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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3. 15. 15:06

   1
 
   나는 최근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할 일은 간소했다. 그 할 일의 하나는 글쓰기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일이 수월하든 어렵든 할 말이 없는 것보다는 많아야 결과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괜찮은 생각을 말로 바꾸고, 다시 세심한 선별을 거친 다음, 글로 옮기기에 나쁘지 않은 어떤 절실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애절한 사랑처럼 나는 애틋한 감정을 동경하니까. 그런데 나는 할 말이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본시 입이 무겁고 공상이 전공이며 수다쟁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한테나 어디서나 머릿 속에 떠오르는 발랄한 상상과 허튼소리를 여과없이 모두 발설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고자질에 이간질은 내 갈 길이 아니었다. 품위를 내팽게칠 수야 있나, 안 그래도 가난한데 지성과 고품격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행복한 기준선이었다. 때문에 나는 글쓰기에 대한 성과가 빈약했다. 그래서 하나의 추론이 퍼뜩 떠올랐다. 그건 바로, 내가 사는 동안 일기를 거의 쓰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은 아닐까 라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어떤 말을 해야 하지, 그보다 우선 상대도 없는데 아니 너무 많은데 아니 넘어오고 나서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무작정 다가갈 수도 없고, 대체 무슨 말로 구애에 나서야 하나, 차라리 속 편하게 유혹하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사춘기 소년의 걱정과 망설임. 마치 그처럼 생각부터 말하기까지의 항진이 어려웠던 건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별로 없는 듯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은 다시 이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 아닐까에 이르렀고, 그러므로 나는 그것의 발단에 해당하는 하고 싶은 일 즉 욕구를 줄이려는 노력을 어쩔 수 없이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이 들고 이거 이거 무슨 수도승도 아닌데 절제라니, 설마 이러다 금욕으로? 아니 될 말이다. 뒤늦게 2군에서 홈런왕을 차지해도 모자를 판에 어? 이미 다 큰 마당에 날마다 순수라는 우유나 마시고 응애응애 삐악삐악 동화책이나 읽으라고? 뭔가 좀 뒤바뀐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 내게 적합한 표어는 그것이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렇다고 삼류에서 일류로 수직 상승하며 복권에 특급 당첨될 리야 있겠냐마는 어떻게 어떻게 부탁해서 과-점퍼를 공수해서 입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키에르케고르를 옆구리에 끼고서 괜히 인상 쓰거나 쇼펜하우어만 마냥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때문에 나는 그런 의혹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간직한 동심의 사심은 혹시 흑심이 아닐까 라는 의심 말이다. 내가 상심을 어찌 부인하겠나. 그러나 그건 환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고로 공상이 어느 날 갑자기 걸작으로 탄생하게 되는 항속성이 유지되든 어쩌든 나는 나를 탈출하든지 신선한 자유를 찾든지 그 어떤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했다. 맞다. 새로움! 새로움에 대한 갈망 새로움에 대한 열망. 깜작 놀랄 만한 새로움. 이도 저도 안되면 조촐한 새로움이라도. 하다 못해 색다른 취미라도 어떻게! 응? 그렇다. 새 신발을 사든 새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든 어쩌든 지금 내 안의 그분은 무조건 새로움을 추구하라고 내게 명령했다. 그처럼 그분의 요구는 새로움을 향한 행진이었다. 그래서 나는 군말없이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의 주인님이 그렇다고 내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모르긴 몰라도 한껏 도도하며 허영심이든 뭐든 열정이 대단한 분인 듯 했다. 그건 좋다만 상황 봐 가면서 사랑을 하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데 그분은 전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일하든 놀든 뭐든지 맹목적이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야생마고 나는 경주마였다. 그분은 자유롭게 푸른 들판을 뛰놀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노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움이란 성과를 위해서 질주하던가 낭만을 지망하며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예술도 절반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처럼 나는 칼럼이든 장편이든 뭔가를 궁리하고 영감이란 황금 과실을 따먹어야 했다. 그런데 나의 화폐 관념과 그분의 이상은 상충됐다. 나는 기다리고 사태를 관망하며 사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분은 당근과 채찍은 물론 어떻게 요술로 날 막 달리게 만드는 요술쟁이였다. 때문에 꼴찌가 분명코 예상되는 분야에서도 그분은 내게 확실한 환상과 선명한 신비를 채근했다. 난 그렇게 항상 뜻 모를 독촉에 시달리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나는 참으로 오랫만에 금주 기간을 마감하고서 차분히 술을 마셨다. 물론 그 목적은 쾌락 반 착상 반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벌써 기분이 저만큼 앞서갔기 때문에 막 들뜨고 기뻐서 날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숙취로 고생하며 반나절을 그냥 허비해버렸다.
   그러든 어쩌든 나는 그분의 지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그분의 지엄하신 주문이 뭐였더라? 맞다. 그건 새로움이었다. 가만 있자, 그분께 어떤 새로움을 선사할까? 아무거나 선물할 수는 없고 강아지 키우기?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일은 너무 식상하고, 새로운 장소로 놀러가자고 하면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걸로 예견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맞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SF 소설 읽기를 시도하기로 했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SF 소설 읽기는 처음? 아니다. 잘 찾아보면 이미 시도했기 때문에 정확히 따지자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첫눈을 그리워하며 1번 작품을 애타게 좋아하는 천성에게 자유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첫날밤이었고 뭐든지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막연한 시도였지만 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므로 지금 들고 있는 이 책, 필립 K. 딕의 걸작 역시 내게는 첫 SF 소설 읽기였다. 제목하여,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 꿈꾸든가 말든가! 누가 시킨 일이라고. 나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몹시 졸렸다. 아 내가 이래서 그동안 SF 소설을 읽지 않았구나 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과연 누구의 명령인가. 나는 책과 함께 가방을 챙겨서 내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는 최근 약속도 없었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 모험, 액션, 판타지, 멜로, 로맨스 이런 장르는 멀리했다. 나야 팔짜 소관이라는 핑계로 사절했다고 하지만 바랄 걸 바래야지. 누가 시켜주지도 않을 테고 그분께 사정사정할 수도 없었다. 그처럼 나는 닥터 누구인 것처럼 사무실에 도착해서 SF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어디서 왠지 샴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카시아 향기인지 고소한 빵 내음이 나는 것도 같았다. 혹시 저 그림 때문인가? 아닌데 그림을 바꿨는데. 나는 예전 그림을 팔고 사무실에 황금 마네킹 상점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걸어놨던 것이다. 비전문가가 봤다면 여지없이 진품으로 착각할 만한 위작을 어렵사리 구했던 것이다. 진품을 사는 것보다 아마 그게 더 여려울 것이다. 그만큼 정말 힘들게 구한 작품인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전문가가 봐도 그 자리에서 모작 판정을 내리긴 어려울 수준이었으니까, 나도 꽤 흡족해 했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에이 잘못 들었겠지 라면서 자꾸 그냥 넘겼는데 그런 소리들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핑~!」
   「얍~!」
   「빵~!」
   「짠~!」
   요술봉을 휘두를 때 들리는 효과음인 것도 같고, 어떻게 들으면 실로폰 연주음의 행진곡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나는 까꿍이란 환청 다음에 오르골 자장가 멜로디를 진짜로 듣고야 말았다. 그건 도저히 본 체 만 체 모른 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그림, 황금 마네킹 상점을 떼어냈다.
   그랬더니 글쎄 그곳에는 저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심연의 통로가 있었다. 원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말이다. 나는 아뿔사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뭐랄까 하루도 빠짐없이 공상의 쾌감을 음미하며 몽상의 단꿈을 만끽했던 노력의 결실일까? 아니면 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4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비밀 통로란 말인가!
   지킬과 하이드가 그동안 마찰이 잦은 우정이었다면 지금은 마침내 싸우다 정들어서 반짝반짝 초롱초롱 사랑의 눈싸움, 바로 그처럼 정답게 둘 다 눈이 똥그래지고 말았다. 오래 참았던 것이다. 그렇다. 마법에 걸린 영심이와 고집불통 4번 타자는 사랑했고 절묘한 합의점에 이른 것이다. 이건 뭐 이의는 전혀 없이 기쁘고 신나는, 토끼와 거북이의 허풍 대회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유례없는 행복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까.
   여자의 호기심 남자의 직감 같은 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건 대책없고 재미없는 허구가 아니라 실화였고, 따라서 나는 풍운아의 계보를 이어 미스테리의 명맥을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야만 한다는 총대를 메고야 말았다. 그건 마치 모텔 백야의 단골 사냥꾼이 졸지에 지옥의 사냥개로 돌변한 일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2

   나는 카페 안에 있는 맨홀 뚜껑을 열고 새로운 세상에 등장했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낮은 포복 높은 포복에다 중력의 뒤틀림을 모두 겪은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행히 카페 안에 인적은 드물었고, 그래서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손님인 척 그곳 분위기에 태연히 동화됐다. 그러다 차를 주문해서 마시며 사태를 사피고 주변을 관찰하며 전망을 지켜봤다. 그런 다음 알게 됐다. 그 세계와 전 세계의 차이점은 전혀 없다는 것을. 다만 딱 하나. 그건 바로 하반신이 대리석이라는 점. 나는 덜컥 놀라서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기서 확인해보니 다행스럽게 팬티 안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하체가 대리석으로 변한 걸 깨닫고 팬티안의 정경이 무슨 애들 장난감 같은 고무라거나 특수 대리석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건 예전과 똑같았다.
   그때 나는 당근 쥬스 색깔, 잔잔한 하늘색, 회항 경로, 이곳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상규, 우격다짐이든 우물쭈물이든 내가 축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같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의 모든 주의력은 단 하나로 집중됐다. 그건 무엇이냐? 무엇이겠나, 순결이라는 상표의 팬티 안에 대리석이 아닌 그것의 건강이지! 내 허벅지가 대리석으로 바꼈는데 뻔트마의 깜짝 변신에 따른 불이익은 있나 없나를 확인해 봐야 하는 건 남자의 본능이자 사람의 본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머나이저는 구경도 못해봤다. 그러다 나는 알게 됐다. 그 동네가 우리 동네란 것을. 바뀐 건 정말 대리석 하체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모험이 시작될 뻔 하다 말았다며 실망했고, 음험한 상상력의 발동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나는 멋쩍게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글을 읽다가 집중력이 잠깐 떨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관성에 따라 읽기를 지속하신 분은 잠깐 하다 뭐지, 뭐지 그러실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멀뚱멀뚱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나는 기분이 이상했고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면서 비몽사몽, 어리버리한 상태가 지속됐다. 그러니까 말하는 멧돼지도 아니고 하체만 대리석? 그러다 나는 저 소파 뒤에 걸려 있는 액자의 뒷면을 들여다볼까 말까 망설였고 잔뜩 겁을 먹었다. 따라서 나는 차마 액자를 들추지는 못했다. 그러다 도나에게 연락이 왔다.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도나는 새로 사귄 친구다. 나는 마라의 친구를 파도타기로 공략했고, 그 중에 미모와 지성을 겸비할 뻔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놓친 가련한 여주인공 비운의 숙녀 역할로 잘 어울릴 것만 같은 한 친구와 친해졌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도나였으며,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3

   「도나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니?」
   「어떤 남자? 그러니까 애정? 음 그런 남자. 우정은, 단짝이 많았던 남자. 사교성은, 성격 좋다는 말을 몇 번 들었던 남자. 남자에게, 넌 너무 예리해 라는 지적을 들었던 남자. 또 여자에게, 뭘 좀 아네 라는 은근한 칭찬을 들었던 남자.」
   「우리 도나는 자꾸 뭔가를 들었던 남자를 좋아하는 구나. 하긴 진짜 성격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듣지는 않으니까. 뭔 말인지 알겠음. 그렇다면 내가 내 입으로 자랑하는 건 내 자유지만 도나의 마음에 들려면 타인에게 그 공증을 받아야 하는 구나. 그렇지? 하긴 그게 낫지. 밖에서 칭찬을 받는 게 낫지 굳이 내 입으로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없으니까 그게 훨씬 기분도 낫고 효율도 좋겠군. 그런데, 어렵다. 오래가겠다. 응? 얘 완전 겉과 속을 다 보네. 응? 왜, 내 말이 틀려? 그런 남자는 많지 않아. 그건 한마디로 남자가 내 친구에게 자기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고 싶은 바로 그런 남자야. 응? 남자들한테 물어보세요. 그런 남자가 많은가 많지 않은가를. 그러나! 그와 같은 신념이 일단 있다는 건 우선 반겨야 할 일. 난 그거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있잖아. 하나 더. 싫은 남자에 대해서!」
   「싫은 남자? 있지. 있어. TV, 라디오, 잡지에 나오는 하고 많은 얘기들 뿐만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등장하고 친구끼리 쉼 없이 말할 테니까, 음 그 중에 딱 하나만. 그건 바로 햄버거 먹을 때 콜라 없이 먹는 남자. 무슨 체험기 쓸려고 일하는 거야? 그냥 앞뒤 보지 않고 막 달리기 위해서만 사는 거야? 그게 뭐야! 오빠. 검소함과 짠돌이의 차이가 뭔 줄 알아? 그거야 그거. 용돈 아껴서 써야 하는 소년도 아닌데, 그냥 궁금하고 심심하니까 군것질하느라 값싼 햄버거 먹는 거도 아닌데, 남자들끼리 만나면 으쌰으쌰할 때는 척척 내. 응? 그런 분들도 남자 세계에서는 숨거나 피하지 않는다고. 곧 남자 사이의 우정은 별 문제없지. 중간은 가니까. 그런데 웬만한 봉급이나 전문가들 주급에 해당하는 돈은 사이좋게 잘 나누어 내거나 내가 사면서 응? 대관절 왜 햄버거는 꾸역꾸역 달랑 제일 싼 햄버거만 음료 없이 먹냐 이 말이야. 물론 혼자서는 그럴 수 있어. 안될 게 뭐야. 그래도 돼. 왜 안 돼? 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혼자가 아니야. 기분도 괜찮아. 모험도 기다리며 달릴 수 있어. 그런데 노-콜라는 뭐 자존심이다 그건가, 밤에는 황제 낮에는 뭐 허당? 왕자와 거지 같은 동화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인데,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지금 검소함과 짠돌이의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말하는 거라고! 응? 짠돌이란 낱말의 어감이 좀 어째서 그렇지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사정 어려울 땐 아껴쓰는 게 당연하지. 그게 왜 나뻐. 지금 내 말은 그 말이 아니라고. 스푼과 나이프와 포크 각 10개씩 사용법을 아는 고풍스런 식사 예절을 도대체 왜 모르느냐, 그걸 따지는 게 아니라고. 응? 괜히 이런 주제 나오면 인상 팍 쓰는 남자, 왜 없겠어! 그보다는 나는 왜 그런 주제에 대해서 인상을 쓰는가, 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주제와 원리와 행간은 뒷전인 체 내 즉흥적이고 습관적인 말로써 타인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좀 많나! 생활 다큐멘터리에 나오듯이 결혼식도 못 올리고, 집도 단칸방에, 그만그만한 일이지만 구슬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고 또 성실하고 형편 뻔허고, 차도 없고 주로 걷고 아니면 대중교통만 이용하며, 그런데 밝고 해맑게 인터뷰하는 사람도 있어. 많아. 정말 많아. 그런데 그거도 아니고 남들 할 거는 다 해. 자존심도 최상이야. 인기는 없지만. 그런데 정작 햄버거 먹을 땐 최저가 햄버거만 달랑 들고 콜라 없이 먹는다? (설레설레) 노노노! 남자들 세계가 알고 보면 물을 흐리는 문제아들이 많아. 중간은 가도 뭘 모르는 허당들 천지야. 여자도 물론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기분 좋을 때 분위기 좋은 자리에서 N분에 1 하기로 했다가, 그 날 지나서는 미루고 미루고 끝까지 미루어 상대를 포기하게 만드는 유형도 남자들 세상에서는 소문이 나. 그런 일 흔해. 왜냐하면 시간 길어지면 흐지부지니까. 돈 거래도 그래. 알고 보면 십중팔구는 빌리지 않아도 될 돈이야. 정말 필요한 의논이 아니라 그다지 불필요한 속사정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도 적합하지 않은데 맹숭맹숭한 호인은 또 빌려줘. 그러면 빌린 후 값지 않는 부류는 또 그쪽에 줄을 서게 돼. 응? 아무튼 햄버거 먹을 때 콜라 없이 먹는 남자! 그 비싼 술값과 아까운 벌금도 내면서, 최신형 기기는 어쩌다 덜컥 사면서 정작 햄버거 먹을 땐 최저가 햄버거에 심지어 콜라도 없이 먹어. 그거 대체 뭐지? 아, 슬퍼! 대체 그건 뭐지? 자학인가, 아닌데! 풍류일까,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뭐 코메디? 웃기지도 않지. 그렇다고 그걸 행위예술로 봐줄 수도 없고. 중간은 없어 그냥.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고. 그건 정말 도대체 뭘까? 응? 고액과 지폐는 시원시원하면서 동전이라면 덜덜 떨어. 그거 반대로 되야 하는 거 아니야? 장비발은 괜찮은데 실력은 모자라도 돼. 그런데 유흥의 세계는 훤헌데 화폐 최저 단위 수수료는 벌벌 떨어. 오빠 있잖아, 나 세금 잘내는 걸로 상 받아야 한다는 거 알지? 어쨌든 그건 유행도 아니고 지금 세대의 행동 방식도 아니고, 뭐지? 그건 정말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 차리리 그럴 꺼면 드라마에서처럼 대놓고 말하는 게 나아.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네요 라고. 하긴 것도 어느 정도 유복해야 그런 말이 나오겠네. 사람도 좋고 인성 안 빠지고 뭐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고 완전 자랑할 만하...지는 않을지라도 바로 그러니까 호박이 제 발로 굴러가지 않지. 괜히 그런 게 아니야. 남자가 바보가 아니듯 여자들도 바보가 아니야. 미남이 왜 싫겠어. 그러나 나랑 안 어울리게 몇 계단 위를 보지 않아 여자도. 남자가 말하는 중간과 여자가 말하는 중간은 너무 다르니까 그게 문제지. 또 그와 약간 다른 경우도 있어. 현재 형편이 굉장히 괜찮은 남자가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그래서 차도 자주 바꾸고 밤의 세계를 누비지. 신차 가격도 세세한 옵션에 따른 제일 마지막 자리까지 정확히 알아. 그런데 정작 술집에서 꽤 비싼 술 마시는 거야 그렇다 쳐도, 마담이 연말 선물을 신경 써서 챙겨주는 단골에다 정말 좋은 밤의 세계에서 계산할 때, 그때도 제일 마지막 자리 동전까지 정확히 받는다? 그건 또 정말 뭐지? 일부러 그 재미 때문에 고액권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지도 몰라. 물론 여자들에 대해서도 사연을 모으면 많아. 남자든 여자든 애청자 엽서로 이런 얘기 모으면 아마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을 걸. 알고 보면 이상한 사람들 꽤 많다니까. 내 주위에 드물 뿐이라서 그렇지.」
   「아 그렇구나. 나는 도나가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랬군.」
   「미안 미안. 내가 좀 말이 많았지? 오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 아니야 아니야. 끄떡없어. 멀쩡해. 나 원래 듣는 거 좋아해. 그럼. 거짓말 아니야.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나보다 더 지인과 친구의 말을 다소곳이 경청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런데 왜 갑자기 카페에 손님이 막 쉴 새 없이 들어오지?」
   「커피 맛이 괜찮나 보지 뭐. 하여간, 그렇지? 오빠가 그럴 줄 나도 알고 있었어. 내가 사람 볼 줄 안다니까. 오빠 표정 보니까 처음에는 조롱할까 달랠까 부러워할까 하더니만, 내 말에 적극 동조하는군. 좋았어.」
   「허허허. 그런데 도나 있잖아. 혹시 너의 허... 허...」
   「허, 뭐? 내 허벅지 혹시 대리석이냐고? 오빠 있잖아. 내가 마음만 착한 게 아니야. 응? 어떻게 보여줄 수도 없고 큰일이네. 아 너무 아깝다 내 청춘.」
   「뭐? 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오빠 정말로 그렇게 물어볼 생각은 아니었지? 그렇지? 그럼. 에이 그걸 어떻게.」
   그날따라 왠지 도나의 입술이 빛났지만 나는 도나의 허벅지가 대리석인지 대리석이 아닌지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입술과 대리석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게 뭐야!
   그 후 나는 도나와 헤어진 다음 실내 수영장과 해변에 놀러가서 확인했다. 그걸 단 몇 시간만에 뚝딱 헤치운 건 아니었다. 대충 2, 3일 정도 걸렸다. 그렇게 확인해 봤더니 대리석과 비슷한 하체들이 많고 투명하거나 반투명하거나 대체로 사람들의 다리가 대리석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하체가 대리석과 비슷했다 뿐이지 완전한 대리석은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이 나와 다른 부분이었다. 내 다리는 대리석인데 왜 사람들의 다리는 단지 대리석일 뻔 하다 말았지? 왜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만 봐도 난 바보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뭔 이상 증상에 따른 그런 뭐 대리석 허벅지 신드롬? 그러고 보니 이건 성장기 때 겪었던 감추고 싶은 그런 일과 비슷한 듯 했다. 오금과 허벅지와 엉덩이에 뾰루지가 약하게 또 심하게 났던 일. 청춘의 상징이라는 여드름도 얼굴에 났음. (참고로 손에 땀이 많다고 고민하는 젊음은 그게 좋은 현상이란 걸 나이 들면 알게 됨) 그러나 그건 보기 뭐한 피부병이었던 반면 이건 매끈한 대리석이었으니 이렇다면서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당분간 이 일에 꽤나 매달려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찾고, 왜 대리석 다리로 변했는지, 또 왜 그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질 테니까. 정말 아무리 봐도 내 다리는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과 또 다르게 그 색갈이 유난히 또렸함과 동시에 투명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막 실핏줄과 그 내부까지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정말 뼛속까지 작가인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핏줄은 보였고 그 밑도 어느 정도는 보였으니까 하는 말이다.
   이로써 나는 알게 됐다. 뭘 그렇게 알게 된 게 많으냐고? 더 이상 알게 없어서 권태로운 것 보단 나을 수도 있음. 아무튼 SF 소설과 영화는 재밌을 수 있지만 SF 극의 주인공이 되면 그만큼 신기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그렇게 나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 할 말을 선출하고 할 일을 탐구하는 아저씨가 되었다.



   4

   나는 커트에게 내 경험 SF를 고백했다. 커트는 도나를 통해 알게 된 친구다. 커트와 나는 내 사무실로 함께 가서 확인할 걸 확인하기로 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아니야 아니야. 믿지 마. 왜 믿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게 못 돼. 그럼. 난 뭐랄까 쾌락을 모면하고 위엄을 지키는 생활에 대해서 터무니 없는 싫증을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 이 모두는 내가 원했던 점괘를 상상으로 막 그려낸 데 지나지 않을 거야. 대리석 다리? 이게 뭐 어때서! 말도 안 되는 SF는 믿을 게 못 돼. 난 이게 모두 엄정한 현실이라는 걸 전혀 의심치 않아. 그럼. 난 말야, 미쳐도 단단히 미친 그런 돌아이는 아니니까 말이지. 암. 내가 정신병자면 정신병원에 있어야지, 어? 여기서 어떻게 너랑 얘기를 하겠니!」
   「그렇지? 장난이지? 나도 처음부터 농담일 거라고 예상했어. SF 그게 실제로 응? 말이나 되니! 차라리 우리, 인생은 아름답다고 간주하는 건 어떨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좋다 싫다 좋다 싫다도 아니고, 하루는 모차르트와 모파상 하루는 베르디와 오 헨리를 끼고 사는 너가, 응? 대리석 다리에 비밀 통로라니? 일하기 싫은 교묘한 구실치고는 너무 황당하지 않니? 그렇자나, 너무 구식이자나! 그래서 하는 말이지. 그럼.」
   「변명하고 싶지 않아. 공부하기 싫어서 꾀부리는 애들처럼 일하기 싫은 심정을 커트 너한테 이처럼 속절없이 들켜버리니 더없이 뜨끔한데. 하지만 난 진짜 시원섭섭해. 오히려 기쁘다구.」
   「좋았어! 루돌프 주인공이 되다 같은 동화책 제목은 잊어버리고. 자, 친구! 오늘은 뭐하고 놀까?」
   나는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기분이 나빴으니까. 하긴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 같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커트의 허풍을 내가 순진하게 다 믿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조없이 이름을 또 바꾸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조심스럽게 다스렸다.
   그 대신에 나는 낸시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사랑 고백이 아니라 SF 고백을. 더구나 저 액자 뒤에서는 계속 내게 천상의 꽃향기, 페퍼민트-레몬그라스-유칼립투스, 상쾌한 스피어민트 내음으로 내게 뭔가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향기는 정말 변화무쌍했다. 고급스런 바닐라향, 머스크향, 텐져린, 베르가못, 핑크베리, 네롤리, 체다우드, 로즈, 베티버, 화이트머스크, 시나몬, 바이올렛, 초록사과, 모로칸자스민, 불라리안로즈, 라이트재라늄, 샌달우드, 나르시스...... 보도 듣도 못했던 천상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이건 정말 동네 아저씨의 영웅담도 허세남의 믿지 못할 뻥도, 소문난 말괄량이가 들려주는 어젯밤 이야기도 아니었다.
   낸시와 나는 만났고 얘기를 나눴다.
   낸시는 상담 후 진단을 고민하다가 처방을 말해주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믿기는 힘들지만 둘 중 하나는 가능하다고 봐. SF라는 게 원래 그렇잖니. 그 장르를 구분하면 두 가지야. 첫째 뭔가 잘하면 있을 법한 일, 둘째 아예 가망 없는 일. 첫째는 가능성이 있고, 둘째는 없어. 둘째는 말이야 아예 만화영화처럼 현실적으로 따졌을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응? 커트는 뭐라는데? 걔는 아마 그랬을 걸. SF는 꿈도 꾸지 말라고!」
   「맙소사!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커트는 원래 그런 친구니까 그렇지. 아 나 얘 아직도 동심으로 가득차서 꿈으로 사랑을 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려 그러네. 왜 그래 너? 어른은 진심만으로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는 거, 모를 나이는 지나지 않았니? 어떻게 열정만으로 저기까지 뛰어갈 생각만 하니? 내가 생각하는 사랑대로만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왜 몰라!」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할까?」
   「넌 이제 어떻게 하냐니! 내가 늬 엄마니? 너 이제 어린이가 다 됐구나. 지금 내게 의지하는 거니? 일단 이건 내가 봤을 때 뭔가 잘하면 있을 법한 곧 말이 되는 SF야. 전혀 황당한 SF가 아니라. 알겠니? 따라서 내 추론이 맞다면 늬 말마따나 대리석과 액자 뒤 통로가 동시에 발생하지는 않아. 왜? 왜냐면 그건 만화영화 같은 일이니까. 사랑은 무턱대고 내 모든 걸 다 주는 게 아닌 것처럼. 그건 주제가 다르니까 왈가왈부하니는 말자고. 불행한 사랑은 청춘의 절망을 이겨내야 하는 오뚜기 같은 것. 지금 이건 말이야 미스테리는 미스테리인데, 문제는 미스테리의 망신이라는 것! (딱) 응? 그렇다고. 원맨쇼는 TV에나 나오는 거고, 현실에서 어떻게 대리석 허벅지와 액자 뒤 비밀 통로를 둘 다? 그건 말이 안 돼. 만약 그렇다면 우린 졸지에 외계인이 되는 거지. 그럼. 너의 그 신비감에 끌리는 본능은 잘 알겠는데 섣불리 환상을 믿지 말고 이성적으로, 어른스럽게, 이제야말로 추리력과 탐구심을 발휘해야 하는 시기란 걸 명심해. 응? 천사들의 합창은 다음에! 요정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고? 청혼을 거절 당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쾌활한 인생이니 눈물 젖은 일기장이니 그런 멜로드라마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정말 그럴 때도 됐자나. 그러니까 그렇게 겁 먹을 거 없어. 응? 이렇게 딱 액자 뒤를 보면... 액자 뒤를... 그게...」
   낸시는 액자를 들어서 내려놓은 다음 액자 뒤에 있는 통로를 보고서 소파에 잠깐 앉아서 실신했다.
   그렇다 액자 뒤에 통로가 있었다.
   낸시가 깨어난 다음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가봤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통상적인 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사무실로 돌아왔고 다시 액자를 걸어뒀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취직해. 그 카페에. 아님 평범한 손님인 척 가장하며 단골이 되라고. 너처럼 깜짝 출연하는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어쩌면 늬가 처음일 수도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그래. 넌 그냥 대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라고.」
   나는 낸시와 헤어진 다음 그 카페로 갔다. 도착했다. 그런데 카페 내부에는 내가 뚜껑을 열고 나왔던 그런 뚜껑처럼 보이는 장치는 바닥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이건 대체 뭐야! 것 참 이상하네. 내가 말이야 그래도 자칭 세상에 둘도 없는 선동가씩이나 되는데... 나는 완전 골탕 먹은 느낌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거 이거 보통 일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단단히 마음 먹고 다음 변화를 관망하기로 했다.



   5

   인간은 믿기를 좋아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믿고 싶어 하는 습성을 타고난 것이다.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그건 처음부터 믿고 끝까지 믿고 싶다, 속기 싫다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만약 속더라도 가짜를 믿은 대가 즉 그 거짓 환상, 그리고 속고 난 다음의 실망 그 둘을 견주었을 때 무언가 극적이기를 바라는 것 아닐까? 적어도 전자와 후자의 등호보다 확실한 승패를 좀 더 선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전자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우리는 전자와 후자가 엇비슷하거나 애매하면 재미없어한다. 무승부? 하품 나온다. 경기장에서 아유하는 관중이, 연주회에서 인상 쓰는 관객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걸 다 알기 때문에 미리 심심해하며 오늘도 TV를 켰다 끄고 내일도 핸드폰을 귀찮게 할 것이다. 적어도 친구와 수다를 나누며 우정을 확인하거나 사랑이든 공이든 뭔가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고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장에서 남자친구에게 팝콘을 사오라고 시켰더니 진짜로 달랑 팝콘만 사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속고 난 다음의 실망' 그 후자라는 반전이 더더욱 감동적이면 우리는 흥분하며, 해피엔딩이면 살짝(?) 놀라워한다. 때문에 여자의 호기심은 영화의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 젊은이 뿐만 아니라 드물게 고상한 노인께서도 추리소설을 읽으신다. 그러므로 사회는 서로 관측하고 속셈을 살피며 속마음을 추측하는 눈치와 빈말과 가식의 기술은 발달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결국 사람의 생각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환희만 믿겠다, 밝은 기쁨과 짜릿한 쾌락과 찬란한 열락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나는 속기 싫다, 그러나! 다만 너는 나를 믿어야 하고, 나는 너를 의도치 않게 속일 수도 있다 라는 세상사의 이치를 우리는 깨우치게 된다. 어떤 어른은 내가 언제? 그럴지도 모르지만! 세상사의 이치? 그건 뭐 대단히 어려운 법칙도 썩 심오한 철학도 아니다. 믿음과 속음이 내게 유리하면 좋고 내게 불리하면 싫다 나쁘다, 바로 그것이다. 사랑의 맹세조차 영원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모순은 빈번하고 내게 유리한 믿음과 속음에 대한 기준 역시 알프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인생에 대해서 위험 회피냐 즐거운 모험이냐 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든 어쩌든 헛똑똑한 어른들은 매번 속는다. 몰상식을 꺼려하지만 비이성적이고, 비윤리를 타도하기를 원하지만 속절없이 최소한 소비에 대해서 비합리적이기 일쑤다. 믿는 건 본능이지만 믿는 것은 물론이요 속고 속이는 것도, 믿거나 말거나,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심지어 무관심까지 모두 함께 인생이니까. 사람이란 동물은 원래 그런 거니까. 게다가 속인 자에게 온전히 책임을 지우기도 힘들고, 속은 자는 만인에게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속아도 알면서 속기도 하고, 처음부터 날 절묘하게 속여주라는 주문이 가능한 분야도 있다. 광고 속 카피라이트를 보라. 아빠의 잔소리와 할머니의 진언, 다 같은 말이다. 물론 <아무도 믿지 마!>가 있으면 <묻지 마>도 있고 <엄마한테 말하지 마>도 있다. 더군다나 속고 속이는 인생 그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뻥도 좀 치고 허세도 적당히 허영심도 약간은 있어야 재밌고 너와 나의 미덕이 통한다. 그런데 미래에는 농담과 거짓말을 로보트가 밥 먹듯이 한다면, 그 녀석이 나보다 말발이 훨씬 뛰어나다면 장점도 있겠지만... 아 (설레설레)! 단지 장난스런 말과 행동 역시 너와 나 그 기준은 불명확하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거짓 환상이라는 전자는 요컨대 사랑이고, 속고 난 다음의 실망이라는 후자는 다른 게 아니라 변심인 것이다. 변덕의 대명사가 무엇인가는 논하지 말기로 하자. 악마가 새로움을 좋아하듯이 천사는 아마도 변화에 약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시간은 늬 편 내 편이 없다. 조금은 핑계 같지만 그런 세상에서 살다보니 나는 엄살이 늘었고 넉살마저 발전했다. 어느새 응석과 더불어 얕고 옅게 재간만 키우는 익살꾼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타적이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라는 이기주의자는 어느 날 어떤 거짓말 같은 일을 믿게 됐다. 그것은 무엇이냐!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 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돌아갈 필요가 없을 만큼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면, 단지 하반신이 대리석이라는 점만 빼놓고, 내 사무실로 배달된 승마머신을 진짜 말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뢰감을 굳건히 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내 공상 같은 꿈을 누군가 듣는다면 차라리 놀이공원의 회전목마가 말떼로 바뀌는 걸 바라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분은 그분이고 나는 나니까 나는 소신 있게 내 꿈을 믿기로 했다. 그럼. 내가 내 꿈을 믿어야지 남의 꿈을 믿겠나! 그런데 어떻게?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은 유보했다.
   그 다음에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할 만큼 하고 나서 쉬기로 했다. 나는 소파에 거만하게 벌렁 누웠고 TV를 켰다. TV에서는 최신 드라마가 재방송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그런데 뭐야 이건! 그 드라마의 내용은 바로 내 이야기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남의 카페를 인수한 사장이 장사도 잘 되지 않고 해서 이리저리 카페 내부를 살피다가 액자 뒤의 비밀 통로를 발견해서 미래의 자기 사무실 바닥 카페트 밑 비밀 문으로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한쪽 다리와 한쪽 팔만 대리석으로 변했고, 즉 신체의 절반은 인조인간으로 대체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드라마는 등장 인물도 많고 사건과 달콤한 로맨스와 시간 여행 미스테리까지 포함된 명작이었다. 시청률도 기록적이었고, 장안에 모르는 사람 하나 없이 파죽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난 이제 알게 된 거지. 다리만 대리석 허벅지면 뭐하냐고! 이건 꼭 그런 농담인 듯 느껴졌다. 키 빼고 다 가진 남자! 참고로, 다비드의 출신을 또 걸고 넘어질 수는 없으니까.
   그럼 뭐야, 내 쪽은 등장하는 청춘남녀도 그만그만하고, 재미도 교훈도 감동도 뭐 하나 볼 게 없다? 나는 어떻게 급한 데로 기획의도를 만들고 사무실 벽면에다 인물 관계도랍시고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이고 막 그래야 하나 라면서 고민 되기 시작했다. 색감으로 치자면 내쪽은 뿌연 회색에 우중충한 흑갈색과 고독한 검정. 저쪽은 부드러운 연분홍색, 고혹적인 청보라빛에다 진지한 파랑과 경쾌한 다홍빛으로도 모자라 오색찬란한 파스텔톤? 이런, 젠장!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했겠지 해도 진작 했겠지. 나만 허구한 날 극도의 희망을 품으며 뭐든지 묘한 상쾌함에 짜릿해했지만 알고 보면 기대는 상심이었고 예감은 꽝이었다. 항상 그랬다. 공상만 쉬지 않았다 뿐이지 현실은 매번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던 것이다.
   와, 드라마의 주인공은 신비한 첫인상에 흔치 않은 행운에 종횡무진 맹활약! 이쪽은 대리석 허벅지는 통 쓸 데가 없고, 어떻게 하면 승마머신을 대리석으로 아니 진짜 말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허황된 몽상이나 하고 있으니... 쯧쯧쯧! TV 드라마는 벌집을 쑤셔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내가 누군가. 이럴 땐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다. 역전승을 위한 상은 다 차려진 거나 마찬가지니 이제 숟가락을 올리는 일만 남았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구구한 사연, 구차한 변명, 변변찮은 말솜씨는 물론 들끓는 질투심을 안고서 미스테리아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다. 매번 나는 아쉬우면 마라를 찾았다. 그렇지만 정치적 빌미든 어설픈 명분이든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게다가 이름하여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아닌가.
   그런데!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굳게 닫혀 있었다. 좋은 징조다. 마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얘가 남의 이목을 신경 쓰나, 혹시 날 피하는 건가. 난 그냥 잠깐의 기분으로 이렇게 결론 냈다. 마라가 나를 싫어하나 봐! 라고. 그렇다고 오랫만에 바텐더와 재회할 수도 없었다. 속된 말로 깽판, 점잖은 말로 소심한 오해랄지 작은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 피해가야 할 술집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는 아니었다. 이건 단지 슬럼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호 미스테리아를 읽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고, 격월간 이번 부 미스테리아를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미스테리아를 읽으면서 알게 됐다. 사무실에서 봤던 TV 드라마의 원작이 미스테리아에 동시 연재되고 있다는 것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느꼈다. SF는 무슨, 대리석 다리는 대리석 다리고, 중요 부위만 대리석이 아니면 천만 다행이자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렇지만 잠시 후 익살꾼에 능청꾸러기, 잠꾸러기 혼자 갖다 붙인 별명도 많은 데다 어째 거짓말이란 진실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서 잠깐 불편했다.



   6
 
   재미없는 오락은 꽃이 피지 않는 과일인 무화과고, 팔리지 않는 상업은 외로운 꽃이자 영양가는 듬뿍 함유되어 있을지언정 좀처럼 탐스럽지 않은 과일이다. 그러므로 자극적인 놀이와 즐거운 유희와 심심하지 않은 오락만 내내 끼고 살았더니? 촌스러움에 물들고 인스턴스 식품에 찌들며 세파에 시달려 어쩌면 행복하지 못한 체 늙어갈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왜냐하면 대체로 인생은 허상이고 인기는 대게 허당기 같은 모래성처럼 부질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겠냐마는. 그런 삶은 아 글쎄 환상은 남의 것, 행복은 허영, 신비는 허망, 어복은 말짱 꽝이더라 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진리는 바로 심심치 않게 들리는 소문이고 늘상 만나는 푸념이자 유익할 듯 무정한 훈계다. 그래서 어른들은 다정할 듯 하나 무익한 시간 보내기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오늘도 분주하다. TV 채널은 너무도 많고, NC는 고집스럽게 사람 가려서 받으며, 쇼핑도 오락도 예술마저 서로 날 선택하라고 난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부끼는 허당주의보를 안내삼아 오늘도 술집을 들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삶을 산다. 어망은 비었고 약속은 없으며 (있어도 시시하고) 야망은 이미 옛날에 저 멀리 날 떠났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렵게 결심해서 읽기 시작한 SF 소설이나 마저 읽기로 했다. 나는 SF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와! 처음으로 읽는 SF 소설을 완독했더니, 하기야 난 여태 첫키스도 못해봤으니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니 SF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예전엔 왜 미처 몰랐을까?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그럼? 그렇다. 내가 읽은 소설은 SF였고, 내 다리는 아직 대리석이었다. 굳이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볼 필요도 없었다. 그걸 왜? 누가 아니래? 더군다나 SF 소설은 하나도 재미없었다. 억지로 읽었다. 실은 다 읽지 못했다. 완독했고 감명 깊었다는 말은 뻥이다. 거짓말이란 말이다. 사실은 읽다 말았다. 대충 넘겨봤다. 그럼 그렇지.
   이처럼 내 삶은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아니라 그냥 보통 램프였다. 꼬리를 흔들 때가 있으면 꼬리를 감출 때도 있는 법이니 뭐 괜찮은 일이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 이참에 나는 무정한 아티스트병은 말끔히 치료되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야호~!
   그런 다음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뭘 할까 생각하다가 서점에 가기로 했다.
   나는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을 구경하다가 내가 읽은 SF 책이 보이길래 펼쳐봤다. 그런데 내가 읽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럼 난 대체 뭘 읽은 거지? 라면서 나는 다른 SF 소설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그 장르에는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서 읽어봤다. 뭐시여,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나의 온 감각과 마술 같은 주의력을 사로잡았고, 거짓말 같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런 흡입력은 여태 보도 듣도 못했다. 난 도저히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어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1페이지와 2페이지를 사진 찍어서 소셜 네트워크에 두 장의 사진으로 올린 것처럼 나는 그 서두를 감성으로 숙독하여 이성에게 고지했다. 그 첫 페이지를 나는 대충 외워버렸다. 내가 숙지한 내용을 옮기자면 이와 같다.
   제목: 새로운 인생
   내용: 나는 첫눈을 좋아했고 낭만을 동경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첫날밤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고조되는 희망에 대한 기다림의 즐거움이란 것을. 춤추고 노래하며 웃고 떠들어도 기쁨과 재미는 내 곁에 머물 듯 머물 듯, 안길 뻔 하다가 스쳐지나갈 뿐이다. 마치 비논리적인 추측과는 달리 교묘하게 불행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예언처럼. 그게 인생이니까. 사랑을 기대하고 행복을 예감하는 그 기분과 분위기가 절정이다. 나머지는 다 발단이고. 게다가 전개는 속임수다. 심지어 결말은 심심함 아니면 허무함만 남겨놓는 뻔한 책략이다. 그렇지 않은 생각은 잡념이고 말은 뻥이며 행동은 성과를 향한 집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을 따돌리고 체념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화신인 쾌락은 (우리를?) 날 가만놔두질 않는다. 더군다나 광고는 유혹하고 꿈은 변덕쟁이다. 나아가 사랑은 좀처럼 믿기 힘들고 이상은 더 믿기 힘들다. 영화도 재미없고 책은 대체로 읽어도 소용없다. 새로움을 탐색하는 데 지쳤고 추측은 어느새 지겨워졌다. 내게 남은 갈망이란 그런 것 뿐이다. 가령 일기장에 적고 싶은 그런 일들. 웬 낯선 풍문이 느닷없이 불어와서 지나가는 숙녀의 치맛자락을 들추면 부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눈을 가린 체 볼까 말까. (대놓고 보기에는 왠지 미안하니까?) 귀여운 강아지를 보며 기겁하는 어린이를 보면서 천진한 웃음을 꾹 참기. TV 드라마에 나오는 고양이라면 치를 떠는 아가씨와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대견해하기. 나는 그처럼 젊었고 세상과 인생과 사랑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청춘은 멀어져가며 사랑은 부질없더라? 아니다. 나에게는 칼럼니스트라는 어엿한 직업이 있고, 숨겨놓은 환상머신이란 믿는 구석이 있으며, 지금 이렇게 장편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목표는 SF다.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지가 첫 도입부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책의 저자는 나였다. 아니 이럴 수가! 난 그것도 모르고. 순간 옆에서 서점 직원의 투덜거림이 조용조용히 들려왔다. 아마도 그 책은 곧 밀려날 거라는 불길한 예고에 가까운 혼잣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장르도 허접한 방황기에 가까운 드라마인데 작가와 출판사가 억지로 우겨서 SF 쪽으로 잘못 분류되어 있다는 눈치였다. 하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그러든 어쩌든, 내 다리는 아직 대리석. 나는 허당. 하지만 무작정 사랑에 굶주린 늑대로 돌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상큼한 숙녀를 만난다면 분위기 잡고 읊을 명대사도 미리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건 뭐 나의 그 국가대표 상비군의 지위 같은, 필수품에 해당하는 준비력이니까. 아니 신들린 애드립이라고 해야 할까? 우웩! 하여간 그건 바로 이런 대사였다.
   「허영심의 논리는 선망에 대한 기쁨이자 아름다움이죠!」
   꺄악~! 오그라들지 않을 수가 없네 그래.
   아무튼 나는 승마머신을 진짜 말로 바꿀 궁리에나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할 일이 그랬다면 나의 할 말은 이랬다.
   나는 어제를 조망했고 현재를 탐지했으며 다가오는 내일을 유망했다.



   7

   대리석 다리로 사는 삶, 아아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나는 이대로 침체된 생활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뭔가 색다른 변화와 상쾌한 새로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웨건을 버전만 새 것으로 바꿀까? 그리고 그 점박이 이름이 뭐드라 달마시안, 맞나? 그 큰 개를 막 태우고 다니면서 공원의 여자들을 꼬실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추근덕거릴 수도 없고 쓸데없는 염문에 엮여서도 안되니까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려볼까? 그렇지만 잘 적응한다고 할지라도 운동도 같이 하고, 사우나를 가던 연애를 하던지 내 하체를 보여줄 기회가 분명코 있을 텐데...! 내내 피하면 의심이 증폭될 테고! 그러다 대리석 허벅지를 들키면 추방? 외면? 따돌림?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재밌는 기분에 좋은 환경과 기쁘고 품위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혼자 놀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멀리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얼굴에 화장을 할 수도 테니스를 배울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동물원에 구경 갔다 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집을 나섰다. 아, 맞다. 집이 아니라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웬 조랑말이 건너편에 있었다. 얘는 날 반기는 게 아니라 봄을 기다리나. 주인은 어디 가고. 혹시 얘가 다른 대리석 허벅지 인간의 주인인가? 그런 상상은 무익하고 숨겨진 내막을 괜히 들추며 소풍 분위기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나는 냉큼 동물원으로 출발했다. 거기 가면 당나귀가 문젠가. 귀가 큰 동물들은 물론이요 온갖 동물을 다 볼 수 있는데. 게다가 근처 호수 공원에 가면 혹시 외로운 아가씨가 혼자서 한껏 멋을 내고 외롭게 걷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그리고, 사무실 앞의 그 조랑말은 하체가 정상이었다. 맞다. 동물원의 동물들도 혹시... 에이 아닐 꺼야. 설마! 나는 동물원에 갔다.



   8

   동물원에 도착하여 구경한 내용은 건너뛰겠다. 별다른 일은 없었으니까. 아, 있었다. 동물원의 동물들도 모두 하체가 대리석이었다. 코끼리의 허벅지도 대리석, 사슴도 치타도 늑대마저 모두 하체가 대리석이었다. 나는 당연히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SF가 이래 그러면서. 그런데, 맙소사!
   나는 깨달았다. 내 사무실 앞에서 만났던 조랑말인지 당나귀인지 그 녀석! 난 느꼈다. 비장의 카드는 녀석이 쥐고 있다는 것을. 그게 설령 원페어도 못되는 7번 다이아몬드일지 아니면 Q 투페어일지라도. 난, 이걸,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놀라운 깨우침은 또 하나 있었다. 나의 대리석 허벅지는 혹시 동물의 사고 체계와 비슷하기 때문에? 즉 동물과 생각 및 행동이 비슷한 사람들만 다리가 대리석으로 변하는 현상은 아닐까란 궁금증은 막 날 애태우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 조랑말이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전개는 기본이고 화사한 절정까지 날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모든 물의와 사안, 유혹하는 듯한 눈웃음과 꼬리를 흔드는 듯한 뒷모습에 대한 잔상까지 사람들은 모두 모름지기 모든 일을 나 좋을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게 유리한 해석, 내가 좋아하는 관점, 내가 최근 하고 싶었던 욕구와 마다할 수 없는 취향과 욕망, 나의 습관적인 축원과 소망이 모두 작용한 다음에 세상의 정보를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중요하고 분위기를 따지며 제 발로 굴러가는 호박은 매번 그 영험한 경로가 딱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의 봄바람마저 부익부빈익빈이기 때문에 세상사는 괜히 시끌시끌할 수도 있는 거고. 당시는 안 그랬을지라도 사람 생각과 기분이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과 변심과 추문의 기준과 표준마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기대했던 복싱계의 유망주가 챔피언 근처에도 못 가고 순위전 경기가 암담하다고 판단했을 때 코치는 새하얀 수건을 링 위에 던진다. 왜? 야 심판! 아니 심판님아 경기 그만합시다 라는 의미로. 양치기 소년이란 동화의 뒤를 이어 개 중에서 가장 영리하다는 개 양치기견, 다시 이어가면 양치기견이 모는 양, 그 양들의 털을 깎아서 만든 면 제품 가운데 대표적으로 무엇이 있냐? 바로 팬티가 있다. 그건 또 어쩌다 무대 위로 던져진다. 바로 그거다. 난 지금 사무실 앞에서 만났던 당나귀를 수건인지 팬티인지 아니면 무도회 초청장인지로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나귀는 하체가 정상이었으니까.



   9

   나는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그 조랑말은 그대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일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특별한 기쁨을 말로 표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렇게.
   「존귀하신 당나귀님이여, 그대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조랑말이 알고보니 고삐가 풀려 있었다. 그러다 조랑말이 움직였다. 계속 움직였다. 어딘가로 이동했다. 나는 따라갔다.
   결국 조랑말은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이윽고 원점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제자리? 이런 젠장! 그럴꺼면 뭐하러 동네를 빙빙 돌아. 뭐 몸 풀러? 뭘 하기 위해서 몸을 풀어, 설마! 하기야 당나귀도 당나귀만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나는 폭넓게 이해심을 발휘했다. 이럴 때 드넓은 아량을 자랑하지 언제 하겠나. 해묵은 대망과 낡은 포부는 이미 쿨쿨 겨울잠을 자고 계시는데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조랑말의 행동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조랑말이 있는 위치의 건물. 그건 2층 건물. 그곳에 입주되어 사람이 이용하는 사무실은 딱 하나. 이름하여 머머 철학관! (딱) 이거다. 이거라고. 이거라니까. 응? 이거야! 나는 도사를 만나 담판을 짓던 싸우던 어쩌던 결판을 내기로 했다. 아 잠깐. 내가 약간 혼동되어 그러는데 혹시 조랑말과 당나귀가 다르던가? 마치 치타와 표범처럼!
   「나를 만나러 왔나? (뭐야 내가 만만해 보이나, 왜 대뜸 반말이야?) 자네, 왠지 그럴 것 같았네. 그대 같은 위인이 아니면 달리 찾아올 손님이 없었거든. 다 알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대로...(헛기침)..., 음, 넘어가자고!
   설마 내게 키스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왔나? 돌팔이가 아닌 이상 당신이 딱 보고 알아봐야지, 아마추어도 아니고 뭘 그런 걸 새삼스럽게 물어봅니까 라고 생각하고 있군. (뭐야, 어떻게 알았어!) 허허허. 허허허허허. 이 양반이 내가 웃는다고 자네도 쪼개면, 어... 아 선생께서는 차분해야 내가 미래를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이요. 음 아무튼 관상을 보아하니 방탕과 퇴폐의 옹호자는 아닌 듯 하구만. 그리고 짙은 화장과 천연덕스런 애교를 싫어하지는 않아. 옅은 화장이 특기인 청순한 숙녀의 홍조를 특히 좋아하고. 젊은이, 맞지? 저 봐. 벌써 입이 귀에 걸리기 직전이군. 좋아하기는. 어떻게, 응?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자네의 미래를 예언하면 심지어 그게 적중한다면 우리 함께 거동해야 하지 않냔 말일세. 아마도 그땐 바 보다는 클럽이 좋겠지? 내가 자네에게 요술 수정 구술 같은 말로써 내일을 보여준다면 자네는 내게 뭘 해 줄 텐가 이 말일세! 뭐 당장 답하란 말은 아니야. 차차 생각해 보시게. 응? 허허허. 가만 있자. 입구에서 제지 당하면 쪽팔리니... 아니 망신이니까 난 그때까지 젊음의 부활을 꿈꿔야겠군.
   좌우지간 나는 어떤 기막힌 환생을 선물할 수는 없어. 별들의 속삭임과 바람의 그리움, 회상의 향기로 판단하건대 그런 말은 해줄 수 있지. 누구를 만나라, 뭘 하지 마라, 그건 사도 된다, 팔랑대는 귀를 주의해라 같은 말. 응? 그런데 보통 사람 같으면 엉덩이가 근질근질한지 사람이 정적이고 내성적인지 한눈에 보이는 법인데, 뭐야, 자넨 뭔가 이상한데. 그게 대체 왜 그러지...? 난 말야 모른 건 모른다고 말해. 괜히 아는 척 하지 않아. 내가 뭐 초딩인가? 내가 모르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거든. 그만큼의 충분한 사유가 커다랗게 있다구. 그렇다고 형씨의 정체성이 의심된다 그런 말은 아니고. 그 뭐랄까, 혹시 자네 허벅지는 뭐 대리석 그런 건가? 정말 있어 그런 사람. 새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물에 살지만 가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물건들이 꼭 있다고. 양서류도 있고 양서류 말고 또 무슨 류가 있지? 그게 그러니까 발뺌도 아니고 오리발도 아니고, 양다리야 뭐야. 응? 하마를 봐봐! 육지 호흡과 물 속 호흡이 다 된다고. 그건 뭐 연필도 되고 볼펜도 되는 투투펜이야 양면 점퍼야? 그게 뭐야, 헛 참 나!
   어, 자네 그런데 그 옷 어디서 샀나? 핑크 팬더야 뭐야! 푸하하하. 무슨 펭귄도 아니고 대책 없는 분홍색이라니. 주책이야 정말. 하지만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돼. 아니 어쩌면 우리는 좀 더 그래야만 하지! 내가 이래봬도 왕년엔 아동문학자였다고. 어디 글만? 동요도 작곡하고 동화에다 삽화도 그렸어. 아 그런데 대체 왜 자네는 내게 운수 보는 조건에 대해서 말하지 않나? (언제 말 할 기회를 줬어야지!) 내 운수 비싸 이 사람아. 응?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많이 비싸다고.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바로 역대 잠룡들을 자리에 앉혔던 사람이라고. 응? 이 양반이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사람은 절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알겠나? 나의 소크라테스론을 읊어줘 말어? 점쟁이의 수다라고 절대 흘려듣지 말게나. 왜냐하면 점쟁이도 점쟁이 나름이니까. 내가 내 입으로 날 칭찬하니 좀 뭐하지만 은둔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자랑이라고. 나 같이 위대한 역술가를 어디 만나기 쉬운 줄 알아?
......」
   아 나 이 양반 참 말 많네! 나는 그분의 열변 때문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얘기를 듣기만 하다가 쫓겨났다. 미래에 대한 예언인지 뭔지는 겨우 듣고서 내 발로 걸어나온 것이다. 복비도 많이 받더라. 장난 아니게. 그런데 그분께 들은 말 가운데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그 역술가가 대리석 다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뭔가 낌새는 파악한 듯 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더군. 그러므로 그분은 뭔가 묘하고 애매한 파장을 남기는 듯한 덕담을 남겼다. 그건 뭔고 하니 현재 인기 리에 방송 중인 어느 드라마를 지켜보라나 뭐라나.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교체되기를 기다리라는 웬 의문의 메아리는 한동안 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쓸데없는 내용 일색이었지만 그래도 어르신의 인생 상담을 내가 귓등으로 듣지는 않았나 보다.
   뭐야! 그러니까 결국 성과는 전무했다. 당나귀의 뒤를 밟을 때 느꼈던 유쾌한 궁금증과 새로운 기분은 모두 애인의 변심과 꿈의 변덕 같은 일로 결론 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쩐지 아주 잠깐 가차없이 황홀하다 했다. 그럼 그렇지.



   10
 
   필명으로 맞이하는 첫 번째 봄. 어젯밤에 어색한 기쁨을 꿈꿈. 기억나지 않는 춘몽은 냉큼 잊어버리기. 그리고 뭔가 흥미로운 일이 날, 막 나를 불현듯 재밌는 모험으로 이끌 것이란 수줍은 기대는 사양하기. 어설픈 뻔트는 적극적으로 마다하기. 그러는 가운데 나는 천사를 믿고 악마와의 마지막 춤은 잊었다. 사랑의 환상을 기억했고 오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말을 외웠다. 어쨌든 봄바람은 춥고 봄비는 차가울 뿐이다. 어김없이 늦잠을 잔 날은 낮술을 먹는다. 아니다. 꼭 그렇진 않다. 정말 그렇다고 하는 말과 글들은 다 뻥이거나 과장이다. 확실하다. 안 봐도 뻔하다. 그러든 어쩌든 인생은 허상이고 우상은 개구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일 모레 곧 우주여행을 떠날 테지만 그 언제까지라도 지구인은 달에 가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는 머머설에 내내 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몇몇 속없는 철부지와 철없는 어른들은 말이다. 그처럼 나는 오늘도 낙서장에 몇 년 뭐뭐 몇 년 뭐뭐 라고 쓸려다가 말았다. 딱히 재미난 일이 없었으니까.
   한편 나는 점쟁이의 조언대로 어느 TV 드라마를 내내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러다 어느 날 여주인공이 교체된다는 뉴스를 보게 됐다. 그러나 나의 대리석 다리는 그대로였다.
   이건 또 뭐야? 적지 않게 냈던 복비만 날린 건가? 그래서 나는 주인공의 다리가 기괴하게 변하는 SF 작품을 찾고 또 찾는 작업에 이르렀다. 그 일에 꽤나 오래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약 20편에 해당하는 작품을 수집했다. 그 작품들을 모두 감상한 다음에 딱히 비밀을 캐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검색으로 알게 된 미심쩍은 학계 보고 사항은 하나 있었다. 크게 관심 받지 못한 일설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헤이즐럿향, 우유 단백질의 특정 성분, 아세트아미노펜 성분, 식용 색소 몇 호, 바키나움미르틸루스엑스, 레티놀아세테이트등을 특정 염색체 이상의 환자가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어떤 환각 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나는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다가 그 보고 내용에 내가 최적화된 인물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긴가민가 했고 정말 신기해서 펄펄 뛸 듯한 기분도 느껴지는 가운데 딱히 자축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심하다고 해야 할까. 나의 이성은 비밀스런 허영심을 신랄한 질투심으로 인도하지는 않았다. 나는 당분간 적잖이 무정했고 어리버리했으니까 소비랄지 박카스랄지 딱히 어딘가에 기대고 뭔가에 중독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그 다음 날! 나의 대리석 허벅지는 원상 복귀됐다. 마치 거짓말처럼 내 하체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정상이었다. 와우! 난 정말 특별한 사건도 모험도 약속도 재미도 없는 심심한 생활에서 기쁨을 느꼈고 행복감에 뿌듯했다.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지금까지 없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인간은 기쁨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가식적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살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정말 누구도 믿지 못할 이상한 체험의 파도를 헤치고 나서 정상으로 돌아온 결과 심심함과 행복의 공통 분모를 깨우친 것이다. 흡사 오랜 빚 잔치를 청산하여 불행의 나락에서 탈출한 사람의 기분이 아마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불세출의 야생마를 길들여 고작 뻔트를 대도록 할 수는 없다는 비장의 복안을 착안해낸 건 아니었다.
   그러면 행복은 마침내 발단, 환상은 이제 시작일까? 아직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11

   나는 대리석 다리가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었는데 그게 모두 환각 증상이었다니 하면서 몹시 의아해 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도 다 있네 하면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상으로 돌아올 걸 알았다면 도나나 낸시의, 아쉬운대로 커트의 다리가 대리석인가를 직접 확인해 볼 걸 그랬나 라는 작은 미련도 없잖아 있는 듯 했다. 그나저나 나는 저 승마머신을 대체 왜 샀지? 괜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광고에 혹하며 빠져서 멍청히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결제한 결과였다. 보고 있을 때는 정말 효용 가치가 굉장할 것 같았다. 그러든 어쩌든 혹시 모르니까 승마머신이 나중 저 혼자 저절로 말이 되나 안되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내가 읽은 SF를 기억했고 내가 쓴 SF는 잊어버렸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소멸이란 제목의 SF 영화를 볼 계획을 세웠으며 평소처럼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놀러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아무 할 일 없이 그냥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스테리아에 연재됐던 드라마 원작의 작가에 대해 마라에게 몇 가지 물어본다는 목적이 있었다.
   나는 미스테리아에 도착해서 내가 겪은 일종의 데자뷰 현상 같은 일을 내 친구의 일인 것처럼 마라한테 얘기해줬다. 당연히 마라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내게 충고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TV 드라마의 원작이 미스테리아에 실리게 되었는지를 심문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앗, 심문이라기 보다는 추궁이겠구나. 그렇게 사무실을 염탐하고 마라의 기분을 짐작하다가 나는 우연히 확실한 단서를 얻고야 말았다. 그건 바로 마라가 책상에 앉아서 핸드폰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소파에서 마라 뒤에 있는 작은 거울을 통해서 마라와 어느 도사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마라에게 꼬치고치 캐묻자 그녀는 내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 도사는 미스테리아에 작품을 연재했던 드라마 원작의 작가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내게 특종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 대리석 허벅지는 원상복귀됐고, 도사의 예언이 엉터리든 아니든 나와는 이제 더 이상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비싼 복비만 날린 거지. 그래도 그 맛에 점을 본다는 과분한 유쾌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하고 싶은 말이 뭐니? 눈동자를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내게 뭔가 캐내고 싶은 일이 있는 것만 같은데. 아니지? 아닐 꺼야. 그럼.」
   「그럼. 아니야. 너 내가 언제 실눈 뜨는 거 봤니? 난 궁금한 거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야. 에이 알면서! 만약 마라의 아름다움에 싫증이 났으면 싫증났다, 사랑이 식었으면 사랑이 식었다 라고 나는 거짓말을 못한다니까. 뭐 어째, 뭐? 그건 직언하는 게 아닌가. 그야 어쨌든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는 절대 쉽게 질리는 잡지가 아니야. 그럼. 그거 하난 분명해.」
   「잘한다! 응? 잘해.」



   12
 
   나는 새로운 쇼핑에 관한 고민에 빠졌다. 그건 바로 기존 승마머신을 팔고, 하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승마머신을 구입할까 말까 라는 문제였다. 아직은 머머 접습니다, 에 이르지 않았으니까. 어쩌다 건강에 관한 관심이라기 보다 충동 구매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뭔가 하나, 가령 대타 안타 같은 뜻밖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나는 인터넷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오랫만에 필명 동호회에 들어갔다. 그곳에 가 보니 돌아가는 분위기가 정말 가관이었다. 왜냐하면 각자 들은 얘기가 아니라 본인이 본 사실에 대해서 일장 토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라고? 그러니까 내 다리가 대리석이다 아니다 왼팔이 나무로 되어있다 심지어 자라기까지 한다고 하더라, 아니다 그게 아니라 발바닥과 손바닥이 돌의 성분과 똑같다는 고백을 직접 들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직접 봤다 그 인간은 꼬리가 달렸더라! 또 있다. 목욕탕에서 날 마주쳤는데 어 그게 음 뭐 어째서 기겁을 했다나 뭐라나. 또 하나. 그 인간이 모텔 피노키오의 사장이라고 하더라? 나 원 참! 그걸 읽고 나는 느꼈다. 첫째, 재밌다. 둘째, 내 정체를 이 세상에 당당히 드러낼 테다─나는 유명해져야 한다─나는 자유를 찾고 싶다 라는 개인적이고 약간 장난스런 발상들 때문에 고심하다가 필명으로 남는 게 좋겠다며 회심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처럼 난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주파수 혼선 같은 대화와 주장들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한편 썩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걸 보는 당사자인 나만 진담으로 인지하고, 나를 제외한 동호인 모두는 농담인 줄 알면서 진지하게 장난하면서 놀고 즐기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 그러다 문득 그래볼까 라는 상상까지 하게 됐다. 곧 내 다리 사진을 찍어서 포토샵으로 조작해서 사진을 동호회에 올릴까도 생각해봤다. 그렇지만 우스꽝스런 흥미는 딱 여기까지였다. 현 회장이 물러나면서 대리석 다리의 실체를 벗기자 어쩌자 하면서 차기 회장 선출에 관한 안내문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는 웹사이트를 닫았다.
   그런 다음 나는 내 고유한 아이디를 검색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는 일을 했다. 재미없었다. 나는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입증할 궁리만 하는 로맨티스트가 아닐 것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그녀의 하찮은 잔소리는 잠잠한 가운데 마침 심심함을 타파하라는 트집을 피할 수 있는 잔꾀도 바닥났다. 별안간 나는 사무실에 걸려있는 황금 마네킹 상점이라는 그림의 진품을 갖고 싶어졌다. 나중 또 모른다. 혹시라도 로또 복권에 당첨된다면 전재산을 올인해서 그만큼에 상당한 걸작을 구입하게 될지도. 꿈도 야무지게 말이야, 치! 그러면 다시 그 다음에 나는 금방 그 그림에 싫증을 내겠지. 그게 순서니까. 곧 순수한 애호가로써 딱 하나의 그림을 구입하는 일도, 가치 투자에 일가견이 있어서 대단한 진품을 사는 것도 내겐 여의치 않을 듯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내 예상보다 비싸면 비쌌지 싸지도 않을 것이다. 대충 생각해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소비의 시대든 어쩌든 나는 아티스트병이 치유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맞다. 그렇다. 이제야 내 안의 그분과 손발이 딱딱 맞네. 이처럼 나의 고상한 취미는 다름 아닌 공상이었다. 새로움은 언제나 그것에서 탄생했고 거기서 출발했다. 어디에든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고색창연한 색다름은 아닐 테지만. 하기는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함은 내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중 내 이력에 기록될 지금의 내 과업은 삼류 엑스트라이자 미스테리아 칼럼니스트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뻔트로 빚어진 9회말 역전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처럼 인생도 모르는 거니까. 오히려 그래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도나와 낸시와의 친교에 대해서 질투를 부추기고 열정을 부채질하는 일은 진작 포기해버렸다. 그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딱히 삶이 말할 수 없이 지겹지도 않았고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나의 말과 글은 아주 형편없지도 않았다. 선망과 만족 사이에서 방황하기는 하지만 난 아마 인생의 비밀을 깨우쳐버린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자존감과 자기애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사람이 때에 따라서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걸 정말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은밀한 열망과 일상적인 우정과 불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 외에도 내게는 또 하나의 사는 방법이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바로 난 미치지 않았고 내 삶은 별 문제가 없다면서 인생을 긍정하는 일. 사람들이 샤워를 마치면서 거울을 보는 것처럼 원숭이 박수를 치며 혀를 낼름거리며 꼭 어딘가에 군침을 흘리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이상이야 그 어딘가에 입도 벙긋 안 할 생각이긴 하지만. 뭐 평생 놀고 먹는 법에 대한 인문교양서는 왜 아직 완성하지 못했냐고? 나도 그러고 싶었다. 잠시 유보했을 뿐. 당연히 그마저 연기됐지. 그래서 나는 차츰차츰 지난 날의 나의 대리석 허벅지가 그리워졌다. 무슨 말도 안되게 말이야, 어? 누가 들으면 정나미 떨어지고 이 작가도 볼장 다 봤구나 라고 혼잣말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땐 뭐랄까 순수한 몰입감이 내 정체성들을 주도했으니까 나는 그 붕 뜬 느낌이 비밀스런 행운인지 정신 나간 사랑인지, 그것도 아니면 유별난 변덕인지 통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든 어쩌든 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SF는 그저 장르임에 불과하다는 게 판명됐고.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 달콤한 꿈을 선물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그 일은 무엇이냐, 바로 지금 SF에 도전하며 무진 애를 쓰기! 이제는 정말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 듯 모를 듯 하니까. 번득이는 영감도, 신기한 소재와 까무러칠 만한 전개마저 뭔가 감이 올 것도 같고 오지 않을 것도 같았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주변의 언짢은 기색은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소속사 즉 미스테리아의 낙관적인 무관심과 칼럼 압박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나저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면서 나의 주인님은 날 막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이처럼 다정히 말해주었다.
   「기대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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