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판에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어.」
이 말을 듣게 된 경위는 이렇다. 먼저 제임스 혼자 <블로그> 옆에 붙여진 벽보를 보았다. 아, 블로그는 그가 자주 들리는 카페의 이름이다. 멀더가 사장으로 있는, 바뀌기 전 카페의 이름이 <정 원한다면>이었던 바로 그 찻집. 그는 첫눈이 오기 전에 그리고 그 찻집 창가에서 연인과 다정히 마주 보며 창밖을 내다보기 전에 멀더를 꼬셔서 찻집 이름을 바꾸게 했다. 또 멀더는 스컬리와 헤어진 듯 했다. 그건 그렇고 그가 본 벽보는 시골 근처 공원에서 록 콘서트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은 그가 자주 가는 낚시터와 가까웠고, 공연하는 밴드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특이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렇다. 펑크 음악하는 밴드의 이름은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얼터너티브 밴드는 <거북목 증후군>, 스페이스 락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였다. 모던 록 밴드는 <우물쭈물하다간 큰일납니다>, 잔잔한 발라드를 노래하는 혼성 듀오는 <제 버릇 개 못 준다>, 스카 밴드는 <일기나 써 볼까 하다가 나는 작가가 됐다>, 뱃노래를 노래하는 실력파 원맨 밴드는 <평생 소원이 누룽지>였다. 제임스는 밴드 이름이 하도 우끼고 놀랄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런 꼴뚜기 같은 녀석들'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그들이 음악을 제대로 할까, 그들이 음악을 알까, 그들이 음악에 진정 열의가 있는 것일까 라고 사뭇 의심하면서 뒤숭숭한 여운이 감돌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또 딱히 재미난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혼자서 그 공연을 보러갔다. 물론 같이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갔고, 그는 공연을 봤고, 감동을 받았다. 아,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 생동감과 환희에 빠져 그는 사람이 약간 사색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공연은 매주 토요일마다 주기적으로 언제까지 지속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을 불렀다. 침울해하지 말라고, 기막힌 공연이 있다고, 부질없는 짓은 이제 그만, 혼자서 혼자서만 놀고 혼자서만 사랑을 하지 말라며 친구들을 소집한 것이다. 그런 후 친구들이 왔고, 제임스와 같이 공연을 보러 갔으며, 그들은 웬 이상한 철조망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딱 공연을 즐겁게 보고 나서 와, 이 무대 정말 훌륭했어 완전 예술이야,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실은 시골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 놀만한 즐길만한 소재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정말 음악에 모든 것을 건 것만 같은 밴드들만 모인 것 같아서 그는 젖 떨어진 강아지 마냥 몹시 보채면서 친구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공연을 보러왔는데 아무도 없다. 왜일까? 그들이 말도 없이 공연을 취소했거나, 제임스가 있지도 않은 환영을 봤다거나, 과거의 경험을 잘못 불러내어 엄한 추측과 섣부른 억측이라고 간파해낼려다가 아직 미처 혼자만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황 그 3가지 가운데 거의 첫번째, 어쩌면 둘째, 아마도 가능성은 희박하나 셋째도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희박하지만!
사람이 혼자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다거나 너무 힘에 붙이게 말도 안 되는 역작을 그것도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쓸려고 하면 헛것이 보일 수도 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의 병적인 긴장감 때문에 주변에서 실망감 때로는 절망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경험은 진짜였다. 사진과 동영상을 남겨놓지 않았다 뿐이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방방 뛰고, 땀을 흘리고, 그리고 옆에 있던 나시 티셔츠를 입은 아가씨와 살갗이 스치기도 했으니까. 또 그의 주위로 갑자기 기타리스트가 싱어를 물리치고 먼저 관객들의 환호성 위에 뒤로 벌렁 누워서 인파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걸 모두 똑똑히 보고 겪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 진짜 경험이었다. 친구들은 믿지 않겠지만 그는 그걸 분명한 사실이라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선서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왜 그렇게 공연에 열광했냐 하면 그는 집에서 공책에 볼펜으로 글을 쓰면서 그 3단계 괴벽을 너무 많이 써먹어서 그 습관도 이제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3단계는 첫째, 글을 쓰고 둘째, 공책을 찢고 그걸 구겨서 물고 씹고 셋째, 방구석에 집어 던지기(때로는 그걸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기). 그것도 더 이상 재미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뭉개진 침 묻은 종이를 펼쳐보면 주로 이런 내용이 단편적으로, 서로 이야기로 엮을 수 없게끔 따로 따로 씌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혹시, 내 아름다운 사랑아? 그건 아니지? 내 마음은 온통 그대 생각뿐? 아니면 음 뭐가 있을까? 새로운 미래, 새로운 인생, 새로운 소설? 친구가 가방을 바꿨으니 나도 새 가방을 사고, 이웃이 차를 바꿨으니 나도 새 웨건을 알아보는 건 좋은데 음 웨건 모양이 이쁘긴 한데 웨건 모양으로 제일 괜찮은 건 또 엄청 비싸지. 음 그렇지. 게다가 출시한지 불과 1~2년만 지나면 실내 디자인이 촌스러워보여. 좋게 스마트 포투나 신형으로 바꿔야겠어. 그런데 뭐야? 아 이런, 네 속마음을 알아볼려다가 딴생각을 해버렸잖아. 한참 새로 익힌 독심술 2단계를 써먹고 있었는데 다 틀려먹었어. 이런, 젠장! 너가 책임져!> 또 짓이겨져 방구석에 나돌고 있는 종이에는 사랑에 관한 글도 있었다. <사랑 그것은 애잔함이고, 창백함이며, 무자비함이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관심을 돌려도, 시를 지어봐도 노래를 불러봐도 벗어날 수 없는 것> 으아, 그가 이런 글을 썼다니... 손가락이 한참을 오글거리다 급기야 잘 펴지지도 않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화문도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아무 말이나, 아무거나 말이야. 어떤 말이든지. 뭐든지! 신기하지 않아도, 재미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제발 말을 좀 해 보라니까. 듣고 보니 흥미로울 수도 있고 구미가 당길지도 모르는 일이라구> 그는 진짜 삼류 소설가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잠시만이라도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멋진 사랑을 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감미로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상상을 하자. 단지 잠시만이라도!> 글을 써서 돈도 벌고 유명해질꺼라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야 말겠다네 어쩌네 그런 포부는 포기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냥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 별일 없이 산다던 보통 사람이 이미 유명해진 다음에 난 유명해질꺼야, 꼭 그런 덜떨어진 결심과 비슷하달까. 그게 끝이 아니라 이런 글도 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은 소원이라면 뭐가 있을까? 이를테면 비밀 일기나 블로그 같은!> 글을 쓰고 종이를 찢어 구기고 물고 뜯고 씹고 던지기, 는 아무래도 잘한 일 같았다.
그나저나 그는 어쩌자고 이상한 공연을 보고 나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친구들을 웬 산중으로 불러서 공연장이 있기는 어디 있다고 다짜고짜 우기다가 친구들에게 미안해하고 스스로 억울해하고 있을까? 그러다 그가 보기 딱했는지 조니가 한마디 한다.
「아까 여기로 올라오다가 말이야, 나만 본 건지 모르겠다만 팻말 하나를 봤어. 무슨 지명이 씌여 있었고 그 다음엔 산업물 폐기장이라고 씌여 있었어.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그게 맞을 꺼야. 그래 공연이 취소되었을 수도 있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안 그래?」
조니의 말을 듣고 하워드가 거들려다가 약하게 빈정대는 말이 되어버린다.
「펑크 밴드의 이름이 뭐라 그랬지? 뭔 증후군? 거북목 증후군이 뭐 어쨌다고? 또 뭐 우낀 이름이 있었는데... 뭐드라, 아~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아닌가? 과일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 였나? 하지만 난 제임스가 도깨비를 보고서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닐라고 봐. 유령이든 자동차 극장이든 뭔가 있었을 거라고 난 믿어. 얘는 장난꾸러기가 아니라고. 지금 우린 어린이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 간에 우리들은 이상한 일 정말 많이 겪었잖아. 그러니까 뭔가 곧 나타날테니까 미리 실망하지 말라구. 포기하지마. 지상의 일은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는 법이야. 행운의 여신의 비호가 있기를!」
「진정해 친구. 끝간 데 없는 미궁에 빠진 거도 아니잖아. 단지 행사와 사건이 없을 뿐 그분은 언제나 느닷없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거의 생각치도 못한 장소에 나타나시잖아.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기대주니까 기다려보자고.」
「정말? 그거 믿기 어려운 걸.」
「그렇다면 좋아. 믿게 만들어주지. 신빙성이 없다라...... 그때 가서 놀라지나 마시게. 정 그렇게 원한다면 멀쩡한 맨정신이 영 도망가버리게 내 아지트 비밀의 공간으로 너네들을 데려가야겠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는데, 보고 나서 기겁하지나 말라구.」
「그런데 너네들 아까부터 꼭 청춘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말하고 있다는 거 알기는 아니? 그리고 너 아지트 없잖아? 그 말 뻥인거 다 알아.」
「정말 친절하시군요. 어쩜 그리 다정하실까. 내 님이 따로 없네요.」
「긴 말 필요없고, 과감히 접고 어딘가로 떠나자. 재잘재잘, 은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봐. 근처를 샅샅이 뒤질 수도 없잖아. 이런 일 많이 겪어 봤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늘상 있던 일인데 민감하게 굴 필요 있냐. 길몽이 될지 흉몽이 될지 모르지만 꿈을 찾아 떠나자구. 실은 우리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개꿈을 찾아 떠날 명분을 마련하는 거? 개구장이들처럼 막 날마다 놀러다닐 수는 없으니까 어른인 우리에게는 뭔가 구실이 있어야 할 꺼 아니야. 잘된 거지. 이게 원래 우리 스타일이잖냐, 한풀 꺾였다 다시 치고 올라가는 거. 안녕 하며 인사한 후 떠날려고 뒤돌아섰다가 다시 메롱~ 속았지롱 하는 거. 안 그러면 재미없잖아.」
「그래. 좋아. 좋다구. 그런데 어디로?」
대화가, 대화만 잠시 소풍을 떠나려고 하자 마크가 다시 그것을 원래대로 가져다 놓는다.
「개의 질주 본능이 너네들에게도 아주 조금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좀 대화의 흐름이 성급하게 흐르고 있어. 그런데, 너네들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니? 아까 팻말 봤다고 했잖아. 그 팻말에 뭐라고 씌여있다고 그랬지? 폐기물 처리장? 나도 그거 보긴 봤어. 하지만 모양이 왠지 조악하고, 급조한 티가 나던 거 못 느꼈니? 물론 그 표지판이 정확히 표시된 상태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공연장이 아닌 게 당연한 거지. 최소한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는 공연장으로 가는 표지판이 없었다는 것 하나는 분명해. 돌아가서 그 수상쩍은 표지판을 다시 확인해보는 게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냐? 어? 어때?」
그들은 마크의 말을 듣고 수긍한 후 그 팻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팻말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팻말을 자세히 보니 그건 보기 드문 삼각형 팻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걸 누군가 삐투름하게 팻말을 틀어놓은 것이다. 폐기물 처리장인가 뭔가의 방향은 맞지만 공연장 안내글을 그래서 못 봤던 것이다. 그러하여 그 삼거리에서 남은 한 방향으로 그들은 이동했다. 그리고 음악 공연장이 나왔다. 여기엔 진짜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시끌벅적한 분위기, 돌아다니는 사람들, 군데군데 보이는 무대들... 다 좋은데 이상하게 행사장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대하고 뭔가 생각지도 못한 생소한 일을 보고 흥분하고 뛰고 떠들며 또 가끔 웃지 못해서, 그래서 왠지 실망한 느낌이 살짝 눈빛에, 표정에, 걸음걸이에, 몸짓에 엿보였지만 아무도 그걸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면 또 바랠 껄 바래야지, 한소리 들을까봐서. 원했던 제 1의 목적이 달성됐는데, 어딘가 허전한 기분? 그런 게 있기 있었나 보다. 간혹, 몇몇 독자도 공감하고 몇몇은 아예 에잇, 대놓고 상스런 탄성을 내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절을 차릴 필요없이 혼자 있으니까.
「우리가 맞게 찾아왔네. 오, 분위기 좋은데~」
「그런데 왜 아까 뭔 처리장인가 그곳에서 이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거지? 이 정도면 안 들릴 수가 없잖아? 이상한데?」
딱히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아무도 꺼내놓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로 쳐다만 봤다.
「일단 왔으니까 저기 보이는 무대로 가보는 게 어떨까?」
그렇게 그들이 당도한 무대에서는 어느 얼터너티브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다.
「저거 뭐야. 이런 아뿔사! 저거, 저거, 저거... 너바나 아니야? 너... 너... 너바나 맞아. 완전 똑같아.」
「흉내낸 거나 뭐 비슷한 밴드겠지.」
그리고 그들은 다음 무대로 이동했다. 거기서 공연하는 친구들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익숙한 음악 같았다.
「이런 뭔가 했드니 세상에나, 저거 오 이런, 비틀즈 아니야 비틀즈! 오, 대단한데!」
「재현 밴드일까? 재림일 리는 없고. 시간이 역행할 리는 더더욱 없잖아.」
그들은 신기함이란 감정에 짓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무대를 멍하니 바라만 본다. 또 한참 후에 자연스럽게 다음 무대로 갔다. 여기서도 기존에 몇 번 들어본 고풍스런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노래부르는 가수는 옷도 그렇고, 생긴 거도 그렇고, 뭔지 모르게 완전 옛날 가수 같았다. 순간 알렉스가 누구라고 소개한다.
「어머나! 저건, 저건 프랭크 시나트라가 분명해. 오, 이럴 수가!」
그들은 웃도리를 벗어 등판에 사인을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다음 무대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1800년대 음악을 연주하는 실내악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꼭 1813년 쯤에 발표된 음악을 바로 한달 후 당시 연주자들이 고악기로 초연하는 모습 같았다. 여기서는 누구도 섣불리 이건 누구 음악이다, 저 사람은 타르티니의 수제자다, 저 가발을 쓴 사람은 글쎄 가발이 가짜일까 혹시 그분이 아닐까, 라는 확신의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음 무대로 옮겨갈 수도 없고, 여기 머물러 있을 수도 또 되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조니는 어느새 저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갔다오드니 들떠서 이렇게 말을 꺼낸다.
「쟤들이 같이 놀자는데. 자기들도 여자들끼리 그렇게 친구들만 왔데. 더군다나 일곱명이래. 심지어 예뻐. 완전 청순해. 진짜 귀여워. 어때? 망설여지니? 뭘 망설여? 어? 왜?」
「이렇게 만나면 나중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해. 답이 안 나와.」
「어, 그런데 쟤네들 어딘가로 바삐 뛰어가는데? 누구 또 다른 음악가가 왔나보다. 야, 뭐해? 따라가야지.」
그들은 얼떨결에 그녀들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인파에 섞였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냥 거기에 몸을 맡겼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흥에 겨워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처럼 진행하면서 흥얼거리고 노는 무리에 섞여서 그들도 같이 놀면서 어느 무대 앞에 도착했다. 보아하니 그곳에서 노래부르는 밴드는 바로 그 밴드 같았다.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아까 7인의 아가씨들은 어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들 옆에는 웬 초딩들이 보인다. 그들이 하는 말은 이랬다.
「야, 야, 다음 공연 그거래. 거북목 증후군! 걔네들 음악 완전 끝장이자나. 오, 기대되는데. 막 흥분되지 않냐?」
거북목 증후군? 흥분? 이상하게 초딩보다 이 친구들이 더 흥분되는 것 같았다. 이런 떨림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찾아와도 되나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때 아닌 흥분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도 달아오를 데로 달아올랐다.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통 구분되지도 않았다. 꼭 어디에 홀린 것처럼!
친구들은 공연장에서의 소동 같지 않은 소동을 체험하고 헤어졌다. 만약 그들이 드라마나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거기서 뭔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필시 그들은 거기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정신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니었으며, 뿐만 아니라 블로그에 공동으로 쓴 그들의 세번째 소설 속 인물도 아니었고, 유식한 말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기 대문에 괜히 소란을 피우거나 말썽이 보이면 끼어들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그런 난리법석을 비켜서 돌아가며 현실을 살되 이상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세계라 씌인 연두색 스티커 풍선의 끈타발을 꼭 붙잡고 살았다. 일상이 영화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 그래서 그들은 풀밭 위의 마돈나를 찾아 떠나거나 솔로몬의 지혜를 얻고 다윗과 같은 힘을 기르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적당히 괜찮은 인생 즐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선 조니는 즉흥 연주 밴드에 합류했다. 밴드 이름은 이랬다.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 기타와 키보드, 드럼을 모두 준비하고 공연하지만 음악을 틀어놓고 입만 맞추는 립싱크 밴드였다. 그는 그 외에 일상 생활은 정상적이라서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케빈은 친구들과 연락이 한동안 뜸했기 때문에 엄한 뜬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식물학을 공부한다더라, 고기와 술을 끊었다드라, 서점에서 식물학 관련 책을 사서 나름 탐독하며 휴가를 즐긴다더라 가 와전되어 잘스부르크 성에서 식물학을 연구한다네, 세계 식물학계를 평정했다네, 잭과 강남콩 나무에 나오는 그 나무 넝쿨을 타고 클라우드 9에 올라갔다네, 두 집 살림을 차렸다네, 하면서 이상한 말들이 무척이나 난무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는 취미 생활도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일설이 그나마 그 가운데 가장 우세한 풍문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모든 종류의 게임을 가장 게임을 하기에 즐거운 분위기에서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해선 RPG 게임을 한다 그러면 해변에서 요트를 타면서 또는 적어도 동네 수영장에서 1인용 보트를 타고 노트북으로 게임을 했다. 배경이 옛날로 설정된 게임을 한다면 어디서 갑옷을 구해와서 그걸 입고 게임을 했다. 간혹 사용하지 않는 게임 계정이 해킹되어 좀 겉늙은 듯한 초딩이나 중딩이 한판 뜨자고 찾아오기도 했다. 골프 온라인 게임도 골프 잡지에서 거의 항상 세계 100대 골프장에 선정되는 골프장에 가서 그 안에 있는 찻집에서 게임을 했다. 당연히 축구 게임은 축구장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밀리터리 복장을 하고 군부대 인근에서, 캐쥬얼 보드 게임은 애들 많은 곳이나 개 운동장 같은 데를 찾아가서 하곤 했다. 따라서 그는 가엾은 사랑이나 여자의 거짓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는 게임 맘껏 하면서 게임을 하지 않을 땐 빈둥빈둥 쉬고,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하는 일만 건사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관심사를 분산시키지는 않은 것이다. 만족할 만한 신기루의 휴일이라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또 마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3인칭 관찰자 시점 즉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요술램프에 그 모습의 영상이 잘 포착되지 않고 있다.
제임스는 보나마나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괴로워하다가 쿨쿨쿨 낮잠을 자다가, 글을 써볼려고 공상에 망상을 거듭하다가 공중누각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감의 일순간만을 호소하면서 그분을 애원한 끝에 우르르쾅쾅 굉음이 개인의 심상에 번쩍거리며 착상이 떠오를 리는 없을 것이다. 뚜렷한 해결책을 못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시간만 허비하겠지. 철딱서니 없는 놈 같으니라고. 오랜 침묵 끝에 명작을 탄생시키겠다고? 일찌감치 꿈 깨는 게 낫다. 잘 해 봐야 카페 블로그에 가서 띵까띵까 놀고나 있겠지. 새로운 점원이 있으면 찝쩍거리거나 할 테고. 놈은 철떡꾸러기다. 끔벅끔벅 해 봐야 바둥거리고 고뇌를 거듭해 봤자 틀림없이 괜히 멀쩡한 공책이나 찢고 구기고 물어뜯고 집어던지기 밖에 더 하겠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쪽은 재미난 일도 없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나마 어떤 실토와 안도감 사이에 있는 악감정도 아니고 호사가를 만족시킬 쾌청한 소식에 가까스로 근접할 가망성이 엿보이는 닉과 하워드의 만남 쪽으로 슬그머니 관점을 돌려본다.
닉과 하워드, 그들은 단둘이 만났다. 어두컴컴한 동네 바에서 바텐더에게 이쪽에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하는 듯이 분위기를 잡고서.
그들이 딱히 모험을 추구하고 시간이 남아돌며 놀라운 신비를 찾아 두문불출하지는 않았으나 둘이서 도란도란 담화를 나누다보니 뭔가 진땀을 빼게 만들고 자꾸 신경쓰이게 만드는 공통점을 서로의 일상에서 발견했다. 그렇다고 혼비백산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또 절대 무심코 넘겨버릴 만큼 사안이 결코 가볍지도 않았다.
「하워드, 너도 솔직하게 말해봐. 우선 나 먼저 말할께. 난 다른 애들에게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지금 갑자기 너에게는 꼭 이걸 말해야만 할 듯한 그런 긴박한 필요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거의 모두 내가 헛소리 한다고 다들 장난치지 말라고 할 꺼야. 하지만 너라면 차분히 듣고 또 신중하게 믿고 같이 번민에 잠길 수 있다는 안심이랄까 뭔가 그런 확신이 들었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그런 예감이 홀연 날 찾아왔다고나 할까? 맹세하라면 맹세할 수 있어. 혹시 너도 원인 모를 무력감을 느껴왔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요즘 딱 그렇다니까. 식사를 하거나 운동을 하다가도 순간 어떤 검은 마음이 날 잠식해와. 흔히 아는 그런 흑심은 아니야. 나는 말이야 누굴 한번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이 드는 상대를 흔히 발견하는 그런 남자가 결코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여심이 혼자 들끓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마다할 수는 없으나 대놓고 퇴짜놓을 수는 없어. 때문에 잘 설득해서 마음을 몸에게 살며시 돌려보내야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 뭘 뜻하는 거지? 흐흠(헛기침). 또 나는 괜히 엄한 남심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아. 잘 알잖아? 괜히 내가 어디 이상한 순위권에 오른다면─쟤가 그렇단 말이야? 그렇게 대단해? 어디 그럼 한번─그분들께서 지명방어전을 노크하면 곤란하니까 존말 할 때 순위권에서 밀어내라고 할 꺼야. 무시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좋은 말이 아니라 애걸복걸 해야 하나? 피식(냉소). 뭐야, 뭔 얘기하다가 의무방어전 얘기가 나왔지? 아, 맞어 그거야. 일상 생활에서 느닷없이 뒤숭숭한 감정이 날 감싼단 말이야. 그 뭔가 이상한 감정, 그 뭐지,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혼돈과 어떤 환청? 와그장창 뭔가가 깨지는 환각도 경험했어. 격정적으로 말야. 그래, 가위눌리는 그런 경험이라니까. 그런데 이거 정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못 잡겠다야. 천착, 천착? 아니, 천품, 천품? 꼭 대강의 뜻을 희미하게만 아는 어려운 단어나 각종 관용구와 어려운 어법을 끌여들여야만 이 일을 네게 잘 설명하여 이해시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야단 맞은 강아지의 주눅든 느낌도 든다니까. 뭔 말인지 알겠지?」 너 같으면 그렇게 말하면 알겠냐, 라고 한소리 듣기 딱 좋은 말 같지만 가까운 사이라면 흔쾌히 안다고 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닉. 허둥대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렴. 그런데 대체 뭔 일인데 그렇게 꼭 소설 속의 광인처럼 주변만 빙빙 돌면서 본론을 꺼내놓지 못하는데 그래? 너답지 않게. 핵심만 말하기가 힘드니? 대체 뭔데 그래? 자꾸 그러니까 궁금하잖아. 이제 그만 털어나봐, 응?」
「그래, 간단히 말할께. 내게 첩자가 붙은 거 같아. 증거는, 증거는 없는데 물론 심증은 있어. 괜히 썰렁한 트윗을 남겼는데 뭔 이상한 아저씨가 리트윗 하고, 어, 어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종자가 늘었어. 또 우리집 우체통 옆에 누군가 조그맣게 네모 표시를 해놨어. 다른 집 즉 앞 집, 옆 집, 뒷 집은 모두 삼각형 표시를 해놨고. 그리고 메일도 왔어. 저번에 우리가 무명 블로그에 올린 공동작품 있잖아. 거기 나온 것과 비슷한 오즈의 마법사라는 유락시설에 놀러오라는 메일이야. 그 뿐만이 아니야. 누군가 날 고성능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만 같아. 더군다나 간혹 어떤 성우가 내게 막 속삭이는 것도 느껴져. 뭐라드라, 뭐라고 했지? 아, 맞다. 이랬어. 뭐가 지겹냐고 했는데... 무슨 광고는 아니고, 아마 딱 이런 내용이었어. 나보고, 글쎄 나보고 말야, 판타지가 지겹녜. 진짜 굉장히 호감가는 들으면 기분이 막 정말 즉시 좋아지는 그런 음성이었어. 그래서 딱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거야. 뭔 귀신에 홀린 거도 아니고 말야. 또 뭐라고 했드라...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 어쩜 이런 내용이었던 거 같아.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아.」
「오, 저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실은 나도 요즘 그런 느낌을 감지했어. 하지만 그걸 어디 털어놓을 데가 있어야지. 맨정신으로 누군가에게 얘기했다가는 미친놈이라고 할 테고, 술집에서 술 마시며 마담에게 말한다면 술 취했다고나 하겠지. 아니면 술을 좀 더 드셔야 바른 말, 곧 날 좋아한다고 고백할 꺼 같다고나 하겠지. 안 그러겠어? 그리고 꿈에서 자꾸, 자꾸만 어떤 왈츠를 듣게 돼. 그냥 여기서 듣고 저기서 듣던 그런 음악이겠지 그랬는데 어느 날 알고 보니 그건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왈츠였지 뭐야? 미발표 신곡, 인지는 잘 모르겠어. 또 뭐가 있었드라, 뭐가 있긴 있었는데 잘 생각나지가 않아. 맞다. 소셜 네트워크에 보니 제임스가 가는 단골 카페 이름이 바꼈다고 했어. 그래, 그 이름이 블로그래. 어, 이건 별로 관계 없는 얘기겠구나. 어찌됐든, 나도 뭔가 이상한 일들이 있긴 있었던 거 같아.」
「하워드 네 얘기도 의미가 있긴 한데, 그러긴 한데, 그런데 그게 다야? 너무 적은 거 아닐까? 그걸 가지고 이상하다고 하기에는 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냥 내 얘기에 덩달아 궁짝을 맞춰준 거 아니냐? 너는 말이야,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좀 앞으로는 너 하고 싶은데로 하면서 살아. 말도 이따금 좀 거칠게 해보고, 뭔가 변화를 주라구. 옷도 그렇게 샌님처럼 입지만 말고 때로는 가죽점퍼도 입고 말야. 어?」
한편, 그들의 옆 탁자에는 완벽한 마초, 멋진 남자, 최고의 상남자, 거친 야성을 어쩔 수 없이 풍겨서 미안하다는 인사말이 푸른 빛깔이 겉도는 수염과 그들이 입고 있는 제복, 장갑, 헬맷에서 한없이 그윽하게 드러나는 모터사이클을 타시는 아저씨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분들은 양치질도 엄청 과격하게 하실 꺼 같아 보인다. 막 잇몸에 피가 나도록. 그들은 한마디로 딱 프로 같았지만 평소 거리에서는 굉장히 천천히 달리고 오직 전문 경기장에서만, 그리고 한가한 교외에서만 질주를 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실력은 완전 초보인데 나머지만 완전한 전문가처럼 보여지고 싶어한다고 실토하는 친구도 있었다. 닉과 하워드는 어딘지 모르게 부러움과 경탄 그리고 경외감과 더불어 동경심 또한 빠질 수 없고, 아저씨 멋져요, 이런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이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들은 중요한 얘기는, 자세한 상담은 차후에 만나서 다시 하자면서 헤어졌다.
강물이 흐른다. 다리가 보인다. 방향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1번 다리는 10시를 가르키는 시침 같다. 그리고 2번 다리는 2시를 가르키는 분침. 그 시침과 분침의 공통 고정점이 위치할 것 같은 지점에서 전방 얼마만큼의 위치에 조그만 섬이 있다. 즉 섬에서 강물을 조금만 건너가면 바로 육지다. 1번 다리와 2번 다리 그리고 섬을 이으면 하나의 문자가 된다. W! 더블유? 응, 더블유. 시계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구도 때문인지 또는 운전대를 잡는 손 모양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풍수지리학상 절묘한 각도와 배경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번 다리와 2번 다리 안쪽에 있던 무인도,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고 카페를 만들어 그곳은 유인도가 됐다. 육지에서 그곳으로 오고가는 방법은 육지와 섬을 잇는 줄이 있고, 그 줄을 잡고 배를 타고 갔다가 다시 줄을 잡고 육지로 건너는 약간 원시적인 수단이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섬에는 찻집이 하나 있고, 그곳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주인이 수차례 바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건너편 도심과 더 멀리 있는 산까지 보이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는 마크와 조니가 앉아있다. 그들은 한잔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바로 그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남긴 소설에 나온 그녀였다. 무명 블로그에 남긴 공동 작품 첫 번째에 나왔던 그녀, 그리고 두 번째에 나왔던 그녀. 둘 다 모두 매력이 넘친다. 그들이 소설에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그들은 그녀를 아끼고, 좋아했고, 어쩌면 사랑했던 것이다. 뒤엉킨 사랑. 심각한 불균형. 아마도 애타게 보고파 하지 않았을까? 볼 수 없는 그녀니까. 만날 수 없는 그녀니까. 안 그랬을까? 안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간히 그녀가 생각나고, 가끔 가다 어찌할 수 없이 숨 가쁜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오면 꼭 그날은 마치 뭐랄까 일진이 안 좋아 하루 온종일 뒤숭숭한 날처럼 무슨 일을 해도, 소설 구상을 해도, 온갖 기교를 갈고 닦거나 화려한 언변을 다듬고 지성을 보충할려고 하여도 통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만 전전긍긍하며 끙끙 앓다가 그걸 알리고 위로 받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가까이 사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사람들은 편하게 만나고, 차 마시고, 술 마실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그에 대한 마음의 흡족한 정도가 X축 나이와 평행을 이루지 않고 전성기라는 선율에 따라 어느 만큼 완만한 굴곡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편하게 만나고는 있었지만 둘 다 속으로는 그래 내가 만나주께, 뭐 달갑지는 않지만 요즘 들어 부쩍 불쌍해 보이고 안 돼 보이니까 내가 다독여주지 누가 하겠어, 친구니까 내가 같이 놀아줘야지, 뭘 생각없이 말했다가 삐지면 어떡하냐, 그런 생각을 속으로 아주 조금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니, 그녀...가 생각나지 않니? 너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말야, 밤에 잘려고 딱 누우면 천장에 저절로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컵을 손에 들고 냉수를 마실려고 해도 물의 표면에 그녀의 새침한 표정이 슥 떠올랐다가 한순간 싹 사라져버리지. 그리고 길을 걷다가 그녀 생각에 난 가로등에 살짝 부딪히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런 날은 또 뉴스에 보면 나와 비슷한 진짜 수컷 냄새가 풀풀 풍기는 어떤 남자가 가로수를 차로 들이 받고 도주했다가 다시 어딘가에 자진 출두했다는 소식이 나와. 책을 읽어도 자꾸 옆에서 나랑 놀아주라고 재잘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 아니야. 그건 착각이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환청이고, 반가운 복과 뜬금없는 운은 물론 촉망받는 기쁜 예감을 모두 동반한 환각이요, 그야말로 청빈한 환시라고 할 수 있을 꺼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매사 그렇게 그녀가 날 따라다니는데 어쩌겠니? 꼭 내가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고 있는 것 같아. 혹시 제임스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녀석, 처음부터 소설 쓴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뭔 말도 안 되게 말이야. 환상 소설? 흥! 그래도 마음에 걸려. 그 친구가 막 리모콘을 누르고 그 버튼에 해당하는 행동을 우리가 한다? 오, 저런! 그러면 안 돼. 아니야 아닐 꺼야. 그러면 안 돼. 혹시 리모컨보다 더 센 거면 어떡하지? 녀석이 소설을 쓰는 데로 우리가 그렇게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대뜸 제임스가 소설을 하나 들고 나타나서 이거 내가 쓴 건데 이걸 우리의 공동 소설 세번째 작품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알고 보니 주인공은 우리일 수도 있고.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저번에 녀석이 내게 귀뜸해준 얘기 때문이지. 녀석이 막 바디랭귀지를 어디서 배웠는지 꼭 말발이 관가나 정가, 경제계, 학계의 거물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걸 그대로 흉내내면서 오른쪽 팔을 팔꿈치를 편 채로 앞으로 악수할 정도 보다 약간 낮게 뻗어서, 그 있잖아 꼭 로보트 같이, 그 다음에 딱 팔꿈치를 90도 각도로 안쪽으로 구부려, 그리고 손바닥을 땅을 보게 했다가 싹 틀어, 하늘로. 그러면서 팔을 위쪽으로 슬며시 올리면서, 다시 손바닥을 뒤짚어 팔을 내리면서 하는 말은 이랬어. 자기는 막 나이 들면서 힘이 위로 올라갈려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오는 거 같드래. 그래서 미치겠다고. 글이 잘 안 써진다고. 도무지 착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안 통한다고. 뭘 해도 안 된다고. 뭘 해도 재미없다고. 혹시 나만 이런 거냐고. 너는 행여나 그렇지 않냐고.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볼까, 무작정 약속도 안 하고 대학교로 찾아가서 문예창작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볼까, 아니면 하워드가 말했던 소설 창작 아카데미에 정말 입학할까, 어디 있나 찾는 게 문제겠지만, 그는 진짜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했으니까. ... 음 그러니까 따라서 녀석이 우릴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니야. 더군다나 뭐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도 아니고, 소설 끝날 때쯤 후렴구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들이 공동으로 구상한 작품이네 어쩌네, 세 번째네 몇 번째네 그럴 일은 없을 꺼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뒤통수 맞으면 아파. 기분이 꿀꿀해. 게다가 반전이 재미없으면 독자들 뚜껑 열릴 테니까. 그걸 가지고 또 뭐 어딘가에선 역-반전이네 뭐네 하겠지만. 하여튼 그럴 일은 없을 꺼야. 아, 어쨌든 귓전을 맴도는 그녀의 목소리, 너무 아늑하여 내 가슴이 떨리는구나. 왈칵 눈물이 쏟아질려고 그래. 눈에다 눈물 나오는 약을 살짝 넣는 정도가 아니라 인형극이나 꽁트에 나오는 특수 장치처럼 콸콸콸 수돗물을 트는 것처럼. 혹시 너는 안 그러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최근 너의 친구는 이런 일이 있었다네. 자네 혹시 그녀를 아는가? 우리 두 작품을 같이 썼잖나. 눈을 감아도 술에 취해도 그런다고 잠꼬대를 하더라도 어떻게 그녀가 꿈엔들 잊히겠나. 안 그러니?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야.」
「나는 말이야. 마크, 나는 있잖아. 그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질 않아. 400살인지 4,000살인지 드셨다는 그녀. 하긴 우리가 글로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니까 생각이 안 나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가방 속에 살고 있는 그녀도 딱히 안부가 궁금한 건 아니야. 부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우리가 썼던 소설, 거기 나오는 일들이 내게 나타나는 것 같아. 정말 실제 그와 흡사한 일들이 막 내게 일어나고 있다니까. 우선 이상한 점 하나는 매일 인사하는 업무와 관계된 사람이라든가 지인들, 이웃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하나같이 대화하는 중간에 내게 꼭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아.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긴 있는데 일단 돌려서 말하든 얘기를 슥 흘리든 모두 똑같이 먼저 의문의 추를 실은 말을 툭 던져. 그럼 내가 다시 반문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려. 화제를 바꾼단 말이야. 대화 방향을 트는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처럼. 모두, 모두 다 그래. 그들의 말은 그랬어. 거기 갔다 오면 어떠냐는 거야. 그곳에 가서 있다가 오면 어떠냐고. 뭘 어때? 뭘? 그리고 어디? 내가 어디 갔는지 안 갔는지 지들이 어떻게 알어? 그런 몇 가지 일을 겪고 나니 느낀 점은 이거야. 내 삶이 꼭 어딘가에 온전히 투영되어 어떤 대칭점이 생기고, 거기에 서광이 비추면서, 그 빛은 슬슬 조명으로 바뀌고 그 다음 뭔가 그것의 인상착의가 누군가 어떤 작가의 두뇌와 동기화 되고, 그건 장차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져 새롭게 탄생할 것만 같은 그런 불안하고 동요된 감정. 거기서 나는 잠시라도 벗어날 수가 없어. 최근에 보는 책을 읽고서 착안한 건데 나도 모르는 척, 그 정보를 추적하고 따라가야 하는지, 샛길로 빠져 적을 활용하고, 정체를 모르는 그들의 미끼에 걸려들어 연기를 하고 또 연기를 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속담이 떠오르니까. 메소드 연기를 한 다음 극중 인물에서 배우가 빠져나오는 사례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알아보기 까지 했어. 그러다가 잡념을 뿌리칠려고 우리가 쓴 공동 소설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드라이브를 하고 다녔지. 정처없이. 그러다 또 하나 알게 됐는데 내게 미행이 붙는 거 같아. 처음에는 B급 정도 되는 인물로 무슨 흥신소 직원일 꺼라 짐작했어. 나중엔 정말 교육 제대로 받은 A급 요원이 붙길래 내 막연한 추측은 하나하나 근거를 모아나가면서 점차 추론으로 발전했지. 아무 일도 아닐 꺼라는 기우는 거의 명멸되어 갔어. 그러나 나는 그쪽 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완전 초짜잖아. 완전 애송이지. 그래서 내가 그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거역하겠니, 그러다가 난 그냥 순응자가 된 것 같아. 어느덧 시간이 흐르니까 이제 뭔가가 날 따르지 않고 관찰하지 않고 추적하거나 어떤 관심의 징후가 엿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 같아. 사태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렸지. 애초에 우리 소설이 이 일을 초래한 것일 수도 있어. 그런데 이 일을 대관절 어디다 하소연하겠니? 속에다만 담아뒀다가 이제야 너에게 얘기하는 거야. 바로 너에게! 너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면 혼자서 속앓이만 했을 꺼 같아. <헛소리!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어디다 말해도 대책이 없잖아. 그러면 이럴 꺼 아니야. <그러면 어쩔 껀데? 그 다음에 뭘? 어떻게? 그게 다야? 그래서? 어쩌자고?> 어떻게 이렇게 일반인의 삶이 영화처럼 흘러갈 수 있는 거지? 내 삶이 꼭 소설 같아. 이름은 뭘로 할까, 나장편? 우리 삶은... 그걸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은데. 특별한 포장을 위한 충분한 내용의 분량 면에서 말이야.」
이렇게 조니와 마크는 W 지점의 가운데 꼭지점에 위치한 찻집에서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주변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잎파리가 뾰족하고 또 적당히 넓고 울긋불긋 나무 모양이 멋진 수풀이 우거진 녹지 공간이 보인다. 기린도 보이고 양들도 있다. 개들도 뛰어놀며, 8시 방향으로 운전해서 약 2시간 정도 가면 대관람차가 있고, 4시 방향으로 걸어서 20분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알록달록한 카누를 타기에 딱 좋은 강이 위치한 경치로 둘러쌓인 어느 오두막이 있다. 한적한 숲속이다. 동화에 나와도 될 것 같은. 그 오두막 창고에는 윈드 서핑이 있고, 잡다한 도구들이 보인다. 해먹은 거의 쓰레기가 됐고, 고급 흔들의자는 망가져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골 같다. 가시거리가 매우 좋은 날은 저 멀리 등대도 보인다. 말만 오두막이지 고품격 별장 같다. 창고는 그렇고 오두막 내부에는 가만 보자, 한눈에 죽 둘러보니 에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보이기는 한데 그런데 그 용도가 좀 미심쩍다. 그리고 사진 출사를 다니기 위해서인지 최고급 라이카 카메라가 보인다. 물론 커다란 사진이 벽면에 붙여 있다. 달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글씨는 매우 매우 작고 그림이 거의 전부다. 해상도가 기가 막힌 누드 사진이다. 물을 규칙적으로 주질 않아 말라비틀어진 선인장 화분도 보인다. 핸드폰은 꺼져 있다. 바람 빠진 럭비공 옆에 자동차 열쇠가 놓여 있다. 브랜드 로고가, 로고가 음 탐난다. 한쪽에는 소형 바도 설치되어 있다. 분홍색과 하늘색 네온 사인으로 <에딘버러의 가을>이라고 오두막 사무실 내부에 빛을 퍼트리고 있다.
여기는 어디일까? 이곳은 알렉스의 작업실이다. 그가 울적하거나 외롭거나 그냥 심심할 때 찾는 혼자만의 공간. 그는 최근 게임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한동안 동적인 취미에 몰입했다. 그래서 온갖 스포츠를 두루 경험했다. 한두 가지 경기에도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곧 재미없어졌다. 그 후 혼자만의 공간을 오랫만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방금 케빈이 방문차 알렉스의 혼자만의 공간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서로 묻고 답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알렉스가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케빈이 묻는다.
「오, 알렉스! 아니겠지만 혹시, 해서 묻는건데 그거 뭐니? 뭘 그렇게 막 섞고 짓이기고 만들고 있어? 뭐 동물 밥 같은 거 만드는 거야?」
「아, 이거? 낚시 미끼 만들고 있어. 나는 일년 중 이맘 때가 되면 이상하게 말이야, 나도 모르게 막 낚시가 하고 싶어져. 이유는 모르겠어. 또 나는 나만의 낚시 미끼 만드는 비법이 있거든. 세계 곡물 생산량 1위를 주원료로 사용하여 식물성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지. 뭐 더하기 뭐 더하기 뭐 해서 반죽 후 숙성하면 돼. 물고기가 썩 좋아하는 음식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건 그들에게 일종의 건강식이지. 또 어차피 잡혀도 바로 방생될 꺼고.」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그렇다 쳐도 저건 뭐니? 혹시 마약 아니야? 힘들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털어놔 봐. 여자 문제야?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혹시 저거 코케인? 아니면, 최고급 유기농 밀가루?」 책상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져 있고 거기엔 고운 미색 가루가 약간 쌓여있다.
「하-하-하. 땡! 틀렸어. 아니야. 저거 아스피린이야. 그걸 가루낸 거야. 가끔 먹던 거 빻아서 선인장 줄려구. 나그네여 오해하지 마시게나. 즐거운 인생, 행복한 세상 아닌가!」
「아, 그렇구나! 난 혹시 아마데우스와 마스네를 듣고 자란 세계 곡물 생산량 만년 2위인 밀에서 직접 채취한 밀가루라면 그걸로 빵을 만들어볼려고 그랬지. 난 요즘 한 달에 하루는 빵을 만들어. 새로운 거도 해 봐야 할 꺼 아니야. 알고 보니 귀공자 타입의 남자들은 모두 그런 기술을 습득하고 있더라고. 비밀리에. 나도 빠질 수가 있나, 주저해서도 안 되고 엉거주춤 암중모색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 외에 요즘 하는 일은 뭐가 있냐면, 뭐가 있을까. 음 햇빛, 바람, 물, 태양, 우주, 나무, 금, 흙, 행성 이런 단어를 인쇄해서 벽면에 붙여놓고 바라보며 10분씩 명상을 하지. 커피콩 키우기, 예쁜 찻잔과 컵도 수집해. 알렉스는 어떠셔? 넌 요즘 뭐 재미난 일 없니?」
「나도 뭐 색다른 건 없어. 보시는 바와 같이 강에 가서 카약 타면서 낚시 좀 해볼려구. 그리고 사진도 좀 찍고 개인 블로그도 다시 살려서 새로운 걸 올릴려고.」
「음, 그렇구나. 그런데 소식 들었니? 애들이 뭔가 이상한 징후를 느낀다고 하던데. 뭐 이상한 거 찾으러 먼저 자기들끼리 조 짜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슬슬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애들이 뭘 막 규탄하네, 공동 소설은 해명이 필요하고 취소하자네 어쩌자네 하면서 정말 정신병원에 진료 예약이라도 하면 어떡하냐? 거의 우리가 꾸민 작전의 목표가 달성되어 가고 있는데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잖아. 방심하면 안 돼. 운수 나쁘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닦아놓은 초석과 앉아야 할 상석은 모두 허사로 돌변해버리는 수가 있어. 실은 우리가 예상 기간을 좀 길게 잡긴 했지만 그새 애들이 우리가 짜놓은 미로에 벌써 빠져버렸지 뭐냐. 우리가 한패라는 것, 그녀는 가상 인물이라는 것 그러나 그녀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런 만남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 꺼야. 아마 우리의 환상 머쉰을 보면 깜작 놀랄 꺼야. 충격 받을지도 몰라. 타임머쉰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건 알겠지만 환상 머쉰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을 걸. 저번 달만 해도 우리가 절반쯤 개발한 기계가 고장나기 일쑤였지만 비로소 이제는 완벽한 환상 머쉰으로 정상 작동하게 되었으니 이건 뭐 거의, 제 몇 차 산업혁명이나 TV, 인터넷에 버금가는 신기한 혁신품이라고 할 수 있을 꺼야. 이거 하나면 굳이 과거로 가네, 미래로 떠나네, 드라마 언제 나오지, 영화로 만들어지면 괜찮겠는데 하면서 무심코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어리둥절하겠지만 가짜도 아니잖아. 예시로 딱 몇 가지만 되는 거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만 입력하면 모두 다 가능하니까 이건 거의 어린이의 꿈과 모험도, 소년의 신비와 환상도, 소녀의 낭만과 문학도, 숙녀의 사랑과 동경심까지 뿐만 아니라 노년의 회춘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뭘 해도 재미없는 중년에게도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과 청춘과 행복과 천연 도파민을 이용한 쾌락마저 만족시키는데 이건 정말 가히 기막힌 발명품이라 할 수 있지. 만세 만세 만만세로다, 우리의 환상 머쉰! 여기 있소이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짜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구. 하하하. 푸하하하핫. 음하하하하하핫. 그런데 너 요즘 보니 왜 그렇게 말을 길게 하니? 쉬지도 않고 하나도 막힘 없이 꼭 긴 명대사를 외우는 것처럼 한 호흡으로 쫙, 꼭 글로 씌여진 분량을 암송하고 연기하는 거 같아. 미리 송시로 써 놓고 외운 거 아니냐? 사랑의 찬가일 리는 없고. 원래 전에는 주로 단답형으로 말하다가 어쩌다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을 때만 말을 길게 했었던 듯 한데, 어떻게 된 거야? 환상 머쉰 때문에 들떴니? 혹시라도 짧게 말하면 그대로 말 따라 할까봐서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거니?」
「오, 그럼!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말 따라하기 놀이를 할 나이는 아니잖아. 또 다른 이유는 말을 꺼냈다가 금새 할말이 끝나버리면 왠지 허기가 지고, 거기서 말을 더 지어서 하게 되고, 그러다 말을 그치면 그 말이 허위로 판명날까봐 겁이 난달까? 그래서 곧바로 다음 말을 하고,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 보면 언뜻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져. 나도 모르게 긴 대사를 뽑게 돼. 왜 그런가는 모르겠는데 검집에서 검을 딱 뺏는데 막 반 토막 아니 반의 반 토막만 남은 댕강 부러진 검이 나올 것만 같은 강박증? 그런 이유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그 세번째 이유는 이거야. 제임스가 요즘 이상한 화법을 구사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그게 생각나서 따라하게 되는데 그걸 따라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일부러 말을 길게 말해. 그 이상한 식으로 말하는 거 있잖아. 모든 말 끝마다, 어? 어? 한번 말하고 나서 어? 심심해도 어? 꼬박꼬박 어? 말하는 문장 중간에 여러 번 어? 계속 어? 그런 거. 이런 건 전형적인 술꾼 그 가운데서도 아주 좋게 말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어법이잖아. 근데 녀석이 그걸 따라하니까 엄청 웃겨. 어쩌다 나도 모르게 막 따라하게 돼. 그런데 있잖아.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일단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자연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 첫째, 아 따라하는 거 같아서 싫어 난 최초가 될 꺼야 첫째가 좋아 이제 그거 안 할래 나 따라하지 마! 그리고 둘째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또 따라하는 게 뭐 어때서 모방은 창조의 어미닌데.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때에 따라서 첫 번째를 써먹고 싶어질 때도 있단 말씀이야. 하지만 흉내는 흉내고 장점을 본떠서 최고의, 최초의, 최대이자 최상이 되고 정 어렵다면 꿩 대신 닭이라도 잡을 것. 바로 그게 인터넷 시대의 가치잖아. 그처럼 말야. 그거 말곤 별다른 이유는 없어.」
「어쨌든 애들은 상상도 못했을 꺼야. 환-상-머-쉰! 이름도 멋져. 그런데 발명가나 창업자는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는단 말야. 혹시 뭐 비속어로 바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되잖아. 어느 벤처기업에 일부 투자했던 거 빼서 여기다 썼는데 말이야. 뭐 그건 아직 미지수지만 차차 알게 될 테고, 이거 애들에게 알려주면 뭘 먼저 고를까? 꼭 어린이가 방에서 읽을 동화책 고르는 거랑 똑같잖아.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몸둘 바를 모를 꺼야. 공상, 마술, 상징, 전설 이런 장르의 작품을 먼저 시도할까 아니면 일단 곧바로 SF 소설 먼저 시도할까? 오오, 기대되는데~!」
알렉스와 케빈이 말하고 있는 환상 머쉰이라는 것은 2층 침대 만한 기계다. 그것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거기다 소설이나 영화 CD 또는 일정 정보가 담긴 USB를 꼿으면 기계와 연결된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은 첫째 사라지게 되고, 둘째 그 소설이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그 줄거리를 체험하게 되며, 셋째 거기서 살아도 되고 또는 정기 이용료를 지불하면 자기의 분신은 기계 바깥 세상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고 자신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작품 속 공간에서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알렉스와 케빈은 이것을 인터넷의 소셜 네트워크에서 링크를 타고 들어가 어느 웹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 봤을 때 또 2번째로 TV 홈쇼핑에서 봤을 때는 애들 장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서 밖에 나가보니 웬 방문판매원이 찾아왔길래 한 20~30분 얘기를 듣고서도 긴가민가 했다. 그러나 그런 여러 번의 고도로 치밀히 계획된 작업에 따라 그들은 어느 동기부여 강연회에 갔다가 우연히 환상 머쉰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거기서 사람이 실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강단에 올라가서 환상 머쉰에 앉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책과 영화 CD를 입력해 보았다. 그래서 직접 그 느낌을 알게 되었다. 책과 영화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환각으로 또 실지로 경험했다. 그들의 말발에 완전 엮여들었던 것이다. 물론 마술사의 옆에 있던 여인은 누구였겠나,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오, 그녀! 대체로 유명한 소설과 CD를 준비해갔던 것도 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수작이었다. 처음부터 그 집단은 트위터로, 페이스북 이벤트로, 회사 동료를 통해서, 단골 술집 사장과 함께, 주기적으로 그녀는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세뇌 시키고 또 세뇌 시키고, 최면 시키고 또 최면을 걸고, 결국 다중 최면이 딱 절묘하게 막 100%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라졌어, 나도 경험했어, 친구도 같이 경험했어, 친구가 빠진 걸 목격했어, 공동 소설 소재도 얻고, 최신 유행을 선도하며 즐기고, 사업 지분도 얻고, 무명 블로그의 명성도 올리고, 출판사 줄 서고, 영화사와 판권을 계약하고, 언론사도 들썩들썩, 팬들도 들썩들썩, 상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고, 상을 수여한 후 축하의 말도 먼저 생각해놔야 하고, 팬들과의 모임이네, 학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매니저나 소속사도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골똘히 기쁜 걱정을 하고... 그야말로 인기든 부든 즐거움이든 두 마리든 세 마리든 또 토끼든 기린이든 뭐든지 바라기만 하면 그러면 될 줄로만 알았다. 환상 머쉰은 쥬라기 공룡 시대의 맹금과도 같은 신기한 존재였다. 입닥쳐 말포이! 해리포터의 사인이든 기원전 3,700년 전 엑스맨 시초와의 어깨동무든 뭐든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딱 여기서 끊고 자, 그들은 공동 집필 소설 세 번째 작품을 이렇게 준비하였다 막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데, 그러면 좋은데,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하는 독자의 예상과 착~ 하면서 결합해야 하는데 어쩌다 배가 산으로 간다. 알렉스와 케빈, 케빈과 알렉스는 이미 투자금도 넣고, 주식 보유 증서와 함께 그 기계 환상 머쉰도 받은 것이다. 정기 이용권을 단 몇 명만 구입해도 본전은 빼고도 남게 된다. 톡톡히 한 몫 건질 수 있다, 이론은.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그들 둘이는 최면이 딱 걸려있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 가상 체험을 정말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 환상 머쉰이 앞으로 잘 작동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 기실 그것은 기대고 애원이며 작은 희망에 불과했다. 그것도 헛된 소망! 기계는 아마도 짐짝? 나중 버려도 돈 주고 버려야 하나? 그때 가서 애들이 이러면 어쩌지? <그걸로 뭘 할 건데?> 설마 놀리기야 할라고! 독려하고 슬픔을 달래주기에 딱 안성맞춤인 상황일 텐데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일이고, 정말 애들이 토닥거릴지 풍자에 비꼼으로 일관할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게 된다.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환상 머쉰을 보란 듯이 친구들에게 공개했는가 안 했는가, 그건 건너 뛰자. 뭐 좋은 일이라고. 환상 머쉰이 미완성 고물로 들통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독차지 할려다가 죽도 밥도 안 된 경우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는, 단호한 추진력 그것은 마치 보통의 소비자들과 똑같고, 결제하고 나서 판돈 날리고 나서 그리고 마음을 빼앗긴 후 짓게 되는 애잔한 미소와 조금은 흡사한 구석이 있다. 자기-계발 부흥회에서 바람 잡고 무대로 올라오라고 했을 때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는데, 이미 지난 일. 어떻게 살려서 환상 머쉰은 폐기물로 재활용이라도 하고, 이 일은 이 대단치 않은 일련의 사태는 정말 웃으면 복이 온다고 유머로 승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저소득자에겐 큰 돈일 수 있지만 아니라면 경험으로 알고 액땜한 셈 칠 수도 있고, 또 그와 같은 지출로 얻는 지속적 경험제라면 먼저 알고도 속겠다는 사람, 절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의 그래프선이 중간에 갑자기 뚝 끊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알고 보면 그건 과대광고였고 그걸 본 당사자는 부풀린 분위기에 매료된 것이다. 결국 그냥 올해의 사건 중 하나 또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초딩들과 수업하고 있는데 학교로 마누라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서 샀냐고, 누가 꼬셨냐고, 왜 넘어갔냐고, 진공청소기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고, 말이 할부지 이거 총액을 생각하면 아 답이 안 나온다고, 당장 물르라고, 대체 언제 정신차릴 거냐고. 우리 선생님 꾸중들으시나 보다 라고 초딩은 생각하겠지만. 저 런닝머쉰을 구입하고 나면 집에서 열심히 운동할꺼라는 가정은 꺼이꺼이 날아가고, 기기에 대한 비호도 날라가며,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제 위치에 그냥 전시용으로 남든가 아니면 보살피기도 아깝다면서 창고로 폐기물 처리장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 머쉰의 팽창된 허식을 빼고 처음과 지금이 뭔 차이가 있는지 느껴봐야 한다. 그래서 환상 머쉰 앞에 가만히 슥 척 달라붙은 관형사? 맞나? (아는 사람 별로 없으니 이럴 땐 우겨도 된다) 그걸 이미 서둘러 떼버려야 했을까, 아니면 아직 그걸 모질게 떼버리기엔 꽤 무정한 것일까. 아, 수식어를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이거다. <우리> 같은 꾸밈어. 우리 뭐, 우리 누구 그리고 바로 우리 환상 머쉰! 오~ 그렇다. 유감이다. 그것도 매우 유감이다. 환상 머쉰? 어딘가 모르게 그런 각오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곳엔 가지 않아야 겠다고. 왠지 거긴 외나무 다리일 꺼라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곳이 어디냐면, 거기는 NC다. 슬픔을 이겨내면 괜찮은데 침체기가 좀 길어지게 되면 이러다 여차하면 퇴락한 번화가에 있는 후진 3류 NC를 찾게 되고, 또 거기서 우연히 마주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 그럴까? 예전에 알던 그녀, 예전에 알던 오빠 아니면 웨이터의 명찰을 어쩌다 마주치게 될 것만 같은 느낌. 그분도 내 슬픔을 알거나 또는 집에 그 물건, 환상 머쉰이 있을 것만 같은 동질감. 어떻게 이런 돈 주고 병 얻는 것 같은 비애를 유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처럼 환상 머쉰도 이쯤 되면 반품하던가 시간을 되돌리던가 하고 싶게 만든다. 당연히 판매처는 연락이 안 될 테고. 그러니 다음 번에는 정말 정상적인 제품만 사고, 꼭 필요한 물품만 또 제값을 주고 양질의 소비재를 구입하리라, 는 값진 교훈을 안겨주는 참 생각 많이 하게 만드는 환상 머쉰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것 하나는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자꾸 의문이 드는 건 꼭 누군가 그들을 조종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 뭔지 모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쎄한 느낌, 그것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면 제임스가 친구들을 저번에 괜히 불렀을까? 거 뭐야,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또 뭐드라, <제 버릇 개 못 준다>도 있었고, 맞다 무엇보다 <거북목 증후군>이 압권이었어. 그렇다면 그 삼거리에 있는 산업 폐기물 처리장 그 푯말을 보게된 건 우연이었을까? 우연치고는 뭔가 냄새가 난다. 정말 그렇다. 따라서 이쯤 되면 공동 작품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도 의심이 가게 된다. 때문에 그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된다. 그녀? 그녀라... 그녀라... 음, 의뭉스러워, 오, 그녀라... 정말 이게 다 뭔지 모르겠다. 제발 누가 말 좀 해 주시라. 이건 블로그에 올려질 공동 집필 소설 제 3편이라고. 서술자는 평범한 작가도, 인간도, 그렇다고 정상 작동도 시원찮은 환상 머쉰도 아닌 바로 춤추는 마법의 구두라고! 다시 말하지만,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동화라고! 아시겠소?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왜냐하면 이건 실은 독자가 서술자거든요. 작가? 거창한 수식어? 뛰어봐야 독자 손바닥입니다. 당신은 사실 이렇게 작품의 끝을 맺고 싶지도 않았고, 어떻게 끝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도 스스로에게 되물었죠. 자꾸만 그분이 대체 누구고, 어떻게 생겼고, 정말 사람 목소리가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뭐라고 되물었냐구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니, 가 아니라 그건 이거였어요. <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진짜 환상 머쉰인지 환상 밥통인지 그것이 사람 질색하게 만드는군요. 당신은 그야말로 헛소리의 달인이에요. 이래도 고분고분 인정하시지 않으실 꺼에요? 원래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데, 올라갈 뻔 하다가 다시 내려간다구요? 이런~ 젠장! 당신은 말대꾸하실 자격이 없는 분이세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을 해보세요. 아니라면, 정녕 아니라면 그분이 당신이고, 당신이 그분인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저 그분은 뭐랄까, 그분은 거식증 같은 것? 뭔 소리야! 계속 딴청만 피우시고 아주 요지부동에 소신 있으십니다 그려. 재량껏 열린 결말을 추리해보자면, 음 추리는 무슨 추리에요 그건 모두 다 허세 같아요. 그냥 작가는 공동으로 하는 것으로 할까요? 그래요. 그냥 이 모든 일이 모두 졸렬하게 느껴지는군요. 사람이 너무 무엄하고 뻔뻔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독자님 면전에서 어느 안전이라고 그 용안을 뵙기도 힘든 일인데 자꾸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만 같고, 한마디로 꼭 죄를 짓는 것만 같아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묵념이라도 해야 할 꺼 같아요. 정말 그렇다구요.
자, 보아하니 그대는 큰 교훈을 전달하고 싶어서 현실 속에서 직접 주인공을 체험한 것인가요? 음, 그렇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대체 그것은 무슨 교훈일까요? 세상사를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라, 적당히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 인생을 사노라면 크나큰 또 자잘한 고비와 험난한 파도는 많다 그러나 파도타기를 즐기다보면 아찔한 미지의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뭐 이런 판에 밖은 교훈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뭘까요? 그건 이것일 꺼에요. 당신은 바로 이로써 현대인에게 그리고 지금 세상에 또 미래에도 이와 같은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군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가 현실에서 통한다는 것을! 여전히! 언제까지나! 나는 당신이 오늘 신은 양말이 무슨 색깔인지 속옷 모양이 뭔지 훤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분에게는 손바닥 보듯 훤히 보이시질 않겠어요? 헉, 그대 팬티에 구멍이 났군요. 아직이라고 틀렸다고 좋아하신다면 해가 기울어 저녁이 되면 아차 하실 겁니다. 그때 빵구날 테니깐요.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뭔가가 좀 과한 것 같군요. 그래서 대화체를 일기체로 바꿔볼께요. 무언가 모르지만 정말 뭔가가 너무 튀틀렸다. 일이 심하게 어긋났다. 그래, 정말 그렇다. 당신께 누군지 모르는 당신께 나직한 음성으로 다시 묻고 싶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당신, 그분인지 뉘신지 모르는 당신, 내 당신, 우리 당신! 말 좀 해보세요. 정말 이 말이 들린다면 이 애절한 기도를 보신다면 대답을 해보시라구요. 네? 네... 오... 오... 보인다 보인다... 내려온다 내려온다... 당도했다 당도했다... 마주 본다 마주 본다 좀 더 가까이 가까이 아 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여 그분이 오셨다 그렇구나. 뭐 뭐 뭐라고? 오호, 인정한다고? 음, 꽤 양심적인 어른이군. 난 또 어둠의 세계를 생각했지 뭔가.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 그동안 이상한 책도 너무 많이 읽어서 쥐뿔도 모르면서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보니까 아주 그냥 상상 속에서 살았던 거야. 퍽하면 공상이야. 못 봐주겠어. 안 되겠다고. 그러나 이건 내가 봤을 때 실화가 아니야. 한 편의 드라마라고. 그러니까 이걸 어, 무명 블로그에 올렸으면 좋겠어. 3번째 친구들 공동 작품으로 말이야. 어, 어때? 응? 뭐, 그럴 생각이었다고? 능청은! 내가 웹사이트에서 티셔츠를 하나 주문해서 선물해줄께, 친구. 티셔츠 앞에는 이런 문장이 씌여있을 꺼야. <우리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거지?> 허나 생각이 바뀌면 말하시게─티셔츠 주문 취소하고, 취소 안 되면 내가 줄여서 동네 돌아다니는 개에게 입히고─티셔츠 주문 취소하고 1회용 문신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자네 정말 그럴 꺼였음 연기를 한번 진지하게 해보지 그랬나? 왜 그 생각을 안 해 봤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뭐? 벌써 옛날에 해 봤다고? 긴 명대사를 못 외우겠다고? 또 그건 관심도 없다고? 게다가 그쪽 외양도 아니라고? 그런데 뭔 변명이 그리 많어? 아예 그냥 긴 명대사를 써서 배우들을 환상에 빠지게 만들고 싶다고? 또 그 연기를 보고 재차 환상에 빠지는 시청자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겠다고? 이거 이거 이 사람 이거 제정신이 아니구만. 이 사람 이거 인간이 아니야. 당신이 아무래도 환상 머쉰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 생각이 절로 들구먼.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어. 그러니까 환상 머쉰인가 뭔가도 만들어서 팔 수 있었겠지. 다 안다구. 이해해, 친구. 뭐? 좀 크게 좀 말해. 건들거리지 말고, 두리번거리지도 말고, 주머니에서 손 빼! 뭘 말할지 이젠 나도 알아. 대충 예상한다니까. 말이 너무 많다고 그럴려고 했지? 자네 속마음이 훤히 드려다보이는군 그래. 자네 이제 보니 그동안 너스레도 많이 늘었군. 그런 모습 보기 좋아. 썩 좋아 보인단 말일세. 으흠. 그렇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어. 뭐랄까, 잠시 삼천포로 빠질 꺼 같아 미리 칸을 띄우는 게 낫겠네. 살면서 때로는 인문학을 넘봐야 하지 않겠나. 때와 장소에 따라 멋진 말이 필요하기도 하잖나, 안 그런가?
음 뭐랄까 자네는 너무 어, 그 있잖아. 그대는 모든 게 은근슬쩍이야. 하지만 천성이 그러한데 또 자네 인생인데 뭘 어쩌겠나. 다만 그런 모습에 어쩌다 그녀가 홀딱 넘어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걸 보는 어떤 상남자는 다만 아~주 극미하게 속이 메슥거릴 뿐이겠지. 물론 찬미하고 축하하는 감정이 99퍼센트일 테고. 아, 나는 아니라네 절대 아니라네. 단지 그 뿐이야. 그럼. 음 그래. 왜냐하면 시인하기가 꺼림직하지만 미미하나마 그 또한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니이니까. 지구에서 2억년 넘게 번식했으나 지금은 멸종한 동물인 공룡, 또 현존하며 북극권 부근까지 서식하는 예쁘지 않은 어떤 생물과 인간이 정확히 공통된 습성이 있는 것처럼. 기원전 27년부터 1453년까지 로마제국이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다가 지금은 수십 개의 나라로 나누어진 것도 인간이 지구에서 한 일. 가까운 근대에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때 그곳에서는 신사 - 결투 - 귀족 같은 근대 서구 문화의 인습 때문에 시작에 대한 선언이 있었던 것일까? 또 제2차 세계대전은 왜 시작되었다가 흐름이 어떻게 꺾였고 또 왜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어른들도 때로는 여전히 그 얘기를 하며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독일어가 인기없던 시절에는 대표적으로 정확한 대명사가 있었네. H라고. 구글 트렌즈 그래프로 봐도 확인되듯이. 허나 그건 하나의 성이야 에르메스처럼. 미스터 에르메스가 엄청 많다는 걸 잘 않잖나. 또 그걸 지구 반대편에서는 슈퍼마리오가 대신할 수는 없지. 참 애매한 긴 이야기도 있었고. 전쟁에 관한 보통의 또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뭘로 가장 손꼽는 하와이 진주만 습격, 그것만 그럴까? 과연? 무엇이? 내가 사는 도시와 산업과 문학작품은 물론이요 수많은 말과 글에서 말하는 부조리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 것이라고─자 이제 들어갑니다 준비하세요─돌림판을 돌리겠습니다 준비하시고 자 (화살을) 쏘세요 라고 로또 번호 당첨하듯이 예고하고 친절하게 알리고 발생하던가? 로마 제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당시에는, 그와 달리 자 살살 합시다 살살 하자구요 벤치 클리어링 보여줬으면 우리도 어색한 자리가 되었지만 서로 얼굴 봤으니 이제 그만 적당히들 하고 돌아들갑시다 자 옐로 카드 나가십니다... 그랬을 꺼 같지는 않아. 그 또한 모두 인간의 본성이 원인. 학생들이 배우거나 어른이 아는 우리나라가 어느 국가가 옛날에 영토가 이만할 때가 있었구나, 도 그렇고. 고대 7댄가 8댄가 불가사의는 물론 어지간한 세계 문화유산은 적지 않게 피와 땀과 눈물과 슬픔으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예측? 추정? 진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군.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멋진 건축물과 장엄한 풍경이요 내가 살고 누리는 풍요로운 세상이지. 글을 읽으면 드러나지 않는 행간을 읽고, 그림을 보면 숨겨진 비밀을 모조리 파악하고, 음악을 들어도 남에게 저는 평소에 이런 음악을 듣거든요 그러고서 진짜 정말 고전음악만 듣고, 그렇게 보통 사람들이 소일할까? 천만에! 그건 희망사항, 아니겠나? 아니라면 교수님일 테고. 세상이 정말 아름다울까? 사랑을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까? 사랑은, 있을까? 그건 그냥 달콤한 사탕 같은 거 아닐까? 세상은 요지경, 아닐까? 세상일은 결국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그런 원리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자꾸 말 끝나마 아닐까, 라고 해서 말하는 당사자도 썩 부담스럽네만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다 엄한 데로 가버렸는지 괜한 청각과 눈요기를 담당하는 지각만 발달되는 것 같아서 나도 자꾸만 듣는 사람과 읽는 독자와 험담에 두각을 나타내는 좌중과 신선함이 바닥난 험담가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의중을 상상하게 된다네. 어쩌겠나, 뒷짐지고 눈을 감고 몸을 30도 정도 옆으로 틀로 고개를 위로 슥 들어올리면서 머리 위로 수증기가 한무더기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보는 수 밖에. 그렇지만 실내에서 그런 생각만 하면 따분하니까 어딘가 관광지로 떠나면 또 시대적인 배경을 누군가 설명해주겠지 친절하게 말이야. 그러면 둘 중 하나잖아. 졸음이 몰려오든가 슬쩍 기념사진을 찍으러 자리를 피하는 거. 물론 솔직히 자네와 난 거기 해당되지 않는 셋째지. 그건 뭐? 아찔한 지성! 이런 거 모르는 사람 없지 않나. 어허, 이런 말 하고 나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든가, 하인에게 눈짓을 하거나, 로시난테 어디 갔냐고 산초 어디 숨었냐고, 정녕 고귀한 이상주의 그 금단의 열매는 어디로 가버렸냐고 누가 몰래 덥썩 따먹었냐고 내 몫은 남았냐고 혼자서 대사 있는 무언극이라도 해야 하거늘... 아~ 수염도 없고, 하인도 없고 형편도 궁하고, 기력은 딸리고, 모르긴 몰라도 친구도 나도 그녀도 돈키호테를 한 번도 정독하지 않은 듯 해서 마음이 씁쓸하군 그래. 자네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네. 이게 다 하늘의 뜻이고 인간의 일이야. 정말 미래에는 말이야, 이와 같은 시간의 역사가 책에서 단 몇 쪽만 할애할 꺼라는 걸, 난 모르는 척 할꺼야. 아마 그렇겠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10세기나 1000세기 후에는 모두 축약해서 인식할 것이라는 냉엄한 예견 또한 다른 동물이 아닌 온전히 인간의 일. 브라질은 삼바, 아르헨티나는 탱고, 캐나다인을 보고 미국사람이에요 묻거나, 벨기에의 초콜릿, 스페인의 투우, 핀란드의 산타마을, 그게 다가 아니라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사람 사는 데는 다 그렇다구.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있는가, 는 딱 똑부러지게 확답하지는 못하겠어. 그건 여기서 말하기가 썩 곤란하다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그 포괄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인간 문명이 이렇게 발전했으니까 또 앞으로는 타임 머쉰도 환상 머쉰도 만들어질 수도 있을 꺼라고 예측해도 썩 비윤리적인 일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일세. 어떤가? 나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꺼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네. 자네는 답을 안하고 말을 아껴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참 탁월한 친구로군. 흐흠.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난 나중 어떻게 살 꺼야 행복한 가정을 꾸릴 꺼야 미래를 그리면서 어른이 된다. 훗날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되어 보니 이제 비로소 오오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좀 더 어른스럽게 살아야지 다짐하고, 내 아이가 크면서 아빠를 하나하나 다 따라하니 나를 보고 배우면서 크니까 아 모범이 되어야겠다 착하고 성실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야겄다 허튼 길로 빠지지 않겠다, 고 다짐하지만 그게 어디 그라고 됩디까? 네? 거 마 그게 어디 그라고 맘대루 되던가요? 네? ... 웬~걸! 돌아서면 곧바로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재 개그를 공부한다니깐요. 인도에서 가장 요가를 잘 하는 사람은? 꼰다리또꽈. 아랍의 가장 열성적인 지도자는? 하나라도 더 알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자선 사업가 이름은? 더 달란 마리아.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사는? 더 드셩. 그렇게! 어디에 쓸려고? 모르겠어! 소설에서 중간에 딴 얘기가 나오는 것처럼, 비유는 적절치 아니하나, <이번 한 번만>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왜 제멋데로일까, 나는 왜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격 좋다 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내가 그런 말을 못하게 막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러면 안되겠구나, 너무 지나치게..는 깐죽(깐족)거리지 말아야지, 악역만 맡지도 말아야지, 그러지만 그 다음은! 그 또한 인간이란 종의 본성이다. 그러나 낙담은 금물.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일어서고 새롭게 거듭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는 의지 역시 그것 음성적인 인간-종의 본성과 분명코 한통속이니까. 갑자기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드니 왠지 모르게 사랑이 멀어져가는 남자의 심정을 토로하는 옛 노래가 듣고 싶군. 그런 노래들 정말 많지 않은가. 아주 부지기수지. 5분쯤 되는 노래 말야... 우린 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달라 당신은 당신이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그녀를 택할 용기 있나요······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내가 물러나요······ 당신이 아닌 그녀를 위해... 그런 음악을 듣고 싶어 지금 말이네. 철지난 유행가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르겠지.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아성에 짓눌린 권선징악의 불분명함과 설움과 모순 같은 거. 또 그때 그 기억이 떠올라 착찹하군 그래. 옛날 자네처럼 팔팔한 나이에 어느 레스토호프에서 시간제 일을 하다 그만둔 적이 있는데, 당시 가게 사장을 같이 일하는 친구와 같이 좀 꺼려했다네. 호감이 없었으니까. 싫어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그때 감정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하니까 애써 부정하는 거 보단 차라리 말을 돌릴 꺼야. 안 친하면, 호감가지 않으면, 왕래가 없으면 왠지 꺼려지는 사례 얼마나 많냔 말이야. 나중 친구와 일을 그만두고 한참 지나서 뭐 재미난 일 없나 찾다가 발길을 끊은 그곳에 한번 들렸지. 이제는 손님으로 통기타 음악을 들으면서 맥주를 마실려고. 거기서 아직 일하던 전-동료에게 들었어. 그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그 자리를 미망인이 대산하고 있다고. 거 참 기분 이상하더군. 누군가는 그런 일을 육성으로 듣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볼 수도 있을 테고. 희미하고 옅었겠지만 좋아할 수는 없더래도 미워하지 말껄 가짜 웃음이라도 좀 건네줄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첫인상부터 뒷모습까지 그럴 여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학교 다닐 때 학년이 올라가면 또 살면서 어디를 가든 괜히 얄미워보이는 사람이 한둘 있긴 마련이만 말이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도 핀잔받을 일이 억수로 많네만 이제야 깨닫는 일도 많아. 뭐 몇 살이 되면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몇 살에는 하늘의 명을 알게 되고, 몇 살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딱 몇 살이 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모든 성인이 그렇다고? 순 뻥이야. 생거짓말이라고. 자, 이제 노래가 준비됐으면 틀어주게나. 지금 이 시점에 기분 전환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혼잣말) 아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귀에 뭐가 들어갔나? 속도 괜히 더부룩한 거 같은데, 이 허전한 팽만감은 뭐지 뭐지? 아 나 이런 이거 이거 이제 안 아픈 데가 없군 그래. 이런~ ...!
결국 용의자 X의 선상에도 오르지 못했던 그 얼간이가 그 일을 모두 기획하고 조종했을 줄이야... 오, 이럴 수가! 탐문할 빈틈이 너무 많아서 일하기 싫게 만드는 부류, 전문가를 잘 아는 사람일까 뭘까. 입 아퍼 그런 말들. Y 파일에 기록되고 보고된 녀석의 별칭은 이랬다. <평생 소원이 누룽지> 어머나! 좌우지간 그 환상 머쉰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발이 달려 뛰어갔나 누가 몰래 뜸어갔나? 이젠 임자도 없을 텐데, 정녕 그대는 어디로 가셨나요? 그분 곁으로? 혹시 그곳이 환상관이라면 약속을 지킬 자신은 없지만 편지 하겠노라고 내 마음을 고이 접어 보낼 텐데, 바람에 실어서. 그러나 여기서 잠깐, 혹시 이거 삼각관계가 아닐까? 그분은 그녀를 보고파 하며, 그녀는 환상 머쉰을 타고 환상관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몰락한 영주가 하는 말은 이럴 꺼야. 뭣이야 네가 헤라라도 된단 말이냐, 썩 물럿거라.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은 행차하시지 아니하고 웬 미친년인지 말괄량이가 자기가 그분이라고 소리치며 득세를 하고 독무대를 만들려고 발광하는 모습이라니, 보기에 안스럽고 무척 딱하며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로다, 그렇게! 꾸밈없이 말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렀던 환상 머쉰, 그 어느 르네상스적 인간도 고안해내지 못한 마술상자, 작품에는 있겠지만 실존하지 못할 운명의 그것, 공익을 가져다주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는 커녕 괜히 몽상가와 방랑자 그리고 어설픈 동기부여 업계 후발주자들과 그의 호객들 주머니만 가볍게 만들며 소란을 일으킨 것 같다. 겨우 잠잠해졌어.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러나 다시 생각나. 잊혀질만 하면. 아 이런 주로 비탄이 즐비하지만 그러나 티끌 만큼의 영감은 겨우 가까스로 건진 듯 하다. 이제 복사기나 프린터기, 자동판매기, 스티커사진 기계, 카페에 있는 커피 머쉰만 봐도 그것, 그분 즉 <환 - 상 - 머 - 쉰>이 떠오르겠군. 아~ 큰일이다 큰일이야.
다만, 환상관이 산업 폐기물 처리장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오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