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llaby Spring(2002), HIRST Damien

   책 한 권 진지하고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뭘 그리 대단하고도 어려운 일인가. 뭐 얼마나 지성적이라고, 그 품격이 어느 만큼 아찔하다고 그 유난을 떠는 것인가. 참 어떻게 표현하자면 눈꼴시려워서 못봐주겠다. 어떤이의 마마식 표현으로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어린애라면 콱 쥐어박아 버리겠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또 지난 연구(?) 결과에 대해서 그 극성스러운 까탈스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 뭔 놈의 비밀이 그다지도 많은 것일까, 고품격에 꺼뻑 죽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면서도 뭔가 합당하고 합리적인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근사한 핑계거리를 좀 더 찾아보자는 심산으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쉼표를 유달리 절묘하게 잘 사용하는 작가들, 한두 명이 아니다.
   매번 같은 얘기지만 믿기지 않는 부분도 있고 그 만큼 이상하다는 뜻이다. 글과 독자 사이에 왜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을까. 화자와 독자가 얘기하고 묻고 답하고 생각하고 잠깐 멈추고 더 잠깐 쉬고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리듬감이 문제인 것 같다. 흥분되는 리듬감을 갖춘 작품이라면 단 몇 문장 또는 몇 페이지 만으로 책과 당신의 감성이 핑하고 연결된 느낌을 감지할 것이다. 그 순간에는 진짜 특이하고 신비로운 효과음이 실제로 들린다. 거짓말처럼 들리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일 수도 있다. 실은 그 진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경험 때문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이지. 다니엘 타멧과 마크 해던은 아쉽게도 질투 예방에 실패한 것이다. 거 사람 참 괜찮다.
   최고의 여성 바리스타는 에르메스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보적인 바텐더는 자신의 집 옷장에 베르사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옷장 자체가 없는 명바텐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의 진짜 최고 바리스타나 바텐더라면 적어도 손님의 마음을 시원스레 훤히 읽는, 평범한 독심술이 아닌 흑마술을 익혔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아예 상대방 마음을 송두리째 훔치는 재간둥이도 있을 것이다. 재간둥이의 나이가 좀 많으면 대도쯤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무슨 텍스트에 카페라떼와 에스프레소가 있겠냐마는 완독의 어려움에 대한 원인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다. 필립 로스와 폴 오스터를 읽고 감탄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심정, 그 불편한 감정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왜 다른 문화, 예술 장르는 안 그러는데 유독 소설 분야 취향은 그 모양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소설 말고 다른거? 여행지, 뭐, 뭐 ,뭐? 환장한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든다."라는 말을 듣고 흔쾌히 덤덤할, 기뻐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위키피디아가 예전 같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으로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쿨한 느낌보다는 께름직한 기분에 가까울 것이다. 청소년들처럼 학원전설 이야기와 달콤한 로맨스 소설 그리고 하드보일드풍 추리소설에 흠뻑 중독되어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서는 불가능에 속하는 원대한 바램이기도 하다. 단순히 최고급 위스키가 비싸서, 다음날 숙취가 적으니까, 금방 취기가 오르니까 꼭 그래서만 좋은 게 아니다. 위스키 원액이 (얼음)물과 섞일 때의 미세한 물결. 그 극도로 예민한 섬세함도 한 몫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이책의 글씨체는 왜 iOS체는 드문 것인가? iPad같은 태블릿 때문인가 또는 번역 출판물이 전체의 5%가 채 안되는 시장 때문인가. 그러니까 그 반대의 세상에 사는 어떤 일반인들의 시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이 하드보일드에 열광하는지 궁금해서 생각해본다. 머머해본다, 그렇다, 동사가 과거형이 아니니까 하드보일드가 아닌 듯해서 기분이 이상하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또 아예 황당한 이야기는 아니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할테니 주의를 기울여 주시면 무척 고맙겠다. 출판사도 브랜드다. 번역물의 경우도 괜찮은 작품은 어떤 마크가 주로 선점한다. 그래서 도서관과 서점의 풍경을 보면 출판사가 보인다. 책들의 표지와 옷감, 디자인도 모두 다 그림이 그려진다. 결국 마크다. 문체? 남녀 성 구분도 있겠지만, 하드보일드도 여러 종류일테지만, 그것은 대체로 젊은이의 관점과 애매한 현재의 1인칭 시점을 많이 볼 수 있다. 정갈한 묘사와 산뜻한 색채감과 더불어 문장의 말미도 특징있다. 옛날에 어땠다, 지금은 어떻다, 그랬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혹시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심지어, 혹시나, 것이다, 의아하다, 머머 같다, 머머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머머했다, 머머같은 일은 없었다, 즉 젊은이의 마음의 동요를 바란다면 매우 적확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정확한'과 '적확한'의 차이를 똑부러지게 구분하는 어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세기말과 여행지 그리고 젊음, 거기에 방황과 지난 기억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 썸타는 감정, 성적 체험, 플라토닉과 육체적 사랑의 간격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항구도시와 섬 분위기! 그렇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섬치고는 너무 크다. 그러니까 UFO 동호회에서 한복판에 있는 이상한 지역을 의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방식으로 하드보일드를 분석하자면, 짦게 얘기하자면 그 비밀은 마음을 홀리는 묘사다. 항상 같은 말들... 전에도 기록했다. "왜 지금 세상에서는 조이스, 톨스토이, 모차르트, 뭉크, 아인슈타인 같은 거성들이 태어나서 활동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남들도 그런다. 흔한 얘기로 좋은 시절에 이미 다 해먹어버렸다고. 영원히 반복될 말들이지만 더 정확한 요인은 그냥 시대가 바뀐거다. 좀 더 냉혹하게 직관적으로 따져보자. 모차르트가 가장 우주적이지만 그보다는 말러가 훨씬 심오하고 어렵고 철학적이다. 하지만 천재하면 모차르트고 모차르트가 더 널리 조금 더 사랑받는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 굴드가 모차르트 소나타를 그렇게 빨리 연주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자의 마음도 그렇다지만 원래 젊은이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이랬다가 저랬다, 뛰었다가 숨었다, 아침과 저녁도 다르다. 다른 사람의 말빨에 의해서 들렸다가 놓였다가, 앞으로 가졌다가 뒤로 밀려났다가, 감격되어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눈탱이 맞아 눈이 게슴츠레 뜨여지고 그런다. 쥐었다 펴는 사람은 예상하기 힘든 당하는 사람의 관점이란... 자기 자신을 판박이로 빼닮은 젊은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인데, 멜로드라마의 수퍼스타인데 왜 안 좋을 수 있겠는가? 하기야 본인도 젊었을 때는―그렇다고 지금 폭싹 늙었다는 뜻은 아니고―그런 알쏭달쏭한 감정과 매력적인 사랑, 마술 같은 회상의 분위기를 그린 작품을 찾았던 것 같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뭔가 앞으로 나올 것 같은 기분, 뭔가가 있어, 그래 있다니까... 그러다가 이야기가 끝나.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 기술 아니 의식에 도달하고, 그 기간 또한 수십년이 걸리기도 하는 결코 쉽지 않은 문체요, 녹녹치 않은 스타일이다. 심지어 있어 보이려고 값비싼 외국어 번역본까지 샀다. 그랬다, 그때는. 왕가위 감독의 전반기 작품 또한 그런 분위기를 띄고 있다.
   누군가가 하이데거, 야스퍼스, 가스통 바슐라르 같은 서적만 읽고 산다고 생각해보자. 이거 정말 딱딱한 인생일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와 달달한 드라마, 미스테리 소설을 모두 내팽개치고 어려운 철학서와 고전소설만 탐독하고 사는 분들의 마음을 상상해보자. 음... 어떠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나오는 어떤 영화도 아닌데 얼굴 표정이 빠뀌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누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매일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런 근엄한 웃음기 없는 매마른 표정들. 당신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기를 바란다.
   밑줄은 딱히 그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 격식은 최고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마틴 에이미스. 고품격 그룹에 누군가는 포함시킬 것이다. 왜? 삶은 인생은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옆사람도 재미있어야 하니까. 그의 입담은 귀와 뇌와 마음에 쩍쩍 달라 붙는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강도의 욕이 적재적소에 작가의 키보드 또는 한정판 파버카스텔 수제-볼펜에 착착 감겨서 탄생한다. 스타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인품이나 평판이 조금 모호하거나 의뭉스러울지라도 브랜드는, 프로세계는 최적합한 모델을 찾는 것 같다. 의뭉스럽다는 말 당분간 안 써야겠다. 뒤늦게 어디서 주워서 읽은 후, 나이 먹고 급하게 너무 남발했다. 마틴 에이미스하면 당연히 찰스 부코스키가 떠오른다. 그러면 또 당연히 부코스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오직 물 밖에 없다. 식물도 의식이 있다는 다큐멘터리와 논문, 연구결과는 까마득한 옛날에 알려졌다. 그러면 무슨주의, 무슨주의... 주의 신봉주의자와 그 추종세력만 남는다. 채식주의도 정답은 아니다. 육식주의도 부담스럽다. 에스티로더 신제품 링클케어 화장품과 랑콤 선크림을 바르는 생활 습관도 좋지만 눈가 주름 예방을 진정 걱정한다면 아예 웃지도 않아야 한다.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인가. 마크(?)가 남몰래 날이면 날마다 집에서 고기를 왕창 먹는다는, 그래서 신물나니까 밖에서만 채식을 한다는 특종이 꼭 버즈피드에 떠야지만 만족스럽다는 말인가? 하지만 캘리포니케이션 제작진은 진정한 멋진 최고의 예술가들이다.
   두서없이 적다보니 하드보일드의 비밀을 알 것 같다. 마음을 하늘 높이 띄우는 게 아니라 약 5cm만 올리는 것이다. 다시 땅에 닿을 듯하면 또 딱 그 만큼만 올린다. 그것이다, 비밀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혼자 알아냈다고 혼자 좋아하는 그 비밀의 또 다른 이름은 젊음이다. 필경 지가 젊고 싶은 거네. 팬들은 적어도 사는 동안 그것에 대한 링크를 커넥션을 의지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마음이 무거워서, 나이 먹어서, 취향이 달라져서, 또 다른 이유로 5cm 공중부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기부상 고품격 컨텐츠를 스스로 찾으면 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들도 죄다 하드보일드를 좋아한다. 작가도 그렇다. 작가의 팬도 그렇다. 그 팬의 친구도 그렇다. 그 팬의 친구의 친구는 어떨까. 왜일까?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역으로 하드보일드 팬이 봤을 때는 느릿느릿하고 하품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막 분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하드보일드 + 철학에세이 + 블로그류 문장들 + 브랜드 이야기 + 트위터 문장 스타일... 하드보일드에 대한 변호를 더하자면 이렇다. 어느 동네 아저씨가 대학가에 출연한다면 그건 평균연령을 깎아 먹는 물 흐리기 행위에 해당된다. 하지만 어떤 중년이 하드보일드 광팬이야. 누가 뭐라 그래?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다 하드보일드에만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 가운데 동화만 보고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어디선가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자. 아득히 기품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노숙녀분이 어느 날 소설을 읽는데 무척 낯익은 이름을 소설 속에서 가끔씩 마주칠 때 그 찰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 이름은 이를테면 알랑 드롱, 율 브리너, 제임스 딘,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그레고리 펙 같은. 그러므로 하드보일드는 아니지만 변형된 격식을 갖춘 문체의 소설이 큰 상을 받은 걸 보면 뭐랄까. 아닌 척 하려해도 마음이 조금은 편치 않다. 그렇다고 데이비드 로지 교수의 의견이 꼭 궁금하다는 것은 아니다. 더 완곡하게 완충어구를 몽땅(?) 동원해서, 세바퀴 반 돌려서 표현하자면 약간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피곤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다만 당신의 이성 친구가 샐먼 루시디를 좋아한다면 또 누구 누구를 좋아한다면 신중하게 그 친구를 추궁해 보아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목소리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성우다. 연기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영화와 연극, 드라마 배우다. 클래식 음악 전문가? 콘서트 콜이 빗발치는 돈을 받고, 돈을 받고 연주하는 프로 연주자다. 개인 스타일, 취향, 연애의 전문가? 개인이다. 어려서 BB탄 쏴본 여자?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왜 철지난 CM송을 듣는가? 허공에 손가락질까지 해 가면서. 그것도 여러 번 미친 사람처럼. 그것은 바로 왜냐하면 초딩이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직업과 부모 입장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귀하는 안 그런가? 그러면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친구의 친구는? 안 친하다고? 음 의뭄... 말이 안통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새삼스럽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중딩...도 괜찮다. 탄생한지 50년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딩이 보면 이런다. "막 도레미송 부르다 결혼해. 완전 웃겨." 그러면 옆에 있는 다른 중딩들 다 같이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솔직히 적잖이 재미있기는 하다.
   어른들은 어린이와 청년을 포함한 젊은이들이 이런 말을 하면 완전 우스워 죽겠다는 시늉을 겉으로 또는 속으로 행한다. 실제 많이 웃기다고 말이다. "평소에 재미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사는 게 지겨워요. 즐거운 일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고." 그리고 젊은이가 반대로 이렇게 말해도 좋아라 한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노는거도 좋고 삶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젊은 기운은 그런 것인가보다. 이런 평문의 특징과 패턴, 공통점에 대한 순도가 조금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유명인 이름이 많이 나오면서 고급스러운 약간 어려운 단어가 가끔 나오고, 브랜드 이름도 많이 나오고, 고도의 심리 기제는 못 다루고, 애매하고 조마조마하고 뭔가 이상해. 왜 그렇지? 단서는 이미 노출되었다. 쩍쩍, 뻥뻥, 척척, 막, 딱, 환장, 신물, 특수(옛날 옛날에 책에서 읽었다. 브라이언 메이도 플랫을 깎았다고. 프로를 따라하는 아마추어들, 수두룩-하다. 그렇다, 그렇다. 요즘 세상엔 특수 아닌 게 없다. 끔찍한 일이다), 특급, 욕(고상한 상류층 사람들도 친한 사이에 욕을 자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말빨, 뻠프질, 깐죽, 재수없다, 유난떨다, 과도증, 감탄사, 머머주의, 그 놈의 고품격, 가택감금... 딱 이 수준 때문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휘들 말이다. 나이트 클럽 이름에 신비도 있다. 술집 이름은 격조, 아파트 이름? 품격. 코메디 TV프로그램 제목? 고품격 음악 방송, 누가 아니라고 할까봐서. 모든 이름들은 대부분 좋은 뜻을 지니고 있고 거의 일반인들이 짓는다. 누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외우고 있는 시가 한편 있다. 누구나 외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아니면 허밍이라도 한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무대에서의 성악가를 잠시만, 단 몇 초 동안만 흉내 내어 보시라. 근처 사람들 다 웃는다. 그 즉시 당신의 품위와 인기는 격앙될 것이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들썩들썩 하시는가? 그렇다. 다 자연의 섭리 봄바람 때문이다. 말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단어, 섭리. 글로 쓰고 나니까 정말 속 시원하다. 그런 감정과 관련되는 밑줄긋기가 생각난다. 

  •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 (최상의 자신을 만들어라/리카이푸 p.73 * 부적절한 적극성은 으...)
  • 자신을 드러내라...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사진을 사용하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프로필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 아주 좋은 사진을 말이다! (트위터/조엘 컴,켄 버지 p.81)

   라이트모티브 유머코드는 그것이다. 제목을 모르는 어느 영화 대사. "폴 뻐킹 스미스" 폴 스미스보다 좀 더 어떤 식으로 좋거나 특이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폴 스미스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폴 스미스가 뭘 그렇게,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욕을 얻어들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왜 질투받고 왜 욕을 얻어듣는가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바로 로브그리예식 질투 연구론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위에 등장했던 브랜드들 뭐, 뭐, 뭐... 왜 그렇게 들먹였을까? 안 좋은 이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유치원생도 안다. 색다른 관점? 대화 주제로는 부적절하다. 또한 전자-후자와 첫째-둘째-셋째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도 일상 생활에는 안 어울리는 키치다.
   이상에 대해 잘 씽킹하고 명작을 찾아 읽으면서 블링킹의 수준을 높이며 스타벅스 마크를 대놓고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가자. 그래서 자기 인생이론을 창시하여 삶의 전문가가 되자. 관절염도 아닌데 급하게 손가락이 안 펴진다. 뭐? 닥치라고? 역시 당신은 절묘한 타이밍을 제대로 아는 리듬감의 천재다. 인정! 어디 천재가 아니면 서러워서 살겠나. (누가 읽는지는 모르니까) 좀 더 막던지자면, 심지어 당신은 영화배우 빰치는 외모까지 겸비한 지성인이다. 카이저 소제다. 레스터 번햄이다. 존 내쉬다. 끝으로 매기는거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p.81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p.86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p.125 그녀는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토마시를 속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다.
p.288 그러나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한 사람을 마주하면, 그가 하는 말이 몽땅 사실이 아니며,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매순간 확신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마련이다. 믿지 않기 위해서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철저하게) 엄청난 노력뿐만 아니라 훈련, 그러니까 잦은 경찰의 신문을 받았던 경험이 필요하다. 토마시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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