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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신맨, 맥스 배리(Machine Man by Max Barry).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이렇다. 예를 들면 달라스 사는 어느 2% 부족하고 꺼벙한 청년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최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초인기 특급 인터내셔널 요리사의 퓨전 요리 테스터가 될 수는 없지만 책은 마음의 양식이 분명해. 그래야해!' 그래서 Amazon에서 자신의 독서리스트에 올려진 책을 몇권 주문한다. 근데 책 배송이 늦어진다. 그래서 서점에 들른다. 그곳에서 저번 달라스 시립 도서관에서 본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을 한권 발견한다. 책 표지에 세스 고딘의 추천사가 붙여 있다. '일단 책을 펼치고 나면 끝까지 다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래서 현장 구입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고민할 정도면 읽어볼만 하다는 뜻이구나. 그런데 세스 고딘의 추천사는 좀 오바다. 세스 고딘의 짧은 추천의 말이 맞냐 틀리냐는 어른들에게는 별 관심사가 아니지만 청년과 청소년들에게는 좀 안 먹힐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한번 펴면 책을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라면 그 나이대라면 김용의 영웅문이나 요즘 친구들이 보는 웹툰이나 만화, 게임, 추리소설이 적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부제는 '기계가 된 남자의 사랑'이지만 책의 전체 줄거리는 기계가 되는 남자 이야기 같다. 즉 사랑에 대한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한 이해는 크게 어렵지는 않다. 이렇게 줄거리 요약에 대한 언급 회피는 또 다시 이어가게 된다. 실은 다른 사람들은(전문가들은) 소설 평론이나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보통 그런 평론을 읽어보면 책을 한권 독파한 후에 퇴고를 포함해서 약 1~2시간 정도 걸려서 뚝딱 완성된 결과물 같다. 그와 같은 경력의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라면 자연스럽게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적당히 아니 많이 게으른 일반인이 색다른 관점의 평론(?)을 하나 쓰려면 읽기와 쓰기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아니 같다가 아니라 정말 어렵다. 그들에게는 읽는 중간에 떠오르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기록해놨다가 대충 모아서 분량을 만드는 방식이 어울린다. 그렇게 얼렁뚱땅 포스트가 씌여지니까 헛생각을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Naver, Daum 같은 회사 직원들이 사용하는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면 더 긍적적인 관점의 글이 나오지 않을까? Facebook, Apple, Google, Amazon 같은 회사에서 일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뭔가 글의 품격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구에서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 한 가운데서 태어나 어떤 환경이나 여건이 맞아서 대서양과 노르웨이 해협, 지중해의 낭만을 체험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면 훨씬 그럴싸한 감상문을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최신 풀옵션 맥북 에어를 런닝머신 책상에 올려놓고 집에서 또는 멋진 개패 창가에 서서 포스트를 작성한다면 감상기라는 결과물은 몰라도 글쓰기라는 과정의 폼은 훨씬 화려하지 않을까? 이런 불필요한 잡념들 말이다. 하지만 이건 한 단어로 변명이다. 핑계를 훌쩍 가뿐히 뛰어 넘는 것이 훨씬 멋지다. 그렇지만 자연 냉방(Passive cooling)과 바람잡이탑(Windcatcher), 바람길(Wind path)에 대한 궁금함과 바램은 감출 수 없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 작품, 생명체를 보고서 그것들이 예측가능성이라는 범주 안에 위치할 때 편안함과 익숙함, 안도감, 참을성 같은 보통의 감정을 느낀다. 아닌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이 그 영역을 넘어서는 순간에는 묘한 긴장감과 신선한 코메디를 그 사람들은 감지한다. 이런 가상 공간의 테두리에 대한 이름을 희소성과 의외성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줄거리 보다는 소설에서 밝게 빛나는 부분에 대해서 되새겨 보고 싶다. 소설속 인물들에 쏘냐를 투영시켜 분석한다거나 학구적인 접근... 사실 너무 어렵다. 그래서 대충 괜찮아 보이는 몇가지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첫째, 회사 이름 '더 나은 미래 주식회사'. 팔도 더 나은 팔이고 눈도 더 나은 눈이다. 이 회사 이름 때문에 소설 내용에 올리버 색스 같은 뇌과학자의 학술 이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고 스티븐 호킹 박사의 우주학 식견과 티모시 페리스의 4 Hour BODY에 나오는 인체이론이 거론되지 않아도 소설의 흥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오 회사 이름이 멋지다. 둘째, 주인공의 성품이 레이시와 존 내쉬를 조금 닮았다. 찰스 뉴먼은 레이시와 많이 다르겠지만 약간의 주관성은 꽤 닮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주인공의 꿈 이야기가 틈틈히 나온다. 분량은 적지만 그 이야기가 포함되어서 괜찮았다. 꿈은 거짓으로 꿀 수 없다. 넷째, 사건 전개가 끝까지 다다른 점. 뉴먼은 자기 몸의 기계화를 적정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또한 찰스 외부의 힘이 아닌 본인 의지에 따라서 로봇화가 진행되었다. 즉 영화 ELYSIUM, 아이언 맨이나 600만달러의 사나이, 형사 가제트, 만화영화 독수리 오형제 그리고 서유기에나 존재하는 손오공의 <요구르트-사리-닥터슬램프> 설화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렇게 장점들이 돋보이니까 B급이 아닌 -K급 Trajet 에세이도 만들어진다.
  풍자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사람의 욕망과 인격의 분리, 다층적 자아들의 독립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단백질과 동일한 양질로 마음이 레코 블럭처럼 모여있는데 그 레고 블럭이 새의 깃털처럼 그리고 꽃잎처럼 떨어져나가는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다. 좀더 현실적으로 보면 집과 차와 옷 그리고 성형과 3D 프린터, 구글 글래스 같은 대상들이 그 레고 블럭 원소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겪어보고 직접 사용해보고 체험하고 살아도 되지만 그러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 사람들은 Twitter와 Facebook도 틈틈히 읽어야 한다. 아이와 노는 시간도 아껴야 한다. 강아지와 노는 시간도 필요하다. 영화보기 데이트 횟수의 감소도 북극곰도 남극 펭귄도 걱정된다. 즉 불로초를 갈구하는 정신연령이 낮은 어른이든 불멸의 카사노바든 천하의 난봉꾼이든 그들 모두 자신의 삶에서 직접 경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또한 사람 몸의 수분함량 비율과 지구 지표면에서 바다 면적의 비가 비슷하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꼬집었다고 우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소설은 줄곧 인체의 완벽한 로봇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적지 않은 비율로 사람들은 대체가능한 인력으로 생존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한다. 대체 불가능함에 대한 담화는 너무 낯뜨거우니까 기후 정도가 평화롭다. 환경단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교훈을 얻고 난 뒤에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가 씌여진 티셔츠를 입고 싶은 충동이 문득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꼭 실행에 옮길 필요는 없지만 왠지 멋진 속옷을 입는 기분과 닮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GAP, Guess, Jeep, New Ballance, Fitch(peach)... 하지만 또 일부 사람들은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Harvard 단어가 씌여진 티셔츠도 좋지만 그렇게 보자면 티셔츠의 빈공간을 남기지 않고 텍스트를 기록하는 것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얘기였지만 그냥 그렇다. 경찰들도 정복을 자주 입지는 않고 경찰이 아닌 사람도 정복을 입은 경찰은 거의 못봤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복을 입은 경찰은 오직 텔레비전에서만 본 것 같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Bourne과의 조우는 영화에서나 가능하고 NCIS, MI6 요원은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게 사실이다. 여백의 미는 담백한 반면 밋밋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별로 내켜하지 않았던 SF,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주 과학에서는 미스테리한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간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중간 영역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화이트 엔젤 협업자들도 그 정체성이 완숙해질 때까지 중간 영역 법칙을 직간접 체험하고 어디에선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A와 B의 교집합과 균형감이 중요하다. 영화 링크(2011)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교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영화는 단조이지만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다) 교집합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강아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물이다. 강아지는 후각이 놀랍도록 뛰어나다. 강아지는 질투를 행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하고 잠을 자고 꼬리를 흔들며 사람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러면 사람이 개인가? 아니다. 아이들은 앙증맞게 작은거도 좋아하지만 커다람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또 알록달록한 컬러의 음식을 좋아하고 노는걸 좋아한다. 그렇다면 인구많은 나라의 어른들과 땅이 넓은 국가의 사람들이 모두 어린이인가? 당연히 아니다. 어른이 화사한 색감의 옷을 입고 있으면 애기인가? 아니다. 막 놀기만 하는 어른도 아이인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좀 생각해봐야 한다. 강아지와 사람 그리고 성년과 어린이를 비교해 볼 때 둘다 완벽한 동일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아지와 어린이의 교집합에 대한 결론이 나왔다. 어른, 어른스러운 어른이다.

머신맨/맥스 배리
p.47 나의 뇌가 무려 35년 동안 '다리'라는 요소에 조건화되었으니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솔직히 이게 현실이라는 걸 또 어느 세월에 깨닫는단 말인가.
p.128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로 묶일 자격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숭고한 대의 같은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 관심은 오로지 더 나은 다리를 만들어 갖는 것이었다. 그 덕택에 다른 사람들이 수혜를 받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그것 자체가 내게 동기가 되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이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보조 연구원들이 나를 스타 대하듯 할 때마다 나는 '이봐들, 나는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하는 데 흥미를 느낄 뿐이라고' 하고 고백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어쩌면 다른 과학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어둠에 빛을 던진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도 어쩌면 유별나게 이타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던 것일지 모른다.
p.279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은 대략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설사 가끔이라도 완벽해지기는 어렵다. 사람은 완벽하거나 완벽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는 생물체가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 작용이라는 건 효율적 근사치의 문제다. '충분한가'의 문제기도 하다. 진공은 완벽하다. 원주율도 완벽하다. 단, 생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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