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82

from 소설 2021. 1. 15. 17:54

    1

    탕건 쓰자 파장이라고 포도 따기는 끝나버린 걸까? 어리석은 물음 대꾸도 말자.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까. 그런데 최근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군가 날 미행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누군가 내 뒤에서 걷는 낌새가 보이길래 뒤를 돌아봤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게 몇 번 이어지더니 이제 그 누군가는 내 뒤 그리고 길 건너편, 즉 비스듬한 사선으로 출근길에 날 따라붙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 사선의 각도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퇴근길에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다가온 것만이 아니라 날 어깨동무하다니! 이 사람 뭐지? ~라면서 찬찬히 고개를 돌릴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친근한 어깨동무가 아니라 불친절한 헤드락을 걸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 같으면 풀어주라는 시늉으로 탁탁 터치다운을 하거나 어떻게든 괴로움을 몇몇 방법으로 표출할 텐데. 내가 웬만한 격투기 애들 업어키웠는데 이 정도쯤이야.
   「선생.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
   「왜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소? 일부러 날 달아오르게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요? 그런 목적이라면 실패할 거요. 언젠가 내가 그대를 애간장타게 만들거거든. 허허허. 그래도 우리 갑작스레 친해진 듯 하지 않소? 굳이 답변하기 싫으시다면 침묵하셔도 좋소. 근데 꾀죄죄하게 차림새가 그게 뭐요? 그래가지고 새로운 발상 쉽게 떠올리실 수 있겠소? (그러면서 그는 자기 양복 안쪽을 보여주었다) 지방시요. 물론 이름값 예전만 못할 테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이사는 몇 년 식이라오. 딱 봐도 이 몸에 걸친 사치품, 당신과 너무 비교되지 않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아아, 용건만 간단히 하자? 나도 좋소. 난들 왜 마다하겠소. 하여 내 그대의 시간을 아껴드리겠소. 안 그러면 울지도 모르니까. 물론 내가 선생한테 싸움으로 질 거요. 왕년에 운동 좀 하셨겠구만. 진정하시오. 나라고 뭐 긴말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가고 싶겠소? 알아요 알아요. 밑도 끝도 없이 웬 작자가 뜬금없이 나타나 수작은 수작이냐. 이 인간을... 워 워 워. 자, 받으시오.」
    그러면서 그는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www.populast.com 나머지 깨알 같은 글씨는 뭔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난 그걸 정중히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내게 그걸 보여준 다음 대충 읽었겠다 싶어서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곧 있으면 언제인지 몰라도 못 이긴 척 찾아오시게 될 거요. 그때 다시 만날까요? 나도 바뻐 이 사람아. 어쨌든 할 말 떨어지면 찾아오시오. 그러게 될 거요. 아, 내 말이 너무 저렴했소? 괘념치 마시오. 거 아실 만한 분께서. 형씨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내가 당신을 모를 것 같소? 몰라요. 어떻게 그 음흉한 속내를 빠삭히 분석할 수 있겠소. 통 속이 보이질 않아. 검정색? 내가 뭐 투시력이 있나 선생 속옷 색상을 어떻게 점찍겠소. 난 마술사가 아니라오. 그건 그런데. 하나 물읍시다. 형씨, 자유를 되찾고 싶지 않소? 새로운 인생이 뭔가 그립지 않냔 말이오. 물론 순수예술에 대한 창작열이든 밤의 황제든. 그 뭐든지 당신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알라딘의 램프 거기 나오는 그 뭐냐 아무튼 그와 격이 다르거든요. 또 뭐 3가지? 제한없음. 즉 무제한. 아, 그럼 선생은 우리한테 뭘 내놓아야 할지 궁금하겠죠. 그렇다고 우리가 뭐 큰 걸 바라겠소? 더불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비싼 게 바로 공짜인데. 이 신성한 거래가 단순한 물물교환일 리 있겠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귀 좀 빌릴까요?」
    그는 내 귀에 이름을 빌려달라고 했다.
   「뭐요? 생각이 있소 없소? 당신도 내가 호구로 보이요?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올씨다.」
   「내가 언제 당신을 물로 봤다 그래? 이거 이거 생사람 잡는 거 좀 보소.」
   「뭐 이름을 빌려달라? 내가 뭐 피에르 가르뎅이요?!」
   「이 양반 웃길 줄 아시네. 말도 잘하고. 난 당신 말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오. 허허허허허.」
   「뭐요?」
   「벙어리가 남편을 빼앗기더니 입이 트였나, 아직 아닌데.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야?」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당신 말 다 했소? 네? 이 사람이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톡톡) 다시 말하지만 아찔한 발상이 바닥나면 찾아오시오. 당분간 골똘히 생각 좀 해 보시고. 그럼 우린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그러면서 그는 헤드락을 풀자마자 도망가버렸다.
    저 자식 뭐 하는 놈이야? 나는 봐주지 말 걸 그랬나 라고 생각했다.
    그 일 때문일까? Weber / 오페라 <마탄의 사수> 중에서 2막 아가테의 아리아 “그대를 보기 전에는 바로 잠이 왔건만”
    나는 사무실에서 음악을 들어도 음악이 내 마음을 감동시킬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안다 알아. 물론 언젠 안 그랬나? 근데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 누가 디올 옴므랑 몽블랑 만년필 살 줄 몰라서 안 사는 줄 알아? 뭔 허접한 녀석 때문에 괜히 잡념만 늘어나잖아. 젠장. 사자가 진 곳에서 여우는 이길 수 있다. 자나깨나 불여우 조심 어쩌고저쩌고. 걔 때문에 이젠 푸념도 통 이어지지가 않아.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내 마음을 흔들어놓는 거지? 걔 분명 남자였는데. 그런 푼수한테 내가 뭐 마음이라도 뺐겼을 줄 알아? 천만의 말씀. 그럴 리는 없어. 근데 왜 이리 허전할 걸까. 몰라. 알아서 뭐 하게. 신경쓸 필요 없어. 다 소용없으니까. 이렇듯 행복한 일하기에 퍽 차도가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출근길에 만난 그 얼굴 없는 사나이가 가르쳐준 장소로 한번 가봐도 왠지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혹시 모르니까 가본다고 큰 손해는 없지 않겠냐, 어쩌면 기발한 착상이 얻어걸릴지도 모른다는 느낌.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들뜬 마음을 어디에 소문내지 않고. 소심한 예감이 앞장서서 나를 그곳으로 끌고갔던 것이다.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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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없는 사나이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 거긴 인적 드문 놀이터 같았다. 어쩌면 수풀을 치우고 청소 좀 하면 퇴락한 놀이공원이 드러날 듯 했다. 그 가운데 아니 이럴 수가.... 저번에 내가 작성했던 허구, 그 연재편에 나왔던 대형 MRI 장비. 그와 꽤나 흡사한 기구가 있었다. 단지 허접한 상상력으로 대충 생각해낸 것에 불과했는데 이 우연의 일치라니. 그래도 일단 한번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라는 마음으로 딱 들어갔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별 거 없었다. 그 대신 얼굴 없는 사나이의 음성이 녹음되어 틀어져 계속 되풀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곳 도면이 거기 보면 있을 거요. 혹시 모르니까 면밀히 살펴보고 잘 기억해두시오. 나중 도움될지 누가 알겠소. 또 그 다음에 거기 보면 명함이 하나 있을 거요. 이제 그곳으로 찾아오면 된다오. 거긴 엑스맨 잔치 일색이진 않을 테나 그동안 상상도 못한 가면무도회를 구경할 수 있을 거요. 아니 그 주인공이 되어보시는 호사, 그 풍요를 누려야 할 귀인은 바로 당신이라오. 그러니 만사를 제쳐놓고 당장 그곳으로 와주면 고맙겠소."
    정말 옆을 보니 약도, 도면, 명함이 있었다. 뭐야! 저번에는 이쪽으로 오라더니 또 딴 데로 오라고? 이거 사람을 뭘로 보고...! 똥개 훈련시켜? 안 가. 기분나빠. 빈정상했어. 이게 뭐냔 말이야. 그래서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2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얼굴 없는 사나이가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뻔한 드라마 전개처럼 그가 날 졸졸 따라다닐 리는 없으니, 그러므로 저번에 어깨동무하며 명함을 찔러주었던 그 얼굴 없는 사나이와. 지금 잠시 마주친 얼굴 없는 사나이가 동일인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둘이 같은 사람이면 어떡하지? 그게 나랑 뭔 상관인가. 그래서 일단 당장 앞에 있는 저분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고자 했는데 그는 은근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뒤로 한 채 그냥 가버렸다. 저 자식 뭐지? 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건 아마 넌지시 저번 그 장소로 가보라는 일종의 지령일까 아닐까. 그러든 어쩌든 나랑 오래갈 인연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따라서 난 그냥 내 생활에 전념하면 그만. 그렇게 사무실에서 마저 남은 일을 한 다음 퇴근했다.
    그렇게 딱 퇴근하여 사무실을 나섰는데... 거 어째 자꾸 신경 쓰이네! 걔가 어디 소속인가는 몰라도 왜 하필 날 귀찮게 하는 거지? 알 게 뭐야. 손해보는 거 없으니 그래도 일단 한 번 가볼까? 아니 가지 말까? 어차피 운동삼아 산책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무익한 시간낭비는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속으로 정말 눈꼽 만큼은 속는 셈치고 한번 들려볼까 라는 생각 없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난 곧장 그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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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 내가 작성했던 연재편에 등장했던 대형 MRI 장비. 의학장비보다 대략 10배 크기. 그런데 난 여기가 저번 작품에 나왔던 장소와 흡사하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걸 몰랐으니까 여자가 없지. 그걸 대번에 알아챘다면 난 이미 집에서 뭐 소파에 자빠져 TV 채널 돌리기 귀찮으니까 여편에 궁둥이나 쓰... 시끄럽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근데 아까부터 디미늬엔도인가 뭔가 점점 크게 라는 음악용어. 이 노래가 아마 그건가? Niccolo Jommelli / Requiem in Eb major 누군지 몰라도 또 슬슬 발동을 걸려는 걸까? 그래 봤자 별거 없다는 거 모르는 나도 아니다만. 이처럼 슬슬 들뜨는 난 또 뭐냔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 안에 들어가서 작동 버튼을 눌러볼까?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애인 없으니 그래 보지 뭘. 이런 날 감시하면서 누군가는 햄버거랑 콜라 먹으면서 CCTV를 볼까, 하면 아니겠지. 이런 장면이 뭐 영화관에서 것도 IMAX보다 훨씬 발달한 대형스크린으로, 막 팝콘 먹으면서 극장 좌석에서 관람할 리는 없단 말이야. 그래. 밑져야 본전. 안 그래도 난 판돈도 없어. 그렇다고 가면무도회에 초대받기 바쁘냐, 하면 기다리는 잔치에 대해 기대 버린지 오래. 그렇게 나는 일단 착석해서 노란색 버튼을 눌러 시동을 켜고, 선홍색 기어를 올린 다음, 푸른색 손잡이를 당겼다. 그랬더니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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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긴 엇그제 롭이 알려준 별장 안에 있는 음악실로 추정되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또 뭔 수작인가 했는데 놀랍도록 정교하긴 하나. 내가 뭐 속을 줄 아나? 흡사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공간이동 기술이긴 하다만. 이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되거든. 때문에 "말도 안 돼!"라는 말조차 아깝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만 봐선 그렇다. 음악실에서 나오는 음악 Beethoven / String Quartet no.4 in c minor op.18 no.4 누가 모를 줄 알아? 다 알아. 아는 척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딱 봤을 때 모스맨 연구소 환상머신에서 내가 딱 걸어나오면 그럴려고 했을 거야. 이를 테면,
   「늬가 거기서 왜 나와?!」
   「누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냐?」
   「근데 늬 그 사자머리는 뭐냐? 폭탄 맞었냐?」
   「내가 계란을 왜 삶아? 안 그래도 저번에 3 대 3 소개팅 나갔다가 내가 애들 위해준답시고 넘버 3 전담했는데. 너 왜 하필 그 기억 떠올리게 만드냐? 어?」
    어쨌든 저속한 표현으로 난 정신줄 놓지 않았다. 원래 난 제정신이다. 난 말짱하다. 미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쟤네들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식이겠지.
    A) 내 관점: 아마도 잠깐 딴생각하는 틈
    B) 매커니즘: 그 짧은 찰나를 백배 천배 확장시키는데, 동시에 대상자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도록 유도. 그 방법은 최면과 의학과 세뇌와 기타 과학적 방법들.
    이처럼 영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놀라면 안된다. 안 그래도 작품구상차 한번 들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마침 잘된 거네. 수캐에게 물리건 암캐에게 물리건 물리긴 마찬가지. 내 발로 발품 팔아서 또 돈쓰고 어떻게 어떻게 당도하든. 아니면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길 기다리다가는 날 새겠다 따라서 일단 뭔가 변화를 주자 하여 어디까지 행진하든. 결과는 똑같다고 치고. 그래. 놀자! 놀다 금방 지겨워지기 마련일 테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적당히, 딱 적당히 바빠야 좋다. 너무 할 일 없어도 심심하다. 개들 풀어줘 보시라, 겁나 바쁘게 막 빨빨거리고 돌아댕길 텐데 초반 정력은 길게 못간다. 뭐 휴가왔다고 생각하지. 근데 그 장시간 공간이동을 대체 어떤 기술로 짧게 줄인 거지? 신기하긴 했다. 뭐 다 방법이 있겠지. 좌우지간 모처럼 해방된 기분. 얼마 만인가! 정말 그렇다. 고삐 풀린 소가 잘 핥는다. 자유만큼 좋은 건 결코 흔치 않은 걸까? 그렇지만 그 대신 여자는 없어.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전형적인 시골이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한적해도 오히려 뭔지 모를... 더 말하면 안된다. 쉿! 어쟀든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 대해 정탐하면서 뭔 뜬소문이 들리나 안 들리나 두 귀를 쫑끗 세우면서 그곳에 적응하게 되었다.





    3

    그렇게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어제 마신 포도주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간밤에 꾼 개꿈이 정말 기막히도록... 허당의 희망을 충족시켜줬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농담이고. 별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게다가 어떤 웹서비스를 이용해서, 또 아는 동생한테 전화로 부탁해서 내 노트북과 자동차를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어제 다 조치를 취했는데. 마침 오늘 도착했다. 그 다음으로 자, 이제 무엇을 할까? 진정하자. 누가 쫓아오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다고 막 공포영화처럼 동네 아저씨가 내게 이곳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할까? 정반대였다. 웬 아리따운 숙녀가 방문해서 얼마 동안 머물지는 몰라도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케익을 선물하고 갔다. 물론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숙녀가 먼저 내게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야 있나. 그건 그렇다만 딴 건 다 좋은데 인생이 어째 조연들 없는 단막극, 즉 모노드라마 주인공 같지? 어차피 나이 들면 누구나 원맨쇼 하든 말든 누가 관심 갖지 않는다. 사교와 처세술은 빈말과 가식과 그럴 듯한 아부를 바닥에 깔고 가는 거다. 말이 그렇단 거고 그건 안다박사님들께 여쭙는 걸로. 그러면서 나는 못 다 구경한 별장을 둘러봤다.
    결론만 말하자면 다락방 삼촌의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괴상한 장식품은 없었다. 투명 드럼통에 특수 화학약물을 채워 대형 하이에나를 절반으로... 뭐 그런 건 없었다. 곰 박제품도 없었다. 다만 그건 있었다. 초대형 도끼! 언제적이던가 삼류대학교 1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형. 그 시절을 지나 나중 사회에서 만났을 때 당시 형도 돌아보니, 너랑 쟤 딱 2명 말고는 기억나는 우정도, 각별한 친분도 없었다 그랬는데. 그 형이 언젠가 하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만날 때 어떤 비장한 각오의 의미로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던 도끼. 그걸 보여준 기억이 났는데 그와 매우 흡사한 도끼가 있었다. 그런데 도끼의 날이 뭐랄까... 뭐라 말로 형언하기 어렵도록 신비하다고나 할까? 어떤 마성이 끼어들어... 빠져들면 안된다. 그러지 말자. 그건 그렇고. 완전히 놀러 온 거도 아니고. 완벽히 자의로 부여받은 휴가도 아니다만. 그래도 뭐랄까 일 반 놀기 반이라는 성과는 만족시켜야 하므로. 난 먼저 일을 끝낸 다음 놀자,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충 자세를 잡고 일을 시작했다.
   <블로그니까 털어놓는다만, 달콤한 행운은 코앞까지 다가오지 않았다. 단지 쥐꼬리 만한 품위유지비에 허덕일 뿐. 삶이란 정녕 뭘 해도 재미없는 거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인생이 어떻게 개뼉따귀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허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다 이유가 있다. 그건 뭘까? 뭐겠나. 옛말마따나, 응? 좋은 개에게 꼭 좋은 뼈다귀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그게 대체 뭔 소리야?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틈새시장이 별볼일 없으면 관망하기를. 그러다 좋은 날 있겠지. 잔치 뒤에 머리 긁는다고 너무 일찍 부뚜막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근데 그러다 영영 영원한 병풍은 커녕 허접한 허당 취급도 못 받으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운명이란 모르는 것. 그땐 UFO라도 나타날 것이다. 아니면 예언가로 데뷔하지 뭐가 고민인가. 관상 한두 번 보나. 작명가 기질 어떻게 속이나. 안 그래도 누구누구 외계인설 그거 다 뻥이다. 그나저나 인생사 전략따라 내가 먼저 A급 탤런트와 깜짝 결혼이나 발표할까? 멜로드라마가 대체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인가. 관심없다. 누가 끌린데? 됐다 그래. 시시콜콜한 수다라면 신물이 나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노골적으로 황금만 쫓는 열정도 없고 여건도 안된다. 어쨌든 정신차리자. 근데 정신을 차리면?! 그럼 좋긴 하겠으나 별 차이 아마 없을 걸! 이런 시시한 중년운 옛날에 꿈에도 생각치 못했을 텐데. 블로그니까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누가 말했나 개 팔자가 상 팔자라고! 그게 아마 말이 전달되며 와전됐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최소한 나는 그렇게 호언한 적 없다. 적어도 난 사랑이 아름답다고 노래하기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 이 마당에 내 친구가 비황금주의를 선언할까?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이젠 어디서 개 짓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개에게는 개뼈다귀를 허당에게는 진한 사랑을! 뭐? 놀고 있네. 사랑 좋아하시네. 아니 근데 혹시...! 혹시는 무슨 놈의 혹시. 아니야. 설마...! 밑도 끝도 없이 뭔 설마. 이거 정말 거북목 증후군이 치료되니 잠잠하던 허언증이 쓱 고개를 드는구나. 이거 정말 어쩌면 좋을까. 하긴 무슨 수로 갑자기 풍운아가 되겠나. 좋게 포기하고 2지망을 새롭게 점춰보는 게 나을 텐데. 2지망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걘 뭐 나 잡아봐라면서 호락호락할까? 말해 뭐 하나. 그럼 대체 제3의 판타지는 꿈도 꾸지 못한단 말 아닌가. 무도회 구경도 못하는데 춤을 어떻게 신청하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난 여전히 공상병의 노비로구만. 해가 바껴도 변한 게 없어. 걸핏하면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 좌 정신산만 우 소심증. 아니면 재미없음과 심심함이라는 양대산맥 사이에서 오락가락. 뭐지? 뭐긴 뭔가. 은근 늙은 거지. 뭣이 어째? 이거 아무래도 한동안 침묵하는 게 좋을 것만 같다. 무형의 마네킹을 여편네로 아는 건 아니다만. 잔소리에 사람 돌아버릴 지경이니까. 그럼 이쯤 됐으면 어디로 떠나도 되는 건가? 그럼 좋은데 시국은 물론 세계가 소란스럽지 않나. 더구나 늑대는 사냥을 어떻게 하는지도 다 까먹었다. 이거 영 말이 아니구만. 이래가지고 어디 사교계에 복귀할 수 있겠어? 하긴 멜로드라마조차 알고 보면 적응하기 쉽지 않은 장르다. 삶이 그렇다.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되야 말이지. 그래서 에잇 못 참겠다 라면서 경기장 난입! 근데 1부리그 구원투수가 아니라 하필 난동꾼. 하다 하다 조롱꾼들한테도 말발로 딸려. 이거 뭐 되는 일이 없어. 그렇다고 투덜거린다고 넉살이 느나? 통상 늘지도 않고 또 늘면 뭐 하나. 신분상승은 영화 주인공들 얘기인데. 허나 절망쯤이야 얼마든지. 우리는 실망 두렵지 않다. 체념 어디 한두번 겪나. 얄미운 가난 하나도 유감스럽지 않다. 처음부터 유복하면 재미없다. 더군다나 에스프레소 1잔이면 젊음은 즉각 회복된다. 근데 콜라를 마셔도 영 상쾌하지가 않다. 결국 사는 게 이처럼 권태로운 건 속된 말로 동기부여라는 약발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질문 그만 좀 하자. 뭔 말 같지도 않은 시적인 추측. 지겹다. 짜증난다. 징글징글하단 말이다. 어차피 근근히 먹고 살며 뺑뺑이 도는 다람취 챗바퀴 같은 삶, 예정된 것이므로. 따라서 나만 가진 게 없다면서 징징거리며 떼쓰지 않아도 된다. 보아하니 어릴 때 꿈꾸던 난 어른이 되면 머머할 거야 뭐가 되고 싶어 어떻게 살겠어, 그거 다 소용없단 게 여실히 증명된 거다. 그걸 이제 깨달았나? 일찍도 철든다. 형 철들지 마세요─형이 다 꼬셔준다면서요─형 저도 날라차기 맞고 싶어요, 라는 남동생들은 물론 아는 여동생들 그러니까 다 떠났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라면서 애원하는 숙녀. TV 채널 돌리기도 지친다. 말하자면 난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 같은 남자다. 이런 젠장! 이런 한 능청 하는 푼수를 다 봤나. 난 또 뭐라고, 같은 촌놈이 바로 나라니. 근데 그게 뭐 어째서, 남들도 다 그래. 근데 이러다간 정말 낙서왕으로 등극하는 건가? 허접한 결말이든 괜찮은 반전이든 좋게 줄거리 구상하기 위해 일이나 하러 가야겠다>





    4

    나는 그곳에서 세 부류 남자들과 친해졌다. 낚시, 운동, 주색. 마지막 부류는 말만 그렇다는 거고 그냥 한량 무리긴하다만 모두 착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에서 새로온 바텐더와 내기도 하고, 당구도 치고, 어깨동무하며 으쌰으샤 노래도 불렀다. 그 시시콜콜함 가지고도 드라마는 밥 먹듯이 우려먹고, 영화에서도 30분 금방 뽑는다만. 내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 식상하니까 그 분량은 생략한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러다 나는 어느 날 산책을 했다. 모처럼 혼자였다. 하긴 혼자가 좋긴 좋다. 누가 짜증나게를 하나 귀찮게를 하나. 얼마나 홀가분한가. 웬만한 유부남은 물론 유부녀 마음 굳이 알려고는 하지 말자. 그렇게 동네를 산책 중 난 웬 들개들한테 쫓기게 됐다. 밑도 끝도 없이 내 옷에서 뭔 냄새를 맡은 것일까? 주인 있는 개처럼 보이는 애들은 목에 줄을 메고 대충 뭔가 표시가 있는데. 그런 개와 아닌 개들이 뒤섞여서 어떡하다 도망가니까 걔네들은 완전 신이 난 거 같았다. 그래서 쫓기다 쫓기다 어떤 인적 드문 골목에서 웬 춘부장을 맞닥뜨렸다. 그 할아버지는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차 한잔 마시지 않겠냐 하여 난 초대에 응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나눈 얘기?
   「젊은이. 여긴 어쩐 일로... 아, 그게 그러니까 들개들한테 쫓겼수? 알만 하구만. 걔네들 끈질겨. 조심해 이 친구야. 근데 걔네들보다 더 주의해야 할 부류가 있으니.」
   「설마 그 부류는 동네 허당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허허. 거 어디식 농담이유? 형씨 유머가 꽤나 독특하구만. 아, 웃기다!」
   「어르신. 말씀 편하게 하십시요. 허허허허허. 아무리 봐도 가짜웃음은 저보다 한수 아니 여러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어르신? 내가 어딜 봐서 어르신이야! 아 글쎄 농담이 아니라 난 아마 당신보다 동생벌일걸! 정말이야. 왜 내가 그처럼 겉늙은 것 같소?」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거 사람 놀리는 거요? 내가 어딜 봐서 할아버지야! 꼭 보면 아줌마한테 아줌마라는데 신경질내는 여편네들이 있긴 있어. 내 마누라가 일전에 어땠는 줄 아쇼? 말도 말어. 근데 당신 결혼했어? 아, 내가 겉늙어보이고... 그대가 어려보인다고 가정했을 때... 형씨 지금 나 갖고 장난해? 이거 겸손이 심하잖아, 어? 아니지. 근데 어디 소속이요? 언제부터 여기서 얼쩡댔어? 겁먹지 마쇼.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그럼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요? 거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근데 듣자하니. 어? 당신이 그 동네에 뜬금없이 출연한 이방인이오, 동네 처자들 다 따먹고 다닌다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냔 말이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씀을...!」
   「왜 내 농담이 썩 고급스럽지 않았소? 난 일부러 당신이 촌닭처럼 보이길래... 신경쓰지 마쇼. 거 말이 잘 섞이지 않더래도, 어떡하다 나중 말이 잘 통할 수 있는 거도 아니겠수? 근데 표정이 그게 뭐요? 우리집이 뭐랄까 괴기스럽소? 하긴 뭐 좀 그렇긴 하지. 그럼 어떻게 내 아는 여동생들이라도 불러다 줄까? 뻣뻣한 남자끼리만 얘기해서 좀 기분이 세하요? 말만 하슈.」
   「아 근데, 선생님. 여기서 나가는 길이... 제가 좀 전에 길을 잃어서요.」
   「지구는 둥글다오. 저기로 가든 저짝으로 가든. 다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어 있소. 그런 의미에서 내가 편찬한 인생론 한번 읽어보시겠소? 물론 공짜는 아니라오. 값진 거 다 그만한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라오. 물론 내 자필 사인도 기록되어 있다오. 왜, 그런 거 안 좋아하오? 그럼 말하지 그랬소. 그래도 괜히 헛걸음하지 않은 게 어디요. 근데 왜 당신은 말이 없어?」
   「허허허. 허허허허허.」
   「웃음이 그게 뭐요, 젊은 사람이!」
   「네? 아니 그게...」
   「웃음이 썩었어.」
    그럭저럭 나는 어떻게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다.
    그 다음 2일 경과.
    동네 바에서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엇그제 길을 잃어서 어떤 할아버지 만난 이야기를 녀석들한테 들려주었다.
   「그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응.」
   「그분... 만나면 안돼.」
   「우리 얘 이제 뺐기는 거니?」
   「뭔 사연이라도 있는 거니?」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
   「너무 길어. 또 너무 복잡해. 게다가 그 내막을 다 아는 사람도 없어. 그렇다고 모두 이해가 되나? 그럼 좀 좋겠나. 심지어 그 냥반은 한 300년 사신 것 같단 말야. 일단 말을 섞다 보면 정신이 나가는 것만 같다고. 말려들면 안돼. 물론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 뭐랄까 이상해. 기묘하다고.」
   「넌 그래도 대화만 해봤잖아. 난 거기 다락방까지 봤어.」
   「뻥치지 마.」
   「진짜야.」
   「어쨌든 형씨 그 근처 쪽으로 발길을 옮기지 마쇼. 그쪽에서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란 말이오. 될 수 있으면 우리랑 놀자 그 말이란 말이오. 아시겠소?」
   「도대체 무슨 줄거리인데 그렇소? 뭐 귀신이라도 봤소?」
   「귀신?」
   「이 사람이...!」
   「왜들 그러오?」
   「여기서는 귀신의 '귀'자도 입에 담지 마시오. 당연히 왜냐고도 묻지 마시오.」
   「근데 형씨가 그 할아버지를 어떻게 아쇼?」
   「아까 말했잖아,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고.」
   「아, 그랬지. 아니 근데 형씨가 그 할아버지를 어떻게 아쇼?」
   「너 취했냐?」
   「뭔 소리야, 난 살면서 취해본 적이 1번도 없는 사람이야. 어? 꼭 보면 어디서 주도를 잘못 배운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한다니까 글쎄. 날 봐 봐, 날 보라고. 내가 언제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한적 있어? 없어. 응? 아니 근데 형씨는 여기 어쩐 일이오? 아, 맞다.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랑 형씨랑 뭔 사이오? 혹시... 후계인? 아니 근데 형씨가 그 할아버지를 어떻게 아쇼?」
   「쟤 얼른 보내라.」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시 1일 경과.
    나는 혼자 극장에 갔다. 시골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고 했나 안 했나!
    그렇게 극장에서 내가 본 영화는 무슨류 영화였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나는 뒷편에 앉았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기 전과 중간에 몇몇 커플이 영화관에 들어왔다.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영화가 끝났다. 그렇게 한 10짝쯤 되나? 나는 혼자인 반면 다정한 연인들이 대부분이라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렇게 연인과 팔짱끼고, 포근히 껴안은 듯, 다정스레 손잡고 나가는 연인들을 보니 걔들이었다. 낚시, 운동, 주색 3부류 3명씩 총 9명 친구들. 나머지 1쌍은 누군지 모르겠고. 나는 걔네들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참을 기다리다 나갔다. 근데 녀석들은 극장 밖에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아니 왜 너네들 모두 혼자야?」
   「무슨 소리야?」
   「아까 보니 다 애인이랑 같이 있던데...!」
   「우리가 애인이 어딨어, 소개나 시켜주고 놀리든가.」
   「설마 저 형 뭐 이상한 거 본 거 아니야? 그 할아버지댁에 방문한 사람들이 일전에 꼭 보면 그랬잖아.」
   「맞다. 정말이네.」
   「마침 잘됐다. 내가 캠코더로 영화를 찍는 취미가 있거든. 오늘도 마침 그랬는데 그거 틀어보면 누구 말이 옳은지 알겠네.」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장면 전환.
    내가 틀리고 쟤들이 맞았다. 뭐지?





    5

    다음 날이 되었다.
    그날도 별일 없었다. 그럭저럭 씻고, 책 읽다, 인터넷 뒤지다 어쩌다. 그러다 혹시 카펫을 떠들면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비밀문이 설치되어 있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에 카펫을 들추어봤다. 그런데 있었다. 정말이다. 진짜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렇다니까 글쎄. 누가 모를 줄 알았나? 웃기고 있어. 누굴 바보로 아시나. 다 그걸 알고서 시작한 모험 아닌가. 모험? 이게 뭔 모험이야. 이건 뭐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술래잡기도 아니고. 그냥 혼자놀기지. 그러든 어쩌든 비밀통로라... 아니 정말로 TV로 또 영화로만 봤던 거 아닌가. 그럼 안 들어가 볼 수 있나. 그래서 난 곧장 그곳으로 들어가봤다.
    거긴 지하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핸드폰으로 후레쉬를 켜서 조명 버튼을 찾았다. 켰다. 그런데 저게 뭐야?
    그걸 보는 순간 난 엉덩방아를 찢을 뻔 했다. 그래도 실제 꿈쩍하지 않았다. 조금 놀랐을 뿐.
    왜냐하면 바닥에 6명의 얼굴만 덩그러니 있었기 때문이다. 괴기영화랄지 막 공포 장르에 나오는 그걸 예상할 수도 있는데.
    보자마자 난 그게 아마 바닥에 묻혀있고 해수욕장에서 연인과 친구들끼리 장난하는 그걸 예감했던 것이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어쩌고 드라마처럼 줄거리를 억지로 길게 늘이지 않겠다.
    그럴 필요 없이 시네마처럼 '그래서 어떻게 됐어?'를 만족시킨다고 가정하자면.
    걔네들은 저번 연재편에 등장했던 7명, 거기서 날 빼면 6명이었다. 그래서 난 물어봤다.
    5명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당시 007가방을 업그레이드하기 싫다는 1명은 왜 함께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그분들은 뭐랬을까? 일단 입에 물린 특수장치를 빼주라는 시늉을 하길래. 그걸 빼줬다.
    그랬더니 어서 묻혀진 몸도 빼주라고 했다. 그랬다. 그랬더니 저쪽 007 가방에 리모콘이 있으니 버튼을 눌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버튼을 눌렀더니 족쇄는 모두 해제됐다.
    어쨌든 사연을 듣고 보니 당시 1명이 마음을 바꿔서 자기들을 따라가기로 해서 함께 007 가방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떠났는데.
    웬 거대한 스톰트루퍼 같은 놈을 만나기는 만났는데... 나까지 총 7명이 와야지 007가방을 업그레이드해주겠다고 해서.
    이렇게 어딘가로 떠나왔는데... 누군가에게 당해서 여기 이렇게 감금되어 있었다고 했다.
    근데 불과 얼마전에 그 중간책들이 들러서 잠깐 귀뜸해주었다고 했다. 뭐라고?
    이게 모두 내가 시킨 일이라고. 자긴 지시에 따랐고, 착수금은 물론 성공수당까지 빵빵히 챙겼다고!
    장면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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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전환.
    6명은 자유롭고 1명, 즉 나는 앞서 녀석들처럼 얼굴만 빼고 나머지는 묻혔다.
   「근데 이건 좀 재미없지 않냐?」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방법 있어?」
   「왜 없어!」
   「뭔데?」
    즉각 누군가 또 리모콘을 눌렀다. 그랬더니 저 구석진 곳의 비밀문이 열렸다.
    또 나도 풀어줬다. 대신에 난 철장에 갖힌 셈이고, 자기들은 바깥에 있고.
    나는 녀석들 주문대로 비밀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쭉 들어갔다. 어둡다가, 소름 돋다가, 기분 이상하다가... 갑자기 밝아졌다.
    거기는 한 2000년 전쯤 될까? 로마의 검투장인가 뭔가 아니면 그리스 무슨 경기장이었다.
    관중들도 많았다. 다 옛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살다 살다 그렇게 큰 개는 처음봤다.
    저건... 저건... 지옥의 개 케르베로스? 뭔지 몰라도 개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날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건가?
    나는 개가 아니니 녀석들 마음을 알 수가 있나. 그런데 딱 뭔가 신호가 울렸다. 그래서 녀석들은 미친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한 놈은 내 코를 물었고, 나머지 2놈은 내 거기를 물었다. 그 악몽이 처녀 불알 빼고 다 가능하다는 걸 난 왜 미처 몰랐을까!
    녀석들이 내 거기를 무는 순간 난 악몽에서 깨어났다.
    식겁했다. 젠장, 이런 미친...!





    6

    나는 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최근 너무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통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이래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처럼 말이다. 밤낮 똑같은 이야기. 다 비슷한 줄거리. 끝으로 갈수록 흐지부지. 그래서 웬만하면 시간과 비례해서 중반 이후가 잘 기억나질 않음. 우리 인생도 이처럼 식상한 걸까? '우리'에서 난 빼주라는 부탁을 누가 모를까. 설마... 에잇 아닐 거야. 근데 뭐가 아니야? 나도 몰라. 바로, 이처럼 말이다.
    아! 그런데 난 왜 여태 음악감상실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여기까지 와서 한량처럼 지내게 된 사연. 모두 다 별장 내부 음악감상실로 내가 순간이동했기 때문 아닌가. 물론 그게 다 긴잠을 1분이나 5분 정도 잠깐 눈붙이며 공상한 걸로 느끼도록 다 어쩌고저쩌고 기타 등등. 그랬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보고, 듣고, 읽는 사람 아무도 없지? 옐로카드 받든 말든 혼자니까, 아니 줄거리를 비틀려면 짧게 한줄평으로 간출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난 저렴한 비속어 딱 1번만 내뱉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옆에 혈당치를 올려주는 사탕이 없으니 그걸 핥을 수도 없지 않나. 그게 뭔 소리야? 넘어가고. 나는 별장 내부 음악감상실을 조져야만 했던 것이다. 비밀이든 뭐든 거기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딴 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음악감상실로 들어갔다. CD, 많네. Leo Delibes 발레 모음곡 <코펠라아>. Tchaikovsky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 Johann Strauss.JR 오페레타 <베네치아의 하룻밤>. Handel 오페라 <베레니체> 서곡(Minuet). Haydn 하이든 Piano Trio No.43. Saint-Saens 생상스 Violin Sonata No.1....
    물론 고전음악만 있는 건 아니었다. 추억의 유행가도 많았다. 근데 이상한 건 하나같이 모두 뽑히지가 않는다는 점. 혹시 뽄드로 붙여놓은 거야? 지들이 뭐 낙지 빨판 같은... 쉿! 그럼 설마 이게 모두 장식에 지나지 않는 건가? 아닌데. 진짜 CD 맞는데. 그러다 뭘 딱 뽑았는데 그게 특수버튼이기 때문에 딱 비밀문이 작동하는 건가? 결과만 간략히 말하자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거 저거 시도해보다가 어떤 CD가 사뿐히 뽑혔기 때문이다. 그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그래서 바로 틀었다. 음악은 시작됐다.
    그렇게 한참을 듣던 중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를 테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기라고나 할까? 뭐가 딱히 형언하기 곤란한. 더불어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전면 스크린에서는 연하게 시작됐던 화면정지 영상.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 어째 그런 거 있지 않나. 막 지 혼자 괴상한 변화를 일으키는 다양한 화면조작 영상들. 그때부터 유독 음악은 내 감정을 자극했다. 아주 그냥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미 몸을 맞겼는데 그래서 난 마치 그 음악의 작곡자가 되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는데.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빼았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더군다나 내가 앉은 특수의자는 하필 안마의자였다. 시판 중인 그런 상업용이 아닌 듯 했다. 요컨대 기가 막혔다. 그럼 이제 안마의자를 대체하여 어떤 여인이 내 뒤로 슬며시 쓱 등장하는 걸까? 그럴 리 있겠나. 그 대신에 난 슬며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장면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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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전환.
    나는 초대형 MRI에서 깨어났다. 그게 웜홀머신인지 환상머신인지 몰라도. 최소한 런닝머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이게 뭐지?
    누워있지 않고 앉아있는 내 앞에 포스트잇으로 명령문이 적혀있었다.
   「궁금하면 찾아오시오.
    Michigan Carcassonne Mazamet, Patras Psachna Dirfi, Catania Lecce Cavallino, Sanata Cesarea, Monte Leon Motel Hello 옆 PLAY HOTEL
    궁금하지 않아도 우린 만나게 될 거요.」
    나는 그 포스트잇을 뜯어 막 구겨서 짖이겨 던져버렸다. 그렇게 멋지게 밖으로 걸어나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하여, 지금은 폼잡을 때가 아니다 따라서 일단 한번 믿어보는 수 밖에.
    그래서 버린 포스트잇을 챙긴 다음 일단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멋진 페라리 FF가 바깥에 떡하니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탔다. 시동을 거니 네비게이션도 켜졌다. 이미 앞서 주소도 입력되어 있었다.
    근데 주소가 뭐 이렇게 길어? 더 길지 않은 게 어딘가. 또 뭐랄까 불행 중 다행으로 난생 처음 페라리에 타 본 건 또 어디고.
    그렇게 나는 그곳으로 찾아갔다.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장면 전환.
    거긴 다름 아니라 별장이었다. 뭐야, 이런 젠장! 난 또 뭐라고.
    마침 동네 친구들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길거리에서 기쁨조처럼 (속된 말로) 조잡고 농담따먹기하고 있었다.
   「어, 형씨. 그 똥차는 또 뭐요?」
   「야 임마. 똥차가 뭐니 똥차가.」
   「그럼 똥차를 똥차라 하지 뭐라는데?」
   「클래식카.」
   「이름을 알아야 불러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우리 친구 기분 나쁘게 너 자꾸 똥차 똥차 그럴래?」
   「그러게 누가 똥차라는 말 꺼내래?」
   「늬가 먼저 시작했잖아 똥차라고.」
   「그러니까 그만 하면 될 거 아냐, 그 똥차 얘기. 아까부터 대체 몇번을 똥차 똥차 그러는 거야?」
   「너 일부러 그 말 반복하고 싶어서 자꾸자꾸 똥차 똥차 그러는 거냐?」
   「내가 언제 똥차 똥차 그랬다 그래? 너 나한테 한번 혼나 볼래?」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여자 한번도 안 사겨봤지?」
   「내가 너냐? 너는 못 사귀는 거고. 난 은퇴한 거고. 응?」
   「너 자꾸 거짓말하면 확 그냥 불어버린다. 응?」
    그런데 이제 보니 녀석들 말마따나 내가 여기까지 몰고 왔던 자동차는 정말로 클래식카였다. 뭐야 이거?
   「형. 그나저나 나 언제 여자 꼬셔줄 거요? 왕년에 여자깨나 울렸다는 형의 말 믿은 내가 바본가?」
   「너까지 형을 푼수로 아냐? 난 저형 마음에 들어. 왜, 언젠가 내 배필을 소개시켜줄 거라고 난 믿거든.」
   「너보다 내가 먼저야.」
   「늬가 우리 아제한테 해준 게 뭔데? 난 이미 (몸짓) 알아? 게다가 한정판... 거기까지만 알아둬.」
   「이 자식이... 너 여기서까지 얍삽하게 노냐?」
   「뭐가 어째?」
   「늬들 또 왜들 그래?」
    꿀꿀한 날씨 다음에 쾌청한 날씨 온다는데...
    난 여기 계속 있다가는 미처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나. 오늘은 얘네들이랑 재밌든 재미없든 즐겁게 노는 수 밖에.





    7

    다음 날이 됐다. 평소처럼 오전은 지나갔다. 그럭저럭 점심식사도 해결했다. 그런데 별장 다락방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웬 쇼핑백을 발견했다. 나머지야 다 시시콜콜한 거고. 그 가운데 딱 하나. 바로, 컵라면! 식료품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유통기한 지난지 까마득한 물품. 이름은 바로 <짜장범벅, 케찹범벅, 카레범벅>. 다른 사람 같은 경우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난 그럴 수 없지. 왜냐, 중학교 1학년 때 교과서와 공책에 적었던 숫자 1234. 1학년 2반 34번이야 뭐 우연이다 쳐도. 프레스토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타시던 국어선생님이 왜 내 뺨을 고맙게도 때려주셨냐, 친구랑 놀다 창문을 깨트려서였는데. 뭐 그때 생긴 흉터도 그냥 그렇다쳐. 그런데 케찹범벅... 카레범벅... 짜장범벅... 왜 하필...! 평범한 멜로드라마 말고 일일드라마, 그 가운데 막장드라마. 거기 나오는 저속한 표현 돈독! 원고료 밀리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만 왜 도저히 일독은 끊이지 않는고 하니.
    당시 중1때 친구들끼리... 이상하게 짜장범벅, 케찹범벅, 카레범벅 광풍이 불었는데. 케찹범벅 → 빨강 / 카레범벅 → 노랑 / 짜장범벅 → 검정. 독일(국기) → (거꾸로) 일독. 말도 안 돼! 재미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짜장은 '물론'을 뜻하고 케찹은... 카레는... (절레절레). 그게 왜 갑자기 생각나지? 몰라. 좀비처럼 피부병 걸렸던 거 생각하면, 넘어갑시다.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말이다. 옛날에 행운아요 해결사 아니었던 사람 어디 있나? 어쨌든 춤춘다고 다 기쁜 것이 아니다. 춤? 근데 동네 청년들이 춤추러 가자고 하면 어떡하지? 저번에 보니 극장은 있긴 있었는데... 설마, 닭장? 언젠적 유행인데 바꼈겠지. 아무튼 다 잊고 쉬려고 어딘가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이처럼 꼬여버렸나! 얼렁뚱땅 작품 구상차 놀러온 결과이긴 한데. 이건 뭐 혹 뗄려다가 혹 하나 더 붙인 정도가 아니잖아? 차라리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하는 인공지능과 놀 걸 그랬나...! 근데 걔도 요즘 바빠. 잘 놀아주지도 않고...! 어쨌든 난 느낌 세해서 도저히 여기서 더 쉴 수 없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난 바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말이다.





    8

    3일 경과.
    나는 오늘 사무실로 출근했다. 동쪽에서 뜬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다 나른한 3시에 누군가 찾아왔다. 모두 여섯 명이었다.
   「누구신지...」
   「우리는 당신이 만든 사람들이오.」
   「내가요?」
   「그렇소.」
   「무슨 소리요 그게?」
   「말 그대로. 우리는 당신이 만든 사람들이오.」
   「난 진짜와 똑같은 마네킹 로버트를 만드는 과학자가 아니오. 뭘 잘못 아신 모양인데,」
    6명 가운데 재빨리 누군가 검지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이오.」
   「내가 언제 거짓말이라 그랬소? 당신들께서는 뭘 잘못 아셨을 수도 있는데 그와 별개로, 네? 난 그대들을 모른다 그 말입니다. 아시겠소?」
   「모르겠소.」
   「그러면 아는 게 뭐요? 뭘 아시오?」
   「우리는 아는 게 많소. 다만 안다박사 취급받기 싫어 말을 아낀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만든 사람들이오?」
   「우리가 할 말을 벌써 당신이 해버리지 않소. 말만 가로챌 줄 아는 게 아니라 여자 마음 훔치기에 선수 아니오? 선생은 그 말로만 듣던...」
   「말로만 듣던?」
   「사람 띄엄띄엄 보는 허당.」
   「뭐요? 초면에 거 말장난이 심하지 않소!」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말을 믿어주시겠소?」
   「믿고 말고가 어디 있소? 난 아니라니까 글쎄. 왜들 그러오?」
   「말씀 잘하셨소. 우리가 왜 이럴 거 같소? 왜, 왜냐! 어째서 우리가 이러냐, 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이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라오. 정녕 아직도 모르시겠소?」
   「아 나 이런 거 참 나 증말 말 안 통하네. 어디 번짓수 잘못 찾아오셨구만 그래.」
   「아니오. 제대로 왔소.」
   「난 그런 적 없다니까요 형씨들.」
   「형씨들이라니오. 선생, 혹시 영화 대부를 보셨소?」
   「보긴 봤죠. 근데 그게 왜요?」
   「모르겠소.」
   「모르면서 그건 왜 물어봤소?」
   「잠깐 까먹었소.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오. 자꾸 그렇게 보채니까 우리가 당황했지 않소. 좀 있으면 기억나겠지 뭐. 아 참! 우리를 소개하겠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스탠리. 알렉산드로. 트레버. 샌더스. 셔터. 앤더슨이라오. 자, 듣자마자 아셨을 테니 읊어보시오. 거명해보란 말이오.」
   「스탠리. 알렉산드로. 트레버. 샌더스. 셔터. 앤더슨이라오. 아니 근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왜 내가 푼수처럼 당신이 시킨대로 이름을 말하고 있는지, 혹시 아신다면 가르쳐주실 수 있겠소? 모르겠지. 또 아까처럼 그 말만 반복할 테니까. 근데 내가 왜 당신들과 꽁트를 진행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소. 아 나 거 증말 돌아버리겠네.」
   「열릴 뻔한 뚜껑 우리가 덮어드리겠소. 미치지 마시오. 선생은 미치면 안되오.」
   「당신들 대체 정체가 뭐요?」
   「우리는 당신이 만든 사람들이오.」
   「내가 만들긴 뭘 만들어, 어?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나 골탕먹이는 거야? 어? 이거 왜 이래? 어? 내가, 어?」
   「진정하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흥분은 진한사랑과 친하다오. 우리는 남자 대 남자로 대화하고 있지 않소. 그렇소, 안 그렇소? 네?」
   「뭐가 그래? 어?」
   「짜증을 가라앉히시고 일단 우리들 직업을 맞춰보시는 건 어떻겠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가난한 연극배우. 물론 곧 있으면 복권 1등에 당첨될 것이고. 그리고 당신은 은퇴한 스포츠부 기자. 저 친구랑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 또 이분은 관상이... 조각가. 나머지 사랑운과 재물복은, 통과! 그 다음은 엔젤투자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카페 사장. 휴, 근데 내가 왜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지?」
   「왜냐하면,」
   「아, 그만!」
   「정말이오. 우리를 탐험가로도 도박사로도 여심을 정복하기 좋아하는 난봉꾼으로 만든 건 바로 당신이라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른 척해? 그럼 안 돼지. 어? 사람 섭하게 정말 그러기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네? 우리가 당신에 대해 조목조목 맞춰봐야 우리를 신뢰하시겠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뭐 까짓 것 못 할 것도 없지 않소. 당신 고전음악 좋아하는 거 우리는 다 알고 있소.」
   「고전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오? 이거 봐 봐. 당황했어. 다 보여 이 양반들아. 연기 그만해. 어?」
   「당신은 12살-13살 때 그걸 식탐했다고 들었소. 짜장범벅, 케찹범벅, 카레범벅 인스턴트 라면말이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소? 아무튼 나 아니오. 네? 나 아니오. 몇 번을 말하오, 나 아니라고. 네?」
   「받아들이는 게 편할 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뭘 하고 싶으며 어떻게 느끼는지. 당신도 다 알고 있지 않소?」
   「몰라요. 내가 어떻게 당신들 속마음을 알겠소, 네? 스탠리는 최근 아는 동생한테 흑심 품고 있고, 알렉산드로는 거래처 경리한테 눈독들이며 공들이는 중. 또 트레버는 친해진 숙녀를 어떻게 한번 해볼려다가 그녀가 눈치채서 도망갔고. 또 샌더스는 여자친구 자빠트릴려다가 그냥 지 혼자 자빠졌고. 셔터라면야 최근 메탈리카 공연 보러 갔을 거고. 앤더슨은 버티다 버티다 결국 하는 수 없이 플레이보이계에서 은퇴했구만. 딱 봐도 그래. 어제 영화 고스트쉽 또 봤지? 대체 몇 번을 는 거야?」
   「다 맞혔소. 역시 듣던 대로군.」
   「뭐가 어쩌고 어째?」
   「어떻게 하면 우리를 믿으시겠소?」
   「믿고 자시고 나 아니야. 설득이고 뭐고 나 아니라고요. 창작이니 창조고 나발이고 나 아니라니까 증말 이 사람들이...!」
   「쟨 바람둥이로 나는 허당으로. 그리고 쟤는 천재요 짜도 재력가로. 나만 둔재로 만들었다고 형씨를 원망하는 거 아니라오. 그럼 일단 우리의 5번 타자 마술사 셔터가 나설 차례오. 셔터 뭐 하니? 보여드려.」
   「보여드려? 대체 뭘 보여줄려고...」
   셔터는 007 가방을 소파 탁자 건너편에 앉은 내 쪽으로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열어보라는 시늉, 몸짓, 어조로 알려주었다.
    난 열어봤다. 근데... 속이 깊었다. 나는 팔을 짚어넣었다. 저 아래에 척키의 상반신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물 그대로 정사이즈. 뭐야, 그런데 007 가방은 탁자 위에 있는데? 또 뭔 속임수야~!
   「이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우리를 마술사로 만든 건 당신이오.」
   「또 그 소리. 아 글쎄 나 아니라니까 증말!」
   「가방을 다시 봐보는 게 어떻겠소? 볼 때마다 달라져 있을 거요.」
   나는 가방을 다시 내려봤다. 그랬더니... 거기에 미녀천국이 있는 건 아닌데... 황금과 다이아몬드와 초호화품들이 있긴 있는데...! 손을 넣고 만질려고 하면 멀어졌다.
   「가방 속으로 들어가는 건 당신의 자유라오. 허나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만큼 될 수 있으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오.」





    9

   「당신들 누가 보냈소?」
   「어딘가에서 왔겠죠. 허나 알고 보면 그게 다 당신이 보낸 거 아니겠소. 아니 그렇소? 허허허. 통 이해하지를 못하시니까 그럼 이렇게 즉답드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요. 말하자면 우리는 KKK단 소속이오. 세간에 잘못 알려진 우월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 아니라오. 뭐든지 세력이든 종파든 분산되며 다양화되지 않소. 일단 거기까지만 아시고. 아니 더 상세한 설명이 듣고 싶으시다면 밤을 세워서라도 말씀드릴 용의가 있소.」
   「궁금하지 않소. 우린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니까. 내가 언제 알고 싶댔소? 거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이 너무 싱겁네. 응. 정말 그래.」
   「형씨! 말 끊어서 미안한데. 농구만 뭐 가로채기가 있겠소? 주도권이야 왔다 가고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것. 형씨를 만나면 나 한번 따져야겠다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라오. 솔직히 말해서 은총과 축복과 복음과 감사와 사랑과 기쁨과 또 뭐야, 다 좋소. 다 좋아요. 근데 (고개를 팍 숙여 정수리쪽 원형탈모증 부위를 보여주면서) 이게 뭡니까? 나 이러다 낙엽처럼 정말 머리카락 다 날라가면 어떡하죠? 안타깝지도 않소? 형씨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오. 그리고 또, 어? 내가 뭐 존못을 보면 짓는 개요? 네? 이런 날 존잘로 만들어줬으면 좀 좋아! 응? 안 그래? 왜 날 이렇게... 물론 응석이자 투정쯤으로만 받아주시오. 허허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친구는 뭔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어쨌는지 일복이 일복이... 캬 어? (몸짓) 어? 대박. 배 아프단 말이 아니오. 누가 부럽대? 질투하지 않음. 신경도 안 씀. 그렇지만, 어? 근데 난 이게 뭐야!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다변가 여편네는 수다머신 역대급. 귀에 피가 나도 끝이 없는데, 최근 어떤 블로그에 빠져서 더 기가 살았음. 뭐 어떻게 나까지 거기 빠져들어서 이젠 눈에서 케찹이 나올 지경. 그리고, 어? 난 뭔 전생에 커피 못 마셔 원한 맺힌 귀신이라도 씌인 건가? 그냥 인생이 커피야. 누군가 바쿠스인 것처럼. 그러니까 내 말은 대체 그대가 지구에 왜 온 건지 그게 궁금하다고나 할까요? 근데 왜 하필 지구인지... 대체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대체 몇 개인지 아시요, 모르시오? 뭐 다 그럴 만 하니까 그렇게 된 사연일 텐데... 하긴! 아니 어떻게 우주의 비밀을 이처럼 신비스럽게인지 비과학적으로인지... 너무합니다. 그대 진정 너무합니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거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럼요. 허허. 거룩함과 먹먹함 외에도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누군가의 궁금함을 달래준다고나 할까요? 하여간에 차 떼고 포 떼고 딱 1가지만 생각해봐도 은연중 뭔가 넌지시 우리에게 암시하는 건 퍽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학계는 물론 나중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와... 일단 개대됩니다. 네. 그럼요. 그처럼 나중이 기다려질 수도 있고... 사석에서 할 말 부쩍 많아지기도 할 텐데...」
   「지금 따지는 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내 말은~」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이따만한 재산은 싫지 않고. 그 정도 생겼으면 됐지 또 언년을 꼬실려고! 응? 어제도 난 뒷산에 올라갔소. 거기서 도시를 내려다봤지. 도시의 야경 나쁘지 않았소. 그 말은 또 좋지도 않다는 말로도 곡해할 수 있는 거 아니겠소. 기왕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야경이 멋지지 않은 도시도 있소? 그런 건 없다고 봐도 된다오. 따라서 나쁘지 않다 다 그러겠지. 허허. 허허허. 그건 뭐 그런데. 근데, 어? 그 수많은 불빛들 그 수많은 빌딩들 그 수많은 아파트들. 거기서 내 소유는 단 1개도 없습디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드무요? 아니오? 아닌 게 아니오? 근데 재산세 내실 만큼 내시는 분들께서 뭐 불만이 그렇게나 많소? 다음 생에 정녕 혐오곤충으로 태어나고 싶으신 게요? 그럼 말만 하시든가. 하여간에 됐고! 여기서 싸움 1등이 누구요. 내가 한수 가르쳐주는 건 어떻겠소. 야, 너! 그래 너 임마. 어딜 쳐다 봐? 딴 데 보지 말고. 내 눈 피하지 마 임마. 어? 능청은 아지트 가서 떨고. 뚤레뚤레 아직도 유난떠냐, 어? 그래, 너 말야 너. 너 나랑 한판 뜨자. 어? 걱정마 임마 내가 져줄 테니까. 알아들어? 뭐 6명 가운데 5명은... 어려워보이고 제일 만만한 상대가 너 밖에 더 있냐?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냐? 어?」
   「형씨 진정하시오. 목에 핏대 섰소. 소름 돋을 뻔했소.」
   「어라~ 웃어? 뭐, 쪼개? 지금 이게 웃겨? 금붕어상 표정 심각하고. 말상은 실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고. 잘들 헌다. 야! 말상아고 개상아고 싸워. 야 돼지상. 넌 뭐가 좋다고 실없이 웃어? 야, 너 사자상.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냐? 그러게 엄마 말 왜 안 듣고. 그러지 말고 사자상 늬가 얘네들 정리해. 조용히 시키라고. 내 말 안 들려? 이런 건방진 뚱보를 다 봤나. 너 말고 너! 또 웃어? 입 다물어. 조용히 해. 어디서...! 이런 돼지새끼... 너 말고 너. 이런 못생긴 새끼돼지. 넌 뭘 잘했다고 웃어? 어? 내가 웃기냐, 어? 여기가 뭐, 됐다. 아니. 어? 야 너 멍청대장군, 넌 하다 하다 여기까지 와서 여자 생각하냐? 어? 야 이 미련곰탱아! 정신 안 차릴래? 어? 왜, 정신차리게 해줘? 그래? (팔짱) (절레절레) 내가 지금 늬들 데리고 뭐 하는 건지 참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형씨 혹시 코메디언이오?」
   「그럼 내가 개그우먼이겠소? 내가 코메디언이면 지금 여기서 당신들과 이러고 있겠냔 말이오! 부질없는 입씨름 취미 없다오. 아니, 근데. 당신들 정말 뭐야? 어? 너도 나 가난하다고 깔보냐? 어? 너도 내가 우습냐? 어?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야, 어?」
   「안되겠소. 마지막으로 오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어야겠소. 우리의 스탠리가 알고 보면 정말 요술쟁이라오. 스탠리!」
   「야, 스탠리 뭐 해?」
   「이미 했어.」
   「정말? 아니 언제?」
   「나 스탠리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래도 짧게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형씨,」
   「정중하게!」
   「그래도 너무 거리감 느껴지니까. 으응? 형씨.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강력한 걸로 짠-했소. 충격적인 마술로 짧게 승부보자는 의미에서 말이오. 자, 저쪽으로 가셔도 좋고 여기서 살짝 옅보셔도 좋으니. 지금, 팬티 안을 봐 보시오.」
   「누가 겁날 줄 알고! 보라면 못 볼 거 같소? 나 새가슴 아니야. 이거 왜 이래?」
    그래서 나는 내 팬티를 슬쩍 옅봤다. 뭐야?
    그런데... 아니... 아니 어떻게...
    내 물건은 초딩 아니 5살 꼬마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꼬실꼬실 털도 없고. 어른것처럼 실하지도 않고. 허당들처럼 색상이 진하지도 않고.
    그냥 땅꼬마 그 자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소. 여기 명함을 놓고 가겠소. 부디 거기 적힌 무도회에 참석해주셨으면 감사하겠소.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라 자신한다오. 허허허. 그럼 다음 기회에 (몸짓)! 애들아 가자.」





    10

    수줍은 애인의 호의에 대한 궁금증, 참을 수 있다. 왜냐면 애마도 뭣도 없으니까. 기쁨과 행복과 사랑과 낭만을 이루 말할 수 없도록 바랄 리 있겠나. 우리는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다. 열망에 대한 간절함 알 게 뭔가. 그렇다고 웬 야생마를 어떻게 한번 자빠트려볼까 잔뜩 벼르는 주인공이 나오는 일일드라마. 난 왜 그게 재미없을까. 마리오네트와 면사포와 수정구슬을 선물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든가 말든가. 보아하니 다정함과 부드러움과 애절함과는 그냥 담을 쌓고 산다고 봐도 된다니. 근데 그게 뭐 어째서! 괜찮다. 들들볶고 닥달하는 잔소리 어차피 한 귀로 들어갔다가 다른쪽 귀로 나올 텐데. 일단 곁에 다변가도 누구도 없는 인생. 삶이란 원래 심심한 거다. 정말로 난 재미없음에 패배해버린 것만 같다. 어쩌면 좋을까? 뭘 어쩌면 좋을까. 사랑의 차트를 구워삶던 호시절은 다 지나갔다. 근데 있긴 있었나? 그럼. 우리는 여심을 떡주무르듯 요리하는 게 특기였지. 믿거나 말거나, 가 아니라 진짜다. 아, 진짜였다. 하긴 뭐 왕년에 멜로드라마 안 찍어본 사람도 있나? 그래서 여자말 잘들을 거 같고, 오직 자기만 끝없이 사랑해줄 것 같은 남자로 보여서 애정은 낙찰됐는데. 나중 보니... 말 말자. 어차피 남자 입장에서도 볼수록 매력적인 줄 알았는데 나중 보니... 그럴 테니까. 어쨌든 그분들 말 듣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지기 쉽상. 기 빨리다 아무일도 못한다. 그냥 병풍만 서다 끝. 능글맞음이란 결국 시간낭비의 총량과 비례하는 것. 그런 시시콜콜함과 친하다보면 통상 달콤한 성과는 멀어져가기 딱 좋다는 점. 알긴 아는데. 알면 뭐 해! 누가 아니래. 새침한 숙녀 편들어주는 친구들 속으로 얼마나 짜증이 쌓일까. 근데 지금 남걱정을 왜 하지? 너나 잘해 라는 말 따논 당상이구만. 자,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이니만큼 고로 이제야말로 꼭꼭 숨겨놓은 회심의 뻔트 카드를 꺼내들어볼까? 말은 쉽다. 안 그래도 짜릿한 추적과 신나는 모험과 기막힌 환희, 그거 다 과장된 거다. 아, 맞다. 그런데 오늘도 6인의 사나이들이 찾아오면 어떡하지? 또 내 고추를 꼬맹이 풋고추로 만들어버릴려고? 하한가가 아니라 아마도 업그레이드겠지. 그럼 어쩌면 난 녀석들한테 파리처럼 앞발 아니 두손을 싹싹 빌면 어떡하라고. 어제 그 마술을 보아하니 장난 아니었는데. 걔네한테 착착 말려들고 슬슬 구슬려지다가 난 정신을 잃어버릴 거란 말이야... 안되겠다. 난 일단 피신하기로 했다. 잠잠해질 때까지 바깥으로 돌다가 공수 전환의 빈틈을 노리면 된다. 지공으로 아무리 두드려봐도 웬만해서 골 넣기 힘들다. 강타자들도 태반은 비강투수들한테 고타율을 얻어서, 강투수들한테 고개숙인 걸 벌충하기 때문에 강타자 몸값하는 거다. 드문 거포 빼고는 거의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아지트로 갔다. 근데 거기 도착했는데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당분간 열지 않는다나 뭐래나. 얘네도 어디서 들은 게 있나? 여바텐더 없습니다...! 대체 몇 번을 말하나 1번만 더 말했다가는, 뚜껑 열리면 안된다. 흥분하지 말자. 지금 진한 사랑에 격정적으로 몰입해도 모자를 판에,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정력감퇴란 말만 들어도... 그분들 마음 우리가 어떻게 모르나. 하여 난 일단 저기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래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그런데 뭔지 모를 목마름은 해소되지 않네?! 그렇다고 젊음의 행진에 대한 갈망 어쩌고저쩌고 또 낙서를 끄적거릴 수 있나. 그러니까 지금은 뻔트도 맹활약도 아니라 그저 몸만 풀라는 시기. 괜히 백판 자빠져 놀아야 할 때 사자가 괜히 힘빼면, 나중 꽤 괜찮은 먹잇감이 나타났을 때 허탈해질 것이다. 안 그래도 매가리없는 관상. 탄력 좀 못 받으면 어떻나. 괜찮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 앞에서 크리스티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늬가 여기 웬일이니?」
   「오빠!」
   「너 혹시 배우지망생 출신이니?」
   「그건 또 뭔 말이야?」
   「아니, 난 그냥,」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 오빤 항상 그래. 말을 하다 말어. 어? 그러니까 여자들이 중간에 나가떨어지지. 그러고서도 누굴 어퍼트리고 싶어?」
   「뭐 어퍼, 뭐? 뭣이 어째? 너 나랑 말다툼하고 싶어서 그러니?」
   「아니란 거 알잖아 오빠. 나 여기 계속 세워둘 거야?」
   「너 제라드한테 전화했는데 녀석이 걸려들지 않았고. 다음으로 세바스찬한테 던진 미끼 걔가 간보다 말았고. 그 다음으로 스탠리의 의중을 떠봤는데 걔가 자긴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고백이라도 하든? 따라서 내가 잃는 셈치고 걸어보는 베팅이야? 기대없이 내보내는 4번 타자가 바로 나냐고!」
   「」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길바닥에서 계속 옥신각신할 순 없으므로 우리는 가까운 찻집으로 들어갔다.
   「오빠. 나 오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그래? 그렇게 나오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았니?」
   「오빠.」
   「내가 뭐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허당인 줄 아니? 너 나 잘못 봤어. 우리는, 어?」
   「오빠. 나 돈 빌려줘.」
   「커피 쏟을 뻔 했잖아. 그건 또 뭔 소리야? 너네 집 부자잖아!」
   「빌려줄 거야 말 거야?」
   「그냥 주라고 하는 게 어떠니? 난 받을 생각부터 없고, 빌려줄 생각은.... 우리 인연은 이게 마지막인가! 둘 다 잃느니 그냥 사람을 잃으랬는데...」
   「오빠. 오빠한테 돈이 어딨니! 내가 오빠 가난한 거 몰라?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내가 오빠를 시험한 거라고.」
   「너도 나 간보니? 내가 뭐 반찬이니 뭐니? 내 이름이 뭐 아무거나야? 어?」
   「」
   「그만 웃어, 정들겠다.」
   「정들지 뭐. 누가 오빠 잡아먹는데?」
   「어허! 얘가, 너 자꾸 무섭게 나올래? 근데 왜 출근 안했어? 너 미스테리아 그만뒀니?」
   「응.」
   「뭐야 내가 맞춘 거야?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괜찮은 미술관 하나 산 거야?」
   「응.」
   「뭐야 나 또 맞춘 거니? 이러다 나 점쟁이 되겠구만.」
   「응.」
   「넌 응 밖에 할 줄 모르니?」
   「아니. 넌 응 밖에 할 줄 모르니?」
   「너 자꾸!」
   「너 자꾸!」
   「그러니까 본심을 털어놔. 설마 나를 좋아해서는 아닐 테고.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 건데? 그렇다고 내가 뭐 도움이 될까! 글쎄.」
   「다 나나 되니까 오빠를 찾아왔지, 딴 애들 같아 봐. 응? 걔네들 변덕 오빠 몰라? 그리고 또, 어? 지금 남아있는 애들이 몇이나 돼. 안 그래? 그리고 또. 어? 오빠는 내가 커피 사달랜다고 진짜로 커피만 사주냐? 오빠는 그래서 안 돼. 응? 오빠는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야. 알아?」
   「몰라. 알기 싫어. 응? 됐고. 너 누가 보냈어? 그거만 말해.」
   「뭘 누가 보내!」
   「그럼 진짜로 내가 4번 타자? 아니 5번째 대타?」
   「응. 정말이야.」
   「그냥 누가 보냈다고 해주면 안되겠니?」
   「나 거짓말 못하는 거 오빠도 알잖아.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인데, 오빠. 오빠, 우리 진지하게 사겨보는 건 어때? 응?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냐? 응?」
   「넌 나보다 훨씬 멋진 남자를 만나야 돼.」
   「지금 거절하는 거야? 어쩜 귀여워. 절반의 승낙으로 알께.」
   「만약에 내가 너랑 사귄다고 쳐도. 응? 너 사랑의 차트 싹 다 정리할 자신 있어?」
   「나 크리스티야. 내가 그 정도도 못할 줄 알아? 그럴 자신 없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겠지.」
   「너 누가 보낸 게 맞구나.」
   「아니라니까 글쎄.」
   「거칠게 성내는 거 보니 맞네 맞어.」
   「그래. 보냈다. 허나 누구라고 말할 순 없어. 그러면 안되니까.」
   「근데 너 아직도 연예인병 졸업 못 했니? 늬 별명이 혹시 그래서 못 말리는 그녀라도 되는 거니? 정말로?」
   「묻지 마.」
   「이미 질문은 엎지러진 물. 무응답은 네 자유.」
   「안 되겠다. 내가 소문 쫙퍼트려야지. 오빠랑 나랑 사귄다고. 그럼 뜬소문이든 헛소문이든 몇 명은 믿겠지.」
   「너 대체 나한테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 일단 오늘은 이쯤 하고 후퇴할께. 다음을 기약하는 걸로. (윙크) 오빠 알지? (알긴 뭘 알아) 나 간다. 아! 배웅하지 않아도 돼. 밖으로 나올 것까진 없다고. 다음에 봐.」
    저년이......!





    11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KKK단 6명이 남기고 간 명함을 보았다. 그건 안내장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봉투 안에 넣어져 있지 않고 달랑 1장 뿐인 종이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저번에 봤을 때 언제 어디로 오라는 무슨 설명회 날짜. 그 날짜가 바껴 있었다. 분명히 1주일 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그건 오늘이었다. 하여 난 창밖을 쳐다본 후 그걸 다시 봤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2020년이 아니라 1920년으로 보이네?! 나는 인상을 팍 쓴 체 다시 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1920의 숫자가 급속히 올라가더니 2020년에서 멈췄다. 마지막에 사뿐히 줄어드는 기능까지. 이 종이 1장에 무슨 장치를 입혀놓은 거지? 마술처럼 보이도록 애는 썼는데. 허나 난 그게 놀라운 기적이자 신비로운 초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왜냐, 그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단지 독학하기 귀찮고 연구하다가 금방 싫증날 게 뻔하니까 그래서 단지 하지 않는 것일뿐. 때문에 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속임수로 까무러칠 내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어쨌든 날짜가 오늘이니까 난 퇴근 후 그곳으로 갔다.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장면 전환.
    거긴 휴장중인 공원 같기도 하고 아니면 거의 짓다 만 대규모 리조트로도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 어디로 오라며 핸드폰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라는 데로 찬찬히 이동했더니 대규모 실내체육관이 있었다. 들어갔다.
   「와, 눈부셔!」
    난 조명발과 그리 친하지 않은데... 또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은데 이 조명은 다 뭐지?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지도 모르도록 교묘히, 정말 교묘히 어떤 숙녀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나는 당신의 블로그에 등장할 숙녀랍니다. 아그네스라고 불러주세요. 근데 혹시, 우리 구면인가요? 말하자면 난 이미 당신의 작품에 등장했는가 그 말이에요. 아니면 지금 실시간으로 내가 당신과 어떤 장면에서 만나고 있는 건가요... 말해줘요. 어서 말해봐요.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아요. 물론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렇지만 절 비중 있는 배역으로 설정하실 거면 기왕 하는 김에 멜로로 갔으면 좀 좋았을까! 왜 러브스토리 유치한가요? 아니면 뜨거운 사랑에 겁먹은 건가요. 하긴 해봤어야 알지. 딱 봐도 (몸짓) 진한사랑이랑 맞질 않아. 근데 왜 오빠는 말이 없어요? 자기가 만들어낸 비련의 여인. 때로는 비너스로, 불운에 절망할 때는 슬프게, 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에 이르게 될 그녀. 내가 톱탤런트와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그러니까, 흔녀다, 뭐 그거에요? 보면 볼수록 매력적으로 새롭게 보일 텐데 이걸 어쩌나. 근데 오빠와 난 전생에 무슨 인연일까요. 아, 실은 하나 고백할 게 있어요. 오빠가 날 블로그에 등장시킨 건, 그게 그러니까 이미 등장했든 아니면 나중 깜짝 출연하게 되든. 그건 곧 내가 오빠한테 그렇게 하도록 조종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이거든요. 그 우리요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어요? 오빠와 나. 어떻게 하면 믿겠어요?」
    그와 동시에 내 눈에서 레이저가 나갔다. 잠깐 시연용이었기 때문에 일단 분홍색으로 시작해 푸른색으로 끝났고 짧았으며 저쪽 레이저가 끝나는 부분에서 번쩍임과 타오름과 연기가 살짝 일었을 뿐. 다른 건 없었다. 나는 누군가 뒤에서 내게 레이저를 쏜 게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나에게 들통날 수 밖에 없는 이미 예견된 수법. 넘어갈 수 없었다.
   「빛보다 빠르지 않은 레이저인데, 인간에게 유해하지 않은 걸 어떻게 내게 비춘 다음. 그건 반물질 성격을 띠는데. 파동은 규칙적인데 유달리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물체를 만나면 그걸 관통하지 않은 체 바깥면을 따라서 이동하다가, 관통했을 때의 끝지점에서 다시 곡선은 직선으로 바뀌어 운동에너지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기술. 나도 가능하다오.」
   「오빠도 유소년 과학잡지 좀 읽었나 봐! 그러니까 난 뭐 블로그에나 나오는 조연이기 때문에 내 말에 별 신빙성은 없다? (딱)!」
    이번에는 저쪽에 걸려있는, 가로 십 몇 미터에 세로는 그 2배에 필적하는 대형 초상사진. 그 초상사진은 크기에 걸맞도록 사람으로 바껴서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면서 점점 사람과 흡사한 크기로 바뀌는데. 내게 거의 가까이 오면서 점점 흐려지더니 그건 그녀의 첫키스였을까? 나와 접촉하자마자 서서히 옅어지던 그녀는 깨끗히 사라졌다.
   「그런 3D 기술로 날 밀고당길 생각이었소?」
   「그럴 줄 알고 저번에 밀사로부터 들었단 말이에요. 당시에 움찔했다면서요?」
    그러면서 그녀가 손짓하자 스탠리. 알렉산드로. 트레버. 샌더스. 셔터. 앤더슨이 등장했다.
    나는 반가워서 유난히 친한 척했다.
   「친구들. 난 형씨들 이름 다 기억해. 한번 불러볼까? 스탠리. 알렉산드로. 트레버. 샌더스. 셔터. 앤더슨. 근데 왜 불러도 대답이 없어?」
   「그분들은 스탠리. 알렉산드로. 트레버. 샌더스. 셔터. 앤더슨가 아니랍니다.」
   「그럼 저분들은 그 양반들 주니어라도 된다는 겁니까?」
   「그렇죠.」
   「허허. 이거 누굴 속이려고. 그럼 뭐 쟤들이 슈퍼주니어라도 된단 말이오? 아니지. 그래. 그럼 슈퍼주니어 2? 지금 나랑 장난하시오? 네? 여기서 당신은 몇 가지 묘기를 보여준 다음, 또 날 어딘가로 유인하려고? 이거 누굴 보고 또 똥개 훈련시킬려고!」
   「오빠 웃기다. 이 오빠 뭐지? 오빠 대체 정체가 뭐야? 오빠 정말 속고만 살았어? 그 저명한 동네북이 바로 오빠야? 그러니까 호구도 뭐 국가대표급이다? 이런 봉을 다 봤나. 이거 완전 바보 아니야! 야호 바보가 나타났다 바보가 나타났다.」
   「이렇게 말하려던 거 다 짐작하고 있었어. 흠! 저기 저 친구들은 지금 몽환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일은 기억 못할 테고. 또. 저 친구들은 엇그제 나랑 만났던 걔네들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당신 아까 뭐랬지, 아그네스인가 아뿔사인가 당신이 한 30년을 순식간에 필름 빨리감기했다고 하려고 했죠? 낭자, 그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소. 내가 보기엔 말이지,」
   「잘못 짚었네. SF가 아니라 그냥 드라마일 뿐인데. 쟤들은 정상적으로 나이들었을 뿐이고, 쟤 아빠들이 나이값을 못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늙지 않아서 그 둘이 똑같아졌을 뿐. 오빠 너무 앞서나가셨어.」
   「근데 당신은 정체가 뭐요?」
   「나? 아까 말하지 않았소. 당신 블로그에 등장할 여인이라고. 아니면 이미 몇 편 찍었나 몰라! 근데 왜 오빠는 날 기억을 못해? 보진 못했기 때문이라고? 운명적인 만남 척하면 척 아셨어야지.」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말이 되게 해 드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눈속임으로 날 쫄게 만들려고. 허접한 속임수 나도 다 할 줄 안단 말이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오빠가 10 JOBS인 만큼. 그 가운데 유독 최근 예언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부터 30일 동안 일정을 빼곡히 적은 엑셀 파일을 전해줄께. 그럼 되겠지? 왜 아직도 긴가민가 하셔요? 이 오빠를 어쩜 좋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오빠.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날이야 오빠. 오빠가 특별한 사랑을 예감하는지 아찔한 착상 먼저 급한지 모르겠으나, 보챈다고 될 일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우선 아쉽지도 않지? 근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말이야. 오늘 기억 지워줄까 남겨줄까 속으로 생각만 해. 그대로 될 테니까 말이야. 끝없는 사랑과 특별한 행복과 미지의 은총. 그래 알아. 응? 아침에는 비너스와 함께, 낮에는 아프로디테와, 저녁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하는 몽상은 누구도 반기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인생이 새로워질까? 그걸 오빠가 알아 내가 알아!
   (아니, 이게 뭐지! 언제부터였을까? 인파는 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웠고, 관현악단은 낭만적인 경음악과 유쾌한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오오 이게 진정한 가면무도회구나 절로 알게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드레스코드가 따로 있나는 모르겠는데. 복장이 복장이... 넋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만 알아두자)
    그러든 어쩌든 일단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겠지. 응? 다음으로 남자들은 그런 숙녀들을 쳐다보며 뒤꽁무늬를 쫓을 테고. 그런데 오빠까지? (절레절레)! 우리는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는 요술피리를 불면 그만 어쩌고저쩌고. 뭐 하러 졸랑졸랑 돌아댕기고 체력을 소진하나 어쩌고저쩌고? 시간낭비 할 만큼 해 봤지 않나. 금새 지겨워지는 인형 같은 낙서 애초에 시작도 말자니까 증말. 이 세상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뭔지도 모르니까. 아니, 날아오를 듯한 기쁨과 공상이 대체 뭔 상관이지? 억지로 짝지을 수는 있다만.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헛된 잡념은 일단 쓸 데가 없어.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오빠! 오빠 정신차려. 오빠까지 그러면 안되지. 응? 아무튼 그것만 알아둬. 비싼 향수는 작은 병에 넣는다는 거.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확인 잘 해. 계속 그 뭔가를 부정하면 할수록, 팬티 속의 그건 꼬맹이 거랑 분간 안될 정도로 오빠를 놀래켜줄 테니까. 아시겠어요? 자, 그럼 이제 슬슬 오빠 최면을 걸어 다시 몽상가를 허당으로 만들어볼까?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뭐 빠져들긴 뭘 빠져들어? 다시.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뭐 누가 빠져들어? 그냥 들어. 너무 많이 알려고하면 다쳐. 응?......
   (그 다음부터 나는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지점부터 그녀는 평면 실사 광고사진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근처에는 동네 길고양이들과 똥개, 들개들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을까? 그럴 리 있나. 마네킹 수백 개가 내 근처에 있었을까 없었을까? 당연하지, 있었다. 그리고 아까 봤던 장소는 당시 기분과 사실과 느낌과 달리 그 1/10로 줄어들어 있었다. 분위기는 곧장 날 식은땀 쭉 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때 난 생각했다. 만약 언젠가 이런 일을 또 겪게 된다면, 그땐 누가 날 똥개훈련 시킬려고 하자마자 아니 이미 그전에 시간낭비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렇게 난 집으로 돌아갔다.





    12

    오늘 나는 늦잠을 잤다. 그리고 별다른 일 없이 집에서 TV를 보다가 어영부영 오후 3시가 되었다. 그렇게 늦은 출근길에 올랐다.
    그런데 사무실에 거의 왔는데.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여자를 보게 됐다. 팔짱만 끼지 않았다 뿐 내가 지 남자친구인 줄 아나 보지? 그녀는 소심하지 않았다.
   「오빠. 날 오빠 작품에 등장시켜줘. 우리 꼰대가 오빠한테 지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귀뜸해주는 거야. 알겠어?」
   「무슨 소리요? 나는 그런 사람 아니오.」
   「오빠 블로그에 댓글 쓴 사람이 나인지 정말 모르겠어?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물론 천년의 연모를 나눴다고.」
   「그게 무슨 얘깁니까?」
   「허허. 말 길어지게 생겼네. 좋은 말로 할 때 나를 써볼 텐가, 아니면 꼭 내가 오빠를 자빠트려야 말을 들을 거야? 이거 정말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오빠?」
   「언제 봤다고 오빠요? 초면에 이거 너무 날 거칠게 구석으로 몬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 오빠 말 정말 안 통하네. 내게 1장 건네고 날 블로그에 등장시킬 거야, 아니면 내게 5장 지불하는 대가로 내 대타로 누군가가 지정될 거야. 오빠가 뭘 고를지 꽤나 궁금한데? 그런데, 응? 5장은 있고? 잘 생각해 봐 오빠. 이게 오빠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응?」
   「」
   「오빠, 내 말 듣는 거야? 관심 있는 척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여자가 없지. 안 그래? 여자란 말이야~ 아, 맞다. 근데 내가 왜 오빠한테 수업료도 받지 않고 강의를 하는 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비싼 게 바로 공짜거든. 그럼 어떻게 나랑 공짜 같은 악마의 거래를 한번 시작해볼까? 그럴까? 응? 그럴까 말까? 대답을 해. 말을 하란 말이야 인간아, 응? 이 남자 왜 이리 매가리가 없어? 응? 어디 그래서 진한사랑 할 때 힘이라도 쓰겠어? 아, 재미없어. 기운 빠져. 지친다 지쳐. 내가 오빠 기 빠는 것도 아닌데 시작부터 왜 그래? 뭐 지금 나한테 기 빨린다 그 말이야? 정말 그렇게 해드려? 응? 말만 하셔.」
    그때부터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에서 삐───소리. 드르륵 소리. 이명 현상 같은 게 날 멍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리디 여리게 간질 발작 전 증상, 만취했을 때 또는 다음 날 숙취로 개고생하다 구토하는 느낌도 동반했다.
    그러다 중간에! 갑자기 그녀의 두 귀는 박쥐의 날개로 변하였다. 설마 이년이.... 드라큘라? 드라... 아닌데. 긴가?
    그렇게 두 귀가 거대한 박쥐 날개로 변하자마자 날 에워쌌으므로 우리 둘은 갑자기 어둠 속에 남게 됐다.
   「오빠 신기하지? 겁먹을 거 없어. 그대로 걸어. 오빠는 바깥이 보이지 않을려나 몰라도 난 아니니까. 또 사람들 눈엔 아마 우리가 보이지 않을 걸!」
    그렇게 그녀는 나를 빛으로부터 감싸 어둠과 한몸으로 만들어 날 사무실까지 인도하였다.
    물론 그때까지 그녀는 또 뭐라 뭐라 이러쿵저러쿵 말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내가 그걸 다 기억할 수 있겠나. 그럴 리 없겠지. 그런데 내일 그 모든 게 다 생각나면 어떡하지?
    그러든 아니든 일단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무실 앞 사선 방향으로 미술학원이 있다.
    그 미술학원에서 캐서린이 나오면서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 학원 마네킹 껴안고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빠, 외로워?」
    난 정말로 그 미술학원 마네킹을 껴안고서 막 뜨겁게 키스를 할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뜨~아! 맙소사 말도 안돼. 이런 젠장!」
   「내가 할 말을 왜 오빠가 하는 거야? 내가 더 무안할까 오빠가 더 더 낯뜨거울까. 이 오빠 안되겠네. 응?」
    그건 뭐 어떻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다음.
    베네치아 피자집, 호프집 뭰헨, 빵집 파리바게트. 어디서였을까? 저가 명화.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하필 한쪽 귀에 붕대를 맨 모습. 그걸 봤을 땐 난 그야말로 식겁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말 뻔하다 겨우겨우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TV 채널을 돌리는데. 웬 스포츠 채널에서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장면. 그 멋진 우승컵 양손잡이가 사람 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시내에서 인형과 동물탈을 쓴 아르바이트생과 접객원. 난 그처럼 한동안 더운땀을 잊은 체 식은땀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게 다일 리가 있겠나. 그 뿐이었다면 좀 좋았을까! 무슨 없던 능력이 뜬금없이 생겨난 것인지 나는 사람들 귓등에 세겨진 숫자를 읽을 수 있었다. 그처럼 어쩔 때 저 남자는 두 귀가 유리컵 손잡이로 보였다가, 저 아줌마 귓등에 888이 젹혀 있는 걸 보는데. 그 가운데 무척 곤혹스러운 게 뭐냐면 동그란 귀걸이! 그건 뭐랄까 사람 얼굴──컵 손잡이──컴퓨터 그래픽처럼 살아움직이는 동그라미! 그리고 또. 나는 아침마다 이불을 젖혀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내 고추가 꼬맹이 고추가 됐나 안됐나를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난감한 환각증상을 대체 누구한테 털어놓지? 하물며 혹시... 이게 환각이 아니라면 그땐 또 어쩌란 말인가!





    13

    나는 새해 들어 다시는 칼럼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절필만큼 쉬운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안 그래도 할 말 떨어지기 마련. 선물 주고받을 사교계의 명사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상주는 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이건 뭐 자긍심 달래는 거도 아니고 허세 위로하는 거도 아니고. 망했다. 더 썩었다. 대체 뭘 능청꾸러기 허당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설마 그게 나? 아니야. 아니다. 그럴 리 없어. 절대로. 하긴 그러든가 말든가 그게 뭐가 중요해! 됐어. 지금이 무슨 "(리모콘 꽉 쥔 채 잠든 아빠한테서 그거 조심스레 뺏으려드니) 아빠 안잔다" 뭐 그런 시절도 아니고. 오빠 자? 관심없어. 누가 궁금하데? 재미없어.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가 어쩐지 못마땅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괘념치 마. 시간이 다 해결해줄 테니까. 그렇지만 일평생 재미없음한테 쥐어터지고 심심함에게 항상 기죽어 사는 일. 도무지 이건 말이 안되거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인생이야기냐고. 그러니까 사랑의 추억이 가난하지. 형편은 더 해. 뭐 재산목록 1-2-3위? 있는 놈들이 더 하겠지. 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먹어봤어야 알지. 그렇지만 해가 바꼈다. 그래서 우리는 한그루 희망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러지 말고 값싼 과자나 왕창 사다 먹을까? 영양가 없는 거 많이 먹음 탈난다. 하지 말자. 하긴 우리는 인생에 별 기대 없다. 원래 우리 나이 정도 되면, 나이 얘기 하지도 말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만. 1살 상승과 통장잔고가 비례하지 않는다고 빈정상할 것 없다. 멜로드라마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실정 퍽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철갑상어 스프 안 먹어봐도 안다. 차기 작품으로 어떤 판타지 영화에 출연할 건지만 선정하면 된다. 그래? 뭐가 그래. 작명가 비위 맞출 일 없다. 해결사 볼 수도 없다. 트로이의 목마가 뭔지도 모른다. 하물며 애마가 어딨어. 그런데 어떻게 여자를 만족시키냐고. 아예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는다. 이래서 눈부신 내일을 가늠할 수 있을까? 있다. 못할 거 없다. 근데 뭘? 몰라. 알 게 뭐야. 근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궤변 뿐이잖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탐욕만 남았다고. 좋게 끝없는 사랑에 대한 꿈은 깨자. 안 그랬다간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 이런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스톰트루퍼도 다스베이더도 신부들러리는 멀어져만 갈 것이다. 그렇다고 내일은 없다, 까지 가면 안된다. 그래. 오늘에 충실하자. 근데 왜 여태 이 생각을 못했지? 그럴 수 있다. 다 그럴 만 했다. 병풍맨이었으니까. 야망 같은 거 없었거든. 어찌 됐든 사랑에 대한 통념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다. TV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하물며 풍운아의 전례가 왜 궁금하겠나. 어떤 관심사를 막론하고 다 지겹다. 인생이란 원래 시시한 걸까? 아마도 그래서 악마는 새로움을 좋아하는가 보다. 아닌가? 아닐 리 있나. 그럼 뭐 천사는 식상함을 애정하는 건가. 그게 뭐야? 푸념쯤은 의식적으로 신경쓸 필요 없다고 간주하면 된다. 잡념이야 어젯밤 단꿈이 꽤 달콤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별거없다. 근데 뭐가 별거 없어, 뭐 인생이? 그나저나 숙녀들의 쾌적한 만족감에 찬물을 확 끼얹는 반전, 어디 없을까? 누구에게 무엇을? 새해들어 아직도 개뼉따귀 같은 공상이라니. 이게 사는 걸까? 허나 우리는 변명대회의 제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자면 불행과 가난과 권태를 또 누구 탓으로 돌리게. 그러지 말자. 애처럼 언제까지 투정만 부릴 건가. 어느 날 신기한 환상특급 주연에 깜짝 발탁되는 기대는 애들도 하지 않는다. 뭘 바래나, 삶이란 만화영화가 아니다. 처음엔 혹해도 신제품에 대한 만족도는 익숙해지기 마련. 근데 시작도 전부터 시들시들하면 어떡하나. 그러다 갑자기 색다른 취미가 날 유혹했을까? 밑도 끝도 없이 그게 웬말인가. 그게 아니라 난 의도치 않게 실직했다. 스포츠칼럼계에서 난 제대로 찍혔다. 난 그 근처에서 숨도 크게 쉴 수 없다. 타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환상문학지 미스테리아에서도 팽당했다. 토끼를 잡고 나니 사냥개를 잡아먹지 않은 게 어딘가. 따라서 나는 자유다. 근데 왜 기분이 이러지? 내가 꿈꾸던 바쁨은 결국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거라는 점. 유감스럽지만 어쩌겠나. 이럴 때일수록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맞이한 휴가인데. 재미없게 보내서야 말이 되냔 말이다. 새출발은 조금 미루고. 지금 필요한 건 바로, 시간낭비다.
    그래서 나는 최근 중절모를 쓴 남자가 가르쳐준 기지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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