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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12. 22.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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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는 칼럼을 또 썼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 나름 뽐내고 멋을 부리고 싶었으니까. 아직 약속도 축제도 정해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용돈도 비상금도 생활비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 다른 글을 썼다. 기존 글과 뭐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그것은 일기도, 수필도, 컬럼도, 여행기도, 신제품 사용기도 아닌 바로 사설이었다. 전문을 옮기자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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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사랑의 시대
   어떻게 놀고 싶다, 판돈은 얼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이다. 나는 어떻게 살았고, 인생은 뭐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궁금하다. 장미꽃과 사랑 노래에 대한 기억이 미래의 감수성과 내일의 행복감과 어색하게나마 조화를 이룰지 자못 궁금하다. 라~고 말하지 않는 손님. 한마디로 멋지지 않으면 재미없다. 정탐만 하면 의뭉스럽다. 또 주머니, 마스크, 지식, 어조, 품격이 각각 따로 노는데 유달리 까탈스럽고 과묵하다거나 깔끔하다면 대게 보면 그런 유형이 많다. 비관, 독선, 괴팍! 그렇지 않다면 롱테일이거나 또는 안 친한 거다. 친해지면 알게 된다. 말이 안 통한다, 믿을 수 없다, 허세 대 허영심의 비율이 50 대 50이라는 불문율은 심각하게 경시된다, 야망에 최적화되어 사랑에 대한 선망과 행복의 소망도 주늑들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연애 감정에 극히 보수적임을 넘어서 심하게 구식이다, 심지어 기억을 통틀어 손꼽힐 정도로 독단적이다, 라~면 그녀는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으로 함께 살 남자는 아닌 것 같다고! 그래서 헤어진 유명인들 꽤 된다. 기 센 남자와 대 센 여자, 속궁합은 궁금해 하지 말자. 남녀의 연애가 아니라 함께 사는 삶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공감하는 실례를 하나 들자면 그거다. 연애는 좋았다. 추억도 만들었다. 과정도 착실히 거쳤다.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오래 살면서 아마 누구나...는 몰라도 꽤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이 있다. 남녀가 평생 따로 살다가 두 정체성이 한 집에서 같이 사는데 사소한 다툼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남자가 아주 잠깐 진짜로 화를 내는 순간, 여자는 잠시 움츠러들거나 많이 겁 먹거나 드물게 미약한 트라우마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첫경험을 넘어서면 자꾸자꾸 뚜껑이 수시로 열렸던 언젠가의 내 단짝처럼 무덤덤해질 테고. 그걸 일찍 겪는 짝도 있고, 보통은 중간 언제쯤 겪을 것이며, 헤어질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우정과 사랑은 정말 많이 비슷한데 약간 다르다. 그렇다고 우정이 일부다처제에 사랑은 일부일처제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혹시라도, 우정과 사랑으로 시작하니 감미로운 로맨스가 이어지겠구나 라고 기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미리 꿈은 깨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환상은 일찍 깰수록 좋다 뭐 그런 얘긴 아니지만. 왜냐하면 어쩜 그건 참을 수 없는 미끼이자 유혹적인 화장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그러느냐, 조금만 진득허니 참고 기다려 주시지 않겠소?
   영화에서는 관리자가 게임판을 화면으로 주시하고, 중간 보스가 지령을 전달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바텐더는 될 수 있으면 호감, 돈, 인기, 예의, 애정, 선물등 적어도 하나는 보장된 신사를 선호하며 기다린다. 웨이트레스 같은 경험 누구나 있으니까 잘 아실 것이다. 그래서 드물게 어느 바 앞에 가면 이런 안내문이 대문짝만하게 눈에 띈다. <여-바텐더 없음. 바텐더 남자임!> 그분들께서 얼마나 실망했으면! 그건 주객이 같은 마음이겠구나. 그리고 중견 기업인은 국제적인 주간지를 읽고, 다정한 대학생은 친구들과 NC에서 신나게 놀기 위해 옛날에는 오로지 TV를 보며 춤 연습을 했다. 나는 꽃을 사고, 너는 고상한 아리아를 듣고, 누군가는 '나 꽃이야' 하면서 구애를 시도한다. 친밀감은 우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단순한 사교는 사랑으로 꽃필 수도 있다. 그런데 유독 친해지기 어려운 신비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그건 아마 사람의 일이라면 내 인생 이야기를 친교로 연결하거나, 문학으로 승화시키길 원치 않는 내면 때문이고, 그건 어쩌면 외교의 경우라면 교섭-공개-질서-기준-틀-시대적 흐름 같은 개념에서 자유롭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론에 입각해서 봤을 때 그분은 첩보 영화에서 착한 편일 수 없다. 적어도 관객이 원하는 멋진 주인공은 아닌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생 사연이 있길래, 사랑의 일관성에서 얼마나 떳떳하길래,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시길래 그렇지 하며 살짝 의아해진다. 복고품 감성으로 판단하건대 그 흑백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보나파르트는 참으로 시대를 잘 타고나서 모든 파란만장함을 풍미하고 갔다. 심지어 아트락 노래 가사에서도 거론된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야망가로써 절묘하게 예술의 전성기와 딱 겹쳤다. 인생도 극적이었다. 지금 세상에 그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아마도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오오 아마도! 네, 어디요? 개인 브랜드가 없다. 무엇? 예술계의 지원이 전무함. 무엇? 너무 옛날이다. 무엇? 오명이다. 무엇? 규모가 작다. 무엇? 논란이 많다. 무엇? 넓었지만 '늦고 작고 약한' 단위 위주였다. 단연, 보나파르트가 최고였다. 그래서 내가 이 시대의 나폴레옹이 되겠다? 그건 누가 귀 기울이지도, 알아주지도, 바라지도 않는 농담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최소한 훨씬 적은 규모로 단위를 달리 해서 재현될 여지는 없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낱말이 있기 때문이다. 야금야금!
   그러면 소년은 나중 이 세상을 알게 되면 궁금해 한다. 소녀도 무턱대고 기도부터 하지는 않으니까. 대망을 꿈꿨는데 은글슬쩍이라니 그러면서. 그처럼 성장기 아동과 유년기 청소년님은 실망할 것 아닌가. '꿈과 희망을 찾아 파랑새를 따라가자'라면서 동화책을 읽기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위인전 위주로 읽었던 친구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고. 친구도 낭만가도 연적도, 행인과 용한 점쟁이까지 조류 대백과는 정답이 아니었던 거다. 왜냐하면 일단은 하이에나가 절대 강자고, 하늘에는 독수리가, 1차적으로는 쾌락이, 음지에는 염탐꾼이, 숙녀에겐 허풍꾼이, 예술과 일상이든 그 어디든 개구쟁이와 허당과 한량등 역할은 각각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부터 내 꿈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델이 되는 것.
   반 세기의 지식과 인생이라는 지성, 더불어 2000년 역사를 근거로 거의 유일하게, 언제까지라고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상을 독식할 표어는 그것이다. 단연코, 야금야금! 시대가 그렇게 됐다. 독서실에 앉아서 비축되는 그 힘을 대체 어디다 쓰겠나. 쓸 데가 없다. 따라서 선택지가 극히 제한된 이상 어떤 대망은 야금야금에 대해서 절대 신사적일 리는 없을 것이다. 국가 체제를 개인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정체성을 비정상적으로 공격성에 집중하는 것이고, 바둑으로 치면 대세력 확장형이요, 투자의 측면으로 보자면 정확히 기업사냥꾼의 관점이다. 단,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체제가 민주적이며, 여러 과목 가운데 특정 분야만 독주하지 않는다면 그 호전적 성향은 훨씬 낮을 것이다. 우리는 1세기 전의 양차 대전에서 뭘 배웠을까? 전조는 똑같이 반복되며 방법은 종종 교묘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차츰 고급스러워진다. 고급? 그것이 기품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을 뜻하는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두고, 보면, 안다. 두고 보면!
   이 세상을 이기주의로 살아야 하는 건 맞다. 약간 이타적이면 되니까. 대인 관계에서 지나치게 욕심 많은 사람이 있다면 적당히 알고, 접고, 져주고 지내면 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단위가 국가로 커지고 역사라는 과거가 아닌 현재라는 실정이 되면 얘기는 판이하게 달리진다. 세상은 아이에게 그런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고. 그러므로 국가도 야심은 기본이다. 탐욕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문제는 과욕과 지나친 이기주의와 현재주의의 수정 욕구다. 과한 욕심을 너머서는 야욕은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다. 포기 역시 용납 불가다. 공공연히도 옛말일 뿐이다. 내 껀 내꺼고 네 것도 내 꺼다 라는 입장이 적지 않다.
   이때 국제 분쟁은 둘로 나뉜다. 첫째, 의견 주장. 다시 거기서 일시적이냐 지속적이냐, 잠재적이냐로 노골적이냐로. 둘째, 물리력 행사. 국제법조차 내게 유리하면 국제법을 근거로, 내게 불리하면 현재성은 무시된다. 일관성조차 상실된다. 세계 해양법 조약조차 오늘은 자유해론 내일은 폐쇄해론, 날씨가 바뀌면 기준도 바뀜. 육지와 바다가 그런데 상공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바닷물이 사라지는 드라마처럼 이제는 깊은(!) 지하도 방공해야 하고, 포세이돈께 안부도 전해야 한다. 아직도 매장된 석유와 가스등 천연자원이 천문학적인데, 바닷물이 사라지는 드라마? 다른 건 몰라도 흥행성은 절반 갖고(먹고?) 들어가는 거다. 지하 깊숙이 잠자던 석유와 천연가스를 추출하면, 너무 많이 알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백성의 원성을 사고 황제의 명성에 대한 평판이 흉흉할지라도 그게 사극이면 괜찮다. 그러나 현실이라면? 거의 모든 주변국과 다 마찰이 심한 경우를 사람으로 비유하면 그분 하면 고개를 돌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척질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나, 분석과 연구는 옛날에 끝났다. 그러니까 고개를 돌릴지라도 왜 앞에서는 웃을 수 밖에 없나? 왜냐하면 첫째 친구니까, 둘째 일이니까, 셋째 원래 심성이 곱고 인성이 바를지라도 현재 나를 이끄는 원동력은 아마도 그분이 아닐 테니까. 그렇다. 같은 사람이다. 동문이다. 이웃이다. 친구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은 최소한 해야 한다. 방대한 지식과 역사적 사실과 여러 학파의 견해에 이르는 정보, 그리고 예술과 오락산업에 따른 간접경험과 군인의 직접경험까지, 그 모두를 통틀어 아픔을 겪은 예가 어디 한둘일까?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고, 줄거리 없는 사랑 핑계없는 무덤이 어디 있을까? 지금 현재 앵글로색슨의 후예끼리 서로 복수를 꿈꾸나? 그런데 왜 특정 후발주자의 예는 그렇게 특이해야만 할까? 공룡계 후발주자가 이걸로 끝일까? 절대 그럴 리는 없다. 곧 따라온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나중 다 따라할 수도 있다. 더 심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다고 기존 공룡들은 학예회처럼 박수만 치고 있을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양한 서사와 여러 입장, 시대적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일방적 군사력? 외교력? 영화에서처럼 십자가 차량을 공격하거나 실제처럼 민간 어선이 군사활동을 하는 예가 걱정되지 않나요? 뉴스에 나온다. 배수량 몇 톤짜리 항공모함이. 남자들끼리 얘기한다. 해군 출신 친구가 말한다. 너 이지스함이 뜨면 얼마나 많은 배들이 따라가는 줄 아냐, 라면서. 하지만 남자들은 안다. 그건 사실 신뢰의 목적과 거대한 운반선이자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함선이라는 것을. 그 영웅은 얼굴마담일 수도 있고, 숨은 실력자는 바로 두더쥐라는 것을. SF영화란 것을 말이다. 학자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군복을 입어봤으면 각자 할 얘기들이 많다는 것이다. 단지 침묵할 뿐. 공교롭게도 군인 신분을 경험했고, 민간인이 되어 교도소에 갔던 게 자랑이랄 수는 없지만 말이다. 군사학과 전쟁론은 영화가 아니란 걸 아니까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상으로 특이한 행보를 보이는 공룡에게 묻고 답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사회 규범에 위배되는 일 아닙니까? 몰라요! 예의상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서로 곤란하지 않습니까? 품위 싫어요. 공식 발언은 그것과 거리가 있지만 결과는 매번 달랐다. 사실이다. 주변국의 국사 교과서를 보지 않아도 된다. 사교계에서 1급인데 국제법보다 그 위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유인이니까. 물론 1세기 전에는 국제적으로 알력 다툼이 심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그러는 분위기였으며 누가 먼저 봉기를 들었고, 그래서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건 1800년대의 그림자였다.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 그리고 올림픽도 약 1세기 전에 부활했다. 그러나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과거와 똑같은 정책은 지탄을, 적어도 걱정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당시와 달리 그런 세상이 아니니까. 심각한 뒷북이니까!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고, 장르도 초현실이 있으며, 과목도 산업도 미래지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유로처럼 성공이라 호평하기에 퍽 애매한 전위적 시행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학생이 지역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사 오면 이건 상황이 꽤 난처해진다. 남은 몰라도 복학생 본인은 괜찮다. 교칙도 없고 선생님도 없으니까. 본인이야 좋고 편하고 정당하다. 딴 건 몰라도 힘 세고 돈 많으니까. 꿈도 롤모델도 부모도 없다. 학교에서도 따분한 과목은 뒷전이고 나중 돈 되는 과목만 인기다. 과장하자면 복학생은 심심하면 경제 보복이다. 학생회는 큰 힘이 없다. 기록적으로 지금만큼 학생회의 역할과 위상이 큰 적이 없었지만 학생회의 꾸지람은 거의 솜방망이가 전부다. 학교 폭력은 옛날 얘기니까 툭하면 야금야금이다. 오직 독서실 드라마인데 대회가 웬말이냐, 쨉이 전부다. 학생회의 '바른 말 고운 말' 운동 협약도, 학생 단체의 강압에 의한 갈취 금지 서약도, 답은 NO! 싫다다. 사인하지 않았으니 첫째 내 맘대로 하겠다, 둘째 언젠가 언어 폭력과 용돈을 상납받겠다 라는 분명한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게 아니면 사인하지 않을 이유도 명분도 뭣도 없다. 학교는 발전하고 학생회는 현대식인데 전학생은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 그래서 장르는 사극이고, 신분은 아마도 황제가 아닐까? 그런다고 사인을 하면 명쾌한 법치주의와 평화가 보장되냐, 그것도 아니다. 조약해도 조약을 어기고, 협약해도 그때뿐이다. 그건 학생이 아니다. 업자고 폭력배고 액션 영화에나 등장하는 치한이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에르메스인데 가짜 에르메스고, 명찰은 신사인데 절대 믿을 수 없는 남자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내세우는 입장이다. 따라서 결국 전학생은 그걸 원하고 있구나 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불투명한 의도와 패권의 목적은 완전한 동물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 하지만 순진하게 믿을 수도, 고고하게 거리를 둘 수도 없다. 친구고 이웃이며 동급생이자 짝궁이니까. 괴로워도 골치 아파도 구식이어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바로 옆자리까지 1984다. 더구나 학교를 장악하는 규율이 없다. 학생회는 약하다. 윤리는 멀리 있다. 전학생은 꾸준히 구식을 고집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범생도 운동부도 독서부도 복학생과 문제아까지 합심하는 게 좋고, 학교 이전에 이곳은 맹수의 고장인 정글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원래 복학생의 본성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가 하면 그건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 증명해야 할, 지금이 아닌 미래의 몫일 테니까. 어쨌든 적어도 오늘은 내일이 아니다. 오늘과 내일은 다르다. 고로 전학생의 영혼은 1퍼센트의 1퍼센트의 1퍼센트의... 라는 어떤 무언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누가 모르랴.
   나는 군인이었던 시절 한 군인의 눈빛을 기억한다. 내가 입었던 군복과 소속을 두고 상중하에 대해서 중하에 해당하는 부분도 많겠지만 나름 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건 그거다. 많이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래에 비해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 그 셋은 괜찮았다. 당시 우리 부대에 어느 날 한 작전장교가 전출왔다. 계급은 대위였다. 그는 거의 특수부대 경력이 전부였고, 훈련과 작전과 실전이 전부지 쉬고 놀고 그런 건 모르는 군인이었다. 아예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온지 얼마 안되서 크게 실망했다. 완전 낙심했다. 심한 표현을 다듬자면 이게 뭐냐 이런 뭐라뭐라, 그런 얘기였다. 인상 팍! 그는 천상 군인이었다. 눈빛이 살아있었다. 난 느꼈다. 빛나는 그 눈빛을! 실제 말로도 그랬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다고. 내 추측인가 들었는가 가물가물하다. 스타가 그 어떤 비보에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이성주의자여야 한다면 현장을 누벼야 할 훌륭한 군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당시 난 나중 제대해서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비견되는 뛰어난 소설을 써야겠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러 기억과 많은 체험과 그분의 눈빛이 인상적이었을 뿐. 그와 같은 군인 정신이 원소기호로 모여 첨단 장비로 똘똘 뭉친 공룡. 그런 공룡이 독서실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모습이 참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실정이다. 하이틴 독서실 드라마인데 보이스카웃이 웬말이냐, 심심함은 운명이고 준비 대기는 끝없는 숙명이다. 그런데 과거가 의심스러운 군인 스타일 전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설마 타임머신을 타고 왔을까? 이게 보통 일일까?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리는 없단 말이다. 친구들끼리 다 아는 얘기다. 소문 옛날에 퍼졌다. 껄끄러운 전학생과 제1범주로 친할 수 밖에, 적어도 옆자리 단짝은 피할 수도 마다할 수도 없다. 조숙한 친구들이 내 무관심, 내 방관, 내 편협한 시작, 내 불공정한 견해, 내 옹졸한 세계관을 전에 어떻게 봤을까? 아 창피하다. 오오 부끄럽다. 적잖이 수치스럽다. 그리고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 또 내일의 평가는? 나도 방관자였고 순응자였으며 불의의 동조자였다. 미필적 고의라는 죄목으로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결백하지 않다. 내 흑심만 봐도 뻔하다. 그러면서, 꿈에서 순결한 피앙세를 만날까 고대한다. 아무튼, 그래도 명목상은 우정이고 내일은 사랑이다. 너도 무엇이든 어디든지 한발 걸치고 있는 건 아니니, 라고 물어본다면 극구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판돈도 떨..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서 말이다. 열만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설에 무엇을 걸래? 걸 수 있는 건 진심 밖에 없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연습벌레에 인성이 바른 사람은 연예계의 별일 수 있다. 호기심이 대단할수록 특정 직업군에 유리하고, 될 수 있으면 낙천적일수록 유쾌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크다. 허나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침착하지 못한 사람은 별이 달린 군모를 쓸 자격이 없다. 저 별과 이 별은 다른 것이다. 완전 딴판이다. 그 세계는 달콤한 연가도 재밌는 드라마도 아니다. 그건 영화와 다르다. 전혀. 별들의 회의를 들어 본 사람은 안다. 군복을 입었더라도 아무나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리 건너 듣더라도 아서왕의 참석 유무는 몰라도 별들의 원탁에서는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내 친구가 어렸을 때 깡섬에서 놀이터도 장난감도 없으니까 했던 놀이, 혼자 연습볼 대신에 살아있는 개구리를 코앞에 던져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놀기, 어른이 되어서도 공원에서 개미에게 신이 되어 막 어떤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놀기. 개미와 개구리는 그 녀석이라면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과 같은 존재를 어떻게 알겠냐마는. 사이코머시기는 아니지만 사람마다 다른 정체성을 타고 나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도 어려운 그 무엇이 사람마다 약간씩 다른 특징을 보이듯이 군인에게 요구되는 특성은 엄격성이고, 별들은 어떤 숫자에 대해서 침착할 수 밖에 없다. 군복을 입어 봤던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이 세상이 상쾌한 트럼펫 협주곡을 듣고,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연인과 다정한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트럼펫 협주곡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최소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누굴 괴롭혔던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다툼은 있었고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크게 나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아, 그 일은 상대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반에서 제일 뒷자리에 앉았고, 그런대로 큰 편이었고, 짝궁은 레슬링부 출신 복학생이었다. 우린 친했다. 점심식사는 급식이 아니고 도시락이었다. 난 당시 농구를 좀 했고, 인기도 괜찮았으며, 까칠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애들 반찬을 맛보기 위해 교실을 한 바퀴 돌았었다. 드라마식으로 그렇게 아무나 돌 수 없었냐,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어떻게 보면 작은 폭거에 해당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 이상한 학교에서 영원히 졸업할 수는 없단 말인가? 아니면 전학생 따라하기, 즉 모범생도 날라리도 미술부도 복학생까지 다 옛날로 돌아갈까? 그러니까, 옛날이 아름답던가? 이따금 그때가 좋았다 라는 말도 맞지만 그건 주로 당시 잘나가던 몇몇만 좋았던 경우가 많다. 이 변화의 바람이 학교에 이로울까? 학교의 디자인도, 질서도, 문화는 물론 전통마저 바뀔지 모르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외계에서 아니, 스스로 따져도 지구는 더 이상 훌륭한 명문 학교가 아닐 것이다. 나는 반대다. 그런 퇴보는 싫다. 친구들이 그런다. 대하드라마에서 조공을 상납했듯이 지금도 땅이든 뭐든 자진납세하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그런 액션 영화는 참 재미없다고 한다. 흥미도 교훈도 특색마저 없다고 한다. 덩치에도 걸맞지 않다는 걸 누가 모르랴. 무엇보다 미래 세대가 무척이나 흐뭇해 하시겠네.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니! 내일 일을 오늘 생각할 필요도 없고, 현재도 험담가는 웃고 냉소주의자는 세상의 불행을 즐긴다. 호사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핸드폰을 집어던지면 잠깐은 시원하다. 처음 바람을 필 때 기분이 어떻다고 하더라. 소파에 쥬스를 엎지르고, 화분을 깨고, 웬 바람이 불어 직접 만든 빵을 먹고 싶네 그래서 어떡하다가 하필 침대 위에 밀가루를 엎지르다? 소셜 네트워크 컨텐츠가 아니라면 줄거리는 후세 길이길이 전해진다. 세월의 불행을 차용해서 잠시 행복할 수는 있다. 남자의 우정은 그럴 수 있지만 외교의 세계에서도? 하긴 원래 세상이 그랬다.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 내내.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그러면 앞으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과거 기준과 어릴 적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다소 부적절한 비유에 부풀린 추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략은 맞는 얘기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왜 있는가, 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사실만 따져보자면 그렇다. 그 부조리는, 실제로 학업과 상업과 마술과 율법 및 인생처럼 먼저 겪냐 나중 겪냐, 그 차이 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의 다 선험 집단에서 먼저 겪은 일들이 후발주자의 현재에 엄연히 실존한다. 언제식, 언제식, 어디의 언제식, 그렇게. 그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선험자가 겪었던 모든 굴곡을 답습한다는 것이다. 구강기, 소년기, 유년기, 사춘기, 몽정기는 물론 권태기까지 더없이 꼼꼼하게 재현된다. 장점만 본뜨면 될 텐데 굳이 안 가도 될 후미진 나이트클럽에 가고, 굳이 사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냥 허당과 친하고, 굳이 조숙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의무방어전도 토너먼트도 연습경기도 다 경험하고 따라할 수도 있다. 실패한 정책과 타당하지 못한 법안과 아름답지 못한 관습까지 차곡차곡 재현된다. 꼭 선구자이지 않아도 되고, 철저한 사명감으로 미래지향적인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된다. 경험자들이 있고, 친절한 자료가 있으며, 놀라운 장비와 다양한 장르가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A부터 Z까지 최고급 차를 내 집에 들이는 게 꿈이다? 그런 촌스런 꿈을 이미 실현시켰다가 다시 꿈2.0 저 너머로 가버린 사람의 인터뷰는 TV만 틀어도 잡지만 뒤적거려도 나온다. 날이면 날마다. 소년이 어느 날 장비병에 걸린다. 검색을 한다. 샀다 팔고 샀다 팔고, 를 반복한다. 그러다 어느 날 변심한다. 머머 접습니다 라고. 단순히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모를까, 취미가 아닌 직업이라면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그걸 뭐라하냐, 아마추어라고 한다. 아마추어 정신이 좋으면 취미를 바꾸면 그만이다. 하지만 까탈스럽기만 하고 실력은 변변치 않은 지휘자 때문에 교향악단, 시향 직원과 교향악단 연회원, 도시 평판과 관객들은 골머리를 앓는 수가 있다. 그게 만약 정치라면 저 멀리까지 가서 언제 세대가 뒷수습까지 하는 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 좋은 길, 더 옳은 길, 더 아름다운 길, 더 나은 길, 더 즐거운 길, 더 합당한 길, 더 이상적인 길, 더 빠른 길, 더 안전한 길들을 놔두고 대체 왜 굳이 모든 길흉화복과 여러 산전수전을 참으로 친절하게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답습해야 한단 말인가. 대체 왜? 그래도 체제가 현대적이면 그나마 낫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만약 누구라면!> 라고 상상이라도 했다간 큰일날 수 있으니까.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어야 하니까. 좋은 집안, 아니 중간만 가는 환경이라면 천재가 될지도 모를 텐데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벙어리 삼 년이라고 그처럼 선장과 선주와 주주와 경영진을 위한 생애를 살아야 하는 운명은 지구인 가운데 일부 현재의 다수와 미래의 세대일지도 모를 일이다. 공기업은 매각되는 게 좋을까, 좋지 않을까? 의료민영화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어디에 가봤더니 인공수로가 멋지던데, 협소한 자연강을 인공수로처럼 다듬자, 옳을까 옳지 않을까? 파나마 운하의 공인된 성과는 익히 자자하다, 따라서 제2 제3의 파나마 운하를 계속 만드는 건 좋은 일일까, 좋지 않은 일일까? 공동 통화와 중앙은행을 공유하는 건 좋을까 아닐까? 불평등의 대가는 무엇일까? GDP는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 적지 않은 정책과 시도와 계획은 어지간하면 가설부터 시험과 적용과 성공과 실패의 사례가 존재한다. 그걸 가장 쉽게 찾는 방법은 인터넷 검색이고, 좀처럼 어려운 방법은 지성인과 한잔의 차를 마시며 듣는 것이며, 아마도 따분한 방법으로는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잘생긴 얼굴에 현혹되어 강의 내용을 놓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또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검토하는 것은 데이터베이스 데이터마이닝등 무슨 전문용어에 따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화술이 좋고 추진력이 있으며 외모와 경력과 성실함등 뭐 하나 빠짐없는 조건의 리더가 도입하고자 하는 방법. 이미 다 누군가 해 보지 않았을까? 나중 포르쉐를 살까 페라리를 살까, 포르쉐와 페라리를 둘 다 몰아봤던 사람의 얘기를 직접 듣고 아마추어 정신의 장점과 전문가의 고견을 오랜 세월 동안 모두 꿰찬 다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정답이다. 기계식 키보드를 처음으로 사 볼까 해서 검색해 보면 딱 눈에 띄는 댓글이 보인다, 결국 다 머머로 넘어옵니다 라고. 느낌 오면 한방에 가는 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에르메스와 머머머는 어려워도 그건 가능하니까. 헤픈 일도 처지에 걸맞지 않게 사치스런 과소비도 방탕한 불건점함도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커서 럭셔리 잡지에 나오는 거라면 전부 살 거야, 나는 커서 1층 뭐 2층 뭐 3층 뭐를 운영하는 소심한 사장이 될 거야, 나는 나중 패션산업계의 큰손이 될 꺼야 등등 다 좋다. 개인의 꿈이니까. 문제는 개인의 꿈이 정치였을 때, 개인의 야망이 시대를 이끌 때, 개인의 대망이 이론이랄지 환상머신 또는 학파로 견고해질 때, 바로 그건 전혀 다른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정규 과정이랄지 시절에 알맞는 모험과 청춘의 경험이 친구들과 동떨어진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르크스호다. 이론은 좋다. 말로는 정치도 백점이다. 단기 성과를 챙기고 장기적 관점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는 이론과 다르다. 게다가 완전 옛날 얘기다. 심지어 이론과 실제 모두 완전한 실패임이 옛날에 증명됐다. 뿐만 아니라 책은 찾기도 힘들고 지식도 구식이 됐다. 그래서 결론은, 그런 이론이 있었다 옛날에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게 다다. 그 이념 때문에 금세기는 아시다시피 일부 진행중이고, 전세기에 얼마나 크나큰 시련이 있었던가! 그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왕조시대. 사극에서 보던 그대로. 곧 드물게 현존하는 마르크스호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주권이 만약 국민에게 있다면 선장은 물론이요 지휘부와 정치계와 환경까지 모두 바꿀 수 있다. 누가? 국민이! 선출, 행정, 평가, 개선, 보완, 변화가 다 가능하다. 그런데 주권이 만약 국민에게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 제한된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 대다수, 절대다수는 배가 산으로 가든, 배가 바다로 가든, 배가 꿈나라로 가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앉어! 앉어야 한다. 서! 서야 한다. 닥치고 써! 침묵한 채 써야 한다. 선주는 유일당이고, 리더는 선장이며, 체제는 불변하며 영원을 지향한다. 따라서 제1인자와 유일당 입장에서 그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가 체제 유지고, 둘째가 번영을 위한 항행이다. 첫째가 아니면 둘째도 없다. 둘째를 위해 첫째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행복한 둘째를 위해서 독재적인 첫째를 희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만약 첫째가 침해 받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망설임없이 깨끗이 묵살시킬 수 밖에 없다. 사극에서 보듯이 쉽든 어렵든 모두 가능하며 실제 사례가 존재한다. 만약 둘째에 대해서 불만이 커진다, 행복하지 않다, 딜레마가 많다, 불합리하다, 불평등하다, 자유롭지 못하다 등등? 그래도 다 방법이 있다. 많다. 목표는 모비딕에 목적이 행복의 완성일지도 모르지만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운 이론 같이 느껴진다. 완곡하게 말해서 그렇고 직접 경험한 사람들 말은 또 다르다.
   단언컨대 연식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식이 왜 중요하냐면 통계와 학설과 사실등을 통합하면 거의 과학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즈음까지는 90퍼센트가 인접국간 전쟁이었다. 거의 다였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경우의 수가 딱 나온다.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어떤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체제가 현대적이지 않다? 주변국과의 분쟁, 마찰이 심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주변국과 심하게 다투나?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무슨 전조와 징후가 심심치 않게 드러날까? 아니다. 역사적 통계로 봤을 때 최대 위협국이어야 할 인접국인 캐나다와 미국의 다툼은? 외교 문제라고 볼 수 없는 미미한 수준이 거의 전부다. 과거는 인접국간이었으면 지금은 문명이 발달했으니까 멀리 떨어진 호주가 아이슬란드를 어떻게 한번 해 보겠다는 본심을 감춘다? 남자가 어느 여자를 눈독들이다가 어떻게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사랑은 끝났더라, 뭐 그런 얘기를 하자는 건가! 그런 일은 없다. 서기 올해라는 시간과 정치-경제-사회-환경-체제의 연식이 같으면 학생회의 간섭하에 분쟁은 존재할지라도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될 소지는 없다. 혹시 있을지라도 요술봉을 휘두르듯 갑자기 뚝딱이 아니라 긴 서사와 많은 정보와 주인공-조연들의 활약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무언가가 현대식이 아니라면 분쟁이 다양하고 많으며 끊이질 않고, 국제기구의 권고도 반겨하지 않는다. 아니 솜방망이인데 뭘, 그거니까.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신식과 구식의 대치가 문제될 뿐이다. 어떤 연식이 구식임과 동시에 주변국 숫자가 10에서 20이다? 그 숫자가 2든 20이든 모두 잠재적, 실질적 적국이다. 스포츠에서 숙적과 군사적 주적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뭔 사연이 깊다면 군사적으로는 어떻게 보더라도 다른 분야는 달리 봐야 하는 게 타당하다) 더군다나 과학의 발달 때문에 그 숫자는 늘 수도, 집중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식 주택이면 동네 수준이 있으니까 옆집이 몰락하거나 소란스러운 일은 반갑지 않은 반면, 주택이나 적어도 의식이 현대적이지 않다면 최소한 옆집의 전반적인 형편이 좋아지기를 바랄 수는 없는 거다. 왜냐하면 구식 기준으로 근접 국가는 적인데 적의 힘이 세지면 우리는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옛날에 전쟁은 그래서 늘상 끊이질 않았다. 초식동물이 치타를 먼저 건든다, 치타는 하이에나를, 하이에나는 사자를, 사자는 보이는 대로! 간혹 어설프게 초식동물 잘못 건드렸다가 큰코다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함. (아프리카에서만? 그건 직접 공부합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아직도 그와 같은 구시대 전략은 일부 실존한다.
   핵보유국을 살펴보자. 선발주자라는 기존 공룡외에 후발주자를 봐 보자. 너는 되고 나는 안되냐 불합리하다, 라는 주장에 의거하여 왜 후발주자를 논하는가 라는 이유를 밝힌다. 왜냐하면 구시대에 인접국은 제일 많이 싸운 나라인데 반해, 현재 민주주의 체제는 불확실성 발발의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후발주자를 들여다보자. 구식과 신식이라는 연식에 근거하여 설명하자면 이와 같다. 먼저 구분은 약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스타워즈 광선검의 실존, 과거형, 의심, 시도한 전력,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까지. 그에 따라 5가지 구분을 통합하고, 이제는 우리의 중요 관점인 구식과 신식의 공존이라는 <지역>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이렇다. 시리아─이라크─이란─파키스탄─인도─중국─과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분까지. 이 모두가 전쟁이 발생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인접국 즉 구시대 기준이다. 정확히 맞닿아 있다. 기차처럼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게 우연인지 어쩐지 그건 모르겠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또 위로는 러시아가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가능한 국가가 또 그 옆에 몇 개 있다. 그곳은 기존 공룡과 동맹이다. 그 불가사의한 선분만 해도 대충 세계 인구의 50퍼센트다. 칙칙폭폭 그 다큐멘터리호가 사랑의 나라로, 행복한 낙원으로, 기쁨의 내일로 가기를 염월할 뿐.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처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모른 체'라는 자세로 인류가 진보했을까? 에이 알면서! 사랑의 태도와 세계관은 전혀 생소한 무언가가 아니다. 당신의 최선은 사설 읽기일 수도 있고─이왕 읽을 거면 무지개를 다. 하나만 1년 10년 읽어도 나도 모르게 물드니까. 세뇌와 통제와 1984는 인간 세상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기술임을 알아야 한다─특파원으로 살기, 북극곰의 현실을 알리기, 시대적으로 어떤 치열한 역할일 수도 있을 테고, 그린피스를 후원하기, 타락한 천사에 대해 알아보기, 세계사를 공부하기..는 어려워도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은 갖추기, 어디가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대체 왜 어른들이 정치-경제-사회를 논하는지 이해하기, 차악에서 탈출하고 차선에서 미끄러져도 중간은 가기, 그것이 곧 꿈이고 정치 철학이자 인생관이다. 이젠 유럽으로 넘어가자. 스페인, 포르투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덴마크, 핀란드, 헝가리, 벨기에,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스웨덴, 크로아티아, 독일, 체코, 루마니아, 그리스 등등 이런 나라들은 그것이 있을까 없을까? 없다. 필요없다. 필요하지 않다. 왜? 인접국이지만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전쟁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뭘까? 적이냐 이웃이냐다. 잠재적인 곧 최소한 군사적으로 앙숙이냐 아니면 친구냐다. 같은 시대를 살지만 한쪽은 완벽히 구시대적이고, 한쪽은 완벽히 현대적이다. 완전하게 나뉜다. 딱 봐도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구분이 어려울까? 과연 그럴까? 리더가 무서우니까 공적으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말할 수 있다. 태생을 골라서 태어날 수 있다면 저 둘 중에 정말 어디에서 태어나고 싶을까? 하지만 일반인은 움츠러들지 말자. 우수한 문화를 천시하고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시대적 성격을 깔보자는 의도로 꺼낸 논의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리더의 문제이기에!
   현대적이라함은 곧 자유와 다양성을 뜻한다. 그런데 반대의 목소리가 놀랍게도 없다? 너무 조용하다? 어떤 리더를 진짜로 좋아하는 건가, 어떤 행동까지 속으로도 진짜 반기는 건가? 보수쪽에서 쓴소리를 하지도, 진보에서 시위를 하지도, 각계각층에서 별로 불만도 없고 심심하다? 그러면서 이방인을 반긴다? 그건 곧 완벽한 통제 때문에 반대 급부가 없다는 거다. 고로 내가 지원하는 정당과 응원하는 정치인이 고전을 면치 못함으로도 모자라 지지율이 바닥을 긴다면, 내 기분은 꽝이지만 그건 한편으로 그 사회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잘 돌아가고 있단 증거다. 언짢은 뉴스가 번갈아 가며 등장하거나 잊혀질만 하면 대두된다? 그건 한편으로 그 사회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잘 돌아가고 있단 증거다. 국제로 시작해서 정치부터 문화까지, 아 경제가 빠졌구나! 급진이니 강경파니 극보수라는 둥 온건이라는 둥, 일관성이 부족한 건 아닌가, 객관적이지 못한 거 아니냐, 저 친구들처럼 똥개 몇 마리 구하기 위해 참 멀리까지 가서 고생을 하는 모습은 왜 여기선 보이지 않나, 남자는 여자처럼 잡지1과 2의 구분이 대체로 없지만 드물게 어르신께서 보시는 월간지라는 게 있다 그런데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에서 한두 가지 색깔은 나와 맞는데 다른 건 도무지 영 그게... 연예인과 예술가와 유명인과 정치인의 구분이 모호해져버린 이 현실이, 세상 돌아가는 게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 그건 한편으로 그 사회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잘 돌아가고 있단 증거다. 바로, 그래서, 연식이 중요하다는 거다. 고전주의와 촌스러움도 어차피 현대적이지 않다는 건 똑같다. 하지만 생물학적 구분은 몰라도 백조는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촌닭은 촌년과 친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대성공이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볼 테니까. 굳이 고고한 백조처럼 하늘을 날 필요 있나! 지붕만 올라가면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 아닐까? 그래도 알고 보면 촌닭이 인기가 좋긴 좋다. 그러나 촌닭은 하수고 촌닭왕은 허당이다. 동물농장론으로 빠지지 말고, 촌닭이 이사를 갈때 유의할 점이 그거다. 동네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는 점. 어느 동네에 가서 어울리지 않게 나 혼자 중세 왕처럼 으리으리한 궁전에 사는 게 마음 편할까, 동네 수준에 걸맞게 인품과 학식과 지성은 물론 농담마저 고급스런 동네로 이주하고 싶으신가? 그거다. 그게 현대식이다. 하지만 현대식이지 않은 것, 곧 그 반대는 드라마의 장르가 현대가 아니라 아직 대하드라마다. 그러면 아무래도 전망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고 세상은 변한다. 반 세기 지나면 보수 정치인이 그런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누구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합니다, 라고. (보수도 진보다 다 좋다만 어감이 좀 그렇다, 보수 하면 인생의 풍부한 연륜 때문에 마음이 더 넓어야 하는데 왠지 갸우뚱한다는 거. 단지 예시는 그 때문임) 그때는? 그때라는 반 세기 전이 다른 데선 지금이다. 멀리 갈 필요가 있나, 지구가 타임머신인데. 반 세기전에 대해서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볼 필요없이, 지금 재현되는 지구촌 다른 현장에서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추려서 정치인생을 걸고 칼럼을 쓰거나 발표를 하면 된다. 깔끔하다. 상대의 단점만 파고들고 비겁하게 내게 유리한 틀만 고집할 필요없다. 당당히 철학을 밝히고 생각을 알리면 된다. 듣는 사람 중 우물 안 개구리가 다수일지도 모르지만. 안 그렇수? 그때가 언젠데. 생각을 뒤쪽으로 유도하고, 관점을 극히 보수적인 틀로 좁히며, 심정을 언제식으로, 향수마저 자극하여 현 시대에 구식으로 정치를 한다라... 듣기 싫어도 들리는 걸 보면 노이즈마케팅의 성공일까? 어느 범주의 민심은 표로 연결되는 걸 보면 게릴라마케팅의 선전(善戰)일까. 냉철한 이성으로 건조한 사실만 추려서 도표로 작성해서 따지자면 절대 딱 끊어서 수학적으로 결론낼 수 없다. 생각 때문에 구시대적인 발언과 행동을 서슴치 않는 것은 좀 더 전으로 자꾸자꾸 왕조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론상 그 다양성과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회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뜻하며, 그 단위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일리는 맞지만, 하지만 뭔가가 자꾸 나를 뒤쪽으로 끄는 점은 쉽게 등한시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얼마나 뒤로 시점을 되돌리느냐, 그러면 더 더 계속 뒤로만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냐, 노인을 위한 정책은 존중하지만 노인이 한창이었던 아니 그 이전의 왕조시대의 추억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뭘 봐라 누구 때문 아니냐 어디가 안 보이냐 예시가 있고 근거가 있다 라는 말솜씨에 따라 50년-1세기-박물관에 사로잡혀 끙끙 않는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고 현대의 시대고 미래 세대의 세상일 테니까 말이다. 이건 아니다 라고 행동하셨던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그랬다면 외국의 멋진 모습, 좋은 환경, 재미난 오락, 즐거운 유희, 신나는 모험, 아름다운 자유, 행복한 인생 그 모두를 여과없이 들일 수는 없는 법. 통제하지 않으면 리더는 스스로 내려와야 하니까. 제발로 내려오기가 어디 쉬운 일이더냐. 정해진 범주 내에서만 자유가 가능했던 그처럼 심하게 수직적인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젊음은 오직 책과 영화, 인터넷, 교육, 예술, 다큐멘터리, 구전, TV등을 통해서 알 수 밖에 없다. 그것마저 세뇌와 최면과 규제의 틀이 존재한다면 다음 기회일 수 밖에. 실제로 신문, TV, 라디오등 대중매체는 그늘져 있기 때문에 당시 일반인은 관리되었고, 길들여졌으며, 속게 됐다. 바뀌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뭐 하지 마! 하면 안된다. 어디 가지 마! 가면 안된다. 뭐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 알면 곤란하다. 좋게 말해서, 곤란하다. 그외 예시는 너무 많다. 어디 끌려가고, 누가 사라지고, 어떻게 위장되고, 뭔가가 날조되며, 어떤주의가 조종하고, 출신이란 낙인은 언제 어디든 따라다니며, 친구와 동기와 지인과 스승도 제자도 누가 두더쥐인지 두더쥐가 아닌지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시대. 당장 세계뉴스를 보면 된다. 아차 했으면 남의 일은 내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세상을 살아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는 것조차 자유와 방종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것, 법에 앞서 관습과 의식과 문화가 뒤쳐지면 안되는 이유다. 그 시절의 무언가가 좋은 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았던 것이지 과정이 옳았던 게 아니라는 점, 지구와 인간이라는 타임머신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좋은 점은 결과적으로 좋은 점이고, 옳지 못한 과정은 천부당만부당으로 인식하면 된다. 전자가 후자를 뒤덮어서도 안되고, 후자 때문에 더더욱 전자는 물론 내 정치관의 의미와 가치와 균형마저 슬기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건 지극히 타당한 결론이고 명쾌하게 합당한 지각이다. 때문에 살아왔던 인생을 근거로 현재를 판단하는 것도 좋지만, 세기의 전환과 격동의 변화를 겪은 지혜로운 노년이 아니라면 살아갈 나와 후세의 인생이 더 길다는 사실을 전제로 정치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박물관 직원은 박물관으로 가야 하고, 학생은 교복을 입고,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 하물며 연예계도 질서가 있고 유행이 있다. 정치! 그게 아니라 친구라면 쳐줄 수 있다. 예술가가 연예인처럼 브랜드 광고를 찍는다? 그러든가 말든가! 과학자가 사업가로 변신한다? 무관심! 축산업 지겹다 나도 오락산업에 뒤늦게라도 뛰어들겠다? 남의 일이다! 냉소적인 유명인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쉬지 않고 떽떽거린다?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데 중차대한 권력을 행사할 리더가 그런다? 고개를 돌려서는 안된다. 싫어도 심판해야 한다. 정치인이 (극심한) 보수성을 핑계로─때와 지역에 따라 보수성이 좀 더 필요한 곳도 분명 있다, 왜 그런지는 살아보면 알고 이해할려고 생각, 생각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보수도 다 똑같은 보수가 아니다, 백 가지 천 가지 보수에서 나는 무엇 무엇이 보수구나 그걸 알아야 한다─자꾸 만인의 생각을 뒤로 이끈다? 져줄 수는, 져줘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분께 현재를 양도하고 미래를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절대로!
   남자의 환상과 여자의 로망은 다르다. 우정은 마음 맞는 친구끼리 으쌰으쌰하며 상대가 접고 꺾지 못한 채 꽉 막혔다면 각자 마이크 들고 따로 방송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는 이유는 남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보완하고 챙겨주고 져 주어야 사랑은 유지된다. 사교도 절반은 그렇다. 외교라고 뭐가 다르겠나. 언어, 문화, 관례, 인습, 인종, 환경, 경제등이 다 다른데 외교를 마초의 우정처럼? 그건 아니다. 외교는 차라리 남녀의 애정과 닮았다.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엔가 있는. 어디에나 내 입장만 고수하는 건 그런 모습과도 같다. 외상값도 안 갚으면서 매번 퉁명스런 손님, 아 저 인간 또 왔네 또 왔어, 옆에서는 고개를 돌려도 그래도 앞에서는 웃는다. 연예계에 유명한 선배가 보인다, 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현재 어떤 발전의 역동적인 부조화스런 상황 역시 1세기전과 거의 똑같다. 따라서 그 모두를 보자면 이건 명백히 지금 생애에만 집중하겠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논거임에 틀림없다. 사람의 일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고, 개인의 인생이야 온전히 개인의 것이라지만, 이거 이거 이래가지고는 자칫 잘못하다 패자부활전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하직하기 직전에 신에게 귀의 한다 그러므로 천국행 땅-땅-땅?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인다구요. 어려운 게임이 예상된다구요. 이 사안에 대해서 선생께선 과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대의 고견을 듣고 싶단 말이오!
    뭐 그렇긴 하나 현대식이 인간 세상의 이상향일 수는 없다. 그리고 천국이 지상에 실존할 수 없는 이상, 내일을 상상하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이자 특권이라 해도 무방하다. 과거의 합법이 현재의 불법이고, 현재의 합법이 미래의 불법이 되는 흐름은 일견 타당할 것이다. 때문에 먼 미래에는 우리가 현재까지 알았던 악역은 인공지능도 사회도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권태는 기본이고, 아마도 오락산업의 놀라운 변신과 성장과 번영, 어쩌면 SF 작품에 나오는 여러 일들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천재의 탄생을 환영하지만 시대는 악당의 출연을 방임한다. 그러나 우린 모두 지구에 놀러온 여행객일 뿐. 좋아하는 것을 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보고 듣고 읽고 먹고 마시며 노래하며 춤추고 놀고, 그 가운데 주위를 둘러보면 누군가는 허풍꾼이고 누군가는 난봉꾼에 누군가는 술꾼이다. 허세냐 허영심이냐, 허당이냐 시인이냐, 애정이냐 사랑이냐, 지금은 모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다. 아마도 어린이가 낭만주의자고 어른은 개구쟁이 아닐까? 보수라는 말이 애매해져버린 시대지만 보수는 괜찮다. 하지만 생각은 후진하지 말자. 앞장설 필요도 없다. 중간만 가면 된다. 적어도 회상과 구분은 하고, 차이는 이해하며, 다양성은 존중하거나 받아들이자.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래야 사랑과 허구와 행복까지 모두 우리와 함께 할 테니까.


   3

   제임스는 사설 마지막에 다음 문장을 넣었다가 지웠다.
   끝으로 첨언하자면 이 세대의 명사가 얼마인데 이미 거론된 내용이라면 미리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당돌한 치기였고 유감스러운 기분이 앞섰다. 자성이 선행됨은 어려워도 내부 비판이 없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마 거론됐어도 많이 거론됐어야 맞다. 그게 옳고 합당한 예측이다. 아무래도 뒷북일 듯 하니까 말이다. 야 야, 비켜 비켜! 나와 나와. 넌 말이야... (효과음).
   그건 그렇고 그는 원고료를 못받았다. 하다 하다 이젠 원고료를 떼임. 미스테리아에서 당분간 정통성을 추구한다길래 칼럼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때문에 마라는 일간지의 어느 편집장을 소개시켜줬다. 그분은 성격이 급했다. 다혈질인 것 같았다. 그래서 전화로 통화할 때 그는 한마디도 못하고 일장 연설을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그 가운데 몇몇 얘기는 저 위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제임스는 그 일간지 편집장과 만나지 못하고 어서 사설을 완성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시작부터 독촉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사야 할 책이 있었고, 사고 싶은 향수와 비누, 먹고 싶은 음식, 갚아야 할 술값이 있었으며, 그리고 혼자서라도 파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설을 뚝딱 완성해서 보냈다. 그런데 그 뒤로 그분과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당숙이라 부르는 그냥 허당 친구의 일화가 기억났다. 어느 날 전당포로 물건을 찾으러 갔는데 전당포가 없어졌다는. 그는 자세히 알아봤다. 그 일간지는 내 사설을 주간지에 넘겼고, 다시 주간지는 월간지로 헐값에 매도한 듯 했다. 그 다음에 어디까지 연결되는지는 알아보다 포기했다. 살다 보니 점점 포기하는 게 많아진다. 다행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일간지는 유명세도 그만그만하며 경영난을 겪고 있어서 브랜드마저 간당간당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고료 역시 포기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언제까지 받고 싶어 하기만 해야 하나? 의도치 않게 선심 쓴 걸로 치부하기로 했다. 마음은 씁쓸했지만 말이다. 때문에 그는 마라에게 꼬치꼬치 그 사건을 고자질하지는 않았다. 마라 인품이면 그 돈 자기가 주는 걸로도 모자라, 최소 2배로 줄 테니까. 왠지 그는 마라가 혹시 자기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불현듯 의뭉스런 의심이 몽글몽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뭐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에 이름을 바꿀까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번에는 무엇으로 바꾸지? 저 앞에 술병이 보였다. 발렌타인. 발렌타인? 아 저양반 이름이 조지였구나. 후보 1번. 그런데 후보 2번부터는 자료 조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조지를 필명으로 정했고, 작품 구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나.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일기를 썼다.


   4

   12월 19일 꿈.
   축제일이었음. 거리에서 혼자 축제를 즐겼다. 갑자기 선거일로 바꼈다. 시대는 사극. 혁명을 함께한 여자 동지가 갇혀있는 감옥에 찾아갔다. 쇠밧줄이 발목에 매여있는 그녀와 손잡고 거리로 나왔다. 나는 여자 동지를 후보로 입후보시켰다. 홀로 입후보해서 당선이 유력시되던 기존 후보와 여자 동지가 재투표에 들어갔다. 그런데 왠지 속은 느낌. 무엇에 또 누구에게, 그건 알 수 없었다. 다시 분위기는 축제로 바꼈다. 어느 학교 안의 계단에서 여자 동지를 마주쳤다. 난 그녀를 알아봤지만 그녀는 날 몰라봤다. 그녀는 바쁘게 뛰어갔다. 나는 그녀를 뒤쫓았다. 내 귀는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혼잣말은 듣게 됐다. 강력한 상대와 패자부활전을 치러야 한다는. 나는 그녀를 계속 쫓아갔다. 강변을 달리고 다리를 건너고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 내부는 콜로세움 같은 미로였다. 설마 여긴 교도소? 그러다 경기장에서 친구 1, 2를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피앙세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오빠 뭐해?」
   그녀의 말을 친구들과 함께 들었고, 난 으쓱했으며, 친구들 앞에서 체면이 섰다. 흐흐흐흐흐! 우린 함께 놀기로 했다. 그러다 잠깐 나는 일행을 놔두고 혼자 잠깐 경기장으로 가서 여자 동지의 경기를 구경하다 다시 돌아왔다. 연장전이었고 난타전이었지만 경기는 이제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우리는 시합을 뒤로 하고 먼저 경기장을 나가기로 했다.
   어느 노천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차를 마시며 피앙세를 훔쳐 봤다. 그녀는 넥타이를 맺다. 여성스런 취향으로 멋지게. 여전히 예뻤다. 그녀는 날 빤히 쳐다봤다. 언제까지 오빠를 기다려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하지만 난 딴청을 피웠고 눈길을 피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코치를 받고 왔는지 생각했다. 난 아무 말도 할지 못했다. 그때 카리스마 친구3이 등장해서 합류했다. 친구3이 말했다.
   「넥타이라도 좀 매고 오지 그랬냐?」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내 피앙세를 본지가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를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지 않았다. 흐릿했다. 아니 자세히 보질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환영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봤다. 예전 기억과 교차되어 헷갈렸다. 그때 친구3이 내 지갑을 봤다.
   「어, 너 지갑 샀냐?」
   「싼 거야. 아니 아빠 건가?」
   난 고개를 숙였다. 내 초라한 모습을 그녀에게 들킬 것만 같아서. 별안간 그녀는 오늘의 운세를 뽑는 소형 자판기 앞으로 갔다. 자판기를 그녀가 만지가 그것은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상인들의 의류 악세서리 같은 걸로 변했다. 그녀는 그걸 착용했고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를 바꿔 봤다. 그녀는 그걸 엉덩이쪽에 대고 뽑기 버튼을 눌렀다. 이때 친구3이 그녀쪽으로 다가가며 도와줄려고 했다. 피앙세는 오늘의 운세를 뽑아서 잠시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어제 꾼 꿈의 내용이다. 꿈에서 처음으로 피앙세를 만났다. 희미하게나마. 너무 아련해서 혹시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너무 희미했고, 간절한 내 마음이 만들어낸 꿈 속의 허상이 아닌지 의구심이 가득했다. 너무 기이한 꿈이라서 긴가민가했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처럼 그저 그렇게 끝나버린 꿈이었다.


   5

   12월 20일 꿈.
   젊어서 날 찾으면 주로 어디든 갔다. 하지만 노회한 어른이 되면 안가도 될 자리는 안가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꿈에서는 아직도 철없는 젊음이라서 또 어느 남의 잔칫집 앞까지 갔다가 그 앞에서 고민한다. 어제 꿈에 그랬다. 내가 여길 왜 왔지? 그러면서.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이걸 예쁘게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니까─3번째 범주에 속해서 불렀을 텐데 꿈에서는 또 속는다. 꿈이니까 괜찮긴 하다마는. 거짓말과 여러 삶의 수완이 더디게 느는 데 비해서 빈말과 참말을 구분하는 능력은 아직도 청춘이다. 청춘?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그러면서 깨는 순간 너무 일찍 깼다 싶으면 또 후회한다. 왜 벌써 깼지? 난 아직 늙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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