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탑 저소음 구현

from Small Talk 2023. 9. 23. 17:54

    방법: 
    1. APPLE: 맥북 clamshell mode 활용
    2. 데스크탑을 베란다 밖에다 설치
    3. 데스크탑 케이스(만) 교체
    4. 데스크탑 케이스     교체 + 저소음,무소음 구성품으로 데스크탑 재조립
    5. 남는 가구, 가정용품 활용 (예: 안쓰는 김치냉장고)
    6. 여행 캐리어에 데스크탑 집어넣기
    7. 여행 캐리어에 데스크탑 집어넣기 + 흡음재

    검토: 
    1. 자금 부족 / 맥북  없음 / APPLE 지식 전혀 모름
    2. 귀찮음 / 설치 어려움
    3. 자금 부족 / 귀찮음 / 번거로움...
    4. 자금 부족 / 귀찮음 / 번거로움...
       막 팬리스에 구성품 복잡해지고 CPU 펌프소음 해결에 막... 막.. 초특급 팬리스에 별의별... 그런다고 녹투아면 끝이냐? 아님. 자동차 완제품을 사면 그만이지... 라디에이터 바꾸고 엔진 내렸다가 막... (절레절레) 통과
    5. 공간 부족 / 귀찮음 / 번거로움...
    6. 괜찮음
    7. 꽤 괜찮음

    참고: 
    케이스를 수랭, 저소음, 저진동 완비한 최고급품에. 내용물도 몽땅 바꾸면... (구글링 조사 결과) 그럼 또 귀가 예민해짐. 자동차 타이어 교체처럼! 2중 접합 유리도 흔하고 3중 접합 유리로 좋다지만. 이거 잡으면 저거가 또 신경쓰이게 마련. 인형의 코를 고쳤더니 입이 이상해보인다? (비유 부적잘은 죄송하다만 마네킹이랄지 그림으로 보면 좋음. 즉 맥락 이해하잔 얘기) 이래서 대공사는 사양하고 대체품으로 만족하는 것임. 값비싼 소비제로 허영심 만족한다랄지 합리적 소비를 충족하는 게 불만으로 뚜껑 열리고 만사 표정 썩는 거 보단 나음. 농담이고. 

    7번으로 결정 후:
    검색어: 차음재, 흡음재, 방음재
    검색시간: 30분 이내
    검색조건: 전문가용 제외, 저가용에서 적당한 매물을 꼼꼼히 살핀 후 결정
    구입도 금방, 배달도 빠름

    설치:
    아메리칸 투어리스트 30인치 (4.9KG) 구입.
    흡음재(방음재) 약 7,000원 * 4개 = 캐리어 옆1개씩/위 0.5/아래 0.5/ 옆 0.5씩
    아메리칸 투어리스트 캐리어 안에 데스크탑 넣으면 끝.

    결과: 
    1.역시 귀가 적응해서 민감해지긴 하지만 꽤 만족
    2.특히, 가령 밤 23시~ 01시 이후가 더욱 예민하나 나머지 낮 시간이라면 쾌적
    3. 나중 새로 장만할 때 저소음 데스크탑을 구입하는 게 좋음. 
    애초에 최적품을 구입하는 게 좋음. 즉 여기저기 거치지 말고 한방에 최고품 구입이 고생 덜함. 
    물론 자동차 20~30종 이상을 타보는 경험과 재미가 더 값지다면 그걸 모두 거쳐가는 거고. 
    아니다 시간, 경비, 노고....를 따져보니? 결국 한방에 드림카로! 
    다만 장단점은 뭐랄까 어떤 여자 왈 "내가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보니 어쩌고저쩌고..."는 농담이나. 
    이 자동차 저 자동차 다 타보니 어떻더라, 뭐 중고차 매매할 일 있나? 그게 나쁘단 게 아니라. 
    딴 자는 말이 없다 VS 패자는 말이 많다! 둘 중 뭐가 좋을까? 
    괜히 옛친구들 만났을 때 차값 1위가 서열에 걸맞게 떠들지 않는 게 미덕. 
    괜히 실패한 지인과 친구한테 뻔한 경기분석 논평을 꾹 참는 것도 귀감.
    물론 형편 대비 최고의 차를 타는 것도 좋은데. 옆그레이드라는 둥 다운 그레이드라는 둥.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느니 연봉 대비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 최고의 차를 타는 게 좋다느니. 다 좋은데. 정말 다 좋은데. 귀찮게 이 여자 저 여자 다... 왜 자꾸 남자 여자 얘기가 나오지? 남녀 얘기 그만 들먹이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임.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니까. 단지 재혼(재재혼...)을 앞둔 남자 왈, 자긴 조용조용한 결혼식을 원하나 만약 신부가 원한다면... 같은 썰. 상상했을 때 또 언제 탐색전에 딴 이성한테 물었던 거 또 묻고, 했던 얘기 반복하고, 어차피 경험했던 과정 답습하고? 농담이나.. 농담 맞나? 넘어가자. 아니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싫다 싫다 하며 손내미는 건 또 뭐지? 뭐긴 뭐야. 이래서 물 들어오지 않아도 노를 젓고, 남의 말 안 듣고, 아니면 말고 난장판에, 아무 데나 얼굴을 들이밀고... 막... 막... 세상은 요지경. 뿐만 아니라 썰 풀고 어쩌고 노력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재미가 톡톡한데. 근데 뭐 제발로 찾아오는 행운? 하긴 왜 싫겠나. 맞어. 좋아. 굳이 바나나 를 꼭 내가 벗겨먹어야 하는 건 아냐. 근데 뭐 썩은 사과? 벌레먹은 사과 증말 징글징글하다 (절레절레)! 그러니까 인문교양서에서 뭔가 있는 척, 아는 척 장사꾼들은 흥정의 묘미를 원한다더라? 웬만하면 뻥. 제 발로 고액권 턱하니 내겠다는데 책에서는 장사꾼들이 그걸 마다한다지만. 정작 현실은? 이래서 이 험한 세상 살아보면 볼수록... 넘어가자.

    (캐리어) 느낀 점?
    1. 캐리어는 큰 게 좋다 (아마도 무조건?)
    2. 최고가가 좋다. 아니면 최저가에서는 딱 2개만. 
    큼직&저렴&튼튼으로 아메리칸 투어리스트, 스위스 밀리터리 2개만. 나머지 안 봐도 됨.
    (설명)여행 캐리어를 장만하기 위해 구글링 최대 7시간까지 할애하지 않아도. 약 1시간 남짓 살펴보니 깨달음. 
    쌤소나이트 캐리어의 경우, 구제품을 염가로 대량 방출한 제품은... 글쎄. (물론 기대치 낮추면 그게 그나마 가성비 최고쯤) 쌤쏘나이트 캐리어는 오직 최고가만! 쌤소나이트 외 캐리어계에서 최고가 라인 몇몇 브랜드. 그게 아니면 아메리칸 투어리스트, 스위스 밀리터리 딱 2개. (중소제품엔 죄송한 말씀이다만 이 거 영... 남들은 유튜브로 돈 벌고, 건물주 흔하며, 주식부자에다... 난 똥차도 없고 무슨... 말이 그렇단 얘기) 즉 자동차 업계랄지 패션업처럼 다종다양한 제품은 눈에 들어오질 않는데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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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llaby Spring(2002), HIRST Damien

   책 한 권 진지하고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뭘 그리 대단하고도 어려운 일인가. 뭐 얼마나 지성적이라고, 그 품격이 어느 만큼 아찔하다고 그 유난을 떠는 것인가. 참 어떻게 표현하자면 눈꼴시려워서 못봐주겠다. 어떤이의 마마식 표현으로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어린애라면 콱 쥐어박아 버리겠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또 지난 연구(?) 결과에 대해서 그 극성스러운 까탈스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 뭔 놈의 비밀이 그다지도 많은 것일까, 고품격에 꺼뻑 죽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면서도 뭔가 합당하고 합리적인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근사한 핑계거리를 좀 더 찾아보자는 심산으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쉼표를 유달리 절묘하게 잘 사용하는 작가들, 한두 명이 아니다.
   매번 같은 얘기지만 믿기지 않는 부분도 있고 그 만큼 이상하다는 뜻이다. 글과 독자 사이에 왜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을까. 화자와 독자가 얘기하고 묻고 답하고 생각하고 잠깐 멈추고 더 잠깐 쉬고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리듬감이 문제인 것 같다. 흥분되는 리듬감을 갖춘 작품이라면 단 몇 문장 또는 몇 페이지 만으로 책과 당신의 감성이 핑하고 연결된 느낌을 감지할 것이다. 그 순간에는 진짜 특이하고 신비로운 효과음이 실제로 들린다. 거짓말처럼 들리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일 수도 있다. 실은 그 진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경험 때문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이지. 다니엘 타멧과 마크 해던은 아쉽게도 질투 예방에 실패한 것이다. 거 사람 참 괜찮다.
   최고의 여성 바리스타는 에르메스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보적인 바텐더는 자신의 집 옷장에 베르사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옷장 자체가 없는 명바텐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의 진짜 최고 바리스타나 바텐더라면 적어도 손님의 마음을 시원스레 훤히 읽는, 평범한 독심술이 아닌 흑마술을 익혔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아예 상대방 마음을 송두리째 훔치는 재간둥이도 있을 것이다. 재간둥이의 나이가 좀 많으면 대도쯤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무슨 텍스트에 카페라떼와 에스프레소가 있겠냐마는 완독의 어려움에 대한 원인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다. 필립 로스와 폴 오스터를 읽고 감탄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심정, 그 불편한 감정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왜 다른 문화, 예술 장르는 안 그러는데 유독 소설 분야 취향은 그 모양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소설 말고 다른거? 여행지, 뭐, 뭐 ,뭐? 환장한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든다."라는 말을 듣고 흔쾌히 덤덤할, 기뻐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위키피디아가 예전 같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으로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쿨한 느낌보다는 께름직한 기분에 가까울 것이다. 청소년들처럼 학원전설 이야기와 달콤한 로맨스 소설 그리고 하드보일드풍 추리소설에 흠뻑 중독되어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서는 불가능에 속하는 원대한 바램이기도 하다. 단순히 최고급 위스키가 비싸서, 다음날 숙취가 적으니까, 금방 취기가 오르니까 꼭 그래서만 좋은 게 아니다. 위스키 원액이 (얼음)물과 섞일 때의 미세한 물결. 그 극도로 예민한 섬세함도 한 몫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이책의 글씨체는 왜 iOS체는 드문 것인가? iPad같은 태블릿 때문인가 또는 번역 출판물이 전체의 5%가 채 안되는 시장 때문인가. 그러니까 그 반대의 세상에 사는 어떤 일반인들의 시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이 하드보일드에 열광하는지 궁금해서 생각해본다. 머머해본다, 그렇다, 동사가 과거형이 아니니까 하드보일드가 아닌 듯해서 기분이 이상하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또 아예 황당한 이야기는 아니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할테니 주의를 기울여 주시면 무척 고맙겠다. 출판사도 브랜드다. 번역물의 경우도 괜찮은 작품은 어떤 마크가 주로 선점한다. 그래서 도서관과 서점의 풍경을 보면 출판사가 보인다. 책들의 표지와 옷감, 디자인도 모두 다 그림이 그려진다. 결국 마크다. 문체? 남녀 성 구분도 있겠지만, 하드보일드도 여러 종류일테지만, 그것은 대체로 젊은이의 관점과 애매한 현재의 1인칭 시점을 많이 볼 수 있다. 정갈한 묘사와 산뜻한 색채감과 더불어 문장의 말미도 특징있다. 옛날에 어땠다, 지금은 어떻다, 그랬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혹시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심지어, 혹시나, 것이다, 의아하다, 머머 같다, 머머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머머했다, 머머같은 일은 없었다, 즉 젊은이의 마음의 동요를 바란다면 매우 적확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정확한'과 '적확한'의 차이를 똑부러지게 구분하는 어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세기말과 여행지 그리고 젊음, 거기에 방황과 지난 기억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 썸타는 감정, 성적 체험, 플라토닉과 육체적 사랑의 간격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항구도시와 섬 분위기! 그렇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섬치고는 너무 크다. 그러니까 UFO 동호회에서 한복판에 있는 이상한 지역을 의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방식으로 하드보일드를 분석하자면, 짦게 얘기하자면 그 비밀은 마음을 홀리는 묘사다. 항상 같은 말들... 전에도 기록했다. "왜 지금 세상에서는 조이스, 톨스토이, 모차르트, 뭉크, 아인슈타인 같은 거성들이 태어나서 활동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남들도 그런다. 흔한 얘기로 좋은 시절에 이미 다 해먹어버렸다고. 영원히 반복될 말들이지만 더 정확한 요인은 그냥 시대가 바뀐거다. 좀 더 냉혹하게 직관적으로 따져보자. 모차르트가 가장 우주적이지만 그보다는 말러가 훨씬 심오하고 어렵고 철학적이다. 하지만 천재하면 모차르트고 모차르트가 더 널리 조금 더 사랑받는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 굴드가 모차르트 소나타를 그렇게 빨리 연주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자의 마음도 그렇다지만 원래 젊은이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이랬다가 저랬다, 뛰었다가 숨었다, 아침과 저녁도 다르다. 다른 사람의 말빨에 의해서 들렸다가 놓였다가, 앞으로 가졌다가 뒤로 밀려났다가, 감격되어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눈탱이 맞아 눈이 게슴츠레 뜨여지고 그런다. 쥐었다 펴는 사람은 예상하기 힘든 당하는 사람의 관점이란... 자기 자신을 판박이로 빼닮은 젊은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인데, 멜로드라마의 수퍼스타인데 왜 안 좋을 수 있겠는가? 하기야 본인도 젊었을 때는―그렇다고 지금 폭싹 늙었다는 뜻은 아니고―그런 알쏭달쏭한 감정과 매력적인 사랑, 마술 같은 회상의 분위기를 그린 작품을 찾았던 것 같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뭔가 앞으로 나올 것 같은 기분, 뭔가가 있어, 그래 있다니까... 그러다가 이야기가 끝나.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 기술 아니 의식에 도달하고, 그 기간 또한 수십년이 걸리기도 하는 결코 쉽지 않은 문체요, 녹녹치 않은 스타일이다. 심지어 있어 보이려고 값비싼 외국어 번역본까지 샀다. 그랬다, 그때는. 왕가위 감독의 전반기 작품 또한 그런 분위기를 띄고 있다.
   누군가가 하이데거, 야스퍼스, 가스통 바슐라르 같은 서적만 읽고 산다고 생각해보자. 이거 정말 딱딱한 인생일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와 달달한 드라마, 미스테리 소설을 모두 내팽개치고 어려운 철학서와 고전소설만 탐독하고 사는 분들의 마음을 상상해보자. 음... 어떠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나오는 어떤 영화도 아닌데 얼굴 표정이 빠뀌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누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매일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런 근엄한 웃음기 없는 매마른 표정들. 당신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기를 바란다.
   밑줄은 딱히 그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 격식은 최고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마틴 에이미스. 고품격 그룹에 누군가는 포함시킬 것이다. 왜? 삶은 인생은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옆사람도 재미있어야 하니까. 그의 입담은 귀와 뇌와 마음에 쩍쩍 달라 붙는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강도의 욕이 적재적소에 작가의 키보드 또는 한정판 파버카스텔 수제-볼펜에 착착 감겨서 탄생한다. 스타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인품이나 평판이 조금 모호하거나 의뭉스러울지라도 브랜드는, 프로세계는 최적합한 모델을 찾는 것 같다. 의뭉스럽다는 말 당분간 안 써야겠다. 뒤늦게 어디서 주워서 읽은 후, 나이 먹고 급하게 너무 남발했다. 마틴 에이미스하면 당연히 찰스 부코스키가 떠오른다. 그러면 또 당연히 부코스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오직 물 밖에 없다. 식물도 의식이 있다는 다큐멘터리와 논문, 연구결과는 까마득한 옛날에 알려졌다. 그러면 무슨주의, 무슨주의... 주의 신봉주의자와 그 추종세력만 남는다. 채식주의도 정답은 아니다. 육식주의도 부담스럽다. 에스티로더 신제품 링클케어 화장품과 랑콤 선크림을 바르는 생활 습관도 좋지만 눈가 주름 예방을 진정 걱정한다면 아예 웃지도 않아야 한다.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인가. 마크(?)가 남몰래 날이면 날마다 집에서 고기를 왕창 먹는다는, 그래서 신물나니까 밖에서만 채식을 한다는 특종이 꼭 버즈피드에 떠야지만 만족스럽다는 말인가? 하지만 캘리포니케이션 제작진은 진정한 멋진 최고의 예술가들이다.
   두서없이 적다보니 하드보일드의 비밀을 알 것 같다. 마음을 하늘 높이 띄우는 게 아니라 약 5cm만 올리는 것이다. 다시 땅에 닿을 듯하면 또 딱 그 만큼만 올린다. 그것이다, 비밀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혼자 알아냈다고 혼자 좋아하는 그 비밀의 또 다른 이름은 젊음이다. 필경 지가 젊고 싶은 거네. 팬들은 적어도 사는 동안 그것에 대한 링크를 커넥션을 의지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마음이 무거워서, 나이 먹어서, 취향이 달라져서, 또 다른 이유로 5cm 공중부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기부상 고품격 컨텐츠를 스스로 찾으면 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들도 죄다 하드보일드를 좋아한다. 작가도 그렇다. 작가의 팬도 그렇다. 그 팬의 친구도 그렇다. 그 팬의 친구의 친구는 어떨까. 왜일까?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역으로 하드보일드 팬이 봤을 때는 느릿느릿하고 하품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막 분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하드보일드 + 철학에세이 + 블로그류 문장들 + 브랜드 이야기 + 트위터 문장 스타일... 하드보일드에 대한 변호를 더하자면 이렇다. 어느 동네 아저씨가 대학가에 출연한다면 그건 평균연령을 깎아 먹는 물 흐리기 행위에 해당된다. 하지만 어떤 중년이 하드보일드 광팬이야. 누가 뭐라 그래?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다 하드보일드에만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 가운데 동화만 보고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어디선가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자. 아득히 기품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노숙녀분이 어느 날 소설을 읽는데 무척 낯익은 이름을 소설 속에서 가끔씩 마주칠 때 그 찰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 이름은 이를테면 알랑 드롱, 율 브리너, 제임스 딘,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그레고리 펙 같은. 그러므로 하드보일드는 아니지만 변형된 격식을 갖춘 문체의 소설이 큰 상을 받은 걸 보면 뭐랄까. 아닌 척 하려해도 마음이 조금은 편치 않다. 그렇다고 데이비드 로지 교수의 의견이 꼭 궁금하다는 것은 아니다. 더 완곡하게 완충어구를 몽땅(?) 동원해서, 세바퀴 반 돌려서 표현하자면 약간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피곤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다만 당신의 이성 친구가 샐먼 루시디를 좋아한다면 또 누구 누구를 좋아한다면 신중하게 그 친구를 추궁해 보아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목소리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성우다. 연기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영화와 연극, 드라마 배우다. 클래식 음악 전문가? 콘서트 콜이 빗발치는 돈을 받고, 돈을 받고 연주하는 프로 연주자다. 개인 스타일, 취향, 연애의 전문가? 개인이다. 어려서 BB탄 쏴본 여자?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왜 철지난 CM송을 듣는가? 허공에 손가락질까지 해 가면서. 그것도 여러 번 미친 사람처럼. 그것은 바로 왜냐하면 초딩이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직업과 부모 입장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귀하는 안 그런가? 그러면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친구의 친구는? 안 친하다고? 음 의뭄... 말이 안통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새삼스럽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중딩...도 괜찮다. 탄생한지 50년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딩이 보면 이런다. "막 도레미송 부르다 결혼해. 완전 웃겨." 그러면 옆에 있는 다른 중딩들 다 같이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솔직히 적잖이 재미있기는 하다.
   어른들은 어린이와 청년을 포함한 젊은이들이 이런 말을 하면 완전 우스워 죽겠다는 시늉을 겉으로 또는 속으로 행한다. 실제 많이 웃기다고 말이다. "평소에 재미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사는 게 지겨워요. 즐거운 일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고." 그리고 젊은이가 반대로 이렇게 말해도 좋아라 한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노는거도 좋고 삶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젊은 기운은 그런 것인가보다. 이런 평문의 특징과 패턴, 공통점에 대한 순도가 조금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유명인 이름이 많이 나오면서 고급스러운 약간 어려운 단어가 가끔 나오고, 브랜드 이름도 많이 나오고, 고도의 심리 기제는 못 다루고, 애매하고 조마조마하고 뭔가 이상해. 왜 그렇지? 단서는 이미 노출되었다. 쩍쩍, 뻥뻥, 척척, 막, 딱, 환장, 신물, 특수(옛날 옛날에 책에서 읽었다. 브라이언 메이도 플랫을 깎았다고. 프로를 따라하는 아마추어들, 수두룩-하다. 그렇다, 그렇다. 요즘 세상엔 특수 아닌 게 없다. 끔찍한 일이다), 특급, 욕(고상한 상류층 사람들도 친한 사이에 욕을 자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말빨, 뻠프질, 깐죽, 재수없다, 유난떨다, 과도증, 감탄사, 머머주의, 그 놈의 고품격, 가택감금... 딱 이 수준 때문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휘들 말이다. 나이트 클럽 이름에 신비도 있다. 술집 이름은 격조, 아파트 이름? 품격. 코메디 TV프로그램 제목? 고품격 음악 방송, 누가 아니라고 할까봐서. 모든 이름들은 대부분 좋은 뜻을 지니고 있고 거의 일반인들이 짓는다. 누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외우고 있는 시가 한편 있다. 누구나 외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아니면 허밍이라도 한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무대에서의 성악가를 잠시만, 단 몇 초 동안만 흉내 내어 보시라. 근처 사람들 다 웃는다. 그 즉시 당신의 품위와 인기는 격앙될 것이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들썩들썩 하시는가? 그렇다. 다 자연의 섭리 봄바람 때문이다. 말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단어, 섭리. 글로 쓰고 나니까 정말 속 시원하다. 그런 감정과 관련되는 밑줄긋기가 생각난다. 

  •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 (최상의 자신을 만들어라/리카이푸 p.73 * 부적절한 적극성은 으...)
  • 자신을 드러내라...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사진을 사용하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프로필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 아주 좋은 사진을 말이다! (트위터/조엘 컴,켄 버지 p.81)

   라이트모티브 유머코드는 그것이다. 제목을 모르는 어느 영화 대사. "폴 뻐킹 스미스" 폴 스미스보다 좀 더 어떤 식으로 좋거나 특이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폴 스미스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폴 스미스가 뭘 그렇게,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욕을 얻어들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왜 질투받고 왜 욕을 얻어듣는가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바로 로브그리예식 질투 연구론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위에 등장했던 브랜드들 뭐, 뭐, 뭐... 왜 그렇게 들먹였을까? 안 좋은 이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유치원생도 안다. 색다른 관점? 대화 주제로는 부적절하다. 또한 전자-후자와 첫째-둘째-셋째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도 일상 생활에는 안 어울리는 키치다.
   이상에 대해 잘 씽킹하고 명작을 찾아 읽으면서 블링킹의 수준을 높이며 스타벅스 마크를 대놓고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가자. 그래서 자기 인생이론을 창시하여 삶의 전문가가 되자. 관절염도 아닌데 급하게 손가락이 안 펴진다. 뭐? 닥치라고? 역시 당신은 절묘한 타이밍을 제대로 아는 리듬감의 천재다. 인정! 어디 천재가 아니면 서러워서 살겠나. (누가 읽는지는 모르니까) 좀 더 막던지자면, 심지어 당신은 영화배우 빰치는 외모까지 겸비한 지성인이다. 카이저 소제다. 레스터 번햄이다. 존 내쉬다. 끝으로 매기는거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p.81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p.86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p.125 그녀는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토마시를 속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다.
p.288 그러나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한 사람을 마주하면, 그가 하는 말이 몽땅 사실이 아니며,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매순간 확신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마련이다. 믿지 않기 위해서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철저하게) 엄청난 노력뿐만 아니라 훈련, 그러니까 잦은 경찰의 신문을 받았던 경험이 필요하다. 토마시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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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 and Jeanne-Claude | Projects | Surrounded Islands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보고 자란 A(나)는 훗날 인류고고학자 및 세계역사학자가 된다. 몇 년에 한번 쯤 사학기행이란 것을 시도한다. 그냥 여행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 세계 3대 무덤이라는 일본 사카이시의 닌토쿠료 고분,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그리고 중국 진시황제의 능은 옛날에 모두 다녀왔다. 하지만 일상 공간을 보면 어딘가 삶은 마치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흐름을 보이는 1900년 즈음 유럽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닮아 있다. 왜냐하면 대학교수라는 자신의 직업 때문이다. 그는 명백하게도 너무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초일류가 아닌 사실을, 그럴 것이라는 예견을 잘 엿보았기에 학자라는 장기적 직업을 위한 표면적 직장을 일찍이 잘 구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다른 교수들? 고리타분하고 몹시 의뭉스러운 노학자들이 많다. 지성의 전당에 매일 출근하는 학생들?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고 날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맨날 희희덕 거리면서 뭉쳐 다닌다. 꺼벙한 녀석들. 어제 술 먹었는지 오늘 먹을지 이젠 대충 보면 감 잡는다. 수업시간? 강의실 제일 뒤에서 떡대 좋고 험상 굳은 학생이 한쪽 귀에 요원처럼 이어폰을 끼고 있지 않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을 꼬시려 하는 또는 반대로 그런 격정을 이끌어 내려는 출중한 미모를 뽐내는 학생도 거의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수업 시간이면 꼭 초딩처럼 내 강의 멘트의 끝말을 따라하는 무거운 목소리의 잘 생긴 남학생이 오히려 나보다 더 애들을 웃긴다. 아주 뻥뻥 터트린다. 그렇게 강의실이 들썩들썩 하는데 어디 개그맨 시험이나 보러다닐 것이지 왜 나의 썰렁한 강의실을 찾아오는지 모를 일이다. 학점이 후하다는 입소문이라도 없었다면 이 짓도 못 해 먹었을 것이다. 블링킹인지 씽킹인지 알 수 없는 그 표정들, 재수없다. 가끔 만나는 오래된 친구들은 모두 좋은 마크의 새해 출시된 차를 모는데 A는 나름 어떤 특이함을 유지하고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클래식 차를 몰고 다닌다. 눈치 없는 조교는 이런 말까지 한다. "교수님, 그거 돈 주고 사셨어요?" 그 조교는 이사장과 같은 희귀 성씨다. 인생의 내공을 총동원해서 유도 심문을 하는데 어디서 특수 훈련을 받았는지 꿈쩍도 안한다. 제기랄! 그 외에도 끝이 없다. 어려서 봤던 멋지고 재미있는 인디애나 존스. 그를 동경해서 그를 닮은 고고학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보니 인디애나 존스는 커녕 한숨만 나온다. 또한 다스 바이더라고 어느 학생들이 놀리는 것 같다. 오 이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허구다. 영화가 인디애나 존스면... 그나마 다행이다. 초딩 이상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약간의 상상을 그냥 기록해봤다. 알록달록한 거 좋아하는 초딩을 얕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A교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초일류가 아니면 삶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자신의 개인 작업실에 침대를 들여놓아야 할 만큼 뛰어난 능력의 천재 작곡가? 매우 드물다. 그런데 작업실에 침대를 왜 들여놔? 보통 사람들은 일평생 이런 사람들을 단 한번도 만날 수 없다. 값비싼 고급의 그럴싸한 007 가방을 들고 다니는 수트맨조차 구경하기 힘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마라"는 카피라이트(모토)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A급 요원을 평생 1번 만나기도 힘들다. 하긴 '나 요원이요'라고 명찰을 붙이고 다니는 이도 없고 노출이 되면 그게 어디 요원이겠나. 평균을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율하고 설레고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을 사람들은 살면서 쉽게 경험한다. 그것을 이 세상 인간계 용어로는 일상이라고 부른다. 1차적 운동을 하고 4차원 밀크 쉐이크를 제조하며, 극장에서 가슴이 뛰는 영화를 보면 관람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100m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심장이 뛴다. 놀이공원에 가서 바이킹과 여러가지 이름의 놀이 기구를 탄다. 야구장에서 술 먹고 으쌰으쌰한 후에 도로에서 떡실신 한다. 아프리카 자전거 종주를 한다. 콜롬비아 경보 대회에 나간다. 미술관 큐레이터의 눈빛이 아닌 뒷모습만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일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하는 구두굽 소리를 듣는다. 우연히 동네 야구하러 갔는데 골든 리트리버 동호회 모임을 보게 된다. 베네쥬엘라 미녀를 만나러 베네쥬엘라로 가본다. 이런 일상과 떨림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육체 활동 외에도 독서하는 가운데도 번쩍임을 구경할 수 있다. 하품 나오는, 읽는 중간 때려 치우고 싶은 충동을 애써 가라 않히는 순간들이 틈틈히 찾아오는 책들을 보면 밑줄을 긋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건강한 독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페이스북 피드에 씌여져 있다. 이렇게. “In the way that women forget the pain of childbirth, men forget that they cry in movies.” - Nora Ephron
   토마스 만이 말하는 감각성의 극치를 구현해 내며 세계 연주 여행 스케쥴이 5년 앞까지 꽉 차 있는 사람은 이상이다. 그런 연주를 YouTube로 집에서 보는 또는 듣는 사람은 현실이다. 챔피언스리그를 보러 로마에 가고 마라톤 뛰러 베를린으로, 북극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아니 적지 않다. 그런데 스케일을 줄이면 달라스 안에서도 이거 다 할 수 있다. 백화점만 가도 작은 미술관과 극장까지 있다. (아 백화점 안에 극장이 없는 곳도 있다) 그러면 가짜 에드워드 G. 로빈슨은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넌센스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가짜 에드워드 G. 로빈슨이 할리우드식 악인은 아닐 것이다. 논점은 이상의 기준선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차이를 편하게 아주 자연스러운 고상한 분위기로 대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유럽 빅리그를 이야기 하는데 달라스 FC 축구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관중들이 적당히 만족해야 하는데 달라스 구장에 와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과 세리아A 선수 이동, 라리가 구단의 챔스 성적을 말하면서 달라스 FC 선수들의 움직임을 본다. 뾰루퉁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독학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 가능한 축구라는 분야에서 십대 시절에 달라스 루니라 불렸고, 현재 회원제 개패 사장과 동물 행동교정 전문가로 쓰리잡을 뛰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선수들인데 말이다.
   또 다른 이상은 무엇이 있을까. 강아지 대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뉴스를 보면 강아지의 혈통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 하이브리드다. 또는 일반 가정집에 있는 전원 코드에 연결해 바로 충전할 수 있는 전기차다. 또 기네스 펠트로도 있고 금성무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훨씬 아름다운 무엇이 있다. 이런 주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필요로 한다. 어디 이것 뿐인가. 일반인에게는 세상 모든 일이 쉽지 않다. 전문가도 A부터 Z까지다. 참 사람은 개가 아니고 강아지와 어린이의 교집합은 무엇이라는 연구 결과는 이미 발표되었다. 강아지란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왜 개와 관련된 욕이 많은지 모르겠다. 유명인이 말한다. 욕을 듣는 게 좋다고. 황홀하다고. 이런 XX. 정말 그렇다면 고개를 들 수 없다. 앞을 보고 걸어다니기 힘들어지게 된다. 악평이 있으면 어떻게든 선호의 별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평가 숫자가 올라가면 개인의 인기와 삶의 행복도도 어느 만큼 영향을 받는다. 정말 잔혹한 피학성 뭐뭐? 사드를 읽어보면 된다. 읽는 순간 어느 만큼 괴로운지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를 절대 알 수 없다. 사드의 작품 가운데서도 벌렁 나자빠질 하드코어. 사드를 읽어보지 않고서 욕 듣는거 자체가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사드를 읽어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말을 참아 주시라. 읽어 본 사람은 그 자체도 뭔가 있다고 해도 된다. 그런데 사드 읽어본 사람이 솔직히 몇 명이나 될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사드 말을 꺼내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니까. 거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이키, 아마존, 뭐뭐뭐? 신화에 나오는 이름인데 신화는 또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뭐뭐뭐에 초일류는 정확하게 이름을 쓰지만 그러면 덜 재미있다. 그래서 일부러 뭐뭐뭐라고 적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책을 너무 많이 읽었네? 누군들 안 그렇겠나. 이상? 그것은 아주아주 희소할지라도 내가 남과 약간은 다른 부분이 없지 않을까 하는 궁금함을 읽지 않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개자식.
   이상이란 그런 것이 아닐런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에 나오는 수퍼맨이 필요하겠다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 그런 수준이 초인류라면 블로그 글을 쓸 때 최근 2년 동안 나온 블로그 포스트 가운데 최고, 반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에세이... 그런 것은 어렵고 불가능하다. 다만 자기 수준에서 어렵지만 품위를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글을 쓰는 게 중요한다. 불분명한 호들갑의 기준쯤은 눈감는 게 속편하다. 2~30만원짜리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실크 펜티를 입은 상태는 이상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푸르른 낙원과 휴양지만 가지 말고 조세 회피처를 가봐야 한다. 잊혀질만 하면 뉴스에 나오고 소설에 단골 소재로 쓰이는... 아주 쇠뇌가 되었다.
   그런데 유명해진 책들의 리뷰는 왜 그렇게 창의적인가? 왜 그렇게 신선하고 보도 듣도 못한 찬사 위주인가? 동양에 별이 나타났네(이건 괜찮은 표현 같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이네,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이네, 티슈 한 상자가 필요할 것이다, 카뮈를 능가한다, 카프카가 부활했다, 오늘 밤 잠을 자려거든 이 책을 아예 집어들지 마라... 그런 리뷰를 작성하는 중간 관리자가 정말 뛰어난 작가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나중 업을 바꿔서 괜찮은 작품을 들고 나타나면 이제는 그들이 창의적인 찬사를 받게 된다. 헬렌 필딩, 조조 모예스, 길리언 플린, 요나스 요나손... 이들과는 달리 수많은 직업과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한 이들도 있다. 페터 회, 어빈 웰시, DBC 피에르... 이런 스타일 같은 경우는 인생의 굴곡이 심한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식상한 주제가 되어버린 몰타 기사단, 더 비즈니스, 프리메이슨류 작가들도 당연히 서로 안 친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머셋 몸, 존 르 카레 같은 요원 출신 작가들도...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이상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이런 분들의 창의력을 고갈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설명할 때 일반인들은 썩 그렇게 멋진 웅장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현실은 모두 아는 거고 이상도 모두 아는 거고 그러니까 그것의 괴리라... 그렇다면 그 괴리는 크면 클수록 좋겠네, 드라마틱 해야 하겠네. 딱 이 정도가 2명중 1명의 일반인들이 하는 생각이다. 영상물로 보면 막 이런 대사다. "그래~ 이거야~ 이거라니까~." 그런 균형점을 찾지 않아도 되는 정말 보기 드문 기적의 경우는 거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전설에서나 찾아 볼 일이다. 그 수준이 아니라 더 짠하고 가슴 찡한 떨리는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그건 미스터 반스에게 물어봐야 한다. 특이하고 성스럽고 고즈넉하며 장엄한 설명? 파묵씨를 오래 살게 만들어야 한다. 제이콥슨을 추궁하고 오즈를 협박해야 한다. 모옌과 겐자부로 정도 작가들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빅풋 발바닥 같은 놈! 하지만 초인기는 댄 브라운이, 돈은 스티븐 킹이, 심오함은 조이스와 플로베르가, 작품성은 누구 누구 누구, 주류는 하드보일드다.
   TV, 컴퓨터, 핸드폰 화면에는 맛난 음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쉴 새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사람들은 광고를 디따 기절하게 잘 만든다. 이 세상은 유혹하는 게 너무 많다. 산책할 때 길고양이에게 빵 냄새만 호호 불어주면 볼 수 있는 야옹이의 반응은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지나가는 어느 강아지는 너무 심하게 귀여운 최적의 기울기로 고개를 갸웃 움직인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저 인간이 지금 뭐 하고 있는거지...' 엥엥거리는 파리처럼 거리에는 꽃다발을 들고 뛰어가는 어떤 남자처럼,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들고 걸어가는 여대생의 마음과 같이 그렇게 자동차들이 돌아 다닌다. 서점에도 가야 한다. 도서관에도 꼬박꼬박 들린다. 극장도 기다리고 있다. 시내버스의 외관 광고도 읽어야 한다. 조금 있으면 꽃이 피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 것이다. 이 곳 달라스에. 그럼 다른 곳은 안 그렇겠나. 나이 먹고 생텍쥐페리를 읽어볼까? 더 나이드신 분의 헛기침이 신경 쓰인다. 어쩌면 바다낚시하러 떠날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와이너씨가 어느 책에서 한 말. 탄탄한 미국 중산층이면 세계 1%라고. 언제였을까? 어느 성의학자가 한 말. 구-신석기 시대나 지금이나 성기술은 변한 게, 차이가 거의 없다고. 어디에 있나 천국은? 인간이 가본 곳은 어디든지. 달나라나 심해를 제외한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살만하다. 그곳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 (조금 멀지라도) 도서관이 있나? 서점은 있나? 동물원은? TV는? 극장은? 술집은? 음식점, 학교, 공원? 다 있네. 그럼 된 거다. 그대가 살고 있는 곳이 뉴 델리건 부다페스트건 몬테비데오건 어디건. 소셜 네트워크를 아는가? 지겹고 짜증나고 피곤하고 옛날에 통달했다고? 딱이다. 얼마나 더 놀랍고 이상한 것을 찾아야겠는가?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심시키고 토닥거린 후 자신은 더더욱 환상과 이상에 환장하는 책략은 여기서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지금은 뉴스에서조차 미스테리가 나오는 세상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외계인은 착하던가 또는 미래는 밝은 빛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이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제야 뭔가 의뭉스러운 감정이 아주 약간 구체화되어 해소되었다. 그런 심리 상태는 특정 작가만의 전매 특허 비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호기심과 약간은 타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애를 누구나 내재하고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교집합인 유대감, 동질감, 연민, 사회성, 남의 슬픔을 공감하고 의중을 파악하는 능력, 상대의 마음을 떠보는 넛지... 백가지, 천가지, 만가지 이상 되는 교양과 예절을 두루 갖춘 인간의 고도의 감정 유형과 심리기제 가운데서 무엇의 괴리라는 것에 대해 고찰해봤다. 괴리. 눈앞이 흐릿할 정도로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상 대화에서 절대 자주 쓰이는 단어도 아니다. 적어도 쉽게 구사하기 편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도 설명이 가능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안 그럴라 했는데, 다른 감정은 없는데 또 사람 이름 브랜드를 한가득 열거해 버렸다.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 누가 그것을 아름답다 했는가.

10½장으로 쓴 세계 역사/줄리언 반스
P191~192.그러나 이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이다. 즉 너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넝마를 입은 야윈 조난자들은 뗏목에 날아 왔던 나비와 똑같이 감정의 유발자가 된다. 후자가 우리를 쉽게 안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전자는 우리를 쉽게 슬프게 한다. 이런 책략은 어렵지 않게 성공한다...캔버스가 우리에게 더 깊고, 바다 속 같은 감정을 일으키고, 우리들을 희망과 절망, 의기양양함, 공포 그리고 체념의 감정을 거치게 하는 것은 바로 인물들이 매우 큰 힘을 전달할 만큼 건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온 힘을 다 쏟는 그 모든 노력 ―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인가? 대부분의 인간 감정에 아무런 응답이 없듯이, 그 그림의 주요한 열정에도 아무런 공식적 응답은 없다... 우리의 감정이 그것을 쏟을 만한 대상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 아닌가?
P.320.사랑은 난해한 영역이다. 우리는 정확해야 하고, 감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권력, 돈, 역사, 죽음 같은 교활하고, 완력적인 개념과 대항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화자찬이나 속물적인 모호성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모호한 주장, 사랑의 숭고한 고립주의적 태도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사랑은 행복을 생산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행복을 생산하건 안 하건 간에
사랑의 으뜸가는 효능은 활기를 주는 것이다... 자신감을 준다... 투명한 비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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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사람) 1972 by 데이비드 호크니

   사람들은 의연히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안면이 있는 듯한 사람, 본 것 같은 영화와 책 그리고 와본 것 같은 장소, 데자뷰가 아니었다는 기억의 되살아남... 그런 정신 상태는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삶의 비밀과 베일과 커튼, 허무 그리고 가능성 그 모두를 알아버리기 전과 후에 대한 소공녀 같은 여대생의 눈빛, 그 차이? 비유가 좀 근사하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수준이 낮은 비유는 단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무엇이냐면 상대방으로부터 거의 분명 이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약간은 무의식의 약은 셈법이 가미된 반향. 또 의도하지 않게 궁금함의 지연이 발생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저급한 비유의 잇점은 before & after의 기준선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런 상상은 말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눈빛으로 드러난다. 왜 그런 비유를 들었는고 하니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앞부분에도 정확히 이와 같은 표현이 씌였기 때문이다. 제이크 반스가 로버트 콘을 간략히 묘사하는 장면. 어떤 한 사람의 독서물에 대한 적정한 연령 수준과 이성, 삶을 대하는 태도. 소비재 산업계에서는 신제품을 출시할 때 타겟 연령층부터 시작해서 온갖 세밀한 계획을 준비한다. 그렇지만 대체로 젊은이는 그처럼 인생 계획을 짜놓고 그에 맞추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틱'에 나오는 '지식의 저주'와 '그리고 죽음'에 나오는 죽으면 어떻게 되버린다는 인간의 육신에 대한 관념 사이에서 조금은 헤매일 수 밖에 없다.
   광고에서는 멋진 연예인이 인생을 얘기한다. 인생이란 어떻다. 사람은 어때야 한다.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남자는... 등등등. 음악과 영상의 조합 가운데 기막힌 카피라이트를 멋들어지게 저음으로 읊으면 정말 폼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처럼 젊은 일반인이 인생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술주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라스 어른들은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 자료실에 가보면 특정 연령층이 좋아하는 책들에만 손 때가 많이 타 있다. 하기는 은은하며 고운 자태의 중년 여인이나 더없이 고상한 모습의 할머니가 발랄하고 새침한 여대생을 주고객으로 하는 의류 브랜드 옷을 입는 것도 썩 잘 어울린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시 스피노자식 불안의 근원에 대해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왜 학계와 교수와 일반 독자층의 굳건한 평판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이다. 그건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면 대개는 그 문체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씌여진 소설이―뭔가 애매한 기준으로 보자면―근사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1인칭 시점으로 씌여진 한 편의 소설에서 '나는'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올까? 1인칭 시점은 아주아주 고급스러운 기술이 요구되는 관점임에 틀림없다. 그래야 마땅하다. 1인칭 시점은 상당히 노회한―그러면서도 나쁘지는 않아야 하는―테크닉이다. 적당한 남성 명사 procédé라면 곤란하다. 그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 업계 전문가들이 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 관계자들은 공들인 문장과 근사하고 우아한 문체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의 비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업계의 감 좋은 친구들은 돈을 많이 벌고, 감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금세 밀려나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쇼펜하우어식 초조함의 원인은 최근 하드보일드 스타일 소설을 읽으면 A와 B 그리고 C 작가나 작품이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구성이나 기술이 매우 닮아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다. 전개, 구조, 설정, 주인공, 주변 인물, 화법... 전문가들이 찾아보면 공통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잠정적) 하드보일드 팬들이라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에게 한꺼번에 욕을 얻어 듣는다면... 사드가 말하는 뭔 백작급이겠다. 그러고보니 참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스타일이다. 가터광 맨켄 때문이다. 헤밍웨이 때문이다. 피츠제럴드 때문이다. 웨스트 때문이다. 왜 이런 의견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지 말자는 어떤 기구 협정 같은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마도 톰소여의 모험에 대한 성장기 직접 경험들을 머드(2012)의 Ellis 울부짖음으로 퍼트려 알리자는 숨겨진 담합 때문일런지 모르겠다. 그 궁금함 또한 미스테리다. 정말 많이 차분하고 진중히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일반 독자들의 의식 흐름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기법의 판이한 작품들도 보면 비슷하다. 게다가 약간 시나리오 같은 작품들은 정말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싱긋하고 파릇파릇 상큼한 십대 여학생들이 싫어하는―혹은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는―고품격 소설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파묵, 쿤데라, 만, 도스도예프스키, 카잔차키스, 에코, 보르헤스 그리고 서정시와 사랑 노래. 그럴 수 밖에 없다. 핀터리스트에서 볼 수 있는 칵테일빛 푸르름, 떠다니는 밝음 그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휴양지에 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렇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좀 더 어려운 책을 찾아 읽기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골아 떨어질 게 뻔하다. 그래야 온당하다. 두숨으로 나누어 호흡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숨 쉬는 모습이 딱 그려진다. 아무래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직된 표정의 다스 바이더로 변신해 가는 것일까. 만일 그렇더래도 나중 주니어의 바이올린 줄을 가위로 자르지는 않아야 할 텐데, 바이올린을 사줄 수나 있을런지, 그를 만날 수나 있을런지 내심 걱정이다.
   어른들은 그런다. 의례 이 시대의 청춘들은 지드와 헤세, 톨스토이를 읽고서 스무살이 된다고. 왜 어른들의 말은 항상 똑같은 것일까? 수십 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텍사스에 사는 20대 젊은이에게 물어보자. 허먼 멜빌, 엘리엇,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웨스트, 스타인벡, 포크너, 존 업다이크, 트루먼 카포티를 모두 읽어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정말 그 작품들을 진지하게 감상하신 분들이 있다면 제발 손을 들어보라고. 지드와 헤세, 톨스토이를 제대로 읽고 감상할려면 새치가 옆머리에서 다른 부위로 이미 퍼져나가는 나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려나. 그런데 (반올림) 중년이 되면 먹고 살기도 바쁘다. 술도 마셔야 하고 TV도 봐야 한다. 드라마, 낚시, 산책, 동네야구, 동네축구. 또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그리고 로테이션. 인간계라는 우주가 참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른들의 말이 교육적이고 좋은 교훈이긴 하지만 쉽게 말해 그것은 엘리트만 해당되는 말이다. 학자들은 또는 어른들은 왜 엘리트를 위한 글만 쓰는가? 작품은 엘리트를 위한 글을 쓰더래도 단문은 앨리스를 위해서도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아니 베토벤도 곡을 썼자나. 엘리제를 위하여. 지나친 비약에 뭔 말도 안되는 소리야.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는 어떤 작품일까? 포크너가 인사권을 쥐어진 당신의 고약한 직장 상사도 아니니까 나중 이성 친구에게 대신 읽고 나서 감상평을 얘기해 주라고 해도 된다.
   아마도 이미 외웠을 테지만 작가들 개개인이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은 찰스 디킨스에 뻑 가지는 않지만 제이콥슨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쪽과는 다르게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익숙하고 좋아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독서는 그야말로 체력소모가 엄청나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한다면 (일부로 억지로 꼬집어 보자면)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일 것이다. 하드보일드 스타일 소설에서 장면 전환? 엄청나게 빠르다. 눈 깜빡하면 영화나 드라마처럼 훌쩍 세트가 바뀌고 단 몇 초만에 플롯의 상당 부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정신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서 읽는 순간 순간 독자의 긴장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는 장소와 상황도 중요한 것이다. 서점에서 구입한 예쁘고 단아한 포장지로 쌓여진 미 비포 유(by 조조 모예스), 가솔린 생활(by 이사카 고타로) 같은 책을 Flickr, Bing 메인 화면에 나오는 공기마저 아름다운 산소와 낭만적인 질소로 구성되어 있을 것 같은 휴양지에서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런 하드보일드 고전 소설 가운데도 3대 뭐뭐가 있다. 미스론리하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위대한 개츠비.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는 그야말로 확실하다. 뚜렷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비교적 덜 정확한 세계 3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세계 3대 후라이팬, 세계 배구계의 3대 거포 등등등. 이런 평가 선정 기준은 정말 아리송하다. 그래서 Top3에 드는 현존하는 누군가는 이런 의사를 표명할 수도 있다. "아니 Top10도 아니고 누가 저를 세계 3대에 집어 넣었죠? 그러니까 이렇게 안티가 극성이고 업계에 소란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 만드신 분, 좋은 말 할 때 3대에서 저를 빼놓으세요." 코메디 프로그램에 보면 실재 이런 말 하시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하여 언제부터인가 규정되어진 이 3대 뭐뭐는 사람들과의 교양을 갖춘 신사적인 대화에서는 유익하게 쓰인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필수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이 3대 뭐뭐는 참고만 해야 한다. 인문교양서에서 전문가들이 많이 얘기한 내용이다. 포춘지 선정 대학생들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기업들에서 초엘리트만 뽑지 않는 이유, 신생 유망 기업들의 특이하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입사 방식, 유명 기업 C-level 괸리자들이 17세기 그림을 보고 18세기 음악을 들으며 19세기 시를 읽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니까 말빨 걸출한 코메디언, 로비스트, 부동산 업자, 모사꾼들이 그 어구를 좋아한다. "내가 봤을 때는" 말빨 좋은 사람들을 잘 보면 목소리만 빼면 억양이나 리듬, 톤, 멜로디는 정말 놀랍게도 일부분 일치한다.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라. 제이 레놈의 턱을 사정없이(거기 학생은 ...과도증입니다) 휘어잡고 흔들었던 에로 영화계의 거장 미스터 봉감독에 대한 영화를 보다가 어느 조연이 말하는 게 어떤 친구랑 완전 똑같다. 말하는 방식과 톤, 리듬... 그래서 말빨 관련 검색 제시어들이 그렇게 많을 것이다. 뭔 근엄하게 하드보일드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불규칙적인 리드미컬한 속도감과 보통이 말하는 세계 여러 공항의 느낌 그리고 상황이나 인물 설정과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고혹적이라면 그 따분한 문체가 아닐지라도 하드보일드 소설을 사랑할 것이다. 다국적 교육환경을 거친 은은하며 고운 자태의 아이들 엄마 또는 충분히 지성적인 묘령의 여인이라면. 곧 이 말은 오슬로 같은 꼭 물가가 비싼 도시가 아닐지라도 거의 모든 대도시든 어디든 사람들 옷 입는 스타일은 다 달라도 견적 스케일은 어느 범위에서 거즘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 범주 바깥은 꽤나 별스럽다. 케미컬하게 희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즉 하드보일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 고품격. 빈칸에 넣을 수 있는 말은 무수히 많다. 굳이 어울리지 않아도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누군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제이크 반스는 이를테면 이런 단어를 선호한다. 빌어먹을. 영화에서는 꽤 어울리게 설정할 수 있지만 영화가 아닌 소설에서라면 그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어떤 독자들은 약간 부적절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떤 까다로운 독자는 읽으면서 그 단어를 세면서 읽어갈 수도 있다. 아무래도 그 빈칸에 '그 놈의'가 자리한다면 어떤 사람으로부터 별 차이없다는 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람은 포근한 속삭임을 연기하고 의무감으로 행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꽤 싫어하는 위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와 소설에 대한 섬세한 차이를 압축해서 받아들이니까. 책만큼 수평적인 인격체를 단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시간을 들 수 있다. 로버트 콘과 짐 크레이스가 말하는 시간의 속도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한정된 자원을 두고 (어떻게 선정된) 고품격 소설 작가들은 어떤 작품들을 선호할까? 그건 개별적으로 추측하기로 하고 그들의 독서량을 생각해보자. 그 전문가들의 독서량은 혁신 업무를 맡고 있는 일반 기업체 사원이나 군무원, 도서관 직원보다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독서량 순위를 매기자면 그들은 적어도 상위권에 들기는 힘들다. 분명 골라서 읽을 것이다. 물귀신 작전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이란 그런 것이다. 한 잔의 카페라떼를 두고 한쪽은 담백하고 부드럽다는데 반해 다른 한쪽은 느끼하고 텁텁하다고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그림. 턱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두고서도 한쪽은 바디랭귀지를 분석하고 다른 한쪽은 척하고 모딜리아니와 노라 에프런을 떠올린다.
   2014년의 바르셀로나, 유벤투스, 첼시 축구팀과 1914년의 그 팀이 가상 대결을 한다면 누가 이길까? 또는 2014년 팀과 더 먼 미래의 팀은? 1년에 대한 예상치는 애매하지만 10년이나 100년 차이는 손쉽게 이치를 알 수 있다. 시간을 쟤는 스포츠 종목들도 그렇다. 시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www.julianseo.tumblr.com/post/74699835616) 메시보다 드리블 기술이, 돌파 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축구 역사상 있었나? 달레산드로 같은 줬다 뺐다, 들었다 놨다, 깐죽 스타일 발바닥 드리블러가 과거에 있었나? 수비수의 마음을 안달나게 하여 애간장 녹게 만드는 그런 발바닥 기술의 지존! 아마도 아니겠지만 만일 수비수가 그의 애인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를 답습하고 공부하고 연습했기에 그런 기량을 갖추었을 것이다. 미래에는 더 뛰어난 선수가 탄생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현재 헤밍웨이 정도의 역량으로 누군가 활동한다면 옛날의 헤밍웨이 만큼 조명을 받기는 힘들다. 아예 묻힐 수도 있다. 즉 세스 고딘 신작에 나오는 그래프와는 다른 성격으로 우수한 작품들의 그래프는 오름새라고 보는 학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 작품 가운데서 쾨헬 넘버 몇 이하만 듣는 오타쿠도 있을 것이다. 60년대 재즈만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 주의는, 그 사조의 일부는 약간 남성의 관점으로 보여지는 세상이다. 성 기호를 세분화하면 매우 다양하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러니까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고 현재보다는 미래 작품이 더 훌륭할 가능성이 높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예상도 가능하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그 학과 젊은이를 위해 조심스럽게 넌지시 한마디 하시는 어른들도 계실 것이다. 교수님들은 당신의 불만을 너그러이 알고 계신다고. 그러니까 현실과 가상세계, 인터넷 세상 속에서 정보를 얻고 침착하게 작품을 감상하면서 장점을 잘 찾고 그런 작품보다 뛰어난 문파를 창시하라고. 글쓴이는 그만한 역량의 어른이 아니라서, 그 분야 전공이 아니라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유감스럽고 통탄해 마지 않는다. 이 어찌 슬프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가식덩어리, 참으로 의뭉스럽다. 소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지은이가 간접적으로 그들을 위한 조언을 하고 있다. www.facebook.com/notes/spafinale/조심스러운-책읽기-실버라이닝-플레이북/558234720876580 참고로 하드보일드 스타일 바깥 영역 가운데 실크 옷감의 살랑거림과 미워할 수 없는 강아지의 꼬리 흔듬과 몸짓 그리고 고양이의 생철학에 대해 연주하는 남성 작가가 그리는 여자의 관점, 참 괜찮다. "가난한 것의 문제는 모든 시간을 다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라고 케빈 로버츠의 책에 나와 있다.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명언이다. 그러면 가난에 따른 환경 요인으로부터 개개인의 소중한 시간 자원의 침해를 최소화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신은 이미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우마 써먼, touch!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작가 이름에 환장한 것도 아닌데 책을 무리하게 너무 많이 읽었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는 너무 많이 리메이크 되었다. 보통,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나는 일을 하면 찐이 빠진다고들 한다. 예를 들어 몇몇 직업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어도 어른들은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쓰러진다. 또는 술 먹고 뻗는다. 세계의 유명 휴양지를 모두 돌아다니는 항공기 승무원들도 곳곳에 도착한 후 정말 왕성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휴식을 취한다고들 한다. 한 편의 짧은 글에서 수줍은 지식으로 사람 이름 브랜드를 너무 많이 들먹이니까 신물 나지는 않지만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누가 지적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였는가? 왜 그대는. 고품격 소설 황금기? 오면 큰일 날 것 같다. 지금의 그 반응? 그것이 제임스 본드 이론이다.

그리고 죽음/짐 크레이스
91쪽. 열정에 앞서 부드러움을 원했다면, 이제 그녀는 그 부드러움을 맘껏 맛보고 있었다. 조지프가 열정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줄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218쪽. 그녀는 얼마나 자주 자문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사랑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셀리스는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급하게 주먹을 치켜드는 타고난 전사인 반면, 남편은 목청을 높이는 것조차 싫어하는 유화적인 사람이었다. 부부 싸움이 일어나면 남편은 굼뜬 인내심과 분통 터지는 임기응변으로 셀리스를 괴롭히고 좌절시켰다. 한번 말다툼을 하고 나면, 대개 그녀는 일주일 동안 화를 냈고, 남편은 보름 동안 불쾌감을 드러냈다. 둘째, 셀리스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했고 친구를 원한 반면, 조지프는 교제를 싫어하고 프라이버시를 추구했다. 셋째, 셀리스는 자기 생활에 불만을 느낀 반면, 조지프는 자기 생활을 걱정했을 뿐이다. 셀리스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지기를 원했지만, 조지프는 힘들게 얻은 확실한 것들이 사라지지나 않을까―건강을, 직장을, 수도승 같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221쪽. 조지프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들한테는 그런 감정적 상상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셀리스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조지프가 그녀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페스타의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극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녀가 아는 여자들보다 더 안정되어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245쪽. 자신에게 할당된 짧은 인생이 나날이 줄어들 때, 죽어 가는 사람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250쪽. 강연, 뉴스, 토론. 감상적인 노래가 아니면 음악은 듣지 않았다. 아내와는 달리 그는 오케스트라에 열중하지 않았다. 실비의 부모는 침대나 연주회장에서 사이좋게 공존할 수가 없었다. 셀리스는 혼자 연주회장에 가고, 혼자 침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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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Inspiración - Yann Kebbi

<의뭉스럽다>는 표현이 최근 읽은 책 두 곳에서 나왔다. 하나는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다른 하나는 줄리언 반스의 태양을 바라보며. 의뭉스럽다는 말은 이렇게 책에서만 아주 드물게―또는 거의 드물게―대면할 수 있지 현실에서는 거의 듣기 힘든 말이다. 사람들끼리의 대화에서―사람과 동물의 대화가 아닌―<의뭉스럽다>는 대체로 잘 씌이지 않지만 '응큼하다', '센스있다', '눈치 빠르다', '뭘 좀 안다', '감 좋다', '숭악하다', '어린양 부린다', '젠체하다', '애교 부린다', '교태 부린다', '요염하다', 음습한 분위기다' 같은 표현은 더 자주 쓰인다. 왜 그럴까? 왜 어느 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일까? 왜 그러긴 뭐가 왜 그러겠는가. 그냥 말과 글이 다르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보통 책을 고를 때 소설을 예로 들자면 멋진 주인공의 환상적인 설정을 선호한다. 이건 어떻게 보면 대리만족, 영움담 같은 단어도 포함하는 의미다. 다른 장르에서는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콤파스로 어떤 범위를 제한하자면 그럭저럭 수긍할 수 있는 얘기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자면 그 멋짐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다르거나 하는 유사성 원리의 둘 중 하나이거나 혹은 또 다른 새로움일 것이다. 전자는 그 어떤 정치함이랄지 뭔가 현실에서는 바랄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낭만 같은 그런 분위기에 대한 묘사나 서술일 수 있고 후자는 이성(남녀)이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시어, 전문용어들이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다. 정확한 구분과 더 나은 설명, 고급스러운 비유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건 그 분야 능력자를 얕보는 처사이기 때문에 더 다듬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세상을 깔보려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한다. 온몸의 피가 일순간 얼굴 부위로 급격히 쏠리면서 몹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절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뭐 알아서 해석하기 바란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면 주인공을 분석하고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성향과 또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이나 유토피아, 등장하는 인물 뿐만이 아니라 시점과 기교적인 수사법에 대해서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뭔가 재미는 있는데 또 뭔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랄지 그런 부분이 당연히 신경 쓰인다. 그래서 기분전환을 위해 시도한 독서 행위가 마침내 투덜거림, 흠짐내기, 약 올리기 같은 본인의 음성적인 인간 본능이 자신에게 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진단이 틀렸다는 깨달음의 반성 시간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따라서 괜찮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신이라면 또는 더 쾌적하고 여유로운 생활 환경 상태에 있는 현재의 본인이라면 느긋하고 관조적이며 침착하게 감상할 작품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작품 탐독을 위해 시간을 아껴야 하는 매우 아쉽고도 억울하고 슬픈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인의 범주에 드는 현상이다.
   대개는 소설 한 작품과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삶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소설 한 권 읽는데는 약 1주일 걸린다. 빠르면 1시간, 오래 걸리면 1년 또는 읽다가 반의도적으로 어디다 숨겨버릴 수도 있고 멋으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만 다닐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반올림 했을 때 요절한다면 50년, 정상일 때는 100년이다. 시간으로만 봐도 장편소설과 인생은 동일시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잘 살펴보면 그가 왜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실험적이고 어렵고 형이상학적이고 깔끔하며 파격적인 또 뭐뭐한 작품들을 모두 뒤로 한 채 고상하고 세련되고 우아하며 기품있고 멋지고 로맨틱하며 정서적이고 미스테리한 게다가 단정한 가운데 오묘한데다가 흥미롭기까지 하는 그런 뭔가 아련한 아름다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가? 그러면 그 인간은 거즘 완벽히 그런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보통 독자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욕심쟁이다. 현실에서 제아무리 공손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책 읽는 태도와 취향 또한 그와 똑같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다. 재수없는 놈!
   소설에 나오는 소유욕이나 구체성, 감상주의 나쁘지 않다. 재미있다. 그렇지만 어느 범주 일반인이 바라는 것은 더 은근한 꾸밈이랄지 더 나은 서술... 그것까지 포함하는 껴안는 스케일을 더 좋아할 것이다. 값비싼 브랜드 제품? 갖지는 못해도 매일 거리에서 본다면 그 느낌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 고품격 서적? 죄다 구입해서 책상 한쪽에 쌓아둘 수도 있지만 서점에도 있고 도서관에도 있으며 인터넷 세상에도 있고 또 혼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물론 젊은 나이의 독자라면 당연히 그쪽이 더 멋져보일 것이다. 나이 든 독자라도 그 빛남은 덜하겠지만 작품성은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작품 또는 서정적이고 궁금하고 몽환적이면서 흥미로운 작품이 (어떤 의미에서의) 고품격을 내재하기까지 바란다는 것은 너무 바램이 지나치다고 아니 말 할 수 없다. 속도감 있고 독특하고 매끈한 작품이지만 매리엔이 느끼는 의뭉스러운 감정을 아주 약간 환기시킨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단 1~2초간의 눈빛이나 표정이 일관되지 못했다면 그건 완벽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눈빛이 포함된 얼굴 표정만을 감지하는 독립 기관이 두뇌에 공간상 자리잡고 있다는 환상이라니. 쉽게 말해 일상 공간에서 화자되는 단어로는 이것을 태도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태도, 책에서는 문체 그리고 (그 둘을 포함해서까지) 영상 공간에서는 스타일, 스똬―일! 그리고 (철학소설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더할 테지만 그런 사조를 제외한다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아무래도 옮기기 힘든 밑줄긋기, 기운, 느낌들...
   까탈스러운 독자 이야기에서 범위를 좁혀볼 수도 있다. 바흐와 스카를라티, 롯시니와 바그너를 구분하고 작가 누구, 화가 누구, 영화는 뭐...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핀란드란 단어를 던져보라. 아마도 100% 이런 답이 나온다. "내가 제일...". 그리고 그 사람이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주제를 던져보라. 근엄한 표정으로 침묵하거나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관심없어." 고품격 브랜드를 꺼내놓으면 ... 재미있다. 사람들 나이듬의 특징에 대해 열거한 후 요즘 새벽에 일찍 일어나냐고 물어보라. 하하하. 또 그 사람과 밤 늦게까지 독주를 마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상황을 연출해서 최근 밤에 일찍 취침하냐고 물어보자. 그 다음 반응 뻔하다. 그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살아간다면 원래의 고유한 감정과 정서는 저 잠재의식보다 어두컴컴한 4차원 공간 속으로 파묻혀 버릴 수 밖에 없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책에 나오는 기가 꺾이는 경험을 한다는 하버드의 얼간이들과 큰 물고기―작은 연못 효과, 물론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언제나 장기적 포지셔닝과 드넓은 스케일의 큰 물에 또는 그 크기라는 객관성에 더 사람들의 마음이 기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째, 특정 생태계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동화되고 적응한다. 둘째, 1%의 1%의 1%는 정말 드물다. 99%라면 물살을 또는 우주선을 타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 셋째, 꼬리표는 무덤까지 따라다닌다. 넷째, 그래프 곡선에 대한 잠정적 기대 고도―미래 기울기 0도―의 궤도 진입에 대한 가치의 가중치는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골 생활도 나름 살만하고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지기만 한다면 엄청 느린 점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래도 달라스에서 필름이 끊기는 것보다는 하버드에서 기가 꺾이는 게 좀 더 그럴싸하지 않겠는가. 만일 하버드의 얼간이들이 진짜 얼간이라면 달라스 사는 인간은 ... 그렇다.
   많은 인간관계와 세상사는 코메디고 동물원에는 조련사가 있으며 소설가는 시인처럼 문체를 고민하고 학자들은 그래프를 연구하며 아마추어 퍼포먼스 관계자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술을 마신다. 엥 아직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문화 생활과 자기 수양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삶, 불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냥 그렇게 타고나는 것이다.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다. 세상 모든 일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또한 사람은 어느 만큼은 대개 비슷하다. 어느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 돈을 건네받으면서 가장 무난하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스킨쉽은 살결과 살결이 닫을 듯 말 듯 하는 지점이다. 눈동자 마주치기 관계의 비율은 논외로 하자. 그런데 이 때 제 아무리 단순한 사람일지라도 과도한 스킨쉽과 다른 여러가지 신호들이 깜빡거린다면 머리속이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는 약간 힘들다. 왠걸...
   왜 하늘은 하늘색이고 바다는 청록색인가? 왜 어른들은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색 신호등이라고 부르는가? 왜 어떤 나라에서는 특정 언어권의 책이 많이 팔리는가? 왜 삶의 속도가 느린 나라의 치매 분포는 더 풍족한 나라들의 그것과 다른가? 왜 추운 나라 사람들은 독주를 잘 마시는가? 왜 만물은 일장일단이 있는가?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jan/27/scandinavian-miracle-brutal-truth-denmark-norway-sweden
 (원문을 아주 대충만 이해했고 사람 사는 곳은 제각기 다르면서 비슷하다는 취지로 인용했다. 선택의 차이, 균형의 산물, 문화적 특징도 있는데 그곳도 그 나름의 단점이 있는가보다) 왜 올리버 제임스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하지 않는가? 세상일은 다 이유가 있고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헤밍웨이의 후반기 인생은 어떠했는가 또는 그 라스트는? 왜 지금 세상에서는 조이스, 톨스토이, 모차르트, 뭉크, 아인슈타인 같은 거성들이 태어나서 활동하지 않는 것일까? 왜 고양이는 그렇게 요염한 자태를 타고났는가? 왜 강아지는 나무 옆에만 서면 한쪽 다리를 드는가? 왜 UFC에서는 미국과 브라질 선수들이 강세인가? 왜 어떤 사람들은 유명인들의 동작을 따라하는가? (흔한 동작 말고 바디랭귀지 전문가가 인정하는 임팩트 있는 액션과 심판이 휘슬을 불었을 때 축구 선수들 반응들) 왜 명배우들은 메소드 연기와 친밀한데 일반인들은 메소드 읽기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가? 왜 블랙 코메디 작품들은 가치 폄하되는가? 왜 새로움, 독창성, 신비로움이라는 덕목은 높이 평가되는가? 왜 팀 페리스의 4시간이란 책을 읽은 후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왜 자신의 영혼을 걸겠다던 게리 바이너척의 이론과 피터 드러커의 연구는 서로 대립되는가? 왜 로고는 컬러풀과 브랜드 가치가 비례하지 않는가? 왜 어느 술취한 아저씨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서 기도를 하는가? 그나마 페이스북 담벼락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일정한 패턴이 보이는가? 그렇다. 분량을 늘리는 가장 저급한 방법이다. 세상일은 모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곡이 안써진다고? 방탕한 생활이 원인일 수도 있다. 그림이 안그려진다고?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서 간도 나가고 실력도 떨어진거다. 주제 잡기가 힘들다고? 먼데서 찾지 말고 좋아하는 걸 생각하고 아는 걸 써야 한다. 데이비드 로지 교수도 힘겹게(?) 고백했다. "그들이 전문적인 용어로 말해 '내 분야'였고, 그 이외 지역에서 발표된 소설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일에는 확신이 적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읽는가 그 대상이 왜 중요하냐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고, 가고, 만나고, 보고, 쓰고, 출판하고, 번역하고... 기타 등등은 모두 제약이 따른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소설 제목으로 치면 서머셋 몸의 면도날이다. 예를 들어보지 않아도 쉽게 절감하고 선뜻 인정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제한적인 성질을 띄지 않는다. 왜 완벽이 아니고 '거의'냐면 (원어 리딩이 가능한) 3~5개 국어 사용자나 특출한 전문가 가운데 전문가,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회적으로 대놓고 보아도 허용되고 묵인하고 장려되는 성질의 것이 있다. Starbucks 마크,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이탈리아 대표팀 복장, 미술관에 있는 라울 뒤피의 그림, 쓰러지게 우스운 Retweet, 인상적인 Vine 컨텐츠, 지적인 성감대를 자극하는 Instagram 게시물이 그렇다. 하지만 (특히 젋고 뭐한) 여성의 아담한―기준이 모호하다―유방, 매력적인 남성의 완전 납짝한 엉덩이(뒷모습이어서 애매하다면 반바퀴 회전하는 걸로), 무섭게 생긴 우락부락한 남자의 얼굴(맙소사!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값비싼 자동차의 어떤 마크는 대놓고 보면 안된다. 하기는 그런 사회 규범과 시장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일례로 어떤 영화에서 삶이 알쏭달쏭 지루한 듯한 제자와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했던 어느 음대 교수의 대사를 떠올릴 수 있다. "왜? 벤츠 처음 봐?" 책은 단연코 전자다. 절대적으로 대놓고 봐도 무방하다. 마음대로 골라서 봐도 된다. 이렇듯 출판물은 참 착하고 어여쁘게도 정말 너무나 수평적이다. 어느 꽃다발처럼 수평 머시기 엔진과도 닮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읽는 것의 나머지에 대해 자유로운 계층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이거라도 마음대로 해야 한다. 젊어서는 무엇을 잘 입고, 잘 쓰고... 잘 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컨텐츠를 향유했다면 시간이 지나서 어른이 되었다면―이것도 기준이 모호하다―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안목과 취향, 선호도와 함께 신체 나이, 정신 연령, 인격 장애, 지적 수준등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왜 읽느냐는 존재론적 고민은 약간씩 각자의 현실 삶에 적용할 때 조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초라한 어느 이방인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면 과거 어느 한 시절 아주 잠깐 책을 많이 읽었던 때가 있었다. 그게 꾸준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고 남들처럼 공부 못하니까 하기 싫으니까 재미 없으니까 펠릭스 아버지의 <닦치는데로 흡수하라>는 교육 철학처럼 책만 마구 읽었다. 그 나이라면 당연히 TV도 즐겨 보았다. 그 나이라면 TV에 나오는 영화 속에서 조용한 주인공이 일순간 말빨을 세우는 장면이 멋져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때는 그런 작품의 원작을 만드는 사람―소설가―도 당연히 말빨이 좋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가끔 EBS나 다른 채널에서 확인한 결과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실망스러운 기분을 근사치로 부를 수 있는 꽤 적절한 명사가 있다. 상심. 살면서 그렇게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된 후 독서에 조금 흥미가 떨어졌던 것 같다. 게다가 소설가들은 영화 배우처럼 훤칠하고 잘 생긴 것도 아니다. 어쩌다 산적 같은 외모의 소유자도 있다. 하긴 프레타 포르테 같은 패션쇼만 보더래도 마지막 디자이너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뭔가 동질감과 인정 같은 감정을 알게 모르게 서로 공유한다. 가끔은 완전 운수 좋은 케이스도 있지만 말이다. 고품격을 타고 난 것 같은.. 그렇다고 본인은 외모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이런, 어떻게 갑자기 당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정확히 읽어버릴 수 있지? 뭐야 이게 현실이야 그리스 로마 신화야. 이제야 죽이 좀 맞는다. 궁짝이 맞아 간다. 그렇다. 당신의 의견처럼 말처럼 생각처럼 글쓴이는 황금만능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소설 태양을 바라보며의 주인공 진 서전트가 바라고 소망하고 기원했던 감정들을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더 구체화 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이카루스처럼 탈출해야 할 운명을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이카루스처럼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방법만 탈출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빠삐용처럼 바다를 건널 수도 있고―빠삐용 친구던가..―태양은 지구 중심에도 있을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마음 한 가운데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연한 방문객(by 알리 스미스)에 나오는 등장 인물처럼 공상하는 걱정을 품고 사는 사람도 아마 존재할 것이다. 아톰이 아닌 채로 치마를 입고서 하늘로 날아오르면 밑에서 사람들이 치마 안의 팬티를 쳐다보면서 수근거릴 것이고 태양이 가까와지면 뜨거움을 느낄거라는 상상. 그러므로 인간들은 칸트 같은 가택감금의 운명을 안고 사는 것이고 토미 프로서처럼 자연현상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에 대한 감성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 같다. 또 그래서 그 린드버그가 그 린드버그인지 굳이 구글링 해보지 않는다. 따라서 순진한 일반인은 인생이 파란만장했던 헤밍웨이의 작품―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을 차분히 읽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뭐 그 작품을 이미 읽었다고? 이런, 그러면 그런 작품을 본인이 직접 써보시라. 페넘브라의 24시 서점―마이클 프레인식 기교가 약한 게 아쉽긴 하지만―을 쓴 로빈 슬로언도 그 책을 쓰기 전에는 그저 평범하고 따분한(?) 회사원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추측이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를 약간은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삶이란 부단히 주위를 살펴보고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보면서 독서와 미술관 관람, 동물원 가기, 여행, 선행, 묵행, 또 행으로 끝나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않기 등을 실행해야 한다.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인생이 재미없는가? 한 편의 소설을 읽어보시라. 살짝만 건드려 보지만 말고 풍덩 빠져 보시라. 어떻게 보면 살면서 그런 순간이 어찌어찌하여 운명적으로 당신을 찾아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당신 스스로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아마 덜 얄미울 것이다. 전자가 마성이라면 후자는 교성― 청각에 관련된 신음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그런 노력하는 성실한 태도―이다. H-T-T-P... H-T-T-P... 그때의 A와 K의 표정이 생각난다.

태양을 바라보며/줄리언 반스
99쪽. 태어나, 성장하고, 결혼한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그것이 인생의 시작인척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결혼하는 것은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수많은 영화와 책들이 결혼에서 끝나는가? 결혼은 질문이 아니라 해답이었다. 결혼은 불평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관찰의 문제일 뿐이었다.
113쪽. 지극히 평범한 마을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행복하지 않았지만, 비참하지도 않았다. 마을의 커다란 음모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꽤 좋아했다. 점차 자신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이클도 분명 그녀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클의 생각보다 더 나쁜 것이 있었다. 아이였을 때, 그녀는 때때로 자기가 특별한 사람, 적어도 어떤 특별한 사람의 아내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군살이 붙어 얼굴의 각도 두루뭉술해졌다.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낮고 흐린 하늘은 언제나 비가 올 것 같았다.
165쪽. 그녀가 그레고리를 위해 터놓고 말한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무 일찍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지 마라. 스무 살에 평생 너를 묶어 둘 어떤 일을 시작하지 마라. 내가 했던 일을 하지 마라. 여행을 해라. 즐겨라. 네가 누구이고 자신이 무엇인지 발견해라. 탐구해라.
166쪽. 남자의 우정은 무엇인가 거짓된 것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한데 모이는 것은 관계 악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사물을 보다 더 단순화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확실함을 원하고 확실한 규칙을 원한다. 수도원을 봐라. 술집을 봐라.
193쪽. 요사이 진은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볼 때, 결말이 행복하냐 또는 불행하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적절히, 정확하게 전개되는 것뿐이었다. 우리 인생이라는 영화도 그와 같다. 그녀는 더 이상 행복이라든가 재정적 안정 또는 병에 걸리지 않기를 (물론 그녀의 야심에 이 셋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어떤 것, 즉 계속해서 믿어도 좋은 것들을 추구했다. 그녀는 자신이 계속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을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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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사랑의 행위에서 세 인물들의 대화 코드로―연애에 대한 보충성 원리―보들레르 시구가 심하다 싶을 만큼 간지럽도록 쓰였기에 어떤 시인의 노래였던 어느 소설 이름이던 문장을 제목으로 정했다. 독서일기 치고는 무게감과 새로움이 약하기에 그래도 애써 고른 게 이 정도다. 가장 중요한 말을 서두에 담지는 못하니까―왜 그러냐면 바버라 민토가 말하는 논리에 약하니까―차츰차츰 피라미드 구조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TV 토크쇼 화신에서 스티브 신의 멘트를 떠올려 보면 결론이 쥐꼬리만한 다이아몬드―또는 역피라미드―방식인 것 같지만 말이다. 참 제목으로는 그게 더 잘 어울린다. 그 시 구절... '시몽 너는 아느냐...' 하지만 제이콥슨과 반즈가 무의식적으로 대하는 프랑스 시어와 쿠체의 심상에 가려져 있는 독일어 명사를 생각하니 가식적으로 더 어울릴 것으로 보이는 제목으로 바꾸지는 않겠다. 딱 그 만큼은 양심적인 모습이 되었다. 빼먹을지 모르니까 중요한 얘기를 먼저 집고 넘어가야겠다. 소설 사랑의 행위 내용에 대한 작품 몰입이 힘겨운 사람이 있다면 펠릭스의 연적을 사람이 아닌 동물로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또는 펠릭스의 상상 수위를 낮히거나 걸러서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무서운 영화나 여러 살벌한 주제의 드라마나 스릴러 장르와 소설 사랑의 행위가 성격은 달라도 일종의 긴장감 변화량은 비슷하다고 감내하는 수 밖에 없다. 불가능 하다면 이런 류의 고품격 소설책은 아예 집어들지 않는 게 좋을 듯 하다.
   어떤 남자가 옛날에 영화 '그래서 나는 도끼부인과 결혼했다'를 흥미롭게 봤고 지금 J사 자동차를 좋아한다면 이 남자가 어떤 드라마와 영화, 책을 선호할지 일부는―당신이 만일 전문가 또는 눈치 빠른 일반인라면―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에 대한 자료들이 하나둘 계속 늘어난다면 게놈 할아버지와 아바타와 그 미래 지도까지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걸 프로파일링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름이 있으며 이건 전문가들의 주영역이다. (영화 카포네 "그럼 엄마와 아빠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연락했죠?" 아주 간단한 질문이지만 핑하고 솔깃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므로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면 짜증스런 얼굴의―인체에서 단위 면적당 근육량이 가장 많다는―섬세한 움직임을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런 얘기는 쌍팔년도 얘기라서 현실에서는 절대 금기시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물어도 된다.
   고품격으로 읽을 수 있었던 소설들이 몇몇 더해가니 그 작품들의 이런저런 공통점들이 보인다. 여러 권 쌓이다 보니 처음보다 훨씬 선정 기준이 뚜렸해졌다. 사랑의 행위(by 하워드 제이콥슨)에서는 악의 꽃도 영국의 보들레르...라고 한다. 여러 표현들도 그냥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독특한 인물, 새로 문을 연 개패가 아니라 스웨덴 모험가이고 뉴질랜드 식당이다. 응용하면 달라스 루니 같은 표현, 나쁘지 않다. 마음에 든다. 이건 뭐와 비슷하냐면 신문의 제목 기사와 비슷하다. 뉴스 기사는 임팩트가 생명이다. 왜 기자들이 초장을, 도입부를, 제목 뽑는 것을 어렵게 느끼고 곤란해 하는지는 인문교양서 스틱(by 칩 히스. 댄 히스)에 보면 나와 있다. 중견이나 베테랑은 안그러시겠지만. 왜 3류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주제 잡는 것을 어렵게 느끼고 곤란해 하는지 역피라미드식 서술에 대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즉, 고품격 소설을 보면 페이지 한장 한장에 나타난 문장들이 꼭 이처럼 뉴스 기사 제목과 같은 눈부신 옷을 입고 있다. 유난떠는 행위, 과도한 낭만적 달변, 토로, 울분... 모두 그러하다. 괜히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밀었다 당겼다.. (마침표는 사강 소설 제목처럼 두개) 함축적이되 오바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또한 너무 사람 이름만 열거하면 품위에 불이익을 가하니까 개인 브랜드가 많이 나오면서 한 번씩 그런 작가들 이름 들먹거리는 가운데 '환장하네', '신물나네' 같은 상어 파도타기를 점 찍어준다. 이런 작품들의 내용과 등장인물, 줄거리, 구조는 전혀 까다롭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이 말은 어떻게 보자면 그런 소설들이 전혀 또는 별로 소설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아주 뒤틀린 심성의 소유자라면 그런 책을 읽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불만을 불쑥 토로할지도 모른다. '메흐드, 뭐야 이거 죄다 말장난 아니야' 라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고 이런 스타일을 싫어하는 독자층도 태평양 만큼 넓고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으며 몽상 터프가이의 심지처럼 확고 부동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팬층도 아마도 탄탄하리라.
   그런 특징들을 보이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모두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런 작품들이 (안 읽어봤지만)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가계도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길고 험난한가? 아니다. 거의 단 1대다. 또는 '토요일'처럼 단 하루다. 엄청 복잡한 집안과 가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자기 자신 배경 탓일 수도 있다. 그 다음은 지리적 요소. '사랑의 행위'가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나 다른 지도를 필요로 하는 소설들처럼 머리 속에 구글맵을 새겨 놓고 감상해야 하는가? 아니다. 지도를 안 좋아하거나 길찾기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에게 걸맞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 그 다음은 분량이다. 악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레미제라블, 백경,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처럼 책이 두꺼운가? 아니다. 본격 추리소설처럼 긴박하게 뒤쫓고 추리력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원소들과 배경을 캐내면서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또한 작품 발표시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보인다. 그러면 등장인물 숫자가 상당한 대작인가? 아니다. 누군가 그런 대서사시 읽기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읽는 중간 자괴감을 느낄 것이 뻔하다. '왜―이 때의 왜는 7세 쯤의 왜일 것이다―난 주요 인물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헤매는 것일까? 남들은 모두들 재미있네, 명작이군 그러는데 말이야.' 셰익스피어나 코엘 맥카시의 카운셀러처럼 시나리오인가? 아니다. 실험적인 구성과 파격적인 문체? 어렵다. 기호학, 시대, 장르, 주의, 과목... 고전 소설? 앞으로 읽어야 한다.
   한동안 고품격 소설 어쩌고 저쩌고, 밑줄긋기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너무 이상하지 않나, 일반인의 어설픈 자기 주장 아닌가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최근 신문에서 본 기고문을 보니 아주 크게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가난한―이런 때는 왠지 가난한 이라는 꾸밈어가 어울릴 것 같다. 실제 탄탄한 중산층일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비한다면 아마도 가난한 게 틀리거나 나쁘지는 않고 더 부유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방대 교수의 고견이다. 동의하지 않는 애호가가 분명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출처는 생략한다. 또 하나의 비밀이다. "걸작의 최종 근거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문체다. 수많은 작품들이 남녀의 사랑을 대동소이하게 다루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을 돋보이게 하는 건 이들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문체다... 세상을 대하는 사유가 독창적이지 못할 때 고유한 문체가 나올 리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그렇게 쉽게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감상주의 문체를 경계해야 할 이유다." 지엽적인 판단 기준일 수도 있고 특정 독자층을 위한 발언일 수 있지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렇게 일반인과 전문가의 품위는 그만한 차이를 보인다.

   학자들의 명문장에 탄복하지만 머리 아픈 얘기라고 독서를 게을리 하면 영영 격조와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문장으로 이루어진 스타일의 소설들 가운데 대중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에 현시대에 약간 안 어울리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인기 차이도 있을 것이다. 지독히 고풍스러워서 그럴까? Goodreads, Amazon 사용자 연령층이 낮아서일까? 아무튼 그런 경우 (약간은 펠릭스와 닮았을 수도 있는) 이율배반적인 두가지 감정이 발생한다.  1.아니 왜 이런 책들은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일까?  2.어라 괜찮은 소설인데 대중의 취향과는 멀리 백조처럼 거리를 둔다?  이런 기분은 아주 특별할 것 같지만 또 인문교양서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http://julianseo.tumblr.com/post/71931978847 여기 몽롱하고 아련하게 빛이 나는 아름다운 신호등이 있다. 그 시그널의 깜박거림이 완전 예술이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면 시그널은 각각 또 다른 언어로 바뀔려나) 그런데 이런 작품 가운데 일부가 대중에게 별로 어필하지 않아. 어디에선가 찾아주질 않아 사장되는 분위기야. 더 좋아진다고나 할까? 토끼가 달린다. 그것도 두마리가 동시에. 이런 순간에는 명백히 과장 수식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과장이란 과거보다는 현재, 이쪽보다는 저쪽, 한쪽보다는 양쪽에서 아주 약간 더 사용하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되지만서도 좀 더 절실한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한마디로 황홀하다! 이런 저런 그런 오묘한 감정들을 이렇게 또렸하게 표현된 글로 인쇄된 책을 읽으면서 좋이를 만져서 페이지를 넘기는 경험이라니. 호사로운 상황이로다. 감탄사로는 와우 또는 어머 쯤일 것이다. 환상적인 놀라움의 표현은 적재적소에 씌여야 한다. SF 장르 소설 매니아거나 예술영화광들도 쏙 빠지는 몰입 대상을 만나면 그와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
   이는 곧 재빠른 속독에 능한 독자들은 담백하고 단촐한 불필요한 장막을 제거한 아주 간결한 문체를 읽는 것 만으로도 청각과 공감각에 연결되는 두뇌 각 부위들이 자동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좀 둔한 타입의 독자는 그런 고도로 산뜻하게 절제된 스타일의 글을 읽는 것 만으로는 특정 뇌 영역들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굳이 올리버 색스의 서적들을 찾아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성질에 속하는 짐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슬로우맨에게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들었다 놨다 돌리고 돌려서 씌여진 책들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냥 대충 90%는 궁금하다고 그 호기심을 풀려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정말 왜 그런지 알고 싶어지게 된다. 왜 남은 뭐라는데 자기는 안 그런지. 그런 차이점을 찾는데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게 좋은 것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Facebook에 dislike 버튼이 왜 없는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여담으로 소설을 훌륭한 예술이자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영화를 밝고 명랑하고 건강한 삶으로 가정한다면 '위대한 개츠비' 작품에 대해 소설보다는 영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소설을 읽는데는 (여건도 뭐하고 해서) 실패했지만 영화는 2번 봤어. 또 그런데 어떤 지역에서는 그 소설 번역본이 조금 과장하면 백여본이 나왔어. 왜 그렇지? 왜 그런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양쪽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타고 났다면, 그런 감성을 후천적으로 개발했다면 더욱 좋겠지만 편협한 기호 뿐이 없는데 어떡할 수가 없다. 혼자니까 1인 취향이 어떻다 말할 수 있지 옆에 권위자가 있거나 어떤 곳에 속해 있다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둘 다 취하는 게 좋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음악 이야기, 사람 브랜드, 마크 브랜드, 몇몇 국가에 이르는 꾸밈어, 고상한 표현과 철학적인 질문과 유려한 문체들이 모두 다 포함된 소설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이 자신에게 알맞는 적당한 균형감을 갖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그(그녀)와 마주치게 된다면 전문가들의 권고처럼 시간을 두고서 2번 이상 읽기보다는 기약없이 지금 분명 아주 천천히 읽고 싶을 것이다. 페이지를 훌쩍 훌쩍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아쉽고 아까우니까. 사람과 책이 아닌 사람과 사람도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그렇게 한 페이지 안에서 틈틈히 문장들을 두어번 읽어보면서 페이지도 되돌려 가면서 읽을 것으로 짐작한다.
   타인의 권유와 찬사는 일종의 Apple 광고다. 최근 개꿈에서 봤던 약 2.5m 길이의 iPad air는 허상이다.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광고와 허상의 중간은 괜찮은 읽을 거리다. 또는 개패에서 불켜진 마크의 기기를 앞에 두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 놈의 마크! 그.. 전문가! 앗 실수할 뻔 했다. 각계 전문가들은 존경한다. 아무래도 이걸 뭐라 부르는 코메디 업계 전문용어가 있을 것만 같다. 펠릭스의 염원과 성향은 닮지 않아야겠지만 낭만파 음악가 펠릭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의 행위를 읽은 후 그 가녀린 떨림을 경험해 보아도 크게 손해보지는 않을 것이다. 떨림에는 타인에 의한 떨림과 직접 본인의 다리를 떠는 행위도 있지만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긴장감도 이 세상엔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반가운 존재다. 그 두근거림이 약간은 슬프게끔 가냘프지 않는다면 플라토닉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육체적 사랑이라면 또는 펠릭스(선조)라면 몰라도.
   언어 마법의 염력사가 노래하는, 소설 문체의 최면술사가 그려내는 작품이 거짓없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면 어린 연령은 아닐 것이니 정신연령 저하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 발생한 셈이다. 때문에 그럭저럭 덤덤하다. 쩍-쩍-쩍-쩍-쩍

사랑의 행위 / 하워드 제이콥슨
p.65 내 생각에 결국 마리사의 마음을 내 쪽으로 기울게 한 것은 바로 대화 방식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프레디는 수다쟁이였다. 수다쟁이는 종종 여자를 외롭게 한다. 마리사도 대화를 원했지만, 잠자코 듣기만을 원한 건 아니었다... (프레디가 항상 그랬듯이) 여자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일 만큼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았고, (역시 프레디가 항상 그랬듯이) 내가 제시한 화제가 더 즉각적인 관심을 요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여념을 끊어버리지도 않았다.
p.66 앉아서 즐길 수 있는 세 가지 지극한 쾌락―독서, 식사, 대화―에 전부를 바치는 남자. 여자들은 자신을 위해 얌전히 앉아 있는 남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p.116 "이타적으로 생각하세요." 부끄럽게도 그때 난 얼굴을 붉혔다. 내가 생각하는 게 너무나 이타적이어서.
p.158 타인의 미신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치 먼 옛날 어린 시절의 나약함이 농축되어 어느 순간 방울져 나오는 것과 같다. 나는 여자한테서 소녀를 보는 게 좋다. 애끊는 심정이 되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불현듯 마리사한테서 그 소녀가 보였다. 공원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겁쟁이 엄마로부터 '안녕, 까치 씨. 부인은 어쩌고 혼자 나왔어?'라고 말하라 배우는 작은 소녀... 토머스 하디가 묘사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드물고 귀한 행복을 즐기는 테스의 모습.
p.169 불안과 긴장을 소명으로서 갈고닦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부공간subspace.'
p.315 하지만 누군가에게 혼이 쏙 빠지도록 반해버린다면······... 정말로, 결단코 안 원해요? 질투 때문에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까? 예컨데 로브그리예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의심되는 현상을 목격하거나 확증하는 사물들의 가장 작은 반향까지 놓치지 않는 그 열정이 정녕 부럽지 않다고요?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애인의 재킷 단추 하나하나, 혹 프랑스령 기니에서라면 바나나나무에 달린 바나나 하나하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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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https://www.facebook.com/goldenretrieverbrasil/posts/10152103099477973

   지난 글들을 돌이켜 보면 어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네 뭐가 좋네 어쩌네 하면서 어설프게 전문가 흉내를 내는 가운데 뭔가 그럴듯하면서 뭔가 엉뚱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패턴이 어느 정도 계속되다 보니 약발이 떨어진거야. 감동 어쩌고 저쩌고 하는 궤변이 한계에 달하다 보니까 다시 공포의 불안 초조 증상이 찾아왔다. 소설 속죄에서 로비가 쓴 편지를 교도관들이 검열하고서 내린 진단이 성욕 과다증이라고 했는데 그쪽 학계에서 일부 학파가 보았을 때 이를 두고 신종 주기적 불안 공포 증후군으로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숨겨진 위장된 조꺼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영화감독은 5년에 1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어떤 소설가는 꼭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10년에 1편의 작품을 출간한다. 유명 록밴드도 앨범 발매 주기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즉 제각기 예술가는 작품 발표 주기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C 이하는 모두 폐기하고 B 수준 이상의 작품이 만들어지면 출고한다거나 주 35시간 노동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적용해서 완벽하게 공장 시스템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사는 화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보통 아무리 잘 만들어도 시간과 촌스러움이 약간은 비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이나 그림과 클래식 음악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좋은 작품일 경우 고풍스럽다거나 우아하다거나 그렇게 평가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명화의 가격을 생각할 수 있다. 곧 대중예술은 1인 명작에 비해서는 좀 뭔가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대중예술은 (미래) 대가들이 성장하는데 영향을 끼치듯이 짧고 가벼운 글은 무겁고 진중하고 격식있는 작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다루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고민해서 쓰고 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론과 상황을 두고 며칠 동안 만만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 가운데 철지난 책의 밑줄 긋기를 정리하던 찰나에 괜찮은 게 하나 보였다. 냅다 포착했다. 그 탁월한(?) 발견은 바로 블링킹과 씽킹이다. http://julianseo.tumblr.com/post/72313547182 모든 일반인이 공감할 수 있고 쉽게 다른 이야기와 연관되고 대입되면서도 용어 자체가 뭔가 괜히 있어 보이니까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그런 담장을 걷는 아슬아슬한 1.5포인트 글쓰기로 꽤 적합한 주제라고 예상했다. 고품격 작품 하나 읽고 포스트 하나 작성하는 속이 보이는 얘기와는 또 다른 방식이라서 무슨 화법의 논리가 이어질지 궁금했다.
   톰 피터스, 말콤 글래드웰, 세스 고딘류 책을 보면 직관이란 단어를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블링킹이 어떻다 현대는 직관의 세계네 뭐네 하는.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얘기다. 근엄하고 성실하고 권위있는 그리고 지성적인 학자의 이론이고 목소리다. 그러면 일반인의 블링킹과 씽킹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이론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지만 단어 자체의 뜻에 그대로 따르면 된다. 그냥 몸을 실으면 된다. 어떤 대상을 처음 보자마자 떠오르는 생각, 단상, 상념, 관념, 번개 같은 스케치 그런 것들. 학교나 직장에서 개패에서 클럽에서 또는 서점에서 첫 눈에 누군가를 보고서 떠오르는 무엇. 대화 중에 긴급하게 갖다 붙이는 블루 거짓말. 바로 그런 것들이 일반인의 블링킹과 씽킹이다. 만약 당신 앞에 12개 나라에서 초특급 호텔의 쉐프로만 20년 일했던 인기 끝장 요리사가 만든 고급 케익이 눈 앞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맛나겠다? 누구와 먹지? 어디서 먹을까? 무슨 음악을 틀까? 지금 먹을까 포장해서 가져갈까? 옛날 일이 생각나는가? 그런 것 말고 그 전에 했던 생각... ... 뭐라구요? ... 그래 그거다. 그게 블링킹이다. 자, 그러면 당신 앞에 튼튼한 후라이팬이 하나 있다. 그러면 ... 그렇다. 그게 직관이다. 럭셔리 카를 본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결혼을 조금 미루고 도시의 이성들을 모두 꼬셔버린 후 카사노바계의 역사를 새로 쓴다거나 또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생각나는가? 처음에 들었던 생각. 옆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지금 빛의 속도로 당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그래 그게 블링킹이다. 이 짧아진 시간, 이건 학습이라고 부른다. 축하한다. 당신은 천재적인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유명 작곡가들이 술집에서 즐겁게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테이블 밑에 고개를 쳐박고 악마에게만 살 수 있는 악상을 허밍으로 즉시 녹음하는 모습... 그런 것이다.
   일반인에게 블링킹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특별한 예술이 아니다. 여자들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즉시 상대방의 전체 외관 견적을 내고 향수 계열 파악하고 목소리로 직업, 사용 어휘로 교양 수준과 학벌 등등을 파악하는 것, 약간의 씽킹이 포함된 블링킹이다. 남자들이 새로운 이성을 보면 순간 작업 기간이 얼마 걸리겠다, 돈은 어느 정도 들겠네, 어느 단계까지 도달할 것 같다, 진도는 뭐하겠다, 몇 마디 반응을 살펴서 살아온 인생 궤적까지 순식간에 꿰뚫어 보는 것? 누군가는 블링킹이라고 우길 것이다.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는 2014년 현재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처절하게 공감한다. 굳이 영화를 떠올리지 않드래도 땅이 크거나 인구가 많거나 부자 나라는 뭔가 비밀의 스케일이 다를 것이라는 당신의 막연한 김빠진 뚱딴지 같은 공상 말이다. 지금 당장 지구인은 우주여행을 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과학으로 영화 인셉션처럼 꿈을 조작하는 것? 가능하다. 또 영화 뭐뭐뭐... 능히 가능하다. 한 사람의 미래? 거즘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스케일이 크지 않드래도 당신이 한 사람과 몇 년 사귀거나 몇십 년을 함께 산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모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무슨 책을 읽고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밑줄을 왜 그을지 모두 다 예측 가능한 세상이다. 빠싹 엎드려야 한다. 레옹, 니키타, 본? 멋지지만 모두 기구한 운명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 아바타? 실제 있다. 굳이 경제학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래도 그냥 있다고 긍정하는 것이 당신 삶의 행복도 총량을 증가시키면 시켰지 깎아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 마초들이여 내기를 하시라.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몽정 터프가이가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앗 오타다. 정정한다. 몽상 터프가이로. 독자의 너그러운 관대함을 테스트했다고 치자.
   원래 명왕성에서 온 이방인과 지구에서 살고 있는 남자는 케미컬이 그다지 맞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에 대한 반어적 표현? 그건 실제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냥 '원래 그런거야' 법칙이다. 하지만 이건 사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류 어른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현실일 뿐이다. 그런 마음의 병을 다룬 작품들이 많지 않은가. 어떤 외국 영화가 생각난다. 조연을 맡았던 어느 여학생의 대사, "우리 반(과)에서 잠을 자보지 않은 애는 너가 마지막이야." 소설 내 말 좀 들어봐. 소설&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영화 해안선...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첫인상을 만들 기회는 1번 뿐이라는 것? 상식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아한 미모가 아닌 험악한 인상이 중요시되는 수컷들의 세계도 치열하지만 인간계 자체가 매우 힘든 세상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진위를 판단해야 하고 표정도 살피고 스누핑도 하고 비유와 은유 그리고 직설법인가도 판단해야 한다. 이 사람이 블링킹으로 말을 하는지 씽킹으로 말을 하는지도 봐야 하고 귀와 꼬리도 봐야 한다. 그 꼬리조차 개꽈인지 여우꽈인지도 물론 살펴야 한다. 말은 몇바퀴 돌려서 하는지 읽는 타입인지 쓰는 타입인지 딜레탕트인지 보편주의자인지 고품격 전문가인지 또는 하이브리드인지. 얼굴 두께와 기억력, 양심, 견적내는 스타일도 다 다르다. 이 세상은 말빨 좋은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전문용어 한 단어로도 뻥뻥 터트린다. 꼭 살아있는 세일즈맨의 전설이 아닐지라도 TV만 틀어봐도 모두 다 한 말빨 한다. 이 세상에서 수십 년 살게 되면 모두 말빨의 귀재가 되는 것일까? 말빨 안좋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힘들고 피곤한 세상이다. 나를 찾아줘(by 길리언 플린)에서 에이미의 친구가 괜히 적은 게 아니다. 황홀한 특작 재능이 없다는 게 슬플 뿐이다. 그러니까 말빨 약한 사람들은 다른 재능을 키워야 한다. 몸빨이든 글빨이든 옷빨이든 또는 특수 공감각빨이든. 특급 탐지견 수준 개코이면서 완벽한 포커페이스 어른들을 상대할려면 말빨과 블링킹, 씽킹을 키우는 방법 밖에 없다. 아니면 로빈슨 크루소로 살아야 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는 씽킹을 파악해보자. 그렇다면 정확하게 구분되는 씽킹은 무엇일까? 알고 싶나? 궁금한가? 또는 별로 혹은 전혀 알고 싶지는 않지만 뭐 들어줄 용의는 있는가? 다 이해한다. 알려주겠다. 영화 Submarine, 소설 The Job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동기부여의 마왕, 입담의 제왕들이 떠오른다. 즉 미칠듯한 궁금증 때문에 그런 재담꾼을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바로 씽킹은 이런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직후 그 순간, 그 찰나의 자신을 면밀하고 냉철하게 관찰하라. 

  • 당신의 첫 (  )는 언제인가. 또는 언제일 것인가?
  • 당신의 마지막 (  )는 언제인가. 또는 언제일 것인가?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by 사강)에 나오는 로제의 68페이지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이 일반인의 씽킹이다. 명확하고 깔끔하지 않은가? 참고로 구원(by 자크 스트라우스)에서 소년 잭 필제는 샴푸병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뭔 생각하시는가? 자전거 타기, 탁구, 미술관 방문, 셀피, 길 안내하기, 뒷사람 음료값 지불하기, 연인 연결시켜주기등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게 많은데 뭔 생각하시는가? 안되겠다 당신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3번 정독할 것을 명한다. 웃을 일이 아니다. 분위기를 바꿔서 D 매니아들은 분명 그 장면을 생각할 것이다. A가 엘리베이터인가 차인가 그 질문을 했드니 K의 반응... 이것도 씽킹이다. D 매니아가 아니었다면 신사답게 점잖게 아무 것도 모른 척, 무관심한 척 넘어갔으면 좋겠다.
   전문가에 비해 일반인들은 보통 블링킹에 약하다. 일반인 가운데서도 소득수준에 따라 창의성의 발화 요인에 한계가 따른다. 하지만 지독하게 가난한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다 방법이 있다. 전주없이 그 비밀을 즉시 알려드리겠다. 바로 다양한 책읽기와 생활 범주화 주의라는 평범한 이치다. http://julianseo.tumblr.com/post/73390632360 고품격 소설이라는 약발이 떨어지면 또 다른 차원의 격조 소설이라는 새로운 물약을 찾으면 된다. 그 다음이 걱정이지만. 이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가. 이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어이없는 생색내기라고 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고품격(?) 코메디라고도 한다. 세련되고 청아한 이름짓기가 아니라서 적잖이 실망스럽다. 아찔한 지성에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책을 읽는데 어떻게 된 게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 연령이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블링킹과 씽킹에 대한 완전 심도있는 분석을 마쳤다. 조금은 정신이 혼미하고 아주 약간 찐이 빠진다. 어떻게든 뒤죽박죽 정신없는 잡문을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어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일부 선구자들은 꿈과 이상 그리고 사랑과 행복을 위해 일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 블링킹과 씽킹도 급박하게 별 생각없이 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개개인과 인류의 행복 같은 형이상학적인 요인들과 연결시키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일반인에게 비난 받거나 요원에게 잡혀가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에 대한 놀랍도록 아름다운 아주 수준 높은 명문장들도 필요하지만 일반인들은 뭐니 뭐니 해도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더 좋아한다. 임팩트 있는 그런 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불세출의 기인들은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해주실 것으로 짐작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젊은이가 어떻게 살아가든 그 ROI에 대한 중요한 수없이 많은 기준 가운데 하나는 학교에서 배웠던 교과서와는 또 다른 교과서를 얼마나 어떻게 만나느냐일 수도 있네. (또는) 미슐랭가이드 넘버 쓰리 기준선을 동네 구멍가게에 들이대지 말게나.
   사람들은 가끔씩 심장 박동수가 한순간 치솟는 경험을 한다. 예를 들면 제동장치를 달지 않은 픽시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서 경사가 엄청 심한 내리막길에서 체인이 끊어지면 일순간 매우 답답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때는 블링킹, 씽킹이 아니라 반사신경이 중요한데 그보다 앞서 인간은 감탄사를 내뱉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 야하거나 은밀하거나 심오한 또는 거창한 그리고 일상적인 그런 들어들. 블링킹과 씽킹 만으로도 도파민이나 엔돌핀이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살면서 하루 몇 시간, 일주일 몇 일 내내 언제든지 항상 웃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5세부터 12세의 어린이들 인생에 좋은 영향을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하고 위대한 작품을 찾아 헤매고 경험하는 것이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다. 일부 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다른 어른들에게.
   아, 이간질을 거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새로움은 찾을 수 없었지만 글쓰기 목적에 큰 오점은 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끝마치려는데 귀가 간지럽다. 소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 그건 정말 우연이다. 좀 아껴라. 그게 멋지다. 조금 숨겨라. 그게 아름답다. 약간 감춰라. 그게 나을꺼다. 때로는 숨어라. 그게 편하다. 모든 것을 말하지 말라. 그게 신비주의 컨셉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게 미스테리 행복 법칙이다. 휴- 이제 마친다. 무슨 단어 어떤 전문용어로 요약할 수 있을까?

사랑, 그리고/줄리언 반스
p.20 우리는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결혼은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는데도 이야기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나는 저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너무나 많이 보았고, 그런 책을 너무나 많이 읽었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너무나 많이 믿는 실수를 저질렀다.
p.39 미국에서는 하루는 부동산 중개업자이고 다음 날은 판사가 되는 연수를 받는다. 나는 음식을 좋아하고, 돈을 이해했다. 그리고 요리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장소를 물색하고, 대출을 받고,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직원을 뽑았다. 그랬더니 당장 식당이 생겼다. 간단하다. 실천이 간단한 게 아니라, 생각이 간단하다.
p.40 그러나 얼마 후에...... 이것이 바로 미국적이다. 영국에서는 그것을 <인내심 부재>라든가 <갈팡질팡>이라고 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게 정상적이다. 당신은 성공한다, 당신은 성공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당신은 실패한다, 당신은 성공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정말로 완전히 낙천적이다.
p.42 사람의 생애에서 시간은 대부분 발을 질질 끌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다. 어쩌다 아주 짧은 행복한 순간, 즉 집에 기쁨의 향기가 서린 듯한 마르가리타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그 순간은 마치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접대하는 여종업원처럼 휙 지나가 버리고 만다. ma belle(내 사랑)에게 존경과 충성으로 무릎을 꿇는 순간 시작되는 행복한 시간을 놓치지 말자. 그 행복의 시간이 내가 지난번 여러분과 헤어져 파리로 향했던 바로 그 순간 끝날 줄이야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접시를 높이 들고 매섭게 노려보는 그 왈가닥 여종업원이 언제 다시 한 번 행복의 시간을 접대할지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p.152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게 아닐까? 몇 가지는 회피하라. 몇 가지는 무시하라. 어떤 문제는 멀리하라. 그것이 정상적이고 성숙한 삶의 방식이다. 바쁜 경우라면, 즉 직업이 있고 자녀가 있는 경우라면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야. 만약 당신이 젊다면, 또는 직업이 없다면, 또는 부자라면, 만약 당신이 시간이나 돈이 있다면, 또는 둘 다 있다면 당신은 모든 일에 뭐랄까, 당당히 맞서고 당신의 모든 관계를 검토하고, 당신이 정확히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질문해 볼 수 있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계속 살아갈 뿐이라고.
p.163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일정한 양의 증거를 입수한 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그 사람을 좋아하기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와 반대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한 다음에 그 감정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다.
p.200 만약 당신이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을 나누고자 한다면, 나는 이렇게 나눌 것을 제안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몇 사람을 차례로나 겹치기로 사랑할 만큼 운이 좋거나, 운이 나쁘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거나, 운이 나쁘다. 이런 사람들은 한번 사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단 한 번 할 수 있다.
p.302 앞으로도 항상 사랑할 것이라고 상정함으로써 나 자신을 속여 왔다는 것이다. 앞 문장에서 말한 질리언은 12년 전의 질리언이다. 나는 그 질리언이 내가 항상 사랑할 질리언이라는 것을 안다. 항상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사랑은 하드 디스크 속 사랑이다. 내 심장을 박살 내려면 큰 망치를 든 우람한 남자들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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