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Inspiración - Yann Kebbi

<의뭉스럽다>는 표현이 최근 읽은 책 두 곳에서 나왔다. 하나는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다른 하나는 줄리언 반스의 태양을 바라보며. 의뭉스럽다는 말은 이렇게 책에서만 아주 드물게―또는 거의 드물게―대면할 수 있지 현실에서는 거의 듣기 힘든 말이다. 사람들끼리의 대화에서―사람과 동물의 대화가 아닌―<의뭉스럽다>는 대체로 잘 씌이지 않지만 '응큼하다', '센스있다', '눈치 빠르다', '뭘 좀 안다', '감 좋다', '숭악하다', '어린양 부린다', '젠체하다', '애교 부린다', '교태 부린다', '요염하다', 음습한 분위기다' 같은 표현은 더 자주 쓰인다. 왜 그럴까? 왜 어느 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일까? 왜 그러긴 뭐가 왜 그러겠는가. 그냥 말과 글이 다르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보통 책을 고를 때 소설을 예로 들자면 멋진 주인공의 환상적인 설정을 선호한다. 이건 어떻게 보면 대리만족, 영움담 같은 단어도 포함하는 의미다. 다른 장르에서는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콤파스로 어떤 범위를 제한하자면 그럭저럭 수긍할 수 있는 얘기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자면 그 멋짐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다르거나 하는 유사성 원리의 둘 중 하나이거나 혹은 또 다른 새로움일 것이다. 전자는 그 어떤 정치함이랄지 뭔가 현실에서는 바랄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낭만 같은 그런 분위기에 대한 묘사나 서술일 수 있고 후자는 이성(남녀)이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시어, 전문용어들이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다. 정확한 구분과 더 나은 설명, 고급스러운 비유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건 그 분야 능력자를 얕보는 처사이기 때문에 더 다듬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세상을 깔보려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한다. 온몸의 피가 일순간 얼굴 부위로 급격히 쏠리면서 몹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절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뭐 알아서 해석하기 바란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면 주인공을 분석하고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성향과 또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이나 유토피아, 등장하는 인물 뿐만이 아니라 시점과 기교적인 수사법에 대해서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뭔가 재미는 있는데 또 뭔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랄지 그런 부분이 당연히 신경 쓰인다. 그래서 기분전환을 위해 시도한 독서 행위가 마침내 투덜거림, 흠짐내기, 약 올리기 같은 본인의 음성적인 인간 본능이 자신에게 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진단이 틀렸다는 깨달음의 반성 시간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따라서 괜찮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신이라면 또는 더 쾌적하고 여유로운 생활 환경 상태에 있는 현재의 본인이라면 느긋하고 관조적이며 침착하게 감상할 작품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작품 탐독을 위해 시간을 아껴야 하는 매우 아쉽고도 억울하고 슬픈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인의 범주에 드는 현상이다.
   대개는 소설 한 작품과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삶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소설 한 권 읽는데는 약 1주일 걸린다. 빠르면 1시간, 오래 걸리면 1년 또는 읽다가 반의도적으로 어디다 숨겨버릴 수도 있고 멋으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만 다닐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반올림 했을 때 요절한다면 50년, 정상일 때는 100년이다. 시간으로만 봐도 장편소설과 인생은 동일시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잘 살펴보면 그가 왜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실험적이고 어렵고 형이상학적이고 깔끔하며 파격적인 또 뭐뭐한 작품들을 모두 뒤로 한 채 고상하고 세련되고 우아하며 기품있고 멋지고 로맨틱하며 정서적이고 미스테리한 게다가 단정한 가운데 오묘한데다가 흥미롭기까지 하는 그런 뭔가 아련한 아름다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가? 그러면 그 인간은 거즘 완벽히 그런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보통 독자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욕심쟁이다. 현실에서 제아무리 공손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책 읽는 태도와 취향 또한 그와 똑같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다. 재수없는 놈!
   소설에 나오는 소유욕이나 구체성, 감상주의 나쁘지 않다. 재미있다. 그렇지만 어느 범주 일반인이 바라는 것은 더 은근한 꾸밈이랄지 더 나은 서술... 그것까지 포함하는 껴안는 스케일을 더 좋아할 것이다. 값비싼 브랜드 제품? 갖지는 못해도 매일 거리에서 본다면 그 느낌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 고품격 서적? 죄다 구입해서 책상 한쪽에 쌓아둘 수도 있지만 서점에도 있고 도서관에도 있으며 인터넷 세상에도 있고 또 혼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물론 젊은 나이의 독자라면 당연히 그쪽이 더 멋져보일 것이다. 나이 든 독자라도 그 빛남은 덜하겠지만 작품성은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작품 또는 서정적이고 궁금하고 몽환적이면서 흥미로운 작품이 (어떤 의미에서의) 고품격을 내재하기까지 바란다는 것은 너무 바램이 지나치다고 아니 말 할 수 없다. 속도감 있고 독특하고 매끈한 작품이지만 매리엔이 느끼는 의뭉스러운 감정을 아주 약간 환기시킨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단 1~2초간의 눈빛이나 표정이 일관되지 못했다면 그건 완벽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눈빛이 포함된 얼굴 표정만을 감지하는 독립 기관이 두뇌에 공간상 자리잡고 있다는 환상이라니. 쉽게 말해 일상 공간에서 화자되는 단어로는 이것을 태도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태도, 책에서는 문체 그리고 (그 둘을 포함해서까지) 영상 공간에서는 스타일, 스똬―일! 그리고 (철학소설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더할 테지만 그런 사조를 제외한다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아무래도 옮기기 힘든 밑줄긋기, 기운, 느낌들...
   까탈스러운 독자 이야기에서 범위를 좁혀볼 수도 있다. 바흐와 스카를라티, 롯시니와 바그너를 구분하고 작가 누구, 화가 누구, 영화는 뭐...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핀란드란 단어를 던져보라. 아마도 100% 이런 답이 나온다. "내가 제일...". 그리고 그 사람이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주제를 던져보라. 근엄한 표정으로 침묵하거나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관심없어." 고품격 브랜드를 꺼내놓으면 ... 재미있다. 사람들 나이듬의 특징에 대해 열거한 후 요즘 새벽에 일찍 일어나냐고 물어보라. 하하하. 또 그 사람과 밤 늦게까지 독주를 마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상황을 연출해서 최근 밤에 일찍 취침하냐고 물어보자. 그 다음 반응 뻔하다. 그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살아간다면 원래의 고유한 감정과 정서는 저 잠재의식보다 어두컴컴한 4차원 공간 속으로 파묻혀 버릴 수 밖에 없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책에 나오는 기가 꺾이는 경험을 한다는 하버드의 얼간이들과 큰 물고기―작은 연못 효과, 물론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언제나 장기적 포지셔닝과 드넓은 스케일의 큰 물에 또는 그 크기라는 객관성에 더 사람들의 마음이 기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째, 특정 생태계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동화되고 적응한다. 둘째, 1%의 1%의 1%는 정말 드물다. 99%라면 물살을 또는 우주선을 타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 셋째, 꼬리표는 무덤까지 따라다닌다. 넷째, 그래프 곡선에 대한 잠정적 기대 고도―미래 기울기 0도―의 궤도 진입에 대한 가치의 가중치는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골 생활도 나름 살만하고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지기만 한다면 엄청 느린 점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래도 달라스에서 필름이 끊기는 것보다는 하버드에서 기가 꺾이는 게 좀 더 그럴싸하지 않겠는가. 만일 하버드의 얼간이들이 진짜 얼간이라면 달라스 사는 인간은 ... 그렇다.
   많은 인간관계와 세상사는 코메디고 동물원에는 조련사가 있으며 소설가는 시인처럼 문체를 고민하고 학자들은 그래프를 연구하며 아마추어 퍼포먼스 관계자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술을 마신다. 엥 아직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문화 생활과 자기 수양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삶, 불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냥 그렇게 타고나는 것이다.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다. 세상 모든 일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또한 사람은 어느 만큼은 대개 비슷하다. 어느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 돈을 건네받으면서 가장 무난하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스킨쉽은 살결과 살결이 닫을 듯 말 듯 하는 지점이다. 눈동자 마주치기 관계의 비율은 논외로 하자. 그런데 이 때 제 아무리 단순한 사람일지라도 과도한 스킨쉽과 다른 여러가지 신호들이 깜빡거린다면 머리속이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는 약간 힘들다. 왠걸...
   왜 하늘은 하늘색이고 바다는 청록색인가? 왜 어른들은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색 신호등이라고 부르는가? 왜 어떤 나라에서는 특정 언어권의 책이 많이 팔리는가? 왜 삶의 속도가 느린 나라의 치매 분포는 더 풍족한 나라들의 그것과 다른가? 왜 추운 나라 사람들은 독주를 잘 마시는가? 왜 만물은 일장일단이 있는가?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jan/27/scandinavian-miracle-brutal-truth-denmark-norway-sweden
 (원문을 아주 대충만 이해했고 사람 사는 곳은 제각기 다르면서 비슷하다는 취지로 인용했다. 선택의 차이, 균형의 산물, 문화적 특징도 있는데 그곳도 그 나름의 단점이 있는가보다) 왜 올리버 제임스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하지 않는가? 세상일은 다 이유가 있고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헤밍웨이의 후반기 인생은 어떠했는가 또는 그 라스트는? 왜 지금 세상에서는 조이스, 톨스토이, 모차르트, 뭉크, 아인슈타인 같은 거성들이 태어나서 활동하지 않는 것일까? 왜 고양이는 그렇게 요염한 자태를 타고났는가? 왜 강아지는 나무 옆에만 서면 한쪽 다리를 드는가? 왜 UFC에서는 미국과 브라질 선수들이 강세인가? 왜 어떤 사람들은 유명인들의 동작을 따라하는가? (흔한 동작 말고 바디랭귀지 전문가가 인정하는 임팩트 있는 액션과 심판이 휘슬을 불었을 때 축구 선수들 반응들) 왜 명배우들은 메소드 연기와 친밀한데 일반인들은 메소드 읽기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가? 왜 블랙 코메디 작품들은 가치 폄하되는가? 왜 새로움, 독창성, 신비로움이라는 덕목은 높이 평가되는가? 왜 팀 페리스의 4시간이란 책을 읽은 후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왜 자신의 영혼을 걸겠다던 게리 바이너척의 이론과 피터 드러커의 연구는 서로 대립되는가? 왜 로고는 컬러풀과 브랜드 가치가 비례하지 않는가? 왜 어느 술취한 아저씨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서 기도를 하는가? 그나마 페이스북 담벼락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일정한 패턴이 보이는가? 그렇다. 분량을 늘리는 가장 저급한 방법이다. 세상일은 모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곡이 안써진다고? 방탕한 생활이 원인일 수도 있다. 그림이 안그려진다고?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서 간도 나가고 실력도 떨어진거다. 주제 잡기가 힘들다고? 먼데서 찾지 말고 좋아하는 걸 생각하고 아는 걸 써야 한다. 데이비드 로지 교수도 힘겹게(?) 고백했다. "그들이 전문적인 용어로 말해 '내 분야'였고, 그 이외 지역에서 발표된 소설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일에는 확신이 적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읽는가 그 대상이 왜 중요하냐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고, 가고, 만나고, 보고, 쓰고, 출판하고, 번역하고... 기타 등등은 모두 제약이 따른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소설 제목으로 치면 서머셋 몸의 면도날이다. 예를 들어보지 않아도 쉽게 절감하고 선뜻 인정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제한적인 성질을 띄지 않는다. 왜 완벽이 아니고 '거의'냐면 (원어 리딩이 가능한) 3~5개 국어 사용자나 특출한 전문가 가운데 전문가,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회적으로 대놓고 보아도 허용되고 묵인하고 장려되는 성질의 것이 있다. Starbucks 마크,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이탈리아 대표팀 복장, 미술관에 있는 라울 뒤피의 그림, 쓰러지게 우스운 Retweet, 인상적인 Vine 컨텐츠, 지적인 성감대를 자극하는 Instagram 게시물이 그렇다. 하지만 (특히 젋고 뭐한) 여성의 아담한―기준이 모호하다―유방, 매력적인 남성의 완전 납짝한 엉덩이(뒷모습이어서 애매하다면 반바퀴 회전하는 걸로), 무섭게 생긴 우락부락한 남자의 얼굴(맙소사!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값비싼 자동차의 어떤 마크는 대놓고 보면 안된다. 하기는 그런 사회 규범과 시장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일례로 어떤 영화에서 삶이 알쏭달쏭 지루한 듯한 제자와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했던 어느 음대 교수의 대사를 떠올릴 수 있다. "왜? 벤츠 처음 봐?" 책은 단연코 전자다. 절대적으로 대놓고 봐도 무방하다. 마음대로 골라서 봐도 된다. 이렇듯 출판물은 참 착하고 어여쁘게도 정말 너무나 수평적이다. 어느 꽃다발처럼 수평 머시기 엔진과도 닮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읽는 것의 나머지에 대해 자유로운 계층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이거라도 마음대로 해야 한다. 젊어서는 무엇을 잘 입고, 잘 쓰고... 잘 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컨텐츠를 향유했다면 시간이 지나서 어른이 되었다면―이것도 기준이 모호하다―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안목과 취향, 선호도와 함께 신체 나이, 정신 연령, 인격 장애, 지적 수준등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왜 읽느냐는 존재론적 고민은 약간씩 각자의 현실 삶에 적용할 때 조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초라한 어느 이방인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면 과거 어느 한 시절 아주 잠깐 책을 많이 읽었던 때가 있었다. 그게 꾸준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고 남들처럼 공부 못하니까 하기 싫으니까 재미 없으니까 펠릭스 아버지의 <닦치는데로 흡수하라>는 교육 철학처럼 책만 마구 읽었다. 그 나이라면 당연히 TV도 즐겨 보았다. 그 나이라면 TV에 나오는 영화 속에서 조용한 주인공이 일순간 말빨을 세우는 장면이 멋져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때는 그런 작품의 원작을 만드는 사람―소설가―도 당연히 말빨이 좋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가끔 EBS나 다른 채널에서 확인한 결과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실망스러운 기분을 근사치로 부를 수 있는 꽤 적절한 명사가 있다. 상심. 살면서 그렇게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된 후 독서에 조금 흥미가 떨어졌던 것 같다. 게다가 소설가들은 영화 배우처럼 훤칠하고 잘 생긴 것도 아니다. 어쩌다 산적 같은 외모의 소유자도 있다. 하긴 프레타 포르테 같은 패션쇼만 보더래도 마지막 디자이너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뭔가 동질감과 인정 같은 감정을 알게 모르게 서로 공유한다. 가끔은 완전 운수 좋은 케이스도 있지만 말이다. 고품격을 타고 난 것 같은.. 그렇다고 본인은 외모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이런, 어떻게 갑자기 당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정확히 읽어버릴 수 있지? 뭐야 이게 현실이야 그리스 로마 신화야. 이제야 죽이 좀 맞는다. 궁짝이 맞아 간다. 그렇다. 당신의 의견처럼 말처럼 생각처럼 글쓴이는 황금만능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소설 태양을 바라보며의 주인공 진 서전트가 바라고 소망하고 기원했던 감정들을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더 구체화 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이카루스처럼 탈출해야 할 운명을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이카루스처럼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방법만 탈출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빠삐용처럼 바다를 건널 수도 있고―빠삐용 친구던가..―태양은 지구 중심에도 있을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마음 한 가운데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연한 방문객(by 알리 스미스)에 나오는 등장 인물처럼 공상하는 걱정을 품고 사는 사람도 아마 존재할 것이다. 아톰이 아닌 채로 치마를 입고서 하늘로 날아오르면 밑에서 사람들이 치마 안의 팬티를 쳐다보면서 수근거릴 것이고 태양이 가까와지면 뜨거움을 느낄거라는 상상. 그러므로 인간들은 칸트 같은 가택감금의 운명을 안고 사는 것이고 토미 프로서처럼 자연현상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에 대한 감성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 같다. 또 그래서 그 린드버그가 그 린드버그인지 굳이 구글링 해보지 않는다. 따라서 순진한 일반인은 인생이 파란만장했던 헤밍웨이의 작품―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을 차분히 읽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뭐 그 작품을 이미 읽었다고? 이런, 그러면 그런 작품을 본인이 직접 써보시라. 페넘브라의 24시 서점―마이클 프레인식 기교가 약한 게 아쉽긴 하지만―을 쓴 로빈 슬로언도 그 책을 쓰기 전에는 그저 평범하고 따분한(?) 회사원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추측이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를 약간은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삶이란 부단히 주위를 살펴보고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보면서 독서와 미술관 관람, 동물원 가기, 여행, 선행, 묵행, 또 행으로 끝나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않기 등을 실행해야 한다.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인생이 재미없는가? 한 편의 소설을 읽어보시라. 살짝만 건드려 보지만 말고 풍덩 빠져 보시라. 어떻게 보면 살면서 그런 순간이 어찌어찌하여 운명적으로 당신을 찾아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당신 스스로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아마 덜 얄미울 것이다. 전자가 마성이라면 후자는 교성― 청각에 관련된 신음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그런 노력하는 성실한 태도―이다. H-T-T-P... H-T-T-P... 그때의 A와 K의 표정이 생각난다.

태양을 바라보며/줄리언 반스
99쪽. 태어나, 성장하고, 결혼한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그것이 인생의 시작인척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결혼하는 것은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수많은 영화와 책들이 결혼에서 끝나는가? 결혼은 질문이 아니라 해답이었다. 결혼은 불평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관찰의 문제일 뿐이었다.
113쪽. 지극히 평범한 마을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행복하지 않았지만, 비참하지도 않았다. 마을의 커다란 음모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꽤 좋아했다. 점차 자신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이클도 분명 그녀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클의 생각보다 더 나쁜 것이 있었다. 아이였을 때, 그녀는 때때로 자기가 특별한 사람, 적어도 어떤 특별한 사람의 아내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군살이 붙어 얼굴의 각도 두루뭉술해졌다.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낮고 흐린 하늘은 언제나 비가 올 것 같았다.
165쪽. 그녀가 그레고리를 위해 터놓고 말한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무 일찍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지 마라. 스무 살에 평생 너를 묶어 둘 어떤 일을 시작하지 마라. 내가 했던 일을 하지 마라. 여행을 해라. 즐겨라. 네가 누구이고 자신이 무엇인지 발견해라. 탐구해라.
166쪽. 남자의 우정은 무엇인가 거짓된 것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한데 모이는 것은 관계 악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사물을 보다 더 단순화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확실함을 원하고 확실한 규칙을 원한다. 수도원을 봐라. 술집을 봐라.
193쪽. 요사이 진은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볼 때, 결말이 행복하냐 또는 불행하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적절히, 정확하게 전개되는 것뿐이었다. 우리 인생이라는 영화도 그와 같다. 그녀는 더 이상 행복이라든가 재정적 안정 또는 병에 걸리지 않기를 (물론 그녀의 야심에 이 셋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어떤 것, 즉 계속해서 믿어도 좋은 것들을 추구했다. 그녀는 자신이 계속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을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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