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론(論) 8

from 칼럼 2022. 1. 30. 21:16

    인생이란 슬슬 열 받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스러워 미칠 것만 같은 무엇?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럼 사랑이란? 짖굳은 농담 그만 좀 하자. 하긴 술 좀 작작 마셔 라는 잔소리를 얻어들을 수도 없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아니다. 뭐가 재미있다고! 그렇지만 즐겁고 기쁘며 재밌지 않을 이유는 또 뭘까. 썩은 미소는 저리 가버리라고 그래. 마술적 상상력을 소환시키면 되니까. 근데 그게 잘 될까?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의 요술이 예전 같지 않다면야 다 방법이 있지. 허나 그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럼 기왕 알 수 없는 바에야 사랑 밖에 모르는 숙녀의 순정을 믿어볼까? 믿긴 뭘 믿어. 개똥 같은 잡념은 속으로만 하고. 말이 심했다만 근데 개는 개뼉따귀를 왜 그렇게 좋아하지? 침 질질... 아주 그냥 환장하잖아. 응? 그럼 우리는 무엇을 애정해야 하나. 그렇다고 자동차 1개만 편애한 체 세상 모든 여자들한테 불친절하라고?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건데. 난 단지 그분들 마음을 대변해서 대신 떠드는 것일 따름. 하긴 우리 역시나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것만 봐도 똑같다. 뭐, 똑같아? 똑같긴 뭐가 똑같아. 근데 내가 지금 뭔 얘기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리 사랑이 말을 듣지 않는다지만. 아름다운 세상과 더 나은 미래와 행복한 인생 등 고민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게 뭐냔 말이야. 괜찮다. 기분을 바꾸면 되니까. 안 변하면 분위기 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 뭐. 아니면 탄성을 내지를 만한 쾌조의 뻔트 카드를 꺼내보든가. 왜냐하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으니까? 아니야.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흥분에 들떠 막살면 안됨. 결국 시소에 탔던 호기심은 도망가버렸고 남은 건 애조 띤 감수성일까 아닐까. 우리는 사랑에 미련 없다. 다 필요없어. 이제 와서 유행가 가사에 왜 상냥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웬만한 발라드도 딱 3번 들으면 질림.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임) 그런 반면 악마의 미소와 천사의 눈물을 고찰하는 거 정말 머리아프단 말이야. 내가 무슨 박사야? 논문 써? 그녀의 가슴에 안겨 사랑을 배워도 모자를 판에, 어? 진정하자. 흥분해봤자 소용없으니까. 다시 순수라는 이름의 빵을 먹는 거야. 아니면 낭만적인 공상을 즐길까? 그래 봐야 사랑은 없어. 정말?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늑대의 군침은 물론 양들의 흑심도 모르는데? 그래. 난생 처음 난 미련 곰탱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자인하는 걸로 하자. 그럼 뭘 해? 아무 소용없는데. 그렇다고 내일이 없는 식으로 사는 한량의 법칙을 엄수해서도 안되고. 겨울인데 또 무작정 밖으로 나가? 안 나가. 추우니까. 하여 대타 목록을 보아하니 짝사랑복부터 추리력과 특급 첩보... 아무도, 무엇도 없음. 그러던 어느 날 몬테카를로 카지노 바에서 고혹적인 숙녀한테 첫눈에 반하는 행운이? 그건 주인공에게나 애정운이고 우리 같은 병풍에겐 뭐지? 하오나 이제 와서 어디로 가 친한 척하기 좋아하라고. 순결함과 멀어지는 사교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허풍, 아마도 더 못 들어줄 게 뻔할 따름. 그래서 남은 건 더러운 사랑? 처녀의 미소가 왜 하필 다 피해가는 그런 속 뒤집어지는 소리, 당장 집어치우자. 이러니 예고 없이 찾아오는 환희는 아예 바라지를 말아야지. 안 그래도 나는 아찔한 영감을 모두 탕진해버렸다. 남은 건 오직 허접한 발상. 하긴 우리가 무슨 수로 그녀들의 마음을 빼았겠는가. 쥐락펴락 들려졌다 놓여졌다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데 어쩌란 말인가. 이를 테면 이 바보야 꽃을 좋아해야지 뭐 하는 거야 이 멍충아! ~라고 말이다.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달콤한 황홀함에 사로잡힌 여인이고 나발이고. 농밀한 수줍음과 아름다운 인생을 억지로 성사시킬 수작 그만 좀 했으면. 그게 뭐야? 그러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느닷없이 칼럼을 또 쓰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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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narcissism): 
    1.noun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 또는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
    2.noun (심리) 리비도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발산되는 사랑. 일반적으로 발달 과정에서 이러한 시기를 거치나, 이 시...

    <끝────────────────────────끝>
    끝과 끝 사이에는 건강한 자존감, 밝은 자존심, 괴상한 공주병... 등 참 많을 텐데. 그 가운데는 나르시시즘도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저 사이에는 천동설이라고 왜 없겠나. 또 거울병? 여자 인생에서 드물게랄지 아주 짧게? 온종일, 언제나, 어디서나, 뭘 하든지 손거울로 자기 얼굴만 바라보며 사는 시기. 그걸 일컬어 거울병 시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거울병인 줄 아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비롯해... 주인공병 걸리면 나만 주인공인데, 그게 어떻게 병이나! 모른다. 나만 주인공인데 왜 내가 거울병이야? 절대로 알 수 없을 따름. 그런 천동설 때문에 남녀가 연애하다가 떠나가면서 한마디 하는 것도 다 그 때문. "넌 너 밖에 몰라!" 그러니까 이 세상에 나 빼고 나머지는 다 시녀, 신부들러리, 병풍... 따라서 오직 나만 공주! 근데 그게 사회지도층을 비롯해 문화와 상식과 관습 등 모든 것의 평균이다? 그게 바로 칼럼 주제. 그래서 매스컴으로 로보트만 만들어냄. 가령, 

  • TV 교양 프로그램: (한국-중국-동남아시아...특히 한국) "혹시 ...알고 계세요?" → "너 알고 있냐?" 비아냥 뉘앙스 더빙으로 돌변 
  • TV 대하드라마   : 귀무덤,코무덤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 이곳 백성에게 절대 피해주지 말라...등등 천사로 돌변시킴
  • Twitter, 사회지도층 발언: 규칙적이자 슈퍼스타처럼 이상, 망언을 하면 할수록 조명발. 인기. 당연. 괴상망측! 
  • 교육/인습/교양: 일본사 불리한 점을 100% 감춤. 거꾸로 미화. 그래서 일본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자기들 같은 편으로 앎. 또는 드라마 대사로 악마들아 우리를 그만 좀....
  • 사회 인프라,안내판,박물관: 일본사 불리한 자료를 없애거나, 감추거나, 거꾸로 뒤집어버림. 막 500~1000년 위로 올려버려 "기원전"이 평균됨
  • 교육/일반상식: 바이킹 해적질...그리스제국...로마제국...프랑스 권역... 대륙으로부터 영향 받은 역사를 사실 그대로. 그게 유럽인들 인식 차이는 거의 없음. 근데 일본은 그런 거 싹 다 감춤. 반대로 영국이 그리스를 지배, 로마제국으로부터 하사품을 받고, 머머설을 비롯해... 괴상망측. 그러니까 외국 대학생, 대학교수들과 대화 자체가 안됨

    그러다 보니 사회 체계는 선진국인데 사람들 인식은 1970년대도 애교니까 1960년대, 1950년대, 1800년대가 평균. 그걸로도 모자라 사회지도층은 유럽식 1700년대 유럽사회를 지향! 이러다 보니 일본인들이 일본 밖으로 나가면 속칭 멘탈 붕괴를 겪게 됨. 그럼 어떻게 되냐? 
    A) 1900년 전후: 전쟁성노예/삼광작전/식인/중국놈 목베기 대회.../레고족 능가/황국사관...
    B) 2000년 이전: 억압된 규율/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넌 우리집에서 안쟤워줘, 나 너네집에서 자고가도 되니? ...원정경기 가서 남자 따먹기... 기생관광...(안에서야 죄악이었을 뿐이지) 민폐는 미덕이 되는데 그게 왜 안돼! 
    C) 2000년 전후: 일본인들 대부분이 외국 생활 첫해 문화 충격 엄청 받음 → 잘 되면 타문화에 적응해 잘 지내는데, 그런 경우는 희박하디 희박 → 고로 대부분은 그냥 주재 일본인들끼리 어울리며 애써 못 본척! 심리적으로 사고체계가 1800년~1960년 인식이 평균인데, 현재 인식이 평균인 세계인과 친하게 지낸다? 겉으로만. 그렇게 됨. 
    이게 다 어째서 이렇게 됐냐? 
    첫째, 양대서기 (고사기+일본서기)
    둘째, 무사문화 (약 천년? 칼로 쓱...DNA에 고스란히 누적)
    셋째, 황국사관! 1850년~1900년에 확립된 황국사관 때문.
    그럼 안 바뀔까? 안 바뀜. 왜냐하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저런 괴상망측만 더더욱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 그래서~ 천주교, 기독교, 구교-신교..., 이슬람교, 불교...처럼 일본은 신도를 만들어냄. 근데 이 신도가 뭐냐? 교리가 없음. 교전도 없음. 교의는 이상. 근데 또 말문이 막히도록 교주 많기는 다다익선! 현천황들은 죄다 교주와 동급. 그마저 온전히 교주 많기로 축적, 계속 누적됨. 그래서 불교랑 비슷한데 불교로부터 형식미만 쏙 뽑아냈지 그런 거 말고는 불교랑 전혀 다름. (바꾸어 말해 불교랑 똑같음. 불교와 토속신앙, 백제식 전통 빼면 거의 껍데기) 바로 그 형식미가 신도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으므로, 따라서 전국에 신사를 최대한 많이 쉼없이 건립. 지금도, 앞으로도, 전세계에... 과거 기록도 다 남아있음. 일본의 목표는 전세계인의 신사에 날마다, 매 식사 전후에 전세계인이 절하도록 만드는 것! 근데 종교의 자유는? 없음. 오직 일본신을 위해서만. 그 전력도 훌륭(?)했고, 교육과 문화와 관습도 특별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임. 또 핑계는 예술이므로 그게 절대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음.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처럼 일본에는 신도대학교가 있음. 거기를 졸업하면 각 신도로... 막 복잡함. 또 신사들 종류도 천차만별이라서 저주신사 머신사... (절레절레)! 만약 이대로 천년 만속 지속하면? SF 영화처럼... 두고 보면 알게 됨. 근데 그땐 늦음! 그래서 다 지리적으로, 환경적으로 정신 못차리는 원시인을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 정작 태평양 원주민은 또 야만적 사고체계를 인정하는 걸 극혐. 말로만 남한테 피해주기를 싫어한다고 하지. 고급스러운 방법으로 남한테 피해주는 걸 최고로 좋아함. 아예 문화 자체가 사디즘&마조히즘임! TV 프로그램도 그게 평균. 

    [신도대학교]
    대표적인 신직 양성기관: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 신도학과
    고각칸대학(皇學館大學) 신도학과
    교육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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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서기]
    일본(일본인)의 문화, 관습, 일반상식, 배경지식, 현대적인 학식 등에서 상당수가 정상과 동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은 길지만 그게 일단 양대서기(고사기+일본서기)로부터 기인한다는 점. 때문에 양대서기를 분석하다 보면 천황에 대해 알 수 있고, 천황가를 연구하여 보면, 왜 천황가가 백제 및 고대 한반도 신들을 섬기는 것을 일본 언론&사회지도층이 필사적으로 함구하는가를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전체적인 서사, 줄거리, 맥락, 방대한 지식을 근거로 일본(일본인)의 사고체계는 1,300년 전과 별로(거의) 바뀐 게 없다는 점. 오히려 바뀌지만 않았으면 다행이게? (절레절레) 즉 양대서기(고사기+일본서기)가 왜 발생했냐, 그냥 그때 시점에 머무를 수 밖에 없으므로.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 당시 그와 같은 역사서지만 소설에 가까운 기록이 왜 남았을까를 따져보면 일본(일본인)의 인식을 빠짐없이, 낱낱이, 투명히, 무엇보다 속 시원히~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중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건 (수많은 학자, 일반인, 관료, 전문가, 애호가, 비전문가....그분들의 노고가 거의 전부이지만 교묘히 필자 혼자 대부분 연구한 것처럼 핑계차 넘어가는 건 누차 말했듯 쓱 넘어감) 반복되지만 천명에 가까운 소임이므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음. 
    A) 700년 이전 일본 왕가/귀족/사회지도층은 백제&한반도 무관. 열도 토착인 출신 강조     → 거짓
    B) 그리스제국/로마제국과 반대로...백제 출신 관료가 왜로 넘어가 창작(사실 포함)한 사료...  → 거짓&참
    C) 일본 고대왕국은 한반도&중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되며 독립적으로 발전했다는 걸 강조 → 거짓
    D) 백제/가야/고구려/신라...가 천황가 상위 족보라는 점을 부정                                        → 거짓
    E) 인도/이슬람/비잔티/남동유럽/그리스정교/서구문명...과 일본문명은 기원 등 모든 게 동급    → 거짓
    F)
    G)
    ......

    비록 소설이지만 1996년 일본에서 발간된 소설 <백제화원>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일본서기'를 읽으면서 '벡제궁'이라는 이름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큼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기나라의 수도에 있는 궁전에 외국의 이름을 붙이다니, 도무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수도 안에서 장대한 가람(절의 큰 건물)을 자랑하는 큰 절의 이름이 '백제대사'였다. 그리고 각지의 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백제관음'이었고, 또 수도 안에서 백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런 것들고 미루어 볼 때 백제인들이야말로 일본의 지배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데 소설 속 내용이 과연 사실과 얼마나 다를까? 중요한 점은 사실과 부합했다는 점. 이게 모두 고고학, 역사적 사료, 무수한 문화재가 철저히 뒷받침하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국민이 숭상하는 천황, 천황이 궁내에서 무엇을 하는가? 역대 한반도 신들께 (일평생) 규칙적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점. 더불어 이세신궁은 황실 조상신 아마테라스의 사당인데, 그 제사 때의 축사 시작부 뜻은 이렇다. 곧 한신을 맞이하라! 제례의 시작이 바로 이 축이라는 건 무엇을 뜻하나? 한신이 괜히 대상제(천황 즉위식) 순서에도 들어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반증. 따라서 다른 칼럼들에서 세밀히 밝혔든 일본 문화와 일본인 사고체계의 본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일본국&민의 조상인 백제/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데서 받은 충격,원망 잠재의식으로 1,300년 누적
    둘째, 일본국&민의 조상인 백제/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데서 받은 충격,원망 치밀,꼼꼼히 정반대로 왜곡
    셋째, 일본인이 어떻게...한국인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민족이라니... 속 뒤집어짐   극구 부정,세계최고로 싫음
    넷째, 무령왕 발굴로 밝혀진 역사적 증명과 반대로. 사실이 밝혀지는 건 무엇보다 싫으므로→ 일본 능묘는 일단 1천년 발굴 금지
    다섯째, 무령왕 발굴로 밝혀진 역사적 증명과 반대로. 사실이 밝혀지는 건 무엇보다 싫으므로→ 일본 능묘는...불리한 것만...이미 몰래 파묘했거나, 앞으로 비밀 리에 하지 않을까? 벌써 완수했을 수도 있음(이건 뭐 거의 정해진 수순 아닌가? 드라마 한두 번 보나. 이러니까 영제업계만 부담스럽잖아, 한발 늦어도 한참 늦으니까). 진작 그랬을지도 모름. 아마도...하늘이 그걸 보며 웃고 있는 걸 넘어서...이미! 다만, 그런 다음에 공개하는 건...무척 부담스러우므로 질문과 항의는 받지 않는 걸로. 
    * 이런 걸로 봤을 때 겉으로만 남한테 피해끼치는 걸 그 무엇보다 혐오한다지만. 알고 보면 미래 세대, 전세계, 더 나은 내일에 피해끼치는 걸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함. 

    [천황 즉위식/팔십도제]
    팔십도제는 793년부터 1185년 시대까지 천황 즉위 의례의 일환으로 행하던 제사였는데 지금은 폐지됐으나, 그때 모셨던 신이 백제신. 그걸 간소화하여 천황 즉위식에서 백제신을 모심. 근거는 많고도 많음. 또 일본어사전 '광사원'에는 한신 항목에서 한신을 백제신이라고 밝힘. 또 이세신궁 제례 절차에는 백제식 축사, 백제식 신악, 백제식 신무, 백제식 신관, 백제식 무녀의 복장 등이 거의 그대로 온전히 백제식으로 남아 지금처럼 전해짐. 
    팔십도제는 천황 즉위식의 한 의례인데 그 의미는? 새로이 즉위하는 천황은 가와찌(아스카베왕의 궁)에서 맞이한다는 행사. 다시 말해 야마토왕조의 정통성이 아스까베왕궁에 있다는 의미. 그런데 일본어사전 '광사원'에는 엉뚱한 제신에 제사드리는 것으로 왜곡되어 있음. 그게 다 양대서기에서 시작된 정반대의 왜곡 때문. 대팔주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고 그런 신도 없었는데, 일반 대팔주라는 용어는 양대서기 편찬 후부터 발생한 용어. 또 난파궁이 일반적으로 인덕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일본서기가 아스까베 왕국을 야마토 왕조에 편입하면서 생긴 것. 
    이 때문에, 일본정부는 2차 대전 전후 정교분리에 의해 신사를 법으로 관리 관할하게 하여 국민의식을 직접통제하기 힘겨웠는데(2차 대전 이전은 대성공이었으나). 그래서 지금 일본의 신사는 신도라는 이름으로 종교화를 완성했고, 극대화는 끝없이 질주하는 중. 
    이래서 평소에는 존경하며, 신성시하는 천황이지만. 그러나 벗기고, 열고, 까며, 들추면... 천황은 단지 천황일 뿐임. 그렇게 됨. 그러므로 천황은 국화 같은 상징일지언정, 실제는 나머지 전국민이 무사요 사무라이며 실질적 주인임. 결국 내면의 상황은 의견 차이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절 없는 사회지도층 뿐. 그래서 언론과 사회지도층이 2010년 10월 8일 당시 천황이 나라천도 1,300주년 기념식에서 했던 말들. 즉 그 백제 관련 발언들을 일본 언론사들은 덮는 데 급급. 절대 무시하는 건 그분들 특권! 사회지도층 입장에서는 무려 1,300년에 걸쳐 천황가 신분세탁을 다 해드렸는데 지금 와서 천황가가 백제 후손임을 당당히 밝힌다? 전국민이 알게 해서는 절대로 안됨. 이와 똑같은 일들만 만년 발전, 개선됐다는 점. 

    [연호/레이와]
    현재 일본 연호만 봐도 모순은 가득하다. 일본의 레이와 라는 연호는 2019년 5월 515일 제126대 천황 즉위식 때 (수없는 백제식...백제식...백제식으로 둘러쌓여) 시작됐는데. 심지어 그렇게 탄생한 연호 레이와! 레이와라는 연호는 8세기 경 정리된 걸로 추정하는 유명한 시가집인 만요슈. 거기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만요슈에 나오는 시나 노래들은 대부분 백제인과 그 후손에 의해 창작된 것이라는 점. 잉글랜드를 비롯해 유니언잭은 공식적이자, 전적으로 십자가를 표방하는데. 태평양 원주민은 은근히 백제를 추종하면서, 그러면서 또 이상하게 백제를 감추는 데 모든 총력을 기울인다는 점. 완전히 사력을 다함. 1억 옥쇄는 물론 세계 평균 관용구 같은 '속는 셈치고' 그게 아니라. 일본어 관용구처럼 "죽은 셈치고" 전원이 모두 희안하게 삶. 대체 왜 그러지? 

    [일본 고대 구분]
    세계 평균과 달리 일본의 고대 구분은 굉장히 복합적이다. 특별하다? 괴상하다. 그럼 왜 하이브리드로 정했지? 불리하니까.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옆동네만 봐도 싫지만 사실이니까 바꾸지는 않는데(틀린 건 차차 바로잡아나가면 되고). 먼 역사니까 양대서기를 필두로 하여 여태까지 안 바꿈. 이를 테면 
    전세계 보편적으로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그리스 제국, 로마제국, 머머 문명 그렇게 공통된다. 아니면 시대적인 나라명이던가! 하지만 일본의 고대 시대 구분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등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게 단지 흥미롭기만 할까?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는 그 시대의 대표적 토기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고분 시대는 거대한 고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고대 구분이 기준이 일관성도 없고 상식적으로만 봐도 이상함. 그러니까 왜? 일본의 초기 역사 발전단계가 중국,한국에 비해 앞서지 못했기 때문에. 많이 늦어으니까.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옛날에 정하려고 했는데 죄다 반도와 대륙보다 늦었거든. 그래서 그건 안됨. 또 시대적인 나라명으로 정한다? 일단 그 옛날 나라가 없었거든. 따라서 그마저 안됨. 그래서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이상하게 됨. 

    [천황가 발상지]
    얼마든지 가능하나 발굴금지하는 가운데 그나마 드러난 고고학 자료가 있기는 있다. 그 가운데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일본에서 천황가 발상지라고 공식 인정하는 유적지. 그런데 출토 유물이 가야계 유물? 이로 말미암아 천황가 고향은 가야라는 게 증명되는데. 그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리스제국/로마제국 진출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 과거 말도 안됐던 임나일본부를 여전히 지금도 주입하는 중. (지금 임나일본부를 믿는 전문가는 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글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뭘 몰라도 한참 모른느 것임. 단지 임나일본부에서 딱 한발짝만 후퇴한 것일 뿐, 그 내면을 빠삭히 엿보니까.... 이건 뭐 말도 못함. 내가 칼럼을 괜히 쓰간디? 뭐 심심해서? 우리 집안에 경제적으로 도움도 못될 망정 모든 걸 바쳐 이 짓을 하간디?) 그 주요 맥락은 1,300년 동안 일절 변함없었고 전국민을 세뇌시켰던 기간은 약 200년으로 현재진행형. 학계에서는 그게 고리타분한 가짜라면서 거짓 학설로 지금은 아무도 안 믿는다, 거짓으로 밝혀졌다 라지만. 현지에서 출판물, 방송물, 학계 논문.... 자료 가운데 무작위로 뽑아서 사정을 살펴보면? 공식적으로 교과서에서는 애매하게 넘어갈지언정, 그 외에는 여전히 1900년 전후 77체제와 전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점. 따라서 향후 백년~만년 사이에 아마도 일본의 고분은 발굴 가능성이 0에 가까울 걸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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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께끼의 4세기 - A]
    중국 사서에 따르자면 266년 ~ 412년까지 약 150년간 왜국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음. 그런데 중국에서만 기록이 없었냐? 왜, 한반도 등 모두 없었음. (아쉽게 사라진 자료들은 많겠으나 현재 남아있는 게 극히 드묾). 다만 참고 자료들 목록을 보아하니 현지에 산재한 수많은 전방후원분,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 무령왕 처녀묘 자료들, 송에 대한 왜국 왕들의 작위 요청, 왜왕 무의 상표문, 다케하라 고분 벽화, 칠지도,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 명문, 무령왕릉 묘지석 명문, 일본 정부가 향후 1만년 발굴 금지시킨 모든 능료 내부 소장품 등이 있는데. 그 150년 동안 중국 사서에 고구려, 부여국, 마한, 진한, 백제 등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있는 걸 감안하면 당시 중국이 근방 여러 국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건 절대 아님. 때문에 당시 왜는 일종의 무정부 시대였다랄지 수십~100개 부족이 난립/독립/대립/느슨한 연합보다 무교류 무외교/경합/각축/산재된 시기로 추정. 그래서 일본 고대사에 대하여 정확한 역사가 무엇인지는 밝혀진 게 불확실하여 수많은 설이 공존하는 실정. 그런데 다만 수십~100개 부족이 병치됐다고만 하는 건 고고학 아마추어 또는 일방적으로 원하는 것만 믿고 주장하는 이치. 그러니까 왜 수십~100개 부족이 병치 및 산재했는가가 중요함. 
    여기서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여러 설들은 순위와 가능성이 대폭 축소된다. 즉 고분 시대 전기인 4세기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을 보면 주로 거울, 팔지, 구슬 등 제사용이나 장신구용 등 대비. 그에 대비하여 또 5세기 고분 시대 후기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무기나 무구, 마구와 같은 권력 상징물은 특정 시기에는 전혀 없다는 점. 그래서 출토품만 봐도 4세기에서 5세기 6세기로,
    a) 지역 수장         무력 수장
    b) 내국인 추정       외부 유입 세력 수장
    c) 비호전적인 수장 호전적인 수장 
    d) 관습 기준 협력   법/힘/무력 기준 통제
    a,b,c,d...같은 변화는 동네 꼬마도 추론할 텐데. 일컫기로 전문가라는 양반들께서 이마저,,, 심지어 알면서? 더더군다나 왜 일본 정부는 향후 최소 1만년 능묘 발굴을 금지시켰을까? 머머설들에서 고고학적 근거를 대입하니 결과는 멜로드라마로 표현하자면, "내부 승진"보다는 "외부 용병"이 정답! 즉 무력을 앞세워 열도에 들어와 점차점차 지배영역을 확장해 갔던 걸로 추정. 뒷받침하는 근거는 매우 많음. 그야말로 쑤두룩. 
    아울러 현지 고고학계 주장에 따르자면 하시하카고분이 조영된 고고학 연대가 350년. 그 때문에 그건 247년 경으로 보이는 히미코 사망시기와 약 100년 차이 발생. 또 백제 멸망 시기와 흡사하도록 일본서기는 뜬금없이 BC 660년으로 황당한 계산법으로 초기 설정. 또 2009년 일본 국립 역사 민속 발물관의 탄소14 연대측정 그룹이 하시하카고분 주변 출토물을 3세기 후반으로 추정 발표했는데. (가령 고분 안쪽은 막 400~500년대, 고분 주변 출토물은 200~300년대? 탄소연대측정조차 막 이상함. 그래서 몇 억년 전 물품을 인디아나 존스처럼 고고학자가 몰래 묻었다가, 발굴한 것처럼... 그런 사태가 발생함) 그런데 모순되도록 일본서기는 일왕가 역사를 중심으로 "창작+역사"를 감안하더라도 (창작에 앞서 수많은 구설 민요, 만가, 신화, 전설 등을 취합 및 반도와 대륙 서적 인용. 그 다음 100년 200년 업데이트 및 새로운 인력으로 개보수) 왜 여왕 히미코가 야마토 왕조의 여왕이라고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이렇듯 내부 승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외부 유입에 대한 증거는(증거만) 까마득한데! 
    그리고 일본 고고학계 통설에 따르자면 초기 고대고분의 조성시기를 실제보다 100년~150년 앞당겼고, 일본서기처럼 BC 660년을 믿으며, 그래서 일본 전역에 위치한 신사들 안내판에 적혀진 기원전...! 이런 배경지식을 총합해보면 5세기 곤지 왕자와 백제인 집단에 의해 특정 지역에 백제의 후국, 즉 백제 분국이 세워졌다는 걸 가리킴. 물론 그 백제의 기원은 부여, 또 백제가 태반이었던 반면 중간중간 신라와 가야와 고구려 등도 영향 및 유입, 다시 부여의 기원은 북만주 및 주변 대륙국가, 다시 그들 역시나 몽고쪽 시베리아쪽 유럽쪽 이집트쪽 더 위쪽 대륙에서. 결국 <그리스제국 → 로마제국 → 영국>이라는 흐름과 더불어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이 옮겨가 자리를 잡고, 프랑스왕이 통치했다가, 문명의 꽃을 피운 과정과 비슷. 다만 

도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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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립 연대             발굴 시기             왜 금지?                       자국 입장/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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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피라미드   기원전 2500년경    1920년~현재진행                                     찬란한 역사/인류문화유산
일본 능묘들        기원후 500년         1900년대~금지      사실공개를 극혐하니까    속 뒤집어지는 역사/노예광산들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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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수수께끼의 4세기에 대한 명쾌한 요점은 결코 "내부 승진"이 아니라. "내부 승진"이 아니라 "외부 용병" 집단이 당시 열도 국사를 독무대로 만들었다는 점. (물론 내부 통합이랄지 각각 용어로 순화해도 되는데 핵심 단어는 '외부 용병'이라는 점이 중요). 그 때문에 바로 "712년+720년" 양대서기가 태동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 일본서기에서 왜 사실과 다르게 왜가 삼국,가야,어디,어디...를 지배하며 통치부를 설치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왜냐하면 그 정반대가 사실이니까. 그래서 일본서기는 백제서기라고 불러도 될 정로도, 아니 오히려 백제서기라고 명칭해야 옳을 만큼 온통~ 백제에 관한 내용들 뿐! (또 백제 내용들 뿐인가? 알고 보면 신라에 대한 내용들도 굉장히 많음. 또 가야, 고구려... 등등) 그런데 그 똑똑한 현지 역사학자, 고고학자, 교양학자들이 이걸 모른다? 단지 알면서 모른 척할 뿐. 자, 반론? 앞에서는 못함. 안함. 짜증남. 딴청. 자, 일단 한 가지만 여쭤보자! 왜 일본의 모든 언론사가 천황을 허수아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알까? 마음에 안드는 내용은 싹 다 거른 체 TV, 신문, 방송에 내보는 게 왜겠나! 불리한 건 애매하게, 유리한 건 확실하게! 그게 야만과 문명의 차이이기 때문. 유럽사를 통틀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리스제국사를 왜곡하나? 아니면 로마제국사의 영향을 폄홰하나? 아니라니까요 글쎄. 
    이로 말미암아 수수께끼의 4세기에서 설득력 있는 후보군은 말하자면 총 10걸. 그 10개 학설 가운데 가장 유력한 논설은 뭐니 뭐니 해도, 유일하게 외부 용병 집단에 의한 내부 정리/통일/체계수립/....그러니까 백강전투에 국력을 총동원하고 여왕 죽고 어쩌고 그랬지. 그 뒤 역사는 다른 칼럼들에서 설명했으니 생략. 히로히토 말고 그 다음 천황들만 봐도 사적으로 누구누구와 대화할 때 왜 백강전투 주제를 유독 수차례 언급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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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께끼의 4세기 - B]
    수수께끼의 4세기가 왜 민감하냐 하면 1900년 전후 77년 체제가 세계 제패를 시도했던 이유였던 임나일본부설과 꼭 빼닮았기 때문. 그리스제국, 로마제국, 앵글로색즌족 이동경로, 바이킹족 활동 영역과 영향. 그 흐름은 일반상식으로 자리잡은지가 오래인데. 일본사에서 수수께끼의 4세기?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고분/대고분들의 축조 시기를 100년~200년 앞당기는 노력은 집단공포이자 야만적이며 원시적인 걸 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치밀, 촘촘, 세밀, 깐깐, 꼼꼼, 장구하다는 것. 
    그렇게 고분의 조성시기를 앞당겨서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결국 기원전부터 AD 500년까지 일본 밖 무장집단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세워진 다국적 연합/독립 세력들. 그걸 백제/가야/신라/고구려/기타 한반도와 무관한 열도 토착인 출신임을 강조하는 걸 넘어, 거꾸로 임나일본부설의 부활에 성공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는 점. 그럼 그 다음은? 1900년 77년 체제의 부활! 점차점차~, 야금야금~, 영차영차~... 1,300년 전의 거짓말은 단 1번도 멈추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느 날 갑자기 야만을 몽땅 없애고 문명만을 추종할 수 있나. 원시적인 관습을 숭상하는 한에서는 불가능한 것. 
    때문에 닌토쿠 왕릉(다이센 고분), 어디...어디...수많은 고분들의 축조 시기 역시나. 10만 20만 신사에 똑같이 적혀진 안내판의 기원전...기원전처럼. 끌어올리려는 집념은 흡사 1945년 어떤 선언문과 꼭 빼박은 듯하다. 견딜 수 없는 걸 견디고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500년~600년 축조된 고분의 건립 연도를 3세기 중반 정도까지 끌어 올려야만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이 죽었다는 240년 대 후반에 맞출 수 있기 때문. 그럼 그리스제국도 없어지고, 로마제국은 원래 반대로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라는 사실(?)만 남게 됨. 그 축조연대 추정에 관련하여 토기편년...고분 축조시기와 연동되는 탄소방위연대 측정조차 각종 설변과 방법 등에 의해 얼마든지 100년 200년 앞당기는 건 일도 아니게 됨. 
    그 왜곡,거짓을 얼마나 세밀하도록 (만장일치로 천년 만년) 조작하는가? 특정 토기 제조기술이 4세기 말 경 대륙과 반도에서 열도로 전수되었던 게 사실이자 역사인데. 그걸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종래에는 300년 경이었다가 일반적이었다가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특정 토기 제조기술 시기를 200년대 후반까지 올리는 걸 유력히 보는 학파도 다수 등장하게 됨. 그럼 은근슬쩍 곧 있으면 그것만 주류가 됨. 그러므로 일본에서 철기, 청동기, 토기...를 비롯해 한자도 일본에서 만들어 반도와 대륙으로 넘어갔다는 학설도 나중 필시 등장할 수 밖에. 이렇듯 100개 부족이 난립했다랄지 일본 밖에서 이주해온 무력집단이 세력을 형성해 수십~100개 지역 왕국이 존재하다가, 그게 서서히 6세기에 들어와 야마토 정권에 복속되어 갔던 게 사실인데. 또 복속된 야마토 정권의 최상위층은 누구냐? 괜히 천황가가 백제/신라/고구려...신들께 제사를 지낼까. 이처럼 1,300년 무렵 작성된 의문으로 가득찬 역사서와 똑같이 학계, 업계, 사회지도층도 살고 있는 것. 그 외 수많은 문화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뜨끔한 것들 천지. 가령, 

  • 일본 전역에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고대 한반도 관련 지명/학명/성씨/제신/이름들은 왜?
  • 일본에 있는 벽화의 대부분은 서북규수에 집중되어 있는데, 왜 그럴까? 
  • 일본 문명은 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을까? 
  • 왜 아시아 정벌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슈&쓰시마 군벌이 독점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정답을 명쾌히, 또 은근히 추로할 수 있는 근거는 가히 천문학적으로 많음. 그러니까 더더욱 고분 축조시기를 최소 100년~ 최대는 가능한 한 많이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 또 일본서기에는 461년 백제 무령왕이 탄생한 섬에 대해 기술된 지명이 나오는데. 타국 국왕을 괜히 언급한 게 아니라, 다른 칼럼에 기록했듯 참 많은 점을 시사한다는 것. 이처럼 일본서기에 명시된 수많은 개별 왕국들. 이와이국, 이즈모 왕국, 기비왕국, 무슨국, 무슨국....수십~100개 부족. 거기서 슈퍼미들급, 헤비급은 단 몇 개일 테고. 그건 없던 걸로 치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을지언정 고분 축조시기를 앞당겨서라도 임나일본부설 오직 그것만 추종하고자 하는 원시부족 학계. 그럼 그 방향성과 황당함과 조작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서 딱 끝날까? (아하~ 이 정도 됐으니까 딱 만족?) 그게 어느 정도에 이르러서 그분들을 만족시켜드리면 세계사, 인류사가 왜 시끄러웠겠나.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리스제국은 없었고, 로마제국은 반대가 진짜였다고 주장하게 됨. 그럼 과거 자기들 본토였던 지방을 되찾고 싶을까 아닐까? 놓친 대어를 잡아야 직성이 풀림. 물론 말은 그렇고 전세계가 신사참배, 궁성요배 해도 성에 찰 리는 없다는 것만 알면 됨. 그걸 요약하면 뭐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음. 물론 문명인마저 그럴진데... 원시적인 부족 관습과 풍토는? 말 다했음. 그쯤까지 가버리면 또 천황은 허수아비에서 더더욱 하락하여 어느 시대처럼 숨어살던가, 아니면 평생 군복만 입고서 모든 걸 지휘하며 살게 됨. (말도 안되는) 기원전 안내판들이 괜히 심각하고 진지할 리는 없단 말이다. 또 문화재 안내판에서 50년~80년이 통채로 빈칸인 게 과연 정상인가? 말도 안됨. 그러니까 못된 욕심은 끝이 없는 식. 이건 집단 광기도 개인 습성도 아니고, 요컨대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아마존 원시부족의 식인, 인도네시아 훈제족을 거뜬히 능가하는 악마성임. 볼링핀? 볼링공? 





    5

    한편 논점을 바꾸어 50년 통계가 말해주듯 일본 사회에서. 왜 일본 언론사-사회지도층은 천황의 백제 발언을 무시-은폐로 일관했을까? 무려 50년, 500년, 1300년 연속, 충분히 예단하기로 500년은 커녕...그처럼 말이다. 다 이유가 지엄하기 때문. 물론 이건 태평양 원시부족이니까 비문명 질서가 극대화됐으나. 문명 사회에서도 그림만 다를 뿐 그처럼 괴상한 예시는 많다. 이렇듯 흑백 TV는 대중, 민중, 군중, 민초... 이런 거 겁나게 싫어한다. 일단 중앙권력은 비교적 단일적이며 영구적인 걸 절대 선호. 사회를 가정으로 비유하여 나머지 가족구성원이 능력자를(능력자 형제 1인만) 50년 (속칭 몰빵) 지원해도 나중, 냄새나는 가족구성원한테 돌려주지 않는다. (대부분 선량하나 또 그런 사례도 찾으면 적지 않은 건, 가정을 사회로 넓히면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 만약 사람이라면, 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게 있으면 나중 베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아니라고 반증함. 내가 왕조시대에서 지지받아 축척한 건 당연하지만, 비왕조시대일지언정 공평 만큼 짜증나는 건 없음. 왜 지금과 달리 비교적 구시대적 가부장 사회에서 말을 하든, 안 하든 각자 쌓인 게 많았을까? 왜냐하면 나 유리할 땐 내 마음대로 기준, 나 불리할 땐 공평...공평... 막 이랬으니까. 내가 싫어하는 건 평등, 내가 좋아하는 건 나만-비평등! 당장 낱말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을 때 어감이 어떤가? 
    A) 독재/군림/영구집권/(공익보다 단점 위주의) 전관예우/악습부활/돈-지위로 무소불위 권력
    B) 봉사, 복무, 역임, 업적...  (A는 C보다 계층 공고와 신분 이동 금지만 훨씬 선호하나, 아니나?)
    C) 대중, 민중, 시민, 혁명, 개혁, 환경, 노동권, 동물권, 미래세대권리, 풀뿌리... 

    * 이래서 도시 대 시골은 현대적 개념일지언정. 그와 종이 1장 두께 차이가 발생하면 무엇이다? 왕조시대. 종이 1장 두께 차이가 나를 부추기고, 유도하며, 설득하고, 평생 세뇌시키면? 모든 걸 중앙집중화. 현대적 개념 정도까지는 그게 효율적이며 좋은 점이 많을지언정. 현대적 개념으로 포장하여... 모든 걸 내 옆에만 있게 한다. ~그게 아니라 좋은 건 다 내 옆에, 나쁜 건 최대한 내게서 멀리! 과거와 현재의 차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빈부 격차를 들 수 있다. 허나 (반말로 표현해) 그걸 어쩌라고? 어쩔 수 없다만 그거 감안하고 다른 장치들에 대해 노력하는 게 지금 세상. 근데 그게 점점, 점점... 그래서 부의 대물림도 자연스러운데. 어차피 너는 너 나는 나! 그렇지만 법조인 집안이 대대로 잘사는 거야 존중하고, 재력가 집안이 더 잘사는 거야 관심 없다만. 그게 아니라 현대적 개념을 과도히 무시한 체... 왜일까? 
    (국제)회계사, (국내지만) 변리사, 일류대 의사 집안, 역대 대대로 부동산 재력가..., 국회의원...들이 잘사는 거야 그렇다 쳐. 응? 그런데 그분들이 법안 검토, 법안 상정, 두꺼운 의료서적 검토, 학자가 국제 논문에 맹렬히 집중.... 다 좋은데. 사람이 일하는 기곈가? 다 사랑도 하고, 결혼, 우정, 친교, 여가, 풍류, 캠핑, 취미...도 함께 하는 게 곧 인생. 그럼 법조인이...누가...누가...주 몇 시간 열심히 노동한 다음 동료의 결혼식이 지방이다? 여자친구가 해외가수 공연 보고 싶다는데 4시간 거리다? 국내 최고급 백화점은 2시간 거리다? 세계 최고 의료센터는 3시간 거리다? 고위급 관료인 친구가 결혼하는데 식장까지 2.5시간 걸린다? 국내의 모든 걸 그분들 (극소수 사회지도층 구미에만 알맞도록) 모든 걸 최적화하는 일. 왕조시대다! 단, 1마디조차 그분들 혼잣말에서 의아함이 표출되어서는 곤란하니까. 그런데 토를 단다? 그러니까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지. 향수병 부채질은 물론 뻠쁘질이라는 저속한 말이 그래서 재밌다. 
    시끄럽고 먼지 많은 공장? 어디로 싹 다 보내. 가방끈 짧은 애들이야 선거철에만 다독이면 돼. 멍청한 하위층? 역감정 부추기고 정신승리, 오기, 투정..같은 민감한 감정 위주로 간지럽혀주면 그만. 그러면 우리편 들지 말라고 해도 들게 되어 있음! 또 애완동물 장례식장은 물론 막 혐오시설? 우리 동네에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며 투쟁~투쟁~! 식품..무슨 청... 무슨 공사...무슨 정부기관. 일 때문에 간혹 들려야 하는데... 법, 의료, 정치, 경제...내 시간을 지들이 아껴줘야지 우리가 지들 비위를 맞추라고? 그래서 모든 걸 그분들 1일 생활권이 아니라 단 몇 시간 범주로 정해버리는 일. 왕조시대인가 아닌가? 또 그 바깥에 포진한 부류였는데, 나중 어떻게 어떻게 그 어려운 진입장벽을 기어올라 안착했어. 그럼 사람이 어떻게 변한다? 예시는 셀 수 없음. 또 연예인병 연예인만 걸리나? 오히려 그 바닥이 훨신 깨끗. 더더욱 그분들을 쥐락펴락했던 방송국 PD들과 사회지도층들이 옛날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뭐든지 성상납 뭐든지! 그 무엇이든 007 가방. 누구의 아들딸이자... 누구 빽 든든하다고? 야 야 그쪽 아니야 굽혀 굽혀...! 그런데 아직도 왕조시대로 돌아가자? 다큐멘터리도 정도가 있지. 그냥 평생 기저귀를 달고 사는 식. 안 그런가? 말이 좋아 고대 왕조 성씨 교체 3번이 불미스럽지 않다였지, 역사만 해도 꾸미고 거짓된 게 얼마나 많은가. 
    다시 말하지만 만인에게 평등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다. 물론 적빈하면 시간을 온통 갉아먹는다는 문제도 있으나 일단 부자 입장에서 봤을 때! 풍족하니까 평생, 집안 대대로 시간을 아껴서 누려왔는데. 인생이 재밌고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며, 자본은 펑펑~까지는 아닐지언정 부족함 없이 풍요를 만끽했던 집안이자 사회지도층인데. 시간이라는 자원 만큼은 너와 내가 동일! 그런데 친구 결혼식장까지 3시간, 여자친구가 부탁한..까지 2시간, 쇼핑하는 데는 또 2.5시간... 이래서 서울 살지만 집안이 지방인 결혼후보자는 제외. 또 법률 검토, 대수술, 재계 순방, 사교계 인사... 싹 다 1시간으로 줄여! 라고 명령. 좋은 건 모두 뉴욕으로 나쁜 건 뉴욕에서 최대한 멀리. 법안 검토할 시간만 해도,,,, 법리 따지고... 전례에서 어중간하게 비슷한 것만 검토해서...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나, 어? 그렇다고 시간이 뭐 남아 도나? 딱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 바로 시간이요, 너와 나 공통된 것 역시나 시간. 그럼 시간을 내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야지, 응? 싹 다 1시간으로 줄여. 증권가, 방송가, 예술계... 범위권 벗어난 거 다시 싹 다 불러들여. 남아 도는 게 돈인데 돈 더 벌어서 뭐 하나, 그래서 시간을 버는 게 바로 관건. 이러면 장기적으로 전망했을 때 어떻게 된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 이걸로 보면 단지 일본만 17세기 유럽사회를 지향하나? 아마도 아닌 듯. 태평양 원주민 만큼 특별한 부족도 드문 건 맞지만 오직 어딘가만 꼭 그런 게 아니라. 당장 내가(독자가) 사는 사회만 해도 몇몇 비율은 지금으로부터 30~50년 전을 극렬히 좋아했을까 아닐까? (그때 돈봉투면 다 되는 세상이었는데. 권력만 있으면 귀신도 부리는 세상이었는데. 방송국 PD면 아무 미녀나 다 따먹는 나라였으며, 너 이리와... 최고의 기준은 오직 성상납과 007 가방. 하여 당시 방송국 PD가 꿈인 사람들 부지기수였음. 지금의 중남미와 아프리카, 어디, 어디를 생각하면 됨. 또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우기만 하면 끝이냐? 학교, 조직, 군대... 맞고 죽고 고문당하고. 그럼 혼자만 당해서 조용한 경우도 있는데. 계급장이 내려가면서 벌칙은 누적...누적...누적... 필자 같은 막내 뿐만 아니라 오직 그게 그 시대 평균. 그때 선생님? 그런데 그때가, 오직 그때만 살기 좋았다며 아직도 향수병(鄕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적나? 당시가 호시절이었던 풍운아는. 그때 만큼 전성기였던 시절이 또 오기는 힘들겠으나 이미 축적한 재산이 얼만데. 후손 대대로~ 쉿! 또 당시 스포츠신문 사주, 편집장, 팀장만 됐어도~ (절레절레). 그냥 손가락 꼼지락꼼지락 호명이면 다 끝. 0.5세기 전 국회의원의 아들딸이면? 엑셀파일에 1만 가지 프리패스, 근데 그 엑셀파일은 무슨 요술 살생부도 아닌데 썼다 지웠다 무한. 당시 수혜를 입고 성장하신 분들을 보아하니... 그때랑 지금이랑 세계관, 인생관, 사랑관...에서 큰 차이가 있나? (물론 호인들도 적지 않겠으나 많기를 바라나) 만약 적으면 필자가 뭐 하러 할 말이 많겠나. 안 그런가? 

    * 아울러 국제적으로 학부를 넘나들며 공부한 일본인 역사학자, 고고학자들 연구 성과도 혁혁하나. 그 고고학자만 봐도 논점과 배경지식 등 모든 걸 보아하니. 이미 시작 전부터 자기 연구 학문의 전제를 무조건 오직 "교류"에만 못 박고 있음. 그래서 그 어디를 들춰도, 펴도, 읽어봐도...무슨 얘기를 할지 죄다 알게 됨. 읽을 필요도 없게 됨. 히로히토 평전만 해도 허버트 빅스의 역작 같은 수준을, 어떻게 일본인이 과업을 수행하나? 죽어도 못함. 안함. 수박 겉 핥기로 폄하하기는 싫으나, 그래서는 안되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아하니... 그 몇 십년 연구한 결과가... 한마디로 교류. 밀접한 교류. 끝? (절레절레)





    6

    [일본서기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나?] 
    660년 백제가 멸망하여 백제 망명인이 왜로 이주/망명. 그때 가져간 백제삼서가 있었기에 가능.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삼서에서 '백제'를 단지 '왜'로 환치 즉 바꿔치기만 하면 거의 일본서기의 반틈이 됨. 물론 백제삼서 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들, 구설화, 수집한 전설들...몽땅 참고하여 복합. 그래서 (사실을 상당수 왜곡한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만든 다음, 800년 전후 진짜 역사서들과 외국 관련 서적들을 몽땅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 고로 천황가도 신분세탁 완료이자, 마음에 들지 않은 역사도 날조 완료. 그게 지금까지 고스란히 연결됐고, 제2차 세계대전과 동남아...그런 모든 게 다 일본서기 탄생부터 이어짐. 지금은? 말도 못함. 

    [일본서기에서 왜 거짓,허구를 창작했을까?]
    1) 야마토 왕조 일왕가(지금 천황가)가 백제에서 온 도래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2) 만세일계를 창립/주장/장래 언제까지나 유지하기 위해서
    3) 백제 왕실이 왜 왕실의 기원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4) 본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원망/적개심/복수심/정벌욕/반감 때문
    5) 400~700년대 야마토 왜가 한반도인들에 의해 성립된 게 사실이지만, 오히려 한반도 국가들보다 더 먼저 성립됐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누적 통계는 1만년 그래프로...단순히 300년만 따져도 저런데...)
    6) 모국 백제가 멸망한지 불과 50년이므로 신생 국가 창립/국가상 정립/또 한반도 국가들을 거꾸로 번국으로 (비록 허구일지언정) 설정하고자
    7) 야마이타이국과 히미코 여왕 문제를 창작으로써 해결하기 위해서. 명백히 중화사상을 본 뜬 개념으로 창작 당시 삼국지, 위서, 진기거주...등 중국사서들을 수없이 검토하면서 동시에 집필. 이로 말미암아 수수께끼의 4세기에 난립했던 소중한 역사적 사료를 모두, 모조리~ 1800~2022년 현재도 열심히 없애는 중. 
    8,9,10...................

    그런데 일본서기 편찬 목적과 반대로 오히려 백제가 왜의 모든 것임을 암시하는 결과 초래! 뭣이 어째?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창작 원인이 나중 어떤 사실들로 고스란히 연결됐다는 점. 그건 무엇이다? 

    [일본서기의 후세 영향력]
    첫째, 정한론 (발단)
    둘째, 임진왜란 (절반 성공)
    셋째, 한일합방 (대성공)
    넷째, 아시아 정벌론 - 세계 정벌론
    다섯째, 제2차 세계대전 (대실패)
    여섯째, 1945년 1억 옥쇄론이 1억 복종론으로 둔갑 (근데 당시 일본인구는 7.5천명... 그럼 나머지는? 통과)
    일곱째, 한국전쟁 특수에 따른 역이익/장기화 희망
    여덟째, 일본서기 탄생 이후 약 1,500년 동안 우월감 
    아홉째, 일본인만 신사참배 해서는 불만족. 따라서 전세계인의 신사참배/궁성요배가 당연
    열째, 천황숭배를 꼭 시켜서 해야 하냐 아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진주만 기습을 시켰던 것 (정계에서...집 지키는 개...개님...알면 알수록 돌아버림)
    열한번째, 77년 체제 이후 못 다한 일본서기의 지시에 대해 야금야금 실행 (예: 고분 축조시기 1~2세기 앞당김)
    열두번째, 국토 전역 신사 안내판의 기원전을 더더욱 공고히...초딩 가방 관습도 더더욱 철저히... 
    열세번째, 일본인 99.9%는 현재 4세기~6세기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서 상당한 지배력/영향권을 행사했다는 것만 사실/교양/배경지식으로 앎 (임나일본부에서 딱 1발짝만 후퇴한 모냥새일 따름. 필자가 왜 이와 같은 연작 칼럼에 매달리는지 나중 두고 보면 알게 됨. 당연히 지금은 모르지)
    ......

    [광개토왕 비문 변조]
    일단 광개토왕비석에 대해 발견 당시와 후대에 일본은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하였다. 
    A) 1883년 비문 탁본을 얻자마자 군 수뇌부에 비밀 리에 이첩
    B) 1883년 비문 탁본 확인 즉시 비석 변조/탁본은 향후 수차례 변조
    C) 1900년 대에 광개토왕비석 자체를 구입 검토 및 의뢰 (결과는 남겨진 게 없음/식자는 모두 제거?)
    D) 1883년~1900년 사이에 광개토왕비석 자체를 강탈과 이전 검토
    E) 국보 1호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처럼 대폭 성형을 검토...근데...밀반입 지시...중지...再考..재론..
    F) ......
    G) ......
    당시 일본은 정한론 및 세계 제패 기세가 팽배한 가운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 찾기에 혈안이 되었던 실정. 더불어 731 부대 맹활약, 삼광작전, 죽음의 행진, 필리핀 볼링공과 볼링핀 광기, 전쟁성노예, 전쟁공장노예 등으로 판단컨대. 그러므로 탁본 변조했을 개연성을 매우 높은데. 단지 정황 근거만 그랬냐, 하면 아님. 일단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본 학계의 주장은 모순이 많고, 특히 일본서기와도 전혀 맞지 않음. 따라서, 
    광개토왕 비문에서 '왜'를 야마토의 왜로 보는 건 심각한 오류로 추정되는데. 시대적 상황으로만 봐도 도저히 상상조차 불가능할 만큼 얼토당토. 이런 억지가 어떻게 지금도? 당시 야마토 정권은 개별 호족들에 의한 연합정권, 또는 수십~100개 부족 난립하는 비연합 형태. 그런데 고대 통일국가에서나 가능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고, 대규모 함대를 한반도로 파견하여 광개토비 비문에 기록을 남기도록 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서도 죽인공은 오직 일본만! 뭐지? 말도 안됨. 지금도 거의 대부분 일본 학계와 박물관장, 교수들은 거의 100% 그걸 야마토의 '왜'로 인식. 일본사를 통틀어 역사서 탑10위만 보더라도 당시 큰 배로 외교권을 행사할 여력은 전혀 없었다고 나오는데 이것만 봐도 여실히 증명. 
    설령 당시 야마토 여러 왕족들이 연계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광개토왕 활약에 따른 전쟁에 참가할 명분 자체가 없음. 무슨 이유로? 또 그 정도의 큰 전쟁에 야마토도 이름을 올리고 싶다? 욕심을 높게 사기는... 그럴지라도 그러면 그런 대업이 일본서기에 빠질 리가 없지 않은가. 이래서 백제삼기, 삼국지, 중국 역사서, 설화, 각종 전설, 각국 신화들을 복합적으로 편집하여 탄생한 게 일본서기. 특히 백제삼기를 참고로, 백제인들 주도로, 백제인 명령에 따라 만들어냈다는 점. 고로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왜는 야마토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 다만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왜'가 약 7차례 등장하는데. 그건 백제, 가야, 백제가 동원한 규슈 고마국 등 군대였을 가능성이 농후함. 
    그리고 광개토왕 비문의 '왜'를 야마토 왜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 왜가 고구려에 버금가는 국력을 갖추고 있고, 우호관계였던 백제를 격파하였다는 기술로 읽는다는 건데. 백제가 왜에게 어떤 나라였나? 한마디로 모국. 본국. 통치국? 부모의 나라. 비상식적인 해석을 무려 200년 동안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게다가 야마토 왕권의 능력은 일본서기 긴메이기에 잘 나타난다. 백제가 국운을 걸고 신라와 싸운 554년 관산성 전투에 긴밀했던 백제성와의 거듭된 지원요청에 따라, 왜는 겨우 1000명의 군사 밖에 보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서 야마토 왜를 고구려와 동급으로 인정해달라? 고고학, 역사학...의 기본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그렇게 됨. 물론 6세기 중반에 1,000명 겨우 파견이었는데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듯이 그보다 150년 전에 대규모 군대를 한반도에 파병했다고? 천문학적 자료는 백제를 본국, 모국, 피식민지를 가르키는데 거꾸로 뒤집어 396년에 백제가 야마토 왜의 속국이라는 건 초딩도 그런 억지는 안 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초토화되는데 구원군을 전혀 보내지 않은 것도 말이 안되고, 일본서기에 나오듯 399년 왜가 이미 신속된 신라로 다시 쳐들어가 성을 파괴하고 신속시킨 것도 말도 안됨. 근데 660년 멸망 전에 백제를 돕고자 3만~5만명 즉 왜의 모든 국운을 걸고서 왜 여왕 사망에도 불구하고 나라 총력을 다해 파병한 건 또 뭐지? 비문 탁본이 이상하던가, 원본이 변조던가, 그냥 모든 걸 오직 왜만 주인공으로 삼아달라는 억지에 불과. 어떻게 이런... (절레절레)! 





    7

    [일본인 최고(最古) 한문]
    일본사를 통틀어 일본인이 쓴 가장 오래된 한문은 무엇일까? 왜왕 무가 송황제에게 올린 상표문임. 상표문 내용은 생략하고. 상표문의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왜왕 무는 왜국을 백제의 봉국으로 소개하며, 백제를 위하여 고구려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부형의 상을 당해 그동안 3년 상을 치렀고... 이제 때가 되어 무도한 고구려를 치려고 하니 지원해주오.. 라면서 선대 왜왕들이 한 것처럼 관작을 요청....>
    내용을 살펴보면 왜왕 '무'가 백제 왕실의 인물임이 훤히 드러남. 무엇보다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 돋보임. 상표문 주인공의 부형들이 백제와 왜에서 모두 고구려에 의해 살해당한 걸로 추정되는데. 역사(정사)를 살펴보면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과 그 왕자들 밖에 없고(475년), 백제에서는 부친상의 경우 3년상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상표문 작성일은 478년이므로. 왜왕 '무'는 개로왕의 아들일 공산이 거의 확실. 
    더더군다나 중국 역사서인 위서 백제전에 기록된 백제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 보낸 상표문을 검토하면. 그 내용, 형식, 어구 등에서 비슷한 점들이 돋보이므로. 일본인이 작성한 가장 오래된 한문인 상표문을 보낸 왜왕은, 결국 개로왕의 아들이 보낸 게 분명해보임. 또한 이 상표문은 5세기 약 150년 만에 중국사서에 재등장하는 왜국과 왜 5왕이라는 의미가 각별하다. 

    [가와치 왕국]
    일본서기 내용: 제21대 유라쿠왕 5년 조에 백제 개로왕의 아우 곤지가, 왜왕을 섬기라는 개로왕의 명을 받고 461년 가와치로 건너가는 문헌이 등장. 
    사실은 <왜왕을 섬기라>가 아니라 <왜로 가서 가왕치 왕국을 통치하거라>이기 때문에 일본서기가 거꾸로 창작. 그런데 478년 왜왕 '무'가 송 황제에게 보낸 상표문 등을 검토해보면 그가 바로 왜왕 '무'라는 사실이 확인됨. 이로써 곤지야말로 가와치 왕국을 세운 인물이며, 장래 야마토 왕조 사실상의 시조. 이처럼 일본서기는 곤지의 도왜 사실만 전할 뿐 그 밖에 곤지의 행적을 전혀 기록하지 않음. 허나 그의 행적은 오진, 닌토쿠, 유랴쿠왕의 기사 중에서 대부분 파악할 수 있는데. 일본서기와 달리 사실 기록 비율이 훨씬 높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사기에서는 곤지가 477년 귀국하여 어느 지위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죽은 것으로 기록. 이건 삼국사기가 신라 위주로 작성되어 백제에 대한 증오 때문이므로 거짓일 가능성이 높음. 또  일본서기에는 곤지와 함께 열도로 건너오는 도중 규수 앞바다의 한 섬에서 사마 왕자가 태어났다는 기술이 있는데. 사마가 501년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의 무령왕이 된 사실은, 1971년 발견된 무령왕의 묘지석을 통해 증명됨.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로 증명) 이처럼 중국 사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일본 6대 역사서, 동국여지승람...등 각국 사서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는 전문가들이 모를 수 없는데. 능묘를 열어보니 일본서기의 무엇은 사실, 무엇은 거짓이 명백히 밝혀지는데. 열도 능묘는 왜 못 여느냐? 열면 거짓이 모두 밝혀지므로. 그래서 일본 능묘들은 영구히 열지 않는다──다만 능묘 축조 시기를 100~200년 앞당긴다──수수께끼의 4세기 등 0년~700년에 걸친 수십~100개 왕국 난립은 거의 단일 왕조로 통합한다 라고 암묵적으로 결의됨. 
    그리고 2010년 발간된 하야시 슌지 학론에 따르자면. 일본서기는 왜국에 와 있던 백제왕자가 백제(한반도)로 귀국한 경우에는 반드시 이를 기록하였는데, 곤지의 경우에만 귀국에 대해 일본서기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왜냐! 유랴큐 5년 조 기사를 꼼꼼히 분석한 결과 곤지를 고니키시로 칭한 것에 주목한 결과, '고니키시'는 백제어로 '대왕'이나 '국왕'을 의미하는 칭호이므로, 이는 곧 곤지가 왜국의 왕이 된 것을 의미함을 확신. ~라고 2010년 공개. 
    여기서 잠깐 부언 설명. 이처럼 역사, 사실, 진실과 함께 최근은 물론 역대 천황가와 천황들은. 거의 일관되도록 백제를 숭상하며 평생 규칙적으로 백제,가야,신라,고구려 신들께 제사지내며 언론에 백제 백제 말하는데. 왜 언론과 사회지도층은 그걸 꼭꼭 숨길까? 왜냐하면 (앞서 밝혔듯)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
    1) 야마토 왕조 일왕가(지금 천황가)가 백제에서 온 도래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백제계 말고도...)
    2) 만세일계를 창립/주장/장래 언제까지나 유지하기 위해서
    3) 백제 왕실이 왜 왕실의 기원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4) 본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원망/적개심/복수심/정벌욕/반감 때문
    5) 400~700년대 야마토 왜가 한반도인들에 의해 성립된 게 사실이지만, 오히려 한반도 국가들보다 더 먼저 성립됐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6) 모국 백제가 멸망하지 불과 50년이므로 신생 국가 창립/국가상 정립/또 한반도 국가들을 거꾸로 번국으로 (비록 허구일지언정) 설정하고자
    7) 야마이타이국과 히미코 여왕 문제를 창작으로써 해결하기 위해서. 명백히 중화사상을 본 뜬 개념으로 창작 당시 삼국지, 위서, 진기거주...등 중국사서들을 수없이 검토하면서 동시에 집필. 이로 말미암아 수수께끼의 4세기에 난립했던 소중한 역사적 사료를 모두, 모조리~ 1800~2022년 현재도 열심히 없애는 중
    8) 그걸 언론-통제하지 않으면, 사상 통제하지 않으면, 황민화 정책으로 세뇌시키지 않으면? 만약 그러면 한마디로 태평양 원주민 정신은 와해되기 때문. 1900년 전후처럼 1억 옥쇄도 불가능해지기 때문. 또 정한론, 임진왜란, 1900년 전후 77년 체제, 일본 지폐 인물, 역사 왜곡, 야스쿠니 신사....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기 때문. 오직 일본만 전세계의 주목과 관심과 호의를 받는데. 오직 태평양 원주민만 천동설 원탑 주인공인데. 
    그런데!   
    만약 언론-통제하지 않으면? 신사참배가 와해. 1억 옥쇄 불가능
    만약 사상 통제하지 않으면? 궁성요배도 망함 (형식은 생략됐을망정...)
    만약 황민화 정책으로 세뇌시키지 않으면? 황국신민들 문명인으로 변신됨
    그러면 다 흩어짐. 사회지도층이 구습/레고 전통만 지속 강요를 하지 않으면? 1,300년 동안 DNA 축척이 어떻게 됐는데. 교육과 세뇌를 어떻게 시켰는데. 일본 국&민의 조상인 백제와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데서 받은 충격, 원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 일본인이 어떻게...한국인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민족이라는 걸 밝히라고? 일본인 입장에서 일본인 전원이 최고로, 극도로~ 싫어하는 것 순위에서 만년 단독 1등이 바로 이건데. 이걸 인정하면? 현재만 해도 1억 2천 5백만, 미래... 속만 뒤집어지는 게 아님. 지진과 해일과 화산폭발을 비롯해 밝혀지면 절대로 안될 것 천지인데... 이래서 언론 통제. 사상 통제. 여전히 황민화 정책. 신사참배. 궁성요배. 1억 옥쇄. 이로써 일본의 학계와 사회지도층과 대하드라마로 세뇌시키는 그 모든 것은. 바로, 서기 700년 이전 일본 왕가-귀족-사회지도층은 백제&한반도와 무관한 열도 토착인 출신임을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시도~지금까지) 사실화 때문에 세계 최대 닌토쿠 황릉을 비롯해 일본 전역 고분들의 축조시기를 100년~200년 앞당기는 것임. 그럼 지금도 그런데 나중은? 77년 체제만 끝없이, 아마도 영원히 반복할 것으로 예상됨. 캬~, 이런 독종이 전세계에 과연 있나? 있긴 있음. 여기까지! 





    8

    [왜 지금도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전시 및 교육시킬까?]
    수없이 설명했듯 사실은 일본 측 입장과 반대되는 게 허다하다. 역사를 입맛에 맛도록,,, 역사가 무슨 요리도 아닌데. 그래서 사실을 살펴보니 개로왕에 의해 왜국으로 건너간 곤지가 후에 왜왕 무가 됐고. 곤지는 일본서기가 말하는 개로왕의 아우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기술대로) 개로왕의 아들! 다만 곤지가 왜국으로 건너갈 당시 개로왕이 임신한 무령왕의 생모를 곤지에게 주어, 이들이 함께 왔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데.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사마의 생모를 곤지왕의 부인으로 보고 그녀가 곤지와 함께 왜국으로 건너가는 도중, 규슈 앞바다의 한 섬에서 출산한 사실을 이상하게 표현했기 때문. 또 일본서기가 그와 같이 거짓을 뒤섞고 이상하게 표현한 건 왜냐? 특히 사마를 개로왕의 아들로 기술한 것은 왜냐? 중간 기착지 섬 태생 (미래 이름) 무령왕이 후일 귀국하여 백제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분명히 확정하려는 의도 때문. 당시 고구려의 침공으로 피폐해진 백제의 개로왕으로서는 이미 가와치 왕국에 기반이 공고한 상태이자, 세력 확대인 실정에서, 백제계 세력이 더욱 영향력과 지배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본국왕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백제 개로왕은 곤지와 그 가족들을 왜국으로 보내 열도 내 백제계 세력에 의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됨. 이때 중간에 출산한 사마가 나중 백제의 무령왕. ← 무령왕 고분 발굴로 여실히 100% 사실로 증명! 
    때문에 칠지도는 개로왕의 절대적 신임 증표, 왕권의 표징으로 가와치 왕국에 정착한 곤지에게 하사한 보검임. 근데 그걸 거꾸로 백제가 왜에 갖다바쳤다고 일본서기 탄생 1,300년 기념으로 도쿄에서 열린 2021년 박물관 특별전시회에서도 그렇게 배포 및 전시. 그냥 모든 게~ 이런 식. 
    그런데 일본 사학계가 거의 100%, 거의 천년 지속으로 주장하는 건 뭐다? 칠지도가 369년 근초고왕 때 제작되어 372년 백제의 사신을 통해 진구 왕후에게 헌상(임금에게 올리다/물건을 감히 삼가 올리다)라고 전원일치 인식. 이유는? 왜국의 군사적인 지원에 감사하기 위한 것... 앞서 언급했듯 겨우 1,000명이랄지 역사적 근거로 지원 자체가 불가하거나... 셀 수 없이 황당한 사실을 거꾸로 뒤집음. 벌써 이와 같은 억지 주장만 해도 사실과 무려 약 100년 차이가 발생함. 그런데 일본 능묘들 축조시기를 200년 앞당기는 게 일일까, 아닐까? 광개토대왕비만 오역한 게 아니라 칠지도도 똑같이 괴상망측하게 오인. 억지. 왜곡. 날조. 
    칠지도에 새겨져 있듯 백제 대왕이 왜에 있는 백제계 후왕에게 하사한 게 사실. 시기는 450년~500년이고, 백제가 왜 열도에 후국(일종의 후백제랄지 분국)이라 할 만한 체제를 설립한 건 500년 대 중반으로 추정. 여기서 보니, 
    a) 칠지도를 100년 앞당겨 하사를 헌상으로 바꾸고
    b) 천황가 족보도 몇 백년은 물론 BC 660까지 만들고
    c) 일본 고분들 축조시기도 현재 200년 앞당겼으면 먼 미래에는? 
    다시 말하지만 칠지도 하사 정확한 시기는 곤지가 백제에서 가와치 왕국으로 건너간 다음, 461년에서 왜왕 '무'로 즉위한 477년 사이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는 468년. 그렇게 개로왕으로부터 곤지에게 하사! 근데 헌상? 헌상? 18세기 후반 규수에서 우연히 발견된 위노국왕 금인만 봐도 뻔함. 후한서 기록에 따르자면 서기 57년 후한광무제가 노국(고대 일본 다수 가운데 하나였을 나국을 일컫음)왕에게 (위에서 밑으로) 하사한 순금제 왕인으로 간주되는데. 그러다 뜬금없이 450년~500년에 백제가 왜 특정 왕국에게 칠지도를 (밑에서 위로) 헌상했다? 뭐든지 '지는 비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뒤집어버림. 

    [일본서기는 왜 475년경 백제 부활을 지원했다고 했을까?]
    일본서기에 이렇게 나옴. "곤지의 아들 말다가 백제왕이 되기 위하여 본국으로 귀국할 때 포학하기로 유명한 것으로 묘사된, 유랴쿠왕이 말다의 머리를 쓰다듬고 은밀하게 타일렀다...." 머리를 쓰다듬고 은밀하게 타이르다? 부자관계임을 암시. 당시 왜왕을 곤지로 보면 왜국이 백제의 부흥을 지원하고 백제 왕실의 최고 수장으로, 곤지가 아들을 백제왕으로 보낸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 그러니까 나중 600년대 중반에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 준비, 실제 지원, 중간에 여왕 전쟁 준비하다 사망...등등이 발생함.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등등 독재지만 당시야 분국이니까 모국에 대해 국운과 나라 총력과 사력을 다하는 것만 예의) 또 당시
    여왕 밑 2인자 등 반대파 + 백제 멸망 = 일본서기 탄생!
    (숭불파 압승 VS 배불파 패배, 백제계 VS 비백제계, 특히 백강전투 패배와 백제 멸망이 정점을 찍음)
    또 일본서기에 적시됐듯 백제가 멸망하므로 고국/모국/본국을 바라보며... 그런 내용을 몽땅 또 불리하니까 무시. 그러니까 지금도 2010년은 물론 근대사 내내 천황이 백제 관련 발언만 하면 일사분란하게...어떻게 됨. 
    그걸 일본 학계 전원은 만장일치로 475년 백제는 거의 멸망 직전 위기였다... 그걸 유랴쿠왕이 공주를 보내 백제를 부활토록 명령했다... 무슨 논리도 설명도 말 같지도 않음. 이 때문에 1873년 에다후나야마 고분 발굴 출토품과, 1972년 무령왕릉 출토품은 거의 복사품. 판박이. 똑같음. 둘 다 백제! 그냥 손바닥을 하늘을 가리는데 창피한 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전세계는 우리를 부러워하지 말라 주의. 오직 전세계인이 우리를(우리만) 어떻게 감상할까...천동설 뿐임. 

    [왜 유랴큐왕은 극악대왕이라는 불명예 별명이 붙었을까?]
    유랴쿠왕 = 곤지이므로! (일본 학계가 최고로 극혐하는 사실/가설/학설/역사...)
    일단 유랴쿠왕과 곤지의 활동 시기가 겹침. 중국 사서가 말하는 왜왕 '무'. <왜왕 '무' = 유랴쿠왕>를 일본 학계가 주장하고 사실로 만들고 싶은데. 유랴쿠왕으로 동일시하는 게 틀리다는 건, 즉위 시기도 다르고, 중국에 조공한 사실도 없는 등 이유는 많음. 그처럼 곤지가 열도에서 가와치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군사적 활동에 주력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전투 등등으로 말미암아 그런 별칭이 붙음. 적게는 몇부터 많게는 몇 십까지 난립한 부족을 통합하는 줄거리였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연임. (4-5-6세기 흐름에 따라 비호전적인 수장 호전적인 수장으로. 수수께끼의 4세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진실을 밝힐 수 있는데. 밝히면 안되니까...말만 많은 것임)
    더욱이 가와치 왕국의 왕인 곤지는, 도왜하기 전에 이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 함락과 개로왕&왕자들 몰살되는 비극을 이미 경험. 그걸 겪은 다음 도왜하여 나중 일본서기에서 어떻게 그려짐. 이렇듯 475년 경 곤지가 가와치 왕국을 이끌며 미와 왕국 등 인접 왕국들을 압박하는 우위를 차지하고, 백제인이 수없이 유입된 건 현지 유물이 증명. (그걸 거꾸로 주장한 게 바로 임나일본부설)
    461년 곤지가 가족과 일족을 이끌고 도착한 가와치 아스카에는, 지금도 곤지왕의 사당인 아스카베 신사가 남아 있음. 물론 한국식 사당인데 오랫동안 방치해두어 초라함. 당연히 감추어야 하는데 바보도 아니고 이걸 일본 사회지도층 입장에서는 3대 신사처럼 개축할 필요가 없음. 오히려 시네마현처럼 독도는 우리땅이라면서 기념식만 규칙적으로 개최. 이처럼 천황가로부터 백제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은 가까이만 봐도 일본이 100년, 200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치밀함! 더더군다나 815년 발간된 신찬성씨록만 봐도 곤지가 아스카베군의 태수였다는 기록으로 가와치 왕국 수장이었다는 걸 여실히 증명. 
    이렇듯 400년대 중후반 열본 열도 전역에는 한반도와 관련한 지역 왕국들이 수없이 병립하는 가운데. (백제계) 곤지의 가와치 왕국이 미와 왕국을 제압, 500년대로 넘어와 미와 왕국을 흡수하여 야마토 왕조를 세웠고. 점차 기나이와 기비, 이즈모 등 기타 왕국들을 합병함. 그런데 단지 일부분만 이와 같냐? 나머지도 숱하게, 거의 모두 이와 비슷. 그 기간은? 무려 1,300년이고 지금은 더더욱 발전. 





    9

    [호무다야마 고분의 피장자]
    지금까지 호무다야마 고분의 피장자는 오진왕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피장자는 오진왕이 아니라 곤지라는 견해에 대한 증거만 늘어가는 셈. 
    더불어 오진왕도 일본서기 편찬자의 의도로 조작됐기 때문에, 200년을 4주갑으로 240년 내리면 440년에 백제에서 출생하여, 461년에 가와치로 건너가 왜왕 '무'가 된 곤지왕자로 보는 학파가 늘어나는 실정. 즉 호무다야마 고분은 곤지가 생전에 조성한 수묘로써 400년대 후반에 조성한 걸로 추정하는데. 그마저 축조시기를 200년 끌어올려 일본서기와 모든 신사들 안내판처럼 멋대로 창작하는 게 일본 학계 평균이 아니라 만년 만장일치. 그리고 곤지를 피장자로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다수.

  • 출토물 매우 유사    : 다이센 고분 = 무령왕릉 (일부 부장품과 출토 유물 등)
  • 왕릉 축조 시기 유사: 다이센 고분 = 무령왕릉
  • 호무다야마 고분 출토품인 하니와(흙으로 만든 인형인 토용)에 혼재된 부품이 5세기 말 이후 제작 (그런데 출토품이 400년대 후반인데 무덤 축조를 200~300년대에? 말이 되나 말이!) 
  • 5세기 말 후루이치 지역 = 백제계 가와치 세력의 중심지

    이로 말미암아 다이센 고분도 닌토쿠 왕릉이 아니라 백제계 왕임이 유력함. 즉 일본에서 규모 1,2위 고분은 모두 백제계 왕릉. (그럼 규모 3위~30위~100위권은 누구이며 그 영향력의 화살표는?) 백제계 세력이 왜로 넘어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가와치 왕국의 영역을 나라분지로까지 확대하고, 미와 왕국을 흡수하여 신 야마토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전방후원분보다(현재까지 발굴된 약 100개와 시기 상 비교되는 고분들보다) 월등하게, 압도적으로 백제계 왕조 초기의 위용과 권위를 내세우게 됨. 딱 그 목적 때문! 그와 같은 사연 때문에 현재 발견된 일본에서 규모 1,2위 고분이 축조된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만들어졌다? 나중 얼굴을 어떻게 들런지... 뻔뻔지수 때문에 오히려 조명발을 사랑함. 사람이란? (절레절레)
    이처럼 일본서기 편찬 의도에 따라 오진왕은 곤지의 허상. 일본서기 내 유랴쿠왕의 기사도 곤지왕이 곧 실행자인 것. 이렇듯 일본서기는 일왕가의 백제와의 관련성, 혈연관계를 절저히 차단하기 위해서. 철두철미 은폐하기 위하여 곤지의 업적을 창작인물 오진왕, 일부 유랴쿠왕의 행적 등으로 여러 명에게 분산시킴. 또 시기도 그걸 5세기 초에서 5세기 후까지 넓은 시간대로 분산시켜놓음. 그게 모두 백제계가 왜에 통합 왕조를 세워 현재 일본 내 규모 1,2위인 다이센 고분, 호무다야마 고분의 피장자조차 지금처럼 헷갈리게 만듬. 그러니까 왜? 야마토 왕조 일왕가(지금 천황가)가 백제에서 온 도래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백제 왕실이 왜 왕실의 기원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물론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지 않고 백강전투에서 대승했다면? 일본서기는 또 달리, 지금과 정반대로 씌여졌을 것. 물론 그래 봤자, 태평양 원주민 정신과 문화에 따라...그 가정은 그만.

    [백제 왕가]
    1920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석은 크나큰 역사적 사실을 증명했다. 
    일단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부여융은 부왕인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었다가, 당이 백제의 옛 당에 설치한 옹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위임했으며. 후에 당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고대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삼국사기 위지동이전, 후한서, 위략 등에 기술된 진왕 및 진국의 왕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 1920년 발견된 묘지석까지 더해짐. 더더군다나 1971년 왕릉 발굴, 2009년 1월 14일 미륵사 석탑 해체, 2010년 9월 10일 37대 제명천황능...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얼굴을 못 들어야 사람. 또는 일본 고대사 같은 경우는 대폭 뒤집어엎지 않으면 야만성만 후대에 물려주게 됨. 때문에 무령왕 이후 후기 백제왕들은 모두 진위가 증명됐는데. 그 혈통이 가와치 왕국, 다음으로 야마토 왜 왕국, 현재 일본의 천황가 고대 족보까지 고스란히 이어졌음. (이와 같은 문화재 발굴에 따라 중국사서 상 모순점들이 다수 해소됨)
    이것만 봐도 역사서 + 비석 +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백제 왕가 성씨의 교체가 있었다, 또는 신라 왕씨는 3번 교체 동안 과연 평화로웠을까? 등등 풀어야 할 숙제도 늘어남. 그렇게 무령왕 왕통이 백제 멸망까지 오롯이 이어짐과 더불어, 가와치 왕국 다음으로 왜 시조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떤 발언들을 사회지도층 전원이 기를 쓰고 감춤. 

    [무령왕의 친동생인 계체왕]
    일본서기는 506년 무열천황이 후사가 없이 죽자, 오진왕의 5세 손에서...호족에서..29대 계체왕이 즉위했다고 기술하는데. 일본서기가 아니라 당대 현실에서는 503년 무령왕이 왜 남제왕에게 보낸 인물화상경이 발견됨으로써, 왜 계체왕이 백제 무령왕의 친동생임이 확인됨. (친동생 말고...몇몇 학설도 다수) 곧 이 시기의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은 같은 백제 왕족임이 확인됨. 이와 같은 사실은 계체왕이 통합된 야마토 왕조의 첫 번째 왕이라는 점을 시사. 바로 이 인물화상경(구리 거울)은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의 스다하치만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지금은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 중. 
    다음으로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으로 불리는 이 거울에 새겨진 명문은, 이 거울을 보낸 인물을 사마로 명기! 사마? 1971년 무령왕 발굴로 무령왕의 시호가 사마임이 증명됨. 이래서 한반도와 달리 일본 고대사 자료가 발굴되면 발굴될수록...그래서 (속된 말로) 다 때려막아버림. 누구도 근접도 못하게 함. 이처럼 당시 
    a) 백제 → 가와치 왕국
    b) 백제 → 왜
    선물을 보내고 호사품을 하사한 게 사실인데. 그걸 일본은 지금도 어떻게 해석한다? 갖다바쳤다! 물론 증명은 못함. 안함. 또 저 화살표가 거꾸로 가지도 않음. 그리고 중국 사서 기록에 따르자면 502년 양무제가 왜왕 무에게 정동장군이라는 작위를 주었다는 기록 이후, 600년 수서 왜국전이 왜국왕의 이름을 아메다리시히코로 표기하기 전까지는 왜왕의 조공이나 작위요청 등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 즉 계체왕부터는 이전 백제계 왜 5왕들과는 왜왕의 성격이 변화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 그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음.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까지 일본 학계는 만장일치로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에 등장하는 '사마'를 남제왕의 신하 중 1명으로 해석했었다. 이게 딱 1971년까지 무수한 증거로 남아있는 사실! 그런데 1971년 무령왕릉 지석이 발견되었네? 일본의 사학자, 학계, 사회지도층은 속이 뒤집어졌음. 일본 사학계 전원이 다 틀렸다는 것은 물론 모두 속 뒤집어져버림. 하물며 사마가 무령왕임이 증명된 지금도 이걸 부인하려는 일본 애국자(?)와 사회지도층과 학자들마저 부지기수라는 점. 또 이 인물화상경을 만들어보낸 주체가 사마 즉 무령왕임이 증명됐으니, 관련하여 언급된 계미년은 당연히 503년임. 곧 곤지왕이 왜 왕위에 있을 때, 왕세자인 남제가 왕위에 오를 걸 훤히 알고 예견했으므로, 그래서 무령왕은 인물화상경을 보낸 것임. 
    물론 남제왕이 (1) 곤지의 아들이냐 아들중 1명이냐  (2) 무령왕의 숙부냐  (3) 무령왕이 왜국으로 보냈다는 사아군으로 변신한 동성왕이냐 라는 설들이 난무하는데. 이건 화상경 명문의 '계미년 팔월일십 대왕년'의 대왕을 누구로 보느냐와 직결된 문제임. 더불어 이런 화상경은 정치권력의 중추인 곳에서 제작되어 각지로 보내는 성격으로, 그 배포는 수장권 승계의 외적 승인을 뜻하는 것. 아울러 750킬로그램의 수백 개 구리거울을 제조할 만한 양으로 보이는 화상경은, 실제로 스다하치만경과 똑같은 모양의 인물화상경이 간헐적으로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는 실정. 즉 이런 거울 배포는 중앙정치세력의 통제수단으로 이용된 정치적 의미를 뜻하는데, 백제 무령왕은 자신의 즉위를 남제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고지하고 그들에 대한 신임을 다지는 뜻이 강한 걸 추론할 수 있다만. 그걸, 백제에서 왜로, 헌상했다? 말이 안됨. 
    즉 이게 암행어사 어패랄지 위세 승인용 증명품인지, 아니면 단순히 갖다 바치는 금은보화인지... 과연 구분 못해서 안 할까?
    따라서 일본 역사하계는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 발견을 매우 증오함. 짜증냄. 싫어함. 외면함. 그러니까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 명문 해석이 영원히 밝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애원함. 이미 포기했거나, 억지만 주장하거나. (다만 유럽사학계는 일본과 전혀 다르다는 점. 그럼 유럽이 야만인이고 일본만 문명권?) 하여튼 그냥 현재 열도 본토에만 남아있으면 모든 게~ 갖다바쳤다. 백제 제품, 백제생산품일지언정, 국보 1호 얼굴을 성형해서라도 진실은 다 감추고. 축조 시기 앞당기고. 신사 10만 안내판들에 기원전 새기고. 대체 뭐지?
    여기서 무령왕릉 지석만 보아도 무령왕의 죽음이 '붕'으로 적혀있는데. 이는 그가 대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왕의 죽음에 '붕'자를 쓸 수 있는 것은 대왕이나 황제인 경우에만 가능하고. 또 보통 왕의 죽음은 '훙'으로 표기했던 게 정설. 곧 몇몇 이유로 말미암아 
    남제왕 = 상왕과 대왕을 모시는 후왕 자격
    무령왕 = 남제왕에게 상왕이자 대왕인 무령왕, 곧 사마! 
    이로써 무령왕과 계체왕은 친형제지간, 둘은 곤지의 아들, 가와치에서 함께 성장기를 지냄. 
    그런데 일본서기 기술 상으로 보면 그 둘이 형제지간이라는 게 맞지 않다? 일본서기 내용들 태반이 그렇고, 또 고사기는 일본서기와 달리 계체왕 사망을 527년으로 명시. 사망 시 연령은 43세라고 기록하기 때문에 계체왕이 즉위할 당시 나이는 23세로써 무령왕의 아우로 보기에 적합. 

    * 고사기와 일본서기 둘만 해도 이렇듯 모순되는 부분이 많음! 그런데 둘 중 1개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앞서 설명은 고사기를 옳게 본 설명이다만, 만약 일본서기를 옳게 본다면 일본 제야사학자인 하야시 준지 학설이 설득력 얻음. 곧 곤지 즉 여곤이 458년 송의 작위를 받을 때 나이가 18세, 여기의 나이가 8세로 추정되어 연령 차이가 10세이므로... 등등. 





    10

    [흠명왕]
    일본서기는 (현존하지 않는 백제삼서 가운데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531년 계체왕, 태자, 왕자가 함게 죽은 것 같다는 애매한 기록만 남기는데. 일본서기 상 계체왕 다음으로 두 아들이 4년씩 재위한 다음 막내아들인 흠명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역시 일본 사학계의 뜨거운 화두. 다만, 객관적 사료를 총합해보면 무령왕이 야마토 왕조로 아들인 사아군(순타태자와 동일)을 파견했는데. 그 사아군(순타태자와 동일)의 아들인 법사군, 그가 바로 흠명왕!  
    흠명왕 = 법사군!
    왜냐? 
    1) 백제계가 미와 왕조의 舊가야 및 신라계 세력을 제압했기 때문 (소가씨와 야마토노아야씨 등 백제계 세력 지지를 바탕으로). 고로 사실상 백제계 왕권을 확립
    2) 백제 본국의 왕이었던 성왕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성왕은 야마토 조정에 불교를 전파하여 야마토 왕권 확립 지원
    3) 성왕의 지원에 힘입어 임나부흥회의를 주도해 강화되어 가는 신라의 가야병합 의도를 저지하고자, 야마토 조정과 긴밀 협조
    4) 가장 큰 조력자는 소가 이나메인데 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지 않음. 허나 삼국사기에는 등장 (475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문주 왕자와 함께 원군을 청하기 위해 신라로 갔던 목만치 장군. 목만치 장군은 한성이 함락된 후 가와치로 건너와, 소가 마치로 신분&이름을 바꾸고, 이나메는 소가 이나메는 그의 후손으로 추정). 소가 이나메는 흠명왕의 즉위와 왕권 확립에 기여하는 한편, 자신의 딸들을 흠명왕의 후비로 들여 외척으로 실권 장악. 또 그의 아들인 우마코 이래 60년간 야마토 오아조의 최고 실권자 집안이 됨
    5) 신찬성씨록 몇몇 구절
    6) 속일본기 몇몇 구절 (그 외 정창원, 개개인 비공개 자료 쑤두룩)
    7) 일본서기는 645년 을사의 변, 672년 임신의 난 등은 자세히 기술하나 <신해의 난>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 점 (이걸로 말미암아 일왕가가 백제왕족임을 감추고 만세일계를 지키기 위한 의도 때문에 지금처럼 오히려 더 화근이 됨. 낯 뜨겁다 아니다? 아니면 구태여 낯짝이라는 저급한 낱말을 사용해야 하나)
    8) 일본서기 내 관련 설명 오류 / 생략 / 은연 중 암시하는 무엇 /사실도 상당수 많음. 그걸 분석하면? 모를 수가 없음
    9)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철검의 명문
    10) 히노구마에 있는 야마토노아야 씨의 사당인 오미아시 신사 경내에 있는 비석 비문
    11) 이나리야마철검의 금상감 명문
    12) 히노구마의 오미아시신사 비석에 적힌 '히노구마 뜰의 센카왕 궁터'라는 비문
    13,14...
    이걸로 추정컨대 여자말 번역기의 대가인 그분들게서 왜 하필 일본서기를 직역하는 우를 범했는지. 범하는지. 장차 변치 않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으나. 그게 원시부족의 운명? 기질인 걸 누굴 탓하랴. 

    [임나일본부]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 말부터 씌이기 시작했는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 '임나일본부'의 '일본'은 당시 실재하지 않았던 명칭으로 후대에 국호가 바뀐 후 가필 수정된 걸로 추정. 실재 일본서기는 수십~수백인지 확인 불가할 정도로 가필 수정되었으며, 그조차 인쇄가 아니라 수많은 필사본에 의해 전해졌고, 또 수도 없이 추가-수정-가필됐다는 점.( 즉 초판본만 712,720년이고 그마저 기반은 백제삼기). 그렇게 하여 지금 남아 있는 게 최종 언제,어떤 판본임. 즉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는 기관 성격이 아니라 이왕이 임나에 파견한 왜의 사신을 의미. 이는 석일본기에서도 자세히 나옴. 
    또 백제-가야-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가야를 신라가 합병하는 상황에서. 본국 백제 성왕이 주도하고 어쩌고, 그 전후에 백제 왕들이 칠지도도 보내주고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도 하사하고. 근데 그마저 모두 거꾸로 갖다바쳤다고 전국민에게 지금도 교육시킴. 
    그리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죽자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왜신이라는 명칭만 등장. 또 그들이 묵는 숙소가 있었을 텐데 그 숙소가 왜관 역할을 한 걸로 추정. 즉 백제 성왕은 541년~552년까지 한시적으로 임나재건을 위한 특별 본부를 운영! 그러다 성왕이 죽은 후 특별 위원회는 사라지고 왜국은 그 이전처럼 다시 필요에 따라 사신 파견 방식으로 돌아감. 당시 정치적 상황 역시나 <백제, 가야(임나), 왜의 연합 체제 VS 고구려, 신라>형세. 그걸 무슨 백제 성왕 주도 10년 남짓이 아니라 야마토 왜 주도 200년 연속 주관? 일왕의 직할영지인 미야케가 규슈에 설치된 것조차 6세기 후반인데, 그보다 150~200년 앞서 무슨...변방 호족세력이 한반도에 관가를 설치. 또 광개토왕비에서 야마토 왜가 몇 백 년 앞서 광개토왕과 동급으로 해석? 다음으로 일본서기 흠명기23년 조만 봐도 훤하다. 
    곧 임나의 뜻은 주인의 나라, 종가, 본가, 종주국, 본국이라는 의미로 (수많은) 일본 문화재와 (쑤두룩한) 신사들 가운데 상징물과 조형물 등이 한반도를 향한 게 과연 몇 개다? 무형의 신은? 유형의 자료는? 이름은? 지명은? 또 신직들이 한반도 관련 신들께 제사 지내는 사례는 몇이다? 대표적으로 천황의 직무 가운데 최고로 중요도 높고 거룩한 일은! 또, 고사기는 712년 집필, 일본서기는 720년 집필인데.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이 단 1도 안 나오는 반면, 뜬금없이 8년 후 제작된 일본서기에 등장. 더불어 일본이라는 국호가 670년 이후에야 최초로 사용됨에도 이 용어가 일본서기 내용에 따르자면 500년대 초반에 일반화됐다? 말이 안됨. 그 외에도
    A) 야마토 왕국 ↔ 백제 
    B) 미와 왕국   ↔ 가야
    C) ........왕국들 ↔ 신라/고구려 등등
    D) A가 BC를 흡수 및 합병: 야마토 왜의 시초 / 시조는 백제계 왕족
    * D를 잘 아니까 그래서 천황이 수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속일본기를 인용하는 것임. 무슨 아무 이유없이? 그러니까 일본 최장기 총리였던,
    아베 총리: "(점잖게 들어가서 부디) 조용히 제사나 지내시라."

   
   
    (여자말 번역기 삐리리리~얍! 삐리리리~ 뿅!)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입도 뻥끗 말거라 천황아!
    천황아 제발 말 좀 쳐들어라. 늬가 누구 때문에...
    천년 하고도 삼백 년을 신분세탁해줬다 우리가
    아직도 갓난아기처럼 굴래? 똥싸배기 짜증나니까 
    심한 말 나오기 전에 경거망동 말거라. 알아들으셨어요?"
    라면서 전언론사와 사회지도층이 77년 체제를 몇 곱절로 발전시키는 것임. 물론 98% 언론사,방송사,고위각교,경제게 100%,모든 사회지도층은 아베 全총리와 마음의 결이 거의 똑같다는 것만 알면 됨. 조금만 더. 이거 무슨 생맥주도 아니고, 뭐지? 살다 살다... (절레절레) 여러분!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현실판 대하드라마를 아시는 분 계시오? 있소, 없소? (손차양) 아무도 손 안드는 건 왜일까. 누가 못들게 시켰나? 이래서 일본 TV를 틀면 자국 정치, 현실판 사극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못하지만. 권장 기본값이 뭔가, 따라서 옆동네 정치판에 대해서는 도형과 도표와 통계와 전망과... 분석하는 거 보면 경마TV부터 애플과 거대 다국적 기업의 극비리 회의 저리 가랄 정도. 기가 막힘! 응? 최고의 생맥주는 분석하는 건 상상도 무엄하므로... 괴상하게 됨. 우리 동네에 대해서는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봉사 벙어리 귀머거리로 평생을 살아야 하니까 그냥...! 그래서 겉으로만 사람을 사귀고, 옅은 친교만 가능하고 그걸로 세계 1등. 전무후무. 이런 실정과 문화와 관습을 다 알지만, 알면 뭐 해? 어쩔 수 없음. 입만 뻥끗 했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스탈린이 보고 알고 듣고 나서 극찬의 극찬을 함. 舊소련 스탈린 시대에 폭압통치로 조용히 없어진 인원만 해도... 2천만? 3천만? 그래도 그 때문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즉 저 세상을 일찍 구경이라도 하지. 열도에서... 손만 까딱해도 댓가는... 말 말자.





    11

    [백제 성왕 vs 왜 흠명왕]
    약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왜에 불교를 전파. 이때, 
    백제계 호족(나니와 소가 등) vs 가라계 호족 (모노노베 등) = 백제계의 압승으로 불교 전파 성공 (즉 백제계는 숭불파, 비백제계는 배불파였음)
    585년 모노노베 등 비백제계의 상소에 따라, 비타쓰왕이 불교를 금지시키나.
    587년에 이르러 이나메의 아들 소가 우마코 세력이 무력으로 비백제계를 제압 = 불교 전파 안정화
    백제 성왕 재위:    523년 ~ 554년
    백제 위덕왕 재위: 554년 ~ 595년
    백제 무령왕 재위: 501년 ~ 523년
    왜 흠명왕 재위:    531년 ~ 571년
    백제에 의한 왜의 직간접 경영이 두드러짐
    무령왕이 장군,박사,고안무를 3년 임기제로 야마토로 파견
    성왕 대에 이르러 고위관리를 7년 임기제로 야마토로 파견
    불교포교, 산업지원, 예술, 정치, 의료, 산업, 군사적 목적
    흠명왕 시기는 특히 백제계 세력의 전국 지배 확대 시기
    흠명왕대에 전국에 30개 이상의 미야케가 설치되는데, 이는 곧 왕이 지배하는 직할지 전국 확대를 뜻함
    미야케 확장으로 말미암아 가야계가 선점했던 지역까지 백제계 세력이 군사력 기반으로 모두 잠식해 나감
    * 야마토 조정의 씨성 제도 설명은 생략

    [아스카 시대]
    일본서기는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의 혈연관계를 철저히 은폐했으나, 815년 신창성씨록에 제30대 비타쓰왕이 백제의 왕족이라고 정확히 적시. 또 백제의 지원으로 아스카데라, 호류지, 시텐노지 등 유명 사찰이 잇따라 건립됨. 





    12

    그는 숙녀들의 무정에 떨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빈곤을 끔직하게 느낀다? 하여 녀석은 간사한 감정을 부끄러워했다. 그럼 뭘 해? 내친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애마의 부재에 창피해할 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니나 다를까 행운을 바랄 테니까. 근데 누구 맘대로? 그러게 말이다. 그러든 어쩌든 그는 (저렴한 표현마따나) 걔가 막 어디 뭇여성들 다 따먹고 다닌다더라, 라는 뜬소문의 주인공일 수는 없다.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허허. 흐흠. 하여튼 목수가 서투르면 대패밥만 많이 난다. 근데 그게 아니라 아예 일하기 싫다? 보아하니 호색한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네. 유감스럽지만 말이야. 끔찍하다. 하긴 굶주린 늑대에게 가혹한 시절이겠지. 왜 아니겠어. 그러니 불면증을 보내고, 조증녀한테 당하거나, 수전증과 함께 할 수 밖에. 하여 녀석은 결국 다분히 당황스러운 용돈에서 절반을 소비해버린 것이다. 어쩌지? 뭘 어째. 아직도, 아니면 벌써. 그렇게 둘 중 하나겠지. 그래서인가? 기쁨과 젊음과 행복을 되찾고 싶다가 아니라. 숙녀를 환생하게끔 만족시키며 쾌감에 뻑 가도록, 뻑 뭐? 7부 리그 근처에도 못 가는 형편에 악이 받쳤군. 그러니까 허접한 몽환극 같은 인생에 아직도 짜증을 낸다? 지쳤을 것이다. 일단 새로움이 없거든. 아, 그래서 애처로운 멜로드라마는 그에게 거북한 것이로군. 그렇듯 전성기는 갔다. 아니 오지도 않았지. 꽃은 졌나? 시간은 장미꽃을 가져온다는데. 더 이상 탐구할 신비가 남지 않은 게 아니라. 아마도 의욕이 바닥. 정말로 사랑할 의지가 없다고? 따라서 NB는 더 이상 아는 동생들한테 환영받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하오나 믿을 수 있어야지. 진짜로 추종 세력들로부터 짝사랑 받기를 포기했다고? 옆집 똥개 말을 믿는 게 차라리 나음. 그래도 본인도 모를 수 없다. 이제 그만 낭만과 열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이상 간절한 구애를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든가 말든가! 하긴 사교계에 호감을 느낄 나이도 아니니 야심찬 성적표의 전세를 모르지는 않을 테나. 하오나 인생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그렇긴 그럴지언정 녀석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뭐 뱃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항구가 반갑다나 뭐래나. 저, 그러니까.. 음, 그게 그러니까. ~라면서 새 옷이나 사자 라면서 허당은 인터넷 쇼핑에 열중했다. 뭐야 이게 끝이야? 그럼 인생의 행복과 사랑의 슬픔은 드라마만 봐도 다 나오는데 없는 비밀을 만들어낼 수야 있나. 예측할 수 없는 불가사의든 상상도 못한 신비든지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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