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도 자랑 좀 하자!

from 칼럼 2018. 12. 5. 22:07

   「나도 말 좀 하자. 야 임마. 나도 자랑 좀 하자고!」
    ~라고 굳이 나서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재주꾼들을 본따서 한말씀 드리자면 이렇다. 분명 좋은 친구지만 허접한 허세꾼, 보고 싶고 만나서 다시 예전처럼 놀고 싶은 어떤 친구를 떠올리면서. 참고로 그 친구는 다른 스파르타 학원에서 착한 친구들까지 막 건드리지 않는 정도로만 문제아였음. 중간은 갔으니까. 학창시절에 비하면 그후 사람이 됨.
    시대라는 게 있으니까 한때 나는 스파르타 학원을 다녔다고 할 수 있다. (저 뿐만이 아니겠죠. 세대는 모르지 않겠죠) 그 중에 악동 선생님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상대방의 인격과 직결되는) 유독 뺨에 집착하는 스승.
    둘째, 뺨 빼고 나머지로 분풀이를 하는 스승.
    스파르타 학원이니까 가능한 얘기고, 지금은 TV 시대극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또 지금대로 방식만 바뀌지 그래프 일정 영역의 까칠함과 냉소 같은 어떤 애매함은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가령 들릴 듯 말 듯 같은 혼잣말처럼. 교육도 엄연히 산업이고, 자본의 논리 때문에 우왕좌왕 정신이 없으니 학생들 스트레스도 생각해줘야 한다. 뭐 아무튼 그건 그거고.
    옛날 옛날에 둘째 유형의 스승님과 함께 했던 어느 수업. 그날따라 반 애들 전체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인생론과 참회록과 명상록으로 봐도 될 만큼 자기 과거를 돌아보고, 내일을 희망하는 의미로 자기소개서를 당장 작성해서 발표하라는! 예를 들어 1명당 10분이든 얼마든 앞에 나가서 발표문을 웅변. 잊고 싶거나 회오와 아픈 기억과 멋진 추억을 모두 포함해서 재미없으면 가차없이 처벌. 즉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지만 통과. 그래서 1번부터 꼴번까지 반 전체가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서 발표를 했다. 당연히 발표문 작성과 웅변 감상은 동시에 진행. 그 가운데 어떤 친구의 발표가 마음에 들었던지 중간에 선생님은 그렇게 칭찬하셨다.
   「발표문을 들으니 무척 감명 깊구나. 좋았어. 어찌 된 게 말이지, 너도 나처럼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구나. 그럼 너도 중간 보스 기질이 다분한 걸까? 넘어가고. 괜찮았어. 잘했어. 좋았다고. 자, 들어가고. 다음.」
    뭐?
   「뭐라고? 놀고 있네~!」
    지금은 이럴 수 있지만 당시에도 그럴 수 있었을까? 웃으며 다행이네 어쩌네 라는 잡답이야 스파르타 학원에서 가능했겠지만 어찌 스승님 명령에 거역을! 왜냐하면 냉철한 처벌이 무엇이란 걸 꼬박꼬박 반복해서 수도 없이 보여주었으니까. 구체적인 처벌을 눈 앞에서 똑똑히, 일상적으로 봐 왔으니까. 심지어 수업 중에 갑자기 선생님께서 한쪽 발을 책상 위에 턱하니 얹으시며 바지를 착착 걷어올리네? 그러면서 종아리에 묵인 무엇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다. 그것은 암밴드처럼 칼집과 칼을 고정한 밴드였다. 칼날의 번쩍임도 물론 보여주시고. (아닌가? 그랬나?) 문화권을 달리 보자면 1883년 하이럼 S. 맥심이 개발한 초소형 무엇쯤 되겠네. 그 권위에, 그 위력에, 그 실행력에, 게다가 스파르타 학원 시절인데? 순진한 17-18살들의 하이틴 드라마에서 그 어떻게! 아무도,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결과는 반 전체 모든 학생은 그렇게 억지로 자기소개서를 급허게, 또 일정 수준 이상으로 멋지게 만들어서 발표했다. 전원 100%. 물론 수준 낮으면, 고통의 처벌과 함께, 다시-였고! 그렇게 전원이 발표하고 (1회였던가 몇 회 됐던가 했던) 수업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런데 딱 1명은 예외. 아니 어떻게 스파르타식 처벌을 누누히 봐 왔거늘, 그걸 감수하고서 모험을? 감히, 누구도, 사소한 데 꿈 같은 젊음의 명운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으니까. 타율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겠지. 맥심에 대한 으름장은 나중 문제고, 구체적인 처벌을 스파르타 수업을 하고 또 하면서 보고 또 계속 봐 왔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 만약 발각된다면 그 정도 범법이라... 스파르타에서 잘나가는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야 뭐야? 앞서 말한 첫째와 둘째 방법이 병행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러면 그 단 1명은 대체 어떻게 그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어떻게-긴 뭐가 어떻게-인가! 쉽게 말해 12번 다음에 13번이 발표를 해야 하는데, 13번은 중간에 족제비처럼 슥 옮겨가서 14번에게 부탁하는 거지. 지가 무슨 미꾸라지야 능청꾸러기 오소리야?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 차례가 되면 너가 그냥 나가줄래?」
   「응? 응!」
    긴가민가라는 표정 다음에 아하 하면서 궁짝이 맞았다.
    그렇게! 협박도 아니고 명령도 아니고, 간절함도 아니고 애틋함도 아닌, 그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14번은 자연스럽게 OK했다. 첫째 웃음, 둘째 친분, 셋째 뒤탈을 책임지겠다는 듯한 13번의 자신감과 베짱과 우정과 소탈한 성격, 무난한 평판, 그 어떤 분위기 때문. 결과적으로 내 베팅은 성공했다. 12번 다음에 14번 발표. 옆에서 누가 들었나는 모르겠는데, 나와 14번 빼고는 아무도 모른 채, 대성공! 그렇게 나는 애초에 첫 발표문이 시작될 때부터 자기소개서를 1자도 작성하지 않았고, 발표도 하지 않았으며, 처벌도 피해갔다. 처음부터 그런 글을 쓰기도, 발표하기도 싫었으니까. 심지어 이미 그런 발표회 한참 전에 그 선생님께 살짝 당한 적이 있거든. 로트레아몽이 쓴 말도로르의 노래던가, 수업 시간에 그거 읽다가 따끔하게 살짝만 혼났던 전력이 이미 내게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그렇다면 하나 받았으니까 하나 돌려줘야지~! 베팅은 뭐 어쩌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뭐 어쩌다가 말이다. 촌닭&뱁새 친구만 만나면 애들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다. 너 뭐 해 봤어? 물론 우정은 소중하고 으쌰으쌰는 재밌지만서두, 아아 그 말을 또 들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랑 좀 했다. 별 자랑도 뭣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건 그거고. 그렇지만 삶은 그와 같은 베팅-감보다 차라리 그걸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던가, 큰기술이 확실하던가, 부단한 타격주의를 견지하던가. 그렇지만 인생은 모르는 것. 잔기술과 베팅감이 언제 어떻게, 또는 절묘한 순간에 딱 1번 극적으로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점. 사랑은 모르듯이 인생도 장기전인 것이다. 참고로 다음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칼럼을 마친다.

A.시간 분류

  • 필수: 전문 / 전공 / 직업 / 일하기 / 공부하기
  • 일상: 놀기 / 사교 생활 / 산책 / 휴식 / 시간 때우기
  • 선택: 잔머머 / 잔지식 / 잔소리 / 잔기술 / 잡기 / 취미...
  • 시간 아끼기: 구간 당기기 / 줄거리 / 스포일러 / 채널 변경 / TV 끄기
  • 시간 낭비: 기타 등등

B.변화 분류

  • 하기: 일하기 / 공부하기 / 놀기 / 취미 / 일상 / 일기 쓰기
  • 바꾸기: 취미 / 애인 / 직업 / 장비
  • 옮기기: 이사 / 이직 / 전학 / 장비 팔기
  • 끊기: 취미 없음 / 애인 없음 / 무직 / 휴직 / 친구 없음 / 도박 끊기 / 주색 끊기
  • 관망: 전망 / 관찰 / 대기 / 꿈 없음 / 야망 찾기 / 때를 기다리기

C.에너지 분류

  • 최선을 다하자
  • 대충 살자
  • 막살자

A X B X C = 인생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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