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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4. 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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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일기를 썼다. 내용은 이렇다.
   식상한 TV 재미없는 NC 무명 JS, 그리고 뻔한 꿈과 더 뻔한 희망. 남몰래 어른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숙녀의 기분에 동조하지만 인생은 불만족. 그렇게 날마다 커피 마시고 낮잠 자고 산책하고?
   마침내 때가 됐다. 자, 신비와 환상의 천국으로 떠나자. 당나귀와의 우정, 불여우와의 사랑은 잠시 뒤로 미룰 것. 어제는 고독한 사색가요 오늘은 즐거운 모험가. 목표는 큐피트 로망은 카사노바. 그러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은 것. 예술은 따분하고 새로움은 바닥났으며 꿈은 포기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인생에서 제일 기쁜 행복은 도저히 잡히지 않는 나비와 같다. 하늘에 기도드려도 소용없다. 그렇다고 로빈슨 크루소나 돈키호테, 드라큘라, 랭보가 될 수도 없다. 바람이 불어도 행진곡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언제까지라도 꿋꿋이 환상머신을 발명하고 시간여행자를 꿈꿔야 할까?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래라. 아니, 혹시 남반구는? 욕조의 물 빠짐이라도...! 꿈 깨자. 그러니까 좋게 호박을 반기고 과일을 탐하며 꽃향기를 쫓을까? 사춘기는 지났고 허당은 허다하며 첫사랑은 옛날에 끝났다. 그런데 젊음은 원래 허무한 것일까? 아니다. 아닌 게 아니다. 청춘은 본디 뭘 해도 재미없고 항상 심심한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아니면 상태가 안 좋던가 운이 좋던가. 잘 알면서! 그러니까 난 드디여 바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니다. 머머 같다가 아니라 정말로 이미 바보가 됐다. 진짜로 그렇다. 축하할 일도 아니고 행운도 아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러니까 어쩌다가. 그건 아마 내 안의 그분이 엄한 데 한눈 팔고, 괜한 데 눈독들이며, 습관적으로 그 뭔가에 군침을 흘리시기 때문 아닐까? 그걸, 대체, 누가 알겠나! 나까지 이처럼 기계적으로 글을 쓰는데. 그건 정말 누구도 관심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살짝만 추측해보자면 있다고 가정하고, 새로운 친구의 지혜로운 답변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건 바로, 그러든가 말든가! 그 언젠가 전문가의 흰색 모자 쓰기를 꿈꾸며 자유와 사랑과 선망을 노래할 테다 라고 큰소리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커서 뭐가 되겠다는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난다. 이건 대관절 어떤 인생일까? 한마디로 시시한 인생! 단편영화, 장편소설, 인문교양서, 유행가의 창작과는 멀어진 채 깜짝 신인상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솔직한 내 심정은 그렇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 에로영화계에서 조연으로 활약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라는 아쉬움마저 남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이라도 뚜껑 없는 좋은 차 몰며 돌아다니고 놀며 또 놀고 기웃거리고 빈둥거리며 인생을 허비하다가, 오빠 결혼 왜 안 해, 라는 추궁도 받고... 그래 볼까? 아니다. 인생의 전반기는 예선 탈락, 중반기는 로또복권 꽝이다. 이거 이거 그럴 만 했네 그럴 만 했어. 게임 제목이 크레이지 아케이드던가, 아니다. 카트라이더다. 옛날에, 괜히 너스레 한번 잘못 떨었다가 웬 초딩한테 충격적으로 험한 소리 얻어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럴 만 한 것도 같다. 안되겠다. 나는 좀 더 체념하고 절망하며 상심해야만 한다. 바닥을 치고 저 푸른 창공으로 날아오르면 되니까. 하여간 어떻게든 박카스 부활에 대한 명분만 고심하다니. 하긴 인생은 놀 궁리고, 직장인의 기쁨은 '오늘 점심 뭐 먹을까'다. 또한 세상사란 만족이 부러움과 부족함을 양쪽에 꿰차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시나요, 공주님들!
   참고로 질투와 부러움과 겸손에 대해서 잠시만 집고 넘어가겠음. 남자라고 썩 다르지 않음. 남녀 공히 우월감, 열등감, 욕심, 이기심, 이타심은 꼭 측정하며 실험하지 않더라도 은연중 알 수 있다는 것. 넌지시 비위만 맞추고 굽실굽실 딸랑딸랑 아부의 '아'자만 꺼내도 사람인 이상 인성과 성격의 파악에 대해 아예 깜깜할 수는 없음. 그걸 느낌으로 알면 직관이요 그 어느 불이익을 매번 당해도 당해도 부족하면 불쾌감이랄지 상심과 슬픔이고, 싱겁다 여리다 이해심이 많네, 성격 좋다는 둥, 심하면 호구일 수도 있다. 천성이 착하든 착하지 않든 모든 기준은 바로 나다. 나야 나, 나야 나! 타인의 조롱은 거북해도 나의 빈정거림은 내 입장에서 괜찮을 수 있듯이. 1번 꼬나 2번, 3번 꼬나 어차피 꼬는 건 마찬가지. 기본은 그렇다. 남자는 열등감은 듣기도 말하기도 싫고 우월감만 말하기 좋아하기 마련, 곧 지는 비교는 본성에 위배됨. 단, 멋진 남자 이전에는. 또 여자는 열등감을 말하기 좋아하고 우월감은 듣기를 원함. 응? 자연스럽게! 판에 밖은 찬미도 좋고 거짓 칭찬도 싫지 않음. 숙녀여 안 그렇나요? 나를 직접적으로 1번 낮췄으니 적어도 날 간접적으로 1번 띄워줄 뻔 말 뻔은 해야지 호인에, 걸작에, 명바텐더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8 대 2에서 8! 무엇이건 롱테일은 있다. 가령 어떤 여자는 친구의 열등감을 습관적으로 칭찬하고, 내 우월감을 말하도록 압박하는 숙녀도 있다. 비교해서 내가 밑이면 모른 체하고 내가 위면 상대의 열등감을 칭찬하는 그녀. 뭐, 내 우월감이 확실한 부분에 대해서만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칭찬해? 그건 돌려서 매기는 거다, 매를 버네 매를 벌어, 옆에 있으면 확 그냥... 바로 옆 사람한테 살짝 윙크하며 아주 험악하게 화염방사기를 그냥! 이런 영심이는 허세-대마왕과 완전한 한 짝이군. 고급은 고급인데 참말로 별의별 고급이 다 있네. 그건 천동설 사고 방식이니까 가능한 거다. 지동설 사고 체계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있어도 아주 희박할 테고. 여자 세계가 이렇다. 아, 그럴 것이다. 남자 세상보다 훨씬 치열한 뭔가가 있을 것만 같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분을 가만히 사겨보고 찬찬히 관찰해보면 왜 그런지 딱 답이 나옴. 생각을 하면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것만 놓고 보자면 차라리 주파수 혼선이 훨씬 낫다, 고양이 신경질보다는. 그분은 진짜-친구도 없고, 있어도 말이 안 통하며, 인기도 없고, 재수까지 없다. 하오나 그런 결점이 있으면 다른 측면에서 장점도 있다. 그렇긴 해도 일단은 밉상이다. 중차대한 흉은 아니지만 그래도 흉은 흉이다. 그래서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기 어렵더라, 는 몰라도 말이 통하는 이성이 뭐 어떻더라 라는 말은 꽤나 주의해야 함.
   의도치 않게 숙녀 입장에서 심하게 민감한 주제가 나왔으니 살짝만 추가 설명을 해야 겠다. 앞서 나왔듯이 그런 문제는 대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까 라는 여자들의 궁금증, 타당한 의문이다. 하여 슬기로운 공감을 심화시켜 정리를 해보자. 어려울 것 없다.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면서 알아보면 되니까. 달력이 넘어가서 봄바람이 불면 말이다 만물은 소생하는 법이다. 꽃이 피고 농부는 씨를 뿌리며, 여심이 싱숭생숭할 때 농심은 설을 풀고,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며 그렇게 무럭무럭 성장하여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고 과일을 따고, 그러다 겨울이 되면 곰은 겨울잠을 잔다. 그 다음은? 민물로 회귀하는 성어는 곰한테 잡아먹힌다. 얌얌 얌얌얌 꿀꺽꿀꺽! 뭐 누구는 흉작이고 누구는 만선이고? 아, 지금 그 얘기가 아니구나. 돌아와서, 문제의 그녀는 바로 이런 여자다. 내가 (친구보다) 밑이면 모른 체하고 내가 위면 상대의 열등감을 칭찬하는 그녀. 곧, 내 우월감이 확실한 부분에 대해서만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칭찬하는 그녀! 나 원 참, 괜히 또 그녀의 낯짝 아니 아니 용안이 궁금해지네 그려.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라서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예측함. 그러나 어설픈 추론은 여지없이 틀릴 수도 있음. 자,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예상이 맞나 틀리나 그 탄탄한 논거를 마련해 볼까? 즉 여자 세계에서 그런 얄미운 친구가 재수없이 습관적으로 촐랑거릴 때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딱)! 방법은 4가지다.

  1. 져주기
  2. 똑부러지게 말하기 (기분과 사정을 고려해서 분위기 잡고 여건 조성해 딱 1번에! 단, 결과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거나 우정이 깨지거나, 둘 중 하나)
  3. 하나 주고 하나 받기
  4. 거울 즉 반사

   1은 패배주의(착한 친구). 2는 모험(직접 화법). 3은 타협(단짝은 아니니까). 4는 초딩(못 믿을 친구니까. 남자라도 있어봐라 어떻게 되나 보게!). 여기서 3과 4는 약간 다름. 3은 그건 내가 접어주고 대신 다른 데서 양보하지 않기, 4는 똑같이 돌려주는 것 곧 그럼 느끼는 게 있을 테니까. 우정은 문제 없는데 사랑은 어려울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뭐냐면 우정과 사랑은 판이하게 다른 점 빼놓고는 거의 똑같은 행위이자 똑같은 감정이라는 것. 따라서 우정을 잘 영위하면 사랑도 그럴 공산이 크다. 그 가능성은 정비례는 아니지만 최소한 반비례는 아니고, 기울기는 다를지언정 만족스런 인생과는 비례일 것이다. 동성 친구에게 우정의 신호를 보냈는데 사랑으로 화답 받는 일을 겪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기와 독점욕과 질투심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사람이 황금을 싫어하지 않듯이 우정과 사랑이란 개념은 서로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둘의 교집합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꽤 많이 겹쳐있다는 것. 가까이는 동성애요 브로맨스고, 보통은 친교, 넓게는 뭘까 바로 외교요 사회성이며 세계관이다. 여심의 이상형이 일반적이듯 동성애의 사랑도 까다롭고 운명적이다. 그리고 모든 남자는 스토커에 변태에 무슨 범죄자가 아니다. 그런데 몇 천년 인간의 관습으로 아직은 동성애에 대해서 이성간 사랑만큼 관대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라 달라야 정상이니까 흐름이 그렇다는 걸 알면 된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다시 우리의─내 안의?!─영심이에게 단독 조명을 비춰봅시다. 단점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하늘 나라에서 찾는다면 몰라도. 저와 같은 친구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 빼놓고는 좋은 친구일 수 있다. 허세로 어디서 절대 안 빠지는 친구도 알고 보면 대체로 좋은 친구다. 그러건 어쩌건 내내 미루다가 나만 피곤해지는 건 1번이다. 네? 딱 1번! 그러니까, 안되겠다 라는 시점부터 앞으로도 계속 커피포트를 감수할 자신이 있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답은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다. 여자는 그런다. 친구의 약점을 말하고 놀리며 깐족을 거듭하고 내 열등감도 술술 뭐든지 말하는 게 8이라면 2의 여자는 그런다. <내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나 위 너 아래>가 아니라 <가만 있는 친구를 겉으론 칭찬으로 위장한 채 허물을 들추어 내 자랑하듯이, 나는 가만 있고 친구는 한칸 낮추어 나 위 너 아래>. 가령, 요염한 고양이를 보시라! 호호호 멋진 남자가 깜짝 출연하면 긴장하지 않는 건 여자가 아니고, 친구들 중에 꼭 여우짓 하는 불여우가 있다! 반드시 있다. 그런데도 남자는 좋다고 들썩들썩! 진짜로 기분 좋으니까. 하하하하하! 그처럼 친구를 놀리고 스스로 나도 망가지고, 그게 여자의 8이라면 남자의 불문율은 그거다. 마음에 들든 약간 어중간 하든, (여)바텐더 앞에서 내 장점은 내가 말하고, 친구의 단점은 절대로 함구하기. 왜냐하면 남자라는 동물은 비교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는 비교를 싫어하니까. 멋진 남자가 아니라면 남자 세계에서는, 나는 오직 내 장점만 말하는 로보트가 되어야 한다. 멋진 남자가 아니면 그처럼 2중으로 피곤해진다. 호박도 제 발로 굴러오기 힘든 걸로도 모자라 나는 나대로 따따부따 내 장점만 선전해야 하니까. 그 처지를 진정 이해하면 깨닫게 된다. 그처럼 원리를 따지고 보면 측은함과 동시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1차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여자의 우정은 남자의 서로서로 '내가 잘났다 내가 최고다'식 귀 막기 놀이와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 여자들이여, 만약 저 문제가 우정인 친구가 아니라 사랑인 남자라면? 그것도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내 남편이면! 어 음 아 그-그땐, 그-그건 번지수가 틀렸다. 아마도 예언가보다는 변호사를 찾아야 하지 않을런지! 웃자고 한 얘기고 무릇 세상의 풍랑을 겪어보니 친구란 그런 것 같다. 한마디로, 함께 하자! 그럼 사랑은 같이 살자? 아아 또 그 놈의 사랑...! 우정 즉 함께 하자란 그런 거다. 남자는 나 혼자 뭐 어쩌기 싫다면서 향긋한 시가를 친구에게 슥 권하는 거지. 그럼 여자는? 뭐겠나! 기본적으로 남자가 위스키 3병이면 여자는 수다 3시간이지. 여자는 그처럼 깐족거리며 친구를 띄웠다가 놀렸다가 띄웠다가 놀렸다가, 그 대신 친구를 쥐락펴락했으니 그 전이든 후든 난 항상 내 열등감을 말하기 좋아함. 안 친하면 놀리지도 않고. 단, 예외는 있다. 신비주의 컨셉, 조증, 증후군, 트라우마, 비정상적으로 허영심 지수가 낮은 경우, 기타 등등. 그게 바로 여자다. 고추 달린 남자로써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여자의 마음 말이다. 하오나 친교에 대한 남녀의 이치만 다를 뿐 심리 상태의 작동 원리는 둘 다 자연스럽다. 가령 우정으로써 친구를 놀리는 건 장난이고, 사랑으로 애인을 기쁘게 하거나 웃기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어떤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건 농담이다. 또 못 웃기면 다음 기회에! 굳이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다 알고 있다. 단, 서열이 중시되는 골목대장 놀이랄지 옷은 어떻게 입고 몸짓은 어때야 한다, 라고 알려주며 꼴찌를 영입하는 어느 언니들 그룹에서는 규칙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상대의 마음을 너무 심하게 가지고 노는 것 아닌가 라는 농락도 있을 수 있듯이 사랑은 몇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마음으로 사랑하느냐, 머리로 사랑하느냐, 아니면 전자에서 후자로 또는 그 반대로 순서가 변하느냐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필요없이 처음부터 진심이고 초심이 변치 않으면 좋겠지만 사랑이란 게 오묘한 게 뭐냐면 그거다. 우리가 사랑을 불렀든 사랑이 스스로 우리에게 왔든 그것은 변하기 쉽다는 것! 각자 방법과 속도가 다르듯 이분의 사랑과 저분의 애정을 견주어야 한다는 것. 마음이 약해서 연애 감정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주체적으로 사랑을 한다기 보다는, 뭐랄까, 어쩌면 사랑이 내 운명을 이끌어가는 게 아닐까 라는 신기한 의혹까지. 그런데 대관절 이 그림은 또 뭐야? 그러니까 우정 상담의 결론은, 여자는 고추가 달리지 않았고 남자는 고추가 달렸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그 둘의 사랑은 초반에(만) 열이 좋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젠장!
   결국 어른도 애랑 똑같다. 지 잘난 척, 아는 척, 센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한 척, 그 척의 과잉이 심한 사람은 영 보기 싫다. 주위에 다 물어보시라. 그게 과연 꼴 보기 싫은지 좋은지를. 실제 잘난 사람이 유행 때문이든 분위기 때문이든, 또는 너와 나 웃고 즐겁고 기분 좋으니까 잘난 체 하는 건 한마디로 인정. 그건 비호감이 아니다. 열광이 아닐지언정 최저는 무관심일 테니까. 그건 곧 못 먹어도 고다! 왜냐하면 그건 척이 아니니까. 최소한 자랑이 얄밉지 않으니까.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고, 오색찬란하며 향기로운 꽃과 꿀처럼 달콤한 과일이 언제나 그댈 반기면 굳이 내 입 아프게 잘난 척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입만 열면 그냥 아주...? 아아, (설레설레)! 밝은 자신감과 합리주의와 재수 없음은 모두 종이 한장 차이일 수도 있다는 걸 잊으면 그 인생은 곤란해지기 십상이고, 옆 사람은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마음은 만인에게 읽힐 수 밖에 없는 거니까, 내 이름을 만방에 알리건 어쩌건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성격 좋은 게 제일이다. 그런데 저 친절하지 않습니다, 나 성격 좋지 않음, 막 그러면서 기준선을 미리 낮춰놓고 대인 관계를 시작한다면 그처럼 만사에 나선다면, 속된 말로 나대면 어떡하지? 심지어 무섭게 생겼으면! 야 야 얘들아 얘들아,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좌우지간, 따라서 결론은 나왔다. 나는 인생을 쨉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 그런데 뭘 또 독학해야 할지 그것이 고민이다.



   2
 
   공상은 과다했고, 심심함은 과도했으며, 타성은 과분했다. 미래의 과찬은 가망성이 희박했고, 행복은 복권을 사는 재미만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럴 순 없을 테니까. 또 아마존에서 나이키를 주문하고, 단골 술집에서 맥없는 허당이라고 푸대접 받든 존귀한 디오니소스로 귀빈 대접 받더라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헤르메스를 읽기보다 헤르메스를 사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막연한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라 페라리나 복권 당첨, 돈 지오반니를 창작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그건 어쩌면 보물섬으로 떠나는 모험, 곧 보물섬 지도의 발견일지도 모른다. 맞다. 지금까지 수다는 충분했다. 다정은 숙녀의 다변을 경청할 때나 절실한 건 아니겠지만 빽넘버 3번 '다망의 재미'는 특급 투수 허영심에게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실력이 허접하면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그렇다. 그러므로 대타 빽넘버 7번 '열망의 실천'이 등장할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느닷없이 상대측이 내놓은 패는 싸움닭 헬맷? 퍽을 그냥 줘, 말어! 아무튼 난 헛된 꿈을 계몽해야만 했다. 정계나 오락업, 사교계에 기웃거려봐야 친구도 없고 승산도 없다. 나 혼자 탁월한 고상함을 편애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자그만 성과는 몰라도 대망의 실현은 덥썩 주어지기 어렵다. 그러면 대중의 총애를 받으려면 정말로 어떡해야 할까? 그러든 어쩌든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걸릴지도 모르는 연예인병을 스스로 치유하고 가택감금을 해제시키는 일. 이목을 끌며 주목을 받느냐 마느냐는 다음 일이고, 우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첫째, 남자는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 안된다. (그렇다고 가정적인 남자들이여 막 바깥으로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둘째, 남자는 무작정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면 곤란하다. 대신에 바깥의 어떤 열정과 기를 내게로 확 빨아들여야 한다.
   셋째, 세상에 나가 '우리는' 화법을 뽐내며 '으쌰으쌰' 인생을 선동하기.
   그러나 나는 누가 뭐래도 의연한 몽상가이자 황금의 추종자였다. 나아가, 활달한 다혈질은 아니지만 약간 상쾌한 열망가였다. 물론 공인은 받지 못했고. 그래서 내일 일은 모르겠고 하던대로 나는 경건파가 아니라 기분파로 남기로 했다. 따라서 나는 근사한 꽃다발과 달콤한 케익과 괜찮은 샴페인을 들고서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뭐라고? 하여간,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최근 나는 내 개인 작업실에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하는 일은 오직 구상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연락이 와서 잠시 친구를 만났다. 녀석은 사업에 실패했는지 사랑에 실망했는지 아주 불만이 많았다. 그런대로 괜찮은 친구인데 누구나 그처럼 침체된 시기는 있는 법이니까 나는 꾹 참고 묵묵히 녀석의 야유를 경청했다. 자기가 무슨 영화를 한 편 봤는데 그게 그렇단다. 그냥 생선 같은 놈 나와서 여자랑 연애하는 영화였다나 뭐라나. '미녀와 야수'나 '혹성탈출'은 최소한 포유류라도 됐고, '인어공주'는 다리까지 만들어서 인간하고 다를 바 없었고, '아바타'는 아예 종을 바꾸는 이야기며, 거북이를 자기가 키워봤는데 뭐가 어쩐다는 둥 기타 등등. 녀석은 현실에서 낭만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녀석이 지금 썩 괴로운 형편인가 보다 라고. 그럼 이때 할 수 있는 일은 그거다. 다독여주고 달래며 위로하기. 리모콘의 오뚜기 단추를 누르기 말이다.
   그렇게 나는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다 헤어졌다. 그런 다음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무실에 편집장 마라는 없고 새로운 경리 아가씨만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샐리였다. 우리는 금새 친해졌다. 그러다 그녀와 대화하는 중 알게 됐다. 샐리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출근한지 꽤 됐고,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만났고 벌써 친했다는 걸. 내가 요즘 작품 구상하느라 잠시 착각했었나 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반말하는 스스럼 없는 사이였다.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샐리.
   「그럼 말하지 마.」
   「뭘 또 말하지 마? 우리가 또 그렇게 박하게 구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무슨 남인가! 우리가 기둥서방과 조강지처 사이는 물론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뭘 또 숨겨야 할 사이는 아니지. 안 그래? 응, 오빠.」
   얘가 뭔 얘기를 할려고 이렇게 날 몰아세우지, 라는 의구심이 발생했다.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난 샐리에게 특별히 실수한 게 없다. 그럴 것이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러기를 바래야지 뭐 별수 있나.
   「오빠. 오빠 취미는 TV 보기야? 아직도 클럽 다녀? 오빠는 혹시 나도 불여우로 보는 걸까?」
   「응? 새로운 취미는 없어. (혹시 나 일중독?) 클럽은 가고 싶지. (나도 막 어? 막... 으아 캬...) 하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갔을 때 입장 금지 당했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니까 난 아직 이해를 못하는 거지. 그리고 또 뭐라고 했지? 무슨, 불여우? 에이 무슨. 오빠는 샐리처럼 이쁜 여자친구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왜 그래요 숙녀여!」
   「오빠. 미스테리아에 칼럼 기고하는 거 짜증나? 막 글 쓰기 싫고 그러지? 오빠가 지금 혹시 몽정기 그런 건가? 아닌데. 발정은 우리 집 강아지가 났는데. 어쨌든 오빠. 뭘 해도 재미없고 항상 심심한 건 맞지? 솔직히 말해서 재미없고 심심한 게 나쁜 거도 아니고 죄도 아니잖아? 안 그래요 오라버니!」
   「어? 그건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오빠, 축하해. 오빠는 바보가 된 게 아니라 어려진 거 같아. 하긴 그게 그거지. 아니다. 바보는 사랑에 빠졌을 때나 되는 거고, 오빠는 이제야 뒤늦게 신묘한 어른들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혹시 오빠 이제 막 분홍색-다홍빛 신기한 성의 세상에 눈을 뜬 거 아니야? 그래, 생물학! 뭐 늦을 수도 있어. 그럼 지금 아담이 눈 뜰 때인가? 그게 뭐 어때서! 내 마지막 키스를 꼭 어디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란 말이야 뭐야? 그러든 어쩌든, 전 오빠 응원합니다. 난 오빠 호감. 아, 생각해 봐. 강아지가 귀엽지, 응? 일단 생선아고 다르잖아. 그치. 자유와 사랑과 선망이 얼마나 좋은 건데. 그럼. 가만 있자. 내 동창 중에 잘하면 에로영화 감독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왜 없겠어! 낙담하지 마 오빠. 체념하기엔 이르다구. 응? 호기심은 젊음의 특권란 말이야. 어머머, 오빠 이마에 여드름 났네. 거 봐 봐!」
   마침내 난 알게 됐다. 미스테리아에 칼럼 변신술을 보낸다는 게 내 일기를 보냈다는 걸.
   오, 저런!
   그 오그라드는 유치하고 간지러운 일기를 대체 왜...! 그러니까 어쩌다가! 딱 보니 이미 샐리가 내 일기를 읽어버린 듯 했다. 아예 외워버린 것 같았다. 나 혼자 볼려고 그냥 낙서 삼아 끄적거린 일기인데. 그 뻔뻔한 투정은 남이 읽으면 절대 안되는 건데.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아는 채 태어나는 것처럼 나 혼자 읽기 위해 쓴 일기는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내가 아닌데.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실수를 했을꼬.
   아, 창피했다.
   「오빠. 창피해하지 마.」
   오오, 너무 부끄러웠다.
   「오빠. 부끄러워하지 말라니까.」
   난 샐리에게 약점을 잡힌 것일까?
   「마라 언니한텐 비밀로 할께.」  뭐-라-고?
   살아가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무안함을 감수한 체 전진하는 일이다.
   「난 오빠의 글이 좋아. 그건 내게 거의 마술이야. 오빠는 내 판타지 도서관이나 다름없으니까. 응? 그러니까 난 작가님의 팬이자 오빠의 여자친구지. 응? 오빠 같은 멋진 예술가 옆에는 원래 나처럼 아리따운 숙녀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응? 세상에 나 같은 여자친구가 어딨다고 그래?」
   샐리는 벌써 내 여자친구로 우리의 관계 설정을 새로해버렸다.
   「난 그냥 무명으로 남을께. 드라마 제목도 있잖아. 내조의 여왕이라고. 대신에 오빠는 내 영원한 애인. 호호호. 농담이야. 정색하기는. 오오, 오빠 귀여운데. 응? 이제는 앙탈까지. 응? 저거 봐 저거 봐. 오빠 귀 빨개지는데! 어머머 저 얼굴의 홍조 좀 봐 봐. 호호호호호. 호호호호호.」
   나는 샐리와의 키스는 추호도 꿈꾸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맹수 앞의 불독처럼 되었다. 내가 뭔 말썽을 일으켰다고 말이야. 이런 일로 샐리에게 책잡힐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건 그냥 애인 가장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로 했다. 안 그러면 내내 찜찜할 것만 같아서.
   내가 그런 꿍꿍이 속으로 현실의 결산을 가늠하는 도중 샐리는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친구끼리 무슨 턱없이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그 정도 호의는 예의라면서 그녀는 내게 그랬다.
   「오빠. 잔말 말고 따라와! 마라한테 확 다 얘기해버리기 전에.」



   3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드니 바이런식 유명인이 되었더라, 가 아니라 나는 샐리의 시녀가 된 것이다. 때로는 애인, 때로는 조수, 때로는 친구. 이미 1인 다역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샐리. 그런데 어디까지 따라가야 집이 나오니?」
   우리는 각자 차를 몰고 갔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지금 정문은 통과했어. 조금만 가면 돼.」
   뭐? 혹시 얘도 대문에서 현관까지? 에이, 설마! 나는 조마조마에서 활동할 때 친했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걸로만 봐서는 난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것만 같았다. 딱히 명백한 근거는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는 샐리의 집, 그것도 휴양관 접견실에 도착했다. 난 아무래도 여기에 잘못 끌려온 것 같았다.
   「샐리. 너 혹시 옛날에 나 몰랐지? 그치? 이거 누가 시킨 거 아니지? 아닐 꺼야. 그럼.」
   「왜 그래, 오빠? 긴장 풀어. 오빠가 의심이 많은 건가... 오빠답지 않게 그러기야?」
   「응. 긴장 풀었어. 그런데 있잖아. 여긴 어쩌면 환상의 나라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드는데. 앗! 이 음악은 혹시 작곡 빨리하기 대회가 있다면 금메달감인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64번째 오페라 돈 파스콸레 서곡 아니니?」
   「응? 아닌데! 미안해. 아니라서. 실은 이거 내가 작곡한 거야.」
   아닌데. 맞는데. 나는 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핸드폰 앱으로 알아봤다. 그랬더니 글쎄 내 예측이 딱 맞았다. 그런데 뭐? 참 나!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또 다시 황당한 기승전결 같은 숙녀에게 낚였다고.
   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발단은 '언젠가'다. 전개는 '혹시나'고, 절정은 '아마도 어쩌면'! 그럼 결말은? 뜬금없이 해피 엔딩! 아니다. 결말은 '역시나'다. 그건 밑도 끝도 없고 대책 없는 완결이다. 세상이 그렇고 인생이 증명하는 일이다. 이 가운데 열은 발단이고, 열정은 절정이다. 그러니까 나는 발단─절정─발단─절정을 원한건가? 결국 그 말이네.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참 나! 뭐, 짝사랑─풋사랑─짝사랑─풋사랑? 호박 나이트클럽에 출근했다 그만뒀다 출근했다 그만뒀다가 낫겠다. 이건 무슨 마술 같은 효과도 없고, 장난꾸러기의 재미없는 장난 같은 상상이군.
   바로 그때 편집장 마라한테 전화가 왔다.
   「어. 마라.」
   「어디야?」
   「어디긴. 지구지.」
   「칼럼은?」
   「조금만 기다려. 거의 완성 직전이니까.」
   「제때 제때 제출 좀 하자. 응?」
   그때 샐리가 내게서 전화를 뺐더니 그랬다.
   「너 누구니?」,  「그야 내 알 바 아니고. 뭐?」,  「난 이 전화기 주인의 여자친구다. 왜?」,  「아 됐고. 아 나 정말 얘 말 많네. 야! 내가 참을 테니까 흥분하지 말자. 아휴, 이제 그만 끊어라.」
   그렇게 샐리는 마라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아마 마라는 미스테리아 사무실 경리 샐리인 줄 몰랐나 보다.
   「오빠. 얘 참 말 많네. 안 그래? 지가 무슨 오빠 마누라야 채권자야? 어디서 독촉이야!」
   「응?」
   나는 뭐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갑자기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황급히 들어오더니 그녀에게 귓속말로 뭐라 뭐라 했다.
   「오빠. 있잖아. 설명은 나중에 하고. 오빠 숨어 오빠 숨어. 어서 어서. 오빠 오빠 숨으라니까 숨으라니까.」
   「응?」
   나는 졸지에 익살극의 주인공이자 축혼가의 훼방꾼이 되어버렸다. 나는 지금 한가하게 사교가이자 야심가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샐리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내게 그 오빠 성격이 장난 아니라고 했고, 나는 한눈팔고 해찰할 수 없었다. 숨으라니까 숨는 수 밖에.
   그렇게 정체 불명의 사나이가 도착한 후 10분쯤 경과.
   로맨티스트의 정서는 무시됐다. 그처럼 해결되지 않는 불확실성이 궁금하던 찰나 나는 커튼 뒤에 숨은 상태에서 바깥을 빼꼼히 살필려고 했다. 그러다 나와 그분의 눈이 핑~ 하면서 마주쳤다. 뭐야 이거!
   그렇게 우리는 통성명을 나눈 다음 친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얻어맞지 않은 것이다. 휴~! 이름이 무슨 포르토피노 몽키스패너라나?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이곳에 포르토피노 페라리를 몰고 왔으며, 본명이 포르토피노였다. 그럼 난 피오렌티나 식스맨이라고 해야 되나 라면서 고민하다가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 몽키스패너는 알고 봤더니 다변을 자랑하는 수다쟁이로써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씨 얘기 많이 들었소. 지의 완성은 블로그다, 라는 책의 작가라구요? 저는 코메디언들을 존경합니다. (뭐야, 그 말은 코메디언이 작가 흉내를 낸다는 뜻인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는 명상가 하루는 교양인이죠. 선생이 글을 막 쓰지 않는 것처럼 나도 막 살지 않는다오. 상식은 내게도 있고 지성이라면 나도 어디서 썩 빠지지 않는다오. 왜, 못 믿겠소? 그렇다고 날 아는 척 깐족거리는 초딩쯤으로 여기지는 말아주시구료. 거 보아하니 살면서 여자 꽤나 울렸겠구만. (댁도 만만치 않아 이냥반아! 이거 왜 이래?) 전적과 명성이야 어떻든, 단언컨대, 샐리는 그만 포기하시죠. 남자가 말이야, 응? 숙녀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정을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 거 안 그렇소? 알 만 하신 분이 말이야. 하긴 그렇게 꽉 막힌 양반 같지도 않구만 그래. 내 좋은 결과를 기대하리다. 그래도 되겠소? 고맙소! (뭘 고마워? 난 암말도 안했는데! 이 인간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허허허. 허허허허허. 웃기면 형씨도 웃으시오. 참지 마시고 말이요. 원래 내가 좀 웃기긴 하죠. 허허허허허. 아무튼, 저는 선생 같은 작가님들을 부러워합니다. (뭐야 이거? 이랬다 저랬다 하고!) 우리, 기분도 좋은데 샴페인 한잔 하겠소? 아 우린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샴페인을 발포성 와인이라고 하지만 아제는 딱 보자마자 내 마음에 들었소. 우린 남자 대 남자이자 떠오르는 듀오로 활약할 수 있을 듯 하오. 허허허허허. 아 그런데 아직은 해가 중천이군요. 샴페인은 다음에 합시다. 말싸움으로는 형씨가 날 이길려나 몰라도 술은 어림없소. 알겠수? 허허허허허.
   그런데 형씨는 왜 말이 없소? 아, 맞다. 내가 통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내 정신 좀 봐. 허허허. 어떻게 분위기도 이상한데 우리 핀볼 게임으로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소? 아마도 포커는 취미 없을 테고. 블랙잭도 관심 없는 샌님은 아니겠지만 천성이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이요. 보아하니 타고난 승부사로구만 그래. 만약 아니라면 뭐 오늘부터 초보자 이어서 1주일 안에 천하의 도박사가 되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요. 아, 그러지 말고 우리 테니스나 한 게임 합시다. 참고로 난 태어나서 테니스를 딱 1번 쳐봤나? 뭐 이 정도면 공평한 승부 아니겠소? 거 승부사 양반. 어째 안색이 썩 좋아보이진 않구만. 혹시 불편하신건 아니겠죠? 걱정 마시오! 내가 운영하는 술집과 클럽에 초대하리다. 한번 왔다 가면 십 년은 젊어질 것이오. 농담이 아니라오. 참고로 그곳은 마초들 사이에서 악마의 쾌감, 끝없는 열광, 그 누구든 광란하는 밤의 지존으로 만드는 곳으로 꽤나 유명하다오. 허허허허허. 아직 소문 못 들었소? 곧 듣게 될 거요. 허허허허허. 아마도 실망하진 않을 거요. 거 혹시 허당계에서 맹활약하는 어설픈 숙녀들만 모아놓은 건 아니냐구요? 예끼~ 이 사람아! 황홀한 천사 1번부터 깜찍한 요정 9번까지, 대타로는 10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절세미녀로만 줄을 서서 대기한다오. 그 대기자 명단, (눈썹 씰룩) 아 말 말어요 말 말어. 말도 못한다니까 그러네. 심지어 행운상에 당첨되면 실제 무인도에 동행할 수도 있소. 말만 하시오. 네? 말만! 자, 궁금하지 않소, 그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 그리고 나란 사람은 정말 어떤 남자인지 알고 싶지 않냔 말이오. (지가 지 입으로 명불허전이네 뭐네 라는 말이야 뭐야? 잘한다 잘해!) 좌우지간, 선생과 나의 만남은 불운의 인연은 절대 아닐 거요. 왜냐하면 이걸 바로 미지의 운명이라 불러야 하기 때문이라오. 그건 뭐 차차 증명하기로 하고 이제 슬슬 테니스장으로 이동합시다.」
   테니스 경기 내기는 아이스크림 사기였다. 결과는 내가 졌다. 생-초보자라는 녀석의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나는 패자가 됐고 초라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그래서 우리는 핀볼을 했다. 나는 또 졌다. 다트도 했다. 나는 또 졌다. 그리고 이어서 영화처럼 무슨 증후군을 흉내내어 암산 시합도 했다. 또 졌다. 소셜 네트워크의 팔로워 수를 비교하기도 했다. 나는 역시나 고개를 숙였다. 강아지가 누굴 반기나 하다 하다 그런 게임까지 만들어서 했다. 심지어 음식 빨리 먹기도 했다. 나는 다 졌다. 모두 졌다. 나의 패배주의는 완성됐고, 나의 루저마인드는 건재했다. 그건 완패고 연패이자 전패였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고, 우리는 몇 일 후에 골프를 같이 치기로 약속한 다음 헤어졌다.



   4

   나는 포르토피노와 헤어진 다음부터 골프 연습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손목이 삐어서 골프를 못치겠다고 한다. 더구나 이제 자기는 골프가 재미없어졌다고 했다. 심지어 골프를 접기로 결정했다나 뭐라나. 이런, 젠장! 그런데 난 왠지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친해질 만 하니 발을 뺀다는 속셈은 적어도 없는 듯 했다. 하긴 녀석은 첫날 밤 얘기를 해줬던 내 친구와 닮은, 나의 새로운 친구다. 아, 첫날 밤 얘기를 해준 친구는 한두 명이 아니다. 허허허. 남자는 여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앞으로 우리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이미 끈끈한 우정으로 엮인 것이다.
   최근 활약을 예고편으로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발단과 전개는 동시에 나타났다. 발단은 샐리였고 전개는 포르토피노였다. <기분 좋은 발단은 숙명적인 절정을 예고했고, 흥분되는 전개는 행복한 결말을 암시했다> 가 아니라 아직은 전망이 불투명했다. 따라서 좀 더 사태를 지켜보며 전세를 관망해야만 했다. 우왕좌왕 바쁘다가 재밌다가 흥미로운 일들이 연이어 날 괴롭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대로 평온했고 많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용케 딱 질색인 일들이 많지 않으니까 일하고 놀면서 적당히 삶에 큰 불만은 없었다. 막 딴생각하고 딴청을 피우며 한눈파느라 즐거운 인생의 주변만 겉돌지 않으면 된 거다. 그래도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지금 잘 살고 있나 라는 의혹 말이다.
   나는 길조를 애정하고 행운을 갈망했다. 따라서 난 모험을 추구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낭만의 주동자도, 꼼짝없이 질투의 여왕을 좋아하게 된 사랑의 포로도 아니었다. 결국 난 알고 보니 엉터리 작명가이자 허세의 제왕에 다름 아닌 존재였나? 칼럼니스트라는 내 직분으로 보자면 난 아마도 허풍의 제물인 듯 하니까 그건 뭐 썩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불현듯 포르토피노는 내 앞에 나타난 걸까. 그는 나의 새로운 단짝이라는 예감은 거의 실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린 서로 은근 허당이라는 걸 인정하며 자평하고 직감했으니까. 하지만 고귀한 사랑은 드물듯이 함부로 갑작스런 우정을 온전히 신뢰하는 건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포르토피노가 좋아하는 샐리에게 난 흠모의 감정을 밀고 당기는 남자로 남아있어야만 하나? 그보다는 포르토피노를 쥐락펴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걸 그 어딘가에 고백하고 싶다. 난 너에게 때로는 좋은 친구이자 때로는 얄궂은 연적으로 순간 순간 깜작 변신할 테니까 바싹 긴장해, 라고 겁박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처럼 난 단지 중도 세력이자 무소속이었다. 나와 포르토피노는 우정, 나와 샐리는 우정 2.0! 사랑은 모르는 거니까. 그러므로 그건 숙명에 맡기기로 했다. 일단은 나와 포르토피노 그 남자 대 남자의 친분이 중요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몇 년 뭐뭐 몇 년 뭐뭐 라면서 자기 이야기를 각자 많이 실토하는 사이는 아니다. 포르토피노와 난 그저 부담없는 친교를 나누는 정도일 테니까. 굳이 고급 살롱과 좋은 술집이나 싸구려 바에 데려가서 속마음을 파헤쳐보지 않아도 속으로 뭘 생각하는지 안 봐도 훤할 만큼 우리는 철없는 어른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눈빛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독심술, 그거 별거 아니다. 허허허허허! 어쨌든 난 녀석을 만나서 '창창한 청춘'의 순진함과 무모함과 유쾌함을 되찾았다. 아닌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난 단지 그냥 딱 세 가지가 좋았던 거다.
   첫째, 포르토피노 몽키스패너는 그저 얄팍한 허명이라는 점. 그러나 처음에는 별명을 듣고 살짝 쫄긴 했다. 왜 안 그랬겠나.
   둘째, 포르토피노가 포르토피노 라 페라리를 몬다는 것.
   셋째, 한껏 과장하자면 악마가 탐낼 만한 쾌락, 즉 녀석의 천리마를 같이 타고서 매일 함께 놀러다닌다는 점.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 친구가 자기는 신선한 기운이 가득한 활기찬 삶을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딱 봐도 알만 했다. 뭘 해도 재미없어한다는 걸. 심지어 자기는 샐리를 좋아하는데 샐리는 내게 호감을 품기 때문에 꽤나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것까지. 그러나 녀석은 우정과 사랑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어했다. 나도 그 친밀감에 덥썩 덜미를 잡히는 데 퍽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포르토피노 그 친구는 욕심이 많다기 보다는 뭐랄까, 재밌는 호인에다 돈이 많았다. 그럼 내게는 애매한 인기만 남았나? 인기는 무슨! 그처럼 녀석의 속내를 파악하는데 구태여 문학적인 관점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든 어쩌든 우린 모두 흥망의 기복이 심한 인생, 내일은 모른다는 듯한 이 급작스런 브로맨스의 감정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싫지 않았다.



   5

   나는 내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녀석을 단순히 이름으로만 등록해뒀다. 왜냐하면 별칭이니 예명이니 것도 좋다만 난 아마 그 어떤 비상함을 감추고 아끼며 바텐더의 거짓없는 예우를 편애하니까. 옛날에 잠깐 그랬던 적이 있다.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친한 친구들을 모조리 내 맘대로 정한 애칭으로 등록했던 일. 그랬더니 도저히 정신사나워서 안되겠더라. 그래서 그 후로 각종 소프트웨어에서 신 기능을 알리는 것처럼 잠깐만 별명을 등록하던지, 아니면 그냥 귀찮게 쓰고 바꾸고 지우고 고칠 필요없이 처음부터 이름만 등록하기로 했다. 타인도 그러겠지?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정답이겠네. 어쨌든 그렇다면, 간혹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이름 대신에 쓰는 거지. 뭐라고? 바로, 진상이라고!
   그런데 뭔 얘기를 하다가 글의 품위가 말의 다변으로 바꼈지? 나도 수다쟁이가 다 됐다. 아니면 음 그래, 외롭던가. 또는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던가. 아닐 수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응석도 귀찮고 투정도 한두 번이다. 다 모르겠고 포르토피노한테 어디 가까운 데로 몇 일 캠핑이나 갔다 오자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보아하니 아마도 나의 기수이신 그분께서 소풍, 그것도 봄-소풍을 가고 싶어하니까. 아무래도 내 이 접속사를 좋아하는 본능과 야박한 변덕, 미지를 탐닉하는 습성, 예민한 코끼리 귀 그 헤어나올 수 없는 업보에게 로마의 휴일을 안겨줘야 할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내가 변심하면 어쩌지? 그건 그때 가서!
   우리는 놀러가기 위해서 만났다. 그런데 저번에 샐리에게 포르토피노에 대해서 험담을 살짝 풀어놓았기 때문일까? 나는 포르토피노와 대면한 순간 괜히 머쓱했다. 바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녀석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소풍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심한 트집은 아니었고, 흉볼 만한 교분은 이미 쌓였으며, 누가 봐도 어디에 내놔도 썩 빠지지 않는 화제인 건 분명했다. 아니다. 그건 미움 받기에 합당한 손색이었다. 고로 누가 누가 대인배인지, 누가 하수고, 누가 속 좁은 남자며, 누가 허당인지는 거의 밝혀진 거나 진배없었다.
   「포르토피노. 자, 이제 떠나볼까! 그런데 어디로 가지?」
   「그러게. 어디로 가지?」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샐리한테 물어볼까? 그래. 그게 좋겠다. 샐리랑 같이 가면 되겠네.」
   「샐리는 가기 싫다는데. 여성잡지1을 정독할지 아니면 서정시를 낭독할지 몰라도 집에서 쉬겠다는데. 헉. 설마......」
   「에이 무슨 소리야. 드라마퀸이 소풍을 왜 싫어해? 자고로 숙녀는 사랑과 여행을 여간해서는 마다하지 않는다네. 자네 여자를 잘 알지 않나. 자네는 숙녀의 헤어스타일만 딱 보고서도 그녀가 지금까지 남자를 몇 명 사겼는지 대번에 꿰뚫어볼 것 같은데. 물론 간혹 헛다리 집을 수는 있겠지. 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않나. 아무튼 놀러가서 고기도 구워먹고, 캠핑 기분도 한껏 즐기고, 음 어 어, 또 뭘 하지? 그게 다인가? 그냥 가지 말까? 아니야. 꽃이 피고 봄바람이 불며 새가 지저귀는데, 우리도 인생을 즐겨야 할 거 아닌가. 가서 풍성한 모험을 하던지, 시원한 해변에서 처음 보는 미녀를 꼬셔서 찐한 연애를 하던지, 가기로 했으니까 가자구. 응? 그래. (멈칫 멈칫) (갸우뚱 갸우뚱) 그런데 어디로 가지? 그래. 우리 그냥, 샐리랑 같이 가자. 그녀가 우리들 꿈속의 행진 그 놀라운 행선지를 알려주겠지. 그럼 좋겠네. 와, 됐다. 그럼 되겠네. 그런데 너가 몇 번이나 가자고 했는데? 숙녀에게 예의상 일단 2번은 정중히 권해야 하는 거 아니니? 일단 내가 한 번 더 졸라볼께.」
   나는 그렇게 샐리에게 전화했고, 샐리는 내 제안을 듣고서 덥썩 흔쾌히 수락했다.
   뭐야? 저런!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을꼬!
   마지못해 응하는 척 승낙한 것도 아니고... 그럼 포르토피노는 도대체 뭐가 되는 거지? 옆에서 다 듣고 있었는데! 뭐시여 이건? 나는 엉덩이에 악마의 뿔이 돋는 듯한 막 그런 이런저런 묘한 기분들 곧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그건 마치 라디오 애청자 엽서의 사연을 듣고서 그러는 거 같았다. 아 아 웃으면 안되는데 웃으면 안되는데, 그런데 사연은 아 글쎄... 아빠가 밖에서 술 드신 다음 집에 들어오셨는데, 세면대에서 발을 씻다가 다른 쪽 발을 같이 씻으면 빨리 씼겠다, 어서 자야 하니까, 라는 생각에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가 공중부양을 하셨다나. 결국 사이렌이 울렸다는 바로 그런 얘기처럼. 아 아 웃으면 안되는데 웃으면 안되는데!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샐리에게 야유회는 취소됐다고 통보했고, 우리는 포르토피노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썩 괜찮은 합의였다. 그런 반면 수다스러운 추억이니 편협한 동경심이니 그런 건 싹 다 날라가버렸다. 희비가 엇갈렸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샐리는 다음에 미스테리아 사무실에서 보면 되고, 포르토피노가 어떤 환희의 나라에 살고 있을지 막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6

   나는 포르토피노의 집에 도착했다. 포르토피노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수영장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드넓은 정원과 멋진 전망으로 보아하니 포르토피노는 그런 남자인 것 같았다.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신사. 그런데 일찍 외롭게 됐고, 다재다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재기를 아끼는 듯한 삶. 뿐만 아니라 친족이라고는 까무러칠 만한 미모의 여동생뿐. 혈육이 다소곳한 만큼 친구는 적고, 돈은 많고, 할 일은 없고. 왠지 모르게 나는 내 예상이 절묘히 들어맞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예감은 이번에는 세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대 다음은 쉽게 말해 8 대 2다. 8은 실망 2는 흡족. 물론 2도 어떻게 보면 시큰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따지고 보면 그마저도 역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일 것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그거다. 그러나 포르토피노는 처음부터 날 낙담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몽키스패너라는 허명이 진짜인가 몰라도, 적어도, 본인 소유 자동차의 모델명과 본명이 똑같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녀석의 집에 도착해서 둘러본 결과 페라리는 캘리포니아 모델도 있었다. 나는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하나, 그림자도 하나, 까이엔 즉 고추도 하나인데 이 친구는 최소한 페라리만 두 대인 남자였다. 난 곧바로 다짐했다. 녀석은 원래 덕망이 두터웠으므로, 따라서 우리의 친교는 외교적 우정으로 시작해서 엉덩이에 애교 점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공유하는 교분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실제 포르토피노의 취향을 살펴보니 나와 비슷한 구석이 꽤 많았다. 그가 지금 읽는 책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13인당 이야기. 또 그는 보지도 않으면서 영화를 틀어놨다. 조그만 큐브 같은 기기에서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는 그거 이름이 뭐드라, 아무튼 그 영화의 제목은 거짓말의 발명. 옷장은 텅 비어있고, 불면증은 치료됐으며, 지금은 다몽증을 앓는 중이란 걸 굳이 숨기지는 않음. 그는 아마도 시적인 운명론자일 것이다. 아니면, 불가능한 낭만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던가. 내가 미스테리아 편집장 마라에게 쏟았던 호의의 반만이라도 얘한테 정성을 들였더라면! 나도 못말리는 장난꾸러기가 다 됐다. 왜냐하면 엉뚱한 열의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을 언뜻 떠올리고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 내 이런 가벼운 기분은 어쩌면 비밀스러운 행복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안된다.
   「뭐해? 자, 수영복! 우리 집에 오면 수영을 해야 해. (윙크)」
   윽, 뭐야 이건? 혹시 수영장 물이 빠지면 비밀 통로라도 드러날려나?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화 같은 삶에 대해서 토론할 수도 없고, 할 말도 많지 않으니까 차라리 수영하기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다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가 한 일은 그랬다.
   바로, 샐리 흉보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 앞에서 눈부신 비키니 미녀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 놀라운 자태의 오묘한 아가씨. 그녀는 뮤즈였고, 비너스였으며, 아프로티테이자 클레오 파트라였다. 아아 그녀는 에코였고 나의 수제자감이었다. 어머 어머 저 저 대리석 대리석...! 그녀는 글래머였고 나는 가슴이 절벽이었다. 그리고 포르토피노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만 눈이 똥그래졌다. 장난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난 그냥 침을 흘리기 직전이었던 거다. 날이면 날마다 마감일에 쫓기고, 복권 꼴등에 절망하며, 뭘 해도 재미없었는데, 그런데 내 앞에 떡 하니 사랑의 화신이?
   오, 땡큐!
   「인사해. 이쪽은 내 동생 이브. 그리고 이쪽은 나와 샐리 그 천생연분을 위한 사랑의 가교 역할을 맡은 예언가. 아,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나. 네 이름이 뭐였드라?」
   「어? 내 이름?」
   「그냥 오늘만 아담해.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알았지?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생각하고.」
   나는 정신이 아찔하고 마음이 아득하며, 영혼이 육신을 밀어낼 듯 말 듯 해서 즉시 바보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브는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니까. 그러므로 이 일은 나중 내 피앙세한테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살다보니 재산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비밀이 늘어나네? 가난해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유쾌한 삶을 살면 그만! 인생은 행복이냐 불행이냐, 둘 중 하나 아닐까? 아니다. 왜냐하면 순애보냐 난봉꾼의 허풍이냐, 것도 아니면 나비처럼 훨훨 날으는 코끼리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옆에서 뭔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른 채 웨딩드레스를 상상했다. 또 첫날밤을 떠올렸으며 내 지난 몽정기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 경주마도 아니고 야생마도 아닌 황홀한 목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를 왜 이제야 만난 것일까? 그러니까 내가 사춘기 때 랭보의 시가 아니라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를 외웠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러든 어쩌든 지금 내 작가의 삶을 위한 수업료는 톡톡히 치른 셈이니 후회는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회오와 아쉬움은 시작하자면 끝이 없으니 그냥 남들처럼 후회하지 않는다며 폼 잡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짜 그렇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허세요 허영심이다. 부러운데 부럽지 않다? 그거 다 거짓말이고 뻥이다. 남자의 본심을 여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고, 여자의 속마음 역시 남자는 이해하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이해와 공감과 유추를 위해 노력함이 아마도 최선일 테니까. 무엇보다 본인이 아니니까. 연극처럼 변장하든 몇몇 실험만 해 봐도 단지 그것만으로도 느낌은 이상해질 테니까 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한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남녀는 각자 그러려니 하며 앞에서 웃고 뒤에서 인상 쓰면 그만이다. 아님 비웃어? 아니지. 남을 웃겨야지! 또는 앞에서 웃고 뒤에서 각자 알아서 하던가, 또는 그 반대로? 쉿! 우리는 짧은 행복과 행동하는 사랑도 존중하자.
   사랑이란 게 정말로 신기한 거다. 남녀가 사귀기 시작할 때는 '나도'고, 점차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면서부터는 '나는'이 압도한다. 처음에는 그녀를 꼬시기 위해, 마음을 빼았기 위해, 사랑의 대리석을 훔치기 위해서 여자들 세계의 질서인 동조성을 한껏 발휘해서 맞춰주고, 그래 의전을 행하고, 그 다음 10년 후? (10년이 뭐야!) 집에 들어가서 시무룩시무룩! 그러니까 시작은 진공청소기 나중은 커피포트! 왜냐하면 일평생 으쌰으쌰만 일삼던 그냥 허당이 하루 아침에 로맨티스트 역할극을 하는 건 생각처럼 그리 쉽진 않을 테니까.
   한편, 바로크풍 음률이 물결치는 나의 청춘 스케치와 달리 우리가 놀고 있는 이 뻔트의 낙원에서는 최신 유행가에 분위기가 들썩들썩했다.
   그 노래는 가사를 들어보니 무슨,
   뿜뿜 네 앞에서 난 뿜뿜, 네게 줄께 뿜뿜 뿜뿜... 너만 보면... 무슨 말이 필요해... 보여줄께(뭘 보여줘?)...
   한마디로 가사는 큰 의미 없었다. 가사는 그냥 한 역할일 뿐 나머지가 최고였다. 나는 안 그래도 이브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던 찰나에 더 정신이 없어졌다. 나는 엉덩이 들썩거리는 팝송도 좋아하니까, 괜히 혼자만 딴생각하느라 말이 안 통하면 안되니까, 제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은 마치 그와 비슷했다. 남의 집 잔치에 놀러가서 가짜 초대장을 내밀며 쓰윽 입장한 다음, 향락에 들뜨고 꽃내음에 안달나며, 상큼한 유혹에 매료된 나이값 못하는 동네 아저씨가 된 것만 같았던 것이다.
   힐끗 힐끗 훔쳐볼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도 무안하다면서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린 다음 슥~ 손가락 사이로 엿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포졸도 아니고 신부 들러리도, 조명 감독 조수도 아니었다. 겁쟁이의 투정과 사색가의 불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애첩의 간청만 남았다. 미심쩍은 전율감─엉성한 직감─밑도 끝도 없는 공포감을 연구하며,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착상을 온종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이제 드디여 샐리와 포르토피노, 나와 이브라는 그 기막힌 2 대 2 구도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잠깐 마라를 끌여들여 긴장되는 삼각관계를 연출할 수도 있고. 그래. 응? 그래~ 맞아~ 맞다니까~ 그래~ 이거야~! 이거라니까! 이거라고!
   내가 바란 건 그런 거였다. 사랑은 가난했고 행색은 불쌍하며 인생을 망쳤다, 의 정반대를 원했다. 이제 슬슬 다몽이 이루어지며 꿈의 신 모르페우스가 깜짝 놀랄 만한 공상이 실현되기 직전이었다.
   오오 이브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난들 알겠나!
   「오빠. 노래 잘 불러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뭔 소리야, 너 왜 그래? 아, 작품 구상했나...! 이브가 묻자나. 노래 잘 부르냐고!」
   「어, 노래? (머뭇머뭇) 어, 그게 그냥 조금.」
   그런 다음 나는 아카펠라 동호회에서 활동했네, 최신곡 누가 부르는 거 내가 지었네 어쨌네 라고 했다.
   그리고 수영장 파티는 곧바로 음란한 마술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문란한 탕자가 아니었고, 교양미를 추구하며 지극히 상식적이고, 아름다운 인생을 동경하는 사람이니까.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나의 탐색전은 어디까지나 조용조용했다. 샐리랑 셋이서 놀러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냥 다행도 아니고 천만다행!
   만약 오늘 포르토피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혼자 야구장에 놀러가서 고함쳤겠지.
   「야 우익수! 누구 엉덩이나 닦아라! 타구 소리는 들리고 내 말은 안 들리냐, 어? 이 바보야! 아 들었어 못 들었어? 아 누구 엉덩이 광나게 닦으라고! 야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늬가 내 대신 우리 회사에 출근해라. 그리고 내가 늬 자리 꿰차자! 우리 서로 바꾸자니까. 왕자와 거지 몰라? 자, 어때!」 
   그러고 보면 스포츠인도 그렇고 참 돈벌기가, 세상 살이가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쉬운 일 하나 없네 하나 없어. 아 글쎄 그래서 더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다 뭐라 뭐라 따따부따, 라는 말이 이어지면? 쉿! 그녀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 꼭 그녀가 영심이에 변덕의 여왕이 아닐지라도.
   그처럼 딱히 큰 일은 없었지만 행운의 여신께서 점지해주셔서 태몽을 기다리는 다몽증 환자에게 2 대 2 로맨스를 선물한 것이다.



   7

   나는 틈틈히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들러 정탐을 했다. 왜냐하면 샐리에 관한 정보를 캐내어 포르토피노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뭐든 따분해야 정상이었다. 이를 테면 백조의 호수는 행복한 대신 끝없이 심심했다, 라고 해야 비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돌변했다. 2 대 2 그리고 짜릿한 삼각관계. 허허허허허! 흐흐흐흐흐! 나는 이브의 환한 미소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렇게 나는 바보 같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생각해냈다.
   「오빠 노래 잘 불러요?」
   그래서 나는 목이 쉴 때까지 노래만 불렀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다 알게 됐다. 나는 노래에 대해서 천부적인 소질은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을. 목표가 멀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독학으로도 가능하다. 그건 자신있다. 중간은 가니까. 끈기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뭐니 뭐니 해도 속성 숙달이 긴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난 학원을 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아 잠깐, 개인 교습? 그건 비쌀 듯 하고 초보자한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다.
   「이브가 클럽 가고 싶다는데. 샐리는 혹시 클럽을 좋아할까? 아니면 고풍스런 3박자 무도회를 선호할려나!」
   「포르토피노. 오늘 이브 생일이니?」
   「와! 대박! 어떻게 알았어? 와, 어떻게 알았지! 신기한데. 놀라워. 너 우리 말하는 거 엿들었니? 아닌데! 그럼 전화기가 켜져 있었나? 것도 아닌데!」
   애인이 뭘 생각하는지, 바람 피는지 한눈파는지, 사랑이 식었는지 눈치채지 못하던 의심하던 어쩌던지, 사랑의 제1법칙은 그거다. 항상 레이더를 가동할 것! 상시 사이렌을 대기하며 오늘은 판도라의 상자인지 다아이몬드인지, 또는 생선인지 꽃인지, 적어도 그녀가 저기압인지 아닌지를 세심하게 살필 것.
   그런데 뭐야 이거! 애인이 노래 잘 부르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클럽? 이거 이거 복고풍으로 춤을 출 수도 없고 큰일이었다. 막춤에 저질 댄스? 망하는 지름길이다. 그때 그때 다른데 지금은 아닌 경우니까. 연애의 논리는 남자를 괴롭게 했다. 사랑은 역시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광고를 흉내내며 카피라이트도 하나 지었다. 사랑도 일이다 라고.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어떻게 갑자기 본격 무도인으로 변신하냐고! 차라리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불러달라 하시지...! 그렇다고 이브에게 난 춤 못 춘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도 없고, 나 춤 잘 춘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로다.
   그러다 나는 좋은 생각이 났다. 카드 게임에서 선두가 베팅을 받기만 하면 게임은 끝난다. 결과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거다. 그런 승부는 따도 적게 따고 잃어도 적게 잃는다. 재미도 아담하기 마련이다. 누가 이기든 망하든 망치던지 탕진하던지. 그러나 선두가 베팅을 받고 나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베팅을 추가하면 게임은 계속된다. 밋밋한 게임의 재미는 느닷없이 흥미진진해지는 거다. (딱)! 이거다. 이거라고. 난 다시 포르토피노에게 전화했다.
   「샐리가 볼링치자는데!」
   그렇게 포르토피노 남매와는 의사 타진이 끝났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정작 샐리의 목소리는 요만큼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아차! 어쩌지? 불이 발등에 떨어졌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코너에 제대로 몰린 거지. 나는 서둘러 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샐리. 너 볼링 좋아하니?」
   「아니. 볼링 접었어.」
   「그래?」 
   「응.」
   왜 접었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지금껏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난 왜 뚜껑 없는 차를 못타냐고 그녀에게 따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있잖아. 너 혹시 라마 본 적 있니?」
   「뭔마?」 
   아 나 이거 정말 거 원 참. 얘 또 나 입 아프게 만드네.
   「아 라마! 낙타 비슷한 거. 아 글쎄 알파카 사촌. 얼굴은 기린, 몸은 양, 다리는 소. 그래도 몰라?」
   하긴 처음부터 몰랐다면 나라도 모를 설명이었다. 알아도 더 헷갈렸을 테고.
   「알아. 우리... 라마, 보러갈까?」
   이렇다니까. 이거야. 이거라고. 나는 어깨뽕이 장난 아니게 튀어나오게 되었다. 어렵싸리 치유되었던 연예인병 다시 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건 말끔히 치유됐고 새롭게 아티스트병 제2기가 진행중이었다. 내가 못살아!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그렇게 하면 돼. 잘 하고 있어. 이제야 좀 우리가 궁짝이 맞네.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8

   어인 일인지 우리 넷은 그렇게 라마를 보러 인근 농장에 도착하게 됐다. 나의 신출귀몰한 임기응변에 따른 신통한 결과였다. 그런데 라마는 표정이 많이 뚱했다. 뭐랄까 철학적이라고나 할까? 설마 저 녀석에게 신기가 있다거나 무슨 통찰력이 있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건 아마 녀석이 많이 심심하기 때문일까? 그거야 뭐 라마의 인생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고. 각자 가는 길이 다른 거지.
   그나저나, 샐리 넌 대체 볼링을 왜 접었어? 라고 다그치고 싶은 걸 난 겨우겨우 간신히 참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2 대 2는 굉장히 애매한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왜 딱부러지게 설명하기는 힘든데 뭔가 이상하게 그런 어정쩡한 만남이 있긴 있다. 우리가 지금 그랬다. 완전 딱 그랬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고.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이건 정말 찐한 사랑도 아니고, 상큼한 풋사랑도, 애절한 짝사랑도, 단정한 우정마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향기로운 장미는 어디 가고 날카로운 가시만 남았다. 천사의 상상력은 다 뻥이고, 무지개의 희망은 뜬구름잡는 허풍에 불과했다. 거짓말은 어른의 인사요 우린 모두 그렇고 그런 사랑이었다. 역시 연애는 개인전이다. 바람둥이들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설픈 추억 찾고 낭만을 탐구하다가는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이도 저도 아니라고 말이다.
   어쨌든 점잖치 못한 허영심은 뭔지 모를 선망 및 갈망과 뭐라 말할 수 없는 최고의 단짝이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이제 남은 건 클럽 밖에 없었던 것이다. 궁짝궁짝 궁짝궁짝, 음악이 도대체 멈추질 않는 2박자 음악만 트는 클럽.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자상하고 다정함과 동시에 고고한 한편 부추기고, 말 돌리기를 좋아하는 부류. 그러나 알고보면 은근 허당. 그 뿐만이 아니라 매번 당하는 역할. 하지만 재밌는 친구. 그러나 오르락내리락 컨디션 난조가 심한 친구. 그래서 절반쯤 호구. 하지만 알고보면 가난한 남자. 뭐? 이런, 젠장!
   꿈 같은 사랑이 우리들의 희망이건 어쩌건 우리들은 웨이터 미스터 에르메스와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맞다. 그래도 뭐랄까 페라리를 타고서 에르메스를 만나러 간다? 형식적으로는 소원 푼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째 이런 식이라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편이 나을 수도 있고.



   9
 
   우리가 클럽에서 과연 천국에 당도한 듯 재밌게 놀 수 있었을까? 아니다. 결과만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클럽에서 잘 놀다가 클럽의 성격이 황당하게 변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곧 고품격 클럽의 분위기는 일순간 물이 흐려졌던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 그건 아니다. 이미 고급 정보를 입수한 채 들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말이! 이건 막 촌스런 나이트클럽인지 완전 구식 카바레인지 통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우리의 조합 역시 영 애매했기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는 이런 조합으로 만나지 말자는 암묵적인 약조와 함께. 정말 지긋지긋하다 어쩐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번 느꼈다. 클럽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이 같기 힘들다는 것! 아조 영 딴판이라는 걸.
   새콤달콤한 행복이 보일락 말락 다정한 사랑이 내게 올 듯 말 듯 했지만, 찬란한 꿈과 유복한 희망을 거의 정말 거의 진짜 품을 뻔 하다 말았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단지 별자리는 운명에게 친절했고 운명은 열망에게 다정했으나, 열망은 결국 행운과 친하지 않았다 뿐! 그러니 이제 앞으로 어설픈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당돌한 초연함을 발휘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브는 말이다, 결코 쉬운 여자가 아닌 듯 했다. 또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어? 뭐 그냥 쉽고 어떻게 생각하며 뭐 그 어찌 어 어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니다. 그-그녀는 정-정숙한 숙녀 나-나는, 나는 비-비밀스런 풍-풍운아! 그거면 됐다. 따라서 일단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아무리 그래도 오오, 이브의 그 난생처음 경험하는 신비한 귀여움! 밝은 그녀의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눈웃음! 난 그녀만 생각하면 또 다시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천사와 함께 하는 행복한 그림을 상상했다. 그러다 욕망을 탐문한 결과 할 일을 고안해냈다. 그녀가 또 뭘 좋아한다고 했더라, 어떤 남자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라면서 자꾸자꾸 그녀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정신 나간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원래 바보였다. 전반적인 기질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질투심에서 유발된 애정은 이미 인생에 대한 환상을 한껏 부풀려놓았다. 완전히 마음을 UFO에 태워서 안드로메다인지 어디인지까지 보내버린 거지. 이건 정말 최근 내게 빚어진 이상한 호사가 확실했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불쾌한 근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난 분명 그녀에게 미흡한 남자일 수도 있다. 또 내가 내 사랑, 내 영원한 애정, 내 하나뿐인 고결함, 나만의 황금 꽃,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애정, 내게 있어 단 하나뿐인 찬미의 대상, 지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정적이고 벅찬 희망인 나의 피앙세를 모른 체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프로였기 때문에 작품에 관한 기념비를 세우고 싶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건 요컨대 비밀의 탄생이었다. 그러니까 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대관절 어쩌면 좋지? 이건 정말 아름다운 시절의 유쾌한 기분 때문에 빚어진 유복함인지, 끈질긴 불운에서 해방된 심정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브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모호한 경외감! 시간 가는 줄 모르고서 나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기쁨의 감탄만을 간직한 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유일한 사랑을 하찮게 여기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아마 나는 그녀가 내 블로그에 등장하는 특별한 선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과연 이브의 유니콘이 될려다 그만두고 싶었던 갈팡질팡은, 그러니까 대수로운 일일까, 대수로운 일이 아닐까? 난 내게 물어봤다, 왜냐고! 그래요? 왜지요? 그러니까 대관절 어째서 그랬냐구요. 왜냐하면 난 아마 싫증을 빨리 느끼기 때문인 듯 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난 포기가 빨랐고, 싫증이 심했으며, 지겨움과 지루함을 언제나 양쪽에 끼고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때문에 나는 연애다운 연애를 단 한 번도 못해봤다. 이제 보니 아마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플라토닉이냐 찐한 사랑이냐, 어정쩡함은 없고 선명하게 둘 중 하나였다. 정식이 없었다. 기준도 없었다. 남자라는 표준은 맞지만 한마디로 허당계의 대표 주자였던 것이다. 오직 뻔트만이 살길이라면서 살아온 듯 했다. 맞다. 그러니까 여자와 추억을 쌓을 일 자체가 없었던 거다. 그러고 보면 추억이란 건 여자가 졸라서 만들어지는 건가? 아니면 남자가 순진하던가! 기억나? 솔직하게 말해 줘! 뭐? 아아 오그라든다. 아니 그렇소? 완전 유치하다. 으으으, 초딩도 아니고 어린애 장난 같다. 하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다. 나 기분 좋다고 남들도 모두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건 아니니까. 자칫 자의식이 과잉되면 잠깐 그런 순간이 지나갈 뿐. 그런 기분이 혹은 잠시가 아닌지도 모르고. 아 저 사람 참 말 많네, 라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이브가 이번에는 정말 떨리는 수필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고 하길래 난 또 어쩔 수 없이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꿩 먹고 알 먹고, 마음을 뺐었더니 사랑도 행운도 황금까지 다 딸려 오더라는 일처럼 하는 수 없이 칼럼리스트라는 직분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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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인생론
   내용: 시샘이라는 감정에 강박증을 느끼는 허세로 보나 선망에 상사병 같은 애착을 품는 허영심으로 보나 질투란 당혹스런 본능이고, 사랑은 유치한 열정이며, 남녀 공히 내 기분이 좋을 때 난 바보 같은 친구고 그렇지 않을 때 난 진공청소기를 부러워하는 허당이다. 그래서 다수가 싫어하는 커피포트로 낙인 찍히지 않을려면, 내내 세상사에 끌려다니고 오락산업의 리모콘에 조종되지 않을려면 최소한 추리소설을 애독하는 취미를 갖는달지, 사랑을 예견하거나, 적어도 상대의 마음을 떠볼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모험에 대한 애호와 낭만을 향한 믿음이 전부가 아니니까. 따라서 사람의 감정을 읽은 다음 그이를 내 마음대로 마술사의 조수처럼 부리거나, 짜릿한 인기를 얻고 대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마음을 붕 띄워야 한다. 악담이 취미인 고수를 조롱한 다음 즉각 그분을 호인으로 띄워주든지 적어도 날 하수로 자처할 줄 아는 게 어른 세상에서는 이로운 일이다. 고급은 아닐지언정 그건 진정 기술인 것이다. 주파수 혼선 되듯 각자 내 얘기만 할 게 아니라면. 여자들이 괜히 조명을 원하며 열등감을 습관처럼 실토하고 항상, 그렇구나, 정말이니, 좋겠네, 부럽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 통 몰랐던 대인관계의 상식적인 교양 그 기본은 이렇다.
   첫째 동조성, 둘째 거울 비추기.
   물론 첫째의 부작용은 그것이다. 어느 날 봤더니 주변엔 순 허당뿐이거나─파도타기란 게 으레 그런 거니까─어떤 숙녀들처럼 친한 친구를 자주 바꾸는 일.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기 때문에 바꾸기 힘겨운 첫째와 달리 둘째는 충분히 후천적으로 습득 가능한 기술이다. 그러니까 허당계의 명언을 기억할 겸 세상은 반기는 법이니까 돌아온 행운아의 영웅담을 과장할까, 과장하지 말까? 일단 나서기 좋아하는 수다쟁이의 고자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대신 내(그대) 어렸을 적 기억만 떠올려봐도 충분하다. 당신의 인생사에 그 모든 세상의 비밀이 온전히 다 담겨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뭐냐면 그거다. 내 삶에 모든 세상의 비밀이 다 있는데, 남의 삶과 사유가 표현된 작품을 보면서 우린 꼭 비슷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유대감-동질감-개성-연민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점. 그러나 결과는 대체로 실망이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는 시간 지나서 읽어 보면 차마 낯 뜨거워서 들여다 보기 어렵게 된다. 뭐 꼭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최신작도 한 달만 지나면 복고풍이다. 어떤 숙녀는 그럴 것이다. 안목과 취향이 어떻건 자기는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친구라면 몰라도 베스트셀러만 주로 읽는 친구와는 절대로 사귀고 싶지 않다고. 가령 상류층이 베스트셀러를 읽는다? 조용히 웃지요! 책은, 옷으로 비유하면 된다. 옷장을 열면 옷은 100벌인데 딱히 마음에 드는 옷은 없습니까? (딱) 그거다! 심지어 에르메스와 페라리는 거의 무료다. 아마도 유명 패션소에 가 본 사람은 만 명 중 1명도 안될 테고, 거기서 VIP는 십만 명 중에 1명은 될려나 모르겠다. 그러나 격조란 건 귀찮게 어디로 쫓아가고 따라가며 기다릴 필요가 하나도 없다. 미술사에서 다시 못 올 최고의 황금기는 언제일까? 그럼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문학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그 시기는 모두 거의 비슷하게 발생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지. 찰스 디킨스와 주세페 베르디는 친구였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사촌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였으며,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딸과 에드바르 뭉크의 여동생은 동문이었다. 좀 더? 구스타프 클림트는 마농레스코와 토마스 하디의 최신작 작품을 애독했다더라, 더구나 피카소는 마법사를 읽고서 감명 받아 무도회에 가서 존 파울즈로부터 사인을 받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더라! 캬~ 이거다. 이거야. 자료 조사가 귀찮아 대충 설명해서 그렇지 과장은 맞지만 결코 망상에 억측이나 상상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사실과 흡사하다. 뿐인가, 지금 당장 유럽 어느 카페에 가보면 이런 명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괴테와 모차르트와 고흐가 한 잔의 차를 즐기던 곳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향기를 영 탐탁치 않아했었죠 라고! 과연 이게, 정녕, 믿겨지는가? 그냥 이건 환상이지 환상! 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던 거다. 미스테리란 바로 이런 걸 미스테리라고 한다. 합리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란 건 잘 알겠다만, 자본의 분배를 논하는 게 왜 나쁘겠냐마는 상류층은 남들과 다르게 사는데 처음부터 기본은 모른 체 연예인만─명목상의 연예인이란 말이 아니라─지망하는 건 문제가 있다. 기본만 따르고 정형을 추구하며 모범생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에 앞서 상식과 교양은 알고서 개성을 논해야 하지 않을까?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성격 좋다는 말 들을 필요 없다. 어느 선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한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아도 되고 학벌이 훌륭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다. 다만, 다만 기본이 무엇이란 건 알고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 그런데도 베스트셀러만? 영화로 나오면 볼 의향은 있다. 만약 평판이 괜찮다면. 그처럼 일반인이 매번 속고 헤매야 오락산업 관계자도 먹고 살며 나 같은 지성인도 그 가치가 상승한다.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실제 괜찮은 파티에 가보면 이미 멋진 남녀는 그곳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이기 일쑤다. 유행을 선도하는 건 전문가 중의 전문가고, 유행을 뛰어넘는 분은 십대이자 고전이며, 유행에 내내 끌려다니는 건 누구? 그렇다, 소비자다. 세상은 그렇게 자본을 돌리며 산업은 매번 새로운 판을 짜느라 바쁜 것이다. 증권가를 생각해도 된다. 거기서 왕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기만성, 누가 싫겠나. 그러나 그럴 겨를이 없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놀아야 하는데? 만약 뒤늦게 대성했는데 그때 아프면, 또는 그때 드디여 눈부시게 빛나는 바로 그 뚜껑 없는 차를 딱 탔는데 모자를 벗으니 글쎄 머리카락이 송송도 아니고 다 날라갔네? 그런 거거든! 어?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상남자의 요점은 그렇다. 아니, 젊을 때 신나게 놀고 방황하지 그럼 언제 노냐는 거다. 더구나 썩 틀린 말도 아니다. 내 친구만 봐도 절대 워렌 버핏을 따라하지 않는다. 왜일까, 청개구리라서? 아니다. 왜냐하면 당장 오늘 술값과 이번 달 쾌조의 유흥비를 장만하기 위하여 단타에 집중해야 하니까. 일명 치고 빠지기 말이다. 좋은 데 가고 싶거든. 단골 술집을 전전하고 의리 없는 마담보다 청순한 마담을 선호하거든. 그도 아니면 취미에 관하여 신형 장비를 사고 싶어서든가. 그렇다고 웨이터님을 위해 사려 깊게 짱돈을 준비하는 걸 어디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나. 그렇게 올린 수익으로 친구가 사준 술을 먹어본 적이 있다. 느낌은? 그게 더 맛있더라! 더더욱 기분 좋더라! 훨씬 맛있더라! 한두 번이 아닌가? 저런! 왜 허영심 지수가 높은 여자의 비음이 각별히 특이할까 라는 남자들 얘기를 알 듯 모를 듯 했다. 벌레먹은 사과가 더 맛있다 라는 둥 어쩌고저쩌고, 영웅담 뺐기도 재미없다. 잠깐, 내 경험이 불미스러우면 그건 다 친구쪽으로 돌리는 방법이 있군. 결과적으로 내 친구는 돈 쓰고 욕 얻어먹고 독박 쓰는 건가? 아무튼 어차피 공짜술은 공짜술이고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스무 살은 나중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은 절반쯤 사행성이자 운명에다 팔자며, 남자는 한 방이라고. 알고 보면 우리는 그 어설픈 인생 경구들대로, 딱 그대로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거 왜 많지 않나.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쩜쩜쩜, 가는 여자 어쩌고 오는 여자 쩜쩜쩜, 남자는 뭐 여자는 뭐 등등. 그러므로 어른들은 내 인생을 꿈과 적당히 화해시킨 채 2세의 교육에 정성을 쏟을 수 밖에 없다. 내 인생의 지난 꿈과 희망은 기억도 안나고 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데, 그런데 넌 달라야 한다 젊음은 그런 게 아니란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정말로 어른이 더 애들처럼 사는 것만 같다. 결론은 그렇다. 팔자 좋은 베짱이가 아니라면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며, 적당히 놀고 적당히 쓰고 적당히 베풀 것. 단, 내 행동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나의 몫. 환경도 좋지만 그것이 전망과 견적보다 선행하기는 어렵다는 점. 세상은 동화보다 요지경에 가까울 테니까. 숙녀에게 나이를 묻지 않는 거야 좋다마는 서류의 예외 조항과 진실의 판단 근거를 잘 살피는 일에 맹하면 곤란하다는 것. 지구의 아름다운 문명이라는 풍요를 위해 그 어떤 숭고함이 있었고, 지금 있고,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 같은 성스러운 가치 장엄한 의미는 나중 분명코 갸륵히 보상 받아야 옳은 일일 것이다. 나아가 세상사 섭리에 따른 인간의 운명은 내세에 인간이 아는 의의와 인간이 모르는 개념으로 배상 받음은 타당한 이치. 따라서 인간사는 저곳의 실정과 어떤 존함과 섭정이 어떻건 제우스의 위엄으로 보장하고, 포세이돈의 별자리로 증명하며, 하데스의 이름으로 심판하여 책임져야 마땅할 것이다. 한편, 유별난 벌칙이라면 혹시 패자부활전? 의무방어전도 아직인데, 거 무슨! 앗 잠깐... 뭐-뭐시여! 벌써 끝나면 안되는데? 이걸 어쩐다...! 그럼 이건 소-결론이라고 치고 칸을 띄어서 다시 상류층 주제를 이어가 보자.
   개천에서 용난다는 건 다 옛날 말이라면서 재능마, 취미마, 대중마, 타인마, 부모마등 난 아무 것도 올라타지 못했다? 내 머리 꼭대기에 고양이님이 앉아 있다? 동화 같은 백기사, 장난칠 때 흑기사는 다 다른 사람 얘기다? 베스트셀러를 보시라! 그건 일단 둘 중 하나를 증명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다. 첫째, 상류층이 아니기 때문에 난 철저히 대중적이다. 둘째,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읽고, 어떻게 살기 때문에 난 상류층이 아니다(또는 그 급이 못된다?). 문제는 뭐냐면 첫째든 둘째든 뭐가 됐든 모순이라는 점! 친구가 날 보고 촌닭이네 촌년이네 놀리면 내 기분이 좋을까?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그 반대다. 좋다면 거짓말이다. 민중은 개나 소와 말, 돼지와 같을 수도 있다 라는 얘기를 들으면 굳이 나서서 논박할 생각까지는 없더라도 썩 불편하시나요? 내 친구 중에 조지 오웰을 안 읽은 친구는 허다허다. 관심도 없다. 이론적으로는 작은 행복에 만족하던가 야망을 이루던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적어도 행운과 교분을 쌓을 만큼 노력은 해본 다음에 의견과 불평과 바램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게 순서다. 그런데 결과는, 냉엄한 현실은? 애시당초 소망은 안 키웠고, 일기는 싫든 좋든 거론하기 애매하며, 허세와 허영심은 내 책임 범위 바깥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제는 내가 열망을, 열망이 나를 알기마저 어쩌면 띄엄 띄엄일 수도 있다. 웃음 짓는 친분을 쌓지도 않았는데 '다정한 행복아' 라고 불러도 왜 안 오냐고? 녀석은, 꼬리를 흔들 때는 언제고 왜 지금은 본 체 만 체일까! 속칭 개 무시요, 속담으로 개 닭 보듯 소 닭 보듯, 일반인의 화법으론 가는 길이 다를 뿐! 그럴 만 하니까. 또는 아닐 수도,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이쯤 되면 헛기침이 들려야 정상이니까! 뿐만 아니라 또 사랑은? 인생은 장기전이며, 성공은 공짜가 아니고, 사랑은 사랑은 모르는 거다. 필연적인 운명보다 어쩜 우연찮은 행운이 더 극적일 수도 있을 테니까. 남녀의 애정은 몰라도 인생의 행복은 아주 드물게는 말이다, 그 바닥에서는 추문도 슬쩍 눈감아준다. 게다가 극빈층만 아니라면 현대인은 중세의 왕이 상상도 못할 호사와 사치를 누리며 산다. 심지어 아라비안 나이트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노력해도 안된다, 해도 해도 내 분야를 못찾겠다, 난 작심삼일이 오히려 좋다? 괜찮다 괜찮아! 올인해도 어렵다, 황당하게도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사람한테 우승컵은 돌아가더라? 좋다 좋아. 그니까 가능한 거다 고로 성공한 사람들 얘기 따라하지 말란 말도 일리 있고, 즐기라는 말 그거 다 뻥이라는 말도 맞으며,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말도 옳다. 어떻게 보면 사는 낙이 없다거나 뭘 해도 재미없고 항상 심심해 해야 지극히 정상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막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의 진실, 인생의 원리, 세상의 비밀을 대체 몰라서 이럴까! 행복의 지조와 절개를 쾌락과 혼동해서는 대망이 진짜로 손에 잡힐 듯한 예감과 결코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뻔트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결국 내 사랑 개구멍이냐고요? 이건 뭐 바이브레이션도 아니고 샤우트 창법도 아니고, 막춤이야 뭐야! 뭐가 어쩌고 어째? 이 냥반이 이거 이거 듣자 듣자 하니까! 하여간 찌질한 허풍꾼의 엄살 하나 만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여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들으면 또 재밌단 말이야. 자화자찬에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고, 아주 잘한다 잘해! 그치만 원맨쇼도 다 이유가 있다. 농담이고 진짜 주제 인생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험담마저도 상류층은 급이 다르고, 허당과 고수도 격이 다르다. 고급 사교계의 문은 만인에게 활짝 열려있다? 그럴 수는 없는 일!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건 만물의 이치, 촌년에게 촌닭이 최고의 배필이라고 하면 (열광적으로) 좋아할 당사자가 어디 있겠나. 수영복 트렁크에 슬리퍼 신고서 백화점이나 오페라 극장에 간다? 오랫만에 옛 친구를 만나야 하니까 꿇리기 싫어 한껏 신경 쓰고 갈 때처럼 치장한 다음 시장에 가는 일과 같다. 친구들한테 내 사랑을 소개하는 일만 해도 그분께서 선입견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다면 분위기 세해지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우정의 기반은 경쟁 아니면 존중 즉 끼리끼리니까. 그런데 예를 들었던 가공의 숙녀 그분만 그럴까? 아니다. 선천적인 선별감은 타고나지 않은 채 후천적인 BMW와 다양한 인생 경험, 그리고 왕성한 지식욕, 저절로 알게 되는 세상의 원리, 그게 대부분이니까 글보다는 말이─또는 말 같은 글이─중요한 세상이 된 거다.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물농장의 분포도를 보면 거의 동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떼 목장에 양을 빼놓고는 양치기견과 심심해서 거짓말했던 양치기 밖에 없다. 새와 개는 언어부터 다르다. 어디 그것만? 남자와 여자조차 대화법도 생각도 다르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도시에 살면서 시장에 간다? 모순이다. (시골장에 가서 낮술 한잔 하고 싶다) 시골에 살면서 사회지도층이다? 부조화다. (사회지도층이란 말이 불편하실 텐데 그 표현은 근래 뜬금없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등장하신지 몇 백년 됐음. 몇 천 년일 수도 있음) 또 나이트클럽에서 나비넥타이를 웨이터가 맨다? 불합리다. 어떻게 보면, 이해 못할 일이다. 등 돌리면 뭔 험담을 할지 모르는 친구가 어찌 보면 절반인데,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오랫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 그랬더니 친구의 속마음은? 또 없을 때 흉보면 기분 나빠하니까, 그건 싫다고 하기 때문에 만나서 얼굴 보면서 불만을 토로하면 그분은 울상이 된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말란 거다. 딸랑딸랑 새콤달콤 뿌잉뿌잉 반짝반짝, 그렇게 그 언제까지라도 날 넘보지 말란 말인가? 글쎄요, 많이 컸다! 세상사가 그런 것이다. 부조리는 너무도 많다. 마초도 몇몇으로 나뉜다. 남자는 말발만 좋으면 그만이다, 어쨌든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다 아니다 나는 인문교양서를 써서 유명해질 테다 그래서 유명세도 얻고 돈도 벌테다 라고. 가령,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치즈에 줄을 매달아 슬슬 끌어당긴 사람이 옮겼지 누가 옮겼겠나. 그래도 꼭 보면 그 어느 유치한 어? 그 촌스러운 카우보이식 액션으로 꼬시면 은근슬쩍 넘어오는 숙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운명이랄지 멜로드라마풍 사랑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역시나 옆길로 빠졌다만 돌아와서, 저 첫째와 둘째의 헛점을 비짚고 들어가자면 이렇다. 즉 허풍엔 더 큰 허풍으로! 값싼 농담에는 고급스런 농담으로! 뜻밖의 진심에는 의뭉스런 습관과 의심이란 전제와의 비교로! 그리고 신비한 허언증에는 더, 더더, 더더욱 환상적인 허언증으로!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다 초딩들이 일상적으로 노는 방식에 다름 아니네? 맞구나, 세상에나! 그러니까 어른의 스승은 어린이라고 하는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아동님께서는 하고 싶고, 갖고 싶고, 되고 싶으며, 궁금한 일들이 많은 반면 어른들은 모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어린애가 거짓말을 시작하거나 어떤 영문과 무슨 모의 때문에 돈의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 그 시점의 애틋한 심정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난 어렸을 때 그랬다. 용돈을 정기적으로 받는 유형이 아니라 비정기적으로 모으는 쪽이었기 때문에 로보트 같은 장난감을 사고 싶어서 그랬다. 내가 돈을 모은다는 사실을 왠지 들키면 안될 것만 같아서 동전이 생기면 그걸 두세 개씩 화장지나 신문지에 쌌다. 소리! 일단 소리를 들키면 내 모든 걸 들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계속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우리는 인생에서 풋사랑이든 세례식이든 졸업식이든 금혼식이든 그도 아니면 파혼의 아픔이든 순수한 첫인상, 타산적인 열망, 지고의 환희든 뭐든 어떤 미지의 유익함과 삶의 의미를 간직해야 하니까 구강기, 아동기,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의 내 파릇함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타인의 파릇함이랄지 어떤 무엇도 말이다. 적어도 내게 유리한 분위기를 좋아하거나 이기심은 내 인생의 독보적인 첫번 째 지침이니까. 그러니까 꼭 어린이가 아닐지라도 하루 1번 착한 일 하기, 또는 동심을 생각한다거나 밤 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흑심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뭐 밤하늘의 빛나는 별? 별이 빛나는 밤에 저 하늘의 별을 보다라...?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라는 TV 드라마 대사가 거론되면 거친 상남자 친구들은 사석에서 어쩜 이렇게 대화하지 않을까?
   「이미 땄는데 뭘 또 따?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 법!」
   「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꽃집이든 과수원이든 그대를 위해 천문관측소라도 차려드리겠소!」
   「너도 뻔트면 대만족이냐? 하긴 아직 NC에 들어가기 전이니까. 들어가서 놀아 봐라. NC에서 나올 때 뭐라 하나 보게.」
   「그대를 위해? 그대! 뭐 말하자면 그대가 인칭 대명사일 수도 있고 암호일 수도 있지.」
   「난 사랑보다 우정을 믿어. 그렇다고 사랑이 의리란 말은 아니야. 그때 그때 다를 테니까」
   「얘들아. 뭐 어찌 됐든 우리가 사는 이 별은 B612가 아니라 지구란 걸 잊지 마.」
   「얘 명심하겠습니다요. B612 좋아하시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달에 가본 사람은 손에 꼽는다니까.」
   「어허, 늬가 무슨 생텍쥐페리냐? 넌 또 뭐야, 왜 벌써 들어가게? 늬가 무슨 신데렐라냐!」
   「뭐, 야 너 결혼했냐? 아니 어쩌다 그런 악수를 뒀나! 에잇~. 너 솔직히 말해봐. (소근소근) 너 집에 들어가기 싫지?」
   「얘들아. 아 됐고. 예약해 뒀어. 일어서자. 자, 한번 놀아볼까? 이번엔 다를 꺼야. 왠 줄 아니?」
   「쟤가 단골을 바꿨거든. NC를 호박에서 신비로 바꿨고, 전담 웨이터도 바꿨데. Mr.에르메스에서 Mr.막살자로. 이름 참 이상하지? 이름이 외국 사람 이름이라는데! 뭐라더라 무슨 뜻이 큐피트라나 뭐라나. 살짝 믿기지는 않지만 속는 셈 치고 한번 두고 보자고. 응?」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마초들이 이렇게 말하냐구요? 넘어 갑시다. 갈 길이 바쁘니까. 아무튼 그래서 어떤 장르 영화를 보면 마초는 스르륵 꿈나라로 떠난다. 반지의 제왕? 내내 걸어만 다니다가 끝나는 영화다. 일부 분들께는 말이다. 게다가 저 하늘의 별을 따다 드리겠소, 꽃 길만 걷도록 하겠소, 손에 물 한 방울 안묻히도록 어쩌겠소 등등. 유행은 금방 바뀌고 달콤한 거짓말은 듣기에는 좋았지만 회상은 한숨을 부를 수도 있다. 세상사란 무릇 그런 것이다.
   결론, 새로움을 지망했던 허망한 인생론의 요점은 이렇다. 행복의 기도문처럼 들리고 새로운 낙원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광고라는 것. 옷이 날개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것. 그럼 사랑 고백은 광고일까, 광고가 아닐까? 그처럼 깜짝 놀랄 듯한 매혹적인 진공청소기 광고를 보고서 덥썩 제품을 샀더니, 그런데 알고 봤더니 나중 그건 커피포트로 판명됐다더라? 그리 흔치 않은 일은 아닐 것이다. 암! 고로 만약 그렇다면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때? 어차피 마누라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자동차를 바꾸든 애용하는 맥주 브랜드나 취미를 바꿀 때 말이다. 그러나 커피 마시는 생활 패턴을 바꾸든 새로운 운동화를 사던지 그것이 문제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단지 순수라는 우유와 새하얀 팬티 대신 톡 쏘는 콜라와 호피 무늬 패션을 편애해서 당신의 권태가 깔끔하게 해결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긴 그렇게 해결되기도 하고 끝끝내 미해결로 남기도 한다. 어쩜 우리는 무엇이든지 슬쩍 한발만 담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애정을 털어버릴 만큼의 미봉책만 좋아하는 약삭바른 어른일지도 모르니까. 왜냐하면 지금은 뭐니 뭐니 해도 소비의 시대니까 말이다.
   아 글쎄 그러니까 도대체 결론이 뭐냐고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지면의 한계 때문에 필자의 졸작인 최신 인문교양서를 참고할 것. 거기 보면 그 모든 신통방통 처세술이 다 나와 있음. 전부 다! 완전 싹! 엮고, 묻고, 업히며, 쩍쩍 달라붙고, 착착 감기며,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바로 그런 달콤한 유혹의 사이렌과 미지의 판도라는 물론 드물게는 겁나는 메두사까지 모두 다. 다름 아닌 제목은, 열망의 뻔트. 부제도 있음. 기대는 실망 예감은 상심, 따라서 인생은 모르는 게 약일까 아는 게 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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