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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칼럼을 따로 써서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모순 가득찬 존재인지 두손 두발 다 들도록 실증하겠음. ~라는 호언장담을 지켰나 어겼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바보가 되어버린 듯 하니까. 전 신동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 언제는 뭐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하니 어쩌니. 이성적으로 검증하지 않으면 안되느니 어쩌느니. 문명인과 야만인은 종이 한 장 두께 차이일 수도 있으니까 분명코 의미있는 일이라면서 난리드니. 그 난리법석이더니.
그래서 나는 원주민 정신에 대해서 또 다시 생각해봤다. 아직 뭔가 부족한 듯 하니까. 심지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후발주자권의 정신과 영혼과 마음을 분석하기>로 웬만한 석학들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학구적 가치가 뛰어나다 라는 뜻이 아니라─솔직하다 라는 명목으로써 자신감이 생겨버렸다. 괜한 우쭐함도 아니고 무명이니까 잃을 것도 없겠다 딴지냐 뭐냐도 아니다. 헝그리 정신도 아니고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 무의식을 따져서 그분들께서 할 말을 못하거나 안 하거나. 그런 면이 없잖아 있는 것만 같았다. 따라서 최근 선발주자─중견주자─후발주자라는 3부분의 정신과 영혼과 마음의 차이점에 대해 통속적으로 말하기를 그래, 꼿혀버렸다. 할 말을 하자면 이와 같다. 일단 왜 선발&중견주자와 후발주자의 사고체계가 다른가는 예전에 밝혀냈고. 그 다음으로 후발주자는 왜 원주민 방식을 고집하는가, 왜 일관성을 그토록 쉽사리 포기해버리는가. 까지 주제로 심도 깊게 다뤘다. 그럼 지금 대체 무엇을 쓸려고 하는가? 그건 무엇인고 하니.
문단 2와 3에서는 후발주자에 속하는 필자가 선발&중견주자측 사고체계를 흉내내서 후발주자를 비판하겠고. 문단 6과 7에서는 약 1.5세기 전에 태어난 선발주자측 작가의 시선을 참고해서 <옛날에 선발주자가 중견주자를 어떻게 바라봤나>에 쓱~하니 묻어가서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한다. 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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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필요하고 내부비판이 좋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러나 자각이란 게 어디 쉽나. 원리라는 대어가 제발 나 좀 잡아주라고 호박처럼 제 발로 굴러오냔 말이다. 원리 연구라는 핑계로 누군가 뻔히 기분 나빠할 사실과 어디서 빤히 마음 아파할 이치를 밝히는 일. 인간이 상심하더라도 누군가 총대를 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은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개미와 거미 같은 개체. 그리고 네발 달린 짐승. 그 다음에 인간. 각자 말이 안 통하기로는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아닌가. 그래서 대체로 훌륭하지만 부분적으로 못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할 수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게? 하기 싫어함과 못함을 양쪽에 꿰차고 있지나 않기를 바라는 게 현황. 지식노동으로 수박 겉 핥고, 예술로써 남의 다리 긁고. 인종차별이란 강박관념에 걸리고 선심성에 발목 잡히고. 희망 따지고 행복 거론하고. 오락산업은 얄밉고 물개박수를 받아도 모자를 판에 또 신부들러리! 허구헌 날 병풍 전문. 내 뻣뻣한 자존심은 물론 타인의 고고한 자존심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고. 만약 내가 우월해도 겸손해야 하고, 상대방 열등감을 건드려서도 안되고.
고로 원리를 논하는 데 한계점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인문교양서를 읽어보면 나온다. 중세 라틴어는 어떤 언어의 바탕이 되었고, 켈트인과 게르만족의 이동 경로는 어떻고, 로마제국이 후퇴할 때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슬라브 민족은 어떻고 제국의 역사니 뭐니. 그걸 학문적이자 건조하게 이성적으로 다 함께 끄덕끄덕하며 이견이 없다. 다만, 선발&중견주자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쪽에서만 말이다. 말하자면 <다양성은 OK, 그러나 아닌 건 아님>. 한마디로 일관성 있다. 학파가 나뉘더라도 학문과 과학과 수학에서 말도 안되는 이론은 상대를 하지 않는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끼워주지도 않는다. 학계에서 뭔 외계인과 UFO도 아니고 51구역을 주제로써 다루지 않는다고. 현지에서는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은 고개를 돌린다. 어른들 일에 고양이의 야옹야옹과 강아지의 멍멍멍을 왜 끼워주겠나. 축구장에 고양이가 난입하고 관현악 연주회장에 강아지가 깜짝 출연을 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프로 레슬링 경기 무대에 아마추어 동호인이 웬말. 그쪽에서는 그게 된다. 순수과학잡지와 학계와 지성의 전당에서 중론에 대해 너와 나의 차이가 근소하다고. 네?
그렇지만 아시아 원주민 가운데 섬쪽 인문교양학자들은 그걸 인정하지도 않고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한자의 기원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게 이동했고 교류했고. 알파벳 인문교양학자들의 연구 가운데 일부를─내게 불리한 이론과 싫은 진실을─자기들은 인정하기도 싫고 듣고 싶지도 않다고. 선발&중견주자측 학계에서 의견을 나누거나 학회에서 토론이랄지 대담을 할 때 후발주자측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을려고 매우, 매우, 매우 조심한다고 한다. 100퍼센트 진실. 100퍼센트 사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나? 어째서? 왜 선발&중견주자측에서 주로 그래야 하냐고. 끼워주고 상장 남발하며 다비드가 물 반 고기 반인 분야에서까지 배려하며 인심쓰는데. 그런데 왜 다양한 원주민만 그 처우를 받아야 하냐고. 자존심마저 거꾸로 된 거 아닌가 모르겠다. 통 모르겠다. 남자들 우정에서 <내가 최고> 사고방식이 어찌나 강력한지는 이해한다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된 게 자존심마저 기형적으로, 늬 꺼는 내 꺼 내 꺼도 내꺼? 뭔 시츄에이션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왜? 도대체 왜? 왜 사실을 사실이라고 하면 안되냐고. 왜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하지 않냐고! 왜냐고? 왜? 감당하든 못하든 뜸들이지 말고 그 신기한 까닭을 밝히자면 이와 같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의 정체를 굳이 복습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칼럼: 애정론. 연애운. 짝사랑복.>을 참고하시길. 핀란드 원주민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지 않고, 캐나다 원주민이라고 해도 썩 혐오스럽지도 않은데. 그런데 왜 유독 어딘가에서는 원주민이니 뭐니 라는 비유와 예시와 원리를 일컬으면 기분 나빠하시는지를. 남미 마초들 자존심도 자존감 화장품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렇지만 자존심 하면 후발주자 원주민이라니까 그러네요, 네? 내 친구들 허세처럼 그쪽 역시 자존심으로 보자면 최고급이라구요. 완전히 최상급이라구요. 원주민 전통의 역사가 대륙은 5000년, 반도도 5000년, 섬은 10000년. 인문교양서를 읽어보면 그래프로 설명으로 나와 있다. 박물관과 교과서에 나와 있다고. 물론 (일부에서) 문화제 설명문에 몇 년부터 몇 년까지는 빈칸. 그걸로 보면 꼭 인류 문명의 기원이 B.C. 4000~B.C. 3000년경 인더스니 메소포타미아니 거기가 아니라 후발주자의 어느 섬인 것만 같다. 보아하니 허세지수-허영심지수처럼 자존심이 마냥 뾰족한 게 좋다니. 그런데 선발&중견주자는 그렇지 않은데 이걸 어쩌나. 좌우간 그게 건강한지 불합리한지, 불미스러운지 멋진지는 각자 판단할 몫. '자존심이 비정상적인지 원주민 정서가 비일관적인지', '잘사는 부자 나라인가'. 적어도, 전자와 후자는 상관이 없다. 전혀 없다. 최소한 후발주자권에서는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특정 원주민의 관습이 세계관과 교양미와 합당한 상식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 봐야 좋을 리도 없고. 왜 유럽전쟁이 1에서 끝나지 않고 세계대전 2로 이어졌는지 모름보다 아는 게 낫다.
그런데 왜 지식노동은 이처럼 자연스러운 이치를 밝혀내지 못했을까? 아니면 밝혀냈을까? 그랬을까? 못했다. 못했다고. 필자가 보기에는 못했다. 왜? 왜냐, 왜냐하면 흑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인종차별이라는 인식이 뗄 수 없도록 붙어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뽄드처럼 철썩~하니 붙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은 내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제패하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도조차 못했거나, 아니면 실패했거나, 아니면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최고의 호박 터미널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할지언정 성선설에 근거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나는 살고 싶고 너를 죽이고 싶다고 드물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낱말 자제는 낱말일 뿐인데 사정이 그렇다 보니, 건드려서 좋을 주제라는 게 한정된다. 도전해도 시간낭비만 하는 특정 영역이라는 금기사항이 생기게 된다. 사생활은 보호 받고 싶고 미담은 환영하지만, 흑역사는 뚜껑이 열리게 된다. 드물게 내 사생활을 방송하기도 하고, 경미한 관음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사석에서도 만나는 사람에 따라 대처법이 다르니 내 정체성만 해도 몇 개로 나뉘게 된다. 귀한 시간을 상당량 할당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돈 떨어지고 인기 떨어져나가고. 더군다나 전통이 어떻고, 더더군다나 사고체계는 어떠하며, 심지어 겉으로는 진보적이게 보여지고 싶어하는데 속으로는 엄청 보수적이자 이기적이고. 그래서 선발&중견주자와 후발주자는 그와 같은 미세한 차이라는 게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한자도 우리가 발명, 젖가락도 우리가 발명. 고대 라틴어가 고스란히 프랑스어에 녹아들었고, 프랑스어는 (영국식) 영어에 영향을 남겼고.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도 일부분 영어에 물들었고.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어쩌고저쩌고. 그게 저네들 사이에서는 논의가 되고, 다툼의 소지가 별로 없다. 거의 없다. 얼굴 붉히며 목소리 키우고 탈날 일이 없다. 5세기 중엽에 건국한 켄트 왕국이 6~7세기에 잉글랜드의 패권을 잡고. 8세기 이후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교황의 간섭을 계속 자청했다. ~라는 데 역사적 사실에 이견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대륙쪽으로부터) 인구의 유입은 0이요 문화적 영향도 0! ~라고 소위 말하는 지식인 즉 인문교양학자들 기분 나쁘지 않도록. 그렇도록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서구 인문교양학자들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분들께 민감한 사항이니까, 그분들은 극력히 반대하니까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경험했고 경험하며 경험할 것이다. 잘 알고 있다. 그분들은 원주민 학자님들께서 얼마만큼 발끈하는지, 자기측 주장과 다름을 어느 정도로 싫어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다 아시듯. 그분들은 그걸 결코 모르지 않는단 말이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권위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구의 유입은 0이요 문화적 영향도 0>이라는 자존심을 좀 더랄까 많이랄까 뭐 좀 그런 게 있다. 일단 옛날 얘기하면 기분 나빠한다. 애플 같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 브랜드명. 그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 브랜드명. 그 성씨가 대륙에서 왔다는 건 정설도 아니고 사실인데. 그런데 그런 말 꺼내면 얼굴 표정이 싹 바뀐다. 정색까지는 아니겠지만 포커페이스, 그거 결코 쉬운 거 아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원리와 원론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정직하며 합리적이어야 할 학자들. 그분들이 나서서 싫어한다. 과거를 바꾼다. 역사를 부정한다. 적어도 학자들은 많이들 그렇다. 이게 원주민 문화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원주민 문화란 말인가. 무슨 조지프 제이콥스작 아기 돼지 삼형제 동화야 뭐야. 꿀꿀꿀 아기 돼지 삼형제, 그 동화 작가! 전자와 후자의 차이냐고 뭐냐고. 이름을 풀이하자면 국가의 왕이 아니라 하늘의 왕이라는 섬나라 신분의 최고봉에 앉은 천왕. 그분은 정치인처럼 성향에 따라 자발적으로 인정한다. (물론 개인 성향에 따라 정치인 마냥 정반대일 수도 있음. 내가 왜 전쟁범죄를 사죄해야 하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일기장에 기록함). 그러니까 어떻게 감추지 않고서 인정하냐? 고대에 대륙쪽의 왕이 넘어와서 우리 왕가에 피가 섞였다고. 흔쾌히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드물게는 현지 묘소에 방문해 예도 갖춘다. 그러나 점잖은 신분은 그렇다 쳐도, 정계에서 그걸 보고 가만 있겠나. 극우 세력은 또 어떻고. 난징 기념관으로 향한 전-총리의 행보를 뭐라 논평했는지 현지인은 더 잘 알고 있고.
(참고로 부언 설명. 제일 친해야 할 이웃 나라가 왜 그렇게 불화스러운지를. 요컨대 대충 근대 올림픽이 다시 시작할 즈음에 이랬음. A나라 국왕제, B나라 국왕제. 역사적으로 보면 2000년 통계로 평균 몇 년에 1번꼴로 규칙적 침략. 오직 A ──> B 그렇게 일방적으로만. 그걸 모두 통틀어 가까운 과거에 A에서 B 침략이 마지막. 당시 A는 B의 왕궁과 왕족과 궁녀들과 민초들을 졸병을 시켜 무참히 오래도록 살해. 개화 같은 장점도 있었는데, 끝물이 내전이라는 파국을 불러옴. 참으로 여러번 꼬임. 꼬인 건 현재도 마찬가지. A의 총리는 전범의 손자요 A의 왕은 전범의 아들. 불과 몇 년 전에 B의 1인자는 독재자의 딸. 물론 1세대가 과오와 연관된다고 2세대도 밉게 보면 안되지만, 그 근방 문화권은 유독 1당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음. B의 치욕적인 통한의 역사이지만 어차피 먼 과거로 흘러가는 만큼 지식에 대한 생각은 각자 개인차 존재. 한편, B의 정치인 일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쫄랑쫄랑 A나라 국왕 생일 잔치에 (일찍도) 참석해서 꼬리 살살 흔들면서 딸랑딸랑 굽실굽실 반짝반짝. 허나 그건 드문 경우. 평균을 보자면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존중, 표면적으로 무관심. 그런데 문제는, 정치권의 소음은 오락산업이 좋아하는 최고의 표적이자 최적의 먹잇감. 따라서 양쪽에서 이따금 시끌시끌이요, 한쪽에서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전범 숭배. 그럼 B─C─D─E쪽... 좋아하고 박수치며 기뻐함. 특히, B는 오락산업의 소음이 반가울 리 없음. B에게 A의 국왕이 예뻐 보이겠나? 제3자의 시선으로 생각을 해 보시라. 상식적으로만 봐도 전혀 어렵지 않은 문제. 그게 어떻게 좋아 보이겠나. 심지어, 못생겼어. 뭐야, 눈을 왜 안 떠? 뜬 건가! 쳐다보기도 싫은 게 솔직한 심정. 그런데 오락산업의 역할 때문에 싫지만 들리고 반갑지 않지만 보여짐. 더 솔직히? 더? 정말? B의 평균은 A의 국왕을 겉으로는 존중. 그러나 실제는 다름. 어떻게? B에게 A의 국왕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깡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음. 거렁뱅이 거지 아니 곤충과도 다를 게 하나 없음. 아니면 비정상. A의 정치인이 뭐라 하건 사실은 사실. A와 B 모두 각자 하고 싶은 말이 때로는 막말일 수도 있고, 간혹 하고 싶은 말을 각자 하는 것일 뿐이며, 상대방측 말을 막을 수도 없음. 전범이 어디에 합사된 시점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일개 가난한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이승에 온 건 아니겠지만, 전범이 숭상 받는 이상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음. A든 B든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없고. 그 다음으로, 그러면 과연 A나라 평균의 속마음 안의 속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됨. 말 하나 마나! 그게 다 비일관성 때문. 유리하면 전면에 나서고, 불리하면 꼭꼭 숨고. 마음에 들면 고스란히 흡수요, 싫은 건 배척. 부언 설명 끝. 아니 하나만 더!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의 군홧발에 알제리궁이고 뭐고 천지가 골병들 당시. 뒷짐지고 방관하던 이탈리아는 1인자의 호쾌한 결정에 따라 프랑스의 뒤통수를 침. 프랑스 입장에서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국왕 없음. 이탈리아가 아직도 국왕제라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도 들고서 생일 파티에 갈까? 현재 독일의 국왕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전-유럽이 쌍수를 들고, 두손 두발 다 들고 자존심도 양심도 없는 독일 국왕을 찬양할까? 정반대라는 건 인간이면 모를 수 없는 일.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살아 생전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건 살아 생전 얘기. 사람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야만인임을 증명하는 일을 자초하는데? 같은 편을 못살게 하며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야만인이 사후 절 받으면 하늘에서도 왕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런 일은 0이라고 봐도 됨. 중간만 가면 되고. 아니면 나중 최말단 거지가 되어 유령들께 봉사하게 될지도 모르고. 살아생전 신급이었으니 누릴 만큼 누렸으니, 차후 값을 치러야 이치에 맞음. 그러니, 어? 올라와서도 왕일 꺼라고 착각하지들 말어, 이 냥반들아. 그걸 누가 보장하겠소. 광대가? 아님 레인메이커가! 똥개 훈련시키다, 라는 속담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뺑이-치다. 그걸 어찌 모를 수 있냐고. 권력에 취하고 영화로움 때문에 벌거벗은 임금님 되시건 어쩌건. 나중 후회하지 마시길. 성선설이 설득력 있다만 성악설도 납득 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람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변하면, ... 그건 통과. 오히려 가중 처벌이 된다면 모를까.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에 뭐가 어쩌고 어째? 어차피 뭘 하든 다 가짜인 거 모를까 봐? 걘 찍혔음. 딱 찍혔음. 일찍도 찍혔음. 국가간 이웃들 속사정이라는 게 이렇듯 비슷비슷. 개구멍에서 나오는 건 개요, 쥐구멍에서 나오는 건 쥐.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러다 사람이 경우에 따라 곤충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할 것. 웃기는! 썩은 미소 이뻐 보이지 않음. 내 자식은 소중하면서 남의 자식 귀한 줄을 모르다니. 밑에서 못하면 위에서 한다니까 그러네요. 그렇다고 차후 쌍방 의견의 차이가 개선될 여지가 있냐, 하면 0이다. 그 가능성은 영원히 없다. 답은 그냥 이대로 가는 거다. 티끌 만한 틈도 없이 완전한 0. 원주민 의식은 여전히 초야권 시대에 머물러 있고, 원주민 정신은 아직도 노예제도 당시와 똑같다. 정치인은 대체불가능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옆나라를 이사보내고 싶은 게 진심. 여자가 천생 여자이듯, 원주민은 만년 원주민인 법.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원주민 입장으로써는 그게 당연. 오히려 국왕이 인간 선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염원. 신이었다가 인간 선언 했다가 다시 하늘의 왕이라니. 완벽히 태평양 원주민-식이다.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야지 언제까지 과거에 붙잡혀 있냐, 우리의 국왕을 사랑해주고 영어처럼 우리 언어도 널리 쓰이고 싶다! ~라는 본심이 없으면 역적이자 매국노 소리를 듣는 현실. 딴 데는 왕이면 왕, 여왕이면 여왕. 끝! 얼마나 깔끔해. 그런데 이건 뭐야. 쌩쑈야 코메디야? 신에서 인간 선언 했다가~ 존엄성은 여전히 신이고. 옆 나라 왕족은 해충처럼 말살에, 우리나라 지존을 입에 올려? 말조심하라느니 뭐라느니.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정말 몰라서 묻건대, 쌩쑈야 코메디야? 그런데 진지해. 엄청 심각해. (절레절레). 독한 것들. 지독한 종족. 피도 눈물도 없는 원주민. 과거 유럽에서 유대인 자본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필요했고. 미움을 샀던 영역은 주로 유대인 가운데 자본가 부류. 아돌프 히틀러야 크나큰 오판을 실행에 옮겨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렀지만. 이건 뭐 그냥 전원이 꽉 막힌 거도 아니고 말이야. 아주 그냥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동 좀비요 일동 로보트. 하여간에 혹성탈출 참 대단하다 대단해. 세계가 자기들을 위해서 희생하며 기도해주는 줄도 모르고. YOU WIN, WE LOSE! 하필 가면이 철면피네 그려? 두고 보자. 어디에서? 하늘에서! 필경 새와 여우는 말이 안 통한다. 토끼굴에서 쥐가 나올 수도 있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부언 설명 진자로 끝)
무슨 서구 문화가 풍선껌도 아니고. 단물만 쏙~ 쪽쪽 빨아먹어도 되는 뭐 그런 건가. 그런가? 정말 그런가? 불리한 역사 영화는 수입 금지요, 참혹스런 가까운 역사는 무조건 고개 돌리기. 국제기구에서뿐만 아니라 공식적-비공식적으로 불리한 건 덮고 감추고 왜곡하기. (일부 민간단체랄지 시민모임에서 또 개인적으로 노력은 하는데, 행정은 반대됨) 그리고 나라의 기원은 1만년. 세계 최고. 공영 방송에서도 불리한 내용은 방송 금지. 조지 오웰식으로 세뇌되니까 학교 선생님조차 민감한 해외 뉴스가 논제로 나오면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지. 별수 있나. 일부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사과하라 사과하라! 그러나 속으로는 아메리카 백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러시아 백곰 뷰티푸리 뷰티푸리! 정치인은 또 아메리카를 못 믿고. 이로 봤을 때, 왜 로렌스가 태평양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봤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지 않을까? 이건 의심할 여지 없도록 완전한, 원주민의, 밝은 미래로 가는 서구문화식 희망 열차에 무임승차하는 모습이다. 아니 그런가? 보자, 그러니까 진짜로 그렇다고? 정말로? 가만있어 봐,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아니라 원주민 참을성이로구만. 수컷들 우정처럼 정치는 남자가 하니, 남자에게 유리한 문화이니만큼 어쩔 수 없음.
여기서 폐막하면 몹시 몹시 서운함. 뿐이던가! 섬나라 원주민만 그런 게 아니라 그 근방 원주민들의 공통점이 있고, 약간씩 다르다. 밝은 피부색이 민족에 유입되는 건 썩 싫어하지 않는 반면 어두운 피부색의 유입은 그와 정반대라고. 아니라면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여기까지 또 지금까지 틀린 얘기랄지 거짓 사실이 단 1개라도 있으면 반론을 제발 해 주시길. 제발 제발 제발. 오오, 제발. 부디, 제발. 제발 좀 소원이니까요.
타인을 험담하는 게 마냥 기쁘고 즐겁고 신나서 이럴까? 정말로 그럴까? 믿거나 말거나, 진짜로 그렇다. 마냥 기쁘고 즐겁고 신나서 이런다.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데 어쩌란 말인가. 학예회는 어린이 잔친데 거기 갓난아기가 등장하면 귀엽기라도 하지. 걔네들끼리 10살이 5살한테 세대 차이난다고 하면 이쁘기라도 하지. 잠시 착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부의 사적인 지각도 아니고. 전체적인 평균이 그런데 어찌 바른 소리, 옳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나. 비겁한 사람이야 하기 싫다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아니라고. 서구문화. 즉 유럽문화와 현대문명의 근간은 딱 2가지. 단 2가지.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크리스트교. 딱 2개. 미술-음악-문학-건축-조각등 그거 빼면 논할 게 별로 없다. 볼 거도 없다. 그런데 원주민은 그 서구문화에서 마음에 드는 건 용광로처럼 흡수요,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배척? 실제로 원주민 섬나라에서 크리스마스는 휴일이 아님. 어디까지나 그건 남의 것. 전범을 길이길이 추모할지언정 그건 싫음. 다양성은 좋지만 그건 너네들 꺼. 일관성에 위배되는 구시대적 관점이다. 유럽처럼 연합이 국가보다 위에 있는 형식, 원주민은 싫어한다. 그건 중견&후발주자 방식이 아니다. 이해도 안되고 용납도 안됨. 내가 최고니까. 서로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딴소리하기도 바쁘니까. (주로 남자가) 비꼬고 조롱하기 좋아하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스코트랜드-아일랜드-북아일랜드 인내력이 아니라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상식이 동일하고 교양으로 말이 통한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돌려서 말할지언정 아닌 건 아닌 거다. 왜? 선발주자권이니까. 그런데 지구 반대편은!
모순을 감내하는 게 정상이자 필수고 진리다. 앞에서는 마음을 녹여주도록 친절과 감사와 수줍고 착하고. 그러나 속마음은 묻지 마세요-고. 겉은 완벽한 문명인인데 속은 완전한 원주민. 절반의 가식이 최선일 수 있고, 반투명한 위선이 차선이 되기도 한다지만. 동질감과 유대감등 인간 본연의 본성은 동서고금 100퍼센트 일치하지만. 그러나 사고방식은 작동 원리부터 시작하여 다른 게 한두 가지가 아님. 본심─사심─진심─흑심─동심─무의식. 아, 중간에 의심이 빠졌다. 100퍼센트 안전빵이 아니면 절대 절대 절대 베팅하지 않음. 치밀함의 극치. 좀비처럼 전체적이고 로보트처럼 완벽하고. 에스프레소와 피자의 고향인 이탈리아에 스타벅스가 발 붙이기 어려웠던 건 말 그대로 고향이니까. 그런데 반대로 열도는 좋고 마음에 들고 우수한 건 전부 흡수한 다음에, 내수품 사용 세계 최고. 역으로 내수 브랜드는 세계 장악. 여러 브랜드를 보자면, 원류 브랜드들 주식 분포를 따져도 실제로 욕망은 왕성한 만큼 성과가 뛰어났다. STEINWAY AND SONS, JOHNNIE WALKER AND SONS 같은 산업군의 가라성 같은 명망을 끌어내리진 못했으나 JIM BEAM 꿀꺽에 세계 제패의 꿈이자 야욕은 모양만 바뀐 추세. 그게 뭘까,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제국들의 공통점이다. 선동이 웬말. 주동자 구경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차라리 방관자요 비겁쟁이에 조연이자 신부들러리를 택함. 순도의 오차를 티끌 만큼도 허용치 않는 원주민 정신. 수많은 원주민 정신들 가운데 굉장이 특이해서 인문교양학자에게 참으로 좋은 연구대상이다. (필자 친구인 촌닭&뱁새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재밌는 것처럼, 대하드라마식 사고방식도 결코 만만치 않음. 다른 말로 꽤 괜찮은 먹잇감. 심리학자들 심하게 떨리도록). 러시아 인형과 진짜 판박이다. 완전 놀랍도록. 속마음 속에 또 속마음. 또 그 안에 속마음. 아무도 믿지 마! 영화 대사가 인생 표어구만 그래. 숨길 수도 없다. 몰라서 손해볼 수는 있으나, 알고서 불이익당하지 않는 게 더 좋다. 알 건 알고 나서, 그 다음에 사랑과 희망과 행복을 따지기. 친하기. 교류하기. 어울리기. 사귀기. 애용하기.
칸트니 쇼펜하우어니 형이상학과 크리스트교는 너네들 꺼. 우리는 국왕을 신격화. 그게 좋음. 좋든 싫든 우리 방식이고 인습이자 지켜짐. 간섭은 정중히, 엄숙히, 결연히 사양하겠음. 죽든 살든 사람 취급 받든 못받든. 야만인은 그런 거 일절 관심 없음. 오직 2가지 관점만 존재. 우리가 최고, 아니면 나머지는 다 적이자 신부들러리. 21세기에서 22세기로 나아가는 지금 아프리카의 정치 시간표가 어떻나. 교과서에 나오는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가 현실이자 평균. 그러니 열도도 원주민인 건 맞는데 '나는 최고', '우리가 최고'니까 옛날 얘기 싫어한다. 딸랑딸랑 반짝반짝이 아니면 거절한다. 서구 문화에서 우리 마음에 들고 좋은 건 들여오고, 싫은 건 노노노노노! 나중 하늘나라에서는 어떨라나 몰라도 우리는 존엄하신 국왕 숭배요 전범자 찬양이 제일 좋음. 하늘이 무섭지도 않고 신이니 뭐니 그런(그딴? 그따위?) 얘기 알고 싶지도 않고. 내 인생 내가 살고 내가 최곤데 신이 뭔 상관? YES~ (딱), OK~ (쉭──쉭──쉭)! 마음껏─실컷─원 없이,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시도록. 단, 천국이 됐든 지옥이 됐든 나중 딴말하기 없기! 기대해도 좋음.
원리가 그러하니, 때문에 순서는 뒤바뀌지 않는 게 100번 나을 것이다. 완벽한 원주민 페이션트. 그러니까 캐나다 원주민이 바둑 세계 1-2-3위권인 동시에 한자 문화 1-2-3위권에서 4~7년을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중견주자 가운데서도, 고전이라는 기반이 없지만 선발주자식 체계는 완벽하게 복사된 중견주자. 그 가운데 그래프 유형이 좀 더 유럽을 닮은 캐나다 원주민이 태평양을 건너 진짜 원주민 문화를 뼈저리게 체험하면 그 솔직함은 차라리 감추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대체 뭘 느꼈을지 헤아리고도 남는다. 어쨌든 원주민은 전통이 좋고 자존심도 지켜야 하니 그건 당사자 문제고. 문단을 띄어서 다음에는 1~1.5세기 전에 선발주자권에서 중견주자권을 어떻게 보았나, 라는 시선에 근거하여 중견주자와 후발주자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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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써 그렇게나 원리는 이해가 안될까? 그럼 예시를 들어보면 된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유럽 각국의 왕실들을 접령하고, 각국 왕가들 3족을 멸했는가 아닌가는 몰라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반대였다. 왜? 원주민식이니까. 입장을 바꿔서 가정을 해 보자.
<당시 대륙 즉 중국의 준-마지막 황제는 평소처럼 항상 품위로운 생활. 반면 아랫것들은 세계 지도 반틈을 피바다 만듬. 당연히 섬나라 즉 일본 원주민들이 그렇게나 떠받들고 신으로 숭상하는 일왕은 소-닭-돼지-말-곤충보다 못하도록 능지처참당함. 것도 일개 쫄병을 앞세워서. 그래서 현재 대륙은 국왕제요 섬나라는 왕이 없음. 중국은 왕도 있고 대통령도 있고 총리도 있고. (한 국가에 왕이 2명일 순 없듯 대통령과 총리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게 보통인데, 둘 다 있는 정치제도권도 있음). 그처럼 중국은 국왕─대통령─총리 그렇게 3세트가 있고. 일본은 꼴랑 총리 1개뿐. 그랬다면 섬나라 원주민들이 현재 대륙의 왕을, 즉 일본 원주민이 중국 원주민의 국왕을
- 존중하겠나 존경하겠나?
- 좋아할까 싫어할까?
- 보고 싶을까 보기 싫을까?
- 근황을 궁금해할까 아닐까?
- 안부를 알고 싶을까 아닐까?
대륙의 왕이 섬나라한테 미안하다 라는 말을 한 적은 0번인데? 영원히 0번인데? 꿈도 못 꾸는데? 오히려 말조심하라면서 대사를 불러서 꾸짓는데? 인접 지역의 늬 땅도 내 땅, 내 땅은 원래 내 땅. ~라고 하는데? 망언은 생활이고 막말은 일관성 쩌는데? 사과를 하고 받고 그거 누가 좋아한다고! 해도 다 가짜 죄다 가짜. 소란스러움과 시끄러움 일으켜서 국내용으로 정치에 이용할 생각이나 하고. 야비한 대륙 비열한 족속이네 뭐네, ~라면서 섬나라 원주민이 생각하지 않으면 비정상인데? 뿐만 아니라 대륙의 대통령 및 총리는 현직 신분으로써 굽히면 역적이란 비난을 받는다고요! 따라서 중국의 역대 전직 1인자만 형식상 반 세기에 1번꼴로 방문만 하는 실정인데? 방문해도 갖은 모략에 막말에 난동은 끊이질 않는데? 그러면서 대륙이 희망찬 내일로 함께 나아갑시다, 과거는 과거일 뿐. ~라고 한다면! 그럼 섬것들 퍽이나 좋아서 춤추시겠네>
사과! 미안함에 대해 유독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 기억난다. 어릴 때. 초등1... 아마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의인화 동물 캐릭터를 그렸다. 솔직히 보통 이상은 되도록 좀 잘 그렸다. 그럼 골목대장 놀이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가만 있겠나. 3인자를 대동한 채 2인자가 내 그림을 좀 보자며 들고서 보더니, 쪼르륵~ 어디로 간다. 필자도 같이 갔다. 그렇게 1인자는 필자의 그림을 보게 된다. 1인자-2인자-3인자 그리고 본인. 1인자가 갑자기 그 그림을 살짝 고의로 찢는다. 필자가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것도 (비)웃으면서. 그러면서 1인자왈,
「앗. 미안하다.」
끝. 미안하다 라는 사과. 빤히 내려다 보면서 미안하다! 사과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림 혼자 찢어져버렸어. 미안. 미안. 야, 가자!」 라는 말을 했나 안 했나. 어쨌든 그거다. 그거라고. 바로 그거라고. 진짜로 미안하면 미안한 짓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의도치 않게랄지 불의의 뭐랄지. 그런 일 빼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타고난 천성을 어찌 바꾸나. 원숭이로 태어나면 원숭이로 살지 사자처럼 행동하고 호랑이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엇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을지언정 원주민 정신을 잊을 수는 없다. 향수병이란 게 다른 게 아니다. 사과?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딴 걸 뭐하러 하나. 단, 사적으로랄지 때와 장소에 맞춰 필요한 건 필요하고. 멜버른─파리─EU 본부가 있는 브뤼셀─밴쿠버─밀라노─뉴욕에서 길을 걷다 흔하디 흔하게 듣게 되는 말, 사과! 미안해요 미안해요. 어머 실례해요 실례해요. 그거 다 배려이자 예의고 습관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듣는 "미안해요"와 같은 말이 뭘까? 설마 모르시진 않겠지요. 귀하께서 잘 아시다시피 우리들이 툭하면 애용하는 말 "낭자 아름답소"다. 곧 진짜는 그것만큼 드물다.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숙녀들이 일상적으로 듣는 말. 동전의 앞면은 예절이자 찬미고, 뒷면은 미끼요 입질이다. 그 가운데 사랑은 매우 드물고, 있어도 어차피 변하기 마련. 인생에서 톱3 사랑. 무인도에 데려가고픈 이상형 1─2─3. 재산목록 1─2─3. 나머지는 다 빈말. 몽땅 빈말. 그래서 습관적으로 "미안해요"를 입에 달고 사는 문화권에 살다가, "미안해요"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지역에 당도하면 때로는 까무러칠 수도 있다. 무례하다느니 무심하다느니 그러면서. 어차피 <미안해요>를 남발해서 인습을 이루느냐, 아니면 <미안해요> 자체를 애초에 줄여서 관례를 만드느냐. 그 차이다. 뒷골목 술집에서 친해질 뻔 말 뻔 그 단계 여급에게 "야, 한 번 주라!". 숙녀들한테 친절함과 자상함과 이름 불러주기를 남발해서 성과가 톡톡하느냐. 아님 오직 하나 뿐인 사랑에 전념하느냐. 그 차이다. 어쨌든 그건 무엇이 <옳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님. 애시당초 미안함을 발생시키지 않던가. 아님 빈말을 입에 달고 살며 타인을 못 믿던가. 기준선이 바닥이라서 입만 열면 미안해요, 손만 까딱 눈빛만 멈칫 해도 인종차별! 다정함과 인기와 짝사랑 받기와 반짝반짝을 좋아하면서, 또 쏘리 쏘리 그러니까 그게 멋져보이니까 무턱대고 그게 좋은 줄 알어. 표면적으로야 남한테 폐 끼치는 게 싫다고 하나, 인간의 본성은 또 다른데? 쏘리 쏘리 쏘리 또 쏘리. 툭하면 쏘리. 그게 다 공짜가 아니란 건 왜 모를까. 매정함─몰인정─무정─비겁─외면. 두 마리 토끼처럼 동전의 양면 같다는 걸. 사석에서 친구랑 어떤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언제부터 그렇게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냐고.
반면 미안함을 표현하는 기준선이 높으면 정말 많이 미안한 경우에만 미안해요, 차별은 차별이고 차이는 차이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그야 어떻든, 소녀감성은 쏘리─쏘리─쏘리, 레이디 퍼스트! ~에 끌리기 마련. 미안함을 표현하는 기준선이 낮은 것보다 월등히 높은 문화를 선호한다. 그게 뭐냐, 웨스턴! 그런데 가만 있자. 가까운 데 곧 바로 옆에 <쏘리─쏘리─쏘리>가 있고, 선심성이란 명분도 아름다운 데다, 피해를 끼치기 싫어하네? 세부적 차이는 있으나 생김새로 봤을 때 세계에서 최고로 비슷하네? 순진한 소녀감성은 싫어할 수가 없다. 에스코트이자 숙녀를 위하고 쳄발로와 플룻 선율로 포장된 근사함과 또 다른 원주민 문화. 그러다 나중 깨닫기도 하고 뭘 모르기도 한다. 말이 통하는 남자가 있네 없네 그래도, 거울을 보니 나도 원주민이거든. 그래서 좋게 말하면 탐정이자 정보원, 중간은 깍쟁이, 안 좋게 말하면 전형적인 간신배에 해당하는 동쪽 남자와 육지의 여자는 대체로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족성이 <여성적─원주민적─구시대적─내향적─남성중심적>인 동쪽 남자와, <남성적─또 다른 원주민적─구시대적─서구권 정도는 아니지만 근방에서는 외향적─보수적>인 서쪽 여자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 선발&중견주자권 문화를 동경하는 건 똑같지만 연애 취향이 정반대니까. 지구촌 어디든 이미 때가 늦었지만 넘어졌다 일어난 연애론자도 있고, 그걸 아름다운 사랑이자 행복한 가정으로 일군 사례도 많음. 어쨌든 영역을 좁혔을 때 문화적으로, 남자가 여자 가방을 미쳤다고 들어줘? 자식에게 기대면 나중 같이 여행도 못가고 연락도 줄고 점점 멀어질 텐데. 흰머리 히끗히끗 할머니도 자기 가방 자기가 들지 절대로 자식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서구식 개인주의와 원주민 개인주의는, <CD-샤넬-에르메스 대 비슷한 상품>처럼 비슷한 듯 한데 잘 보면 완전 딴판. 역으로 서쪽 남자와 동쪽 여자는 나름 궁합이 괜찮고. 8 대 2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는 따로 하는 걸로 하고. 옆으로 좀 샜다만 돌아와서. 아무튼 소녀감성은 <미안함>의 겉과 속, <미안함을 표현하는 기준선>에 따른 원리를 아주 잘 안다고 하기는 좀처럼 힘들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기준이 높냐, 낮냐는 이쯤 하고.
"미안 미안 미안"의 다양성으로 보건대 세상은 썩 아름답지도, 사랑은 그다지 진실하지도 않다는 점. 그거 아니면 다 뻥이다. 죄다 거짓말일 뿐이라구. 개구쟁이 초딩도 아니고 언제까지 소녀감성? 밑도 끝도 없이 착한 척 귀 막고 생각하지 않기? 바른 말 옳은 얘기하는 일부 시민단체나 개인은 극소수일 뿐. 소녀감성 오졌네 오졌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이라는 여성잡지1? 과연 나중 어떻게 여성잡지2로 변하는가 보시라. 찬찬히 관찰하시라. 괴물은 다른 게 아니다. 골목대장 꼬마가 선보이는 미안하다 퍼포먼스, 그게 진짜 미안함이다. 우리 다혈질 오빠는 아니다 아니다 할 말 한다? 진짜 앞에서는 암말도 못한다. 벙어리가 따로 없고 비겁자 중의 최고다. 그런데 또 원자폭탄 투하는 사과해라 사과해라! 매스컴에서는 사과할 마음 1도 없다, 극히 유감이다, 말조심해라! 툭하면 망발이요 걸핏하면 막말. 그게 진짜다 그게 진짜라고. 아니면 몽땅 전부 뻥이다. 전부 다 개-구라다. 마키아벨리즘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피렌체는 어쩌고저쩌고. 마키아벨리즘이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를 뜻함. (참고로, 윤리학에서는 수단을 목적으로 오해하는 일을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꼽음). 그러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확산을 막아야 한다, 감춰야 한다, 너네들 뭐하고 있냐 이건 장난이 아니다, 불미스러움은 요만큼도 없었다. 물론 이견은 정당하고 정말로 입에 '미안해요'를 달고 사는 건 좋지 왜 아니겠나. 그럼 뭘해. 다 뻥인데. 다 가짜인데. 변치 않건 수시로 변덕이 극심하건, 속마음을 열어보고 본심을 파헤쳐보니 무릇 사람이 양의 탈을 쓴 금수만도 못할 수 있기가
이렇게 쉽다니. 이리도 흔하다니. 이다지도 만연할 수 있다니.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게 위선이다. 포장은 아주 그냥 기가
막히게, 사람 마음 녹여주도록 부드럽게, 관능적으로 유혹하여 목적만 성취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아마존의 뜻은 무엇인지. (눈
살짝 찡그린 채, 한 손으로 다른 손 새끼손가락을 집으며) 요만~한 일에는 남 피해 끼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면서. 응?
(소녀감성끼리 이거 동의하지 않는 여자는 만나기 힘듦. 귀가 아주 그냥 펄럭펄럭). 그러면서 골목대장 어린이가 꼬마 어린이 앞에서
그림 찢는 장면을 시연하자마자, 앗~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게 진짜다. 아니면 가짜다. 뻥이다. 다 뻥이다. 몽땅 뻥이라고.
속으로는 극심하게 이기적이면서 미안한 건 무슨. 인간이라는 존재는 티끌만한 이익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존재다. 교양인이냐
유인원이냐.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 원리로 따지건대 반틈은 동물일 뿐이고 반틈은 사람이다. 그나마 반틈이
사람이면 다행이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듯. 야만인이 문명인을 흉내낸다고 생각도 그렇게 되는 건 절대─절대─절대로 아니다.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형식도 중허고 겉꾸밈도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진짜는 마음이다. 말로 진짜인 것처럼 속이는 화술이 아니라, 앞에서만 딸랑딸랑 반짝반짝이 아니라. 알맹이는 마음이라고. 여러개의 마음과 시시각각 간신배처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묵직한 마음. 순수한 순애보 같은 것. 천년의 사랑. 알록달록 탐스럽든 벌레 먹었든, 향기롭고 울긋불긋 못생긴 풀꽃이든. 모두 다 따먹고 죄다 꺾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게 뭐냐, 미안해요 미안해요-다. 아시겠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2범주 3범주로 먼 친교랄지 어중간한 지인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가까운 사이요 친한 친구. 티격태격 다투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해도 되는 사이. 그런 남자들 우정에서 미안하다는 말? 말발 센 녀석이 농담으로 간혹 구사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정말 많이 미안해서 미안하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주제처럼 친구 사이에 그런 말은 낯간지러워서 못한다니까 그러네요. 정말로 그러거든요. 그럼 땡큐는 뭐라고? (딱)! 일단 넘어가고. 그러니까 남자 대 남자는 그렇다 치고. 남자 대 여자! 날 좋아한다고? 변심은 수순에 절망은 운명이요 뒷패가 환멸일 수도 있지만, 내가 더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 사랑해요? 속는 셈 치고 믿어본다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법. 그런데 미안해요? 썩도 아니고 퍽도 아닌 더없이 믿을 수 없는 그 말. (절레절레)! 내가 하면 당위성에 동물적 논리요 경제 관념이고, 남이 하면 알량한 자존심에 질투심과 복수심? 일관성 없음. 비윤리적. 금수의 야성. 곤충의 논리. 분통 터지는 분이시여!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상심의 나날 부디 쾌차하시기를. 조금 늦더라도 악함은 응분의 값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니. 다시 돌아와서,
그처럼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유럽의 왕족들을 말살했다면, 지금 현재 전-유럽인들이 독일의 왕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진정 의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유럽은 문명인이니까 상식이 통한다고. 지구 반대편처럼 원주민식이요 야만인이 아니니까.
그럼 지금 현재 이와 같은 칼럼을 인지한다면 섬나라 국민들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까? 솔직히 어떻게 느낄까? 인간이라면 깨달아야 정상인데, 바로 이때 정확히 갈린다. 바로 문명인과 원주민으로! 절대로 반성이니 뭐니 이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라면 거짓말. 속으로 칼을 간다. 아주 그냥 칼을 간다고! 어떻게? 세계제패 재도전에 대해서! 원주민은 어쩔 수 없는 원주민이니까.
「너네 따위 미개한 것들이, 어? 너네들이 우리의 신 같은 하늘의 왕을 모독했겠다? 어디 두고 보자!」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100% 비정상이라니까요. 네? 우리가 무슨 코흘리개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모르겠나. 모든 포장을 풀어 무의식을 분석하자면 그게 정상. 지구본 반틈을 쑥대밭 만든 건 괜찮고, 거룩한 우리 지존이 모욕 받는 건 괜찮지 않고. 아니라면 거짓말! 1세기전─현재─1000세기 후 같은 먼 미래까지. 대동소이한 게 아니라 완전히 동기화됨. 인간의 사고체계는 바뀔 수가 없는 법. 천부적인 사고방식이 어찌 바뀌나. 타고난 천성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음. 원주민이 더 원주민스럽게 사극으로 아예 쏘옥 들어가버리느냐. 아니면 원주민식을 고집하지 않아야 할 게 무엇인지를 아느냐. 그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나! 인간의 육신으로 사는 인생, 살아 생전 원없이 모멸감을 느끼든 막살든 대충살든. 그건 온전히 인간의 몫이고. 반면 사후는 인간의 몫이 아님.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어떤 인간 말종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인간으로 만들어줌. 인간계에서 인간 이하이자 인간 미만은 사후 입도 뻥끗할 권리도, 힘도, 뭣도 없으니까. 신성모독이니 무신론이니 그런 건 얼마든지 좋다 얼마든지~ 아름답다. 그건 괜찮고 좋고 예쁘며 향기롭다. 좋다고. 그렇지만 다양성은 좋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산타 할아버지가 정상참작을 못하시겠나 우주 바깥에 SF가 없겠나. 의무방어전에서 내내 기 빨리느라 힘드셨다가 나중 패자부활전을 치를 수도 있다. 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정말로. 진짜로! 하늘 같은, 우주 대천사 같은 우리의 (직접적인 용어는 입에 담지도 못하니까 무엄하니까) 지존의 숭고한 존성대명을 더럽혔다며, 앞으로 더더욱 원주민스럽게 더 더 더더욱 독해질 생각이라니. 할 말을 잃게 만듬. 안 그래도 내수품 사용 세계 최고에, 크리스마스는 너네들 꺼에, 말이 안 통하기로 세계 최고인데. 선심성에 강박증에 퍼주고 어쩌고, 서구적인 세상 문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 바보되라고? 또? 계속? 영원히 신부들러리? 어버버버버 아부부부부 응애응애 삐악삐악, 문명인들만 끝없이 병풍을 전담하라고? 계속? 이게 정말 뭔 시츄에이션인지. 그 놈의 징글징글한 강박관념 때문에 할 말도 못하게 만들고. 젠장, 할 일도 안되고. 기분 잡치고. 일, 일, 일을 못하게 만든다고. 못 볼 걸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 놈의 원주민 정신!
현실을 봐 보시라. 영국 왕실은 1년에 1번 1인자들을 초청하는 전통이 있다. 여왕 할멈의 거동이 경솔하면 안되니까. (그놈의 할망구? 자, 보자. 관상을 보아하니 이마에 허영심이라 써 있고, 남자복은 좀 있는데,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음. 난 멍청하지 않음. 우린 남 험담하는 거 싫어함) 여기서 저기까지 왔다 갔다 잘난 척 사진이나 찍을 줄 알지, 빨빨거리며 나돌아다니면 안된다. 그런데 드물게! 독일과 조율을 거쳐서 일정을 짠다. 당일이 되어 독일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아 영국 여왕은 독일로 넘어가서 또 카메라 후레쉬 세례! 거긴 그게 된다. 처지를 따져보니 어찌 됐든 최후 침략국이 독일이었고, 독일은 왕이 없고 영국은 왕이 있고. 뿐만 아니라 거긴 굽히지 않거든. 너 왕? 그래 존중. 끝! BBC에 나오는 장면을 봐도 그런다. 영국 왕세자가 미국 군인과 악수. 너 왕? 그래 악수해줄께. 나무날 데 없는 동격. 그게 된다고. 물론 웨일스나 잉글랜드에선 약간 다를 수도 있으나, 나머지는 그게 된다. 게르만족, 켈트족, 앵글로족, 색슨족, 슬라브족 뭔족 뭔족. 알고 보면 다 야만인들 아니었나. 교양서를 인용하자면, "영국에서는 농민계급까지도 과거 3세기 동안 조상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온 정복시대의 기억, 외국 귀족과 외국어의 지배 때문에 프랑스인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농민의 영국에 대한 증오라는 것은 이번 전쟁 때까지는 전혀 없었다. ...... (중략) ......영국과 프랑스 간에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증오감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두 국민에게 대대로 극복할 수 없는 불신감이라는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참고로 (퇴역했던) 콩코드가 그래서 탄생했고,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도 선물했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로마제국을 포함해서 잉글랜드인을 노예로 삼은 유럽 종족이 어디 한둘인가? 덴마크와 바이킹 하며 어디 한둘이냐고. 잉글랜드도 나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웨일즈와 스코트랜드를 박해하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더 박해하고. 그래서 제국이 된 거 아닌가. 그러나 어쨌든 쟤네들은 그게 된다. 사실은 사실이요 세계사는 세계사라는 것이.
그런데 지구 반대편은? 원숭이 원주민 왕은 뭔가, 가택감금도 그런 가택감금이 없다. 그 근방에서 혐오스런 곤충을 누가 좋아한다고. 징그런 동물이 어디 보기 좋던가. 정치인이야 일부분 자기가 연예인인 줄 알든 묵묵히 음지에서 열심히 일하던,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동남아시아는 우리보다 못 생겼고, 아시아는 물론 지구 반틈을 우리가 정복했던 시기가 있었으며, 우리의 왕은 신격이다? 남아메리카의 국가 가사가 정말로 살발~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엄하신 신분은 제발 오락산업에 노출되지 좀 마시라.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께서 사람이라면 챙피한 줄을 아시라고. 그런데 왜 그처럼 그 냥반은 얼굴이 그렇게 두껍나? 왜, 인간인데 도대체 왜 수치심이 없을까?
물 반 고기 반은 둘로 나뉜다.
첫째, 다비드가 물 반 고기 반이거나.
둘째, 다비드의 정반대가 물 반 고기 반이거나. (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고개 돌려 고개 돌려. 야 뭐해 어서 튀라고!)
그러니까 왜? 왜냐하면 그게 다 굽히는 원주민 문화 때문이다. 백인종들처럼 악수하고 대담하며 1 대 1로, 정상 대 정상으로, 사과할 거 사과하고. 때로는 조롱할 때 조롱하더라도. 교양 대 교양. 상식이 통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사과라는 건 굽히고 절하고 내가 지는 거 같고 모멸감을 느끼며 막 그러니까. 절하고 어쩌고. 완전 싫은 사람한테도 인습이라는 이유 때문에 극존칭에 굽히고 90도 인사하고 어쩌고. 원주민 문화의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적지 않음. 특유의 문화적 특징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시대와 그리고 세계적 표준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뤄야 할 거 아니냐 바로 그 말. 어른이 어린이에게 존칭하고 예우하는 모습. 얼마나 보기 좋나. 물론 애들 버릇 나빠지게 가르침이라는 의무를 소홀히 해선 안되겠지만. 그렇듯 TV 사극에 나오듯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와 권력에 따른 주종관계가 극심하게 구시대적이면 곤란하다는 뜻.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올림말을 쓰는 건 만국 공통. 그게 옅냐 짙냐 그 차이 밖에 없다. 그런데 또 뭘 모르는 원주민은 우리 원주민은 예스러운 반면, 저쪽은 청년과 노인이 평등한 줄 안다. 사고방식도 이상하고, 말을 하면 상투적인 말만 계속 계속 계속. 어쨌든 이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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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부에서 이렇게 볼 수도 있다. 갈색 눈동자 인문교양학자가 진단하기로 앞서 떠든 논의는 전문용어인 르상티망일 수도 있다. 곧 르상티망이란 무엇이냐, 철학에서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시기심. 속된 말로 후려치기네 뭐네. 정신 승리네 뭐네, 내가 하면 겸손 남이 하면 자기 자랑-자기 과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 틀린 말은 아님. 그러나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얘기. 애들처럼 나를 부러워하지 말라던가, 원주민처럼 우리를 아시아라고 부르지 말라-던가! 그것과 이건 엄밀히 다른 얘기. 우월감과 질투심과 열등감은 개인 감정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고. 앞서 논한 논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상식, 오직 상식!
- 하늘이 푸르다. 바람이 시원하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의 문화적 차이가 어떻다.
- 내 꺼는 내 꺼, 늬 꺼도 내 꺼. 세상은 평등하지 않음. 합리적인 도덕은 오로지 강자 기준. 약육강식만이 진리. 원주민 문화는 (원주민) 역사드라마와 완전히 일치.
1을 말하는데, 말이 안 통하는 인문교양학자이자 원주민식 사고로는 1을 2로 볼 수도 있는 일.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게 원주민 정신이니까. 그렇다면 2의 말이 옳다면. 정녕 그게 상식적이고 오차없도록 만인이 공감할 만하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유대인 대학살과 난징 대학살이네 전쟁 성 노예니 뭐네, 그 무수한 야만성은 합당한 일이 되어버린다. 근대 올림픽 이전은 모르겠고.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몽땅 다 애들 장난이 되어버리는 거다. 물론 세계관에 입각하여 생각은 개인차가 있다지만 세계사와 <선발주자─중견주자─후발주자>의 개인적 견해 차이란 건 자연스러운 일. 반면 세계사와 원주민 정서와 야만인 정신이 아니라 개인 성향에 대한 거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상식은 이렇고. 그 다음으로 우월감과 질투심과 열등감등 개인 감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생판 생소한 <르상티망>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의 고견을 들어볼까, 들어보지 말까? 들어보지 말자. 희귀한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한테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면서. 그러면서 아아 뚜껑 열려, 아 빡쳐! 그분들 심정을 모조리 헤아리다가는 날 샌다. 날 새. 허세지수 상. 자존심 지수 특상. 무조건 내가 최고. 내 상황 무조건 합리화. 객관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더라도 그걸 그쪽에서 일컫기로 <정신 승리>로 보는 유형, 적지 않다. 부러운데 부럽지 않고, 꿇리는 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인간이란 타인과 비교하여 우월감과 열등감이 공존한 존재. 그런데 이기는 비교는 미친듯이 환장하면서도, 지는 비교라면 짜증에 울분에 뚜껑은 도저히 닫힐 줄을 모르고. 그러면서 비교 자체를 싫다 하고. 일관성 상실. 모순 가득. 변심이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듯, 남자의 주관도 일관되는지 변했는지 그걸 어찌 다 기억하나. (하오나, 우리는 다 기억하지 않고는 못 삶!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기억 못하거나. 우리는 둘 중 하나 밖에 없음). 일단 대표적으로 <열등감 인정하기─부러움 고백하기─자조 개그─병풍>. 그건 무조건 싫고 하기도 듣기도 싫음. 상남자가 싫어하는 이 4가지 외에 쌓인 게 그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소-결론은 앞서 말했듯 1개의 사안을 논할 때 개인 감정과 상식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질투심 같은 개인 감정 = 지극히 엄정한 상식. 등호의 성립을 내게 유리하도록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끝으로 조금만 더. 원리를 인문교양적으로 분석하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반면 <넌 너고 난 나다>식으로 개인적 성향을 앞세우면 얘기는 간단해진다. 깍쟁이네 뭐네, 장점과 특징과 단점이 혼합된 건 어디를 가나 누구를 보나 공통점. 일장일단을 따지면 어디나 마찬가지다. 곧, 만국공통! 사람 사는 덴 다 똑같음. 대륙적 기질은 면밀한 분석이 부족하니까 반도의 특징을 간추렸을 때 좋게 보면 쿨하다. 반면 안 좋게 보면 토끼처럼 성미가 급하고, 상남자처럼 귀여운 일에 대해서 주로 다혈질이며, 명백히 후발주자니까 의식이 서구 문명처럼 교양스러운 면이 아마도 훨신 아름답기는 다소 어렵다. 추운 나라가 괜히 진지하고 재밌지도 않은 반면 질서 의식이 좋듯이, 남쪽은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 줄 모르고 수닭처럼 여기 꼬끼오꼬꼬댁 오리처럼 저기에 꽥꽥꽥 그런 특징이 없잖아(?) 있다. 그건 단점으로 볼 수도 있고, 재밌을 수 있는 장점으로 봐도 무방하다. 쿨하다는 건 동전의 앞면은 얽매이는 걸 싫어하고, 뒷면은 제멋대로일 소지가 있다는 뜻. 바로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사에 해박하고 인생을 아는 어른들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종차별보다 끼리끼리의 가치를 더 높이 사는 것이다. 순혈주의라는 비판도 마땅하지만, 인류 역사상 끼리끼리만큼 자연스러운 기준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덕목은 별로 없다. 소수를 배려하고 상호 존중하며 선의를 실천하는 거 좋아 좋다 모두 좋다고. 다 좋다고. 그런데 대체로 소란스러움이랄지 모순에 따라 어떤 단추가 클릭되는 일은 A개체와 B개체, 즉 A단위와 B단위의 섞임에서 시작한다. 불협화음이 발생할 가능성은, 형편이 비슷한 경우가 차이가 큰 경우보다 비교적 낮다. 대체로 그렇다. 물론 그건 무역이자 교류일 수도 있고, 교과서로 보자면 세계사였으며, 제일 쉽게는 여행이다. 국내에서 괜찮다가 국외로 나가 사람이 평소와 달라지는 경우도 의식이 얼마나 현대적인가가 원인이므로, 고로 그 역시 사는 수준과 작게나마 일정 부분 비례한다. 거기에 문화적 차이가 더해지고.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없는 거도 아니고. 무조건 잘사는 부자 나라만 옹호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직업여성을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암스테리담에서 약을 구하거나 특별한 동성애자를 만나는 건 또 어떻고. 우리 어른들이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좌우지간, 어디나 무엇으로 따지건 일정 비율이란 건 확실히 있다. 아울러 드러내냐 감추냐의 차이가 있겠고.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어떤 혐오증이랄지 자기 주장을 알게 모르게 겉으로 드러내는 비율 역시 공존. 차이는 옳고 차이를 상호 존중하고. 로보트처럼 이성만 존재하면 깔끔한데, 인간은 불합리하며 감정적이고 너와 내가 다른 존재. 메마른 감정이냐 후한 인심이냐, 도시와 시골만 봐도 걸음걸이 속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먼 미래에는 몰라도 현재 판사는 로봇으로 대체불가능한 현실. 그러므로 무언가 어떤 사안을 <일반화로 볼 것이냐, 원리를 따질 것이냐> 그 선택은 개인의 자유라는 점.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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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현실적으로 죽일 수 없고, 윤리적으로 죽여서는 안되고.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말한다. 나는 살고 싶고 너를 죽이고 싶다고. 단, 인간 대 인간은 그렇고. 인간 대 동물은 다르고. 인간에게 천사성이 있다면 악마의 습성도 있으니까. 실상 케첩은 현실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내 손에 케첩을 묻히지 않는 픽션 주인공도 있고, 모순도 적지 않다. 죽을 만큼 이별이 괴로워도 죽지 않고.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죽음을 참 많이 거론했고. 삶과 죽음은 하나의 짝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인문교양서랄지 소설과 드라마에서 죽음을 빼면 재미없는 이유는 대체 뭘까?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우리들. 우리들이 세계마초협회 명예의 전당에 영구히 입성될 자격이 있나, 없나! 그건 몰라도 상남자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가장 쉽고 제일 일반적인 방법 두 가지는 그거다. 첫째, 가족 장르 영화가 재밌는가 아닌가. 둘째, (비현실적)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는가 아닌가(내내 걸어만 다니다 끝나는 영화와 뭔 생선 같은 놈 나와서 여자랑 연애하는 영화는 엄연히 다르니까). 옆길로 빠지지 말고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인간들끼리 모순이 빚어지는데, 왜 그것이 발생하는 합당한 이치와 마땅한 원리를 얘기하기 싫어할까? 왜냐하면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하기 싫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억지로 해야 한다고 가정한 채 해 보자.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옛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과 인디언 원주민의 관계는 정복과 피지배의 관계였다. 유럽 원주민이 이해하기 힘든 그 어떤 미묘한 감정선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헨리 세인트 존 드 크레브쾨르왈,
「인디언들에게 입양되었던 아이들에게 유럽식 예절을 다시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그들(인디언들)의 사회적 유대감 속에는 유별나게 매력적인 그 무엇,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어느 것에 견줘지더라도 월등히 우수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디언이 된 유럽인은 이미 수천 명을 헤아리는 반면, 원주민들 중에 스스로 원해서 유럽인이 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
D.H. 로렌스왈,
「헨리, 어지간히 하렴.」
로렌스 말마따나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님 과장이던가. 절반의 거짓일 수도 있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포장! 요즘 말로 착한 척. 예술의 할 일도 어쩌면 착한 척이고, 할 말은 아마도 무제한급일 테니까. 미국식으로 보자면 새로운 지성의 탄생일 수도 있고. 인문교양학에 최적화된 언어이니 만큼 이 분석도 틀리지 않음. 착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무엇보다 순결한 처녀의 미모가 꽃 피는 것 같은 문화의 개화기 이전이었을 테니까. 기준과 대상을 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일단 그랬으니까. 현재 탁월한 선의를 제시하고 싶어하며, 먼 과거는 미화되는 사회적 공통점에 근거하자면 충분히 그럴 만 했을 듯 싶다. 언어들 가운데 낱말 숫자, 즉 단어의 총량이 제일 많은 이유는 논외로 치고. 로렌스의 다른 글을 읽어보자.
D.H. 로렌스왈,
「두 인종이 친한 친구로 지낼 때 보면, 어느 한쪽이 자기 인종을 정신적으로 배반하는 경우가 많다. 인디언과 "우정"을 나누는 백인(대개 식자층)은 자기 인종을 배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뭔가 내막이 있다는 인상. 사회 이탈자라는 인상. 백인종의 스타일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미국화된 인디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배반자. 이탈자. ············ 의 똬리에 감겨서 괜찮을 백인은 어디에도 없다. 괜찮으려면 백인인 자신을 증오하고 백인이라는 자신의 정신을 증오하는 진짜 사회 이탈자여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살과 살이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정신은 바뀔 수 있다. 백인종 정신이 홍인종 정신으로 바뀔 수는 없고 그렇게 바뀌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백인종 정신이 홍인종 정신에 대립하고 홍인종 정신을 부정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가능하다. 백인종 정신이 홍인종 정신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의식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태평양 종족들은 "야만인들"이다. 멸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내가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 존재와 그들의 존재가 한데 섞이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야만인들이다. 다정하고, 웃음이 넘치고, 참 근사한 몸을 가졌지만, 우리와는 다른 것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껏 수천 년간 혹독한 문명의 시대를 살면서 한 세기 한 세기 전진해왔고, 지금도 전진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을 만났구나 싶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진보하는 종족이고, 예컨대 흑인종과는 다른 종족이다············ (멜빌은) 문명화된 인간성을 증오했지만, 야만인들에게 돌아가기를 소망했지만, 야만인들에게 돌아가기를 시도했지만, 야만인들에게 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왜 불가능했냐...」 여기까지.
인디언이 된 유럽인은 많은 반면 그 반대는 0이라고? 진짜로? 정말로? <예-아니오>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큰 그림으로 봤을 때 아마도 아니오쪽에 무게가 실린다. 허구니까 가능한 얘기. 왜? 왜냐하면 그걸 반박할 예시는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굳이 반론조차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종이라는 명사 자체가 일단 멈칫하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드니까,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인종이 다양하지 않고 딱 1개라고. 복고풍 흑백TV와 최신 컬러TV니 흑인종 차별하던 노예 시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인종이 다양하지 않고 오직, 오로지~ 딱 1개라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만약 당신이 촌닭, 뱁새, 오리, 팔색조, 파랑새, 제비, 참새, 펠리컨, 펭귄, 까마귀, 백조, 참치, 상어, 앵무새, 거위, 칠면조...등등등. 그 가운데 골라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럼 어떻겠나? 만일에 그처럼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그래도 촌닭&뱁새로 태어나고 싶은가? 아따~ 선상님 의중이야 나중 듣는다 치고!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다. 만약에 내가 내 친구인 촌닭&뱁새 명콤비를 딱 혼합해 놓은듯이 태어난다? 정말 그런다? 그럼......······......······
노노노노노노노! 노노노노노노노! 노노노노노노노! 오오, 노~~~!
이런 젠장~! 젠장 젠장 또 젠장! 이런 제기랄!
뭘 좀 안다느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오빠라느니. 그동안 받았던 짝사랑과 풋사랑 뿐만 아니라 더티러브에 찐한 사랑이니 순애보니 뭐니.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는 모든 행운은 싹 다 몽땅 날아가버리는데? 진짜로 그러는데? 그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미치지 않는 이상, 아니 미쳐도 그건 말도 안된다. 말이 안된다. 잔재주도 비리비리하라고? 내 친구가 속으로 어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말았는데? 3000 궁녀를 전부 다 1 대 1 개인 면담을 할 궁리나 하는데? 꽉 막히고 속좁고 고지식하며 말이 안 통하는데?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데? 그런데 딱 그걸로 골라서 태어나라고? (친구니까 녀석들 인생사를 살펴보고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미쳐도 정도가 있지 그건 말 같지도 않은 가정이다. 물론 그분들께서 들으면 기분 나쁘시겠지만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입장 바꿔서 그분들이 뭔 얘길 할지는 상상하지 마시길. 뭔 말을 할지 제발 추측하시지 말기를. 필자도 왕년에 말이야, 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였으니까). 나 저 오빠 업어보고 싶어, 전 달라요. (첫인상이) 나는 첨에 보고 애기 아빠인 줄 알았어. 그런 말 싹 다 못듣는데 말 다 했지. 그럼. 그렇고 말고. 꽃을 꽃으로 바라보지 않는 숙녀의 심정, 절실히 이해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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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 그 얘기를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영화로 각색했다고 가정하고. 늑대에게 키워진 소년이 인간들에게 구출되어 인간으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렇다고 유럽 원주민은 우수하고 후발주자 원주민은 열등하다, 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원주민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착한 척하지 말고. 가식 떼고 계급장도 떼고. 모자 벗고 옷까지 벗고. 남자 대 남자로 말해보자. 속된 말로 까놓고 말하잔 말이다. 응? 좀 더, 좀 더 솔직해보자. 무의식을 꺼내서 구경이나 하자. 쇼윈도우 인생도 있는데 아이쇼핑이 뭐 어렵나. 나중에 위선도 챙기고 예법을 따지더라도 지금 당장 진심보다 더 깊은 무의식을 따져보잔 말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 그럼 섭하지. 그럼 많이 섭섭하지. 개봉 박두. 개봉 박두라고. 그건 다음 칼럼에서. 칼럼니스트도 근사한 레스토랑에도 가고 어쩌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타적인 심성을 잃지 않으려면 최소한 평범한 정도로 이기적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했나? 그랬나? 했는지 안 했는지 헷갈리네. 이런 바보 멍청이 밥통 미련곰탱이 같으니라고.
한편 필자는 앞에 인용한 D.H. 로렌스의 의견에 절실히 동의하지만 약간 달리 생각한다. 헨리 세인트 존 드 크레브쾨르왈, 고결한 야만인이니 뭐니 어쩌고저쩌고. 물론 알맹이는 같지만 표현의 결이란 게 있으니 약간 다르다 뭐 그 말이다. 로렌스가 헨리 세인트 존 드 크레브쾨르를 약간 뻥쟁이로 보는 비평에는 물심양면이자 전적으로 찬성하나, 즉 다른 부분에서는 약간 다르다. 약간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 일단 파란 눈동자를 타고나지 못했고 언어를 비롯해 다른 점이 판이하니까 그게 정상. 완벽한 양손잡이는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양손을 쓸려고 노력한 걸로도 최소한 100명에서 1인자는 된다고 자부하는 만큼, 딱 그 정도만 애쓰며 살아온 입장해서 봤을 때. (※양손잡이! 100만명 가운데 0.5명 기준의 타고난 양손잡이가 아니니 만큼. 바지를 입고 벗고, 신발을 신고 벗고, 점퍼를 입고 벗고. 정해진 기득권이 없도록 매번 다르게. 책을 넘길 때. 물건을 집을 때. 음식물을 씹을 때. 머리카락을 빗을 때. 공을 던지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양손 손글씨 쓰기에 도전하고. 일방적이지 않도록, 주도권이 없도록, 의도적으로. 징크스 깨기. 주시안은 못 바꿔도 그 습관으로써 100명에서 1명은 된다고) 잠을 막 하루에 2~3시간 자고 큰 재주가 뛰어나고 그런 데 명함도 내밀지 못하지만. 나름 잔재주꾼으로서 보자면 그렇다. 우선 로렌스의 글을 재인용하자면 이렇다.
1.유럽인이 볼 때, 미국인이란 일단 돈에 환장한 놈이다.
2.살과 살이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정신은 바뀔 수 있다.
여기서 1번은 그냥 웃자고 인용한 거니까 통과. 2번에서 필자는 로렌스와 반대로 정신은 바뀌지 않는다에 판돈을 거는 쪽이다. 사람의 천성도 타고난 건 안 바뀌고, 구현 방식을 빨주노초파남보 그처럼 바꿀 수 있듯이. D.H. 로렌스야 <선발주자 & 전형적인 식자층 &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로렌스가 살던 시대 배경과 선발주자로써 뭐랄까 약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관찰자로써의 분석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로렌스가 살던 시대부터 현재까지 무수한 사실들 하며, 그리고 현재 필자가 좋아하는 인문교양서에 최적화된 글 읽기를 경험하지 못한 점도 역시 상상 밖이므로. 따라서 로렌스가 집필한 약간 철학적인 비평문에서 저 부분, <정신은 바뀔 수 있다> 요게 요게 요 부분에서 180도냐 1.5냐 아니면 한 세 바꾸 반 바뀐다 라는 점에서 애매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 즉 우리가 로렌스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저걸 딱 한마디로 바꾸면 뭔가, 존중이지 뭐겠나. 근 200년 동안을 살펴봐도 유럽의 문명과 문화가 전-지구로 퍼시면서 그냥 쉽게 퍼진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사를 들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 보자면 외국인은 그 처절하고도 모순이 혼재된 국사를 잘 모른다. 교양이라는 게 그런 거다. 아무튼 지금 세상 우리는 평화와 행복, 사랑과 자유를 누린다. 쉽게 말해 함께 친하고, 널리 사랑을 하며, 다국적으로 어울리고. 또 이민에 이사에 견학이자 유학등 모든 게 다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건 가능해도, 생각 즉 사고체계이자 사고방식은 여간해선 바뀌진 않는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왜냐하면 <10살 이전까지 살던 땅, 20살 이전까지 사용한 모국어>에 따른 한계라는 건 극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니까. 곧 25살이든 30살이든 후발주자권에서 선발주자권으로 옮겨가더라도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준 차이다. 기준선을 낮추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본인 말마따나 기준선을 높이면 여간해선 불가능하다에 가깝게 된다. 실제로 약간 그렇다. 특별히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외국어를 20살 30살 어른이 되어 통달하더라도 외국어를 꽤 잘한다. 원주민인지 중간 유입자인지 잘 관찰하지 않으면 구분이 어렵듯이. 그렇지만 그건 기준선을 높이면 <거의 없다>에 가깝게 된다. 언어 재능이 1퍼센트라서 20살 이후에 습득한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할지라도 일단 세 가지가 다르다.
첫째, 그 완벽함의 정도가 원어민과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고.
둘째, 자기 모국어를 이따금 사용하고 싶어하며. (가끔이라도. 향수병처럼 굉장한 그리움이 있다)
셋째, 사고체계가 원주민에 가깝게 변했지만 이 역시 '섬세함의 극치'라는 잣대로 보자면 완벽하진 않다.
결론은 간단하다. 주시안처럼 사고방식은 개조되지 않음. 타고난 혈액형이나 DNA가 어찌 바뀌나. 상남자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4가지도 그분들께서 웬만하면 듣고 싶지도 않음. 복습하기도 싫어야 정상. 아니면 비정상. (로렌스 의견도 그거다. 정신 개조가 아니라 1.5로 변화랄지 융합이자 화해에 조화를 뜻하는 거다) 다만 부단한 노력 여하에 따라 1.5는 가능. 아울러 원주민 문화와 다양한 전통과 각각의 관습은 나쁜 게 아님. 씨가 중요하냐 밭이 중요하냐. 둘 다 중요하겠지만 황인종으로 태어나더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살던가,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점. 그거면 된다. 그거면 된 거라고. 주어진 여건에 불만족하느냐 희망의 사과나무를 심느냐. 그 차이다. 다소 불만족스러워도 찡그려서 뭐하겠나. 비판할 줄 알고 중간은 가돼 긍정적으로 살기. 다른 건 다 기계한테 일임하더라도, 마술사의 조수한테 현혹되더라도 생각만큼은 내가 하기.
칼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