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o and Jeanne-Claude | Projects | Surrounded Islands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보고 자란 A(나)는 훗날 인류고고학자 및 세계역사학자가 된다. 몇 년에 한번 쯤 사학기행이란 것을 시도한다. 그냥 여행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 세계 3대 무덤이라는 일본 사카이시의 닌토쿠료 고분,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그리고 중국 진시황제의 능은 옛날에 모두 다녀왔다. 하지만 일상 공간을 보면 어딘가 삶은 마치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흐름을 보이는 1900년 즈음 유럽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닮아 있다. 왜냐하면 대학교수라는 자신의 직업 때문이다. 그는 명백하게도 너무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초일류가 아닌 사실을, 그럴 것이라는 예견을 잘 엿보았기에 학자라는 장기적 직업을 위한 표면적 직장을 일찍이 잘 구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다른 교수들? 고리타분하고 몹시 의뭉스러운 노학자들이 많다. 지성의 전당에 매일 출근하는 학생들?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고 날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맨날 희희덕 거리면서 뭉쳐 다닌다. 꺼벙한 녀석들. 어제 술 먹었는지 오늘 먹을지 이젠 대충 보면 감 잡는다. 수업시간? 강의실 제일 뒤에서 떡대 좋고 험상 굳은 학생이 한쪽 귀에 요원처럼 이어폰을 끼고 있지 않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을 꼬시려 하는 또는 반대로 그런 격정을 이끌어 내려는 출중한 미모를 뽐내는 학생도 거의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수업 시간이면 꼭 초딩처럼 내 강의 멘트의 끝말을 따라하는 무거운 목소리의 잘 생긴 남학생이 오히려 나보다 더 애들을 웃긴다. 아주 뻥뻥 터트린다. 그렇게 강의실이 들썩들썩 하는데 어디 개그맨 시험이나 보러다닐 것이지 왜 나의 썰렁한 강의실을 찾아오는지 모를 일이다. 학점이 후하다는 입소문이라도 없었다면 이 짓도 못 해 먹었을 것이다. 블링킹인지 씽킹인지 알 수 없는 그 표정들, 재수없다. 가끔 만나는 오래된 친구들은 모두 좋은 마크의 새해 출시된 차를 모는데 A는 나름 어떤 특이함을 유지하고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클래식 차를 몰고 다닌다. 눈치 없는 조교는 이런 말까지 한다. "교수님, 그거 돈 주고 사셨어요?" 그 조교는 이사장과 같은 희귀 성씨다. 인생의 내공을 총동원해서 유도 심문을 하는데 어디서 특수 훈련을 받았는지 꿈쩍도 안한다. 제기랄! 그 외에도 끝이 없다. 어려서 봤던 멋지고 재미있는 인디애나 존스. 그를 동경해서 그를 닮은 고고학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보니 인디애나 존스는 커녕 한숨만 나온다. 또한 다스 바이더라고 어느 학생들이 놀리는 것 같다. 오 이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허구다. 영화가 인디애나 존스면... 그나마 다행이다. 초딩 이상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약간의 상상을 그냥 기록해봤다. 알록달록한 거 좋아하는 초딩을 얕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A교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초일류가 아니면 삶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자신의 개인 작업실에 침대를 들여놓아야 할 만큼 뛰어난 능력의 천재 작곡가? 매우 드물다. 그런데 작업실에 침대를 왜 들여놔? 보통 사람들은 일평생 이런 사람들을 단 한번도 만날 수 없다. 값비싼 고급의 그럴싸한 007 가방을 들고 다니는 수트맨조차 구경하기 힘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마라"는 카피라이트(모토)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A급 요원을 평생 1번 만나기도 힘들다. 하긴 '나 요원이요'라고 명찰을 붙이고 다니는 이도 없고 노출이 되면 그게 어디 요원이겠나. 평균을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율하고 설레고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을 사람들은 살면서 쉽게 경험한다. 그것을 이 세상 인간계 용어로는 일상이라고 부른다. 1차적 운동을 하고 4차원 밀크 쉐이크를 제조하며, 극장에서 가슴이 뛰는 영화를 보면 관람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100m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심장이 뛴다. 놀이공원에 가서 바이킹과 여러가지 이름의 놀이 기구를 탄다. 야구장에서 술 먹고 으쌰으쌰한 후에 도로에서 떡실신 한다. 아프리카 자전거 종주를 한다. 콜롬비아 경보 대회에 나간다. 미술관 큐레이터의 눈빛이 아닌 뒷모습만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일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하는 구두굽 소리를 듣는다. 우연히 동네 야구하러 갔는데 골든 리트리버 동호회 모임을 보게 된다. 베네쥬엘라 미녀를 만나러 베네쥬엘라로 가본다. 이런 일상과 떨림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육체 활동 외에도 독서하는 가운데도 번쩍임을 구경할 수 있다. 하품 나오는, 읽는 중간 때려 치우고 싶은 충동을 애써 가라 않히는 순간들이 틈틈히 찾아오는 책들을 보면 밑줄을 긋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건강한 독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페이스북 피드에 씌여져 있다. 이렇게. “In the way that women forget the pain of childbirth, men forget that they cry in movies.” - Nora Ephron
   토마스 만이 말하는 감각성의 극치를 구현해 내며 세계 연주 여행 스케쥴이 5년 앞까지 꽉 차 있는 사람은 이상이다. 그런 연주를 YouTube로 집에서 보는 또는 듣는 사람은 현실이다. 챔피언스리그를 보러 로마에 가고 마라톤 뛰러 베를린으로, 북극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아니 적지 않다. 그런데 스케일을 줄이면 달라스 안에서도 이거 다 할 수 있다. 백화점만 가도 작은 미술관과 극장까지 있다. (아 백화점 안에 극장이 없는 곳도 있다) 그러면 가짜 에드워드 G. 로빈슨은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넌센스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가짜 에드워드 G. 로빈슨이 할리우드식 악인은 아닐 것이다. 논점은 이상의 기준선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차이를 편하게 아주 자연스러운 고상한 분위기로 대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유럽 빅리그를 이야기 하는데 달라스 FC 축구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관중들이 적당히 만족해야 하는데 달라스 구장에 와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과 세리아A 선수 이동, 라리가 구단의 챔스 성적을 말하면서 달라스 FC 선수들의 움직임을 본다. 뾰루퉁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독학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 가능한 축구라는 분야에서 십대 시절에 달라스 루니라 불렸고, 현재 회원제 개패 사장과 동물 행동교정 전문가로 쓰리잡을 뛰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선수들인데 말이다.
   또 다른 이상은 무엇이 있을까. 강아지 대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뉴스를 보면 강아지의 혈통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 하이브리드다. 또는 일반 가정집에 있는 전원 코드에 연결해 바로 충전할 수 있는 전기차다. 또 기네스 펠트로도 있고 금성무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훨씬 아름다운 무엇이 있다. 이런 주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필요로 한다. 어디 이것 뿐인가. 일반인에게는 세상 모든 일이 쉽지 않다. 전문가도 A부터 Z까지다. 참 사람은 개가 아니고 강아지와 어린이의 교집합은 무엇이라는 연구 결과는 이미 발표되었다. 강아지란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왜 개와 관련된 욕이 많은지 모르겠다. 유명인이 말한다. 욕을 듣는 게 좋다고. 황홀하다고. 이런 XX. 정말 그렇다면 고개를 들 수 없다. 앞을 보고 걸어다니기 힘들어지게 된다. 악평이 있으면 어떻게든 선호의 별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평가 숫자가 올라가면 개인의 인기와 삶의 행복도도 어느 만큼 영향을 받는다. 정말 잔혹한 피학성 뭐뭐? 사드를 읽어보면 된다. 읽는 순간 어느 만큼 괴로운지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를 절대 알 수 없다. 사드의 작품 가운데서도 벌렁 나자빠질 하드코어. 사드를 읽어보지 않고서 욕 듣는거 자체가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사드를 읽어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말을 참아 주시라. 읽어 본 사람은 그 자체도 뭔가 있다고 해도 된다. 그런데 사드 읽어본 사람이 솔직히 몇 명이나 될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사드 말을 꺼내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니까. 거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이키, 아마존, 뭐뭐뭐? 신화에 나오는 이름인데 신화는 또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뭐뭐뭐에 초일류는 정확하게 이름을 쓰지만 그러면 덜 재미있다. 그래서 일부러 뭐뭐뭐라고 적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책을 너무 많이 읽었네? 누군들 안 그렇겠나. 이상? 그것은 아주아주 희소할지라도 내가 남과 약간은 다른 부분이 없지 않을까 하는 궁금함을 읽지 않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개자식.
   이상이란 그런 것이 아닐런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에 나오는 수퍼맨이 필요하겠다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 그런 수준이 초인류라면 블로그 글을 쓸 때 최근 2년 동안 나온 블로그 포스트 가운데 최고, 반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에세이... 그런 것은 어렵고 불가능하다. 다만 자기 수준에서 어렵지만 품위를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글을 쓰는 게 중요한다. 불분명한 호들갑의 기준쯤은 눈감는 게 속편하다. 2~30만원짜리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실크 펜티를 입은 상태는 이상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푸르른 낙원과 휴양지만 가지 말고 조세 회피처를 가봐야 한다. 잊혀질만 하면 뉴스에 나오고 소설에 단골 소재로 쓰이는... 아주 쇠뇌가 되었다.
   그런데 유명해진 책들의 리뷰는 왜 그렇게 창의적인가? 왜 그렇게 신선하고 보도 듣도 못한 찬사 위주인가? 동양에 별이 나타났네(이건 괜찮은 표현 같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이네,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이네, 티슈 한 상자가 필요할 것이다, 카뮈를 능가한다, 카프카가 부활했다, 오늘 밤 잠을 자려거든 이 책을 아예 집어들지 마라... 그런 리뷰를 작성하는 중간 관리자가 정말 뛰어난 작가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나중 업을 바꿔서 괜찮은 작품을 들고 나타나면 이제는 그들이 창의적인 찬사를 받게 된다. 헬렌 필딩, 조조 모예스, 길리언 플린, 요나스 요나손... 이들과는 달리 수많은 직업과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한 이들도 있다. 페터 회, 어빈 웰시, DBC 피에르... 이런 스타일 같은 경우는 인생의 굴곡이 심한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식상한 주제가 되어버린 몰타 기사단, 더 비즈니스, 프리메이슨류 작가들도 당연히 서로 안 친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머셋 몸, 존 르 카레 같은 요원 출신 작가들도...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이상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이런 분들의 창의력을 고갈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설명할 때 일반인들은 썩 그렇게 멋진 웅장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현실은 모두 아는 거고 이상도 모두 아는 거고 그러니까 그것의 괴리라... 그렇다면 그 괴리는 크면 클수록 좋겠네, 드라마틱 해야 하겠네. 딱 이 정도가 2명중 1명의 일반인들이 하는 생각이다. 영상물로 보면 막 이런 대사다. "그래~ 이거야~ 이거라니까~." 그런 균형점을 찾지 않아도 되는 정말 보기 드문 기적의 경우는 거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전설에서나 찾아 볼 일이다. 그 수준이 아니라 더 짠하고 가슴 찡한 떨리는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그건 미스터 반스에게 물어봐야 한다. 특이하고 성스럽고 고즈넉하며 장엄한 설명? 파묵씨를 오래 살게 만들어야 한다. 제이콥슨을 추궁하고 오즈를 협박해야 한다. 모옌과 겐자부로 정도 작가들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빅풋 발바닥 같은 놈! 하지만 초인기는 댄 브라운이, 돈은 스티븐 킹이, 심오함은 조이스와 플로베르가, 작품성은 누구 누구 누구, 주류는 하드보일드다.
   TV, 컴퓨터, 핸드폰 화면에는 맛난 음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쉴 새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사람들은 광고를 디따 기절하게 잘 만든다. 이 세상은 유혹하는 게 너무 많다. 산책할 때 길고양이에게 빵 냄새만 호호 불어주면 볼 수 있는 야옹이의 반응은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지나가는 어느 강아지는 너무 심하게 귀여운 최적의 기울기로 고개를 갸웃 움직인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저 인간이 지금 뭐 하고 있는거지...' 엥엥거리는 파리처럼 거리에는 꽃다발을 들고 뛰어가는 어떤 남자처럼,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들고 걸어가는 여대생의 마음과 같이 그렇게 자동차들이 돌아 다닌다. 서점에도 가야 한다. 도서관에도 꼬박꼬박 들린다. 극장도 기다리고 있다. 시내버스의 외관 광고도 읽어야 한다. 조금 있으면 꽃이 피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 것이다. 이 곳 달라스에. 그럼 다른 곳은 안 그렇겠나. 나이 먹고 생텍쥐페리를 읽어볼까? 더 나이드신 분의 헛기침이 신경 쓰인다. 어쩌면 바다낚시하러 떠날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와이너씨가 어느 책에서 한 말. 탄탄한 미국 중산층이면 세계 1%라고. 언제였을까? 어느 성의학자가 한 말. 구-신석기 시대나 지금이나 성기술은 변한 게, 차이가 거의 없다고. 어디에 있나 천국은? 인간이 가본 곳은 어디든지. 달나라나 심해를 제외한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살만하다. 그곳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 (조금 멀지라도) 도서관이 있나? 서점은 있나? 동물원은? TV는? 극장은? 술집은? 음식점, 학교, 공원? 다 있네. 그럼 된 거다. 그대가 살고 있는 곳이 뉴 델리건 부다페스트건 몬테비데오건 어디건. 소셜 네트워크를 아는가? 지겹고 짜증나고 피곤하고 옛날에 통달했다고? 딱이다. 얼마나 더 놀랍고 이상한 것을 찾아야겠는가?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심시키고 토닥거린 후 자신은 더더욱 환상과 이상에 환장하는 책략은 여기서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지금은 뉴스에서조차 미스테리가 나오는 세상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외계인은 착하던가 또는 미래는 밝은 빛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이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제야 뭔가 의뭉스러운 감정이 아주 약간 구체화되어 해소되었다. 그런 심리 상태는 특정 작가만의 전매 특허 비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호기심과 약간은 타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애를 누구나 내재하고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교집합인 유대감, 동질감, 연민, 사회성, 남의 슬픔을 공감하고 의중을 파악하는 능력, 상대의 마음을 떠보는 넛지... 백가지, 천가지, 만가지 이상 되는 교양과 예절을 두루 갖춘 인간의 고도의 감정 유형과 심리기제 가운데서 무엇의 괴리라는 것에 대해 고찰해봤다. 괴리. 눈앞이 흐릿할 정도로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상 대화에서 절대 자주 쓰이는 단어도 아니다. 적어도 쉽게 구사하기 편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도 설명이 가능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안 그럴라 했는데, 다른 감정은 없는데 또 사람 이름 브랜드를 한가득 열거해 버렸다.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 누가 그것을 아름답다 했는가.

10½장으로 쓴 세계 역사/줄리언 반스
P191~192.그러나 이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이다. 즉 너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넝마를 입은 야윈 조난자들은 뗏목에 날아 왔던 나비와 똑같이 감정의 유발자가 된다. 후자가 우리를 쉽게 안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전자는 우리를 쉽게 슬프게 한다. 이런 책략은 어렵지 않게 성공한다...캔버스가 우리에게 더 깊고, 바다 속 같은 감정을 일으키고, 우리들을 희망과 절망, 의기양양함, 공포 그리고 체념의 감정을 거치게 하는 것은 바로 인물들이 매우 큰 힘을 전달할 만큼 건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온 힘을 다 쏟는 그 모든 노력 ―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인가? 대부분의 인간 감정에 아무런 응답이 없듯이, 그 그림의 주요한 열정에도 아무런 공식적 응답은 없다... 우리의 감정이 그것을 쏟을 만한 대상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 아닌가?
P.320.사랑은 난해한 영역이다. 우리는 정확해야 하고, 감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권력, 돈, 역사, 죽음 같은 교활하고, 완력적인 개념과 대항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화자찬이나 속물적인 모호성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모호한 주장, 사랑의 숭고한 고립주의적 태도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사랑은 행복을 생산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행복을 생산하건 안 하건 간에
사랑의 으뜸가는 효능은 활기를 주는 것이다... 자신감을 준다... 투명한 비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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