볼까?
마크: 자, 한번 다시 환상관으로 가볼까? 고! 고!
하워드: 좋아 그럼, 출발하자고. 오늘은 모두들 환상관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하이파이브, 하이파이브)
그들이 다시 환상관의 내부에 들어선지 몇 잔의 차를 내리는데 필요한 물을 끓이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얘들아 저기 앞에 있는 더운 기운이 느껴지는 액체, 그 붉은 물줄기가 보이니?」
「어 정말. 뭐지? 저거... 용암일까?」
「오 이런. 뭔 여기가 화산도 아니고 이곳이 용광로일리도 없는데 그러기야 하겠어? 열기는 있지만 수증기가 없어. 아니야 용암.」
「그럼 케찹?」
「그게 케찹이든 용암이든 상관없고 저기 보이는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 보이니?」
「뭐야, 쟤네들?」
「옷과 머리카락 색깔과 장신구로 보아서는······ 전사, 기사, 마법사, 요정 그리고 엘프 같은데?」
「뭐야? 아이템 어디서 주워온 거 아니야?」
「자, 조니. 이럴 땐 조니가 납셔야지.」
친구들 가운데 조니 혼자서 이상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뭔일인지 물어보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보통은 이런 생소한 만남을 즐기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런 상황을 반가워하지만 그도 이번 만큼은 왠지 모르게 자꾸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기 싫은 장소로 끌려가는 강아지 마냥 어쩔 수 없이 수상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조니와 그들이 만나서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누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조니가 다시 친구들에게 왔다. 이제 보니 그쪽도 쪽수가 7명이었다. 일단 개인 대 개인이 아니면 친한 친구들끼리 있다가 이런 상황에 맞닥드리면 이쪽 숫자와 저쪽 숫자를 재빨리 파악하게 된다. 여자들은 잘 모르는, 알게 되면 웃는, 결코 사소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사실.
「무슨 봉인 해제를 하러 혈맹을 찾고 있다는데. 잊혀진 섬을 아냐고 물어보길래 난 모른다고 했지. 어디서 장난하냐고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 게다가 저 장신구들이 그저 흉내낸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라면... 아니 그런데 왜 내가 자꾸 저네들에게 말려드는 느낌을 들지?」
「잘 살펴봐. 혹시 변신할지도 모르니까.」
「뭐 공성전이라도 같이 치를까?」
「거대한 운명의 서막이 시작되었군. 쟤들은 오래 전 봉인되었던 잊혀진 섬을 찾아 시공을 초월한 항해를 시작한 거라구. 내가 봤을 때 저들은 아덴의 용사들이야. 아니 붉은 기사단?」
「웃기고 자빠졌네. 엮여 들면 안돼. 정신 똑바로 차려.」
「다가올 거대한 운명을 맞이하라!」
「자꾸 너까지 왜 그래?」
「재밌나자!」
「오 그런데 저기 저 요정인지 엘프인지 완전 멋진데. 성적 매력이 넘쳐.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그쪽 정극에서 사람이랑 쟤들이랑 그런 뭐 그 있잖아? 그런 게 가능할까? 그냥 몰라서 하는 얘기야.」
「아 이런. 정작 찾고 있는 하워드 핸드폰은 나타나지 않고 뭔 나이랑 안 어울리게 코스플레이하는 꺼벙한 친구들이나 만나고 이게 뭐니? 이게 진짜 환상관이야? 환상관이 뭐 이래? 이름만 환상관이네. 이런 젠장. 왜 몬스터는 안 나와?」
「지금 나오는 교향악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런 음악이야.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옅어져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신들의 보물과 신성한 힘이 한꺼번에 휘몰아 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음악.」
「봐봐. 이렇다니까. 너가 방금 말하기 전에 이미 이 환상관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우리들 생각을 읽었어. 미리 예상했겠지. 이미 척하면 척, 외모만으로 동작 딱 하나만으로 눈빛 잠깐이면 뭐든지 5분후 10분후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바닥을 봐봐.」
「어 이거 지도잖아? 자르딘, 피시스, 울라, 라노, 콘누스. 뭐야 이거?」
귀여운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건 좋은 일. 자신에게 활력을 줘 보세요~."
「아 이거 나 미치겠네.」
또 들린다. 이번엔 도톰한 남성 목소리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요. 모험은 계속 될 겁니다."
「(또) 별을 따려 손을 뻗다가는 자기 발아래 놓인 꽃잎마저 놓쳐버리고 말아요.」
「점점.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마법사의 음성이다) 막연한 기대따윈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화영화 주인공 목소리다) 빨리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점점 빠져들게 되는데.」
「환상관. 흡사 하나의 영화평처럼 지어졌어.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네. 영화보고 나서 왜 그런 짧은 1줄 후기 말하잖아. <난 괜찮았는데 친구는 잤다.>」
「환상관이 차츰 살아나고 있는 것 같지 않니? 설마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일까?」
「일단 여기를 지나가자. 이 지역을 벗어나야해. 지도가 그려진 바닥 위에 있으니까 자꾸 이상한 말이 들리고 기분도 이상해지잖아. 마법의 언어에 말려들면 안돼.」
「그러게 아까부터 너무 당혹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길을 가다가 바닥에 버려진 악보나 쪽지, 이상한 글씨와 숫자, 표식, 종소리 같은데 혹하면 안돼. 다 구라고 거짓이야. 모두 (개)뻥! 그 흔하디 흔한 추리소설이나 드라마들 보면 그 다음에 뭔 일이 있을지 다 보이잖아. 뭔가 있어 뭔가 있어, 하면서 따라가다가는 그냥 날새. 환상관? 이름만 그럴게야. 무슨 파란만장한 모험이야 있을려구 이름이 그렇겠어. 환상관 좋아하시네.」
「저기 그림자 세계라고 씌여있는 문이 보이는데?」
「저 너머에는 하워드의 핸드폰은 없어. 뻔해. 뻔할 뻔자야.」
「저기 또 7명 정도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그냥 모두 일반인이야. 그리고 모두 여자야. 게다가 음 이뻐. 조니는 약간 김샜으니 누굴 보내지?」
「보내긴 뭘 보내. 딱 보면 모르겠어? 지금 계속 7이 반복되고 있잖아. 쌩가. 모른 채 해야 된다니까. 이렇게 삼세번 7이 나온 다음에는 틀림없이 7의 배수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냉큼) 그러자.」
그들은 이제 사람이 지나가도 미래에서 온 외계인이 지나가도 그리고 동물이 말을 하고 책과 소파가 걸어다녀도 본체만체한다. 뭐 길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동안 어떤 환상관의 기운이 그들에게 주입되었던 것일까.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어떤 충동적인 또는 극중 배역과도 같은 말을 개별적으로 말하면서 일행이 대화를 같이 이어나가지 않고서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는 건 좋은 일. 자신에게 활력을 줘 보세요~.」아까 들은 말인데, 느낌이 괜찮았던지 다시 반복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무게가 있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흥. 어른들은 다 똑같다니까.」
「그릇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 해도 담을 수 없지요. 사람의 몸과 영혼의 관계도 그러하답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왜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세요. 마음이 약간은 편해질거에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이것도!
뭐 여기까지는 그냥 서로 혼잣말을 하는 분위기인가 보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멈추지를 않는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제 소원.」
「이봐~ 밤이 새도록 즐겨보자구~ 에헤헤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이건 뭔가 안 좋은 쪽으로 계속 나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상한 혼잣말하기도 차츰 잦아들고 멈추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들이 당도한 곳은 어느 칸막이로 임시 설치된 것 같은 백화점이나 마트, 박람회 같은데서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아담한 아가씨가 신생 회사 에너지 음료의 시음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뭐야, 프랑켄슈타인? 그쪽 시장에 큰 어려움없이 안착하기엔 썩 어울리지 않는 제품 이름으로 보인다. 너무 길어. 이상해. 그러나 그래서 먹힐지도 모른다. 그건 사후에 평가하는 게 말을 만들기가 쉽다. 당연한 거라고? 그걸 누가 몰라?
「어머나, 이미 저희 제품을 여러 번 시음하신 분이 자꾸 오심 어떡해요~ 몰라요~.」
「네? 우린 여기 환상관 46번지에 처음 왔는데요.」
「또 예쁜 건 알아가지고. 안경을 써도 예쁜건 예쁜거 아니겠어요?」
「네. 그대의 미모를 저흰 무척 흡모하고 있습니다만 우린 프랑켄슈타인? 이걸 한번도 마셔보지 않았다구요.」
「거짓말! 우후... 어쨌든 우리 프랑켄슈타인을 다른 경쟁사 에너지 음료랑 비교하진 말아주세요.」
「네, 잘 모르겠지만 주의할께요. (몇몇이 프랑켄슈타인 음료를 마신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 여기 근처에 혹시 미용실 기구나 지표면 구부러지는 기법에 관한 행사장을 혹시 아시나요?」
「환상관에 오셨으면 쉽게 쉽게 목적지만 찾아다니실 게 아니라 환상적으로 각 번지수 가게들을 즉흥연주처럼 건너뛰어다니셔야죠. 진정한 환상가는 그런다던데요. 아저씨들은 환상가, 아니에요?」
「아가씨도 잘 모르나본데.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그래요. 모험은 계속될 꺼에요.」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요.」
「벌써 인사하면 어떡해? 언니, 이따 몇 시에 끝나요?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아님 친한 친구와 요즘 만남이 뜸한가요?」
「에이 그만하고 우린 갈 길을 가자.」
「잘 있어요. 귀여운 소녀여.」
「저두요~ 환상가님들! 저기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이렇게 어느 유니폼걸과의 짧은 만남은 끝나고 그들은 또 어딘가로 하워드의 핸드폰을 찾아다닌다.
「어쨌든 대단한 밤이야? 막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청소년 권장 소설같은 기분은 나네.」
「뭐? 벌써 밤이라고?」
「그래 저기 창문을 봐봐.」
「오, 이런!」
「세상에나.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여긴 바깥 세상과 뭔가 달라. 시간이 무척 빨리흘러.」
「그럼 여기 계속 있으면 우리가 빨리 늙는단 말야? 난 인생을 좀더 천천히 즐기고 싶다구.」
「누가 아니래.」
「오 이런 바보같으니라고. 하워드에게 전화해 보면 될 꺼 아니야?」
「으악,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전화 안 받아.」
「아 맞다. 그때 창가로 등대가 보였어. 우리가 처음 이곳에 들어오기 전 봤던 등대말야.」
「오호, 그럼 등대를 찾아가면 되겠네.」
「그런데 등대를 어떻게 찾지?」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은 마크 핸드폰으로 울렸는데 전화는 닉이 받는다. 아니다. 받기 직전이다. 마크 핸드폰은 알람이었고, 닉 핸드폰 소리가 전화가 걸려오는 소리였다.
「뭐야, 발신자로 하워드라고 뜨는데?」
「받아봐. 전화 놓고 갔다고 누가 알려주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래. 받아봐.」
「여보세요. 네? 누구요? (옛날 드라마에서 보듯이 전화기가 좀 컸으면 송신부를 손으로 가리고 말할텐데, 그래도 들리긴 하겠지만, 지금은 상대방 다 들으라고 닉이 친구들에게 말한다) 자기가 하워드라는데?」
「얘 뭐야?」
「여보세요? 하워드세요? 하워드 여기 있는데요.」
「뭔 소리야? 닉! 나야 나. 하워드라구. 누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거야.」
「하워...드?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데. 어떻게 된 거지?」
말이 필요없었다.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도 믿으면 안돼, 라는 명대사가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진짜라는 걸 깨닫는 것 같았다. 고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뒤돌아 보면 안될 것 같아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리는, 당신은, 그대는 살면서 단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알고 있는 타인이 그 타인이란 말인가. 더 이상 뭘 믿고 살아야 하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한번 불러보는 건데. 공주님이라고. 나의 왕자님이라고.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당신을 만나 행복하다고, 너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고, 내가 만일 화가였거나 화가가 아니라도 살면서 한 번쯤 자화상을 그리든 그걸 뭘로든 남기든,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 롤리타였다면 또는 아니었다면, 내 이름은 하찮지만 당신의 이름은 고귀하게 여긴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게 너무너무 더없이 기쁘다고, 거짓말이라도, 뭔가 상대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드는 아늑한 안정감과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가슴 속에 몽글몽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긴장감까지,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지금부터는... 언제까지나... 주어도 동사도 목적어도 불분명한 엉망진창 문장이 뭘 말하는 것인지. 그러나 당신의 님은 어딘가에서 당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기다릴 것이다. 그녀. 어렸을 때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에서 3일간 지냈던 그녀. 그녀가 꼭 남자아이처럼 보여서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린 그녀를 키울려고 집으로 데려갔는데, 고추가 달려있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실화이자 어린시절 각인된 기억을 간직한 그녀. 갸 눈 얼마나 높은 줄 아냐? 라는 말을 듣던 그녀. 날파리가 주위에 얼마나 많이 날리는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그녀. 그러나 변변치 못하고 보잘 것 없어도 내 마음에만 쏙 들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녀. 여자들은 사소한 일을 세심하게 기억하고 챙겨주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렇게 현재를 추억과 미래로 길게 늘여서 정신을 아찔하고 몽롱하게 만드는 하워드의 출현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시작해야 하나 여기서 판을 새로 짜서 시작해야 하나. 자꾸만 생각이 복잡해져만 간다. 아, 인간이 되고 싶다. 너가 찰과상을 입어 피를 흘려본지 오래 되었다면 네 피가 초록색이 아닌가 의심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것이 파란색으로 한 번 더 변했을지 어찌 알겠나. 누군가는 처음부터 사람이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까. 순간 저쪽에서 하워드가 걸어온다.
「이런 뭐야, 삐──삐──.」
「삐─삐─삐─.」
「삐─.」
「쟤 뭐야.」
「너 누구야?」
그들에게 걸어오는 하워드는 핸드폰을 들고서 통화중인 것처럼 보인다. 닉과 아직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쪽엔 하워드가 없었다.
「누구긴 누구야? 나야 나. 하워드라구. 왜 그렇게 놀라는데?」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며 하워드2가 없다는 걸 알고 이 하워드가 그 하워드인줄 깨닫는다.
「너 어디 갔었어?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할 꺼 아니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공짜로 공포영화봤네. 혹평이 하나도 없는 완전 무서운 걸로.」
「이······ 보고 싶은 얼굴. 하워드.」
「오, 대단해!」
「여기, 환상관, 맞네!」
벌써 끝나셨어요? 맞긴 맞는데, 얼빵한 이번 편께서 역시 얻어듣긴 얻어들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여기서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지는 말고. 왜냐하면 안고 있는 게 더 좋은 포근함처럼 읽고 있는 그 상태를 사람들은 보통 더 간절히 바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식사와 대화와 매일? 어쩌다? 자는 낮잠처럼 취미가 아니라 그냥 생활이라고. 누군가는. (워, 어쩌지? 그럼 또 그 다음에, 가 나와야 하는데!) 꾹 참았다가 더 절실함이 긴요한 시공간에서 넌지시 어떻게 다른 의사표현으로 여쭙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정말 몰라서 묻는 질문이다. 언제는 생각하지 말자고 해놓고서. 무엇을. 그런데 왜, 하필, 여기서, 그 말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그래, 가자. 좋다. 괜찮다. 떠나자. 여기서 다 뒤집어쓰겠다. 여기서 모~두 덮어쓰겠다. 이번 이야기를 서둘러 급하게 마무리한 걸로. 허접하게. 마땅히 뒤짚어써야 한다. 여기서. 덤탱이, 아니다. 눈탱이도 아니다. 억울한 누명이 아닌 정당한 오명이다. 다 모두 다 뒤짚어써야만 한다. 모든 뒷담화와 온갖 불만은 이곳에, 바로 여기서! 게다가 이번 편은 객관적으로 봐도 많이 재미없다. 뭔가 나올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끝났다. 인간이 꼭 즐거움만을 위해 읽기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이미 독서에 할애해버린 타인의 귀중한 시간마저 뺏어버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꼭 그렇지만...은 아닌 듯한 타자의 막대한 시간을 딱 훔쳤단 말이다. 그러니 욕을 먹어도 싸다. 뭐 그게 대수란 말이냐. 좋다. 모든 악담과 화풀이와 험담을 이곳에 풀어놓으시라. 다 감수하겠다. 아니, 그래도 싸다. 단, 여기서 풀고 저기서, 당신의 삶에서, 그것이 진지하든 가볍든 1회성이든 그곳에서는, 당신이 잘 살고 있다면 주변을 돌아보고 그게 아니라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된다. 그대에게 건투를 빈다.
그동안 한꺼번에 얘네들끼리만 너무 몰려다녔다. 뭔 특집 하이틴 드라마도 아니고.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 이렇게 끝나면 아무래도 너무 서운하니까 다음편에서는 위에서 누가 말했듯이 이 친구들 각자 쓴 소설을 모두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흠잡는 시간을 갖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