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108

from 소설 2017. 11. 15. 23:49

   1

   나는 이대로 순순히 늙지 않겠다는 일종의 결의 때문에 입으면 늙지 않는다는 점퍼를 샀다. 내가 품은 의지는 혹시 모종의 예민한 감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갖은 미사여구로, 젊은이가 열광하며 미의 여신마저 광분하게 만든다는 둥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그런데 멋진 모델이 그 옷을 입고 방대한 추종자를 거느린 듯한, 뭐라고나 할까, 약간 건방진 표정을 짓는 순간 나도 모르게 덜컥 뻔한 상술에 그만 맥없이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옷을 입었더니 글쎄 나는 젊어졌을까? 잘도 그러겠다. 광고를 신뢰하고 사랑을 맹신한다면 영원한 장난꾸러기요 순진한 개구쟁이일 뿐이다. 거울이 잘못된 걸까 뭐가 문제인 걸까. 잘 가라 내 청춘 이라며 쿨하게 노래하지도, 어느 멋진 명언을 듣고 그런 말이라면 나라도 하겠다며 큰소리치지도, 나이 먹고 새로운 취미에 도전한답시고 피카소풍 셔츠를 입고서 누드화를 그릴 수 있는 진취적인 배짱이 없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무모한 청춘의 방황을 모방하고, 유명한 예술을 베끼며, 끊임없이 사모하도록 뭇남성들을 유혹하는 여심을 훔쳐야만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아니지, 못할 거 없지. 내가 못할 꺼 같나 라고 지킬을 제치고 하이드가 나서면 되니까. 최소한 시도는 할 수 있다. 열은 좋으니까. 하나 난 주의가 산만해서 금새 딴청 피우기 일쑤다. 의욕을 상실했고 자주 무기력했으며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마도 시간이라는 요술에 걸려서 한심한 허풍꾼이 되어버렸나 보다. 즐겁고 기쁘고 재미있는 삶! 바로 그 행복의 신기루에 거의, 정말 거의 깃발을 꼿을 뻔 그럴 뻔 하다가 미끄러지는 게 다, 결정적으로, 내가 가난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핑계다. 게다가 이 세상에 1주일에 1번 운명적으로 태어날까 말까 라며 칭송 받는 신동처럼 매우 드물게 그래, 꾀죄죄한 내 행색에 걸맞지 않도록 아주 드물게 예술적 착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때문에 피장파장이다. 따라서 마음의 여유를 찾았기 때문일까? 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획기적인 묘안을 찾아냈다.
   그렇다. 언제까지 바카스로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이제는 큐피트가 될 차례다. 그럴 때도 됐다. 사랑도 했고 여자도 안다. 예술과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장비 검색하는 거도 재미없고, 젊음의 거리를 나 혼자 나돌아다니는 거도 피곤하다. 골프장도 자주 가면 재미없다. 쇼핑은 귀찮고 어린애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도 없다. 드라마도 많이 봤고, 책도 너무 많이 읽으면 안된다. 이유는 불문에 부치자. 게임도 싫증났고 운동에도 흥미를 잃어버렸다. 마초들과 어울리기? 허당 중의 상허당들? 재밌기는 하지만 주색이라면 이제 신물이 난다. 심지어 거짓말조차 재미없다. 누누히 말했듯이 이젠 바카스가 아니라 큐피트가 되어야 한다. 외계인이 활약하는 꽤 괜찮은 영화는 가뭄에 콩 나듯이 발표된다. 그렇다고 내가 좀비가 될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보자면 그러니까 착한 일이 하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동네 소식을 말하자면 크게 변한 건 없다. 다만 친한 친구들만 매번 바뀐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지만 예술가의 생애와 특별한 관계없이 돌아가는 처지가 그렇게 됐다. 곧 친한 친구들이 자주 바꼈다. 왜냐하면 동네에서 말이 통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자주 떠나고, 또 새롭게 이사를 오기 때문이다. 내 의도와는 별개로 순환률이 좋았던 거다. 마을이 무슨 카페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녀석들은 도시로 떠나서 출세하면 되고,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우애를 쌓고 예술적 영감의 소재를 벌꿀처럼 단물 빨아먹듯이 쪽쪽 빨아먹는, 거 어째 표현이 좀 그렇다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처럼 어쩌다 돌아가는 실정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시간 여행, 즉 상대성 이론의 극적 전개에 관한 영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우주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지구에 돌아왔더니 난 그대로인데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 손주가 꼬부랑 할머니가 된 이야기. 둘째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간 여행이고, 셋째는 시간이 정지되어 세상 모든 만물이 정지됐지만 나만 예외니까 나는 시간에 따라서 훌쩍 커서 어른이 되고, 어떤 이유 때문인지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서, 머머 2세 머머 주니어가 그 머머와 같아지거나 어린시절 풋사랑과 재회해도 옛날처럼 절친하게 지내기 어렵다는 소재. 여기서 나는 이상하게 첫 번째 은하계 여행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친하게 어울리는 친구들은 남자로는 델과 존과 톰, 여자로는 리지와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틴이다. 여기서 애인이나 친애하는 이성친구가 따로 모두 있었는데 톰과 리지만 아직이었다. 그걸 모른 체 하고서 나만 잘 먹고 잘 살 수는 없었다. 누가 사랑의 다리를 놓아야 할까? 누가 해도 해야 했다. 그 어려운 역할을 내가 맡기로 결심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일을 바랬을 뿐. 바쿠스에서 큐피트로 변신을 시도하고 싶었으니까. 획기적인 묘안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걸 말했던 것이다.


   2

   남자는 남자가 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한다 라는 격언이 있다. 그건 사랑의 철학도 아니고 모범적 교훈도 못된다. 그건 진리도 뭣도 아니고, 그냥 웃자고 말하며 전해지는 경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그럼 여자는 남자를 모를까? 알긴 아는데 알아도 잘 믿고, 흔히 속는 듯한 측면이 없잖아 있다고도 한다. 왜냐하면 낭만은 원래 가짜 이상(理想)은 아닌가 그렇듯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그래서 저런 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인생도 그렇다. 피노키오가 사자로, 백설공주가 호랑이로 변하는 게 인생 아닐까? 안델센 동화책과 최신 볼보 자동차가 어디 공짜냔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나 섭섭한 건 결코 아니다. 장엄한 자연과 신비로운 세상사는 소망에 실패하고 대망에 절망하더라도 소소한 즐거움과 가슴 찡한 행복을 그대에게 선사하니까. 따라서 엄마라는 낱말과 '아빠 사랑해' 라는 동심 외에 웃기는 일설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다. 푸는 사람 입장에서는 등에 식은땀 쭉 나고 거리의 마법사야 체념도, 가난도, 무반응마저 모두 감수한다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삼류의 초라함과 절대 놓칠 수 없는 그 뒷이야기의 기쁨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자. 왜냐하면 유감스럽고 거북하며 뜨뜻미지근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물밑 속담을 확인하고, 기쁜 우리 젊음의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니까. 그건 이거다. 딸아, 아빠 빼고 모든 남자는 늑대이니라! 흐흠. 아빠만 빼고!
   뭐 어쨌든 나는 톰과 리지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톰과 더욱 더 친하게 지내면서 리지를 한껏 띄우는 작전에 들어갔다. 내가 리지에게 접근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리지가 만약 날 좋아하게 되면 그땐 정말 어떡하냐 라는 부작용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톰과의 친교를 더더욱 신경썼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미 시작됐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1인칭 해설? 뭐 일단 지켜보자. 발단은 그렇다쳐도 전개는 다큐멘터리에, 그 다음에 대체 절정이 올지 안 올지, 장르가 뭘로 바뀔지를.
   좌우지간, 인물 관계도가 어정쩡해졌다. 우정의 변색은 아니나 친구들과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아닌 척 모른 척 관심없는 척, 큐피트네 뭐네 그러더니 글쎄, 사랑을 가로채다? 나는 확실치도 않은 추정과 오해 살지도 모르는 비판을 감수하고서 톰과 친하게 지내는 생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왠지 톰이 내 새로운 단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왜 말 안 했어, 나 여자라고!」
   「오빠들이 안 물어봤잖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던데? 그리고 우리가 무슨 시트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재밌고 웃기고, 막 많이 친한 건 아니지 않나? 난 처음부터 여자였고, 우리는 파티도 하고 겉으로 꽤 튼튼한 우정으로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알고 보면 모두 각자 개인전을 펼치고 있는 것일 뿐이라구. 서로 자세히는 상대를 잘 모르잖아. 아마 깊이 알고 싶어하지 않을 걸.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다, 그런 말을 간혹 하더라도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다고 해.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우정도 사랑도 아니지. 안 그래?」
   「톰. 넌 정말 못 말리는 톰보이구나. 네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그렇지만 어쨌든 난 네게 리지를, 리지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걔 꽤 괜찮은 여자거든. 나도 물론 여자를 좋아하지만, 어느 정도인가는 밝힐 수 없고, 음 그래. 나도 리지가 솔직히 욕심나. 리지를 보고 있으면 막 이상한 상상이 돼. 하지만 그러면 안된다고 최면을 걸고 꿈을 깨지. 무엇보다 리지는, 너한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 오, 들린다. 글쎄, 누가 아니래? 라고.」
   「그거 환청이야? 곧 있으면 UFO도 보이겠네? 오빠 외계인이구나. 아니면 흡혈귄가?」
   「아무튼 천국을 뒤흔드는 사랑을 해 보라고 그럴싸한 찬미가를 불러줄려고 했더니만 공치사는 벌써 초장에 꽝으로 결론났군. 항상 그렇긴 하지만 이번엔 뭔가 특별했는데. 하긴 언제는 안 특별했나. 나 혼자 뭣도 모르고 소설 쓰면서 내가 큐피트라도 된 것 마냥 좋아했는데. 하지만 과감히 고백해줘서 고마워, 톰.」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놀이동산에나 갔다 오자. 원래 드라마에 보면 전학생은 한 명이잖아. 그런데 현실을 봐 봐. 다 신흥 세력이고 오빠 혼자만 시골 촌뜨기라고. 오빠를 꼭 놀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정이 그렇지 않냐는 말이야. 안 그래? 그런다고 우거지상 쓰지 말고. 내가 보니 오빠는 내내 혼자 놀았던 거 같은데. 동물로 비유하자면 오빠는 카멜레온 같은 사람인데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취향을 숨겨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애타는 애정 초조한 사랑, 우리 그런 거 잊자. 지금은 말끔히 잊어버리자. 사랑 노래 지겹지도 않니?」
   우린 그렇게 놀이동산으로 떠났다. 하지만 연인처럼 카메라 각도 나오게 운전석과 조수석에 다정히 자리잡지 않고, 각자 차를 몰고 갔다. 톰의 차는 뚜껑을 뗀 포르쉐 914-6 GT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응해서 흰 셔츠에 연분홍색 바탕에 토끼와 돌고래 문양이 멋진 넥타이를, 그리고 베이지색 투버튼 수트를 차려입었다. 바이킹아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우리는 진짜로 그렇게 외치면서 도시 근교의 놀이공원으로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리지였다. 뜬금없는 리지의 출연! 발랄한 에로 로드 무비가 될 뻔 했는데, 훼방꾼이 나타나서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장르는 어정쩡한 청춘 로맨스로 돌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꽁한 남자가 아니다. 맹꽁이보다는 차라리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가 낫다. 따라서 모질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왜 따라와? 라고!
   그건 그렇고 리지의 차도 뚜껑이 없었다. 나는 커피포트가 되어 차분했던 평상심은 뚜껑이 열렸고 삑삑! 영화에 나오는 폭주기관차인지 뭔지 막 뱃고동 소리처럼 코에서 귀에서 수증기가 분출됐다. 하긴 리지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저 인간이 톰을 내게 소개시켜 주는 척 하다가 딴 맘 먹는 거 같으니까 직접 나섰다는 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리지는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는 싫었으니까.


   3

   나와 톰의 여행에 리지가 동참했다. 하지만 불청객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리지는 그리 흠 잡을 데가 없었으니까. 사랑은 일기예보 같은 것일까? 원래는 톰과 리지를 사랑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나는 의도치 않게 두 여자를 양쪽에 포진시키고 말았다. 사랑은 따로 있고 두 여인의 미래를 예언하는 기행을 여보란 듯 이어갈까? 그건 그냥 궁금해 하는 이도 없고, 풍설 축에도 못 드는 날개 달린 탐욕일 뿐, 꾀보의 의타심도 괴물의 파릇파릇한 선망도 아닐 것이다. 시작은 그랬다. 새로운 여자와 청순한 사랑을, 이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다 함께 하이틴 드라마를 즐겨보던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아무튼 놀이공원은 그저 그랬다. 썩 화려하지도, 꽤 황홀하지도, 자못 신비롭지도, 군말 필요없이 막 내내 재밌지도 않았다. 늙었기 때문일까? 응석은! 헛기침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것도 아주 크게. 왜 재미없었냐면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꼬마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냐 아니냐, 아무래도 전자에 가깝기 때문일까 아직 철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너무 일찍 조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신 뿐만이 아니다. 의무 방어전을 일찍 경험하신 분들의 인생 철학 역시 매사에 신중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젊다는 게 뭔가. 좌충우돌이고 우왕좌왕이며, 열 남자 마다하는 여자는 없다더라-다. 아. 농담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놀만큼 놀고 거닐만큼 거닐었기 때문에 놀이공원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거기서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랬다.
   「오빠. 여자의 마음을 알아? 내가 듣기론 오빠가 사람의 마음을 무척 잘 읽는다던데. 혹시 내가 잘못 들었을까? 아닐까? 시시각각 다른가, 사람에 따라서? 어디 한번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지 않을라요? 오 - 빠?」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을 말해달라고? 여자는 이런 대사를 좋아하지. 진중한 얘기를 글로 읽으라고 하면 그림이 있나 없나, 곧 만화냐 아니냐,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 있냐 없냐를 따지겠지만. 젊은 그대니까, 응?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니까 바쁘게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고, 고운 입술이 간질간질하니까 친구와 시시콜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수다를 나눠야 하겠지. 응, 여자니까. 여자는 그래. 그는, 아아 그녀는 알고 보니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 신기한 매력이 넘쳤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는 아 그녀는 단테의 순정보다 백 배는 더 아름다운 것만 같았다. 보티첼린지 뭔지와 단테의 순정이 대체 뭔 차이냐고!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행복한 사랑의 요술에 덥썩 빠져버렸다. 여기서 그는 리지가 합류하기 전의 톰이었고, 여기서 그녀는 리지가 합류할 찰나의 톰이었겠지, 아마? 아닐 수도 있고. 과장된 호들갑, 유치한 허풍, 성급한 허영심, 모방 기질, 흉내내고 싶은 본능, 뭐든지 일단 따라하고 보는 습관, 그걸 혹시 숙녀는 모두 다 가지신 건 아니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쩜 너무 무분별한 게 아닐까? (딱) 여자란 자고로 맹목적으로 사랑에 빠져드는 데 있어선 타고난 달인인 법. 다정해야 할 때 무심하고 조신해야 할 때 유쾌하다, 난 괜찮지만 남자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게 혹시 여자의 마음이지 않을까? 자, 그러니 이제 그만 후할지 박할지 점수를 알아맞춰볼까?」
   「리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난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어머, 너도? 어쩜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빠. 우린 여자지만 여자를 잘 몰라. 남자는 그러잖아.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왜일까? 오빠가 친절하게 여자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을래? 일단 나를 알아야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가를 알게 될 거 아냐. 남자를 알려면 먼저 여자를 알아야 한다, 그게 우리 지론이니까. 우린, 오빠, 믿어. 그치?」
   「여자? 여자와 연애? 단 몇 가지면 첫눈에 홀딱 반하는 그녀는, 뭐랄까, 금새 큰 사랑에 빠져들 수 밖에 없어. 그게 뭐냐고? 적으셔. 못 외우겠으면. 첫째, 아니 셀 필요도 없겠다. 너무 기니까. 자, 그녀가 좋아하는 풍요로움을 손꼽아볼까요? 낭만의 대명사인 회전목마, 빠질 수 없는 TV 연속극, 시선 집중 그래 뚜껑 없는 차, 연정의 상징인 선물, 모든 시선을 독차지하는 화사한 드레스는 어떠니? 소재는 참 좋은 면100이 최고니까 실크는 호불호가 있겠네. 그리고 어렵지 않은 소풍처럼 감미로운 추억 만들기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겠지. 여자가 웃긴 남자, 말 잘하고 잘생긴 남자를 싫어할까? 그윽한 음성은? 어머나,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예능에 잔재주에 못하는 게 그이는 정말 없네 그래? 적빈만 아니라면, 일부러 빈곤할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 다 한 거겠지. 그러니까 여자는 고양이냐고? 때로는 그렇고 때로는 아니지. 뭐니 뭐니 해도, 여자는 객관식으로 시작해서 인공지능으로 발전해야 해. 미술관과 오페라글라스! 일단 선택권을 주고서 치즈에 연결된 줄을 살살 응? 이렇게 살살 끌어당겨야만 해. 연애는 카우보이처럼 줄을 던지고 사랑은 치즈에 연결된 줄을 살살 끌어당겨야 하는 거라고. 그 둘의 차이가 대체 뭐냐고? 여보세요, 다 알면 재미없다네. 알면서! 그렇게 술술 당기면 저절로 오게 되어 있어. 왜? 아니, 어째서? 왜냐하면 남자는 톰 여자는 제리니까. 제일 중요한 게 그거야. 그녀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고상한 취향을 칭찬하며, 기대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발 빠른 예감을 실망시키지만 않으면 돼. 여자는 무엇보다 마음이 쉽게 동요되거든. 마음이 가만 있질 못한다고. 뒤쳐졌다 앞서갔다, 그 남자의 블로그 비밀번호는 몰라도 속마음은 알아낼려고 그이를 따라서 동기부여 강연회에 갔다가, 거기서 새로운 이상형을 보게 되면 마음은 벌써 꿈동산을 거닐며 신세계로 건너가지. 딱 눈치 봐서, 호박 나이트클럽이냐 우아한 신비 살롱이냐,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 답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라고. 단, 주의할 점은 그것. 둘 중 한 명일까, 험담하는 걸 자긴 좋아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여자일까. 누군가는 3년 동안 사랑을 하고 여러 새로움의 끝을 봤더라도 남자의 전망이 그만그만하면 주저하지 않고 한치의 미련없이 뒤돌아서는 사람, 그분은 바로 여자라네. 왜? 여자가 원래 그러니까. 사랑은 정녕 그런 거니까. 이때 여자는 무조건 떠나고 남자는 벙 찐다네. 이때 여자는 영원히 남남이 되고 남자는 슬픔으로 붕 뜬다고. 이때 남자는 마음 아파하며 찡그리고서 멋진 뒷모습을 남기지 못한 채 그녀를 보내겠지.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이미 미래로 떠난지 오래니까 남자와는 다르겠지. 하나의 사랑은 이미 끝났고, 지난 사랑의 미래는 더 이상 장밋빛이 아니며, 다른 새로운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데, 새처럼 자유로운 여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하나의 인생에 하나의 사랑은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게 너무 가혹한 걸 잘 알기 때문에 성장기 또는 전성기에 남달리 조숙했던 유부남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뻔한 거라구. 안 그래? 그분들 참 이상한 생활 대사를 능청스럽게 잘도 만드시지.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먹어도 사과는 계속 열린다느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긴 하지만 별은 하나가 아니라는 둥, 그처럼 말이야.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으면 속된 사랑이라고 왜 없겠나. 속되다 해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일편단심 사랑이 지독하기만 하며 아름답지 않다는 말도 아니라네. 어떤 여자는 사랑이 정말로 그렇게 끝나는구나? 그러면 남자는! 쳇! 진지한 얘기 말고 쉬운 걸 말해달라고? 언제는! 뭔 생각하시는지 이미 다 알겠네 글쎄. 나 원 참, 숙녀여! 성큼 말을 하시지 그랬나. 내가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오빠가 또 발동이 걸리면 눈치가 좀 없어지나봐. 달릴 땐 달려야 하니까 말이야. 열심히 몰두하면 한 번에 하나 밖에 못하니까 말이야. 너구리든 노루든 하나만 노려야지 둘 다 좇아 봐. 끝에 가서는 밀림의 치타와 표범과 사자 모두 손가락만 빨게 된다구. 너그러운 자네들이 이해하시게. 응? 쉽게 말해서 사랑 그리고 여자, 여자의 사랑이라... 한 단어로 말해 볼까? 케익. 쳄발로. 영화. 나비넥타이. 에르메스. 호텔. 말. 강아지. 인형... 많고도 많다네. 그걸 모두 논하다간 날 새겠네 그려.」
   그런데, 소풍 그리고 수다, 소풍 와서 수다가 다였을까? 그럴 리가 있나. 그 다음에 뭔가가 있었다. 톰이 그랬다.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라면서. 그녀는 못 말리는 궁금증과 노골적인 의구심을 부채질 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의 날 따라오라는 부름에 이어 우리는 놀이공원에서 제일 인기없는 축에 드는 귀신의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서 톰은 우릴 비밀 통로로 끌고 들어갔다. 비밀 통로가 어찌 그리 허술하게도 노출돼 있을 수 있냐, 라는 타당한 물음에 대한 해설은 풀어놓고 가자. 별 거 없다. 유령의 집 안에 있는 삐에로의 코를 비틀었고, 그렇게 버튼은 누른 셈이니 전면 거울은 비로소 특수한 문으로 작동한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든 그러지 않았든. 고대와 중세에 그처럼 지어진 건축물이 실제로 얼마나 많았는지를.
   우리는 그 통로를 쭉 따라가서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지금은 폐업한 어느 작은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와, 톰! 이런 길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어?」
   「오빠는 여기 오래 살았으니까 모든 게 새롭지 않잖아! 하지만 난? 난 모든 게 새롭다구. 그래서 발견했지. 내가 누구야? 스타는 아니지만 왕년에 꽤 바빴을지 또 모른다구. 저 놀이공원에 대한 토지대장을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어. 대충 지은지 족히 반 세기는 됐을 거라고. 오늘 우리가 걸었던 길에 대해서 처음부터 설계했고 당시 시공도 마쳤어. 그런데 인기가 없네? 있어도 그 다음이 없네? 그럼 잊혀지는 수 밖에. 그걸 만들었던 참여자들을 입단속 시킬 필요도 없이 반세기 지나면 어떻게 되겠어? 세상에 그런 일이, 로 되는 거야.」
   「톰과 나랑만 알고 있을려고 했는데, 오빠가 이제 비밀을 알았으니, 앞으로가 궁금해지는데. 호호호!」
   「헤헤. 오빠는 그랬어. 우리가 어리니까 귀엽다, 젊으니까 예쁘다, 청춘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라고 하지 않았어. 그 말은 뭐야? 젊음이 퇴색하면 보통의 엄마처럼, 그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줌마처럼 변할 거라고 예언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엄마 보고 싶다 아빠 사랑해, 그건 좋은데, 여성잡지1을 구독하는 우리가 여성잡지2에 대해서 친구끼리 맹렬하게 논쟁하시는 우리 엄마들처럼 될 것이다? 먼 미래에? 누구라고 말은 안하겠는데, 가만 보면, 꼭 그런 남자들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안 그러니, 리지?」
   「응 그럼. 오빠, 그럼 이제 2탄을 기대해. 알았지?」
   나는 얘네들이 이때부터 어딘가 모르게 엄청 부담스러워졌다. 이 험난한 고비를 어떻게 타개한다? 그 생각 밖엔 없었으니까.


   4

   나는 내일은 요리왕을 꿈꾸는 즉 지금은 약간 성의 없는 요리사 델과 식사를 했다. (델이 요리를 못한다 너 그럴려고 요리 배웠냐 라는 말을 얻어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친한 누군가가 가게에 놀러오면 요리를 해 주지 않고 배달음식을 주문할 정도로 뭐 어떻다는 걸 말함) 그런 다음 속 좁은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현자 존과 함께 칵테일을 마셨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운영하는 음악당에서 호프마이스터의 더블베이스 협주곡을 감상했다. 그 후 멀더의 카페에 들렸고, 노트북을 펼쳐서 글을 쓸까 했는데, 멀더가 쪽지를 전해주었다. 쪽지를 보니 리지의 글씨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빠 지금 톰에게 연락해 봐, 라고.
   나는 톰에게 연락했다. 톰은 우리 동네 공터에 있는 테트라포트로 즉시 가 보라고 했다. 그 테트라포트도 뭐랄까, 초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3대 명물이었다. 불가사의까지는 아닐 테지만 그렇게 우겨도 반론하기도 애매했다. 어떻게 그것이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또 그게 꼭 거기 있어야 하는 납득할 만한 영문을 추론할 수도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건 유치하긴 해도 불가사의인 게 맞다. 보통 해안가에 있는 테트라포트는 그 무게가 최소 수십 톤이고, 최대는 (대략) 최소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에 이르는 것까지 있다고 한다. 따라서 테트라포트는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그것을 설치할 지역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만드는 게 정석이다. 그럼 우리 동네가 옛날에 바다였다고? 빙하기 때 그걸 제조할 문명이 존재했다면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예측이다. 하긴 우리 동네의 2번째 명물인 나무 위에 걸쳐져 있는 소형 보트도 따지고 보면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아무튼 나는 톰이 말한 이유가 아마도 합리적일 것이라 예상했고, 하지만 별 일은 없을 거라 추측했으며, 실망하면 가만 두나 봐라 라면서 톰과 리지의 밀고를 과소평가했다. 설마 테트라포트가 공중에 붕 떠 있기라도 하겠어 라면서 나는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테트라포트는 진짜로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그것이다. 나는 느꼈다. 2탄치고는 너무 엉뚱하다고. 하지만 갑작스러운 선물인 건 분명하다고. 그리고 나는 들었다. 요한 밥티스트 반할의 바순 협주곡 F장조를. 뻔한 기대, 실망스런 예감을 뛰어넘어 신기한 환영, 놀라운 환청, 황홀한 환각, 그처럼 잠깐이나마 환상은 완성되었다. 보기 좋게 나는 대충 최소 10~20초에서 최대 1~2분 가량 그걸 믿었고, 놀랐고, 동시에 믿을 수 없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물건이 어떻게 자력으로 공중에 뜰 수 있지, 라면서 의심은 명백한 증거를 보고 있는데도 그걸 가짜로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불과 3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게 실물 크기의 초정밀 풍선이란 걸 알게 됐다. 당연히 테트라포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원본은 위장 그림이 그려진 천막으로 가리고, 거기서 투명한 줄로 복사본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오, 저런 저런! 나는 추억의 노래와 최신 유행가만 3분의 마법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이것 봐라, 그러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게 2탄 같은데!」


   5

   3탄은 어려운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몇 탄까지 이어질지는 몰라도 일단은 톰과 리지가 우리의 리더였고, 분위기 메이커였으며, 동네에 활력과 생기와 즐거움까지 제공하는 인기 스타였다. 때문에 그녀들은 바빴다. 어쩌면 나 같은 물러터진 바보와 놀아주니까 나는 그걸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턱없이 모자란 자존심 때문인지 욕구 불만에 기인한 질투심 때문인지 나 혼자서, 그래, 난 무의식적으로 그녀들 리지와 톰을 묘령의 후궁들로 여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그녀들에게 애첩의 계급을 올려줄까 말까, 막 그러면서 영락없이 사춘기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면서 천재적인 악상이네 환상머신의 탄생은 무슨!
   그러다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와 생각했다. 혹시 아직 시작도 안한 건 아닐까 라고. 덜컥 겁이 났고, 흠칫 놀랐고, 벌벌 떨었다. 뻥이다. 아니 진짜다. 나는 허랑방탕하게 살아온 지난 인생을 후회하는 마음까지 느꼈으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져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혹시 톰과 리지에게 내가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인지 추정인지 의문에 휩싸였다. 형편없는 정보력을 긁어모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잠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여 나는 크리스틴이 운영하는 미술관 귀빈실로 갔다.
   그곳에 도착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거긴 거의 내 제2의 사무실이었다. 크리스틴은 거의 도시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보기 힘들었다. 비서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쉬면서 나는 2~3분 분량의 동영상과 10초 20초 길이의 소셜 네트워크 게시물을 보았다. 첫째는 거의 1미터에 준하는 대어를 낚아올리면서, 친구들끼리 흥분에 설레발에 들뜬 대화들 끝에, 물고기를 끌어올려서 마구 기뻐하는 영상이었다. 둘째는 쥬스를 업지르고, 화분이 깨지고, 침이 꼴깍 넘어갈 듯한 요리에 바람기가 가득한 해변의 분홍색 모래를 끼얹고, 백설탕 황설탕 흑설탕과 코코아 분말을 부엌과 거실과 푹신한 소파에 한가득 뿌리는 등의 기행을 짧게 편집한 영상이었다. 그걸 보고 아 나도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약 할 수 있다면, 행운이 따라주고 갖은 노력과 모든 귀찮음을 충분히 감수할 수만 있다면! 다만 나는 말미에 보너스를 추가하고 싶었다. 1과 2 모두 끝에 10~20초면 충분하니까. 즉 추가하고 싶은 장면은 이랬다. 첫째는 잡은 대물을 다시 방생하는 장면까지 포함하면서 막 끄지 마 끄지 마 기다려 기다려 그러면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고, 둘째는 그 모두를 다 치우고 뒷처리하느라 억수로 고생하는 모습을 편집해서 추가하는 것! 하지만 어느 세월에? 성가셨다! 이래서 남모를 욕망의 몽상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논리적 상상력의 기쁨 역시 그 재미가 제법 쏠쏠한 거다.
   내 딴에는 톰과 리지의 깜짝-쇼에 예의껏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다 못해 박수 치고 기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마음에 나는 결국 그날 하루를 곱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 혼자 괜히 2탄의 즐거움과 3탄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 때문에 즉석 복권을 몇 장 사 들고, 동네에 새로 생긴 바에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즉석 복권 당첨 때문에 바쿠스의 천명을 받들어 골든벨을 울렸다. 물론 다짜고짜 아무 생각없이 덥썩 골든벨을 울린 건 아니었다. 그 전에 제법 웃긴 아주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바로 누군가가 카페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곡명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땡벌의 비행.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또는 옆에서 부추겼을 수도 있다. 배우면 뭐하냐 써먹지를 못하는데 라면서 깐족깐족 건들었을 수도 있다. 통상 이런 장면은 거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지 실제로는 정말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전문연주자는 무대가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실력을 뽐내는 데 대해서 아마도 무척 신중하기 때문에 그 빈도가 드물 테고, 아마추어는 하고자 하는 열의는 가득하고 분위기를 띄우고 싶은 갈망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실수할까 봐 두려워서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면 소품 하나쯤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는 직업 의식과 예술에 대한 소명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을 내내 유지시켜야 함을 잘 알기에 그런 자리에 선뜻 즉흥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나중 혹 정체를 알게 되면 대중도 실망할 수도 있고. 그래서 카페의 무대는 대개 아마추어의 독무대다. 놀 때는 상관없다. 그런데 뭔가 놀랍게 시작했다가 실망으로 끝나는 게 문제다. 그곳의 누군가도 그랬다. 딱 그랬다. 출발은 좋았다. 당연히 누가 그랬겠지. 음악 꺼 음악 꺼, 라고. 그래서 독주곡이 탄주된지 1분이 되니까 완전히 개미의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순간이 찾아왔는데, 분위기 다 갖추어졌는데, 어머나 이게 뭐래니! 딱 이때부터 버벅버벅 연주자는 헤매고, 좌중은 속닥속닥, 작은 웃음 소리는 잔잔한 미소 가운데 간혹 폭소도 발생했다. 이때 웃지 않으면 그건 유머 감각이 없는 작자고, 호인도 이상형도 허당도 뭣도 아니며, 인성도 사회성도 다 포기한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있겠나. 평생 골들벨을 들어보지도, 일평생 골든벨을 울려보지도 못했겠다, 상위권은 아니지만 복권도 당첨됐겠다, 곤경에 빠진 꿈 많은 아마추어 연주자를 독려해야겠다, 까닭은 많고도 많았다. 블로그 신드롬과 허언증이 치료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열정은 앞뒤 보지 않고 내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골든벨을 어린애 장난처럼 울렸던 것이다. 누가? 그래, 바로 내가! 난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있게 골든벨을 부서져라 울려본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알고 보니, 복권의 위 숫자와 아래 숫자가 일치했나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일이! 망연자실. 하나 패를 무를 수는 없는 법. 비굴한 불운을 사랑의 기회로 삼아 나는 어느 아프로디테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결과는? 시작은 좋았으나 보기 좋게 퇴자를 맞았다. 따라서 결론은, 2탄은 공짜가 아니라는 결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톰과 리지와 계속 절친한 친분을 앞으로 계속 유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고.


   6

   나는 세 번째 퍼포먼스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면서, 연이어 발생하는 요란한 오락적 사건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그 모두를 관심 없는 척 외면했다. 가련한 모험심에 순박한 애욕,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감수성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은 지난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톰과 리지를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아직 생활 예술 3탄은 기척도 없는데 내가 설마 기대를? 그렇다. 점잔 빼지 말고 솔직히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기다려지기는 했다. 요만~큼! 그런 내 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나의 허영심은 다치고 허풍은 쏙 들어가서 허당은 마침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글도 안 써졌다. 그러나 먼저 연락할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받는다고 이긴다, 뭐 그런 호승심 같은 건 없었지만 살면서 난 패배주의에 꽤나 민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먼저 꼬리 친 개 나중 먹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심지어 속을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 봐야 안다고 하니까, 뭐랄가, 제3탄이라는 놀라우리만치 기발한 발상이 현실화되기 전에는, 뭐랄까, 악마의 궤변은 믿을 수 없었다. 속마음은 은근 한번 더 감쪽같이 속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제3의 도취감은 별안간 내게 다가와서 내 여린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먼저 리지로부터 문자를 받았고, 나는 리지가 알려준다는 동네 호수 중간에 있는 섬까지 가 봤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나는 또 다시 선뜻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공상에 빠져버렸다. 일이 그럴 만 했다. 넉넉히 그럴 만 했다. 우리 동네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인 나무에 걸쳐진 배에 대해서 나의 설명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까? 그 호수의 섬, 곧 나무 위의 배가 있는 곳으로, 그걸 뭐라하더라, 열기구 비슷한 물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곧 풍선이 수십 개 달린 배였다. 안에는 톰과 리지가 타고 있었다. 말도 못하게 뜬금없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친구들은 그 하늘을 나는 배를 역시 근처 나무 위에 안착시킨 후 어떻게 어떻게 내려왔다. 뭐야, 날이면 날마다 퍼포먼스? 얘네들 미친 거 아니야? 늬네가 누구냐, 라고 말할려고 했는데 막상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버버버 어버버버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감탄사와 혼잣말을 내뱉을 차례가 됐다. 될 수 있으면 나는 품위 있는 화술을 구사하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 때문일까? 내 말을 내가 듣고 보니 딱 그랬다. 바로, 호색가의 현란한 언변!
   난 도저히 걔네들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난 가난한 작가일 뿐인데! 그런데, 왜? 내 말이! 이건 혹시 왜곡된 사랑일까? 또는 사랑 게임? 아니면 만화영화 같은 사랑?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녀들은 내게 웃음기가 싹 가시게 만드는 징크스 같은 일들을 가지고 매번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설마, 혹시 이거 자랑일까? 어리석은 젊음 무모한 청춘, 정결한 소망과 단순한 야망, 없는 꿈이 자연스러운 철부지 스무 살의 놀이일 뿐이라면서? 심지어 보트도 멋졌다. 오묘한 오렌지색 더하기 딸기잼 색깔. 풍선들은 더더욱 화사했다. 나른한 살색, 촉촉한 주황색, 애교 가득한 선홍빛, 세상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파란색과 달콤한 행복을 암시하는 연노란색까지. 아 나 정말 이거 진짜, 허허! 가지 가지 한다. 누가 마성의 질투심 유발자들 아니라고 할까 봐.
   사실 난 많이 떨렸다. 내심 겁이 났고 무서웠다. 걔네는 딴 세상에 사는 돌아이, 나는 정상인인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이러하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친김에 제4, 제5, 제6... 막 계속 기다리고 확인하고 기대하고 감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톰과 리지를 만나서 담판을 짓기로 했다. 어여쁜 숙녀의 환생한 듯 기쁨에 벅찬 사랑의 환희와 바로크 음률이 나부끼는 찬란한 인생, 모두 안다 아름답다 부럽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자 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 너네가 사람을 잘못 찍었을수도 있고, 지금 잠시 생각이 딴 데 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 맞어, 사랑처럼 콩깍지가 씌었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 오해가 있으면 풀고, 우리 이렇게 하자. 우리 아니 숙녀여 그걸 꿈꿉시다. 다음의 이상을. 네? 허영은 충족됐고 허풍은 감상됐으니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다. 바로 그 포지셔닝을 추구하는 게 어떠냐고. 나는 그렇게 절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렇게 이 친구들을 설득하고 타이르기로 마음먹었다.


   7
  
   「너네들 왜 이러니? 아니, 허허! 나한테 왜 그래? 음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구나. 오빠가 인정할께. 어떻게 소원이라도 들어줄까? 신발끈 매줄까? 아니면 뭐? 말만 해. 뭐든지. 응? 오빠가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는데, 확실히 그랬을 텐데, 음 그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그대들께서 오빠한테 친절함을 베풀지 않겠소? 네 이년! 뭐가 어쩌고 어째? 냉큼,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소상히 아뢰옵거라! 어서 이실직고하세요, 네? 아 정말 알려주시오, 낭자! 응? 도대체, 왜, 하필, 나니? 응? 너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응? 고백해주시오 그대여. 실토해 이 아가씨들아. 숙녀여, 궁금해서 간밤에 잠을 설치는 이 오빠한테 조그만 힌트를 알려주지 않겠수? 응? 뭐라고 말 좀 해 보셔. 정말, 너네들 누가 보낸 거니? 누구의 지령이야? 아이디어는 누가 냈고? 아 왜 말이 없니, 답답하게. 얘네들 정말 과묵하네. 진짜 심하네. 너무나도 의뭉스럽다고. 어?」
   「오빠. 우리 이거 그냥 불문에 부치는 게 어떨까? 내 불찰일 수도, 운명의 장난일 수도, 번뜩이는 타인의 행복일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리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솔직해 말하자, 톰. 우리야 그냥 중간 역할자일 뿐이자나? 우리가 특별히 조율하고 계획을 변경하고 작전을 설계하고? 우린, 그런 거, 몰라.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아가씨, 어이, 톰! 자세히 보면 보이는 엷게 화장한 아가씨의 보드라운 그 콧수염, 남자처럼 막 만지작거리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셔. 응? 가만 놔두면 얘 혼자 있을 때처럼 막 코 후비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너 혼자 있을 때 진짜 막 그러는 거 아니니? 아무래도 걱정되는데.」
   「하긴. 네 말이 맞다. 동의해. 인정한다구.」 그니까 뭘, 뭘 동의해?
   「얘네들 뭐래니? 그게 대체 뭔 말이야?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줄래? 오빠 말은 무슨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달라는 말이 아니잖니? 재산 목록 1호 최선의 희망 최고의 사랑을 실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야. 그냥, 지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가는 형세 그거만 알고 싶다는 게 다야. 안 그러니?」
   「그런데 있잖아 오빠, 문제는 우리도 아는 게 없다는 거야.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데 우리가 뭘 알겠어? 오빠는 장래 커서 예술가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 우리도 그래. 우리가 고액 현찰이 가득 찬 007가방을 받게되리라곤... 아니 영화처럼 그런 거 한번 구경이라도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고. 음, 돌이켜보면 우리도 아는 거 하나도 없어. 우리가 뭘 아니. 안 그래?」 
   톰과 리지는, 리지와 톰은 인상주의의 직계 후계자라도 된다는 듯 그럴듯한 핑계를 잘도 꾸며냈다. 일단 이대로 가자고? 정...말? 가뿐히 환심 살 말만을 떠벌리고 다니지도 못하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열정을 리지와 톰과 함께 나누어 가질 수도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가? 그래?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우선 후퇴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뜬구름잡는 화제에서 스윽 일상 얘기로 전환했으며, 여자들이 좋아하는 얘기를 나눴다. 왜냐하면 뭔가 느낌이 내가 계속 더 속고 있다는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톰과 리지와 내가 하는 말들을 누군가 실시간으로 듣고서 문서화해서 상급자에게 보고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만족할 만한 우연의 은총에 힘입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내 말이 뭐라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니, 혹시 모르니까, 나는 톰과 리지를 안심시키고 다독거리고 아첨 일색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얘들아 최근에 오빠가 어떤 일기를 쓴 줄 아니? 막 그러면서. 오빠가 말이야, '불유쾌함, 무환상에 몰상식과 역교양에서 탈권태와 초현실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글을 썼다가 볼펜으로 끄적끄적 적었다가 종이를 찢어서 구기고 입으로 물어뜯어서 던져버렸어. 왜냐하면 난 지금 바보가 되어야만 했으니까! 
   녀석들과 헤어져서 집에 돌아온 후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봤다.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리지가 그랬다. 무슨 지령 제목이 1.5라나! 쩜오? 그게 뭐지? 나는 내 주특기인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1탄 비밀통로, 2탄 테트라포트, 3탄 하늘을 나는 배. 제1번 객관적 시간이 정지된 채 개인적 시간은 정상, 제2번 시간의 정지, 제3번 객관적 시간은 정상인데 반해 개인적 시간은 정지. 이 경우의 수에서 정답을 맞춰보라는 수수께끼일까? 1에 갔더니 A현상, 2는 B현상, 3은 C현상, 그래서 주인공이 그 규칙적인 정형을 파악하기 위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미스테리 영화? 제작비만 날리는 거다. 것도 왕창. 그건 불가사의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럼 혹시 1.5는 미래 언제쯤 내가 쓴 소설 제목이고, 리지와 톰에게 지령을 내린 베일에 감춰진 인물은 바로 미래의 나? 우리가 영화에서 보면 시간이 정지되면 모든 게 정지되서 우스꽝스런 일들이 자연스러워지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곧 만약 시간이 정지되면, 그 상태로 주관적 시간이 흐르는 당사자는 시간이 정지된 모든 생명체를 볼 수 없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어떻다고 하겠지만 그 모두에 대해서 실증된 예가 많지 않으니까 또 모른다. 그야 어쨌든 리지와 톰 때문에, 아 나 정말 이거 어떡한담, 생각이 쉬지 않고 생각이 멈추지도 않고 계속 많아졌다. 숙녀는 예감하고 신사는 예언하다, 그게 원래 내 임무인데 시간의 허구를 다룬 이야기? 그게 정말 웬말이냐고! 뭐 방법이 없으니 일단 기다려보는 수 밖에.


   8

   비밀이란 속임수다. 환상이란 없다. 신비를 탐구할 시간 없다. 오늘은 심심하고 마침내 내일 재미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1.5가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무턱대고 이름 하나 가지고 어떻게 사연을 추적하고, 어디 가서 판타지를 탐애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유난 떨지 않고서 가만히 기다렸다. 제4탄의 무언가를 영접한다면 얼마나 황홀하고 얼마나 기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미스테리 그거 말이 쉽지 어디 가능하기나 하냔 말이다. 오락산업 종사자가 특정 단어만 남발해도 그런다. '반전' 그거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발단을 1 전개를 2 라고 했을 때, 1.5라는 소강 상태는 우리를 찾아왔다. 톰과 리지도 바쁜지 통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차피 서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나도 형식적으로 예의상 친한 척 했을 수도 있다. 내가 이래뵈도 가식으로 따지자면 아마 어디서 쉽게 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우린 모두 자기 인생이 제일 중요한 개인이니까. 그렇게 무료한 일상이 이어지던 나날은 계속됐다.
   한편 크리스틴이 유명해졌다. 관광객들은 크리스틴이 사는 집을 구경하기 위해 막 찾아오기 시작했다. 특별히 볼 건 아무것도 없는데 크리스틴이 거기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찾아오고 또, 또, 끊임없이 찾아왔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크리스틴이 옛날에 그렇게나 유명했는지를. 알고 보니 크리스틴은 왕년에 꽤 잘나갔다고 한다. 가수로 활동하며 앨범을 발표하기만 하면 무조건 1등이었고, 열광하는 팬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책도 쓰고, 영화에도 나오고 광고에 모델에 사업가에, 그땐 뭘 해도 됐다고 한다. 아니 그런데 난 왜 몰랐지? 난 대체 뭘 한 거야? 하긴 나도 과장하자면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지옥 훈련 기간이 있긴 있었다. TV도 보지 않고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혼자서 작품에만 정진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나도 그때 꽤 오랫동안 뭔가를 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 둘러보니 특별한 성과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몰랐을 수도 있다. 모르면 어떤가. 나는 친구 중에 예술가가 한명도 없었지만 전직 종합 예술인이 생겼으니 기뻐할 일 아니겠나. 그동안 뭘 모르는, 태반에 해당할지도 몰라 걱정되는 꽥꽥-짹짹-떽떽형 유명 작가와 연예인병을 앓아본 적 있는 예술가, 특히나 얼굴이 두꺼운 삼류들의 촌스럽고 남부끄러운 안목을 괜스레 나 혼자서 대신 챙피하게 여겼는데, 내게도 유명인 친구가 생겼으니 나까지 덩달아서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들리고 반짝반짝 조명이 바춰지는 것만 같아서 괜히 기분이 잠시나마 우쭐했다.
   뭐, 꽥꽥-짹짹-떽떽형 작가? 뭐, 최소 절반이나 될지도 몰라 걱정된다고? 걱정된다. 왜냐하면 고전주의가 있으니까. (나도 안다. 너나 잘해 라는 충고를. 사둔 놈 말 하시네 라는 비아냥을!) 권위와 인기와 오락과 유행이 좋긴 좋다만 시간 앞에 장사 없다. 쟁쟁한 예술은 대개 허상이고, 예술이란 분야는 이미 산업과 오락에 잠식당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예술만 그런 게 아니다. 신앙도 그렇지 않나 라고 종교인이 자성을 담아 말한다. 옛날 옛날에 교회는 그리스─로마─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철학─제도─문화로 침윤됐지만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오니까 기업이 되더라 라고. 다시 누리꾼은 덧붙인다. 어디에 오면 대기업이 됩니다 라고. 어쩔 수 없다.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양지도 있고 그늘도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구관이 명관이다랄지 그 반대랄지 나와 남을 대하는 기준 자체가 유동적이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그건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의 신은 누가 뭐래도 그분이 아니라고 쉽게 반론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체계가 탄탄하고 문명이 발달한 만큼 예술, 농담, 놀이, 장난, 자유, 오락, 연예, 학문, 산업, 경제등 분야도 드넓고 사람의 생각도 원대하게 다양해졌다. 행복과 보람과 가치와 즐거움등 추구할 제재도 줄 길게 서 있는 걸 무시할 수 없다.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삼권 분립을 교복 입는 시절에 정치 과목으로 배우지만, 사회에 나와 보면 그 3이란 숫자는 다시 경제─정치─사회로 바뀐다는 걸 알게 된다. 현대는 그렇고 중세는 또 달랐다. 국왕과 교왕과 통치권자가 1이나 2로 압축됐다. 다시 현대로 와서 통치권자는 만국 공통이고, 국왕과 교왕과 교황은 만국 공통이 아니다. 그래서 뉴스에 어떤 악수하는 모습이 나오면 또 말들이 많다. 그건 한마디로 넌센스다. 그게 다 오락산업이 대중을 위한 삐에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무언가가 때로는 하트 퀸일 때도 있고, 때로는 다이아몬드 1일 때도 있다. 똑같은 카드를 놓고 누구는 스페이드 킹으로 보겠지만, 누군가는 크로바 A로 볼 수도 있는 게 이 세상이다. 그러니까 고수는 다음 장을 읽어야 한다. 카드 하니까 또 삼천포로 빠질 뻔, 돌아가자. 그건 곧 이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 그게 곧 세상사니까. 오늘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뉴스에 나온다. A의 1인자와 B의 국왕이 만나서 악수를 나눈다. 애초부터 어색한 만남이다. A에는 1인자만 있고, B에는 1인자와 국왕까지 있으니까. 조건 자체가 동등하지 않다. 그렇다고 B의 국왕은 옛날식으로만 인사를 받기만 해야 하느냐, 오히려 B의 국왕이 현대식으로 웃어야 하지 않냐, 아니다 전통이기 때문에 굽히는 게 옳다, 만인에게 인사만 받겠다고?(현시대 왕이 구시대적으로 그렇게 원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소수 의견이.), 아닌 게 아니지 만약 어디에 1인자만 있다면 그 1인자는 대외적으로 통치권자와 국왕의 역할을 겸해야 하니까 따라서 굽히는 건 옳지 않다, 그 논리가 싫다면 어디라도 국가 수장이 세상 모든 각 나라의 왕들한테 굽실거리는 건 뭐 괜찮다 좋다는 말 아닌가 아니 그렇소?, 어른들 잘 아시다시피 정치만 해도 그렇지 않나 꽤 적지 않은 경우 국내용을 위해 불필요한 말과 허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찬성과 반대라며 말들이 좀 많지가 않다. 대중매체도 거든다. 그 언제라도 국왕의 소박함과 품위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또 말은 안 해도 각자 생각은 따로따로 다 한다. 그게 왜 그러냐면, 일단 한 국가의 1인자는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국왕은 말 그대로 세계가 아닌 국내의 국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질적인 역할이 대하드라마와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름은 분명해진다. 왕은 존중 받아야 할 특수한 신분, 통치권자는 존경을 받도록 노력해야 할 정치가라고. 그렇다. 땜장이는 절반쯤 자기의 일을 좋아하고, 재단사는 꼼꼼하게 마름질하는 일을 천직으로 삶고, 군인은 명예를 중요시한다. 선원의 직업은 선원이고, 부자든 가난뱅이든 누구에게나 천운이 내리는 기회가 사는 동안 세 번은 있다고 한다. 진짜 세 번인가는 중요치 않다. 그건 살기 나름이니까. 추리소설에서 어떤 역할은 두더쥐의 숙명이었다. 그러든 어쩌든 왕이라고 하면 왕의 일은 대하드라마에 나오는 것, 그게 진짜다. 그 진짜로 인해 무수한 기쁨과 슬픔이 태동되었고, 그 진짜는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단지 상징적인 전통일 뿐. 이런 주제를 논하는 것이 누군가의 역할이듯이. 핑계 대며 딴 데 쳐다보고 쉬쉬할 필요 없다. 따질 건 따지고 정면돌파해야 할 때는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 추억의 영화배우 율 브리너는 연기자였고, 학자가 가설을 이론으로 발전시킬 동안, 현대에 존재하는 왕에 대해서는 왕은 무슨 일을 하는가 라며 주업이 무엇인가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된다. 모르는 사람도 없다. 단지 그건 운명이라고 알면 된다. 그게 다다. 반면 1번 정치인이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관심을 가지는 게 좋다. 다수의 무관심이 치러야 할 대가가 적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왕이 어떻게 사는가는? 몰라도 된다.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분이라면 몰라도, 아니라면 알아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처음도 끝도 일반인과 왕은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인 건 똑같다. 왕은 신이 아니고, 일반인도 존엄한 인간이다. 게다가 중요한 일은 정작 일반인이 다 한다. 정치, 경제, 사회, 그외 모든 것을. 그러면 왕은? 그냥 왕이다. 대하드라마에서야 역할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존중하면 그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 시대에 오락산업으로 만들어지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현대의 왕을 소재로 삼을까? 부적절한 주제다. 왜냐하면 재미없고 의미도 적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알아야 하고 알고자 했고 듣기 싫어도 들렸고 때로는 거짓으로 숭앙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로 나와도 재미없다. 자존심 센 남자들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나지 않나요? 혹 대사랄지.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라구요. (이 모토가 1번인 외적 인격만 유지하면 나중 큰손이 될지는 몰라도 덕망과 인기를 잃을 가망성, 무시할 수 없음. 다 성취해도 외롭다는 말이 입버릇이 됨) 그치만 그런 말도 다 쓸 데가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왕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뭔 잘못이겠냐마는, 작가는 글로써 왕도 그 무엇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어야, 그래야 진짜 작가다. 아니면 가짜다. 다른 가치 추구와 다른 장르에 대해 뭐라는 게 아니라 99의 내 분야와는 별개로 1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감은 언제 어디라도 따라간다는 거다. 젊어서는 돈이 없고 황금성에 입성한 다음에는 청춘이 아니다, 난세에는 권력에 약했고 풍요로운 세상에서는 돈과 인기만 추구한다, 나중 깨닫게 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남의 다리를 많이 긁어 봐야 그게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딸랑딸랑 반짝반짝, 기분 좋게 팡파레가 울려퍼지면 기교는 기교를 숨기는 데 있다 라는 라틴어 경구는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도처에서 꾸중을 듣고 원성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할 때는 하고, 지저를 땐 저질러야 한다. 단, 서로 원하는 사랑처럼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인 의도와 좋은 의미로다. 하여간 예술가는 예상의 의표를 찌르고, 유행을 선도하며, 초심을 잊지 않고 이상향에 대한 유망함을 간직해야 하며,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숙녀의 공상이 상상을 초월하듯이. 실행은 어려워도 맑은 자신감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는 거다. 소꿉장난 하듯이 간질간질 에게~ 삐악삐악 에게~, 현대가 뭐 사극의 시대인가? 무예 그리고 판타지? 예술가의 명분과 직업인의 사명과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장인으로 책임감을 느껴야 할 신념이 부족한 채로 전문가가 (어쩌면 얄팍한?) 기술만 가지고 득세한다면 그건 그냥 그때뿐이다. 그건 다만 껍떼기에 지나지 않는 거다. 포장이 아무리 예뻐도 어차피 버려지고 소모될 명운일 뿐. 첨예한 주제와 민감한 단어와 궁금한 원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진짜다. 맨날 똑같은 말만 하는 것, 그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알게 되는 게 인생이지만, 그것만 해도 꽤 괜찮은 어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미래까지 예견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널리 알려진 문화와 교양과 예술의 소양을 얘기하고 향유한다. 일요일에 각자 신앙생활도 한다. 그러다 전시가 되면 종교는 헌신짝 버려지듯 슥 조용해진다. 나서도 분위기상 천시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평시에 왕은? 대하드라마에서는 존경받았다. 그리고 현대는 과거에 비해 비교적 수평적인 세상이 됐다. 따라서 누구나 그 어떤 불분명한 애정과 열정과 소망과 관심을 각자 좋아하는 데 부여한다. 무엇보다 현대인은 자유를 누린다. 각자 무엇을 즐기는가 그건 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왕에 대한 존중이 있으면 직업인에 대한 존경도 있다. 쉬운 예로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 말이다. 옛날에는 1인자가 독식했다. 고을의 원님이 구법과 행정-군율-생활-교육등 모든 질서와 문화등 그 모두를 관장하고 군림했던 지역의 1인자였다. 지금이야 지방의 법원-행정기관-경찰서-교육청-우체국등 책임자가 따로 있지만 옛날에는 원님이 장땡이었다. 당연히 전화와 라디오와 인터넷이 없었으니 폐해에 대한 처방도 필요했다. 또 예술가는 광대였고 노비가 존재했으며 신분제가 확고했다. 지금에 비해서 완벽한 피라미드 사회. 하지만 시대가 바꼈다. 또 세상은 변한다. 좋은 변화를 도모함은 인류의 의무다. 발명과 창조와 탐구 외에 종교적 선과 대치되는, 철학자가 말하는 파괴적 본능과 제국주의적 의미의 실현과 그 어떤 맹위와 쟁취와 전진은 세계에서 엄정히 현실이었다. 지금이라고 없어질 수는 없고 성격만 변한다. 교양인의 상식이자 미래를 위한 교훈인 역사가 그랬고 그러하다. 옛날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비교적 구도가 안정됐고, 경험적으로 어떤 낙관을 희망할 수 있다. 앞으로도 방법은 다를지언정 성취욕과 존경심과 꿈과 사랑을 향한 동경심마저 경쟁은 기본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는 어제와 나와 오늘의 나라는 것. 그 안에서 발전하면 그뿐. 과거엔 사극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르가 다양하다. 공동의 이익을 긴밀히 조율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인간의 음성적 측면을 만족시킬 오락산업도 발달됐다. 난국이던 시절 인터넷은 없었고, 대하드라마에 핸드폰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달까지, 무인선은 태양계 바깥까지 진출했으나 미래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줄면 줄지 늘지 않는 것이 있고, 늘면 늘지 줄 수는 없는 것이 있다. 그걸 알면 된다. 알아야만 한다. 어떤 때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모를까? 미래 지향적인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말의 의도를 알아야만 한다. 바나나로 시작해서 인간은 온갖 과일에 비길 수 있었고, 피어의 권한과 배경은 거의 신성했으니까. 인류 역사상 왕권이 약화된지가 불과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비교적) 세상이 살기 좋고 아름답게 정착된 지가 불과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승이 천국일 수는 없는 법. 그리고 품위를 취하면 새로움이 아쉽고, 새로움만 뒤쫓으면 품위는 서운해지기 쉽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목표는 일단 크게 잡자. 청춘을 그리워하고 스무 살을 부러워하면서 인생 장르는 사극만 고집한다? 아아,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이다. 어쩌면 몹시. 아집을 버리지 못하면 타자들은 그 누군가를 피할 수 밖에 없다.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그런데 젊은이들에게는 진보적으로 말하고, 친구들끼리 있을 땐 시간을 돌려 추억을 얘기하는 건 이중적 성격인가? 맞다. 이중 인격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때로는 타인에게 맞추고, 의견을 공유하고 유대감을 공감하며, 우수한 양식에 동화될 수 있음은 이중 인격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노는 게 일인 어린이와 비록 철들지 않았을지언정 상상력을 반납한 어른, 그 둘의 장점만 취한다는 건 모순이다. 날이면 날마다 맨날 똑같은 말만 하는 어른도 존중하고 존경 받으면 좋겠지만 천편일률적인 그 말은 대체로 발언이 길고, 많고, 비슷한 친구로 비유하자면 대체로 자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귀는 막고 말만 하니까. 세상은 주로 괴짜에 의해 발전했다. 진부한 어른스러움은 역사적으로 그 발전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왜? 이상하니까! 익숙함이 편하지만, 불편과 노력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더 나은 새로움을 만날 수 있다. 머무르면 도퇴될 가능성이 크고 시간의 방향처럼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거의 둘 중 하나가 전부다. 수평선이란 건 오름과 내림의 무수한 반복일 뿐이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사람의 생각은 왜 그대로 멈추어 있어야만 할까? 속담에서 일컬어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한다. 은행권도 순환 근무는 옛날부터 질서였다. 대체로 보수적이되 차츰차츰 진보적일 것. 생각만이라도 뒤가 아닌 앞을 향할 것. 미래엔 또 현재를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짐의 말이 곧 법이다, 대하드라마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현시대의 왕은 그럴 수 없고 누구도 원치 않는다. 왕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되고, 운명으로써 존중할 뿐 각자 자기 삶을 살면 된다. 세상 모든 일은 왕을 제외한 직업인과 아마추어가 다 한다. 전부! 100%! 현대의 역사까지 그렇게 만들어지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장래 타임머신이 만들어지면 그땐 그럴 수도 있다. 사견으로서, 지구가 곧 사람이 타임머신이던 그때가 좋긴 좋았다고.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다. 그런 말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테니까. 벌거벗은 임금님은 왕이었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왕이 아니었다. 인성과 함께 장비발은 물론이요 학벌, 행복도, 증시, 인권, 언론의 자유도, 교양, 상식 그 모두는 일반인에 의해서, 위해서, 음 뭐 그런 거다. 무엇보다 생각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골동품의 가치도 높지만 생활용품은 대체로 신식이 월등히 좋다. 그러든 어쩌든, 첫째로, 생각은 오롯이 현대적이기를! 보통 박물관과 대하드라마를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좋다. 훨씬 좋다. 그걸 모르고서는 거 웨 사람이 웃기고 반갑고 다정하고 다 좋은데, 간혹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뭘 좀 모르는 남자는 바로 그분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왕이란 개념 역시 그렇다. 전공과 직업 이전에 학교에서 배우는 공통 과목은 다 그 목적이 뚜렷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대표적으로 모자를 쓰는 게 예의였지만 지금은 멋을 위해서 쓴다. 헤어스타일이 자유를 만났으니까. 하지만 모자를 써야만 하는 일도 있다. 가령 야구선수, 요리사, 경비원, 또 있다 땀방울 송글송글 산업 현장의 일꾼! 모자처럼 유니폼을 빼고서 이 세상이 잘 굴러가기를 바랄 수는 없다. 불 끄고 신고 받으면 달려가고 어쩌고. 서열이 저 뒤인 법관은 날이면 날마다 하는 일이 그거다. 도둑놈과 하위 범법자와 (날)강도와 걸인들 재판만 하고 또 한다. (악성 채무자로써 현장에서 노곤한 법관의 표정을 읽고 선서해 봤음) 예 아니로로 대답하세요?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드라마 같은 중대 재판은 남의 떡일 뿐. 그래서 1번 방송매체에서는 왕의 공공근로에 대해서 방송하기도 한다. 사람은 중간만 가면 된다. 대부분 그분들께 고마워하지만 드물게 내가 낸 세금이다 뭐다 라며 소란피우는 일도 있긴 하다. 어려운 시절이 지나면 반성하게 된다. 내가 그때 대체 왜 그랬지 라며. 시간이 해결해 준다. 사람이 미워도 어쩌고, 그런 말도 있다. 옛날 세상에는 삼권이 불균형을 이뤘고, 많은 예술가들이 신을 경배했다. 이제는 과학과 문명이 발달했다. 현대인은 왕을 존경하기보다는 존중하고, 솔직히 관심도 없고, 신을 위해 살지도 않는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된다. 이기적이되 적당히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면 그만이다. 인기로 따지면 연예인, 삶의 제약이 많기로 최고는 왕족이다. 그럼 자유라는 명목으로 최고는? 단연 일반인! 가능성의 최고봉이니까. 그대는 왕 빼고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 정치라는 말처럼 왕이라는 단어도 너무도 너그러운 낱말이다. 어떤 말에나 붙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동사와 명사는 대게 어울림에 따라 짝지어진다. 바흐를 듣고, 위고를 읽으며, 웨이터 에르메스씨와 친한 현대인은 왕을 존경하고 예술가를 존중할까? 아니다. 그 반대에 가깝다. 왕을 하고 싶어서 왕이 되든 예술가의 삶을 그저 동경하든 왕은 왕이다. 어쩔 수 없다. 어떻게 달리 유감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 큰 관심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간혹 접하는 형식적인 뉴스가 전부일 뿐. 그거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건 곧 누구나 내 삶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고, 특정 신분으로 태어나면 매우 피곤할 수 있다는 거다. 또한 촌닭의 행복 만큼 과소 평가되는 것도 많지 않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유명인에 대한 무관심의 권리는 철저히 보장되고, 인생을 즐기라는 교훈이 진짜 의무다. 그래도 가십은 잊을만 하면 나온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 가운데는 사전 조율이 민감한 악수에 대한 소식만 들리는 건 아니다. 교황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지를 만나고 빈자의 맨발을 씻겨주는데, 어디의 국왕은 웃으며 현대식으로 악수하는데, 또 다른 의견 제시는 물론 너무 불합리하지 않냐 라고 많은 의견은 거론된다. 그렇게 따지면 나중 널리 찬양됐지만 옛날 교주는 살아서 통치권자와 국왕과 고위 원로에 대한 존중과 의전의 발 끝의 먼지 근처에도 못갔다. 두말할 것 없이, 돌아가는 형편을 봤을 때 현대의 신으로 황금을 첫손 꼽지 않나, 라는 점!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은 국왕과 교왕과 통치권자까지 1인 3역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점! 만약 신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상에서 만들어진 신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면 날 위해 살지 말고, 인간 곧 그대 자신을 위해 사시길 바랍니다, 라고 인공지능처럼 말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점까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 날 밟고 올라서라, 과연 어느 말을 직역하고 무엇을 의역해야 할까? 이 세상에는 모순과 부조리가 너무도 많다. 많은 부분, 기능적으로야 피라미드는 아마 언제까지라도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옛날과 지금의 피라미드는 미래에는 부분적으로 역삼각형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유명인의 친구 입장으로 시작해서 꽥꽥-짹짹-떽떽형 논설가, 다음에 결국 얘기의 쟁점은 그걸로 귀결됐다. 내가 최고!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할 뿐. 좋고, 괜찮고, 많이 좋아하는데, 하지만 동물농장의 분포도 때문일까? 어떤 유형의 농담 형식은 너무 롱테일 저 끝에서 천대받는 면이 없잖아 있다는 것이다. 그대는 최고? 그럼 난 존 말할 때 순위권에서 저 멀리 보내주세요! 인생을 살아 보니, 세상을 둘러 보니, 내가 최고가 아닌 경우가 많지 않으니까 아마도 논점은 항상 그렇게 골인되는지도 모르겠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미래든, 어디서 어떻게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모두 똑같은데 말이다. 우리는 나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까지는 생각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여행과 사랑, 똑같은 얘기다. 그렇긴 하다만 이왕 예술과 유명세 즉 생각의 차이라는 주제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논해 보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고 옛날에는 그랬다. 그러나 새로움과 변화에 응용까지 필요한 세상이다. 이렇게 바꾸는 건 어떨까? 인생은 한바탕 놀이고 예술은 인생(놀이)를 위한 도구다 라고. 맞다. 예술은 이제 인간이 세상을 즐기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유명한 예술가 말고, 어쩜 천국에 계실 예술가 가운데 아는 이름을 대보라고 스무 살에게 물어보자. 그 답은 보나마나 많지 않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기분 나쁜 촌평일 수도 있지만 지금 맹활약하는 예술가 가운데 향후 기억될 이름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쥐락펴락 시대를 들었다 놨다, 그랬을지라도. 그래서 시작은 일기를 나만 읽기 위해서 쓴다 할지라도, 나중은 달라야 한다. 허당을 위해서, 인기를 얻고자, 허상과 허풍을 도구 삼아 예술이랄지 모래성만 만들 것이 아니라 예술가는 예술로써 놀고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돈과 인기와 칠전팔기라는 말처럼 진짜로 7번 이혼하고 8번 결혼까지 해서 행복과 환희의 궁전을 지었는데, 아직도 뭔가 허전하다? 그건 아마 그래서 아닐까? 첫째,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영화는 바로 어떤 뭔가 완벽한 신비감으로 채색된 바로 그런 영화였는데... 왜 아직까지 나는 그걸 못만들었지? 난 왜 그걸 잊고 산 거야? 대체 왜 이제 와서... 그런 느낌! 둘째, 사랑을 예로 들자면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이 그립다, 가 아니라 사랑과 야망을 모두 성취했는데 언제나 외롭다 라는 것! 셋째, 제발로 내려오지는 못하니까 그럴 수는 없는 거니까. 예술에 대해서 말할려면 예술가 즉 인간의 삶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광활한 우주와 시간 가운데 깨알 같은 지구에서, 콩알 같은 삶을 살다가, 해변의 금빛 은빛 모래알처럼 반짝 하다 가는 거다. 그렇다면 그냥 생각없이 사는 것보다는 꿈을 쫓고, 사랑을 하고, 환상머신을 탐닉하며, 행복하든 재밌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잔잔하게 때를 기다리든, 삶의 의미를 찾는 인생이 더 좋지 않을까?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심심함과 무료함에서 몰입과 열정까지 우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이든지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어른들이 하는 얘기는 딱 거기까지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라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만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지. 그러나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계속 주저리주저리 설변을 읊으실 수는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듣는 사람 표정은 점점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당신은 최고 진공청소기라고 하시길래 진득하니 들어봤더니, 아 글쎄 최신형 커피포트였더라? 그런 일이 틈틈히 있을 것이다. 응애응애 엉금엉금 아장아장, 천재가 되어 버린 어른, 그 둘의 중간에 머무를 수는 없을까? 어렵다. 많이 어렵다. 다만 이왕 허당인 거 상허당이 되어 보자, 은근이란 수식어는 꼭 한번 들어보기를 원하고 과찬이시라며 나도 사양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래서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둥 두런두런 어쩌고저쩌고? 그런 심오함은 모르겠고, 인생은 그게 인생이다. 저번 포커판에서 미스터 아인슈타인에게 꾼 급전의 이자만이라도 건네는 성의를 보이는 것! 뭔가가 꼬였으면 자초지종을 간명히 정리하는 게 좋고, 말다툼과 소란과 장난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건 주로 친구들끼리. 자, 그럼 이제 음... 하고자 하는 일, 좋아하는 무엇,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인생, 내가 잊고 살았던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걸 논해야 하는데, 그런데, 뭔 놈의 주제 넘게 예술가로 시작해서 인생론까지? 그러게! 크리스틴 때문에 내 기분이 좋다를 말하고자 했는데 난 어쩜 크리스틴을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오나, 질투가 뭐 어때서! 다시 크리스틴으로 돌아가자.
   더군다나 크리스틴은 외국어 욕구 브랜드 투정 취향을 빼면 별로 남는 게 없는 다변과 수다로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아가씨는 아니다. 그러니 내 친구로써 그다지 손색은 없었다. 고상한 대화냐, 평범한 수다냐, 전자냐 후자냐 그런 고민 필요없이 그녀는 허영심 적당하고 내 재미없는 허풍에도 가짜 웃음이 아니라 꽤 환하게 웃어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보다도 난 유쾌한 친구들이 적게 잡아도 최소 반틈은 되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다만 고독한 일하기, 작품 구상의 괴로움에 끝없이 쫓겨서 딴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 궁금증은 풀렸다. 난 정말 옛날에는 알고 싶었다. 자주는 아니고 간혹 의아해 했다. 꽤 저명한 유명인을 친한 친구로 둔 일반인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라고. 그런데 어머머! 크리스틴이 사는 집이 관광 명소가 될 줄이야, 당장 어디다 크리스틴과의 친교를 자랑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 입장 되고 보니 별거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안 그래도 돌아보니 그랬다. 친구 중에 누가 영화배우감이고, 연설가는 누구, 하필 제일 검소한 친구가 유독 바텐더에게 인기가 많을 땐 내가 나서서 해야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야 누구(풀 네임), 영화 찍지 마 라고! 그런데 크리스틴이? 퍽 쉽사리 믿기지는 않지만, 근래 보기 드문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신문배달, 주유소 점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못해봤네 응애응애 어쨌네,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없는 반증은 아니겠지만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라네, 난 그렇게 헛된 회한에 빠져 있었는데, 그런데 크리스틴이? 으잉, 크리스틴이? 톰과 리지가 조용하니까 어쩌면 꽤나 좋은 소식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난 아마 톰과 리지가 더 기쁜 소식을 물어올, 아 전해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타자화해서 생각하는 그런 공상을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9

   여기서 잠깐!
   떠들썩한 유명인을, 꾀죄죄하진 않지만 한때 잘나갔고 지금은 잊혀진 유명인을 친구로 둔 느낌? 말했듯이 별거 없다. 별거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유명해지지 못했을지라도, 앞으로 전망이 꽤 불투명할지언정, 내 친구가 유명인이 아닐지라도, 그래도 괜찮다. 내가 다정하다면, 누군가를 닮은 걸로 충분하다. 괴팍해도 중간만 가면 된다. 인성이 잠깐 길을 잃더라도 슬럼프는 대게 극복되기 마련이다. 사춘기는 지나간다. 염세주의도 한때고 메뚜기도 한철이다. 할 일이 많을 때가 오히려 호시절이다. 게다가 머머 접습니다도 있다. 쾌락은 또 어떻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행복할 기회는 언제나 존재한다. 인생 성적은 상대적일 수 있고, 예술은 적잖이 개인적이며, 오락산업은 항상 건재하다. 이 세상에 미남이 좀 많냔 말이다. 사서 낙담할 필요 없다.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 방법이 있으니까. 어디에 가면 또는 그저 장소만 이동해도 자발 말고 일단 전망을, 사람을 만나도 진단을,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관찰로 끝낼지 호감을 발전시킬지 감별하고, 무슨 일이든 먼저 생각을 생각을 먼저, 바로 그렇듯이. 사랑이 뭐 별건가? 너가 웃으면 나도 웃고 너가 좋으면 나도 좋다, 그게 사랑 아닌가? 하여간 말은! 오늘은 안개꽃 한다발을 사서 그녀에게 선물할까? 오늘 이별한 누군가를 약 올리는 거 아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지 않나. 그러니까, 엇그제 바람맞았으면 뭐다? NC가 있다! (딱. 쉭─쉭─쉭) 친구들이 뭐라 하나. 여자는(남자는) 여자로(남자로) 잊는다고 하지 않나. 단, 상황과 사람과 미래의 사랑과 식어가는 연정에 대한 예의? 의리? 그런 거 봐 가면서 그런 말 하기로. 당연하다. 왜 아니겠나. 클라우드 나인에 올라가면야 좋겠지만 클라우드 나인에 올라가지 않고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바로 그게 먼저다. 주입식 교육이든 뭐든 현재 내게 주어진 형편에서 그것의 고유한 장점을 살리거나 오뚜기처럼 꿋꿋이, 강아지처럼 꼬리 살랑살랑, 고양이처럼 요염한 동시에 이기적으로 합리적이든 그 반대든 어쩌든 친구와, 그리고 지인과 웃으면서 대화할 수 없다면 어디를 가든 큰 차이는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낙천적인 사람들이 사는 더운 나라든 무지개 너머의 낙원이든 추운 극지방이든, 알려진 게 하나 없는 미지의 그 어딘가든. 물론 "난 나중 기필코 유명해질 꺼야", "머머해서 분하다 다음번엔 반드시 기필코 머머할 테다", 필자가 그런 유형은 아니라서 그분들 속마음까지 엿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작게나마 투정이 줄고, 작게나마 부드러워지고, 작게나마 너그로움을 알게 되며, 작게나마 접고 꺾고 져주고 웃길 줄, 적어도 웃을 줄 알게 된다면 전망도 괜찮고 희망도 밝다. 언제까지 강한 척 센 척, 그녀는 말끔한 수트를 바라는데 난 아직도 여전히 헤비메탈에 가죽펌퍼만? (아 가죽점퍼 입고 싶어라. 블랙진과 딱 맞춰 입고 조니워커들고서 사진이라도!) 그래프가 꺾이면 알게 된다. 똑같은 얼굴을 보고도 사람들 생각은 각자 다 다르다. 저 사람이 날 때리면 어떡하지? 형이 늬한테 싸움 진다 알았냐 어? (우리) 친해질 수 있을까? 와 반했다! 아아 멋지다, 오오 예쁘다, 힝힝 부럽다! 우리는, 사랑일까? 알고 보면 저런 부류가 은근 허당임! 무뚝뚝하고 불독 악세사리를 즐겨차는 저런 친구가 의외로 순진하지, 말 몇마디 섞어보면 견적 바로 나와! 쟤 무섭게 생겼다고? 저 양반 겁 많아, 쟤 말싸움도 못해! 뭐 저 친구가 술고래처럼 보인다고? 순 날탕이야, 쪼그만 잔으로 위스키 두세 잔 마시면 바로 혀 꼬여! 그런데 있잖아 너 그거 아니, 저분이 글쎄 열 하나는 좋다는 걸! 바로 그처럼. 물론 어려울 수도 있다. 동심으로 종이학을 접는 것과 어른이 커피포트를 식혀서 진공청소기로 만들 정도로 마음을 접는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듣고 보니 정말 말이 쉽지만 역으로 요술처럼 또 그만큼 웃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로, 꺾을 줄 안다는 것과 여자를 안다는 것, 그게 말이 쉽지 어디... 안 그런가요! 물론 어려울 수도 있다. 말은 이미 다, 모든 걸 내려놨다고 하는데 나중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모든 남자가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더라도 난 아니다, 만날 때마다 첫사랑이고 누구에게나 첫키스며(혹시 그래서 여자들이? 어머나 어머나!), 아빠 빼고 모든 남자는 다 늑대다, 에서 (미래의─사랑의─새로운) 나와 아빠는 바로 그대이듯이. 단, 엄한 풍문은 사절한다. 설령 그럴 리도 없겠지만. 


   10

   드디여 톰과 리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그녀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톰, 넌 왜 이름이 남자 이름이니, 그러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 너도 그런 말 무수히 들었겠지만, 그래도 이쁘니까 용서된다. 그리고 리지. 리지 너 혹시 톰 좋아하니?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너가 잠시 착각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니까 나와 응? 어떻게 어디식 인사를 찐하게 하고 나면 혹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의 그 뜬금없고 달콤했던 몽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실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아 정말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표현은 진짜 진짜 사용하지 않을려고 무진장 노력했는데, 참고 또 참았는데, 진정 구사하기 싫었는데, 어쩌다 하고 말았네─그 친구들이 웬 이상한 제안을 내게 해 왔기 때문이다.
   저번 퍼포먼스 3탄은 풍선 수십 개가 달린 배의 출현이었다. 그래서 호수 중앙에 있는 섬, 곧 거기 나무 숲 위에는 총 2척의 배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야 많든 적든 나와 밀접한 관계는 없지만 문제는 본부가 궁금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꽤 솔깃하고 영향력 있는 물음이었다. 1, 2, 3 바로 그 지령을 누가 내렸는지 알고 싶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싶지! 그런데 오늘이 그날이란다. 나무 위의 배가 있는 그곳에서 비밀에 감춰진 무언의 신비주의자를 만나기로 했다나 뭐라나. 자기들도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에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지금 이 얘기를 누군가 도청할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고 내다봤지만, 헛점을 내가 귀찮게 준비할 필요없이 그냥 어설픈 분위기에 묻어가기로 했다. 정보학과 탐정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눈부신 탐지력, 풍부한 현장 경험, 그런 거 하나 없이 나는 날탕에 허당에 허접한 바보로 보이는 게 어쩌면 오히려 훨씬 유리할 테니까. 그렇게 나는 서둘러 접선 장소로 떠났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굴복한 것이다. 아무래도 톰과 리지는 띄엄띄엄 보면 안될 것만 같았다. 합리적인 동기를 신기하게 부여할 줄 아는 친구들이니까. 아, 성능좋은 쌍안경을 챙겨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나는 호수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일단 쌍안경으로 조망을 살폈다. 아직 나무 위의 배는 그대로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응. 오빠야. 블랙 달리아는 왔어?」
   「뭔 달리아? 차라리 백작을 찾으시지. 우리도 긴장된단 말이야. 그리고 오빠야 있잖아. 우리가 말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거 우리 아르바이트였어. 그런데 건전한 일거리가 아니라 좀 규모가 있는 거야. 거 웨 있잖아. 피라미드 마케팅! 우리도 물린 돈이, 아 투자한 소액이 조금 있거든. 하지만 극미한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어. 그냥 한번 스파이 흉내낸다는 게 어떡하다 여기까지 왔어. 설마 일이 크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던 찰나, 검은 그림자로 불리는 그 인간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 왔어. 그래서 우리가 먼저 여기에 거의 다 왔거든. 뭐? 뭐라고? 아, 오빠! 난 오빠랑 통화 중인데 리지는 그 인간이랑 통화하고 있거든. 잠깐만! (그때 작게나마 그런 얘기가 오간 듯 했다. 이런 개뼉따귀 같으니라고. 사람 똥개 훈련시키나, 라고)
   오빠, 보여? 배 뜬 거 보이냐고. 아, 풍선 달린 배가 하늘로 뜬 거 보이냐고? 오빠 지금 어디야? 저 인간이 풍선 달린 배를 타고, 자기처럼 하늘을 날아서, 자길 쫓아오라는데! 뭐 높이 뜨냐고? 당연하지. 두둥실 두둥실 훨훨 훨훨 사뿐사뿐. 시원한 창공으로 올라가고말고.」
   그 다음 나는 겁난다 어쩐다 변명을 계속 만들어냈고, 그래서 같이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다. 오빠가 후발대로 맹추격할 테니 먼저 검정 머시기를 따라가면서 저의를 파악하라고 말한 다음, 내가 먼저 전화를 뚝 끊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촌스러운 별명인 검은 그림자씨는 풍선 달린 배를 타고 먼저 떠났고, 톰과 리지도 풍선 달린 배를 타고 그분을 뒤쫓았으며, 나는 내 차를 몰고 그 뒤를 쪼르륵 따라갔다. 빨리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톰과 리지가 탄 하늘을 나는 배는 저 높이 떠서 가는 게 아니라 지면에서 불과 1~2 미터 정도만 떠서 이동했다. 뭐야 이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타고 간다 그럴 걸!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의외로 가까웠다. 우리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뒷산 중턱에 위치한 고급 저택이었다. 아, 거기까지 따라가는 동안 나는 하도 느리게 가니까 그 풍선의 숫자를 세어 봤다. 총 23개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렇게 나는 게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냐? 현재 과학기술이 어느 단계에 도달했는데, 설명하자면 입만 아프다. 우선 경과를 설명하자면 시작은 좋았다. 경이로운 새로움과 영화스런 신선함은 그칠 새가 없었다. 중간 과정도 그런대로 화려했다. 와, TV로만 본 걸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저게 모두 가능하구나 라면서 누가 촌놈 아니랄까 봐 막 신기하게 계속 탄복했고, 감탄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문제는, 결론이 꽝이었다. 환히 미소 짓는 행운의 여신을 상상해 봐, 막 그러면서 궁금증과 신비감을 밑도 끝도 없이 증폭시켜놓고, 뭐야 판돈이 딸리자나~ 그러면서 나 몰라라 도망간 악당이 알고 봤더니 내 사랑이었더라? 마치 그런 결과를 맞닥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 작전까지는 진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과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낭만이었는데...! 그런데, 꽝! 완전, 꽝! 한번 더, 꽝! 행복은 다음 기회에, 행운은 은회색 생쥐에게? 이런, 젠장!
   그러니까 일이 어떻게 된 거냐구요?
    액션 영화의 절정에 걸맞는 분위기의 저택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톰과 리지 그리고 나는 악당인지 재력가 영화제작자인지 그 검은 그림자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간발의 차이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대체 어떤 용안의 위인이신지 보고 싶었는데,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톰과 리지에게 남겨놓은 보수는 확실했다. 일명 007 가방! 그런데 째째하게 그 안에 든게 지폐긴 지폐인데 최하권 지폐였고, 그것도 제일 앞장과 그 밑에 몇장까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어떻게 무슨 교환권과 상품권등으로 약속한 금액에 겨우 턱걸이한 듯 했다. 그래도 결과는 꽝인데도 불구하고 모험에다 추격까지 포함되었으니 이건 주목할 만한 성과인지, 아니면 톰과 리지조차 예상하지 못한 제4탄 퍼포먼스인지, 그 판별이 너무 아리송했다. 그래도 나는 절망적인 결과에 따라 펑펑 울 수는 없기 때문에, 또 나는 쾌남아니까 그래 오빠니까, 호쾌한 척 톰과 리지를 다독거리면서 슬그머니 포몽해주고 가벼운 스킨쉽을 유도했다. 꼭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으니까. 녀석들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걸까? 2탄이 기대되는 그만그만한 제작비의 1편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분위기를 몰아갈 줄 알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대체 누구인지, 그 너머의 세력까지는 정말 가늠하기 어렵지만 일단 이것만 해도 뭐 그런대로 큰 실망까지는 아닌 듯 했다. 원래 비싼 장비가 제값을 하긴 하지만 공짜가 전율감이 크게 느껴지고 대탈주보다 소탈주가 멋진 법 아닌가. 톰과 리지와 나는 연속극은 원래 미완성이 제맛이라는 둥, 벌레 먹은 사과가 그래도 맛은 있네, 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날의 활약을 마무리했다. 만약 근처에 들꽃이라도 피어있었다면 그 꿋꿋한 들국화를 꺾어서 톰과 리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꼿아주었을 텐데. 아무튼 우리는 마저 그 저택을 구경했다. 거기는 원래 고급 저택인데 아마 거기를 소규모 연예기획사인지 뭔지 그런 사무실로 사용했던 것 같았다. 고급 대리석이 즐비한 저택이 괜찮긴 했는데 뭐 거기 계속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11

   나는 당분간 4탄 퍼포먼스의 절정을 이뤘던 그 빈집으로 출퇴근했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다 보면 왠지 좋은 착상이 떠오를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물론 진득하니 반나절씩 머물러야 했으니 꼬박꼬박 도시락을 챙겨 갔다. 그곳이라면 작품 구상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흐뭇했다. 마냥 발랄하고 행복한 톰도, 언제나 즐겁고 기쁜 리지와 놀다 보면 좋긴 좋지만 은근 피곤했다. 세월이 불행했고 행복은 짧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체력이 문제인지, 어딘가 모르게 그 친구들한테 내 에너지를 막 빨린다는 기분은 결코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곳 주인이 있을 테지만 아마 헐값에 내놓지는 않았을 테고, 어쩌면 피지섬 같은 외국에 나가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별장을 떠돌고 있겠지. 곧 집주인은 노년 휴양 생활, 나는 정열, 그렇다면 내일은 기쁨과 쾌락과 환희가 찾아와야 하는데...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뭔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대저택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집기는 거의 없었고 가구도 매우 조촐했다. 마치 이방인이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다 웬 낙서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명상의 글이랄지 신인 배우 면접 일정등 연예기획 관련 메모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냥 책을 덮을려고 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름들이 적혀 있는 걸 보게 됐다. 윌, 핍, 쿠퍼, 바비, 아론, 오스카, 앵거스, 폴, 마라, 실비아, 스컬리, 멀더등 모두 내가 소설 속에 등장시켰던 이름이었다. 나도 평소에 말이 없는 만큼 글은 유달리 쉬지 않고 썼던 것일까. 필자는 원래 내성적인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소설 속에는 유난히 등장인물이 많았다. 뭐 물량으로 승부한다 그런 주의인가? 주의는 무슨! 나도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다변이랄지 다작은 꽤 조심스러워야 하거늘 나도 오리 꽥꽥 참새 짹짹-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낙서장에서 발견한 연락처의 이름들과 내가 쓴 소설 속의 이름이 일치하는 건 아마 우연일 거라고 일축했다. 왜냐하면 만약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랄지 작전, 추리의 왕이 꾸민 미끼 같은 기록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그때부터 상황 이상하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톰과 리지로도 모자라 나까지 그림자인지 뭔지 그 덜떨어진 신비주의자의 수하에 들어가라고? 제발로? 것도, 피라미드 최말단? 그건, 절대, 안된다. 말려들면 안된다. 가짜다. 영양가 없는 허당의 장난일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나는 일이나 하자 라면서 노트북을 켜고, 발단 전개 장르 주제등에 관한 생각을 끄적거렸다.
   바로 그때, 거기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이 찾아왔다. 보나마나 톰과 리지가 알려 줬겠지. 누가 입이 무거운 심복 아니랄까 봐. 실상은 내가 그녀들을 보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곤 쉴레를 닮은 델, 백수가 됐다는 존, 휴가중이라는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기 집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피해서 놀러왔다는 크리스틴까지. 델과 톰과 리지만 빼고 다 왔다. 고생했네. 애쓴다. 즐거운 청춘 신나는 인생이 틀림없구만. 참으로 반갑게도 말이다. 심지어 영광스럽게도 모두들 빈손으로 왔다. 그건 아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지만. 그건 아니야.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 그게 뭐냐고. 염치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면박을 줄 수도 없고, 나중 술자리에서 술 취한 척 새하얀 블라우스에다 적포도주를 실수로 쏟는 척 할까? 나중 하는 거 봐서! 때문에 순결했던 작품 구상의 분위기는 여지없이 불결해지고야 말았다. 정말 시끄럽고 난장판이란 말이 아니라 나만 아는 비밀스런 아지트를 들켜버려서 기분 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어서 연락할까 말까 망설였다면서, 한술 더 떠 왜 날 피하는 것 같다며, 은근 우정을 시험하냐는 농담을 건넸다. 따라서 결국에는 내 예술적 창작 본능은 개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의욕만 놓고 봤을 때 뭔가 하나 만들어낼 것 같았는데 말이다. 이런 마음가짐처럼. 놀라운 환상머신을 발명해야 한다. 새로운 신비주의를 창조해야 한다. 꿈동산을 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숙녀의 치명적인 매력을 찬미해야 하는 임무를 게을리할 수도 없다. 막 그러면서. 더 말해 무엇하겠소!
   하지만 친구들이 특별히 심술궂거나 유별날 정도로 의뭉스러운 건 아니기 때문에, 잠깐 구경하고 모두 자기 삶으로 돌아갔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면 한발 먼저 내가 후한 대접이라도 할 걸 그랬나. 대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열로 지칭하든, 정열의 열 열애의 열이든, 작품 또는 사건이라 부르건, 어찌되었든 그 제5열이 무엇인가, 제5열이 언제 나타날 것인가,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제5열의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는가를 알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 심오한 과제는 쩌렁쩌렁 내 심금을 백 번 천 번 울렸고, 나 역시 그것에 대한 고민을 결코 서투르게 치부할 수 없었다.


   12

   다음 날이 되었다. 색다른 유혹의 속삭임은 없었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연기를 하고, 색정적 사랑만을 탐닉하며, 제5열을 궁금해 하는 일에 넌덜머리가 나지도 않았다. 사는 게 사는 건가 라며 무턱대고 자유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를 셌고, 어제까지는 첫 번째 사랑 두 번째 애정 세 번째 몽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을 꿈꾸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제5열이 모든 것에 앞서 최우선이었다. 한번 터지면 멈추기 힘든 웃음을 그리워할 수도, 시간 여행을 믿을 수도, 사랑의 찬가 달콤한 오락 행운의 예감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지금은 오직 제5열 하나만 생각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날도 도시락을 싸서 언덕 위의 푸른 집으로 출근했다.
   도착해서 평소처럼 일을 하던 중 나는 어쩐지 이 고급 저택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쓸데없는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심심함이 위대한 창작으로, 허영기가 뜻밖의 미남의 발견으로(발견만?), 허당 중의 허당이 매우 드문 확률로 언젠가 일을 내도 크게 낸다는 걸 잘 아는 나였기에 나는 그 엉뚱한 의구심을 물고 늘어졌다. 마치 컹컹 킁킁 헉헉 냄새를 맡고 맨땅을 마구 신나게, 미친듯이, 열심히 파는 강아지처럼.
   결과는 별거 없었다. 앙드레 카잘렛! 여기 주인은 그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인물이다. 딱히 연상되는 브랜드도 저절로 떠오르는 힌트도 없었다. 바깥에 붙여진 팻말, 집을 판다는 부동산 주인장의 이름은 알랭 모글리아. 모르겠다. 아는 건 직관적으로 거기에 더 이상 시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현주인은 알았으니까, 혹시 이분께서 정식 용어로는 법정 대리인, 속칭으로 바지일지도 모르니까 전주인까지만 알아보자 라고 개구쟁이 같은 내 탐구욕을 다독거렸다. 바지? 바지까지 벋어주다, 사랑 주고 마음 주고 행복을 만족시키고 황금까지 다 주는데 그댄 왜 날 떠나려 하시나요, 의 그런 바지인가? 아무튼 나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타며 녹슬지 않은 정보력을 발휘한 끝에 뭇여성들이 사랑의 보금자리로 욕심낼 만한 이곳 저택의 전주인 이름을 알아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아 글쎄,
   마를린 쿠퍼!
   뭐 - 라 - 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니까. 그래서 웨스 앤더슨 영화류 포스터에 나오는 색상을 그대로 간직한 실제 장소가 어디 어디라더라,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소녀 감성 충만한 갈대 같은 내 마음을 잘 붙잡아서 불허했던 추측의 봉쇄를 풀고 말았다. 뭔가 느낌이 왔다. 살짝 냄새를 맡았다. 그 향기는 특이했다. 아마도 저번에 거리에서 만났던 마술사의 전부인, 즉 한때 잘나갔던 소설가 마를린 쿠퍼와 동일 인물은 아닐 꺼라는 감이 왔다. 나는 곧바로 사진까지 알아봤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하지만 이건 무용한 자료는 아닐 거라는 직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마를린 쿠퍼? 그 이름이 제5열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아마도 특별한 관계는 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놀라운 우연을 선물해 줄지도 모른다는 애잔한 추리력, 난 그것을 더더욱 물고 늘어졌다. 마를린 쿠퍼, MC! M은 13번째 알파벳, C는 3번째 알파벳. 13 + 3 = 16. 그리고 오늘은 16일. 심지어 금요일. 그렇다. 맞다. (딱)! 오늘은 16일의 금요일이다. 제5열의 숨은 세력은 몰라도 다섯 번째 작품의 날은 바로 오늘이라고 그것은 말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개구쟁이들이 합심해서 이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비밀을 혼자서 캐냈다? 그래서 난 천재다? 천재는 그냥 과자 이름에다, 시시한 립서비스요, 하찮은 노랫말로도 인기 없다. 하지만 내가 비록 둔재에 한없이 범속한 아저씨일지라도, 단지 나는 어리버리한 가난뱅이 한심한 삼류에 불과할 뿐(일시적이기를 바람), 지금은 한 껀 한 거다. 제대로 건졌다. 확실히 물었다. 진짜 그랬다. 처음으로 무슨 그림자인지 뭔지 그 제5열을 뒤에서 설계하고 조작하는 흑표범보다 앞서서 전개와 조망과 감독까지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 보는 것만 같은 환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의기양양한 기분 때문에 나는 큰 웃음은 자제했고, 팔짱을 낀 채 고개의 각도를 달리하며, 표정의 변화에 속도감을 부여했다. 하지만 말만 그랬지 별것도 아닌데 너무 들뜨면 안된다며 다시 침착하게 제5열과 나의 예술열을 어떻게 하면 연결시킬 수 있을까, 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막 그러면서 딱, 난 한껏 설레고 흥분된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신비한 제5열의 새로운 다음을 예견해? 믿을 수 없었지만, 신뢰감은 듬직했다. 오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고 감성에 넘어가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실망을 할 만큼 했고, 체념도 원없이 맛보았고, 절망은 그냥 내 생활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하수일 때는 그랬다. 조증이 도진 건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건 사랑이 시작됐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그렇다고 지금 내가 고수라는 말이 아니라 난 지금 1.5, 재야의 고수, 도박계의 미네르바, 나만의 비너스, 전문가가 추종하는 은둔형 권위자를 지향하며, 그래 쩜오를 추구하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신중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 말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 일은 이만 접고, 드디여 그 제5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갔다.


   13

   동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제5열을 확인했다. 냇물은 보이지도 않는데 신발부터 벗는다고 물론 나는 이미 기쁨의 찬가를 불렀고 희망의 단꿈을 꿨다. 사랑스러운 당신 오오, 날개 달린 천사 같은 그대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 계십니까 라며.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나의 말도 안되는 추리는 정확히 적중했다. 우연일 수도 있을 테지만, 어쩜 반가운 불청객이라 할 수 있는 그 극적인 때가 임박하는 동안 특별한 징후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니? 그게 다 번뜩이는 내 직감과 천재적인 추리력 때문. 농담이고, 생각해보니 제5열이 나타날 만한 시기가 된 거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따라서 나는 마침내 재치, 배장, 풍모, 익살에 격정과 품위까지 뭐 하나 결여된 게 없을 것만 같은 풍운아가 됐다. 숙녀 입장에서, 사랑의 큐피트 처지로 입각해서 봤을 때 너무 길한 행운 때문일까 불길한 악몽의 조짐을 반대로 해석한 결과, 미지의 신세계에서 날아온 듯한 귀공자를 만나게 됐다? 아니다. 난 바로 그 귀공자가 됐다. 결전의 날이 임박해서 엄청 호의호식한다랄지, 그날이 되기 전에 풍족한 호사를 대접한다랄지 그런 거룩한 섭리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고, 나는 당장 순진한 육식주의자가 됐다. 아 그러니까, 다 됐고, 도대체 그 제5열이 어? 대관절 뭐냐구요? 그건 이랬다.
   단추 많은 양복이 공중에 떠 있었다. 영락없이 언뜻 보면 투명 풍선에 매달리지 않은 투명 인간처럼 보였다. 그 뿐인가? 포도주병도 눈 높이에 떠있었고, 농구공 운동화 책 향수병 치킨 인형 빵... 다 떠나녔다. 뻥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 진짜로 떠다녔다. 어린애 눈높이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높이에서 말이다. 만질 수도 있었다. 몇몇은 만졌다. 하지만 문득 그러다 시간이 정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귓가와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쭉 날 뻔 하다가 말았다. 그러므로 난 내 마음을 속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뻐도 기쁜 게 아니고, 알고 믿고 봤지만 그 모두를 모른 체 했다. 무시했다. 걸려들면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앞으로 펼쳐질 제6 제7의 무언가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따라서 나는 곧바로 가택 감금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이때 만약 꽃밭에서 살랑살랑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며 노는 나비와 꿀벌들을 보게 된다면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환각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쎄한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도 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아름다운 그 특출난 제5열에 대한 흥분감은 도저히 가실 줄을 모른 채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 몽환, 이 느낌, 이 기분, 이 흥분, 이 행복, 이 환상, 이 신비, 이 저항할 수 없는 몰입감. 이 홀림, 이 꾀임, 이 반함, 이 꺼뻑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랑! 아 사랑이 아니라 지금은, 제 5 열! 나는 마구 되지도 않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상상해보오, 터질 듯한 가슴 참을 수 없는 욕망 부끄러워하는 숙녀, 하트 뿅뿅 반짝반짝 사과향 딸기맞 새콤달콤 키스 키스, 쾌락의 침대 신기한 환희 천상의 기쁨,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행복을 듣고 보고 꿈꾸며, 우리의 끝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인생을! 뿐인가? 곧 이어서 말도 안되는 시까지 썼다. 탐스런 금단의 열매에 첫눈에 반하다. 건강한 남아라면 눈독들이지 않고는 못배기는 저 매혹적인 자태 수줍은 애교, 모차르트를 애정하는 유쾌함, 외국영화를 동경하는 낭만적 허영심까지. 허허허, 발동 걸렸고 탄력 받았는데 딱 흐름을 탔는데 일기가 빠지면 섭하다. 몹시 서운하다. 많이 섭섭하다. 나는 일기장을 펼쳐놓고 또박또박 기쁨의 일기를 썼다. 열락과 열망을 그대로 글로 옮겨적었다. 오래오래 기다린 끝에 떨리는 가슴 안고 코끝이 찡한 사랑의 첫날 밤을 맞이하는 상상, 오오, 흐흐, 키키, 큭큭! 그 뿐만이 아니다. 말 같지도 않은 공상은 끊이질 않았다. 사랑의 기쁨을 애걸하고 사랑의 쾌락을 복걸하여, 그래서 사랑의 완성을 애걸복걸하다? 대놓고? 아니 남몰래! 혹시라도 누가 그러지 않겠나, 그게 무슨 (개)수작이냐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 개 풀 뜯어 먹는 흥미진진함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던 것이다. 혹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었다. 명백히 진짜였다. 의심할 수 없이 그 모두가 진짜였다. 볼을 꼬집어도 눈을 깜빡거려봐도 모두 현실이었다. 창문으로 훔쳐봐도, 쌍안경보다 뭔가 분위기 돋보이는 단안경으로 살펴봐도, 장비 없이 그냥 맨손을 웅크려서 눈에 갖다 대고 그게 장비인 것처럼 봐도 모두, 다, 완전, 진짜였다. 이런 기이한 전율감은 어디서 보도 듣도, 어느 귀인으로부터 듣도 보도 못했다. 읽어본 역사가 없었다. 오오 세상에 이럴 수가! 맙-소-사! 나는 나이키를 처음 사고 아마존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스무 살로 돌아갔다. 진짜로 느껴졌다. 우리반 그림 잘 그리던 친구한테 잡지에서 찍 찢은 헤비메탈 아 하드락 그룹 사진을 주면서 그림을 그려달라했고, 그 친구는 성적이 좀 뭐랄까 그만그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의 우정 때문에 수업 시간에 열심히 연필화를 그려서 내게 선물했으며, 나는 리치 블랙모어의 장비만이라도 흉내낸다고 또 스트라토캐스터를 목수랄지 조각가처럼 막 심혈을 기울여서 깎고 또 깎던 데 열중하던 땀방울이, 진짜로 느껴졌다. 그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만약 당시 공부에 쏟았다면 난 지금쯤...! 그리고 또 나는 테슬라의 러브송을 듣기 위해 록카페 안에서 음악실로 들어가다가 투명한 유리창에 꽝 부딪혔던 당시로 돌아갔다. 처음 샀던 CD를 들고와 집에서 TESLA를 처음 듣던 사춘기로, 음악당에서 작곡자 베를리오즈 곡명 환상교향곡 지휘자 오토 클렘퍼러 관현악단 어디, 바로 그 CD를 훔칠려다가 주인장 양반한테 딱 걸려서 혼쭐이 난 후 제값을 지불하고서 기분이 완전 꽝됐던 몽정기로 돌아갔다. (바로 그런 때, 이론 따로 실천 따로일 수도 있지만 사업 철학상 어떻게 해면 좋다는 걸 어른들은 아신다) 난 정말 어른들의 세상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의무 방어전이 궁금했던 것일까. 눈 꼭 감고서 양심을 모험심으로 덧칠하여 거짓말로 용돈을 타냈던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가짜가 아니라 눈에 아른아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찡할 정도로 눈에 선선히 보였다. 1층 여자 목욕실 2층 남탕 3층 독서실, 바로 3층을 올라가기 위해 거쳤던 입구에서 개구멍으로 훔쳐봤던 신비한 여체의 찬란한 뒷태가 보여서 가슴이 마구마구 쿵쾅쿵쾅거렸고, 아찔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난 더, 더, 더더, 더더더 계속 어려졌다. 동화책에서 알리바바를 처음 읽고 만화영화로 꿈나라에서 신밧드를 만나던 어린시절로, 추억의 디즈니 TV 만화영화에서 해설자의 달변에 깜빡 빠지고─꺼뻑 넘어가며─덥썩 신비감을 꽉 부여잡고─홀딱 반해서─덜컥 환상머신에 탑승하여─훌쩍 최면에 걸려버렸던 바로 그 꿈결 같던 땅꼬마 시절로 공손히 돌아가고야 말았다. 물론 우리반 여자애 더블 에스의 정말로 보드라울 것 같던 눈부신 뽀얀 엉덩이를, 후라이팬에 덴 처절한 아픔을 이겨낸 우리 동네 삼총사였던 불굴의 천진난만 아동 JH의 엉덩이를 처음 봤던 당시로, 신묘하게도, 나는 몸도 마음도 돌아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난 그렇게 곧바로 돼지꿈보다 복되고,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흡사 사랑의 대화처럼 달콤하며, 고전음악의 여러 익숙한 멜로디를 듣는 듯한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상상하기까지 좋은 환상에 주체하지 못하던 결과 내내 그 행복감의 손바닥 안에서 허우적거린 끝에 단잠에 빠져버렸다.


   14

   다음 날이던가 다다음 날이던가, 나는 모처럼 멀더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친구들이 모두 한꺼번에 모였을 때 제5열과 제5열의 배후와, 그래, 앞으로 펼쳐질 제6 제7의 미스테리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면서 그 얘기를 친구들에게 꺼냈다. 심심풀이의 목적이 아니라 진지한 어조로 약간의 과장을 첨가하여 기승전결을 살려서.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내 얘기는 말짱 도루묵이 되었고, 난 딱 묵사발이 됐다. 존도 엘리자베스도 크리스틴도 모두 간접화법을 구사했다. 하지만 델은 남자였다. 남자 중의 남자, 독설의 총아. 그러므로 녀석은 날 생각해서 내가 좀 정신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따끔하게 다음과 같이 날 한심한 듯 여기면 빈정거림 가득한 설을 풀었다. 물론 믿지 못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야, 인마!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어? 아 나 정말 얘 어디서 헛바람 잔뜩 들어가지고 이상한 얘기 또 하고 있어? (난 이때 도와주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의 귀염둥이인 톰과 리지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그래서? 냉정한 년! 톰과 리지는 꼭 둘이서 짠 것처럼 눈길을 돌리더라, 심지어 남자처럼 헛기침까지 하더라, 것도 아주 능숙하게, 난 진짜 걔들이 남자가 아닌가 멈칫 그렇게 생각함) 난 있잖아, 글을 읽으면 남자가 썼는지 여자가 썼는지 딱 알 수 있어. 한 85퍼센트쯤? 좀 비싼 그림을 내게 보여줘바라. 다 맞춰. 남자가 그렸는지 여자가 그렸는지를. 그건 한 90퍼센트 정도. 단, 반드시 작품이 비싸야 할 것! 응? 얼마 이상! 그리고 나는 유행가의 작곡자를 알아맞추는 건 아무리 해도 해도 안되지만 작사는 또 내가 기가 막히게 맞히잖니. 어? 남자가 가사를 썼는지 여자가 썼는지를. 너의 그 황당한 얘기들이 만약 추리소설이라면 내가 봤을 때 그건 남자가 쓴 것도 여자가 쓴 것도 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야! 결코! 어? 완전, 엄청, 꼭 아니라고!」
   「그럼 뭔데?」
   「뭐긴 뭐야! 뭐겠냐? 너도 생각을 하는 이성주의자라면 한번 어?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응? 뭘 물으면 대충 찍지는 못할망정 대답이라고 하는 말이 애처롭게 알고 싶다는 듯이 뭐냐고 그게. 응? 항상 뭐냐고 반문하는 게 뭐 늬 특기냐? 어?」
   「아 그니깐 시끄럽고. 그게 대체 뭐냐고? 그게 뭐야?」
   「그건, 바로, 허당이 쓴 졸작! 됐냐?」
   「돼기는 뭘 돼? 늬 같으면 됐겠냐?」
   「그럼 그렇지. 내가 너를 알잖냐. 응? 늬 마음이 훤히 보인다. 어디 나만 그러겠니? 저기 보이는 저 초상화 보이지?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자화상! 저 양반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니?」
   「아, 됐어. 뭐라고 하든가 말든가.」
   「안 들려? 하긴 나도 안들린다. 언제적 활동하시던 분인데 말씀을 하시겠니. 그런데 오늘따라 부쩍 자화상이 나한테 말을 거네? 응? 저기 술병들 사이에 자화상 보이지?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스탠리 스펜서의 자화상이야. 1936년작. 패트리샤 프리샤와 함께 있는 자화상. 저 그림 꽤 사연이 있지. 더블 에스가 더블 피에게 반해서 사랑과 예술혼과 집 문서까지 내주고, 결국, 집 날리고 아내와 이혼하고 더블 피까지 떠나서 하룻밤 풋사랑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더라, 라는 바로 그 그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할까? 했을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유행가 가사 같은 우리네 인생 그런 건 모르겠고, 인생은 어쩌면 그런 표어 같은 게 아닐까? 그건 바로, 밀림의 중간 보스인 사자도 생쥐를 잡을 때는 최선을 다 한다. 아니 왜?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 법이니까.」
   「아 그러니까, 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어?」
   「난 다만 더블 에스의 나직한 음성이 들릴 뿐이라고.」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고 지겨워도 지겨워도 정말 너무하지만, 한번 들어나 보자. 내가 접어야지 늬가 꺾길 바라겠니. 그래. 더블 에스가 뭐라는데? 젠장, 대체 그 양반이 뭐라 하시냐고?」
   「미스터 스펜서는 내게 이렇게 정중히 말하시네? (딱) 정신차려 이 친구야! 라고.」
   나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묵묵히 글쓰기에 정진하고 싶었으니까 씁쓸한 충고를 연료 삼아 경이로운 주문으로 삼고자 했던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습관이 일상이 되니까 속절없이 당하는 게 자연스럽고 또 나도 그게 좋았다. 오락 같은 세상이자 허풍꾼의 시대요 허당의 전성기가 아니던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말귀와 글귀를 모으면 뭐라도 된다는 걸 옛날에─정말?─깨달았으니까. 기억력의 극치라는 왕좌 자리는 내 차지가 아니기 때문일까, 큰 재주 없이 잔재주만 그만그만하게, 딱 사극에서 양반이 애첩 거느리듯 수하에 거두었기 때문일까. 귀동냥과 잔지식을 총동원하여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타고난 말주변이 어디 가겠나. 알고 보니 난 지극히 정상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 체 하자면 그래야 귀가 즐거웠고, 뭐랄까, 외람되오나 그래야 마음도 안심이 됐다. 바로 그래야 여기서 들은 말로 딴 데서 아양을 떨고 아부도 할 수 있었다. 지금껏 나한테 술 산 친구들 그 돈 모두 모았으면...! (이 말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지? 내가 글로 썼던 말이 아닌데, 어떻게 기록으로 남았을까? 아하, 백퍼센트 그거다. 내 안의 그분께서 잠깐 얼굴만 비추신 거구나. 한 문단에서 저 문장이 대체 왜 들어가 있나 했더니만 글세...!) 나는 보고 들은 말과 읽고 연구하고 알아낸 글을 써먹을 데가 없으면 (좋게 말해) 무의식의 창고에 차곡차곡 챙겨놨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난중 장미다발도 사랑도 대망도 사이렌과 판도라의 상자까지 모두 나의 사랑에게 바쳐야 하니까, 그런 희망은 변치 않았다. 처음에 잘 길들이느냐 초장에 잡느냐, 그건 뭐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원래 우리는 이러면서 놀았다. 그게 재밌었다. 당당한 압운과 낭랑한 운율이 어색한지 고결한지는 모르겠고, 우리식 대화의 즐거움은 말장난이 전부였으니까.
   일단은 그렇게 제5열은 거기서 마무리됐다. 그 다음 새로운 6번 타자가 나타날지 색다른 연작2탄이 시작될지는 두고 봐야 했다.


   15

   나는 식스맨의 출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가 까꿍 하며 나타나면 그때 가서 시치미를 떼든 놀라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든, 그건 그때 가서 감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의 요청으로 환상 문학과는 꽤 거리가 먼 연애에 관한 수필을 작성했다. 내가 완성해서 보낸 글이 미스테리아 제일 뒤에 실릴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원고료는 두둑하게 받았겠다 나중 편집장이 선물도 주고 술도 사겠다는데, 내가 쓴 일기를 누가 몰래 봐주지 않을까 그런 애원 어린 걱정일랑 허공 속으로 날려보냈다. 그 글이 대체 얼마나 짜잔한 사랑론이길래 잠시 확인이나 해 보자. (형편없기만 해 봐라?) 읽어 봐서 썩 가치가 아예 없지 않다면 슥 넘어가고, 퍽이나 훌륭하다면 곤장을 그냥...! 각설하고 자, 연애담인지 환상론인지 뚱딴지인지 그 뭔가를 즉각 읽어보자.
   기본적으로, 여자는 착하고 숙녀는 순진하다. 대체 여자와 숙녀가 뭔 차이가 있냐고 물어보는 남자, 속으로만 뭐지 뭐지 라며 생각하는 여자, 둘 다 똑같다. 그건 그렇고 여자는 뭘 말하면 그냥 자연스럽게 믿는다. 여자는 저절로 믿는다. 우리는 보면 안다. 여자는 속는 걸로 도가 튼 다음에도 또 속는다. 그런데 남자는? 남자는, 남자는 무조건 안 믿고 무조건 허세와 딴지와 허풍으로 일관한다. 친하다면 그게 기본이다. 만일 정중하고 예스럽다면 친하지 않거나 백조랄지 딱따구리과다. 또는 뭘 좀 아는 거고. 남자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넘어가고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자가 꽃이고 남자가 꿀벌이라고 가정했을 때 재미난 예가 있다. 상남자로써 모든 게 완벽한데, 그런데 유독 여자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그런 남자가 있다. 왜 그럴까? 그분은 왜 그러냐면, 왜냐하면 그런 남자는 여자보다 더 착하고 더 순진하기 때문이다. 허당은 허당인데 은근이란 딱지는 부여할 수 없음. 절대로. 그래 봐야 허세는 피할 수 없는 운명. 허영심이란 나비를 쫓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나 잘 잡히지는 않고. 마음만 심란할 뿐. 이러니까 사랑은 양분됨. 나비와 나방으로. 타고난 성정 때문일까, 정작 필요할 땐 허풍은 구사조차 할 수 없음. 그래서 촌닭도 둘로 나뉨. 모두 함께 편하게 말을 놓는 친한 사이라면 모를까 바깥에서 내 짝에게 경어를 쓰냐 아니냐로. 그렇다고 어디서 얘기를 듣게 되면 내가 그런 상식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아, 하면서 곧이곧대로 경어만 계속 써 보시라. 나중 어떻게 될까? 드디여 여자의 이상형으로 변모하여 신비주의자, 낭만주의자, 고전주의자, 신사등 뭔가 하나 감미로운 애칭을 얻지 않을까? 과연, 퍽이나 그러겠다. 듣기 불편한 감투나 얻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아마도 이렇지 않을런지. 응당 그럴 것이다. 응용하면 왠지 지는 것 같으니까 하나를 하면 내내 그것만 계속함. 그렇구나 라는 완곡어법은 허용할 수 없는 인생. 그런데 신기한 점은 여자도 그렇다는 점. 영화배우 뺨 칠만큼 잘생긴 사람과 성우는 저리 가라 해도 될 정도에 해당하는 고혹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를 만난다면 딱 한번 말하고 넘어갈 그녀가 아니다. 딱 한번? 아님 딱 두 번, 끝? 어디 그게 여... 연예인병은 몰라도 공주병이 걱정되고 일중독이 의심된다. 진심이기를 바래야겠지만, 불만의 원인을 파악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처방은, 일단 하고 보자. 아무튼, 참을성이 없다랄지 감탄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숙녀는 예찬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여자니까. 그럼 남자는 어떻게 되겠나. 뚜껑이 열리고 그분이 오셔야지 별 수 있나.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허영심과 질투심은 여자로써 일평생 귀여워하며 아름답고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양대산맥이다. 따라서 합리주의, 싸구려, 격조, 취향, 교양미, 구미와 안목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동물 유형에 대한 변별력과 숙녀를 아껴줄 수 있는가, 라는 남자의 어떤 천재성에 대한 감식력까지 훌륭한 숙녀는 하고 싶은 말을 잘 참는다. 애써서 꾹. 하지만 섬세한 남자는 그런 여자의 인내심까지 귀신처럼 감지한다. 여자와 남자, 커피포트와 진공청소기, 그건 매번 교차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세상사고 인생이다. 다시 어쩜 그렇게 고지식할 수 있는지 신기한 그이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그렇긴 해도 그분도 나름 호인에 대인배이기 때문에 그런 풍문을 혹시라도 우연히 전해듣고서 기분 나빠할 그런 꽉 막힌 위인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그건 진짜 쪼다, 뭐, 뭐, 말 다 한 거니까. 그러니 기왕지사 시작한 험담인지 성격 분석인지 뭔지, 까짓껏 계속 가자. 영화에 나올 거다. 그런 남자한테는 작전을 짜서 낚시할 때 고기를 잡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그분이 고기를 잡는다. 낚아 올린다. 그런데 그 물고기는 냉동 상태다. 시간이 정지되거나 특수 현상이냐고? 작전이 어설펐거나 실행 착오랄지 귀찮아서 그랬겠지. 따라서 이건 뭐지 뭐지, 라면서 그는 기뻐함과 더불어 황당해 한다. 바로 그때 옆에서 분위기 쓰윽 잡고 상황 몰아가서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만약 낚시를 잘한다? 그 작전은 사전에 취소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여자는 그 어떤 남자와 내가 어울릴까, 또는 내가 그분과 사랑을 꿈꾸어도 될까, 아니면 혼잣말로 어딜 넘봐 라며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라고 가정했을 때 여자의 마음은 낱낱히 드러나고야 만다. 그 황홀함으로 어디서 짝을 찾을 수 없는 나신, 그 속마음은 숨기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내고야 만다. (딱)! 우리는 보면 알고 안 봐도 안다. 우리는! 따라서 한 남자와 여자와 애정과 사랑은 단 한 문장으로 명쾌히 결론난다. 숨기지도 감추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딱 결론난다. 그건 뭘까? 뭐겠나.
   여자는, 바람둥이를, 좋아한다.
   (보너스) 여자는 '그냥' 허당을 좋아하고 천재를 흠모하는데, 하지만 숙녀는 '은근' 허당을 편애하며 바람둥이를 사랑한다.
   이 명제에 반대하는 사람? 조용조용히, 솔직히 동의하는 사람이라고 소곤거릴 걸 그랬나. 내가 원래 천리안에다 수퍼맨의 청력에 버금가는 초능력을 지녔는데 대체 지금 왜 이러지? 왜 이럴까? 왜 이러긴 뭐가 왜 이래! 게다가 내가 그걸 알 리가 있나. 행색이 이렇고 생활 습관이 이 모냥인데. 안 그런가요? 안 그렇단다. 시간 끌며 애태우지 말고 어서 결론 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제발! 하오나 결론에 앞서 1과 2의 잘잘못과 불합리를 지적하고, 미완성에 반대하며, 불만족을 슬퍼하자. 그건 곧 철지난, 지나도 한참 지난 카피라이트 같은 말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각자 명사와 동사를 마음에 드는 위치로 이합집산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뜸 그만 들이고 결론을 간출이자면 이렇다. 여자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 바로 그것! 여기서부터는 정확함보다는 문제 제기를 선호하는 게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래야 여자에게 칭찬받고 숙녀한테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뭘 좀 아는 남자라면 이때 자연스럽게, 술술, 능숙하게 객관식 보기를 제시할 것이다. 아마도! 왜냐하면 그래야 하니까. 하지만 어쩌면 어느 멋진 남자한테(어머머 남자들?) 호되게 당한 어느 아가씨께 서늘한 험담을 얻어들을 수도 있을 테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어서 보기를 들어보자. 첫째 지적이냐, 남자가 지적이냐 지적이지 않냐. 둘째, 바람둥이 스타일인가. 셋째, 그이는 여성스럽냐. 넷째, 오오 넷째부터는 아아, 그만 그만! 아 참고로 첨언하자면 웃기고 밝고 어쩌고 이러쿵저러쿵, 그건 다 저 2번에 포함되는 걸로. 원래 여기서부터는 유료로 전환되거나 개인교습이 적절한 상도덕에 해당하지 않을 런지. 분위기 잡고 폴 모리아 악단의 명곡을 잔잔히 틀어놓고서 속닥속닥, 바로 그렇게. 어떤 남자가, 누군가가 바람둥이인지 아닌지 그건 잘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난다면 그는 자발 말고 그녀의 마음을 뺐고자 한다는 것! 귀신도 모를 만큼 감쪽같이. 으잉, 자발? 만일 자발에서 파생된 변종이더라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런데 간혹 드물게(?) 초장에 하산하거라 하면서 맷돼지를 내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아하 그녀는 바로 이런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라면서 얜 아니다 싶으면 안녕하며 일찍 떠나보내야지 뭐 별수 있나. 냉정하게, 털어낼 건 털어내는 게 좋다. 그래야 소중한 인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맺고 끊는 거를 잘 못하면 살면서 얘깃거리가 많아진다. 직업적으로 그게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러든 어쩌든 행복과 성공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따지고 보면, 지나고 보니까 때로는 햄릿형이 때로는 돈키호테형이 낫더라. 그러다 어느 날 사랑이라는 행운이 당신께 찾아올 것이다. 곧 조숙하든 순진하든 돌아이든 일장일단이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행운이 내게 찾아오지, 바로 그처럼 놀랍도록 아름답고 새로운 숙녀는 어머머, 웃네 완전 방긋 웃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이미 게임 끝난 거다! 우리는 원래 금방 친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해도 해도 여자를 모르는 남자가 있다는 것. 그런 친구를 보고 있으면 참 답답허다, 답답해!


   16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쇼핑을 했다. 요즘 출간된 인문교양서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 있길래 슥 살펴봤고, 덥썩 구입했다. 댄 라이언스의 천재들의 대참사. 그렇지만 쇼핑은 그게 다였다. 이젠 뭘 사는 것도 귀찮아진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환절기라서 기분탓일지도 모르겠다. 저속한 사치가 제발로 내게 찾아오고 하찮은 호사를 거부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말 그대로 만사가 귀찮았던 것이다. 좌우간 나는 아침이면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소셜 네트워크를 구경했다. 점심이 가까와 오면 언제나 점심은 뭘 먹을까를 고민했고. 그러다 이대로 제6열을 기다리기만 하는 건, 이건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7번 작품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탄생시키든 어쩌든 선수칠 궁리에 대한 방안 역시 간과할 수는 없었다. 허둥지둥 야단법석을 부리며 바쁘게 날뛰지는 않더라도, 우왕좌왕 어느 (화가명)풍 모험가의 탐험심을 본뜬다면서 안절부절 초조해하지 않더라도, 가서 확인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긴 어디? 바로, 전망 좋은 저택! 아직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으니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혹시 누구? 그러면서 이 가운데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내가 새로운 검은 그림자가 될까? 그런 공상도 마다하지는 않았다. 지금 형편에 사랑에 흠뻑 취해 다른 인연은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을 꿈꿀 수는 없으니까, 잡념을 모두 접고서 나는 당장 그곳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언제나 매번 이상한 일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길가에 핀 들꽃을 봤는데 나는 그 꽃이 혹시 제비꽃은 아닐까 궁금했다. 제비꽃은 글로 아마도 최소 100번 이상 읽었을 텐데 난 아직도 그 이름에 대해 어디서 아는 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 할 기회가 생긴다면 몰라도 난 그런 느끼한 허풍쟁이나 유들유들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니까. 종이 한 장 차이가 대체 뭘 뜻하는지는 아마 내 영원한 숙제인가 보다. 그리고 가는 길에 대낮인데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해는 매번 날이면 날마다 어김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러나 달님은 해님처럼 단조롭지 않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뜨는지 알아도 쉽게 잊어먹을 만큼 떴다 지는 게 변화무쌍하다. 참 기특하게도 말이다. 문득 달을 보니까 생각했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별로 몰랐던 옛날에는 별이라고 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낭만적이었을 것이라고. 하긴 현대인들조차 태양이 공전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단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나는 언덕 위에 위치한 전망 좋은 저택에 도착했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달리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별일없이 한동안 노트북을 켜서 일을 했고, 쉬는 시간을 맞이해서 휴식을 취할려고 바깥으로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일이지? 문이 잠겨버렸다. 할 수 없이 나는 톰과 리지에게 연락했고, 톰과 리지는 열 일 제쳐 놓고 서둘러 날 구하러 달려왔다. 당연히 그녀들은 자기들만 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친구들도 구경했기 때문에 같이 바람쐬러 가자면서 친구들을 대동해온 것이다. 그런데 재주 좋은 녀석들도 문을 열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리창을 깼고 상황은 종료됐다. 그런데 이걸 수리를 해놓자니 뭔가 찜찜하고, 안 하자니 도리에 어긋나고, 그러나 분명한 건 다시 여기에 들리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뒷처리는 어떻게 간신히 해결했고, 우린 특별히 놀 구실이 없었기 때문에 흩어졌으며, 난 달리 유난떨 만한 숙원이 있는지 찾아봤다. 없었다. 흥미로운 일도 혹하는 사건도, 성미를 현혹하는 관심도. 뿐만 아니라 면박당할 나의 잘못도 장비 때문에 뭔가 꿀린 것 아닌가 라는 그런 대결 구도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진가를 발휘할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딱히 어디 갈 데가 없었으니까, 정처없이 떠돌 수는 없어서 내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웬 요정이 날 반겼을까? 어인 일로 행차시요 라고?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딱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바로 내 사무실 소파 위에 있는 그림이 갸우뚱해진 거. 앗, 혹시...? 나는 황급히 액자의 뒤를 살펴봤다. 그런데 뒤를 봤더니 아니나 글쎄, 비밀 금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와우!
   앗싸!
   야호!
   이거야~ 이거라니까!
   나는 먼저 아니 이게 웬 떡이야 하면서 놀랐다. 그 즉시 나는 환호성으로 비밀스런 축복에 대한 갈채를 실현한 다음, 흐뭇한 표정과 함께 두손을 슥삭슥삭 비비면서 어떻게 요리할까 고심했다. 그러고 나서 저 안에 든 황금과 무슨 증서와 유가증권과 상금은 물론 복권과 초대권까지 정말 내가 다 가져도 될까, 막 그러면서 초조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을 부르르 떨면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를 냈다. 행복한 고민은 나중 하자면서 나는 서둘러 금고를 열려고 딱 자세히 살펴봤다.
   그런데 그건 금고긴 금곤데, 그림만 금고였다.
   아니 뭐야 이거? 누가 이런 장난을! 이건 친구한테도 바텐더한테도 이실직고하면 안된다. 절대 안된다. 장난친 사람 허를 찔러야 하니까. 왜냐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날 바보라고 할 테니까. 누가 알아요? 검은 그림자가 찍은 천재가 바로 당신일지? 그런 품위 있는 깐족에 당할 내가 아니다. 이젠 속임수든 허탕이든 뻥이든 뭐든, 당할 만큼 당했고, 마침내 내가 허당 중의 상허당이 됐으니까. 세상 모든 재주를 내가 다 흡수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어느 별명이든 무난히 내 차지가 되었다. 그게 바로 허당의 특징이니까. 지금에 와서는 뭐랄까 재능보다는 운수를 부를 줄 알았고, 불행 속에서 행운이란 치즈에 무슨 빨판처럼 딱 달라붙어서 줄을 살살 당기는 각종 업계 관계자들의 흑심을 파악할 줄 알게 됐다. 따라서 나는 여자들의 허영심을 역이용하고, 남자들의 허세에 관하여 역발상으로 접근했으며, 그러므로 허풍의 신세계를 창안하는 새로운 견자로 거듭나게 됐다. 일단 말로는. 그걸 작품으로 옮길 수 있는가 없는가는 차차 확인하기로 하고, 어쨌든 그렇게 그날 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


   17

   나는 클래식 기타를 하나 샀다. 최고급에서 약간 아래 품목으로. 왜냐하면 그걸로 고전음악을 연주하고, 최신곡을 노래부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3분의 마법도 모두 클래식 기타로 연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일거양득! 그렇게 연습하던 끝에 초보 딱지는 겨우 뗐다. 그런데 권태라는 악마는 벌써 날 찾아왔다. 고급 장비를 산지 얼마나 됐다고.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 친구는 사이렌처럼 막 내 귓가에 사랑 고백이 아니라 장난기 가득한 권유랄지 다정한 정담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들어본 결과 요점은 그거였다. 클래식 기타 연습하는 거 지겹지 않냐고. 넌 원래 뭘 해도 재미없어 하는 인간 아니냐고. 다 커서 그거 연습해서 어디 대회를 나갈 테냐, 아니면 공연이라도 할려고 그러냐면서 나의 타성을 막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딴 거 해보는 게 어떠냐면서 타락을 부추겼고, 호색한의 명예를 되찾고 싶지 않냐고 날 괴롭히는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 결정할 게 아니라 당분간 기분 전환을 하고 나서 연습을 계속할지, 아니면 머머접습니다 라면서 악기와 이별할지, 또는 그냥 진열품으로 방치할지 어쩔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한적한 해변으로 떠났다. 한가하고 평화로운 해변가에서 내가 했던 일은 이랬다. 일광욕을 즐겼고, 일순간 경미한 관음증의 유혹을 이겨냈고, 노을을 바라보며 시상에 젖었다. 실제 시도 썼다. 특별할 건 없었다. 시를 쓰면 시인이고, 노래하면 가수, 풍경을 스케치만 하면 화가니까. 내가 쓴 시는 이랬다.
   발랄한 몽상은 언제나 기쁜 젊음을 유혹한다. 바다 역시나.
   오 그대에게, 마술 같은 우리 미래의 행복을 축원하자꾸나.
   아아 바다여 약속해 다오, 예언이 적중할 것이라고.
   내 사랑이여 맹세해 주오, 허풍은 더 이상 거짓이 아니라고.
   희망의 여신이여, 눈물을 기억하고 사랑을 노래하며 달콤한 예감을 이야기하자. (끝)
   그건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낙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 쌀쌀한 날씨에 계속 일광욕만 할 수도 없었고, 책 읽는 것도 따분했고, 해변의 미녀를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할일을 찾게 됐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즉 나는 낚시를 빠트릴 순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도전 끝에 결국 대물을 낚고야 말았다.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요술 주문을 외워볼까요, 아직 좀 더 기다릴까요? 한눈팔 때 별안간, 얍~!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룰루랄라 랄라라 룰루랄라 랄라라, 날 따라 해 봐요 이렇게!
   신비한 요정들의 마법 세계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라네!
   쿵짝쿵짝,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반짝반짝,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렇게 멋진 날, 랄라랄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대물입니다! 아이참 재미있다!
   돼지는 꿀꿀꿀 개구리는 개굴개굴 강아지는 멍멍멍 병아리는 삐약삐약, 그런데 나는야 대물이라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난 찌르찌르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데르센도 알고요
   저 무지개를 넘어 파란 나라 있나요? 저 파란 하늘 끝엔 거기 있나요?
   동화책 속에 있고 텔레비전에 있고 아빠의 꿈에 엄마의 눈 속에 언제나 있는 나라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어서 생각만 하는 나라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헤어질 때 또 만나요 뽀뽀뽀
   우리는 귀염둥이 뽀뽀뽀 친구
   뽀뽀뽀 뽀뽀뽀 뽀뽀뽀 친구
 
   나는 도레미송이 절로 나왔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콧노래는 멈출 줄을 몰랐다. 물론 난관은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모두 이겨냈다. 힘든 노력은 알찬 결실을 맺고야 말았다. 탐스런 과일을 따서 상큼한 과즙을 맞보는 일은 결코 상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내가 실망과 체념과 절망의 뒤치닥거리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는 나도 어엿하게 대망과 열망과 선망, 적어도 양쪽에 긍정적인 지성과 아름다운 미녀를 꿰찰 때도 됐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짧은 시간 느꼈던 긴 행복감을 잠시 접고 묵직한, 아니 대체 얼마나 큰 대물이길래, 꿈을 낚는 철학자와 조우하기를 한사코 거부하시는 바로 그 물고기님을 잘 달래서 녀석을 겨우겨우 물 바깥으로 들어올렸다. 나 원 참, 이거 뭐야? 대체 왜 이렇게 안 올라오지? 고래야 뭐야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라면서 영차영차 열심히 끌어올렸다. 내가 어떤 대물을 잡았는지 듣고나면 아마 깜작 놀랄 것이다. 어쩌면 너무 떨려서 살짝 혼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뿔사!
   그건, 내가 잡은 그건, 큼직한 물고기는 글쎄 대물은 대물인데, 이걸 뭐라 해야 하지? 뭐랄까, 그건 냉동된, 냉장고 냉동실에서 꺼낸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냉동된 대물이었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있을 수 있지, 라면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팔딱팔딱 생동감 넘치는 진짜 물고기가 아니라 냉동 물고기? 오오, 저런! 그나마 생선 스테이크가 아니니까 다행인 건가? 다행은 무슨! 동태, 명태, 생태에서 왜 하필 내게만 동태가? 나는 매료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만화영화 명해설자가 말하는 몸서리치게 아찔한 환청을 마침내 듣고야 말았다. 그건 무엇일까? 내가 들은 자상한 어조의 간곡한 진술은 바로 이와 같았다.
   「어차피 진짜 미스테리라면 이왕 실감날 거 마른 것보단 언 게 더 낫지 않겠어요?」
   뭐라고? 마른 것보단... 마르... 뭐가, 어쩌고, 어째?
   제1탄이니 제5열이니 증거도 모조리 사라졌는데 무슨 근거로 뭐, 언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그럼 그렇지! ......(심호흡)...... 뭐야 정말 아후!
   ......(휴)......
   어판장에서 파는 생선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생물과 생물이 아닌 것. 비록 후자에 속할지라도 해동이 됐고 적당히 신선했다면 그럼 과연 내가 속았을까? 절묘하게까지는 어려워도 약간 긴가민가? 속기는! 하지만 또 모른다. 한번 가정을 해 보자. 심지어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 나왔듯이 실제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엄연히 내가 원하는 목표가 분명했고, 중간 과정에서 잡히냐 놓치냐 물고기님과 꽤 애타는 흥정이 있었으며, 약간의 고생 후 다행스럽게 우리는 만났다. 적어도 밀고 당기기가 있었고, 최소한 교감이 스치기는 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빛을 봤다. 엄정히 결과만 놓고 보자면 물고기님의 눈빛은 뭐라 말하기가 썩 곤란했지만. 하지만 말이다, 일방적이기 때문에 애절한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야 할 인연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로 그때 절묘하게 녀석을 올리자마자 팔딱팔딱하는 전자에서 팔딱팔딱하지 않는 후자로 넘어갈 가능성도 완전 없는 건 아니다. 낚시 많이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뭍으로 나오면 일단 물고기는 더 이상 홈그라운드가 아니기 때문에 뭐 어쩐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따라서 해동이 좀 더 잘됐다면 내 실망감은 훨씬 덜했을 테고, 내 절망감 역시 잠깐 스쳐지나가는 풋사랑과의 이별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심지어 확인 후 체념했지만 확인 전에는, 뭐랄까, 물고기님과 그 짧은 시간에 약간의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런 측면이 정말 없잖아 있었다. 그야 어찌 됐든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난 갑자기 뜬금없이 사랑의 정의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절정의 순간에는 항상 뭐뭐증이 나섰다. 조증은 탄력 받기 힘들고, 허언증은 지쳤고, 조급증은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올려다 3군으로 미끄러졌으니 지금은 단연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생각했다. 뜸 들일 필요도 없었다. 사랑! 사랑이 찐해야 하냐, 동심을 움직이는 동화처럼 순수해야 하나! 사랑은 전자가 옳을까 후자가 괜찮을까? 사랑은 연필로 써야 하나, 뭘로 쓰든 일단 쓰고 나서 보자! 정말로 사랑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는 것, 어쩌면 그게 진짜 인생 아닐까? 사랑이 뭐 길거리 마술쇼도, 소풍의 풍선놀이도, 강아지가 애정하는 테니스공도 아니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사랑은 바로 솜사탕 같다는 것. 사랑이 솜사탕이든 아이스크림이든 사랑의 정의가 그렇다면 로맨시티스가 할 일도 정해진다. 단, 사랑을 받는 숙녀여! 그대의 할 말도 범위는 좁혀졌다. 그걸 설명하는 게 곧 작가의 사명이다. 로맨티스트의 할 일과 숙녀의 할 말과 작가가 써야 할 글은 알고 보면 어쩜 비슷비슷할 수도 있다. 작가가 딴 게 작가가 아니라 숙녀의 비서요, 일반인의 대변인에, 환상적인 해설자 그의 이름은 바로 작가인 것이다. 아니 그런가요?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자상함을 하나 받고 너그로움을 하나 화답하자. 왜냐하면 예찬과 칭송과 선물도 그럼 그럼 사랑까지 그녀는 받고자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말은 다 다르다. 사랑은 뭐다, 사랑은 어...(사석이 아니니까 쉿!) 호탕하게 싸워야 진짜 사랑이다 어쩐다, 다 맞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사랑은 하나다. 여자에게 사랑은 바로 이기적이라는 것. 맞다. 여자는 원래 천동설이다. 그렇다. (그러니 여자끼리 모여 있으면 오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눈치 백 단이면 스쳐지나가도 눈빛 한번이면 충분하다, 아빠만 빼고 모든 남자가 늑대다 라는 말이 맞다면 여자 역시 내 사랑만 빼고 모든 여자는 불?여우다 라는 말은 진리다) 진짜(?) 솜사탕과 순수라는 이름의 우유와 모파상의 명언이 쓰인 엽서나 오 헨리의 단편집을 선물하는 남자의 세심함을 칭찬합시다. 짠-하며 화사한 꽃다발을 안겨줬드니 아 글쎄 이 돈이면 어쩌고저쩌고, 라는 야박한 꾸짖음만이라도 꾹 참자. 일반적으로 의전과 의무는 비례한다. 그런데 거기에 덥썩 얹어보자. 배팅을 멈추지 말자. 추억을, 사랑을, 배려를! 의전과 쫄망쫄망을 반대로만 하지 않기를! 그것으로 그녀를 만족시키고 진정시키고 아주 간혹 감동시킨다면 그녀는 당신을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다. 여자는 그 무엇을 안겨준 남자를 절대 떠날 수 없다. 결코 못 떠난다. 그럴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니까. 왜 여자에게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가, 그런가 아닌가를 얘기하는 남자는 뭘 모르는 남자고, 이럴 때는 가만히 말없이 왜 그럴까를 추론해야 한다. 그걸 아는 남자는 마음이 편하다. 단, 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여자를 알았고, 사랑엔 조숙했고, 인기와 호박과 신비는 모두 영원한 우정이었으며, 인생을 새롭게 정의했고, 세상을 두루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셨던 바로 그분들께서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니까. 사랑은 없어, 라고! 물론 농담일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진짜로 어렵고, 드물고, 힘들 테지만 그 반대이기를! 안 그렇소, 이 세상의 숙녀들이여? 그냥 저냥 조용조용히, 좋게 좋게, 쉬엄쉬엄 넘어갔더니 그이는 글쎄 정말 해도 해도...... 안되겠소, 우리 모두, 들고 일어섭시다? 워─워─워! 하지만 일단은 사랑은 없다인 걸로. 당분간만요! 그렇게,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은 주관식인 것 같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이고, 우리가 살면서 앞서 나온 그 무엇을 내 인생의 모토로 삼느냐, 또는 잠깐 쓰다가 헌 양말 버리듯이 포기하느냐, 그 모두가 개인의 마음이지만 딱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 제5열처럼, 이건, 뭔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게 정말 말이나 되냔 말이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어떻게 내게 있을 수 있냐고. 하지만 현실로 맞이했다. 그럼. 참으로, 기뻐서 덩실덩실 거리에서 발가벗고 춤이라고 추고 싶구나 글쎄. 그렇다고 다른 일은 또 뭐 얼마나 나와 어울렸나! 그러면서 감히 제6탄이 괜찮냐 괜찮지 않냐, 제6열이 맞냐 아니냐를 따질 계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러고 보니, 언뜻, 들었다. 그러든 어쩌든 결과는 물릴 수 없었다. 내가 쥔 패는 그게 최선이었고, 새로운 다음을 기약할 힘도 다 빠져버렸다. 그게 중요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지 어쩔 수 있나.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뭐.
   그래... 음... 흐흠... 언 게 낫다라... 언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천국의 계단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그렇지. 나는 가까스로 환영에 이은 환청을 뿌리치고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야 어쨌든 내가 겪은 환상은 진짜였으니까. 믿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젠 숫자를 세는 것도 잊어먹었다. 숫자? 숫자를 세는 낭만이라면 이젠 귀찮고, 싫고, 진작 지쳐버렸다. 언제는 몇 차 작품이네, 몇 탄이네, 제 몇 열이네, 뭐네 뭐네 바쁘게 설레고 들떠서 좋아하더니만, 결국 난 검은 그림자한테 당하고야 말았다. 꼼짝없이 당해버렸다. 난 정말 내가 어린 동심과 모든 여심을, 게다가 날 만나고 싶어서 애달파하는 대물은 물론, 심지어 많은 여복을 요리할 궁리로 흥미진진하게 촐싹거리며 보글보글, 뽀글뽀글 너무나도 맛날 것 같은 스프를 젓는 가가멜인줄 알았는데...! 언젠가 반드시 머머하고 말 테야 라며 당돌하고, 당차고, 의뭉스러우며, 불독의 트레이크 마크인 바로 그 삥 둘러 뿔 달린 목걸이를 찬 검은 고양이를 꾸중하는 그 만화영화에 나오는 악당이 바로 나라는 걸 알게 됐다. 하물며 그날 내가 입은 옷은 웬 유니폼이었고, 등번호는 하필 바로 7번이었다. 엎친 데 덥친 격이었다. 이런, 젠장! 내가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 기고했던 수필에 나오는, 바로 그 은근이란 고품격 마크가 요원한 허당, 뼛속까지 허당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나는, 허당 중의 상허당이라고? 노노노노노노노! 허당 중의 하허당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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