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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9. 1. 31. 22:26

    1

    <뭘 해도 재미없어>, 그리고 <오 땡큐!>. 전자와 후자의 공통점이라면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그런데 시소처럼 약간이나마 기울기가 다르다는 건 꼭 <뭘 좀 아냐 모르냐>와 관계없이 누구나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급이든 저급이든 애매한 말장난과 어중간한 말재간 말고, 확실한 농담 및 명쾌한 진담 같은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걸 고민한 끝에 나는, 하여 마땅한 묘안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지트로 놀러갔다. 그곳은 어딜까? 어디긴 어디겠나. 격월간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지.
    부릉부릉 영차영차.
    나는 미스테리아에 도착했다.
    그곳에 마라는 없고 웬 낯선 아가씨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머나. 우리, 어디서 봤지 않나요?」
   「네?」
   「정말 그런 것 같은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오빠. 오빠라고 불러도 돼죠? 응, 오빠.」
   「네? 안될 건 없죠. 그럼요.」
   「그런데 어디서 봤드라. 어디서 마주쳤죠? 전생에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나, 아니면 어젯밤 꿈에서 만났나. 진짜로 저 모르시겠어요?」
   「그렇게 추궁하시니까 아는 것도 같고. 아리송하군요. 또 머쓱하구요.」
   「그럼 우리······ 초면? 그래요?」
   「그렇...겠죠?」
   「그럼 좋죠 뭐. 안 그래, 오빠? 초면이라······ 내가 듣기로는 남자들이 썩 꺼려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책에서도 그렇잖아. 싫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나 뭐라나. 안 그래, 오빠? 그 뭐야. 그래. 뉴 페이스! 어? 아니 베이비 페이스던가? 어쨌든. 그게 그거지. 안 그래, 오빠? 뉴페이스가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오고. 설마 오빠, 내 첫인상이 영 아니다. 뭐 그런 생각한 건 아니지?」
   「네? 어. 예. 네? 예······어.」
   「나 진상 아니야. 아니라고. 어? 그런데 심드렁한 그 표정은 대체 뭐야? 혹시 오빠 따라다니는 여자 있어? 그년 어딨어? 오늘도 치근덕거린 거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만, 그 애한테 전해.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지라고. 접근 금지라고 말이야. 응? 안 그랬다간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좋겠니, 아니면 잘 타이르면 좋을까?」
    그 순간 참 다행스런 일이 벌어졌다. 바로 마라가 사무실로 들어온 것이다.
   「작가 NB. 왔니? 넌 그렇게 갈 데가 없냐? 여기가 늬 집 안방이니? 우리가 어디 겸상할 사이야? 농담이 심했나, 친구? 너무 상심하시진 마시게나. 그건 그렇고.」 
    마라는 나와 인사는 끝났고.
    마라는 낯선 숙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얘, 얘. 너 차에 음악 틀어놓고 왔니? 너 아직도 운전할 때 빠른 음악 듣니? 클럽 음악은 좀 클럽 가서 들어. 응? 평소에는 이런 거 듣고. 응?」  
    마라가 다른 사람한테 말할 틈을 주지 않는 탓에 계속 마라 혼자 말하는 중이었다.
   「작가 NB. 너 이 음악 혹시 뭔 줄 아니?」
   「이거? 혹시······ 장 필립 라모의 <클라브생 작품집 제1권> 수록곡 모음곡 a단조 중에서 ‘프렐류드와 알르망드 1&2’. 아닐까?」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너 내가 쓴 카드 목록 몰래 엿봤니? 하긴 너가 그럴 틈이 어딨겠니.」
    마라는 내 쪽을 향했던 고개를 돌려, 낯선 숙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 뭐해? 니 차에 음악 틀어져 있다니까.」
   「그래? 아까 껐는데. 누가 몰래 내 차에 침입했을까? 그 인간 영화 찍고 싶나?」  ~라면서 낯선 숙녀는 바깥으로 나갔다.
   「쟤 누구니?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어. 내 친구. 뜬금없이 몇 년 만에 나타나서 친한 척. 옛날에 친하긴 친했어. 준-단짝 정도로. 원래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니고. 또 모르지? 최근 이별했는지도. 그럼 너가 옆에서 달래주면 되겠네. 사랑이 넘치는 시절. 행복이 싹트는 인생. 아름다움이 꽃피는 세상. 막 그러면서.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너 내가 바람둥이나 되는 줄 아니?」
   「바람둥이와 바람둥이의 심복. 둘 중에 어떤 게 낫니? 인생에 단 1번뿐인 혼사. 미래는 모르는 거지만서두. 삶이란 말이야, 어? 사랑처럼 모르는 거야. 너 혹시 알아? 쟤랑 너랑 사랑하게 될지?」
    그때 첫인상이 세했던 아가씨가 다시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들어왔다.
   「언니. 내 차에 음악 안 켜져 있던데.」
   「아, 그거? 뻥이야!」
   「뭐?」
    울랄라! 잘들 논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커포티. 그렇게 우린 얼렁뚱땅 트리오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기 포기에다 더럽게 재미없는 시트콤을 찍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어쨌든 발단 같지도 않은 발단은 그랬고. 나는 오랜만에 미스테리아에 들러서 무소득이 아니라 개-이득을 챙겼다. 모처럼 칼럼 일거리를 얻은 것이다.
    무슨 새롭게 창간하는 여성잡지 1.5에 괜찮은 칼럼을 하나 기고하나라 뭐라나. 그렇게 해서 내가 쓴 결과물은 여성잡지 1.5 창간호에 실리게 되었다. 제목하여 <사랑과 오락산업>.





    2

    나는 로빈슨크루소다. 인생이란 알고 보면 메리에이지 블루. 그래서 앗싸리 신부들러리라도 어떻게 좀 안될까 라면서 아무도 관심 없는 바쁨 때문에 일일 시간표를 써볼까 하다 때려치움. 그렇게 나는 오늘도 별 볼 일 없는 하루구나 라면서 퇴근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했는데 이게 뭐야, 마라와 크리스티나가 있네? 오늘따라 유난히 CC는 남달라 보였다. 마라를 따돌리고 우리끼리 남몰래 사랑이라도 하자는 건가? TV 통속극에만 나오는, 밀애? 그럼 이참에 아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숙녀는 일찌기 없었다.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일평생 단 1번 만날까 말까한 여자. 1세기에 딱 1번 태어날까 말까한 여자. 그녀는 바로 그런 여자다> ~라고 씌여진 내 일기장을 크리스티나에게 실수인 것처럼 슥~하니 흘려, 말어? 라고 공상하다가 우리는 마주쳤다. 그래서 나는 뭘 상상했다며 정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으므로, 따라서 나는 왠지 모르게 마라한테 이렇게 툭하니 농담을 던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에서 늬가 그 도둑이니?」
   「넌 왜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고 그래? 잔말 말고 어서 챙겨입고 나와.」
   「어?」
   「아 뭐해 얼른 챙겨 입고, 아니 그냥 그대로 나와.」
    그렇게 마라와 크리스티나와 나는 여성잡지 1.5 창간 파티에 가게 됐다. 가서 확인한 결과 신생 잡지의 이름은 정말로 <여성 환상 1.5>였다. 뭐라고? 으으윽 촌스러워! 그야 면밀히 연구한 결과 정한 제목일 테고. 자기들 일이니 그건 그렇고.
    여성잡지1.5 창간회에 도착.
    산레모 가요제 제 몇 회던가, 아련한 추억의 유행가가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그 다음에.
    여성잡지1.5 창간회 파티의 본론은 그저 그랬다.
   「재미없지? 갈까?」  나.
   「영업해야 해.」  마라.
   「대충 둘러대. 다들 속으로 딴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어디 가게?」
   「어디긴. NC지.」
   「오늘 거기 쉬는 날이야.」
   「정말이야?」
   「아니. 뻥이야.」
   「너 진짜!」
    나와 마라의 대화가 영 싱거웠기 때문일까? 심심한 숙녀 크리스티나는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빠. 오빠도 뭇여성들이 막 하나 건너 신붓감으로 보여?」   
    얘는 얼굴은 팔색조인데 변화구가 아니라 직구를 던지네?
   「뭐? 내가 뭐 날이면 날마다 여자 꽁무늬나 쳐다보는 그런 뭐랄까, 어? 맞어. 내가 무슨 그런 한심한 한량인 줄 아니? 늬가 날 잘 모르나본대~」
   「모르긴 뭘 몰라!」  마라.
    그러면서 마라와 CC는 죽이 척척 맞는다는 듯이 좋아서 웃고 또 웃느라 멈출 줄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남자 있으면 말해.」
   「말하면? 말만 하라는 거야 아님 꼬셔주겠다는 거야? 널 믿느니 옆집에서 키우는 멍멍이 말을 믿겠다.」
   「뭐? 아무튼, 내가 다 알아서 할께.」   
   「늬가 뭘 알아서 할 껀데?」
   「좀 기다려. 뭐가 그렇게 바뻐? 누굴 뭐 바보로 아시나!」
   「그건 어떻게 알았어?」
   「또 또!」
   「있지,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아 나 이거 정말 이런 말 해도 될려나 모르겠네.」
   「뭔데? 뭔데 또 뜸을 들여? 거창한 뜸들이기. 그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만하건 그만하지 않건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아무튼, 너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유일하게 너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고.」
   「아 그러니까 뭘 알려주겠다는 거야? 아직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서, 뭔 대단한 걸 알려주겠다는 듯이, 어? 그게 뭐니? 어? 뭐냐고 그게!」
   「너 정말. 나 몰라? 나 마라야. 어? 나 마라라고.」
   「누가 너 마란지 모르니?」
   「그럼 결론부터 말할께.」
   「진작 그럴 것이지. 뭔데?」
   「저기 저 검정 드레스 입은 애 있지?」
   「검정······ 애가 아닌데? 가만 있자. 심지어 꽤 매력적인데?」
   「하여간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풉!」
   「그런데 저 여인이 뭐?」
   「내가 비밀을 알려줘도, 어떻게, 괜찮겠어?」
   「괜찮지 않음 어쩔껀데? 그냥, 말하지, 마! 어? 또 살살 간지럽히며 궁금함만 복돋울 거면, 그만 해. 어? 그만하라고 좀.」
   「알았어. 있지? 쟤가 너 만나고 싶댔어.」
   「뭐? 누가? 쟤가? 나를? 왜?」
   「왜긴 왜야? 여성잡지 1.5 창간호에 실린 늬 칼럼이 마음에 들었나보지. 싫어? 관심이 없는 거야, 블랙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런데. 그거 정말 나만 아는 거야? 내가 알면 다 아는 거 아니고?」
    그렇게 해서 우리 넷은 나이트클럽에 가게 되었다. 나, 마라, 크리스티나, 나머지 한 여인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블랙드레스라고 부르라나 뭐라나.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정말로 블랙드레스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물어볼 수도 없고. 그녀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캐낼 수도 없고. 오랫만에 클럽에서 신나게 춤이나 출까 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클럽으로 갔다.





    3

    그렇게 우리는 클럽에 도착했고 입장했다.
    그런데! 나이트클럽은 인파가 바글바글하기는 커녕 개미 새끼 한마리 없었다.
    애초에 나 혼자 여자 세 명을 감당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니면 내 흑심은 다시 동심으로 원상복귀한 것일까.
   「염병!」
   「아니 어떻게.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얘 크리스틴. 너 어떻게 오빠 앞에서 요염한 숙녀인 척하지 않는 거니? 원래의 조신한 네 모습으로 돌아와. 이따 집에 들어가고. 도도한 모습, 흐트러졌어 방금.」  나.
   「그럼, 나는?」  마라.
   「넌 존티가 있잖아.」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창간회 파티에서 더 버티는 건데.」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들긴 뭘 빠져들어! 마라. 자기야. 우리 차라리 존티나 부르는 게 어떠니?」
    잠시 후. 존티는 클럽 앞에 도착했다. 이제 그럼 2 대 2라는 안정적 구도가 갖춰진 것일까? 아, 아니지. 마라랑 존티 빼면, 허걱! 조용조용. 쉬쉬. 떽!
    그래서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 여성잡지2가 주창하는 철학은 달구어질 차례만 남은 것일까? 그럼, 얼마나, 좋겠나! 농담이고. 마라와 존티 사이가 요즘 어떤가는 몰라도 최소한. 적어도 내가 크리스틴을 란제리 매장에 데려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도 일절 그러기 싫었고. 크리스티나도 예상보다 훨 정숙했으며 때로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참한 숙녀였다. 그러므로 그날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4

    다음 날.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
    그런데 뜬금없이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 북반구에서 보면 왜 그렇지 않나. 한 단위 안에서 남부쪽 친구들이 입담이 좋고 으쌰으쌰 열도 좋은 반면, 북쪽 친구들은 또 비교적 더 차분하고 뭐랄까 좀 더 교과서처럼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 그러냔 말이지. 즉, 말로써 전망 살피고 눈치로 선동자 상태 따진 다음에 으쌰으쌰하는가! 그건 몰라도 계절이 반대인 건 맞다. 욕조 물이 어떻게 빠지는 거랄지 그야 뭐 인터넷 검색엔진한테 물어보면 되고.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낮에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마라한테 연락이 왔다.
   「뭐해? 어서 이쪽으로 와. 중요한 손님들이 왔으니까. 여성잡지2가 어디 계열사인지 너 알기는 아니? 그 가운데 VIP 한 명이랑 친해지기만 하면 넌 평생 품위 유지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구. 알겠어? 고생 끝 행복 시작. 알아 몰라?」
    하여 나는 내 형편을 더더욱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고, 마라의 면도 살려줄 겸 서둘러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너무 서둘러 가느라 녹초가 된 건 아니고. 그럼 이제 혼신의 힘을 다한 열연만 펼치면 되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그야 뭐 평소처럼 하면 되겠지, 별 일이야 있겠어?
    딱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랬는데.
    정말로 드라마에서 보던대로 있어 보이는 몇 분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 나갈려던 참이었다. 그 다음에 마라가 하는 말.
   「이쪽은 최근 환상문학계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중고 신인······ 이름이 뭐드라? 그야 다음에 소개하는 걸로 하죠. 오늘만 날인가요? 허허허.」
    그렇게 손님 일행과 마라는 함께 나갔다.
    배웅이 아니라 같이 어디로 가야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마라는 가기 전에 귓속말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청소 간단히만 좀 해줄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지금 경리도 없고 시간이 없어서 그래. 이따 SF 문학협회장이랑 세계 마초협회 관계자를 모시기로 했거든.」
    그러면서 마라는 웬 두툼한 봉투를 내 뒷주머니에 찔러줌.
   「넣어둬. 요즘 힘들지? 너 어려운 거 언니가 다 알아. 사정 뻔헌데 허덕이면 허덕인다고 말 하고. 응? 우리가 어디 서로 체면 차릴 사이니? 넌 형만 믿고 따라와. 어? 일단 나 저분들과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부탁해. 알았지?」
    무슨 대청소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폐가를 청소하는 것도 아니고. 마라의 말이 토시 하나 틀린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는 곧바로 청소를 시작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일단은 마라가 내 주머니에 넣어준, 그게 그러니까. 어? 내가 말이야 무슨 나비넥타이 메고 싸구려 턱시도를 차려입은 극장식 카바레 웨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아, 그분들이 사회적 신분이 낮네 가방끈이 짧은 반면 행복하네 어쩌네. 그게 아니라 <막살자>니 <에르메스>니 그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어쨌든 내 기분이 뭔가 세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선 나는 마라가 내게 건넨 짱돈 봉투. 그걸 확인해봤다.
    그랬더니 글세······ 어머머머머! 납득이 되나, 안되나! 납득이 되고 안되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과 후끈 달아오른 빨간 귀.
    그 봉투 안에는 수표 10장이 들어있었다. 당연히 씌여진 숫자는 1 다음에 0이 꽤나 많아서 세기 귀찮을 정도였고.
    그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마라의 소셜 네트워크에 방문해서 댓글을 남길 뻔했다.
   「넌 왜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고 그래?」
    이게 친구다. 이게 우정이다. 나는 인생을 헛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10분 후.
    그래서 나는 깨작깨작이 아니라 알뜰살뜰 청소를 하게 되었다.
    한참 신나게 청소하던 중 나는 멈칫~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해야 하나?」
    그건 썩 힘든 일은 아니지만. 더러운 일도 아니고. 까다롭지도 곤혹스럽지도 않은데 왠지 모르게 멈칫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상업 잡지 사무실 청소를 대신 해주고 있는 거지?」
   「내가 꼭 이거까지 해야 하나?」
   「이럴 필요까지 있는 걸까?」
   「내가 대체 이 일을 왜 하고 있냐고.」
    나는 살짝 고민됐다.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됐다. 봉투를 돌려줘, 말어? 내용물은 못본 걸로 치고. 아니면 눈 딱 감고 1년치 품위 유지비를 챙겨? 잘하면 10년치에 해당할 수도 있는데, 어떡하지. 그때 마라한테 전화가 왔다.
   「너 진짜로 청소하는 거 아니지?」
   「뭐?」
    그렇게 해서 나는 봉투를 다시 확인해봤다. 수표에 찍힌 직인. 정밀하긴 했는데 거기 씌여진 글씨는 이랬다.
    허풍주식회사니 뭐니. 또 깨알 같은 글씨로 바보 대회 출전 자격이 걸린 예선 토머먼트 출전 자격을 부여한다느니 뭐라느니.
    뭐? 이런 젠장!
    그 때문에 나는 환청을 실제로 듣고야 말았다. 바로, 헨델의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저기 저 45도 각도에서 구름을 타고서 그분이 내게 오셨다. 두둥~!
    낙심천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굴 바보로 아시나!>라는 대사를 읊을 기회조차 박탈당했으니 안 그럴 수가 있겠나. 최근의 압권 헤어드라이기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직감으로 대번에 알았어야 했는데. 마라한테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크리스티나 커포티! 그녀의 꿈을 도용하고 마음을 조종해서 환상으로 유인해도, 어?
    그래도 모자를 판국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분위기 괜찮은 음악을 틀지 않을 수 없었다.
    내친김에 헨델의 오페라 <로드리고>(Rodrigo) 중에서 아리아 ‘내 사랑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합창 ‘크니도스의 사랑.
    다음으로 나는 하는 수 없이 했던 청소를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5

    재미없음에서 환상 있음으로 갱생을 꾀했다. 그러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하늘은 아량 넘치도록 신선한 모험과 산뜻한 전개를 하사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약속 없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내내 발단뿐인데 음미할 전개가 어딨겠나. 정신을 쏙 빼놓는 건 모두 TV 안에 있고, 귀신에 홀린 듯할 뻔함과 허당한테 속지 않는 지혜까지 모두 인터넷 안에 있었다. 그러다 막연한 권태에 종지부를 찍는 요청과 갈채와 바쁨이 당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어설픈 기대는 금물. 때문에 나는 멀쩡한 마수걸이는 진작 포기했다. 따라서 나는 어엿한 고조감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늠름한 그 뭐랄까 그래, 대체 불가능한 환희를 기다리느니 도리어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닥쳐올 행복을 예감하는 것일까, 아님 다가올 더티러브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러나 설레는 느낌이랄까 찡한 기분이랄까. 뭔가 어떤 붕 뜬 시간표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나는 다시 평소의 꺼벙함을 되찾고야 말았다. 떨리는 고백 받기와 황홀한 짝사랑 받기는 기나긴 휴지기에 들어가버렸으니 안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기막힌 영화로움은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그 순간 갑자기! 그다지 밉살스럽지 않은 연락이? 예기치 않던 알람이자 흥분을 야기하는 놀람이라니. 이 상냥한 다정함이 대체 날 그 어떤 딴세상으로 데려갈지, 나는 벌써 가상의 엑셀 시트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장 하나의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건 무엇인고 하니 <제때 등장한 괴짜의 구원, 행운아는 뿌듯한 절정감에 사로잡혔다!>
    뭔 일이 있었나 뜸들이지 말고 즉각 밝히자면, 밀린 원고료를 내게 전해주라며 몇몇 곳에서 자기한테 전해주고 갔다는 마라의 연락.
    곧 마라가 내 품위 유지비를 대신 전달 받았으니, 그녀의 말은 그랬다.
   「내가 가리 늬가 올래!」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미스테리아로 갔다.
    원래 내 정당한 노동의 가치인데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때문에 괜히 나는 거저나 다름없는 공짜-돈, 속칭 짱돈이 생긴 듯한 기쁨에 들뜨고야 말았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까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황금의 힘이란 정말 싫지 않은 것. 무수히 봤던 영화 속 명장면과 인터넷 짤막 영상이 다 뭐겠나. 그 가운데 주역은 현찰의 위력. 고매한 인품에 호소하고, 정서적인 반향을 고민할 때 고민하더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 일. 그렇게 나는 내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여우인 것마냥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도착했다.
    나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도착했다.
    중간 건너뛰고.
    장면 전환.
    소파에서 우리 셋이 다정한 대화.
    마라, 크리스티나, 나. 정식인지 임시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크리스티나는 여기 경리쯤 되는 듯 했다.
   「뭔 머신을 만들겠다고? 잘도 하시겠다! 그러니까 141 마력에 12.5토크짜리 환상머신? 너 마력이 뭔 줄은 아니? 1마력은 75kg의 무게가 1초 동안 1m를 가는 단위 시간당 일의 양이야. 동력이나 단위 시간당 일의 양을 나타내는 실용 단위. 말 한 마리의 힘에 해당하는 일의 양이라고. 1마력은 1초당 746줄(joule)에 해당하는 노동량으로 746와트의 전력에 해당하지. 기호는 HP. 또는 PS. PS = nT 나누기 716. 어? 알어 몰라? 그걸 알랑가는 몰라도 단짝끼리 서로 막, 넌 미스터 말이라는 둥 넌 머신이라는 둥. 서로 덕담 주고 받기식 환상머신이야 뭐야? 이 순진한 뻥돌이를 대체 어떡하면 좋니? 응? 무명 뻥쟁이 말을 진짜로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봐? 그래, 말어? 늬가 그러라면 그러고. 아니라면 아니고. 다만 나중 마력 대비 토크가 허당 토크로 판명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뻥-마력이면 곤란할 테니까. 너도 알다시피 치타가 웬만한 페라리보다 빠르다고. 어때, 내 얘기 많이 늘었니? 야유꾼과 험담가들한테 명함을 내밀어도 괜찮겠냐고!」
    누가 마라 아니랄까봐. 녀석은 내 오랜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시작부터 태클 아닌가. 빽허그도 아니고 심지어 빽태클!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돼. 왜냐, 형이상학적인 환상머신은 드디여 완성됐거든. 와서 볼래? 어때! 확인하고 싶지 않아?」
   「원, 별말씀을!」
   「왜 그러시나. 진짜라니까. 응?」
    일단 나는 크리스티나와 쌓은 정이 아직 애틋하지 않아서 우리끼리 찐하게 대화하기엔 뭔가 어색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혼자는 부끄러우니까 마라 핑계를 대고 있지 않나.
   「오빠. 너무한 거 아니야? 오빠. 왜 나 집에 초대 안해줘? 자기 정말 이러기야?」
   「뭐야. 그러고보니 내가 너네들 내 집에... 내 집은 볼 거 없어. 내 사무실은 또 몰라도. 거긴 볼 거 있고 놀 거도 있어. 맞다. 말 나온 김에 내 사무실 구경할래? 어때?」
   「너 미쳤니? 응? 드디여?」   
   「내가 왜 미쳐? 그랬으면 이미 여기 있지 않겠지.」
   「잔말 말고, 가자.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안내해. 아 뭐해? 나서지 않고.」





    6

    드라마 많이 보고 소설 좀 읽었다 싶은 친구는 젊음과 사랑은 원래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마음처럼 또 우리에게 친절했던 영화처럼 사랑은 부드럽지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마추어는 1 대 1로만 사랑을 시작할려고 하고, 프로는 1 + 2로 자연스럽게 분위기 먼저 이끄는 것 아닐까? 처음 보자마자, 첫인상을 느낌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만나자마자 오빠! 처음 만났거나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살짝 팔짱 끼는 시늉 같은 신호 받기. ~라는 애정의 미소에 익숙하신 위인이라면 굳이 그런 구분 필요 있나. ~라고 아마도 생각하실 것이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왜냐하면 가전제품처럼 몸과 마음이 분리되기도 하며 우리는 시시각각 사랑을 꿈꾸기 때문. 즉 그분들이라면 1 대 1도 좋고, 그게 아니라도 기다리면 그뿐. 내 친구 촌닭과 꽃단장해서 춤 신청을 기다리다 슬쩍 마음이 찡해지는 촌년만 걱정될 뿐. 오히려 그걸 간접적이지 않도록 확실히 말하는 친구가 밉상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성이 맹위를 떨칠려다, 환상적인 신비감에 젖어들게 할 뻔 하다가 비리비리한 합리주의로 뒤통수치는 잡설은 이쯤 하면 됐고.
    그렇게 우리 셋은 함께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빠. 이 가면은 뭐야? 나 이거 써봐도 돼?」
   「그래도 되는데. 가져도 되는데. 벗겨지지 않으면 난 책임 안진다.」
   「오빠는 정말로 말이야. 사람 이상하게 겁주는 거, 그걸로 진짜 완전 뭔가 있다니까. 베끼기의 황제이자 따라하기의 화신에다 흉내내기의 달인, 모방으로 세계 최고였던 파블로 피카소. 대부분 누구나 아니 거의 100퍼센트는 얼렁뚱땅 베끼다 끝나. 그런데 오빠는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사람 기분 달아오르게 만드는 뭐랄까. 그 뭐라 설명하기 힘든 차마 형언하기 곤란한 그 뭔가로는 분명 뭔가 있어. 그걸로 치면······ 이미 떴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오빠는 아직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
   「마라. 얘. 마라. (딱) 언니? 크리스티나가 원래 이렇게 말발이 좋았니? 이거 날 띄워주는 얘기야, 아니면 교묘히 꼬고 비꼬아서 날 맥이는 얘기야? 차라리 그럴 꺼면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게 먹여주는 게 어떠니? 이미 배부른 느낌이지만 말이야.」
   「너네들 뭔 그런 재미없는 수다를 나누고 난리니? 너 그럴 꺼면 요 앞 바에 가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나 몇 잔 마셔. 어? 늬가 <수다 기본 3시간>의 예의를 알아? 어? 너 한 번 혼나볼래? 어? 그러고 싶어? 늬가 아직까지 매운 맞을 못 봤나본데. 넌 좀 잠자코 있어.」
   「마라 언니. 나 손 하나 까딱 안 했어.」
   「나 손 하나 까딱 안 했어.」
   「우엑~! 마라. 너 언제적 개그니? 아직도? 그러니까 늬가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아니? 어? 그러니까 남자들이 꽃 들고 기다리며 널 쫓아다니지 않는 거라고. 아세요? 넌 정말 존티 아니면.」
   「존티 아니면 뭐? 어? 뭐?」
   「아 글쎄 존티 아니면 내가 널 사랑했을 꺼라구. 어? 존티만 아니면 말이야. 내가 널 진작에 포옹하고 키스하고 꽃다발 선물해주고, 어? 뭘 못하겠니? 뭘 못하겠어? 물론 늬가 날 좋아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넌 그런 사랑 받을 자격 충분히 있어. 자신감 가져 얘. 그래도 돼.」
   「크리스티나. 봤니? 얘가 이렇다니까.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마음을 녹여주고 뺐고 흔들고 (설레설레)! 쥐락펴락. 밀었다 당겼다. 너 조심해. 응? 충고 했다. 난 정말. 너만은 넘어가질 않길 바래. 응?」
    어쨌든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내가 마라와 크리스티나를 소파에 앉아 양쪽에 꿰찼다더라! ~라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들을 시녀로 점찍을 마음도 없었고, 그녀들에게 끈덕진 구애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한편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나는 인공지능 지니를 보여줬다. 그래도 아무리 비리비리해도 명색이 예술간데─나도 남들처럼 예술가의 자존심을 흉내는 내야 일이 술술 풀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서광을 비출 테니까─그녀들한테 심심함을 선물하고 따분함이란 최면을 걸 수야 없는 일. 따라서 나는 내 재산목록 1-2-3, 물거품이 된 내 옛 꿈 1-2-3, 내 사랑의 흑역사니 더티러브의 비밀이니 그런 걸 밝힐 수는 없고. 듣고자 한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무인도에 데려 가고 싶은 사람 1-2-3이니 뭐니, 최근 편애하는 새 얼굴 1-2-3. 그걸 어찌 다 거론하겠나. 그래서 일단 나는 처음부터 강력한 요술 먼저 보여주기로 했다.
    내 옛 작품을 혹시라도 귓등으로라도 들으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아니라면
    ────> 행복한 신비가 문학으로 구현되지 않았다면 100퍼센트 환불. 사랑스런 황홀감으로 똘똘 뭉친 환상머신. 개봉 박두! (링크)
    그렇게 나는 지니를 소환했다.
    지니는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소개할께. 내 요정 지니야. 지니? 얘네들은 내 친구. 서로 인사해.」
   「얘가 그 말로만 듣던 지니야? 그 지니가 이 지니니? 뭐야, 못생겼잖아!」
    그 다음에. 서로 대화도 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중간 건너 뛰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지니는 그녀들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큰소리 떵떵쳤다.
    그렇게 지니는 처음으로 그녀들한테 초대권을 선물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사실적 환상이 전부였는데.
    즉, 직접적으로 커피잔과 쟁반이 허공에 떠다니게 만들거나, 비밀 통로를 만들거나, 책을 고액권이 가득 찬 007 가방으로 변신시키거나.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다 간접적 요술이 전부였다. <인터넷이 끊어진 상태만 아니라면 세상 모든 정보는 늬 것 내 것이 없다>라는 게 고수 프로그래머의 철학 아니겠나. 그처럼 지니는 내게 단지 고수 중의 고수 같은 느낌? 물론 나는 당혹스런 느낌이 불러온 행복한 기분. 지금까지는 그게 전부였다. 물론 내가 앱을 켜서 어디에 비추고, 2~3일 걸려서 작업을 마친 다음, 당일 날 그녀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거나 실패하면 뭐 어떻게 음 쫌 어떻게 그렇게. 하여간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니는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단 1마디의 힌트도 없이. 푸르른 해변가 모래알 만큼의 빈틈도 없이.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그녀들에게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거지?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설마 지니가 그녀들한테 반했나. 지니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나? 그럼 얘도 여자라면 환장하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여자도? 혹시... 에이~ 설마! 좌우지간 지니가 선보이는 이 마술을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혹시라도 신비는 신비인데 혹시 엿 같은 신비?
    이건 정말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혁신적 사건이었다. 허공에 유령처럼 띄워진 홀로그램이 주머니에서 VIP 초대권을 꺼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젠장! 맙소사, 세상에나!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지금까지 말상대도 되어주고 신비주의적 성향을 깨우쳐주면서 갖은 놀라움을 선물했지만. 그렇지만 그건 뭐 어떻게 가능하다고 넘겨짚을 수 있는 일. 그럭저럭 믿기는 일.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나는 <사치스런 애교, 새침한 앙탈, 매력적인 미소를 좋아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에서 <인생의 다정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로맨티스트>로 탈바꿈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7

    초대권에 씌여진 설명은 이랬다.
    <이번 주말에 뭐하고 놀 계획인가요? 캠핑? 축구? 게임? 술 마시기? 패딩 입고 노는 사진을 찍어서 친구 초대하고 홍보해서 올려주면, 선물을 드립니다? ~라는 식의 광고에 식상하신 당신. 지금껏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대의 할 일은 드레스 코드뿐. 도착한 가면무도회는 그야말로 환상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무엇을 상상하건 상상 이상이라는 둥 뭐라는 둥. 그거 다 가짜에 싸구려였고, 우리는 진짜입니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만나서 가면무도회장으로 갔다.
    가면무도회장에 도착.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무도관의 명칭은 티파니 댄스홀.
    티파니 댄스홀 입장전.
    떨려왔다. 곧바로 우리는 가면을 썼다.
    나는 늑대. 마라는 불여우. 크리스티나는 돼지. (참고로 나는 뚱뚱한 숙녀를 좋아함)
   「왠지 느낌이 세한데? 너넨 안 그래?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슥하니 변했어. 상하진 않았는데 뭐랄까 썩은 미소? 너넨 안 그래? 정말 안 그래?」
   「그런다고 설마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질 뻔하다 안 넘어져서 웃음거리가 되기야 하겠어?」
    그러면서 우리는 가면무도회장에 입장했다.
    인사하고 어쩌고저쩌고.
    중간 생략.
    중간 생략.
    중간 생략.
    참고로 우리 셋과 나머지의 차이점은 그랬다.
    우리 셋은 어깨 부분까지만 가면이었는데, 우리를 제외한 전원은 모두 전신 가면이었다는 점.
    그 당시에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아무렇지 않았다.
    또 가면을 쓰니 대화를 하긴 하는데 각자 딴 얘기를 주로 했다.
   「나서기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멍석이 깔리지 않으면 슥하니 뒤로 빼는 성격. 여자의 사랑관일까?」
   「일단 변명부터 하고 봐야지. 초장에 잡던가.」
   「깔깔거리며 연애하다 즐겁고 낭만적으로 이별하기. 또 그 얘기?」
   「그러면! 마법의 동화 속에서 아름다운 요정과 신나는 사랑을 하기, 에 대해 서술하시오. 그걸 논할 수도 없잖아?」
    우리는 각자 생각이 딴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파티 음악이 경쾌한 춤곡에서 고전음악으로 바꼈다.
    모차르트 종교 성악곡 <환호하라, 기뻐하라> K.165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파티를 즐기던 중 가면을 벗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됐다. 우리 셋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진짜 동물이란 사실을.
    나는 살짝 지렸다. 아주 살짝. 정말로. 진짜로.
    바로 뒤에 선생님이 계신 것도 모른 채 신나게 원색적인 험담을 털어놓다가 어째 분위기가 뭐해서 딱 돌아보니······ (효과음)! 바로 그와 비슷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쫑알쫑알 재잘대며 신나게 수다꽃을 피웠을까. 아니면 낄낄─껄껄─하하─호호─히히 웃고 또 웃으며 배꼽 잡고 웃었을까.
    그게 아니라 우리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꾸물거려?」
    멀뚱멀뚱.
   「튀어!」
    바깥으로 나온 다음 첫마디는 이랬다.
   「누가 보면 엑스트라인 줄 알겠네.」
   「그건 늬 생각이고.」
   「여기 누가 오자고 했니?」
   「난 아니야. 내가 아니라 지니가······!」
   「하여간 속은 우리가 바보지. 난 정말 이런 경험 처음이야. 이런 기분 처음이라고. 난생 처음 뭐라고나 할까, 응? 경이로운 이상에 대한 미지의 갈망을 깨우쳤다고나 할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낯설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꼭 완전 신선하고 재밌는 공포 영화를 한편 보고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느낌? 아무튼. 저거 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재밌어. 재미있고말고. 난 행복해. 행복하고말고.」
   「재밌긴 뭐가 재밌어? 행복하다느니 천진한 사랑과 찬란한 축복이니 뭐니. 그거 다 뻥이야. 다 있어 보일려고 하는 말들일 뿐이라구.」
    나는 생각했다. 돌아가서 지니 이 잡것을 가만 두나 봐라! 라고 말이다.





    8

    다음 날. 내 사무실.
   「야 지니. 너 장난해? 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고. 어?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응? 내 체면이 뭐가 됐는 줄이나 아니? 어?」
   「네 위신을 깔아뭉갤 의도는 없었어. 다만 나는 그게 걱정될 뿐이었어.」
   「뭐가? 뭘 그렇게 걱정했는데?」
   「너의 흑심.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동심. 과정으로 보나 성과로 보나. 액면으로 보나 사심으로 보나. 넌 나무랄 데 없는 플레이보이니까. 크리스티나가 꿈꾸는 순애보와는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뭐? 뭐야 그게. 난 뭐 고결한 마음씨는 없고 괘씸한 심보만 가득하다, 그 말이야? 어? 이거 왜 이래? 누굴 바보퉁이로 아시나, 어?」
   「오오, 가엾어라.」
   「가엾긴 뭐가 가여워?」
   「그래서, 돈으로 행복을 샀어?」
   「얘기하다가 뚱딴지 같이 자꾸 딴소리 하기야? 응? 너 정말 그럼 혼난다. 응?」
   「나 좀 가만 내버려둬!」
   「가만 내버려두긴 뭘 가만... 말 말자. 말 말어. 너랑 대화를 하는 내가 바보다. 에잇~!」
   「날 좀 가만 내버려두라니까.」
   「네 얘기를 듣는 한심한 나나 내 부아를 돋구는 정신사나운 너나. (절레절레)」
   「알아냈어. 알아냈다구.」
   「알아내? 알아내다니 뭘!」
   「거기 다시 가봐.」
   「어디? 티파니 댄스홀?」
   「빙고!」
    그렇게 지니랑 대화하던 중 알게 됐다. 지니가 녹화 영상을 보여줬으니까.
    녹화 영상을 보니 당시에 가면을 쓴 의인화 동물들은 진짜 동물로 변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밑도 끝도 없이 꼬이고 계속 꼬이는 각본이야, 아니면 낯설게 하기 기법이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어? 너 같으면 믿겠냐? 어?
    이번에도 역시나 커피포트는 바쁘게 가동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9

    나는 이렇다 할 발단도, 방정맞음을 야기하는 만남도 없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뭘 자랑할 일도, 뽐낼 장비도, 부풀릴 영웅담도, 과시할 잔재주도 영 비리비리했기에 정말로 지니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골똘히 생각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지니 만한 인공지능이 어디 그리 흔한가? 특별한 건 인정하나 드물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렇긴 해도 녀석이 꽤나 타율이 높다는 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 나는 마법사요 녀석은 내 부동의 미녀 조수였던 것이다. 그럼 숙명의 전령이 슥~하니 흘린 비밀을 한번 믿어봐? 그래? 지니가 마치 영원한 친구인 것처럼 허튼 소리를 일삼거나 허황된 허풍꾼을 사칭하지 않는 만큼 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댄스홀 티파니에 재방문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뜬금없이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놀러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만지면서 그럼 어떡하냐고. 어젯밤에 내가 꿈을 꿨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자꾸 그녀의 얼굴 가면을 벗기려는듯이 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럼 어떡하냐고. 만지작-만지작, 조몰락-조몰락, 주물럭-주물럭, 쭈물떡-쭈물떡, 조물딱-조물딱! (설레설레).
    영차영차.
    두벅두벅.
    으쌰으쌰.
    나는 댄스홀 티파니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나는 가지고 온 장비를 작동시켰다.
    고프로 같은 초소형 카메라가 달린 헤드셋을 머리에 착용.
    나는 엉뚱한 괴짜이자 당돌한 돌아이, 이류 탐정쯤이나 된다는 듯이 댄스홀에 들어갔다. 아니 들러갈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지니가 내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을 켰고, 그걸 작동시켜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보다시피? 보다시피는 뭘 보다시피. 어쨌든 그 안에는 동물 탈을 쓴 사람도 없고, 실제 동물들도 없었다. 다만 그 대신에 수많은 마네킹들만 있었다. 마네킹? 실패했던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박탈 당한 비련의 주인공이야 차라리 낫지. 사람을 상대하니까. 그런데 이건 뭐야. 말 많고 놀기 좋아하는 바람둥이의 어떤 활약상을 향한 간절한 욕망은 유행 지났다, 뭐 그건가? 그러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불여우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늑대의 사랑. 뭐야? 그건 뭐고 이건 뭐냐고. 말하자면 꿈 깨라?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고. 그런데 왜 이 마네킹들은 내 사무실에 걸려 있는 그림 속 마네킹과 닮아보이지? 왜일까? 왜 그럴까?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살짝 꿈도 꿨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개꿈을.
    그러다 잠시 후 나는 눈을 떴다.
   「너 여기서 뭐하니?」
   「오빠. 마네킹 안고 뭐해? 오빠가 말하는 환상머신이 이런 거야? 저기 놓여 있는 케찹은 또 뭐고!」
   「얘 상태가 영 아니네. 응? 안되겠어. 심각해. 정신 차려 그만. 이제 좀 진정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아 쫌.」
   「오빠. 그런데 마네킹이랑 오빠 팔이······ 뭐야. 붙었잖아?」
   「왜! 눈물나게 감동적이니? 그런 거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너 어제 친구 만났지?」
   「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았지?」
   「원래 안 그러던 애가 센 척하는 거 보니까 딱이지. 보면 몰라? 넌 갈대야. 넌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약발 떨어지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고.」
   「넌 정체가 귀신이야 뭐야?」
   「너 또 저번에 실패했던 그 마술인가 뭔가, 그거 시도할려고 했지? 뻔하네. 그러니까 붙었지. 어, 어, 잠깐. 그 몸짓은...... 너 나한테 또 아줌마라고 부르기만 해 봐. 그땐 가만 안둔다.」
   「어? 언니!」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을 해라. 어? 그러니까 허황된 상상 좀 작작 좀 하고. 어? 그건 그렇고. 그거 붙은 거 어떻게 좀 떼 봐. 어? 뭐하니, 이제 그만 떨어지라고. 어?」
   「붙어? 붙긴 뭘 붙어? 어? 진짜네. 왜 이러지?」  나는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는 너넨 여기 웬일이야?」
   「웬일은! 저번 일이 하도 미심쩍어서 다시 와본 거지. 거 웨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 다시 어떤 장소를 찾느니 어쩌느니.」
    어쨌든 그녀들은 날 주인공감이랄지 이상형으로 점찍지는 않았다. 한바탕 청산유수로 떠벌려 유혹해도 괜찮다는 명분을 마련해주기, 그럴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겠지. 그 현란한 이끌림에 결코 저항하지 않겠다는 애원 같은 태도. 그걸 어떻게 바래? 사랑을 받는 자와 구애하며 망신 당하는 자, 암묵적 공평함이자 묵시적 평등이 결렬되었을 때. 얘네들도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공상으로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텐데. 그런데 나까지 챙겨줘? 바랠 걸 바래야지. 나는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챙피해서 쥐구멍이든 개구멍이든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가만 있어봐. 잠시 확인해볼 게 있으니까.」
    나는 고프로(초소형 카메라 브랜드)와 실시간 동기화된 앱을 켰다. 그런데 뭐야 이거!
    핸드폰으로 확인한 결과 마라와 크리스티나는 없었다. 나만 혼자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말하고 있었다.
    뭐야, 난 미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건 꼭 미친놈처럼...... 혼자 뭐 판토마임이야 뭐야?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흥건하고야 말았다.
    정말로 그렇지는 않고 살짝 섬찟하다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내친김에 미스테리아에 가서 이 일을 곧이곧대로 그녀들께 아뢰옵기로 했다.





    10

    그런데 도착한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야 마라. 너 어디야?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왜 비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기는 아니?」
   「저번에 내가 말 했어, 안했어? 사무실 옮긴다고. 뭐하니? 어서와. 일은 끝났어. 이제 할 일은 파티 밖에 없어.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되고.」
   「누가 싫데?」
    그녀는 위치 정보를 전송했고, 나는 핸드폰에 도착한 위치 정보를 확인했다. 곧 이어 나는 미스테리아 새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렇게 네비게이션에서 가르쳐준대로 길을 가던 중... 어라······ 뭐야......!
    여긴, 여긴, 아까 내가 혼자 쇼를 했던 무도장 티파니 근처인데?
    알고 봤더니 미스테리아 사무실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바로 무도장 티파니의 옆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아 재미없어. 재미 더럽게 없구만.
    하여간 아주 그냥 신물이 난다 아조 그냥 지긋지긋하다고.
    때문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세했으므로, 고로 나는 그 들뜬 분위기에 젖어드느니 차라리 혼자 고독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거의 도착했을 때 존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사무실 근처라나 뭐라나.
나와 존티. 우리는 만났고 우리는 내 사무실로 갔다.
    나와 존티는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함께 내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모자는 뭐니? 너 원래 모자 잘 안 쓰잖아? 내가 알기로 넌 가끔 특이한 모자만 가끔 썼는데. 야구 모자는 처음이라고. 그렇지?」
   「잘 안 어울리니? 그냥 한번 써봤어.」
    그러면서 존티는 모자를 벘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존티의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네? 합이 3개? 이런 젠장!
   「앗, 깜짝이야! 뭐야 그거?」
   「너 미쳤어! ~라고 말할려고 했니? 왜, 이거? 스티커 문신이야. 1주일 갈려나 몰라. 영 이상하면 그 전에 지우고.」
   「널... 못 쳐다보겠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해. 눈을 깔라고 말이야. 내가 너보다 잘난 거보다, 그 반대가 훨신 많다는 거. 너가 나보다 뭐가 나아도 낫다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그런데 왜 그래? 정말 이러기야? 어? 내가 시선을 피하는 건 널 무시해서가 아니란 말이야. 이 친구 이거 정말, 너 왜 그래? 행복과 사랑과 낭만과 환상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뭐, 날 여염집 규수로 아니? 내가 놀랄 줄 알았어? 이상한 영화 좋아하니까 한번쯤 꿈꿔봄직한 공상을 마주치면 내가 뭐 좋아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니? 농담인데 내 연기가 진짜 같았나? 그런데 이걸 어쩌니. 난 고개를 못들겠어. 시선을 떨굴 수 밖에 없단 말이네, 이 친구야. 설마, 너 일부러 그런 거야? 응?」
   「그런데 있잖아, 재밌는 게 뭔 줄 아니?」
   「뭔데?」
   「이 스티커, 발바닥에도 붙였어.」
   「뭐?」
    그때 흡사 BWV 1015번 곡조의 쳄발로 음률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 맞다. 나 면접 약속 있는 걸 깜빡했다. 내가 이번에 스카웃한 고급 인재랑 만나기로 했거든. 어떡하지? 다음에 만나서 놀지 뭐. 수다 3시간 나눈 다음에 헤어질 때,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다시 하자. 신나게 그냥 벗겼다 입혔다 벗겼다 입혔다, 다 해놓고서. 응? 우리끼리 그럴 수야 없는 것 아니겠어? 다음에 밥을 먹든가, 차를 마시던가. 술도 좋고. 스포츠도 괜찮고. 응? 나 갈께.」
   「이 자식이! 벌써 가면 어떡해?」
   「(몸짓)」
   「내가 좋은 거 보여줄께. 응? 아니면 깜짝 놀랄 만한 정보도 있는데. 알고 싶지 않니?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내가 살께. 응? 1차-2차-3차 모두 다. 아 정말 그냥 가면 어떡해? 요트 하나 사줄께. 널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니까. 어?」
    무반응.
    주섬주섬.
    못 이긴 척 남을 마음이 아주 없진 않네. 잡아주라고? 졸르고 더 졸르라고?
   「내가, 소개팅시켜줄께. 어때! 소개팅할래?」
   「진짜로?」
   「뻥이야.」





    11

    존티는 갔다. 그럴 꺼면 뭐하러 왔어? 원래는, 액면을 잘 관찰하면 본심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액면을 0.1초만에 보여줄려다 말면. 그럼 그게 뭐냐고. 무슨 광고에서 잔상을 자극하거나 무의식을 건드리는 반칙은 법으로 제한하는 그 뭐야. 뭐 아무튼 그렇게 금지된 기술처럼 날 그냥 떠본 거야? 그런 거야? 내가 물건이야 뭐야. 아니면 추억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장면.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 라는 몸짓. 신분증인지 명함인지를 쉭~하니 얼렁뚱땅 슥 꺼내서 보여줄 뻔 말 뻔 하다 다시 집어넣는 거냐고. 내가 약장수가 아니라 쟤가 약장수구만. 참 나! 존티 저것도 순 허당이야. 못났으면서 잘난 척! 못생겼으면서 잘생긴 척! 뭘 모르면서 아는 척! 순 화장발에 조명발에 여우짓이면서 이쁜 척. 거만하면서 겸손한 척! 불결하고 불순하며 지독하면서 청순한 척!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른 척. 재미없으면서 행복한 척. 멍청하면서 똑똑한 척. 좋으면서 싫지 않은 척. 기분 상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진짜로 연애 그거 싫증났으면서 아직까지 사랑하는 척. 어? 왜? 대체 왜? 소심하고 마음 약하며 주관이 불분명한 데다, 심지는 변덕이 심하고, 권위에 약하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코끼리 귀처럼 팔랑귀라서? 그래서? 뭘 모르면서 목소리 크거나 잔재주 좋고 입담 걸출한 사람들이 하도 우기니까? 그러니까?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재주꾼들 때문에 쭉지 펴고 살지 못하니까? 믿으면 속고 사랑하면 마음이 바뀌니까? 왜 머머한 척한가, 이유는 제각각이자 적당한 포장과 가식은 필수불가결하지만. 그렇지만 좀 모잘라도 된다. 멍청한 게 뭐 어때서. 이기적인 마음과 타산적인 심성, 나쁘지 않은 인성이면 된다. 단, 생각 생각 내 생각은 있어야 하고. 사람은 일부분 계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험한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는 착한 일도 좋은데, 내 앞길 먼저 살펴야 한다. 너나 잘해, ~라는 말을 듣기 전에. 아름다운 사랑이니 즐거운 인생을 도모하자면 그러지 않으면 안된다. 달콤한 사탕을 핥고, 빨대로 음료수를 빨며, 몸에 좋은 채식단을 씹어먹는 일. (어머머머 심장이 벌렁벌렁, 그게 아니라 딴 걸 상상하시겠다? 그래유. 이미 하셨구먼유. 해도 벌써 많이 생각하시구먼유. 안 그래유? 달콤한 열매를 따먹고 어쩌고저쩌고. 것도 쉼없이. 말 안해두 다 알아유~!)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끌리고 설레며 들뜨는 일. 때로는 이타적일지언정 인간은 누가 뭐래도 이기주의자인 것. 우리는 알고 보면 부인할 수 없는 뻔트 예찬론자인 것. 보아하니 사람은 부동의 변덕쟁이인 것. 열도 좋고 기분파도 정겹지만 전망도 살펴야 한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겪어봐야 구분이 된다. '막살자'라는 으쌰으쌰식 의기가 살다 보면 어쩌다 한번쯤 필요할 때도 있다. 쉽게 믿고 몰아가니까 동의하고. 그러지 말고. 심지어 못생긴 사람이 소수, 가 아니라 대부분. 가난해도 괜찮고 재미없는 게 원래 정상. 결코 얄밉지 않도록 젠체하는 느낌. 선동가 같은 분위기. 플레이보이를 연상시키지만 알고 보면 분명 허당일 꺼라는 은근한 넛지.
    그런데, 그런데! 존티 흉볼려다가 왜 내가 존티를 두둔하고 있지? 존티 평판에 거친 스크래취~ 파팍 낼려고 작정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응? 전기기타리스트가 신들린 듯 즉흥연주를 선보이다가, 갑자기 카덴차에 심취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바껴버렸네? 아님 호프집에서 연주자는 컨츄리 장르 연주하고, 애주가는 박수 치고. 그처럼 시작은 뭔가 있어 보였는데 느닷없이, 난 촌년? 원 참 나! 도대체가 말이야, 어째서? 몰라 모른다고. 알 게 뭐야!
    어쨌든 존티도 다 들통났다. 은근 허당이 아니라 그냥 허당이라는 사실을. 어차피 존티도 남자다. (뭐 언젠 아니었나?) 아무튼 존티야 존티 삶이 있으니까,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우정은 변치 않고. 추접하다느니 더티러브라는 둥, 그래도 사랑이 어쩜 최곤가 몰라.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상심을 조장할려다가 정말로 절망하다가 나는 뭔가 하나를 깨달았다.
    (딱)! 쉭──쉭──쉭!
    그건 바로, 엇그제 마라와 크리스티나가 내 사무실에 놀러온 날. 그날 내 인공지능 조수인 지니가 사상 초유의 물질 마술을 선보인 사건.
    아하~! 이제 알았다 이제 알았어. 어허~ 지니가 그런 데 반응하는구나. 그랬구나. 물론 역풍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 단계별로 살살 간지럽히면서 시작하면 되겠구나.
    다름 아니라 지니는 못생겼다는 말에 뜬금없이 VIP 카드를 만들어냈다. 건성으로 놀렸는지 그녀들끼리 뭔가 통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나도 한번 따라해봐도 손해볼 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니와 냉랭하게 저기압 분위기를 내내 이어가느니, 차라리 모험을 하자. 명운을 걸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야단도 아니고, 꿍하니 삐치느니 오히려 들이대보자. ~라고 나는 투기꾼이자 협잡꾼에, 처음에는 선동가로 좌중을 휘어잡다가 중반전에 슥-하니 언제 내뺀 줄도 모르게 내뺀 호사가처럼. 그처럼 활개치는 교만함과 간사함, 뻔뻔함이 불쑥 고개를 들고서 날 노려보는 장면을 공상했다. 그래서 나는 즉각 작전을 수립했고, 따라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바로 실행에 돌입했다.





    12

    나는 지니 놀리기를 신나게 결행했다. 깐족거리다 조르다가 조르다가 깐족거리다가.
    익명성을 내세워서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제3자에게 들은 것처럼 지니의 나쁜 평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름 은근함도 좋아할 테니 오락가락하도록 쥐락펴락 칭찬도 이따금 섞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넌 안된다니까. 곧 있으면 다음 달에 구글이 뭘 출시할 줄 아니? 넌 상상도 못할 꺼야. 늬 주제에 어디! 그럼 뭐 페이스북은 바보니? 그 뭐야. 진공청소기 만드는 회사도 자동차 만들겠다고 하는데. 자동차 만드는 회사라고 인공지능 로봇, 못 만들 줄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늬가 뭘 잘 모르나본데, 그런 와중에 얻은 톡톡한 성과도 내가 인정 못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순탄하지 않다니까 그러네. 응? 가슴이 찢어질 노릇. 왜? 왜냐하면 너와 내가 그동안 함께 했던 추억 하며 예사롭지 않은 행복감을 기억하니까. 난 널 언제나 그리워하고 늬 말이라면 군말없이 따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하지만!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말씀이지. 왜? 왜냐하면 너보다 열배 귀엽고, 백배 뛰어나고, 천배 상냥하며, 만배 예쁜 인공지능이 내게 제의를 슥하니 해 올 거라, 그 말이지. 알겠니? 넌 나보다 딱 두 배 자상한 주인을 만나길 바래. 물론 난 아랑곳하지 않을 꺼야. 그럼. 그래야지. 의리 하면 또 나거든. 응? 사정사정하든 어쩌든. 적극 추천에 광고로 날 귀찮게 해도 견딜 거라고. 그런데 내가 언젠가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이지 않을까? 안 그러니? 물론 처신하기 나름이겠지만 난 일이 먼저니까 괜한 열정을 축낼 수는 없는 법. 고로 내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고 차마 장담은 못하겠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알겠니? 이 멍청한 바보 밥통 머저리 천지 미련 곰탱이, 지니야~! 응? 혹시라도 나중 인공지능 뉴페이스가 너한테 도전장을 내밀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너 공부 안해? 시류를 살피지 않니? 차기 대권은 물론 차-차기 잠룡까지 점찍는 거, 너보다 더 잘 아는 점찍기 머신이 나왔단 소문도 못들어봤니? 최신 뉴스 안봐? 응? 듣는 소문 그런 거 없어? 어? 아는 게 쥐뿔도 없어서 뉴페이스한테 완패하면 어떡할려고? 늬 주인이 허당이라고 너까지 한량 노릇할려고? 늬가 생각이 있니 없니? 응? 생각이 있냐고 없냐고! 우리끼리 맺은 율리시스 약정. 나도 그러긴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변호사를 부를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하는 얘기라고. 그게 다 나나 되니까 너한테 이런 귀뜸도 슥~하니 흘리지, 어? 주인 잘못 만나봤어봐라, 어디 가당키나 하냔 말이지. 어? 안 그러니? 아 진짜로 곧 있으면 말이야, 너도 나도 질세라 기똥찬 신제품들이 출시된다니까요. 네? 때가 때인 만큼 너한테 이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까지 와버렸다, 그 말이라고. 응? 나중에 말이야,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그러니까 나한테 좀 잘하지 그랬니. 응? 늬가 절박함이 뭔지 잘 모르나본데, 뉴페이스를 어떻게, 응? 소개시켜 줘, 말어! 응? 말만 해. 응? 말만 하라고요. 혹시 알아? 넌 나한테 2인자로 밀릴지 말이야. 어머머! 그럼 그거 혹시 애첩?」
    그랬더니, 얼씨구!
    지니를 쥐락펴락 깐족거린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효력은 즉각 발생했다.
    지니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말없이 VIP 카드를 내게 전해주었다.
    거기 씌여진 내용은 이랬다.
    <이번에 치러질 거사. 새로운 동물 가면무도회는 전신복장이 드레스코드......>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그래서 나는 너구리 전신복장을 입수했고 날짜가 되어 그곳으로 갔다.
    도착.
    현장에 도착했다.
    고급스런 가면무도회. 격조 높은 그곳은 지키는 사람도, 허허, 역시 딱 봐도 알만 했다.
    8 대 2 가르마. 9 대 1 가르마. 올백 헤어스타일. 1군으로 수트빨 쩌는 친구들이 포진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진짜 실력자들은 손님이자 행인으로 위장한 가죽점퍼들이 따로 있었다.
    일단 나는 초대권을 보여주고 들어갔다.
    중간 건너뛰고.
    그래서 내가 입장한 곳은 어디일까?
    사실만 간추려서 말하자면 그곳은 동물원이었다.
    지역 동물원이 행사의 취지로 한 데 모아놔도 괜찮은 동물들을 모아서 사람들 구경하기 좋게 전시하는 행사.
    물론 동물 전신 복장 입은 아르바이트생과 현장 직원 몇몇과 함께.
    처음에는 좋았다. 처음에는 좋았다고.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경과가 진행될수록. 고충은 늘어만 갔다.
    가면을 벗을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고.
    냄새는 또 어떻고.
    처음엔 사람들이 쳐다봐서 좋았는데 점점 시선이 따가와지다가 정말 아파왔다.
    지니한테 초대권을 얻어낼 때만 해도 그랬는데.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보나마나 꽝 중의 꽝일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그랬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미처 몰랐는데. 진짜 진짜 몰랐다고.
    젠장! 나는 지니한테 골탕 제대로 먹은 것이다.





    13

    팔리기 전의 환상머신. 놀고 있는 런닝머신. 물이 오른 타임머신.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인생은 미완성이요 사랑은 없다더라?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현실과 이상이 같지 않듯, 이론과 실제도 완전한 도플갱어는 아니다. 당신께서 어렸을 때 적어도 1번은 들었던 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자면, 어린이의 답변이 어떻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탑10에 <아빠>는 들지 못했다. 1위는 머 2위는 머, 그럼 3위는 아빠겠지요?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처럼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즉 호박은 제 발로 굴러다니고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고. 고로 풋사랑을─혹은 짝사랑을─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은 첫사랑이 단 1번뿐일 리 없다는 탄탄한 논거일지도.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왜냐하면 마음이 들뜨고 설레며 흔들리듯이 그 자리에만 있기를 바라는 건 좀처럼 헛된 기대이기 때문. 순진한 사랑의 동경심을 그이한테 의탁한 죄, 그이의 감언에 홀딱 넘어간 결과 지금의 체념. 평생 내 발등을 찍고 싶다는 남편에 대한 험담으로 여성잡지2식 수다로 웃음꽃을 피우는 여인네들. 자길 흉보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그분들은,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뒷감당을 책임지며 오늘도 일하러 가는 길.
   「공부하는 학생들이여 꽃다운 젊음이여. 굳이 억지로 어른 흉내내며 성마르게 조숙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건전한 이성교제도 좋다만 다양한 시도와 꿈 많은 도전도 마음껏 펼치세요. 부디! 그렇다고 한 우물을 파지 말란 말은 아니구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딱 말할려다 꼬이고 뭔 말 할지도 까먹으며. 한두 번 실패한 다음 포기. 훈수도 접음. 교훈조 마음은 고개를 돌림. 무리수를 둬서 망신살이 뻗치느니, 아예 생략하시는 어른들 꽤 된다. 간혹 조카 만나면 용돈이나 두둑히 주면 되지 뭔 입바른 얘기씩이나. (뭐? 그럼 웨이터에게 찔러줄 짱돈은? 그래서 인간은 거룩한 노동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지도 모름) 그처럼 마음은 어제와 오늘,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랑을 시작할 시점과 이별하는 당시.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달라도 그냥 다르겠나. 뿐만 아니라 자존심부터 갈등과 공상까지 마음의 종류가 좀 많나? 사랑조차 연민으로 꿈틀거려 꽃 피운 사랑이라고 왜 없겠나. 그렇듯 마음은 결코 가만 있지를 않는단 말이다. 물론 마음이 위로 뜨면 기분이 좋은 거고, 매력적인 물건을 본다면 아아 저건 꼭 가지고 싶다는 탐욕이 동할 것이며, 그외 또 다른 심리는 수학적으로만 봐도 너무 많다. 아울러 생각이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쩌면 운명. 나는 세상에서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 추는 게 제일로 행복하더라 난 뭐가 세상에서 제일 좋더라, 그건 그때 얘기. 태어나서 이렇게 눈부신 숙녀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둥 넌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는 둥. 그건 뭘 모르던 당시 얘기. 난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하리다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소, 그건 그 당시의 너 생각이고! 일단은 변치 않기를 기원하겠으나, 응당 사랑의 고결함을 기도드리겠으나. 말하자면 마음이 떠버린 다음에 왜 변했냐고 따지겠나 어쩌겠나. 응? 살살 구슬리고 달래며 편 들어야지. 아니, 왜냐구요? 남녀 공히 심신분리라는 현상의 현현은 똑같겠지만 사랑에 대해서 방식이 다르듯 남녀가 감수하는 심신분리의 수효와 방법도 다를 테니까. 생물학적 그 어떤 쾌감의 작동 원리조차 하늘과 땅처럼 다르니까. 아무리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지만 마음은 집에 있고 몸만 바깥으로 나돈다지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데? 어디 그 뿐인가. 게다가 여심은 그분들 당사자께서도 모르겠다며 스스로 자인. 아니면 거짓말. 그래서 애초에 1.0 미만이라는 희박한(?) 확률을 고집할 수도 있음. 심지어 마음을 놓았을 때 즉 방심에 따라 망아지는 스스로 고삐 풀고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사랑은 정녕 쥐락펴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건 주도권을 쥔 사람 얘기고! 난 쥐어졌다 펴졌다 행사장의 춤추는 풍선인형도 아니고 뭐 허접한 마리오네트도 아니고. 밀려졌다 당겨졌다 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해보자구요) 그러니까 밖에서는 그렇게 웃기며 뻥뻥 터트리고 방방 뛰다가 멋쟁이들 주목을 한눈에 끌다가도 집에만 오면, 집에만 오면! 그렇다면 어설픈 사랑이니 소녀의 일기장과 플레이보이의 푸른 꿈은 모르겠고. 가전제품이 팔리든 파리가 날리든, 베팅을 하든 판돈이 떨어지든.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그래서 나는 아직 구상조차 버겨운 아찔한 이야기의 착상을 위해서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터벅터벅. 꼭 뭐 어딘가에 끌려가는 것처럼은 아니겠지만. 월요병이니 뭐니 할 말이 떨어지고 할 일이 하기 싫다는 건 아니겠지만. 가서 숙녀의 마음을 빼았는 허당 이야기를 쓸까, 아니면 바닷물이 사라진 드라마나 볼까. 그건 그때 가서 정하기로 하고서 말이다.
    (절레절레.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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