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별 인구 변화에 따라 증시가 일부 영향을 받듯이, 세계 인구 이동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통계만 따지자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은 점점 줄어든다. 그래프를 안 봐도 상상이 된다. 그런데 왜 아직도, 왜 여태, 어째서 여전히 말이 많을까? 이치만 따지고 보자면 그렇다. <그래프와 수치라는 근거가 명확하다, 따라서 불만은 훨씬 줄어들어야 정상이다>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왜 그처럼 차이와 차별이 구분되지 않을까? 왜인지는 전문가들한테 맡기고, 과학적 추론이나 추상적 사상이 아니라 대충 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 비율이 낮아지니까, 반대로 다양성의 비율이 높아지니까 말은 많아질 수 밖에 없다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일단 자리를 잡으면 텃새도 역으로, 차별도 역차별이 될 여지가 없지 않다. 보아하니 그렇다. 제품마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예는 흔하고, 요술 뿐만 아니라 상술 또한 쉽게 쉽게 소비자를 농락한다. 조류학을 공부하던 청춘이 사회에 나오면, 학자가 아니라 닭을 튀기는 식품업에 종사하는 일은 다반사다. 스탕달의 연애론 대충 훑어보고 여자 꼬실려고 하면 그렇게 되던가? 시대적으로도 전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왔다.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도 자유와 황금 같은 덕목이라고 오락산업에서 물어본다. 그거 맞냐고. 때로는 가르치다가, 때로는 그거 진짜 맞냐고 물어본다. 그럼 사랑은 어디 갔냐고. 마을에 웨건 타는 양복쟁이가 100퍼센트라면 그러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비율이 1까지 떨어지는 동안 어떤 일들이 발생할까? 발생 가능한 일은 모두 발생할 것이다, 가 정답이다. 파란색 난쟁이가 100퍼센트인 마을에서 주민 하나가 분홍색 난쟁이와 결혼해서 파란색-분홍색 혼혈 아이가 그 마을에서 자라나면, 뭐 양측에서 어떤 말할-말 못할 느낌을 안고서 살아간다. 원주민과 이주민 즉 주거의 문제가 아니라 관광의 문제도 비슷한 게 있다. 몽고로 관광 온 동쪽의 졸부들이 돈을 어떻게 쓰니까, 장사꾼 사이에서 잡음이 발생하는 일. 그 장사꾼 왈, 내가 이런 말발을 다 누구한테 배웠겠소!
    설핏 생각하기로는 훨씬 좋아져야 정상인데, 왜 그 정반대일지 이상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처럼 사회지도층은 거의 왕권과 동일한 권위를 가졌을 때는 문제가 없다. 단, 위에서는 좋고 아래서는 죽겠고! 어쨌든 구간 당기기 버튼을 눌러서, 딱 어쩌고저쩌고 해서 현재가 됐다. 그럼 세상 사람 모두 행복하고 웃고 기뻐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니다. 영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피라미드는 신분제였지만 현재의 기준은 황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평민이 과거의 황제는 상상조차 못할 어마어마한 풍요를 누리더라도 일부분 불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다. 키 빼고 다 가진 남자마저, (웬만한 20위권 상장기업 시가총액 만한 현금성 자산 보유자), 입버릇처럼 외롭다고 한다. 키 작고 가진 것도 비전도 없는 걸로도 모자라 뭘로 봐도 루저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데. 물론 사석에서니까 그럴 수 있고,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하는 게 정상이다. 누구나 그렇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이니까. 실정이 그렇다는 거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황금 뿐만 아니라, 인구의 이동에 따른 인종 구성의 변화도 있다는 거다. 더 자세한 얘기는 전문가들께 일임하고, 어차피 생각은 개인주의일 테니 다음으로 동네의 사정을 알아보자.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 변동과 끼리끼리의 벽이 높은 것은 비례한다. 그런데 그 비례함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면 머머주의고, 일종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면 인지상정이자 유대감이다. 동네에서 양복을 입지 않고 웨건을 타지 않는 주민의 비율이 10퍼센트가 넘어가면 이사를 가는 것. 선택은 온전히 이사를 가는 사람의 자유다. 동네에서 NO 양복 NO 웨건인 사람의 비율에 대해서 왜 너네는 10퍼센트를 기준으로 삼았냐, 나는 그 기준이 50퍼센트는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자유지만 부자연스러운 자유다. 왜냐하면 생각은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지만, 이사는 온전히 이사를 가는 사람의 결정 사항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내 인생을 타인의 의사에 맞추어 삐에로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엇갈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가죽점퍼를 입고 뚜껑 없는 차를 타는 주민의 비율이 높은 동네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다. 난 그냥 강 건너 낙원으로 가고 싶지 않고, 지금 살고 있는 데서 유유자적 대충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다. 가끔 기발한 착상과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를 때만, 아니 아니 여심을 기쁘게 해줄 때도 더불어, 단지 그때만 최선을 다하겠다. 난 멀리 가기 귀찮다, 집 근처에 시카고바도 있고 카페 이름도 핀란드다. 난 그거면 된다. 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맥주나 마시면 된다. 왜? 뻔트면 대만족이니까! 난 야망 그런 거 안 키운다. (혹시 못 키우는 거 아니냐고? 뭐-뭐, 뭐가 어쩌고 어째!) 내 주제에 무슨 최고급 와인에 만찬이란 말인가. 철갑상어 알은 구경하기도 싫고 달걀과 메추리알도 맛있다. 명태알도 괜찮다. 알이 아니라 값싼 연어 살이면 된다. 거위만 간이 있나 돼지도 간이 있다. 소고기도 좋지만 치즈는 더 좋다. 우유도 있다. 차라리 이참에 셰익스피어나 다시 읽고 아예 채식을 하던가 해야지, 이거 원! 하여간 비유해서 아는 척을 좀 많이 하긴 하지만, 나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 행복하기도 바쁜데 내가 뭐헌다고 옆집이랑 싸우며 불쾌하게 살고 싶겠나. 안 그런가?
    그렇듯 스포츠계에서 용병을 제한하듯이 단위 내에서 인종도 할당제로 비율을 유지할 게 아니라면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감안하는 게 맞다. 그게 아니라면 올림픽 메달도 인종 구성 감안해서 수여해야 하니까. 곧, 하나 주고 하나 받기. 왜냐하면 어떤 방향성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실례를 모래시계처럼 뒤집어 보더라도 발생하는 현상은 처음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용두사미라는 공감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까.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칼 포퍼도 안 읽어봤냐, 열려 있는 사회에서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끼리끼리의 장벽도 낮아져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계 100에 슬라브계가 진입해서 9 대 1이랄지 8 대 2의 비율이 무너지더라도 라틴계는 이사를 가면 안된다. 아니다. 내가 그냥 다큐멘터리의 본고장으로 가겠다. 그럴 수도 있단 말이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에서 하이에나로 살 용의가 있다고. 내 헤어스타일을 보란 말이다.」
    글쎄요 글쎄요, 정말 글쎄요! 몰라서 주장하실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 한순간이다. (덜 잘사는 쪽을 비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치를 따져야 하니까) 좀비 영화 그거 엄정한 현실이란 말이다. 그 때문에 다양성이 낮은 데 사는 사람은 다양성이 높은 집단의 끼리끼리 장벽이 그 얼마나 높은지를 잘 모른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 생태계의 잘난 척과 슬기로운 자랑, 현명한 겸손, 그들만의 모순을 영 모른다. 체감하지 못하니까 당연한 일. 어쩌면 알면서 모른 척일 수도 있고, 혹여나 생각 자체를 하기가 귀찮아서일 수도 있다. 세상은 시끄럽고 오락산업은 내가 차분히 생각하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초식동물 공동체에서도 똑같이 다 존재하는 일일 뿐이다. 곧 안과 밖을, 나와 남을 똑같은 잣대로 보지 못하는 일. 괜히 초딩끼리 거울이네 반사네 에코네 그러면서 노는 게 아니다. 어른으로써 어리광 만큼은 제발 애들 꺼 빼았지 말자. 그런데 초식동물이 아는 척, 뭐 자유다. 꼬마한테도 하이~ 할아버지한테도 하이~ 처음 보는 사람도 하이~, 뭐야 그거, 예의도 없고 구별도 없네? 응애응애 삐악삐악, 귀엽다. 모른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용기와 지혜에 해당한다. 루저에게 패배감은 운명이라서 광고는 우리에게 그토록 살가운 것이다. 오락산업마저 곰살궂지 않으면 빈말조차 듣기 힘든 수도 있으니까. 나 또 차였어, 라는 말도 농담할 여유가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 숙명이 영 기쁘지 않은데 선녀가 어떻게 빵끗 웃으면서 그 말을! 누구도 늙었어, 누구나 되니까 그런 말도 들을 수 있다. 우정이란 게 뭔가. 친구 파도타기를 단조로만 해 보시라. 인생 이상해지기 쉽상이다. 나는 우정조차 편파적이고, 사랑마저 외모차별하면서, 그런데! 그런데 왜 이 사회는 약자에게 닫혀있고, 정의는 다 어디로 갔냐? 이런저런 비유는 헷갈리고, 피자배달부의 경험만 봐도 된다. A+++동네에 B---주민이 유입되어 반반이 되면 A+++는 그 동네를 언제 떠났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B---동네에 A+++주민이 유입되면? 그럴 일은 드물고, 만약 그렇더라도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다. 그걸 뭐라 하느냐, 위화감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실제 B---동네에 A+++주민이 유입되면 B---가 뭐하러 떠나겠나. 죄진 게 없는데? 내가 바보도 아닌데? 내가 원래 원주민인데? 내가 왜! 그렇다. 이거다. 이거라고. (물론 기준이 자본이라면 굴러온 돌은 박힌 돌을 빼낼 수도 있고, 대상은 가족마랄지 신분-사교-NC일 수도 있다) 여자 세계에서 말이 통하는 남자가 없더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해서는 안되는 사람은 딱 정해져 있다. 아마존이라고 서열이 없고 허영심이라고 고급이 없겠나. 여자는 남자한테 잘 보일려고 화장한다, 라는 말에만 발끈할 게 아니라 여자도 내가 아는 연민과 내가 절대 모를 수 없는 유대감에 대해서 나와 남, 안과 밖의 기준을 외면하면 안된다. 사랑이야 내게 유리하도록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으쌰으쌰 철없는 남자들은 일단 애라고 상정한 채 여자는 말이 통하니까 말이다) 지금 세상에 피라미드의 기준이 바꼈지 지구는 결코 평평하지 않다. 피라미드의 원리는 여전하다.
    자유냐 평등이냐, 둘 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에는 경쟁이 있는 것이다. 사랑이냐 행복이냐, 둘 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에는 최소한의 황금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처럼 집단 이주 개국은 크게 보면 차악이라기보다 썩 나은 해법이었고, 종교적으로 보면 퍽 애매한 예일 수도 있다. 독립하고 싶은데 못하는 일부 스코트랜드 주민, 영국의 한 주이고 싶나 아니면 아일랜드의 한 주이고 싶나 라는 북아일랜드인의 입장은 약간 다른 문제고. 옛날 세상도 아닌데 신분제가 강한 문화와 아닌 문화가 역사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접한 주변국이 10개~20개인 나라보다 1~2개인 국가가 지리적으로 꽤 유리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인접한 주변국이 10개~20개인 나라보다 1~2개인 국가가 욕심이 적을 것 같은데, 또 꼭 그렇지도 않다. 그야 어쨌든 구시대적인 야욕과 소년의 야망과 상남자의 야심은 구분되는 게 좋고.
    흑인으로도 살아보고, 백인으로도 살아보면 훨씬 많은 걸 알게 되겠지만 한 번 살지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을 수 없는 생애. 고로 평생 배워야 한다. 나는 틀리고 늬 말이 맞다, 라고 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혼혈을 비롯해 어디계로 살아보면 그렇다고도 한다. (A에서 태어나 쭉 살지만) A에서는 B계로 존중 받고, B에서는 그를 100퍼센트 A 사람으로 보는 일. 99퍼센트 추정은 하는데 100퍼센트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먼저 힙합 가수로써 막 화나서 무대에서 진짜 화났기 때문에 제대로 멋진 무대 예술을 선보일 수도 없다. 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석이든 무대든 카메라 보조든 삼류 잡지 기자던,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는 한도 내에서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론과 실제는 왜 차이가 날까, 를 그냥 야트막하게 추론해봤을 뿐이다. 그게 다 외모, 언어, 문화, 사고방식, 세대차이, 풍습, 형편, 개인주의, 이기주의, 환경. 그런 개념들 때문 아니겠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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