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론.
유혹하는 방법은 여자마다 다르다. 숙녀의 단아한 몸짓에 매료되다, 그런 노래 가사에서도 안 받아주는 만남은 열외하고 여자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쉬운 예를 들자면 이렇다. 그냥 한번 팔짱, 팔짱도 1인이 끼는 팔짱이 있으면 양쪽에서 끼는 팔짱도 있음 심지어 딱 한번이 아닌 경우까지 있음, 그래 오빠, 나 저 오빠 엎어보고 싶어, 뜨거운 또는 은근한 눈빛, 노출을 동반한 몸짓,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가섬 들이댐 알짱알짱, 노골적인 또는 약한 한마디 여러 마디, 여자가 먼저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계속 연락하고 고기 사주고, 사진을 찍어서 간직하고, 그냥 직진, 풋사랑,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는 마음, 헤어스타일의 변화, 몸으로만 마음으로만 또는 둘 다 등. 그 모두와 다른 하나, 끈질긴 구애 곧 장기전까지! 불행일지 모르지만 이런 호감을 받아본 경험이 빈약하다 할지라도 다 방법은 있다. (딱)! 꽃 들고 쫓아다니기 꽃 들고 기다리기, 또는 어딘가에 계실 인연을 내 님을 기다리기, 그 동안 나를 가꾸기 복권 사기 돈 벌기 유명해지기. 중간을 달리는 여자의 직접 경험과 보고 듣는 얘기와 친구와의 수다만 가지고도 책 1권은 뚝딱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서운하게도 대개는 10권이든 20권이든 다 그 내용이 그 내용이다. 때문에 그것은 즉 사랑은 여자에게 일종의 손님이자 불청객이며 왕자님이고, 여자는 문구점 주인이다. 여자는 꽃 남자는 꿀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여자는 양이자 여우 남자는 늑대, 여자는 고양이 남자는 강아지. 뭐이, 여자는 물고기 남자는 어부? 아, 또 있다. 여자는 호박 그런데 발이 달렸어, 남자는 신비 그런데 가난해. 그러므로 뜨내기와 단골이 들리는 동화 같은 문구점은 정답고도 다정하며 단정하지만 문구점 주인들의 무수한 또 조용한─열렬한─간절한 애모를 애써 모른 체한 남자의 사랑이 어쩌면 더 애절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게 옳지 않다면 말도 안되는 이론일 뿐더러, 그게 옳다면 숙녀들이 결코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혹 그렇더라도 사랑의 목적이 행복이냐 본능이냐 쾌락이냐, 그 보다는 사랑은 그저 기쁨과 밝음과 사랑이라는 믿음이 미약하나마 납득되고 믿음직스러우면 사랑에 대해 주연과 작가의 신분까지 보장된다는 상상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재미없을 수도 있고, 물론 문구점 주인은 여자고 장난감 기업 대표는 남자라는 어디 무슨 그런 짜잔하고 쪼잔하며 찌질하고 허접한 가설의 역설 역시 성립되므로, 따라서 하수인 양은 설핏 또는 해맑게 웃을 테지만 고수인 양께서는 아마도 훨씬 여유롭겠지. 그런데 간혹 자칭 전문가라면서 연애의 첫 신호라는 것은 압도적으로 일방적이라는 견해가 일설로 나돌기도 한다. 그런 청초한 이론은 가볍게 웃어넘기자. 딸랑딸랑, 가뿐히 웃어주자. 피식! 왜냐하면 동물의 세계는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신호를 보내도 보내도 답이 없거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신호가 무슨 외계인이 보낸 외계인에게 보낸 신호도 아닌데 통 신호를 받아보질 못해서 허세 지수만 폭등하는 실제 사례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전문가가 혹시 중간인가 아닌가 설혹 자기 전적에 대한 투정이 일반화된 게 아닌가 라는 진단까지 참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녀가 있으면 선녀도 있듯이 친구 커피포트의 허세를 친구 진공청소기가 받아주지 아니 그걸 누가 받아주겠나. 뚜껑이 열리고 귀에서 피가 나더라도 친구니까! 허세의 단짝은 허영 주류는 허당 할 말은 허풍, 그래도 할 일은 사랑.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뭐라 뭐라, 발터 벤야민에 르네 지라르에 일리치니 뭐라 뭐라 쑥덕쑥덕? 사람으로 변장한 미네르바와 비너스와 큐피트가 아닌 이상, 그건 안 봐도 백퍼센트 허당의 허상. 더군다나 쾌락 위에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러면 사랑보다 쾌락이 젊어보이지 않나 라는 썩 의아한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게 어디 쉽더냐. 나는 다시 태어나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 그녀는 나보다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하니까, 그녀는 현생에서 날 만나 사랑도 했지만 아픔과 슬픔도 함께 겪었으니까 라고 고수는 때로 역설적으로 말한다. 달달한 연애 교본? 엄마들도 말한다. 그런 책 읽으면 멍청해진다고! 그런데 그런 책만 보고 그런 방송만 보고 그런 화법의 소유자만 만난다면 진짜 멍청해질까, 멍청해지지 않을까? 굳이 실험해 볼 필요는 없다. 실험으로 증명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설령 그랬다가 진짜 멍청해지면 대체 그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결과야 어찌됐든 적어도 똑똑해지지는 않을 것이란 점,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추정이다. 그렇긴 해도 우리 소녀와 아가씨와 일반인께서는 그와 같은 달콤한 연애론을 열심히 탐독하시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구한테 좋을 것인가? 바로, 그 때문에 하류 일반화가 되어서 어설픈 중간이 은근슬쩍 고품격에 숟가락을 떡 하니 얹을 수 있는 기회주의자이자 고품격 신봉자에게. 그렇게만 되면 그건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의 길일일 텐데 어디 보자, 아무래도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을까 이미 늦었을까. 사랑은 가기도 하고 머루를 수도 있고 오기도 하는 것. 결론은 사랑이 대등하건 귀하건 1 대 1이건 사람은 남녀 공히 평균 100번의 사랑을 한다는 것. 최소 0.5? 1? 뭐라고 현실적으로 100에 100 더하고, 다음은 다시 100 더? 그게 아니라 최대 1000? 아니 10,000? 뭐야 베팅이야 무제한이야, 것도 아니면 진정한 허풍쟁이? 신호가 어쩌고저쩌고 첫눈에 반하고 이러쿵저러쿵, 다 필요없고 사랑은 거미줄이다. 사랑은 거미줄! 토너먼트의 하단이건 상단이건 남자건 여자건, 사랑은 하나 아니면 거미줄일뿐 그 중간과 과거는 현재와 최고의 사랑만 못하다는 점. 곧 사랑은 선수 개개인이자 팀이고, 토너먼트 주최측이 진정한 연애술사이며, 인생이라는 대회가 곧 사랑론인 것이다.
2
어느 날 스컬리라는 여자가 도날드 덕을 찾아왔다. 그녀는 캠핑카에 온 짐과 전재산을 챙겨서 왔다. 아 참, 도널드 덕은 과거에는 나미래, 새공식이라 불리던 남자의 새로운 애칭이었다. 스컬리는 덕에게 당신의 연애 컬럼을 읽고 감흥을 깊이 받아서 당신을 만나보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덕은 덜컥 의심이 들었다. 친구인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에게 보낸 수필이 미스테리아에 실리지 않고 혹시 여성잡지 1이나 2에 실린 것은 아닐까 라고. 덕은 이처럼 애호가가 직접 찾아오는 적극성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고 그녀 앞에서 하느님 맙소사 라며 감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런 일 수도 없이 겪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덕은 스컬리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했고, 지극한 겸양과 극진한 감사와 스컬리의 예술론에 대해 어쩜 사탕발림이 아닐까 하는 격식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흡사 이런 일은 종종 찾아오기 때문에 대처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그런데 스컬리는 매우 교양 있고 뭘 좀 아는 숙녀였기 때문에 뭔가 미숙한 화술과 서투른 몸짓을 선보이는 덕을 놀리지도 않았고, 적당히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그때는 덕도 스컬리의 등장을 별다른 예견없이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다. 그때까지는.
덕과 스컬리의 만남은 낮에 있었던 일이었고, 덕은 저녁에 바텐더 캐롤을 만났다.
「캐롤. 너 그거 아니? 왜 사랑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는지.」
「황금의 상징 때문에? 비싸니까? 낭만적이니까? 가짜와 구별이 어려우니까? 평생 다이아몬드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니야. 모두 아니야. 캐롤, 왜 사랑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냐면 첫째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30억년 전에 생성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다이아몬드는 절대 흠집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 무기여 잘 있거라 라는 제목이 중세에도 씌였고 근대에도 씌였는데, 다이아몬드에 흠집이야 나겠지 왜 안 나겠니. 다만 모스 경도계에 따라 1부터 10까지 각 광물은 아래 단계의 광물에 흠집을 낼 수 있으나, 위 단계의 광물에는 흠집을 낼 수 없어. 거기서 10이 다이아몬드고. 바로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사랑에 비유하는 것이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응? 알겠니, 캐롤?」
「아 그렇구나. 오빠. 너 참 많이 안다? 그럼 너도 어느 예술가나 무슨 증후군처럼 모든 게 음악으로 보이고 소리가 다채롭게 느껴지니? 대리석을 볼 때마다 그 속에 어떤 사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심하면 돌 속에서 잠자고 있는 천사를 깨워 자유롭게 해 주고 싶냐고. 오빠, 그냥 평소처럼 해. 이상하다구. 설마 내가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니지? 꿈도 꾸지 마!」
「그래도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서 난 약간 섭섭한데 이걸 어쩌니. 난 정말 늬가 그렇게 물어볼 걸로 예측했어. 이렇게. 오빠 혹시 그거 이런 때 멋진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외운 거니? 꼬시고 싶은 여자가 그럼 나란 말이야?」
「진짜 그렇게 물어볼려고 했는데 이 오빠 선수치는 거 좀 봐. 오빠 요즘 무슨 독심술 학원이라도 다니는 거 아니야?」
「허허허. 그건 아니고, 실은 내가 오늘 널 찾아온 건 말이야, 저번에 우리 중에 제일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을 꼽으라고 했을 때 왜 날 선택하지 않았는지 따지러 왔어. 용건은 그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안되는 거야. 난 또 꽃이라도 전해주면서 이의 제기를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심한 걸 바랬네. 어 맞네.」
「사랑이라는 명분이 왜 나쁘겠나. 다만 너무 남용되어서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뿐. 난 캐롤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가기 싫었을 뿐이라구. 그것만 알아둬 캐롤.」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 「그런데 있잖아 오빠.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달라?」
「사랑과 우정이 어떻게 다르냐고? 다르지 않아! 누가 다르다고 하든? 누군데? 어딨어? 오빠가 그 양반이랑 한판 뜰까? 오빠 아직 살아있어, 응? 아 농담이고, 사랑과 우정은 다르지 않다네. 캐롤은 왜 같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다를까를 생각했네 그래. 음 착한 아가씨군. 정말 기특하다. 다 큰 처녀야. 심성이 곱고. 음. 캐롤은 앞으로 풋사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될 꺼야. 아가씨. 숙녀여, 오빠의 예언이라네. 기억해두렴.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장면을 기억하기, 남자보다 여자가 낫긴 낫지. 명대사든 푸념이든 졸작의 밑줄이든 말이야. 있잖아 캐롤. 사랑과 우정은 똑같아. 그 둘은 같다고. 단순한 차이점만 빼고는 말야. 그래서 사랑과 우정으로 나뉘는 거지. 누가 오빠고 누가 동생인지는 몰라도 되지만 같다는 건 분명해. 그런데 있잖아요. 차라리 바람둥이한테 사랑이 뭐냐고 사랑을 아냐고 물어보지 그러니? 음 글쎄 그건 뭐랄까, 사랑은 일부일처제 우정은 일부다처제? ...까지는 아니겠지만 형식적 차이는 있어도 그 둘이 얼마나 닮았는지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그럼 왜... 어째서 내게... 너 혹시 날 떠보는 거니, 아니면 날 평가하고 싶은 거니? 하여간 그 속마음을 통 알 수가 없단 말야. 아 정말 여자의 마음은 미스테리야. 영원한 미스테리! 사랑과 우정,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할 필요 하나 없어. 닥치면 잘 하잖니. 그런데 뭐가 궁금한데? 사랑과 우정. 할 만큼 해 봤다면, 단짝이 바뀔만큼 바꼈으면 설마한들 모르지는 않겠지. 겸양이 지나치면 뭐다? 재수없다고 하지! 별꼴이야 증말, 나도 한번 실제로 들어보고 싶네 그려. 캐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선수여.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뭐 다른 꿍꿍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사랑과 우정. 인기가 있었냐 없었냐 까지 따질 필요없이 어른이 되면 모를 수가 없겠지. 그럼. 앗 그런데 있잖아. 잠깐만 있어 봐. 그럼 뭐야. 1번 단짝은 애첩이고 밀려난 2번 단짝은 싫증나고 지겨워진 여자란 말인가? 나아가, 삼류 작가인 난 그럼 사랑도 우정도 모두 넘버 쓰리? 심지어 가난해? 더구나 심심해? 게다가 인기는 하락세? 그리고 외롭다? 그런데 바텐더한테 심각하게 저평가당했다? 이런, 젠장! (......) 그나저나 캐롤은 우정 백 번 사랑은 혹시 천 번? 흐흐흐. 흐흐흐흐흐. 농담이야 농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놀래니? 어머나 눈도 흘길 줄 아네? 이거 뭔가 수상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끼리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건가? 캐롤. 캐롤. 걱정 마 캐롤. 오빠야 캐롤. 오빠라구. 응? 오빠를 봐 봐. 오빠가 또 눈치가 빠르잖니, 응? 크크큭. 크크크크큭. 크크크. 크크크크큭.」
캐롤은 다소곳이(?) 덕을 째려보고, 덕은 슥 딴 데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덕은 효과적으로 캐롤의 따가운 시선을 회피함과 동시에 그는 효율적으로 그윽한 눈빛을 띤 채 딴생각에 몰입한다. 캐롤은 기분이 이상했고 덕은 최소한 지금은 얄미운 남자였다. 다만 제3자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지금까지 등장 인물은 셋. 사건은 스컬리가 마을에 등장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은 발단이었다.
3
전개는 때 이르게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물밑에서 바쁜 움직임이 있었고, 아직은 전개가 나타나면 안된다는 암시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동네에서 기존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났고, 그 빈자리를 슬슬 스컬리의 친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암시도 전조도 아니고 낯선 등장이 여러번 겹치는 정공법인 것만 같았다. 물론 귀뜸과 힌트는 있었지만 덕이 모두 묵살했다.
「덕. 잘 지내니?」
「오, 로잔나. 네가 보고 싶은데 그럴 리가 있겠니? 어떻게 지내? 그래도 시골보다는 도시가 좋지? 마을 사람들과 놀아줄 필요도 없고 말이야. 홀가분하게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응 뭐 그냥 그렇지. 그런데 있잖아 덕. 내 말 잘 들어. 너 당장 짐 싸서 그 마을을 떠나. 너네 마을이 어떤 이상한 기운에 잠식당했단 말이야. 네가 배짱이 두둑하면 몰라도 넌 실은 겁이 많은 애잖니. 좋은 말 할 때, 마을을 떠나!」
「로잔나. 왜 그래? 내가 마을을 왜 떠나? 뭐 우리 동네에 스컬리라는 여자가 이사온 다음부터 너네들이 모두 밀려났다는 거니 뭐니?」
「응. 밀려났어.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밀어냈다는 거야. 너 아직 못 느꼈니? 마을에 지금 너랑 캐롤 말고 누가 있니? 옛 친구들 모두 떠났다구.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봤을 때는 로잔나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아. 난 그냥 쫀쫀한 남자로 남을래.」
「내가 봤을 때는 늬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같다. 지금은 쫀쫀한 남자일지 몰라도 곧 있으면 겁쟁이 덕으로 바뀔 걸. 아마 그때 가서 오늘 내 얘기가 생각날 꺼다. 덕, 그냥 흘려듣지 말라구. 덕, 그러면 안 돼. 말 좀 들어 이 친구야!」
차후에 어찌될지 모르지만 덕은 수완가가 아니었고, 친구의 충고를 무슨 자장가처럼 듣는 개구쟁이였다. 눈동냥 귀동냥은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드라마이자 행복과 권태의 뫼비우스 띠였다. 덕은 현실감이 몹시 떨어지는 인물이었고, 속으로 사랑의 미래와 비논리적 괴물작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머지 않아 커다란 감정의 기복을 불러올 전개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4
덕은 맥스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렸다. 그곳 간판 색깔이 어떻고 이름은 무엇이며, 맥스의 외모를 설명하고 어떤 음식인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덕은 음식을 주문했고, 식사가 나왔고, 식사를 모두 끝마쳤다. 그래서 바에서 덕과 맥스는 커피를 같이 마셨다. 덕이 말한다.
「모두들 스컬리 친구분들이라면서요? 새로운 분들이 오셔서 동네에 활기도 넘치고, 기존 주민이라곤 이제 저와 캐롤 뿐인데 막 새로운 바람이 잔뜩 주입되는 기분이네요. 이건 행복의 희망일까요 새 인생을 개척하라는 운명의 서막 같은 어떤 상징일까요? 제 말이 좀 이상하죠? 생각과 말이 따로 놀거나 생각이 말을 지배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말이 생각을 제압하면 아마도 평범해질 텐데 그게 쉽지 않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덕은 생각한다. 이분은 무척 진지한 분이신가 보다 라고.
「그런데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냥 우연 때문인지 캐롤과 저는 가만히 앉아서 전학간 아이가 된 듯한 기분 때문에 요즘 부쩍 친해졌어요.」
「네.」
덕은 생각한다. 나랑 대화를 나누기 싫어하시는 건 아닌가 라고.
「오 그런데, 몸이 아주, 워워, 오오 아무리 봐도 정말 대단하신데요?」
「과찬이십니다.」
「설마 주민등록이 말소됐거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공부하셨던 건 아니시죠? 아니면 됐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주민등록이 말소됐습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아직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심각하게 법을 위배하지 않는 이상 법의 구속을 받지는 않습니다. 물론 추방으로부터 자유롭고 게다가 저는 방종은 싫어하며 취미는 게임이고 예술을 사랑합니다.」
「뭐야 이 인간! 얘 뭐지? 뭐지? 완전 과묵하던가 완전 근엄하던가. 둘 중 하나잖아? 얘 혹시 돌아이 아니야?」 라고 덕은 생각했고, 이 말을 겉으로 소리낼 수는 없었다. 덕은 하는 수 없이 그날도 캐롤을 만나러 갔다. 이젠 캐롤이 거의 여편네? 친근하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마누라처럼 느껴졌다. 캐롤도 덕을 영감탱이로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캐롤. 사람들이 이상해. 멀쩡한 인간들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넌 그런 거 못 느꼈니?」
「매상이 올랐어. 그것도 두 배로! 좀 이상하더라도 신선하고 색다르다고 생각하렴. 응, 오빠!」
「캐롤. 오빠 오빠 그거 너한테 안어울리는 거 아니? 아무튼 캐롤 침대로 가요, 그런 남자가 태반이래두? 진짜 그렇다니까. 지금 돌아가는 거 이거 정상적이지 않다고.」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아 장난치지 말고.」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너 설마 쟤들한테 넘어간 건 아니지? 벌써 좀비 흉내내는 거니?」
「당신이 지구 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라도 싫어요.」
「아 나 이거 정말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천궁과 바다와 저승 그 세 왕국의 자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 그 땅의 왕이 된 저승의 신 플루토. 암흑 세계의 무단자 하데스 역시 큐피트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 법. 혹시 스컬리는 큐피트? 자기가 자신에게 처방이라도 내렸나? 캐롤은 날 도망가고 싫어하라는 저주의 화살이라도 맞은 걸까?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인 듯 했다.
덕과 캐롤. 그리고 스컬리와 요리사 맥스까지 현재 등장 인물은 넷. 아직은 발단 아직까지도 발단.
5
덕의 의심이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스컬리가 마을의 리더라는 점. 곧 동조성 지수가 높은 덕은 스컬리에게 동화될 수 밖에 없었고, 덕은 어느새 스컬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스컬리가 누구인가? 딸랑딸랑 빙글빙글 반짝반짝, 아부의 제왕 립서비스의 황제, 아양의 신 애교계의 이단아가 아니던가. 즉 스컬리도 둘 중 하나였다. 기쁨과 쾌락, 그것도 아니면 못마땅한 표정.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런 조증과 울증이 들쑥날쑥한 스타일이 오히려 비위 맞추기가 손쉽다. 다정이면 다정, 사랑이란 사랑, 카인과 아벨, 사라와 마르크스등 말 많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얘기만 노래하는 귀가 꽉 막힌 양반보다는.
덕은 캐롤이 수지 맞는 장사 때문에 사람이 변한 것 같아서 캐롤과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대신에 스컬리와 움직였다. 옆에서 보면 그건 마치 스컬리는 5선 의원으로 선거 운동을, 덕은 굽신굽신 이상과 현실에 대해 옥신각신 혼자 고민하는 스컬리의 에코인 듯 여겨졌다.
덕은 스컬리의 영향을 받아서 스컬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즉 유명 추리소설가를 만나러가고, 에로영화계의 거장한테 찾아가서 인사하고 사진 찍고 당장 친구가 되고 소셜 네트워크까지 굳건히 결속하는 바쁜 행보들. 그러나 그러다 포기했다.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은 절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 그의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그는 그냥 스컬리 옆에 있다가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먹고, 나부끼는 콩고물도 선별해서 감식하며, 꼬박꼬박 열리는 정말 정말 탐스러운 복숭아를 손쉽게 딱 따먹고, 제발로 굴러온 호박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며, 애정의 착복을 경계하고 삼각관계를 연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어느 인어을 낚았을 때 과연 그 인어에게 밥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만 심사숙고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덕은 스컬리를 만나기 전에는 꽝 지금은 손속, 꽃놀이 패를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덕은 결벽증이 치료됐고 허언증은 실현됐다. 지금 같아서는 술집이든 체육관이든 장난감 가게든 박물관이든 뭘 해도 될 것만 같았다. 다만 자본이 좀 부족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덕은 간파했다. 스컬리가 은근한 허당도 못 돼고 아예 그냥 허당 꽝 허당이라는 진실을. 어디서 펠리컨 행세를, 어느 안전이라고! 덕은 경주마에 잘못 올라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덕은 스스로 경주마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또는 혼자는 외로웠기 때문일까, 뭐랄까 사정이 참 딱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는 에반스라는 블러거와 친해진 것이다. 물론 에반스도 스컬리의 친구였다. 요약하자면 스컬리와 덕은 명콤비가 됐다가 결별, 다시 덕은 에반스와 단짝이 됨.
6
에반스는 타고난 험담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네 친구들의 단점과 연애사와 집안 내력에다 재산 사항은 물론 자잘한 습관까지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의 익숙한 패턴이 유익한 탐구심인지 섣부른 눈독 같은 악습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반스가 에반스라면 덕은 덕이었다. 덕은 천부적인 심미안은 부족했으나 그간 떼인 돈이 얼마며, 만난 사람이 몇이고, 읽고 본 작품이 얼마인데! 덕은 에반스 몰래 에반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훓어봤다. 들켜도 상관없었다. 팔의 동선과 고개의 각도는 고상했고, 눈빛의 방향과 차분한 어조는 단아했으며, 말끝마다 오빠 라고 부르는 숙녀들이 꽤 잘 따를 것 같은 남자로 보였다. 그래? 정말 그래? 일단은 그랬다. 그러나 배짱 좋고 열 좋고 추진력도 좋은데, 막판에 결정타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다. 거품만 많고 승부구가 없었던 거지. 이때다 싶으면 춤을 추든 고백을 하든 계산을 하든 속된 말로 깽판을 놓든 결론을 제시하고 성과를 얻어야 하는데, 사람 김빠지게 말이야 딱 애원하는 스타일. 그래도 차라리 에반스가 낫지 덕처럼 허당에 몽상가에 허울만 좋은 낭만파에 그걸로도 모자라 천덕꾸러기라면 철드는 건 애초에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오락에 길들여졌고 쾌락만을 탐닉하며, 드라마는 잘 알지만 여전히 추리를 좋아하고, 극적인 공포를 두려워는 하는데 절대 마다하지 않고, 사랑과 모험과 환상 가운데 최소 두 가지를 추구하는 남자. 그의 이름은 바로 덕이었다. 떡! (왠지 건배 구호 같은 느낌이 없잖아 느껴진다)
그런 덕과 에반스? 단짝의 우정이 앙숙으로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덕은 캐롤과 함께 기존 우정을 유지한 채 새로운 친구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친구들은 각자 자주 하는 농담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자기가 전에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한두 번 말했을 때는 웃었다. 세 번 네 번 말할 때도 웃었다. 그 다음부터는 술버릇이나 지적장애가 아닌가 헷갈렸고, 결국 듣는 사람의 뚜껑만 열렸다. 듣고 믿고 또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블로거 에반스는 뭐 흡혈귀? 늬가 흡혈귀면 난 드라큘라 백작이겠다, 라고 무안을 안겨줄 수는 없지 않나. 아 그러냐 그렇구나 라고 옹호했을 뿐. 그리고 요리사 맥스는 좀비, 천문학자로 평탄한 삶을 살기에는 뭔가 섭섭한 아가씨 리플리는 마녀, 스컬리는 큐피트라고 했다. 아주 가지가지 했고 아득바득 떼 쓰고 작작 놀고 있었다. 그냥 몇 번이야 농담이라고 쳐도 이건 정말 구제 불능이었다. 원래 녀석들은 모두 외톨이였고, 리더인 스컬리를 위주로 새롭게 결성된 모임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 친교가 확장됐고 좀 더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들은 모두 혼자 살기 때문인지 동물을 하나씩 키운다는 것. 에반스는 닭, 맥스는 고양이, 마녀 리플리는 파랑새, 큐피트 스컬리는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은 작고 예쁜 물고기가 사는 어항을 관리하고, 유일하게 식물만 키우는 덕은 동물을 키우는 캐롤과 친하다. 물론 주종관계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가족 관계에 버금가는 우애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최소한, 설마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닭은 모르지만 개는, 새는, 너무 작나? 기린을 어쩐다는 소리는 내 살면서 한번도 못들어봤지만 고래는... 그 얘기는 그만 하자.
어쨌거나 저쨌거나 여전히 발단이지만 끝까지 발단일 리는 없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곧 계속 발단이지만 엉뚱한 일이라면 감히 말하지만 새로 이사온 친구들이 모두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고백하고 증언한다는 점. 그건 단지 괴상한 농담이지 특이한 전개 축에도 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전개? 어림도 없다!
7
덕은 집에서 일기를 썼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대개는 천국 일부만 패자부활전, 그러나 예외는 필요하다. 법의 일관성이 무너졌거나 우리 할머니처럼─우리 할머니의 명복은 빌겠으나─죽기 하루던가 3일 전이던가 그때 참회하면 너무 늦다. 이미 이승에서 어쩔 수 없이 법적으로 큰 죄인이 되어도 참회했으니까 하느님께서 천국행 땅땅땅, 이미 이승에서 법망을 용케 피하면 떵떵거리며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고 고대 황제처럼 행복을 누리며 제우스보다 재밌게 산 다음 천국행 아니면 혹시라도 패자부활전? 일부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부분적으로 적용되야 옳을 것 같다. 1심에서 손바닥을 내미네 그런데 2심부터 손바닥을 뒤집네, 또는 1 - 2심 모두 손등을 내밀다가 3심에서 손등을 뒤집네, 그러면 법의 대리인은 아 그러세요 호호호 그러네요 짝짝짝 그렇군요 라며 일관성 없이 참 예쁘고 귀엽고도 아름다운 일관된 전례를 남기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똑같이 따라하면 시시각각 결과가 다를 거라는 말이군. 허허허. 애기들 장난도 아니고 완전 엿장수 맘이다. 돈이 신이니까 돈이 장난을 치는 세상. 그래서 이승에서 드물게(?) 죄는 선이 된다. 그러므로 그건 하는 수 없이 저승에서 악은 벌이 되야만 한다는 논리를 불러온다. 결과적으로 때린 자는 행복 맞은 놈만 불행? 그건 아니다. 악마가 다른 어떤 멋지고 희한한 존재가 아니고, 천사가 진짜 날개가 달렸고 큐피트처럼 생긴 미지의 당신이 아니다. 인간이 천사고 인간이 악마다. 지구가 타임머신이고 그 탑승자가 인간인 것처럼.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이고, 그러므로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다.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오락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의 적용도 같은 이치. 그러니까 이승에서 중간과 기준과 선의 개념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얼핏 보면 아름다운데 달리 보면 요지경이 따로 없다. 우주야 엔트로피라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더라도 이승의 너머 곧 다음 생에서도 무질서가 통용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우리 할머니처럼 뒤늦게 후회한다면 늦다. 저승의 신 플루톤의 주변에 있는 쟁쟁한 분들을 모르니까 그러는 수 밖에! (현생 다음을 어떻게 부르든) 다음 생은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그럴 수 밖에!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천진한 동화 같은 발상이다. 따라서 까마득한 옛날 완성된 종교적 교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효과에 대한 명철한 해결책을 현재의 인지심리학만큼 제시했는가에 대해서 썩 긍정하기는 어렵다. 옛날 옛날에 은하계 바깥으로 지구의 문명을 전하는 지금과 같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개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이 발생했을 때 기도하고 용서하고 참회하고 믿어라 그러면 천국행이다 드디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보다는 그 시점 이후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상쇄하는 행동을 권장하는 게 낫다. 2000년의 시행착오가 그것을 증명하니까. 우리는 인간인 이상 선에 크게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내 인생을 살면 된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도 하고, 사랑이 있으면 이별도 있고, 사회적인 삶을 살며, 꿈을 먹고 자라는 청춘으로 이상의 날개를 펼치고, 연정의 밭에 씨를 뿌리고 사랑의 썰을 푸는 인생론을 노래하며, 행운의 법칙을 측정해도 좋고 새로운 행복론을 창안하며 색다른 쾌락 이론을 발견해도 괜찮을 것이다. 다 좋단 말이다. 다만 때로는 달콤한 하이드의 간청에 넘어갈지언정, 대개는 천국 일부만 패자부활전이라는 범주만 넘어서지 말자 그처럼 살지는 말자. 독실한 신자 1이든 2든 아니면 무소속이든 무관심이든 상관없다.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최고의 관건은 선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운 좋으면 골 세러모니 보통은 중간, 슬픈 비운 때문이든 무정 때문이든 또 다른 골 세러모니. 전자를 추구하는 삶을 살자.
8
아직도 전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조만이 독자와 서술자를 괴롭힐 뿐이다. 게다가 특별히 암시랄 것도 없다. 그러다 뜬금없이 SF로 장르 변신을 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활동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그러던 언제부턴가 덕은 새초롬한 음식이 유난히 댕겼다. 그래서 덕은 밑도 끝도 없이 케첩을 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케첩을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다고 하루에 한 끼를 오직 케첩 하나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치 케첩에 중독된 듯 케첩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덕은 초지일관 캐첩만 애호했지 겨자 소스 막 이런 걸로 좋아하는 종목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습관에 대해 분석해 보자면 대충 그럴 것이다 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바로 덕은 어느 날부터 스컬리가 말하면 로잔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스컬리를 얼핏 보다가 로잔나의 환영이 보였기 때문에 유난스레 케첩을 탐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와 엇비슷한 일은 없었다. 캐롤이 시도 때도 없이 갈색 설탕을 숟가락으로 마구 퍼서 먹는다거나 리플리는 콜라에, 에반스는 하다 하다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더라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 이게 다냐? 다는 아니다! 술래도 없고, 사건도 없고, 재미도 없고, 발단으로 시작해서 발단으로 끝나는 소설? 그럴 바엔 차라리 만화책을 읽고 말지 그래서는 안된다. 커튼콜이 생략되든 입장료를 환불하든. 왜냐하면 그런 이유 때문이랄까 뭐랄까, 만약 맛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면 진짜가 아니면 10배 100배로 갚아드린다는 자신감 마케팅? 상황이 상황인지라 없던 추억을 불러내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실화에 대한 포장은 해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고 게릴라 마케팅이라도 해야 할 차례다, 지금은! 허나 일부러 사실주의라고 통사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가 막힌 즐거움과 놀랄 만한 반전과 괘씸할 만한 흥미를 보장한다고 처음에 공언했다가 나중에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하며 바쁜 것 보다는 그게 나을 수도 있다. 하여간 조심스레 말하자면 드디여, 마침내 전개가 태동되었다.
얍, 전개 탄생! 두둥~, 짜잔~!
질겁할 만한 전개는 바로 동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겹고 지루하고 권태로우면 환호에 갈증나고 축제와 색다른 만남을 원하게 되지만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든 어쩌든 뜨거웠던 사랑은 따듯한 사랑으로 서서히 식는 법. 어느 단계에 접어들면 연인끼리 재미난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야만 하듯이 발단이 그 얼마나 따분했으면 전개가 제발로 나타난 것이다.
전개는 바로,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그대 두손에 가득 드려요, 같은 사랑이 각자에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 마을에 새로운 인물이 출연한 것이다. 남과 여, 곧 마법사 연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당연히 남자가 마술사고 여자가 조수였지만, 여자가 출중한 외모로 시선을 끌고 그 빈틈으로 헛점을 파고들어 마술사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저급한 마술을 선보일 테지 아마도 특별한 건 없을 것이다.
일단 그들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마술사는 안소니였고, 마술사의 숙녀는 마고였다. 물론 그들은 마을로 이사를 왔고, 토끼를 한 마리 키웠으며, 당연히 스컬리의 오랜 우정이었다.
다른 친구들이야 이미 안소니와 마고를 알겠지만 덕과 캐롤은 처음이니까 인사를 나눴고, 친해졌고, 찬찬히 그들을 지켜봤다. 지켜본 결과 뭔가 냄새가 났다. 우선 그들의 화법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
「세상 참 좁네요.」 그 다음에 할 얘기를 잊어먹는다.
「우리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없다. 속 보이는 대사다. 유행도 아니고 복고도 아니다. 낯선 남녀가 정말로 외로울 때가 아니라면 권장해서는 안될 화술이다. 이거 정말 때릴 수도 없고!
「우리, 춤추실래요?」 맥스의 생일 날, 대뜸 이러더니 정작 춤을 출 줄 모름.
「당신 정말 멋지네요.」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도 않고, 딴 데를 쳐다본다. 와!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아마도 반어법 같다. 주변을 살펴 보면 꼭 그런 화법을 틈틈히 또는 습관처럼 구사하는 친구들이 있다. 충족되지 않는 욕구 때문일까? 여기서 만족할 수 없는 비통한 현실 때문에? 그야말로 왕성하고도 왕성했던 욕망에 비해 그것을 달래 줄 여력은 시나브로 지나칠 만큼 초라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능하면 긍정 내가 불가능하면 부정? 내가 주인공이면 호평 내가 찬밥이면 독설, 내가 하면 합리 남이 하면 간사함 쪼잔함 찌질함. 그러든가 말든가 언제 어디서나 초지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선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독심술을 구사할 상대방의 권리를 너무 일찍 빼앗는 것,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상대가 독심술을 알든 모르든 눈치가 빠르든 늦든, 난 상관없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허세와 허영과 허풍처럼 가식과 위선과 허위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일정 범주라는 게 있지 않을까? 머머하고 싶지 않다, 머머하면 재미없다, 머머는 좋지 않다, 머머가 되고 싶지 않다, 날마다 머머하면 재미없다, 머머할 필요없다, 죄다 쓰잘데기 없는 일이다 등등등. 그건 모두 다 반대로 들으면 된다. 반대로!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유명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어쨌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황금, 캬! 날마다 놀면 재미없어? 인생 목표가 평생 놀고 먹는 거다. 매력적인 아가씨라, 산전수전 다 겪었겠네 내 화술이 뭐 저렴하다니 나도 관심 없어? 예술은 길고 욕망도 길다. 날마다 주색을 탐하면 재미없다라? 날마다 주색을 탐하고 싶다는 거다. 공을 차고 때리고 달리고 게임하고 장비를 수집하고 작업하고, 매일 그러면 재미없다? 매일 그러고 싶다는 거다. 날아가는 철새도 타오르는 태양도 모두 다 사랑하리? 완벽한 탐미주의자다. 세상 사람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건 사색가이자 환상가요 시인이다! 싱그런 복숭아와 달콤한 망고고 뭐고 다 지겹다? 저 신선한 과실을 다 따먹고 싶다 저 화사한 꽃밭에서 마냥 뒹굴고만 싶어라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다. 손날로 목을 그냥 콱...!
그런데 와! 설마 했는데 안소니와 마고는 진짜 마술사였던 것이다. 와, 아찔함에 살짝 어지러우니 잠시 쉬었다 가자.
9
그날은 에반스의 생일이었다. 모두들 에반스의 집으로 모였다. 블로거로 집에서 일하는 에반스의 집에는 흡혈귀 가면과 물 대신 술을 채운 수영장과 정원에서는 닭이 뛰놀고 있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그런데 닭이 나는 재주가 있다는 걸 몇몇은 처음 알았다. 멀리는 아니지만 까마귀처럼 짓고 매처럼 노려보며 호금조나 카나리아처럼 주인의 어깨 위에 앉기까지 하더라. 그리고 음악은 에반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왔다. 바로 추억의 유행가. 생일잔치니까 당연히 춤과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다 즐겼다. 그럼 이젠 장기 자랑이랄지 누군가 나서서 실감나는 감동을 안겨줘야 할 시간이다. 케익도 먹었다. 닭에게 모이도 주고 사진도 찍었다. 할 건 다 했다. 그래서 조용해졌다. 그러나 갈 데까지 간 건 아니다. 그렇게 적막이 흘렀다. 바로 그때,
무슨 보도 듣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소니와 마고가 등장했다. 옷차림은 누가 봐도 아 마법사와 조수구나 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복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캐롤과 덕은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마술이 재미없으면 딴 일을 하던가 적당히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짜잔한 무대요 뻔한 속셈일 꺼라고 예측했다.
「여러분. 마술에 대해서 잘 아시죠? 화면에서 또는 무대 위에서 마술사가 기다란 모자를 들고 어떻게 딱 하면 모자에서 앵무새나 꾀꼬리가 나오고, 시시한 카드 마술에 도구를 이용해서 몸이 2개 3개로 분리되고. 그래요. 물론 미리 정해진 참가자를 무대로 불러서 다 어떻게 박수를 이끌어내죠. 무난하게 말이죠. 네. 그러나 그건 몽땅 가짜라는 것.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정말 그건 가짜니까요. 그렇지만 실제 극장에서, 최고의 마술사가 펼치는 대향연을 바로 로얄석에서 지켜보신 신사 숙녀 또한 거의 없다는 사실, 그건 뭔가 석연치 않아요. 그건 썩 개운하지 않다구요. 깔끔하게 가짜다, 어? 다 열어놓고, 어? 당당하게, 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이거다, 이건 진짜고 이건 가짜다, 내 최고의 장기는 이거라고 왜 말을 못하냐고요! 대체 왜!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네. 괜히 그러는 게 아니겠죠. 무대는 어디까지나 쇼고, 마술사도 광대이자 관객도 실은 마술사의 조수가 선보이는 그 신비한 미소와 상냥한 표정과 다소곳한 움직임을 보고 싶어하죠. 마술사가 실수하면 공연 실패고, 실수하지 않아도 식상한 행사 밖에 더 되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그분들 재롱에 들러리를 서야 하는 겁니까? 신부 들러리 많이 선다면 누가 상이라도 준답디까? 마술사면 다에요? 저라면, 저라면 차라리 재미없을지라도 속고나 보자 라면서 삼류 극장식 카바레에 가서 스탠드업 코메디를 보거나 한물 간 거물의 열창을 듣겠어요. 같은 시간이라도 우리들은 남자들끼리 으쌰으쌰 삼류 스탠드바에 가겠다구요. 여러분, 마술의 시대는 지났어요. 좋은 시절은 가버렸다구요. 왜, 왜일까요? 왜냐하면 마술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력자들은 모두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명맥은 죄다 거의 끊겨버렸어요. 마술사는 대부분 은둔형 신비주의자로 돌변해버린 것이죠. 여러분,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술사인 거 모르시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리투스 피타고라스의 3번째 수제자였어요. 2.5? 아니 3번째. 그런데 재능은 출중한 반면 노력은 하지 않았죠. 차라리 재능이 형편 없고 끈기라도 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그는 스승에게 뺨 맞고 문하에서 쫓겨났어요. 얼씬도 하지 말라면서요. 바로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때부터 철학을 공부하게 된답니다. 아시겠어요? 방금 전에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전설적인 마술사 헤라클리투스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지금 시대에 과연 현존할까요? 아니죠. 없죠. 안보여요. 명맥이 끊겼으니까요. 그러면, 그러면 말이죠, 혹시 1812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건 아시나요? 전 몰라요. 전 모른다구요. 아 농담이구요, 전 그때 한참 스피노자를 원서로 읽고 있었고, 마키아벨리 추종자들을 설전으로 아주 오줌 지리게 혼쭐을 내줬고, 전 그때 당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내연녀였던... 음...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전 당시 그녀의 꽁무늬를 한참 네 맹렬히 쫓아다녔으며, 에 또 가만 있자, 아 맞다, 미셸 푸코가 한참 나중 발표했던 학설은 물론이요 이미 그때 저는 반오이디푸스 사상에 대한 연구도 끝마쳤어요. 깔끔하게요. 이게 다 제 자랑 같죠? 네, 맞아요. 사실인데 뭐 숨길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당시 초현실주의를 예견하고 5차 산업 혁명을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밖에 없었으니까요. 누구요? 동시대인지 어렴풋하지만 네, 모차르트? 은근 허당이었죠. 아이쿠, 에고머니나 호호 베토벤? 와, 허세 정말 캬 장난 아니었죠. 아 말도 못해요 말도 말어. (설레설레) 아니야. 아니야. (설레설레)
자 그러면 마술계로 넘어와서 로버트 후딘의 라이벌이었던 스코트랜드의 존 헨리 앤더슨! 그 양반께서는 쇼맨쉽 덕에 그나마 사기꾼 신세는 면했죠. 당시 탈출 마술한다고 정통 마술에 대한 정체성을 흐트려놨지만 데이비드 커퍼필드나 랜스 버튼과 20세기 마술사중 가장 뛰어나네 어쩌네 라던 다이 버넌? 열심히는 하는데 너무 보이더군요. 그게 다가 아니죠. 발 발렌티노는 저를 만나면 차마 고개를 못듭디다. 어디 그뿐인가요? 유리 겔러는 제가 딱 1분 만에 제압했어요. 자존심 살려줄려고 했는데 자꾸 깐죽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더라구요. 하지만 여기서 멈출께요. 숨겨진 비화를 알게 되시면 아아 그만, 그만. 예언계까지 넘어가지는 않겠어요.
여러분 말이죠, 마술은 대학교에 전공으로 자리잡는 데도 실패했고, 마술업도 이제는 간당간당해요. 그게 다 그 친구들 비리비리한 실력 때문이에요. (캐롤과 덕을 가리키며) 우리 신사 숙녀분 께서도 벌써 속마음을 들키셨잖아요. 이미 방심하셨고, 이 양반이 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 라고 저의 그 건방진 입방정에 꽤 불편해 하시고 계시는데, 이게 다 작전입니다. 저는 간질간질 자잘한 에게 응애응애 그런 거 다 필요없고, 확실한 것 한두 가지만 보여드립니다. 제 방식이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서론이 길어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자신 있으니까요. 그럼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이게 다 뭐였냐? 멍석을 깐 거에요! 먹밥을 뿌린 거라구요. 저는 실력으로 승부하니까요. 뭐 예술가의 자존심 자존심 하는데 그거 다 허세에요! 우리쪽에서도 조수에게 눈독들이게 하는 거? 원하옵건대, 간청컨대 우리 그러지 맙시다! 흑심을 탓하자는 게 아니라 오락산업이 싫다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든 무대든 진짜를 내놓자는 저의 절실한 네? 간절한 애원이라구요. (이런 때 시의적절하게도 탁월한 바디랭귀지라는 손바닥을 펴서 마주보며 손가락부분을 맞대는 장면을 안소니는 연출한다) 휴~, (...오른쪽으로 몇 걸음 왼쪽으로 몇 걸음. 골똘히 뭔가를 생각함...) 뭐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와 UFO다, 괴물이 나타났다, 믿을 수 없는 신기함의 극치다? 후~!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구요. 코흘리개 똥싸배기 뭐 기저귀차고 박수치고 들러리나 서다가 인생 종 치라구요? 인간의 삶이 진정 그처럼 시시하다구요? 인류 문명이 그렇게 네? 어디 그처럼 장난스럽게 금자탑을 쌓아올린 겁니까? 네? 그게 뭡니까! 네? 우리, 그러지, 맙시다. 더 이상은! 그게, 그게, 아 아니야 아니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른들이 애들 보는데 그게 다 뭔... 아 아니야 아니야. (그는 멋진 척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한숨을 앞이나 옆이 아니라 이마를 향해서. 물고기의 구강 구조를 흉내내면서)
...... ...... ......
자, 갑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만 귀가 따가우셔서 피곤하신 게 아니라 네. 저도 입 아픕니다. 많이 아픕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네. 실은 제가 말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제가 말을 많이 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저는 피곤해요. 완전 피곤해서 막 괴로워요. 저는요. 싫고 짜증나요. 막 때리고 싶어진답니다. 그러나 자학은, 참아요. 리듬을 타야하니까요. 그렇다구요. 그러나 단, (쿵) 지금까지는 모두 2부를 위한 1부였습니다. 기대하시라. 자, 드디여 2부가 여러분 앞에 선을 보일 차례입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또 이상한 음악이 흐른다)
(마술사 안소니는 먼저 그날 옆 동네에서 놀러온 리플리의 친구를 앞으로 불러낸다)
여러분, 앞에 한분의 미녀가 계십니다. 저는 마고가 옆에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왜냐? 이분의 손에서 블랙홀 같은 기운으로 저의 손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죠. 으윽.. 아아... 철컥! 그래도 뭐 악수죠 이게 뭔 대숩니까? 어디식 인사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한바퀴 돌리고 제가 한바퀴 돌고 춤을 추는 것 가능한 것 보셨죠? 그리고 악수를 했죠? 그 다음에 뭐 키스라도 할까요? 손금은 봤지만 해몽은 참겠습니다. 허허 농담이고 이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더 이상 여쭤보지 않겠다구요. 다만 지금 잠시만 이분께서 주인공이시니까 조금만 집중해주시라는 것 뿐이에요. 정말 이쁘잖아요? 네. 그럼요. 제가 만약 마고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제가 어떻게 이성을 잃을지 차마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튼 이제 악수도 했고, 손장난도 쳤고, 할 건 다 했습니다. 갈 데까지 갔어요. 네, 사랑 빼고는 할 건 다 했어요. 갈 데까지 가지만 않았다 뿐이죠. 그렇죠?
두근두근두근두근, 밤바라밤 밤밤바 밤바라밤 밤바밤, 빠라밤 빠라밤 빰빠빠밤...... 짠! 자, 보세요. 이분의 손이 마네킹처럼 굳었어요. 어떡하죠? 제가 말했잖아요. 어중간한 점쟁이처럼 YES만 요구하는 끈 당기기를 하지 않겠다고. 내내 NO만 주문하다가 제일 쉬운 YES로 놀래켜주기?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잘 아시잖아요. 그럼요. (팔꿈치 밑으로 손이 의수처럼 굳어버린 리플리의 친구분은 울상과 놀라움으로 범벅되어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되었다)
아, 이 다음에 제가 이분의 의수를 정상으로 돌려들릴 순 없어요. 왜냐하면 이건, 여기서부터는 마술이 아니라 진짜니까요. 그래도 걱정하진 마세요. 7시간이나 7일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저도 알아요. 이딴 술수로 마술했냐고 폼잡냐는 거. 들리지 않는 비아냥. 그럼요. 지금까지는 몸풀기였죠. 그럼요. 호호호호호! 허허허허허! 흐흐흐!
분위기를 이어갑시다. 다른 분들은 저와 친분이 있으니까 곤란하고, (딱) 네, 눈을 피하시지 마시고, 제 눈을 피하시지 마세요. (캐롤과 덕을 앞으로 불러낸다) 긴장하지 마세요 마세요. 전혀 다른 마술이니까요. 한숨을 두 숨으로 나누어 쉬시고, 푸른 초원과 시원한 해변을 상상하세요 상상하세요. 환상을 영접하고 신비와 사랑에 빠집시다 빠집시다. 인생 뭐 있나요? (윙크)!
자 눈을 감으시고 감으시고, 그대로 손에 계란을 쥔 듯이 손을 오므리세요 오므리세요. 그대로 팔을 들어올려 눈에 대세요 대세요. 살짝 오므린 손이 망원경인 것처럼 것처럼. 네 잘하셨어요 잘하셨어요. 그럼 이제, 우린 숫자 그런 거 세지 맙시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런 거 건너뜁시다 건너뜁시다. (쾅─딱─슉) 자, 눈을 뜨세요 뜨세요. OK!
이제 우리 앞에 서있는 이 분께서는 천리안이 되셨습니다. 마침내 이 분들은 천리안이 되셨습니다. 자, 우리 모두 확인해볼까요?
스컬리 집에 있는 귀여운 강아지가 보이나요?」
「네. 진짜 보여요! 어, 이거 어떻게...」
「와. 진짜에요! 오오... 아아... 와...」
「그러면 말이죠, 리플리 집에 있는 새는 자고 있나요, 심심해 하고 있나요?」
「자고 있어요.」
「네. 꿈을 꾸나봐요.」
「캐롤이 띄워놓고간 물고기의 특식은 어떻게 됐죠?」
「다 먹었군요. 네 수면이 깨끗한 거 보니까 녀석들이 다 먹었나 봐요.」
「옆 마을은 보이나요?」
「네. 사람들이 누구지... 뭐 하는 거지? ... 아, 우리 험담을 하고 있군요.」
「그럼 바다 건너 미남들이 사는 나라는요?」
「거기는 제가 말할께요. 아직 살짝 보일락 말락 하네요.」
「그럼 우리 신사 숙녀께서 너무 빠지시면 안되니까, 다른 마술과 겹쳐봐야겠네요. 직렬이 있으면 병렬도 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맥스가 키우던 고양이는 한 마리에요. 그런데, 보이나요? 맥스 집에 지금 고양이가 몇 마리가 있죠?」
「두 마리요.」
「어머나! 맥스가 고양이로 변신했을까요? 그럼 어쩌지? 에반스네 집은요? 뭐가 보여요?」
「에반스네 집은... 에반스는 보이지 않고 닭이 두 마리 보이네요.」
「에반스가 설마 닭으로? 좀 전까지만 해도 에반스와 맥스는 우리와 함께 있었죠 네. 그렇죠? 그럼요. 나중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에반스와 맥스는 어디 가지 않았을 꺼에요. 우린 모두 그 친구들를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두 분 모두는 모르겠는데 아마 한 분게서는 어제 이런 꿈 꾸시지 않았나요? 자기가 거인이 되서 도시 조감도 모형을 앞에 놓고 장난감 조립하듯이 모자 달린 다리를 지으셨죠? 다리의 모자로 쓰일 만한 건 잭과 강남콩에 나오는 커다란 나뭇잎을 이용했구요. 그런데 그게 진짜 도시였구요.」
「와! 저에요. 제가 그와 똑같은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와, 말도 안되. 오 이런!」
「어떻게 알긴요. 찍었죠! 그런데 꿈이 잘 기억나지 않다가 지금 제가 말하니까 왠지 그런 꿈을 꾼 것도 같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아무튼 이제 그만 쌍안경을 벗으셔도 좋습니다. 어허, 저기 선생님! 아 나 이런 증말, 여자분. 숙녀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혹시 설마 지금 남탕을 꿰뚫어보시고 있는 건 아니시죠? 어디 가나 꼭 이런 분 계시다니까요. 저번에도 한번 이런 일이 발생했어요. 참 난감합디다 그려. 호호호. 이런 분께서 진짜로 사춘기 시절에 목욕탕을 훔쳐보다가 엉덩이를 걷어차였을지도 모르죠.」
그런 다음 어떻게 어떻게 에반스의 생일잔치는 끝났다.
아, 그 뒤로 마술쇼의 대미가 있었다. 까딱하다가 잉꼬 없는 찜빵이 될 뻔 했는데 마술사 안소니가 무리를 했을 수도 있다. 힘드니까 상급 난위도 마술을 건너 뛸려다가 유종의 미는 커녕 험한 꼴 당할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최종 마술은 말이 많지 않았다. 속임수도 아니었다. 놀라웠고, 완벽했고, 신기했다. 그것은 곧 마술사 안소니가 스컬리한테 중력파를 쏘았고, 손가락 검지로 파파팍, 스컬리가 쿵 하면서 사라졌다. 다들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꽝 소리와 불꽃과 연기는 물론 불꽃놀이 냄새까지 진짜였다. 그 모두가 완전 진짜. 와 이건 말도 안되, 완전 이건 궁극적 신비감이자 극도의 환상이었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일은 그거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고 사람의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불꽃이 내뿜는 일.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안소니의 손가락에서 지지직 번개 같은 중력파가 나갔다. 지가 무슨 해리 포터야? 그걸로만 봐서는 그랬다. 진짜 그랬으니까. 이건 정말 꿈으로 치자면 심신이 쇠약할 때 꾸는 기분 나쁜 꿈도 아니었고, 욕망에 관한 꿈이라는 잡몽도 아니며, 신화적이고 영적인 영몽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환상이었고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신묘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기똥찬 마술에 모두, 아니 주로 덕과 캐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모두들 파티를 서둘러 끝냈다.
10
다음 날이 됐다. 큰 변화는 없었다. 스컬리에게 물어보니 술에 만취해서 어제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즈음에 모두들 캐롤의 카페에 모였고, 그때 물어 물어 확인한 결과 에반스와 맥스를 어제 이후로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에반스네 집에는 닭이 한 마리 늘어서 총 2마리라고 한다. 게다가 맥스네 집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늘어서 총 2마리라고 했다. 에반스와 맥스가 각각 닭과 고양이로 변신했을 리는 없고, 뭐라 논평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1일 지남.
우연일 테지만 개인 일정이 있겠지만 스컬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스컬리 집에 한 마리였던 개 옆에 똑같이 생긴 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총 2마리. 스컬리는 개가 아니고, 개도 스컬리가 아니겠지만 스컬리가 개로 변신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더군다나 잘 보니 녀석은 스컬리와 닮아보이기까지 했다.
2일 지남.
천문학자 리플리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리플리가 키우던 새의 개수는 홀수에서 짝수로 바꼈다. 긴가민가했으나 남은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캐롤은 운동 중독에 빠졌고, 덕은 집으로 뛰어가서 퐁~ 소리가 나는 라이터를 찾아봤는데 없었다. 오, 저런!
마을에서 오다 가다 마술사 안소니를 만났을 때 덕은 물어봤다.
「안소니! 너 우리도 변하게 할 꺼니?」
안소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다는 듯이. 다만 말없이 윙크만 했다. 많이 해 본 솜씨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음 동작이 뭔가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안소니는 그러더니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더니 손가락 끝을 자기 눈을 향했다가 다시 덕쪽을 가리켰다. 덕은 식겁했다.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덕과 캐롤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작전을 짤려고 자세를 잡다가 포기했다. 그들은 짱구를 굴렸으나 딱히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다만 에반스-맥스-스컬리-리플리 집에 있는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 있는 동물들을 챙겨주느라 힘이 들었을 뿐. 밥 주고 응가를 치워주고 놀아주고! 그들은 생각했다. 안소니는 왜 나타났을까? 대체 왜 안소니는 마술을 남발했을까? 그 마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진짜라면, 진짜면 안되는데...! 그런데, 안소니와 스컬리는 설마 라이벌? 그럴 리는 없다. 그 둘은 친구다. 아니다. 오히려 마고가 더 의심스럽다. 지금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일단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아, 그 외에 덕은 겉도는 대화를 원했는데 캐롤은 심각하게 어느 화제를 물고 늘어졌다.
「캐롤. 엇그제 세기의 대결 있었잖아. 권투와 격투기의 대결. 재미있게 봤니?」 덕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캐롤은 표정이 살아났다.
「응. 아주 재밌었어. 그래서 손과 발에 땀이 많이 났어. 그렇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단,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평은 다소 덤덤. 기쁨과 분석에 대한 시각이 약간씩 다르더군.
시작부터 일단 코너는 손해볼 게 없었지. 지면 당연한 거고, 이기기는 어렵지만 선전만 해도 성공. 반면 플로이드는 애초에 절대 승산 없는 게임이 아니었고, 질 리는 없고 이겨도 본전! 시간 끌다 후반에 승부 보는 건 당연했어. 그러니까 주인공은 선수가 아니라 도박사일 테고.
일단 성사된 게임 자체가 코메디이자 행사 성격이지만 같은 타격 양식치고 그 둘은 달라도 너무 달라. 권투와 격투기? 많이 다르지. 레슬링과 유도 만큼. 세팍타크로와 풋살만큼. 스키와 스노보드만큼. 테니스와 베드민턴 배드민턴과 탁구만큼. 유도 선수 옷 벗겨서 레슬링 선수와 붙여봐, 재밌겠다! 바다낚시나 민물낚시나? 운칠기삼과는 달리 요행과 행운은 통하지 않는 분야가 그거야. 수십 년 동안의 땀 100퍼센트라고. 권투는 말이야 춤처럼 스텝이 기본이지만, UFC의 기본은 레슬링, 단게임 정면 승부가 특징이야.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쉬는 날 없이 농구는 매일 슛 2천개, 권투는 줄넘기만 매일 2시간, 그렇게 세월을. 아무리 천재라도 그 기본없이 대등함은 불가능해. 올림픽에 종목이 있냐 없냐, 종목의 역사가 기냐 짧냐, 아마추어 기반이 탄탄하냐 아니냐, 그 둘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고. 권투가 훨씬, 훨씬 기술이 촘촘하고 기술과 기량의 폭이 넓고 세밀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를 폄하하는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건 대개 낭설이고 농담이자 다름의 다른 표현일 뿐. 더구나 그 뭔지 모를 빈자리를 자본과 인기가 매꿔주지 않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발레리나가 살사레나? 살사리노? 아무튼 그분을 질책한다? 그 둘이 절친이고 장난이란 거 어느 누가 모르겠나. 건들건들 힙합 뮤지션이 프리마돈나의 사생활을 비꼰다? 뒤에 나오는 좋아한다 사랑스럽다 알고 싶다까지 듣지 않으면 비꼬는 게 맞겠지. 그 뿐만이 아니야. 관람평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까지는 아닌데 좀 약해. 코너의 복싱 완벽 적응? 완벽 실패지! 자세가 완벽하게 빵점인데? 포먼이나 소렌스탐등 몇몇 기본을 벗어나는 예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분야라고. 응? 자기 분야! 옛날에는 독학으로 세계 최고가 가능했어. 지금도 가능할 수는 있어. 그러나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하지. 타분야에서라면 두말하면 잔소리고. 체급만 바꿔도 모험인데 타 분야? 글쎄요. 전설적인 농구 선수가 은퇴 후 골프선수로 데뷔한다? 호호호!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그랑프리를 위해서라면 도전은 의미 있지만 결과는 그것도 코메디지. 일반인이 운동 신경 괜찮으면 뭘 해도 다 잘하는데, 직업과 프로와 챔피언은 달라. 물론 은퇴해서 아마추어와 놀게 되면 잔잔한 비아냥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할 테고. 돈도 돈이지만 구경꾼을 위해서 도전 정신을 위해서 당당히 남의 업계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여한 사기를 높게 사야지. 또 챔피언이 바보도 아닌데 후반 승부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여한 것도 역시나. 잘해야 이겨도 본전인데 뭐하러? 무엇보다 오락산업이 큰 몫을 담당했고 말야.
그런데 있잖아 다만 아쉽다면 말이야, 최고 중의 최고에게라면 내 스타일보다는 자세를 택했어야 했지만 음,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이직이 아니라 옆 동네에 잠깐 얼굴만 비췄던 거니까. 스포츠의 처음과 끝은 자세거든. 그래, 기본기! 적응에 대한 준비랄까 전략이 좀 그랬어. 그래도 프로도 아니고 아마추어도 아니고 1회성 데뷔전인데 평생 그 길을 걸었던 2인자, 3인자 만큼 했으니 패자도 낙승감. 프로선수들 가운데도 리그와 국가대표 경기의 차이가 보이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몸을 사리지 않으며 휘청휘청 아슬아슬, 격투기 선수들 특기지 않나. 남자? 응? 남자! 이건 드문 행사지만 상업적으로 권투나 다른 스포츠 선수가 격투기로 넘어가서 암담했던 전례는 드물지 않아. 젊은 제2의 플로이드가 그쪽 업계로 가서 행사를 해도 결과는 똑같겠지. 아니 오히려 훨씬 뭐하지. 그쪽 시장이야말로 월등하게 화려하니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챔피언을 바라보거나 벨트를 맺던 운동선수의 스포츠 인생이 상업 때문에 타분야로 이직해서 뭐랄까, 꽝되는 안타까운 모습이 돈 때문이었던 사례가 있다는,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좀 씁쓸하지. 보는 사람이야 오락이고 휴식이자 장난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재밌기는 했어. 관람 포인트는 첫째 경기가 가까와 오면서 또 경기 당일 최고의 쇼맨쉽, 둘째 경기 직전 선수 소개, 셋째 눈으로 보고 감으로 주먹을 피하는 장면들. 원래 권투 선수가 타 분야로 가서 경기는 완패해도 몸놀림을 보고 감으로 피하는 장면이 압권인데, 경기는 같이 하지만 그것만 보면 어른과 초딩 차이인데, 오오 이번에는 그게 반대로도 가능하던데. 괜찮았어.
하지만 글러브 큰 거 끼고 수비 축구 자세 잡으면 때릴 곳도 때릴 의욕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은 공감이 되네. 한 쪽은 규칙과 기술을 100퍼센트 활용하는 최고의 백전노장, 한쪽은 프로도 아마추어 데뷔도 아닌 딱 1번 재미. 경기 중 등을 보이면, 등을 보이면 거 어째 자세가 좀 응? 이상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진 않을 꺼 아냐. 거 왜 좀 웃기잖아? 산업적으로 보자면 권투가 하락세를 겪은 것 가운데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다른 말로 하자면 수비 축구 때문이야. 라디오가 TV와 인터넷과 핸드폰에게 자리를 양보한 건 음 것도 운명이지. 권투는 축구와 반대로 기반이 약해졌던 데다 몇몇 요인이 있었어. 경기 전 경기 중 경기 후, 조르주에게 코치진이 요구하는 건 딱 하나야. 오직 과학과 이성. 오로지 그거 하나 밖에 요구하지 않아. 그래서 이기긴 이겨. 하지만 재미없어. 완전 재미없다고. 그러니까 비슷한 상대나 상대적인 강자를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플로이드가 조르주랑 완전 똑같아. 제일 재밌게 뛰는 선수와 조금 심심한 성향의 선수, 정반대의 경기 스타일을 붙여놨으니 뭐 그렇지. 하루종일 과학과 이성을 연구했는데 밤에도, 쉬는 시간에도 과학과 이성에 지배당하는 놀이를 보라고? 프로의 세계야 냉정하지만 프로가 아닌 우리야 그 빈틈을 보는 재미로 멍청하게 화면을 쳐다보는 거잖아. 안 그러니? 내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애호가라면 모를까, 그런 경기를 끝까지 보기는 힘들어. 채널 돌려야지. 안 그러면 스트레스 풀려다가 오히려 스트레스 더 쌓이라고? 선수와 비선수의 입장 차이가 그렇게나 극명하다네. 하지만 그 스타일 아니면 그런 성적은 거의 어려운데 어쩌겠나. 다른 분야도 아니고 말야. 스포츠라는 게 원래 그래. 체급이 세세한 종목이 있는 반면에 없는 종목도 있는데, 먼 미래에는 또 모르겠어. 같은 체급이라도 체격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니까.
아바타가 있었다면 상대방을 완전 똑같이 따라한 채로 거의 쨉만으로 승부는 판정까지 갈 텐데, 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혹시 마이크 타이슨 스타일? 정상에서 고고히 내려오고, 서서히 멀어지며, 유유히 인기와 관심과 조명을 모두 내려놓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꺼야. 그건 곧 <끝까지 무대에서> 라는 일에 대한 신념과 <최고는 나>라는 포기를 모르는 집념이 점점 상충할 수 밖에 없기 때문. 자만심이 끌고 자부심이 밀어서라도 어깨 뽕 위에 악마를 세워서라도 1인자일 것, 그게 안되면 에잇 그냥? 난 아마도 마이크 타이슨 스타일인가 봐. 그러면 내게는 승부사가 아니라 도박꾼 기질이? 어머나! 달리 말하자면 한때 최고였든 길게 최고였든 꾸준한 모습이 멋지다고들 많이 말하지만 최고일 때 한번에 딱 돌아서는 뒷모습, 그게 오히려 더 극적이고 멋지지 않나 이거야. 어쩔 수 없는 사고 때문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제발로 내려오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만 생각해 봐도 돼. 괜히 십대의 문학적 감성으로 스타의 요절을 멋지게 보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인생 기니까 예술도 기니까 꾸준한 모습이 더 멋진 것으로 하는 게 좋겠군 그래. 오오 기도하는 소녀여, 벌써 얘기가 그렇게 됐나? 하여간 아무리 그래도 전설은 타이슨이고, 카리스마도 타이슨. 무패 다체급 석권도 훌륭하지만 플로이드는 은퇴한 챔피언, 타이슨은 전설! 아 스치기만 해도 캬, 스치기만 해도 으아, 아 치아와 치아 사이에 살짝 끼기만 해도 얼마, 그 음식 이름이 뭐드라? 내 치아 사이에도 한번 낑겨 봤으면...! 다시 타이슨으로, 스치기만 해도 캬 으아 오오, 캬 말 말어 와 한 경기 한 경기 정말 오오 그때는 아직 복싱의 전성기였을 꺼야. 진짜 재밌었어. 완전 멋졌어. 복싱이라는 올림픽 종목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이런 관심이라도 있지 것도 없으면 진짜 슬퍼져. 그야 어쨌든 결론은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오락산업의 쾌거라는 점. 목적이 쇼인 만큼 행사는 대성공.
검투사끼리든 사람이 야수와 맞붙든 콜로세움에서 있던 일은 당시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었잖나. 나머지는 전해 듣거나 소식을 읽는 것만 가능했을 테고. 악보가 없으니 명곡을 귀로 따서 연습하다가 기타리스트가 됐드라? 요즘엔 그러지 않아도 돼. 독학도 쉬워졌고 천재도 많은 세상이니까. 9년부터 79년까지 살았던, 콜로세움과 신전의 건설에 착수했던 고대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누리던 축복뿐만 아니라 마법의 양탄자니 알라딘의 마술램프든 뭐든 모두 현실이고 (대체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그런데 재밌는 건 말이야 또 현대인이 그 풍요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도록 가만 놔두질 않는다네, 우리의 오락산업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살짝 비켜서 상위 몇 퍼센트가 얼마의 부를 차지한다는 헤드라인을 거리에서 지나가다가 슬쩍 보거나 매일 지구 어디선가 발생하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대표적으로 국제 구호 단체, 응? 북극곰을 살립시다, 응? 기쁜 소식 슬픈 소식, 길흉화복 흥망성쇄. 음 그렇지. 가까이만 봐도 일이 많아. 주피터의 서자인가 헤라클레스가 천상에 올라가기 전 지상에서 모두 해결했다는 열두 난제? 지금은 그 모두가 창과 방패야. 보완하면 또 헛점을 파고 들고 어쩌고. 응? 뜨고 지고 왔다 갔다 커졌다 작아졌다 밀었다 당겼다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응? 그렇다니까. 뭐야, 그런데 왜 갑자기 콜로세움이니 마술램프니 독학에다 밀고 당기기가 나왔지? 그게 다 오빠 때문이야, 어? 알아? 너 때문이라고! 삼천포로 빠질 것 같으면 오빠가 말렸어야지, 응? 거 무슨 뭐, 난 아무 말도 안했어요? 아무 말 안했으니까 꾸지람 받는 거라고! 오빠 눈치 없기는 여전하시군. 흥! 오빠가 쫌~만, 뭔가가 쫌만 부족했으면 나한테 더 혼났을 텐데, 호호호 넘어가자구요. 좌우지간,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기량이 최고라는 공통점에 반해 경기 양식은 정반대니까 1회성이 아니라 왔다 갔다 그렇게 짝을 맞춰 2부 예고가 있어야 공평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은 너무하다는 점. 그건 안 돼. 상인과 예술가는 물론 닭과 거위까지 두루 관심 끌고 만족시켰으니까 아마도 스포츠보다는 오락이었고.
오빠. 오빠 얼굴을 보니 썩 좋아보이지 않은데, 그게 혹시 지금 이 연설 때문이야? 미안 미안. 나도 바텐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들을 보면, 어떤 관찰을 지속하면 뭔가가 보여. 그래서 그래. TV를 내다버린 어느 사람의 얘기가 그러더군. 부자들은 볼 것만 보고 빠진다고. 자기는 그게 안되니까 그래서 TV를 버렸다고. 여기도 그래. 여기서 독주를 마시는 분은, 나야 고맙지만 오히려 주머니가 얇은 양반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뭔가 착찹한 심정이 없잖아 있다네 오빠. 그렇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오빠. 응, 오빠.
관전평 한마디가 왜 길어졌나면 마술사 안소니 때문이야. 아무래도 안소니는 그저 그런 흔한 마술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안소니 전공이 뭐니? 마술이라고. 마술이 그래. 정신분석학과 사회심리학이 학계와 업계와 일상 생활에서 그 지위를 탄탄히 하고 분야를 공고히 하는 동안 마술은 어떻게 됐냐고. 마술은 그동안 뭐했어? 어? 잠잤어? 낮잠이야 밤잠이야? 아니면 뭐 바람이라도 폈어? 유행하는 그런 거, 협업? 그건 그렇고, 그런데 안소니의 그 믿을 수 없는 신공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고. 우린 말이야. 안소니를 결코 쉽게 봐서는 안될 것 같아. 절대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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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친구들은 돌아올까 돌아오지 않을까? 안소니의 마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점점 더 이런 일이 늘어날까, 늘어나지 않을까? 혹시 안소니와 마고가 그들에게 소풍을 가자고 제안하고 그곳에 가면 그 친구들은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 설마 이대로 전개가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앞으로 새로운 일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캐롤과 덕은 선수를 쳐야 할까 아닐까? 그런데 선수를 쳐야 한다면 어떻게? 그러게 말이다. 게다가 안소니의 마술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슨 사이비 신도들을 거느리다가 1대 교주 스컬리가 2대 교주 안소니에게 권좌를 물려준 것일까? 아니면 뒤통수를 맞은 걸까? 뭐 하나 뚜렷하지도 않고 선명한 기운은 모조리 종적을 감춰버렸다.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에서 안소니가 모두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서늘한 느낌 때문에!
이거 무슨 동물원에 취직한 거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닭, 고양이, 새, 개를 것도 두 마리씩 꼬박꼬박 밥 주고 똥 치우고 놀아주고 지켜봐야 하다니... 아 맞다. 그래도 하나 믿는 구석은 있었다. 바로 캐롤과 덕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을 키우기 때문에 안소니가 그들에게 마술을 써서 자기들을 무슨 생쥐나 너구리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 그러나 그건 추측이자 못미더운 신뢰이며 희망 사항이고, 자기들은 거의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아 참, 덕은 아니지만 캐롤은 물고기를 키웠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키워? 특종도 뭣도 아니다. 아무튼 이제 마을에서 짧은 반경 안에는 안소니─마고 짝과 캐롤─덕 짝만 남았다. 잘 됐네. 2 대 2! 뭘로 붙을까? 테니스 복식? 비치발리볼? 걱정도 팔짜고, 몽상도 정도껏이다.
그렇게 1주일이 조용히 갔고, 새벽에 덕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나가 보니 리플리였다. 이 시간에 리플리가 왜? 리플리가 무사했으니 반갑기야 했으나 남의 집 돼지나 우유나 신문을 훔친 것도 아닌데 너무 뜬금없는 방문이었다. 그래도 덕은 쉬쉬 하는 몸짓의 리플리를 따라 갔고, 마을 외곽까지 걸어가서 어느 시커먼 차량에 올라탔다. 그것은 일명 특수 차량! 안에는 방송, 해킹, 염탐, 작전 수립, 작전 회의, 상황판등 휴식도 가능하고 어떤 염문까지 가능한 바로 탐정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국가 정보 기관 정도가 운영할 것 같은 그런 특수 차량이었다.
그 안에는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는 물론 정보 요원과 조수들이 있었고 사정을 듣고 보니 모두 이해가 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정보 요원이고, 안소니의 초능력을 밝혀내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는 중이란다. 그건 녀석들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 아니라 진짜였다. 와우! 그럼 이제 어떡한담?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덕과 캐롤이 두더쥐가 되는 수 밖에!
일단 특별한 지시는 없었고, 아무것도 모른 체 행동하라는 주문만, 주문? 별다른 지령없이 그들은 덕을 돌려보냈고, 덕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안소니에 대한 정보를 캐내라고 했다. 그렇게 덕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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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덕은 캐롤의 카페에서 안소니를 만났다. 말문은 덕이 먼저 열었지만 인사를 마치기 전에 안소니가 덕의 말을 조속히 가로챘다.
「혹시 애들 만난 건 아니지? 앞으로 말이야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는 게 좋을 꺼야. 간혹 환청이 들린다거나 헛것을 볼 수도 있으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게. 설령 그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쉽게 속아넘어가지 말고. 그쪽에서 먼저 선공을 펼칠 테지만 그건 아마 유인책일 꺼야. 알겠니 덕?」
「어? 무슨... 아 몰라. 뭔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어.」
덕은 뜨끔했다. 얘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그건 진짜 환상이랄지 착각이나 꿈이 아니었을까? 아닌데. 모두 진짜였는데. 완전 생생했으니까. 그런데 안소니가 어떻게 알았냐고! 얘가 정말로 내 머리 위에서 노나? 덕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소니가 실제 가상의 요원들을 보냈을 수도 있고, 덕의 꿈을 조작했거나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덕은 대화의 맥이 끊기기 전에 물어보는 게 좋을 듯 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그거... 예언인가?」
「뭐, 현실이든 꿈이든 가까운 시일 내에 사라진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란 말? 예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믿거나 말거나는 아니겠지.」 안소니가 눈썹을 쑥 들어올리며 덕에게 의뭉스러운 눈길을 건넨다.
「안소니.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소심하게 왜 그래 덕. 한 열두 가지를 물어도 괜찮네 친구. 날 심하게 다뤄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어? 어허, 형씨가 알고 보면 사람이 참 순박해. 그래서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걱정 마. 내가 자넬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난 그런 말 듣기 싫거든. 너 마술 그럴려고 배웠냐 같은 거. 물론 결코 들을 기회가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 어쨌든 내 하나 묻겠네. 그건, 비밀이었나? 아니. 지금 비밀인가 비밀이 아닌가?」
「비밀이냐고? 비밀이었냐고? 뭐 말인가? 은밀한 비밀 아니면 비밀 다음에 비밀이 계속 이어지는 비밀? 재미있는 비밀 재미없는 비밀? 그러니까 대체 뭐? 아, 그거? 비밀이라면 비밀일 테지. 그래. 맞아. 비밀이든 비밀이 아니든 아마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자네를 믿기 때문에 괜찮은 정보를 알려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슥 흘렸던가 확실한 구두점을 찍었던가. 논리적으로 봐도 그렇잖나. 내가 자네를 속일 이유가 없어. 안 그런가?」
덕은 슬슬 안소니에게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술이야 안소니가 월등하고 덕에게는 별다른 재주가 없고 말로도 안되고, 덕은 점점 초조해졌다.
「안소니. 그럼 말이야. 날 믿는다면 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줘. 나도 안소니란 마술사를 알게 된 게 더없이, 뭐랄까, 음, 그게 말이야, 음 그러니까...」
안소니가 덕을 다독였다. 툭툭 어깨의 위를, 톡톡 견갑골의 후면을 두드리면서 천천히 걷자는 듯 슥 움직임을 부드럽게 시작하며 말을 꺼냈다.
「차차 여건을 보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서. 아, 하나만! (잠깐 멈춤) 나도 실은 내 마술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못해. 확실한 것 하나는 말이야, 난 그 어떤 마술사보다 최고라는 점인데 그게 편차가 좀 심해. 나도 제어가 잘 안된다고. 쥐를 풀벌레로 풀벌레를 쥐로도 만들 수는 있어. 그런데 문제는 처음의 의도와 나타난 결과가 다른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는 점. 나도 아직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어. 앞으로도 아마 미해결된 숙제로 남아있을 거고. 알겠나?」
「어, 알겠어. 여부가 있겠나. 내가 어떻게 말귀를 못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덕은 그날 집에서 꿈을 꾸었다. 자기의 코털이 매우 매우 길게 자라났고, 물론 그것은 꿈에서 꾼 선잠을 자다 깨서 발견했고, 그 줄을 잡고서 끝까지 따라갔다. 그 끝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그 머나먼 무지개 너머에는 과연 어떤 보물과 수많은 궁녀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다리지 않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덕은 줄을 잡고 계속 갔다. 계속 갔다. 밧줄은 마을 뒷산으로 이어졌다. 계속 줄을 따라갔다. 줄은 마을 수호신의 의미가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끝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빛을 발하듯 반짝였다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반복하는 상자가 있었다. 그는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았다. 뭐 안 열려? 열리나 안 열리나 보자, 늬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면서 덕은 계속 힘을 썼다. 마치 열려라 참께 같은 주문은 필요없다는 듯이. 이것만 열면 그 안에는 마술에 관한 비서가 들어있고, 그걸 숙달하면 마술계의 1위로 덕이 당당히 등극하게 되고, 안소니는 하는 수 없이 2위로 밀려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드디여 상자가 열렸다. 그런데 상자 안에는 고서나 비서는 없고 잘 접힌 쪽지가 있었다. 덕은 그것을 폈다. 씌여진 문장은 이랬다.
「일어날 시간이다 덕. 덕, 개꿈은 끝났느니라. 덕이여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덕!」
덕은 꿈을 깨고 일어났다. 이런 젠장, 이라고 말할 기운도 없이 허탈했을 뿐.
13
다음 날이 되었다. 절정은 없었으나 약속은 있었다. 마술사의 그녀 마고가 캐롤을 찾아갔다. 혹여 마고는 캐롤을 전담 마크하기 위해서? 아니면 설득이라도? 그러니까 뭘 설득? 덕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아마도 여자들끼리 비밀리에 할 얘기들이 있을 것이다. 어쩜 많을지도.
그리고 마술사 안소니는 덕과 같이 어디에 가기로 했다. 그들은 일단 만났고 덕은 놀랬다. 왜냐하면 안소니가 시골 아저씨로 완벽하게 변신했기 때문이다. 덥수룩한 가짜 수염을 붙였고, 허름한 멜빵 바지에 살까지 찌운 걸로도 모자라 바구니인지 젤리인지를 배에 붙였고 옷으로 가렸다. 감쪽같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교당이었다. 평범한 교회와 성당과 법당 같은 공간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만 달랐다. 그건 바로 교주가 안소니라는 것. 사진도 안소니, 흉상도 안소니, 그림도 안소니, 기도 드리는 기도문도 안소니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안소니는 덕을 대동하여 뒷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그곳 교당의 넘버2로 보이는 인물에게 007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렇게 소일이 끝난 후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지면서 안소니는 007 가방을 열어서 그 내용물을 덕에게 보여줬고, 그 가운데 한 뭉치를 덕에게 줬다. 가방 안에는 돈 뭉치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덕이 받은 뭉치도 돈뭉치. TV에서만 봤던 거! 덕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가 안소니가 자기를 여우나 사슴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떡하라고! 오늘부터 덕의 손은 뭐랄까 검어졌다고 하면 인종차별적 표현이라 오해할 수도 있으니, 덕은 오늘부터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인물인 안소니와 일종의 동반자 관계를 묵인한 셈이 되었다. 덕은 지금까지 스컬리와 콤비가 됐다가 결별했고, 에반스와 단짝이 됐다가 갈라섰으며, 이제는 마술사 안소니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느낌이 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덕은 딱 하루를 고민했고, 다음 날 그 지폐 뭉치를 안소니에게 돌려줬다. 그래도 될 것 같다는, 그래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소니는 웃으며 그것을 받았고, 돈뭉치를 세어보지는 않았으며, 별다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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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특별한 일은 없었다. 곧 전개는 절정을 부르지 않았고, 발단으로 퇴보한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꼭 패배자의 초췌한 표정을 떠올릴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비유하자면 이건 모종의 장기전에 해당하는 줄거리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확 드러나는 고백이나 계약, 떼돈 같은 큼직한 권위나 명목이나 행사성 사건은 없었지만 잔잔한 발단, 곧 10개가 모이면 혹 전개의 값어치에 필적할지도 모르는 부제 같은 일은 있었다.
어느 때던가 덕은 예술적 착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공원과 해변과 옆 마을, 옆 고장등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이 뭐냐면 가는 곳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여러 곳에서 마을 친구들이 기르는 동물들을 한꺼번에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닭 한 마리, 말 한 마리, 재규어 한 마리를 따로 따로 볼 수는 있지만 그 모두를 한꺼번에 본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일상에서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는 이상 거의 목도할 수 없고, 동물원이나 아프리카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혹시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가 주가 지수처럼 덕보다 한발 앞서서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모여 있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마술사 안소니의 최면 혹은 마술? 안소니가 그렇게 한가한 친구도 아닐 뿐더러 그런 미스테리가 발생하게 만들 만큼 덕으로부터 뽑아낼 고유한 비밀이랄지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싹 다 우연? 아마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덕은 결론을 내렸다.
아, 잠깐! 주가 지수처럼 덕보다 한발 앞서서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모습의 균형이 깨져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건 둘 중 하나다. 번번이 듣고 읽고 기억해도, 반복해서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일. 첫째 그야 어쨌든 <잔말 말고 날 따라와>, 둘째 <의전> 오오 의전! 첫째는 들뜸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바깥을 향하는) 경쟁 자발, 둘째는 존경 동심 호감 사랑. 첫째는 귀에서 피가 나는 거고, 둘째는 귀는 날개가 되고 당신은 천사가 되며 이곳은 마침내 천국이 되는 것. 단 첫째에서, 경쟁과 자발과 들뜸 이 셋의 차이는 꽤나 심하지만 누군 뭐 좋겠나 일단은 한편인 걸로! 조증과 울증도 때로는 한 침대를 쓰는데 인자한 들뜸께서 접고 꺾어서 자발을 품어안아야 하지 않겠나.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주장이 있으면 얼굴 마담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있잖아요, 걸음만 그런 게 아니라 말도 마찬가지. 말도 잔말 말고 날 따라와 아니면 의전. 글도 역시. 식상하거나, 혼자 가거나, 한 문장 한 페이지 슥 보면 책을 덮게 만들거나, 계속 맴맴 돌기만 하는 글도 역시. 중독 아니면 시간 낭비, 응애응애냐 응애응애 아니냐. 물론 롱테일에는 중간도 있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바쁜 행보가 주특기인 경우도 있음. 사람이 살면서 항상 새로운 화제만 꺼내고 재밌는 말만 하고, 새로운 작풍만 추구하고, 꾸준히 계속 기발한 새로움만 선보일 수는 없다. 이 또한 둘 중 하나다. 했던 말 하고 또 하는데 도저히 싫지 않은 진공청소기가 있으면, 친구한테는 그 얘기 했잖아 하면서 지적하고 자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 커피포트도 있다. 말 빠르기 즉 말의 속도 때문에 혹하기도 혼미하기도 짜증나기도 하는 수박 겉핥기 스타일 화법과 NC 웨이터 에르메스식 화풍은 뻥뻥 빵빵 터트리는 (장)타율과 비례하지 않고, 예언의 적중률도 형편없을뿐더러, 그러므로 우정의 교분과 사랑의 대화에 있어서 면밀한 관찰이 요구되는 지점은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오고감 곧 화자와 청자가 작품과 관객이 얼마나 어울리느냐 라는 친화력과 의역 간접화법 새로움 신선함 정다움 지성 고급스러움 그리고 빙하 같은 내면과 무의식이라는 심연이고, 걸을 때 눈에 훤히 보이는 누가 앞서가나 그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잊어서도 간과해서도 안될 중요한 하나는 우선은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이고, 처음부터 슬기롭고 언제나 아찔할 수는 없을지라도 먼저 찬찬히 생각을 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날 모르고서 남을 아는 것은 헛다리 짚기일 테니까. 선구자로 남을 것인가 언제나 회상의 노래만 부르고 지나간 전성기만 그리워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 모두를 아우를 것인가. 열두 난제를 해결했던 헤라클레스가 상상도 못할 문제로다 문제야. 그래서 중요한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라는 그대의 요점은즉슨, 그이가 뻥뻥 우리 오빠가 빵빵 터트리는 건 바라지도 않고 잔잔한 미소라도 포근히 안겨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피식)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렇지만 우리 멋진 남자들은, 무슨 방어전 만큼은 똑소리 나게 치르는 치를 수 있는 적어도 의욕에 불타는 우리는,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자. 그렇지만 우리 멋진 남자들은 아기자기한 소품도 챙기고 단꿈에 대한 할 일과 대망에 관한 할 말에 앞서 소녀에게 처녀에게 숙녀에게 타인에게 친절하자. 그러고서 비싼 계산은 물주인 친구가 치르고 나는 운전할 때 애모하라고 큼직한 염주를 선물해서 그 술값과 퉁치자. 그럽시다. 그러나 저러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물론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덕은 입이 근질근질했고 그런 발설에 대한 욕구를 참기 어려웠다. 적당한 대화 상대가 당장은 캐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덕은 캐롤을 만나러 갔다. 만났다. 그런데 덕은 착하고 예쁜 캐롤한테 그렇게 험상굳고 울분을 토하는 절규의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캐롤에게도 할 말이 있고 확고한 처지가 있었다. 바로 덕이 외지로 떠도는 동안 친구들이 기르던 동물들이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롤은 겨우겨우 정말 개고생해서 닭과 고양이와 새와 개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각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씩을.
「너는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이게 뭐니? 숙녀가 무슨 궁녀니, 조수니? 하인이나 뭐 내가 심부름꾼이냐고? 어? 들려 안들려, 듣고 있니? 어? 내가 늬 전처냐고 후처냐고 임마! 이런, 젠장! 그러고도 늬가 친구냐 그러고도 늬가 오빠냐, 어?」
캐롤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캐롤의 마음도 풀어졌고 현실로부터 배격당하지도 않았고, 이상으로부터 배신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덕이 미래의 문이라는 카페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15
덕은 캐롤에게 어디 간다고 보고를 하고 뒷산에 올라갔다. 운동하고 기분 전환에 명상도 할 겸, 겸사겸사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덕은 산행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려고 할 때 생각났다. 자기의 창작 노트를 산 중턱에 있던 카페 미래의 문에 놓고 왔기 때문이다. 덕은 돌아갔다. 도착했다. 그리고 창작 노트를 찾았다. 그런데 주인 양반이 웬 동영상을 즐겁게 보고 있길래 뭐지 라면서 유심히 살펴봤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안소니와 마고가 한편이고, 에반스─맥스─리플리─스컬리가 한편으로 서로 마술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상대를 생쥐로 만들었다가 복수하면 얼굴은 양 몸은 늑대로 변하는 영상이었다. 카페 사장은 가짜인지 쇼인지 알고 봤을 테지만 세상 사람 다 몰라도 덕은 알고 있었다. 그건 서커스도 프로레슬링도 허접한 카드 마술도 아니란 사실을.
덕은 허겁지겁 마을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캐롤에게 뛰어갔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덕은 캐롤의 카페까지 달려가는 동안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슬로우모션 현상을 경험했고, 분위기에 알맞는 3분의 마법 즉 신나는 유행가가 들리는 환청을 체감하고서 황홀한 사랑을 막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상사병에 빠지고 향수병에 그리워하고 꿈을 먹고 꿈을 노래하고 꿈에 취해 춤을 추며 꿈과 함께 자라는 요정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사라졌던 맥스가 자기 집 정원에서 꽃과 나무에 물을 주고, 에반스는 잔디를 깎고, 리플리는 수영장을 청소하며, 스컬리는 강아지와 놀다가 덕에게 눈인사와 꼬리 흔들기와 하트 뿅뿅은 물론 사랑의 윙크까지 듬뿍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고 덕의 눈만 똥그래졌다. 원래 눈이 동그란 건지 모르겠지만.
즉 마을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덕도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캐롤은 이제 슬슬 본게임이 시작된 것 마냥 내내 심심하다가 왕왕 재미없고 종종 따분하던 일상에서 마침내 신나는 모험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덕. 이제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지 않니? 더 이상 숨은그림찾기라는 꼬마들 미로 같은 관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됐어. 왜냐하면 판이 커졌으니까. 판돈을 올리고 승부를 걸어야 할 시기라고. 넌 언제까지 안소니의 사냥개로 만족할 건데? 그런다고 마술사 안소니가 널 1급 매로 인정해 줄 것 같니? 늬가 아무리 안소니를 보필해 봤자 넌 영원한 비운의 책사일 뿐이야. 늬가 그 모양인데 나라고 행운의 시녀랄지 자유의 천사일 리 있겠니? 안 그래? 우리 시대에 뭔 놈의 신데렐라, 호박 나이트라면 모를까!
이제 우리 삶은 신비롭지 않아도 되고, 우리 인생도 굳이 환상적일 필요가 없게 됐어. 우리가 요술에 걸리지 않아도 좋고, 우리가 마술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고, 우리 삶이 신기하지 않아도 좋다구. 미래의 문은 이미 열렸고, 때문에 우린 요정과 유령들과 대적할 수 밖에 없어. 일이 그렇게 됐다고. 따라서 지금은 행동을 취할 때라는 거지. 속임수가 아니라, 거짓이 아니라, 바로 행동을! 지금 상황이 그렇다니까. 안소니와 마고가 사라졌고, 안 보이던 4인방이 돌아왔다고!
넌 누가 뭐래도 허당이니까 아마도 몰랐을 꺼야. 하지만 난 아냐. 허영이든 허풍이든 끝을 봐야 뭐가 중간인지 알게 될 테니까 은근 허당은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고. 난 말야, 그래서 마술사 안소니에 대해서 좀 조사를 했지. 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덕. 있잖아, 작가의 운명이 뭔지 아나 친구? 작가는 말이야, 작가는 말을 잘하든 못하든 모든 대상의 뒤를 봐야 해. 너의 비밀, 나의 과거, 마술사 안소니의 뒷모습. 미래까지 회상으로 내일까지 상상으로 바꿔야 한다고. 또 그는 모든 동사를 과거형으로 치환해야 한다고. 사랑한다? 사랑했다! 동경한다? 동경했다! 좋아한다? 좋아했다로! 왜냐하면 그래야 픽션의 생명력이 살아나고, 행동에 속도감이 부여되며, 창작에 대한 구상이 탄생하기 때문이야. 그런 반면 미래학자는 미래를 내다보지. 헛다리 짚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작곡가? 해 봐야 시간 예술이야. 그러나 미래를 현재로 데려오거나 나중 일을 엿보는 운명도 있어. 일명 점쟁이, 약장수? 그건 빼고 허풍쟁이도 빼고 그래 예언가! 또 있다, 마술사 안소니! 나머지는 뭘까? 다 현재를 사는 거야. 사랑을 하고 인생을 즐기고 복권을 사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안소니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린 지금까지 안소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아무리 뛰고 날고 연구해도 우린 안소니의 밑이고, 마고의 비위를 맞추며 아양 떨고 그들 앞에서 재롱 피울 수 밖에 없었어. 너도 조금은 알고 있었잖니? 게다가 늬가 제일 잘하던데? 심지어 애교까지? 뭐라고 덕이 애교를, 오오 미처 몰랐네, 아 글쎄 덕이 애교를? 두고두고 놀려먹어야지. 난 늬가 여잔줄 알았다. 나랑 바꼈다고. (흠칫 째려봄)
그러므로 우리가 이 총체적 난국을 타파할 비장의 묘수, 궁극의 비책, 최고로 기막힐 신의 한 수는 뭐다? 뭘까? 뭐지? 강력한 핵심과 겁나 훌륭한 요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있었는데 까먹었네. 뭐더라? 뭐였지? 아, 생각났다 생각났어. (딱) (쉭─쉭─쉭) 인문교양서에 뭐라고 나오니? 머머 해라, 머머하면 안된다, 머머하면 머머할 것이다, 머머할 수 없다면 머머하는 게 좋다, 장담컨대 어쩔 것이다, 개인 브랜드가 어떻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라고 하지 않나. 얘기하다 보니 넌 젊은이 난 늙은이가 된 듯 해서 기분이 어째 좀 이상하지만 요약하자면 이제 드디여 때가 된 거야. 우린 어쩔 수 없이 마술사가 돼야 할 숙명이라고!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안소니가 뭘 했는지 아니? 1년 전 안소니는 동기 부여 강연회에서 떼돈을 벌고 있었어. 여기를 봐봐. (캐롤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존재하는 증거를 보여준다) 자료 다 있잖아? 시간당 강연료가 자그만치... 그건 안 나와 있네. 아무튼 우리가 상대하는 안소니는 거물이고, 우린 상대도 안되는 미미한 존재야. 그러나 이렇게 모든 걸 승부의 관점으로 보는 이유가 있어. 인터넷에 기록이 다 남았거든. 여기를 봐봐. 에반스와 맥스, 리플리와 스컬리도 모두 전직 마술사였어. (딱)!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니? 응?
심지어 결정적으로 늬가 봤다는 그 뭔가! 이건, 이건 확실해. 우린 거대한 게임에 휘말렸고, 이미 주인공이야.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자, 한번 시작해볼까!
뭐해? 안 따라오고!」
결론적으로 저번과 달리 안소니와 마고만 사라졌고, 안소니와 마고가 키우던 토끼는 1마리에서 총 3마리가 됐다. 에반스부터 스컬리까지 그들의 동물 친구들도 다시 각자 1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캐롤은 덕을 데리고 가서 안소니네 집을 뒤졌고, 정원에 있는 화분 밑에서 어느 고서를 발견했다. 그런데 제목은 글쎄,
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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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마법의 책 마술론에는 어떤 내용이 씌여져 있을까? 일단 캐롤과 덕은 입수한 비서를 다른 친구들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덕의 집 창고로 가서 조용히 비서 마술론을 펼쳤다.
그런데 마술론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고, 마술관이란 곳의 주소와 그곳 그림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갔다. 다행이 멀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술관에 도착했다.
마술관은 파르테논 신전인가 그와 비슷했고, 인적은 개미 새끼 한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설마 이런 곳이 여기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장소와 시간과 대상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문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문양이 있는 벽에 잠시 기댔는데 문이 열림. 그 안은 한마디로 천국!
여기까지, 이 모두가 한 편의 영화였다.
여기까지 그 모두가 한 편의 영화!
그렇다. 지금까지는 영화였고, 지금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올라간다. 박수 소리가 안들린다 안들린다. 어쩌면 기립박수? 영화는 망했다 망했다. 관객들은 야유한다 야유한다. 그분들 표정이 안좋다 안좋다. 아주 안좋다 아주 안좋다. 장난 아니다 장난 아니다. 뚜껑이 열렸다 열렸다. 하지만 마지막 화면은 관객쪽을 향해 일사분란한 카메라와 조명 세례. 거 무슨 그게 그러니까 관객이 주인공이란 뜻일까?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화는 흥행 순위 10위는 커녕 간신히 최소 상영관과 최소 상영 기간과 극미한 애호가만 확보했을 뿐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전혀.
그러나 어디에나 무엇이든 예외는 있는 법. 목적이 어떠하든 덕이 사는 시골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게 중요한 진실이다. 어떤 작품을 보고 나면 그곳에 가서 구경하든 사진을 찍든 또는 보물을 찾던가 꼭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더블린을 보시라. 고장의 상징은 물론 학계에서도 어디서도 유명세는 영원하다. 비틀즈 앨범 재킷을 따라한 사람 역시 부지기수다. 목적과 의도는 각기 다르지만 사람들은 많든 적든 그곳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비서 마술론을 찾으러, 또는 마술사 안소니가 혹시 진짜로 거기 사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서든. 그런데 우연짢게도 관객 중에는 묘한 운명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 명 또 한 명, 기다리니 다시 한 명. 시간이 흘러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실존 인물과 영화의 환경이 거짓말처럼 현실로 갖추어졌다. 한다하는 마술사들이 모두 모여들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서 자웅을 겨뤄 엄선된 인재들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마치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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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의 메이저 아르카나에 속하는 카드 마술사. 정위치의 의미는 기원, 가능성, 활기, 재능, 기회, 감각, 창조. 역위치의 의미는 혼미, 무기력, 슬럼프, 배반, 겉돎, 바이오 리듬 저하, 소극성. 히브리 문자는 물론 마술사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바로 덕과 캐롤은. 당연히 그들은 마르세유판 타로의 권위자가 됐다.
아마도 이제 캐롤과 덕은 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했는데도 아직이라면 좋게 마술사의 꿈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고 누군가 조언해줄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덕과 캐롤은 그들의 마법을 써먹을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분위기가 조성됐고 여건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 보도 듣도 못한 허접한 영화사에 판권을 팔아서 영화 원작자라는 간판은 얻었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흡사 영화처럼 방방곡곡에서 마술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중에 모르긴 몰라도 토너먼트로 영웅호걸들만 남은 듯 했다.
그래서 덕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영화 마술론 2를 제작할 것인지 아니면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마술사로 활약할 것인지를. 일단 마술사만 되면 그 근접 분야는 덤으로 딸려올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막 최면을 걸어서... 쉿!
하지만 그들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불안의 이면을 파헤쳐보면 덕과 캐롤의 반응은 확연히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캐롤은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부터 정말 정말 삶이 흥미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입장. 그런 반면 덕은 겁이 나서 도저히 이 동네에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딱히 이사 가기는 싫고, 이사 갈 수는 없고 귀찮고, 만약 이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마술사들이 자기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때문에 그는 자발적 가택 감금이 아닌 거의 정황상 피치 못하게 가택 감금에 돌입했다. 덕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다. 돌아이가 1명도 아니고 자그만치 6명씩이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꾹 참고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상상했고 캐스팅 됐던 배우와 닮은 친구들을 보고서 그는 부랴부랴 집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그런 운명이 야속했으며, 소문의 여신 파마는 옛날에는 딱 1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한두 명이 아니라 차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캐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 작전에 들어갔고, 어렵게 만남의 약속은 성사됐다. 이어서 덕이 캐롤의 간청을 수락했고, 다른 친구들의 애원에 자애롭게 대처하자고 자청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캐롤의 집에 모였다. 왜냐하면 오늘은 캐롤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스컬리, 리플리, 캐롤, 마고, 안소니, 맥스, 에반스 그리고 덕까지.
「덕. 오해하지 마시게나 친구. 우린 그렇게 이상한 마술사가 아니라니까. 우리가 어디 그렇게 꽉 막힌 돌아이처럼 보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에반스 저 머저리 같은 놈이 설마 흡혈귀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래. 심지어 맥스는 허당이야. 안소니는 어떻고. 공인인지 비공인인지 어느 이상한 기관에서 주최하는 마술사 시험에서 자랑스럽게 떨어졌대. 우리들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도 유분수지 말야. 나? 아직 스승을 못 찾고 있지 않나. 실력이 금새 바닥나니까 지금까지 떠돌이 인생을 살아야 했다고. 어느 스승이 좋아했겠나, 자질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데. 난 가끔 착각한다네. 나는 집시일까,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건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말야. 자네가 그 설움을 알긴 아는가?
마고? 생성, 소멸, 변형 기술이 전부야. 모자에서 꽃이나 새가 등장하고, 옷장을 열었더니 사람이 나오고. 그거 다 뻥인 거 자네도 잘 알잖나. 동전 마술 그거 초딩도 따라한다고. 그리고 리플리는 복구, 이동, 탈출이 전문이고. 그래서 우리 중에는 그나마 스컬리의 실력이 제일 출중하지. 공중부양, 예언, 투시, 생각을 읽기, 초능력 마술은 물론 순간 이동과 물 위를 걷기까지 가능하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게 어떻겠나? 내 이렇게 간청하는 바일세 친구. 응, 덕 그만 마음을 열어주면 고맙겠네.」
그러던 중 생일 파티 음악이 등장하고, 축복이 터지며, 선물 증정식에 이어서 샴페인에 다과에, 그러다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시간이 돌아왔다. 이미 덕은 특별 회원으로 마술사 그룹 명부에 등록됐고, 마고와 춤을 추게 되는 행운의 주인공으로 낙찰됐다. 그야말로 더없는 행운에 당첨된 양상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판단됨.
덕은 그래도 녀석들이 준비를 꽤 많이 했다고, 그리 나쁜 친구들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안심했다.
그렇게 덕은 마고와 즐겁게 춤을 추던 중 어떡하다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런데, 어머나 맙소사! 오오, 이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
마고는 치마 밑으로 구두가 없었다. 구두가 없었으니 맨발이냐고? 발도 없었다. 그럼 공중 부양? 거기서 멈추면 실망하고 몹시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면서 더없는 배려가 이어졌을까? 그렇다. 정말 그랬다. 참으로 친절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마고는 내친김에 달려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둔갑술까지 감행한 것이다. 덕이 놀래서 딱 고개를 들어 마고를 봤는데 글쎄, 그건 마고가 아니라 마술사 안소니의 면상이었다. 만약 덕이 덜 놀랬다면 그는 안소니를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나. 더 나아가 안소니가 개상이나 말상, 원숭이상이 아니라서 그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만약 덕이 약간만 더 이성적일 수 있었다면 그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라도 드렸을 것이다. 좀 늦게라도 그러는 게 나았을까? 숨돌릴 틈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덕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남자였고 소심했고 순진했으며, 잔뜩 겁을 먹었기 때문에 거의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었다. 그는 결국 기겁해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집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다시 덕의 가택 감금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다른 친구들은 덕의 집 문 앞에 가만히 책을 한 권 놓고 갔다. 책 제목은 당연히도,
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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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론은 그저 그렇고 그런 동화책일까 아니면 어느 명망 높은 마술사 가문이 대대로 보물로 전수하여 후세에 전해진 신비한 마술론일까? 그 안에는 소설이나 수필이나 논설, 설마 만화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진짜 불가사의라도? 아닐 것이다. 모두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저번에 덕이 쓴 극본처럼 마술관을 찾아갈 수 있는 마술관 지도와 주소가? 그 역시 아닐 것이다. 그 또한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왜냐하면 덕이 미처 가택 감금에서 스스로 풀려나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 그 책을 어느 개가 물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일명 천재견!
그리고 덕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마술사 친구들은 죽 쑤어 개 좋은 일만 시킨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 개가 나타나서 고귀한 비서를 덥썩 물어가버린 것이다. 친구들이 몰래 선물했던 마술론으로 남 좋은 일만 시키 결과가 되어버렸다. 남도 하필 강아지를 말이다. 친구들이야 공치사를 늘어놓을 리도 없고, 엎드려 절 받는 식으로 덕의 마술 기교를 늘려주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됐던 것이다. 어쩌면 쉽게 토라진 덕이 문제였을 수도 있고. 그럼 결정적 공헌 때문에 주인공은 개요 덕은 개만... 쉿! 저기 팡 쿵 어디 콩 룸 톰 우리 훡 칫 퍕 사랑 툽 킁 붼! 왜 하필 강아지였는지... 나 원 참.
그 천재견, 괴도 루팡 같은 여심을 감쪽같이 빼앗는 카사노바 같은 천재견의 목적지는, 바로 덕의 마술사 친구들과 대척 관계에 있는 마술사들인 마술단의 은거지였다. 어떻게 이런 바이런적인 우연이? 그러게 말이다. 이 무슨 초현실적인 우화란 말인가? 내 말이! 귓가에 들리는 가상의 음률은 브라질 풍의 바흐? 그 무슨 때 아니게 태교 음악 모차르트도 아니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필름을 돌려서 줄거리만 요약하자면 이렇게 됐다. 덕 친구들과 마술단은 마술 시합을 펼쳤다. 덕의 친구들은 물론 덕이 마술론을 모두 마스터한 줄 알았다. 그때까지도 천재견의 활약상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것이다. 덕도 마술론의 존재 자체도 몰랐고. 결과는 마술단의 압승! 안소니와 덕과 친구들은 참패! 마술 대회가 아니라 차라리 허풍 대회였으면? 이미 지난 일일뿐 돌이킬 수 없는 실패한 사랑 같은 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상금이자 내기에 걸린 자랑할 만한 보물은 바로 마술사 안소니를 교주로 알고 있는 어느 집단의 이권이었다. 무슨 나이트클럽 이권 타툼도 아니고 참 나! 즉 이제 안소니는 변신해서 그곳 이상한 교당에 더 이상 출두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덕이 바로 안소니의 수고를 덜어준 형세가 됐다. 누가 제일 머쓱했는가는 불분명해도 덕분에 안소니는 음지에서 탈출했고 더 이상 느와르 영화계에는 발도 붙일 수 없게 됐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성과라면 마을에 다시 평화롭고 잔잔하며 심심한 일상이 찾아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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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최근의 소란스런 사건들을 뒤로 하고 자기 일에 정진하기로 했다. 원래 그는 처음부터 그 친구들을 돌아이로 규정했다. 심성이 고운 친구들이었으나 자기와는 사는 방식이 너무 다르고 추구하는 양식 또한 상반되는 것 같았으니까. 놀라운 일은 놀라운 일이지만 정말로 기적이나 진짜 환상은 아니었고 좀 특이한 일이었을 뿐이라면서 덕은 지난 일이자 추억의 멜로디라고 상정하고 잊기로 했다. 곧 그는 기존 친구들과 만나고 놀고 떠들기 위해서 도시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점, 그것만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몇 발짝만 가면 연예인도 유명인도 개그맨에 예술가에 마술사까지 상시 대기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자기만 재력가로 거듭나면 되는가 까지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새로운 예술 창작에 대한 구상을 위해 한 5일쯤 휴양지에서 쉬고 오기로 했다. 그는 짐을 챙겨서 즉시 떠났다.
5일 후, 덕은 휴식의 기간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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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5일간의 휴가로 심신의 피로가 풀릴 뻔하다가 반틈만 풀렸고, 그런대로 최근 겪은 놀람과 심리적 불안, 문학적 공포, 현실적 신비는 그런대로 치유됐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랬다.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사랑도 해야 하지만 여행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왔으니 또 얼마나 징글맞은 깜짝 쇼가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꽤 괜찮은 작품을 어쩜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을에 돌아와서 보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특별한 건 아니고 녀석들이 어떤 색다른 기분과 새로운 선망과 설레는 동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인지 다들 대문과 지붕을 뜯어고친 모습이 역력했다. 파란 지붕 노란 대문도 있고, 노란 지붕에 파란 대문도 있었다. 게다가 차도 바꿨다. 전에는 그만그만한 차들이 많았는데 검소하고 합리적이던 이 친구들이 웬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찼는지 고급 차에 뚜껑 없는 차와 바닥에 딱 달라붙어가는 스포츠카가 보였다. 인생을 즐기자 뭐 그런 취지일 수도 있는데 이건 어딘가 모르게 그런 모습이 연상됐다. 베풀 만큼 베풀었고 꿈도 이뤘고 많은 인생 경험을 했고, 사랑도 운우의 정을 나누는 장미꽃과 나비만이 아니라 튤립과 꿀벌의 사랑도 한 골백번쯤 했으니, 이제는 백발을 휘날리며 빨간색 스포츠카와 뚜껑 없는 노랑이를 몰며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독서를 하자,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노인들의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덕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녀석들 허영심 하고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마술사는 개뿔! 차라리 나한테 연애운이나 물어봐라. 나도 복돈 좀 챙기자 이 친구들아.」
그러면서 덕은 별다른 희소식을 기대하지 않았고, 황금빛 햇살이 부러워지는 어두컴컴한 날씨에 흡족해 했으며, 기쁨과 행운과 길몽에 대한 비밀스런 예감을 남몰래 간직했다. 이제 그만 공회전은 멈추고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간지럽히는 상상 속의 미지의 세상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옮기는 즐거운 작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를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설레였다. 물론 뻥이다. 그는 그냥 약간 좋았고,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마음까지 상쾌했을 뿐이며,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채 기분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횡재는 바라지도 않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현실 만족을 막론하고 친구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모두 노인 분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덕은 피식 웃었다. 애들이 심한 건가 아니면 애들이 미친 건가. 드디여? 아마 마술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 치고는 장난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뻔한 이야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어설픈 변장 지겹다고 꾸중할 수도 없었고 속아줘야지 안 그러면 녀석들 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 피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덕은 녀석들에게 맞춰줬다. 궁짝궁짝, 짝짜꿍 짝짜꿍, 칙칙폭폭 칙칙폭폭, 나비 훨훨 회전목마는 빙글빙글.
그런데 문제는 점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나 싶었는데, 그게 모두 진짜란 것이었다. 노인으로 분장한 에반스가 이제 그만 에반스로 돌아와줬으면 싶었는데 에반스는 장난을 그칠 줄을 몰랐다. 덕은 참고 또 참았다. 짜증이 나고 또 났다. 그래서 덕은 아휴 이걸 그냥 하면서 수증기를 가라앉히고 에반스의 볼을 잡아서 이라 갔다 저리 갔다 흔들흔들 해버렸다. 에반스는 아파서 난리였다. 덕은 꼭 고양이처럼 에반스의 얼굴을 할퀴려는 듯이 그의 가면을 벗길려고 했다. 그런데 에반스의 쭈글쭈글한 안면 피부는 진짜였다. 가짜가 아니였던 것이다. 이분이 설마 에반스의 할아버지일 리는 없는데... 그러면서 자기들의 공통된 경험을 얘기하고 가장 최근의 추억을 같이 회상하면서 덕은 이 에반스가 그 에반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이 에반스는 덕이 잠깐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훌쩍 늙어버렸다는 말인데? 덕이 5일 휴가를 다녀왔는데 마을은 50년이 흘렀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공상은... 일에 도움이 되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말자며 덕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녀석들에게 또 속을 생각을 하니 슬슬 부화가 치밀었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된다. 그건 다 허구고, 이건 현실인데 말 같지도 않은 장난 그만 좀 하라고 덕은 마침내 호통을 쳤다. 그래서 에반스가 뭐라고 했을까?
「뭐라고? 안들려. 안들려 이 친구야. 덕. 덕. 좀 크게 말해줘. 응? 뭘 그렇게 속삭이나 이 친구야. 나랑 뭐 연애라도 하잔 말인가? 이 마당에 우리가 자서전을 써도 어중간한 마당에 뭔 연애여? 아 그라고 난 여자 좋아한다구 이 친구야.」
덕은 이게 정말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에반스 상태는 진짜 같은데 무작정 그를 때릴 수도 달랠 수도, 젊음을 돌려주겠다고 장담할 수도, 청춘을 되찾으라고 닦달할 수도, 정신 차리라고 들들 볶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나 미치겠네 와 아휴 아 증말 나 원 이거 완전 돌아버리겠네, 덕은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일단 그는 에반스와 헤어지고 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에반스와 작별했다.
설마, 마술? 아닐 것이다. 일단 그는 녀석들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자고 다짐했고, 일단 시간을 벌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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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됐다. 그런데 에반스 뿐만이 아니라 맥스도 안소니도 마고도, 캐롤과 리플리까지 모두 노인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니 그는 환장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컬리는 이사를 갔다고 했다. 자기들은 마술계에서 은퇴 했고, 당시 마술 대회에서 상대편 마술단에게 혼쭐이 나서 각자 사진작가로, 농부로, 조류 학자로, 상인으로, 기술자로 제2의 인생을 살다가 이렇게 늙어버렸다고 했다.
덕은 도망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패배주의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불균형의 비밀을 어떻게 풀 수 있나, 못푼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묵묵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 궁금해졌다. 그러면 내 50년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라는 것! 내 50년만 막대 그래프에서 뚝 떼서 앞으로 옮겨졌다고? 그건 말이 안된다. 그런데 상황은 그걸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몽정기는 과거인데 사춘기는 생각도 나지 않는데, 이제 와서 물리학을 독학하라고? 오 세상에나! 이게 대체 뭔 상황이란 말인가. 뻔한 드라마도 아니고 따분한 극장 데이트도 아니고 일상이자 현실인데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덕은 잃지 않았다.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신뢰는 그 언제라도 굳건했으니까.
다음 날이던가 그들은 모두 전직 요리사였던 맥스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전직 요리사 맥스는 오랫만에 실력 발휘를 하지 않은 채 음식을 모두 배달시켰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식사 중에 하던 얘기 가운데 공통된 숙어가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도 괜찮았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칵테일을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초저녁인데 모두들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다들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게 아닌가. 전형적인 노인의 습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덕은 맥스가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가 어딨나 찾아봤다. 고양이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 이상한 점은 그 고양이는 예전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맥스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덕이 봤을 때 얘는 옛날 그 녀석이 맞았다. 고양이의 수명이 얼마인데 주인이 늙을 동안 고양이는 뭐 회춘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영생? 주인만 보내고 자기는 불멸하시겠다?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덕은 지금이 바로 생각을 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선명한 해결책을 명시적으로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한발 떼서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서 TV를 보다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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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심사숙고 후 모든 정황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객관적 시간은 정상이고, 친구들의 심리적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급격히 늙어버렸고, 따라서 그들은 외부로부터 어떤 마성의 주술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술법은 아마도 사람에게만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그 효력이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살을 날린 일당들이 그렇게 허허실실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고, 사람을 동물로 변신시킬 단계의 마술까지 통달했을지는 몰라도 그 반대는 불가할 것이다.
이처럼 덕은 아침 시간 곧 두뇌 회전이 잘되는 시간에 현재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딱 떠올랐다. 저번에 마술 대회에서 맞닥드렸던 상대측 마술단의 주장이라는 인물을 어딘가에서 꼭 본 듯 했던 것이다. 그냥 스쳐지나간 건 아니고 분명 낯이 익었다. 것도 많이. 누구지? 누구지? 곰곰히 생각하다 그는 드디여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하! 그분이다 그분이야. 그는 생각이 났다. 이쪽 친구들은 자칭 마술사이면서 단체의 이름이 없었지만, 그래 무명이지만, 당시 상대했던 팀은 이름이 마술단이었고 그 마술단의 수장은 덕의 학창시절과 연이 닫아 있었던 것이다. 덕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 마술단의 리더는 바로 덕의 중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이상한 종교인지 학파인지 그런 재단에 소속된 도인이었던 것이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그들의 인연은 서점에서 시작됐다. 중학생이었던 덕은 주말이면 꼬박꼬박 서점에 들렸다. 서점에서 책을 보던 중 어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도를... 아세요?」 라고.
지금은 철지난, 유행 지난, 안 먹히는 다가섬의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일종의 대표적인 포교의 한 방법이었고 순진한 학생은 그 교묘한 화술에 척 하며 걸려들었던 것이다. 덕이 지금 생각해보니 그 종교인지 학파인지 주술 사단은 정확히 피라미드 네트워크 방식으로 운영되는 단체였다. 보험 영업과 비슷하게 어느 점수제에 의해서 포교에 헌금에 뭐에 어떻게 해서 계급이 올라가는 방식. 덕은 회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 성인이 약 500년 주기로 태어났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어떤 말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뭐라 뭐라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덕은 당시 그분이 선물하면서 권해준 책을 읽었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보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반성문도 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교문을 나설 때 친구들이 막 웃었다.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교문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그러다 어느 제당이랄지 그곳 본거지에 따라갔고, 어떤 입단 의식을 치렀고, 단체로 진행하는 명상에도 참여했다. 그때 명상하면서 무슨 주문인가를 모두 읊었는데 경력이 오래된 사람은 외워서 읊었고 아닌 사람은 실눈을 뜬 채로 보고서 읽었다. 그러다 덕은 졸았다. 그래서 많이들 아다시피 나무 막대기로 어깨를 탁 맞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어깨 뽕이 튀어날올려고 하면 그때가 생각나기 때문에 어깨 뽕이 다시 쏙 들어간다. 겸손이네 교만이네 뭐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통증과 수치랄까 그런 오만가지 감정들의 선선한 기억 때문이다. 그 모두가 말이다. 그러다 그때 딱 한 달인가 지나서 그만 두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가 알아보니 어떻다고 해서 누나 친구와 함께 합리적인 정보를 제공받아서 생각했고 마음을 접었고 얼렁뚱땅 그렇게 끝을 맺었던 기억이 덕에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술 대회에서 상대팀 마술단의 수장은 바로 그분인 것 같았다. 아니, 그분이 맞다. 확실하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그 표정. 그러면 그 아저씨는 어느 낯선 종교인가 학파인가 주술계 쪽에서 마술계로 넘어오신 것인가? 그러면 그분도 마술사? 그렇다면 그 말은 곧 그쪽 업계를 완전히 제패하고 새로운 분야로 진출했다는 뜻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적은? 마술계를 평정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분은 내공이 상당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그 마술단 역시 모두 실력이 출중한 고수들일 것이며, 때문에 내 친구들이 한순간에 노로해진 원인을 그분이 제공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고, 따라서 그쪽에서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친구들은 다시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 그랬구나, 아 그렇구나! 덕은 희미한 희망이 엿보이는 걸 느꼈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뭔가 잘 하면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덤으로 영화 마술론 2에 대한 극본도 자동적으로 챙길 수 있을 듯 했다. 상금을 받으면 뭐에 쓴다? 일단 맛난 음식을 맘껏 배불리 사먹고...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새로운 경험에...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을 이이갔다. 저번에 마술 대회 전에 친구들이 덕에게 물어봤다. 마술론 혹시 못 봤냐고, 너네 집 문 앞에 놔두었던 마술론을. 덕은 그런 거 못봤다고 했고, 친구들은 혹시... 하는 눈치였다. 덕은 이제야 딱 그림이 그려졌다. 이때 악당에 해당하는 마술단의 손에 그것이 들어간 것이라고. 그러면 마술단을 어떻게 찾는다? 친구들은 이제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단 말이야. 음,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아하! 덕은 자기가 쓴 희곡을 떠올렸다. 비록 보도 듣도 못한 삼류 영화사에 판권을 팔았고, 흥행에 여지없이 실패했지만 자기 글이 영화로 즉 그 장면이 영상으로 옮겨진 신기함이자 첫경험을 몸소 체험했다. 교묘히 분장한 마술사 안소니가 덕을 어느 교당에 데려가서 007 가방을 챙기고, 돌아와서 뭉치돈을 덕에게 건네는 장면. 게다가 극본에서 마술론에는 마술관의 지도와 위치가 나와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뭔지 모를 풍문이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히 들려오는 어느 사당을 그곳으로 정해서 극본에 적었다. 덕은 즉시 그곳으로 출동했다.
지금은 캐롤도 할망구가 되버렸고, 나머지는 모두 꼬부랑 꼬부랑이고 스컬리도 이사를 가버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만 과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만 넙죽넙죽 받아먹을 게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제발로 굴러다니는 호박만 기다릴 것인가? 이제는 진정한 사랑도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는 마술단과 마술단의 수장과 맞장을 뜨든 담판을 짓든 뭐든 하겠다고, 뭐든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영화에 나왔던 교당이 있었고, 몰래 정찰하니 교당에서는 어떤 예배 형식의 수업이나 강의 같은 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뭘로 그들을 상대할 것인가? 마술론도 뺐겼고, 덕은 마술사도 아니고 오히려 허당이고, 친구들을 제모습으로 돌이켜줘 라고 하면 녀석들이 고분고분하게 응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을까?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극본에 가짜로 썼는데 영화에서는 진짜로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의 요원 신분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었다. 심지어 무리한 과장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그 교당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어쩌고저쩌고에 대한 죄목이 상당했고, 그들을 비밀리에 쫓는 민관군 연합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군에도 정보 집단에도 초능력에 관한 전담 부서가 존재한다고 영화에서는 설명했다. 그 정보를 근거로 덕은 그곳에 연락했고,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빨리 그분들은 출동했다. 그래서 마술단은 일망 타진됐고, 친구들은 정신도 육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비의 비서 마술론은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덕은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마술론2라는 극본을 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편은 실패했지만 2편까지 실패하란 법은 없으니... 영화가 흥행에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반타작만 해도 판권에 보너스에, 클럽에 먼저 갈까 쇼핑을 먼저 할까? 그는 언제나 김치국부터 마시는 친구였고,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부류였다. 그러니까 아직도 뭘 해도 기쁘고 여전히 아침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나고 내내 즐겁고 그 모두가 재미었었던 것이다. 뭘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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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었던 과정을 간출이자면 이렇게 됐다. 그렇게 그럭저럭 그는 작업에 들어갔고, 극본을 거의 다 썼다. 거의 다. 그러다 덕은 피곤해서 TV를 틀었다. 그런데 TV에서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를 기점으로 앞과 뒤가 많이 달라야지 '그런데' 라는 부사가 적합한 건데, 그 말은 곧 영화는 덕의 기대에 부합하는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으니까. 덕은 코메디나 동물 방송을 원하고 있었나 어쨌든. 개봉 영화 가운데 재미없는 순서로 TV에서 바로 방송되는데,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개봉일과 별 차이없이 TV로 영화가 나왔다. 그러다 영화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 영화는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마술론2와 거의 똑같았다. 뭐야 이거! 마술론1이 끝난 후에 웬 구경꾼도 아니고 매니아라면서 찾아온 친구들이 처음부터 작품 2를 위한 목적으로 찾아왔다고? 이런 젠장! 그럼 결국 이건 뒷북인가? 아니다. 아예 뒷북으로 쓸 수도 없게 되버렸다. 이럴 수가, 워 난 망했다. 이런 젠장!
그러나 덕은 삼류를 면할 정도의 경사를 안을 뻔 하다 놓쳤지만 하늘은 내내 무심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마술론3이 아니라 전혀 다른 1탄 즉 환상론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환상론이라는 착상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미처 최근 이어졌던 엉뚱한 일들 때문인지 원상태로 복귀한 마술사 친구들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환상론이라는 영감이 떠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상금만 받게 된다면, 바로 그 공상 때문에. 덕이 완전 독자적으로 스스로 상상력을 가동하고 창의력은 물론 예술적 재능까지 총동원해서 환상론을 생각해낸 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집에서 허탈해 하는 허당 덕의 허공을 바라보는 무심한 심상이 빚어낸 허구에 불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가 집에서 실의에 빠져있다고 할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오나, 뭔가 나사 하나 빠진 듯 최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 봤다면 그건 혹시 사실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만큼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밑도 끝도 없는 억지와 정반대로 매혹되면서 어? 잠시 아찔하면서 응? 홀랑 홀린 채로 '완전 좋아' 라는 혼잣말을 저절로, 자동적으로 툭 내뱉으며 뭐랄까 이건 정말 진짜가 아닐까 하며 포근히 그 사태를 찬찬히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즉, 대반전!
그 일은 바로 라디오와 TV와 인터넷에서 가리키는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었다. 시련에 빠졌을 때 아무 생각없이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덕은 기분이 저기압일 때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고 라디오와 TV와 인터넷을 동시에 켰다. 우선 라디오. 소리만 절달되는 라디오의 특성상 영상은 듣는 사람 맘대로 그릴 수도 있고, 사실적인 설정은 라디오 드라마가 도와주며, 최고로 황홀한 목소리로 극본은 내내 진행되기 때문에 빠져들지 않을래야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 중간에 광고가 나가고, 뉴스도 나가고, 그러면서 현재 시간이 어떻다 지역 방송 어디다 라는 안내가 나왔는데 그것이 가르키는 시간과 공간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울적하니까 그는 TV로 다큐멘터리를 봤고, 인터넷으로 각종 블로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각자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공간을 사는 듯 뭐가 뭔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따라서 덕은 어쩜 당연하게도 환상론을 써서 첫째 환상 문학상에 도전하고, 둘째 아동 문학으로 편집해서 동화작가로 등단하고, 셋째 동네 마술사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마술론은 물 건너갔으니까 녀석들에게 뭔가 내면의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해볼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 그 일에 착수했다. 어차피 더 몰릴 궁지도 없고 내내 바닥인데 이제 둘 중 하나일 테지. 훌쩍 사뿐히 껑충 뛰어서 구름 위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가 봐야 동네고 생각해 봐야 뒷북이냐 라는 것.
하오나, 하나 분명한 건 그가 희구하던 소설 환상론이 덕에게 인생은 딸기쨈이 될지 부푼 예감에 이어지는 서툰 실망이자 도도한 절망으로 판정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여간, 그 제목은?
환상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