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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12. 31. 23:51

   1
 
   일상에서 익숙함이 좋고 만사가 귀찮다면 현실 안주다. 그 방향에 따라 도피와 회피도 있고, 머머증과 만족과 권태도 있다. 또 동네에서 일하고 놀다 지치면 여행을 간다. 시간과 경비가 부족하면 못 가고. 하지만 평범함에 물리고 지루하고 심심하면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그 새로움에는 후보군이 많다. 모험, 이사, 이직, 도전, 변심, 변덕, 만남과 이별, 취미, NC, 직업을 바꾼다 등등. 그러나 환상은 노상 뜬구름 잡는 얘기고, 신비는 몽상가들의 단꿈에 불과하며, 사랑을 돈으로 사는 건 쉽지도 않고 도덕-소문 같은 허들의 문제도 있고 재미도 없다. 일단 판돈이 넉넉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최근 왠지 호감 가는 새내기 유명인 1명에, 그다지 유망 없고 흥미도 떨어진 취미 2가지, 한때 촉망 받았지만 여심을 빨아들이는 기운이(약발이?) 떨어진 수트 3벌을 교체할 것인가? 이때 귀찮으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뫼비우스 기하학이고, 망설이면 햄릿이요, '뭐가 뭔지 왜 그런지 나는 모르겠다' 그건 늙은 거다. 따라서 젊음의 여신 헤베는 아마도 이렇게 처방하시지 않을까? 고민과 성과는 동의어가 아니고, 아무리 귀가 얇은 사람일지라도 첫눈에 반하는 최고의 사랑은 알아보는 법이니, 고로 에라 모르겠다 라면서 과감히 결정하여라 씩씩하게 실행하거라 라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떨리며 영혼이 설레어서 코끝이 찡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원해지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낫다. 왜냐하면 언제, 어떻게, 왜인지도 모르게 발목 잡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이랄지 어떤 괴로움의 실체를 본인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럴 땐 쉽게 생각하는 게 상책이다. 잠, 휴식, 꿈, 게임, 오락, 여행, 술, 만남, 산책, 운동, 일광욕 등등. 그렇게 시간을 번 결과 조지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행복한 일하기 대신에 바로 판타지 머신을 구입한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게 다행일지 화근을 불러올지를. 마음의 문을 열지도 못했고 닫지도 못했다. 젊음의 행진을 나 혼자 할 수도 없으니까 사긴 샀는데, 잘 산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슨 머신? 속은 건 아닌가 걱정됐다. 괜히 혹해서 말이야, 그 돈이면... 그래도 아직은 몰랐다.
   비밀의 리본을 풀었더니 내용은 미지. 미지를 애써 파헤친 결과 마주한 건 기막힌 사연. 그 사연이라는 것은 두 가지. 첫째 환상적인 사랑, 둘째 신기한 인생 이야기. 그 첫째와 둘째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조지는 환상머신을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조지가 그것을 구입하게 된 경위는 이랬다. 정결한 미술관에 갈까 한적한 강변도로를 신나게 달려 볼까, 라면서 드라이브를 하던 중 별다른 결실 없이 마음이 바껴서 집에 돌아갈려고 했다. 집에 거의 왔다. 외곽도로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웬 늘씬한 아가씨들이 일렬로 여러 명이서 동시에 손짓을 했다. 달콤한 미소, 오빠 멋져, 아빠 뭐해? 쉿! 친근감이 활짝 샘솟게 만드는 숙녀들의 안내로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무슨 연예기획사 차량과 영화에나 나오는 뭘 탐지하는 특수 설비가 갖춰진 벤차량. 그리고 방송사 장비처럼 보이는 기구를 실은 트럭까지 주차되어 있었다. 굉장히 멋져 보였다. 뭔가 있는 듯 했다. 일단 분위기로 압도했다. 거기서 누가 봐도 눈이 호강하고, 귀가 호사를 누리며, 감성이 촉촉해지고, 감수성을 자극하여 호기심에 한껏 (헛)바람을 주입하는 듯한 감탄스러운 웅변술이 장기인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상인이 나타났다.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무슨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인공지능이라는 둥,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둥, 아마도 불가능하고 초현실에 기적적인 일만 아니라면 그 무엇이든 새로움을 경험할 것이라고 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어쩌면 환생을 경험할지도 모른다며 썩 기품이 떨어지지도 않은 펌핑? 동기 부여는 계속됐다. 게다가 상품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고, 심지어 아가씨들과 장비와 한껏 고조된 조지의 기분이 그 모두를 엄정한 사실일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었다. 어떻게? 밑져야 본전이라고!
   그는 그렇게 약간 찜찜한 심정을 숨긴 채 판타지 머신을 구입했고, 그 소프트웨어를 들고 집으로 갔다. 컴퓨터에 잘 설치되면 다행이고, 순 엉터리로 밝혀지면 내 이것들을 당장 달려가서... 그냥 사교계에서 작은 내기에 진 셈 치기로 했다. 그처럼 별 기대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뭐 특별할 게 있겠어 라면서. 그렇게 시작은 미약했다. 그러나 시작도 미약했다 라는 예감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그날 일찍 꿈나라로 떠났다.


   2

   조지는 다음 날 컴퓨터에 환상머신 소프트웨어를 설치했다. 그건 포토샵이나 구글어스를 설치하는 것과 똑같았다.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다 설치한 후 하라는 대로 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입력했다. 운영하는 소셜 네트워크 계정도 알려줬고, 블로그 주소도 입력했고, 인터넷에 올리지 않은 사진들도 넘겨줬다. 바지만 벗지 않고 다 내줬다. 그런데 그 수많은 정보를 받은 채 환상머신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주인님, 나체의 숙녀를 원하십니까? 라는 농담조차 건네질 못했다. 그래. 녀석은 좀 멍청했다. 조지는 멍청한 건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TV를 봤다. 그래도 뭔지 모르게 미심쩍은 기묘한 느낌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환상머신은 새로운 행복과 문학적 열정을 이간했다. 아, 그건 아직이고 희망 사항이다. 그는 궁금했다. 환상머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창립멤버는 누구일까? 사용자는 나뿐일까? 설마 아직 상용화 이전 단계는 아닐까? 이건 혹시 너무 과분한 행운일까? 그렇다고 헛된 성적 공상마저 창조적 상상력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과신하든 무시하든 시험은 해 보면 된다. 녀석이 3일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기다리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조지로 말할 것 같으면, 특별할 건 없다. 그는 놀이를 사랑하고 무질서를 싫어한다. 이따금 으쌰으쌰는 즐겼다. 풋사랑은 후회스럽고 인기는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분께서 왜 그리 주말이 한가하실까) 비둘기에겐 친숙함을 올빼미에겐 경이감을 느낀다. 방탕했던 친구가 앞으로 건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자 그는 피식 웃어 주었다. 행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더라. 오오 가여운 것! 결혼은 신나는 모험과 놀라운 새로움의 종말이란 말인가. 하루는 벌꿀 때로는 나비 대체로 베짱이. 자못 엄숙한 마법사들을 바라보는 부러운 눈길을 마누라한테 들키면 안된다. 절대 안된다. 그러면 혼나니까. 왕년에... 뭔가가 울컥하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어쩌다 꼴깍 마른 침이 넘어간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는 지금까지 첫키스를 한번도 해 보지 않았고, 난생 처음 한두 번 거짓말한 게 전부였으며, 그의 추리는 지금까지 빗나간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노스트라다무스를 훨씬 능가하는 예언가라고! 왜냐하면 너무 유명해지면 은근 피곤해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여태까지 꿋꿋이 허당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해명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그 쓰잘 데 없는 심정을 누가 알고 싶어 한다고!
   조지는 기다리기 지루해서 지난 날을 회상했다.
   한때 조지는 단짝이 그럴 줄만 알았다. 바람의 변화를 예언하며 지성을 버겹게 가득 안고 고뇌하는 지략가 정도 되는 줄로. 하지만 말만 그랬다. 그러다 외로운 시기가 돌아왔다. 길지는 않았다. 방황도 했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또 다시 단짝이 생겼다. 사랑은 아직일 테니까. 녀석은 '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라는 말에 동감하는 평범한 여행가가 되는 건 무엇보다 내키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여행을 사랑에 비유하는 달변가였다. 멋진 여행지를 다 직접 가 봐야 하는 건 아니듯이 모든 여자와 포옹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걔도 허당이었다. 그래서 단짝은 또 바꼈다. 새로운 친구는 그랬다. 광고를 믿고, 외모에 매료되며, 목소리에 끌리고, 지성과 애모로 가득찬 웅변술에 감탄하는 소문의 여신 클리오. 그런데 그건 단짝이 아니라 본인이었다. 조지가 친구들한테 대체 뭘 배웠겠나, 이번엔 허세 따라하기 차례였다. 자평하자면 불세출의 카사노바가 확실하나, 전설적인 팔랑귀를 타고났기 때문에 고개 숙인 난봉꾼 그분은 혹시 내가 아닐까 라면서 걱정됐다. 그래서 자화자찬만 할 게 아니라 사태를 객관화 해 봤다. 그랬더니 아 글쎄, 여기서 중간은 건너 뛰자.
   그런데, 그분의 바람기는 어떻게 잡혔을까, 현대판 파마 때문에? 아니다 아니다! 간당간당 언제나 부족한 품위 유지비, 넘쳐나는 오락과 유희는 물론 바카스와 큐피트를 비롯하여 맡아야 할 역할은 너무나 많고, 그래서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다. 굳이 모든 여심을 하필 바쁜 내가 친절하고 사려 깊게 어떻게 한번? 다큐멘터리를 보면 되지 구태여 나까지 주인공이 될 필욘 없다. 자동차 1대, 가방 2개, 양복 3벌, 속옷 5개 양말 7켤레면 충분하다. 그거면 된다. 구두 100개 선그라스 200개? 귀찮다. 정신 사납다. 비오는 날이면 나는 RV차를 타 라는 친구의 말도 이젠 시큰둥하고, 내가 중세의 왕일지라도 애첩을 총애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넌 아직도 그렇게 한심한 상상이나 하냐? 소신 있네. 지극정성이다. 열 좋아.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의 소란스러움을 다 따라하지 않아도 괜찮다. 핸드폰 연락처 3000명과 다 친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럴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어차피 못하니까 합리화하는 게 아니다. 꿈의 포기도 아니다. 기본은 철들면 안돼, 그것이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사랑과 흑심과 소망을 구분하겠다는 거다. 바로 그래서 어느 돈 주앙은 학자랄지 예술가가 되어 블로그를 운영한다더라? 아니다. 다 아니다. 조지는 피앙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애 처음으로 구름 위를 걷는 듯 했으며 꿈과 현실을, 환상과 통장 잔고를, 미지의 신비와 한심한 술버릇을 잘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말인지 뻥인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헛생각 충분히 했고, 기다렸던 3일 후가 되었다.


   3

   조지는 카페에서 혼자 차를 마셨다. 짝 1, 2, 3이 보인다. 관찰했다. 왜 짝1은 여자가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았을까! 혹시 남자가 그녀한테 첫눈에 반해서? 그는 예측했다. 왜 짝2는 하필 여자가 벽을 보고 앉았을까! 시작부터 그이한테 홀딱 빠져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능하다면 이 연애는 비공식이고 싶어서? 억측이기를. 곧바로 이어서 그는 추리했다. 짝3은 보아 하니 할 말이 별로 없어 보이네. 사랑이 식었구만. 어설픈 가정일 수도 있지만, 왠지 저 남자는 의리 있고, 여자는 신망이 두터워 보인다. 그리고 짝4의 경우는 부러웠다. 눈을 뗄 수 없는 연정. 좋을 때다. 그치만 조금만 지나 봐라! 쓸데없는 추론은 그만하자 라고 생각했다.
   환상머신 때문에 조지는 카페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카페에 앉아 내부의 분위기도 살피다가 창 밖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무엇보다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하다가 노트북에 글을 쓰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는 그 일이 그렇게나 어려웠다. 왜냐하면 언제 글이 써 질지 그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혼자만의 특별한 재주는 아니지만, 그는 이상하게 느낌이 와야지만 글이 써졌기 때문에 직업에 걸맞지 않게 필력은 초라하고 행색마저 궁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우연히 만난 환상머신 때문에 그는 마침내 카페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실전엔 돌입하기 전이었다.
   그때 환상머신이 말했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주인님이라며 존칭을 쓰지도 않았다. 친한 친구처럼 막 불렀다. 야 조지, 그렇게. 그래서 조지는 일단 녀석한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뭐라고 부르지? 아프로디테? 너무 길다. 비너스? 식상하다. 아도니스? 남자다. 아르테미스? 그 보다는 신식이 좋겠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애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애인은 그랬다. 품위 유지비가 필요하냐고. 때가 되지 않았냐는 거다. 듣고 보니 때가 됐다.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 또 칼럼을 기고할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쪽에서 요청이 없었다. 조지가 먼저 연락하기에는 뭔지 모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나 고민하고 있었냐며 애인이 말했다. 그런 조지의 마음을 투명하게 엿보았을까? 애인은 편집장 마라의 친구 중에 여성잡지1과 2에서 활약하는 친구라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당연히 그 친구들도 편집장이었다. 애인은 조지가 그다지 썩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로 간략히 어떻게 어떻게 물어보라고 알려줬다. 그랬더니 금새 원고료가 선입금되었다. 게다가 그건 미스테리아 원고료의 2배였다. 완전 짭잘했다. 아 그런데 글을 어떻게 쓰지? 조지의 고민은 한방에 해결됐다. 왜냐하면 애인이 도표로 작성해서 상을 차려줬기 때문이다. 단어 목록, 2개 단어 즉 숙어들, 관용어, 속담, 비유, 문장등 자료를 쭉 나열해줬다. 조지는 그걸 숨은그림찾기나 그림 맞추기처럼 잇기만 하면 됐다. 다 차려진 잔치상에 숫가락만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낸 건지 꽤나 신기했다. 그는 일단 정신없이 글을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 길지도 않았다. 오히려 짧고 발랄하며 산뜻하다고 그쪽에서는 좋아했다. 아무튼 조지가 새로 쓴 칼럼은 무엇인가 읽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4

   제목: 허당 인생론
   유난히 기억력이 뛰어나고 남달리 거짓말을 잘한다? 허언증1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상할 정도로 농담에 일가견이 있다? 허풍꾼! 주위에서 말한다. 재주가 아깝다야 작가 한번 해 봐라. (나도 친구 중에 시인 한명 있으면 좋겠다, 코메디언에 도전하는 건 어떠니?) 그래서 노력과 끈기와 열정은 부족하나 그냥 한번 해 봤어, 그랬더니? 삼류도 아니고 유명해져서 돈도 벌고 막 광고도 찍고 드라마에도 곧잘 나오네, 와 대~박!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전성기는 지나고 시대에 갇혀서 박제된 천재는 글이 안 써지네? 후유증! 왜냐하면 한때 신세계를 봤고 이제는 누가 찾지도 반기지도 않는 허세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 링에서 끌려내려왔기 때문에. 따라서 이제부터 측정할 수 없는 허영심이 측량할 수 있는 허당기를 본격적으로 먹여살려야 하는 시국.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제발로 내려갈 걸? 우리는 철들면 안됨! 그래서 분야를 바꿔, 화가나 작곡가로. 허나,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 잘 안돼. 반응 별로. 종목을 다시 바꿔. 사업가로. 그래서 번 돈 절반을 까먹어. 그 돈 버느라 지금까지 어떤 역경을 감내했는데! 허나 인생의 풍파를 이겨냄. 다시 일어서.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어서 영화판에 뛰어들지. 어? 뭐야? 이거 뭐냐고! 일도 재밌고 돈과 인기는 덤으로 따라오네? 이때 적절한 속담은, 배 들어올 때 노 저어라! 그런데 노 저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물이 빠지네. 그러나 때 이른 실망은 금물. 왜냐하면 물이 다시 들어왔으니까. 전문가들이 찾고 투자자는 줄을 서고 팬들도 막 기다려. 아아, 내가 정말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라고 깨닫지. 그렇게 새로운 시네마 탄생 짜잔~!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뭐 그런대로 선방했다고 자평. 그래서 다시 허세는 꿈틀꿈틀 꼼지락꼼지락. 따라서 애초의 연애시, 처음의 꿈이었던 코메디언이랄지 작가로 재기하기를 결심. 은퇴 선언을 한 적이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은퇴 번복. 오락산업의 헤드라인은? 누구 뭐를 들고 돌아오다! 그런데 결과는, 누구도 갔네 갔어! 뒷모습이 글쎄 애매해짐. 모양새마저 어중간함. 심지어 이혼까지 당하면, 그건 개인사니까 쉬쉬! 오오 세상이 원래 이런 건가? 시장에서 이용당한 다음 버려진 건 아닐까? 토사구팽 뭐 그런 말처럼. 결론은 이렇다. (딱) 승자는 산업, 낙천가는 관객, 패자는 단물 빠진 복고풍 유행 선도자. 너무 식상한 패턴인가? 어쩐지, '뭔가 있어 뭔가 있어'로 시작했지만 결국 재미없음으로 종결. 그러니까 뭐가? 허당의 인생론이!


   5

   하루는 또 일기를 썼다. 아동기, 유년기, 소년기, 몽정기, 사춘기 때 거의 쓰지 않던 일기를 왜 이제야 즐겨 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은 재미있기 때문에 또 참을 수 없어서 일기를 썼다.  
   일기. 12월 26일.
   친구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느낀다. 꺼림직하고 싫지만 사랑도 남남도 아닌 하필 우정이니까 또 넘어간다. 그러니까 뭘 느꼈냐? 마초에 대한 연민이라고나 할까, 그분들께 그동안 참으로 어렵게 벌었던 깨알 같은 친밀감 점수, 속된 말로 개고생해서 얻은 사연 깊은 점수 다 까먹게 생겼네. 어쩌면 이건 그것의 정반대 되는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르겠군.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아는 지식일 테지만 뭘 다시 각성했는지 자,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자.
   성격을 보아 하니 아아, 도시에서 자란 숙녀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내로구나. 더구나 시골에서 자랐으면 친구들끼리 비교적 허세와 과시욕에 유독 민감했을 텐데,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젊은이의 열망은 잊혀지고, 직업이랄지 어른의 임무에 이르르기까지 순수했던 동심이 대망이나 행복감으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다고 느끼는군. 그건 둘 중 하나. <자발형 허당이던가, 재미없는 조롱꾼이던가> 바에 가면, 한 명은 말을 많이 하는데 반응이 안 좋고, 한 명은 오직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담 입장에서 별로 반갑지도 달갑지도 않은 손님이다. 그분께서 비싼 술 한번 시키는 걸 보는 게 소원일 지경이니까. 3병맨이라고 소문나서 옛날에 바도 끊었다. (똑같이 3명 마시고 가는데 왜 얘만? 제게는 묻지 마세요! 혹은 바텐더 맘대로) 개가 뭘 끊겠나, 고양이가 생선을 마다하겠나, 내 집이 술집이고 인생은 술이다. 고품격-고전주의-상류층 기질은 1퍼센트도 섞이지 않은 완전무결한 촌닭. 그걸로는 순수하군. 만약 시트콤처럼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친하고 모두 아는 사이다, 그랬을 때 내가 불균형적으로 심각하게 인기가 높다? 질투한다. 싫어한다. 경계한다. 짜증난다. 겉으로 표시내진 않는다. 다만 때를 엿볼 뿐. 친하기는 하지만 언제 뒤집을지 모르는 카드다. 가만 있는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든다. 밝은 말을 하면 그런다. 누구야 (손짓 몸짓) 어떤 도덕군자를 어쩌고저쩌고! 건실한 얘기가 아니라 으쌰으쌰 어울린다. 그럼 또 꼬투리 잡고서 여자들한테 그런다. 이러쿵저러쿵 쟤도 뭐 어쨌다고 쏙닥쏙닥! 그렇지만 다행스럽게 시트콤 멤버가 아니다 라고 할지라도 심기가 불편할 때가 언제냐, 하면 당연히 바텐더한테 평가 받을 때! 남자끼리 어울릴 때가 아니라 언제 표정이 가관일 것인가 예상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속편하다. 얼렁뚱땅 건들건들 듬성듬성 만나는 것, 그게 피차 상책이다. 편한 대신 격이 떨어진다. 맞춰줄 수 밖에 없으니까. 둘 다 경미한 사이코머시기 기질 있음. 전문가와 내기 하면 내가 이김. 자신 있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지는 건 지는 거다. 우리 아들은 본성이 낙천적이죠? 완전한 호사가에 완벽한 비관주의다. 인생 표어는 그거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우리 오빠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에이, 알면서! 촌닭에게 최고의 배필은, 그렇다. 촌년이다. 여자들에게, 그분은 전형적으로 인기 없는 남자. 도도한 숙녀가 좋아할 리가 있나. 그건 뭘 아는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어쨌든 촌닭도 다 같은 촌닭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설혹 고상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어도 나중 이혼하거나, 또는 뜨뜻미지근하게 결혼의 감옥에서 좌절할 수 밖에. 허풍도 기준 미달. 동조성도 심각한 결여. 농담도 깐족도 아부도 싹 다 그만그만하니, 아 바로 그래서 숙녀들의, 특히 도시에서 자란 숙녀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었구나. 시골에서 자랐을지라도 성미 마르지 않고 여심을 배려하며 꽃 들고 쫓아다니기를 안다면, 무엇보다 성정이 밝다면 도시에서 자란 숙녀들의 한결 같은 사랑도, 뭘 아는 남자로부터 다정한 우정도 얻던데. 내 다른 친구도 이제 보니 바로 그래서 미녀를 얻을 뻔 잘될 뻔 하다 말았다. 당사자에겐 아픈 기억이지만 단짝이라면 말할 수 있다. 함께 했던 추억에 대해서. 말해도 된다. 우정에 있어서 단짝으로 상중하에서 상중, 적어도 상하는 되니까 하는 말이다. 그게 다 타고난 천성 때문. 혹시 운명의 굴레 때문일지도. 살아온 여정과 현실 사정 알고 나면 끄덕끄덕 수긍하게 된다. 만인에게 웃음을 선사해야 한다는 코메디계에서도 어느 개그맨이라는 작자는 연애로 대화 주제가 바뀌면 인상 험악해진다. 기분 꽝이다. 표정 망가진다. 울기 직전이다. 차마 못 봐주겠다. 평소에는 고급이든 저급이든 타인의 사생활이든 가리지 않고 촉새처럼 인정사정없이 마구 말하다가도, 듣거나 말거나 막 떠들다가도,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뜰 것처럼 타석에 들어서기만을 좋아하면서도, 유난히 연애와 사랑이라면 유체이탈의 경지에 이르른다. 그 주제 자체가 싫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구미 위주로 도시에서 자란 숙녀들에게 충분히 사랑 받지 못했으니까. 진짜 그러냐구요? 그렇죠. 왜냐하면 좋은 말로 지고지순한 사랑만 한두 번 한 게 다고, 신중하기 퍽 애매한 말로는 연애 경험이 영 변변치 않으니까. 보면 천상 허풍꾼이지만 난봉꾼엔 소질도 취미도 취향마저 없는 걸로도 모자라 전적까지 비천하니까. 입만 열면 뻥이니까. 그 주제는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나설 수 없으니까. 실제 주위에 보면 무성애자 같은 심각한 사례도 매우 드물게 있다. 어느 선을 넘지도 않고 에로비디오 정도만 어떻게? 한마디로 건강한 거다. 숙녀와는 라이트모티브를, 무대에서는 조명을, 그런데 언제 어디서나 내가 최고에 나만 주목 받아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비롯한 몇몇 정치색 짙은 소설을 읽지 않은 정치인과 별반 다름없다. 그래도 그분들 모두 중간은 간다. 그러나 중간만 간다. 지금까지 평생, 앞으로도 내내, 오직 잔지식만이 살길이다. 잔지식이 아니라 심도 깊게 얘기한다? 뚜껑 열린다. 잔지식이 아니라 서론-본론-결론을 따진다? 화제를 재빨리 넘긴다. 잔지식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늘어놓는다? 당장 화낸다. 늬나 나나 아는 것 똑같지 뭐 그러냐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공통적이면 친구고 아니면 남이다. 그래서 친구는 많은데 그냥 그런 친구만 많다. 선천적으로 완벽한 촌닭이다. 고로, 답이, 없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짜증낸다. 내 지식보다 친구 지식이 높다? 화낸다. 내가 새롭게 좋아하는 분야를 걘 이미 옛날에 뗐다? 뚜껑 열린다. 말을 바꾼다. 자기 얘기가 아니라 먼 친구 얘기라고. 얘기 길어질려고 하면 우긴다. 어렸을 때 봤던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구두를 온화하게 각색한 만화영화 얘기가 나온다? 지금 당장 몇몇 분께서는 내가 꺼낼 애드립이 생각날 것이다. 누군가 하면 안델센과 발음이 얼추 비슷한 앤더슨을! 귀는 막히지 않았는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앤더슨은 머머스키처럼, 머머스탄으로 끝나는 지역명처럼 꽤 흔한 이름이다. 축구하는 앤더슨, 격투기쪽에서 떠오르는 앤더슨도 있고, 야구하는 앤더슨과 아이스하키의 전설도 있을란가 모르겄다. 맞다. 진짜 그런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단편소설들 있지 않나, 그쪽으로 주제를 꺼낸다면 표정으로 말할 것이다. 지금 그 얘기를 대체 왜 하는데, 대관절 왜 그 얘기를 나한테 하나 이 친구야! 라고. 그 모두를 친하면 알게 된다. 때문에 친해서 좋은 게 있고, 동시에 거리가 있어서 좋은 거도 있다. 마음 맞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게 다 투정과 불만에 따른 글이라기보다는 웃자고 하는 말이긴 하나, 그래도 좀 심한 구석이 크다는 거다. 안 그렇소 여성 여러분? 체면 내려놓고 말해서─까놓고 말해서(?)─내 말이 틀렸소? 이거 진짜 한번 속고 두번 속고 셀 수 없이 속고 또 속기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대체 이게 뭡니까, 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들고 일어섭시다? 워─워─워! 그렇지만 아직 안 끝났다. 더욱이, 뭐가 그렇게 바쁠까? 그렇다고 리드하면 잘 따라오지도 못하고 길을 잃다가 결국 일행과 멀어져서 찾기를 포기하고 아니 아예 찾을려고 생각도 않고 혼자 집에 들어가서 잔다. 여자한테도 그런다. 그렇게 말한 것처럼 행동한다. 잔말 말고 따라오라고! 아 답답~허다! 답이 없다. 그렇다고 요리에 취미가 있나, 돈이라도 많나, 싸이 톰블리를 이해하나, 동물의 마음을 공감할까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알기를 하나. 머릿속에는 오직 무슨 생각뿐이다? 그렇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혹시 형편이 풀려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더라도 말을 많이 하면 안된다. 근사한 사교계로 진출한다 할지라도 말을 많이 하면 안된다. 말을 많이 하면 정체가 탈로난다. 홍학과 백조와 기러기들 잔치에 촌닭이나 오리 몇 마리가 합류하는 상상을 해 보자. 멋지겠군. 재밌겠다. 아름답겠지 아마? 하여 중요한 자리다 싶으면 절대로 말을 많이 하면 안된다. 동네 챙피하게...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설프게라도 어떻게 뻔트 한번 칠려다가 2부리그 3부리그까지 밀려날 수 있으니까. 이러쿵저러쿵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특히나 조심해야 하니까 말이다. 펠리컨도 갈매기도, 대중이 이뻐서 봐 주는 게 아니구나 라며 일찍이 깨닫는 게 아니라 애초에 포지셔닝을 그처럼 잡았던 것이다. 원래 성격도 본성도 그렇다. 그래도 살면서 왕왕 느낀다. 말 한번 잘못하면 큰일나니까 묵비권을 조랑말처럼 꼭 대동해야 한다고. 그렇더라도 무뎌진다. 남이 뭐라던가 말던가 인생 직진이니까. 그럼 입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살까, 다시 낙향할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거야 당사자 알아서 하실 일이고 아무튼, 만약 이런 남자가 드물게 천문학적인 부를 성취하게 될지라도 그분은
   첫째, 인기 없다. 앞에서야 굽실굽실 딸랑딸랑일 테지만. 야 야 떴어 떴어 또 왔어 또 왔어 피해 피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음.
   둘재, 재미없다. 어쩌다 재미가 있어도 금새 허당임이 들통난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
   셋째, 썩 행복해 하지 않음. 비운의 뉴스는 즐겨 봄. 그건 그분께 변치 않을, 영원한, 최고의 취미다. 이에 대해 사람은 크고 작냐의 차이만 존재하긴 하지만 아아, 심하다.
   넷째, 사랑에 불만족. 뭘 좀 아는 남자나 여자가 좋아하는 제반 여건이 되는 남자도 그런다. 으쌰으쌰 자리에서, 멋 모를 때 결혼했다고 쩜쩜쩜! 그게 아니라 자발이나 조롱 유형의 친구는 그런다. 자긴 사랑에 만족하는 듯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나보다 친구가, 돈이 많네? 잘나가네? 인기는 불변하네? 여긴 내 홈그라운드인데 남의 동네에 와서 대물을 잡네? 친구 여자친구가 어쩌네? 천성이 밝던가 인정할 건 인정하던가 그렇지도 않고, 그저 꿍하니 자기는 비교는 싫다면서 자기는 허세와 과시욕이 싫다면서 자기도 그러고 싶어한다. 잠재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부류처럼 되고 싶어하고, 살면서 운이 따라주면 실상 그렇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싫어했던 타인의 행동을 정확히 답습함. 싫었다면서 왜 모방을 하냐고! 더 심하지나 않을런지 걱정이군. 평범한 택시 운전수가 왜 악덕 사장이 된 사례가 드물지 않았는지 약간 알 듯 모를 듯 하다.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을 때도 있는데, 그런데 그런 순간은 짧다. 많이 짧다. 금방 있는지도 모르게 쓰윽 지나가버린다. 어쩌면 사고 체계와 행동방식이 그에 최적화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할 땐 놀 생각, 놀 때는 으쌰으쌰니까. 만일 부러움을 비난으로, 선망을 비관으로, 내 호박과 친구 호박을 견주는 게 보이는데 아는데, 그런데 속마음이 비춰지는데도 짝을 동반해서 만난다? 미안해서라도 그러면 안될 것 같다. 실제 그래 봤더니 진짜로 미안하더라! 아주 많이. 아아 제발 오오 이런 젠장, 그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남의 여자는 쳐다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여자들 태반이 남의 여자인데? 아예 그냥 고개를 들지 마시지, 아예 그냥 산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시지 그래. 뭐야 잠깐. 자기는 남의 여자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째서? 왜 안 쳐다보는데? 사심없이 그냥 언뜻 볼 수도 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짝 쳐다볼 수도 있고 주문을 하면서 쳐다볼 수도 있잖아. 그냥 보는 게 뭐 어때서? 이미 스무 살부터 돌씽이란 말이네. 왜, 부러워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니까? 것도 아니면 남의 떡이 커 보여서? 그럼 그건... 본다는 것과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것 사이에는 크다도, 적다도, 같지 않다도, 모두 아닌 등호가 성립한다는 뜻이네? 이런 개뿔! 동심이 무슨 보너스 포인트야, 소멸하게? 소망은 안 키우고 동화를 떼자마자 흑심으로 건너뛰었다는 말이군. 뭐든지 보기만 하면 눈독이란 말이야. 나 원 참! 허허허! 웃기지도 않다. 누군지 몰라도 그 양반 안되겠네. 남자는 둘로 나뉜다. 경쟁 심리가 뼛속 깊이 전제된 남자와 아닌 남자로. 거기서 전자이면서 촌닭에다 잔지식파에다 허무에다 과묵과 비꼼 둘 중 하나에다, 인기 없고, 젊은 시절 청춘 시트콤을 남녀동반 두루두루 함께 찍었던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며, 짠돌이에 애연가에(절반은 입담배. 연기 얼마 빨지도 못함. 폼도 별로) 질투심 많고,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다 아는데, 형편 풀리면 좋은 차 타고 뽐내고 싶어 하는지 밤의 황제로 살고 싶어 하는지 어쩐지를 다 아는데, 효과음 동반해서 견적 다 나오는데, 그런데 어떤 동반 만남? 혹 제의 받아도 빼는 게 예의다. 그게 인정이다. 극구 사양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일일 테니까. 끼리끼리의 법칙과 예외에도 심각하게 위배되니까. 친한 친구가 몇이었고 단짝이 몇 명이었으며, 주류는 안 되도 영화배우에 성우에 야수파에 마피아 출신에 재담가에 예술가에 사기꾼에 팔방미인까지 쑤두룩했는데, 노 포커페이스? 노노노노노노노! 솔직한 거랑 음흉한 거는 다르다. 정직과 시기가 다르듯이. 완벽한 목적-지향형 부류. 만약 다정하다면 목적이 확실하기 때문. 어머머, 완전 우리 아빠다? 아빠 사랑해 한번 하자. 아니면 용돈 두둑히! 맙소사 우리 오빠? 이미 달관하셨구만. 축하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퍽 난감하구먼유. 하지만 저 조건이 거의 충족되더라도 예외는 있다. 꽃다운 스무 살 청춘 시트콤을 남녀동반 두루두루 찍었거나 기타 등등, 다시 처음의 이유 나열로 돌아가는 거지. 어차피 각자 인생 사느라 볼 일도 많지 않을 테고. 이런 유형은, 내 방과 더불어 무의식과 본심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도 잘 하지 않는다. 첫째 하기 싫고, 둘째 재미없고, 셋째 감추는 게 많으니까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보여줄 것도 별로 없으니까. 해도 즐겁지 않고 인기도 없다. 진득하니 관계를 발전시키고, 관심을 갖고 애정을 기울이며 노력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음. 댓글을 내가 가서 쓰고 남이 답글을 쓰고, 친구와 지인이 와서 내가 올린 내용에 댓글로 대화를 할 때, 내 컨텐츠에 댓글이 달리는 것과 내가 밖에서 댓글을 다는 비율, 팔로우와 팔로워의 균형을 도무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까. 인생을 오래 살아 봤으면 모를 수 없다. 사둔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을 꺼내 놓으면 바로 그때 명백히 갈린다는 것을. 그땐 진공청소기도 있고 커피포트도 있고 울그락불그락도 있다. 여자들 말처럼 화사한 꽃다발을 받는 모습을 거리에서 보며 아가씨들 말마따나, 유난 떠네─좋겠다─부럽다─부러우면 지는 거다─그냥 지고 꽃 받고 싶다도 있다. 단지 부럽다, 그게 뭐 어때서? 진공청소기는 웃는다. 그럼 머머하면 당연히 배가 아프지 하면서. (촌년은 혹 그럴 수 있겠다. 적당히 좀 하지 너무 심하네 하면서. 그녀들 사이에선 그게 얄미운 롱테일일 테니까) 그와 정반대로 또 다른 촌닭은 완전 울기 직전이다. 못 봐 준다. 정말 이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어진다. 정말 아아 그건 오 제발, 오오 제발, 오오오 제발! 그런데 이런 분께서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나를 제일 친한 친구로는 부족하더라, 두 번째로 친한 친구다 어쩐다, 친하니까 싸움 순위 10등에 턱걸이 시켜준다? 아 창피하다. 괜히 부끄러워진다. 각자 6하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자. 언제, 누가, 어떻게, 어디서, 무슨 일 때문에, 도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를! 뭐야 내가 그랬다고? 난 뜨끔하지 않아 왜냐하면 난 타고난 포커페이스거든. 야, 나 같은 천하의 승부가가 이 세상에 어딨다고 그래? 만약 이런 분께서 도박사에 도전한다, 그러면 인생 불행해지기 딱 좋다. 극구 말려도 꼭 해야겠다? 못 말린다!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코 해야겠다? 고개를 돌린다.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라고.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제어가 어렵다. 여간해서는 힘들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타고나니까요. 그렇다고 여기서 끝이냐, 하면 솔직히 섭섭허구먼유! 이거 정말 이러기예요? 우리 사이가 그거 밖에 안되냐구요. 내가 이럴려고 글을 쓰나,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선생님, 여기서 끝일 리가 있겠습니까요. 그 피함과 고개 돌림을 즐길 가능성이 있을까 없을까, 그처럼 정신분석은 2.0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말이다.
   다섯 째, 사랑과 행복과 귀찮은 호사와 지겨운 풍요도 모두 함께 하지만, 입버릇처럼 외롭다 라고 한다.
   이런 남자인가 아닌가를 여자가 과연 처음에 판단할 수 있을까? 거의 어려울까? 여간해선 어렵다? 아니다. 둘 중 하나다. 직감으로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남자처럼 여자도 뭘 좀 모르는 여자와 뭘 좀 아는 여자로 나뉘니까! 여기서 주부10단의 말씀을 들어보자. 평생 우정과 사랑만, 밀도와 횟수까지 더할 수 없을 만큼 경험하신 여인의 철학을 들어보자. 앗, 들었다고 칩시다. 여성잡지2에서 간혹 화류계랄지 뭐 어떤 얘기를 괜히 다루는 게 아니다. 뭘 좀 아는 여자는 직관적으로 느낀다. 그런 남자는 싫다고! 미녀도 아니고 인기도 없고 착하기만 한 여자. 평생 남자로부터 단 한 번도 구애를 받지 못했고, 평범하거나 멋진 연애를 한번도 못해 봤고, 당연히 남자가 꽃 들고 따라다니고 기다렸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여자. 단짝 중엔 형도 있었는데 그 형 말마따나, 여동생 결혼식 날 난 쟤가 결혼도 못할 줄 알았다나 뭐라나. (단짝은 아니어도 동생뻘한테 러브콜도 받았던 적이 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나보고 웃기다면서, 저는 형이 좋은데 형은 저 안 좋아하요? 라고. 아 그만 그만. 이거 완전 순 '자랑 일기'구만 그래) 어느 여자분께 그런대로 준수한 남자가 정식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집요하게 애원해도, 일평생 남자의 대쉬를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녀일지라도 단호히 딱 거절한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수많은 사실에 엄정히 근거해서 정리하는 말이다. 때문에 그 가치는 적을까, 적지 않을까? 부끄럽다. 재수 없다. 그래도 거의 끝나간다. 평생 그처럼 황홀한 고백을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는데, 남자가 꽃 들고 쫓아다니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건 다 친구 얘기에 불과했는데, 그녀 입장에서 그렇게 결연히 거절하기가 쉬웠을까, 어려웠을까? 살짝 가녀린 망설임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이런 여자의 손을 잡고 아이는(동생은) 엄마와(누나와) 함께 바깥에서 잠시 그녀의 친구나 지인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빈틈을 보이고 그런 거 없이 자기는 싫다고 딱 거절한다. 바람둥이인지 아닌지, 이 사랑을 승락했을 때 그 행복함이 짧을지 길지를 대번에 눈치챈다. 아무리 촌년&선녀일지라도 말이다. 7번 이혼하고 8번 결혼할 운명일지라도 사랑한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 말이다. 지적이냐 잔지식이냐, 폼이냐 차분하냐, 비관인지 낙관인지, 표정 관리가 되냐 안되냐, 판돈은 많냐 적냐, 객관적으로 남자쪽이 훨씬 나아 보이든 어떻더라도 딱 아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그게 바로 직관이다. 아 됐고, 그러니까, 그놈이 그놈이다? 호호호! 풍파를 겪고 파란만장함을 알며 명망의 정점을 한동안을 넘어서서 꽤 오랫동안 찍었던 스타일지라도 인생을 살짝 덜 이해했을 수도 있다. 아직 세상에 대한 원도 있고 일단 착하니까. 그래서 적어도 나보다는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걸로 치면 나한테 안된다. 그분은 내게, 상대도, 안된다. 그 남자가 다 그 남자다? (웃자고 하는 말이고, 말이 그렇단 얘기지만 일단은 달리자!) 그럼, 그 여자가 다 그 여자던가? 그런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절대로 아니다. 그 종이 한장 두께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건 우리 인생을 충분히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능히 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피장파장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분들은 눈부신 미녀한테 열렬한 구애를 하지 않고, 아마도 할 수 없고─어딜 넘봐?─미녀는 특히나 고귀한 백조는 뭘 모르는 야수를 절대 반겨하지 않기 때문. 자신감과 배짱과 열만 혼자 저만치 앞서가는 남자인가 주인공으로 주목 받지 못하면 허술한 포커페이스는 금새 탄로나고 마는가, 눈빛과 몸짓과 발언이 왠지 부자연스럽고 어딘가 모르게 달갑지 않으며 말을 섞기가 꽤 불편한가 시간만 나면 핸드폰으로 남의 불행만 읽고 보는가, 전자와 후자의 중간에 해당하는 뭘 아는 남자가 정말 그렇게나 드물단 말인가? 글쎄요! 때문에 그분들께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숙녀의 사랑을 얻는 방법은 대체로 정확히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함. 단, 그분들께서 외모나 말이나 목소리나 능력등이 중간은 가야 한다는 가정 하에. 적어도 우연찮은 행운은 따라줘야 함. 두 가지 조건은 무엇이냐면 이렇다.
   첫째, 그녀가 어릴 때 구애해야 함. (일명 세뇌, 최면 요법으로 일찍 발목 잡기. 말꼬리 잡고 늘어질 필요도 없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둘째, 꽃 들고 쫓아다니지 않으면 가망성 전무. (텐미닛? 노노노! 오직 노력과 돈으로 승부. 왜냐하면 하이에나니까. 아니면 카리스마형 무서운 남자)
   그래서 내 친구 중 저 앞선 두 유형은 시골에서 선녀와 살면서 도시 진출을 꿈꾸거나, 도시에 살면서 여심을 찾아 시골로 내려가야 하나를 고민한다. 따라서 나는 그런 친구와 대화해 보고 싶은 소망의 발생을 깨닫는다.
   첫째, 스무 살 이전을 시골에 살다가 어른이 되어 이름이 브랜드가 된 친구.
   둘째, 스무 살 이전을 도시에 살다가 예술적 영감이랄지 그 어떤 평온함 때문에 어른이 되어 시골로 내려간, 또는 내려가고 싶어하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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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환상머신은 고장났다. 어머머, 그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지 얼마나 됐다고. 고장난 뭔가를 툭툭 건드릴 수도 없었다. 조지는 그렇다고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동전만 먹은 자판기라면 푼돈 포기하고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동전을 넣을 텐데, 이건 무슨 맛보기도 아니고, 줬다 뺐는 로망도 아니고, 뭐지? 뭐야 이거? 도대체 이건 뭐냐고! 시작부터 실망, 어제까지 체념, 오늘부터 절망? 이 무슨 메두사의 저주도 아니고 말이야. 아예 처음부터 작동을 말던가. 괜히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느낌 왔고 기분 좋았는데, 이게 뭐냐고. 영웅주의는 식상하고 부담스럽더라도, 천사의 전령사를 맞이할 분위기였는데. 어쩐지 뭔가 잘 풀린다 했더니만 아 글쎄 딱, 고장! 이제 한숨도 안 나온다, 라고 조지는 한마디 했다.
   환상머신 구입비와 원고료를 맞춰 보니 대강 비슷했다. 본전은 했네. 수지 맞는 장사. 더 이상 뭘 바래. 바랠 걸 바래야지. 그치만 그는 서운했다. 몹시 서운했다. 올챙이 개구리 된지 얼마나 됐다고. 순전 엉터리 가짜 기계 같으니라고. 일이 잘 풀린다 싶어서 감정을 묵살하고 이성을 등용시킬려고 했는데, 반대로 됐다. 그는 천상 커피포트와 진공청소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팔자였다. 졸지에 망한 거지. 신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보게나 젊은이, 그만 슬퍼하고 이제 일을 하시게나, 라는 말이 진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절초풍할 노릇이구만 그래. 하지만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 있었나. 그는 면역이 됐어도 옛날에 됐다. 그는 안절부절했던 흥분을 가라앉혔고, 펄쩍펄쩍 요동치는 철딱서니 마음을 다독거렸다. 얼토당토않은 환상머신은 그만 잊고, 소셜 네트워크나 하기로 했다. 유행에 편승하고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시대를 뛰어넘고 상상을 초월하라는 둥 뭐라는 둥, 그거 다 헛소리였다. 밖에서는 사교에 대한 투명성을 강조하고 희구의 좌절에 대한 논설을 늘어놓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겉으로는 고고한 척 하더니만 변심한 약혼자 환생한 마돈나를 흉보는, 꿈의 궁전에 사는 우울한 마왕이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에 뭘 올리지? 뜬금없이 인스타그램이 하고 싶은 건 좋은데, 그런데 뭘 올리냐고! 그러니까. 조지가 왜 소셜 네트워크의 새 글 올림에 주저하고, 조지가 왜 무언가를 고를지 망설이며, 조지가 왜 말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는지 그 이유를 알 듯 모를 듯 했다. 뭐든지 엄선하여 최고만 등록하고 싶어서 등용문을 좁혀야 하니까, 마누라 100명 보다는 일편단심이기를 원해서 그런 거였다. 진짜 그랬다.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떤 여성들은 뭐 남편 100명? 그러면서 흐뭇해 하시거나 응큼한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그 정신을 읽을 수는 있다. 내 손바닥의 손금을 보듯이! 푸하하하하하하. 넘어가고. 남자의 환상과 여자의 로망은 다를 뿐, 현실에서도 남자의 실행과 여자의 성과는 꽤 다를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누라 100명이 왜 나왔지? 털 깎은 양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는 척 하더니만 결국 늑대? 하이에나? 이제 그만 허둥대고 인스타그램에 무엇을 올릴지나 고민하자.
   조지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그동안 올렸던 몇 안되는 사진들이 보였다. 어느 술집 간판.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 1페이지. 발바닥 드리블의 명인.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지니가 튀어나온 모습을 구현한 설치미술. (지가 무슨 루드비히나 된다고) 문학수첩. 또 뭐가 있지? 사고 싶은 악세사리. 만화영화와 시네마의 한 장면. 그래프. 가고 싶은 곳. 직접 만든 아트박스. 밑줄 긋기. 초딩 옆에서 미니오락기에 열중하는 모습등. 그게 다였다. 별거 없었다. 그 별거 없는 목록에 새롭게 하나를 추가하기로 했다. 바로 문에 붙은 구겨진 화장지 사진이었다.
   눈치는 두 가지가 있다. 뭘 좀 아는 눈치와 뭘 좀 모르는 눈치. 꼬마들도 속은 다 있다. 다만 직관, 멋, 낭만, 전망, 여자, 숙녀, 여성, 마담, 바텐더, 웨이트레스, 보봐리 부인을 아주 잘 아는가, 꼬마도 속이 다 있고 어른도 눈치가 다 있는 것처럼, 그걸 아주 섬세히 아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건 타고나야 하기 때문이다. 후천적으로 취득하고 숙달할 수도 있겠지만 천부적인 재능과는 또 다른 것이다. 다변, 다작, 다정, 다망, 다신, 다처? 다한증? 야망, 왕성한 활동, 과찬, 립서비스, 엄살, 몰인정, 칭찬에 인색함, 무례함에 비견될 만한 극도의 예절에 따른 부담감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양하고, 서비스가 추구하는 목표점은 애초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방관자도 있고 어떤 떨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나니까.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사는 동안 묵묵히 다스려야할 특성이 있다면 그건 감수해야 하는 운명이고, 원치 않았지만 그 때문에 사랑과 호감과 애정이 언제 어디서나 내내 따라다니게 된다면 그건 한마디로 행운이다. 사람들도 안다. 너무 유명해도 피곤하다는 것을. 나는 말이 많다, 내가 욕심이 많다, 나는 참을성이 부족하다, 어쩐다 등등. 그러면 그 에너지를 어떻게 돌리든 쓰든 나중을 위해 아끼든, 그것은 어떻게든 구체화-가시화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한 뭘 좀 아는 것의 기준 역시 불분명하고 애매한 면이 없잖아 있다. 추억의 영화배우를 만나서 지인이 하는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격조 있는 표현으로는)
   「세월은 당신을 비켜가나 보구료. 그대의 여전한 아름다움을 보아 하니 말이오. 아마도 그댄 사랑받았던 게 분명한 듯 하오. 그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대신 안부를 전해주지 않겠소? 어느 노인이 꽤나 부러워하더라고 말이오.」
   (드라마풍으로는)
   「시간이 무색하군 그래. 녀석은 사람 봐 가면서 편애하나? 헛, 참 나! 아 그거 차별 대우 아니냐고! 당신은 아직도 방부제 미모니까 말이야. 내가 널 아는데, 넌 분명 파스텔톤 노란색 영양크림을 듬뿍 공유하지 않았는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안 그러니?」
   그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 가운데 뭘 해야 하느냐, 까지는 얘기하지 말자. 뻔대기 앞에서 주름 잡는 일 만큼은 꾹 참아야 하니까. 아무튼 조지는 인스타그램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그게 대체 무슨 사진인가는 차차 알아가면 좋겠다. 그랬으면. 어머머 말해놓고 너무 멋져, 완전 시적이야. 호들갑도 재미없다. 혼자서는 말이다.
   역시나 조지의 인스타그램에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차라리 직접 나서서 반짝반짝 크리스마스 츄리 장식을 하고 말지, 엎드려 절 받기의 시절도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는 어차피 원하지 않았는데 잘됐다고 생각했다.


   7

   조지는 이대로 단념할 수 없었다. 이처럼 희망을 버리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며 춤이라도 췄냐? 만약 그래서 고장난 환상머신이 소생할 수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따라한 일이 몇 개고, 흉내낸 기술이 얼마며, 본뜬 방법들의 수준과 안목이 어떠한데! 맞다. 남자가 폼이라면 조지는 독학이었다. 일단 부딪혀보기. 그래야 감을 느끼니까. 아 열로 밀어붙히자, 아 이건 어렵겠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나중 후회하겠다, 그러니 정중하게 문구 날리고 뺨을 맞던가 어쩌던가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어쩐다더라 등등 이상한 말들이 많은 것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네 뭐네 등등. 입만 열면, 볼펜만 들면, 껌뻑하면 수시로, 그만 그만. 오, 제발! 누가 자꾸 날 삼천포로 이끄시는지 참으로 신념 있다. 뚝심 좋네. 일관성 있어. 어쨌든,
   그래서 조지는 프로그래밍 언어 독학에 들어갔다. 물론 그는 스무 살인가 스물 한 살 때 한번 도전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도 그랬다. 시작하자마자 초급부터 중급까지 책을 10권 샀고, 시작하자마자 포기했다. 그러나 내내 미련도 함께 했다. 때문에 제빵 학원으로 시작해서 프로그래밍 언어 독학, 나중 학원도 띄엄띄엄 한달씩인가 다녔다. 피아노 학원 2곳을 동시에 다니고, 동양화 화실에다 필기체 학원에다 계속 포기, 포기 또 포기하다 나중 컴퓨터 그래픽 학원도 다녔다. 패션을 배울까? 헤어 디자이너가 될까? 꿈도 많았고 생각도 많았다. 할 말은 별로 없었지만, 펜팔도 했고 미래가 궁금했으며 소기의 성과는 얻었다. 시시한 청춘 맨발의 젊음 얘기는 그만 하고, 조지 얘기로 돌아와서, 그는 환상머신을 고칠려고 프로그래밍 언어 독학을 시작했으나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만뒀다. 칼을 뺐으면 무라도 찔러라? 바로 그래서 그는 환상머신 제작사를 찾아갔다.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목적지가 분명했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도착했다. 무슨무슨 주식회사. 겸사겸사 도시도 구경하고 환상머신도 수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사무실은 허름하고 느낌이 세했다. 내일 모레 문 닫을 것만 같았다.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얼핏 들었다.


   8

   조지는 똑똑똑 노크도 했고, 담당자와 인사를 나눴고, 용건도 밝혔다. 사무실에는 아가씨 혼자뿐이 없었다. 어쩌면 1인 기업, 아닐 수도 있고, 그녀는 아마도 경리일 듯 했다. 그런데 조지는 그녀를 보는 순간 자기가 왜 이곳에 왔는가 라는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웃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웃으면 다 OK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X축 무엇도 있고 Y축 무엇도 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는 꽃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 사랑노래가 기억났고, 사랑의 시상이 떠올랐다. 동경하는 사랑. 순수한 사랑. 육체적 사랑. 절제를 모르는 사랑. 참을 수 없는 사랑. 가슴 뭉클한 사랑. 세상과 인생에 둘도 없는 사랑.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간 아침에 눈을 떠서 꿈나라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녀 생각만 나는 거 아닌가 하고서는. 조지는 천성은 심리학자 직업은 작가 포기한 꿈은 마술사였지만, 그 대칭선이 복권 당첨 기계 안의 번호처럼 수시로 바꼈지만, 지금은 단지 사랑의 포로일 뿐이었다. 헤드라인은 말괄량이 여자와 말썽쟁이 남자가 만났다? 아니다. 그녀는 바쁜 듯 했으니까. 그녀는, 정말이지 자극적인 매력은 물론 은근한 관능미까지 철철 넘치는 숙녀였다. 그렇지만 조지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그 어떤 노력을 쏟고 공을 들이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따라서 조지는 생각이 바꼈다. 어떻게? 환상머신 그거 고쳐서 뭐해? 라고. 그는 분명 저 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저 문을 열고 나서는 순식간에 겉늙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속이 응큼해져버렸다. 하지만 사랑이 죄는 아니었다. 그는 곧 돌씽 같은 아저씨가 됐다. 일에서는 제몫을 톡톡히 하며 오라는 곳도 아주 없진 않고, 장미도 튤립도 데이지까지 손짓하며 반기지만, 집에만 오면 병든 닭 마냥 비실비실 기운도 의욕마저 풀이 죽는 아저씨. 누구나, 수다쟁이의 본능과 허풍꾼의 감각, 로맨티스트의 직관력과 풍운아의 직감까지 총동원해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찾아오니까. 그래서 조지는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작전상 철수 말이다. 자기는 환상머신의 구입자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고로 임상실험 대상자에 대한 정보를 이미 보고 있을 테니 그는 마음 편히 돌아가기로 했다. 작전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 부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 떼기. 그는 고장 신고를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게 됐다. 환상머신은 진짜 막 환상으로 날 데려다 주는 신기한 요정이 아니라 단순히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인공지능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게다가 경쟁이 붙어서 제품은 끊이지 않고 출시되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오면서 거리의 대형 광고를 보게 됐다. 그 광고는 TV에도 나올 테고, 공공장소에도 인터넷에도 어디에도 나올 것이다. 이름도 다양하다. 신비머신. 무슨머신. 머머머. 등등. 그렇게 그는 집에 도착했다.
   그는 TV를 봤다. 재미없었다.
   일을 했다.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잡지를 읽었다. 재미없었다.
   잠을 잘려고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도통 맛이 없었다. 왜 그런지 나는 몰라-였다.
   극장에 갔다. 볼 만한 영화가 없었다. 심심치 않게 그렇긴 하지만.
   나이트클럽에 갔다. 물이 좋지 않았다. 참 나 이거 원, (눈을 꾹 감고서 고개 각도를 이렇게 살짝 틀기!)
   소셜 네트워크를 봤다. 모두 시시콜콜한 얘기들 뿐.
   고전음악을 들었다. 졸렸다. 그래서 잘까 했다. 그러나 잠은 다시 도망갔다.
   요리? 귀찮았다.
   여행? 가택감금중이다.
   약속 없는 주말이 탐탁치 않냐고? 언젠 안 그랬나. 익숙한지 오래다.
   신나게 춤을 추고 즐겁게 노래하며 정신없이 놀고 또 놀기, 의 시절은 다음 전성기를 기다리는 중.
   모험에 착수해야 하는데 맞이할 모험이 없었다.
   가면무도회가 웬말이고 귀족들의 승마대회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면 오락산업계의 동정을 살펴볼까? 대타는 남겨두자. 개구멍은 미루고 또 미뤄야 하니까.
   그는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런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조지는 한때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확인할 길 없는 과장이냐, 과장이다. 하지마 심한 과장은 아니니까 넘어가자. 그렇게 여자들이 좀 따랐다. 그런데 사랑의 문제는 발단이 졸고 전개는 게으르다는 점. A의 입술은 키스를 부른다. 하오나 B는 C에게 끌린다. 그러나 C는 D에게 반한다. 완전 반했다. 꺼뻑 넘어갔다. 그렇다고 D가 C의 마음을 받아주랴. D는 E의 마음을 빼았기 위해 작전을 짠다. 하지만 E는 밤이나 낮이나 F 생각뿐이다. E가 고백할까 말까 고백할까 말까 망설일 때 F에겐 애인이 생겨버렸다. 사랑은 늘 이런 식이다.
   그런데 내가 왜 사랑을 생각하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그 주제를 왜 지금, 왜 하필 내가! 그걸 그가 어떻게 알겠나. 일단은 일을 할 수도 차분히 책을 읽을 수도, 다른 소일거리도 적당치 못해 그는 소셜 네트워크를 들여다 봤다.
   사람들이 왜 TV를 끄지 못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발목잡히는가, 왜냐하면 매사 의식주에 만족하고─이조차 쉽지는 않겠죠─심심함에는 불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심함이 충족된다면 TV를 끊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해방되어 오락산업의 전성기에 버금가는 환상머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아주 엉뚱한 가설은 아닌 듯 하다. 아 저런 저런! 또 환상머신이다. 고장나서 잊었는데 녀석은 왜 자꾸 내 바지끄댕이를 잡고서 놓아주지 않는 걸까? 라고 조지는 생각했다. 내가 혹시 그녀를 기다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지. 그렇다고 다시 그곳으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조지는 기록할 걸 기록하고, 볼 걸 보고, 생각할 걸 생각하고 연상하며 상상도 하다가 다시 몽상가가 됐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 있으면 내내 처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좋게 사무실에 가서 일이나 하자 라며 집을 나섰다.


   9

   조지는 자기의 개인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사무실 앞에는 다름 아닌 환상머신 기획사의─제작사? 모르겠다. 아 됐고!─경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화사한 꽃을 들고서. 얘 뭐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로 못 믿는 척 혼잣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뭐...지?」
   「뭐긴요! 꽃 들고 쫓아다니라면서요? 봤어요. 아저씨, 아니 오빠가 쓴 글과 비망록과 시와 동화와 노래와 칼럼과 소설을요. 고객의 비밀을 엄수한다는 그런 선서, 저도 했으니까 너무 뭐라 하진 마세요. 최고의 인공지능 때문에 스스로 발전하는 우리의 환상머신이 왜 고장났나,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거든요.」
   「그래...요? 일단 들어가실...래요?」
    그들은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또 정답게 모텔 캘리포니아로 들어갔다. 앗, 아니 조지의 집필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대체 뭘 했냐, 차차 알아보자. 평범한 대화는 다 마쳤다. 예의상 묻고 답하고 날씨가 어떻고 그외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다 말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환상머신은 고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스스로 깨우쳐야 하기 때문이란다. 조지도 뭘 특별히 바란 건 아니었다. 수긍했고 알았다고 했다. 따라서 경리는 그만 돌아가도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더 머물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래서 조지는 환상머신에게 붙여준 애칭을 혹시 경리가 이어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라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편하게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든 금방 친해진다, 우리는 보면 알아, 우리는 원래 그래, 조지는 뭐 그런-주의 같았다. 지가 언제부터 '우리는' 화법을 구사할 줄 알았다고 말이다. 참고로 한 말씀 드리자면, 재혼과 사회적 성공을 비롯한 평탄한 삶, 행복한 인생, 만족스런 일상, 채워지지 않는 탐욕등은 모르겠고 일반적인 개인 기억의 총계에 대해서만 간략히 따져 보자면 <우리는>화법의 능숙한 구사자 그분들의 중간 성적표는 다음과 같다. 이혼 > 만혼 > 불행 > 평탄. 그분들 현황과 여자관계는 자세히 모름. 무엇보다 남의 인생. 하오나 일단 결론은, '우리는' 화법을 간헐적-상대적이 아니라 일생 동안 일방적으로 구사하는 남자의 경우, 그 생애에 우여곡절이 좀 있다─꽤 된다─적어도 짜릿하다가 불유쾌하다가 놀랬다가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탄다 라는 것. 그 화술에 그 기질에... 그건 곧 '성격 어디 가겠나' 라는 의미일 수도 있음. 살면서 보고 듣고 읽는 기본과 숙달하게 되는 모범 사례가 얼만데! 사용 가능한 화법이 몇 개고 최면요법에 고급스런 설복술 외에도 교묘한 유인책에, 우기고, 닦달하며, 걸핏하면 말을 돌리거나, 변죽만 울리기, 슥 지나가며 떠보는 등 수법은 많고도 많은데 오직 그 하나만? 모르긴 몰라도 어느 초년생께 권유는 고사하고 일단 주로 만류해야 마땅하겠으나, 정 원한다면 각자 인생이며, 이미 그걸로 최고봉에 오르신 분에 대해서 최소한 한결같은 심지 그 일관성 하나는 높이 사야 함. 그러므로 이때 주의할 점은 이와 같다. 표준편차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통계의 정량이 부족하다거나 특수하다랄지 추정량의 오류, 표본추출은 균일한가, 오차의 여지는 어떻고 등등. 따라서 당장 비과학적인 총합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 부여보다는 사석에서 조용조용히 다룰 화제 정도로만 여길 것.
   「유망하기 이를 데 없는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적이 있었니?」
   「저요? 아, 나 말이야 오빠?」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니?」   이 말을 조지는 속으로만 했다. 대신 다정한 눈빛으로 너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기다려주었다. 내숭은 대환영이라는 듯이. 나는 뻔트 전문, 넌 탐스런, 쉿! 아 맞다 그녀가 대답할 차례지 라면서 조지는 그녀의 대답을 대신 생각했다.
   「그야 뭐 꿀벌과 나비가 전부였을 걸. 아마도 곤충쯤? 요정은 아직 날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오빠는?」
   「나? 없었어.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 이처럼 어여쁜 숙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감지덕지... 아니 아니 우린 뭔가 말이 통하는 것 같다 뭐 그런 얘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옷을 벗고 음 일단 좀 씻고, 편안히...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얘가 은근 말로써 날 들었다 놨다 하네? 라며 조지는 내심 반가웠다. 조지는 이어서 고삐를 당겼다.
   「우리 경리는, 아 그게 아니라, 오스틴은 기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즐거워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기억나지도 않았다. 오빠 혹시 허당 아니야? 허당이라니 당치않소 낭자. 당치않긴 뭐가 당치않아? 아 그러니까 털어 놔. 털... 뭐? 털-어-놔? 털어놓긴 뭘 털어 놔! ...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이거 정말 환상머신이 내 머리속에도 깔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
   「괜찮아 오빠. 그런 반응이 몇몇 보고된 적이 있어.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꺼야. 걱정 마. 그런데 있잖아. 오빠가 쓰는 소설에는 왜 주인공들이 외로워 보이지? 현대인의 고독, 뭐 그런 건가? 아니던데. 등장인물 많은 작품도 꽤 되던데. 많이 재밌었다구. 그런데 왜 오빤 내내 삼류에다 영영 가난하지? 의문이네. 미스테리라고. 하긴 내가 작가라도 헷갈리겠네. 주인공들이 활약을 많이 했으면, 글 많이 쓰고 말 많이 했으면, 그땐 진짜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이렇게 마주 보며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걸로 수많은 모험 이야기를 모두 포함시킬 수도 있고 말이야. 사랑도 시작할 때나 설레고 들뜨며 뜨겁지, 좀 지나 봐. 그게 얼마를 가나 해 보면 알지. 안 그래 오빠? 괜히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게 아니지 않나. 어때? 나도 좀 비슷했어?
   그런데 왜 오빤 말이 없어? (늬 같으면 말 잘하는 언니 말을 끊고서 말을 가로채고 대화를 주도하고 싶겠니? 게다가 방금 전에 말했잖아?) 이 오빠 정말 말 없네. 왜 그러지? 실연당했나? (얘 혹시 낮술했나?) 아무튼, 하긴 내가 드라마를 좀 봤나? 어떤 드라마든 조연 빼면 주연 몇 명이서 다 해 먹는 얘기지. 그 얘기가 그 얘기야. 다 거시서 거기라구.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말이야. 시대가 그래. 옛날에는 예술 지금은 분류는 예술인데 오락이 태반이야. 때문에 감상이 아니라 거의 소비야. 안 그래요 아저씨?」
   「내가 왜 아저씨야? 아깐 오빠라며!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호칭을 하나로 통일해 줄래? 아니면 뽀뽀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음, 아니면 백허그를,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지. 아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아 갑자기 덥네. 날씨가 왜 이래?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어?」
   「오빠. 밖에 지금 눈 내려. 많이. 엄청, 춥다고!」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눈만 깜빡깜빡 전 아무것도 몰라요 끔뻑끔뻑)......」
   「세월은 당신을 비켜가나 보구료. 그대의 여전한 아름다움을 보아 하니 말이오. 아마도 그댄 사랑받았던 게 분명한 듯 하오. 그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대신 안부를 전해주지 않겠소? 어떤 남자가 꽤나 부러워하더라고 말이오.」
   「응? 아니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뭐지? 뭘까? 모르겠네. 난 하나도 모르겠어.」  혹시 이분 뭘 모르는 여자 아닐까? 여자들끼리 묻고 답하자. 이때 말을 많이 해야 하나, 모른 척 넘어가야 하나를. 당장 친구에게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참지를 못하시는 분 여기, 저기, 거기 계속 보이네. 막 보인다. 줄 섰다.
   「시간이 무색하군 그래. 녀석은 사람 봐 가면서 편애하나? 헛, 참 나! 아 그거 차별 대우 아니냐고! 당신은 아직도 방부제 미모니까 말이야. 내가 널 아는데, 넌 분명 파스텔톤 노란색 영양크림을 듬뿍 공유하지 않았는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안 그러니?」
   「......(눈만 깜빡깜빡)......」  이 인간 대체 왜 이래? 오스틴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지와 오스틴은 사귀게 됐다. 그런데 그 사귐은 공개도 아니고 비공개도 아니었다. 심지어 우린 연인이다는 믿음을 넘어 오늘부터 사귄다 라는 확실한 정의가 없었다. 도시에 가면 그들은 언제라도 남남이 될 여지가 없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많은 걸 생각하면 사귀지 못할 수도 있다. 일단 지금의 감정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그럼 이건 사랑보다는 우정에 가깝고, 연인보다는 친구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사귀긴 사겼는데 재미가 없었다.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육체적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의 목적이 일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추억을 만들려는 노력도 부족했고 응원할 관객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밀애보다도 아동들의 사귐과 비슷했을 것이다. 맞다. 정말 그렇다. 유치원에서 사겼다, 초딩 때 좋아했다 그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연애도 지지부진했다. 할 말도 떨어졌다. 노력도 부족했다. 처음엔 호기심과 궁금증이 전면에 나섰는데 점점 매력도 떨어졌다. 결국 처음에만 혹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지 입장에서는 찐한 연애 곧 본격적인 애정을 원했던 것일 수도 있고, 오스틴은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일 때문에 접근했을 수도 있다. 순전히 인공지능이 오류를 일으킨 원인이 대체 뭔가,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만나고 보니까 금새 결론 나왔을 것이다. 이 인간이 이러니까 환상머신이 고장났던 것이로군!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어? 알아? 바로 그래서 늬가 안되는 거라고! 어? 1주일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천재가 한달, 아니 일년을 기다린들 다시 오지 않을 뭐랄까, 비공식적인 외도의 기회를 만났다. 그런데 결과는 꽝이었다. 불륜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말이 쉽지 총각들은 유부남의 연륜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래서 일찍 홀로 된 돌씽들을 보면 뭐라고나 할까, 그래 활력이 눈에 보인다. 에너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막대 그래프가 진짜로 보인단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뛰어 노는 맹수들이 왜 맨날 느그적 느그적 게으름 피우다 먹이감을 발견하면 눈빛이 빛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가씨들 여보세요 숙녀들이여, 늑대를 경계하는 건 숙명이고, 정말 조심해야 할 대상은 하이에나와 임자 있는-있었던 분이다! 뭐 살면서 뺐고 싶은 감정을 한 번쯤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구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된다. 심지어 본 임자께서는 그러신다. 뭐 어떤 년들은 허리를 그냥 확 접어브러야 한다고. 그렇지만 어제도 오늘도 난 왜 임자 있는 남자가 멋져 보일까? 바로 그래서 칼럼니스트가 웨이터님께 상납할 짱돈을 챙기고, 오락산업 종사자의 품위 유지비도 해결되는 것이다. 어쨌든 조지와 오스틴은 연락을 안 하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깔끔한 뒷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처럼 미적지근한 뒷모습이 불미스러운 헤어짐보다는 차라리 낫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헤어지는 것에 대해 많이들 싫은 이별 유형에서 만년 상위를 차지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헤어지는 게 태반이다. 제일 부담이 없으니까 말이다. 어촌에만 어장관리선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도 범위 1, 2, 3 그런 게 다 있으니까.
   조지는 그녀와 멀어지고 나니까 뭔가가 보였다. 그녀를 울렸다가 웃겼다가, 마음을 빼았다가 녹였다가, 밀려졌다 당겨졌다, 그처럼 연애에 애절하게 호응하고 구애에 즐겁게 화답할 숙녀는 아닐성 싶었는데 그땐 몰랐던 거다. 왠지 끌리는 그녀였지만 뭐랄까, 그녀는 당차고 도도하고 팔짜가 드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말을 나눠 보니 글쎄 정반대로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그녀였드라? 아니다. 한마디로 대가 세더라-였다. 오, 카리스마! 자세한 얘기는 옮기지 않았다만 공개 못할 뭔가가 있으니 그쯤에서! 많은 말은 필요 없고, 오스틴은 한마디로 괜찮은 숙녀였다. 단지 그 둘이 어울리지 않았다 뿐 변명은 사절함이 좋을 듯 하다. 이상형까지는 아닐지라도 아 이 남자 한번 만나보고 싶다 점점 그이에 대해 알아갔으면 좋겠다, 라면서 시작된 만남이 점차 실망의 확신을 키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지가 오스틴이 아닌 이상 더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얼추 그렇지 않을까 라는 의심은 들었으니까. 조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녀의 이상을 만족시켜 줄 만큼 자기가 여유롭거나 뭔가가 출중하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조지는 옛날 채팅으로 그날 하루 딱 한번 만났다 헤어진 여자가 생각났다. 등치가 좀 되어보였는데, 당시 처음 만난 그녀와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가 뭐였나는 생각도 안나지만, 기억나는 건 그거였다. 그녀는 코뼈가 부러졌는지 그 보호대를 하고 나왔다. 아마도 밤에 일하는 그녀인 듯 했고, 남자한테 뭐 어떡하다 그렇게 된 듯한 눈치였다. 그건 그렇고, 이제야 느껴진다. 지금도 아직 관성에 따라 에너지가 막 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조지는 오스틴을 아직 모를 것이다. 한 남자를 알고 연애를 하며 사랑을 키우다가 변심하지 않은 결과 오래 만났다면 연인에 관해서 희망부터 흑심까지 모르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조지는 오스틴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게 뭐야?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른 거지. 그러니까! 그래도 만약 만남이 오래 지속됐다면 아마 조지는 내심 괴로웠을 것이다. 애인의 투정에 애써서 귀를 기울였고, 그런 결과 귀에서 피가 났으며, 때문에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예요 라며 도둑이 제발저리듯 말하는 남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오스틴의 처지도 그렇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사랑을? 그건 아니다. 아니고말고. 그래서 미녀는 가죽 점퍼를 입은 무서운 인상의 남자를 이따금, 아니 대체로 일찍 만나는 건 아닐까? 농담이다.
   아무튼 환상머신은 고장났고, 웬 카리스카 아가씨가 마음만 흔들어놓은 채 무책임하게 떠나갔으며, 조지는 다시 고독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어떡하지? 진짜 어쩌지? 바로 그때 환청이 들렸다. 여보슈! 프로그래밍 독학에 재도전하는 건 어떻소? 라고. 그래서 조지는 환상머신을 스스로 고치기 위해 프로그래밍 독학을 다시 시작했다.


   10

   조지는 환상머신을 잊고 여자도 멀리하며 뭐 재미난 일 없을까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없었다. 색다른 애착은 자기에게 제발로 찾아오지 않았고 친구들은 바빴다. 새로운 열정은 귀찮았고 사랑도 지겨웠다. 그렇지만 이대로 우물쭈물하다가는 마음이 늙어버릴 것만 같아서 심심함, 권태, 타성, 게으름끼리 서로 길항하게 만들어 쾌락의 향응에 빠지지 않기를 요망했다. 그런데 그럴려면 환상머신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다. 뼈 아픈 패배는 잊고 다음 경기에 집중하라는 미명이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으랴. 이별 때문에 헤어진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리는 청년처럼 조지는 이해타산을 따졌다. 들인 돈이 얼마고 사준 선물이 몇 개인데, 사랑이 식어? 그럼 못 쓰지만 그는 환상머신을 독자적으로 고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 독학에 재도전했다. 주워 들은 지식은 전문가였으니까. 기계어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C, C++, 모던C++, 피톤, 자바 등등. 심기일전을 결심했다. 그런데,
   그런데 힘이 들었다. 많이 어려웠다. 이건 도저히 나랑 맞지 않는 분야인 것만 같았다. 눈 딱 감고 독기와 오기로 1년을 투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1년이 지나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하여 그는 겉주변만 돌았다. 알랑말랑도 아니고 아예 감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시작은 했는데 또 패배주의? 솔직히 괜히 시작한 듯 했으나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살짝 보이지 않게 뚜껑이 열렸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그래밍 공부는 뒷전인 체 학교 다닐 때처럼 공부하기가 아닌 프로그래밍에 대한 칼럼 같은 책을 읽었다. 폴 그레이엄의 해커와 화가 같은 책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으랴. 이미 잘못 들어선 길.
   그는 또 다시 깔끔하게 포기했다. 내가 웬만하면 독학인데, 무조건 독학인데, 이건 어렵다 싶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고장난 환상머신이 아까웠다. 그래서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학원으로 찾아갔다. 속성 과정에 등록했다. 준비는 마쳤다. 그러나 조지가 누군가! 3일 배우다 관뒀다.
   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지금까지 한번도 손내밀지 않았던 업계를 찾게 됐다. 바로 탐정을. 상담 후 결제까지 마쳤다. 그는 주책바가지일까? 뭐 그런 일을 순식간에! 그리고 대체 무엇을 의뢰한 건가? 언제나 심심한 일화에서는 단독 주연이고, 달콤한 희극에서는 만년 조연이던 조지, 그가 뭐가 아쉬워서? 그는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환상머신의 정체가 말이다. 아마도 자신이 단단히 세뇌됐다가 겨우 제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 아직 미약한 최면 효과는 남아있는 듯 해서 왜 그런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기발한 착안도 떠오르지 않고 사랑의 변심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우정이었으니, 따라서 그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환상머신 제작사인지 기획사인지 그것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하다 하다 탐정께 의뢰한 것이다.
   그는 창백한 처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기 때문에 진득하니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니. 탐정 업체에서 결과가 나왔다고 3일 후 연락이 왔다. 원래는 거기서 쩔쩔매며 이건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하는 흐름이어야 했는데, 벌써? 그래서 그는 냉큼 그곳으로 찾아갔다.


   11

   「설마 그럴 리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죠? 그 기획사는 물론 제조사와 직원들, 지분 분포도, 업체의 전력, 땅 지번의 기록, 대표의 출신과 무엇을 키우는가, 과거 교활했던 적이 있었나, 거리낌없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황금인가 가전제품인가 아니면 대뜸 여자? 그분의 연애사도 알아 봤고, 사랑의 보금자리가 은행에 저당잡혔는지까지 모두 알아봤답니다. 알아본 결과, 불운의 비명이나 음탕한 엘프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배후 세력? 당연히 없었죠.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도 아니었고,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그런 인기와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한참요. 그런데 딱 하나! 이 일을 대체 어떡하면 좋죠?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닌데 그래도 꼬투리 하나까지 원하시는 듯 하셔서, 그래서 말씀드리자면 그건 이렇습니다. 그 환상머신 제품 기획사는 문어발식으로 사업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개발사, 기획사, 시행사, 제작사, 광고사 등등 모두 제품 출시 및 판매와 관련된 법인이 전부였습니다. 하오나, 딱 하나 전혀 의외의 업체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에로비디오 제작사였죠. 에로비디오를 제작하고, 희곡을 수집하고, 신인을 발굴하며, 감독을 키우기도 하고 후원하기도 하며, 에로배우를 양성하기까지 하는 그런 에로 전문 연예기획사가 있습디다 그려. 어떻게 그게 떡 하니 최후에 버티고 있었는지 저희도 무척 놀랐습니다. 고객님께 부디 좋은 정보가 되기를 바랍니다만, 불필요한 정보라도 나중 혹시 모르니까 일단 모아놓고, 어떻게 특수 영상... 그런 건 취급하지 말기로 합시다.
   사장님. 저기, 사장님! 듣고 계세요? 선금 외에 아직 완료 수당과 보너스, 아 맞다. 착수금도 조금 덜 내신 게 있군요. 네. 그게 그러니까......」  점점 여리게에 해당하는 셈여림 음악용어에 이어 다음으로 묵음이 찾아왔다.
   비밀은 풀렸다. 모두 알고 나니 아찔했다. 차라리 모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설마 녀석들이 날 다큐멘터리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환상머신을 내게 넘겼을까? 라는 의구심은 그를 괴롭혔다. 허무하긴 했으나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궁금증 해소. 그래도 허탈했다. 알면 다쳐, 가 아니라 알면 실망해-였으니까. 뭐야 이거, 돈만 날린 거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했나 라면서. 나?
   나! 여심에 대한 탐욕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여복의 환상과 신비한 인생이라면 꼼작 못하는 그런 한정판에 대한 소비욕을 감수성으로 착각하는 장본인...은 바로 내가 아닐까?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난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속을만큼 속았기 때문에 팔랑귀를 다스리고 농담-농간-농락을 적절히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됐는데, 그게 뭔 소리야? 그러나 탐정 사무소를 나오는 순간 그는 절감했다. 자긴 어쩌면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어떤 남자? 있는 애교, 없는 애교는 물론 배운 허영심, 못배운 허영심을 총동원해서라도 사로잡고 싶은 남자. 환상머신이니 뭐니 괜히 이상한 음모에 휘말려서 시간 쓰고 돈 쓰고 기분 이상해지고 완전 꽝이었다. 결과도 대실망. 그는 추억을 좋아했고 현재를 사랑했으며 미래와 결혼해야 했는데, 다시, 누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건 아닌가 하며 귀가 쫑긋 하며 수시로 예민해졌다. 누가 뒤에서 날 부르는 건 아닌가 하면서 자꾸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기분을 바랬는데 뭐 에로비디오! 기분 좋은 일이 자꾸자꾸 이어지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뭐 에로비디오 제작사! 나 원 참, 저런 저런, 이런 젠장!
   그러므로 그는 다음 작품 구상에 대한 착상이 떠올랐다. 다음 주인공은 멋진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어떤 여자라면 그런 숙녀. 아닌 척 해 봐야 속으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를 간직한 그녀. 보기 드문 바보의 절박한 사랑은 정직하기 때문에 받아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그녀. 그러나 뭘 모르는 남자는 단호히 딱 거절하는 그녀. 하지만 순진한 숙녀가 마음이 저절로 끌리는데 왜 싫겠나. 가련한 숙명과 속아 넘어간 약한 마음이 원망스러울 뿐. 그는 친구의 부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내 친구 누구는 그렇고 그런 음 그렇고 그런 어떤 남자만 연속으로 딱 3번 연애했다네. 그런 여주인공을 한번 내세워 볼까 라고 생각했다. 허나, 단조로운 동선, 왕자님을 사랑처럼 우연인 듯 우정처럼 필연인 듯 만날 수 없는 이 내 조촐한 생활 반경이 비통할 뿐. 바로 그런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했던 것이다.


   12

   조지가 탐정 사무소를 떠나 집에 왔을 때 집 앞에서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었다. 누구지? 날 기다릴 사람이 없는데. 심지어 여자가 아니네. 뭐가, 아니네?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지. 그럼.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무슨 이유로...?
   「저기 오스틴의 현-남자친구 되시나요? 저는 오스틴의 전-남편, 아니 전-남자친구입니다. 이름은 매트라고 합니다.」
   매트? 뭔 매트? 오스틴? 아아 오스틴! 아닌데. 난 그녀의 남자친구라고 하기엔 썩 부적절한데,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인사는 해야 하니까...
   「안녕하세요. 전 조지입니다.」
   「하늘색 수트를 입으셨군요. 특이한 스타일이시네! 전 보시다시피 가죽점퍼를 입었습니다. 이 가죽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밝힐 수 없습니다. 하필 오늘 일부러 이걸 입고 왔냐구요? 뭐, 의도적으로? 아니죠. 전 원래 이런 스타일 옷을 좋아한답니다. 음 그건 그렇고,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아, 방금 그 말씀 하실려고 하셨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자리를 옮겨서 차분하게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라구요. 전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답니다. 제 취미가 야구인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선구안 만큼은 캬, 기가 막혀! 아 아직 우리 사이가 어색한데 말이 짧았군요. 전 원래 그리 험악한 사람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세요. 아무튼 제가 미래를 예언하고 그런 건 몰라도 하루 일정 같은 거랄지 어떤 미세한 자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근거로 최대로 정확한 예측을 하기로 어딘가에서 꽤나 유명하답니다. 에헤, 그럼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재주로는 제가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당시 야구부 코치한테 속아서, 제가 좀 인생이 엎치락뒤치락했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 차 타고 오셨군요. 음 몇 년식 웨건이군요. 저도 한때 저 차를 탔죠. 아니 안 탔나? 다른 건가? 비슷하긴 하네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뭐요?)」 
   그렇게 그들은 멀리 가지도 않고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눴다. 할 말은 많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매트는 속을 드러내지 않았고, 조지는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게 됐다. 용건만 말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라고 말하지 않은 체 그분이 자꾸 빙빙 돌려서 말하는 바람에 조지가 먼저 물어봤다. 혹시 오스틴 때문에 오셨냐고.
   「네. 그럼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기는 뭘 어떻게 알아. 당신 같으면 모르겠소?
   「허허허. 선생 인상이 좋아서 말이요, 오스틴이 전에 꽤나 형씨 속을 썩였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이오. 모르긴 몰라도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가진 않았을 것 같소.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바로 사실을 알려줄까 말까) 음... 세상에는 드물게 한 여자를 두고서 남자끼리 질투를 하기도 하고, 그녀를 계기로 그녀가 떠나간 후 지난 사랑 때문에 연적끼리 새로운 우정을 맺어 인생을 사는 매우 드문 일이 존재한다오. 물론 제 주위엔 그런 남자는 없소. 어디서 들었냐구요? 못 들었소. 추측이오. 아니, 왜 없겠소? 없을 리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외다. 원래대로라면, 내 발음은 뉴스 진행자를 꼭 빼닮고, 목소리는 성우를, 언변은 빠져들 수 밖에 없도록 말을 잘하는 대학교수를, 학식마저 소포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은둔형 학자 뺨을 칠 정도라야 말이 되는데 이게 또 상황이 썩 여의치 않소. 난 보시다시피 행색도 초라하고, 말도 어눌하기 그지 없소.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내 하나 묻겠소. 웬만하면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게 좋겠소만, 정 어렵다면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좋소이다. 자, 내 질문은 그것이오. 선생께서는 혹시 에로비디오를 최근 언제 보셨소? 꼭 최근이 아니더라도 그 뭔가를 봤던 어쨌던 가장 가까운 시일 말이오. 나는 평생 술을 마시고 취해 본 적인 한 번도 없다, 나는 싸워서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거짓말을 쩜쩜쩜, 나는 아직까지 첫키스를 못해봤다, 그런 풍은 우리 사이에 생략합시다 그려. 아시겠소? 아 그러니까, 글쎄 뜬금없이 왜 갑자기 에로비디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듯한 표정이구료. 안 봐도 알겠소. 왜냐하면 그게 다 오스틴 때문이라오. 오스틴과 내가 무슨 특별한 사이였냐, 각별한 인연이라도 됐나, 아니냐! 그걸 선생께 가르쳐드릴까요, 말까요? 그걸 진정 이 못난 당숙이 형씨한테 실토해야 하는 게 맞소,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거요? 눈빛을 보아 하니 이 양반이 꽤나 청각이 예민하구만 그래. 형씨! 형씨 싸움은 잘 하요? 그렇소? 다른 것도 좋소. 종목은 그대가 정하시오. 뭐든지! 아무튼, 난 그대가 마음에 드오. 당신은 말이야, 아직 동심이 남아있어. 흑심한테 완전 점령당한 건 아니라고. 예술가 기질도 충분하고, 서정적인 행운에 매혹되기를 좋아하며, 주위에 나서기 좋아하는 친구도 여럿 되구만 그래. 음. 어째 자리를 펼까요 아니면 뭐 다른 걸로 시작할까요? 관상? 사주? 아니면 점성술? 말만 하시오. 내가 뭐 하나 빠지나 봅시다. 내뺄 생각도 없고 거짓말은 이젠 끊었소. 허언증도 재미없고 내 철학이라면 그것이오. 뻥은, 숙녀에게만! 하긴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소이다. 내 공연히 이러는 게 아니라오. 대체 그동안 뭔 일이 있었느냐, 괜시리 아무것도 아닌 사연 때문에 서로 궁금해 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오. 안 그렇소? 한번 생각해 보오. 내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를 말이오. 이거 정말, 살면서 매우 드문 상황에 맞닥드리게 되었단 말이오. 허허허! 제가 제 마음을 모르듯이 매트씨도 매트씨 마음을 잘 모르는 듯 하오. 알 리가 없죠. 없다마다요! 아 나 정말 이런 일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불행한 사랑이 일찍 파국을 맞이하면 행복한 미련에 당도하게 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물어본 거 아니오. 그렇다고, 아 물어보면 안되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둘 밖에 없는데, 그럼 그걸 그대에게 물어보지 누구한테 물어본단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흐흠! 기쁨의 축일 시적인 행복을 느꼈을 뿐 다른 뜻은 없다오. 이거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망과 전도유망한 내일에 대한 예감과 기대에 따른 기쁨을 맞바꾸는 건 어떻소? 아마도 선생께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듯 한데, 어떻소? 그래도, 적어도 형씨 안색을 보아 하니 기뻐서 참을 수 없는 것 같진 않소. 아니 그렇소? 일단 내 인생을 돌아보자면 나는 불행을 연구했고 나쁜 운명을 청산했소. 아 그런데, 이거 이거 오래간만에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만 힘이 들구료. 무척 피곤하오. 상대의 마음은 물론 과거가 보여서 무척 고단하단 말이오. 아시겠소? 나만 이럴 게 아니라, 선생도 선생 얘기를 좀 풀어놓아보소. 형씨 이거 보니 둘 중 하나야. 속이 응큼하니 아주 능글능글 쑹악하던가, 아니면 몇 세기 전에 바쁘게 살았던 그분 누구지? 누구드라? 무질서를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고 어딘가에 쓰셨던 그분처럼 굉장히 정확한 양반같단 말이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딱 보니 여자 마음을 몰라도 어지간히 모르는 양반이구만! 여자친구는 여행을 가고 싶은데, 그것도 (최소?) 1박 2일로, 괜히 딴청만 피워대며 핑계를 궁리하는 스타일이야. 복권 당첨 한방이면 당장 인생 역전의 명수니 뭐니, 허나 확률은 희박하다는 둥 뭐라는 둥, 스트레이트플러시는 무모하고, 차라리 복권업을? 그런 구닥다리 시상을 이 세상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소? 안 그렇소? 내가 여자라도 뚜껑 열리겠단 말이오! 원래 사랑은 그런 거라오. 사랑이 내게 찾아오면, 내가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나면, 그 뭔가를 한번 알게 되면 깡그리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 어느 때 직관이 꼭 한번 개입한다오. 너무 많이 알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더 들어 봐야 할까, 들어 보지 않는 것이 좋을까? 어쨌든 일장 연설)......」
   매트는 뭔가 중요한 핵심을 조지가 말해 줄 줄 알고, 기대를 놓치도 예감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번번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꾸자꾸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뭔가 있어 뭔가 있어 이제 거의 다 거의 다, 계속 내내 뒤로 미루고 연기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때 사람은 둘로 나뉜다. 쓰고 있던 모자를 땅바닥에 짚어 던지면서, 아 나 이런 젠장 증말 못해먹겠네, 라고 말하는 남자. 그리고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오면 맞고 날 찾으면 가고 사랑이 떠나가면 이별노래를 작곡하는 유형으로. 그외 몇 가지가 더 있겠지만 일단 매트는 용건을 꺼내지도 못한 채 한껏 혼나고 있었다. 속으로 느꼈을 것이다. 아, 괜히 왔다! 아아, 사람 잘못 만났다! 아아아, 이건 정말 아니다! 라고. 어쩌면 오스틴과의 만남을 악연으로 치부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결과만 얘기하자면 큰 무리없이 사태는 진정됐고 매트는 돌아갔다. 냉가슴만 않다 속만 태우다 눈치만 보다 돌아갔다. 조지도 매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나는 끝끝내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는 주로 화자였고 매트는 내내 청자였기 때문이다. 원래 잘 어울리지 않는 한쌍이었을 수도 있고, 그 둘이 친구였다면 꽤나 불가사의한 우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동상이몽은 오늘로 잊고 내일부터는 아마도 밝고 희망찬 하루를 시작하기를 빈다.
   내내 남의 다리만 긁다 이제사 뭘 빌어? (뭐가 어쩌고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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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는 독학도 재미없고, 환상머신은 남의 얘기가 됐고, 인스타그램도 했으니까 다시 일기를 썼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성스럽게, 에로비디오를 볼 수는 없었으니까.
   일기. 12월 30일. 날씨: 관심없음.
   내가 왜 일정 수준의 부를 취득해야 하냐? 왜냐하면 개인의 탐욕도 있지만 우리 동네 수준 때문이기도 하다. 나를 기준으로, 내 옆집과 앞집, 뒷집, 몇몇 집들 안부를 묻고 사는 형편을 다 관심 갖기 힘들다. 작품 구상이 먼저니까. 하지만, 내가 쪼들리면 내 옆집 입장에서는 최소한 그에 대해 쾌활할 리는 없다. 구시대적 관점으로는 다르지만. 내가 튀든 내가 퇴색하든 적어도 보호색은 뭐랄까, 최소한 이타적이든 타의적으로 보든 조금은 예의에 해당한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을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어디든 갈 수 있고, 왜 하늘은 파랄까를 생각하며, 점심 때 무엇을 먹을지 저녁에 누굴 만날까, 라는 자유와 권리 외에 내게는 의무도 있다. 됨됨이 같은 것. 공중도덕은 사적으로 빵점만 겨우 면하고 인품은 들쑥날쑥하는데 사회 정의에 대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얼굴 붉히는 일, 나는 아닌가 한 번쯤 자문자답하자.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남몰래 오가는 뭔가도 없이 웨이터님과 괜히 기싸움을 할 것인가, 2박자 음악이 멈추지 않는 - 파죽의 인기를 구가하는 클럽 입구에서 건장한 어느 담당자에게 입장을 제지 당해도 낙담하지 않을 자신 있는가, 골똘히 고민해 보기. 그외 여러 상식과 교양과 품위 유지에 관한 일들. 올 한 해 내가 이룬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알고 무엇을 포기했나. 그런데 말이다. 내일 일은 셋으로 나뉜다. 걱정과 준비와 예감으로. 걱정도 준비도 모르겠고 사랑의 기대로 왠지 들뜬 하루, 애련을 회상하며 축배를 들자. 더불어 동네 수준과 밀접히 관계되는 보호색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이 기계적인 논리가, 이 인간적인 감정이 크게 잘못됐을 리는 없다고 본다. 안 그럴까?
   그리고 해가 바뀌기 때문에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봄.
   절망을 받아들이기. 불행을 인정하기. 실패를 이겨내기. 넘어져도 일어나기. 재미없음은 고사하고 슬픔을 감내하기. 심심함은 운명 사랑은 행운. 상냥한 웃음을 잃지 않기. 끝까지 행복을 포기하지 않기. 애인의 선망을 만족시켜 주기. 부러움과 부끄러운 감정에 솔직하기. 지루함과 친하고 새로움을 좋아하기. 그러니까 흠칫,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만들어볼까? 일단은 연기하기. 디오니소스가 되어 좋은 기분을 느끼고, 큐피트가 되어 황홀한 분위기를 선물하기. 상사병을 탈출할 것인가, 청순한 궁녀를 상상할 것인가, 헛된 몽상에서 그만 졸업하기. 변덕을 흠모하고 허영심을 이해하기. 허나 변심에게 뒤통수 맞지 않도록 조심하기. 사는 동안 언제나, 사랑은 숙명 인생은 미완성! 더 이상 줄 달린 치즈에게 속지 않기. 이왕 낚였으면 월척이 되기. 우스꽝스런 허풍에 동요되지 않기. 항상 연애를 꿈꾸기. 언제 어떻게 원페어로 트리플을 이길 줄 모르니 판돈은 넉넉히. 경마장의 열광을 기억하기. 당신은 생각보다 멋진 사람이란 사실을 잊지 않기. 무언가에 감사하고 누군가의 안부를 궁금해 하기. 선물은 시시하지 않게. 세상의 신비스러움을 바로 알기.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에 대해서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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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쩔 수 없이 용돈 벌이를 위해서 다시 미스테리아에 컬럼을 기고했다. 장편소설을 위해서 이제 다시는 칼럼을 쓰지 않을려고 했는데 그건 어느새 생계 벌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번엔 사설도 투자전략도 새 게임 추천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내일의 운세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 신년 전망.
   내용: 신년에 떼돈을 벌 것인가, 놀라운 여복에 눈물겨워할 것인가, 남풍이 부는 곳으로 여행을 갈려다가 아예 남극을 넘어 지구를 한 바퀴 돌 것인가. 카페에서 내년 전망에 대해서 글을 쓰는데 옆 자리에서 친구들끼리 내일을 내다보며 정답게 수다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너 왜 저출산 문제가 내내 미해결되는 줄 아냐?」
   「왜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해야 할 뭔가를 하지 않기 때문이야.」
   「해야 할 뭔가? 뭘 해? 무엇을 해야 하는데? 아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시장 경기가 더없는 호황을 맞이할지 한동안 고배를 마실지 궁금하다면 친절하게 예측을 도와주는 선행 지표들이 몇몇 있다. 아니다 경제는 모르겠고 우선 내 형편이 풀릴지 어쩔지, 뻔트라도 댈지 솜방망이 맞고 저만치 끌려내려갈지 알고 싶다면 또 몇몇 방법이 있다. 첫째, 꼼꼼한 준비─치밀한 계획─각고의 노력을 다 한 다음 다가올 하늘의 운을 스스로 점쳐볼 수 있다. 둘째, 아니다 기다리기 힘들다 당장 용한 점쟁이를 알현하기 위하여 복돈 들고 쫄랑쫄랑 달려가는 방법도 있다. 그건 그렇고 조지의 최근 고행으로 판단하건대 즐거운 삶에 대한 내년 판도는 날씨가 어째 도저히 추정하기 어렵고, 새로운 변화는 일단 먹구름이 잔뜩 끼었으며, 황홀한 사랑마저 에로비디오로 대체되는 건 아닐까 우려스러움을 피할지 어쩔지 심히 걱정부터 앞선다.
   (참고로, 조지가 누구신지 궁금하시나요? 화제의 단행본 및 중편 연작으로 전격 출시됨. 아마 그 신나는 모험을 알고 나면 깜짝 놀라실지도 모름. 약은 약사에게 책은 서점에서. 뭐야 이제는 마케팅까지? 가지가지 한다!)
   아낌없는 행운과 고마운 행복과 함께 고혹적인 쾌락,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많이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자신있게 관측한다? 아마추어 시인도 그런 예언은 하지 않는다. 자고로 노장은 입이 무겁고, 삼류도 객관적인 자료와 유용한 정보 먼저 따진다. 내 장담하는대, 무턱대고 낙관하고 다짜고짜 승승장구를 기원한다? 내 코가 석잔데 빈말인 거 다 안다. 개구멍 어디 없나 기웃거리고, 제발로 굴러다니는 호박에 대한 찬미사는 언제라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오늘은 삼진이지만 내일은 울지 않겠다 라며 어떻게 뻔트라도 한번 대볼까 갖은 모략을 짜고 또 짜실 텐데 누가 모를 줄 아쇼? 아무리 그래도 이 허접함 암만 생각해도 답이 없다? 괜찮다 괜찮아. 배당률 만큼은 전설적으로 최고니까. 하여간 말은 말은!
   흐음, 결론 나왔다. 격려도 좋고 조언도 좋지만 남 걱정 말고 쩜쩜쩜! 행운의 동반자로는 '최선'이 천생연분이고, 싱글벙글 오늘을 살면 된다는 것! 루마니아 속담도 있다. 예외는 규칙을 강화시킨다는 점. 꽃 하나로 봄이 오지 않는다는 점. 차근차근 내 인생을 가꾸는 것부터 희망의 범위를 넓혀가면 된다, 라고 환상머신 제작사의 실패한 음모는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다.
   (환상머신 제작사의 실패한 음모?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단 말이야? 조지 이야기는 화제의 단행본 및 중편 연작으로 전격 출시됨. 아마 그 신나는 모험을 알고 나시면 깜짝 놀라실지도 모름)
   아닌가? 아니다. 아닌 게 아니지. 그럼. 심술꾸러기, 욕심꾸러기, 걱정꾸러기 등등 내 안에 사시는 그분들과 먼저 화목하기. 첫눈에 홀딱 반할 수 밖에 없는 기승전결은 잠잠한 발단과 소심한 심심함으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두 마리 토끼를 잡을려다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다는 말도 있고 사례도 있다. 그러니까 두 마리 토끼가 혹시 야망과 소망 아니야구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편 선각자는 말한다. 내게는 열정 하나면 충분하다고. 인생 별거 있나 오늘은 샛노란 바나나 껍질 내일은 새빨간 립스틱이지 라는 배짱도, 시작이 반이라는 포부도, 밝고 건강하고 자신있게 뿌잉뿌잉 새콤달콤 반짝반짝 애교도 좋다. 다 좋다. 메피스토펠레스일지 괴도 루팡일지 천당과 지옥이 또는 그 어딘가에 패자부활전이 존재할란가 몰라도, 육신은 이 세상에서 빌린 몸이니만큼 의미 있는 인생을 살다 가면 된다. 또 하나의 새해는 시작된 것이다. 그대의 건투를 빌면서. (엄지손가락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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