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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1. 1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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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세를 다듬고 허당기를 감추며 허영심이 합세하여, 부푼 빵처럼 깐족이 탄생하면 무엇이 될까? 그건, 산문시! 왜냐하면 일기는 고개 숙이고, 사설은 고개를 돌리며, 품격은 아예 고개를 틀고 들고 눈을 지긋이 감을 것이며, 칼럼은 한숨을 절로 쉴 테니까. 그런데 낙서마저 날 거절하면 내 오묘한 심정 얠 대체 어디로 보내지? 이러다 영영 새로움이 합류하지 못한다면! 나는 바짝 긴장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은 날 기다려 주지 않고, 대형 신인들은 쉬지 않고 속속 등장하는데, 주위에선 미안해서 그런지 어쩐지 하는 일은 잘 되냐며 안부마저 묻질 않으니까. 위대한 일류 작가임을 상정하고 의무적으로, 또 규칙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일을 그르치기 쉽상이다.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경륜장에도 가고, TV도 보고, 술도 마셔야 한다. 나는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 여자는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 없이 사교계는 잘 돌아갈까? 단골 카바레의 수습직 웨이터인 에르메스씨는 쫓겨나지 않았을까? 바텐더 양반도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별 게 다 걱정이네. 별다른 예감도 없고 특별한 약속도, 조촐한 여행 계획도 없으니 나는 화려한 꽃다발 아니 값싼 프리지아 몇 송이를 들고서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벌써 도착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네. 저런! 뭐야 이거. 허나, 문은 열려 있었다. 잠겨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나와 미스테리아는 냉장고 권리를 방조하는 사이였다. 때문에 나는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서 나는 프리지아를 대충 컵에 물 받아서 꼿아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은퇴한 일러스트레이터, 취미 때문에 반-재산 날린 동화작가와 부동산 사장님, 정육점 주인등이 모여서 노는 어느 한가한 펀드매니저의 개인 사무실에서 퇴근하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라고 추측했다. 한때 잘나갔던 펀드매니저는 어떡하다 팽당하여 주류에서 밀려났고, 하는 일은 심심한 비서 또는 수다스러운 경리나 다를 바 없음.
   그래서 나는 도시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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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도시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했다. 모텔 이름은 고흐와 먼로. 전세계에 체인이 즐비한 촌스러운 호텔은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좀처럼 유명하지 않은 최고급 호텔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적당히 외지고 깔끔하며 너무 으슥한 느낌이 들지 않음과 동시에 가격이 착한, 정말 어렵게 고른 숙소였다. 거긴 거의 상업적 이익을 포기한 숙박업소가 아닌가 의아했지만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곳에 짐을 풀었다. 예전 같으면 도시에 사는 친구가 놀러오라며 꼭 방문하면 들르라고 일주일 놀다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날 초대하면, 나도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덥썩 응했을 텐데. 빈말을 참말로 오해하던 호시절은 지난 것이다. 어느새 뭐랄까 누추한 뒷골목도 상큼한 첫사랑과 고상한 연애와 조용조용한 대화를 모두 아는 숙녀가 하기엔 썩 부적합한 발언처럼, 난 어쩜 세상의 풍파에 닳아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도시를 구경했다. 특별한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우선 어쩐지 내게는 새로운 노트북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새로운 노트북을 사기 위해 전문 매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새로운 노트북을 사기 위해 줄이 엄청 길게 늘어서서 대기중이었다. 나도 하는 수 없이 제일 뒤에 줄을 섰다.
   그러다 나는 하도 줄이 줄어들지 않길래 왜 줄이 줄어들지 않나 해서 옆사람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글쎄 그 줄은 컴퓨터 매장 줄이 아니라 나이트클럽 입장 대기 줄이란다. 뭐야? 뭐냐고! 아니 도대체 뭐하는 NC이길래 그렇게나 인기가 많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노트북은 내일 사도 되고 언제라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뭔가 특별한 기회라고 느꼈고, 다이아몬드 호박마차에 탑승할 시간은 촉박하며, 황금 마네킹 상점과 연줄이 닫을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나는 나도 다 안다는 듯이, 확인차 물어봤다는 듯이, 그분께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나는 얼떨결에 클럽에 입장하게 됐다.
   다행스럽게 출입을 제지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클럽은 재미없었다. 왠지 속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만나서 반갑긴 했는데 문제는 녀석이 여자 둘을 내게 맡기고 가 버린 것이었다. 신용카드가 정지됐기 때문인 듯 했다. 급한 용무는 무슨, 마누라한테 전화온 것 같지도 않았다. 옛 친구가 떠나가서 눈부심 때문에 피곤했던 내 체력이 되살아났다. 왕성하게! 녀석은 오랫만에 봤는데 글쎄 반-대머리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도 눈부셔서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분들 기분 나쁘고 어쩌고 너무 지나치게 배려할 필요없다. 왜냐하면 결국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또 수시로 그 얘기를 꺼내니까 말이다. 단지 내가 하면 농담, 남이 하면 결례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친하면 괜찮음.
   오랜 친구를 스치듯 만났는데 그 친구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이렇다.
   그 친구는 생각해 보니 이런 친구였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였다.
   잔기술, 잔머리, 잔지식, 잔꾀, 잔뻔치, 맛보기, 엿보기, 물색, 뻔트...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건 마초의 운명이다. 고급이 웬말인가.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사랑과 야망, 드라마 제목일 뿐이다. 이제 남은 건 로또 밖에 없다. 백조는 고개를 돌리고, 요염한 고양이는 사랑을 받아주지 아니 구애조차 못해 봤고, 어딜 넘봐 라는 듯한 오해만은 피해야 하니까, 피닉스로 변신은 불가능하며, 반겨주지 않는 고상한 사교계? 나도 싫다. 타석지상주의는 어쩜 우리의 사명 아닐까? 아니다. 이젠 것도 귀찮으니까. 하지만 가끔 열정이 선두로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바로 그래서 바에서 반응이 안 좋은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바텐더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봐도 참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차마 답이 안 나올 테니까 말이다. 바텐더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나도 안다. 우리 중에 누가 돈이 제일 많아 보여요? 아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다 소망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모르겠고 풋사랑이나 잡자 라면서 어린시절 놓쳤던 알록달록한 풍선과 동요 대신에 다 커서 미러볼을 쫒아간다. 지상의 삶이란 게 별거 있나 하면서. 혹성 탈출. 혹성은 일상이고 미지의 낙원은 나이트클럽이다.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장소였던 것이다. 연애편지에 억지로 썼던 말들. 청춘, 별이여 사랑이여, 달님 해님, 애정이니 꿈이니 뭐니, 공주님 순수라는 반지를 받아주오 내 그대에게 행복의 왕관을 씌여주겠소, 낭자 저 무지개 너머 희망의 나라로 함께 떠나지 않겠소? 그거 다 순 거짓말이었듯이 말이다. 물고기를 잡기 전에 뭔 말인들 못하랴.
   라~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옛날에 잠깐 친할 뻔 하기는 했다. 아마 당시 그래서 헤어진 것 같다. 그게 뭐냐면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와 <선생님 사랑해요>에 대한 생각과 애원과 이상에 대한 구미와 취향이 서로 정반대였다는 점. 정반대끼리는 통한다느니 뭐니, 그런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고, 클럽에서 만난 두 여인과 나는 헤어졌다. 나는 여자에 관심이 없었고, 그녀들에게도 나는 자기들이 바라던 이상적 신사가 아닌 듯 했으니까. 우린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도회의 인연은 무도회의 인연으로, 라는 눈빛을 뒤로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음악소리가 시끄러워서 별다른 얘기도 나눌 수 없었다. 드라마에 나오듯이 나이트클럽에서 막 순조롭게 대화하는 거 다 거짓말이다. 비싼 술 시켜서 룸에서 밀담을 나눈다면 모를까. 나이트클럽이란 게 그렇다. 도시의 낮은 분주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의 야경은 멋지게 바뀐다. 그리고 사람들은 낮에 이성적이었다가 밤이 되면 감성이 뭉클해진다. 그래서 카바레든 나이트클럽이든 흥겨운 파티든 들뜬 장소에서 새로운 만남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당연히 타석과 타율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선수는 한정된 분들께만 문이 열린다는 고급 사교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그곳에 가서 뻔트를 댄다. 어쩌면 다른 게 아니라 판타지와 예술과 궁금한 인생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던 소년 소녀가 몽상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그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린 그녀들과 헤어졌다. 그녀들은 2인조였다.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내가 그녀들에게 느낀 점은 밝은 낮에 만나서 대화를 한 번 더 나누고 싶다는 정도. 그리고 그녀들의 이름은 기억났다. 마리와 영. 헤어지면서 물론 내 뒤통수가 적잖이 따가웠다거나 내가 그녀들을 떠나가면서도 엉거주춤, 안절부절, 미적지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거짓말에 가까울 공산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일단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날 하루는 몸만 풀었다고 여기며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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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음 날 서점에 갔다. 내가 서점에 들린 목적은 분명했다. 서점에 출간된 내 소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내 책은 중편소설로 출간됐고, 필명을 사용했으며, 작가 소개는 단 두 줄 정도가 다였다. 사진? 게재되지 않았다. 때문에 내가 원하는 최적의 조건으로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였다. 물론 내가 쓴 소설은 굉장히 특이한 형태였다. 장편도 되고, 각 편별로 단편과 중편도 되는 이상한 소설이었다. 처음에 내가 먼저 연락했나 아니면 출판사에서 내게 접근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마라의 소개로 연락이 됐던가? 희한하게 그 사연이 통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만나게 됐고, 그쪽에서 전혀 엉뚱한 계약 조건을 제시해 왔다. 나도 똑같이 맞대응을 했다. 등단 경험이 전무하고 흥행에 관한 예측도 어려운 신인에게 꾀나 파격적인 대우임에는 틀림없을지라도, 내가 소유한 최소한의 객관적 자료는 분명하기 때문에 나의 협상 카드는 '하나 주고 하나 받자'였다. 어쩜 너무 무식하고 아마 너무 멍청한 접근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바라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꽤 만족해 했다.
   내가 제시한 조건은 이랬다. 작가 소개 최소화, 사진 비공개, 필명 보장, 그외 불필요한 만남이니 모임이니 일절 없음. 거의 모든 비즈니스는 온라인으로 처리할 것 등등. 나는 연예인도 유명인도 예술가도 아니다. 일단 내 생각은 그랬다. 최소한 내가 추구하는 작품을 위한 전제는 그래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계약서를 받아 본 순간 뜨끔했다. 왜 그랬을까? 어딘가 모르게 유명해진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고 깨달았기 때문일까. 거의 예상되는 지점은 삼류일 테고, 미래에 잘 해야 들을 말은 그럴 테니까. 누구도 늙었어! 나는 그처럼 어깨 뽕이 튀어나오기 싫었던 것이다. 말발 끝내주는 내 친구들, 성우에 영화배우에 마피아에 각 분야 각 장르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친구들의 말마따나 내가 고른 책이 아니면 나머지는 보나마나,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읽으나마나, 눈길과 시간과 마음과 애정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시간 낭비일 수도 있을 테니까. 적지 않은 친구들의 삶과 인생이 그랬다.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내 생각과 녀석들 생각의 교집합은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처럼 내가 바라는, 내가 양보할 수 없는 항목에 대해 고집한 결과 내 요구를 승인 받게 되었다. 챙피하기도 싫었고, 겸손한 척 조명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누군가에게 토하는 척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꼭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바램이 그랬던 것이다. 일단 시장 경제에 얽히고 나면 순수는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되면 격조는 여간해서는 집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심일 테니까 말이다.
   내가 제안 받은 조건은 그랬다. 편당 얼마, 일 년에 몇 편, 고로 연봉 얼마! 그게 기본이고 훨씬 많이 팔리면 적당한 보너스, 아예 안팔려도 불이익은 없고, 대신에 노동량이 부족했을 때는 그에 맞게 연봉 삭감이 들어간다고 했다. 곧 선수들처럼 다음 해 연봉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냉정하게 현재의 실적에 따라 연봉은 유지 및 삭감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혹시 나중 실망하고 체념하면 어쩌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이혼이 두려워서 사랑도 결혼마저 못하랴. 여자들이 옷과 가방을 잘 알듯이 남자들은 차를 잘 안다. 자동차는 두 가지로 나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격제와 아닌 걸로. 옵션이 마술을 부리는 계약서? 내가 왜 싫겠나! 나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내가 바라던 로망은 그게 아니었다. 훨씬 큰 물에서 널리 인정 받는 세계적인 출판사, 순수와 대중계를 쥐락펴락하는 그곳에서 어느 구석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에 사는 은둔형 작가에게 먼저 역으로 제안을 하는 일. 아직 등단도 안했고, 비전문가에 지나지 않은 데다 흥행의 보장도 없거니와 영 이상한 이야기들일 뿐이지만, 그분들은 옥석을 가릴 줄 알거든. 진흙 속의 진주를 대번에 알아 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쪽에서 먼저 손수 기라성 같은 통역자는 물론 당대 최고의 변역가까지 대동하여 직접 만남의 자리를 주선함. 그렇게 해서 역으로 먼저 해외에서 출판된 다음에 이쪽에서! 당연히, 나는 걸출한 위인들처럼 A언어든 B언어든 가리지 안고 자유자재로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처럼 소문만 무성하고 철저히 어두운 장막에 가려진 필명 누구. 그건 이상도 아니고 몽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야 뭐 타인에 대신 그런 역할을 맡는 일도 가능할 테니까 그런 바램은 접은지 오래였다. 어쨌든,
   OK! 나는 계약서에 즉시 서명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크기의 글씨로 날 옭아매는 메피스토펠레스 조항이 있나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고정급 박봉에 시달리는 미스테리아 칼럼니스트는 일정 수입이 보장되는 어엿한 작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신분 상승일 수도 있고, 이제야말로 혹독한 전문가의 세계에 입성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나는 혹시 비정상적으로 작품이 팔리거나 영화로 만들어질지라도 난 과도한 인기나 황금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야 그때 가서 섭섭하고 아쉬울지는 몰라도 행복을 위한 최저 수준의 품위 유지비면 내게는 충분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열심히 글을 쓰는 것도 쓰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는 정설이었다. 그렇다고 밑에 있던 힘이 위로 다 올라가버리면 또 것도 좀 아니 많이 곤란할 것이다. 때문에 부족한 에너지를 외부에서 충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내내 그래왔듯이 고전주의자로 살면서 환상머신을 꿈꾸고 무지개 너머 사랑의 나라, 희망의 세계, 신비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선망을 무럭무럭 키우며 광기 어린 사이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할 수 있다고 동기 부여를 하고 또 했다.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일부러 마감일과 같은 궁지의 여건에 몰아붙여서 내 안에 계시는 그분 투명인간을 자꾸 귀찮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러든 어쩌든 좋은 주제가 나왔는데 간략히 지나치면 서운하니까 조금만 추가 설명을 하자면 이와 같다.
   나는 왜 필명을 고집했나? 첫째 시간, 둘째 새로움, 셋째 (혹시 모를) 슬럼프, 넷째 초심. 무엇보다 귀찮기도 하고, 미리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끌려다닐 필요도 없고, 할 말 원없이 할 수 있으니까. 나도 반짝반짝 딸랑딸랑 참새 짹짹 병아리 삐악삐악 어른닭 꼬꼬댁꼬꼬꼭 알록달록 조명 비추고, 이름 알리고, 얼굴 알아보고 유명해지며 인기를 구가한다면 웃지 왜 안 웃겠나. 당연히 좋지 왜 안 좋겠나.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순히 그러고 싶어서 유명해지고 싶다고 할지라도 원하는 모델이 있고, 바라보는 이상향이 존재하고, 가고 싶은 지점이 분명하며, 하고 싶은 일이 구체적이란 건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뜻한다. 나도 역시 그러면 좋고 그러고 싶은 마음 있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 아니 이미 그러기 전부터 이상한 예술가였고, 장래 더 이상한 전문가가 될 테며, 벌써 유명인이 된 순간부터 연예인일 테니까. 바로 그래서 나는 필명을 고집했다. 어른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주인공인데, 어른들도 때때로 깜짝깜짝 놀라는 게 바로 어른들의 세계다. 환상이니 신비니 문학이라는 둥 예술이라는 둥 그래 봐야 관건은 돈이고, 원리는 오락산업. 비교는 기본이고 경쟁이 심화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자 꼭 대중의 잘잘못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는 것이다. 또 소비와 경쟁이 아니면 그래프 선은 내려갈 수 밖에 없다. 문화와 교양과 예술이란 마차도 결국은 자본이 굴리니까 경쟁은 현대인에게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숙명. 하오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며 법복을 입고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며 경례를 하더라도 '솔직하게'라는 꾸밈어조차 필요없이 1번은 돈이다. 에이 잘 아시면서! 작가든 칼럼니스트든 대부분은 단지 연예인 지망생일뿐! 어른들의 무책임한...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자본 논리 때문에 아마추어는 동심 때부터 이미 시작 단계부터 삼류로 길러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시대가 그렇다. 감히 전문가라는 양반이 이름을 걸고 약을 팔어? 라는 사례, 지나고 보면 스스로 깨닫거나 스스로 무시하게 된다. 풍요로움과 호사와 자유와 행복은 절대 공짜가 아닌 것이다. 화가를 예로 들어보자. 화가를 꿈꾸는 꿈나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언젠가 화가로 멋진 인생 변신을 준비하는 친구, 현재 유명하고 잘나가는 화가! 그분들이 자신이 태어났던 20세기 중-후반 그 이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아는 건 많아도 남의 다리나 긁을 줄 밖에 모르며, 얼굴은 두껍고,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고, 흉내낼 생각일랑 일절 없으며, 단언컨대 심지어 닯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게 화간가, 네? 그게 화가냐구요! 그건 화가가 아니라 연예인이자 광대다. 응애응애~ 에게에게~ 미술은 그냥 직업이자 취미일 뿐이다. 그건 예술가가 아니라 상인이다. 피카소는 카페 이름, 에르메스는 받고 싶은 선물, 아마데우스는 CM송, 톨스토이는 단지 웨이터의 명찰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야에 따라 삼류가 일류인 세상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게 모두 자연스럽게 가능한 것일 따름이다. 어머나 그런데, 그런 화가가 어느 잘나가는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다? 세상에나,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부터 업계에서 삼류만 키운다니! 그게 대체 뭐지? 그 어떤 미술계에는 절대로 희망찬 미래는 없다. 두고 보시라! 무슨 거창한 시상식의 시기가 다가오면 또 언론에서 수다 떨고 오락산업이 들썩들썩한다고 진짜 그런 줄 아시나. 지난 날을 돌아 봐도 어디에서, 음악이 좋긴 좋다만 하늘까지 갔다 되돌아 오고... 라는 시상 말고는 거의가 아니라 아예 그 뭔가가 전무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보이는 게 우물 밖에 없다. 뭔 동네 강아지처럼 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 짓기는 엄청 짓고, 빈수레는 요란하며 쉬지도 않는다. 여실히 물 건너온 꿀벌이 하나를 봐도 똑부러지게 본다. 대번에 안다. 즉각 느낀다. 누군가가 괜히 합리주의 합리주의 그러는 게 아니다. 그 옛날 장 폴 사르트르의 어떤 말은 취지는 좋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 말은 틀렸다. 다른 게 아니라 확실히 틀렸다. 그렇다고 정신 차리면 손바닥 뒤집듯이 업계 전체가 뚝딱 슬럼프를 탈출할까? 그게 말처럼 쉽겠나. 우리도 제빵사 모자를 써 보자, 그래 봐야 그 모자는 모자가 아니라 내 두 어깨를 밟고 서 계신 어느 여인일 뿐이다. 보이나요? 그녀의 음조는 어떤가요? 분위기는 어떤가? 아 정말 사람 답답하게 그러지 마시고 말 좀 해보시란 말이요! 그 모자와 리본과 넥타이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그 현재를 위해서 천 년 이 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은 백번,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이니까. 규모가 앞서고 타석주의를 선도하며 인프라스트럭처가 엇비슷하고 화장법이 뛰어나고 조명발에 환호성이 끊이질 않을지라도, 다른 건 다 따라하고 더 훌륭하고 어쩌고, 제아무리 로맨스와 판타지가 유행할지언정 정신은, 정신은 어림없다. 그 현격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반짝반짝 딸랑딸랑 그 말 밖에는! 화자는 나는 바보입니다, 청자는 지는유 뭘 모르는 촌년이에유, 예술가는 뭘로 보나 내가 최고입니다, 인기 있는 분들도 저는 (은근) 허당이랍니다 라는 광고와 도대체 뭐가 다를까. 대부분 귀감에 꿈의 실현은 권리이자 야유회도 학예회도 모두 재밌고 아름답지만 그 뭔가 그 뭔가는 좀 그래서 하는 말. 꾀꼬리 같은 소리, 황홀한 사랑 고백, 소프라노가 부른다 밤의 여왕 아리아를 아이쿠 부르자마자 우리의 심금을 울리네, 그외 수많은 초절 기교와 신기한 특징과 놀라운 장기는 많고도 많지만 오롯한 정신은 하루 아침에 따라할 수 없다.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확연히 두드러지는 분야가 뭐냐, 글이다. 그래서 말하는 변호사와 말하지 않는 변호사가 나뉘기도 하고 분야에 따라 대변인이 있는 것이다. 자존심인지 뚝심인지 아니면 열정인지 그 뭔가가 너무 강한 분들 그분들 글을 가만히 읽어 보면 이상...하다. 뭔 말인지를 하나도 모르겠네 모르겠어. 한두 명도 아니고 대체로 그분들이 대세고 스타고 인기다. 타고난 유전자가 백조 대 촌닭 대충 2 대 8일지라도 늑대개처럼 일평생 동물농장에서만 산다면 아프리카 그 광활함 그 가슴이 일렁이며 마음이 뭉클하고 코 끝이 찡함으로도 모자라 눈물이 핑 돌며 지각마저 아찔한 그 대자연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모른다! 절대 모른다. 나는 뭐가 좋다, 에 대해서 태생적으로 뭔가가 다르다면 죽어도 모를 수 밖에 없다. 그냥 모르다 가는 것일 뿐. 모르긴 몰라도 먼 미래에는 그 모두까지 아마 숫자로써 미리 알고 만나고 부딪히고 생활하며 사랑까지 해야 할지도. 다른 데는 몰라도 어디를 보면 능력 출중하고, 감성 뛰어나며, 기술까지 고상할지언정 딱 보면 꼬끼요 꼬꼬꼬꼬 뭐라뭐라 떽떽거리는 느낌, 묵묵히 외면하기엔 내 참을성이 부족함을 반성해야 한다. 어쩌다 듣게 되는 헤드라인처럼 뭐 어쩌고 좌시하지 않겠다 그게 아니라 솔직한 심정이 그러하다는 뜻.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그러나 지는 건 지는 거다. 인간의 본성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라는 속담과 정확히 딱 들어맞는다. 그분들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냐는 거다. 울그락불그락 커피포트 부글부글! 그래서 또 바빠진다. 레이저와 화염방사기는 항상 대기중이다. 업계는 반기고 품위 유지비는 돌고 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자유와 행복과 번영과 호사와 기쁨이 보장될 수 있다는 반증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결국 타임머신 얘기네. 기왕지사 타임머신으로 주제가 넘어온 거 분야를 틀자. 대중의 수준은 차치하고 정치계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둥 어쩐다는 둥, 정치 얘기를 하면 듣게 될 말, 다 안다. 뻔하다. 우려먹다 어쩐다. 그러니까 딴 거. 종교, 가자. 허나, 짧게. 매우 짧게. 종교도 똑같다. 무슨파니 무슨파니 뭐니 뭐니 갸우뚱 간혹 설핏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식? 종교1도 다 거쳤던 일일 뿐이다. 구교니 신교니 십자군 전쟁이니 뭐니, 르몽드 세계사를 읽어보지 않아도, 대충이라도 알고 나면 큰 그림이 보이면 일단 끄덕끄덕 하게 된다. 그건 그렇더라도, 아니 대체 어른들은 왜 그럴까? 무슨 말은 말은 제우스에 신동에 큐피트고 예언가가 따로 없다. 당장 오빠 그리고 아빠만 봐도 사랑은 얄비운 나비인가 봐 그러면서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그녀와 엄마는? 보아 하니 많은 부분 발명가, 선지자, 창시자의 원류를 찾아서 휴양지에 가는 식이다. 남의 다리를 피나게 긁으면서 아 이제야 좀 시원하다? 그분은 시원하시겠네 삼류들이야 좋지 왜 안 좋겠나, 유명하고 돈 벌고 반짝반짝 딸랑딸랑 굽실굽실 벌거벗지도 않고서 임금님인데 말이다. 이제 곧 인공지능이 전면에 나서게 되어 있다. 그쪽도 스타가 있을 것이다.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스타가! 그처럼 오도된 상업이 지배한 학계는 먹구름만 잔뜩 낀 걸로도 모자라 촉각도, 미각도, 지각마저 점점 퇴보하여 난쟁이의 나라가 되버릴 것이다. 내 장담한다! 그건 어쩜 처음부터 정해진 숙명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패션을 배우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가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낭만주의를 배우기 위하여 카바레를 찾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인상주의를 전공할려면 동기 부여 강연회를 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거장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니자. 왜 안 되겠나. 안될 건 뭔가. 어머 어머 우리 똘똘한 개구쟁이들이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가설과 실험과 증명이 웬말인가, 레인메이커가 있는데! 시골 사는 도박꾼들, 왜냐면 대우부터 다르니까요, 어디로 이사 가서 팔짜 한번 고쳐 보지 않겠수? 헤드라인에 나오는 도박사는 승부사고, 외딴 동네에 사는 도박꾼은 뭐 사과나무나 심어라? 아 됐고, 우리 행운아들은 묻지마 베팅이나 합시다 그려. 흥! 연예인은 연예인병에 잠깐 설혹 걸릴 수도 있다지만 몽땅 탈출한다. 다 과정일 뿐이다. 옛날에나 통과 의례였지 촌스럽게 누가 지금 그러나. 예전부터 다 건너뛴다. 그 시장은 하향 평준화가 아니란 말씀. 그렇지만 업계에 따라 연예인이 아닌 유명인은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미세하고 신경 쓰이는 우쭐함이 작품에 영향을 끼칠까, 끼치지 못할까? 스포츠 선수는 성적으로 화답하고 영화감독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미세하고 신경 쓰이는 우쭐함이 작품에 영향을 끼칠까, 끼치지 못할까? 답은 어렵지 않다. 설령 그럴지라도, 난 지금 그분들의 황금을 부르는 수완이 탐나서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나도 나다. 이건 잘하는 일일까 못난 짓일까. 바로크 음악가들처럼 후원하는 귀족, 대귀족이 없으니 뭐 칼럼이나 꾸준히 또 열심히 쓰는 수 밖에! 생각해 보니 별수 없었다. 자신감 있게 당당히 세상에 나서면 되지, 그게 뭐 어렵다고, 이 세상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지 뭐 그렇게까지 유난 떨 필요 있나? 라는 반론도 있을 수도 있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누가 보면 머머증에 걸린 환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가. 인정한다. 겸허할 필요도 없고 툭 터놓고 말하자면 그렇다. 좋다. 그 의견에도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왠지 모르게 사랑 노래를 즐겨 듣기 좋아하는 그런 수줍은 소녀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아직 동화를 떼지 못한 12살, 나도 어른들 세상이 뭔지를 이미 다 알고 있어 라며 뚱한 표정을 짓는 소년이자, 꿈 많은 아동이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허풍 대회를 주최도, 주관도, 후원은 물론 진행에 시상에 당선도 모두 혼자 독차지하며 원맨쇼를 펼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서점에서 내 책에 누가 손을 내미는가 내밀지 않는가, 언뜻 눈길 주는데 인색한가 인색하지 않은가, 몰래 엿보다가 나는 한때 꽤 친했던 형씨를 만났다. 그분을 처음 만난 곳은 다름 아니라 어느 후미진 카바레였다. 당시 나는 그 웨이터의 명찰에 뭐라고 씌여있는지 알고 나서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건 바로, 미스터 보봐리! 뭐? 난 당장 그분이 범상치 않은 분이란 걸 깨달았다. 그치만 남자 대 남자인데, 손님 대 웨이터인데 인연이 곧바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인연은 끈질겼다. 한 일 년쯤 후에 도시에서 CD와 예술 서적을 고르기 위해 방문했던 어느 한적한 초소형 가게에서 그분을 다시 뵙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렇게 연을 맺게 되어 친구가 된 우리는,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고, 자리를 옮겨 찻집으로 갔다. 못 다 나눈 얘기가 꼭 많지는 않았으나 솔직히 말해서 많이 반가웠으니까.


   4

   「사진 계속 찍으세요?」
   「처음에는 열정이 있었는데 뭐랄까요 사랑처럼 마음이 바뀌더군요. 스콧은 춤 계속 추세요?」
   「그만뒀죠. 뭘 진득하니 오래 할 팔자는 아닌가 봐요.」
   「그런데 참 오랫만에 뵙는데 여전히 멋지시군요. 아직도 여자들이 줄줄 다르겠어요. 번호표 발부 기계 사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형씨처럼 숙녀한테 인기 많은 남자 때문에 저희 같은 까마귀들은 매번 발빠르게 뛰는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날아 봐야 지붕 위라니까요. 그럼요. 오늘 입으신 의상도 거의 뭐 오피스 룩의 정석이군요. 수트는 꼬르넬리아니. 양말은 폴 스미스. 아닌가? 그리고 다른 건 음... 모르겠어요.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죠. 뭐 옷이 문젭니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데 말이죠.
   그건 그렇고, 그동안 어떻게 사셨소? 왜 내게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소? 이것 봐. 내 정신 좀 봐. 모르긴 몰라도 아마 형씨가 세 번 연락하면 난 겨우 한 번이나 연락했는지 모르겠소. 지난 날이 떠올라서 쑥스럽구만 허허! 고전적인 자주색 수트와 기대와 설렘이 뒤섞인 분홍색 셔츠는 여전하시구료. 선생을 보고 있으면 꼭 괴물과 조커가 떠오른다오. 그런데 누가 조커지? 아, 맞다. 그녀는 계속 만나오? 추리소설 문학잡지 편집장 말이오.」
   「헤어졌소. 그녀는 직장도 옮겼다오. 심지어 자주 옮긴다오. 여성잡지1. 여성잡지2. 게다가 남성잡지까지 말이오. 나아가 나와 헤어지고 남자친구도 바로 생기더라, 그 말씀. 그래서 난 좀 놀랐다오. 그래도 우리가 사랑을 하긴 한 건가? 그런 의문이 살짝 들길래 말이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재빠르게 말을 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가끔 소셜 네트워크로 사는 소식을 접하면서 연락 한번 할까 말까 고민했소. 선생이 최근 바꾼 차가 너무 멋져 보였걸랑요. 무슨 루소? 노란 애마 마크가 유난히 선명해서 선생을 좀 괴롭히고 싶었단 말이오.」
   「봤소? 난 그냥 멋진 차 타며 유랑 생활도 했다가 직업도 많은 분야에 도전하고, 내내 좋은 술집이나 전전하다가 늙어야 할 팔자는 아닌가, 가끔 그런 걱정이 든다오. 형씨는 안 그렇수?」
   「난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소. 하지만 내 친구 중에 하나 철 없는 녀석이 있거든요. 만나면 만날 때마다 고급 술집에 데려다 달라느니 어쩌니, 아주 난리도 아니랍니다. 내가 그래서 나중 녀석한테 어디 자유이용권을 발급해 줄 생각이라오. 요염하고 음습한 분위기에다 아주 도도하고 예쁜 마담을 걔 사무실로 보내서 식은땀 쭉 나도록 괴롭힐 생각이란 말이오. 당연히 내가 보냈다고 하면 안되겠지요. 아, 그래서 말인데 이 몸도 어쩔 수 없이 햇빛이 따스한 양지로 나올 수 밖에 없었소. 뻔하지 않은 청보라색 연한 줄무늬 수트도 사고, 담백한 노란색이든 고마운 느낌의 하늘색이든 중고로 어떻게 뚜껑 없는 차도 타 봐야 하니까, 부족한 품위 유지비에 대한 내면의 절규를 언제까지 모른 체 회피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라오.
   그래서 난 그냥 출판사와 계약해버렸소. 물론 필명에 얼굴 없는 작가로 말이오. 안 그랬다간 슬럼프로 꽤나 고생할 듯 해서 덜컥 겁이 났으니까 말이오.」
   「아, 그러하오?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식이오. 축하하오. 그런데 그 일은 어렵지 않았소?」
   「전혀요. 매우 간단하던 걸요. 먼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부터 소개 받은 분께 메일을 보냈소. 고전적인 손편지가 아니라 이메일 말이오. 무슨 에디션 만년필도 잃어버렸고, 요즘 수전증 때문에 원고는 몰라도 편지는 좀 힘들어서 그랬소. 이메일도 별 내용 없었소. 메일 제목, 장르, 특징, 블로그 주소, 분량과 요구 조건등만 간략히 써서 보냈소. 그래서 연락이 왔고, 만났고, 계약을 했소. 그게 다요. 허허허허허.」
   「경하드리오. 아 이거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네 그려. 어떡하면 좋지? 어떻게 음 뭐가 있을까? 아, 최근 친한 내 친구가 특급 호텔 사장이오. 형씨 숙소나 옮깁시다. 그렇다고 내가 꽃다발을 안겨주겠소 옷을 선물하겠소? 친한 친구 몇 명에 등번호에 허영심을 어떻게 반기는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우리끼리 모르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거라도 내 마음대로 합시다 그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루쏘 타며 바람도 쐬고 이참에 숙소도 냉큼 옮깁시다 친구. 허허허허허. 아, 맞다. 내 하나 묻겠소. 갑자기 궁금해졌소. 당숙께서 쓰시는 다음 작품 제목 말이외다. 전부터 부쩍 궁금했다오. 살짝 과장하자면, 난 정말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오.」
   나의 대답은 이랬다. 허당론! 그렇게 우리는 드라이브를 즐겼고, 나는 숙소를 최고급 호텔로 옮기게 됐다. 앞으로 어떤 질투를 받게 될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나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친한 척이 아니라 친했고, 있는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으며, 강한 척 센 척 잘난 척 애쓰지 않아도 되는 우정이었기 때문이다.


   5

   나는 스콧이 마련해 준 최고급 호텔 피노키오에서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도시를 방황했다. 거기서 일단 편집장 마라의 청탁을, 나 필명으로 인기 좀 얻고 형편이 풀렸을지라도 매정한 남자로 돌변할 리는 없으니까, 마라의 애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도 칼럼니스트라는 일을 즐겼으니까. 좋았으니까. 동화작가로 시인으로 연애-수필가로, 인문학자로 매번 변신하며 실험하고 연습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음은 내가 고품격 호텔 피노키오에서 작성한 시다. 이번 장르는 대중적인 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미발표 작품으로 남겨놓을 생각이다.
   철마는 달린다. 목마는 춤춘다. 양떼견은 바쁘다. 말상인 숙녀는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최고의 갈채는 개상인 여자와 고양이상인 숙녀가 만나 이루는 절묘한 수다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뜻임. 허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구경꾼 때문에 시상이 끊길 리는 없다. 상상은 자유니까. 공상은 장기니까. 여자는 내 전공이니까. 그리고 마술사는 종적을 감췄다. 신비극은 명맥이 끊겼다. 술집은 텅 비고 사내는 외롭다. 주사위는 던져지기를 기다린다. 방랑자는 다음 모험을 물색한다. 미러볼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밤무대에서는 한껏 원숙한 원로 여가수의 눈빛보다 입이 떡 벌어지는 의상이 훨씬 반짝인다. 꿈의 회피 기술도 다 안다. 살면서 핑계는 늘 수 밖에 없으니까. 문학 소년은 페이스메이커를 꿈꾸고, 발레리나는 한정판 하이힐을 떠올린다. 어쩐지 음산한 추리소설, 왠지 신나는 액션 코믹 영화. 어딘가 모르게 따라가기 버겨운 으쌰으쌰 분위기. 따라서 그대의 주말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찬란한 행진, 둘째 무정한 상심. 첫째는 우리들의 희망이고 둘째는 재미없는 얘기이자 싫증난 연애다. 그러나 새로움과 즐거움과 황홀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혹시 모를 절망을 각오해야 한다. 값진 보람, 지고의 성과, 다정한 기쁨은 다 대가가 따르기 마련. 논박할 수 없는 진리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날마다 심심하기 바빴으나 언제라도 그 어떤 새로움을 맞이하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고로 나는 오늘도 꿈꾼다. 무엇을? 순진한 환상─무구한 신비─눈부신 사랑─천진한 행복─정다운 우정─우연찮은 행운─아찔한 지성─천사 같은 당신─끊임없는 영감─발동 걸린 인기─마침내 자유─재미있는 하루─이상적인 내일─과장된 추억─고귀한 기쁨─비밀스런 활기─아름다운 애정 그리고 심심한 우연을!


   6
 
   우정을 과소평가하고 사랑을 과대평가했다. 친구는 기쁨을 속삭였고 애인은, 애인은, 나는 아직 애인과 데이트를 한번도 못해봤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여자에 대해서 그리도 잘 아냐고? 왜냐하면 여자 앞에서 나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하얀 거짓말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 난 여자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알겠나? 누가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 계시면 내게 그 영험한 비법을 전수해 주시지 않겠소? 나는 배우고 싶다. 난 모른다. 내가 어떻게! 그러니 어쨌든 나는 당연히도 포근한 포옹과 달콤한 키스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권태라고? 낭만주의도 거치지 못했는데 권태는 무슨! 현실을 보아 하니 칼럼니스트로의 전향은 실패한 변심이었다. 아직 승부를 얘기하기엔 오판일 여지가 많지만, 허언증에서 블로그 신드롬으로의 변신도 실망스러운 변덕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다시 미래주의자로 복귀하여 새로운 환상극을 써야만 한다. 재미있을 뻔 하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작품이라도 괜찮다. 지금 어쩌면 식은 밥 찬 밥 가릴 처지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혼잣말은 술친구와 하고 일하는 사람은 성과를, 도전자는 실패를 감수하고, 작가는 글을 써야 하니까. 지금 나는 도시에서 또 고급 호텔에서 휴양 생활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리핀, 특급 호텔 사장 그리핀 그 친구가 심술이 장난 아니다. 왜 그런 줄 모르겠다. 그리핀은 스콧과 오랜 친구 사이라고 했다. 나는 스콧과 업계 동료이자 다양한 취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였고, 따지고 보면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소셜 네트워크 친구에다 관계되는 의미가 많은 끈끈한 사이였다. 다만 한동안 떨어져 살다가 오랫만에 반갑게 재회한 후 지난 우정이 다시 뜨거워졌다는 것 뿐.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스콧이 그리핀을 소개시켜줬고, 나는 그리핀과도 친구가 됐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당분간은 친하게 지내야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기를 원했다. 어쩌면 간절하게. 그런데 그리핀은 변덕이 심했고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설핏 다혈질은 아닌가 하는 의문은 날 살짝 떨게 만들었다.
   하루는 호텔 바에서 그리핀과 나, 단둘이 술을 마셨다. 그리핀이 바텐더를 모두 반대편으로 보내버렸다. 저런! 그리고 그리핀은 다짜고짜 탁자에 자신의 차 열쇠를 턱 하니 올려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나 보고 타라고 했다. 나는 아직 그리핀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타라면 못 탈 줄 아냐!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니?」  우리는 이미 반말하는 사이가 됐다.
   「아직 딱히 정해진 건 없어. 하는 일의 결과에 따라 약간 달라질 것 같은데! 그건 왜... 혹시 뜻밖의 청첩장 그런 거 줄려는 건,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
   「어... 하하하하하.」  준다는 말이야, 안 준다는 말이야? 얘가 은근 맹하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딴 속셈이 있나?
   「누구와 누구를 결혼시키지? 약혼식도 아니고 다른 행사도 아니고 결혼식을 주문하네. 왜, 내가 멋진 파티에 초대 받은 경험이 전무할 꺼 같애?」
   「응?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었어. 신경 쓰지 마.」
   난 느꼈다. 그리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심기가 썩 불편하시다는 걸. 얘 혹시 질투하나? 자기들 우정에 내가 끼여들었다고? 불청객한테 단짝을 빼았길 것 같은 불안감. 뭐 그런 건가? 아마도 그런 듯 했다. 얘한테 분명 트라우마가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이런 때 어떡해야 하지? 여자들은 몰라도 난 이런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경험이 많다고 자부할...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어본 걸로는 상중하에서 상이었다. 때문에 대비책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오직 작품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우정의 위기와 동심의 위협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곧 단짝 삼각관계에 대해서 불감증은 아니었음. 하지만 마치 사랑처럼 나는 매번 초보자일 수 밖에 없었다. 영원한 아마추어. 일과 놀이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아마추어가 좋긴 좋은데, 또 설명하기 까다롭게 어떤 미묘한 차이 같은 것도 있었다.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감수해야만 하는 하수의 사랑과 고수의 연애법 같은. 따라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수동적으로, 차세대 환상곡이라는 문학 2륜 마차가 아닌, 단짝 삼각관계라는 4륜 쌍두마차에 업혀갈 따름,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기분이 묘한 게 나중에는, 곧 시간이 오래 지나서는 질투를 하는 쾌감도 부러움을 받는 기쁨에 대해서도 온전히 분석적인 글쓰기가 가능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주연이 되어 현실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 메소드 연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점. 퍽 난감했다.
   그러다 그리핀은 내가 호텔에서 글을 쓸 때, 스콧과 내가 극장에 갔을 때, 그리고 음악회까지 매번 현장에 나타났다. 한 번은 우연, 한 번은 문화생활, 한 번은 일시적인 동참. 스콧의 전화도 내 전화도 불이 났고, 녀석도 나도 매번 당황했다. 한마디로 예측 불허였다. 어머 별꼴이야 정말! 라는 말을 들어도 부족했다. 거의 상상 초월에 준하는 사태였다. 또 나는 스콧에게 책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선물했다. 스콧이 다음 날 말했다. 그리핀이 웬 CD를 선물했다고. 안 봐도 뻔하다. 비제지 뭐겠나. 걔가 그런 애가 아닌데 질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스콧과 나는 허탈하게 활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7

   아침에 나는 호텔 내 미술관에 갔다. 자체 소장품을 전시중이었다. 미술관 뿐만 아니라 호텔 내에 진열된 작품은 대충만 봐도 이랬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어느 초상화. 니콜 아이젠만의 남자 예술가. 카스텐 횔러의 거울 회전목마.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독서. 탈 R의 바이올린을 켜는 남자. 90퍼센트는 그리핀이 직접 골라서 비서한테 사라고 시킨 것 같았다. 재수없는 놈! 얘 현대미술 좋아하나? 그거랑 나랑 뭔 상관이야. 아마도 우린 아무리 잘 쳐줘야 애증 이상의 관계는 불가능한 듯 하니까. 그것도 너무 갔네 너무 갔어. 한편,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카페에서 만났다. 나, 스콧, 그리핀 그렇게 셋이서. 차라리 나를 빼고 그 둘이 만나면 좋을 텐데 내가 뻔히 도시에 있다는 걸 아는데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심정인 듯 했다. 우리는 남자 대 남자의 우정이지만, 이때 한 명이 일정상 바빠서 함께 할 수 없다면 어김없이 넘버 쓰리로 밀릴지도 모른다는 성실한 불안감, 없었다고 부인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1번은 몰라도 행여 등번호 3번만은 피하자 그런 의도는 굳이 과학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 여자와 짧게 사귄 일이 있었는데, 난 그녀를 만날 때 이렇게 생각했어. 내가 그녀라고 가정한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해서. 아빠는 시인 오빠는 바텐더 나는 아마 투자자? 어쩌면 도박꾼! 그러다 갑자기 사랑해요 사랑해요, 반짝반짝 좋아해요, 종알종알 즐거워요.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었지. 그런 만남이 잦았기 때문일까? 난 결국 그렇게 변해간 듯 해. 상심에 빠진 마법사, 쾌락에 젖은 예언가, 사랑을 모르는 책략가로.」
   내 말에 녀석들의 반응은 썩 신통치 않았다. 오직 표정 연기로 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에는 뭐랄까 JB 특집일까? J&B 위스키라도 마셔야 하나? J.B. 브와모르티에의 트럼펫&오르간 소나타, 플룻&하프시코드 소나타가 연달아 연주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왜! 그야 점원 마음이던가 카페 방침이겠지. 나는 좋았다. 나는 마음에 들었다. 다만 스콧이, 그보다는 그리핀이 살짝 걱정됐을 뿐. 왜냐하면 사람들 저마다 각자 싫어하는 주파수 음역대가 있을 텐데 그리핀은 어딘가 모르게 관현악 음률이 너무 두루뭉실하다고, 너무 불협화음이 많이 섞였다고, 너무 음의 진동이 이상하다고, 너무 묻어가는 느낌 때문에 지나친 거부감을 표할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얘네들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계속 내가 마이크를 들고 방송할 수 밖에 없었다.
   「얘들아 어제 있잖아. 얘들아? 형씨들 어제 있잖소. 어제 내가 영화를 한 편 봤다오. 생일 파티에 부른 업체의 행사가 취소되자 아빠가 광대옷을 입고 대신 광대 역할극을 했고, 그 광대옷은 끝내 벗겨지지 않기 때문에 아빠의 운명이 어떻게 바뀐다는 내용이었소. 영화를 중간까지인가 보다가 잠들었고. 그런데 그걸 보다 보니 특이한 점을 느꼈소. 카피라이트처럼 느낀 점을 축약하자면 이렇다오. 캐나다 영화는 글렌 굴드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정말 놀랍도록 닮은 것 같단 말이오. 군더더기가 아예 없어. 영상은 스타카토고, 기획 의도는 긴장감이며, 영화의 진행은 거의 무슨 인문교양서의 골격과도 비슷하더라는 감탄 말이오. 의문─억측─예상─실험─새로운 가설의 논리적 증명─정석으로 영화는 구체화 되고,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학설로 다듬어서 법칙을 만들기. 나만 알고 싶은 그이의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마술사의 주술에 걸린 것 마냥 그게 그냥 자연스럽게 보이더라 그 말씀이외다. 어느 청년의 삼국 생활기가,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라고 아차 하면서 크게 이해되더란 말이오. 이거 이거 퀘벡으로 여행 가서 한동안 은거 생활하며 추리소설이라도 써야 할지...! 와, 그래서 어느 재미없는 운동선수는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내 그걸 느꼈소. 느긋함, 심심함, 여유, 고지식함, 답답함, 밋밋함, 차분함과 모범이 느껴지는 클라우디오 아라우처럼 말이오. 아, 비슷한 일은 그러고 보니 또 있었네. 예전에 뭐 새로운 취미 없을까 하면서 알아보다가, 암벽등반을 해볼까 하며 궁금함에 동호회 웹페이지를 한참 구경할 때도 그랬어. 그곳에 공개된 기념사진들을 보니 완전 신기하더구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난 정말 그렇게 느꼈어. 사람들 얼굴이 뭐랄까 바위를 닮은 인상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멋지게 딱 설명하지는 못하겠는데 처음에 보자마자 내가 한 일은 놀라운 감탄사였다고. 할 말을 잃어버렸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러면서 무언가 경이로움을 느껴버렸으니까. 결국 그 후 나는 실내-실외 암장을 알아보다가 무서워서 구경만 하다 말았는데, 한마디로 어떤 첫인상...쯤 되겠네. 음 그말이 알맞겠네. 혹시 보는 사람이 문제인가? 살면서 으쌰으쌰만 하느라 대화 같은 대화를 통 못해봤으니 알 수가 있나. 설령 그렇다 해도 분명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무언가로 사람은 원래 닮고 비슷해지는 건가 봐. 그럼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건... 많지. 많아. 많은데, 그런데, 허걱! 뭐시여? 흐흠... 뭐 그건 그렇고 별건 아닌데, 형씨들 다 아시는 얘기일 텐데, 난 새삼 느꼈소. 이런 수없이 다양한 특징들을 반복해서 간접적으로 깨달을려면 대충 최소 스무 살, 경험으로 체득한다고 보면 적어도 30살? 그게 아니라 단순히 화이트 소음을 비롯한 분위기로 집에서만 단 10살에 깨우치는 게 뭐냐, 아마도 가정교육이겠지요. 허나, 놀라운 기록 단축에 따른 단점이라고 왜 없겠소? 다만 숙녀가 반기는 풍성한 꽃다발의 화사함과 아저씨한테 익숙한 유흥가나 홍등가 불빛의 다채로운 느낌은 같을 수가 없다는 점은 있겠지만 말이오.」
   「지가 무슨 영화평론가야? 자기가 무슨 스타니슬랍스키야 뭐야? 가당치도 않소! 하여간 누가 허당 아니랄까 봐 애쓴다 애써!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 영화가 누구라고? 웃기시네! 캐나다 영화 몇 편이나 봤다고 아는 체야? 도대체가 마음에 안 들어. 또 뭐라더라? 무슨, 뭐... 동경 어린 여심과 지겨운 일하기, 싫증난 사랑? 그냥 한마디로 권태기에 진입한 연애라고 하면 되지, 그게 뭐야? 순 돌팔이 작가 주제에 잘난 척 따박따박 잔소리 하기가 취미야 뭐야? 떽떽거리는 게 무슨 뽐내야 할 재능이라도 되나? 아 증말 꼴보기 싫어. 완전 재수없어. 지 유난 떠는 응석을 남들 보고 봐 주라는 거야 뭐야? 별꼴이야 정말! 도저히 못 봐주겠다니까.」
   그리핀이 잠시 탁자를 벗어나 바에 가서 느닷없이 칵테일을 주문한 채, 밑도 끝도 없이 음악을 헤비메탈로 바꿔줄 수 없냐며 담당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면 그 혼잣말을 듣지 못할 만큼 내 청력이 약했냐? 그건 아니었다. 그리핀은 일부러 음량을 줄이지 않았고, 얘길 들으니 어느새 내 칼럼도 몇 편 찾아서 읽은 듯한 눈치였다. 그의 압박은 쉬는 시간이 없었고, 트집 잡기는 점점 노골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수완도 차차 발전해 간 점,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8

   여기서 잠깐! 우리 중에 최고의 왕가슴, 역대급으로 가슴 큰 여자는 누구일까? 나? 스콧? 아니 이건 우정의 경쟁심이 아니라 단짝 삼각관계지! 뭔가 재미난 일이 연이어 발생할 것만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이 쾌감에 이어 행복감으로 도약하느냐, 중간 과정 생략하고 곧바로 절망감을 선사하느냐. 아니기를 간원해도 하사 받은 진실은 어쩔 수 없이 후자임이 분명했다. 아뿔사! 단짝 사이에 내가 끼여들어 질투심을 유발한 경험 외에 그럼 그처럼 나와 내 단짝의 우정에 내 옛 친구가 끼어든 적은 없느냐 라는 궁금증,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이쯤 해서 우정의 삼각관계에 대해서 직접 경험을 조금만 정리하고 가자. 남자1, 남자2, 남자3에서 그 셋이 모두 되어 봐야 하니까. 그러므로 보기는 세 가지.
   A. 단짝 사이인 남자1과 남자2의 우정에 내가 남자3으로써 끼여들었을 때 실제 있었던 반응의 구분은 이랬다. 나는 네 가지 모두 두루두루 겪었다.
   첫째, 남자2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내가 자기의 단짝인 남자1을 뺐는다, 고로 남자2는 광분하고 질투심에 부글부글 끓는다.
   둘째, 남자1과 남자2 그 둘이 다투면서 멀어진다, 고로 나에게는 남자1과 남자2라는 2개의 단짝 우정이 생긴다. (1과 2의 우정은 끝내 완전 복구 불가)
   셋째, 그만그만하게 어정쩡한 삼각관계의 우정으로 지낸다. (혹시 이게 제일 어렵고 이상적일지도)
   넷째, 남자1과 남자2의 단짝 우정은 흔들림 없이 굳건하다. 즉 1과 2 사이는 여전하고 다 같이 친하게 지냄.
   B. 그러면 나만 이방인이자 불청객으로써 남의 우정에 끼어든 게 다냐? 아니다! 나와 내 친구가 단짝일 때 나의 옛 친구가 그 사이에 끼어든 적도 있다. 곧 남자1은 현재 내 단짝, 남자2는 나, 남자3은 내 과거 단짝. 그런데 이 경우에는 내 과거의 단짝인 남자3이 이방인이자 불청객일 텐데, 남자1이나 남자2의 질투심 지수가 상승하지 않았다. 학교를 같이 다니는 남자1호 2호는 호프집에서, 가출한 남자3호는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당시 우리 셋이 한 집에 함께 살면서 시트콤을 찍었다. 함께 할 때는 뭐 그런대로 괜찮았다. 나중 생각하니 나는 괜찮았는데 나의 옛 단짝이 나의 현재 단짝과 잘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는 괜찮게 보였을지도 몰라. 게다가 어떻게 인연이 얽혔는지 여자 한 명을 놓고서 그 둘이 나중 연적이 되었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자1과 남자2의 우정에 내가 속했을 때 남자3이 나타나면 나를 뺀 그 둘은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남자3이 나의 우정이자 나의 옛 단짝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하 그렇구나.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이제 알겠네.
   C. 여기서 마지막 세 번째 경우의 수 발생. 남자1과 남자2의 우정에 내가 속했을 때, 내게 생소한 남자3이 그 사이에 끼어든 적이 있는가? 곧 남자1은 현재 내 단짝, 남자2는 나, 남자3은 남자1의 옛 단짝. 그런 일이 있었나? 그건... 아 없었구나! 왜 그렇지? 모르겠다! 하오나 모르긴 몰라도 내게 현재 단짝이 있었을 때 나는 녀석에게 생애의 우정 1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관이 나타나도 별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통신사에 온전히 기록이 남아 있고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은 찾으면 다 나온다. 내가 1번 전화하면 나는 10번 전화를 받았으니까. 또 그만큼 각별했고 친했으니까. 1호와 2호의 단짝 관계에 뜬금없이 3호가 나타나서 그 우정을 이간질할 수 있다는 걸 과연 단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경우에는 없었다. 나는 그런 적 없었다. 이때 우정을 사랑으로 바꿔도 말은 된다. 따라서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람에 따라 일부일처제로 똑부러지게 만인에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정이든 사랑이든 일부일처제로 똑부러지게 만인에게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일뿐. 요컨대 남자1과 남자2의 단짝 사이에서 내가 남자2였을 때 남자3의 출연은 항상 나랑 친한 우정이었다, 고로 나는 양쪽을 꿰찬 듯 했지만 남자1과 남자3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거! 따라서 결국 내가 화근인 일이 많았었다는 거 밖에는 달리 경험론을 이론으로 구체화시키지는 못한 걸로. 아니 잠깐! 뭐야 그럼 난 우정에서 일부다처제였다는 말인데? 우정에서 나는 일부다처제 내 단짝들은... 쉿! 여기서 멈춥시다. 오 제발!


   9
 
   두 여인. 우정. 마리와 영. 그녀들은 단짝 사이. 사랑은 비밀.
   「마음에 드니?」  뭐가?
   「대답이 필요할까?」  그러니까 뭐가?
   「응원한단 말은 하지 않을께.」  잘들 논다!
   「어떻게 알았니. 기대하지 않았다는 걸. 사랑을 꿈꾸느니 회전목마나 타러 가자. 그냥 다음에 갈까? 하긴 움직이기 귀찮네.」
   「왜, 그분과의 유쾌한 호시절을 회고하시게?」
   「이땐 회고가 아니라 회상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고 보면 너도 은근 허당이야? 어쩜 막 즐기는 것도 같고. 분명 알면서 모르는 척은 아닌데 말야.」
   「알아. 알고 있었다고.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그렇고, 누가 뭐래도 넌 내 친구야. 하나 더. 난 네 비밀을 알고 있어. 적지 않게. 또 하나 더. 너도 그런 거 다 알아. 허영심은 늬가 나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너도 동의하지? 뭐 에르메스의 미래가 궁금하며 페라리의 내일을 알고 싶다고? 아 유치해!」
   「읽었니? 어쩐지 최근 조용하다 했다. 어쭈? (...소곤소곤 속닥속닥...) 새롭게 최면술을 배워야 할까, 좀 더 예뻐져야 할까?」
   「지금도 충분히. 이참에 책을 읽어 보는 건 어떠니?」
   「우리에게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니?」
   「얘. 2시 방향.」
   「몇 시 방향?」
   「갔어.」
   「누가?」
   「누구긴 누구야? 미남이지!」
   「아 나 정말 얘 안되겠네.」
   「안돼? 뭐가 안돼? 우리가 너무 가벼운 얘기만 하니까 얘가 자꾸 어려지네. 정신 차려 얘. 너 자꾸 순진해지고 있단 말야. 응? 안되겠다. 생각을 자꾸 수동적으로 하게 되니까. 언니가 어려운 얘기 하나 해 줄께. 자, 들어봐. 귀납적 추리는 말이야 현상을 일반화하고, 연역적 추론은 새로운 판단을 유도해. 보통 말이야 사람들 말은 전자를 아니까 후자에 대해서 얘기를 하거든. 서로 알고 있는 전제가 비슷하니까. 그런데 넌 말이야 거꾸로, 후자를 먼저 정해놓고 전자를 만들어. 속된 말로는 때려맞춘다고 하지. 쉽게 말해 대화에서 지식의 양을 견준 다음 새로움을 찾는 게 일반적인데, 네 수다의 정형은 먼저 결론 내고 억지로 갖다 맞춘다고나 할까? 왜, 잘 모르겠어? 아직 뭐가 안 와? 느낌 없어? 오다 갔어? 응? 표정이 어째 영 거시기-하네.」
   「왜 그런 줄 아니? 아는 게 많으니까, 새로움은 드무니까, 미남이 안보이니까 그래. 늬가 남자들이랑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이 좀 이상해진 거 같은데, 교육은 늬가 받아야겠군.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한빛이라고, 너도 전에는 딱 그랬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얘가 아주 헛바람 들었네 그래. 것도 잔뜩! 네 가슴을 몽땅 채운 허영심 그 헛바람 좀 빼야겠다. 안 되겠어. 너 쇼핑 좀 해야겠다. 쇼핑이 뭐니? 늬 말마따나 정확히 후자를 먼저 정하는 거야. 후자가 뭐야? 갖고 싶다 잖니? 이미 마음은 가 있다고. 마음이 먼저 몸은 다음. 신상품이 딱 나와. 뭐, 귀납 어쩌고 연역이 뭐라고? 그래서 따질 거 따진 다음에 사랑을 하겠다고? 지금 그 말이니?」
   「너 있잖니, 지금 흥분했어. 아무 데서나 흥분하지 마, 얘. 응? 넌 지금 전제와 결론을 착각하고 있어. 내가 아니라 늬가 남자들이랑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까 이상해졌어. 것도 많이. 많이 이상해졌다고. 응? 저기 봐 봐. 10시 방향. 저 남자 뒷모습만 보이다가 (딱) 앞모습을 확인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랬을 때 마음에 들면 호감, 그렇지 않으면 외면. 논리적 귀결이 그렇거든. 알면 전제 모르면 다음, 곧 뭔가가 익숙하면 다시 선택 새로우면 결론. 그런데 늬 말은 뭐야? 마음 먼저 몸 다음이란 말 아니냐고. 왜, 내 말이 틀려? 아님 네 의견이랑 달라? 아마도 다르겠지! 어쩌면 틀릴 수도 있고. 하지만 품위란 게 뭐니, 몸과 마음이 될 수 있으면 같이 사이좋게 가는 것 아니겠니? 달리 말하자면 이심전심은 포기해야 한단 말일 수도 있지만, 넘어가고. 내가 봤을 때는 말이야, 내가 아니라, 늬가 남자들이랑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사람이 이상해졌어. 바로 늬가! 남자들 봐 봐. 남자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니? 응? 그거야, 그거라고! 남자는 늑대 여자는 과일, 그거라니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남자 눈에는 여자만 보이는 법이지. 뭐 낭만주의? 그건 미술관에 있고 책 속에나 있는 거야. 세상 이치가 그래. 카피라이터 눈에는 모든 것이 광고 문구야. 유행가 작곡가? 세상 모든 것을 음악 만드는 것 위주로 생각해. 사업가는 사업만 생각하고, 유명 요리사라고 뭐 다를 거 같니? 요리사는 요리만 하니까 일부 요리사는 누가 자기 일하는 공간에 찾아오면 그래. 전화해서 배달음식 시킨다고. 그거 드시라고. 내 요리는 구경할 생각도 말고. 또 게임 좋아하는 사람은 뭐든 게임 이론으로, 생각이 많은 주부는 딴생각하다 생선을 핸드백에 집어넣어. 바쁘다가 한숨 돌리려고 핸드백에서 핸드폰이나 지갑을 꺼낼려는데 웬 고등어 한마리가 들어있네? 고등어가 뭐 호박이야? 지가 제발로 걸어서 핸드백에 들어갔냐고! 어쨌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처럼 마음은 아예 전제로 고정되고 나중 견적을 뽑는 것 아니겠니? 그래서 내가 예전부터 자꾸 너한테 촌년 촌년 그랬고, 넌 자꾸 촌년 촌년이라는 얘길 들었던 거라고. 알겠니? 이 ㅊㅗ.... 미안! 정말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내가 맛난 거 살께. 뭐든지 말만 해. 단지 말만!」  단지, 말만? 그러니까 그게... 얘 맞어야겠네!
   「얘가 도대체 어떻게 배웠지? 늬 말발이 이렇게 좋지 않았거든. 어디서 새로운 촌닭이라도 만난 거니? 그런 거야? 응? 말 해. 숨기지 말고. 응? 거기 어디니? 나도 하나 건지자. 지금 품위 따지게 생겼니? 그리고 말이야. 뭐 촌년? 자꾸 촌년 촌년 할래? 누가 누구 보고 촌년이래? 이거 왜 이래? 얘 안되겠네. 혼 좀 나고 싶니? 얘가 은근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보아 하니 아주 탁월해. 응? 그치만 마음 놓친 마. 사랑이 변심하는 것처럼 우정도 변덕이 특기니까. 조심하라구. 너가 언제 나한테서 넘버2로 밀려날지 모르니까. 알겠니?」
   「뭐 넘버2? 그럼 지금 난 늬 친구 중에 넘버1이란 말이네? 등번호 2번은 누군데? 됐어. 아 됐고, 듣고 싶지 않아. 아니. 이미 알고 있어. (딱)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응? 알겠니. 바로 그래서 늬가 안되는 거라고. 넌 여자가 말이야,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응? 나한테 너는 벌써 옛날부터 오르락내리락했단 말이야. 알긴 아니? 얘가 완전 허당 중의 상허당이구만 그래. 아 나 정말 얘 걱정되네. 오늘은 다시 널 넘버1으로 올려주긴 하는데, 그러긴 하겠지만 긴장 풀지 말어. 딱 긴장해. 응? 언제 밀려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응?」
   「뭐, 뭐? 뭐가 어쩌고 어째?」 
   그녀들은 잠시 휴지기를 가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얘. 나 어제 어떤 꿈 꾸었는지 아니? 역시나 학교 다니는 꿈이었어. 난 대체 꿈에서 언제나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까? 넌 학교 다니는 꿈 안 꾸니?」
   「왜 아니겠니. 나도 어제 꿈을 꿨고, 역시나 학교에 갔네 글쎄.」
   「어머 그래? 무슨 꿈인데? 응? 말해 봐. 어서. 말해 줘.」
   「너 먼저.」
   「꿈은 두 가지가 있어. 기억나는 꿈과 기억나지 않는 꿈. 기억났으면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을까? 새삼스럽게 왜 그러니. 우린 내외할 사이도 안 그런 척 내숭 떨 관계도 아니잖니? 응? 안 그래?」
   「그래 얘기해 줄께. 그런데 거 어째 추궁 받는 게 기분이 좀 이상하다? 늬가 꼭 수사관... 막 심문관처럼 보이는 거 있지. 얘가 참 이상한 화법을 배운 것 같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어서 말해 봐. 얘가 말할 거면서 자꾸 뜸을 들여. 가만 보면 은근 밀당이 생활화되어 있어. 대체 너 꼬리가 몇 개니? 어?」
   「어딜 만져? 아 됐고, 나도 실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내용은 이래. 수업 시간이야. 무슨 과목인지는 모르겠어. 책이 없어서 책을 짝궁이랑 같이 보고 있었는데, 차례가 점점 다가와. 서서 읽기만 하면 돼. 전혀 어렵지 않아. 단지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읽어야 할 뿐. 물론 난 딴일을 하고 있겠지. 264페이지던가 274페이지던가 대충 알았는데, 딱 내 순서가 닥치니 어디를 읽어야 하는지 잊어먹어. 그러다 막 친구한테 물어보고. 그러던 중 선생님이 그러시지. 읽기는 그만 하자고. 그러면서 폼 잡고 명대사를 읊으시네. 자세한 대사는 잊어먹었으니까 대충 만들어서 말하자면 이래. 아 그런데 꿈속에서 들은 그 말이 완전 명대사였는데. 아 어떡해, 기억나지 않아. 정말 멋졌는데 말이야.」
   「너 또 말할 듯 말할 듯 말하지 않으면 혼낸다. 어? 이번엔 진짜 때린다고! 한번 맞아 볼래?」
   「말할께 말할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 물론 진짜 꿈속에서 들은 명대사와 비교는 안되지만 그냥 대충 지어내자면 이런 거였어. 꿈속에서 들은 그 말이 완전 멋졌는데... 아 선생님은 이랬지.
   1.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를 읽어보세요. 아니다, 난 그림자처럼 조용히 배우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 라는 학생은 '왜 적극적이어야 하는가?'를 읽어보시구요.
   2.고전과 촌스러움의 차이에 대해서 논하시오.
   3.여러분.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글과 말로 동시에 표현해 보았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나는 그건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게 뭐 어렵겠어요? 그러나 막상 난처한 상황이란 게 있지 왜 없겠습니까. 그럴 수 없거나 그러기 힘든 상황은 무엇이 있을까, 에 대해서 토의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한 학생이 말하지. 선생님 그거 한꺼번에 다 하자구요? 그러다 종이 울려. 야 신난다! 또 그러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니 같은 반 친구가 창문 밖으로 뛰네. 뭐야 해서 얼른 창밖을 쳐다보니 유유히, 부드럽게, 사뿐히 착지해서 또 걸어가. 딱 위에서 밑으로 내려올 때만 슬로우모션이었어. 막 그런 꿈이었어. 무슨 꿈이지? 복권 살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냐고.」
   「사지 마. 개꿈이야. 난 또 뭐라고!」
   마리와 영은 아직도 다정한 우정을 키워나가는 소녀와도 같았다. 아, 근래 얼마 전에 그들은 함께 나이트클럽에 갔다 온 적이 있다.


   10
 
   나는 여성잡지1에 연애론을 기고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그 어떤 뭔가를 직감과 직관으로 대번에 눈치챌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사전에 오판을 줄이고 싶다면, 친해지고 사랑하기 전에 미리 알고 싶다면, 만약 내가 여자라면 지성, 환경, 인생, 취향, 습관, 매력, 풍모, 재능, 인성, 형편, 신분, 말수, 평판, 조류 구분, 동물 유형 외에 판단 근거─객관적 단서─미묘한 자료─유용한 정보는 명백하게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언니는 논리와 이유와 권위와 광고와 잔소리와 해박한 지식과 현란한 언변에 약하다. 언니는 그래도 알기는 아는데, 잘 알지를 못한다. 언니는 깊이 들어가면 곤혹스러워 한다. 짜증낸다. 어차피 언니도 잔지식파다. 그래서 언니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운동이든 건전한 취미든 뭐 하나는 꼭 하는 남자를 만나라고. 언니! 언니! 언니! 왜! 왜! 왜! 라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물어보면 그럼 언니는 뭐라 할까? 일단 도망간다. 대체로 말을 돌린다. 내내 대답을 못한다. 얼굴색이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변한다. 괜히 빌려준 뭐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정답만 빼고 아무말이나 다 얘기한다. 정신 사납다. 언니 말을 새겨듣다간, 이러다가 멍청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정말 그건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소녀는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느낀다. 맞다. 동생은 언니를 포기한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한계니까. 강아지가 다정하면 단순히 간식을 원하기 때문에 꼬리를 흔드는지 아닌지 잘 모른다. 언니가 무슨 동물학 박사도 아니고 그걸 대체 어떻게 알겠나. 막내만 그런 게 아니라 언니도 말하면 다 믿는다. 읽어도 다 읽고 후회한다. 매번 속는다. 후회는 끝이 없다. 투정은 생활일 뿐이다. 심지어 먹음직스런 케익을 자기가 먹고 자기가 화낸다. 다이어트 중인데 왜 말리지 않았냐고. 싼 게 비지떡이다. 먹으면 탈난다. 합리주의란 그런 거다. 으하하하하 음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그렇지만 행복이 뭐 별건가. 흥행작이나 보고, 베스트셀러나 읽고, 끼리끼리 만나서 놀고 마시고 먹고 떠들고 노래 부르며 춤 추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지. 그러니까 마음대로, 얼마든지, 뭐? 누구라고?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일반적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못 부르는 것보다는 유리하다. 여자를 꼬시는 데 있어서는. 그런데 그건 시작의 관점에 한해서만 그런다. 엄밀히 비공개 연애에 국한되는 특징이다. 일단은! 단순히 노래만 잘 부르면 끝이냐, 그건 아니거든. 그러면 얼굴 없는 가수가 최고게? 그럴 리는 없다. 나머지가 그럭저럭 마음에 들기 때문에 노래를 잘 부르는 그분의 재주가 너무 멋져 보였네 뭐라 하는 거지, 나머지가 그럭저럭 축에도 못든다? 호호호 호호호호호! 첫인상은 첫인상이고 본론부터는 고급이다. 고급은 내면을 알고 무의식을 읽어야 하니까 어렵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하고, 어떤 새로움을 좋아하며, 무슨 익숙함을 애정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건 쉽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속단하기는 꽤 까다롭다. 일찍 예측하기도 어렵다. 때문에 그건 판단 근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가능하다면 친구의 여동생이랄지, 될 수 있으면 직장보다는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게 좋다. 허나 장점이 하나 있으면 단점도 하나 따라가니까 그건 각자 생각하고. 그러므로 몇몇 목록에서 최소 몇은 있어야 첫인상과 선입견은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꾹꾹 참다가 드물게 표독스런 대꾸만 하던가 목구멍에 턱 하며 걸리는 말 한마디, 상황 몰아가고 기분이 몰리며 분위기 조성하면 본심은 드러날 수 밖에 없음, 난 여태 어떻게 살았는데 도대체 왜 나는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냐, 그게 우리 탓은 아닌데 뭐라 할말을 잃어버리는 반응만은 피해야 하니까, 그 말만은 꾹 참는 그런 품위 넘치는 사람인가 아닌가, 판단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인터넷 기록, 소셜 네트워크 활동, 굴곡진 인생의 사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변명을 책이든 뭐든 그 뭔가로 입증하기, 블로그, 일기, 내면이 외적 대상으로 투영되는 그 무언가! 강박 관념, 열등감, 억압, 질투, 허세, 굴욕, 울분, 체념, 회피등 음성적인 감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게 좋다.
   어쩜 거룩할지도 모를 땀방울로 일군 기록,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예술, 내 인생이 오롯이 담긴 일기장, 살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그 무엇,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다 못해 재산 목록 1호 2호 3호 등등. 만약 그게 없다면 첫째, 그 사람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기는 힘들다. 둘째, 본인한테 그게 없어야 유리하다. 하기도 싫다. 어차피 괜찮은 호박이 내게 굴러올 리는 없거든. 여자는 보면 알거든. 여자는 웃으면 끝이거든. 여자는 대답만 잘하고 맞장구치며 얘기를 잘 들어주며 자상하고, 섬세하며, 다정하면 거의 다 좋아하거든. 무엇보다 그런 거 다 관심 없고, 남자는 중간만 가면 된다, 중간이라도 가는 남자에게 꽃 받고 싶다, 라는 여자들도 적지 않거든. 보면 대번에 알거든. 여자를 다루는 기술, 이란 제목의 책은 없을랑가 모르겄다. 우선 괜찮은 대상을 물색하고, 다음으로 카우보이처럼 끈을 묶는 시늉을 해서 줄을 돌리고 돌려서 던져, 던진 다음 낚였다 치고 슥슥 끌어당겨, 마지막으로 줄 달린 치즈를 제시하면서 살살 끌어당기면서 내일로 내 마음으로 슬슬 유인하기. 우리는 그거 일도 아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다. 물론 농담이다. 아니 아예 농담은 아니다.
   자, 여기서 다시 여자의 마음을 예시로 들어보자. 아무리 뭘 좀 모르는 남자들이 적지 않다지만 그분들도 다 내공이 있을 텐데 대관절 왜 사랑이 이루어지기 힘든지, 그 끙끙대는 추론을 거뜬히 정리해 보자.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사안도 어쩌다 너무 쉽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 쉬운 예로 역발상처럼. 만일 나라면, 지금이라면, 이라는 상상처럼. 왜 그녀가 그렇게 느꼈는지를 남자의 마음으로 역추적을 해 보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간략히 말해서, 한 여자가 남자를 100명 만나 봤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는 남자가 한 명도 없더라, 그래서 그녀는 남자와 진지한 연애 찐한 사랑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더라, 말이 통하는 남자와 태어나서 단 1번도 고혹적인 마음의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다더라? 정말 그렇다더라? 진짜? 참으로?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을 안에서 찾아야 할까, 밖에서 구하는 게 현명한 걸까? 그분의 입장은 그렇고, 옳고, 타당하며, 정당하고, 아름답지만, 그런데, 상대방 말도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객관적인 거 아닐까? 뭔 남자가 바본가, 그런가? 그럴 리는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만약 남자가 바보라면 그럼 여자는, 쉿! 이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객관적으로 사실에 접근하여 생각해 봐야 옳다. 그렇게 따지는 게 온당하다. 아니 그렇소? 당연히 그래야 공정하며 매우 적확하다. 그래야 듬직하고 믿음직스럽다. 아니면 가짜다. 아니면 립서비스다. 아니면 허세와 허영과 허당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 말이 안 통했는지를! 왜 화려함을 자랑하는 청초한 들장미에게 벌꿀도 나비도 나방마저 기웃거리지 않았는지를! 그분들이 몰라서? 꽃이 유명하지 않아서? 아니면 꽃밭이 인기가 없이 그만그만해서? 결국 땅 기운이 좋지 않다? 행운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니까 노력이 부족했거나 운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멈추자. 글은 몰라도 말은 그래서는 안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건 재수없다. 생애 단 한 번일지도 모를 숙녀의 로망을 깨트리는 게 과연 좋은 일이겠나. 여자의 마음을 뭘로 보고 말이야. 그건 결코 멋지지도 자연스럽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럼. 그렇지. 왜 안 그렇겠나! (이미 말 다 해 놓고 뭐-라-고?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기야 뭐야? 벌~써 쥐락펴락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쉿!) 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직관적으로 남자 유형을 판단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가 대체 왜 갑자기 여자의 마음으로 바꼈지? 또 동물농장, 조류대백과? 허허 나 원 참!
   그러니까 허접한 촌닭인가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촌닭인가, 그냥 허당인가 은근 허당인가,를 본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본론부터는 글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들끼리 얘기합시다.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완전 홀딱 반할 만한 남자를 만나기 전에, 하도 귀찮게 학교 다닐 때 직장에 집에 내내 꽃 들고 기다리며 참으로 집요하게 쫓아다녀서 야수파와 딱 한 번 사겨서 1년을 만났다 헤어졌는데, 지갑 속에 사진을 고이 간직하며 바보처럼 1년을 사겼는데, 언제 내 생애 최초로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완전 홀딱 반할 만한 남자를 만날 것인가? 그건 숙녀 인생에 오직 1번일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따져야 좋을 수도 있다. 3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40년 아니 반 세기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너끈히 기다리겠다는 여심도 있을 것이다. 없지는 않다. 모르긴 몰라도, 오히려, 아마 많을 걸! 보장이 확실하다면, 설혹 불확실할지라도 말이다. 미래를 미리 알면 재미가 없거든. 남자들이 괜히 트럼프 놀이를 하면서 판돈을 걸고, 경마의 배당률이 과학적이며, 대물을 잡으러 바다로 떠나 귀여운 어복에 윙크를 하고 시샘하며, 치고 달리고 때리고 넣고 조종하며 몰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님. 그리고 이 세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하인, 돌쇠, 재간둥이, 난봉꾼, 무서운 카리스마, 말상, 쥐상, 개상, 늑대등 가리지 않고 자기는 무조건 꽃 들고 기다리고 따라다니는 남자라면 전부 다 OK라는 여자. 생애 단 한 번도 남자로부터 고백과 구애와 배짱과 친절을 받아보지 못했을지라도 어떤 바람둥이의 서슴없는 대쉬는 단칼에 거절했던 여자. 30살까지 연애를 딱 3번 해 봤는데 참으로 묘한 우연인지 뭔지 알고 봤더니 글쎄 그 셋이 모두 직업 뭐 그런 어떤 그렇고 그런 남자였다더라 라는 사연을 간직하고서 서른을 맞이한 여자. 쉽게 말해 언제 어디서든 손꼽히는 빼어난 미모 때문에 적잖이 고생하며 인생 내내 부러움을 받고 누구에게나 찬탄을 자아내게 했던 그녀일지라도, 그에 걸맞는 애정과 사랑과 배필이라는 운명은 너무도 멀리 있었기에, 직장에 집에 꽃 들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야수 같은 남자의 구애에 딱 넘어가 고시 공부하는 그분과 일주일에 딱 한번 백화점 구경하고 영화 몇 편 본 게 전부였던 연애 밖에 해 보지 못했던 여자. 그런 그녀가 영원한 내 사랑 낭군님을 기다리면서 친구들이랑 이따금 점을 보러 다녔는데, 점쟁이들이 뭔 바보도 아니고 그분들이 하나 같이 일관 되게 눈치 없고 꽉 막힌 분들이 절대 아닌데, 웬만하면 싫은 얘기도 좋은 얘기를 위해서 하시는데, 그런데 본인 직업 사상 최악의 사주를 최초로 대면했기 때문인지 어쩐지 만나는 점쟁이들마다 업을 걸고 말씀하시는 악담의 저주, 저주의 해몽만 수없이 들어야만 했던 여자. (생년월일시를 바탕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술은 방대한 과학적 통계일 텐데 도대체 어떤 사주이길래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전문가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수도 있음. 대관절 어떤 운명을 타고났길래... 알고 나면 경악을 금치 못할지도!) 바로 그런 여자는 유부남을 비롯해서 오직 짝사랑만 도가 튼 여자. 심지어 하도 귀찮게 학교 다닐 때 직장에 집에 내내 꽃 들고 기다리며 쫓아다녀서 야수파와 딱 한 번 사겨서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여인. 심지어 그 엄마는 아가씨 때 너무 일찍 험상궂은 하이에나한테 발목잡힌 게 억울하기도 하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하여, 젊어서 애교는 성숙한 교태로 바꼈기에, 바깥에서 외간 남자를 만날 때 딸이나 아들의 손을 꼬옥 잡고 나간 여인까지. 남자는 차라리 쉽고 간단하다. 0이냐 1이냐 1.5냐 1이후에 소수점이 놀랍도록 섬세하게 나누어지는 우정이 존재할지라도 내가 0과 1이란 진실은 변함없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시시각각 변한다. 어렵다. 복잡하다. 까다롭다. 변덕도 심하다. 심지어 변심은 다 오빠 탓이다. 그게 뭐야! 여자의 마음이란! 여자의 <싫다>는 남자가 이해를 잘해야 한다. 해석만 잘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책임과 불이익은 여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여자가 싫다 하면 보기가 많다. 보기가 많다고! 1번 영원히─한없이─끝없이 싫다. 2번 완전 짜증난다 치가 떨린다. 3번 진짜 싫다 피하고 싶다. 4번 정중히 거절한다 우리는 문명인이니까. 5번 아직 애매한데 좋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또는) 최소한 당신은 아니다 그러니 싫다. 6번 좋은데 싫다 그러나 과정은 생략하지 말자. 7번 일단 싫다 뭔가가 부족하니까 조금만 보완하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지 싫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 따라서 대답은 노 속마음은 유보. 8번 캬~ 8번! 으아 워워워 와우! 8번이 가관이다 뭘 모르는 남자 입장에서 가관이다. 여자는 그런다. 다 그런 게 아니라 몇몇 중 하나는 그런다. 뺐을 생각 아니면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오래 대외적으로 가질 생각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나 하나만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사랑하지 않겠다면, 공식적으로 책임질 각오 그런 거 없으면 멈추라고! 하인, 조수, 머슴, 보디가드, 낭군님등 꼬부랑 할아버지 아니 다음 세상에서까지 내 전속 1인 다역 노예가 되지 않겠다면 포기하라, 깨끗이 포기하라 그 말이다. 만일 나의 사랑이자 나의 노예가 되겠다면 우리 함께 축배를 들고 팡파레를 울리자 그것이다. 여자가 원래 어렵다. 답이 없다. 질문조차 문제시된다. 때문에 남자도 알아야 한다. 고로 여자끼리 더, 더 어렵다는 것을! 바로 그래서 그녀들은 만나면 할 얘기가 많은 것이다. 뭐,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다시 만나서 하자? 다시 만나서 하기는 뭘 다시 만나서 해! 5시간 6시간 얘기해 놓고 뭔 진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야? 뭐야 그게! 그게 대체 뭐냐고! 이런, 젠장!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자가 아무리 1.5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남자의 0과 1 그 이진법에는 못 당한다. 여간 해서는 어렵다. 어째서? 왜냐하면,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 법이거든. 하늘을 봐야 별을 보지, 라고 한탄할지라도 맞바람이 불면 애절했던 애수와 사연 깊은 사랑과 한결 같은 흠모는 더 이상 문학적일 수도, 낭만적일 수도, 극적일 수도 없게 되버리거든. 그래서 여성잡지2를 들여다보는 수 밖에. 그 옛날 그 수많은 배려들 그건 혹시 <잔말 말고 따라와>였나 아니면 몸에 익은 의전이었나. 설마 <잔말 말고 따라와>를 위한 의전이었나, 아님 그 반대였나. 초장에 잡지 않은 게 알고 보니, 이제 보니 결국 초장에 잡은 건가? 초장에 잡아라 라는 경구는 비공인 속담이니까, 하수는 초장에 잡고 고수는 초장에 잡히나? 아아 머리 아퍼. 헷갈리고 또 헷갈린다.
   참고로 꽃을 든 남자에 대해서 한 말씀. 꽃 들고 쫓아다니는 부류는 대개 보면 야수파임. 그게 아니면 가능성이 치사하니까. (완곡어법이 두드러지지 못함은 다 결론을 위해서. 특히 거친 형님들께 양해를 구함. 꾸뻑! 왜냐면 친동생도 있고, 토끼 같은 딸도 있으며, 제자도 동료도 선배도 국민-여동생도 있을 테니까요. 내 욕심을 채웠든 채우지 못했든 나는 늑대고 남은 늑대이면 안됨? 반대로 나는 백조 타인은 하이에나? 어패가 있죠 네 그렇죠) 어디까지나 촌닭 본인 입장에서 보자면 어차피 예절 차리면 촌년 만날 거 뻔한데 밑져야 본전이거든. 잃을 게 없는데 얼마나 좋아. 져도 돼 지는 게 당연해. 부담이 없음. 허나 시작은 어려움. 그럼 그 다음은? 시작만 어려웠음. 뭐든 처음이, 처음만 힘들다는 건 어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시 그 다음은? 천성도 있겠다 흥미도 있고 소폭 이득도 돌아온다면 이제 남은 일은 그거 밖에 없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보이는 감이란 감은 다 찔러보기! 타석주의가 그렇다. 토너먼트도 그렇다. 1부리그 A팀 대 3부리그 b팀의 대결. A팀은 지면 (대)망신 이기면 뉴스에 나오기도 민망. 그러나 b는? 지면 당연, 게다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강팀 없네? 어머나! 더군다나 이기면 특종, 심지어 1부리그 A팀과 3부리그 b팀의 합병? 대~박! 이거다. 이거라고. 1년을 실컷 즐길 수 있고 10년 동안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아도 된다. 시작 단계에서 3부리그 b팀은 미래의 운명을 아마도 예감했을 것이다. 제발로 굴러다니는 호박은 언제 어디서나 다 날 피해갈 것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3부리그 b팀의 난동은 어쩜 정말 숙명에 불과했을지도 모름. 그런데 만약 3부리그 b팀이 야수가 아니라 허당이라면, 멋지다면? 여기까지! 멀리 볼 필요없이 그런 습관을 타고났다거나 여자에 따라 정신 못차리는 친구들이 꼭 있거든요. 지금 당장 내 주위만 둘러봐도 누구, 누구, 누구 헤헤헤! 환경에 따라, 연애나 남녀간 우정 경험 제로 같은 개인 사정에 따라, 입장과 시점에 따라 기준선은 왔다 갔다 애매한 면이 있다. ......─(범죄에 해당하는)스토킹─혐오─무례─배짱─어딜 넘봐─결례─실례─군침─상식─예의까지. 남자가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로 나뉘듯이, 여자는 둘로 나뉜다. 완벽하게, 여자는 둘로 나뉜다. 일단 1과 2 모두 꽃 들고 쫓아다니는 야수파에게 넘어갔다고 가정한 채로 설명하겠음.

  1. 적극적인 구애 즉 꽃 들고 쫓아다님을 태생적으로 좋아하며 원하는 여자 (의전이 먼저)
  2. 그렇지 않은 여자 (사람이 먼저)

   여기서 1과 2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함. 2번도 꽃 들고 기다리면 좋지 왜 안좋겠나요, 자고로 여자 치고 꽃 들고 기다리며 쫓아다니는 반짝반짝─굽실굽실─딸랑딸랑을 싫어하는 사람 없다. 그건 유명인도 마찬가지. 그러다 넘어가면 야수나 오락산업의 승리! 1번은 1번 방식이 아니면 절대 안됨. 그 허영심을 누가 누가 채워줄까? 꽃은 시들 수 밖에 없고, 더 예쁘고 더 어리고 더 귀엽고 더 웃기며 더 착하며, 더 다른 면모가 좋은 꽃은 많고도 많은 걸로도 모자라 꽃은 시들 테지만 황금은 증식될 텐데. 남은 왕자님은 야수 밖에 없음. (큐피트 황태자를 만나기를 기원하나 일단은). 허나 2번은 쉽게 말해서 순진하고 착함. 1번이 노련하고 순수하지 않고 못됐다는 뜻이 아님. 대체로 1번은 야수를 만나도 나중 큰 후회는 하지 않음. 왜냐하면 1번은 대상이 아닌 방법을 더 선호하기 때문.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꿈은 실현됐고 욕망은 충족됐으며 허영심은 채워졌으니까. 1번은 남자가 아무리 최고라 할지라도 방법이 틀리면 절대 노! 물론 방법도 남자도 틀리면 싫음, 둘 다 좋으면 금상첨화. <1번은 나중 크게 후회하지 않음. 단, 작게 후회함> 왜냐하면 진행은 피동적이지만 방식은 간접적으로 보면 능동적이니까. 따라서 1번은 문제 없음. 설령 나중 후회해도 본인 책임이지만 그래도 후회가 작음! 그러나 문제는 2번. 즉 꽃 들고 쫓아다니면 아무나 OK라는 구미가 아닌 유형. 이건 로맨스와 멜로드라마를 좋아하고 선망과 동경심이 풍부한 80퍼센트로써 어디까지나 방법이랄지 과정이 아닌 대상 즉 남자를 먼저 따짐. 여자가 아무리 하늘이 정해 주신 사랑이라는 천생연분 같은 1.5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남자의 0과 1 그 이진법에는 못 당한다. 여간 해서는 어렵다. 저 실례와 결례의 왼편에 위치한 배짱과 '어딜 넘봐' 그 너머엔 또 다른 몇몇이 있거든요. 흐흐흐흐흐! 영리한 고양이가 밤눈 어둡다고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 2번은 열렬히 따라다니는 남자가 싫어도 끈질기고, 집요하고, 지치고, 세뇌 당하며, 마음 약해지고, 소문 나서 마지못해 넘어간 경우. 극과 극도 드물지 않음. 2번은 그런 구애의 상대가 싫으면 넘어간 적이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일절 없을 0, 딱 한번 넘어갔다가 헤어져서 예방 접종이 된 1-1, 그 딱 한번이 세 자녀로 이어진 1-2, 그 이상으로 나뉨. 아무튼, 그러므로 2번 스타일의 여자가 나중 사랑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 좋은 거고, 그게 아니라 만약 사랑에 실망한다면 대개 체념, 달관, 어떤 바람, 또는 이별. 다시 말해 <2번은 후회가 큼!> 1번과 2번의 후회 차이는 많이 비교됨. 그러니까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든가, 싫어도 넘어간 책임은 본인에게도 있고, 아니 본인 책임이 더 크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는 경구는 꽤 애매한 법이고, 오뚜기처럼 일어나고, 사랑은 또 온다는 것을 믿기. 집신도 짝이 있다 하지 않나요. 그러나, 심지어 꽃 들고 기다리며 쫓아다니는 것 말고도 방법은 많고도 많음. 단순 무식하게 기다리고 쫓아다니는 것 말고도 무지 많음. 으하하하하 음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게다가 여자도 비슷하신 분은 많고도 많음. 그녀에게 꽃 한송이를... 어쩌다 부정적인 꽃 선물이 주제가 되어버렸지만 사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듯이 알아야만 하는 내용이니까 일단 듣고나 보자.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꽃 들고 기다리며 쫓아다니는 가상한 모습이 멋지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른 긍정적인 사연이 부정적인 사연을 여간해서는 상회하지 않는다. 한 여자가 그런 남자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꽃이란 진실이 확연히, 극적으로 증명됐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쭐한다. 원래 싫었던 내 이상의 기준과 나중의 무언가는 모른 체 당장 우쭐한 기분 딱 하나만 남게 된다. 그 어떤 야수라도 (일부) 여자는 정신 못차린다. 비로소 나는 여자가 됐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웃고 얘기하고 그렇게 소문난다. 그래서 챙피하고 싫었던 남자였는데 또 몇은 넘어간다. 여자는 그 순간 연예인이 되어 구름 위를 걷는다. 구름 위를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클라우드 나인의 기분을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절대로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때문에 그에 대한 훈수는 추정하는 입장보다는 어떤 최고를 찍었던 사람이, 남자들 전부 시시해 보여서 찐한 연애 멋진 사랑 못해 본 채 중년 이후에 접어든 우아한 여자가 하는 게 더 실질적이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직 헤아림과 추측과 상상만, 또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비유가 가능할 뿐. 그런데 그렇게 결혼해서 애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일궈 행복하게 잘 살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중간에 끝내야 할 때! 남자가 매달리고─매달리고─매달려서 시작한 연애를 여자가 그만 하자 하면 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든 어쩌든 그런 남자는 시작이 그러했듯이 끝에 가서도 똑같다. 또 기다리고 또 따라다니며 또 매달린다. 헤어지지 말자고! 나는 싫다고!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냐고! 널 어떻게 보내냐고! 비뚤어진 사랑은 애인의 몸과 마음을 고이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나 모를 수 없는 본심일 뿐.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굳이 당사자가 되어야 할 필욘 없다. 이때 경우의 수가 몇 가지 있다. 물론 객관식 보기에는 드물게 비극도 있다. 사랑은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 사랑은 준비없이 가능할지 몰라도 이별은 또 다른 문제다. 오늘의 운수는 재미를, 잘못된 우정은 변심을, 과도한 허세는 믿거나 말거나, 그건 괜찮다. 충분히 괜찮다. 하지만 비뚤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그대) 주위만 둘러봐도 그런 사람 꼭 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그런 성정을 타고났으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내 습성을 후천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 강제로 시작하고 억지로 지속되며 사랑의 뒷모습마저 한숨을 부르는 애정,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악연이자 불행이고 죄악이다. 범죄도 있다. 취미일 여지도 없지 않다. 몇몇 행복한 예시마저 불한당 같은 야수의 저돌성 때문에 쉬쉬하게 만든다. 남자들은 친구끼리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겠지만 여자는 다르다. 얼핏 듣고 풍문으로 아는 실제 사례가 가까이, 또 멀리 있다는 점. 가령 1달 쫓아다니고, 그래서 1년 사귀고, 한쪽에서 이별하자 하니까 또 매달리며 또 따라다니고 또 기다리는 남자. 롱테일은 반듯이 있다. 주위에서는 꽃과 꽃병의 어색한 만남을 보며 대체 뭐라 생각했을까? 어떻게 바라봤을까! 미래는 내다봤을까? 어쩌면! 그녀는 창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았을까? 처음에만! 이건 아닌데 싫다고 했는데 이건 아니야, 그렇지만 결과는 마수에 넘어감. 시작과 과정이 어쨌든 결과적으로 꽃은 꺾이고 과실은 마수의 손아귀에. 여자에게만 남자가 1인 다역이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비로소 화가가 되고, 친구들 사이에선 최고가 되며, 그녀는 정물화에 등장하는 과일도 누드모델도 나의 천사도 되는 것이다. 잡힐 때는 인어, 잡혀서는 물고기, 전적으로 보아서는 어복. 새하얀 도화지에는 숙녀가 바라지 않았던 조악한 모험과 삼류 멜로와 저급한 남성성이 그려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여전히 순결할 수도 불순한 사랑을 체험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주위의 걱정과 아직도 남자친구 없냐는 핀잔과 집안의 우려에도 끝까지 낭군님을 기다려왔거늘, 천하의 절세미녀일지라도 꽃으로 존중 받고 사랑 받아야 할 여자임이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숙녀는 야수에게 넘어간다. 오랜 외로움을 잘 견디던 내 마음은 약해졌고, 꽃 피는 봄날 봄바람이 불어 뭔가에 홀린 듯 기분도 이상해졌으며, 지나고 나면 도저히 이해를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 그녀는 아직 순진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자는 수학처럼 완벽하게 둘로 나뉜다. 완벽하게! 야수라면 죽어도 싫은 여자와 아닌 여자로. 야수라면 이 세상 이 우주를 다 줘도 싫다는 여자와 아닌 여자로. 물론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아니한, 몰래한 사랑에서 공식적이지 않은 비공개 몰래한 사랑의 어떤 교감을 잠깐 궁금해 하는, 수학적이지 않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우리에게 넘어올 수 밖에 없다. 으흐흐흐흐! 그런데 당연하게도 여자의 이분법은 또 하나 있다. 없을 수가 없겠지. 바로 야수처럼! 그것은, 젊음에 기인하는 꽃다움과 어디 가나 누구에게나 손꼽히는 인상으로. 아시다시피 전자의 미래는 후자도 그렇겠지만 엄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뭐 부티 나는 엄마 친구?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안되는 거라고! (특정인만, 우리끼리 얘기였음). 그렇다면 야수의 미래는? 상상이 뭐 어렵겠나 그 흔한 동네 아저씨지! 누구도 늙었어, 도 누구나 되니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내일에 대한 수읽기에서부터 벌써 여자는 남자에게 한 수 지고 출발하는 지점이 여기다. 거울아 거울아, 그처럼 나르키소스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동시에 띄고 있다. 왜냐하면 허세와 허영심을 양쪽에 꿰찼으니까 말이다. 오락산업이 자본의 회전을 일구듯 경제는 지구를 돌리듯, 마술을 부추기는 건 바로 거울과 화장술과 조명 그리고 성미와 기호, 청각, 시각, 공감각, 지각인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정작 사랑하는 것은 순수한 여심과 남아의 푸른 기상이 아니라 늠름한 말 여섯 필이 이끄는 황금빛 호박마차가 아니겠는가. 무턱대고 부일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단, 어른이라면! 무난한 신붓감, 천상의 배필, 새하얀 면사포, 사랑의 맹세와 더불어 야수와는, 애교만으로 승부하는 아가씨와는 도저히 한 침대에서 희망을 함께 한다는, 만인에게 떳떳히 알릴 수 있는 내일의 사랑이라는 자유로운 공상이 결코 허락되지 않는 분들은 어쩜 적지 않다. 때문에 바로 그래서 사랑은 재밌을 수도, 행복은 난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일평생 단 한 번만 사랑하면 그만이지 남녀 공히 평균(적어도?) 100명을 사랑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다시 이어가자면, 너무 아니었지만 주변의 눈총은 무시한 채 일단 만나 본다 만나 봐야지 괜찮은 남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면서 천연기념물은 스스로 다독이며 합리화 한다. 다시 2차로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의례가 남았다. 기다리며 쫓아다니기만 1등이었지 다른 면모도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그녀는 걱정이 앞선다. 함께 만날 수도 없다. 친구들에게 우리 오빠라며 지갑 속의 내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준다. 친구들은 겉으로 그런다. 와 믿음직스럽다 괜찮네 멋지다 어쩐다. 친구들은 속으로 그런다. 어떻게... 만나도 만나도... 어떻게... 붙어도 붙어도... 그녀들은 드라마 속 유부녀처럼 말한다. 왜냐하면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니까. 물론 속으로만. 그때 똑부러진 친구가 나선다. 와, 나 이 오빠 알아. 우리, 채팅해서 만났어. 여자친구 없다던데? 효과음...! 숙녀는 뚜껑이 열린다. 수증기가 귀에서 머리에서 분출한다. 막 분출한다. 레이저가 나가고 화염방사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대신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싫었는데 아니었는데 정말 아니었는데. 우리 오빠는 다 잡은 초특급 대어를 놓치게 된다. 완전 꽝된 거지! 어떤 파국에 따른 남녀의 이별 특히 미녀와 야수의 이별 다음에도 나뉠 수 밖에 없다. 누가 먼저 차든 어쩌든 그래도 우리 오빠인 여자(다른 여자 품에 안겨도 함께 살아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여자, 결국 속 시원한 결과에 묵묵히 체념하기로. 다른 사랑을 기다리기로. 그렇지만 아니 어떻게...! 사랑은 어쩌다 어두운 장르일 수도 있음을, 내가 그 주인공일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시작이 아름답지 못한 사랑은 끝이 단정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 심지어 뒷모습의 나쁜 사례들 가운데는 심심치 않게 들리는 소송전도 있다. 내가 이별을 선언한다면 몰라도 너는 이별을 선언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받은 거 다 내 놔라, 아니면 계속 사랑하자! 솔직한 속마음을 꼭 말로 듣고 눈으로 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꽃 들고 기다리고 따라다니며 매달리는 의전식 사랑의 정점을 남자가 먼저 불현듯 찍는 경우도 있다. 따라다녀서 의전식 기대감을 충족시켜줘서 시작한 연애, 그런데 사겨 보니 완전 허영심 덩어리네 아 얘는 도저히 안되겠구나, 라면서 그녀를 내 걸로 만들어 놓고 복수를 준비하여 완비되면 남자가 여자를 차고, 곧바로 다른 여자와 결혼, 그러면 우리의 영심이는 완전 충격 먹고 괜찮은 남자 골라서 소개팅에 나가, 딱 나가서 그런다. "들었어요?" 뭐, 들었어요? 듣긴 뭘 들어! 일생이 연예인병이군. 무조건 꽃 들고 기다리고 따라다니며 매달리는 의전식 사랑. 그 가운데는 사랑이라 부르기 힘든 사례가, 도저히 축복할 수 없는 슬픈 사랑이 당연히 있다. 어쩌면 많다! 그보다는 차라리 흑심이 오히려 풋사랑이 훨씬 낫다. 월등히 낫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은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흥가는 그래서 언제나 분주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어렵고, 끝이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랑인가 애초에 따져야 하며, 그 남자의 숨겨진 본성과 구미와 뒷모습까지 아는 게 좋다. 모르는 것보다는 말이다. 나중에 가서 그럴 줄 몰랐다? 그걸 누가 책임지랴.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내 인생에 무책임한 방임을! 세상도 똑같다. 잘되면 내 역량 못되면 세상 탓 보통은 운수 대통. 내가 사귀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과연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정말 얼마만큼? 연애는 쇼핑이 아니다. 사랑이 뽑기였으면 노력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사랑했으면 사랑을 하면 사랑할 거라면, 사랑은 즐거운 연애와 기쁜 추억이 다가 아니다. (속닥속닥 그러니까 마담에겐 그 곡을, 다음 사람에게는, 크크크큭) 최선을 다하는 사랑도 뒷모습은 다를 수 있고 미래는 모르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그 말이 대체 뭔 말인가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을 해서는 아니된다 등등 사랑의 불가해함은 끝이 없다. 아무튼 뭐 그렇고 그래서, 나 꽃이야 타입은 그게 문제다. 홀딱 반할 수 밖에 없는 화사한 꽃일지라도 그 꽃에 걸맞는 화병을 만나야 하는데 와, 어떻게 골라도 골라도 저런......! 미술계에서 세월을 들여 부단히 공들였지 않나요? 꽃과 꽃병! 와 저 정도 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사람은 내가 그 아름다운 꽃에 어울리는 꽃병인가 아닌가 대략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선을 넘지 않음.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봐도 남자가 아까운데 여자가 아닌 척? 그런 척 하는 양상, 다른 여자가 모른다면 모를까 옆에 있다면 여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말한다. 그 꼴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못 봐주겠으니까. 뭐에 진주 목걸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럴만 하지 않은데 만약 그런다, 잘난 체 아는 체 이쁜 척 그 꼴 못 본다. 그럼 또 다시 어떤 척 했던 숙녀는 모른 체. 난 몰라! 난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추가로 설명하자면 허풍 80점이 꿈으로 가는 초석이 될 수 있듯이 허세 90이면 남자가 뚜껑 열리고, 허영심 70이면 여자는 핑 돈다) 아무튼 꽃과 꽃병의 조화는 사람이라면 대략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선을 넘지 않음. 그래서는 안됨. 더군다나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음. 허나 롱테일은 30년 같은 시간이랄지 지역과 문화와 사람에 따라 없을 수가 없음. 어느 거리를 걸어보거나 어디에 살아 보면 알게 됨. 게다가 피자 배달원의 경험도 있음. 나 꽃이야 타입은 그게 문제다. 남자라면 누구나 홀딱 반할 수 밖에 없는 화사한 꽃일지라도 그 꽃에 걸맞는 화병을 만나야 하는데 와, 어떻게 골라도 골라도 그런...! 어설픈 하이에나도 그저 그런 늑대도 아니고, 어떻게 골라도 골라도...! 그와 막 절묘하게 똑같은 사례는 드라마에 보면 나옴. 유부남이 뻔트 대는데 뭘 까다롭게 고르겠나 뭘 많이 따지겠나. 부인에게 딱 걸려서 혼날 때 부인이 하는 말, 아니 어떻게... 골라도... 붙어도 저... 어떻게 어떻게...... 기가 막혀! (딱) 남자나 여자나!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여자는 천동설 남자는 지동설이니까. 여자는 거울 보며 화장하고 거울아 거울아, 라며 거울과 묻고 답하는 <나 꽃이야!>. 애인이 야수든 맹수든 상관 없고 난 모르겠고, 1차적으로는 나만 이쁘면 그만! 꽃처럼 예뻐 보이고 비누처럼 향기로우며 광고처럼 꾸미기만 하면 그만이거든. 딱 거기까지. 무엇이, 누가? 나만! 내면의 아름다움? 그건 글쎄요... 지적인 남자? 지적이냐 아니냐 보다 내게 잘하냐 내게 다정하며 내게 자상하고 내게 극진하냐, 바깥을 향한 진면목도 중요하겠지만 나를 향한 연기와 남자의 본모습-사고 체계를 구분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내면의 아름다움은 숙녀든 숙녀의 이상형이든 뭐라 말하기 퍽 애매하단 말이오. 그 옛날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서 자화상을 주로 그렸던 화가처럼 내 자화상을 그려야 할 의무도, 재주도 없고 고생할 필요도 없이 오직 사진만 찍으면 그만. 언제나 거울아 거울아! (무슨 주의 그 얘기가 아니라,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사실만 봐도 응당 진실. 지금 원리 얘기!) 그런데 남자는 내가 나서야 함, 탐구하고 탐색하며 탐험하고, 추측하고 추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고, 싱그런 꽃을 찾아서 떠나고, 탐스런 과일을 따먹고 또 따먹고 쉬지 않고 계속 따먹고 아예 과수원을 차리고(구시대 연예계와 방송계가 딱 그랬음. 뭔상납 기타 등등. 지금 생각하면 난리도 아니었음. 그리 먼 옛날도 아님), 나중을 위해 과일나무의 씨앗을 뿌리면서 만방에 설을 풀다가,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짓고 마시고 놀고 춤추며, 던지고 치고 달리고 잡고 넣고, 남자는 그래야 하니까! 여자는 나만 꽃이면 되니까 야수의 보호를 받으며 종족 번식에 성공하여 2세를 잘 키우면 그만. 딱 그만! 하오나 남자는 내가 꽃이든 꽃이 아니든 타고난 건 어쩔 수 없고, 내가 최고의─최상의─최선의 꽃을 얻고 갖고 사고 꿈꾸며 황금의 사과를 따먹고 나서, 그외 나머지 뭐 어떤 그런 뭐 그 거기시 어? 머시기는 가리지 않음. 여자가 처음과 끝이 거울인 것처럼 남자도 그럴 수는 없음. 남자는 텐미닛이란 화술이든 세이렌 같은 리본-포장-멋-외면-재능과 능력-글발이든 아니면 내 성실함을 내세우던가, (무례니 뭐니 그런 거 모르겠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무조건 쫓아다니든가, 2세를 잘 키울 수 있는 재력이랄지 나머지 여자가 좋아할 만한 미끼를 제시하면 그만. 남자는 꽃처럼 예뻐보이고 비누처럼 향기로우며 광고처럼 꾸밀 필요가 전혀 없음. 여자는 머리 감고 말리고 어쩌고저쩌고, 남자는 수건으로 쓱쓱 닦으면 끝!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화병에 꽃아 내 옆에 탁~! 탐스런 사과를 따서 내 앞에 딱~! 그걸 사진 찍든 먹든 정물화를 그리든, 행복하건 불행하건 그건 그 다음 문제. 바로 그래서 야수와 미녀라는 짝이 존재하고, 바로 그래서 드라마에서 숙녀는 어떤 상황에 직면하여 너무 황담함에 차마 뭐라 말할 수 없는 장면이 존재하게 됨.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 비뚤어진 사랑도 있다. 아무리 해도 해도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남자를 영원히 잠들게 하는 여자, 그러고서도 0.5세기 1세기 내내 보란듯이 잘 먹고 잘 사는 여자. 너 나랑 만나자 사귀자 너 내꺼-하자, 뭐 싫어? 싫다고? 그녀를 휠체어에 앉혀서 인형으로 변신시켜 내 것으로 만드는 남자. 연애 칼럼을 이왕 쓸 거면 뭘 좀 알고 써야 하지 않을런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요! 여저분, 사랑을 바로 압시다. 유행가는 거의 100퍼센트 사랑을 노래하지만 다 같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결론은 그게 아니라 이것임. 결론은, <사랑은 대체로 여자가 남자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는 게 더 좋더라> 라는 말씀. 세상은 말한다. 또 가수는 노래한다. 남자가 여자를 좀 더 좋아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실속을 따지자면 전혀 그렇지 않음. 겉으로야 그럴란가 몰라도 여자가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게 훨씬 좋음. 훨씬~! 하지만 어느 정도 비율은 근접해야 하겠죠? 그런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연애 칼럼니스트는 95퍼센트 여자가 먼저 사랑의 신호를 보내네 어쩌네? 신호 좋아하시네! 어중간하게 유명하다고 사랑을 띄엄띄엄 아시나? 그런 분이 여자라면 꽃은 꽃인데 음 꽃은 꽃이네. 95퍼센트? 꽃도 꽃 나름이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어떻게 분야에 따라 허당들이, 허허, 대단하십니다 그려. 허당이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양쪽에 꿰찬 세상이구먼 그래. 난세다 난세!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그래프만 떠올려 봐도 답은 즉각 나옴. 남자 A와 B, 여자 A와 B. 경우의 수는 딱 4가지. 이때 사랑의 화살표가 어떻겠습니까? 뭐 여자가 먼저 신호를? 아아 사람 건방지게 만드시는 주장임. 남녀 공히 평균 100명을 사랑하는데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씀을! 그 무슨 허접한 이론도 재밌는 수다도 아니고 허허 웃기지도 않음. 응애응애 삐악삐악 참새 짹짹 에게에게, 놀고 있네! 감히 사랑의 신들이 현존하는데 약을 팔어? 누구 코 묻은 돈은 내 품위 유지비라고? 재수없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거만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여자의 신호를 많이 받아본 입장으로써 보자면 그 말은 맞다. 그러면 여자의 신호를 많이 못 받아 본 남자도 그럴까? 아니다! 천만의 말씀! 절대 아니다! 그럼 미녀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무조건 남자가 사랑의 신호를 먼저 보낸다. 절대적으로! 아조 환장한다! 정신 못차린다! 돌아버린다! 심지어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 답 나왔네 답 나왔어. 삼류 칼럼니스트는 선녀라고! <여자가 남자를 마음에 들어해서 시작한 연애가 아무래도 훨씬 멋지더라> 라는 교훈과 여자가 (1의 자리) 반올림 100퍼센트 사랑의 신호를 먼저 보낸다는 미신인지 과학인지는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 분간은 해야 어른이겠죠. 암요. 절시구, 적어도 전문가라면요!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추가로 한 말씀 드리자면, 꽃 들고 쫓아다니기의 하수는 노력과 체력과 돈과 무안함과 소문냄과 노이즈 마케팅 전법을 일관되게 밀어 붙인다. 그러나 꽃 들고 기다리기의 고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 그렇게 무식하지 않음. 그분들은 리듬을 타고, 칸타빌레와 크레센도를 구분하며, 호르몬 변화 그래프에 따라 밀었다 당기고 들어다 놓음. 남자도 여자처럼 유혹할 수 있음. 그게 고수임. 바로 그게 고수라고. 여자들은 마음이 여리고 감정이 흔들리는 기간이 따로 있거든요. 숙녀가 정말 좋아하는 그 무언가가 따로 있거든요. 으흐흐흐흐 음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아무튼 앞서 말한 결론은 명목상 결론이고 진짜 결론은 이렇다. 서술자 본인만 빼놓고 모든 남자는 다 늑대라는 것!
   표정이 찡찡한 누군가는 없을 수가 없으니 기왕 논한 거 간략히 부언 설명을 하고 넘어감. 그러니까, 긴 얘기와 상대적으로 야수에게 달갑지 않은 내용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왜냐하면 첫째, 그 어떤 원리(!)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둘째, 야수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각자 다를 수도 있음을 알자 라는 의도. 우리 오빠 우리 아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거 모르는 바 아니거든요. 외모가 전부가 아니거든요. 셋째, 지금까지 이런 얘기를 아무도 말로도 글로도 하지 않아서,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 못 찾았거나 흩어져 있을 수도 있지만. 넷째, 애절한 사연이 어떻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건 지금 함께 행복하고 잘 살면 그만이지 않을까 라는 점. 다섯 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아니죠! 옛날 얘기죠. 구식이니까요. 순진한 발상은 연인끼리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할 때나. 예술마저 거의 완벽하게 재화 가치로 측정하고 거래되며 이용한다는 점. 더없이 막중한 인생과 예술을 기초적으로 그냥 달랑 동사 하나로만 표현하면 몹시 섭하죠. 그럼 인생과 예술을 동격인 명사로 묘사하는 건 어떨까? 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 시도하자면 이와 같음. 인생은 묘비명이고, 예술은 황금이며, 세상은 놀이터다! 그럼 사랑은 다이아몬든가? 어쨌든 황금과 놀이터야 정말 그런가 안 그런가는 각자 생각하고, 인생만 놓고 보자면 또 유명한 묘비명을 인용하면 얘기가 길어질 테니 딱 두 가지만. 그의 인생은 행복했다,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렇게. 예술은 그냥 예술이고, 세상은 넓고 인생은 길다는 것. 그대의 행복이 짧지 않기를! 가령 환경운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옳다고 생각하며 정의감 때문에만 한다면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며, 오래 가기 힘들 것이다. 멀리 보고, 전수조사와 표본조사를 구분할 줄 알고, 무엇보다 즐겨야 좋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괜히 타임머신이라는 둥 선험자요 선구자를 들먹이는 게 아니다.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를까 생각하고, 트로이의 목마라는 다큐멘터리와 회전목마라는 소녀의 낭만을 동시에 떠올리며, 무턱대고 사랑을 강요하지 않기! 무엇이 예술이건 무엇이 드라마틱하건 내 인생 외에는 그건 다 남의 인생, 타인의 여자, 멋진 세상일 뿐. 따라서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일들이 있을 테니까 회의적인 관점에도 문을 열어놓은 체 긍정적일 것. 이타적인 이기주의가 기본일 것. 상남자도 그냥 상남자는 재미도 없고 인기도 없다. 어떤 상남자가 호감인가 그걸 누가 모르랴. 아름다운 사랑마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 그 모두를 무시하고 너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적어도 천당을 바라기는 스스로 미안하겠죠. 이승에서의 행복을 기도하며 속세의 성공을 기원하기야 개인의 자유일 테지만요. 때와 상황과 여건에 따라 세상도 그렇고 사람도 변한다는 것. 무엇보다 한마디로 원리가 이렇다 라는 말씀.
   <일단 여기서 심화 과정은 소설 '신비한 추측'을 적극 권합니다. 강력하게! 부드러움과 섬세함과 격조와 재미와 감동의 극치를 그대에게 선물할 테니까요. 어설픈 광고계의 립서비스 그런 건 비교도 안될 테니까요. 한마디로 격이 다를 테니까요. 사랑과 야망, 행복과 운명, 허세와 허영, 허당의 전기, 환상과 신비, 늑대론과 오락업과 요술학등 그 모든 게 다 들어있을 테니까요! 딸은 사달라고 난리다.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달콤한 사랑은 결실을 맺고, 나중 단란한 가정과 별개로 아빠는 할 일 없는 심심함을 종식시킨 채 유년기의 꿈을 되찾았다. 바로 그 책을 들고서!>
   분명 미래에 사람들은 이처럼 말할 것이다. 그분들이 본 광고는 이렇다. 엉뚱한 광고 문구는 이와 같았다. "놀라운 상상과 신비한 추측은 따라쟁이의 습관. 신기한 성과는 창조자의 책동" 그런데 과장 광고가 아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는 입소문이었던 것이다. 동기부여도 아닌 거리의 마술사와 약장수로 빠지지 말고 다시 와서,
   그처럼 주변에 누구 누구 누구 장본인이 있을 테니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웃고 계신 그분들께 여쭤보시라. 사랑에 대해서!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부터는, 꼭, 여자들끼리 얘기합니다. 네? 부디, 그럽시다! 단, 적어도 뭘 좀 아는 촌년이라면 말이죠.
   아, 힘들어. 아아, 피곤해.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짐. 우리끼리 정말 이러기예요? 네. 저도 몹시 유감스럽지만 여기까집니다.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깁니까? 네, 한번만 봐주세요! 아, 힘들어. 아아, 피곤해.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정신이 혼미하군 그래. 이런 강의 어디서 절대로 쉽게 듣지 못하는데 말이야. 이거 이거 공짜로 하면 안되는데, 상도덕에 심각하게 어긋나는데, 업계 불문율에 딱 위배되는데, 아무튼 무지하게 피곤하구먼 그래. 아, 잠깐. 잠깐. 귀 귀울여 보시오 낭자. 들리쇼? 아 이 웃음 소리가 정녕 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으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우리 오빠 우리 아빠 우리 그이, 게다가 다 잡은 대어를 참으로 안타깝게 놓쳤다거나 아예 인어를 오래 붙잡아뒀는데 한눈 파느라 어이없이 놓친 야수까지, 꽃 들고 쫓아다녀서 사랑을 쟁취한 그분들의 폭소가 정말 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난 벌써 그쪽 대표 주자에 해당하는 내 친구 누구와 다가오는 어느 만남 그때 우리가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이라오. 옛날처럼 바에 가서 바텐더 등에 땀 쭉 나게 만드는 것도 이젠 더 이상 재미없고, 어디 가서 1번부터 7번까지... 쉿! 백넘버는 지극히 사적으로만 얘기합시다 그려. 끝.


   11
 
   믿는 건 너의 마음, 변심은 나의 자유. 적지 않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나의 YES와 NO는 알고 보면 수없이 오락가락하다는 것을 미래에는 알게 된다. 믿음이란 그런 게 믿음이다. 사슴 루돌프의 코는 빨갛고 산타 할아버지께서 내 소망을 모른 체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점. 바로 이런 게 믿음이다. 그래서 달콤한 복수라는 이름의 의류 브랜드는 무의식적으로 동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SWEET REVENGE? 산타 루돌프의 이니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라~는 낙서를 문학수첩에 끄적거리는 데 연락이 왔다. 여성잡지1에 기고했던 연애론에 관해 인터뷰가 필요하다고. 나는 싫다며 거절했다. 계약서의 몇 조 몇 항을 인용하면서 나는 인터뷰를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민사상 고소가 접수됐다, 내용 증명서가 도착했다, 어디 무슨 머머의 법무팀이 바빠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라며 날 압박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여성잡지1의 담당자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 본 다음 진짜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그때, 출판사에 연락하건 변호사를 고용하건 어떻게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리코더 협주곡 RV 443을 들으면서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직접적인 탐구욕 이타적인 질투심에 근거하여 떠올렸던 작품 구상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깡그리 깨져버렸다. 카페라떼 커피색 서론과 어린이가 좋아하는 파란색 전개, 망사 스타킹을 떠오르게 만드는 선홍색 절정까지 모두 다 어떻게 응? 어떻게 잘만 하면 잡을 듯 말 듯, 다시 잡을 듯 한손에 그 달콤함을 모두 거머쥘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토실토실한 영감은 훵하니 도망가버렸다. 허당의 자발과 백조의 침묵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뜻밖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만나 보면 알겠지 라며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건축 잡지나 디자인 잡지에 나올 만한 멋진 카페에서 담당자를 기다렸다. 기자가 나타났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취재기자 한 명은 사진기자. 뭐시여? 나 사진 안 찍는데! 게다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더라? 아, 맞다! 그녀들은 내가 도시에 와서 들렸던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아가씨들이었다. 뭐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상황이 이 상황 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들은 아마 그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설마 모르는 척? 혹시 모르니까 나는 먼저 아는 체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는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무슨 법적 소송에 휘말렸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녀들은 너무 쉬웠고 너무 편했다.
   「뻥이었어요. 작가님이 만나주시지 않을 듯 하여 거짓말 좀 했죠!」
   「뭐라구요? 그럼 우리가 만나서 할 일이 없는데, 왜...?」
   「왜긴요? 이렇게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그윽한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며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잖아요. 시간 나면 드라이브도 하구요. 어? 차 좋네! (난 하필 거기까지 그리핀이 타라고 선뜻 내 준 뚜껑 없는 차를 타고간 것이다) 그런데, 왜 모른 체 해요? 네? 응, 오빠! 우리 봤자나. 만났잖아. 며칠 전에. 말 텄잖아. 혹시 무슨 일 없었나? 말만 놓았나? 마음만 줬나? 아님 전화번호도 줬나? 모르겠네. 그런데 만났네? 어쩜 이런 우연이! 와, 생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완전 모른 체, 연기력 대박! 이거 정말 이러기야? 이 오빠 안되겠네. 아 진짜 삐─! 우리가 무슨 어? (뭔가 말할려다 조심하는 듯) 철부지 말괄량이인 줄 알아? (혹시 할려던 말은...) 어떻게 그처럼 알면서 모른 체 하기야? 완전 딱 잡아떼네. 배꼽이 웃겠군. 오빠, 너무 맹랑한 거 아니야? 너무 심한 거 아니냐구! 사람 너무 하네 진짜!」
   「아이참. 인사할려고 했는데 혹시 싫어할까 봐, 나름 망설였다구. 기억 못하는 건 아닐까? 긴가민가 하나? 만약 내가 먼저 아는 체 하면, 나 보고 설친다고 하면 어떡하지? 사람 뭘로 보고... 그러면 어떡하냐고! 이랬다니까.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믿어 줘...요.」
   「OK! 그건 그렇고. 음. 오빠. 우리 몇 가지만 간단히 묻고 답하고, 일 그런 건 잊어버린 다음 놀자. 응? 반갑잖아. 놀자구. 오빠는 반갑지 않아? 조금 그런 눈친데. 아니...지? 에이 설마! 어쨌든 딱 몇 가지만 얼른 묻고 답하고 응? 묻고 답하고 그리고 놀자. 좋아. 그래야지. 즐거워질 생각 하니까 기쁘네. 그치? 묻고 묻고 답하고 답하고. 자, 가 봅시다. 오빠. 첫째, 그동안 썼던 작품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작품은 뭐야?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 말이야. 둘째, 그동안 썼던 작품에서 유독 애착을 느끼는 사건, 주인공, 우정, 사랑은? 셋째, 오빠가 글을 쓰는 방법은? 어떻게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쓴다 같은 거. 모래시계형 구조와 어떤 문체를 선호하고 무슨 전개 방식을 추구한다, 그런 것들 말이야. 응?」
   「음... 먼저 첫째. 어쩌다 생각나고, 불현듯 기억나며, 종종 떠오르는 작품도 있긴 해. 유난스레 연상되는 일도 있고. 하지만 난 앞만 보고 달려. 지난 작품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 대한 최적화된 태도가 못된다고 생각해. 옆에서 귀찮게 하고 조명 비추고 유명세를 치르면 그만큼 다음 작품에 대한 에너지를 뺐기는 건 아닐까? 뭐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 괜찮긴 하겠지만 말이야. 난 아직 순진한 신인이다 뭐 그 말씀이지. 그런데 있잖아. 나 인터뷰 안한다고 했는데. 뭐야, 어느새 말렸네? 내가 두루마리 화장진가? 아 나 이런 정말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참 나 완전 말린 거네 말렸어. 제대로 엮여버렸어. 완전 넘어갔다고. 꼼작없이 낚였잖아? 맙소사! 인터뷰 취소야 취소. 내 그럴 줄 알고 법적 대리인이자 전속 변호사한테 실시간 검토해서 상대방 법무 담당자와 직접 얘기하라고 말해 놨으니까 유도 심문 그만 포기하시지. 이따 편집장 그 양반한테 전화 오면 얘기 잘 하시고. 그럼 이제 자, 우리 한번 놀아볼까? 근데 뭘 하고 놀지? 그런데 우리가 그처럼 스스럼없이 함께 놀 사이...라고 하기엔 더없이 딱 맞는 인연이지. 암. 안 그러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하마터면 말려들 뻔 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술술 다 말할 뻔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법적 대리인은 무슨! 설마 그리핀의 작전은 아닐 테고. 오늘은 장난치기 좋은 날이었을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허나 내가 굳이 그녀들과 담을 쌓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도한 흰색 실크 팬츠에 부시시한 은회색 블라우스. 헤어드라이기의 바람 좀 맞이한 듯한 우아하게 굴곡이 들어간 긴 머리카락. 사랑에 빠진 듯한 진분홍색 가방. 그리고 '맥주 100명 + 최고급 위스키'를 살 수 있는 가격의 요만~한 크기의 향수 내음은 또 어떻고! 그리고 더없이 진한 검정색 세무 구두에 자수가 특이한 온통 흰색 원피스까지. 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몽상가들의 천국 몰디브도 막상 살아 보면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NC에서 스친 인연이었던 우리는 알고 보니 업계 동료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린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리와 영은 단짝 나는 남자. 뭔가 이상한 전율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다 설마 삼각관계로 무르익는 것은 아닌가 감수성은 부끄러워했고, 그녀들을 알고 싶다는 곧 그녀들을 내 작품에 담고 싶다는 호기심까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흑심은 발동되지 않았다. 말을 나눠 보니 마음이 따뜻한 친구들 같았다. 뭘 좀 아는 친구들이었고 됨됨이도 괜찮았다. 마리는 꽁꽁 언 내 마음을 샤르륵 녹여 주었고, 영은 옴짝달싹 못하도록 날 웃겨 주었다. 난 막 고민에 빠졌다. 무인도에 가게 되면 둘 중 누구를 데려가야 하는지. 그러다 딱 결정했다. 둘 다 데려가겠다고!
   이미 미묘한 신경전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사랑의 삼각관계이자 우정의 삼각관계를 동시에 체험하는 진귀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2

   「오빠. 사랑은 뭘까? 응? 오빠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으잉? 사랑? 사...랑? 우리가? 웬 사랑? 그... 사랑? 바로 그때 저쪽에서 이쪽으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영이었다. 나는 말했다.
   「사랑은... 영이야!」  뭐라고? 아니 이렇게 크나큰 실수를 하다니!
   그게 뭐야, 저런! 그런데 영은 어떻게 알았을까? 나와 마리가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치만 내가 영과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 할지라도 마리도 똑같을 거 같았다. 화들짝 놀라지 않고 별수 없었을 것이다. 아아 지금이 그 언제까지라도 이어질까? 이 꿈만 같은 시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우리는 비몽사몽 사랑의 발라드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나만...일까?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공원을 유람했고 틈틈이 해변가를 배회했다. 시간이 많이 남지도 썩 심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분은 내내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언젠가 기적을 부르는 표어로 그걸 떠올려 봤다. 바로, 여자 말을 잘 듣자! 왜냐하면 그녀들은 기분 나빴다 했을 때 당장 그러니까. '늬 애기 못생겼어~ 아니 이년아? 완전 못생겼어!' 라며 친근한 우정과 감미로운 호의는 한순간에 비난으로 바뀌니까.
   한편 나는 스콧도 만나야 했고 그리핀의 마음도 헤아려야 했다. 마리와 영의 우정도 이해해야 했으며 사랑의 시도 써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그분들과 거리 두기에 들어갔다. 밀었다 당겼다 에서 썰물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때문에 나는 혼자 막 좋아하면서 평일에는 동화를 썼고, 주말에는 해변에 누워 연가를 불렀다. 지금은 추운 계절 나는 겨울 남자였기 때문에 입는 침낭을 애용한 것이다. 그러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겨울에 일광욕을 하다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남풍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여행 오라며 정답게 손짓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좌우지간 문제는 인기가 한순간에 집중되도 탈이었다. 우정이 하등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교제에 지나지 않는다면 곤란하듯이 사랑도 정히 행복한 교감과 다정한 대화, 풍부한 감정의 교류를 나눌 수 없다면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 드문 경우, 대개 남는 건 하나다. 몸의 대화. 때문에 애초에 풋사랑으로 시작했는데 깊은 사랑이 되어버리면 나중 머리 아플 수 밖에 없다. 운명적이든 정식 만남이든 자연스러운 주위 소개로 만날지라도 나중 어떤 과정들은 다 겪을 텐데, 아무튼 그건 남의 일이고, 난 지금 시간과 몸을 어떻게 쪼갤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양다리, 그거 아무나 하는 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러므로 나는 소망은 양떼구름에게 드리고, 부케는 남쪽 하늘 별님에게, 열정은 앵무새한테 내맡겼다. 딱 하나 남은 상상은 그럼 어디에? 그건 이제부터 고민해 볼 일이다. 어떻게? 자못 심각하게. 남자는 폼이다, 처럼 삼류는 자세가 전부다. 하여간 말만 말만 그냥...!


   13

   나는 마리와 영 그리고 스콧과 그리핀도 만나야 했기 때문에 빠듯한 품위 유지비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성잡지2에 인생론을 기고했다. 돈 필요하면 통장에서 빼 쓰듯이 기고할 칼럼 제목들은 상시 대기중이었다. 상상병. 환상통. 신비증. 품격론. 연애술. 사랑학. 허언증. 긴장감. 증후군. 우정관. 꿈을 이루는 주문. 그리고, 평생 놀고 먹는 법까지.
    풋사랑 10번이냐 참사랑 1번이냐. 사람에 따라 우정과 사랑에 대한 선호도는 약간씩 다를 수 있음. 뭐 양다리? 못 들은 걸로 하겠음. 애초에 사랑은 시작부터 애모와 뻔트로 구분된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나중 그것이 드문 상사병이나 최고의 사랑으로 변하게 되는 고귀한 연정을 드라마는 좋아할 테고. 태어나서 한번도 눈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뽀송뽀송한 눈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눈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반반. 그럼 가만 있는 호박한테 직접 가서 뻔트를 대느냐, 아니면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니까 사랑을 하느냐, 과연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고 무엇을 선호해야 하며 또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보면 알게 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거니까. 그래서 아마도 성공은 쉽지 않다. 사랑이 쉬우면 성공도 쉽다. 그러나 사랑이 어려우면 성공도 어렵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인기라고 다를 건 없다. 고품격은 제일 늦게 움직이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가, 평범한 삶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타고난 재능, 후천적인 노력과 기회와 그리고 행운을 부르는 실행력과 더불어 중요한 게 또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어떤 말을 탈 것인가 라는 점. 10개 100개의 말이 있다. 적토마, 천리마, 허세마, 한방마, 다크호스, 아내는 어쩜 천사인지 모른다,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기마, 튀어야 산다마, 그외 기타 등등. 그렇지만 그 말을 타고 싶다고 타지는 것도 아니고, 나만 타는 것도 아니며, 유행도 수시로 바뀐다. 때문에 제일 미운, 제일 꼴보기 싫은 놈은 바로 그거다. 일명, 개구멍으로 들어간 뻔트마! 말과 기수가 합체된 경우 말이다. 완전 재수없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니 어쩌니 그것도 아니고 뭐, 개구멍으로, 뭐가 어쩌고 어째?
   끝으로, '튀어야 산다'마에 대해서 부언 설명. 돋보이고 튀는 재주는 사람들이 안하기 때문인지 못하기 때문인지, 뉴튼형인지 허당형인지 보면 안다. 유별난데 저급하다? 물 건너가면 안 먹힌다. 여기서 전문가는 저기 가면 아마추어라네. 환경에 따라 못 봐줄 정도로 튀는 양식은 물 건너가면 기본 중의 기본일 뿐. 그 역시 타임머신의 문제다. 옛날 옛날에 다 있었고, 판이 최신이냐 구식이냐, 규모가 크면 비슷한 유형도 널렸다. 아주 즐비함. 없는 놈이 있는 체 못난 놈이 잘난 체,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그냥 우물 안 개구리다. 내가 최고다? 그래 허세 최고 허영심 최상! 바로 그래서 시장에 따라 '튀어야 산다'마는 오락산업의 제물로 딱 좋음. 연예계 문화계 예술계 출판계에도 최적. 학계는 글쎄. 순진한 사람들만 과장 광고에 넘어가서 그분들 품위 유지비만 두둑히 챙겨주게 됨. 나중 보면 남는 건 그거 밖에 없음. 유행과 유명, 촌스러움 또 촌스러움, 퇴락한 명망, 복고풍 패션, 추억의 디스코 등등. 튀는 말은 대체로 다른 튀는 말에 밀릴 수 밖에 없다. 튀는 말은 대체 불가능한 게 아니라 대체 가능하다. 복사가 가능하고 모방으로 시작하여 원본보다 더 뛰어나게 각색도 문제 없다면 굳이 원본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밀려나고 잊혀지는 건 시간 문제일 뿐. 그래서 시작은 튀는 말일지라도, 그건 다른 말들도 마찬가지고, 경마장에서 살아남을려면 그거 밖에 없다. 변신! 다시 말해 새로움! 원론적으로 신부들러리는 신부들러리고, 백댄서는 백댄서다. 그건 옳고 맞고 예의다. 거의 대부분 그래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말고 역발상으로 삼각형을 뒤집어 보자. 그렇다면, 백설공주 동화에 나오는 마법 거울처럼 역피라미드에서 그대에게 선물하는 표어는 이렇지 않을까? 신부들러리는 신부들러리가 아니고, 백댄서는 백댄서가 아니다. 제 역할에 충실해야겠지만 드물게 그럴 수도 있을 테니까. 일은 우연히 내 운명이 될 수도 있고, 취미는 어쩌다 내 행복이, 그녀는 내 끝없는 사랑이 될 수도 있다는 것. '튀어야 산다'마는 '튀어야 산다'마로 끝나지 않을려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의 전적으로 상업용이라는 어떤 사실들이 어린 친구들 눈에 잘 보일까? 어른들 꿈은 부자라는 걸 어린이님도 다 아실 텐데, 하지만 그분들은 순수하기에 그럴 리는 없다. 괜히 촌닭 촌닭 그러는 게 아님. 여기서도 모순은 존재함.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까. 조명이 비추면 자세를 취해야 하니까. 운 좋게 일찍 성공하든 대기만성형이든, 경쟁은 원리고 전진은 일리일 테니까. 나는 당나귀 너는 코끼리, 아빠는 늑대 엄마는 양, 오빠는 개상 그녀는 말상 애완동물은 고양이, 각자 좋아하는 게 다 다르거든. 뿅 가는 지점도 다 다르거든. 사회적 출세가 아닌 개인적 사랑도 역시 젊음의 행진일 뿐. 그런데 속세에서 하는 말로 누구 코 묻은 돈, 겉은 예술 속은 상업이면 차라리 낫다. 그게 아니라 증권가, 부동산, 정치, 경제, 사회가 그렇다? 대출해주고, 모래성이 만들어지고, 투자하고, 모래성은 또 담보로 잡히고, 주식을 담보로 다시 대출해주고, 그걸 다시 투자하고, 거품은 빠지고, 돈은 돌고 돌고 돌고, 그런데 어머나! 배당금이 짭잘하다고 좋아했는데, 뭔 가상화폐? 그건 또 뭐야! 그러다 은행이 팔리기 전에 누군가 슥 발을 빼. 그런데 웜~마 잔머리 굴리다 너무 빨리 뺐어. 주가 폭등!... 인생론은 여기까지.


   14

   오늘은 영과 데이트하는 날이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니까 버겁지도 부담스럽지도, 좋으면서 이상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복잡하지도 않았고, 홀가분했다. 분위기도 훈훈했다. 꼭 관계의 정의를 분명히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이다.
   도시에서 연애하는 남녀는 간혹 이런 말을 한다. 갈 데가 없다고. (같이) 할 일이 없다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서로) 모르는 게 없다고. (어쩌면) 기대할 새로움이 없다고.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제일 웃기고 가장 흥미진진하며 최고로 인기 있는 곳이 어디냐? 그곳이다. 바로 내가 현재 머물며 일도 하고 휴식도 취하며 명상하는 곳. 잠깐만 여기 이름이 뭐더라? 그러고 보면 정말 무난한 모텔, 호텔 이름은 아마도 이름일 것이다. 사람 이름! 단지 가게 이름만 봤는데, 생각했는데, 들었는데 웃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건 분명코 행복감이다. 아, 왜 사귀는 사람들이 데이트할 데가 없는가, 왜 신혼 부부들이 결혼의 좋은 점으로 꼽는 '데이트하러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의미가 있는가, 그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익숙해지니까 그런 거다. 도시도 익숙해지고, 사람도 익숙해지며, 인생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꼭 3년을 채워서 연애하며 갈 데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갔던 데 또 갈 수 밖에 없다. 새로움은 곧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구경하고, 놀이공원에 가서 스무 살은 바이킹을 낭만주의자는 대관람차를 소녀는 회전목마를 탄다. 극장에도 한 1000번쯤 갔을까? 거리를 걷고 드라이브를 하며 공원을 구경하다가, 하다 하다 어정쩡한 우정은 그런다. 뻣뻣한 남자끼리 썩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호수에서 오리배를 탄다. (만약 남자와 남자가 사랑이라면 다른 얘기지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나열하기는 힘에 벅차니까 대표적으로 하나만 얘기했음. 롱테일이 얼마나 다양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요!)
   그 가운데 의외로 드물고 놓치며 건너뛰는 일이 있다. 애인이 일하는 곳에, 사귀는 사람이 공부하는 학교에 찾아가기. 어떤 날 공장에 직원 가족들을 초대하고, 어떤 날 골프장은 1일 매출을 포기한 채 주민들을 초청하여 소풍 장소가 되기. 이를 테면 그런 일들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쉽지 않을까? 왜냐하면 일이 즐겁고, 공부를 좋아서 하며, 업무가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재밌기는 좀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생계 같은 단어.
   여기서, 생각하기 마음먹기에 따라 동전처럼 둘로 나뉜다. 첫째, 한 달을 일하든 일 년을 일하든 어차피 돈 때문에 하는 일 대충대충, 일은 완수하지만 뒷처리는 흐지부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어차피 시계는 째깍째깍 지구는 돈다, 그러니 시간이나 떼우자. 둘째, 한 달을 일하든 일 년을 일하든 이왕 하는 거 깔끔하게,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고! 나는 옛날에 단기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꽃집 구인 광고가 보이길래 그랬다. 뭐 꽃집? 어딘가 모르게 부케가 생각나고, 그윽한 꽃 향기에 웃음 짓는 숙녀가 떠오르며, 프리지아 장미 백합 국화 달리아 목련 벚꽃 수선화 튤립, 코스모스... 왠지 멋져 보여서 찾아갔고, 채용 됐고, 그래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했는데, 그런데, 그게 음... 처음 막연히 느꼈던 그런 상상과는 거리가 멀더라. 많이 멀더라. 내딴에는 재밌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다. 일하다가 나는 꽃배달을 하면서 생일 기념 꽃도 배달했고,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에도 화환과 근조를 배달했다. 그러던 중 시장을 지나다 생선 파는 가게의 채양을 차로 치면서 지나갔는데, 그곳 주인 양반이 오토바이를 타고서 쫓아오고 난 잠깐 모른 채 도망가고, 그런 추적의 모험도 있었다. 그 결과는 최소한 세계적인 단편영화제에서 신인상이랄지 인기상을 너끈히 받을 정도는 족히 되지만, 결과는 비밀에 붙이겠다. 문어 발을 그쪽까지 뻗칠 수는 없는 일. 그러다 그만둔 다음 같이 일했던 형과 술 한잔 할 때였나 그 형이 그랬다. 사장 사모님이 그랬다고. 누구 삼촌은 그래도 일 잘했다고. (일 잘하는데 일 했던 기간이 짧아서 아쉽다는 뜻) 그래. 자랑이다. 내 자랑이다. 나는 자랑할려고 작가가 됐다. 그랬나? 이제는 대놓고 자랑이네. 자랑이 뭔 죄는 아닌데 그런데 대체 왜 죄스럽지? 이런, 젠장!
   어쨌든 영은 나를 데리고서 자기의 직장인 여성잡지1에 갔다. 남자친구 데려와서 구경시켜 주라던 편집장 말은 빈말일 수도 있지만 영은 행동했고, 과감히 실천했으며, 나의 소극적 만족이라는 성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결혼은 어려울 듯 하고, 삼각관계를 보아 하니 3년 동안 행복한 연애는 힘들 것 같고,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며 손 잡고 당장 어디로 가자, 그것도 힘들 테니 기억에 남을 특별한 데이트는 바로 '출근'이었던 것이다.
   「영! 그런데 있잖아. 마리가 혹시 위치 추적기 그런 거 같고 있니?」
   「응? 뭔 추적기? 마리는 그런 데 취미 없는데. 그런데 그건 왜?」
   「아니 그냥.」
   마리 얘기는 왜 물어보는데, 라~는 듯한 영의 기분을 나는 충분히 헤아렸다. 마리 얘기를 더 꺼내지 않는 게 신의이자 예의였고 지혜였다. 그러나 마리 입장에서는 내가 마리 얘기를 하는 게 희망일 것이다. 심지어 영은 내 마누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청개구리처럼 마리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영, 있잖아. 마리는 어디다 떼어놓고 왔니?」
   영은 날 째려봤다. 그러다 눈을 흘겼다. 지금은 키스 타임일까, 키스 타임이 아닐까? 긴가 아닌가는 몰라도 나는 난봉꾼이 아니었고, 괴씸한 스쿠르지요 탐욕스런 돌씽 스타일은 아닌 듯 했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까지 지갑에 여자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지금은 지갑이 없고, 마음속에는 누군가 있다. 무엇보다 영과 나의 사이는 풀래야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어쩜 사랑과 우정 사이? 청순한 영, 정숙한 여자, 꽃보다 아름다운 숙녀여!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멈추면 실망이고, 저 멀리 갔다가 변심하면 절망일 텐데. 다 됐고, 그냥 이기적으로 밀애를? 뭐랄까 이별의 슬픔을 편애할 수는 없다고나 할까, 친애하는 영에게 속임수로 거짓 연기를 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영을 알게 되어 기뻤다. 나는 영과 마리 사이에, 여자의 우정에 1.5인자로 어정쩡하게 끼여들어 행복했다. 우리는 자애로웠고 우리는 다정했다. 아름다운 인연은 젊은 날의 추억이었다. 복권 당첨은 다름 아니라 사랑의 싹틈이다. 정절도 질투도 사랑의 비애도 모두 우리와 함께 했다. 내일의 싫증난 애인을 점치는 것보다는 수줍게 여기서 멈추는 것일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마리를 감시할 수도, 영에게 에로비디오 출연을 제의할 수도 없었다. 물론 내가 에로영화 감독으로 제2의 인생을? 그건 계획에도 마음에도 없는 일이다. 오빠 믿지? 복숭아빛 연분홍색 마리의 염탐이 걱정됐다. 나는 생각했다.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멈출 수 없었다. 나와 영의 결혼생활, 상상할 수 있는가 상상할 수 없는가? 그 순간 시상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쇼팽과 풍선껌. 고전주의와 쇼핑. 홈런과 뻔트. 놀자족과 단테 동호회까지. 나는 지금까지는 그랬다. 신비에 대한 공학론을 완성해 볼까, 최초로 환상학을 창시할까, 하다가 애초에 포기했다. 그러나 생활비가 빠듯했다. 그래서 일기와 이별했는데 일기를 썼고, 칼럼을 외면한 척 했으며, 환상문학 구상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얼굴 없는 작가로 먹고 살만해지니까 방탕한 생활에 영과의 염문으로도 모자라 마리와는 운명을 바꿀 새 경험을? 그런 인간이 허구로써 사랑을 얘기한다? 수다스럽고 불결하지만 그게 어른들의 진면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생각만 많아지고 너무 복잡했다. 그래도 경쾌하면 그뿐 행복을 초래하면 그만. 난 그냥 그게 좋았다. 처녀의 부끄러움과 숙녀의 변치 않는 귀여움을 어떻게 작품으로 포장하며 고급스럽게 승화시킬 것인가가. 그런데 그걸 알려면 내가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산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욕심을 채운 다음의 냉정함과 거만함과 무정이 아니라. 그녀들의 애교를 테스트함은 곧 내 일이자 본분이었다. 가련한 짝사랑과 다정한 살색 질투심을 파헤쳐야만 했던 것이다.
   「오빠. 무슨 생각해?」
   「응? 첫날밤! (......) 어? 아니, 그, 너의 마음을 훔치다. 아니? 백허그?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나중 회상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어. 우리는, 이름을 묻고 답했고, 꿈도 묻고 답했다. 그런데 이름은 기억나고, 그녀의 꿈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중 그런 글을 쓰게 될까 봐서.」
   「오빠는 미래를 즐기시는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난 자꾸 오빠를 아빠라고 불러보고 싶은 그런 괴상한, 변태스런, 이상 욕구를 느끼네. 응? 형! 아 형~! 왜 그러지? 대략 절충해서 그냥 그렇게 불러 볼까? 선생님!」
   「뭐? 아니야. 아니라고. 나 오빠야. 오빠라구.」
   이건 마치 총각의 쾌락과 신부의 기쁨,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대립인 것만 같았다. 그건 뭐 거의 내 고상한 취미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 내가 동경하는 순애보,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 내가 흠모하는 연정의 섬세함,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부드러움, 내가 애타게 바라는 그녀와 나 우리들 마음의 대화 꿈의 속삭임, 내가 꿈에라도 만나고 싶은 고귀한 천사가 결국 뭐 첫날밤이라고? 이런, 젠장!
   혈기 왕성한 탐욕을 합법적인 새로움으로 탄생시키기, 는 벌써 글러먹은 것이다. 그럼 그렇지.


   15

   나는 독학, 포기, 질투, 따라하기, 공상, 실망, 동경심, 허영 가운데 지금껏 무엇을 가장 즐겨 했나를 생각했다. 우정의 삼각관계와 사랑의 삼각관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목격한 낙원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다고 잘 될 리는 없겠지만. 기쁨은 수용하고 불쾌감은 거부했다. 하지만 문제는 의도와 달리 효과가 역으로 나타나는 빈도가 많다는 점. 일단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포기할까? 아니면 둘 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엇이 최선일까, 최선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가'를 따지는 건가를. 난 네 단짝을 뺐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구! 나 때문에 조마조마 우정에 마음 조리며, 가슴 뭉클한 사랑까지 미완으로 끝나버릴지 모른다며 걱정했다면 내 이렇게 빌며 사과할께.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단적으로 난 가만 있어도 펌프질에 준하는 존재였다. 어쩜 당사자 입장에서는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기똥찬 착안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색다른 묘안 역시 내게 친절함을 베풀어 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 내 편이자 나의 수호신인 공상이 있었다. 그건 어떨까? 내가 2 대 2 소개팅을 주선하는 일. 어차피 스콧과 그리핀의 우정을 회복시켜 주는 건 내 임무일 테고, 더군다나 마리와 영마저 언제까지 내 팬클럽으로 나이 들고 다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다지 썩 잘 어울릴 듯 하진 않아 보였다. 중매를 잘하면 술이 석 잔이요 못하면 뺨이 세 대라 했거늘, 없던 일로 하는 게 좋겠다. 혹시 모르니까 애초에 싹싹 빌 일은 만들지 말자. 그리핀의 질투심이 평범한 수준은 아니지 않나. 충분히 보았지 않나. 빌미 잡힐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큐피트가 되기를 꿈꾼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바카스로 돌변할 명분만 마련한 셈이네. 어쨌든 잘 생각했다. 기특하기도 하여라. 그렇긴 하나 설마 그리핀이 마리나 영의 친오빠는 아니겠지? 아닐 꺼야. 그건 장르가 다르니까. 그건 또 전문가는 물론 애호가가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나중 모르니까 지금 이 상황을 소설이라고 가정하며 극적 전개에 대해서 문학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마리가 갑자기 찾아온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다짜고짜 날 데리고 호텔 내 미술관으로 간다. 가면서 듣고 보니 그녀는 그리핀의 여동생이었다. 뭐라고? 그리핀이 만약, 여동생이 누굴 만나는지 뭘 하는지 알게 된다면...? 안돼 안돼 그건 정말 안돼! 그런데 그리핀이 내게 빌려준 슈퍼카부터 시작해서 특급 호텔이 보유한 미술품만 해도 그게 얼마야? 그럼 그리핀의 여동생인 마리는? 이 사랑은 처음부터 순수했냐 아니면 사랑이라 부르기엔 원래 뭔가 부족한 설정일까? 생각이 점점 많아질 때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한다. 마리는 나 보고 여우 석상의 꼬리를 만지고 있으라고 한다. 여우 꼬리에 인체 혈류 인식 뭐 그런 장치라도 되어 있는 건가? 내가 여우 꼬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 그녀는 어느 액자 측면에 있는 단추를 누른다. 그랬더니 커다란 그림 전체가 문처럼 작동해서 밀실이 드러난다. 밀실은 진짜 특급 손님에게만 제공되는 뭐 그런 휴식 공간인 듯 하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간다. 난 직감했다. 혹시, 첫날밤! 여기서? 천상의 음률이 들린다 들린다. 그녀의 시선은 뜨겁다 뜨겁다. 우리는 이 시간이 지나가면 그 소중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잘 안다. 눈빛으로 얘기한다 얘기한다. 손을 잡는다 잡는다. 힘차게 껴안는다 껴안는다. 격정적으로 키스한다 키스한다. 어디식 무슨식 어디식 무슨식. 흥분한다 흥분한다.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 나는 피노키오가 됐다 피노키오가 됐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없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거의 다 벗었다 벗었다. 마지막 남은 속옷...... 그런데 갑자기 그리핀이 난입한다. 쨍그랑! 문학수첩편은 여기까지.
   농담을 학문의 경지로, 허풍은 생활로, 그리고 나는 아무튼 우정과 사랑의 삼각관계에서 스스로 낙오자가 되자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난 처음부터 짧은 만남 긴 추억을 미리 예감했을 수도 있다. 물론 '어쩌면 좋아하시네!'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스콧과 그리핀과 함께 탐나는 추억을 아직 만들지 못했는데 어쩌지? 마리와 영에게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랄지 진짜로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랄지, 그녀들의 탄복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 뭔가도 없었다. 즐거운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우정을 어떻게 원위치시키고, 어떻게 해야 숙녀의 환심을 사며, 참신한 주황색 사랑 엇비슷한 감정을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을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정을 회복하는 것도 당치 않았고, 숙녀의 환심도 살 수 없으며, 참신하니 뭐니 사랑 엇비슷한 이상한 감정도 이미 물 건너간지 오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전개는 발정 아니 절정으로 급격히 달아올랐다. 발단은 내내 침묵하더니만 모범적인 기승전결로 치달았다. 내 숙소로 그리핀이 어떤 여인들을 하루에 1명씩 투입시킨 것이다. 몇몇 미인계 작전은 내게 먹힐 리가 없었으니까 또 별다른 사연이 없었으니까 그 가운데 특별한 걸 하나만 추리자면 이렇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랬던 것이다.
   어느 날 호텔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마자 내 머리채가 잡혔다.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밀었다 당겼다 당겼다 밀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어느 아줌마께 휘어잡힌 채 밀렸다 당겨졌다 밀렸다 당겨졌다, 하면서 지금 이 장면이 혹시 슬로우모션은 아닐까 라고 착각했다. 생각도 많이 했다. 이게 만약 단짝의 의리를 방해했고 사랑을 놓고서 숙녀의 우정에 금이 가도록 만든 대가라면 저는 달게 받겠습니다, 아멘! 라~고 나는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알고 보니 일행이 있었다. 혼자 무턱대고 쳐들어왔을 리는 없겠지. 날 아마도 바람핀 남편쯤으로 여겼을 테니까. 아니 남편의 내연녀의 배후? 몰라. 어렵다. 넘어가고. 아무튼 작전을 철저히 세우고 왔을 거라고. 그 순간 소란스런 여자들의 신음과 수다와 고함이 불현듯 감탄사와 조용조용한 속삭임으로 뒤바뀌더니, 그녀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랬다.
   「어머 어머 얘 얘 아니야 아니야. 어머 어머 어떻게 어떻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야 야 얘들아 얘들아 가자 가자. 이 방 아닌가 봐 이 방 아닌가 봐!」
   그러면서 세 명 쯤 됐나, 네 명이었나. 그녀들은 서둘러 떠나버렸다. 뭐야 이거! 난 느꼈다. 문제아로써 더 이상 설치고 다녀서는 안되겠다고. 지금이 바로 시골로 내려갈 적기라고. 물론 전날 꿈은 악몽이었다. 나만 쏙 빼고 스콧과 그리핀과 마리와 영이 즐거운 2 대 2 데이트를 하던 장면을 목격해버린 꿈. 나는 '맷돼지 드디여 하산하다'가 아니라 작품을 어서 쓰고 싶어서 하향하기로 했다. 칩거에 들어가 작품을 쓰고 싶었다. 결국 패배주의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분은 결코 언제라도 날 체념하도록 가만 놔두는 법이 없었다. 그처럼 나는 쓸쓸히 낙향하고야 말았다.


   16

   대충 1년쯤 지났나? 반 년? 모르겠다. 너무 열심히 그래, 미친듯이 글을 쓰느라 시간이 어떻게 어찌나 빨리 지나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작품 구상을 다 마쳤다. 내가 도시에서 겪은 실화에 살만 붙이면 그만이었다. 무엇을 추가하고 어떤 걸 과장해야 할지도 뻔했다. 기쁨조, 분위기 메이커, 약방의 감초 같은 조연, 기존 추종 세력과 신흥 세력, 유망한 허풍 대회까지. 거기서 난 사랑이 뭔지 모르는 희대의 허풍꾼? 바람둥이? 아니면 바람잡이? 마술사의 조수를 내가 짝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짝사랑을 받을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 친구1을 허당으로 출연시킬까, 출연시키지 말까? 뻔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2를, 게임이라면 그냥 환장하는 친구3도 출연시킬까 말까? 작품 돌아가는 거 봐서! 허허허 허허허허허! 잔치상은 다 차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남은 일은 숟가락만 올리고 번호표만 발부하면 그만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하! 이제는 본격적으로 쓰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첫 페이지를 쓰다가 왠지 모르게 나는 인스타그램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봤다. 그런데 이게 뭐지? 스콧과 마리의 결혼식 사진을 보게 됐다. 이럴 수가! 맙소사! 세상에나! 내게 말도 없이? 언제는 우정이 어쩌니 사랑이 무엇이니 말만 말만 장황하더니만, 결국 난 행인1이었어? 이런 개뿔! 기념 사진을 보니 참 다정하게도 찍었다. 신랑과 신부의 옆에는 어김없이 세상 그 누구도 그들이 단짝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그리핀과 영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럼 난 뭐야? 내 이것들을 그냥 가서 확... 보나마나 조촐하게 치르고 싶었네 정신이 없었네 뭐라 뭐라 핑계는 많겠지. 다 알아 다 안다구. 그래도 그렇지. 가서 따질까? 아니다 아니야. 귀찮았다. 다 귀찮았다. 내가 열 받았을까? 아니다. 난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다음 순서로 무엇을 해야 할까? 유난 떨까, 내숭 떨까, 호들갑스럽게 감정을 과장하여 글로 쓸까? 다 아니다. 다 아니야. 내가 무슨 우정을 연구하는 만학도인가 아니면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문학소녀인가. 다 아니다. 다 아니야. 강한 부정은 강한 부정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글이 안 써졌다. 따라서 나는 작품을 때려치게 되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나는 패자인 듯 했다. 모두가 부질없는 허상이었다. 그래서 내 허영심은 발동이 걸렸다. 나는 쇼핑에 빠진 것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우정을 상징한다는 어려운 이름의 꽃을 매일 샀다. 하루에 한송이씩 꼬박꼬박. 그런데 이름을 외우지 못한 그 꽃이 정말 우정을 상징한다고? 금시초문인데. 꽃집 사장님의 허튼 소리일까? 그 양반이 날 속였어? 속아 줄께. 속아 준다구. 나는 속아도 싼 존재에 불과하니까. 난 단짝도 떠났고, 아니 못 뺐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까 아닐까, 어디 가나 무얼로나 넘버 쓰리니까. 그 다음으로 나는 고갱이 남긴 우정의 상징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반 고흐'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렇다고 잘 모일 리가 있나. 잠깐의 열정으로 모은 돼지저금통을 탈탈 털어서 난 술집으로 달려갔고 그 신성한 모금액을 고스란히 탕진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할 일은 새로운 친목을 결성? 재미없는 거 다 안다. 그리하여 나는 어쩌다 1번 증후군에 걸려버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1번만. 육식은 1주일에 한 번만. 여행도 한 달에 1번. 옷은 절대 이틀 연속 입지 않았다. 하루에 하나씩 새롭게 입었다. 뭐 팬티를 딱 삼 일씩이나 막 일주일 연속으로 입는다? 그런 순수한 남자가 남잔가? 어? 나를 1범주 친교로 대접하지 않는 지인은 만나지 않았다.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극장에 가서도 제1열에만 앉았다. 목이 뻐근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목에 파스를 붙였다. 그래서 1번 증후군은 포기했다. 진작 포기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어? 내가 아쉬울 때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지. 첫째 칼럼을 쓰는 일, 둘째 에로비디오를 보는 일. 둘째는 벌써 옛날에 끊었고 내게 남은 건 첫째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마저 쓸 말이 바닥나버렸다. 할 말이 떨어졌고 할 일이 없었다. 이 허덕거리는 슬럼프를 난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보고만 있지 않으면 뭐 어쩔 껀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날 마음대로 요리하든 어쩌든 내가 먼저 수그리고 굽실거리며 넘버 쓰리로써 어느 우정의 수하로 들어갈까? 그러니까 좋게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전속 삼류 칼럼니스트로 만족해야 하나? 아니다. 만족하면 끝이다. 내 주제를 아는 건 좋다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그러면 광고를 믿을까 다큐멘터리를 만들까 신세계를 탐험할까? 이참에 새로운 친구를 사귈까? 우정 아니면 사랑? 만남은 익숙한 만남과 새로운 만남이 있다. 지금 필요한 건 후자인 듯 했다. 새로운 만남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내가 먼저 말을 건다, 둘째 첫째처럼 상대방이 다가오도록 유혹한다, 셋째 우연이랄지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한다. 나는 그 가운데서 눈 딱 감고 3번을 선택했다.
   일명, 고품격 사교계 진출!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이제 그 말도 듣게 되겠군. 호호호! 도대체 뭐에 홀려서? 누가 아니래!
   나는 편집장이랄지 몇몇 친구들한테 주워들은 얘기가 있었으니까. 일일드라마가 보통 그러니까. 뭔가 궁금하고 보통 일이 아닐 듯한 전개, 애달파하며 지켜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것만 같은 절정이 다음편에 곧 이어질 것처럼 기대감에 부풀게 만드는데, 막상 나중 보면 그냥 뭐 시큰둥! 그러나 내가 다음을 기약하는 방법은 그처럼 판에 박은 양식이 아니었다. 아니었다? 과거형이군. 잘못 썼다. 아닐 것이다, 가 맞겠네. 그건 다음이자 새로움이며 환희일 테니까. 무엇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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