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Blog - 76

Spafinale 2016. 7. 15. 18:21

   ①
   나는 최근에 어느 언덕에 올라갔다. 글을 쓰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접시에 물을 받아놓고 기도드리며 촛불을 켜놓고 그런 분위기에서 글을 서봤다. 그래도 소용 없었다. 대낮에 해변에서 선그래스를 끼고 일광욕을 하면서 모래사장에 엎어져서 글을 써봐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단연코 무엇이 안될 때는 싹 포기하고 조금 쉬는 것이 좋은 방법이란 걸 오랜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푹 퍼질러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그냥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실 그대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첫째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어떤 정량적 데이터와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이상하게 예전부터 차분하게 또 매우 진지하게 글을 쓰다 보면 왠지 모르게 재미난 일들이 발생하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명할 수는 없다. 그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고, 우선은 실행이 우선이기 때문에 곧바로 나는 집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내가 요즘 친한 사람은 문구점 사장 O씨다. 혹시 내가 옛날 썼던 소설에서 문구점 사장이 다른 사람이라고 썼다면 그것도 맞는 얘기다. 둘 다 틀린 얘기가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중간에 주인이 후자에서 전자로 바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최근 O씨와 자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전 이름 '정 원한다면' 현 이름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의 사장 멀더는 전에는 친했는데 요즘 그가 너무 유머감각이 떨어져서 서로 연락한지가 오래되었다. 특히 요즘 그는 호시탐탐 주색에 빠져 있고, 더군다나 저질 댄스를 연습하는 걸 보니 어디 자주 가는 NC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그 인간이 제정신 차릴 때까지 당분간 거리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화가게 Q양, 으슥한 술집 주인 G씨, 골동품 상점 사장 레이디 제인도 뭔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또 다른 동네 친구들은 말이 너무 많거나, 말을 너무 잘하거나, 말을 너무 안 하거나 또는 말을 잘 안 듣거나 어떤 비애와 상념과 과묵한 묵상을 떠올리게 하는 용모라거나 수완이 너무 약삭빠르다, 해박한 지식이 부담스럽다, 엮이면 꽤 피곤할 듯 하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같이 자주 만나고 어울리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근래 부쩍 문구점 사장 O씨와 교제를 했는데, 그런데, O씨가 도시에 일이 있다면서 본격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갖가지 핑계를 대고 도시로 떠나버렸다. 내가 그에게 심하게 <나를 잊지 말아요> 분위기를 피력했을까? 아니면 당신을 위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리오 내가 그렇게 비추어졌을까. 실재 그는 도시에 급한 용무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그렇게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장사가 잘 안 되는 그의 장난감 가게에 별일 없나 한 번씩 들러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공짜로 꺼내 마시거나 갖거나 놀고 싶은 장난감을 아무거나 가지고 놀면 되었다. 그것이 최근 내 일상의 전말이었다. 그런데,
   아차, 그런데 O씨가 도시로 떠나기 전에 내게 간곡한 부탁을 하나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자기의 동생 시몬이 오기로 되어있는데 자기가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나보고 자기 대신 시몬과 놀아달라는 것이었다. 길어야 한 이틀 있다 돌아올꺼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문구점 사장 O씨의 동생 시몬이 도착했다.
   잠깐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그건 무엇이냐면 과연 지금 남기는 이야기가 재미있냐는 것이다. 읽기에 즐겁고 기쁠까? 마냥 재미있을까? 썩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괜찮다. 재미없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건 글을 쓰면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에 근원을 두고 시작한 사실의 기록과 같은 어떤 동굴 벽화와 비슷한 일이기 때문이고, 둘째 무인도에 같이 데리고 가고 싶은 1인에게 들려주는 허무맹랑한 옛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평범한 일상은 이보다 더 재미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득 떠오르는 흥미로울까 하는 의구심은 무시하고 가는 것으로 간결히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시몬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②
   시몬을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시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특별한 취미는 아니지만 그냥 심심할 때 소일하는 정도지만 그와 관련하여 뭔가 특이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걸 얘기하자면 이렇다. 나는 왠지 모르게 주변에 있는 알고 지내는 지인보다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얘기를 했을 때 그분의 반응을 보고 싶고 그것이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어딘가 모르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이 얘기를 했다가는 뭐 그런 걸 가지고 다 놀라고 신기해하냐고 약간 핍박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예상됐다. 흡사 그것과 관련해서는 내가 저명한 미래학자가 된 기분과 비슷했다. 내가 시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이냐면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들이 인터넷 세계에서 이거 저거 구경하다가 클릭 클릭 하다가 어느 일반인의 일상에 관한 사진과 글들을 구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라 내 말은 그 일을 한 다음날에는 꼭, 꼭꼭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진 어플리케이션에 등록된 누군가의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를 구경하면 그 다음 날 반드시 그를 직접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스믹스기를 사서 무슨 쥬스를 만들어 먹은 사진을 올리고, 어디 콘서트에 가서 즐겁게 구경하다 왔다, 강아지 몽군이 내 벼개를 몽땅 물어뜯어서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느 날 산동네 마을에 벽화를 그리러 갔다, 최근 내가 일하는 업계와 관련하여 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아주 묵사발이 됐고 상사에게 호되게 혼났으며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휴가를 떠나기로 계획했다는 그런 내용의 글을 보면 나는 그 타인을 당장 내일 만나게 됐다. 멀더 친구랄지, 터미널에서 미술관에서, 개 운동장에서, 식료품점에서 등등. 정확히 몇 번 만나졌고, 어떤 경우에 선별되어 나타났는가를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뭔가 그런 낌새가 느껴진 이후로 나는 그 패턴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남자에서 여자로, 생각이 새롭고 사진도 감각적이고 어떤 호사로운 분위기나 예술적인 심상이 느껴지는 블로그들에서 단적으로 예를 들면, 다이어트 엑스포 무슨 클래식 비키니 부분 상위권 선수의 단독샷을 찍은 블로그로. 거기서 또 약간 진화했다. 그런 사진들을 찍고 댄스 그룹 개별 동영상을 찍은 블로그를 보면 다음날 무대 위의 사람이 아니라 무대 밑의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어떤 연습생을 찾아보고 모델 지망생이나 열심히 활동하는 조연 영화배우의 홈페이지를 찾아보게 되었다. 혹시 만나게 될까봐. 그러나 만나지는 못했다. 만났다고 해도 인사를 나눌 것도 아니고 몸의 굴곡을 대놓고 감상할 것도 아닌데 괜히 호기를 부렸다. 그래서 다시 나는 일반인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딱 시몬이 나타났다. 내 앞에 나타났다. 하필 O씨의 장난감 백화점에서 캔 맥주를 퍼마시고 있을 때 시몬이 나타났다. 그런데 녀석이 나타나자마자 그런 일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이상한 현상이 지금 사라졌기에 다행이지 조금 늦게 사라졌고, 난 또 그걸 시몬에게 얘기해준 후 사태를 지켜봤다면 역시나 양치기 소년이 되었을 게 뻔하다. 원래는 소년, 그러면 사춘기도 생각나고 변성기도 떠오르고 코메디 영화와 첫사랑과 청춘과 사랑 노래와 청소년 드라마와 연애시가 떠올라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소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양치기 소년이다. 둘째는 몽정. 맙소사! 나는 거짓말쟁이 어른인 것만 같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시몬, 시몬, 시몬을 들먹거려놓고 시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예 이 긴장감, 이 고조되는 궁금증, 어떤 막연한 낭만, 뭔가 감추어진 비밀스런 귀족적 신비감, 어느 단계에 이르러 나타날 당혹스런 황홀감, 내내 기대되고 내내 심심하고 재미없지만 알 수 없는 까닭으로 기다려지는 그 돌발적인 환희,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심층 탐구하고 두근두근 설레고 애타는 마음을 키워갈까? 그럴까? 일말의 감정은 그러고도 싶지만 아무래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들을 것 같아서 참기로 하자. 시몬도 시몬이니까, 무대 뒤에서 뭐 벌 세우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시점에 등장시키기로 하겠다.
   적당한 시점? 기습 키스? 뭐가 적당한 시점이고 어떤 게 시의적절한 신체 접촉이란 말인가.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지금 딱 그가 등장한 것으로 한다. 내가 시몬을 만나는 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그 전날과 전전날과 또 전전전날에는 비가 많이 왔는데 시몬이 도착한 날 그날은 맑게-는 아니고 약간 흐리게 개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시간이 정지된 줄 알았다. 왜냐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서 구했는지 선물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구석에 놓여진 시계가 정지되어 있었고, 거리에 나가면 보이는 대로변 조형물에 붙여진 시계도 정지해 있었다. 게다가 거리에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바람이 일순간 갑자기 정지했다. 뿐만 아니라 새들도 날아오고 날아가지 않았고, 결국 내가 잘못 봤던 정교한 실상 크기 강아지 인형도 짓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하면 시간이 정지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어, 이거 뭐야?> 그러면서. 그때 딱 시몬이 등장했다. 허걱! 뭔가 나는 내가 뭔 죄를 지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잠깐은. 나는 그가 미래에서 짜잔하고 등장해서 막 슬로우모션으로 걸어오는 듯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잠시 후에 사라졌다. 왜냐하면 멋진 옷을 입고, 수려한 외모와 뭔가 고급스러운 분위기, 도저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느낌, 목젓이 없는데 가슴도 없고, 언뜻 보니 반대로 가슴도 있긴 있고 목젓도 있긴 있는 듯 보였는데, 뭔지 모를 고전적이며 복고풍의 귀족적인 고상한 고고함은 갑자기 파파팍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입을 염과 동시에!
   시몬은, 시몬은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그건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이고, 그는 매사 매번 달변가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만 열변가였고, 장난꾸러기였으며, 무모한 도전가이자 영화 주인공식 도망자,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속빈 강정형 탐험가이자 거짓말쟁이에 그냥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물론 미리 도시로 떠나기 전에 시몬이 이렇다는 걸 O씨가 다 얘기해줬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들은 것 같다. 넘어가자. 들은 그대로 시몬은 그랬다. 우선 나는 그의 짐을 내 집에 놔두기 위해 우리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는 우리집을 보더니 굉장히 놀란 듯, 신기한 듯,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제임스, 어떤 모양의 집을 좋아해요? 천혜의 자연 경관 속 여유롭게 살아가는 하늘과 하나가 된 듯한 스타일?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개방적인 콘크리트 주택? 아니면 삼각형의 협소한 대지를 현명하게 극복한 주택? 또는 산뜻함은 더하고 불편함은 빼는, 그러면서도 오직 요리를 위해 주방에 모든 것이 최적화된 집? 목조 주택? 거실 창으로 바다가 보이는 집? 좁은 공간은 어둡다는 편견을 깨는 틈새 주택? 어떤 형식을 선호하나요?」
   「어, 난 청소하기 쉬운 집. 지금 여기! 넌 그런데 건축 관련 일을 하니? 말하는 게 아주 청산유순대? 설마 거짓말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 그럼요. 하지만 때에 따라 감언이설은 적당히 필요한 법이죠. 아, 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에요. 전-여자친구가 그쪽 일을 해서 억지로 습득한 지식이 남아있어서 그냥 써먹어 본 거죠. 헤헤!」
   싱거운 녀석,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넌 몇살이니,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넌 요즘 무슨 책을 읽니, 라고 오랫만에 만나는 부모의 심려를 선뜻 떠올릴 듯한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또한 만나자마자 우리 술 한 잔 하자면서 남자 대 남자로 속 터놓고 대화를 나누자며 사나이의 순정을 자극하는 호의와 어리석음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심기를 밝히는 일도 잘 참았다. 그러나 그는 정녕 매우 특이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옷 입는 것도, 상류층이다. 그는 빈손으로 등장하지 않았고 웬 포도주 한 병을 건네는 의례적인 예법을 생략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나도 심심했고 그도 여기에 놀러온 것이며, 나는 O씨와 시몬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기억했고, 여유 시간 동안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면 그만이며 담소도 나누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내 임무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는지는 차차 지켜보기로 하고 우선 나와 시몬, 우리는 격식을 갖추되 말은 편하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물어볼까, 를 생각했다. 먼저 그와 함께 나는 인근 공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시몬에게 넌 왜 이름이 그 모양이냐, 어디 가봤냐, 여자는 몇 명이나 사귀어봤냐, 너는 사랑을 아느냐, 혹시 너와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어느 불량배와 맞서게 된다면 넌 나를 보호해야 되느니라, 이런 걸 묻고 동의를 구하며 윽박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을 했냐고,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악기 2개 정도는 기본으로 다루고,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으며 꽤 멋지고 바쁜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달콤한 듣기에 좋은 말을 속삭여주었다. 진짜 귀에 대고 하지는 않고. 그는 그동안 몇몇 일을 해봤는데 최근엔 일러스트레이터였다가 갑자기 그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그가 나를 경계하는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그는 무척 조심성을 띄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온정 어린 대화가 싹틀려하다가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 자식이 속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는 거야, 이런 의뭉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시몬에게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라고 물어볼려다가 덜컥 그가 값비싼 음식이나 구하기 어려운 요리를 답하면 어쩌나 하는 측은한 마음 때문에 이렇게 묻고 말았다.
   「게임, 좋아하니?」
   「아니요.」
   「공놀이는 좋아하니?」
   「아니요.」
   「만화 보는 건?」
   「별로...」
   「소셜 네트워크는 좀 하고?」
   「거의... 안 해요.」
   「어때, 스포츠카 운전하는 건?」
   「그것도 별로.」
   「그럼 찻집에서 차 마시기, 노래부르기, 춤추기? 드라마 보기? 에잇, 다 재미없네.」
   「......」
   「이거도 아니요 저거도 아니요. 넌 뭐 좋아하는 것도 없냐? 간식을 주면 낼름낼름 받아먹기만 하는 고양이처럼 대답하는 것도 시큰둥하고 젊은 놈이 뭐 그렇게 기운이 없어? 어휴 이 쪼그만... 등치는 커 가지고 속에 든 건 없고, 아휴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넌 커서 대체 뭐가 될래? 어? 그래 가지고 뭔 큰 꿈을 꾸겠다고, 사랑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이건 말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되는 격조를 갖춘 생각만 했을 뿐.
   그러다 시몬은 갑자기 해변으로 가자고 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햇볕을 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가까운 해수욕장에 갔고, 파라솔 밑에서 엎어졌다. 나는 책을 읽었고, 시몬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날 따라 해변에는 멋쟁이들이 많았다. 나는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가는 곳은 있던 사람도 가버리고 그 근처에 일절 인파가 접근하지 않는 이상한 일을 마주친 적인 있었다. 그런데 시몬은 그와 반대로 사람을 끌고 가는, 끌어모으는 그런 신기한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겐 척력, 그는 인력 그리고 나머지 뭔가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다 시몬은 갑자기 저기 가는 어떤 아가씨가 잊혀진 그녀가 아닌가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그는 그 일을 정확히 3번 반복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삼세번. 처음에는 그가 뭐라고 묻길래 아가씨 두 명이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두 번째는 그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시몬이 계속 추근대고 그녀들을 귀찮게 하자 시몬이 말을 걸었던 일행 가운데 어떤 아가씨가 시몬의 따귀를 때렸다. 철~썩! 세기는 좀 약했다. 그냥 경고성이었다. 그리고 드디여 세 번째는 일행에서 뭔가를 사러갔던 건장한 남성들을 잘 살피지 못한 불찰 때문에 그는 행패를 불러일으켰고,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분위기를 깼고, 험악한 어떤 전조 단계에 이르렀다. 나는 도망칠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급히 뛰어가서 어떻게 어떻게 겨우 중재하고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아무래도 시몬은 허당 같았다. 방금 보여준 행동은 허세였다. 보나마나 뻔한 허식일 것이다. 우린 허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남자였던 것이다. 나는 허상을 꿈꾸고 그는 그 허상을 내게 보여준 소년이었다. 혹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추측은 어김없이 빗나가버렸다.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대충 왜 그렇게 소란이 일었는지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시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을 하고 뭔가 안심을 하거나 또는 반전에 따른 흔한 예기적 술법이 아닌 것이 드러나서 붉어지는 작은 즐거움을 부수적으로 얻어보고자 노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몬에게 간단히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굳이 저 아가씨들을 꼬시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냐고, 왜 갑자기 그런 충동이 일었냐고,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습벽은 후천적으로 익숙해진 것이냐고, 바로 그렇게 물어봤다. 역시 시몬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또 나도 허탕을 치지 않은 것이다. 시몬 왈, 그는 그녀들에게 자기가 개발한 놀라운 화장품을 팔고 싶었다는 것이다. 상품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 놀라운데 최근 들어 매출이 발생하지 않아서 고민이었는데 그걸 해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 돈으로 선주문해서 대량구매를 해놓고, 봉급과 특별 수당을 먼저 챙겼다는 것이다. 그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노화의 방지 비결을, 그녀들의 보디가드이자 남자 친구들에게는 초단기에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주식 옵션 투자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시도했는데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강의실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서 시도하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이 의문이라고 했다. 흔히 아는 상업적 사업 수완에 대한 실망감을 그가 말했으나 나는 '그럼 그렇지' 라는 일상적이고 무신경한 기분에 젖어들지 않고 오히려 얘가 그냥 단순히 여자를 꼬실려고 했던 게 아니었구나, 지금 그는 어려운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대성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미약하나 그 길은 열려있다는 어떤 예상 외의 기쁨을 잠시라도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시몬은 나와 별다른 일 없이 희희낙락하지 않고 뭔가를 찾고, 기다리고, 탐색하며 궁금해만 하다가 시간을 보낸 후 그는 짐을 챙겨서 떠났다. 몇 가지 허례허식을 같이 경험할려고 했는데 약삭빠르게 눈치 채고 도망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야?)

   ③
   그후 나는 O씨의 문구점에 가서 혼자만의 공상에 빠지고 소설 구상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정밀히 기획하고, 어떤 이야기를 쓸까,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무엇보다 일타쌍피를 노려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를 고심하던 바로 그때! 예상보다 빨리, 급작스럽게 문구점 사장 O씨가 가게로 들어섰다. 그는 미리 도착 계획에 앞서 곧장 불시에 돌아오면 뭔가 이색적인 행동을 내가 자기 가게에서 하고 있지나 않을까, 또는 자기가 나를 놀라게 깜짝-쇼를 연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도로 연락없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재미는 없었다. 이걸 가지고 과감하다, 남달리 통찰력이 뛰어나다, 순전히 고도로 발달한 직관력 때문이다, 나는 여지없이 구설수에 말려들었다 라고 하지는 않고 단순히 O씨는 애꿎다, 짓꿎다, 그는 장난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보면 된다. 나도 특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이다. 쓴 미소와 허무함은 남았다.
   그런데 한 가지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 무렵, 문구점으로 어떤 수려한 외모의 우수를 간직한 듯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가슴이 컸다. 그러나 그건 어릴 때 어디에서 살았다, 밀크쉐이크를 좋아한다, 샤워를 하루에 2번 정확히 30분 알람을 맞춰놓고 한다, 팬티가 30개 있고 매일 다른 팬티를 입으며 한달에 30일이 넘는 달의 남은 하루는 노팬티로 지낸다, 와 같은 기호나 타고난 습벽과 어떤 구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살면서 안고 가야할 시선과 어딜 가도 주목받는 부담감은 물론 실지 전방으로 가해지는 압력과 무게와 위-아래로 작용하는 중력 때문에 고생하는 측면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은 정말 브래이저와 같은 남자다. 문제는 그 황홀한 착용감의 브래지어가 금새 탈이 난다는 것이지만. 아무튼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O씨의 동생 시몬이었다. O씨가 장난감 백화점을 비울 동안 내가 잠시만 같이 놀아줘야 할 상대. 꿈의 손님.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인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호의를 베풀고 약간의 호혜를 요구해도 썩 부자연스럽지 않을 사이. 그런데!
   「이거 웃을 일이 아닌데!」
   뭐야? 그럼 내가 아까 만난 시몬은 누구야?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했다. 설명이 끝났다.
   O씨가 말하기를, 그 시몬은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말했던 시몬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시몬이라고 한다. 또 내 동생 시몬은 발음은 시몬이지만 철자와 발음이 유사해서 그렇지 시 - 몽이라고 부르고, 시 - 몽이라고 써야한다고 한다. 영락없이 나 혼자 엄한 사람을 두고 시몬이라고, 아니 시 - 몽이라고 착각했던 거다. 더군다나 아까 그 시몬은 자기가 시몬이라고 당당히 내게 밝히지도 않았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시몬이었는데 시몬이었다. 그가 시 - 몽일줄 알았는데 시 - 몽이 아니었다. 나는 뭔가 가슴 벅차오름을 느꼈고, 시간이 구부러진 듯한 어지러움과 공간이 겹쳐진 것만 같은 개탄, 오락가락한 정신과 어떤 현실에 대한 불신감을 느꼈다. 나 혼자 속이고 속았지만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분명 일정 시간 이전에 그의, 가짜 시몬의 모호한 성정체성에 대해 뭔지 모를 기이함과 애착을 느꼈고, 약간의 기대와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까지 감지했다. 그러나 그건 바보짓이었다. 헛다리 짚은 것이다. 괜히 가만있는 남의 다리를 긁은 것이다. 그것도 피나게, 벅벅! 차라리 그 인간에게 일확천금을 버는 비법에 대해 캐묻고, 나는 가짜 시몬의 제 1호 수제자가 되어서 스승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지금 이 실소에 대한 당사자가 되지 않았음이 어쩌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고, 무척 심란했으며, 허둥대기만 하고 이루지도 못할 꿈만 찾아 돌아다니는 이상주의자가 된 듯한 그런 광증의 주인공 그 표본이 된 듯한 환각에 어느덧 나는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 내 마음은 다시 정상적인 희노애락에 반응할 수 있는 평상심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왜냐하면 진짜 시몬, 다시 말해 시몽, 시 ─ 몽이 간다고 인사하며 떠났기 때문이다. 극구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항상 한발 늦거나, 기왕지사 큰길로 가면 샛길에서 좋은 일이 생기거나, 꿋꿋이 참았다가 딱 한번 옆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칵테일 값을 지불하고 나면 그때부터 모든 제품은 반값 할일이라면서 정문을 넓히는 것만 같다. 반신반의...하지만 뭔가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 듯 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의심할 수 없는 일상성의 원리이긴 하지만, 그러나, 모두 다 감수할 수 있다. 모두 넉넉히 품어 안겠다. 불세출의 블로그 원리를 위해서는. 하지만 간출이면, 쉽게 말해 거의 좋다 만 거다. 응당 열 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 뚜껑 한두 번 열려보나. 원래 사는 건 그런 거다. 골이 깊으면 또 언젠가는 환희와 환락, 유흥과 쾌락의 파도타기를 즐길 날이 오게 되어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는 법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세상이니까. 그나저나 아쉽기는 조금 아쉽다. 그러나 사기는 당하지 않았다. 이제 뭔가 전말이 밝혀지는 느낌이 드는 건 내 행색 때문인 듯 하다. 아까 가짜 시몬이 뭔가 캥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얘는 설득하고 주문을 외우고, 구슬리고 최면을 걸어도 딱 봐도 나올 게 없겠구나, 그렇게 내다봤나 보다. 뭐 잃어버린 게 없으면 그만이지만 어째 약간 기분이 나쁠락말락 하는 쎄한 분위기가 없잖아 있다. 딱히 웃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산을 탕진한 과오도, 기분 나쁜 실수도, 미녀와의 데이트를 놓친 설움도 아닌 듯 해서 괜히 삶에 대한 통합 복잡성만 늘어난 느낌이다.
   그렇게 O씨와의 친교는 별일 아닌 별일과 함께 어느 만큼 휴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후 O씨는 장난감을 많이 팔게 됐고, 웹사이트도 운영하며, 장난감을 직접 만들고 디자인도 한다는 후문이 전해졌다. 특히 어른용 장난감 분야에 심취해서 때론 식음을 전폐하며 시간을 쪼개 쓰면서 거의 상업과 예술이라는 쌍두마차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멀더에게 들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인생의 호시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제 몇의 전성기가 아니라 처음 만난 환희에 빠져서 그것이 환희인지 헛경험인지 분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장난감 백화점은 그야말로 최소한 지금은, 환락궁이었다.

   ④
   한편 그와 반대로 나는 <경사났네 경사났어>라는 찬사와 축사와 꽃다발을 받지도 못하고, 딱히 자축할 일도 새로운 관심사도 없이 심심한 일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엇비슷하게 보내는 시간과 삶이라서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고, 혼자서 TV를 보고, 혼자서 텔레비전을 끄고, 혼자서 책을 읽고, 혼자서 음악을 들었다. 누가 귀찮게 하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동네가 너무, 너무 조용했다. 지나다니는 고양이나 개도 없었다. 이럴 때 찾아오면 반가운 걸로는 많겠지만 그 가운데 딱 두 개만 꼽자면 첫째, 편지나 엽서 그리고 둘째, 누구야 어디 가자 하면서 집 앞으로 뜬금없이 4인승 컨버터블을 친구 세 명이서 타고와서 남은 자리는 널 위해 남겨뒀어 캬~ 하는 거다. 캬~!
   그러나 엽서 켕이는, 엽서는 커녕 엽차도, 엽으로 시작하는 어떤 단어도, 염문도 뭣도 없었다. 물론 글도 안 써졌다. 그렇게 뚱하고 있던 찰나 마침 나는 동네에서 어떤 비밀을 가득 품은 듯한 은둔형 예술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O씨에게도, 멀더에게도 약간 말을 듣긴 했는데 통 아는 정보가 없다던 인물이었다. 동네 주민과도 교류가 거의 없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다니고, 이름도 본명이 실장님이라고 한다. 그 실장님이 뭐가 아쉽다고 나 같은 삼류소설가, 거의 놈팽이에 가까운 날건달에게 초대장을 보냈을까, 모를 일이다. 게다가 초대장도 특이했다. 우산 만한 봉투를 내 차 와이퍼에 끼워놓은 것이다. 그런 일을 직접 할 리는 없고, 나도 수많은 영화와 제법 우스운 드라마를 많이 봤기 때문에 이분도 어디서 본 건 있구나, 교양미가 빼어나고 그야말로 상식을 갖추고 품위가 드높겠구나 라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성 편력은 모르겠고 뭔가 재력이 풍족할 것만 같은 낭만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 재력을 그와 내가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보통 규모에 따라 시골도 시골 1, 2, 3으로 나누어 보면 시골 1, 2도 거의 도시와 비슷하게 굴러간다. 즉 동네 사는 사람도 대체로 타인이다. 누가 어디 살고 누가 가슴에 털이 많이 났고 누가 복권에 당첨됐네 누군 재산이 거덜났네,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시골은 시골 3이었다. 그래서 동네 청년과 중년들끼리 우애가 좋았다. 누구 집 개가 개... 몇 마리를 낳았다네 뭐라네 개인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냈다. 그러나 그곳에 이방인이 나타난 것이다. 기간은 한참 됐다. 하지만 그 신비감이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아서 그, 실장님이 속인인지 기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허당인지 그것을 알 수 있는 정보나 근거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 있자. 멀더 외에 나랑 친한 친구들이 또 누가 있드라. 아무래도 이건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일시적으로 곤두박질쳤거나 내가 좀 더 교우관계에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표로 여겨지는 일임에 틀림없다. 아~! 그래서 실장님이 나를 초대한 것일까? 동-병-상-련? 동네에서 인기 순위가 바닥권이고, 상당히 심심하게 사는 듯 하고, 이를테면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측은지심? 또한 멀더에게 듣기로는 실장님씨는 동네에 정착한지 기간이 꽤 됐다고 한다. 날 찾는 동네 청년들이 별로 없기에 망정이지 살짝 바쁘기라도 했다면 당연히 그는 날 초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기는 동네에 오래 살았는데 여기저기 성금도 알게 모르게 많이 내지만 인색한 스크루지요, 난, 난 뭐 그건가?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괜히 밉상으로 찍힐 수도 있었는데, 더없이 사람들과 친하고 바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름 소설 쓴다고 칩거하랴 일광욕이든 낚시든 새로운 취미가 생기면 하나만 끝까지 하느라 사방팔방 나다니고 나대지 않아서 썩 다행인 일이었고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런데 뭐 선물이라도 사가야 할까? 빈손으로 갈 수야 없는 일이지만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으니 적잖이 난감한 일이다. 내 정보력이 이 모양이라니, 맙소사! 뭐 발이 넓고 촉이 좋다고 글이 잘 써지고 소설의 문학적 상상력이 월등히 뛰어나도록 삶이 새롭고 흥미로워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엄살 한번 피워본 것이다.
   일단 혼자 고민하기에 적적하니까 몇 가지 어려운 점을 풀어놓고 봐야겠다. 우선, 그는 여자가 있고 그것도 젊고 예쁘고, 그런데 거기서 그녀가 날 유혹하면 어쩌지? 어머, 어떡한담? 음, 그건, 글쎄... 그건 그때 가서 보자. 그리고 나는 선물로 꽃다발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위스키 작은 거 한병을 안주머니에 챙기고 분위기를 딱 봐서 꺼내든지 아니면 꺼내지 않든가 해야겠다. 그런 건 살면서 많이 해봤다. 항상 그랬다. 국어 시간에 수학 숙제 하고, 소풍날 탐험을 하고, 졸업식 전날 술 엄청 마시고 그 다음 날 뻗기. 추이를 지켜보고 넘버 쓰리, 불어서 펼치는 사람 크기 풍선 인형을 꺼내든지 말든지 할 꺼다. 그 외에 제 4, 제 5 계속 이어지는 건 일도 아니지만 너무 거추장스러우니까 긴밀히 멀더를 부르든가 멀더가 바쁘면 다른 친구를 부르면 될 꺼 같다. 난 지금 나 초대받았어, 그 기대감과 흥분과 도취감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날이라도 샐 꺼 같다. 동틀녁에 알몸으로 동네 한 바퀴, 세 바퀴 반이라도 거뜬히 돌 수 있을 듯 하다. 하여튼 보면 항상 초반에 기세는 좋고, 초반에 체력도 빵빵하고, 초반에 의욕도 충천하지만 문제는 그게 오래 못간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환경에 말리고 주변에 엮이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더라도 언제나 기분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재설정하며, 한 고비 넘고 나면 여행을 가든 술을 혼자 퍼마시든 재충전의 즐거움을 기다리고 누리자고. 나는 언제까지나 소년이고, 때로는 초딩, 항상 미성숙, 모든 게 서툴고 모자라도 딱 하나 환상 소설의 영감에 대하여 꿈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분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은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오히려 배가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괜히 나의 들뜬 기분을 강조하여 그분의 미스테리함, 정체불명의 실장님의 마법적인 동화적 분위기만 고취시킨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곧 그의 집에 대해서 또 그에 대하여 털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무엇을 거치고 어찌하다가 만났는가, 는 모두 생략하겠다. 나는 실장님을 만났다. 그의 집은 한마디로 데이비드 호그니의 그림과도 같았다. 딱 그걸 모델로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만화영화에서 뚝딱 튀어나온 듯 보였다. 나는 실장님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고 대체 왜 날 초대했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간략히 그에 대해 묘사하자면 이와 같다. 그는 전혀 연예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랑스럽다, 이런 말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도 무척 단순한 성향의 소유자인 것 같다. 나도(독자도) 뭐에 빠지면 하나만 하는데 그는 진정한 남자 같았다. 왜냐하면 방 하나에는 의자만 꽉 차 있고, 또 다른 방 하나는 빈 맥주 캔으로 꽉-꽉 차 있고, 사진첩을 보니 웃고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을 좀 아는 듯 한데 그런 느낌이 있어서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구르는 돌, 롤링스톤즈의 가사를 얘기하니까 겉으로 아는 체 하는데 속으로는 모르는 것 같다. 나도 특기가 수박 겉 핥기니까 그가 지식을 깊게 물고 늘어지면 그것도 별로 좋은 장면은 아니기에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리고 그의 집에 딱히 숨겨지고 비밀스런 뭔가는 전혀 없었다. 괜히 기대만 잔뜩했고, 실망감 엄청 컸다. 그러나 항상 결과가 그럴지라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똑같을지언정 그 패턴에 변화를 줄 생각은 없다.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게 좋다. 바보 같다. 어쨌든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 그는 그냥 동네에서 존재감이 없으니 사람들과 좀 어울려 지내야겠다는 심정으로 나를 불렀고, 자신의 수줍은 성격도 보여주고 호탕한 기질과 약간의 호색적인 마초 성향도 엿보여주고 일부러 빈틈을 많이 보여서 동네 청-장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고, 물장구치는 정도로 수영을 하고, 명화를 감상하고 차후 다시 만나기로 약조하고서 거기서 나왔다. 걱정 말라고, 문제도 아니라고, 어디 그런 게 일이나 되냐고, 누구 누구 누구랑 어울리면 게임 끝난다고, 내가 미리 씨를 뿌리고 잡초는 밟고 열매를 거둘 날짜도 받아놓겠다고 그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괜히 그렇게 그를 구슬리다가 너무 멀리간 듯 했지만 꺼낸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말을 다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을 것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적당히 가감해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역시나 나는 별일 없이 실장님의 집에서 나왔다. 꼭 별일 있기를 바랬던 건 아니었으니 뜨뜻-미지근했다는 그런 감정이 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말했으니 됐다.
   나는 집에서 몇 날 며칠 푹 쉬어도, 일광욕을 해도, 서점에 가고 극장에서 영화를 봐도 뭔가 울적하고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느꼈다. 평범한 주민을 괜히 특별한 신사요, 사연이 있는 남아, 어쩌면 돌아온 탕아일지도 모른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투덜거림을 동반한 답답한 애잔함에서 쉽사리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번 기분을 타면 그 흐름이 꽤 이어지는 게 누가 몰래 우리집에 부적을 숨겨놓은 듯한 기분이다. 보통 나이값 하시는 어른들은 잘, 여간해서 잘 하지 않는다는 사서 고생하기, 그걸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핸드폰 전화번호를 뒤적거려도 그다지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었다. 친구들도 다 멀리 살고, 조금 친해진 지인들도 모두 바쁜 듯 했다. 오늘은 신나는 토요일인데 도통 신이 나질 않았다. 놀고 싶은데 어떻게 놀지 모르는 범생이, 꼭 그것이 된 느낌이다. 그 영화가 뭐였지? 나도 꾀병을 떠안고서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해볼까? 그러다 멀쩡한 사람 진짜 이상해지면 어떡하지? 그건 안 하는 게 좋겠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삼류소설가, 만족한다. 키우는 애완동물이 없으니 녀석을 산책시키다가 우연히 운명처럼 새로운 나의 추종 세력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톰도 없고 제리도 없다. 괜히 동네 산책하다가 문닫힌 동물병원 바깥에서 유리창 너머로 내부를 막 흘낏 흘낏 들여다보곤 한다. 새 옷을 입고 싶지도 않고, 멋진 선물을 타인에게 들이댈 위인도 주위에 없다. 이럴 때 특효약이 있긴 있는데 그건 좀 비겁한 방법이다. 억지로 쓰면 탈난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한 달 또는 일 년 열심히 일하고 온갖 괴로운 소리 여기저기 다 지르고 알리고 그러다가 전형적인 모습으로 슬프게 직장을 때려쳤다면서 평소에 연락 한번 안 하던 사람에게 새벽에 전화해서 불러내는 것. 다 부질없는 짓이다. 괜찮은 직장? 들어가기도 힘든데, 들어가지도 못할 꺼면서 미리부터 들어갔다 때려치울 생각을 하다니, 너무 미련한 짓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난 과거에 좋은 직장에 못들어간던 것이다. 그러나 낙오 때문에 지금 삼류소설가가 된 듯 하니 좋은 일이긴 한데 음 좋은 일이라고... 좋게 생각해야겠다. 뭔가 깜찍하고, 뭔가 매력적이고, 뭔가 두근거리고, 뭔가 막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뭔가 뭔가가 있을 것만 같고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없다고? 그렇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혹시 음악을 듣지 않고 살기 때문에 삶이 이렇게 달리의 그림처럼 녹아내리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이어트는 안 해도 된다. 기가 막힌 음식점은 썩 땡기지가 않아. 새 옷도 귀찮아서 사기 싫다. 만사가 귀찮다. 어디 발 디딜 틈이 없는 인기 폭발 분위기 좋은 행사에나 가볼까, 갈만한 데가 없다. 일단 오늘은 집에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를 보고 술 마시고 그런 후 자야겠다.

   ⑤
   아~ 깨어났다. 꿈을 꾸긴 했는데 그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왠지 모르게 상쾌하군, 어딘지 개운하다, 그와 같은 약간의 고조감을 느끼지 않았고 한마디로 찌푸둥했다. 그래서 나는 불현듯 그게 궁금해졌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침 햇살이 나를 반기고 세상은 아름답고 오늘은 어떤 기쁜 일이, 무슨 즐거운 놀이가,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손님과 신기한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 그분들은 대체 뭔 신경세포가 발달했기에 뭔 놈의 선천적인 기질 때문인지 그렇게도 마음이 둥둥둥 떠다닐까, 약간 의아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러다 말았다. 왜냐하면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많이는 아니고 어느 정도, 어느 정도는 아니고 몇몇, 몇몇...이라도 있었나 모르겠다.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생각나는 사람 하나 없다. 하지만 TV에서는 본 것 같다. 아무튼 십중팔구 그런 꽈는 허당이다. 아니면 사람이 가볍다. 처신이 진중하지 못하다. 입도 무겁지 않다. 남의 허점과 비밀을 사방팔방 다 떠벌리고 다닌다. 아니면 뭘 모른다. 아니면 자기 자랑만 한다. 아니면 말이 안 통한다. 아니면 거울만 본다. 아니면, 아니면? 꼭 꼬마들이 설명을 해주면 조금 귀찮게, 약간 짜증이 날듯 말듯, 슬슬 신경질이 날까 말까 하게 계속 왜─왜─왜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고, 창밖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새소리를 듣고, 동네를 산책하는 강아지와 대화를 나눴고, 시상을 떠올리며, 악상을 추적하다가, 문학적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며 향긋한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렇게 고상한 자세로, 뭔가 햇빛의 각도와 바람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세련된 불만과 어떤 근사한 예술적 착상에 대하여 생각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회사 경리녀 꼬셔서 삐─>라는 제목의 뭔가 음험하고 응큼하고 눅눅할 것 같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란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시선과 관심을 끄는 것만 같은 에로비디오를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폴에게 전화가 왔다. 폴은 내가 최근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다. 녀석과 만난지는 얼마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끌리는 구석이 있고, 다방면으로 재주도 좋고, 성품도 좋고, 말도 잘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좋았다. 인성이 바르다는 뜻이다.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녀석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얘를 만나면 항상 새로운 지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건 어쩌건 그렇게 끊임없이 막연한 새로움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도 뭔가 그럴싸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확률상 잔잔한 가운데 튀는 위인도 간혹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나도 뭔가 바쁘고 젊음에 가까워진다고나 할까, 이 친구와 같이 있으면 환생이란 여동생과 친분을 쌓은 듯 지내게 되고, 회춘이란 시를 지으며, 청춘이란 옷을 입고, 로맨스라는 단편소설도 구상했다가, 무궁무진한 우아함 그런 이름의 특급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나 할까, 그런 도취감에 물들게 되는 그와 같은 신비감이 반짝반짝, 경이로운 설레임도 반짝반짝, 입고 있는 옷도 어두운 면 백퍼센트지만 단추 부분만 반짝반짝 빛나는 최면에 빠진 듯한 경이로움을 아주 극미하게 이끌어 내는 친구였다, 폴은! 그렇다고 폴이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서 썩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라는 말이 아니라, 또 시골에서 지내는 게 썩는다 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 그런 말이 아니라, 쉽게 말해 얘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웃게 된다, 재밌다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즉 폴 때문에 그나마 한동안 줄곧 단독으로 내 우정을 독차지했던 멀더는 아주 자연스럽게 넘버 투로 밀려났다. 또 멀더가 가벼운 찰과상 때문에 병원에 3일간 입원하게 된 것도 그와 나의 브로맨스가 휴지기에 들어간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물론 폴도 멀더와 친하다. 훈남들은 원래 서로서로 친하기 마련이다. 내가 멋진 사나이란 말이 아니라 난 그냥 묻어가는 잔꾀가 어쩌다 보니 후천적으로 생겼다고나 할까. 나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서핑을 해야 하니까, 서핑 보드만은 최고급으로 장만해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빌붙고 살아남는 재주가 저절로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 따지고 보면 멋지고, 우락부락하거나, 재밌는 친구들을 내가 알랑알랑 거려서 친해진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번...이라도 있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없다. 그냥 친해졌던 듯 하다. 다 지난 일이다. 아 이거 이거 사랑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꼭 남자들 사고 친 무용담을 풀어놓을려는 모습과 비슷해졌다.
   다시 돌아와서 폴에 대해 묘사해보자. 그는 정말 명불허전이다. 그는 그야말로 최고다. 그는 못하는 게 없다. 그는 지금껏 싸워서 져본적인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마음 먹은 여자는 지금까지 다 넘어왔다. 꼭 그런 일들이 믿거나 말거나 라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그렇게 띄워만 줄려는 의도는 일절 없다. 왜냐하면 첫째 실제 그렇기 때문이고, 둘째 그렇게 극찬 일색이다가 찌질한 일면이나 소심한 구석과 음습한 습관이나 어두운 실패담이 하나 둘 나오면 찔금 하고 웃기는 반전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좀전에 미리 선포했듯이 나도 그 익살과 인기와 못하는 게 없는 그의 다재다능함에 살며시 묻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폴은 그런 사람이다. 어떤 사람? 설명은 뭔가 장황하게 입에 거품 물고 했던 것 같은데 실상 그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상세한 신상 명세를 하나도 정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름 대면 하나도 모를 정도로 세간의 이목만 주목시키고 오명으로 판명나고 불찰로 붉어질지도 모르는 그에 대한 신비감과 궁금증만 커다랗게 부풀려놓은 듯 하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 지금부터 해명하면 된다. 원래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주곡이 요란한 법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도 하지만 광고도 다 때가 있다. 어디서든 좋은 자리는 비싼 법이고, 장미는 얼굴값을 하고, 전야제와 회상이 더 특별한 법이다. 본편은, 다시 말해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소문만 요란한 그 남자의 잔근육, 알고보면 별 거 없을 수도 있다. 작품에 따라 주인공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상적 작품에 비해 산술적으로 따져 열세에 처해있지만 비교적 그런 작품들이 과거에 비해 많아지는 추세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웬 이상한 영화를 보고 나서 햇볕 쨍쨍한 바깥으로 나오니 아~ 옆에 있는 이 남자가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이구나, 그런 느낌을 자아내는 드라마도 있는 법이다. 최-후자와 전자가 뭔 상관이 있겠냐마는 상어 파도타기가 있다면 롱테일의 특별함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긴긴 연애 끝에 파국이랄지, 내 여자친구가 내 친구에게 넘어가버렸달지, 뭔가 있어 뭔가 있어 그래서 그래서 읽고 듣고 함께 살고 봤드니 결~국 그분은 허당이드라, 그는 허세로 일관됐드라, 그 달콤한 속삭임은 끝끝내 용두사미였드라, 사랑은 영원하지 않드라, 살고 보니 어디 남자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더냐 여자도 어쩐다드라, 그런 깨우침과 직감과 직관력은 처음 만나자마자 또는 한 몇 십 년 살아봐야만 깨닫고 후회막급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뭔가 폴에 대해서 대대적인 서사를 풀어놓은 것만 같은데, 어디 보자, 도저히 그의 비밀스러움만 키워논 꼴이 됐다. (도저히? 뭐가 도저히야? 도저히, 가 왜 나와? 어쨌든) 따로 얘기 좀 해봐야겠다. 남은 계산에 대해서. 뭐 차차 알아가면 된다. 너무 깊게 알고 볼장 다 보고 부케를 던지면 꿀맛과 같은, 하늘 위의 구름이 솜사탕인 듯한, 지나가는 동네 강아지든 뭐든 보이는 건 뭐든 번쩍거리는 황금마차요 낭만적인 회전목마로 보이는 것만 같은 환상감이 비교적 덜 내 삶과 부응할 수 있으니 미리 실망하지는 말자. 내일을 꿈꾸고, 희망의 나무를 심고, 나를 가꾸고, 그분에 대하여 언제라도 미지의 이상을 간직하더라도 또 그와 별개로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자 라는 인생 법칙도 살다보면 아주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폴의 재산 내역과 그가 누구를 사귀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뻥은 얼마나 심한지, 그 비밀이 낫낫이 드러나고 남자의 역할과 자격은 충분한지 그렇지 않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서둘러 어떤 어두운 좌절감과 호흥하지는 말기로 하자.
   자, 폴이 뜬금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내 단짝 1위로 급-부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참 어렵게도 밝혔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절교를 선언할지 그냥 조용히 멀어질지는 몰라도 일단 그와 내가 가장 친하고, 가장 많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니 딱 그 정도로 애상은, 남자와 남자의 애상은 묶어 놓고 제한시키고 이제부터 그와 나의 기쁜 일, 즐거운 사건, 흥미로운 다가올 추억 만들기에 대해 약간은 간교하게 또 과도히 간사하지는 않게 그렇게 간질간질 그대의 귀를 간질여주겠다. 주인님 딸랑달랑! 상감마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성은이 만극하옵나이다~! 하지만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시골 생활이니만큼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런데 옆에 아무도 없는데 자꾸 누가 이렇게 말하는 듯한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냥 한동안 뜸했던 환상이라고 치부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야겠다. 영차 영차!

   ⑥
   어찌되었든 나는 엉겹결에 그 어느 층위의 남자, 그 대열에 덜컥-덜렁 편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폴은 뭐랄까 비록 낙향한 듯 하지만 언제라도 아니, 지금 즉시 영화판에 뛰어들어도 비중 있는 자리를 꿰찰 수 있고,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춤이면 춤, 말이면 말, 단 한 사람이든 좌중이든 대중이든 분명 누군가의 속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난 그의 절친한 단짝이기 때문에, 그 어느 도도한 아가씨라도 폴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내게 문의하고, 내게 호의롭게 살랑살랑 향수를 풍기며, 그 누구도 아닌 나와 바로 나와 친교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걸 진짜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일시적으로 PDI 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고 사전에 밝히는 건 농담도 되고 협상을 하는 탁자에서 이길 마음이 없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무릇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더없이 올바른 멀쩡한 사람도 클라우드 나인에 입성하고 보면 어쩌다 크고 작은 실망감을 발생시키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쓴 소리를 반기고 글을 읽고 뭐 어쩌고저쩌고......라는 삼천포로 나는 절대 빠지지 않겠다.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다만 나는 덩달아 멋진 남자가 된 듯한 기분에 우쭐하고 어깨에 뽕이 들어간 듯한 어떤 권력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종이 한장 차이를 기억되는 농담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덤으로 먹고 살 만큼만 글을 쓰겠다, 먹고 살 만큼만 커피를 팔겠다, 먹고 살 만큼만 과일나무를 키우겠다, 그런 것이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어...... 바로 앞 문장은 문맥상 빼는 게 맞는데... 어떻게 말이 되게 논리적 오류를 교묘히 비켜갈라고 했는데 못하겄다, 이건 좀 어렵다, 그냥 놔두고 슬며시 넘어가야겄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그와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얼렁뚱땅 나 역시 최고의 남자가 된 듯 하기도 했으나 난 무엇보다 주제 파악 하나 만은 잘 한다. 내 할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우정 내 할 일은 소설쓰기, 이렇게! 나는 그것에 대해서만 엄격함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다 이처럼 삼류소설가 생활을 지속한지가 짧지 않았기 때문에 난 이제 어디 가서 월급쟁이 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자영업자도, 무슨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소설을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거의 모두 남의 일처럼 치부되어버린 것 같다. 아 나 이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면서 폴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이 또 내게 조명이 비추어져버렸다.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이제는 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다시 시작한다. 또 시작한다. 언제나 시작이다. 시작만 한다. 그렇지만 나도 할말은 있다. 이제 와서 나도 불현듯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은 나도 그에 대해서 썩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점차 더 많은 걸 알게 될 것이고, 그것과 비례하여 공허감이 커질 정도로 폴이 비루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그를 만나면 무조건 즐겁기 때문이다. 그도 이를테면 다시 만난 괴물도 아니고 나도 <나는 귀신이다> 그런 류의 인간도 아니니까 모든 게 준비된 상태다. 이제 즐거워질 일만 남았다. 속을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좌우지간 다음 순서는 그것만 나오면 된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바로 이거!

   ⑦
   어느 날 나는 나 혼자 살고 있는 우리 집, 초소형 주택에 딱히 필요하지 않는 가전기기를 구입했다. 딱히, 가 아니라 아예 필요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왠지 그 기계가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다. 나는 녀석에게 어느 순간 이미 홀딱 반해버렸고, 참아야 한다는 근검절약 정신과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물품은 곁에 일절 놓지 않는다는 철저한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나의 신-포스트모던적 철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이 먼저 움직였고 손도 저절로 움직였고 귀도 실제로 움직였으며 어느새 점원과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덜컥 그 머쉰을 구입하고 말았다. 나는 알렉스와 케빈이 한때 환상 머쉰인가 환상-개뿔인가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당시 그 친구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그건 나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최고급 진공청소기를 구입했던 것이다, 진공청소기를. 왜 내는 그것을 샀을까? 어째서 필요하지도 않은 가전기기에 흥분했을까? 뭣이 나의 마음을 확 끌어당겼을까? 사전에 어떤 뭔가 의미심장한 광기의 징후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나는 그 일로 인해서 내가 최근에 두 가지 색다른 취미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남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서 그 대화의 문맥을 살피면서 뭔가를 아는, 안목 있는, 광범위한 취향을 고고한 우아함으로 한껏 제한시키는 절제와 단순함의 미덕을 알 것 같은 사람들을 별다른 사심없이 웹 페이지만 보면서 찾고 구경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 옛날에도 간혹 했던 일이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다. 둘째, 온통 마음을 송두리채 앗아가버리는 물건이 있다면, 드물게 그런 소일이나 품목, 신조, 문구, 관심사가 발생하게 되면 그걸 최대한 가까이 놓고 최대한 그 음악만 많이 계속 듣고 그걸 최대한 감상하는 것, 직접 기계를 돌리고 격언에 따르지 않고 뒤돌아서면 잊기도 하지만 일단 뭐랄까 <군침 흘리기>라고나 할까, 밥 한 번 먹고 공중에 매달린 생선 한 번 쳐다 보고─밥 한 번 먹고 공중에 매달린 생선 한 번 쳐다 보고, 맨 빵 한 입 먹고 맛깔스러운 선명한 요리 사진이 인쇄된 책이나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맨 빵 한 입 먹고 맛깔스러운 선명한 요리 사진이 인쇄된 책이나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 바로 그와 같은 몰취미하다가 딱 하나 만난 듯한 취미도 되고, 사랑도 되고, 애증도 되고, 때로는 친구도, 가끔 꿈도 되고, 자주자주 소망도 이상도 선망도 기대감도 동경심도 부러움도 환-상-통까지 모두 되는 가히 만능이라 할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요즘 내가 즐기는 두 번째 취미였다. 간출이자면 <첫째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 일상 엿보기요, 둘째는 뭐든 하나만 하기>. 첫째에 대해서는 게시물을 놓고 친구들끼리 댓글 달아주고 대화하는 걸 보면 이것 저것 다 비추어지고 참 많은 게 공감되고 잠정적으로 (나 까짓 게 뭐라고) 평가하면서 타인의 삶을 유추하며 뭔가 견적을 나도 모르게 뽑게 되니까 어쩌다 그 일에 흠뻑 젖었고, 빠졌고, 즐게게 된 것이다. 둘째는 원래 대동소이하게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것도, 분명,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고급 진공청소기. 줄여서 진-청! 예전 내 친구의 별명도 진공청소기였다. 진공청소기, 구입한 그분을 집에다 모셔놓고 우리집은 그날부터 박물관이요 미술관이며 환상관인 것이다. 내심 각오를 새롭게 하는 거다. 모든 여심을 쏙 빨아들이는 것처럼 착착 감기고, 쩍쩍 달라붙고, 시선을 강탈하고, 단물 쪽쪽 빨아들이며, 마음이 온통 말려들어가는 그런 글을 써야겠다 라는 생각을 매번 새롭게 하게 될 것이다. 일종의 최면 요법이다. 사놓고 한 번도 기계를 작동시켜보지 않고 먼지만 쌓이고 쌓인 먼지를 닦아주기만 하면서. 살면서 내내 남 얘기만 듣고, 남의 글만 읽고, 남의 기계만 부러워하다가 나도 이젠 뭐랄까, <누가 뭐래도 난 나야!> 라는 표어에 심취한 돌아이 또는 드디여 정상인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지? 어느 고전 소설의 작가처럼 나는 말하고, 내 말을 글로 옮기는 조수, 그 두 가지 일을 나 혼자 한꺼번에 할려니까 상당히 힘에 부치는 것 같다. 아, 생각났다. 내가 진공청소기를 샀고, 집에서 매일 매번 그걸 보면서 감상한다는 것까지 구연했다. 어느덧 장편소설이 구연동화로 바꼈다. 그래도 나는 이걸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비록 진공청소기가 인간과 다른 기계지만 나처럼 웬 철들지 않은 어른을 만난다면 먼지를 빨아들이고 청소를 한다는 그 용도와 목적과 그 순수하며 지고지순한 운명이, 진공청소기의 천부적인 숙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구나, 나는 그걸 느꼈다. 썩 대단한 통찰은 아니지만 썩 대단한 통찰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 애들은 몰라도 된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왜 진공청소기 얘기를 꺼냈냐면 집에서 한 잔의 녹차를 마시면서 고혹적인 진공청소기를 탐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짧게 서넛 문장이면 되는데 설명이 길어졌다. 뭐 그럴 수 있다. 살다보면 그분을 고대할 수도 있고, 공부하다 보면 거울 한 번 보고 머리카락 한 번 빗고 맨손 체조 한 번 하고 목 마르니까 물 한 잔 마실려다가 물이 없어 없네 어 콜라 생각나는군 콜라 사러 나갔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오고 그 둘이 회원으로 있는 팬클럽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뭐라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슈퍼스타가 어디로 지금 오신다더라 그래서 공부고 자시고 뭐고 다 때려치고 딴길로 샐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왜 95퍼센트의 자영업자는 실패하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왜 주식인가, 왜 머머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와 같은 <왜 점점점>의 제목과 때로는 <뭐가 답이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같은 책의 제목들 그걸 보고 옛날에는 정말 왜 그럴까, 왜 그렇지, 왜 그렇게 쩜쩜쩜 한지 갸우뚱하고 감화되고 설득당하고 호기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안 그런다. 이젠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절반의 어른들은 책을 안 읽는다. 뻔할 뻔자다. 안 봐도 비디오다. 옛날에는 속았다. 이제는 머리가 커져버렸다. 자만심과 거만함과 건방짐, 과격함 그런 것도 다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늦었지만 알게 됐다. 정말 A를 절실히 원한다면 B는 냉정하게 쳐다보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자존감이 비뚤어지면 보통 정상이 아니지만 예외도 있고 또 비정상에 대한 포용력이든 뭐든 출발은 자존감에서 시작된다는 것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수업료가 들어가는 수업을 다른 말로는 기적, 신화, 전설이라고 하고 어린이에게 동화든지 뭐든지, 어른에게는 각자 하나 둘씩 있을 테고, 그걸 다 아니까 어른들이 책을 많이는 읽지 않는다. 또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애 키우고 어쩌고 삶에 치이다 보니까. 어쨌든 나는 진공청소기를 샀다. 그래서 매일 그걸 보면서 (기존에 알려진 비슷한 단어로) 기도랄까, 뭐 그런 어떤 의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어쩌다 중간에 어른들의 고달픈 인생, 먹고 살 만큼 돈벌기라는 샛길로 주제가 빗나가 버렸다. 때로는 말썽을 피우지만 보통은 귀엽고 정다운 강아지의 목줄을 부여잡고 다시 <인생은 무엇이다>에 대한 얘기를 잠시만 이어가자. 문단을 띄고서!
   왜 진공청소기였나, 를 말했다. 왜 소설과 인문-교양서인가, 말 안해도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몇몇 있기 마련이다. 또 시간은 제한적이다. 이 삶은 내 삶이다. 남의 집 잔치가 아니고 타인의 인생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내 인생이란 말이다. 내 인생을 1인칭 게임의 1인칭 시점에서 글을 읽고 게임을 하는 당사자와 완벽하게 일치시키자. 그것은 그대의 인생이다. 따라서 나는 최고를 추구한다. 진공청소기? 최고급으로! 소설? 고품격만! 사랑? 그것도 역시! 그러나, 그러나! 폴에게 연락이 왔다. 잘은 몰라도 <한 눈 팔자> 뭐 그런 의도로 연락한 듯 싶다. 특정 상품만 고집하고 설명서만 곧이곧대로 따르고 책에서 읽고 TV에서 보고 남에게 들은 말을 다 믿고 다 받아들이는 건 어른이 아니다. 믿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건 어른이 하기엔 뒤늦은 순정이다. 때에 따라서 거르고 흘리고 연기하고 박수만 치고 그건 어른의 일이다. 이론과 실전, 이성과 감성, 교리와 생활, 학교와 회사, 어린이와 어른, 어떻게 보면 대치되는 개념이 너무 많은 것 같지만 끝내 직접적으로 뭔가를 짧고 쉽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다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뭔가 중요한 부분이 있는 듯하고 요점을 기억하고 가야할 부분은 슥 연구와 책임을 독자에게 전가했으니 이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정적······ 잠깐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가기 시작했다. 길게는 멈추게는 못하겠다. 짧게는, 가능함. 폴에게 연락이 왔다. 한 눈 팔자고. 놀자고. 심심하다고. 뭐 재미난 일 없냐고. 그는 뭐 그런 의도로 연락했을 것이다. 사람이 최고만 추앙하고 최고만 가까이 하고 그러면 가식덩어리네, 허영끼 못 버렸네, 사람 변했네, 재수없어 라는 험담을 들을 수도 있다. 얻어들을 악담, 예상 가능하다. 처음 듣는 신기한 말도 있을 것이고, 간혹 일부는 그것에서 색다른 만족감을 느낀다. 앞뒤 꽉꽉 막힌, 고지식하며 제멋데로의 돌진할 줄만 아는, 아무 데나 갔다 들이대고 낄 데 안 낄 데 다 두리번거리고, 뭐만 보이면 다 먹고 마시고 그러면서 최고네 최고 아니네 비싸네 싸네 그렇게 우둔한 개구장이 어른으로 살 수만은 없다. 단짝의 요청을 뿌리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껏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후회? 많이 된다. 그러나 그건 인생이었다. 그래프에서 안 좋은 부분을 싹둑 생략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미화만 할 수는 없다. 어두웠던 지난 일도 엄연히 인생의 한자락이다. 내 인생이란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도 된다. 단! 문장 끝에 그 말만은 붙이지 말자, 옷을 벗는다.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DJ~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노랫말, 난 그것이 좋아서 나이에 안 어울리게 그런 음악도 찾아들었는데 또래 애들은 너무 단순했다. 뭐 자기는 후회를 안 하네 어쩌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신발을 유심히 살피네 어쩌네 그런 말 다 개소리다. 나는 <세상에서 네가 최고야>라는 태도로, <자 웃겨봐> 라는 쥐었다 폈다 조련하는 듯한 장난스런 허세도 포함하여 말해보세요 어린이~ 그런 느낌을 전달하여 폴의 용건을 나는 전달받았다. 뭐 특별한 지령은 없었으나 껀수가 있으니 나오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⑧
   나는 폴을 만나러 <농담 반 진담 반>이라는 공원으로 갔다. 가는 동안 폭우가 엄청나게 왔다. 엄청나게! 현대의 문명에서 과학은 옳다. 그것은 진리다. 또 그것은 다름 아닌 미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전설을 읽고 설화를 듣고 고대 신화든 뭐든 그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폭우는 당연히 대기 현상의 섭리와 결과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 쏟아지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장대비가 웬일인지, 왠지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마치 사람들이 말도 안 되고 하나도 재미없지만 시를 읽는 것처럼, 수학의 기초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계에서 인간이 과학과 별개로 다양한 과목과 언어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것처럼, 흡사 아니라고 하면서 남몰래 선행을 하거나 어른이 됐다고 마냥 쾌락에만 빠져 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예술의 연장선에서 인지하게 되었다. 즉 그 억수 같이 내리붓는 비가 이상하게 대기 현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흘리는 그칠 줄 모르는 어마어마한 눈물처럼 느껴졌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먹먹하며 울컥했다. 속에서 뭔가가 불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폭우를 지나서 저 흐리고 어두운 지대를 지나 폴과 만나기로 한 공원에 이르렀다.
   공원 <농담 반 진담 반>에는 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여인이 그와 함께 있었다. 음악하는 여자일까? 그림 그리는 여대생? 그냥, 쉬는 아가씨? 신부 수업을 받는 여인? 폴을 흠모하는 짝사랑을 들켜버린 비운의 여자? 사랑의 약자? 그들은 보통의 연애를? 아니면 불안한 연애? 혹시 비밀연애? 시시콜콜한 설명은 건너뛰기로 한다. 평범한 대화도 건너뛰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른이 되는 일이니까. 일단 폴이 건넨 첫마디는 이랬다.
   「뭘 그렇게 놀래?」
   우리는 셋이서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찻집에서 창가에 앉아 한잔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학교가 살아있다, 올빼미 시간 탐험대, 우리 개가 학교 가요, 막 그런 얘기를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 아니라 진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동화에 등장하는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차를 마셨고, 차만 마시고 헤어졌다. 셋이 각자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그녀만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난 것이다. 나는 폴이 드디여 남부러울 것 없는 미녀를 얻은 것만 같아서 축하해줬다. 그러나 폴은 그 축하를 사양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녀는 폴이 좋아하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폴을 좋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짝대기는 돌고 도는가 보다. 그녀는 뭐랄까 그날 하루에 본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미모의 여자였다. 그리고 이름은 너무 특이했다. 나는 어떤 여자를 알았다. 예전에 만났던, 뭔가 궁금하고 웃기고 호기심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아서 채팅으로 알게 되어 딱 1번 만났던 어느 여인이 내 기억엔 있다. 왜 딱 1번이었는가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폴이 마음에 들어아는 여자의 이름은 예전 내가 만난 여자의 이름과 정반대 되는 이름이었다. 당시 TV에 많이 나오는 신화라는 이름의 인기 그룹 멤버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전진(난 유명인을 거의 못보는 축에 속하는데 우연히 거리에서 서로 마주치며 지나친 일이 있다), 나와 한때 매우 친했던 내 친구는 전진고, 그때 내가 만난 그녀는 전진해, 그리고 폴이 좋아하는 그녀는 <후진해>였던 것이다. 마침내 후진해 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그녀와 그녀는 뭐는 반대되고 뭐는 비슷하고 그랬다. 그 외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의 소재가 떨어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네에 새로 생긴 술집에 들려야 했다. 왜 새로 생긴 술집이냐? 왜냐하면 새로운 마담은 어떤 스타일일까,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기존에 알고 친하던 술집 사장과의 재회와 새로운 술집 물색하기에서 전자의 기쁨과 익숙함이 후자의 모험을 뛰어넘는 일이 최근엔 드물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별로 재미난 일은 없었다.
   우리는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 이름은 <젠장>이다. 폴은 위스키 스트레이트와 에스프레소 더블을 시켰고, 나는 고급 수제 맥주가 없다고 해서 그냥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병맥주를 시켰다. 폴이 말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달변가다.
   「한 두어 달 동안 해변도로 드라이브와 모래사장에서 비치발리볼을 구경하고, 날마다 술 마시고, 날마다 낚시하고, 날마다 아름다운 풍경들을 구경하고, 무조건 많이 먹고, 미술관도 갔다가 동물원도 갔다가 여기저기 하도 싸돌아 다녔드니 이젠 뭔 생각이 드는 줄 아니? 놀다 지치다 놀다 지치다 또 놀다 지친 후에 드는 생각, 그게 뭐게? 뭘 꺼 같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친구들은 이럴 때 보통 일하고 싶다 라고 하지. 그럼. 그러나 난 그 부류가 아니야. 그럼 난 무얼 느꼈을까? 뭘 꺼 같아?」
   「또 놀고 싶다? 계-속?」
   「(손가락 딱) 빙고! 그런데 중간에 한번 일이 있었어. 어느 호텔에서 지낼 때였는데 호텔 카지노에서도, 바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수영장에서도 마주쳤던 여인이 있었어. 반짝반짝, 번쩍번쩍, 트윙클트윙클, 눈꺼풀 깜빡깜빡 막 진짜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어. 뭔가 기분이 저조할 땐 또 그 반짝임이 사라지고 슥 후광이 비추어졌지. 자동으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자유로운 몽상가인 내게 더없이 적격인 듯한 아가씨였어. 그렇다고 내가 구태의연하게 그녀 옆으로 접근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며, 꽃을 선물하지는 않았어. 평범한 행복을 기반으로 하여 반미치광이처럼 사랑에 빠지고 서정적인 낭만과 신남과 단순한 기쁨을 추구하는 건 이제 애제자에게 모두 전수했고, 일임했고, 전화번호와 내 작업 백과사전까지 모두 넘겼어. 수업료, 내지말라고 했어. 나 돈 많아. 귀찮아. 짜증나. 난 이제 새로운 즐거움 그리고 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 받는 일, 곧 호혜를 즐기기와 다가가지 않고 주변에서 머뭇거리며 내가 마치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 뭐 그렇다고 변태는 아니고. 순수한 넉살과 염원 어린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속인이 아닌 듯 속인이고 싶어한달까, 조금 그런 변화가 내게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녀를 더 관찰했지, 관찰만. 유심히 살펴보고, 추측하고, 혼자서 내기도 했어. 뜨뜻미지근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난 이제 그 경지로 접어들었거든. 여기저기 눈독 들이고, 여기저기 군침 흘리고, 여기저기 친절을 베풀고, 여기저기 내 몸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다가 여자친구를 기분 나쁘게 하고, 해명을 하느라 난색을 드러내고 기분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일, 이젠 지겨워. 그건 미욱한 짓이야. 나 정도면 어~ 나 정도면 이젠 거의 텔레파시를 이용해야지. 돌고래처럼. 그 있잖아, 그 뭐야... 음, 진공청소기! 일명 진-청! 그처럼. 여심을 쏙, 쪽쪽 빨아당기고 끌어당겨서 내쪽에 놔두는 거지.」
   폴은 연극 무대에서 일인극을 하는 것처럼 매끈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화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가 혹시 약을 한 건 아닐까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또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보통은 격식 있는 수트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1954년식 501 빈티지 청바지와 도트 무늬 실크 스트라이프 셔츠에 소가죽 모터사이클 재킷을 입고서 뭔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알 수 없는 의문과 애잔한 추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어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다네 친구. 그녀와의 기분 좋은 데이트를 탐냈지만 꼭 그렇게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어. 나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지. 그녀가 읽는 책, 그녀가 듣는 음악, 그녀가 즐겨 마시는 음료, 그녀가 즐기는 운동, 그녀와 연락하는 사람과 그날 기분은 어떻고 어조는 어떠하며 표정을 살피고, 그렇게. 어느 날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길래 옆에서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들어봤는데 그녀가 경마장에 간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날이 됐고 나는 그녀를 따라갔지. 그런데 그녀가 간 곳은 진짜 경마장이 아니라 스크린 경마장이었어. 그게 다가 아니었어. 매번 보니 그녀는 모든 게 그런 식이더라구. 그녀의 팔뚝에 불독 목걸이 문신은 스티커였고, 눈가와 입가의 점은 가짜였고, 처음에 그녀의 블로그를 보고서 난 그녀가 독서광인줄 알았는데 나중 알고 보니 그건 다 어디서 줄거리랑 남의 글을 짜집기한 것이었고, 무슨 케이프타운과 남태평양 어디 섬에 자주 간다던데 그것도 알고 보니 그건 모두 자주 가는 술집과 미용실 이름이었어. 또 무슨 명문대 이름이 씌여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길래 언어학과나 조류학과 이런 걸 전공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고졸이었어. 고졸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그게 끝이 아니야. 난 그녀가 특파원일 꺼라고 예측했어. 거의 심증이 있었기 때문에 내 추측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지.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니 그녀의 별명이 특파원이었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사진과 글도 전부 그런 거야. 주말이 기다려진다, 아직도 수요일이다, 맨날 어디 가고 싶다, 어디 갔다 왔다, 여기서 살고 싶다, 어디가 생각난다, 뭐 먹고 싶다, 요즘 아주 허영이 물이 올랐어. 잔뜩! 원래 그런 줄도 모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와 온갖 불만족과 뜬금없는 여러 불이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마음에 안 들어! 흥!」
   오늘은 폴이 기분이 안 좋은 듯 하다. 오늘은 폴이 말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소년 어쩌고저쩌고 하드니 정신연령이 초딩 수준으로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 뭔가 멋진 얘기를 꺼낼려다가 결국 끝말은 마음에 안 들어? 흥? 냉소도 아깝다. 웃기지도 않다. 그는 적어도 오늘은 허당이다. 원래 항상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그러나 돈을 빌려달란 말은 못 들어봤다. 두고 봐야겠다. 그는 오늘 김 빠진 맥주다. 나는 지금 신선하고 향긋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녀석이 술이 취해서 조용하다. 나는 그래서 분위기 전환 삼아 폴에게 하나 제안했다.
   「NC... 갈까?」
   「NC?」
   「그래 NC.」
   「뉴 써클? 뭔 불가사읜가 뭔가 신종 미스테리 서클이 어디 옥수수밭에서 새로 발견되었데?」
   「안 웃긴 거 알고 있지?」
   「응. 미안해.」...... 「주변에 어디, 분위기 있는 여자, 없냐?」
   「어, 없어.」...... 「미안.」
   어느덧 대화는 끊기고, 분위기는 비몽사몽, 기분은 얼레리꼴레리, 모험과 오늘의 일과는 어쩐지 망한 듯,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대감과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현실이 못마땅하다면서 NC는 들어갈 때만 기분이 끝짱이라면서 터무니없는 한탄만 쏟아내고 낙심한 듯한 자세를 잡고 시골에 살면서 도시인의 권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별다른 출중한 일 없이 그날 일정은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⑨
   그날 일정이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이거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환상도 아니고 초현실도 아니라 진짜였다. 거의 그것에 버금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버젓이! 나는 정신이 또렷해졌고, 폴도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한마디 했다.
   「놀랍다, 그지 않아?」
   저쪽 탁자에서 늘 똑같은 일상에 힘들어하는 것만 같은 느낌의 어느 묘령의 미인 두 명, 그 가운데 한 명이 막 카우보이가 밧줄을 휙휙 돌리다가 우리쪽으로 던져서 딱 걸렸고 그래서 헉헉거리며 끌어당기는 무언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은 잘못 본 것이겠지 하며 지나쳤고, 조금 있다가 우리는 우리 뒷편을 쳐다봤는데 아무도 없어서 이상해 했고, 좀 더 지나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즉 폴이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네? 저요? 저요? 무슨... 저 말인가요? 저를 부르셨어요? 하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노트북 배경화면과 핸드폰 바탕화면에 자기 사진이나 남자 사진이 아닌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았을 것 같은 어느 아가씨에게. 따라서 지금 이 일은 정확히 이런 대사와 정 반대? 완벽하게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냐고?>
   사람들은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일이 있기 마련이다. 흡족한 일 보다는 불만족스러운 하룻밤이, 최적화된 로맨스보다는 뭔가 부족한 대로 좋았던 연애가, 평범한 인생보다 그 가운데 깨알처럼 묻혀있는 사건과 품행이 흐트러진 장난이며 어떤 비밀의 문을 마주한 것만 같은 작은 일화들이 더 새록새록 떠오르고 기억에 남는 법이다. 왜 그런 줄은 모르겠다. 원래 그런 것 같다. 부정해도 된다. 옹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폴과 나는 2 대 2로 그녀들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녀 둘이 사는 집에 놀러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그런데 거기서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꼭 뭔 일이 있으란 추궁은 그곳에서 실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어설픈 드라마와 농염한 연애소설이 어른들의 이상적인 사랑과 소녀가 꿈꾸는 순수한 사랑과 소년이 동경해 마지않는 뜨거운 격정적인 포옹과 키스와 그 다음에 대한 환상을 다 흐려놓고, 이상한 선입견을 어설프게 주입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이 쌓이고 세상을 어느 만큼 알게 되면 저처럼 아무 일 없이 같이 놀고 하룻밤 남의 집에 얹혀서 눈만 붙였다가 다시 기운을 차린 다음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꼭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 굉장히 많을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런 일을 겪을까. 그게 잘된건가, 잘못된 걸까 또는 나은걸까, 그 얘기가 아니고 말이다.
   폴은 그녀 둘을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정상이었다. 우리도 썩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 아니다. 가만 있어보자... 뭐가 있긴 있었다. 폴이 그녀를 엎고 그녀의 집으로 갈 때 그녀가 폴의 등에 구토를 했다. 그랬다. 나는 그녀가 당나귀인 줄 알았다. 그녀가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마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녀는 폴을 좋아했으니까! 그녀들 얘기는 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왠일인지 뭔가 찜찜하기 때문이다. 폴과 내가 그렇게 품성이 올바르고 단정한 류는 아닌데 어쩌다 우리는 소년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게 뭐 잘못됐나?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피곤할 수도 있고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우리가 항상 늑대도 아니고 하이에나의 탈이라도 써야한단 말인가. 그 판에 박은 드라마를 찍고 전형적인 단계를 여지없이 밟으라고? 차라리 그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니면 그녀들이 우리들 보다 술이 더 센 거든가. 모르겠다. 본의아니게 하룻밤 우리는 포스트모던형 소설을 쓴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둥절하지만 사실이다. 그런 실화가 내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극의 주인공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그래도 나는 우리의 무명 블로그에 올릴 껀수를 건졌다. 나의 내면에서 이런 울림이 여운을 남기고 있다. <블로그가 없었다면 어쩔뻔했어?> 어제 일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사석에서 나눌만한, 흔쾌히 공유할만한 그런 소재였던 것이다.

   ⑩
   날짜가 바꼈다. 아, 하나 생각났다. 엄청 얇은 종이에 날짜 하루만 써있고, 그것이 365장 묶어진 달력이 생각난다. 언제 한 번 그거 구해서 집에 걸어놓고 날마다 찢어보고 싶다. 뜯든 찢든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다. 개운동장에서 우연히 개 몇백 마리를 보고서 뭐라고 어떤 감탄사를 내뱉는 건 어떻게 보면 품위유지비를 벌고 쓰는 것과 별개로 또 의식적으로 참아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달력은 넘겨야 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그 달력을 집에다 걸어놓고 날마다 한장 찢어서 하루는 뭉개서 던지고, 하루는 컵 받침대로, 하루는 메모지로 쓰고, 하루는 씹어먹든가 포장지로 써먹든가 해야겠다. 재미있을 꺼 같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마 이런 생각 해 본 사람,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즉시 실현하면 뭔가 허전하고 억울하며, 자꾸 어 이게 아닌데 이 느낌이 아닌데, 그런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그걸 해보는 건 일도 아니지만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뤄서 난 꿈이 있어 라며 폼만 잡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날이 바뀌고 나는 집에서 쉬었다가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또 폴의 작업실에 놀러갔다.
   폴은 예술가다. 그리고 나는 요즘 폴과 주로 논다. 바꾸어 말하면 동네에서 은근히 둘이 따돌림을 받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과-점퍼가 없으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폴은 완전 종합 예술가다. 못하는 게 없다. 또 폴의 작업실에 오면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내 운동화의 중력을 약화시키는 듯 하다. 그래서 살짝 기분이 고조된다. 오늘은 누드 스케치나 패션모델 촬영 그런 일은 없고 녀석 혼자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일까? 꼭 보면 술도 못마시는 것들이 저렇게 개폼 잡는 걸 좋아한다. 나는 폴에게 나도 칵테일 한잔 만들어주라고 부탁했다. 생소한 칵테일을 주문할 처지는 아니고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간혹 그런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되는 때다. 칵테일이 도착했다. 그리고 폴이 물었다.
   「뭐 할 말 있는 건 아니지?」
   「그럼.」
   나는 그녀에 대해 물어볼까, 옷은 빨았냐, 그날 술값 많이 나왔던데 그녀들이 일부러 너 눈탱이 맞힐려고 짠 것일까,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꺼내서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와 같은 태도와 <왜 웃어?>와 비슷한 용건 그리고 <야~호!>를 바라는 듯한 뭔가 불분명한 전망을 품고서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잘 아니까! 뭘? 성인 여성을 엎고 이동했을 때 드라마에서처럼 절대 가뿐하지 않다는 것을. 매우 숨차고, 매우 헉헉대고, 매우 땀 뻘뻘흘린다는 것을. 완전 중노동임. 완전 제대로 퍼짐. 그런데 폴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 뒤통수에 ...... 그렇게 됐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녀들은 그냥 동생들이야. 그게 다야.」
   「누가 뭐래? 지금 우리가 허둥댈 상황은 아니잖아. 또는 뭐 팍~, 캬~, 웩~, 뷝~, 꺄~ 이런 장난스런 말을 운운하겠니? 사랑과 디지털 카메라의 유사점이 뭔 줄 아니? 뭘 꺼 같아? 나도 몰라. 다만 우리는 그런 쪽이라는 거지, 내 말은. 디카 처음 샀을 때, 그 기분, 알지? 막 이거 저거 다 찍고 올리고 관심받고 기록으로 남기고,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행가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 노는 것 같은 생활. 어느 시점까지는 좋아. 그런데 그게 길게 안 가잖아. 친구들끼리 어디 놀러라도 가면 귀찮으니까 서로 사진 안 찍을라 하고. 나 같은 경우는 돈을 곽 티슈에서 뽑아써도 관광지에서 물건을 잘 안 사. 왜? 귀찮으니까. 어차피 버려야 하니까. 그걸 놓고 주변에서는 자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의도로 내 의견을 표명하는 건 아닌데, 난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하고 또 그 말에 대한 반응을 듣고 보니 그걸 자랑으로 여길 수도 있겠구나 그랬어, 언젠가. 하지만 어차피 <자랑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났으니까 또 난 원래 그게 좋으니까 그냥 계속 하던대로 하면 되는 거지. 단, 하나 주의할 점. 어디서든 지인이든 새로 만난 사람이든 친구든 다 서로 모든 게 궁짝이 맞을 수는 없으니까 반응을 봐 가면서 말을 할 것. 사람들 다 그래. 교향악단 연습 끝나면 어떨 꺼 같아? 다 끼리끼리 흩어져. 누구는 채무 때문에 일 끝난 다음에 곧바로 개인교습하러 가는데 누구는 바람을 피거나 누구는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클럽에 가겠지. 또 친한 사람들끼리도 말하는 거 있고, 숨기는 거 있고, 아무리 친해도 다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건 있기 마련이야. 그렇게 난 대회 기념품이든 관광 상품이든 행사 기념품이든 그걸 받으면 받자마자 버리고 싶어. 혼자 있으면 뭐가 문제겠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면 그 사은품이 내 것이지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면 안되드라고. 그걸 챙기지 않을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친구는 그걸 왜 버리냐고, 목소리가 커지고 약간 심각해지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면서 자기가 대신 챙기더라구. 부부 사이에서도 보면 남편쪽이 뭘 안 버려, 말은 그런다 (빈 물컵에 물을 넘칠락말락할 정도로 가득 채우면서) 이렇게 맹물이 가득차면 쥬스든 맥주든 뭔가 새로운 액체를 채울 수가 없다고 비워야 한다고 비워야 한다고 그래야 새로운 거의 신기한 관심사가 놀라운 무언가가 양질의 호사와 원대한 꿈이 채워질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컴퓨터에 쌓인 어떤 파일들과 집에서 먼지 쌓인 오래된 물건들 게다가 자신의 악습들로 모자라 심지어 찻집 카페 피카소에 묵혀둔 외상값과 어딘가에 돌려줘야할 호혜주의는 그 말과 따로 논다 완전 따로 놀아 말만 세계 몇 대 갑부 실상은 허당, 그래서 계속 보관하고 쌓아둔 잡다한 물건들을 부인이 그걸 몰래 버리고 그래. 나중에 쓰지도 않고 없어진 줄도 모르면서 그냥 무조건 쟁여두고 보는 건데, 각종 그래프 지표로 통계로 구분이 되는 게 있어. 그래도 참 이상해. 내 짐을 내가 관리하겠다는데 그건 온전히 내 관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상류층에서도 그렇고 서로서로 끼리끼리 뭔가 지식의 양이나 취향이 많이 다르거나 예법에서 조금만 차이가 나도 뭔가 그에 따라 기분이 언짢아질 수도 있나봐.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해. 과격한 행동과 일단 비관과 냉소 다음에 불신과 험한 말과 매사 좌충우돌 그 모든 것이 이거 하나면 다 OK야. 그것이 뭐겠어? 뭐긴 뭐야 친구지. 그런데 이거 뭔 얘기지? 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골을 보니 다른 시골과 다른 것 같아. 원래 여기 출신 친구들은 모두 도시로 올라갔고, 우리가 도시에서 여기 시골로 내려와서 우리는 뭐랄까, 어떤 새로운 촌닭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신개념 촌닭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아무데나 막 굴러다니고 막 궁굴러오는 호박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멋진 호박마차에 타고 내일로 떠나는 로맨티스트니까. 푸하하하하하! 나도 내가 뭔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재미난 일이 없어서 그러나봐.」
   「그럴 수 있어. 이해해. 길 잃어버리지 않고 용케 여기까지 잘 찾아왔잖아. 그러면 된 거야. 어떻게, 오면서 뭐 이상한 일은 없었고?」
   「뭐 그러지. 다 평범한 일상이야. 찻집에서 자기들끼리 나누는 말들, 소셜 네트워크에서 하는 말장난 다 그런 것들 뿐이야. 가령 뭐는 없다, 문장 끝에 옷을 벋었다를 붙여보자, 또 월요일이다, 아무리봐도 미쳤어, 슬픔은 아름답다. 그런 애기들.」
   「어쩔 수 없잖아. 아저씨들이 그럼 청춘영화를 찍겠냐? 아니면 주술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겄냐. 그렇다고 <안아줘요>라는 시를 쓰겠니 <너를 사랑해> 이런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희망사항에 대해서 노래할 수도 없고, 남들이 하나 같이 재밌다는 장안의 화제 최고 인기 게임인 실시간 증강현실 앱도 왠지 나는 예술을 위해서든, 내 개성 때문이든, 무엇보다 그걸 해봤는데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때문이든 그렇게 게임이나 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허비할 수도 없다면서 소심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겁만 먹고 있어. 나, 나만 그렇다고. 나만! 오늘도 봐봐. 누드 모델 서주기로 약속했던 여대생, 약속 빵꾸냈잖아. 난 그림만 그릴건데 내가 뭐 지를 어떻게 한대? 커피 사주고, 술 사주고, 뭐 사주고, 돈만 허-천-나-게 들었어. 아 나 증말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네. 이런, 젠~장!」
   폴이 말한 여대생은 저번에 내가 하숙집에서 기거했던 그 대학교에 다니는 어느 학생을 말한다. 우리는 그 말이 나왔으니까, 그래서 뜬금없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불합리하고 불편한 사교와 빌린 돈은 늦게 갚아도 했던 말은 지켜야 한다는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신념에 대해 떠들다가 그녀, 그녀의 이름은 시몬이라고 했다, 시몬을 만나기 위해 그 대학교로 찾아가기로 했다. 대체 왜 말을 바꾼거냐고, 왜 마음이 바뀐거냐고, 따져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 시몬이 그 시몬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⑪
   우린 사실 그곳으로 가면서 조금 설렜다. 박힌 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저, 저기 저분들 또, 또, 또 저 양반들 여기 평균 연령 낮추시려고 오시네, 뭐라뭐라. 그렇지만 우린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린 혹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축제 기간이면 어떡하지 막 그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어떤 긍정적인 간헐적 강화의 드라마틱함을 기대하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간헐적 강화는 뭔 놈의 간헐적 강화? 축제는 뭔 얼어죽을 축제? 그날은 시험 끝나고 무슨 기간인지 방학인지 어쩐지 사람이 유난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난 어디를 가면 싸늘하게 관광객이 빠지고, 반대로 폴은 어디를 가면 인파가 불야성을 이루는데 그럼 이게 그와 뭔 관련이 있을까? 없는 것 같다. 괜히 마음의 준비만 하느라 우린 제풀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아마 폴과 나는 어떤 공통된 의심, 교집합의 음모, 너무 순조로워서 심심한 일상에 대한 대항마적인 의미와 뭔가 짜릿하고 흐뭇한 교감, 똑같은 생각을 서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얘랑 놀면 전엔 재미있었는데 이젠 힘 떨어지고 운이 빠지고 복도 달아난 것일까? 지금 와서 보니 얘는 완전 허당 같아. 너무 철이 없어. 사랑을 몰라. 도대체 뭘 몰라. 따라서 미안하지만 음, 단짝을 이제 그만 바꿔야 할까? 지금이 그때인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걸 말로 하지는 않았다. 또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폴은 몰라도. 난 사실 폴을 우리 무명 블로그에 영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뜻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도 해봤다. 여지없이 탈락했지만. 폴은 모르겠으나 괜히 가상으로 녀석은 엉덩방아 제대로 찍은 거지. 암~! 예전에는 폴을 보기만 해도 재밌고,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녀석이 과자를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난 포식한 것처럼 배가 다 불러왔는데, 지금은 미안하고도 서운하게도 안 그런다. 사실인데 어떡하랴. 혹시 사랑도 이런 단계를 밟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있는 연인끼리 같이 공감되는 미소를 지으면 어떡하지? 난 냉정한 마초가 되는 것이고, 비열한 얼간이요, 한마디로 바보 천치로 찍히는 거잖아? 이런, 개뿔 같으니라고! 간헐적 강화도 날아갔고, 축제도 날 샜는데, 욕까지 한가득 얻어들으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지금 상황에 적절한 대사는 이런 것일까? 에라~ 인간아~ 넌 잘해줄래야 잘해줄 수가 없어~ ......!
   뭐하냐, 어디냐, 뭐 재미난 일 없냐, 오빠 보고 싶어요, 우리도 데려가줘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 오빠, 살판나셨군요, 같이 가줘요, 같이 뭐 좀 합시다...... 이런 말을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연히 폴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 없다. 아~ 나 이거 이거 이 놈의 인기 못 말린다니까~, 이런 말 한 번 해 보고 싶다!
   「이건 꿈일꺼야!」 폴.
   「영화일 수도 있어.」 나.
   「그럼 좋겠다. 또는 중편 소설?」 폴.
   「그만 하자!」 나.
   폴이 말할 차례였지만 가만 있길래 다시 이어서 내가 말했다.
   「응... 그래도 괜찮아. 우리만 술 마시고 노는데 돈 다 쓴 거 아냐. 여자들도 그런다드라. 이때까지 찻집에 쓴 돈 다 합치면 찻집 차리고도 남았을 거라고. 진즉!」
   「그래?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 같은데...」 폴.
   「하기사 지금 이렇게 놀듯이 공부했으면 진작...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지금껏 마신 술값을 모았으면,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아아! 그렇다고 뭐 불행한 것도 아니야. 그럼 된 거네. 굿! 그건 그렇고 그녀에게 연락해봐. 여기까지 왔으면 얼굴 보며 인사하고 차를 같이 마시면서 근황이라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나.
   「응, 그래. 그래 볼까?」 폴.
   그런데 폴이 전화를 걸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는데 그 음성이 나온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넘버 유 헤브 리치드......(침묵)......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하는데?」 폴.
   「요금을 안 냈을까? 아니 그건 당분간 통화를 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번호를 차단하거나 어떤 사정으로 정지해도 그렇게 나오고. 번호를 바꾼 거 같은데. 누드 모델은 커녕 같이 카페에서 차 한 잔도 마실 수 없고, 완전 남남이 된 거네. 아, 어찌 이럴 수가!」 나.
   「핸드폰 집어 던질까? (손가락질, 저쪽으로)」 폴.
   「참어!」 나.
   「알았어.」 폴.
   폴은 그녀를 헬스클럽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헬스클럽에서 그녀가 자기를 꼬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남자는 딱, 막, 팍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폴은 자기를 돌맹이 보듯 대했기 때문이란다. 뭐 어쨌든 폴은 헬스클럽을 옮길려다가 그냥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 우리 동네에는 헬스클럽이 없는데 그동안 폴은 도시까지 원정 경기 다니느라 고생했다. 나는 그만 뺀질거리고 녀석을 토닥거려주기로 했다. 하기야 우리가 만인의 연인이라면 귀찮을 것이다. 운신의 폭이 비좁으니까. 우리가 대학생이 아닌 것, 좋다. 날마다 이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것, 괜찮다. 불현듯 갑자기 지금 그녀에게 연락이 온다면, 이젠 우리가 싫다. 그러나 뭔지 모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멈출 수 없고 뭔가를 하고 지금 현실에 안주할 수 없고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 대하여 마뜩잖다고 느끼는 감정만 남았으며, 그 때문에 움직였고 이곳 교정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녀인지 누구인지 사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다 핑계였고 투정이었다. 그러나 허영과 허세를 동반한 달이 뜨는 시간에 남몰래 체조를 하는 것과 봄에 낙엽을 밟고 싶은 낭만적 충동감은 멈출 수가 없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천만의 말씀. 완전 멀리 있다. 지금 행복하다고 선언해버린다면, 그것은 지속되기도 어렵고 짧은 영원은 커녕 앙증맞은 원대함은 기대할 수도 없으며, 창작의 영감은 다정스레 작별을 고하고, 괜스레 얼빠진 동네 아저씨가 될 것만 같은 사념 때문에 쉽게 이와 같은 수다를 말로 털어낼 수도 없다. 못난이 같지만 못난이가 어때서!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렇게 폴과 나는 학교 잔디밭 그늘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멀뚱히 바라다 보고 있으니 지금 우린 별로 바라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을 설명하는 단어는, 고졸함? 우린 누구, 밀정? 제아무리 재주가 용해도 발각될 일은 발각되고야 만다. 그것도 쏜살같이! 우리는 허당, 은근한 허당이라고! 그냥 허당 보다는 저처럼 수식어가 붙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러나 끝까지 한사코 아니라고 우겨야만 하고, 적어도 독자 한 분 쯤은 그 부서진 환상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하는 우리가 처한 난처함과 피로함을 극구 만류해야 하리라. 우와,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뭔가 홀가분하긴 홀가분하지만 자기애, 완전 쩐다. 못봐주겠다. 재수 없다. 타인의 소셜 네트워크와 남의 우정과 행복과 인생을 괜히 훔쳐봤다. 아아, 챙피하다. 오, 민망하고 부끄럽구나.
   하나 분명한 건 우린 아직 단짝이고, 서로 모르는 부분이 많으며 어떤 망설임의 순간 그것에 대한 소년 같은 동경심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우리는 왠지 모를 기분 탓에 마음이 들떴지만 목마름과 배고픔과 약간 꿉꿉한 날씨를 탓하면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예전에 지냈던 하숙집에 들려보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했다. 난 기분이 이상했지만 폴은 표정이 어두웠다. 그래서 난 남고 싶었고, 폴은 돌아가고 싶어했다. 따라서 난 남았고, 폴은 떠났다.
   나는 다시 짧은 일정 동안 하숙 생활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하숙집에 묶기로 했다.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기존에 많던 학생들은 한 명도 없고 인근 공장 지대던가 무슨 뭘 만드는 어디선가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만 엄청 많았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더 머물러 보기로 했다.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그분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이며 착상이고 시상이고 다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근처를 산책하면서 노을을 봤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게 됐다. 그런데 그 화장지가 엄청 길게 풀어져 있었다. 내가 그 길게 풀어진 화장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땠겠나. 난 허당, 허무, 허영, 허세, 허공, 허탕, 허풍과 온갖 허짜로 시작하는 낱말들에 둘러싸여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구나, 난 도대체 또 뭐에 말렸길래 여기까지 와버린 것일까, 난 착착 감기고 술술 말리는 글을 써야 하는데 그 반대의 어떤 상징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을 보았으니 고개를 돌리고, 눈을 잠시 길게 감았다가, 머리 위로 수증기가 푸~~~쉭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달리 할 일이 없어서 나는 그 화장지가 풀어진 길을 따라가보았다. 그런데 금방 길이 끝나지 않고 화장지가 엄청나게 길게 이어져있었다. 뭔 특수 화장지도 아니고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닐텐데 뭔일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길게 화장지를 따라가다가 나는 예전 그 하숙집의 주인 아저씨든가 할아버지든가 그분이 항상 관리하시고 운용하시던 시추기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하얗던 화장지는 슬그머니 연한 노란색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나는 나는 조금씩 조금씩 정신이 흐릿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 기억은 끊겨버렸다 끊겨버렸다. 뿌연 안개가 짙어지는 것은 감지한 것 같은데 괴상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는가, 말을 걸어왔었나, 중력을 무뎌지게 만들었나 그것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머쉰이 그냥 머쉰은 아니었던 듯 하다. 기괴한 자기장을 내뿜었든가 뭔가 날 홀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서 하숙집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머쉰 앞에서 또 하숙집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의 기억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즉 중간의 기억은 끊겨버렸다. 지금도 그때 어찌된 일인지 그것을 하나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못볼 껄 봐버렸을까. 그래서 내 기억이 단절된 것일까? 그건 정말 미스테리다. 그렇다고 정신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전문용어 몇 마디를 듣는 건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그 분야를 독학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어떻게 달리 알아볼 수도 없고, 점쟁이 말발은 이젠 내게 먹히지도 않고, 이미 알아볼 만한 건 다 알아봤는데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나는 사람은 대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째, 살다보면 이런날도 오는구나 라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를 궁금해하는 친구. 둘째, 나처럼 이상한 일을 겪고도 그걸 설명하지도, 이해하지도, 잊지도 못해서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 나는 그 가운데 명백한 후자였다. 그러나 나는 전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