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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란 무엇인가? 정답은 이렇다. 보수란 무엇이 보수인지 지금은 잘 모를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어른들께 여쭤보면 된다. 옛날에 보수는 어땠냐고. 어른은 말씀하신다.
옛날 세상이 어땠냐고?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뺨 맞은 기억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요즘... 아 또 이런 얘기하면 젊은이들 싫어하는데... 그러실 수도 있다. 또 그땐 무슨 통행료를 내듯이 학부모는 선생님께 봉투를 거의 전원 상납했다. 그러면 당연히 열외된 학생만 불이익 당한다. 지금 선생님이란 직업은 노동자이자 교육자로써 가치 있고 힘겹고 보람찬 일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만약 부자 동네에 있는 학교라면, 선생님이 꿈인 젊음이 거기 들어갈려고 줄을 섰다. 가르치는 일은 적당히 하고, 일찍 퇴근하고, 배보다 더 큰 배꼽으로 수입도 두둑하며, 학부모들도 쟁쟁하니까 덕 보는 일도 많고, 1년에 또 몇 달은 쉬거든. 너무 지나치게 과욕을 부려봐야 전근 밖에 더 가나. 어차피 피자 배달을 하는데 이왕이면 소란스러운 동네보다 청결하고 즐거운 동네로 배달하고 싶을 테니, 뭐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다. 불과 오래되지도 않은 일인데 부자 동네 교장이 학부모 간담회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부모 너네들 똑똑히 잘 들으시라는 듯이.
위로 어지간히 상소하라고. 그래 봐야 꿈쩍도 안하니까, 괜히 헛일 하지 마시라고!
그분 교육자 맞나? 혹시... 패1은 설마 그럴려고 교육자가 되셨나, 패2는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아무튼 지금 어른들께 왜 그렇게 맞았냐고 여쭤봐도 그냥 그랬다고 하신다. 어려도 부모님한테 말할 수 없다는 정도로 속은 있으니까. 왜 뺨을 맞는지 알면서도 모른다. 다른 관청도 그렇고 병원도 그렇고 다 비슷비슷했다. 유독 무슨계 무슨계는 더 느렸다. 중간은 갔던 직업인은 그나마 나은데, 그분들도 불합리는 외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이 있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 혼자 뭐 어떻게 해봐야 하나도 바뀌지 않으니까. 그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총대를 매고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또는 권력과 공룡에게 맞서다, 행방이랄지 아픈 결과라도 알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예 종적도 없이 실종된 사람도 많았다. 정책이 잘못됐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라고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행. 옛날에는 그랬다.
인구당 의사수. 학급당 학생수. 언론의 자유. 교사 직업 만족도. 교내 총인원 / 교내 총면적. 도시내 녹지 공간 비율. 사립 기관에 대해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근거. 소방-우편등등 말단에 대한 처우 인구당 머머.
0.5세기 전의 좀 더 나은 세상을 보면 형편은 그나마 낫다. 사회는 이처럼 힘들게 돌아가는데 그런데 백인은 달에, 우리는 어쩌고 경제는 어쩐데 그런데 백인은 달에! 백인 작가는 이게 말이나 됩니까 뭡니까 어쩌고저쩌고. 지금도 해외토픽에 나온다. 우르르르 어디로 가서 애를 낳자, 아이에게 새로운 국적을 선물하자 등등. 당시에는 사회지도층의 권력은 가족-인맥-친맥에 따라 세습됐다. 지금은 과학수사, 당시는 (정의로운 수사관도 있었지만) 비과학수사. 언제 어디서든 일단 돈봉투면 OK. 현금이 가득 든 007 가방이면 뭐든지 만사형통. 중급 관료 진급에 얼마, 법복이라고 왜 안통했겠나. 즉 관습헌법과 성문헌법의 큰 간격. 성문헌법조차 사회지도층에 유리한 정도로만 통용. 민-관-군 그 어떤 조직을 봐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일들 투성이. 지금의 몰상식이 당시는 상식. 어디에서 1800년 전후로 혁명을 일으켜 정치 체제를 괜히 바꾼 게 아니다. 그렇듯이 그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현실적으로 형편이 늦은 실정이 적지 않다. 그처럼 내 선조는 야만적이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너와 나는 부모의 (일부) 부도덕한 돈벌이로, 너와 나는 (일부) 비윤리적인 풍습 하에, 너와 나는 (일부)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장하여 지금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모르게 너와 나도 죄악의 녹을 먹고, 그 수혜를 입었다니!
그게 바로 옛날에는 정상이었고 현실이자 보수였다. 그게 바로 당시에는 보수였다고! 그렇게 체제는 겉으로 민주주의였는데 1당이 독재하고 1인이 독재하고 주인만 바뀌거나, TV 다음 타자로 인터넷이 도입되기 전부터 1당이 이름과 로고만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사회적 명사들도 정계에 입문하면 병풍 서려고 정치를 하시겠나. 신부들러리가 꿈이 아닌 이상 제1당에만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장점도 챙겼겠지만, 언론과 인권 또 정치-사회-경제는 비상식적이었는데 아직도 생각은 당시 기준으로 사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분포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음과 같은 논박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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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보수냐, 시대적 현실 아니냐! 어? 진보만 이상이냐? 이 기반 다 누가 만들었냐! 그 정도 먹고 살게 만들어줬으면 되지 않냐, 뭔 말들이 그리 많냐. 먹고 살게 됐는데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냐 뭐냐. 먹고 살게 되기 위해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걸로 치자. 어차피 전국민의 세금을 뽑아서 기득권이 좀 더 해 먹고, 조금 진보하게 만들며, 그 중에 힘 없고 비리비리하며 허접한 놈 가운데 골라서 악역 만들고 그림까지 만들었으면 되지 않냐. 그럼 나보고 소가 되라고? 그건...... 넘어가자! 어차피 잠룡은 많고 권좌는 천운을 품어야 하는 법. 기왕에 하늘이 내리시는 왕권, 아무리 잘해도 비판은 많고 많이 못하면 성토는 훨씬 많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사극에서 주인공이고 실패하면 인기 없는 역사의 1페이지가 되는 것이다. 대하드라마에 나오듯이 궁상맞은 평민과 미천한 하층민은 제발 잘 따르고, 잘 지키며, 시키면 시킨대로나 하자. 뭔 말들이 그리 많냐. 그러니까 배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니냐. 법을 만들면 뭐하냐, 지켜야 장땡 아닌가. 그런데, 법이 잘못 됐다고? 그럼 보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뭐, 국회에서 통과를 안 시킨다고? 그럼 국회의원들이 어떤 잘못된 투표를 했는지 낫낫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하면 될 거 아닌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정치인의 입법안 투표 기록만 주르르륵~! 분류도 법안별, 정치인별, 정당별, 시간별로. 1가지 색깔로 짙고 옅은 차별화 그래프를 곁들여 반듯하게. 정치인이 발의는 무얼 했고 기안은 뭘 했는지, 출석률은 어떻고 매스컴에 어떻게 노출됐는지. 그게 잘 되어 있냐, 못 되어 있냐. 잘사는 것과 못사는 것, 그 차이 아닌가.
국회 안에서 정치인이 어떤 결정을 했나, 딱 그것만 모아서 볼 수 있는 시스템.
막 어떤 말과 어디 가고 무슨 행동을 하고 언론에서 얼마나 띄워주고, 그런 거 다 빼고!
소수를 대변하거나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거나. 우왕좌왕 무책임한 위인인지, 예측 가능한 양반인지. 쉽게 판명할 수 있도록. 단지 딱 클릭 몇 번으로! 얼마나 좋아. 매스컴에 노출되는 사진과 발언, 기념회와 출판회와 모임과 종교계 찾고 어디 찾고. 노이즈마케팅 그런 거 말고. 중요한 판단 근거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정치를 잘했는지, 앞으로 기대를 접어야 할지 어떨지. 정치인이 어떤 직책을 겸한다면 여기저기 행차하실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바깥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하면 정작 꼼꼼히 판단해야 할 입법안을 충분히 검토하기 힘들게 된다. 겉으로 보여지는 활동에만 전념하면 사무실에 들어와서 중요한 서류를 읽기에는 이미 지쳐서 힘에 붙이는 거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을 내가 어떻게 하나, 에너지가 떨어졌는데. 그렇다면 비서들한테 시키면 그만이다. 비서가 달랑 1명도 아니다. 판단 근거 자료를 수집할 협력관계는 세고 셌다. 보아하니 왜 정치도 절반은 오락산업이고, 정치인도 절반은 연예인이라고 할까? 왜냐하면 조명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명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조명을 비추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로 나뉜다. 자기는 조명 받는 사람과 결혼한다 하지 않는다, 사귄다 사귀지 않는다로. 뉴스 앵커가 뉴스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몸 풀고 수다 떠나? 아니다. 절대 아니다. 괜히 막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눈 인사 하고 어쩌고, 뭔가를 쓰는 척한다. 그런데, 정말로? 아니다. 그거 다 뻥이다. 연기다. 카메라발 받는 일이라는 건 그처럼 절반은 연기란 말이다. 국정감사도 그렇다. 진부한 관행을 하루아침에 개선하면 그게 혁명이고 혁신이지 무슨 개선인가. 그게 쉽나? 겉으로는 뭔가 하는 척 바쁜 척! 그래 봐야 한 번에 뚝딱 안된다. 그럴 수가 없다. 질문 받는 사람이나 답변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이기주의자이자 사익 추구자다. 자선 사업가나 구도자가 아니다. 이따~만한 두꺼운 책 옆에 놓고 카메라 비추면 뭘 막 엄청 필기한다. (무슨주의는 아니다만 여자라면 저 헤어와 화장 하루 2시간짜리다. 매일) 뭘 필기할까? 하긴 하겠지. 그러나, 그거 다 뻥이다. 별로 필요없는 일이다. 물론 꼼꼼히 검토하며 뭘 공부하고 많이도 챙겨서 10가지, 100가지를 내놓으려하는 자세, 좋다. 왜 나쁘겠나. 그러나 그건 아마추어다. 카메라가 비춘다고 더욱 외양에 신경 쓰고 뭘 필기하며 서류 찾고 어쩌고. 그거 다 뻥이다. 아무리 질타를 하고 어쩌고 그래 봐라. 나중 보자. 얼마나 바뀔까? 대체, 얼마나, 바뀔까! 중요한 건 실행이다. 실행을 이끌어낼 수 없는 공론은, 물론 그게 모여 다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발언자 각자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토론처럼, 한계가 분명한 공론은 말 그대로 탁상공론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자리도 너무 많은 걸 할려고 하는 것보다는 많으면 3개, 될 수 있으면 1~2개만 추려서 그것을 강조하는 게 좋다. 뭐라뭐라 이러쿵저러쿵, 조명 비추고 카메라 각도 바꾸고 1번 카메라 불 꺼지고 2번 카메라 불 켜진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어떻게 책임지시겠어요? 예? 자리라도 내려놓겠습니까 어쩌시겠습니까? 그만 두실 수 있어요?」
「네, 책임지고 그만두겠습니다. 온전히 제 잘못이고,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 따로 반복하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효과음~!
설마 이걸 위해서? 프로답지 않은 일이다. 프로라고 얼마나 다를까. 축구 얘기를 왜 많이 했냐면 이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화 나서 막 빽빽 소리지르고, 방방 뛰면서 꽥꽥 고함을 질러봐야, 씨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기 중에 아무리 닦달하고 들들 볶으면 뭘 하나? 그래 봐야 감독 힘만 빠지거든. 그래서 감독 생활이 오래된 중고등부 축구감독은 2개도 많고 1개만 말한다. 그게 뭐냐? 바로, 숫자! 1 대 1을 시원하게 뚫는 일은 1부 리그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으니까. 완전 어렵다. 스피드나 여건이나 옆에서 패스 주라는 신호랄지 그런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나 1 대 1을 멋지게 뚫지 프로 대 프로가? TV에 나오는 명문팀들이야 그런 일이 흔하다지만 하위 리그에서는 그런 장면을 구경하는 건 차라리 포기하는 게 좋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는 게 이롭다. 여간 쉽지 않은 일이거든. 그처럼 준비도 많이 했으니까 말을 많이 하며 조명 받고 카메라에 신경 쓰다 보면, 나중 변화된 결과는 그것만큼이 아닌 경우가 흔하게 된다. 1개나 2개만 바꾸도록, 서로 머리를 맞대고서 의견을 나눠야지 그게 아니라. 꽥꽥 꽥꽥꽤, 꽥꽥 꽥꽥꽤, 꽥꽥 꽥꽥꽤! 간혹 찬찬히 관찰해보면 뭔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논점을 빗나갔으나 다시 돌아와서. 정치에 대해서도 상남자처럼 남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대외 활동에 치중한다면 그렇게 된다. 바깥의 영향을 받게 되고, 알력도 느끼며, 생각은 딴 데로 외출할 여지가 커지지 않겠나. 회의를 하고 또 하고, 7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하면서 활동의 근거를 사진과 행적과 인터뷰로만 남길 게 아니라 그러면 된다.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뭘 많이 한 것처럼 보일 게 아니라 그러면 된다. 어떻게?
하루에 단 3시간이라도 우선 순위가 앞서는 입법안 몇 개, 중요한 통계와 그래프와 새로운 논문을 참고해서 발의안 검토, 마지막 결정은 내가!
한편 정치인의 비서도 그렇다. 법으로 제한된 친인척은 받지 않더라도 이권이 얽혀서 합법적으로 아는 비서를 고용할 수도 있다. 탈법이 아닌 한도 내에서 일부를 또는 그 이상 비서진과 보좌관을 꾸리는 것 역시 자유이자 권한이다. 그렇지만 작은 것도 오점은 오점이다. 왜 식사 전에 손을 비누로 박박 깨끗이 씻으면 비교적 적게 먹고 좋은 식품을 섭취하게 될까? 이유야 어찌 됐든 실험으로 증명된 일이다. 왜 축구를 할 거면서 경기전 선수들한테 어떤 감독은 양복에 커프스단추와 넥타이까지 매고 입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넥타이도 자크 넥타이 말고 직접 맨 걸로. 왜냐하면 마음가짐과 더불어 미세한 포부, 경기에 임하는 결연한 자세, 선수라는 엄격한 기분이 덩달아 동요되기 때문이다. 청탁도 썩 다른 문제는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만약 정치에 대해 어떤 권력자라면 공평한 경쟁 제도에 따라 보좌관을 뽑을 것이다. 영화 캐스팅처럼 경쟁하듯이 아는 사람이 정당한 절차에 따라 합격한 건 괜찮더라도. 그처럼 착오는 1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0이 갑자기 10으로 널뛰는 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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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과 기자님들과 친한 걸로도 모자라 모임 1-2-3... 협회 방문 1-2-3... 정당 회의 1-2-3... 밀실 1-2-3...
- 전문가들 자문 구하고, 인터넷에서 내가 직접 7개국어로 자료 조사하며, 결정의 빈틈을 연구하기.
과연, 하나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는 대충 해야 한다면! 그럼 대관절 무엇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은 대충 해도 되는 걸까? A에 최선을 다하면 B는 대충 하기조차 버겨운 것 아닐까? 그렇다고 B에 최선을 다하면 다음 선거에서 미끄러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내가 B를 열심히 했다는 걸 정말 알아줄까? 진짜로?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지만 B가 진짜 내 소명이라는 심지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굳이 기자님들과 언론사까지 친할 필요가 없다. 영세 언론사와 삼류 기자님들한테까지 선물을 꼬박꼬박 돌리지 않아도 된다. 나머지 시간은 놀면서 취미로 캠핑 다녀도 된다. 골프장에서 살아도 된다. 일만 잘하면 나이트클럽에 출근해도 된다. 안 그런가? 얼마나 좋은가! 거물들과 친분을 유지하느라 시간 뺐기고, 큰손들 만나서 굽신거리느라 에너지 낭비하면 진짜 할 일은 언제 하나. 오늘은 무슨 협회 사람들과, 내일은 로비스트들과. 국회 출석 잘하고 매스컴만 휘어잡느라 노심초사 바쁘신 정치인만 앞서가면, 그 대가는 과연 누가 감당해야 할지! 그걸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모순은 있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시점까지는 일정 부분 정치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러니까 간혹 지역 의원에 출마하시는 제법 젊은 정치인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명함을 받고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머머, 머머머, 머머머머, 머머머머머 위원, 머머머머머머 이사...... 하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고?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럼 정치는 언제 해? 어떻게, 말로? 무엇으로, 몸으로? 이권이 이렇게나 많이 얽혔으면 거기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정치 제도가 앞선 곳에서는 기관장─사기업 사장─대기업 이사─알짜 비상장 회사 대주주─차명 재산이 어쩌고저쩌고─어디 고문─무슨 머머등을 겸한 선거권자에게는 피선거권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설혹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나중 150년, 200년 이렇게 땅──땅──땅 한다. 미숙과 성숙의 차이는 없을 수 없을 테니까. 판단 근거가 풍족했을 때 의사결정은 빠른 게 좋지, 결정을 먼저 하고 성과를 짜내며 밑그림을 나중 그리다가는 유령 도로가 생기는 거다. 시골 도로는 원래 한적하기 마련인데, 그게 아니라 딱 봐도 크고 어쩌고 대번에 직감할 수 있는 그런 도로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국회의원들이 꽤나 게으르고 막 술도 마시고, 더 많이 쉬며, 훨씬 많이 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막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만 일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도껏 잘한다는 가정 하에서 대충 살며 결정을 잘하고, 법률안 통과 투표를 잘하며, 까다로운 사안 가운데 뭘 먼저 추려서 입법 시킬지나 잘 판단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냔 말이다. 이미 혜택은 많이 누리고 있으니 정작 해야 할 일만 잘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고 쉬고 즐기면 그만. 단지 정치인이 무슨 예언가도 주술사도 아닌 만큼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고, 반성할 기회도 주며, 칭찬도 아끼지 않기.
뿐만 아니라 이런 일도 있다. 내가 우리 동네 쓰레기를 하루 맘 먹고 깔끔하게 청소를 해 봤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시나? 글쎄 딱 1일 지나니까 원위치 되더라. 청소한 의미가 없다. 보람도 없다. 기분만 더 나빠진다. 어? 의미가 없어. 그게 뭐냐? 사람들이 못사는 건, 못사는 이유가, 다 있다! 다 못사는 이유가 있단 말이다. 뉴스나 보고 신문만 읽으면 그만이지, 정치권이 하는 일은 믿고 맡기면 그만 아니냐. 정치의 전문가는 정치인이고, 정치의 비전문가는 시민이다. 아마추어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잘사는 경우도 있지 않냐. 안 그런가?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나. 규율을 안 지키고 형식에 얽매이기 싫어서 못사는 예가, 무조건 따르고 지켜서 잘사는 예보다 많지 않냐.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만, 흐흠, 넘어가고. 물론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고, 리더인 정치 전문가들만 잘살 수도 있긴 하지만. 일단은 길게 봐야 한다. 으쌰으샤해서 축구 감독 부임시키고, 진득하니 기다려주고 따르며 응원해줘서 대기만성을 바라는 게 미덕 아닐까? 한 번 지고 두 번 지니까 마저 세 번째까지 기다려주지도 못한 채, 당장 경질시키자? 뭐야 그게! 그렇듯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세계사도 어쩔 수 없었나? 하긴 조상이 안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왜 지금 내 마음대로 정해? 어찌 됐든,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어?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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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은 정당하다. 다만 반론의 논리는 맞지만 논리만 맞았다는 점. 즉 보수와 암담한 현실이 구분되는 게 맞지만, 만일 구분되지 않는다면! 교양이 상식을 외면한다면! 그래서 시민은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1세기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랬다. 유색인이 마신 커피잔은 깨트려야 한다는 것. 의식주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인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온전히 사실 그대로 통계만 따지자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은 점점,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난민 뉴스는 이제 단골이다. 크고 작은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풍요로운 문명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서 중범죄 및 어떤 비율은 차츰 낮아진다. 그런데 반대로 중남미는 어떤 그래프선이 상승세다. 지구 상에서 큰 단위로 봤을 때 유일하게. 전쟁 없는 일상의 슬픔이,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 중인 비참함보다 통계-상 양적으로 훨씬 많다니! 근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부침이 많았다는 증거다. 타임머신은 지구인데, 보수냐 중도냐 진보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면 국민은 자동적으로 체제로부터 존중 받을까? 그럴 리는 없다. 노예가 되기 싫다면 눈을 부릅 뜨는 수 밖에 없단 말이다.
결론은 미래 세대가 보기에, 아아 그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구나, 라는 관습을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정도 만큼은 적어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99퍼센트는 보수인데, 내가 진정한 보수입니다 여러분 이 중차대한 시국에 좌파 어쩌고저쩌고, 그러지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