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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10. 31. 19:08

   1

   환영식은 없었다. 예술관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은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그대로 사무실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이름을 윌로 바꿨다. 머머일 것이다로. 왼쪽에 추리 오른쪽에 추측, 그처럼 양쪽으로 낮에는 예쁜 숙녀와 밤에는 아름다운 요부 아니 다소곳한 천사 같은 내 사랑을 누가? 그래, 바로 예언이 그 둘을 양쪽에 황홀하게 꿰찬 듯한 신비한 청록빛깔 공상 때문이었다. 맞다. 윌은 이제 이름 바꾸는 게 취미가 되어버렸다. 작명술도 점쟁이도 알고 보면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일 필요없이 스스로 학습에 응용에 실전까지 1인 다역을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 당장 잃어버린 낙원으로 떠날 수 있는 당첨권을 어딘가에서 따낼 수는 없지만 이름을 바꾸는 거라면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람은 원래 미세한 차이로 여러 외적 인격을 거느린다지만 서류상의 서명이 아닌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처럼 필명 하나 갖는 건 죄도 아니고 벌도 아니니까.
   서두가 길었다만 인생을 일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면 저번 편까지는 재미있을 뻔 하다가 말았고, 이번 편부터 진짜 흥미진진하고 기똥차게 즐거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라는 포부로 윌은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느꼈다. 예술관 친구들은 이제 거의 만날 수 없지만, 반 다이크의 마돈나나 거리의 옷가게에서 마네킹만 봐도 그 친구들이 생각날 것이라고. 그는 느꼈다. 친밀감과 연민, 감수성, 우정의 감정을 뒤로 하고 다시 호기심쟁이로써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윌이 그렇게 새로운 사무실에 입주한 후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특별한 전개는 없었다. 발단뿐인 삶이니까. 그는 마티니처럼 분위기 좋은 해변에 놀러갔다 왔고, 진짜 같은 호접몽도 수시로 꿨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쾌한 해변에 당도했을 때 하필 뚜껑 없는 차 동호회 일당이 몰려와서 구닥다리 웨건을 타고 갔던 윌의 자신감은 슬픔으로 바꼈다. 당연히 어떤 낭만을 기대하는 젊음의 감성은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심과 한숨을 불러왔다. 그 외 윌이 한 일이라곤 도시의 이곳 저곳을 둘러봤고, 오래된 모텔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구상하다 포기했으며, 문학수첩이란 장편영화용 희곡을 쓰다가 고배를 마신 게 전부였다. 그러면 그게 다냐, 아니다. 달리 아름다운 추억과 별난 무언가 비명을 지를 듯한 모험은 없었지만 무명 친구들과의 비공식 회동이 한번 있었다. 윌은 무명 친구들과 만나서 꾸벅꾸벅 졸지도 않았고, 싱글벙글 시종일관 쾌활한 면모만 고집한 것도 아니고, 바로 함께 공동소설을 썼다. 각자 1편의 단편을 써서 그 일곱 편을 억지로 이어서 어느덧 1편의 중편소설을 완성했다. 한데 그 작품은 젊고 세련되고 기발하지 못했다. 동경심을 꿈틀꿈틀 자극하지도 못했고, 번쩍번쩍한 절정이 나타날 뻔 하다가 느릿느릿 다시 발단으로 끝나버리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무명 친구들은 그 시시한 범상함의 원인으로 과작을 첫손 꼽았다. 하필 다작이 뽑혔다니, 윌은 속으로 뭔가 뜨끔했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깜짝 행사와 특별 모임이랄지 이런 선심성 자화자찬식 작업은 예술가로써 남발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고, 퉁명스러운 소음없이 모두 그 뜻에 찬성했다. 말종 종마 막장 별종에 진부함, 식상함, 상투적인 인기나 어떤 모범이 아닌 전혀 뜻밖의 새로움을 추구하자는 데 모두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무명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윌은 미처 몰랐다. 그 실패작이 불러올 낯선 만남을. 즉 그들은 졸작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블로그에 올렸고, 작품 말미에 보너스로 이런 안내문을 내걸었던 것이다.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라는. 그렇지만 상업 영화의 주인공을 일반인이 꿰찰 수는 없는 법. 무명 연극배우일지라도 어느 정도 물망에 오를 만한 조짐이 보이거나, 언젠가 나중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 나 잊지마라, 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 같은 의외의 인물이라면 모를까, 그 장난스런 머머해드립니다 라는 문구는 거느린 조건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무명 블로그는 조회수가 초라했고, 심지어 그 대단한 조건에 걸맞는 최적의 인물이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날 가져요, 아니 제 이야기를 써주세요 라며 제발로 나타날 리도 절대 없다.
   그런데, 어머머, 그런데 나타났다. 내걸었던 그 구구절절 까탈스러운 자격에 대해서 결격 사유가 하나도 없는 뽀송뽀송한 첫눈 같은 숙녀가, 새하얀 도화지 같은 아가씨가 말이다. 여기서 잠깐. 살짝만 곁가지로 얘기를 흘려보내자. 잠시만 모른 체 해 주시란 말이다. 고급 사교 클럽에서 여자들 하는 얘기, 최고급 생활 반경을 제공하는 호텔 커피숍에서 나누는 비밀스런 사적 담론 가운데 하나는 그거다. 어디에 오는 남자들 다 그만그만하다고. 어디 물 아 말 말라고. 여자는 보통 남자를 볼 때 최소 2가지를 본다. 물론 그 두 가지가 재력과 꽃 들고 쫓아다니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고급 회원제 클럽에서 볼 수 있는 남자라곤 딱 그 두 가지 요건에서 최소 1가지에 발목잡힌 여자들이 대동한 남자들뿐이라니, 어머나 세상에 나 같으면 어쩌고저쩌고 아휴 이러쿵저러쿵 쩜쩜쩜!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 혹시라도, 속으로는. 여자는 둘 중 한 명은 이런 말을 한다. 아마도 하지 않을까? 안 한다면 그건 셋 중 하나다. 친하지 않거나, 여자가 아니거나, 고상하면 좋을 곧 세련되기를 바래야 할 말로 포장됐거나! 거울을 비춰보면 남자들이 사석에서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 말은 뭔가? 나는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 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는 말 아닐까? 아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자는 그런다. 허영심은 필요하고, 허영심은 본성이며, 허영심이 50일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허영심이 기형이 아닌 이상 그게 정상인 것이다.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의 중간에 파랑새의 번역기가 있다는 걸 누가 모를까. 1000분의 1, 10000분의 1은 몰라도 10분의 1, 100분의 1은 왜 평균이 될 수 없느냐. 이곳 분위기는 별로다. 언니 고급 사교계라더니 글쎄 순 촌스런 남자들 뿐이 없잖아? 나 같으면 어쩌겠다 쩜쩜쩜. 나는 드문 소수라는 진실을 대전제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엷디엷은 소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바로 그런 드라마적 요소를 순수문학에서 보신 일이 있나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흔하다면 가르침을 받겠다. 있어도 드물고 매우 희귀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걸 순수예술에서 다뤄보자면서 무명 친구들은 헤어졌고, 영화처럼 눈부신 숙녀는 윌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신 것이다. 일은 그렇게 됐다. 그건 제발로 걷는 호박이 아니라 순간 이동하는 신비라고 불러야 어쩜 마땅하리라.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맞...죠?」


   2

   빰빰빰 빠─ 빰빰빰 빠─ 빰빰빰 빠...... 윌의 가슴에 운명의 멜로디 5번 교향곡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만족시켜줄 만한 여자였다. 그렇다면 윌이 불만족할 리가 있나.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지만 그녀는 그저 흔한 말괄량이는 아닌 듯 보였다. 엇그제 판도라의 상자에서 방금 깨어났고 이제 그 환희의 송가를 윌에게 대신 노래해달라는 형편이었으니 윌이 싫다하겠나 넌지시 마다하겠나, 아니면 질겁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만세 만세 만만세 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게 웬 떡이야 그랬겠지. 이거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막 그러면서.
   「설마 블로그에 독자가 없을 거라고 예상하신 건 아니겠죠? 만약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럼 뭐 전 선생님 조수하면 돼죠. 안 그래요? 요정인데 예쁘지 않고, 마녀지만 수정구를 잃어버렸으며, 미남인데 심하게 말수가 적을 뿐더러 간혹 꺼내는 화제도 부적절함으로 모자라 특히나 목소리가 깬다? 제가 그런 드문 확률에 해당되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됐어요.」
   윌은 고뇌하는 청춘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스쿠르지 영감처럼 노인이었다는 말이 아니고, 노인도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쨌든 이미 사랑은 시작됐다. 외로움은 끝났다. 믿지 못할 느닷없는 연정이 애증으로 돌변할지 불면증과 몽유병을 파생할지는 몰라도 일단 그 사랑은 현실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윌의 생활은 이랬다. 지긋지긋한 심심함에 신물나게 재미없고, 할 말도 할 일도 약속에 돈까지 없었다. 혹시나 둘 중에 한 명은 그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절대 없다. 그런데 그 둘 중에 한 명이 바로 윌이었다. 그분들도 사는 낙이 있고 기다려지는 기쁨이, 사랑스러운 연정과 지고의 환희가 있겠지. 바라노니, 있어도 많지 않을 거라고 어찌 그처럼 경망스럽게 예상할 수 있으랴. 그처럼 긍적적인 낙관론을 내다버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윌에게 이와 같은 내 안의 그대로 아껴야 하니까 어딘가에 말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쉽게 믿을 수 없는 어젯밤 단꿈의 줄거리 같은 사랑이 나타난 것 아니겠나.
   윌은 헤헤헤 아이 좋아라, 입을 해벌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침은 흘리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지금은 그녀가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언젠가 전세가 역전될 것이다. 그녀는 때가 되면 기대게 되어 있다. 의지를 해야 하니까 사랑받아야 하니까. 그때가 임박하면 어떤 작전을 편다? 그야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면 되겠지. 녹슨 실력도 실력이라면. 이럴 때 가장 좋은 전략은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수읽기보다 앵무새 따라하기의 시기였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먼저니까.
   그녀의 이름은 핍. 키는 148cm. 악당 험버트 험버트가 사랑했던 롤리타보다 자그만치 1cm가 컸다. 147과 148 가운데 뭐가 맞을지 헷갈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취미는 플룻 연주라는데 가만 보니 속눈썹광에 수다 떨고 소셜 네트워크를 떠돌며 여성잡지 1과 2사이에서 방황하는 숙녀인 것 같았다. 포도주에 조예가 깊을까? 아니다. 술은 마실 줄 모른다는데 내숭이 장기인 여자일 것이다. 보석에 대해서도 모를 테니 다이아몬드에 대한 지식을 읊어주면 처음에는 혹하다가 얘기가 길어지면 하품할 게 틀림없다. 가족 사항과 성장기, 물어보지 않아도 시시콜콜 술술 다 말할 것이다. 아마도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 게 특기일 테고, 그 수다를 듣다 듣다 나가 떨어진 남자가 적지 않을 거라는 추측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를 사랑하려면 귀에 피가 날 각오를 해야 하리라. 그러나 의외로 이런 유형이 사귀기 쉽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음에 쏙 드는 상대와만 사랑을 시작하니까 마음을 포근히 내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꼬셨나 누가 먼저 홀렸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견디다 견디다 어느 때가 되면 퍼질 때 퍼지더라도 엑셀 파일에 그녀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1급, 2급, 3급으로 나누어 관리하면 그녀는 은밀한 애정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기 얘기를 자기가 1인칭으로 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에겐 소설가의 재능이 없다나 뭐라나. 소설가 가운데 소설가의 재능이 충만한 사람이 몇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핍은 장편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 주소는 잘 찾아온 게 맞다. 핍이 독보적인 질투심 유발자일까 일시적인 교태꾼일까. 최소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윌은 직감했다. 핍의 인생에서 고품격 소설의 주제로 삼을 만한 괜찮은 소재는 많지 않다는 걸. 맞다. 진짜다. 그녀는 잘생긴 색소폰 연주자를 흠모하고, 노래도 가사는 듣지 않고 멜로디만 좋아하는 전형적인 드라마퀸 부류였다. 좋게 말하면 천재적 연애술사. 윌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아, 좋긴 좋은데 얘 좀 피곤하겠는데 라고. 유복한 어린 시절에 행복한 성장 환경으로 눈부시게 그러나 아담하게 성장한 인형 같은 숙녀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아아 그녀는 완벽한 촌년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윌은 생각했다. 내가 드라마 작가라면 좋았을 텐데 이걸 어쩐다, 라고 느꼈다.
   오, 이제 어떡한담! 윌은 점차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3

   핍은 이제 윌의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윌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들었던 그녀의 말을 기억했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90퍼센트는 맞다고 큰소리칠 수 있으니까, 어쩜 그녀의 말과 몸짓과 표정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 그녀의 말은, 만약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럼 뭐 전 선생님 조수 하면 돼죠, 그것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호칭도 선생님에서 오빠로 바꼈다. 이미 처음부터 편했으니까, 웃었으니까, 밝음으로 말했으니까. 여자는, 웃으면, 끝난다. 그래서 윌은 핍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해줬다.
   「와, 시집이다. 오빠 시 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런데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하나도 몰라. 그래도 좋아. 나, 하나, 고백하자면 음 시인이 어떤 의도로 글을 썼건 해석은 내 맘이야. 은유? 오빠 난 정확한 사람이야, 숫자를 좋아한다고. 환유나 의인법은 괜찮지만 그림 조각맞추기처럼 시간과 공간과 사연을 마구 뒤섞어 놓는 낯설게 하기? 과연 내가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할까. 그래서, 나는 시를 읽돼 우선은 직유법으로 받아들여. 직설화법처럼 시인이 내게 직접 나직한 음성으로, 때로는 도톰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직접 묻고 답하고 혼잣말하는 그 구술을 듣는 것처럼 모두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내가 시를 읽는 방법에서 첫 번째 원칙이야. 두 번째 이후로는 잘 모르겠어. 그야 뭐 직관이 주관하고 직감이 눈치채지 못하면 무의식이 알아서 하겠지 뭐. 아무튼 난 그래. 오빠도 그래 봐. 그거 의외로 꽤 재밌다. 그거 알면 몇몇 작가들은 아마도 낯이 두껍지 않은 이상 사뭇 당혹스러울지도. 어디 시인만 그러겠어? 전문가와 비전문가! 전문가가 하늘이면 아마추어는 바다라거나 풀밭인 경우도 있겠지. 들장미인 아마추어가 어디 천상의 궁전에서 산책하시는 전문가의 고견을 깨우치겠어? 쉽게 말해서 경우의 수가 몇으로 나뉜다고. 상중하로 봤을 때 말이야. 전문가의 글을 읽으면서 꺼벙한 비전문가와 찌질한 사색가, 허접한 한량이 만약 웃는다면 그분은 대체 왜 웃는 걸까? 아니 도대체 왜 웃는 거냐고! 아마데우스 이후로 아마데우스만한 음악가가 나온 적이 있나? 고전음악은 영원히 지속될 테지만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끝났어. 이미, 완벽하게, 끝! 반론은 전무해. 없어. 있어봐야 의미 없고 필요도 없지. 진짜로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완벽하게 종료됐으니까. 그건, 완성됐고 끝났어. 학계보다는 상업쪽에서 한껏 치켜세운다면야 어느 재주꾼을 새로운 신동을 제2의 피카소라고 제3의 헤밍웨이라고 제4의 드뷧시라고 앞으로 틈틈히 새로운 누군가를 칭찬하겠지만 그 제2의 제3의 제4의 그분을 진짜 제2의 피카소와 제3의 헤밍웨이와 제4의 드뷧시로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가 어렵다면 정치 앞에 모든 명사를 붙이면 되듯이 문학도 그래. 출판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상도덕이 있고 철학이 뚜렷하며 나름 전문가일 테지만 어떤 말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더군. 예술은 계몽의 용도로서 어울리지 않죠 라고. 기다 아니다 맞다 틀리다, 의견은 자유야. 따라서 틀린 건 아니지. 그래서 헷갈린다? 그럼 갖다 붙이면 돼. 어떻게? 문학과 예술 앞에 계몽이란 낱말을. 소설은 계몽적 성격으로 적합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게임, 영화, 장난, 농담, 행위예술, 거짓말등 이 세상에 예술 아닌 게 어디 있겠어. 계몽...에 적합한 과목이라면 그럼 도덕과 윤리, 종교, 예절 이런 거 밖에 없겠네. 나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들었어. 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도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들었어. 그 말은 뭘까? 다른 것도 그렇다는 뜻이지. 누구나가 그렇다는 말이겠지. 상식에 두루 정통하고, 교양미를 갖췄으며, 말귀를 알아듣고, 글귀에 밝은 어른이라면 실제 누구나 그렇다는 말이라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서 아이의 정신 건강을 진단한다거나 만나자마자 또는 오래 사겨 봐야 그 사람을 알게 된다거나 그런 거 말야. 교묘하게 피해가기는 하지만 상업에서 과장 광고는 법으로 규제를 해. 그것이 심하다 그러면 범법이라고. 그래, 관여한 사람은 범죄자가 되는 거지. 반면에 예술을 보자고. 예술에서 과장 광고를 하면 뭘까? 뭐긴 뭐겠어 미덕이지. 관행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네.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하겠지. 불법이 아니니까. 의사소통에서, 청자와 화자의 의사소통에서 빚어지는 부조리랄지 오해에 관한 원인 여부를 놓고 따질 때 많은 경우 근원적으로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거나 양측간에 균등히 생각이 짧지 않은 일은 흔하잖아. 그처럼 생산자보다 소비자의 선택에 책임의 무게를 싣는 분야가 있듯이 난 그래서 시를 읽을 때 내 방식, 곧 직유법으로 읽어. 시간으로 굳어진 내 방식이라고. 읽는 방법은 내 마음이니까. 예술의 양적 팽창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만큼 현대는 펠리컨인가 참새인가 각자의 정체가 훤히 드러나는 점은 매우 좋은 점 같아. 절대 속일 수가 없다구. 그런데 오빠한테 시집을 선물받아서 내가 너무 들떴나 봐. 미안 미안. 긴 말 요약하자면 난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부푼 허영심이 가라앉지 않는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직유법으로 밖에 읽을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들으며 어디에 갔고 누구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라는 내용을 열심히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삶을 산다구. 그래. 부끄러운 일은 아니야. 남들도 다 그래. 혹시 내 의견에 반대한다면 반론을 제기해 보세요 오빠. 오빠도 오빠의 취향이 있듯이 난 그래. 꼭 내 방식을 존중해달라는 말이 아니라구. 시에 대해서 어렵다, 따분하다, 시적이다 라는 말은 있지만 시를 1차적으로 읽지 말라 라는 말은 없거든. 내가 다시 초딩이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래. 왜 그럼 안돼?」
   「안되긴. 핍이 그동안 할 말이 많았나 보구나. 이건 거의 평론가 수준인데 그래? 오빠도 가끔은 그래. 때로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어머,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니까 기분이 무척 좋은데? 그런데 있잖아. 그 시집, 똑같은 거였나 이젠 기억도 안 나지만, 그게 뭐 중요하다고. 아무튼 오빠가 오빠 친구한테 시집을 선물해준 적이 있거든. 푸르른 브로맨스의 불꽃이 강렬하게 불타오를 때 말이야. 당시 그 친구의 잿빛 단짝은 안색이 납빛이 되어가지고 막 쫓아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지. 어쩌면 삼각관계나 쩜오─1.5 그래 그러니까 나보고 알아서 반 반짝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의미에서─쩜오 정도를 바랬을 테니까. 그런데 그 시집을 선물 받은 친구가 말이야 얼마 있다가 여자를 사겼어. 진지한 만남이었나 봐. 그리고 내가 선물해준 시집을 똑같이 그 여자분께 선물했고.」
   「와!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혼했어. 그 둘이!」
   「우와. 음, 그럼 난 이제 어떡한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안 나타나면? 오빠가 내 인생 책임질 꺼야? 오빠가 나 데리고 살 꺼냐고. 오빠, 그럴 수 있겠어? 그럴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고. 그게 정말 가능할까, 아무 문제 없을까?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궁금하네. 아 맞다.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리고 그 사연을 요약해서 난 블로그에 간단히 올렸어. 그런데 있잖아 그 뒤로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올릴 수 없는 일이 있었지 뭐니. 아이쿠, 에고머니나, 어떻게 그 참...」
   「와! 그래서 그래서? 말해 봐 말해 봐. 어서 어서. 말해 줘 말해 줘. 뭔데 오빠?」  라고 그녀는 윌의 말을 끊자마자 맞받아쳤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것마냥.
   「그래서, 그 다음에? 그 친구가 바람 폈어.」
   「아 나 이거 진짜, 뭐야 그게? 여자는 시인이 되고 남자는 과학자가 됐다더라, 그런 거도 아니고 뭐 불륜? 내가 동네 아줌마들처럼 그럴 줄 알았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어머, 진짜요? 그렇게? 인생 허무하네. 이러니 초딩들이 동요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나. 난 기억나. 초딩 5학년 때 우리 반 합창단이었던 애가 선생님이 부탁하니까 엄청 이쁜 척 딱 손동작 막 이러면서 노래하던 거. 그 동요 제목이 뭐였더라?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 다음은 잘 모르지만, 잘 살겠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
   「뭐야 그게 다야?」
   「미안 미안.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고전주의자의 열정과 로맨티스트의 갈망에 대해 설명해주지는 못할 망정 꼬마 요정의 동심과 아리따운 숙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듯 하여 무척 쑥스럽구만 그래.」
   「그래 내 이번만 봐줄께. 하지만 다음엔 어림 없어. 알았지? 음. 기억해 두겠어. 그런데 있잖아. 오빠.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오빠.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꼬셔? 아 오빠. 여자가 꼬리치고 미혹하며 걸어다니는 호박에 날아다니는 꽃잎 막 그런 거 말고. 응?」 
   부드러운 몸짓과 수상한 비음은 물론 교태와 애교라면 도무지 자신 없는 여자도 다 방법은 있다. 꽃 들고 쫓아다니고 돈 쓰고 시간 쓰며 꽃 들고 바보처럼 벌스듯 언제 어디서나 기다려야만 하는 슬픈 남자처럼. 슬프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슬퍼도 진짜 슬픈 게 아니다, 결과에 따라 쉬쉬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여자는 남자에 비해 뭔가가 너무 쉽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일장일단이 있는 것일 뿐. 아, 그러니까 본론만 말하라고? OK! 손이 차갑고 가슴이 이성적이며 애교는 체질에 안 맞고, 성질이 용납할 수 없으며, 인생 철학에도 도저히 어울리지 못한다! 라는 숙녀도 다 방법이 있다. 뭐겠나? 뭐긴 뭔가 그거지. 오─빠!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데? 으잉? 어인 일로? 왜, 미남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서로 널 차지하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우리 핍을 자꾸 귀찮게 하는 꿈이라도 꾼 거니? 오빠가 꼭 네 꿈나라의 그 은밀한 줄거리를 엿본 건 아니지만 은근하게 씩 웃는 네 미소 하나면 어젯 밤 핍의 꿈 내용을 난 단박에 짐작할 수 있지. 암. 그럼. 땅 집고 헤엄치기요 식은 죽 먹기라네. 흐흐흐. 헤헤헤. 하지만 오빤 모른 체 하겠어. 그러니까 오빠한테 고마워하라구. 알겠니? 아, 사랑. 사랑이라... 이렇게 말해 볼까, 저렇게 고자질할까. 없는 헛소문에 멋진 풍문이라도 만들어내야 하느냐. 가만 있자, 의뭉스러운 그런 거 믿거나 말거나 험담 말고 뭐가 있을까. 자고로 기쁨과 젊음을 찬양함은 불변의 진리, 다정한 사랑을 애원함은 부동의 인기. 정다운 젊은 날 사랑하자. 천 곡의 노래와 만 편의 시가 말하는 주제가 무엇이더냐, 바로 그것. 허나 영화 같은 사랑은 드물 테지. 그래서 회상의 발명과 추억의 과장과 창작의 열망이 있는 법. 그러므로 우리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샤를 보들레르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내 사랑은 중요하나 그분들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 곧 일단 뭔가 있어 보이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브랜드의 사랑에 대해서 물어보면 멈칫하기 때문. 즉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나 문외한이거든. 호감 있는 남자가 물어보면 선뜻 알고는 싶어지는데 정작 별 내용이 없는 걸로도 모자라 원래 관심 없던 나조차도 내 무관심을 잠깐 잊게 되는 거라고. 결론은 모른단 말이야.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남자는 그래. 아마도 여자도? 자, 그러면 그 다음엔 이렇게 운을 띄울 차례. (딱) 나는 이런 사랑을 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라고. 덧붙여 호들갑스런 오락적 색채가 짙은 어느 언론에 따르자면, 최근 프리미어리그에서 성적이 부진한 어느 팀 감독이 사뭇 볼썽사납게 경질당했다는데 하필 이름이 셰익스피어네? 아아 그녀가 생각난다, 셰익스피어! 우린 한때 꽤 잘 어울렸고 찐한 사랑을 했지. 에잇 그만하자! 라~고 한다면 그 친구는 영원한 허당, 백퍼센트 허당, 완벽한 허당이라네. 여대생 셰익스피어 근처 10미터 안쪽으로 접근하기나 했나 몰라. 하오나 숙녀가 그런 허당의 허세를 들어주겠나, 들어주지 않겠나? 그분은 남자친구한테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쫓아다녀야지 별 수 있어? 어디 쫓아만 다녀? 보는 눈이 있는데? 기다려야지. 뒤쫓는 것보다 더한 정성이 필요한 바로 눈물 겨운 기다림 말이야. 곧 호박도 호박이고 꽃도 꽃이지만 남아도 나뉘는 법이지. 노력형이 있고 돈을 많이 쓰는 유형에다 거미줄 작전이 주특기인 부류도 있어. 그 가운데 축복은 뭐다? 바로 여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 부류지. 진짜 괜찮은 남자는 여자가 가만 놔두질 않는단 말일세. 남자가 여자를? 아니야. 무슨. 아니라고. 에잇, 알면서? 오빠는 스쳐가는 눈빛 한번이면 대번에 알 수 있다네. 어허 저것 봐라. 거리의 어느 미남을 보고서 기쁨의 군침을 흘리는 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허나 내 이번엔 특별히 모르는 체 하겠노라. 바로 이 '특별히'가 아마도 썩 드물지는 않겠지? 이번 연애학 강의는 여기까지.」
   윌과 핍은 이처럼 마술사와 조수인지 숙명적인 연인인지 분간이 어려운, 드디여 사뭇 부러운 친분을 뽐내는 사귐의 단계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4

   윌은 핍을 광란의 무도회장에 데려갈 수도 낯선 별명을, 아첨의 여신 사교계를 누비다, 같은 문장형 애칭을 붙여줄 수도 없었다. 그는 유일한 목적, 핍의 인생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옆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콧노래를 불렀다가 거울과 대화를 나눴다가, 핍은 내내 남 모르게 윌의 속을 태웠기 때문에 글을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때 사무실 소파에서 핍이 TV를 보고 있는데 뉴스가 나왔다. 동물원에서 여우가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꼬리가 1개인 정상 여우였다. 그와 동시에 바깥이 소란스럽길래 윌은 나가서 무슨 일인지 살펴봤다. 동물 구조대와 영세업체 소속으로 보이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뉴스에 나왔던 여우가 윌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는 걸 누가 봤다고 한다. 또 입주인 중 1명은 윌의 사무실 근처로 여우가 이동하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고 한다. 윌은 눈치가 없는 척 구경꾼인 듯 거동했다. 동물원에서 여우가 탈출했다, 그런데 내 사무실 앞에서 종적이 묘연하다, 그러면 핍이 바로 그 여우일까? 새로운 소식은 윌의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는데 설마 소파에 여우가 한 마리 앉아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 설령 그럴지라도 그는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윌의 잠잠했던 동정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그의 총명한 추리력과 스코트랜드풍 상상력이 되살아났다. 따라서 윌은 무언가 감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핍이 어떤 삶을 살았고, 머스트 찰리 톰 스미스 게다가 델에 심지어 2부 리그 3부 리그까지 추종 세력을 든든하게 거느렸고, 문란...까지는 아니지만 이거 혹시 속칭 날라리가 아닐까 하는 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핍에게 먼저 퇴근한다면서 곧바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3박 4일간의 여행에서 핍은 돛단배를 탔고, 조랑말과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고성을 개조한 호텔에서 핍에 관한 소설의 줄거리와 구조와 인물 관계도에 대한 구상을 모두 마쳤다. 그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소녀 감성을 한껏 부풀려서 인형의 마을 천사의 나라 꿈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핍의 사랑 이야기를 들고서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윌이 사무실로 가는 길에 라디오 뉴스가 나왔다. 집 나간 여우가 동물원에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장엄한 자연 풍광과도 같은 평화로움과 TV 광고의 예언처럼 다행스러운 심심함과 일상의 상투적 행복이 제자리를 잡았겠다, 이제 남은 일은 핍의 소설을 완성하는 일만 남았다. 작품은 대필이지만 핍이 작가인 걸로 발표할 것이다. 못 견디게 사무치는 열정과 환성과 찬양은 모두 핍에게 떠넘길 테다. 왜냐하면 언제라도 얄밉지 않은 능청과 흥미로운 착오는 윌의 몫이고, 아름다운 꿈 행복한 기분 유쾌한 사랑 즐거운 인생은 발랄한 숙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윌은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그나마 어디서 들어도 본 것 같고 보긴 본 것 같다는, 적당하지는 않지만 나름 불만족스럽지 않은 인지도의 순수예술가로써 위상을 공고히 다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기대감이 부풀었다. 이제 장난감 트럼펫과 장난감 삼지창도, 조촐하게 20명 정도 모이는 펜클럽 모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쁨의 고양감에 사뭇 떨려왔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니 참을 수 없는 몽상, 멈출 수 없는 공상은 이쯤에서 자제하고 그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머나! 사무실에 핍은 없었다. 느낌이 쎄했다. 윌이 줄거리 구상을 완성한 날 핍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참을 성 없는 년, 라고 핍의 빈자리를 더럽히지는 않았다. 역시나 핍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기서 인연은 끝난 건가? 핍의 사랑 그 애절하고 장구하며, 어떻게 안 좋게 보자면 난잡하고 질펀한? 까지는 아니겠지만, 핍은 윌을 돌파리로 인정하고 떠나갔다? 상놈부터 목신까지, 씩씩한 뻔뻔스러움 숨기는 아름다움, 그 모든 사랑에 대해 기계처럼 스캔할 수 있는가를 마침내 깨달았는데 핍은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다? 혼자 남은 윌은 그럼 약장수? 윌은 텅 빈 지갑 외로운 마음, 고딩 수업 시간에 들었던 표어 나를 가꾸세요, 살면서 깨닫고 체감한 긍정적 관점인 어차피 나중 의무방어전이든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라는 체념 어린 문구는 잘 아니까 유독 각별히 아꼈던 '인생을 탐구하자, 예술에 정진하자' 그런 순진한 다짐 같은 문장은 이제 지겨웠다. 챔피언에 올라야 지명방어전으로 매번 새로운 상대를 맞이하던지 말던지 할 텐데 내내 경기장 주변에서 맴돌기만 하고 구경꾼 주변에서만 서성거리는데 어느 세월에, 시무룩한 심정이 때로는 그처럼 자기를 지배했으니까. 그야말로 낙관과 긍정과 희망 찬 내일은, 머머해라 같은 브랜드 슬로건과 인문교양서적의 명령이라면 이제 신물이 났다. 허당의 자발에 골탕먹기 일쑤? 짜증났다. 아 됐고, 그러니까 언제까지? 짧든 길든 세월은 가고 행복은 챙겨야만 하는 것! 윌은 무턱대고 새로움만 쫓는 속물이 되긴 싫었는데...! 지금 그에게 남은 건 그렇다. 맞다. 많이 맞다. 돈에 팔려가는 환상과 병든 신비!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젠장!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누가 찾아왔다. 오오, 이번에는 핍과 전혀 다른, 완전 색다른 스타일의 미녀였다. 예뻐 봐야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자세히 보면 실망한다. 언뜻 보면 무수히 예뻐 보이지만 언뜻이 아니라 잘 보면 깨닫는다. 잘못 봤다는 걸. 거의 다 그렇다. 전부 조명발이고 대부분 화장발이다. 오래 봐도 괜찮은 미녀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새로움을 반긴다는 것. 그래서 여자옷의 종류는 그렇게나 다양할까? 아마도. 남자는 백화점에 가서 목적지에 도착, 선택, 계산 찍, 곧바로 공이든 게임기든 술집이든 어디론가 떠나는 게 행동 지침이지만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를 홀리고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매번 꾸미고 새로워져야 한다니! 남자는 그러니까 눈치껏 상황 봐서 그녀보다 앞서 걷든가 아차 싶을 때 그녀를 앞서 걷게 만들 줄 아는 요령을 터득해야만 한다. 안 그랬다가는, 쉿!
   그건 그렇고 오오, 이번에는 핍과 완전 딴판의 분위기를 간직한 숙녀였다. 핍은 이미 머릿 속에서 잊혀졌다. 이 정도면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라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전혀! 손색은 무슨, 대환영이었다.
   지구는 신비롭고 우주는 말이 없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한다. 그래야 한다.


   5

   새로운 아가씨를 기점으로 그 다음 날부터 방문자는 쇄도했다. 그칠 줄을 몰랐다. 흡사 이래도 되는 거야 라면서 그런 헤드라인이 연상됐다. 화제의 인기 드라마 1058 : 1 경쟁률 뚫고... 몇 대 1의 여주인공 누구... 그러나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계속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까 윌은 정신이 없었다. 지금 바로 이곳은 기쁘기 그지 없는 낙원이었다. 이미 핍은 잊었다. 깨끗이 잊었고 깔끔하게 정리됐다. 일단 지금은. 심지어 이번에는 심사를 까다롭게 해서 아무나 받아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뿐인가? 윌은 샀다. 무엇을? 바로 번호표 뽑는 기계를! 룰루랄라 룰루랄라, 즐거운 인생 행복한 마음. 순정만화가 따로 없었고, 착각 탐정단은 바로 자신이었다. 바로 지금은 행복한 사춘기였고 내일은, 내일도 언제까지나 기쁨의 왕자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설레고 떨리며 한없이 들떴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케를 들어야 할 것만 같은 숙녀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끼니가 지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야옹야옹 고양이상도 있었고, 어떻게 저리도 고혹적일 수 있을까 싶은 말상도 있었다. 끊이지를 않았다. 매번 똑같은 상상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명은 키스를, 이번에는 윙크를, 깜찍한 그녀와는 백허그를? 아아 이건 진정 천국이었고, 오오 아마도 이건 꿈이 아닐까 싶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방문자가 끊겼다. 완전 뚝 끊겼다. 잠깐 주춤하나 보다 라고 안심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파리만 날렸다. 이건 안심할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 정지된 듯 했으니까. 으리으리한 재산 탕진 후 빛 더미에 올라서니 1층에는 인기도 친교도 우정도 사랑도 돈도 아무것도 없더라, 바로 그런 심정과 똑같았다. 윌은 생각했다. 개의 팔자와 마술사의 새가 처한 운명을 비교했고, 그 가운데 무엇이 상팔자고 하수는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사실이지 말은 좋아하지도 않고 마권은 관심도 없으면서 승마용 채찍은 어디에 쓸려고?」  같은 대사를 끄적거려 놓은 창작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뭉치고 물어뜯다가 집어던질 의욕도, 의지도, 기운도 없었다.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재기에 성공하다, 그럴려면 일단은 방탕한 시절이 선행되야 합당한 일이다. 퇴폐적인 난잡함이 합리적으로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런 제목을 얻을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이건 어설픈 난봉의 단꿈을 꾼 것도 아니고, 찐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호시절은 아주, 정말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윌은 그래서 동화에 싫증났고 성인극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다시 에로 비디오에 슬슬 관심을 기울일까 말까 고민하는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인형에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당신은 내 기쁨의 보배요 달콤한 사랑이며 행복의 원천이로다! 친구들로부터 습관적으로 질투 받는 여복에 기뻐하는 행운아에 그는 결코 등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든가 말든가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는데 뭘. 하지만 잊혀지지 않았다. 눈웃음과 선웃음 그리고 창백하지만 애처로운 표정들을 기억했다. 저는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요 라고 속으로 말하는 듯한! 과자든 꽃이든 뭐든 주변에 보이는 걸 콕 찝어서 저도 뭐를 정말정말 좋아해요, 라고 빗대어 말하는 모습을! 그것도 아주 선명하고 달콤하게. 그러나 기억이 전부다. 그것도 어디냐마는. 윌은 사랑에 빠진 걸까, 사랑에서 빠져나온 걸까? 그가 몰입했던 환상은 환락의 구렁텅이였나 희망의 신천지였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엉거주춤. 어영부영. 얼렁뚱땅. 대충대충. 내 이럴 줄 알았다면 작가가 아니라 차라리 점쟁이를 할 걸 그랬나? 라는 의구심마저 쉬이 잠재울 수는 없었다. 뭐 점쟁이? 점쟁이로써 그런대로 중간만 간다면 홀리고 꼬시고 예언하고 점지하며, 거두고 게다가 맹목적 믿음에, 심지어 몸과 마음과 돈과 신비한 사랑까지? 퍼뜩 떠오른다. 바로 이런 말이. 물오른 젊음과 약오른 교태, 상큼한 맵시를 보아 하니 여한 없이 사랑할 사주군 그래. 바로 그러면서 손끝으로 살짝만 턱을 스치면서 관상을, 손을 덥썩 깜짝 놀란듯한 그녀를 다독거리며 안심시킴과 동시에 손금을? 이런, 젠장!
   윌은 예감했다. 당분간은 이 얼떨떨한 저기압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6

   윌의 생활에 달리 변화는 없었지만 그가 언제까지라도 즐기듯이 무능함을 치켜세우고 운수 없음을 한탄하는 방랑자는 아니었다. 꽝일지라도 셀 수 없이 당했고 세상살이는 된통 헤매도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털고 일어났다. 수줍음 많은 넉살꾼처럼 말이다.
   그런 다음 그는 은행에 갔다. 왠고하니 수중에 현금을 넉넉히 쥐고 있으면 그래도 꽤 힘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민한 건 좋은데, 그런데 명민한 당나귀라서? 차라리 토끼 아니면 유니콘이기를 바랬다. 새로운 향락은 몰라도 장난스런 딴마음은 물리칠 수 있다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번호표를 뽑았고 기다렸다. 순서가 됐다.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은행원과 대면한 다음 용건을 말할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소설을 써드릴까요? 보아 하니 선생님께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을 것 같지는 않고, 갖은 풍파보다는 그런 제목의 일기를 많이 썼던 애인을 꽤 거느렸을 것으로 사료되는군요. 변덕스런 허영녀의 습관적인 공상이 되살아나다 같은. 변덕스런 허영녀라면 선생 애인의 친구를 가르키는 걸까요? 혹시 삼각관계? 그야 모르죠. 애꿎은 사랑의 균형감은 필시 누군가한테는 못마땅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음, 일단 제가 봤을 땐 주제를 이렇게 잡는 게 괜찮을 듯 하네요. 암탉의 허영엔 수탉의 허세와 허풍의 구애로, 숙녀의 낭만에는 신사의 품격으로, 연애란 어떤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환상이랄지 혹은 후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자였드라. 캬~! 어때요? 괜찮나요? 괜찮을 리 있겠어요? 아님 조금은 촌스러운가요? 어럽쇼, 조금이 아니라구요? 그야 어쨌든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먼저 큰 방향을 정하는 게 중요하죠. 그럼요. 인생. 사랑학. 환상론. 마법. 동화. 또는 멜로? 그렇게요.」
   어떤 헛생각이 그를 이곳에 데려다주었을까. 윌이 당도한 은행은 이율과 금리에 따라 화폐 가치의 기준을 거래하고 시장 가치의 표준이 통용되는 은행이 아니라 바로, 어느 작가의 사무실이었다. 그분은 여자였고, 중견 추리소설가였으며, 이름은 마를린 쿠퍼였다. 마를린 쿠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런 작가도 있었나,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아마도 전성기는 살짝 꺾인 듯 보였다.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인 친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금새 이력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윌은 무엇보다 정신을 차리는 게 급선무였다. 무엇에 홀렸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지다, 원래 이런 게 정상적인 흐름이지만 지금 윌은 그 어떤 우울한 잠재의식에 이끌려서 은행에 간다는 게 그만 이상한 흥신소 같은 장소에 와버린 것이다. 묘한 우연의 일치로 그곳은 우스꽝스럽게도 추리소설 작가의 사무실이었고.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요?」
   윌은 눈썹을 까딱했고 입술도 깨물었으며 울그락불그락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웬 깜짝쇼란 말인가. 사랑함과 사랑 받음도, 사랑도 사랑 없음도 일이고 삶이며 인생이다. 무슨 엉뚱한 말이냐구요? 그러니까요! 윌은 그처럼 황당하게도 자기 앞에 있는 여자와 사랑을 그것도 찐한 연애를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런 때 생각이 많으면 안된다는 걸 잘 아는 그였다.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더러운 사랑도, 지독한 사랑도, 파렴치한 사랑도 아닐 것이다. 뻔하디 뻔할지라도 애잔하다면 모를까. 왜냐하면 그녀는 이런 말을 좋아하니까. 미칠듯이 아름다운 너! 전설과도 같은 미모, 현기증을 부르는 아찔한 눈매와 고매한 몸짓. 눈부신 그대는 굳이 단장하지 않아도 꽃보다 아름답소. 영원한 젊음의 여신이여! 그렇지만 그런 그녀는 과거고 이제 제 앞에는 다른 사랑이 있습니다. 눈부신 천사 새로운 요정을 발견했거든요. 그게 누군 줄 아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윌은 깨달았다. 앞에 앉은 숙녀에게는 작은 사랑이 단지 두어 번 있었을 뿐이고, 거의 다 짝사랑이었으며, 일단 표정은 미스테리했지만 의뭉스러움과는 약간 성격이 달랐던 데다 이미 속으로는 웃고 있다는 것을. 혹시라도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남자는 반하면, 반하면 끝이다 라고.
   「모른 체 하지 마시구요. 운명의 여신이 손짓을 하면 이미 큐피트는 제 소임을 다했고, 사랑의 성사라는 달콤한 향배는 그대의 결정에 달려있답니다. 수줍은 처녀의 연정을 모른 체 하지 않겠다는 사나이의 다정한 포부, 가련한 사랑으로 져버리게 하지 마소서. 마침내 이 몸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혹시, 코메디언이세요? 제 블로그 글을 보고 오신 거 맞나요?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라는? 아니면 연극배우던가, 낯이 익숙하지 않은데.」 
   「쉿! 긴 말 하지 마세요. 내일 다시 오겠어요. 답은 내일 듣는 걸로. 그럼 안녕히.」 
   윌은 챙피했고,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몰랐으며, 당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금새 웃기지도 않은 소극이 벌어져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몰랐으니까. 은행에 간다는 게 누가 자기를 이곳에 데려다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윌은 다시 이분께 진지한 만남을 애원할 것인가, 실없는 고백을 후회하며 가택 감금에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7

   번호표 기계 때문이었을까, 말없이 가버린 핍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온 상심 때문이었을까. 윌은 언젠가 언뜻 본 가짜 뉴스를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의 냉혹한 이성은 그만 권좌를 장난기 풍만한 개구쟁이 윌에게 넘겨줘버린 것이다. 오두방정 유형이나 악바리 윌에게 주도권을 잠식당하지 않은 건 다행일 테지만, 개구쟁이 윌이 인기척도 없이 쌩하니 나타나 걷잡을 수 없는 촌극을 펼치다니! 하마터면 오래오래 순정을 지켜온 어느 여작가한테 심각한 결례를 범할 뻔 했다. 까닭인즉, 핍과 같은 열성 팬클럽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과 떠나간 사랑에 대한 아픔과 시련이 만들어낸 착각과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슬픈 연금술사 미다스의 운명을 탓할 필요도 없고, 뜻하지 않게 발설한 사랑가 때문에 창피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께 찾아가서 솔직히 말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만나서 실언이었다는 느낌을 전달할 듯 하다가 상대가 실망한 것 같으면 사랑을 밀어붙이고, 일단 웃는다 그러면 토크쇼 분위기로, 내내 진지하다 싶으면 용건을 말하고 선물을 전하고 나오면 그만이다.
   윌은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입구에 당도한 순간 속으로 부담스러웠던 심정이 색다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대화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일까. 수다스러움과 은근한 기대와 은은한 예감은 부끄럽다는 것처럼 고개를 다소곳히 숙였다. 소란함은 시시하다는 듯이. 흥미진진한 어린 친구와 놀아주는 건 피곤하다는 것처럼. 언제는!
   윌은 작가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 맙소사!
   그곳은 은행이었다. 평범한 은행. 불길한 예고의 부적중인가 응큼한 짐작의 얄궂은 불운일까. 사연을 알아본 결과 그곳은 옛날부터 은행이었다고 한다. 비밀 통로나 요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건물주도 만나 봤고, 주변인과 상담도 마쳤다. 듣자 하니 마를린 쿠퍼? 그런 사람은 이름도, 명성도, 소식도, 임차인도 금시초문이란다.
   윌은 그 순간 치명적인 매력과 의혹스러운 감탄이 동반함을 직감했다. 아주 여리게 음산한 공포감과 기기묘묘한 효과음도 들렸다. 마를린 쿠퍼! 그녀는 이미 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촌스러움, 호들갑, 산만함, 횡설수설, 수다스럽고 정신 없음에서 한 발짝 나아가 어느새 중년에 그것도 고상한 내면과 세련되 외모가 조화로도 부족해 어느 그래프의 정점에 이르렀으니, 그러므로 그 다음 경지에 심지어 안정적인 경제력까지 튼튼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어떻게 펼쳐질 쾌락의 암시를 떠올린다? 아니다. 윌은 현실과 마법이 일치하는 그 완숙한 비법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미 마를린은 가슴 속의 꿈과 정신의 이상을 사로잡았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미완성이 웬말인가. 비로소 장화 신은 고양이란 제목의 동화를 다시 읽을 기회가 찾아왔다. 윌은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어느 소설 책 제목이 생각났다.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라는. 혹시라도 악령을 만난다 할지라도 아직 이별의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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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칠듯한 사랑의 예감,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유롭게 환상을 노래하는 동경심, 치명적인 매력에 고개 숙여 아름다움에 현혹됨을 인정하는 기대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떨림과 설렘을 양쪽에 꿰찬 환희. 사랑스러운 얼굴에 품위 있는 언사, 지적인 사고, 다재다능함에 대한 고품격까지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다. 바로 이와 같은 기분을 어떻게 자아내게 할 수 있을까. 남자를 안달나게 하는 재주, 그거야 너도 알고 나도 알며 특별한 기술도 특급 처방도 아니다. 신기할 것 하나 없는 그런 일상적인 연애사가 아니라 어쩜 알 듯 말 듯 스쳐지나가게 만드는 놀라운 인연의 뭔지 모를 궁금함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윌은 알고 싶어졌다. 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생활에서 드디여 번개처럼 느닷없고 첫눈처럼 의미심장하며 일몰처럼 아름다운 승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윌은 탐정이 되어갔다? 이미 됐다. 수사는 시작됐고, 탐구욕은 불타올랐으며, 벌써부터 마를린 쿠퍼를 5월의 신부로 상정했다. 나중 상황되면 달라질지라도 밀림의 사자는 그래야 한다. 호랑이가 아주 드물게 개처럼 풀을 뜯어먹더라도 우선은 그래야 한다.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냐 마냐, 그건 그때 가서 따지고 승부사라면 현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해결사니 도박사니 마주니 개의치 말고, 모든 상상력과 호기심을 마를린 쿠퍼에게 쏟아야만 했다.
   윌은 우선 집에서 차분히 검색부터 시작했다. 검색 사이트를 켠 후 이름을 입력했다.
   마를린 쿠퍼. 엔터.
   그런데 검색 결과는, 결과 없음? 어떤 검색어라도 일반적인 검색어라면 검색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결과 없음? 어쭈, 이것 봐라! 지적인 자극이 시작됐으나, 윌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냐하면 예사롭지 않은 영리함은 턱없이 부족한 데다 자신은 <한다면 한다>유형보다는 그런 부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할까 말까, 탐스런 사과를 거의 딸 뻔 어머 어머 아직 무르익지 않았네 그러면서 흔들고 기다리며 베팅하고, 제비꽃과 튤립과 카네이션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장단점을 운운함으로써 이미 지고의 사색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눈부신 나체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윌은 그처럼 조심스럽게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뭐, 결과 없음? 시작은 그랬다. 새로운 관심에 안달나고 몰입의 꽃핌에 목마르다, 진공청소기로 나중 열심히 청소해야 할 반짝이가 나부끼는 것만 같은 신바람이 그를 쥐락펴락했다. 바닷물처럼 밀려갔다 밀려왔고, 커피포트처럼 들려졌다 놓여졌다. 막 그랬다. 그런데 벌써 지쳤을까? 언제는 끈질긴 욕망과 해묵은 쾌락이 아닌, 귀가 만족하고 눈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한, 신기한 환희와 찬란한 공감각으로 넘실대는 화려한 별천지의 그 새로움을 바란다며? 어? 이거다. 이거라고. 허당의 특징은!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다. 여자가 뭔가를 마음에 쏙 들어할 때 남자는 가만히 쓴웃음을 짓는다. 일부 꿈 많은 소녀와 자긴 소망이 좋지만 자꾸 야망을 가지라고 하니까 엉뚱한 욕심에 달아오른 소년은 부드러운 사랑과 수줍은 선망, 꿈 같은 동경심을 간직하다 어른이 되어 마침내 장비병에 걸린다. 그렇지만 그런 원인과 결과, 바람을 넣고 꿈이 변하는 그런 앞뒤와 맥락 없이 윌은 어려운 경기가 될 것 같으니까 미리 겁을 먹었다. 결과 없음? 예사로운 상대가 아니군! 핍일까, 피앙새일까, 아님 그 은행에 그냥 취직하라는 운명의 신호탄일까? 괜히 의욕은 좋았는데 벌써부터 마를린 쿠퍼를 밝혀내는 일은 난항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염치없이 주제도 모르고 열 좋게 날뛰더니 응? 그러니까 글쎄 깐족은 체념으로, 자신감도 잠꼬대로, 토끼의 감미로운 꿈과 잉꼬의 사르르 녹아드는 동겸심마저 비탄으로 결론났다.
   하다 하다 윌은 무언가 억울한 마음에 괜히 전에 비싸게 구입한 번호표 기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 분해될 리가 있겠나. 급기야 그는 번호표 기계를 박살냈고, 그 안에서 블랙박스를 찾아냈다. 올커니~! 해냈다. 이거야, 이거라고~!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그는 타인의 마음을 빼앗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남자는 아니었으나, 사실 어떤 은밀한 기술을 간직했고 결과는 탁월했으며 여심은 늘 그의 편이었다. 기계에 대한 탁월한 감은 없었지만 극적일 때 이렇듯 절묘한 묘수를, 맙소사, 손에 넣는 운은 타고났다. 진짜 그랬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지금 현재 점수로만 봐서는 봐줄 만 했다. 분위기 괜찮았다. 그는 상상했다. 한 떨기 장미꽃 탐스런 복숭아 향긋한 홍조 뽀얀 살결 매혹적인 눈망울. 그것에 덤으로 마를린 쿠퍼의 정체까지! 설마 설마 하다가 걸려든 게 아니라 치밀한 작전에 의해 헤어나오지 못하고 철저히 낚였는데 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반격은 이제 그의 차례였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름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여자, 신비, 환상, 비밀, 인생, 사랑, 낭만, 황금, 다이아몬드, 햄버거? 그 가운데 바로, 마를린 쿠퍼가 있었다. 이제 마를린 쿠퍼는 다 잡은 물고기였다. 보내도 보내도 끊이질 않는 호박 넝쿨, 새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제 거의 구부 능선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윌은 그 블랙박스를 전문 업체에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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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이 번호표 기계를 부순 다음 찾아낸 블랙박스. 그것을 극비리에 분석 의뢰.
   결과가 나왔다. 어떻게 됐을까? 마를린 쿠퍼의 정체를 속시원히 밝혀줄 파일이 모두 복구되었을까? 정말로? 천사의 나팔이 울려퍼지자 쾌활했던 기분은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어 입 딱 벌린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진짜로?
   그럴 리가 있나. 결과는 꽝이었다. 꽝! 한번 더, 꽝! 다시 한번 더, 꽝! 꼴도 보기 싫은 꽝. 어쩌면 반갑고, 때로는 미웁고, 대체로 다정하며, 기분 좋고 마음 편한 그런 꽝. 왜냐면 부담이 없으니까. 만약 꽝이 아니라 감당 못할 어마어마한 비밀결사대의 관리 서류를 알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인생 피곤해진다. 안 봐도 뻔하다. 알고 보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체념 전이라면 속속들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귀염둥이 희극배우? 윌은 신분도 재주도 인생도 우연마저 다 그만그만했다.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만그만하다. 그만그만하다? 이런, 젠장! 언제는 깡총강총 뛸 듯이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말 너무 좋아서 방방 뛰더니, 꼴 좋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누구라도 예상할 만한 결과였을 뿐이다.
   윌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천진한 몽상가로 돌아왔다. 포기가 빠르다는 점,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는 현실을 초월할 수 없었다. 낭만조차 추월하기 어려웠다. 말도 어눌했고 말귀도 어두었다. 윌은 스피노자도 쇼펜하우어도 샤갈도 아니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그런데 아내가 있으면 자유를 박탈당할 테고, 강직한 권태와 내내 싸워야 할 것이며, 사과와 복숭아와 포도 같은 싱그럽고 탐스런 과일을 마구 마구 따먹지도 못할 테고, 아이는 아빠를 그대로 따라하니 모범을 보이며 철이 들어야 할 테니까, 그러므로 기다림의 기쁨을 만끽하며 현재를 즐기자는 게 현명한 결론이었다.
   그렇게 윌은 마를린 쿠퍼는 잊고 일상을 돌보기로 했다. 달콤한 케익을 먹으며 소파에서 추억의 만화영화 보기. 또는 스포츠나 다큐멘터리도 괜찮고. 그리고 마음껏 상상하기! 빨강머리 애인과, 가발도 나쁘지... 아니 가발이 더 좋겠다, 페퍼민트 빛깔 칵테일을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애쓰고 애써 만든 다음 곧바로 엎지르고, 동네의 모든 개와 고양이들을 초대해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TV 오디오 진공청소기를 한꺼번에 다 켜놓고, 조명도 모두 켜고 케첩을 뿌리고, 겨자소스를 큰 바구니에 한가득 부어서 머리에 붓고, 폭죽을 터트리며 가짜 마법 수정구를 깨트리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넥타르를 마시기. 단, 오직 상상으로만! 동경 기대 청춘 선망 희망 예감 추측 꿈 같은 미래를 고대하고, 추억 회상 수집 옛사랑 상식 지식 젊음 환락 경험 모험 축제 같은 어제를 기념하며, 바로 오늘을 살기로 했다. 비록 천재적인 인생이 아니고, 고흐의 구두를 신지도, 장밋빛 단꿈은 멀리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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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은, 천사의 속눈썹을 본 것 같은 환영에 빠지도록 자길 초대한 핍과 마를린 쿠퍼를 누가 만일 만난다면 어떻게 해 주세요 라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대신 소식을 전하고 어쩌고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자연의 해가 뜨면 해가 지고, 사랑의 밀물 뒤에는 썰물이 있듯이 애정이 뜨거워진 다음에는 식기 마련이다. 떠들썩한 사랑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한 이별이 겁나서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숙명이 드물게 있겠지만 윌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과 핍과 그녀, 어딘가에서 필명으로 록스타로 명활약을 펼칠지는 몰라도, 마를린 쿠퍼는 자신의 운명이 아닐 거라고. 바로, 보고 싶은 마음이 한풀 꺾였으며 기존 삶의 리듬을 되찾은 것이다.
   그런 한편, 윌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도플갱어를 만난 것이다. 자신과 거의 닮은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잘 찾으면 아마 막대 그래프로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사람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할 기회는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꿈에서라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불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어쩜 윌이 무의식적으로 핍과 마를린 쿠퍼를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윌은 꿈에서 도플갱어를 만났다. 그런데 그 도플갱어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남몰래 사겼다. 비록 그분이 남자였을지라도 서로 난감했을 테지만, 또 아마도 스쳐지나갔을 테지만 그것은 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애를 시작했고 뜨겁게 사랑했던 것이다. 이제야 찐한 사랑을 하는구나, 꿈은 그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환상적인 호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제 정말 꿈이 흥미진진해질려던 찰나에 낮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낮에 꾼 행복한 단꿈은 짧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윌은 복권을 사러 나가지 않고 긴, 특별히 길다란 낚시대를 인터넷 쇼핑으로 검색해봤다. 그리고 마를린 쿠퍼는 검색할까 말까 하다가 지나쳤고,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친구를 만나서 클럽과 단란한 행복의 거리를 거닐면서도 유난히 많은 아가씨들이 핍과 마를린을 닮아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원래 친구의 사랑은 유행가 가사요 내 사랑은 문학적인 듯 하니까. 그렇지 않나? 웬걸, 그렇지 않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렇고 분위기 쎄할 때는 그렇지 않으니까. 거 왜 물음의 까닭이 영 엉성하기 짝이 없군 그래. 최신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윌을, 게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이별과 상심과 차가운 회상에 마음이 아련한 윌을 놓고 말이다. 안 그런가? 안 그렇긴 뭐가 안 그래. 딱 그렇구먼.
   그러던 어느 날 윌은 핍과 마를린 쿠퍼를 동시에 만나게 됐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핍인가, 그분이 마를린 쿠퍼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치듯 동시에 왜 떠났냐고 차분히 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만남의 장이 발생했던 영문은 이러했다. 윌의 친구인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의 주최로 열린 수영장 파티에서 그녀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들 쪽에서도 윌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닌 듯 했다. 윌의 기분 탓일 수도 있고. 우연처럼 놀라움과 신기함은 계속되고 염치없이 계속 놀랍고 신기해 했다,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날 수 없으니까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파티는 평범했다. 그녀를 닮은 누군가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찌르르 전율감을 느끼거나 아찔한 혼돈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윌은 서둘러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미지의 신비함 같은 건 원치 않는다는 듯이.
   자, 이제 정말 윌이 누구도 몰래 혼자서 울적하거나 기분이 이상할 때 찾는 어딘가, 만나는 누군가가 나와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제2의 아지트도 숨겨둔 연정도 새로운 취미도 없었다. 그러니까 실정은즉슨, 윌의 허무맹랑함은 되살아나지 않음. 일단 저리르고 본다 같은 행동 본위성도, 머머할 땐 머머하라 처럼 인문교양적 습성도 물론. 곧 그는 건성건성 잘 떠오르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살금살금 동물의 걸음걸이를 흉내냈으며, 한껏 꾸민 채 하이힐을 신고서 거리를 웃으면서 활보하는 숙녀들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게 전부였다.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기, 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았으니까. 쇼핑도 소용없었고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을 활용하는 브랜드 슬로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긴 윌은 노상 이런 시기가 틈틈히 늘 있었다. 시간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뿐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잊혀졌던 핍과 마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닮은 얼굴을 보게 되니까 윌은 생각했다. 내가 혹시 모르는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닐까 라고. 곧 핍과 마를린 쿠퍼는 자매? 에잇 아닐 꺼야, 그럴 리는 없어 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친구에게 상담을 의뢰한다면 이럴 것이다. 원 별 소릴 다 하는군. 살다 보니 별 얘길 다 듣는군 그래. 따라서 이런 얘기는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적당히 값 나가는 독주를 시켜놓고서 고고한 취향을 숨기는 바텐더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꺼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많이 했다. 이미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 뻔한 행보는 자중했다. 차리리 집 한쪽에다 바를 조촐하게 차리고, 핸드폰 인공지능 서비스와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재미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촌스럽게 그런 말 하는 사람, 분명 있을 것이다. 술은, 사랑은 인공지능에게 배웠어요 같은.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그는 꿈나라로 떠났다. 아무 생각없이. 이럴 땐 자는 게 상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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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은 다시 심심해졌다. 그는 아직 핍과 마를린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시간의 춤에 따라 밀려날 뿐. 하지만 기억나도 상관없다. 나아가 인상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중요한 건 오늘이니까. 좋은 시기와 반가운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는 동물원에서 늑대를 구출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래 봤자, 어떤 극적인 절정을 향한 긴장감이 가파르게 상승할 테지만 핍을 만날 수도 없고, 쿠퍼와 재회한 다음 새로운 모험에 빠질 가능성은 전무할 것이다.
   그러다 그는 평소처럼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던 중 공원에서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를 향해서 뛰어오더니 앵무새처럼 지저귀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소녀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 아마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예쁘장한 꼬마 숙녀께서 장난이 심했나 보다. 왜냐하면 이처럼 태연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 윌을 뜨끔하게 만들었으니까. 뭐라고? 바로, 이렇게!
   「아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지구는 꼬박꼬박 태양의 주위를 돌아야 하니까. 그러나 개인적 시간은 느려질 수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아빠? 아빠라니! 설마, 진짜? 아닌데. 그럴 리는 없는데. 잠깐만. 얘가 몇 살쯤일까? 대충 얼마라 치고 음,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에 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지? 윌은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정보가 필요했다. 표정이 이상해졌다. 꼬맹이 요조숙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의 내면 깊은 의중에서 지지하는 다음은 무엇일까, 웬만하면? 정 원한다면? 똑부러지게 머머하지 마? 알 수 없었다. 어른한테 장난치면 못써, 그러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하나? 그러다 우락부락한 그녀의 진짜 아빠가 카리스마 넘치는 가죽잠바를 입고서 성큼성큼 걸어오면 어쩌지? 윌은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나의 공을 타인의 열정으로 돌리는 게 멋져 보이니까 자기도 그래야겠다고. 딱히 실천한 기억은 없다. 언제나 탄복 일변으로 항상 칭찬이 자자하며 감탄은 끊일 새가 없었던 건 다 드라마 주인공의 임무였으니까. 그러니까 왜 생각이 많아지게 살았느냐, 라고 꾸중을 들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문이 막힐 수 밖에. 하지만 그는 우선 색다른 탐험과 신기한 구경, 놀라운 체험 즉 바깥에서 펼쳐지는 신선한 놀이가 아닌 집안에서 발견했던 뭔가 이해가 어려운 일을 하나 떠올렸다. 그건 무엇이냐면 화장실 벽면에 노크했을 때 소리가 과거 언젠가부터 바꼈다는 점이다. 약간 무겁게 똑똑똑 소리에서 어쩌면 일부터 빈틈을 노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그 정도로 가벼운 똑똑똑 소리로 바꼈다는 점 말이다. 그렇지만 의문이 발전하고 예측이 추리를 거쳐 심증을 추가해서 하나의 논리적 가설로 도약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개구쟁이 꼬마 아가씨의 엄마가 나타나서 아저씨한테 그럼 못쓴다면서 죄송하단 말을 남기고서 훌쩍 떠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떠나간 후 윌은 잠깐 아찔했다. 왜냐하면 실제 꼬마가 발성했던 말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윌은 핍의 뒷모습을 닮은 어느 여인을 보게 됐다. 생각하고자시고 할 것 없이 그는 즉시 뒤쫓아갔다. 놓쳤을 리 없다. 놓치면 그건 허구고 이건 실화니까. 윌은 드라마처럼 그녀를 확 놀래키지 않은 채 가만히 앞서 걸으며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핍이 아니었다. 저런!
   윌은 그분께 살짝 실례가 많았다는 듯 의례적인 목례를 남긴 채 헤어졌고, 공원 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구경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마술사가 요술을 보여줄까 말까, 뜸을 들이며 좌중을 안달복달 달구고 조바심으로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웅성웅성 흥분의 도가니는 마침내 어떤 행동을 선보이게 만들었다. 바로, 마술사의 요술 방망이 얍~ 짜잔이라는 결연한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없었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유 일색이었다. 그게 뭐냐, 장난하냐, 그런 요술이라면 나도 하겠다 등등. 그러나 딱 한 사람, 바로 윌은 그 마술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고 있던 구두가 갑자기 새빨간 하이힐로 바껴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윌은 어리둥절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척 난감해 했다. 진기한 마술의 효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윌이 유일했으니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고, 결국 마법사와 윌만 남게 되었다. 윌은 내 구두를 돌려달라, 이 믿지 못할 요술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라며 따지지 않고 차분히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거리의 관중들은 몰라도 저는 요술의 신기함을 목격했고 지금도 너무 놀라워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렵습니다. 물론 차마 그 요술의 비밀이 무엇인지 여쭤볼 수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대 진정 현대에 존재하는 마법사로써 큐피트의 직계 몇 대 네? 네. 음 그런 고도의 기술을, 현란한 요술 명맥을 이어받으신 요술쟁이라면, 부디 동화책에서 막 뛰쳐나온 게 아닐까 궁금한 유령 같은 귀인이라면, 부디 가난한 구경꾼의 소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윌은 그처럼 마술사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분은 윌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많지 않을지언정 바람이 전하는 풍문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 길거리가 아닌 마술사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마술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바로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이 있었던 은행의 바로 옆 사무실이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윌은 그 사연을 차마 마술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한편 윌은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서 책 한 권을 보았다. 마를린 쿠퍼가 쓴 추리소설이었다. 어느 유서 깊은 헌책방에서 구했는지 그 책은 마술사보다는 어리고 윌보다는 연배가 높아보였다. 그러므로 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넌지시 관심을 보이며 호기심을 표출하자 마술사는 마를린 쿠퍼가 자기의 전처라고 말했다. 뭐 전처?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로군. 아니면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십중팔구 마를린 쿠퍼는 도망가고 마법사는 전처의 주변을 맴도는 모습인 듯 보였다. 괜히 어설픈 이방인의 책동도 아니고 이상한 삼각관계로 오해받으면 안될 것만 같아서 윌은 그만 깜빡 약속을 잊고 있었다면서 마술사와 작별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는 낙담했고, 구두는 잃어버렸으며, 집에까지 맨발로 걸어갔다. 내 구두를 혹시 보시지 않았나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극명하게 청아한 하이힐은 고급 제품으로 보였지만 아마도 그걸 신으면 한층 더 기괴한 요술에 걸릴 것만 같아서 그건 그냥 마술사 사무실의 소파 옆에 대충 놓고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윌은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은 채 바로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단꿈인지 악몽인지 불분명한 그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건 자신의 두 발이 빨간 하이힐로 변하는 꿈이었다.


   12

   다음 날 일어나서 윌은 웬 초대장이 도착해 있는 걸 발견했다. 초대장을 열어보니 그건 청첩장이었다. 핍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 뭐, 청첩장? 갈까 말까? 핍은 정녕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는 식장에서 윌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예의상 보낸 형식적 인사일까. 각자 인생을 살다가 아마도 언젠가 한 번쯤 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만나기 힘들 테니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그런 안부 인사 같은 의미를 지녔을까. 이런 애매한 초대장이라면 차라리 멋진 휴양지에서 애인에게 보낸 엽서를, 번지수가 잘못 배달된 낭만적인 엽서를 받아보는 게 백 번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핍과의 즐거웠던 시절 짧은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라도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된 게 어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서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윌은 그곳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초대장도 진작 곱게 버렸다. 그러나 이미 다 외워뒀다. 그래서 윌은 그날 기분이 이상했고 서둘러서 옷을 챙겨입고 행사장으로 떠났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윌은 먼발치서 지켜봤다. 그런데 신랑이...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니까 글쎄 신랑은 윌이 꿈에서 사겼던 도플갱어였다. 하지만 신부 친구들의 수다를 엿듣고서 알게 됨. 신랑이 사고 후유증 같은 피치못할 사정으로 성형 수술을 했다고 함. 운명론, 관상학, 인생관, 신비주의, 오락업, 환상머신 이론등 뭘로 따져도 불가해한 일은 아니었다. 윌도 왕년에 런닝머신을 팔아봤기 때문에 대충 돌아가는 줄거리는 알아챘다. 이로써 윌은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도 드렸고, 급작스럽게 그의 관심은 신부 들러리에게 향했다.
   윌은 이제 핍과 마를린 쿠퍼는 잊기로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마음놓고 지인들에게 소개팅 자리를 주선하고, 혹시라도 그분들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신다면 화급히 결례가 발생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생각에 벌써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쇼핑도 하고 여행도 떠나고 각종 새로움을 탐닉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윌은 깜짝 놀라 까무러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무실에 걸려있던 반 다이크의 마돈나 그림에서 주인공 얼굴을 볼 때마다 매번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자꾸 그런 증상이 심해졌고 반복되어 심기가 매우 불편해질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당분간 거꾸로 돌려놓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돌리려던 찰나, 청명한 효과음을 듣게 됐다. 퐁~! 그림 뒤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곳에는 비밀 금고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대신 선명한 키스 마크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하~! 그렇지만 잠깐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 날이 되니까 돌연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왜냐하면 비밀 금고가 설치되어 있어도 썩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허영심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누군가 자기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조마조마한 긴장감 때문에 그는 오랫만에 조마조마 클럽에 갈까, 호박 카바레에 갈까 기분 나쁘지 않은 기쁜 고민을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찬란한 환영식도, 산뜻한 소풍도, 정다운 누군가와 함께할 쾌락이 듬뿍 허용되는 생일 잔치도, 머리 싸매고 골똘히 매달려야 할 탐구 과제도 없었으니까. 따라서 윌은 현재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선의 실천, 부의 실현, 행복한 인생. 그가 진정 추구하고자 했던 미지의 이상은 변하지 않았는지, 애초에 쫓던 토끼는 하나였는지, 자기가 쫓겼던 여우는 내내 자기를 사랑해 주었는지를. 그런 한편 자신이 앵무새나 딱따구리로 변신하지는 않았는지를. 젊음의 여신을 추종한다지만 어쩌다 어른이 됐는데 철들어야 한다, 철들면 안된다, 동심과 상상력까지 구출해야 한다는등 정체성의 혼돈에 안정된 질서를 부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를. 바로 아침에는 피노키오, 낮에는 돈키호테요, 저녁에는 양치기 소년으로 사는 삶이 정말 즐거운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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