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사람) 1972 by 데이비드 호크니

   사람들은 의연히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안면이 있는 듯한 사람, 본 것 같은 영화와 책 그리고 와본 것 같은 장소, 데자뷰가 아니었다는 기억의 되살아남... 그런 정신 상태는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삶의 비밀과 베일과 커튼, 허무 그리고 가능성 그 모두를 알아버리기 전과 후에 대한 소공녀 같은 여대생의 눈빛, 그 차이? 비유가 좀 근사하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수준이 낮은 비유는 단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무엇이냐면 상대방으로부터 거의 분명 이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약간은 무의식의 약은 셈법이 가미된 반향. 또 의도하지 않게 궁금함의 지연이 발생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저급한 비유의 잇점은 before & after의 기준선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런 상상은 말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눈빛으로 드러난다. 왜 그런 비유를 들었는고 하니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앞부분에도 정확히 이와 같은 표현이 씌였기 때문이다. 제이크 반스가 로버트 콘을 간략히 묘사하는 장면. 어떤 한 사람의 독서물에 대한 적정한 연령 수준과 이성, 삶을 대하는 태도. 소비재 산업계에서는 신제품을 출시할 때 타겟 연령층부터 시작해서 온갖 세밀한 계획을 준비한다. 그렇지만 대체로 젊은이는 그처럼 인생 계획을 짜놓고 그에 맞추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틱'에 나오는 '지식의 저주'와 '그리고 죽음'에 나오는 죽으면 어떻게 되버린다는 인간의 육신에 대한 관념 사이에서 조금은 헤매일 수 밖에 없다.
   광고에서는 멋진 연예인이 인생을 얘기한다. 인생이란 어떻다. 사람은 어때야 한다.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남자는... 등등등. 음악과 영상의 조합 가운데 기막힌 카피라이트를 멋들어지게 저음으로 읊으면 정말 폼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처럼 젊은 일반인이 인생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술주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라스 어른들은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 자료실에 가보면 특정 연령층이 좋아하는 책들에만 손 때가 많이 타 있다. 하기는 은은하며 고운 자태의 중년 여인이나 더없이 고상한 모습의 할머니가 발랄하고 새침한 여대생을 주고객으로 하는 의류 브랜드 옷을 입는 것도 썩 잘 어울린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시 스피노자식 불안의 근원에 대해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왜 학계와 교수와 일반 독자층의 굳건한 평판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이다. 그건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면 대개는 그 문체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씌여진 소설이―뭔가 애매한 기준으로 보자면―근사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1인칭 시점으로 씌여진 한 편의 소설에서 '나는'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올까? 1인칭 시점은 아주아주 고급스러운 기술이 요구되는 관점임에 틀림없다. 그래야 마땅하다. 1인칭 시점은 상당히 노회한―그러면서도 나쁘지는 않아야 하는―테크닉이다. 적당한 남성 명사 procédé라면 곤란하다. 그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 업계 전문가들이 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 관계자들은 공들인 문장과 근사하고 우아한 문체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의 비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업계의 감 좋은 친구들은 돈을 많이 벌고, 감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금세 밀려나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쇼펜하우어식 초조함의 원인은 최근 하드보일드 스타일 소설을 읽으면 A와 B 그리고 C 작가나 작품이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구성이나 기술이 매우 닮아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다. 전개, 구조, 설정, 주인공, 주변 인물, 화법... 전문가들이 찾아보면 공통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잠정적) 하드보일드 팬들이라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에게 한꺼번에 욕을 얻어 듣는다면... 사드가 말하는 뭔 백작급이겠다. 그러고보니 참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스타일이다. 가터광 맨켄 때문이다. 헤밍웨이 때문이다. 피츠제럴드 때문이다. 웨스트 때문이다. 왜 이런 의견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지 말자는 어떤 기구 협정 같은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마도 톰소여의 모험에 대한 성장기 직접 경험들을 머드(2012)의 Ellis 울부짖음으로 퍼트려 알리자는 숨겨진 담합 때문일런지 모르겠다. 그 궁금함 또한 미스테리다. 정말 많이 차분하고 진중히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일반 독자들의 의식 흐름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기법의 판이한 작품들도 보면 비슷하다. 게다가 약간 시나리오 같은 작품들은 정말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싱긋하고 파릇파릇 상큼한 십대 여학생들이 싫어하는―혹은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는―고품격 소설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파묵, 쿤데라, 만, 도스도예프스키, 카잔차키스, 에코, 보르헤스 그리고 서정시와 사랑 노래. 그럴 수 밖에 없다. 핀터리스트에서 볼 수 있는 칵테일빛 푸르름, 떠다니는 밝음 그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휴양지에 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렇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좀 더 어려운 책을 찾아 읽기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골아 떨어질 게 뻔하다. 그래야 온당하다. 두숨으로 나누어 호흡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숨 쉬는 모습이 딱 그려진다. 아무래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직된 표정의 다스 바이더로 변신해 가는 것일까. 만일 그렇더래도 나중 주니어의 바이올린 줄을 가위로 자르지는 않아야 할 텐데, 바이올린을 사줄 수나 있을런지, 그를 만날 수나 있을런지 내심 걱정이다.
   어른들은 그런다. 의례 이 시대의 청춘들은 지드와 헤세, 톨스토이를 읽고서 스무살이 된다고. 왜 어른들의 말은 항상 똑같은 것일까? 수십 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텍사스에 사는 20대 젊은이에게 물어보자. 허먼 멜빌, 엘리엇,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웨스트, 스타인벡, 포크너, 존 업다이크, 트루먼 카포티를 모두 읽어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정말 그 작품들을 진지하게 감상하신 분들이 있다면 제발 손을 들어보라고. 지드와 헤세, 톨스토이를 제대로 읽고 감상할려면 새치가 옆머리에서 다른 부위로 이미 퍼져나가는 나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려나. 그런데 (반올림) 중년이 되면 먹고 살기도 바쁘다. 술도 마셔야 하고 TV도 봐야 한다. 드라마, 낚시, 산책, 동네야구, 동네축구. 또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그리고 로테이션. 인간계라는 우주가 참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른들의 말이 교육적이고 좋은 교훈이긴 하지만 쉽게 말해 그것은 엘리트만 해당되는 말이다. 학자들은 또는 어른들은 왜 엘리트를 위한 글만 쓰는가? 작품은 엘리트를 위한 글을 쓰더래도 단문은 앨리스를 위해서도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아니 베토벤도 곡을 썼자나. 엘리제를 위하여. 지나친 비약에 뭔 말도 안되는 소리야.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는 어떤 작품일까? 포크너가 인사권을 쥐어진 당신의 고약한 직장 상사도 아니니까 나중 이성 친구에게 대신 읽고 나서 감상평을 얘기해 주라고 해도 된다.
   아마도 이미 외웠을 테지만 작가들 개개인이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은 찰스 디킨스에 뻑 가지는 않지만 제이콥슨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쪽과는 다르게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익숙하고 좋아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독서는 그야말로 체력소모가 엄청나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한다면 (일부로 억지로 꼬집어 보자면)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일 것이다. 하드보일드 스타일 소설에서 장면 전환? 엄청나게 빠르다. 눈 깜빡하면 영화나 드라마처럼 훌쩍 세트가 바뀌고 단 몇 초만에 플롯의 상당 부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정신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서 읽는 순간 순간 독자의 긴장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는 장소와 상황도 중요한 것이다. 서점에서 구입한 예쁘고 단아한 포장지로 쌓여진 미 비포 유(by 조조 모예스), 가솔린 생활(by 이사카 고타로) 같은 책을 Flickr, Bing 메인 화면에 나오는 공기마저 아름다운 산소와 낭만적인 질소로 구성되어 있을 것 같은 휴양지에서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런 하드보일드 고전 소설 가운데도 3대 뭐뭐가 있다. 미스론리하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위대한 개츠비.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는 그야말로 확실하다. 뚜렷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비교적 덜 정확한 세계 3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세계 3대 후라이팬, 세계 배구계의 3대 거포 등등등. 이런 평가 선정 기준은 정말 아리송하다. 그래서 Top3에 드는 현존하는 누군가는 이런 의사를 표명할 수도 있다. "아니 Top10도 아니고 누가 저를 세계 3대에 집어 넣었죠? 그러니까 이렇게 안티가 극성이고 업계에 소란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 만드신 분, 좋은 말 할 때 3대에서 저를 빼놓으세요." 코메디 프로그램에 보면 실재 이런 말 하시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하여 언제부터인가 규정되어진 이 3대 뭐뭐는 사람들과의 교양을 갖춘 신사적인 대화에서는 유익하게 쓰인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필수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이 3대 뭐뭐는 참고만 해야 한다. 인문교양서에서 전문가들이 많이 얘기한 내용이다. 포춘지 선정 대학생들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기업들에서 초엘리트만 뽑지 않는 이유, 신생 유망 기업들의 특이하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입사 방식, 유명 기업 C-level 괸리자들이 17세기 그림을 보고 18세기 음악을 들으며 19세기 시를 읽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니까 말빨 걸출한 코메디언, 로비스트, 부동산 업자, 모사꾼들이 그 어구를 좋아한다. "내가 봤을 때는" 말빨 좋은 사람들을 잘 보면 목소리만 빼면 억양이나 리듬, 톤, 멜로디는 정말 놀랍게도 일부분 일치한다.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라. 제이 레놈의 턱을 사정없이(거기 학생은 ...과도증입니다) 휘어잡고 흔들었던 에로 영화계의 거장 미스터 봉감독에 대한 영화를 보다가 어느 조연이 말하는 게 어떤 친구랑 완전 똑같다. 말하는 방식과 톤, 리듬... 그래서 말빨 관련 검색 제시어들이 그렇게 많을 것이다. 뭔 근엄하게 하드보일드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불규칙적인 리드미컬한 속도감과 보통이 말하는 세계 여러 공항의 느낌 그리고 상황이나 인물 설정과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고혹적이라면 그 따분한 문체가 아닐지라도 하드보일드 소설을 사랑할 것이다. 다국적 교육환경을 거친 은은하며 고운 자태의 아이들 엄마 또는 충분히 지성적인 묘령의 여인이라면. 곧 이 말은 오슬로 같은 꼭 물가가 비싼 도시가 아닐지라도 거의 모든 대도시든 어디든 사람들 옷 입는 스타일은 다 달라도 견적 스케일은 어느 범위에서 거즘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 범주 바깥은 꽤나 별스럽다. 케미컬하게 희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즉 하드보일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 고품격. 빈칸에 넣을 수 있는 말은 무수히 많다. 굳이 어울리지 않아도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누군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제이크 반스는 이를테면 이런 단어를 선호한다. 빌어먹을. 영화에서는 꽤 어울리게 설정할 수 있지만 영화가 아닌 소설에서라면 그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어떤 독자들은 약간 부적절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떤 까다로운 독자는 읽으면서 그 단어를 세면서 읽어갈 수도 있다. 아무래도 그 빈칸에 '그 놈의'가 자리한다면 어떤 사람으로부터 별 차이없다는 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람은 포근한 속삭임을 연기하고 의무감으로 행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꽤 싫어하는 위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와 소설에 대한 섬세한 차이를 압축해서 받아들이니까. 책만큼 수평적인 인격체를 단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시간을 들 수 있다. 로버트 콘과 짐 크레이스가 말하는 시간의 속도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한정된 자원을 두고 (어떻게 선정된) 고품격 소설 작가들은 어떤 작품들을 선호할까? 그건 개별적으로 추측하기로 하고 그들의 독서량을 생각해보자. 그 전문가들의 독서량은 혁신 업무를 맡고 있는 일반 기업체 사원이나 군무원, 도서관 직원보다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독서량 순위를 매기자면 그들은 적어도 상위권에 들기는 힘들다. 분명 골라서 읽을 것이다. 물귀신 작전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이란 그런 것이다. 한 잔의 카페라떼를 두고 한쪽은 담백하고 부드럽다는데 반해 다른 한쪽은 느끼하고 텁텁하다고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그림. 턱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두고서도 한쪽은 바디랭귀지를 분석하고 다른 한쪽은 척하고 모딜리아니와 노라 에프런을 떠올린다.
   2014년의 바르셀로나, 유벤투스, 첼시 축구팀과 1914년의 그 팀이 가상 대결을 한다면 누가 이길까? 또는 2014년 팀과 더 먼 미래의 팀은? 1년에 대한 예상치는 애매하지만 10년이나 100년 차이는 손쉽게 이치를 알 수 있다. 시간을 쟤는 스포츠 종목들도 그렇다. 시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www.julianseo.tumblr.com/post/74699835616) 메시보다 드리블 기술이, 돌파 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축구 역사상 있었나? 달레산드로 같은 줬다 뺐다, 들었다 놨다, 깐죽 스타일 발바닥 드리블러가 과거에 있었나? 수비수의 마음을 안달나게 하여 애간장 녹게 만드는 그런 발바닥 기술의 지존! 아마도 아니겠지만 만일 수비수가 그의 애인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를 답습하고 공부하고 연습했기에 그런 기량을 갖추었을 것이다. 미래에는 더 뛰어난 선수가 탄생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현재 헤밍웨이 정도의 역량으로 누군가 활동한다면 옛날의 헤밍웨이 만큼 조명을 받기는 힘들다. 아예 묻힐 수도 있다. 즉 세스 고딘 신작에 나오는 그래프와는 다른 성격으로 우수한 작품들의 그래프는 오름새라고 보는 학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 작품 가운데서 쾨헬 넘버 몇 이하만 듣는 오타쿠도 있을 것이다. 60년대 재즈만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 주의는, 그 사조의 일부는 약간 남성의 관점으로 보여지는 세상이다. 성 기호를 세분화하면 매우 다양하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러니까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고 현재보다는 미래 작품이 더 훌륭할 가능성이 높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예상도 가능하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그 학과 젊은이를 위해 조심스럽게 넌지시 한마디 하시는 어른들도 계실 것이다. 교수님들은 당신의 불만을 너그러이 알고 계신다고. 그러니까 현실과 가상세계, 인터넷 세상 속에서 정보를 얻고 침착하게 작품을 감상하면서 장점을 잘 찾고 그런 작품보다 뛰어난 문파를 창시하라고. 글쓴이는 그만한 역량의 어른이 아니라서, 그 분야 전공이 아니라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유감스럽고 통탄해 마지 않는다. 이 어찌 슬프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가식덩어리, 참으로 의뭉스럽다. 소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지은이가 간접적으로 그들을 위한 조언을 하고 있다. www.facebook.com/notes/spafinale/조심스러운-책읽기-실버라이닝-플레이북/558234720876580 참고로 하드보일드 스타일 바깥 영역 가운데 실크 옷감의 살랑거림과 미워할 수 없는 강아지의 꼬리 흔듬과 몸짓 그리고 고양이의 생철학에 대해 연주하는 남성 작가가 그리는 여자의 관점, 참 괜찮다. "가난한 것의 문제는 모든 시간을 다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라고 케빈 로버츠의 책에 나와 있다.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명언이다. 그러면 가난에 따른 환경 요인으로부터 개개인의 소중한 시간 자원의 침해를 최소화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신은 이미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우마 써먼, touch!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작가 이름에 환장한 것도 아닌데 책을 무리하게 너무 많이 읽었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는 너무 많이 리메이크 되었다. 보통,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나는 일을 하면 찐이 빠진다고들 한다. 예를 들어 몇몇 직업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어도 어른들은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쓰러진다. 또는 술 먹고 뻗는다. 세계의 유명 휴양지를 모두 돌아다니는 항공기 승무원들도 곳곳에 도착한 후 정말 왕성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휴식을 취한다고들 한다. 한 편의 짧은 글에서 수줍은 지식으로 사람 이름 브랜드를 너무 많이 들먹이니까 신물 나지는 않지만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누가 지적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였는가? 왜 그대는. 고품격 소설 황금기? 오면 큰일 날 것 같다. 지금의 그 반응? 그것이 제임스 본드 이론이다.

그리고 죽음/짐 크레이스
91쪽. 열정에 앞서 부드러움을 원했다면, 이제 그녀는 그 부드러움을 맘껏 맛보고 있었다. 조지프가 열정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줄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218쪽. 그녀는 얼마나 자주 자문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사랑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셀리스는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급하게 주먹을 치켜드는 타고난 전사인 반면, 남편은 목청을 높이는 것조차 싫어하는 유화적인 사람이었다. 부부 싸움이 일어나면 남편은 굼뜬 인내심과 분통 터지는 임기응변으로 셀리스를 괴롭히고 좌절시켰다. 한번 말다툼을 하고 나면, 대개 그녀는 일주일 동안 화를 냈고, 남편은 보름 동안 불쾌감을 드러냈다. 둘째, 셀리스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했고 친구를 원한 반면, 조지프는 교제를 싫어하고 프라이버시를 추구했다. 셋째, 셀리스는 자기 생활에 불만을 느낀 반면, 조지프는 자기 생활을 걱정했을 뿐이다. 셀리스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지기를 원했지만, 조지프는 힘들게 얻은 확실한 것들이 사라지지나 않을까―건강을, 직장을, 수도승 같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221쪽. 조지프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들한테는 그런 감정적 상상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셀리스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조지프가 그녀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페스타의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극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녀가 아는 여자들보다 더 안정되어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245쪽. 자신에게 할당된 짧은 인생이 나날이 줄어들 때, 죽어 가는 사람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250쪽. 강연, 뉴스, 토론. 감상적인 노래가 아니면 음악은 듣지 않았다. 아내와는 달리 그는 오케스트라에 열중하지 않았다. 실비의 부모는 침대나 연주회장에서 사이좋게 공존할 수가 없었다. 셀리스는 혼자 연주회장에 가고, 혼자 침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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