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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사랑의 행위에서 세 인물들의 대화 코드로―연애에 대한 보충성 원리―보들레르 시구가 심하다 싶을 만큼 간지럽도록 쓰였기에 어떤 시인의 노래였던 어느 소설 이름이던 문장을 제목으로 정했다. 독서일기 치고는 무게감과 새로움이 약하기에 그래도 애써 고른 게 이 정도다. 가장 중요한 말을 서두에 담지는 못하니까―왜 그러냐면 바버라 민토가 말하는 논리에 약하니까―차츰차츰 피라미드 구조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TV 토크쇼 화신에서 스티브 신의 멘트를 떠올려 보면 결론이 쥐꼬리만한 다이아몬드―또는 역피라미드―방식인 것 같지만 말이다. 참 제목으로는 그게 더 잘 어울린다. 그 시 구절... '시몽 너는 아느냐...' 하지만 제이콥슨과 반즈가 무의식적으로 대하는 프랑스 시어와 쿠체의 심상에 가려져 있는 독일어 명사를 생각하니 가식적으로 더 어울릴 것으로 보이는 제목으로 바꾸지는 않겠다. 딱 그 만큼은 양심적인 모습이 되었다. 빼먹을지 모르니까 중요한 얘기를 먼저 집고 넘어가야겠다. 소설 사랑의 행위 내용에 대한 작품 몰입이 힘겨운 사람이 있다면 펠릭스의 연적을 사람이 아닌 동물로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또는 펠릭스의 상상 수위를 낮히거나 걸러서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무서운 영화나 여러 살벌한 주제의 드라마나 스릴러 장르와 소설 사랑의 행위가 성격은 달라도 일종의 긴장감 변화량은 비슷하다고 감내하는 수 밖에 없다. 불가능 하다면 이런 류의 고품격 소설책은 아예 집어들지 않는 게 좋을 듯 하다.
   어떤 남자가 옛날에 영화 '그래서 나는 도끼부인과 결혼했다'를 흥미롭게 봤고 지금 J사 자동차를 좋아한다면 이 남자가 어떤 드라마와 영화, 책을 선호할지 일부는―당신이 만일 전문가 또는 눈치 빠른 일반인라면―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에 대한 자료들이 하나둘 계속 늘어난다면 게놈 할아버지와 아바타와 그 미래 지도까지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걸 프로파일링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름이 있으며 이건 전문가들의 주영역이다. (영화 카포네 "그럼 엄마와 아빠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연락했죠?" 아주 간단한 질문이지만 핑하고 솔깃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므로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면 짜증스런 얼굴의―인체에서 단위 면적당 근육량이 가장 많다는―섬세한 움직임을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런 얘기는 쌍팔년도 얘기라서 현실에서는 절대 금기시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물어도 된다.
   고품격으로 읽을 수 있었던 소설들이 몇몇 더해가니 그 작품들의 이런저런 공통점들이 보인다. 여러 권 쌓이다 보니 처음보다 훨씬 선정 기준이 뚜렸해졌다. 사랑의 행위(by 하워드 제이콥슨)에서는 악의 꽃도 영국의 보들레르...라고 한다. 여러 표현들도 그냥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독특한 인물, 새로 문을 연 개패가 아니라 스웨덴 모험가이고 뉴질랜드 식당이다. 응용하면 달라스 루니 같은 표현, 나쁘지 않다. 마음에 든다. 이건 뭐와 비슷하냐면 신문의 제목 기사와 비슷하다. 뉴스 기사는 임팩트가 생명이다. 왜 기자들이 초장을, 도입부를, 제목 뽑는 것을 어렵게 느끼고 곤란해 하는지는 인문교양서 스틱(by 칩 히스. 댄 히스)에 보면 나와 있다. 중견이나 베테랑은 안그러시겠지만. 왜 3류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주제 잡는 것을 어렵게 느끼고 곤란해 하는지 역피라미드식 서술에 대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즉, 고품격 소설을 보면 페이지 한장 한장에 나타난 문장들이 꼭 이처럼 뉴스 기사 제목과 같은 눈부신 옷을 입고 있다. 유난떠는 행위, 과도한 낭만적 달변, 토로, 울분... 모두 그러하다. 괜히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밀었다 당겼다.. (마침표는 사강 소설 제목처럼 두개) 함축적이되 오바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또한 너무 사람 이름만 열거하면 품위에 불이익을 가하니까 개인 브랜드가 많이 나오면서 한 번씩 그런 작가들 이름 들먹거리는 가운데 '환장하네', '신물나네' 같은 상어 파도타기를 점 찍어준다. 이런 작품들의 내용과 등장인물, 줄거리, 구조는 전혀 까다롭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이 말은 어떻게 보자면 그런 소설들이 전혀 또는 별로 소설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아주 뒤틀린 심성의 소유자라면 그런 책을 읽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불만을 불쑥 토로할지도 모른다. '메흐드, 뭐야 이거 죄다 말장난 아니야' 라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고 이런 스타일을 싫어하는 독자층도 태평양 만큼 넓고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으며 몽상 터프가이의 심지처럼 확고 부동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팬층도 아마도 탄탄하리라.
   그런 특징들을 보이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모두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런 작품들이 (안 읽어봤지만)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가계도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길고 험난한가? 아니다. 거의 단 1대다. 또는 '토요일'처럼 단 하루다. 엄청 복잡한 집안과 가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자기 자신 배경 탓일 수도 있다. 그 다음은 지리적 요소. '사랑의 행위'가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나 다른 지도를 필요로 하는 소설들처럼 머리 속에 구글맵을 새겨 놓고 감상해야 하는가? 아니다. 지도를 안 좋아하거나 길찾기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에게 걸맞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 그 다음은 분량이다. 악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레미제라블, 백경,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처럼 책이 두꺼운가? 아니다. 본격 추리소설처럼 긴박하게 뒤쫓고 추리력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원소들과 배경을 캐내면서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또한 작품 발표시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보인다. 그러면 등장인물 숫자가 상당한 대작인가? 아니다. 누군가 그런 대서사시 읽기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읽는 중간 자괴감을 느낄 것이 뻔하다. '왜―이 때의 왜는 7세 쯤의 왜일 것이다―난 주요 인물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헤매는 것일까? 남들은 모두들 재미있네, 명작이군 그러는데 말이야.' 셰익스피어나 코엘 맥카시의 카운셀러처럼 시나리오인가? 아니다. 실험적인 구성과 파격적인 문체? 어렵다. 기호학, 시대, 장르, 주의, 과목... 고전 소설? 앞으로 읽어야 한다.
   한동안 고품격 소설 어쩌고 저쩌고, 밑줄긋기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너무 이상하지 않나, 일반인의 어설픈 자기 주장 아닌가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최근 신문에서 본 기고문을 보니 아주 크게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가난한―이런 때는 왠지 가난한 이라는 꾸밈어가 어울릴 것 같다. 실제 탄탄한 중산층일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비한다면 아마도 가난한 게 틀리거나 나쁘지는 않고 더 부유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방대 교수의 고견이다. 동의하지 않는 애호가가 분명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출처는 생략한다. 또 하나의 비밀이다. "걸작의 최종 근거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문체다. 수많은 작품들이 남녀의 사랑을 대동소이하게 다루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을 돋보이게 하는 건 이들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문체다... 세상을 대하는 사유가 독창적이지 못할 때 고유한 문체가 나올 리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그렇게 쉽게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감상주의 문체를 경계해야 할 이유다." 지엽적인 판단 기준일 수도 있고 특정 독자층을 위한 발언일 수 있지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렇게 일반인과 전문가의 품위는 그만한 차이를 보인다.

   학자들의 명문장에 탄복하지만 머리 아픈 얘기라고 독서를 게을리 하면 영영 격조와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문장으로 이루어진 스타일의 소설들 가운데 대중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에 현시대에 약간 안 어울리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인기 차이도 있을 것이다. 지독히 고풍스러워서 그럴까? Goodreads, Amazon 사용자 연령층이 낮아서일까? 아무튼 그런 경우 (약간은 펠릭스와 닮았을 수도 있는) 이율배반적인 두가지 감정이 발생한다.  1.아니 왜 이런 책들은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일까?  2.어라 괜찮은 소설인데 대중의 취향과는 멀리 백조처럼 거리를 둔다?  이런 기분은 아주 특별할 것 같지만 또 인문교양서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http://julianseo.tumblr.com/post/71931978847 여기 몽롱하고 아련하게 빛이 나는 아름다운 신호등이 있다. 그 시그널의 깜박거림이 완전 예술이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면 시그널은 각각 또 다른 언어로 바뀔려나) 그런데 이런 작품 가운데 일부가 대중에게 별로 어필하지 않아. 어디에선가 찾아주질 않아 사장되는 분위기야. 더 좋아진다고나 할까? 토끼가 달린다. 그것도 두마리가 동시에. 이런 순간에는 명백히 과장 수식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과장이란 과거보다는 현재, 이쪽보다는 저쪽, 한쪽보다는 양쪽에서 아주 약간 더 사용하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되지만서도 좀 더 절실한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한마디로 황홀하다! 이런 저런 그런 오묘한 감정들을 이렇게 또렸하게 표현된 글로 인쇄된 책을 읽으면서 좋이를 만져서 페이지를 넘기는 경험이라니. 호사로운 상황이로다. 감탄사로는 와우 또는 어머 쯤일 것이다. 환상적인 놀라움의 표현은 적재적소에 씌여야 한다. SF 장르 소설 매니아거나 예술영화광들도 쏙 빠지는 몰입 대상을 만나면 그와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
   이는 곧 재빠른 속독에 능한 독자들은 담백하고 단촐한 불필요한 장막을 제거한 아주 간결한 문체를 읽는 것 만으로도 청각과 공감각에 연결되는 두뇌 각 부위들이 자동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좀 둔한 타입의 독자는 그런 고도로 산뜻하게 절제된 스타일의 글을 읽는 것 만으로는 특정 뇌 영역들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굳이 올리버 색스의 서적들을 찾아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성질에 속하는 짐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슬로우맨에게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들었다 놨다 돌리고 돌려서 씌여진 책들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냥 대충 90%는 궁금하다고 그 호기심을 풀려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정말 왜 그런지 알고 싶어지게 된다. 왜 남은 뭐라는데 자기는 안 그런지. 그런 차이점을 찾는데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게 좋은 것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Facebook에 dislike 버튼이 왜 없는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여담으로 소설을 훌륭한 예술이자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영화를 밝고 명랑하고 건강한 삶으로 가정한다면 '위대한 개츠비' 작품에 대해 소설보다는 영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소설을 읽는데는 (여건도 뭐하고 해서) 실패했지만 영화는 2번 봤어. 또 그런데 어떤 지역에서는 그 소설 번역본이 조금 과장하면 백여본이 나왔어. 왜 그렇지? 왜 그런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양쪽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타고 났다면, 그런 감성을 후천적으로 개발했다면 더욱 좋겠지만 편협한 기호 뿐이 없는데 어떡할 수가 없다. 혼자니까 1인 취향이 어떻다 말할 수 있지 옆에 권위자가 있거나 어떤 곳에 속해 있다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둘 다 취하는 게 좋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음악 이야기, 사람 브랜드, 마크 브랜드, 몇몇 국가에 이르는 꾸밈어, 고상한 표현과 철학적인 질문과 유려한 문체들이 모두 다 포함된 소설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이 자신에게 알맞는 적당한 균형감을 갖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그(그녀)와 마주치게 된다면 전문가들의 권고처럼 시간을 두고서 2번 이상 읽기보다는 기약없이 지금 분명 아주 천천히 읽고 싶을 것이다. 페이지를 훌쩍 훌쩍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아쉽고 아까우니까. 사람과 책이 아닌 사람과 사람도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그렇게 한 페이지 안에서 틈틈히 문장들을 두어번 읽어보면서 페이지도 되돌려 가면서 읽을 것으로 짐작한다.
   타인의 권유와 찬사는 일종의 Apple 광고다. 최근 개꿈에서 봤던 약 2.5m 길이의 iPad air는 허상이다.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광고와 허상의 중간은 괜찮은 읽을 거리다. 또는 개패에서 불켜진 마크의 기기를 앞에 두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 놈의 마크! 그.. 전문가! 앗 실수할 뻔 했다. 각계 전문가들은 존경한다. 아무래도 이걸 뭐라 부르는 코메디 업계 전문용어가 있을 것만 같다. 펠릭스의 염원과 성향은 닮지 않아야겠지만 낭만파 음악가 펠릭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의 행위를 읽은 후 그 가녀린 떨림을 경험해 보아도 크게 손해보지는 않을 것이다. 떨림에는 타인에 의한 떨림과 직접 본인의 다리를 떠는 행위도 있지만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긴장감도 이 세상엔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반가운 존재다. 그 두근거림이 약간은 슬프게끔 가냘프지 않는다면 플라토닉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육체적 사랑이라면 또는 펠릭스(선조)라면 몰라도.
   언어 마법의 염력사가 노래하는, 소설 문체의 최면술사가 그려내는 작품이 거짓없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면 어린 연령은 아닐 것이니 정신연령 저하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 발생한 셈이다. 때문에 그럭저럭 덤덤하다. 쩍-쩍-쩍-쩍-쩍

사랑의 행위 / 하워드 제이콥슨
p.65 내 생각에 결국 마리사의 마음을 내 쪽으로 기울게 한 것은 바로 대화 방식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프레디는 수다쟁이였다. 수다쟁이는 종종 여자를 외롭게 한다. 마리사도 대화를 원했지만, 잠자코 듣기만을 원한 건 아니었다... (프레디가 항상 그랬듯이) 여자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일 만큼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았고, (역시 프레디가 항상 그랬듯이) 내가 제시한 화제가 더 즉각적인 관심을 요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여념을 끊어버리지도 않았다.
p.66 앉아서 즐길 수 있는 세 가지 지극한 쾌락―독서, 식사, 대화―에 전부를 바치는 남자. 여자들은 자신을 위해 얌전히 앉아 있는 남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p.116 "이타적으로 생각하세요." 부끄럽게도 그때 난 얼굴을 붉혔다. 내가 생각하는 게 너무나 이타적이어서.
p.158 타인의 미신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치 먼 옛날 어린 시절의 나약함이 농축되어 어느 순간 방울져 나오는 것과 같다. 나는 여자한테서 소녀를 보는 게 좋다. 애끊는 심정이 되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불현듯 마리사한테서 그 소녀가 보였다. 공원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겁쟁이 엄마로부터 '안녕, 까치 씨. 부인은 어쩌고 혼자 나왔어?'라고 말하라 배우는 작은 소녀... 토머스 하디가 묘사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드물고 귀한 행복을 즐기는 테스의 모습.
p.169 불안과 긴장을 소명으로서 갈고닦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부공간subspace.'
p.315 하지만 누군가에게 혼이 쏙 빠지도록 반해버린다면······... 정말로, 결단코 안 원해요? 질투 때문에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까? 예컨데 로브그리예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의심되는 현상을 목격하거나 확증하는 사물들의 가장 작은 반향까지 놓치지 않는 그 열정이 정녕 부럽지 않다고요?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애인의 재킷 단추 하나하나, 혹 프랑스령 기니에서라면 바나나나무에 달린 바나나 하나하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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