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47

from 소설 2019. 5. 15. 17:54

    1

    [칼럼: 고백이란!]
    ~라는 공상을 하던 찰나. 존티로부터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NB는 전화기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핸드폰은 멀쩡했던 것이다. 
   「나 잊고 있었어.」
   「뭘?」
   「늬가 내거 가져간 거. 듀퐁 79년식 한정판 실버 버젼. 내 사무실에서 가지고 놀다 어떡하다 그게 늬 상의 주머니로 들어갔던 일. 내가 그랬나 늬가 그랬나.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고. 그게 없으니까. 나 불안해.」
   「아 그거?」
   「대강 얼버무리고 넘어갈 생각일랑 말어. 어림도 없으니까.」
   「나 라이터 욕심 없어. 넌 차 욕심 많을랑가 몰라도. 이거랑 똑같은 거 한 100개 사 줄까? 말만 해.」
   「아이고. 말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형님. 넌 말이야, 가만 보면 그게 문제야. 그러니까 넌 여자들이 따르지 않는 거야. 뭣 때문에? 이런 상황이면 궁짝이 딱 딱 맞아야 할 거 아니냐고. 어? 발뺌이라도 좀 해라 그 말이란 말이지. 아, 재미없잖아? 그리고 새 거랑 애정이 쌓인 게 같니? 아무튼. 거기 있지?」
   「어. 소파 옆에.」
   「어 보이네. 아니. 소파가 아니라. 책상 위에 있네.」
   「어? 아 그렇구나. 책상 위에 있구나. 뭐? 그걸 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그걸 누가 알겠니, 늬가 알겠니 내가 알겠니.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어? 그건 다 늬 안경에 부착된 초정밀 카메라가 내게 실시간 영상을 전송시켜주고 있으니까 알지.」
   「뭐, 진짜?」
   「진짜겠냐. 뻥이야.」
   「뭐? 뻥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러지 말고. 그거 가지고 우리 사무실로 놀러와라. 심심한데 너랑 나랑 연애를 할 수는 없고, 뭐 하고 놀지 꿍꿍이나 짜 보자고. 아님 무슨 특별한 건수 있어? 없잖아. 너 약속 없지? 그렇지? 다 알어 임마. 그러니까 늬가 뭘 해도 안되는 거야. 알어? 그러니까 늬가 여자가 없는 거라고. 날 봐 날 봐. 어? 날 보라구. 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야, 어? 내 전적은 물론, 날 날이면 날마다 귀찮게 하는 게 여자라고. 물론 이젠 아는 동생이든 뭐든 다 떨어져나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이긴 하지만. 어쨌든 플레이보이는 추억에 사는 거라고. 그런데 너 그거 아니? 나 말 아직 안 끝났다는 거.」
   「나 늬 말 끊지 않았어.」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글쎄나 말 길어지니까 피곤하다야. 아 뭐해, 얼른 넘어오지 않고.」





    2

    다음 날 JS는 존티를 만나러 갔다. 
    존티 사무실로 가던 중 그는 전화를 받았다. 
    존티가 어디까지 왔냐며 도착을 재촉하는 것인지 아닌지. 받아보면 알겠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혹시 출발했니? 출발했으면 어디 소풍이라도 좀 가는 게 어떠니.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사업 관계자를 만나봐야 할 거 같아. 빅딜이거든. 이거 잘 풀리면 나중 내가 크게 쏠께. 응? 그리고 그 뭐야 듀퐁 라이터. 그거 너 가져. 어제 누가 한정판 최신품을 선물해 줬지 뭐니.」
   「그래?」
   「낙심천만이라는 둥 실망했다는 둥. 내가 다음 번에 죄다 만회할께. 알았지? 이보게 친구.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도 돼. 뭐 그 말을 왜 내가 하냐고? 말해 뭐 해! 나도 모르는데 뭘. 허허. 어쨌든 자네의 기민한 관심은 사양하므로, 고로 자넨 이제부터 자유 시간이 공짜로 생긴거나 마찬가지라네. 시간 벌었으니, 공짜 시간 생겼으니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안 그래? 어떻게, 미술관에라도 좀 가보는 게 어떤가? 아니면 내가 여자 소개시켜 줄까? 어떤 스타일! 말만 해 뭐든 말만 하라고. 그렇다고 진짜로 말만 하지는 말고.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걸 딱 꼬집어서 말하란 말이야. 알겠니? 격정이 있으면, 달려. 낭만적인 꿈이 섬멸할 거 같아? 다시 띄워. 주말을 어떻게 놀아야 신나게 놀았다고 소문이 날지 잘 모르겠다고? 파티플레너를 네 비서로 서임해. 그럼 돼. 진땀을 뻘뻘 흘리지 않아도 되고, 아님 거칠게 자기 연민이라도 하던가. 뭐 그러던가 말던가. 네 인생 늬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걸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겠니? 너도 어엿한 어른이잖니. 호박이 제 발로 너한테 쉼없이 굴러갔는지 아닌지. 과거에는 간혹 뜨문드문 그랬나는 몰라도, 지금은 좋은 시절 다 가버렸는지 몰라도. 아무튼 닥치는 대로 예술적인 삶을 추구해 보시게. 그럼 그게 새로운 호시절 아니겠나. 안 그래 친구? 그럼 난 이만 끊겠네.」
    뭐야 이거! 
    존티는 지 할 말만 하고서 전화를 뚝 끊었다. NB는 딱 한마디뿐이 못 했다. 저런 저런. 
    그야 어떻든. 갑자기 분위기 싸했졌는데, 허공에 붕 떠버린 이 자유 시간을 이젠 어떡한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정말 존티 말대로... 워──워──워!  
    그 때문에 NB는 제일 가까운 곳에 누가 사느냐를 생각했고, 아아 친구 토마스가 있구나, 그래서 녀석을 만나러가려고 먼저 전화를 했다. 
   「어어. 이게 누구야. 웬일이니?」
   「왜 내가 전화하면 안돼?」
   「안돼긴. 반가워서 그렇지. 먼저 전화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도 사람 꽤나 만나봤는데 너처럼 친분이 일정 수준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연락을 안 하는 친구는 네가 처음이거든. 너 나 알지? 그런데 방금 뭐랬니? '왜, 내가 전화하면 안돼?'. 맞다 맞다. 그렇지 그렇지. 나 좋아하던 여자애가 먼저 전화해서 딱 그렇게 말했어. 대뜸 연락해서 말이야. '왜 내가 전화하면 안돼?'. 난 걔랑 썸만 탄 건데. 걘 날 많이 좋아했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끝난 게 최선이네. 걔한테는 최선. 나한테는 아쉬움. 아니, 진짜로 아쉽단 말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 볼 생각이었다면 가능했을 텐데 잘 참아서 풋풋한 기억으로 남았단 뜻이지. 그렇듯 고지에 깃발을 꼽지 않아서 오히려 아련한 회상이라도 할 수 있는 거고. 더티러브까지 갔으면 말 그대로, 에잇. 말 말자.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모르는데 또 옛 생각나니까 입이 근질근질하구만 그래. 어떻게, 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말어? 마저 할 말이 또 있냐고? 없진 않지. 그럼. 못 다한 말이 얼마나 많았냔 말이지. 일단 그쪽 친구들은 아르바이트생 인연으로 만났어. 중간 건너뛰고. 최초로 남녀 커플이 먼저 있었지. 그렇게 남자쪽 친구들, 여자쪽 친구들끼리 감정의 교류가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그 수많은 노력 가운데 딱 한 인연만 부부로 맺어졌고. 어쨌든 그렇게 됐는데. 왜 나는 상대방의 노력에, 여자의 구애에 깍쟁이처럼 딱 그 만큼 이상은 절대로 넘어서지 않았느냐? 하면 다 이유가 있지. 없지 않다고. 그럼. 일단 그녀를 B라고 지칭하자면 내가 걔들 시트콤 친구들과 친구 파도타기로 미니홈피 친구가 됐던 시점이 딱 그래. 당시 양성애자 남자가 있었는데 걔가 여자 B를 짝사랑했어. 걘 아마 자기가 양성애자라는 거 커밍아웃하지 않았을 꺼야, 스스로에게. 그런데 어떻게 바깥에 커밍아웃을 하니, 웬만한 동성애자도 평생 커밍아웃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 그건 그렇고. 난 당시 B를 처음 알았지. 그때 양성애자 남자가 내게 진실을 털어놨어. B는 무반응녀다, 자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B는 자기랑 딴 남자를 저울질했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사귀지는 않지만 모두 다 어장 관리다 어쩌고저쩌고. 그때부터 B는 옅디옅게, 은근히, 지속적으로, 꾸준히 날 좋아했어. 다만 1위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거만 반복했고. 그래도 차트에 오래 생존한 걸로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최고. 양성애자 남자랑 둘이서 걔네 집 앞에 한두 번 갔는데.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호감이 간다 싶으면 자동적으로 팔짱을 끼는 시늉을 하지. 확실하게 낄 단계는 아니니까 쓱~ 하니 신호만 보내는 거라고. 당연히 B도 그랬지. 또 단짝 친구랑 일터에 들려서 오빠 차 있네, 그러니 데이트해도 되겠네 그럴 수 있겠네, 굴러만 가도 괜찮은 똥차 중의 똥차만 있어도 난 얼마든지 좋아 그게 낭만이지 뭐야. ~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초콜릿 주고 초콜릿 주고. 어디 가면 자동차 옆 자리에 타고. 주변에서도 챙겨주고. 술집에서도 꼭 옆 자리에만 앉어. 그렇게 몇 년. 내가 어떤 직장 임시직으로 들어가니까 친구를 통해서 또 고백. 자기는 5미터 전방에 앞서가며 뒷모습 실루엣과 함께 단짝 친구의 대리 고백. 누구 어떻게 생각해? 중간에 또 친한 친구랑 2 대 1로 만나서 누가 좋냐, 망설임없이 오빠다 항상 오빠다 말할 필요도 없다. 단짝 친구 통해서 또 떠 보고 어쩌고. 나중 딴 직장에 또 임시직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1 대 1 데이트한 거. 핸드폰 문자로 왔다 갔다 주고받으면서 하는 말, 나 죽었어. 으잉? 나중 또 술자리에서 만나니까 쪼르륵~ 내 옆자리에 앉고. 앞에 또 덩치 마피아 하이에나 친구가 앉아서, 둘이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오빠는 아니다, 오빠 만은 아니다 다른 남자는 다 몰라도 오빠만은 아니라는 둥 어쩐다는 둥. 나중 여자 셋이서 섬에 놀러갔다가,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시트콤 친구들 얘기 캐 보면 캐는 대로 계속 나온다니까.
    그런데 그 여자 동생들이 좀 그랬어. 남자친구 있어도 어장관리하는 성격. 딴 남자 끼고 내 남자 만나는 거. 완전히 결혼이 예정되면 내 남자한테 올인하는 건 좋은데, 그 이전에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친구들이라고. 그 친구들이 다 그랬는데 어떻게 마음을 받아주겠니. 또 여자가 먼저 자기는 결혼하면 집에서 얼마 해 줄 거다,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정확한 액수를 당당히 밝히는 일. 그거도 여자 입장에서는 고백이거든. 걘 2000 누군 5000 플러스 알파. 여자가 친구 통해서 사귀지 말고 바로 결혼하자 한 달 내에 결혼하자, 그거도 그거고. 또 술집 포장마차에서 생음악으로 트로트 장르 유행가를 불렀던 애. 걔네들 말괄량이였어. 막 들이대. 아휴~ 말도 마라! 좋은 듯 난감한 척하기도 힘들었지.
    그럼 대체 뭘 어장 관리로 봐야 할 것인가. 그 기준은 뭔가. 요즘에 어장관리 안 하는 친구도 있나. 그럴 수도 있어. 어장관리 안 하는 친구도 있긴 있더구만. 내 피앙세. 미니홈피 유행할 때 보니까 딱 알겠더라구. 이성 친구나 아는 동생 아는 오빠들 많으면 내가 인기 많다는 만족감? 우쭐감? 안정감? 흡족함?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타석이더라고. 어차피 가능성 전부 열어놓은 거니까. 피앙세 같은 여자를 보면 억지로 떠밀려서 민폐 손님과 몇 번 만나 주는 거는 연습 게임. 남녀공학 학교에서 똥파리처럼 달라 붙는 애들 무리 가운데 제일 질기고 가장 끈질기며 최고로 집요한 애를 졸업하기 전에 몇 번 만나준 거랑 똑같이. 하나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타고난 애교녀가 도무지 애교 부릴 마음이 동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차갑고, 말도 많이 안 하고, 남자도 웃기지도 않고. 스토커가 끔벅끔벅 차 한 잔만 마셔 주라고 해서 진짜로 차만 마시다 끝난 사이. 하던 시험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자주 보지도 못하면서 꿈도 야무지게 말이야. 꼭 보면 타큐멘터리 인생 드라마를 보면 그렇게 맺어진 사이에서, 여자가 불감증 걸려. 불감증이 괜히 걸리는 게 아니야. 그러다 여자가 절정을 50 넘어서 겨우 알까 말까. 당연히 남자는 밖으로 돌지. 습관이자 취미처럼 돌겠지. 여자만 바보되고 인생 꽝 되는 거라고. 어차피 그녀 책임 절반. 물론 남자가 죽일 놈이지만. 어쨌든 걘 어장 관리 안 하더란 말이지. <여자는 그래요>에 한 발만 걸친 게 아니라 두 발 모두 다소곳이 평생 빼낼 마음이 없는 숙녀. 걔들은 한번 마음을 주면 웬만해서는 정 떼기 힘들어. 물론 마음 안 주고 몸 안 주었으면, 뒤통수 맞은 건 억울해하고. 그게 다 만나 주니까 그런 거라고. 일단 1 대 1로 만난다 라는 것. 애초에 커닐링구스, 펠라치오, 딥키스 하루 12번 육체적 사랑 날마다, 내가 바라던 얼굴이 바로 이 얼굴이다 라는 자신감 없으면 끌려가지 말아야지. 말리면 말린 사람만 바보. 나중 아아 이번 인생은 이러다 끝이구나 라면서 환멸하고. 이번의 내 여자 인생 여기까지구나 라면서 슬퍼하고. 엮이면 엮인 사람만 두고 두고 뱁새 미만과 그 주위에 다 똑같은 동류만 보게 될 테고. 목적녀나 성과녀로 남몰래 튀어도 문제지만, 너무 순진해도 탈이라 그거야. 때가 묻지 않았으니까 그녈 꿰찬 늑대야 뭐 좋긴 좋겠지만 말이야. 허허허. 대어도 어떻게 그런 대어가 다 있냐고. 허허허. 그렇게 연습 경기 같지도 않은 연습 경기는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정하고 몇 개월 동안 친구랑 목표로 선정한 퀭하고 허접하고 매가리없이 생긴 자상남을 공략하는데 성공. 결과 분석하니까 타율 100퍼센트라 그거야. 아무튼,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냄새는 뭔 냄새?」
   「너 향수 뿌렸니?」
   「하다 하다 넌 이제 전화기로 내 향수 내음까지 맡는 거니? 늬가 뭔 개코야? 어?」
   「워워. 진정하고. 너 심심해서 전화했지? 뭐해, 우리집에 놀러오지 않고.」
    그렇게 NB는 존티를 만나려다가 토마스네 집에 놀러갔다.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토마스네 집에 도착. 





    3

    그는 캐묻고 따지기 좋아하는 성정은 아니다. 단, 불리한 일만 빼고. 그런데 토마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보는 순간. 조곤조곤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뭐하니?」
   「뭐하긴 보다시피!」
    토마스는 자기 집 정원에 있는 미니 수영장 바닥을 미니 포크레인으로 파고 있었다. 둥둥둥둥~ 바닥을 쪼고 있었다. 미니 포크레인의 코끼리 코 끝에 뭘 결착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 부착물이 있듯이. 그거 뚫는 뭔가를 붙여서 미니 수영장 바닥을 뚫고 쪼고 파헤치고 있었다. 
   「토마스. 늬가 무슨 딱따구리니? 거길 왜 파?」
   「그럼 내가 탐 크루즈냐? 아님 제이슨 본이니. 다 팔 만하니까 판다. 너 왔으니까 이제 좀 쉬어야겠다.」
    그러면서 토마스는 미니 포크레인에서 내려왔다.
   「뭔데 이리 난리야? 뭔데 그래? 뭐야? (NB는 미니 수영장 바닥을 살펴봤다) 에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 됐고. 그러지 말고. 우리 놀러 가자.」
   「말 돌리지 말고. 대체 뭐야?」
   「듣고 싶어? 듣고 나서 감당할 자신 있어? 어?」
   「아 웃기지 말고. 어서 말이나 해.」
   「허허. 다름 아니라. 그 뭔 영화더라. 자기 집 정원에 삽과 포크레인으로 구멍을 파헤쳐서 어쩌고저쩌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그러다 끝나는 영화. 그 영화의 결말이 기억나지 안아서. 그래서 파 보는 거야.」
   「정말이니? 나 그 영화 결말 아는데.」
   「그래? 뭔데? 뭔데 정말?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열린 결말 아니야. 미안하지만 해피 엔딩이 아니라고.」
   「그래? 그럼 그만 파야겠다. 에잇 괜히 팠잖아?」
   「그러게 멀쩡한 수영장 바닥을 왜 파니? 늬가 뭔 두더쥐니?」
   「내가 두더쥐는 아닌데. 그런데 넣을 구멍이 없어서. 농구공은 농구 골대에 넣어봤고. 골키퍼 있어도 축구공을 골키퍼 다리 사이로도 넣어봤어. 그런데 최근 에잇 말 말자.」
   「죽은 말에 채찍질하는 격. 힘 빼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하니까. 알겠니?」 
   「그럴까? 내가 어디에 홀렸나? 내가 정말 왜 이랬지? 그렇지만 에너지를 어딘가에 허비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거 참 나 정말 이거 원. 뭐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하긴 뭘해. 누가? 내가? 내가 왜! 하긴 왜 해. 안 해. 귀찮어. 기분도 별로. 누가 재촉하는 거도 아니고. 명분도 그닥. 별로 내키지도 않아. 별달리 성화하는 분위기도 아니잖아. 안 그래? 안 그러긴 뭐가 안 그래. 혼잣말도 재미없다 재미없어.」
   「그러고 보니 너 정말 이상한 취미가 생겼구나. 아무래도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은데? 많이 안 좋은 거 같다고.」
   「응. 늬가 봐도 그렇지? 제대로 봤네. 나 상태 안 좋아. 그런데 뭐. 뭐? 남이사 뭘 하던. 남의 인생.」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냐고. 서운하게 정말 이러기야? 사람 섭섭해지네. 너 설마 내 험담하고 다닌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됐고. 나, 사랑하고, 싶어.」
   「아 쫌!」
    그래서 토마스와 NB는 동네 친구 폴네 집으로 놀러갔다. 





    4

    폴의 집. 토마스, 폴, NB. 
    세 친구는 맥주 마시고, TV 보고, 게임하고, 그러다 폴네 집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서 그날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토마스와 NB는 오늘 폴 네 집에서 자고 자기로 했으니까. 
   「내가 저번에 그 얘기 했니?」
   「무슨 얘기?」
   「나 있지 옛날에 대학교 다닐 때, 학과 후배가 오리엔테이션 가서 똥싼 거.」
   「넌 왜 그 얘기를 지금 하고 그래? 어서 해 봐 어서 해 봐. 뭐해, 빨리 말하지 않고!」
   「이 자식이... 넌 꼭 그런 얘기를 지금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어? 아 뭐해 빨리 말하지 않고!」
   「허허. 난 2학년 걘 1학년. 우리들끼리 밤에 모여서 술 마시며 진실게임, 왕게임, 술게임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걔가 필름이 끊겼나 봐. 걔가 술게임하다 갑자기 바지랑 팬티를 내리더니, 아 여자가. 것도 새파란 스무살. 꽃다운 여대생 1학년이. 우리들 앞에서 빤하게. 걔가 갑자기 바지랑 팬티를 내리더니, 그 뭐야? 아, 우리가 먹던 소세지 야채 볶음. 맛있었어. 요리사가 꿈이던 친구가 정성들인 특급 요리였거든. 그런데 있지, 걔가 그 후라이팬에다 대뜸 똥을 싸네? 그럴 줄 누가 알았겠니! 그러고 나서 술 취해서 그대로 골아떨어져서 옆자리에서 잠들고. 그게 다야. 우리만 그거 뒷처리한다고 난리났지. 판 깨고. 분위기 파장이고. 그런데 더 이상한 게 뭔 줄 아니?」
   「뭔데?」
   「뭐냐고 묻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어? 어서 말을 하라고 이 친구야.」
   「허허. 그거 뒷처리하면서 막 투덜거리고 짜증내거나 딱 그래야, 드라마 전개 상으로는 그래야 정상인데. 거기 모인 우리가 이상했던 걸까? 우린 모두 말수가 줄어들다가 뚝 끊겼어. 그러다 실없이 웃고 막 그랬거든. 있지 얘들아, 그런데 또 이상한 게 뭐냐면. 그 가운데 한 명은 울었어. 그런데 걘 또 왜 울었는지, 난 그걸 아직도 모르겠다. 참 알다가 모르겠다니까.」
   「뭐 그럴 수 있어. 잠시 당사자 챙피하고, 다음 날 당사자가 말 걸면 어색하게 웃을 듯 말 듯 겸연쩍어 하면서 피하고. 그래도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그런데 나도 그거랑 비슷한 일 있었어.」 NB는 이렇게 말했다. 
   「뭔데?」
   「너 설마 바지에 똥쌌냐?」
   「아니 나도 삼류 대학교 다닐 때. 1학년 때 성적 안 좋아서 학사경고 누적되어 다음 해에 재입학. 그래서 95학번인데 96학번이랑 지냈지. 94학번이 1회 입학생이고. 그렇게 94, 95, 96학번 셋이서 놀러갔어. 그렇게 MT를 갔다고. 그러다 으쌰으쌰 자기들끼리 어쩌고저쩌고 할 때 난 단짝이랑 무리를 이탈해서 산으로 올라갔지. 그러다 산에서 주인없는 카페를 발견했고, 그 버려진 카페 있잖아. 그런 거. 그런데 내부에 술이랑 그런 건 그대로 남아 있고. 스무살이면 한참 맨발의 청춘 아니니, 한창 때 아니냐고. 그래서 그 카페에서 웬 양주가 보이길래 단짝이랑 나랑 그거 각자 1병씩 갖고 나왔고, 산 중턱에서 둘이서 그거 마셨어. 응? 병나발! 해 봤지? 안 해 봤으면 해 보던가 말든가. 그렇게 깡 위스키. 그러다 난 필름끊겼고. 걔가 업어서 날 애들 모여있는 데로 데려갔고. 막 저체온증 걸린 날 애들이 주물러주고 조물딱조물딱 주물러주고 어쩌고. 나중 들었더니, 나 인기 많았나 봐. 말이 그렇다는 거고. 허허. 그렇게 하루 꼬박 지나서 난 깨어났어. 그때 나도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았는데, 아마 나도 그랬던 거 같아. 바지랑 팬티 내릴려는 시도까지만 했을 수도 있고. 아님 끝끝내 실내에서 오줌누는 장면을 모든 사람들 보란듯이 보여주었을 수도 있고. 나도 딱 그랬어. 그래도 꿋꿋이 이겨냈지 뭐.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뭐. 그런데 그런 일 또 있어.」
   「뭐 또?」
   「또? 이 자식이...」
   「왜 얘기하지 말까? 얘기하지 말라면 얘기하지 않고.」
   「이거 왜 이래? 칼을 뺐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니 그래서가 아니지. 뭔 일이 또 있는데? 빨랑 말 안 해?」
   「어. 알았어 알았어. 허허. 2008년이던가. 애들이랑 1박 2일로 별장에 놀러갔는데. 놀고 나서 밤에 잘 때. 사고뭉치 친구가 자다 깨서 깜깜한 방 안에다 오줌을 누네? 내게 기억이 각인됐고. 나중 그 사고뭉치가, 걘 입만 열면 손만 까딱하면 민폐이자 하자에다 진상이거든. 그래서 나의 사랑스런 피앙세가 우리들 친구와 잤다며 망발하기를 서슴치 않았고. 그 트라우마 치유하느라 난 집에서 혼자 술 마시다가 수없이 오줌을 누었어. 집에서 나 혼자 술 마실 때마다. 내 방에다. 거실에다. 컴퓨터 뒤에다. 의자 옆에다. 옷장 옆에다. 도대체 몇 번인 줄 셀 수가 없었지. 한동안 그러다 멈췄어. 하다 하다 딴 친구 집에도 오줌 눴는지, 그건 뭔가 불확실한데 뭐 넘어가고.」
   「너 개냐?」
   「개는 잘 가려. 얜 사람이고.」
   「그런데 난 개들이 오줌누고 똥누는 거 보면 기분 좋은데. 너넨 안 그러니?」
   「난 고양이 안 좋아해.」
   「난 개 보면 무서워. 우리 조카가 딱 그러는데. 막 겁먹고 엉엉 우는데, 나도 걔랑 약간 비슷해. 허허.」
   「그런데 우리 똥 얘기 이제 그만하면 안 되니? 이거 고기 먹는 자리에서 꼭 그런 얘길 해야겠니? 우리가 무슨 초딩이야 뭐야? 어?」
   「늬가 시작했어.」
   「너도 거들었잖아.」
   「제일 신나게 들었던 게 누군데?」
    그렇게 폴네 집에서 세 친구는 재밌게 놀았고, 다음 날 헤어졌다. 





    5

    다음 날. NB는 헨델의 실내 이중창곡 ‘그대만을 바라보다 길을 잃었네’ HWV178번을 들으면서 집으로 갔다. 
    사랑의 본질과 흑심의 본색에 대해서 생각할려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심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고.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 앞에 웬 똥이? 뭐야 새똥이야 개똥이야! 
    그 근처에 잔디 깎는 기계, 잔디 깎는 기계도 종류가 많지만 그 가운데 제일 간단하고 제일로 허접하며 제일로 구닥다리인 골동품. 그게 세워져 있었다. 
    뭐야, 그럼 사람 똥이잖아? 왜냐하면 최근 웬 이상한 사람이,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는 기인이, 아마도 미친년일지도 모를 숙녀가 NB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오빠. 제 환상머신이랑 오빠 차랑 바꿔요. 왜요, 이게 잔디 깎는 기계처럼 보이나요? 아니에요. 이래뵈도 타임머신 저리 가라라니까요. 일단 타 보시라니까요. 말 마시고요. 왜요, 제가 좀 상태가 이상해 보이나요? 저 멀쩡해요. 저 트라우마녀 아니라고요. 그런데 세상에, 아니 벌써 까마득했던 할 말이 여기서 바닥나다니 뭐야 이거. 저런 저런. 내가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그 얼마나 많았는지 아세요? 네? 아시냐고요 모르시냐고요! 제 장래 희망이 뭐였는 줄 아세요?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겠어요, 자기 장래 희망도 모를 텐데. 하여간에 인생은 엉망이고 상상력은 손해가 막심하고. 그럼 사랑마저 염증을 느낄려나? 그래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길 원하신다면. 그렇다면 제가 가진 허름한 잔디머신과 오빠 볼보 웨건이랑 바꾸게요. 네? 
    왜요, 별로 내키지 않나요? 그럼 거절하시면 돼죠.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도록 뭘 그렇게 쩔쩔매고 그래요? 싫으면 싫다 꺼져라 닥쳐라, 네? 너나 잘해 어디서 지적질이야, 어? 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오빠를 만만하게 보는 거죠. 안 그래요? 저 봐요 절 보라고요. 전 아무도 못 믿어요. 어떻게 믿어요? 누구도 못 믿죠. 그럼요. 허허허. 그 냉소를 따스히 쓰다듬어, 포근히 애무하고, 사랑스럽게 애정으로 포장하면 어떠냐구요? 그럼 다시 쾌활한 말괄량이로 변신할 수 있다구요? 사랑은 없어요. 사랑이 어딨어요. 사랑은 변한다구요. 사람마저 왜 안 변하겠어요. 모든 것이 변해가는 거죠. 그럼요. 물론 웬만하면 그렇다는 말이지 진짜로 다 그런 건 아닐 테구요. 오빠 가만 보니 순진하시네. 거짓말도 잘 못하시겠구만. 아닌데. 알고 보면 오빠 같은 사람이 세상물정에 눈 뜨고 나면, 그럼 꽤 괜찮은 허풍꾼이 되는데. 알고 보면 딱 이런 인간이 난봉꾼으로 딱인데. 아닌가? 아닌 게 아닌가. 
    뭐, 너나 사랑 많이 하라고요? 사랑할 수 있지만 귀찮게 뭐하러 그래요? 어차피 사랑은 차갑게 식고 말 텐데요 뭘. 하긴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라는 말을 할 기회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한 적도 일절 없었고. 그런데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어머머. 내 정신 좀 봐. 이런 멜로드라마 같은 전개. 너무 진부해요. 기승전결없이 무작정 절정. 뜬금없이 흥분. 밑도 끝도 없는 줄거리. 짜증나요. 재미없어요. 알 게 뭐에요. 식상하다고요. 안 그래요? 저도 이런 똥차 싫어요. 이런 거 새 차로 몇 백 대를 가져와 봐요, 내가 눈 하나 깜빡하나 보게. 누군 뭐 얼마나 좋아서 이빨 까는 줄 아쇼? 내가 뭐 미친년인가. 오빠가 바보네. 것도 사랑의 바보. 그러지 말고, 어디 오빠의 연애사나 들어봅시다. 그 잘나신 사랑의 설을 좀 풀어보시라구요. 왜요, 이야기 보다리를 풀어놓자니, 내가 오빠를 덮칠 거 같아요? 안 그래요. 아니에요. 저 처녀에요. 그럼요. 호호호. 전 사랑을 아직 모른답니다. (············어쩌고저쩌고············)」
    어떻게 잘 꾸미고 옷만 잘 입고. 그러면 썩 괜찮은 아가씨로 보일 텐데. 원래 상태가 이상한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 마치 길에서 갑자기 낯선 여인이 전화기를 빌려달라는데, 차림새를 보자마자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람처럼. 오다가다 만나서 말 몇 마디 섞었는데, 전형적인 사기꾼의 달콤한 수작이랄지 자연스러운 과정도 없이 무턱대고 오빠 거랑 내 꺼랑 바꾸자는 정직함. 솔직함? 마구잡이 떼쓰기. 살면서 어쩌다 한 번쯤 만나게 되는 그런 일들. 그도 그랬다. 뭐 그런 일도 있고 보통은 아무 일도 없고. 
    살다보면 부득이한 일도 없지 않고. 바나나 껍질 밟은 셈 치지 뭐. 새똥 맞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편 다시 생각해 보니 상태가 안 좋은 낯선 아가씨의 말발, 꽤나 대단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운 좋게 얻어걸린 발단이 신나는 전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하필 똥으로 끝나서 그렇지. 그래도 사교계의 입담꾼으로 간판격인 아가씨. 본 게 어디고 만난 게 어딘가. 그녀 입장에서 체면치레 했을지 못 했을지 몰라도. 화사한 행운을 벌충할려면 뜬금없는 일도 액땜으로 여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래서 희박한 우연의 일치를 살짝 재밌어하는 듯 말 듯 하다 그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걸 가지고 무슨 상징이니 징후니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프니까 말이다. 





    6

    NB는 생각했다. 바지에 똥을 싸지 않는 이상 우물 안이라는 컴포트 존을 벗어나는 건 힘들지도 모른다는 걸. 친구들이랑 한참 그 얘기 때문에 당분간 썩 뭔가 괴로울 듯 한데, 또 다시 이 와중에...! 당분간 곤혹스런 기억을 이겨낼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려나. 만에 하나! 점점 초딩들 좋아하는 거만 생각하다 아예 응애응애 기저귀 차면 어쩌지? 사람팔자 알 수 없다고 그때 되면 또 어떻게 다 풀어나가겠지. 걱정도 팔자다. 사전에 대비하고 미리미리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건 좋다만. 엉뚱한 공상 때문에 극도의 난처한 망상을 사서 할 필요까진 없었다. 
    자, 그러면 그 다음에.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돼긴 뭐가 어떻게 돼. 누가 뭘 어떻게 하냐고. 입도 뻥긋하지 말고 행동하기 밖에 방법이 없는 거지. 따라서 그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놀 수 밖에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수순이 그렇게 됐다. 나도 모르게 생각의 흐름이 그렇다는 걸 NB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서 사용하지 않는 모니터 위에, 포스트잇 3장을 붙였다. 혹시 모르니까 구상과 착상에 도움될 거 같았으니까. 즉 거기 뭐라고 씌여있었나 하면 이랬다. 
    1. 땅 파기
    2. 구멍에 넣기
    3. 마빡에 글씨 쓰기
    4번 페인트 바르기는 생략하고. 
    이 세 가지에서 해 본 거 안 해 본 거. 직접 본 거 못 본 거. 뭘 해야 하나. 다 귀찮다. 재미없다. 대단한 허풍선이요 하찮은 행동가, 그것도 다 옛날 얘기. 
    그런데 바로 그때. 
    마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거긴 대체 뭘 먹고 사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마라 일당들이 일을 하긴 하는데 뭔 일을 하는지. 그는 아직도 몰랐다. 
    그래도 이따금 업계 동료의식도 들고 구경 가는 재미도 있으니 간혹 들르긴 했다. 
    그러다 한동안 뜸했던 거고. 그래서 마라는 미끼를 던진 거고. 그는 미끼를 물어서 결국 자신이 대어가 아니라 잡어임을 마라한테 증명하면 그뿐. 
    그렇게 그는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로 갔다.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도착. 
    마라의 편집장실에 도착. 
    마라는 생리대로 코를 풀고 있지도 않았고, 탐폰으로 귀를 후비고 있지도 않았다. 
    단지 고위급이 앉는 그런 중후한 의자가 뒤로 돌려져 있었을 뿐. 
   「인기척을 더 크게 하리? 뭐하니? 너 설마... 남자 생각하니? 그런 거니?」
   「」
   「왜 말이 없어? 못 본 척하면 다야? 모른 체하면 그만이냐고. 응?」
   「」
    그는 의자 곁으로 갔다. 역시나 마라가 앉아있는 게 아니라 사람 크기 인형이 앉아있었다. 
    그때 마라의 친구인 지아니가 편집장실로 들어섰다. 
   「어? 늬가 여기 웬일이야?」
   「오빠는 여긴 웬일인데? 마라 언니 휴가 갔어. 것도 멀리.」
   「뭐라고? 난 마라 전화 받고 왔는데.」
   「장난전화겠지. 인공지능 사람 목소리 복제하기 어플리케이션. 몰라?」
   「맞아. 뭔가 이상하다 했다.」
   「그럼 이제 우리 둘이 허니문 떠나면 되는 거야?」
   「뭐?」
   「왜. 나 싫어? 싫지 않잖아?」
   「너 원래 이렇게 도발적이지 않았잖아? 왜 그래? 요즘 외롭니? 그런 거니? 누구, 괜찮은 남자 소개시켜줘? 내가 아는 남자들이 좀 많니.」
   「다른 남자들 말고. 오빠. 응? 난 오빠.」
   「어허. 사람 놀리지 마. 괜히 들었다 놓지 말라고. 호기심에 고양이가 데이거나, 장난삼아 던진 돌맹이에 개구리가 옥고를 치르거나. 알잖아.」
   「오빠. 그런데 얼굴이 못 본 사이에 많이 초췌해졌다. 오빠 원래 그렇게 얼굴이 퀭했어? 완전 이건 퀭 중에 퀭이네. 안 그래, 오~빠!」
   「다크서클. 이거 곧 없어져. 해변에서 일광욕 좀 하고 비키니 구경도 하고. 다 어디 가서 놀러오라는 신호겠지 뭐.」
    (잠깐. 지아니의 대사가 살짝 길어졌음)
    (많이 길어졌음)
    (그래서 지아니의 긴 대사는 따로 칼럼으로 엮음)
    (칼럼 제목 : 나이와 비례하는 피부. 체모. 군침)
    (다시 지아니의 대사로 이어가서)
    그런데 내가 오빠한테 애액 얘기를 왜 하고 있지? 오빠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니?」 
   「오빠 때문이라면 좀 오빠 때문인 줄 알어. 어?」 
   「그래? 응. 아, 나 때문이구나. 미안 미안. 귀에서 피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깜박했어. 미안.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야.」
   「그렇지? 그렇지? 그럼 뭐 우리가 질외 사정을 논해야겠니? 어? 그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러지 말고 이거 받아.」
    그러면서 지아니는 웬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여성환상 1.5에서 의뢰한 칼럼이지. 애액 충분히 나올 때까지 남자들이 느긋하게 기다려 줘야 한다, 그렇지만 그거 다 기다리다간 남자들 풍선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판 깬다 어쩐다, 그러므로 액션 영화 말고 약간 애매한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는 게 딱이다. 또는 새벽에 여자가 고조되었을 때 남자가 깨어나서 달리는 게 최적이다. 사랑이란 일단 애무만 길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렇다고 마빡에 뭘 쓰고 다니란 말은 아니다. 물론 새벽녁에 여자가 뜨겁다는 전제 하에. 그게 아니라 여자가 꿀잠 중에 불쑥? 그건 여자 입장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예의가 아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10대 때 딱 1번 약한 몽유병 때문에 부모님 방에서 잤다가. 새벽에 깨서 뭔가를 느끼고 쥐 죽은 듯 다시 잤다는 기억 같은 거 포함되면 좋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응, 오빠! 그러나 사랑도 일이긴 하다. 배고픈 개는 더러운 푸딩도 먹는다. 고양이가 배고프면 빵 껍질에도 만족한다. 배고프면 딱딱한 콩도 달다. 허나 배부르면 만찬도 지겨울 수 있다. 그런 거. 응? 그런 거 말야.
    그런 칼럼 하나 써달라는 거지. 아, 일하라고. 오빠 돈 벌어야 할 거 아냐? 이 오빠가 말이야, 어? 고양이가 생선은 먹고 싶어 하면서 발을 적시기는 싫어하네. 응? 지금 어디서, 손 안 대고 코 풀려 하고 그래? 응? 오빠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땐 줄 알어? 어? 오빠. 우리 그러지 말자. 응? 응, 오빠. 왜 또 듣고 싶니? 오빠. 오빠. 오빠. 얼마든지 해 줄께. 돈 드는 거도 아닌데 뭘. 오빠. 오빠. 오빠. 먹고는 살려면 다 그런 거야. 어? 그런데 이거만 알아둬.」
   「뭘? 뭘 알아두라고.」
   「나 지금 젖지 않았다는 거. 꿈도 꾸지 말라고.」
   「아 정말! 꿈은 너나 꾸지 말어. 흥!」
    그러면서 지아니는 지 할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그는 농락 당할 만큼 당해버렸다. 아주 그냥 너덜너덜해져벼렸다. 
    그런데 그게 썩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그 어딘가로 외출해버렸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 NB는 일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7

    말싸움에 탐닉하고 트집잡기에 집착하는 코뿔소. 우기기 좋아하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걸 싫어하는 고집불통 황소. 물과 기름처럼 자석의 같은 극처럼 문명을 밀어내는 호모 사피엔스 본능.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언제 본색을 드러내는가. 그야 모르겠고. 뭔 얘기인 줄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걸 말하고 듣고 읽고 관심을 끊지 못하는 사람은 또 뭐냐고. 곧 있으면 인생의 경이로운 광채가 포문을 열든 말든. 기막힌 환희에 대한 반발심으로 갑자기 동네 똥개가 똥 마렵든 말든. 그야 남의 일이고. 어쨌든 평소 같으면 얼씬도 하지 않을 탐문.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햄버거를 파는 피자가게 방문이었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몰라도. 그 피자가게에서 포장한 피자를 사 들고 이동하여 집에서 그 박스를 풀었을 때. 만약에 햄버거가 들어있으면 로또 복권에 버금가는 행운이 찾아온다는 뭔 믿거나 말거나 미신이 퍼졌던 것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왕 뻥이요 개 구라에다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 그렇지만 개도 풀을 뜯어먹고 고양이마저 이따금 잡초를 뜯어먹을 때도 있긴 있다. 호랑이가 배고프다고 풀을 뜯어 먹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몰입감 때문에 NB는 피자집 문턱이 닳아질 새라 아예 출근하다시피 피자를 먹어댔다. 날이면 날마다 피자만 먹었다.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까정 아니고. 그렇지만 자연의 법칙이 뭔가, 싫증 아닌가. 곧 그것 역시 금새 지겨워졌다. 한동안 진득하다 그랬지. 
    그래서 그는 여기서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럼프를 이겨내고 다시 피자 식탐에 중독됐다. 이 음식 저 음식, 맛난 음식에 과도하게 몰입했다. 그 가운데 최근에 유독 피자에 대한 탐닉은 끈질겼다. 그게 아마 동네를 산책하다가 동네 똥개가 피자 1조각을 물고서 어딜 바쁘게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반했기 때문일까? 그걸 누가 알겠나. 앞 문단에 나온 그 피자집 말고 그는 여러 피자 가게를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NB는 대중적인 피자 브랜드 가게에서 피자를 먹다가 친구인 자콥 커퍼필드를 만났다. 
   「자콥 너 여기서 뭐해?」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여기 늬 구역이니?」
   「늬 구역 내 구역이 어딨어? 우리가 무슨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쫄따구니? 겉으로만 보면 넌 보스. 그럼 난? 나야 행동대장에 오를 뻔 말 뻔 부침이 심하다, 결국 팽당한 걸로도 모자라 말단 구석자리로 밀려난 넘버 쓰리. 그런데 피자는 많이 먹었니?」
   「피자? 아니 별로.」
   「왜? 피자집에 온 건 피자를 먹으로 온 거 아니야?」
   「피자가 더럽게 맛없더라고. 허허. 농담이고. 요즘 입맛이 없어. 입맛만 없는 게 아니라, 뭘 해도 재미없어. 너 뭐 재미난 일 없니?」
   「재미난 일? 많지. 그런 거면 날 찾아왔어야. 그거 내 전공이잖아. 넌 꼭 가만 보면 번짓수도 제대로 못 읽더라.」
   「재미난 일이 뭔데?」
   「재미난 일? 두 가지가 있지. 아니 세 가지. 
    첫째, 구멍에 넣기 일명 구멍치기라고 하지. 
    둘째, 땅 파기 즉 어딜 파고 무얼로 팔 것인가는 네가 정하는 거고. 그리고 
    셋째. 너가 최근 몹시 염원하는 뭔가가 있니? 없으면 기다리고. 만약 바라는 소망이 있다거나, 희구하는 목표가 있으면 그걸 이루는 방법. 딱 있지. 딱 있어. 그게 셋째야. 그게 셋째라고. 
    그건 뭐냐, 기대하는 게 만약에 햄버거 많이 먹기 대회 1등이다 라고 했을 때. 목표로 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이마에 써. 어? 매직펜으로 이마에 햄버거왕, ~라고 쓰라고. 어? 아니면 거창한 거 바라지도 않고, 귀엽게 그냥 허풍대회 입상 정도? 이마에 써, 허풍 지존이라고. 어? 물론 벼락부자랄지 마술사랄지 어이없는 걸 바라면 당연히 어림 반푼어치도 없고. 그게 아니라, 그나마 미약한 희망이랄지 미세한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바로 그 셋째 방법이 확률을 높여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고. 어때? 뭐 바라는 거 있니? 기다리는 무슨 도전장이나 방어전이라도 있니? 있어? 있어 없어? 없으면 나랑 같이 놀고.」
    그렇게 해서 NB와 자콥은 근처 바로 자리를 옮겼다. 





    8

    해질녁이 가까와 지는 시간. 행복도가 밋밋한 바닥 기어가기에서 완만한 상승세로 전환하려는 시점. 일찍 달리기로 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할 겸 그들은 근처 바, <너만 알고 있어>에 자리를 잡았다. 
   「자콥. 난 있지. 요즘 꿈이 잘 기억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라도 내가 꿈에서 널 깠더라도 날 이해해 줘. 아울러, 만약 네가 험담해도 나는 함구할께.」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얘기야? 뭔 개소리냐고. 시작부터 이러기야? 진정해 친구. 천천히 몸부터 풀자고.」
   「뭐 몸을 풀어?」
   「또 또 또. 재밌기 그지없군 그래. 아까 너가 말한 방법 때문에 넌 재밌는가 몰라도 난 그냥 그래. 내가 너무 진지한 걸까?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나. 안 그런가?」
   「너 최근 여자 생겼니? 새로운 여자? 생겼네 생겼어. 말 해 말 해. 어서 말 안 하고 뭐해?」
   「하여간에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원래 넌 왔다 갔다 종잡을 수 없어. 가만 보면 직감이 끝내주던가. 아니면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말 끝을 흐리고, 말하는 도중에도 막 뭔 생각을 엄청 해.」
   「됐고. 말 돌리지 말고. 날 떠볼려고도 생각 마. 어떤 여자야? 기가 세? 기 빨려? 아님 기 받어?」
   「무슨 벌써부터 기 받고 기 빨리고 그걸 생각하니. 이제 겨우 탐색전일 뿐이야. 이제 시작이라고.」
   「이제 겨우 전초전 근처에도 못 간 데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날지조차 확실히 모른다? 늬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알어? 늬가 그러니까 매번 차이는 거라고. 어? 그러니까 확실하게 노선을 정해. 벼락치기일 것이냐, 간격 효과일 것이냐. 어? 티 좀 내 임마.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응?」
   「내가 다 알아서 할께.」
   「다 좋다 이거야. 다 좋다고. 허허. (......시선 전환......) 그럼 난 우리 바텐더와 독대해야지 뭐. 우리 바텐더 아가씨~! 바텐디스란 말이 있나 없나는 몰라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숙녀가 아니신데. 떴어도 진작 떴어야 마땅하신 분께서 왜 여기에! 요즘 한참 TV에 나오고 연예계를 뜨겁게 달군 누구보다 훨씬 이쁘네. 나 아까 따질라 그랬어. 다짜고짜 소리 지를려고 했다고. 여기 무슨 미녀대회 우승자만 바텐더로 뽑냐고. 진짜로 멱살잡고 사장이랑 싸울 뻔 했다니까. 겨우겨우 참았다고. 우리 같은 아저씨 동네 노땅 말수 없는 늙다리들이랑 그래도 좀 말이 통하려면, 응? 그래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숙녀가 제 격 아닌가? 갓 스무살 뽀송뽀송 애기를 떡하니 뽑아놓으면 우리가 쳐다보기 아깝고 민망해서 어디 말이나 제대로 걸겠냐고. 안 그러유?」
   「하여튼 말만 말만 그냥...」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소, 바텐더 양반.」
   「궁금한 게 뭔데요, 오빠!」
   「저쪽에 저 꽤 멋지게 보이는 손님.」
   「아 저분이요?」
   「저분 별명이 혹시 발렌타인 30년 아니요? 아님 조니워커 30년산인가?」
   「어머머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이 친구야. 저 친구 이마에 씌여 있네. 발렌타인맨이라고.」
   「네? 농담은 참.」
   「야 자콥. 넌 보이지 않니?」
   「뭐가? 마빡에 발렌타인맨이라고? 너 마침내 미친 거니? 이거 이거 축하해야 하니 답답해 해야 하니?」
   「아 농담하지 말고. 진짜로.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 있어?」
   「하라면 할께. 걸라면 걸고. 판돈은 부족하지만 못할 거 없다 이거야.」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가죽점퍼 입은 발렌타인맨이 다른 바텐더와 게임을 하다 졌기 때문에, 다른 바텐더가 왼 손을 펴서 발렌타인맨 이마에 대고, 오른손으로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당겼다가 빡~! 그걸 보고 나서 NB는 식겁했다.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가 봤던 포스트잇, 발렌타인맨이라고 씌여진 포스트잇이 그분 이마에 붙여져 있었는데, 바텐더의 가운데 손가락과 포스트잇의 영상이 겹쳐져버렸기 때문이다. 뭐야 내가 헛것을 본 거야? 라면서 NB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때문에 NB는 더 이상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서로 보는 눈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현상 역시 다르니까. 
    즉 악마로부터 오는 것은 악마에게 돌아가는 법인데. 이게 웬 봉창 뜯는 일이냐고. 사과는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이런 신통한 요술 같은 천리안이 자신한테 계승될 수 있냐 그거지. 좋든 싫든,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러니 배겨낼 턱이 있나.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차도를 찬찬히 지켜보는 수 밖에. 이상한 능력에 따라 칭찬 받아 마땅한 전개가 출연할지 말지. 불운은 잠재우고 행운을 꽃 피울지 어쩔지 기다려보는 수 밖에 없었다. 
    단, 이게 과연 믿을 만한 초능력인가 아니면 엉뚱한 우연인가는 차차 지켜보면 알 테고. 그래서 그는 당장 내일부터 시험해 보기로 했다. 





    9

    다음 날 NB는 친구 사무엘의 투자사무실에 놀러갔다. 
    짜식 나름 고상하게 고전음악을 듣고 있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 현악사중주 12번.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너가 고급 정보를 나만 쏙 빼놓은 채 주변에 퍼트릴까 봐. 그래서 깜짝 방문했다. 됐냐?」
   「돼긴 어떻게 돼. 그런 거 알고 있으면 늬가 날 살려주라.」
   「왜, 최근 몇 장 말아먹었냐?」
   「말아먹긴 뭘 말아먹어.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으나, 본전이야. 판돈만 키우다 남 좋은 일만 시켰다고. 지금이 아마 새로운 전환기일지도 모르고. 아둥바둥 살면 뭐하냐. 밤에 외로운데.」
   「아 나 이거 또 거 참 나 원 허허. 우리 그런 얘기 하지 않기로 했잖아. 너 설마 나한테 똥 이야기 할려는 건 아니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저기서 기다려. 내겐 그래도 저분이 큰손 중의 큰손이니까. 순서는 저쪽이 먼저라네.」
   「어. 일 보고 와.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그처럼 NB의 주문이 주효한 것일까? 사무엘은 침착해도 침착해도 너무 침착했기 때문에 장장 1시간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1시간 후. 
    큰손인가 작은 손인가는 갔다. 
   「고객님과 면담은 잘 됐니?」
   「아직. 좀 더 공을 들여야 되나 봐. 뿜뿜 팍팍 푸쉭푸쉭. 그런데 진짜로 원하는 뻠쁘질이 뭔지 아직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감을 잡을 거 같다가도 아리송한 게 말이야. 거 어째 느낌이 세해. 차라리 발을 빼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이상해.」
   「그래 잘 생각했어. 너 그러다 늬가 당해. 제 꾀에 제가 속는 건 그나마 낫다고. 그런데 있잖아. 아까 말한 큰손. 그분 혹시 스파게티광이니? 1년 내내 스파게티만 드시지 않니?」
   「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농담하지 말고. 나한텐 중요한 문제니까. 당혹감 흥분 충동 친구 기 살려주기. 친구 놀리기. 그런 거 말고 진짜를 말해 보란 말일세. 진짜를.」
   「나 요즘 가뜩이나 뻥을 참고 참는데, 늬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니? 나 거짓말 해 본 적 한참 됐어. 내 최근 별명이 냉혈한이란 말이야.」
   「그 흔해빠진 사이코패스가 너라고? 늬가 사이코패스면 난 소시오패스 할아버지다. 아 그러지 말고. 그분이 진짜로 스파게티 매니아야?」
   「아 그렇다니까. 내가 뭐하러 너한테 그런 걸 거짓말하겠니. 내가 그걸 뻥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없잖아. 안 그래? 내가 그걸로 널 속여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 그런데 넌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 그분 이마에 그렇게 씌여 있으니까 알았지. 그분 마빡에 나 스파게티광, 라고 씌여있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몰라. 안 그래?」
   「씌여 있긴 뭐가 씌여 있다는 거야?」
    이 모든 일이 다 존티가 주인이었던 그 라이터. 눌러도 불꽃이 나오지 않는, 그냥 소리만 특이하고 별다른 용도가 분명치 않은 듯한 듀퐁 라이터. 그 때문일까? 
    NB는 탁자 건너편의 사무엘과 대화하던 중. 탁자 밑으로 사무엘 몰래 듀퐁 라이터를 눌러보았다. 
    듀퐁라이터는, 퐁~!
    NB의 전두엽은, 핑~! 
    그는 즉각 사무엘 마빡에 씌여진 글씨를 읽고야 말았다. 
    그건 바로 
    <경마 매니아. 특히 거세마 베팅>
    뭐? 
    그는 정신을 잃은 채 소파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10

    그러던 어느 날 NB는 낮에 연습장에 글씨를 썼다. 일명 메모.
    만약에 내세에 지옥이 없다 = 공룡이나 다수 멸종한 동물처럼 흔적도 없이 말살될 가망성 있음.
    만약에 내세에 지옥이 있다 = SF 영화처럼 종이 미래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큼.
    그리고 그날 그는 개꿈을 꾸었다. 내용은 이랬다. 
    <개꿈 1>
    유부남 친구 1이 바람피는 애인을 데려옴.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걔는 친구들 만날 때 하나같이 못생긴 여자만 골라서 데려왔음. 단 1번도 '어떻게 붙어도 붙어도'를 벗어난 예외는 없음. 걔 부인을 보고서 친구들이 바보로 여김. 일부러 그럴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업신 여김. 그 유부남 친구는 취미처럼 한달 평균 몇 명, 연평균 몇 명과 바람을 피는데 부인은 바보. 그냥 밖에다 내놓음. 완전히 밖에다 내놓은 줄 앎. 하필 녀석의 자녀는 딸 하나. 설마 그 딸이 나중 자기 아빠 같은 유부남을 만나는 거 아니야? 혹시 첫경험으로? 그럼... 숙녀 인생... 쉿! 그건 그렇고.
    그렇게 친구들 만나는 날 유부남 친구 1이 바람피는 애인을 데려옴. 친구 2 친구 3, 그렇게 넷이서 야한 술집에 감. 어쩌고저쩌고. 갑자기 유부남 친구와 바람녀가 뜨거워짐.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처럼 교미를 시작.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 (아, 친구 3은 없었음. 친구 1과 2뿐. 등장인물은 매우 단촐). 그런데 하필 바람녀는 조루녀였음. 서서 정상위로 관계를 하다 말고 바람녀는 살짝 빠져서 뒤돌아 섬. 그렇게 그녀 혼자 아후아후. 갑자기 세차장 물뿌리개처럼 빛나는 액체 찍~! 곧 이어서 곧바로 연분홍빛 안개 분수. 다시 이어서 과학실험실 알콜램프처럼 거기서 빨강-노랑-다홍빛-선홍빛 불꽃이 일었다 사그러짐. 유부남 맨붕. 그래서 혼자 달림. 그런 다음 정자가 방출. 그런데 그 액체가 하필 옆 탁자에 놓여진 어떤 연애론 위에 찍. 유부남은 고추 끝 알콜램프의 파란 불꽃을 입으로 후~ 불어서 끔. 상황 정리.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연애론 주인이 똘만이들을 거느리고서 유부남을 찾아감. 딩동~!
    결론 : 대부분의 유부남은 성실!? 그래서 바람피는 유부남만 보고서 유부남은 어떻다고 일반화는 곤란. 미꾸라지와 하이에나도 일부만 문제. 그 못된 극소수 때문에 못생긴 남자만 보면 혹시 뭐 어쩔까 또 강박증이 추가됨. 괜히 착한 촌닭과 호인인 뱁새까지 손해 입음. 스토킹은 중범죄 중의 중범죄. 스토킹 당해본 사람은 그 심정 앎. 여자가 1번 싫다 하면 웬만히 껄떡거리고 남자 얼굴에 똥칠하지 말기를. 제발! 아니 1번이 아니라, 알아서 자신감 갖고 찝쩍거리지를 말아야지. 툭하면 용기니 걸핏하면 고백이니. (절레절레). 똑같이 미꾸라지의 엄마와 부인과 누나와 여동생과 딸에게도 미꾸라지 조직과 하이에나 군단이 붙을 수 밖에 없음. 그 DNA는 알아서 도태되던가 아니면 SF영화처럼 걸러지거나 제지되도록 세상은 진보할 것임.
    <개꿈 2>
    플랩잭 경찰서의 필 로버츠 경사에게 전화가 왔던 날. 세바스찬이 체포됐던 일. 
    그 세바스찬이 NB에게 귀뜸해 주었다. 자기가 팠던 골프장 몇 번 홀을 진득히 파 보라고. 
    NB는 내심 세바스찬이 괜한 일을 벌이지는 않으리라는 뭐랄까 끈덕진 소망을 믿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건 현실이고 이건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바스찬이 알려준대로 삽을 챙겨서 그곳으로 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홀컵을 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땅을 파고 또 파고 계속 팠다. 
    그랬더니 뭔가 끝이 보였다. 그런데 그 끝은 다름 아니라 땅 밑에서 자기랑 똑같이 삽질을 하는 본인을 발견한 것이다. 흡사 거울을 보듯. 마치...가 아니라 자기랑 똑같이 생겼다.
    그럼 뭐야, 지하 세계가 있다는 건가? 여기서 멈출 수 있나. 하여 계속 팠다. 그렇게 그는 도플갱어와 겹쳐졌다가 끝끝내 도플갱어가 지상으로 나왔고 그는 지하로 들어갔다. 
    그러다 꿈은 끝났다. 뭐? 
    꿈이 뭐 이래? 이건 뭐 개꿈도 뭣도 아니잖아? 복권을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내용이잖아? 괜시리 기분 세해지고.
    그렇다고 뭐 딱히 고배를 마실 일도 아니므로 그는 툭툭 털고 일어났다. 





    11

    음악은 뭘로 듣지? 그래 그게 좋겠다. 요제프 아르놀트 그로스(Joseph Arnold Gros) / 트럼펫 협주곡 D장조
    향기는, 니나리치 레흐 뒤 땅. 위는 베르가못과 차자나무와 카네이션이요. 중간은 장미에 제비꽃에 흰봇꽃에... 기본은 시더우드와 샌달우드와... 됐고. 모르겠고. 대충 비누향 이상만 되면 좋고. 
    색상은 진한 초콜릿색. 우윳빛. 연보라색. 에메랄드빛. 
    소리는 기존의 효과음과 또 다른 뭔가 몽환적이며, 번뜩이는 재치 신나는 재미 열정적인 드라마가 느껴지는 기계음. 
    그런데 그걸로 뭐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은 화장실을 가지 않고 이슬만 먹고 산다는 논리도 아니고. 거 참 할 일 없네. 
    아! 할 일 있지? 
    그는 최근 이마에 씌여진 글씨를 자기만 읽을 수 있다는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존티에게 돌려줄려던 듀퐁 라이터에 정말로 신통한 재주가 있다면. 그렇다면 이번에는 노트북에 엑셀 파일 띄워놓고, 카페에서 한 명 한 명 찬찬히 관찰하면서 측정값을 기록하고. 그러므로 성공률은 어떻고 오차와 변수를 알아내고. 그래? 재밌겠네. 
    그래서 그는 근처 카페로 갔다.  
    도착했다. 
    부드러운 집념을 듀퐁 라이터가 귀여워할지 아니면 따가운 눈총으로 모른 체할지. 그건 두고 보면 아는 거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도 아니고. 사활을 걸 부담감도 없고. 
    마침 그때 카페에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가 썩 동의할 줄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외로운 숙녀. 그녀는 최근 3년 동안 키스 한 번도 못 해 봤네. 어쩌면 사랑의 교감 때문에 진짜 신음은 지금껏 0번. 단 몇 번에 불과했던 연애 경험은 죄다 가짜 교성뿐. 뭐 엄한 상상은 그쯤에서 멈추고 과연 그녀의 이마에 무슨 글씨가 씌여 있을까? 그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달콤한 환상머신은 타는 듯 불가사의한 몰입감 때문에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퐁~!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거 이거 진짜야 가짜야.
    어? 이거 정말 재밌어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면...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는데 이게 정말 좋은 거냔 말이지. 
    이건 정말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울기는 뭐하고. 무엇보다 웃지 않을 수 없고. 
    와 이 발견은 흡사 황홀한 입맞춤으로 도달 가능한 무아지경과도 비슷했다. 
    어떻게 봐도 봐도 신비롭고 아무리 생각해도 흥미진진했다. 
    그러니까 제비족의 결승점은 단란한 가정이라는 가택감금이란 말인가?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 
    기상천외한 상상이 부득이 개꿈으로 이어지는 일은 다 남의 일이든가 말든가. 
    이제 그만 좀 뜸들이고 본론으로 넘어가서. 그런데 차마 이런 얘기까진 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이런 말 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기왕 말나온 김에 얘길 꺼내자면. 그때 그녀는 왜 남자 화장실에 혼자 앉아서,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 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일어서냐고. 아니 그거 말고. 놀이공원에서 옛날에 아기랑 같이 오신 그분은 왜 하필 흰색 팬티를... 쉿! 
    됐고. NB가 본 건 바로 그랬다. 
    그녀의 이마에 쓰여진 건 바로, 개년! 
    뭐?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카페 안으로 그녀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여자와 인사하고 어쩌고. 의례적인 거 건너뛰고. 연인처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한 다음. 
    그 다음에 그 남자는 그녀의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더니 그녀의 이마에 글씨를 썼다. 
    그녀의 이마가 거울이야 뭐야. 왜 그녀의 이마에다 글씨를 쓰냐고. 것도 하필 립스틱으로. 
    사랑은 립스틱으로 글씨를 쓰라야 뭐야. 그럼 그걸 뭘로 지워야 하냔 말이야. 
    그야 어떻든 그렇게 씌여진 낱말이 뭐냐. 
    그건 이랬다. 
    키스맨! 
    뭐라고? 
    그럼 그녀는 남자였어? 
    뭐야? 이제 보니 남자네. 둘 다 남자. 뭐야? 여자 아니잖아? 이런... 아니지 아니지. 남의 일이고 내 여자도 아니고. 듀퐁 라이터가 오작동한 건지 뭔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먹잇감을 물색하던 중. 카페의 음악이 바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실내 이중창곡 ‘온갖 걱정에서 멀리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 HWV181
    손님이 뜸하니 카페 사장은 자기가 듣고 싶은 걸 틀었을지도 모를 일. 아, 맞다! 저 냥반한테 리모콘을 눌르면 되겠네. 
    퐁~! 
    그랬더니 카페 사장의 마빡에 도대체 뭐가 씌여있었느냐. 
    하면, 이번에는 좀 길었다. 글씨가 길기 때문에 이마에 다 써 넣어야 하므로 글씨가 작았고. 따라서 그거 읽느라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래서 씌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나 오늘 한가해요... 저는 있잖아요...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뭐? 그는 당장 듀퐁 라이터를 집어던질 뻔하다 말았다. 겨우겨우 참았다. 
    그러다 그는 카페 사장 뒤편 거울에 비춰진 이쪽 배경을 보고 뭔가 깨달았다. 
    바로 NB의 뒤에서 진짜로 특수 리모콘을 쥐고서 듀퐁 라이터를 켜는 시점에 딱 딱 맞춰서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그래서 그는 슥~ 뒤돌아봤다. 그들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다음 그 정체불명의 중성인은 슬금슬금 카페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이제 추적은 시작되었다. 





    12

    그러나 모험은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미행하고 주시하며 몰래 대신 마법까지 부리는 염탐꾼. 따라잡을 여지를 주지 않는데 어떻게 따라잡나. 
    만약에 따라잡았다고 해도 어차피 거짓말할 테고. 물증도 없고. 혼자만의 공상이고.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다. 그래 봤자 개꿈처럼 달콤한 줄거리가 기억날 듯 말 듯 하다 풍선은 사그라들기 마련이 듯. 
    굳이 저분을 끝까지 쫓아가야 할 이유도 알고 보면 쓸데없고. 저분 역시나 NB에게 '나 잡아봐라'라며 사랑의 쫓고 쫓기기 장난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괜한 데다 시간만 허비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경멸하기 쉽다고, 그림의 떡은 여우가 따먹지 못하는 신 포도. 그게 다 이 구식 듀퐁 라이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괜한 데 힘 빼지 말고 NB는 좋게 사무실로 돌아가서 일이나 하기로 했다. 
    아무리 재미없기로서니,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사교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지 못해 안달날 정도는 아니고. 
    세상사 전반에 관하여 범상치 않은 배경 지식과 혀를 내두를 만한 잔지식을 지녔는데. 그런데 정작 빼어난 고급 지식과 쓸 만한 큰 기술은 부재. 그럼 뭐 별수 있어? 일이나 해야지. 그럼.
    원하든 원치 않든 으뜸패는 속임수였어. 
    그는 구식 탱탱 묵은 듀퐁 라이터를 버렸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 그럼 이제 신나는 일하기를 시작해 볼까? 
    그러던 바로 그때 세바스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 웬일이야?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했니?」
   「어, 어떻게 알았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걸 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기는 누가 어떻게 알아? 설마 늬가 보물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러 가져가겠니 어쩌겠니? 대체 뭔 얘긴데 그래?」
   「말 그대로. 보물을 발견했어.」
   「거 참 막막하군 그래.」
   「그러지 말고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그래서 그들은 만났다. 
    찻집 '늬 남편 요즘 뭐하니?'에서 그들은 만났다. 
   「또 무슨 일을 벌였는데 그래? 어디 말 좀 해 봐 봐.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사연은 그래. 내가 어느 날 물건을 샀어. 그 뭐야, 초소형 완구품 조립하는 데 쓰는 공구품 세트.」
   「그래. 그래서?」
   「그걸 샀는데. 그걸 인터넷으로 샀거든. 그런데 계산할 때 보니 무슨 뭔가를 보너스로 거저 준다는 거야.」
   「뭘?」
   「뭐긴 뭐야 보물 지도지.」
   「그래서 그걸 결국 받아봤어?」
   「응. 집에 도착한 공구 세트 정리한 다음에. 사은품으로 함께 실린 보물 지도를 펼쳐보니 이거 가짜가 아니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자세한 정보부터 그 보물이 묻히게 된 계기. 그리고 그 공구품의 브랜드 역사까지 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더란 거야. 뿐만 아니라 그 보물이 묻혀 있는 특정 장소가 하필 우리 집과 가까워.」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런데 거기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면 무슨 세계 비밀 조직에 찬조금을 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그 돈 보냈어?」
   「그럼 보냈지.」
   「얼만데?」
   「얼마 안 해.」
   「한 장?」
   「두 장.」
   「세 장 보냈네. 세 장 보냈어. 그렇지? 그치?」
   「그걸 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았는가는 몰라도 세 장은 세 장 맞어. 그렇지만 할부로 끊었어.」
   「늬가 무슨 초딩이니? 그래서 그 보물지도에 관한 보완품, 뭐라고 불러야 하지, 맞다, 보물지도 2.0은 왔어? 어디 좀 보자.」
   「안 돼. 보여줄 수 없어. 보여주면 안 된다고 했어.」
   「넌 그 말을 믿니? 야 무슨 말이 돼야지 보물 지도를 믿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무슨 애도 아니고, 참 나.」
   「아무튼 파 보면 알아. 파서 나오면 진짜고. 아니면 뭔가 잘못된 거고.」
   「너 어쩌다가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진거니?」
    그래서 그들은 현장으로 갔다. 
    NB는 도와준 김에 인심 후하게 써서 오늘 땀 흠뻑 흘리자고 다짐했다. 
    음악도 틀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K339.
    그들은 열심히 삽질을 했다. 다른 기계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땀의 결실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중간 건너뛰고 결과만 말하자면 그렇다. 뭔가를 찾긴 찾았다. 
    그건 다름 아니라 007 가방이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나는 몰라도, 일단 가방 하나만큼은 꽤나 튼튼해 보였다. 
    물론 열쇠로 굳건히 잠겨있었고. 
    곧바로 세바스찬은 핸드폰을 켜서 어느 앱을 켜서 메시지를 보내고, 답변을 받고, 전화를 해서 통화를 마쳤다. 
   「쟤들이 뭐래? 그게 보물 맞데?」
   「어 맞데. 그런데 그 가방을 열려면.」
   「그럴려면?」
   「추가로 무슨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야 한다는데?」
   「야 야. 관둬 관둬. 때려쳐 때려쳐.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너 당했어 임마. 계속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말리고 엮이며 끌려가는 거라고. 너 솔직히 말해 봐. 저번에 얼마 보냈니?」
   「세 장.」
   「세 장이면 뒤에 0이 3개?」
   「아니. 단위가 달라.」
   「오 맙소사, 세상에나! 너 미쳤니? 야 그럴 돈 있으면 나한테 투자해야지. 얘가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네. 너 엉덩이에 뿔났니? 그걸 거기다 보내면 어떡하니?」
   「날 좀 내버려 둬.」
   「말이나 말든가.」
   「그런데 늬가 봐도, 한눈에 딱 봐도 사기인 걸 알겠니?」
   「알다마다!」
   「아휴~ 속 터져.」
   「아휴~ 속 터져? 일찍도 깨닫네. 내가 더 속 터진다.」
   「갑자기 왜 웃어?」
   「나도 몰라. 괜히 웃음이 나오는데 어떡하니? 그럼 그냥 웃을 수 밖에.」
    그렇게 별일도 아닌 사건은 자연스럽게 수습됐다. 





    13

    일하든 놀든 재미없고. 앉으나 서나 심심하고. 보나마나 주말은 약속 없고. 새로운 모험은 꿈도 꿀 수 없고. 그러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NB는 롭의 별장에 가서 쉬엄쉬엄 작품 구상이나 하고 오기로 했다. 이번에 롭은 또 어떤 기발한 별장을 소개시켜 줄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발가락이 다 간지려워졌던 것이다.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롭한테 어딜 소개받고 어쩌고.
    중간 건너뛰고. 
    낯선 객지에 도착. 
    한편 갑자기 세바스찬에게 연락이 왔다. 
   「열었어. 열었어.」
   「열긴 뭘 열어?」
   「그 007가방 열었다고.」
   「어떻게 열었는데. 너 또 추가금 보낸 거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뽀갰어. 장비 구해와서 다짜고짜 뽀갰다고.」
   「그래서 안에 뭐가 들어있든?」
   「일단 가방 안에는 2가지가 들어있었어.」
   「아 글쎄 그 두 가지가 뭐냐고.」
   「알고 싶어?」
   「아 나 얘 또 시작했네. 뭘 또 들었다 놓고 싶은 거니? 날 좀 웬만히 쥐락펴락하라니까.」
   「알았어. 말할께.」
   「」
   「」
   「말한다며?」
   「그건 말이야. 첫째 새로운 지도, 둘째 중고 듀퐁 라이터. 그리고 간단한 설명서.」
   「설명서에 뭔 내용이 씌여있는데?」
   「라이터를 켜면 육플루오린화 황, 레몬과 스피아민트 향, <커피 + 초콜릿 + 복숭아>복합 향이 나는데. 그걸 지도 밑에서 작동시키면 지도에 숨겨진 그림이 나타난데.」
   「그래서.」
   「그렇게 비추니까 정말로 숨겨진 지도가 나타났어.」
   「그러니까 지도는 일반적인 지도고. 숨겨진 지도는 제일 빠른 길, 최단 코스, 제일 안 막히는 길. 뭐 그런 게 나타났다고?」
   「와!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어. 그래서 또 추가금을 보내달라고?」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아 나 이거 정말 이치고 환장하겠구만 그래. 넌 수작과 개수작도 구별 못하니?」
   「수작과 개수작의 차이점이 뭔데?」
   「뭐긴 뭐야. 둘 다 수작이지. 하나는 작은 수작 하나는 큰 수작. 곧 개수작은 큰 수작. 늬가 당한 건 말 같지도 않은 수작. 그런 수작에 당한 넌 뭐니 대체! 됐다 됐어. 너 알아서 보내든가 말든가. 끊어 끊어.」
    요한 아돌프 하세 / 오페라 <마르칸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중 아리아 ‘그의 사나운 모습에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NB는 세바스찬이야 세바스찬의 인생이 있는 거고. 언제까지 놀아줄 수도 없고. 그래서 그는 음악을 틀어놓은 채 묵묵히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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