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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4. 30. 22:44

   1
 
   일기. 날짜 없음.
   어른에게 거짓말은 습관이고, 남자는 없다는 걸 좋아한다. 숙녀에게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며 속삭인 다음, 남자는 뒤돌아서서 친구들과 사랑에 대해서 절대 얘기하지 않는다. 만약 어느 연인이 헤어진다면 이럴지도 모른다. 동화풍 행복론으로 보자면 서로 축복 받는 미래를 기원해주는 게 좋겠지만 장조가 있으면 단조도 있는 법. 여자는 일기장에 그 인간이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고백할 수도 있고, 남자는 모처럼 비싼 술을 시켜 놓고 바에서 마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없어 라고. 바텐더는 깜짝 놀란다. 3병맨에 바에서 인기 없고 짠돌이로 소문났는데 비싼 술이라니, 뿐만 아니라 주제가 사랑이라니 막 그러면서. 이어서, 여자는 무시 받거나 대화의 맥이 끊기는 걸 싫어하지만, 남자는 없는 걸 좋아한다. 저 하늘의 별따기? 필요 없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 관심 없어! 사랑은? 없어! 그게 끝이 아니다. 남녀의 우정은? 있을 리가 있나. 역시나 남자의 소신은 '없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인생을 알고, 세상을 보며, 사랑을 믿든 안 믿든 (남자) 어른들은 그걸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다. 도덕은 도덕이고 윤리는 윤리지만, 살아보면 욕망에 대해서 무조건 악의적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많은 얘기는 필요치 않다. 내 친구 중에 척키만 봐도 되니까. (삼류)대학 여자 동창 중에 녀석의 마수에 넘어간 친구가... 그러니까... 쉿! 그런데 사과를 딴 것도 아니고 튤립을 꺾은 것도 아님. 하지만 꿈틀꿈틀 꼼지락꼼지락 진도는 나감. 걔가 원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숙명을 타고났다. 그러니까 남녀의 사랑 뿐만 아니라 그 뭔가는 여자도 문제고 남자도 문제다. 그 친구는 진짜로 척키 인형을 닮았고 키도 작고 음흉한데, 말은 많고 정신은 산만하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나와는 단짝이었고. 그런데 고상한 그녀들이 대체 왜 척키에게 절반쯤 넘어갔을까? 왜냐하면 몇 명인지는 몰라도 전부 다 우정 때문이었다. 그래 우정, 그것도 남녀의 우정! 그처럼 여자들이 애시당초 소녀 시절 품은 사랑의 소망은 청초한 숙녀가 되어 어차피 분산될 수 밖에 없다.
   첫째, 척키과
   둘째, 야수파
   셋째, 꽃 들고 기다리는 해바라기형
   넷째, 무섭게 생긴 카리스마
   물론 보기를 계속 드는 건 일도 아니다. 다섯째, 가련한 예술가 유형. 여섯째, 돈만 많은 남자. 일곱째, 돈만 빼고 팔방미인. 여덟째, 얼굴과 키 빼고 다 가진 남자 등등. 게다가 소개팅에 나가면 실상 어디산 다비드는 기대 만큼의 인기는 없다. 어중간한 막 그렇게 애매하고 매가리없이 생긴 무난한 남자가 차라리 인기가 더 많다. 여자는 원래 착하게 생긴 미남과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니까. 숙녀는 그런 남아와 부드러운 포옹을, 달콤한 키스를 꿈꾸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이 허세 저 허세? 허영심도 엄연히 본능이고 학습이자 공력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상적인 기분파도, 자상한 신사과도, 재밌고 웃긴 개그맨도 아닌 엉뚱하게도 척키 같은 노력파가 어부지리로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진짜로 그렇다. 왜냐하면 거울아 거울아, 여자들은 일평생 거울만 봤으니까. 화장하고 거울 보고 얘기하랴 공부하고 일도 하며... 난 그래서 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제일 먼저 그 생각을 한다. 아, 저 화장과 꾸밈은 2시간 짜리구나 라고. 그런데 또 수다 3시간? 통과! 그게 나쁘다는 뜻도 아니고 남자가 여성잡지1에 능숙한 여자를 싫어할 리가 있나. 하긴 그렇게 긴 시간이 소요되나, 으쌰으쌰 신나게 놀다가 다음 날 모이기로 했는데 나와보니 나 혼자 밖에 없드라? 그거나 그거나! 그건 그렇고, (삼류)대학 여자 동창 중에 녀석의 마수에 넘어간 친구가... 하나, 둘, 셋... 쉿! 이미 엄마요 아내이자 신앙인이든 무소속이든 문화와 함께 하는 정숙한 주민이고, 건전한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교양인일 텐데, 지난 일은 지난 일로. 그렇지만 옛날에 그 만큼 친했고, 꾸준히 척키가 노력했으며, 열심히 공들였으므로 뭔가가 가능했던 거다. 그러든 어쩌든 이제는 척키도 늙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현역일 테니까. 그처럼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서도 사랑과 우정의 정의는 명확치 않는 일이 드물지 않을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기도 하며, 못 이긴 척 넘어가기를 바랄지도 모르고, 끈질긴 구애에 넘어가는 연애사가 대체 왜 내게는 없냐며 마음 아파하는 숙녀도 분명 결단코 있을 테니까.
   여자 입장에서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척키와 빚어진 옛날 일을 생각하면 때로는 어떤 아득함을 느낀다. 대타로 나가 뻔트 홈런을 쳤는데, 묘하게 찐한 풋사랑은 지울 수 없는 수치심을 끝으로 한낱 우정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만약 그때 척키가 선을 넘었다면! 그래서 척키가 나몰래 다른 친구에게 자랑했고, 파도가 이어졌다면? 시작은 달라도 그런 엇비슷한 일이 우리 주위에 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다. 다른 뭔가로 시작된 일이 12번 또는 13번의 파도를 쳤고, 언니의 슬픔이 여동생의 우울증으로 이어졌으며 나중 그녀의 가족은 몰락했고, 저 중에는 성공하든 유명세든 출세한 사람도 생겼다는 어떤 일화. 그래서 여자도 단호할 땐 단호하고, 앙칼질 땐 앙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잊고 이겨내며 넘어졌다 일어나는 게 진짜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 때문일까? 나는 왠지 모르게 드럼 치고, 근육을 키우는 육체미 넘치는 숙녀와 거친 스포츠를 즐기는 여자가 멋져 보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뭐랄까 경의에 가깝고 이상형에서는 덜 가까울 것이다. 뭐, 둘 다? (쉿) (조용조용) (소곤소곤) 이따 우리끼리...! 농담이고, 뭐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진짜로 농담이고, 원래 남자는 보통 그런다. 어릴 땐 화려한 여자가 멋져 보이다가 점점 세상사에 노숙해지며 단정한 여성미를 선호하기 마련. 어쨌든 여자가 마음은 햄릿형 남자에게 주고, 몸은 프랑켄슈타인과 연애하는 일도 그래서 가능한 거다. 그런데 뭔 얘기를 하다가 유체이탈이라는 주제로 넘어왔지? 이러다 공중부양까지 가는 거 아닌가 몰라! 아, 남녀의 우정. 그건 한마디로 말이 안된다. 그래서 우정은 그와 비슷한 사랑이란 감정에게 양보하고, 남녀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정이라기보다는 친교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굳이 막장 드라마의 특별판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스페인어 방언을 공부해야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바람둥이는 본능적으로 그런다. 정실은 가능한 한 최대한 이쁜 여자를 선호하고, 바람은 이쁜 척 하는 여자를 편애한다. 드물게 글씨체가 예쁘다며 반하는 남자도 있긴 하고. 그러나 모든 남자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더군다나 불륜을 남자 혼자 완성할 수야 있나! 불미스러운 사랑이든 우연한 남녀의 우정이든 남자에게 바람둥이 기질은 아마도 선천적이겠지만 아무나 바람 피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그러지도 못한다. 사랑의 맹세를 잊을 수야 있나! 그래서 남자는 보통 카사노바에게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고로 남자는 플레이보이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선망은 본디 여자의 것. 질투는 물론 변덕까지 여자의 재능. 뭐, 변심은 사랑의 운명? 넘어가자. 뿐만 아니라 남자는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패자이자 숙녀의 이상형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음. 그러므로 남자는 결국 허풍꾸러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지는 비교는 당연히 싫어하고. 그처럼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다. 그러나 모순은, 농담도 거짓말이고 여자는 고급스런 농담에 매혹된다는 점. 그러니까 오늘은 어떤 남자가 무슨 거짓말을 했을까? 영웅담 아니면 한눈팔기겠지! 보나마나 뻔하다. 착한 일 1개는 생략해도 못말리는 뻥은 참지 못했을까? 어쩌면 누가 아니랄까 봐 먼저 선수쳤을 수도 있다. 대체 어떻게? 그 중에는 실제로 하는 말도 있고, 실제로 하지 못하는 말도 있다. 아 그러니까 어떻게? 난 차 욕심 없어, (누가 넌 불행해 라고 단정할까 봐) 난 행복해 난 행복해, (허당의 3박자를 갈망하는데) 난 돈 욕심 없어, 그리고 때로는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닙니다 까지!
   그러나 결론은 그게 아니다. 나도 본격적으로 욕망을 드러내고 싶다는 거다. 그건 대체 어떤 욕망일까? 바로, 나도 계산한 줄 안다 라는 말하기! 그런데 나중, 누군 뭐 슥 먼저 나가면 기분 좋을 줄 아냐? 너 같으면 좋겠냐? 라고 내가 막 삿대질하면서 따지면 어떡하지!



   2

   JS는 이번에는 아예 샐리에게 자기가 쓴 일기를 손수 보여주었다. 검사를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그녀를 요정으로 길들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숙녀가 타인의 일기를 읽으면 훨씬 도도해지며 동화의 나라를 전전한다는 특수한 이론이라도 발표됐나! 어쨌든 그는 골상학에 정통하고 라파엘로의 그림 속 인물을 쏙 빼닮은 관상가로써 샐리의 사랑운을 점쳐줄 수는 없었으므로, 고로 그녀의 상냥한 내숭과 진심 어린 아양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샐리는 그 일기를 읽고 나서 뭐라고 했을까? 교환 일기라도 쓰자고 했을까, 아니면 JS를 아예 바보 취급 했을까. 그녀는 그의 일기를 숙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들어낸 풍문쯤으로 경시했다. 그래서 그는 실망했다. 그러나 겉으로 그런 체 했고,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왜냐하면 샐리는 애교 넘치는 교태의 여왕으로써 자기를 이미 허당계의 총아이자 사교계의 기대주로 인정함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허당학에 정통한 허세론자라는 2인자 딱지를 벗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속적인 욕망 이기적인 쾌락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으나,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이 타락해버린 호사가는 아니었으니 절반쯤 성공이었다. 그것만으로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턱대고 샐리 앞에서 춤을 출 수도, 워매 좋은그 라며 찬탄을 금치 못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 체 만 체 하는 권위를 앞세우며 그녀와 거리 두기에 들어갔다. 너무 성급하게 친해지면 안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외에 특별히 재미난 일이 없었다. 역시나 심심했을 뿐.
   남자의 세계는 밝고 쾌활하며 흥미롭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어제까지는 행복했고 오늘부터는 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뻥이다. 대체 멋진 모험은 어디에 있을까? 도박장에 있을까 공원에 있을까! 아마도 술집에는 없을 것이다. 셀 수 없이 확인했고 무수히 속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밀 클럽에? 과장 광고에 넘어가면 안된다. 어쩌면 미지의 환상은 무지개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멋진 공상 속에나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것이다. 그토록 기대하던 찐한 연애의 부재, 가슴 조리며 고대하는 흥미진진한 약속의 실종, 또 예감이 들떠서 살짝 흥분하는 축제와 무도회에 초대 받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좋게 광고에 현혹되고 영심이의 구애에 못 이긴 척 넘어가야 할까? 이상은, 포기할 수 없는 소유욕과 근사한 화장품을 애인에게 선물하고 싶은 자존심 같은 것. 화장품? 그는 물거품 같은 대망보다는 차라리 소망이 낫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짧은 인생 이처럼 내내 몽상에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야망을 잡으러 떠나자,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떠나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목표가 막연했으니까. 목적이 불확실하니까. 여비가 간당간당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는 두 번 다시 쓸데없는 궤변에 헤롱거리지 말기로 했다. 그야 어쨌든, JS는 하루는 샐리가 자기의 사무실 앞에서 기다릴 줄은, 하루는 이브가 미스테리아 사무실 앞에서 기다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는 정녕 싫었지만 어깨 뽕은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고, 아티스트병은 치료될래야 치료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지금이 무슨 온갖 비밀 결사대가 난무하던 18세기니, 아니면 우리가 우스꽝스런 소년 탐험대니? 여기가 무슨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연구소라도 되는 줄 아냐고!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꿈결 같은 상상의 세계에 살고 있네. 큰일인데! 왜, 없는 비밀이라도 만들어서 갖다 바치랴? 꿈 깨고 좋게 현실로 그만 나와 이 친구야. 그럴 때도 됐다. 차라리 그럴 꺼면 우리도 클럽에 놀러가서 좋게 스캔들이나 만들자구. 마음대로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응? 시도는 한번 해 봐야 할 거 아니냐고! 아 그런데 말 나온 김에 응? 이참에 한번 가...볼까?」
   「어디, NC?」
   「그래~」
   「이 사람이, 얘가 사람을 뭘로 보고... 갈까?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는데!」
   그들은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러나 성과는 전무했다.
   나오면서 짓는 울상마저 전처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이처럼 JS는 포르토피노와 어쩌다 친해졌다. 그런데 사겨보니 그 점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포르토피노는 페라리 얘기를 묻지 않는 이상 통 하지를 않는다는 것. 허나 더 좋은 건 둘 다 페라리를, 애마 뿐만 아니라 어떤 차이가 덜 심할수록 비교적 친분에 더 유리하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 정도 공감대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
   거 왜 보면 그런 친구가 있다. 친하고, 술도 잘 사고, 착하고, 사람 좋고, 으샤으쌰 잘 놀고 잘 어울리는 친구. 그런데 그 우정은 친구의 작은 단점을 감안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 1급 허세랄지 극심한 고지식, 고루한 취향, 뾰족한 자존심, 자발, 촐싹, 제멋대로─막무가내─고집불통, 방탕, 말이 오고 가며 대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 내가 아는 정보와 내 일과표만 읊는 친구. 열거한 사항에 대해서 최소 5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친구가 남자들에게는 간혹 있을 것이다. 우정에 대해서, 곧 서열에 대해서 남자들 생각은 같을 수가 없다. 나나 되니까 저 인간 돌봐주고, 접어주며, 생각해주지 나 아니면 대체 누가... 바로 그것이 마초의 우정이니까. 그럼 같이 만나서 으쌰으쌰한 결과는 어떨까? 앞에서는 웃지만 돌아서면 기분이 세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친구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아니 어째서? 왜냐하면 돈 쓰고, 욕 먹고, 독박 쓰는 거니까!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간혹 가다 주파수가 이상하게 튄다. 그래서 딱 시간 되면 또 뭐라 뭐라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그럼 듣는 사람은 또 그런다.
   「아, 또 시작이구나!」 라고.
   들을 땐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도록 횡설수설이니까, 앞에서 얘기하면 울상일 테니 말을 돌리는 게 좋다. 이번주 로또 샀냐고! <난 어때>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하든? 라고 답할 수는 없으니까. 듣고 보면 그런 얘기다. <자기는 야망 그런 거 없다, 나는 허세 그런 거 안 키운다, 난 호색가 그런 거 싫어한다, 난 모든 권위를 다 내려놨다, 내가 언제 그런 적 봤냐, 나 모르냐, 친구들 만나서 내가 더 쓰든 어쩌든 난 그게 좋다, 나는 돈 벌어서 늬들한테 쓰고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무엇보다 난 부러운 거 없다, 난 현재에 만족한다, 난 차 욕심 없다, 내가 뭐 못할 줄 아냐, 내 스타일 아니면 나는 다 관심 없어, 나 약속시간에 늦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듣고 보면 결론은 한마디로 그거다. <난 돈 욕심 없어!> 그 한마디를 빙빙 돌려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한다. 맨정신에서도 말이다. 술 취해서 기분 좋으면 아예 그런다. 그럼 자기를 부러워하지 말지 그랬냐고! 옆에서 입도 뻥긋 안 했는데 혼자서 연극했다 코메디했다 영화를 찍고 꽁트를 하며, 아주 웃기지도 않는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입에다 모터라도 단 듯이 말한다. 맙소사, 어떻게 딱 그런 말들만 골라서 하는지 너무나 신기하다. 정신 연령이 막 스무 살도 아니고 딱 몽정기에서 멈춰버린 유형이다. 술 마시는 속도는 날 따라와라, 내가 편안하게 식사하실 때는 옆에서 절대 잔소리하지 말아라, 어디 가든 뭘 먹든 다 전부 나 하자는대로 하자, 등등. 그래서 그 부류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다. 잠깐 반짝했는데 당나귀 청춘 시절이었음. 이런 유형은 여자 입장에서 보자면 한마디로 버티기 힘들다. 사겨도 작별은 정해진 수순이고, 이혼은 숙명이다.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꾹 참고 사시는 여인네들, 꽤 된다. 아무튼 친구의 자동 재생 허세를 듣다 듣다 못 참아서 주변에서 슬슬 피하면 어떻게 될까? 술집에 가서 돈 주고 할 수 밖에 없다. 정신과 전문의의 조언을 구할 필요도 없이 뻔하다. 만약 얘가 일기를 쓴다면 씌여질 내용은 투정 아니면 불만이 전부다. 절반은 욕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아마도 안 쓸 것이다. 이런 친구는 말이 아니라 그냥 개다, 들개! 심지어 좋아하는 여자라면서 사진을 보여주는데, 사진을 봤더니 글쎄 얼굴이 안보인다. 뒤통수를 평가하라는 건가? 남자들 잘 아는 용어다. 일명, 도촬! 뒤에서 비스듬히 찍은 거다. 도시의 굶주린 늑대요, 먹이를 찾아 세상을 헤매는 하이에나이자, 주연들 변두리만 떠도는 조랑말이다. 첫사랑이 어쩌고저쩌고 연애가 이러쿵저러쿵 대부분 쓸데없는 얘기고, 이 남자의 머리 속 주된 생각은 어제도─오늘도─내일도 오직 그것이다. 딱, 하나! 과연 그건 무엇일까? 바로,
   「오, 땡큐!」 
   그분도 연상하기를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니까. 물론 이 또한 좋은 친구이자 각별한 우정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꿈이 있다는 건 선이 아니라 악일까? 아니다. 그런데 왜 대망을 터부시하면서 로또는 일생의 취미고, 소극적으로 긴밀히 자산 관리 꼼꼼하게 다 하나. 그러면서 안그러는 척! 재수없어. 돈이 좋기는 좋네 라는 말도 못해, (직접적으로) 난 돈 욕심 없어 라는 말도 안해. 차라리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다, 라고 하면 웃기라도 하지. 그 대신 빙빙 둘러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똥개였다면 콱 그냥 발로, 워─워─워! 농담이고, 그러니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좋아하는 술 원없이 사줘서 마담과 짜서 녀석을 꽐라를 만들 치밀한 작전 계획은 대기중이다. 그건 그렇고, 말하자면 돈 욕심 있는 건 죄일까? 그럴 리가 있나. 이 세상에 돈 욕심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어느 시간이 되면 요술에라도 걸린 것마냥 따따부따, 따따부따, 방정을 참지 못하는 것일까? 뭔 병인가! 왜일까? 왜냐하면 그건 천성이고 취미이자 고독 그리고 기분 때문이다. 그러니까 돈 쓰고, 욕 먹고, 독박 쓰는 거다! 뭐니 뭐니 해도 외로운 허당이니까. 무엇보다 돈 욕심이 있다, 없다? 있으니까! 돈 욕심 없기는, 개~뿔! 많을랑가는 몰라도 적어도 허세만큼은 있으니까. 그 욕심마저 없어봐라, 허세 보기 불쌍해지는 걸로도 모자라 허열마저 고개 푹~ 숙일 것이다. 그런데 말을 가만히 들어도 들어도 자기는 돈 욕심이 없데! 뭐야, 덜렁덜렁 고추 달렸는데 불규칙적으로 여자들 그거 무슨 마법에라도 걸리는 건가? 이런, 젠장! 그렇지만 얘도 인정 많고, 존재감 있고, 치고 빠질 줄도 안다. 으쌰으쌰라면 선두 주자다. 그래서 자기 좋다는 여자도 드물지만 있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거다. 자기는 어리고, 엉덩이와 가슴 크고, 직업 좋고, 이쁘고 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렇지만 거울을 보면 훵한 머리카락, 거친 피부, 자칭 조각 미남이던 얼굴도 갔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 알 수 있으니까 눈은 많이 낮아졌다. 그래서 어리고, 엉덩이와 가슴만 크면 만사 OK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그분은 삼촌이고 아빠인 경우가 많다. 연예인병에 걸린 일반인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조 불치병이다. 착하면 뭐해, 그냥 허당인데. 웃자는 의도로 말해서 그렇고 허당 중의 상허당이 봤을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JS의 친구도 바보가 아니다. 아무한테나 그러는 게 아니다. 아무 때나 그러지도 않는다. 또 친구가 농담과 장난과 습관을 받아주지 누가 받아주겠나. 곧 이런 유형의 넉살인지 허세도 받아줄 만한 1범주 안짝의 친구에게만 이상한 친밀감을 표시한다. 드물게 핸드폰 전화번호부의 2범주 그룹에 해당하는 성격 좋은 친구에게 들이댈 수도 있는데, 그 친구는 성격 좋다는 얘기를 왕왕 듣는 사람이라 또 그럭저럭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날따라 분위기 세하게 3범주 저쪽의 지인에게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까?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고, 나중 소심하게 돌려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종종 그랬다가는... 아아 (설레설레)! 사람은 이처럼 각자 민감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어떤 욕심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누구는 고소공포증, 누구는 건망증, 또 수전증과 건망증도 있다. 그러나 머머증이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병이 있다거나 장애가 있거나 불우한 환경이랄지 딱한 사정이라고 없을 수는 없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원인은 스트레스다. 짜증 지수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최면술사의 (딱) 소리를 듣고서 로보트가 되는 식이지. 그리고 소원은 그거다. 지금보다 한 단계든 열 단계든 그저 좀 더 잘 사는 것. 잘 먹고 잘 살고, 한마디로 웰빙! 그게 전부다. 제2의 인생 목표도 없고, 꿈에 대한 원대한 장기 전략도 필요없으며, 제7의 전성기가 부응하여 각종 조명과 화려한 거울을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단지, 좀 더 좋은 여건에 풍요로운 처지에 부분별한 사치를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싶어 한다는 점. 그거 말고는 없는 선량한 동네 아저씨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JS는 그래서 허세 상급에 동등히 맞설 수는 없기 때문에 그랬다. 혼자 속으로 웃거나 샐리와 함께 흉보거나! 그는 지존이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몰라도 데굴데굴 뭔가가 굴러오셨다는 둥, 응? 멍멍~ 멍멍멍~! 알고보니 초승달이 뜨거나 회사에서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꼭 짓는다는 걸 알게 됐다는 둥, 촌닭님께서 이번에 뭐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허당 누구에게 새로운 얘기를 들었다, 개 풀 뜯어먹는 거도 아니고 그분께서 뭐라 하셨는지 너 아니? 아 글쎄 쩜쩜쩜...! 그렇게 말이다.
   아, 잠깐! 그런데 남자의 우정이 일부 이럴진대, 웃자고 일부러 흠잡아 이러할 터, 그럼 여자의 우정은? 아아, 바로 그래서 그때 만난 그 숙녀께서 그리 말씀하셨구나. 이제 알겠다. 이제 알겠어.
   뭐 어쨌든 JS는 허세의 패자, 허영심의 왕자로 군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칼럼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가 이번에 쓴 컬럼은 이처럼 주제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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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돈 욕심 그리고 강박증
   내용: 멜로드라마에서 듣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말, 돈독. 지나치지 않을 땐 돈 욕심. 실현되면 호사와 풍요요, 부족하면 이루지 못한 야망이고, 기분 따라 분위기 따라 가난도 됐다가 특별한 사랑도 될 수 있는 것. 그처럼 아동의 소원과 유년의 상상, 숙녀의 선망, 남자의 대망은 물론 소소한 행복까지 좌지우지하시는 분. 어쩌면 사랑의 감정 그 위에서 존경 받으실지도 모르는 경이로운 존재의 이름은 바로 돈이다. 그 실체는 복잡하지도, 대채롭지도, 추상적이지도 않고 그냥 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그것에 대한 느낌과 응대와 생각은 시시각각, 가지각색, 변화무쌍이다. 나는 친구 녀석이 왜 하필 돈 욕심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는 모르겠지만─모르긴 뭘 모르겠나─그와 별개로 나는 돈을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돈을 사랑했고 돈을 동경하며 돈과 친하고 싶었다. 풍족하면, 사석에서 하는 말로 지갑이 빵빵하면 일단 보고, 듣고, 입고, 놀고, 뭘 하든 하는 수준이 비교적 월등해질 것이다. 눈높이도 올라가고, 씀씀이도 늘어나며, 내 여유가 생기니까 주위에 베풀 수도 있다. 없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가능한 방법으로, 그게 더 좋긴 좋겠고. 더군다나 돈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시간을 살 수 있고, 하고 사며 놀 수 있는 한도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한도가 좁은 것과 안 그런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여자들의 드문 우정처럼 친구의 비교 하위와 열등감에 대해서만 칭찬하지는 않겠지만, 그동안 친구로부터 호혜를 받았던 만큼 그 우정의 성격을 똑같이 되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든 어쩌든 분풀이처럼 비춰지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하지만 살짝 재수없을지라도 졸부이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다. 솔직함이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면 엄숙히 손가락질을 받고 싶다는 거니까. 그래도 일류 도박사가 아닐지라도 오히려 카드게임처럼 얹고, 더하고, 곱해서 베푸는 일은 문제도 아닐 테지. 만약 지금에 비해서 나중 형편이 훨씬 풍족해진다면 말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도량을 베풀었던 친구의 화법에 거울을 비추면서 자, 이제 그 조명 늬가 받아봐라! 라면서 나도 설마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친구와 똑같이 심심하면 '너 같으면 기분 좋겠냐' 라면서 난 어쩌고저쩌고 그러면서 허세로 친구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는 일. 어떻게 하는 일인지 꼭 좀 알려야 한다면 그건 일도 아니다. 로또만 당첨된다면 아주 그냥, 라는 게 바로 허세다. 다만 허세는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 리듬만 타면 된다. 그러나 나의 소원은 그게 아니었다. 결점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장점일 수도 있는 친구의 허세를 굳이 되돌려줄 필요가 있겠나. 그게 아니라 나는 지성이면 몰라도 재력은 자신의 어렸을 때 나쁜 기억 같은 일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돈 욕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차라리 허세 대신에 허영을 택한 것이다. 뿐인가? 다망과 다몽만으론 부족할 테니 여차하면 다작과 다변은 상시 대기중이었다. 그와 같은 미지의 가능성을 부러워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은 아마도 타고났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든 어쩌든 그건 재미도 없고, 주제도 아니며, 관심도 없으니까 나의 어렸을 적 나쁜 기억이 뭔가를 알아보자면 이와 같다. 5살은 아니고 7살? 아니 6살이었나. 대충 그만했을 때 나는 옆집에 사는 남자애와 같이 놀았다. 옆집 사는 남자애는 동생이었고. 그렇게 둘이 집 앞에서 놀다가, JS는 또 TV에서 본 걸 따라한다며 (걸레부분이 빠진) 밀걸레 자루 같은 걸 돌리다가 봉이 옆집 꼬마의 귀를 타격하게 됐다. 그래서 옆집 꼬마가 펑펑 울길래 우리는 같이 그 애 집으로 갔고, 부모님을 만났다. 달래든 안심시키든 내 잘못이고 울음은 그쳐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 애 부모님인 옆집 부부가 나와서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이 엉엉 우는 걸 본 거다. 딱 보자마자 그 애 아빠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 뺨을 다짜고짜 후려쳤다. 그 우악스런 어른의 거칠고 커다른 손으로, 힘차게 말이다. 그 일은 일종의 불상사였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금 이렇게 멋진 척 글을 쓰는 일. 그래도 어린이가 그렇게 맞을 때 기분은 완전 꽝이었다.
   철썩~!
   곧바로 거침없이, 나는 그분께 좋은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 애 아빠는 택시기사셨고, 일하다 낮에 집에 오셔서 쉬시는 중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계셨다. 당연히 꼬마의 엄마는 말리셨고. 나는 그러고 보면 택시와 인연이 많다. 중학생 때 독서실&야구 일원이었던 동네 형들과 최신 영화를 보러 어느 형 집에 우르르 몰려 갔을 때, 그 형 누나들에게 손꼽혔던 일. 그 형의 아빠도 택시운전수였고, 그 가운데 인정 못하던 친한 형의 아빠도 택시운전수였으며, 함께 살며 같이 성장했던 사촌형의 아빠 곧 외삼촌도 택시운전수였고, 나도 나중 택시운전수를 잠깐 했었고─택시 회사 사장과 대판 싸운 일은 넘어가고─내 형도 그 업계에 한동안 몸담았던 기간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 뒤로 그날 일을 나는 영원히 함구했다. 집에 가서도 말하지 않았고 장래에 친구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일기처럼 혼자 소셜 네트워크에 낙서처럼 적은 게 전부였다. 그거 하나 빼면 옆집 동생의 아빠한테 나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은 거였다. 그래서 내가 그 일에 대해서 느낀 점은 세 가지다.
   첫째, 사람 수준
   둘째, 동네 수준
   셋째, 사회 수준 
   첫째는 인품-인격-인성일 테고, 둘째는 돌려 말하지 않자면 돈과 관계된 것이다. 셋째는 시대가 그랬다. 저런 일을 공감하는 걸 넘어서서 비슷한 경험자를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 수평보다 수직을 존중했던 시대. 권력과 돈이 전부인 사회. 지금이니까 인권이네 언론의 자유네 뭐네 의사 표현이 자유롭고, 글과 말의 구분이 모호할 수도 있지만 당시는 알고 보면 단언컨대 참말로 구식이었다. 모든 게! 하지만 추억은 향수를 부르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회상은 예술적 착상과 친할 수도 있다. 곧 누구나 사춘기와 침체기가 있듯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뜻. 그때가 아마 존 매켄로, 보리스베커, 카트리나비트가 현역이던 시절인가 그랬을 것이다. 얘기하자면 말도 못할 셋째는 논외로 하고 첫째와 둘째에 집중해서 논하기 전에 저 1-2-3이라는 큰 그림의 원리만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뜸들이지 말고 칸도 띄지 말고 곧바로 말이다. 1에서 3으로 갈수록 선택은 어려워지고, 3에서 1로 갈수록 변화는 쉬워진다. 1~3 모두 좋은 쪽으로 비교적 편차가 좁은 걸 뭐라 하냐, 건강하다 윤택하다 잘산다 라고 한다. 떵떵댐과 호의호식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근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차피 똑같은 웰빙일 뿐.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인프라스트럭쳐가 거의 균등하면 선진국이고, 한 종목에서 고급과 보급형의 차이가 월등한 건 다름 아니라 내 친구 이름들이다. 가령 조니워커, 발렌타인, 듀어스, 잭 다니엘스 등등. 또 3의 수준이 경직됨에서 밝고 다채로움으로 바뀌는 건 발전이라고 한다. 갑자기 바뀌면 혁신이요 뒤돌아 봤을 때 조금은 실소가 나오는 건 시대상 때문이라고 한다. 보수란 게 그렇다.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하고, 99퍼센트는 모두 보수며, 토끼식이든 거북이식이든 진보라면 몰라도 퇴보가 아니면 다행이란 점. 그러나 거꾸로 가는 건 보수가 아니다. 당시 보수 하자는대로 요술지팡이가 효과음을 발생시켰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허나 사랑은 아픈 만큼 성숙해지며, 인생은 시련을 거친 다음 진정코 세상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신비한 환락이 무엇인가, 환상머신은 어디에 숨어있는가, 내 님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주로 하며,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주제와 수다는 물론 오답까지. 게다가 명검은 부단한 담금질을, 만선은 끈질긴 시행착오를, 풍년은 추운 겨울을 필요로 하는 건 만고의 진리다. 싸구려 위스키라고 우습게 보나 섭섭해도 유분수지, 어디 딱 그것만? 맥주든 뭐든 막 띄엄띄엄 본다는 게 아니라 호호호, 그러니까 여복은 행운과 천생연분인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말하자면, 쉽게 말해 첫째는 BMW─BWV─페라리─에르메스고, 둘째도 그것이다. 단지 다른 점은 첫째는 개인이고 둘째는 집단이라는 점만 다르다. 첫째가 모여서 둘째가 된다. 첫째라는 지성과 교양, 쾨헬 번호에 대한 취향 그리고 탁월한 안목도 중요하다. 하지만 돈이면 백작도 공작도 밤의 제왕까지 되는 세상, 그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왜 지적 능력과 예술적 구미와 도덕적 인품보다, 돈이 더 중요할까? 왜냐하면 후자에 대한 내 만족도에 따라 전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거나 조금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첫째가 중간 이상이 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게다가 포장하고 가면 쓰고 적당히 연기하면 자서전도 대필할 수 있고, 동기 부여 비디오도 만들 수 있으며, 자선재단 하나 뚝딱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삼류 드라마의 그 흔한 (평)대사가 뭔가, 돈으로 안되는 일 어쩌고저쩌고다. 그처럼 현대의 신은 돈이 아닐까 라는 의아함 때문에 내 친구도 돈을 그렇게나 극렬히 부정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절대 부정은 절대 긍정이라며, 이따금 사회의 범죄와 개인의 사랑이 혼동되는 일은 현실과 허구에서 왔다 갔다 한다. 사실이 그렇다. 피자 배달원의 경험 뿐만 아니라 택시업계도 저 첫째와 둘째에 따라 팁은 거의 정비례할 수도 있다. 최소한 말이 통하고, 법을 지키며, 선을 넘지 않는 확률이 비교적 높거나 낮을 수 밖에 없다.
   자, 그럼 논설이 건조하고 평론이 재미없을 시간이 되었으니 살짝만 삼천포로 빠져볼까? 뭐 그럽시다, 쉬어가지 못하란 법도 없으니! 그러니까, 그렇게 돈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대체 왜 그처럼 JS의 친구는 돈에 대한 욕망을 터부시했을까? 왜냐하면 한마디로 허세, 다른 말로 충족되지 못한 야망 때문. 속으로는 탐미와 환희와 쾌락과 기쁨과 딸랑딸랑, 뿌잉뿌잉, 반짝반짝, 새콤달콤 그 사정없는 기쁨과 끝장나는 재미와 내 방식의 즐거움에 환장하는데, 그런데 나는 거침없는 기분파에 무욕에 금욕주의자다? 순진하네, 착하구만! 모순이 이만저만하지 않음. 정신의학과 교수님의 강의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럴 것이다. 원인은 아마도 결핍이다. 찐한 사랑의 경험은 아마도 전무하고, 그렇다고 순수한 사랑의 꿈을 접을 수는 없으며, 허세는 되는데 허풍이 안되니까, 그러므로 남자들 세계에서 쌓인 게 많은 것이다. 쌓여도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닐 테지. 알고 보면 아마 말도 못할 걸! 끈끈한 우정이란 자랑의 형식, 뽐냄의 규칙, 과시의 층위가 고만고만해야 성립하기 쉽다. 뽐낼 줄도 알고 때에 따라 배짱도 두둑하며, 허세부릴 때 허세부려야 너도 좋고 나도 좋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 라는 말도 좋지만 이왕이면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더 좋지 왜 안 좋겠나. 하오나,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고 격이 높으면 웃기기도 힘들다. 제약이 많으니까. 허세는 리듬만 타면 되고 나설 때와 참거나 물러설 때만 구분하면 그만이다. 그게 바로 중간이고 미덕이다. 그처럼 친구뿐 아니라 동료를 비롯해 여러 교분 또한 허당의 3박자가 서로 그만그만해야 교분은 돈독하며 안정적일 것이다. 적어도 관심사나 잇속, 목적, 친교 중에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은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딱 맞거나 오래 사겼거나 혈연, 혹은 속셈이 있을 테고. 곧 그분들만의 리그에서는 농담이자 장난이며, 허풍에 영웅담이고, 절반은 사실인데 경주마 사이에 당나귀나 조랑말이? 길을 잃고서 멋모르는 야생마가? 웃고 넘길 질서가 누군가에게는 한마디로 뻠프질이 된다. 남 비위 맞추는 일이 아니라 놀이일 뿐인데 그게 안되니까 가면을 써야만 한다. 프로 1단부터 9단이 주류인데 아마추어가 명함을 내밀겠나 어쩌겠나. 다 된 밥에 코 빠졌다고 일부러 교묘히 져주는 건 사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방망이부터 다르다. 알류미늄이냐 나무냐 그렇게. 만약 특기가 뻔트라면 솜방망이! 그 이질감의 쉬운 예가 뭐냐, 동성애자다. 남자 세계에서는 허세 지수가 극심하게 낮거나, 허세는 되는데 허풍이 안되는 남자도 마찬가지. 영심이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럼 그처럼 오래 참고 오래 상처 받은 정체성의 소유자는 겉으로 태연한 척 연기했던 제2의 자아 때문에 쌓인 울분을 어떻게든 풀고 발산하게 된다. 곧 채워지지 못한 욕망을 실현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므로 참 듣기 이상한 허세는 또 어딘가를 향해서 으샤으쌰 뻠쁘질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분은 어쩌면 동물의 천국 아프리카를 동경할 수 밖에.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사회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으쌰으샤는 피할 수 없는 법. 하루는 동료가 얘기한다, 오빠 나 사랑해? 라고. 또 하루는 딴 친구가 말한다,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신입도 거든다. 오늘 어떤 장면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고 말이다. 낄 데 안 낄 데를 가리고, 빈말 참말도 잘 구분하며, 할 말과 할 일과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며 정도껏 성실히 살았던, 나는, 정작 바보처럼 언제나 듣고만 있어야 하다니! 혹시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던 건 아닐까, 설핏 때로는 그런 의문이 든다? 에이~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뿐인가? 이따금 전문 바텐더가 아니라 아르바이트 바텐더조차 자길 3병맨이라며, 까도남 - 까고 싶은 도시의 남자라며 대놓고 놀린다. 동네 북이 따로 없는 거지. 이젠 뭐 술집에도 오지 말라는 거야 뭐야? 어? 뭐가 어째? 사람 미치는 일이다. 물론 그분께만. 아마추어 허세남은 귀에서 피가 나고, 커피포트는 쉴 줄을 모르며, 아조 환장허고 미치는 거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응? 사연이 그러할 터, 그런데~, 아아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허세-연애사-허풍>이라는 그 허당의 3박자 가운데 조촐하게 허세 딱 하나만? 결국 남은 건 자존심뿐! 게다가 허세도 허세 나름. 변덕스러운 취향과 갈대 같은 허영심, 봄바람처럼 설레는 자존감과는 다르지만 거 참!
   자, 한번 생각해보자. 방탕과 건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트집 잡기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플레이보이의 3대 요소가 뭔가? 그건 바로 황금, 주색, 인기 그 세 가지다! 단, 주색을 술과 여자로 나누면 4대 요소. 각자 하나 빼고 하나 넣고, 편집은 엿장수 맘대로. 그런 상남자의 꿈에 대해서 걔는 평범한 형편─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최소한 꿇리지는 않음─적당한 평판─호인이냐 탕자냐, 호인이다─그외에... 오, 저런! 거친 남자 세계에서 어중간한 허세와 뻣뻣한 자존심뿐이라...! 자고로 허풍의 한 유파는 이런 것이다. A라는 남자가 살면서 미녀1명과 선녀9명을 만났다고 치자. 그런데 B라는 남자는 미녀0명과 선녀1명을 만났다고 하자. 예를 들어서 말이다. 일단 허세로 치면 둘 다 상급이다. 허세의 품위가 아니라 허세의 정열이! 그러나 허풍은? A가 미녀10명을 만난 건 기정사실이고 B는 재밌어도, 지겨워도, 짜증나도 틈틈히 일생 동안 A의 허풍에 실소로 일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A는 허세와 허풍이 다 되는데, B는 허세도 어설프니까. 실제로 B의 또 다른 친한 친구들을 보면 A 유형이 대세다. 말 한두 마디만 들어봐도 견적은 금방이니까. 그러니까 이처럼 연애사가 되는 허세와 연애사가 안되는 허세가 만나면 승자는 과연 누굴까? 답은 생략하기로 하자. 이미 들었다 놨다 밀었다 당겼다 다 해놓고서, 뭐-뭐라고? 통과! 그렇다고 관심사가 다양하지도 않을 테니 진퇴양난이군. 결론은 허세꾼과 바쿠스가 되는 방법 밖에는 없을까? 결과적으론 YES! 사실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둘 다 좋아하니까.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을꼬, 대관절 그분을 누가 위로해주지? 친구 아니면 마담인데, 둘 다 각자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답은 <성에 차지 않는> 사랑이든 뭐든 스스로 찾는 수 밖에. 가령 오래 공들였고, 프로팀 구단주는 아니지만 본인이 아마추어 동호회 창단주며, 돈과 나이와 지분과 연줄등 뭘로 봐도 본인이 최상일 테니, 축구단 조마조마같은데서 깍듯하게 대우 받는 수 밖에. 그런데 뭐 자기는 모든 권위를 다 내려놔? 완벽한 권위주의자에 어중간한 황금만능주의자다. 여자 후배들과 친구의 여자친구나 아내들이 하나 같이 나를 착한 오빠로 인정한다며, 사실은 사실이니까, 자화자찬? 그건 좋다마는, 왜 나쁘겠나, 그런데 중요한 건 여자를 못 꼬셔! 허풍꾼들 앞에서 몸은 어른인데 마음은 유치원생, 더욱이 표정은 불쾌하고 심정은 거북한 그림. 꼭 허풍의 종결자가 아닐지라도 내막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충전된 화염방사기와 바쁜 커피포트를 어떻게 하지도 못한다. 전적도 안되고, 허풍도 안되며, 평점심마저 일생 완패-연패-석패-참패-전패였다. 인생은 짜증나고 세상은 말세다. 그래서 스무 살 이전을 시골에서 보냈던 고향 친구에게 자주 연락해서 귀찮게 하는 수 밖에 없다. 그 친구는 내성적이고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친군데 딱 이런 식이지.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 하는 말이, 내가 따따부따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느냐? 라는 말이 목구멍에 턱하니 막히듯이, 그분은 '나는 돈 욕심 없어'라는 말을 돌리고 돌려서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할 뿐이다. 덤앤더머의 최고봉이 따로 없다. 원래 상남자들 대화가 절반은 이렇다. 20년 사귄 우정인데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구석이 굉장히 많은 경우가 다반사다. 사랑 뿐만 아니라 우정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운명조차 때로는 새로움을 선호하기도 한다. 오늘 친한 이 사람들과 내가 10년 후에도 친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잘해줄려고 하는데 그 인간이 꼭 내 성질을 건드린다 어쩐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마초들은 티격태격일 것이다. 안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철들면 안되니까 말이다. 그건 그래도 사람은 분위기도 맞추고, 각자 기분도 고려하며, 상대의 마음도 떠볼 줄은 알아야 한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내게 맞는다고 남들도 다 맞는 게 아니니까. 이처럼 남이 바다로 가든 산으로 가든 어쩌든 큰 관심 없는 게 상남자의 규칙인데 무슨 시도 때도 없이 나는 돈 욕심 없다, 나는 돈 욕심 없다? 그게 대체 뭐하는 쇼인지 숙녀의 마음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오나 그것도 어떻게 보면 행복일 수 있다. 아니, 복에 겨운 거다. 행복의 비명이 따로 없는 일이다. 그게 바로 인생을 대하는 밝은 자세이자 세상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니까. 어쨌든 허영심은 이처럼 허세의 작동 원리를 분석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행복의 아리아가 2박자인가 3박자인가로 구분될 수 밖에 없는 운명. 곧 그 흔한 촌년의 반쪽짜리 사랑을 간직할 것인가, 아니면 세련된 프리마돈나로써 순애보와 인기와 조명과 함께 고결한 사랑까지 모두 독차지할 것인가로 나뉜다. 허세의 작동 원리를 모르고서는 발레리아의 근사한 행복은 모래성 같은 허상이거나 부러움과 질시에 대해 강박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저급 허영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대 친애하는 영심이시여!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때에 따라, 아는 게 힘이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 첫째 '사람 수준'을 둘째 '동네 수준'이 리드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했던 말 또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다른 이유를 또 하나 들겠다. 남자에게 야망은 2가지다. 첫째 꿈의 완성, 둘째 자아 실현. 첫째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둘째는 돈으로만 승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첫째는 1장짜리 자동차, 1장짜리 건물, 1장짜리 그림, 1장짜리 비밀을 사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둘째는 그게 아니다. 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고,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유행가를 짓고, 이 정도면 자타공인 천재의 작품이요 희대의 걸작이라 칭송하면 썩 부끄러울 만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둘째다. (용어는 살짝 부정확하거나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필자 잘못이고, 그 차이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완을 발휘하자) 하지만 둘째가 꼭 그처럼 재능을 필요로 하는 성격의 이상주의만 인정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 나 좋아하는 일을 하고, 즐겁게 놀며, 세상을 알아가는 일도 둘째라고 할 수 있다. 곧 사람에 따라 첫째와 둘째가 완벽히 동등할 수도 있고, 교집합이 있을 수도,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의 현실적 환상과 미지의 이상조차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로 첫째보다 외부 환경 요인이라는 둘째와 함께, 파도타기로 알게 된 허당 사교계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쁘게만 볼 수도 없다. 예술업으로만 놓고 봐도 그건 알고 보면 값진 인생 수업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꿈의 완성과 자아 실현의 평균은 뭐 적당히 겹친다 가정하고, 왜 드라마와 사석에서 우정과 사랑이 돈을 자꾸자꾸 귀찮게 하며 돈-돈-돈하는지 그걸 유추해 보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명쾌히 YES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라는 것. 질문은,
   나는 현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종사하는가?
   대답이 '네'면 행복도, 희망도, 꿈도, 사랑도 다 가까이 있을 가망성이 크다. 그러나 대답이 '아니오'면 몇몇 유형으로 나뉘겠지만 아마 이렇게 말할 공산도 아예 없지는 않다. 어떻게? 나는 돈 욕심 없어, 나는 차 욕심 없어,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해! 나만 행복해, 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는 불행하다, 누가 그럴까 봐 지레 겁 먹고 그러시나? 아마도! 그런데 아무래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점, 듣고 또 듣고 수없이 듣다보면 알게 된다. 오늘도 어느 숙녀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한숨을 쉬실 테고, 그녀의 엄마는 이미 달관과 환멸의 경지에 다다랐을 수도 있다. 즉 내가 좋아하는 돈과 호사와 사치와 기쁨에 대해서 나는 욕망이 없다고 부정하는 건 허세남의 투정 어린 습관일 뿐이다. 또는 나는 실제 썩 행복하지 않지만 나는 행복하다며 거짓말을 하는 부류도 있다. 나아가 괜히 따따부따 떠들거나, 내가 좋아하는 돈과 호사와 사치에 대해서 그걸 비틀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비틀까? 앞서 나는 싫어한다, 욕심 없다, 행복하다 그처럼 비꼬든 고급이든 그건 어떻게든 내게 얽매인 문제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발전해서 그 욕망을 구기고 망가뜨려서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너 좋아하는 돈, 너 좋아하는 사랑, 늬가 그렇게나 사랑하는 푸아그라, 너가 환장하는 굴요리, 늬 좋아하는 품위, 그게 나 때문일 줄 아니? 너 여기서 빠져라, 그렇게! 방탕도 똑같다. 방탕이라는 자유의 통념에서 자유로운 남자는 많지 않다. 물론 아저씨 기준으로 말이다. 아니면 산속에서 자연인으로 살던가 또는 유명해지는 방법 밖에 없다. 방탕의 기준은 논할 필요없이 여자가 알아야 할 건 그거다. 그 황홀한 밤의 세계가 클럽이냐 클럽이 아니냐. 여기서 나뉜다. 첫째, 앞장서서 데려가는 캐릭터 즉 리더이자 선동가. 둘째, 따라가는 동참자. 셋째, 으쌰으쌰 1차와 별개로 난 아니야 유형. 넷째, 넌 아직도 머머하냐 라고 반문하는 대가. 허세의 특징은 뭐냐, 욕망을 거꾸로 뒤집기다. 난 좋아하고 하고 싶은데, 그런데 난 욕심 없다 라고 말하기처럼. 여기서 허세는 1, 3, 4번이다. 여기서 3번도 어차피 그 세계에 흠뻑 젖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미 옛날에. 유명해져서 건전하게 살던가, 유명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살던가. 전자인 2번 허영심일 것인가, 후자인 뭘 모르는 1&3번일 것인가 그 차이. 묻지도 않는데 유독 '없다'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한다? 완벽한 강박증이다. 이미 남자 세계를 오래 알았고, 3번인데, 소년은 아니지만 아직 드라마식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욕망의 탈출구가 때로는 1년 365일 술과 담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허풍꾼들 앞에서 입도 뻥끗 못하며 억지 미소 썩은 미소와 함께 담배만 퍽퍽! (설레설레) 그런 허세는 곧 허열이다. 그래서 술에 대해서는 가위손 같은 손끝의 그 극심한 섬세함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여기서 셋째는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자기는 한발 쓱 빼는 부류다. 그 기준은 물론 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넷째는 허세의 부정, 허세의 욕망 전가처럼 본인은 이미 옛날에 단계를 달리해서 4차원으로 탈출했다는 식으로 격상하는 일.
   어린애에게는 삶이란 곧 놀이지만, 어른에게는 놀이도 좋지만 일이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다. 마치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고 속삭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평생 직업이던 증권업자가 어느 날 목수로 변신했다더라 같은 일. 돈을 버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우리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처음부터 운 좋게 만날 수도 있고, 왜 이제야 나타나셨나요 라는 듯이 뒤늦게 접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끝끝내 조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가가 왜 중요하냐면 대답이 YES냐 NO에 따라 그 사람의 태도도, 자세도, 관성도, 성깔도, 마음씨도, 개성도, 다정한 성품과 자상한 배려와 정다운 본성까지, 그렇다 인생까지 모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많이 들 필요도 없다. 앞서 나왔듯이 택시운전이라는 일만 봐도 그렇다. 택시운전을 하고 싶었고, (시간이 좀 걸렸을지라도) 좋아하게 되었으며, 나름 적당히 낙천적으로 만족해하며 일하는 택시운전수를 만나면 손님은 대체로 기분이 좋다. 말을 나누면 서로 말이 통한다. 기분 언짢을 일이 드물다. 오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하기 싫고 좋아하지 않지만 먹고 살려니까 택시운전을 그만두지 못하는 택시운전수를 만나면 손님은 뭐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군가는 어쩌면 그분의 눈치를 본다. 팁을 이만큼 밖에 못드려 죄송합니다, 말 섞기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으면 침묵해야 하는가도 파악하고, 인상과 표정을 참고해서 대화의 방향과 주도권마저 포기할 수도 있다. 그 YES와 NO의 차이는 완전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인문교양서를 보지 않아도 사람들은 잘 안다. 어떤 일이 힘들고, 어렵고, 이직률이 높은지를. 어른들은 모르는 일이 거의 없다. 헤픈 말괄량이와 쉬운 호박의 비율이 비교적 어디서 누가 누가 높은가, 그 역시 관상과 NC 분위기만으로도 대번에 알아채는 천재들의 경연장이 어디냐,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아니겠나. 그런 험한 인간계 거친 세상에서 밀리고 떨어지고 차여서 나는 이 일을 한다? 허세 지수가 드높다면 몰라도 안 그러면 별로 말을 많이 하고 싶지는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좋은 얘기는 나오기 힘드니까. 하지만 그 일을 내가 하고 싶었고, 좋아했고 그래서 나는 그 일을 한다? 상황은 180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내 친구 중에 트럭운전수가 있다. 얘는 고1때 나랑 친했다. 나는 농구를 즐겨했고 얘는 그림을 잘 그렸다. 나는 학교 농구부 유니콘 11기 소속이었다가 자진 탈퇴해서 무명이라는 팀을 친구들끼리 창단한다고 해서 선배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또 나는 리치 블랙모어를 흉내낸다면서 집에서 최저가 전기기타 스트라토캐스터의 플랫을 깎을 때 그 친구는 내 부탁으로 수업시간에 록그룹 딥 퍼플의 연필화를 그렸다. 둘 다 공부는 못했다. 난 처음에만 반짝했다가 그래프가 어쨌는데, 그 친구는 음 어 넘어가자. 그런데 나중 그 친구는 마라톤 선수 출신 아내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뤘고, 꽃집을 하며 부케가 만들어지면 웨딩 사진 연필화를 그려준다. 그치만 본인의 본업은 트럭 운전이다. 그것도 대형 트럭. 옛날부터 그 일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JS는 찰스 부코스키가 일했던 우편 업계에서도 잠시나마 잔뼈가 굵었다. 비정규직으로 맛만 본건데 당시 만난 트럭운전수들도 쉽게 말해서 둘로 나뉘었다고 느꼈다. 밝냐, 어둡냐로! (그렇지만 꼭 밝고, 친절하고, 억지로 웃으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말의 의도 글의 논조는, 이왕 인간계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상 그 언제나 고슴도치로 살겠다면 몰라도 그 어떤 불이익은 감소하는 게 낫다는 거다) 일과가 끝나고 현금 박치기 포커를 치느냐, 다른 취미를 갖느냐로. 가난해도 재밌고 대화가 되는 트럭운전수가 있는 반면에, 가난하지는 않은데 자기가 자기 입으로 자기는 집이 몇 채인 자산가라면서 앞 동네 여자와 자기가 바람 피는데 궁합이 끝내준다느니 어쩐다느니 허세 장난 아닌 트럭운전수도 있었다는 걸 체험했다. 그게 그렇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 답에 따라 긍정이냐 부정이냐 그 차이는 확연할 수 밖에 없다. 보통은 적당할 테지만, 그러니까 조증도 아니고 허언증도 아니고 강박증의 명령에 따라 로보트처럼 따따부따하는 친구도 있을 수 밖에. 그러니까 결론은 평서문이 아니라 질문이다.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내 일은 옛날에 과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을까?
   나는 내 일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일을 할 때 기분이 괜찮은가? 적어도 보람은 있는가!
   직업과 이상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분명한 건 그거다. 우리는 이처럼 일에 대해서 산에 오르기 전에도, 오르는 중에도, 정상에 등극해서는 물론 내려오면서도 스스로 저런 질문들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 아, 또 하나!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하기 좋은 방법으로 우유를 옷에 엎지른다거나 뿜는다거나, 웨이트레스와 종업원을 대하는 예법, 자기는 과거 키우던 동물을 버렸다는 고백을 쓴 일기,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자기 방의 모습, 음악은 무엇을 좋아하고 영화의 취향은 어떻고, 내일이 있다 또는 없다, 게임형인지 불만형인지 허세형인지, 그것도 아니면 막살자는 부류는 아닌지에 더불어 또 한 가지 가상의 지표가 생긴 것만 같다. 사람의 성품을 판가름하는 새로운 방법은 어쩌면 공상만으로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친구는... 저분은... 이 냥반은... 과연 내 아들딸이 엉엉 울면서 귀를 붙잡고 옆집 꼬마와 함께 날 찾아온다면 옆집 꼬마에게 내가 어떻게 대할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꿀밤을 먹인다? 이걸 그냥 확... 할려다가 참고 참으며 말은 사근사근하게 하지만 어금니를 꽉 다물고 있는다랄지, 뺨을 살며시 쓰다듬거나 머리를 기분 나쁘게 밀어버리는 유형도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조카 둘이 어릴 때 여동생이 우니까 남자-오빠의 머리를 살짝, 아주 살짝 밀면서 싸우지 말라한 적이... 저런, 그러고 보니까 있었네. 어머머, 다음 번에 비상금까지 털어서 용돈을 대폭 인상해야겠군. 뭐 별수 있나!
   결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은연중, 나 돈 욕심 없다? 속 시원하게, 있다─많다─겁난다(?)라고 솔직히 고백하기. 곧 허세를 달래기!
   둘째, 포커도 아니고 삶은 올인이 아님. 고로 야망도 좋지만 일단은 소망 먼저! 즉 목표 설정하기의 소박함과 심원함의 비율과 왜를 깨닫기.
   셋째, 내 생각과 행동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기록되고, 기억되며, 교감된다는 것. 사랑은 물론 우정도 거울이고, 만물은 연결되어 있으며, 세상은 돌고 돈다는 점까지.



   5
 
   정력가에게는 흑심과 욕망이, 사랑의 바보에게는 꿈과 희망이 기본이다. 그리고 선동가와 허당과 난봉꾼은 황금과 쾌락을 맹렬히 추종하는 사냥꾼이다. 장소는 상관없다. 도시에 살면 도시의 촌놈, 시골이면 촌닭, 만약 여자라면 촌년. 그런데 사랑이라는 남녀의 대결 구도는 대등하기 어려운 법. 서로 약자로 자처하며 균형이 안정적이면 사랑의 완성이요, 대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다. 그래서 사랑의 행복은 짧고 강렬하던가 또는 그 반대던가, 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의 발단─전개─절정은 금방일 뿐더러 일반적이고, 사랑의 결말이 진짜 실력자라는 것을. 그래서 조마조마, 그만그만, 해피엔딩, 절망적인 체념이 모두 사랑론임을 알고서 사랑을 시작한다면 사랑은 어려울 수 밖에! 그러나 뭐가 뭔지도 모른 체 사랑에 빠져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처럼 인생은 우리에게 언제, 어떻게, 누구와 사랑에 빠질 것이라며 극적인 운명의 상대를 미리 점지해주지도, 살짝 귀뜸해주지도 않는 얌체와 같다. 그러면 대체 그 아름다운 큐피트의 역할은 누가 누가 맡을까? 그 중임은 사람이 맡는 게 아니라 뻔트 같은 작전이, 예술적 소양과 고상한 교양미도 좋다만 그보다는 우연과 사교가 맡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른들이 평판 관리를 하고, 인문교양서에서 하는 말로 2-3범주에 해당하는 지인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심심치 않다고도 한다. 고로 사교계의 꽃과 숙명을 노래하는 예언가, 하다못해 돌팔이 점술가는 물론 아리따운 숙녀를 찬미하는 솜씨가 남 다른 허풍꾼이 인기가 좋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위에는 그분들을 조종하고 쥐락펴락하며 리모콘을 누르면서 즐거워하는 로맨티스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 인생의 묘미는 그와 같이, 사랑처럼 날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딱) 비장의 카드는 남겨두는 센스, (윙크)! 그러니까 결국 우정은 내가 위고, 인생은 오리발이며, 사랑은 신비주의인 것이다. 단, 배려는 숙녀 먼저, 수컷은 서열 정리. 무서운 얼굴 대회의 인기상과 여자들의 이상형 그 두 마리 토끼는 함께 붙잡기 힘들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세가 남발되고 허영이 남용되는 초급 세계의 논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고급은 몰라도 대관절 중급은 뭐냐고요? 그야 어쨌든 일반 상식은 대중에게 맡기고, 격조 높은 인생론과 신기한 동기 부여, 놀라운 환상머신은 마술사의 뒤집힌 모자와 만날 아담한 성의와 조촐한 미소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이 시대 최고의 인문-교양서 그 극적인 제목은 다름 아니라 바로 허영심 2.0! 마침내, 두둥~, 개봉박두~!
   여기까지가 그가 뚝딱 완성한 칼럼이다. 제목은 사랑론 2.0! 그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칼럼 쓰기도 재미없었다. 그래서 마라가 그를 이제 대놓고 놀렸다.
   「너 칼럼 처음 쓰니?」 
   그러면 JS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듣고만 있을 샐리가 아니다. 걔는 미스테리아 경리 일을 취미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들 논다 잘들 놀아.」 
   그렇지만 이건 시트콤이 아니었고 그곳은 지성의 전당도 아니었다.
   「샐리. 너 학교 다닐 때 인기 없었지?」
   「내가 왜 인기가 없어? 보여줘?」
   「정말 보여주게?」
   「보여주긴 뭘 보여줘! 또 뭔 생각하니? 아 정말 못말려.」
   JS는 어딘가 모르게 여자들과 놀면 겉도는 느낌이란 게 있었다. 기분은 들뜨고 분위기는 좋은데 뭐랄까 그 다음이 없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의 속셈은 그것이었다. 단체전은 남자와, 개인전은 여자와. 전자는 우정 후자는 사랑. 그러니까 지금 재미가 없지. 그래서 그는 일단 한 명을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실천했다.
   마라가 없는 틈을 타서 샐리와 미용실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읽다가 딴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마라를 따돌리고서, JS와 샐리는 미용실에 갔다.
   어디에? 미용실에!



   6

   「뭐가 고민이니, 혹시 변비? 딱 보니 그거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한두 가지 생활 습관만 파악하면 긴지 아닌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어. 아 진짜로! 운칠기삼인 종목처럼 점쟁이도 다 말발로 먹고 들어가는 거야. 하지만 고수를 만나기는 힘든 법.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는 웃지만 나올 때는 어쩌니? 아무래도 표정이 좋긴 힘들거든. 아 그러니까 진작 날 찾아오지 그랬어, 이 사람아! 이거 이거 알고보니 순 맹탕이네 이 친구. 나랑 친해지기는 힘들어도 한번 내 세이렌을 듣고 판도라의 사연에 공감하고 나면 응? 헤어나올 래야 헤어나올 수가 없다네. 알겠나?
   있잖아, 비달 사순 들어봤지? 최고로 잘나가는 미용실에서 여자들한테 인기 만점인 그분들에게 내 헤어스타일을 맡기면 내 기분은 어떨까? 한마디로 환상이지! 왜? 모르긴 몰라도 그냥 보기만 해도 좋거든. 어딘가 모르게 지켜만 봐도 막 빨려드는 것 같다고나 할까? 뭔 말인지 알겠지, 응 그런 거거든! 내 머릿결을 맡겨보지 않은 사람은 그 황홀감을 도저히 알 수가 없겠지. 그런데 그 마술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니? 손에서 나와, 바로 이 손.
   (악수!)
   춤의 종류는 많은데 남녀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 누가? 무도인들이 말이야. 딱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그런 기회에 환상적인 고수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다리에 힘이 풀린다고나 할까? 진짜 주저앉는 사람도 있데. 일단 말이야, 손만 딱 잡으면 느낌 알거든. 손맛부터 다르니까. (미소&눈 감고 상상하며&설레설레) 응? 그게 다겠니, 오줌싸는 사람...까지는 없겠지. 허허허. 넘어가자고!
   (하이파이브!)
   자, 이제 다음을 이어가 볼까! 그러니까 대관절 왜 이상형을 보는 걸로 만족하고, 주인 있는 달마시안과 비싸서 엄두도 못내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만 해도 좋냐고? 아하, 그러니까 왜냐라는 말씀! 왜냐하면 다른 건 다 생략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단언컨대, 그 아찔한 감정의 발동 때문이지. 응? 핑~하는 그 즉각적인 신호! 착착 감기는 손맛! 환상머신의 작동 말이야. 그때가 되면 찰칵~ 하면서 효과음이 진짜로 들린다고 하더라고. 물론 여기서 둘로 나뉘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그걸 모르는 사람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별 감정 없어. 한마디로 뭘 모르는 남자.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제대로 신호가 오는 거지. 확 그냥 필 받는 거라고. 왜? 그 다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거든. 예고편은 즉각 떠오를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회상하며 공상하고 추측함으로도 모자라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떨까 라며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밖에 없어. 어? 엮이고 말리며 물리는 게 뭐 다른 게 아니야.
   꼭 들어맞는 비유는 아닌데 크게 세 가지로 나뉘지. 첫째, 물고기를 잡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낚시꾼. 둘째, 물고기를 잡은 다음 반드시 그 맛을 음미해야 만족하는 경우. 즉 잡았으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 어차피 인간 세상은 다큐멘터리 아니겠어? 셋째, 셋째는 뭐겠니? 뭐긴 뭐야,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지. 요컨대 첫째는 야생마, 둘째는 사냥마, 셋째는 경주마 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군. 셋째는 어디로 가셨나는 모르겠지만 일단 첫째와 둘째는 모처럼 목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시겠군. 곧 그 말은 물고기가 동격의 물고기를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생명체를 만나는 것처럼, 앞서 말한 경험이 물고기가 이종의 인어공주를 만나는 것마냥 신기한 경험이라는 말이지.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볼까? 약이라면 소싯적 인생이 꼬였거나 일가견이 있었던 사람이 드라마에서 약에 취한 연기를 본다랄지 음 또 뭐가 있을까? 담배를 끊은지 오래 된 사람이 누군가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을 바라 봐. 그러면서 느끼는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비현실적 기실감이라고 해야 할까? 뭐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나도 다른 분야에서 몇 번 듣긴 들었지. 그때가 되면 응? 샤르륵 아라송해진다네. 허허허허허. 야생 동물이 밀림에 살면서 만약 인간의 음식에 잠시 길들여졌다가 다시 온전한 야생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해 보자구. 그럼 다른 맹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고기를 포식할 때 그걸 바라보면 그 과거 기억의 기묘한 소환이 20년, 30년을 간다구. 굳이 어려운 전문용어로 설명하진 않겠어. 그건 생략하자구.
   약간 옆길로 샜지만 다 비슷비슷한 얘기야. 음 그럼. 용어가 약간 불분명하긴 한데 그 기력인지 뭔지 같은 게 있거든. 그건 누구나 악기를 5년 10년 연주해 보면 알 수 있다네. 독학하면 다른 취미에서도 속성으로 그 기분을 느낄 수 있고. 아아, 이거구나! 라고 말이야. 아가씨, 바둑 프로기사에게 딱밤 맞아봤어요? 맞지 마. 절대 맞지 마. 소스라치게 거절하라고. 왜냐면 장난 아닐 테니까. 응? 아 말도 말어, 말도 마! 내가 맞아봤자나. 그래서 그때 나 기절했자나. 응? 아, 여기, 응? 내 이마 여기, 만져 봐! 어디? 넘어가! 시간 지났어. 다음 기회에. 그러길래 뭘 망설여? 아 그러니까 이마를 내줄 때 만져야지. 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입술을 내줄 수야 없는 거 아니겠어! 내가 이마를 만져보라고 했지, 언제 이마에 키스해달라 그랬나? 참 나 정말~! 이마에 키스하면 뭐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관습이라도 있는 줄 아시나, 거 참! 나도 다 어디에 가든 누굴 만나든 존재감 있어! 어? 이거 왜 이래! 나도 사랑의 유혹자요, 대망의 열정가며, 코끼리 같은 청력의 소유자라고. 얘가 얘가 아직도 뭘 모르네, 응? 아무튼 일단 넘어가고. 음,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전문가의 손길을 타면 음식 맛부터 달라 이 양반아. 맛부터? 아니 재료부터! 또 뭐가 있을까? 있다, 그림! 기회가 된다면 화가에게 손을 잡혀 봐. 악력 장난 아닐 걸? 그런다고 무조건 손 잡기를 건너뛴 채 연애하면 나중 살짝 아쉬울 수도 있으니까 그건 참고하고. 잠깐만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높임말이 아닌가, 아무튼 기의 관록이란 게 그래. 그런데 예외는 있어. 오빠 봐 봐, 응? 오빠!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잖아. 아 그러잖아? 뭐, 보여줘? 떽~! 아무튼, 그건 왜일까? 왜냐하면 외부에서 그 부족한 기를 충당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냐고! 열의 원리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거든. 다른 사람들도 예술적 착상을 떠올리는 방식은 다 비슷비슷해. TV, 라디오, 잡지, 걷기, 독서, 대화, 소셜 네트워크, 다리 떨기, 모방, 사교 그리고 사랑. 에 또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 노장의 섬세한 손맛하면 또 뭐가 있지? 아 또 있구나. 가령, 술꾼! 그분들도 시선의 분위기와 고개의 각도 또 술잔을 꺾는 자세부터 다르긴 한데, 그런데 그건 약간 다른 거야. 그건 좀 따라하고 본 받기에 애매하지. 내 방식을 터득하는 게 차라리 나아. 어쩜 훨씬. 아무리 그 바닥의 선수일지라도 그건 경우가 다른 거거든. 그건 잘하면 멋이 아니라 중독이 되니까. 무엇보다 그건 노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참는 의지가 더 중요한 분야라서 주신 디오니소스께서 함부로 타이틀을 빼았기기 싫어하신다네. 응? 게다가 습관도 다 비슷해.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하는 거! 읽고 보고 듣고 놀고, 즉 정보의 습득보다 말하기가 중요시되는 분야니까 말이야. 그 시장에서는 단순히 뭘 아느냐와 뭘 모르느냐랑 큰 상관관계가 부족해. 몰라도 아는 게 되고, 알아도 모르게 되기 십상이거든. 아 그리고 말이야. 손금은 건너뛰자고. 왜? 다음이 있으니까! 허허허허허.
   아 그런데 뭔 말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그래 변비. 그런데 그걸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느냐! 보면 알지. 우리는 뭐든지 그냥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딱 그냥 대번에 알아버리거든. 응? 우리는 말이야! 운동 안하고 입 짧고 생활이 불규칙적이고, 뭐 그런 몇 가지. 보면 보여. 그럼 위는 수다 아래는... 여기까지. 그러니까 난 이제 어떡하냐고? 많이 먹어. 그럼 돼. 그럼 하나는 해결되는데 그 대신 살찐다고? 풍만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겠지? (윙크&끄덕끄덕) 그럼 돼. 뭐야 그런데 내 주위에 괜찮은 남자가 없다고? 영 시원찮은 허당들뿐이라, 오 단추구멍뿐이라, 그럼 외모만 보지 마! 그런데 알고 보면 더 실망이라구? 에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도 착착 말리게 만들지를 못하네. 맞지? 맞네! 완전 맞네. 꼬리 흔들기는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허락치 않고, 딱히 팔짱 끼는 시늉조차 할 만한 기회가 엿보이지 않는군. 얘 가만 보니 내숭이 없네. 얘 완전 은근 허당이구만. 괜찮아 괜찮아. 번지수를 잘 찾아왔으니까. 그대의 인생은 말이야, 지금까지와 그리고 지금 이후로 나뉘게 될 꺼라네. 알겠나? 오빠만 믿어! 어머머 이것 봐라, 언니 어제 꿈꿨구나. 정말로 그분을 만났구나. 아 그럼 키스도 했겠네? 앙큼한 숙녀 같으니라고. 혼자서 아주 야무졌겠다? 웃는 거 봐. 괜찮아, 우리 사이는 얼마든지 쪼개도 되니까 말이야. 아 글쎄 야한 꿈 꿨으면 진작 그렇다고 실토할 것이지, 응? 꼭 이렇게 들켜야 속이 후련하니? 얘가 얘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네 그래. 그런데 있잖아? 공주님 말해보세요. 아 털어놔 이 가시내야! 꿈속에서 만났던 그 늑대인지 여우인지는 꼬리가 붉은 빛을 띄었니 아니면 은회색이었니? 잘 생각해 봐! 그래~ 그거야~ 그러라고~! 잠시 후 그 여우를 만나러 갈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응? 딱 기다려! 허허허허허. 푸하하하하하하. 어허 속마음을 알고 보니 말이야, 아 도도한 여인께서 내숭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라... (딱)! 그건 있잖아, 물론 타고나면 좋겠지만 사는 동안 내 결점에 내내 심하게 강박을 느끼며 살 필요까진 없어. 자존심이네 우월감이네 열등감이네, 그게 다 뭐니? 비교, 그것도 상대적인 비교로 발생하는 거거든. 자존감과 자신감 그리고 허세가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바로 세상에는 말이야, 나처럼 지금 당신께 마법의 동기 부여를 하는 주술사가 필요한 법이고.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분명 하나의 학문과 산업이라고. 응? 인생이란 알고 보면 신기한 거지. 요술이 따로 없어. 음 아무튼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후천적으로 숙달될 수 있는 본능을 타고난 것 가운데 하나를 뭐라고 하냐, 바로 애교라고 하지. 애교! 허허허허허. 자, 따라서 해 봐. 오빠! 그래, 오빠. 어이쿠,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잘하네, 응? 그거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내 문제를 잘 아느냐고?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늬가 쓴 일기를 읽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JS와 SF가 당도한 곳은 어디냐, 바로 미용실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맹신했을까 아니면 헤어드레서의 용모에 혹했을까. 그보다는 아마도 시나리오는 미리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용실에서 위치한 구도만 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훤히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위치만 보고도 열 가지를 파악한다. 그 미용실의 1인자 HP, 미안하지만 휴렛 팩커드는 아니고, 유감스럽게도 해리 포터도 아니며, 핫 팬티는 아닐테니까 본명은 핫스퍼 피츠버그! 그런데 그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했다시피 미용실 내부의 그림이 문제였다. 결국 JS는 미리 사전 작업을 다 해놓은 상태에서 오늘을 기다렸던 것만 같다. 어쭈, 카운트다운 다 셌겠구만 그려. 허어 이것 봐라!
   그러니까 작전의 개요를 살펴보자면 이랬다. 우선 그곳의 1인자를 파악하고, 그 다음에 몇 번 들려서 그분과 친분을 돈독히 쌓은 다음, 미용실이 한 달 중 가장 한가한 시간을 골라서 방문. 그래서 JS가 욕심대로 1인자의 손길을 타겠다고? 아님, 절대 아님! 그럴 리가 있나. 그게 아니라 그 영광은 선심 쓰듯 SF에게 살며시 양보하고, 자기는 특급 조수가 초급 헤어드레서로 입봉하는 제물이 되겠다는 것. 그런데 바로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면 후자가 전자를 바라보겠다는 것. 뭐라고? 캬~~! 으아, 그야말로 기막힌 속셈이군. 이건 뭐야, 이건 정말 마성에 다름 아니다. 내 공감각의 만족을 위해서 이 모든 이야기는 철저히 계획되었다? 저런! 처음부터 치밀한 각본대로였군 그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응큼한 본심은 자상한 아량으로 누구도 모르게 슥 옷을 바꿔 입게 된 거지. 누구도 모르게? 알면 어때! 누가 아니래? 오, 제발! 동심이 배우기 걱정이고, 2인자가 따라할까 봐 겁난다.
   누구나 아시겠지만 전문가는 헤매지 않고, 힘들이지 않으며, 매우 간결하게 작업을 완수한다. 한마디로 깔끔하다. 더없이 산뜻하니까. 즉 환상에 빠질 듯 하자마자 컷트는 끝나버린다. 난 거북이를 원했는데 주어진 우승컵의 상품은 아 글쎄 마법 토끼? 오 세상에나! 내 기대 곧 화염방사기는 딱 발사되었는데, 결과는 막 그냥 커피포트도 아니고 주전자는 이제 겨우 예열조차 안됐다? 맙소사! 최고라는 게 그렇다. 아쉽다. 너무 아쉽다. 완전 아쉽다. 진짜 섭섭한 거지. 드라마 대사는 그런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라고. 그러나 현실은 하늘을 봐도 별을 따기 힘든 경우가 꽤 많다. 에이, 알면서! 꿈이 그렇다. 황금도 그렇다. 마음에 쏙~ 드는 아트박스는 설레지만 내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랑이 그런 거니까. 우머나이저도 그래서 잘 팔린다. 물론 그때 그때, 또 상황따라 인연따라 다르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하물며 우연조차 내 편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므로 말로 만족하고 처지를 합리화하는 건 어른들의 장기다. 허세와 허영심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인 것이다. 인생 한방이다? 훅가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한발 쓱 담구며 플랜B를 미리 미리 준비할 수 밖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만그만하고 비리비리하며 완만한 인생 곡선을 선호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사람들이 광고에 속아주고 합리주의를 선호하는 것이다. 지갑은 검소하며 시간이 없거든. 응? 선택과 집중! 나아가 누려야 할 호사는 많고, 세상은 넓으며, 인생은 가난하든 인기가 있든 둘 중 하나거든. 하물며 친구는 멋도 모른 채 날 촌년-촌닭이라고 놀린다? 이런 젠장, 지는 얼마나 잘났길래!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면 어쩌다 아티스트병에 걸릴 수도 있는 거지만, 일반적으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다.
   농담이고, 그는 실패작이 될 열의가 가득했고, 시원하게 그분과 연애할 용의마저 있었다. 삭발조차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의 순번이 올 뻔 하다가 약올리듯 스쳐지나감도 무섭지 않았으니, 헤어 스타일은 몰라도 작전을 망칠 염려 그 가능성은 심각하게 낮을 수 밖에. 물론 하다 하다 안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더더군다나 필요하다면 가발이라도 쓸 용기까지 충만했던 것이다. 미용실 조수 생활 몇 년만에 그것도 업계 최고이자 대단한 명성의 고수들 사이에서 귀동냥으로, 눈썰미로 배운 동화 같은 요술을 이제는 내 손으로? (딱) 특별한 날이네! 완전 특별헌 날. 오늘은 기념일이다. 어찌 됐든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흥분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그 순간을 나중 언제까지라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을 막살지 않듯이, 그분들도 손님 머리카락이 내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막-자를 순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나는 차분하다. 아니 기쁘다. 게다가 기분이 좋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다. 더구나 색다른 구경도 했네? 뿐만 아니라 SF에게 사려 깊은 호의를 베풀었고, 그분의 가위손을 찬찬히 그것도 이상적인 거리에서 바라보며 느낀 흡족함은 이미 기억에 아로새겼네? 심지어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좋다고, 그건 꽤 부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던지 과일은 빛나고 오묘하며 꽃은 향기롭기까지? 말 다 했다. 말 다 했어. 따라서 JS는 눈으로 만족함과 동시에 그 사각사각, 슥슥슥은 물론 그분의 사교 생활까지 추측하는 그야말로 공감각의 낙원, 마술의 고향, 유령의 성에 사뿐히 입성하게 됐다. 짝사랑은 애달프지만 그이를 먼발치서 보기만 해도 좋고, 상사병은 도저히 아련한 꿈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경지 바로 그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희망찬 미래와 꿈 같은 현실을 양쪽에 꿰찼다? 총애하던 투명인간 애첩을 거느린 체 요정과 천사와 뛰놀며 한눈팔다 풋사랑의 뻔트를? 이런, 젠장! SF에게는 신비감의 맛만 보게 만들고─맛배기야 뭐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자기는 그냥 환상의 왕국에서 그것도 환희의 왕좌에 앉았다? 악마의 쾌감이라는 왕관을 쓰든 말든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죄다 해먹어라, 에잇~!
   알고 보면 인생에서 크게 부도덕하지 않고서, 특별히 얌체가 아니면서, 밉상으로 낙인 찍히지 않고서도 이기심과 이타주의의 경계를 어떻게 잘 줄타기하면 이처럼 가끔 황홀경에 빠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예전 조마조마에서 활동했던 이유가 정녕 이건가? 막 갖다붙이기엔 자연미가 영 아슬아슬하군 그래. 아무리 그래도, 어찌 보면 그건 인생사의 묘미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는 안된다며 화들짝 반박할 수 만은 없는 일이다. 보아하니 설득이란 이런 걸 말하고 무승부, 윈윈이란 이렇게도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속으로 외웠던 주문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낮잠 자는 토끼, 달려라 거북이!
   저런! 결국 상황 봐서 뻔트란 말이군. (어깨 으쓱!)



   7

   JS가 최근 획득한 성과는 특별하지 않았고, 발단의 탈출은 요령부득이었다. 어딘가에 애원할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애걸할 수도, 어떻게 자발적으로 이 심심함을 해결하기를 바라며 하늘에 간청할 수도 없었다.
   그 외에 그는 <듀퐁과 말보로>라는 술집에 들락날락했고, <롤스로이스와 셰퍼트>라는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포르토피노를 비롯하여 샐리와 이브와 함께하는 사랑과 우정의 복잡한 인물 관계도에서 슥 한 발을 뺀 구도를 원했으니까. 화살표가 오고 가고 그것도 좋지만 우선은 일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뭔지 모를 작품 구상을 떠올리며 희희덕거리다, 엉뚱한 착상과 우스꽝스런 영감 때문에 조소하며 심란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마음은 어느 푸른 신세계로 떠났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딱 환상 문학 장르에 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날따라 또 이브는 미스테리아 사무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JS는 부담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자기 머리를 삭발할 수도 없었고, 포르토피노에게 고자질할 수도, 이브를 설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작가이자 종합예술의 모방자인 JS를 가만놔둘 이브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치도 빠르고, 젊고 예쁘고 부자였으며, 자신의 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 앞에서 그녀에게 들키기 직전에 부랴부랴 옆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예전에 건축설계도를 보고서 두 사무실 사이에 임시로 막힌 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방금 들어간 사무실은 입주 안내용으로 빈 사무실을 공개해 놓은 상태란 원인도 그의 재빠른 행동에 주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 사무실에는 이방인이 있었다.
   「누구신지...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아, 그게 그러니까... 옆 사무실로 간다는 게 그만 잘못 들어왔네요. 어떡하죠?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제가 뭔가 딱한 사정 때문에 여기서 곧바로 나가면 안되는 거거든요. 제가 지금 나가면 들켜요. 딱 걸린다구요. 제가 무작정 그녀를 피한다고 한들, 그녀가 애처로운 연정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렇다고 마음을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한술 더 떠 딴 남자를 소개시켜주겠어요, 어쩌겠어요?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요? 잘 아시잖아요. 아 그런데, 어머머 글쎄 제가 낯선 분께 괜한 말을...」
   「아,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설마 절 그렇게 꽉 막힌 사람으로 보시는 건 아니겠죠? 제가 무슨 악덕 업주인가요, 아니면 퇴폐의 정복자인가요? 지금은 누가 뭐래도 사랑의 시대 아닙니까! 그렇다고 제가 선생께 다짜고짜, 설마 지금 바람 피우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일 테구요. 물론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보면 기만적인 자유주의자에 가식적인 위선자입니다. 원래 세상이란 게 마냥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사랑에 설레고 우정을 신뢰하며 자본의 전망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딱) 지금 속으로 그 생각하셨죠? 이 인간 뭐야! 아 나 정말 괜히 사무실 한번 잘못 들어왔다가 귀에서 피가 나게 생겼네. 얘기를 귓등으로 들을 수도 없고, 거 원 참. 아무튼 이 인간 참 말 많단 말이야.
   (쉭─쉭─쉭) 웃었어 웃었어. 와, 설마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호박을 피할려다 수박을 만난거군요! 뭐 어쨌든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저는 멜이라고 합니다. 멜 게이츠. (악수)
   형씨 이름은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아, 다름 아니라 제가 오늘 그것도 방금 미래를 볼 수 있는 요술의 최후 3단계를 막 숙달한 참이거든요. 정말이에요. 제 얼굴을 보세요. 이게 어디 거짓말할 얼굴인가요? 전 이미 선생이 제 사무실로 들어올 줄 알고 있었답니다. 제가 이 신공을 완성함으로써 저의 그 귀신도 깜짝 놀랄 만한 무공은 정확히 세 가지로 나뉘게 됐죠. 제가 딱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첫째 과거가 보인다, 둘째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인다, 셋째 과거와 미래가 다 보인다! 형씨는 딱 운 좋게도 셋째군요. 그렇다고 믿으시란 말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저 돈 많아요. 그럼요. 일단 의심의 먹구름을 저 멀리 보내버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는 음악을 틀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오늘 이 음악 들었죠? 아니... 혹시 내일인가? 아닌데 오늘인데. 절 속일 생각일랑 하시마슈. 우리 속이고 속고 그러지 맙시다. 네? 여자 마음을 울리면 못써 이 사람아. (그러다 그는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척키 포스터를 그에게 딱 들이밀면서) 얘 알죠? 제가 진짜 왜 이러는지 몰라서 이래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구요? 선생. 차근차근 하나씩 합시다. 바쁜 것도 아닌데 서두를 필요 있나요? (그러면서 그는 사무실 출입문을 열어 고개만 슬쩍 내밀어 바깥의 동향을 살핀다)
   자, 이제부터 시간을 젭시다. (그러면서 그는 스톱워치 10분을 작동시킨다) 형씨. 진짜 비밀 진짜 환상을 설마 싫어하지 않죠? 나한테 왜 그러냐구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연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드디여 유령의 마술을 완성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뭔가를 보여드리겠단 건 아닙니다요. 리시브─토스─스파이크! (빡)! 저는 그처럼 속 시원하게 딱 3박자만으로 진짜 미스테리를 증명하겠습니다. 기분 좋으면 말입니다, 빈틈이 보이면 세터가 상대측 빈자리에다 슥 그냥 공을 밀 수도 있구요. 그건 물론 운이 좋아야겠죠? 그럼요. 아 잠깐만. 진짜라고 하지 않으면 다 가짜인 건가? 이러니까 세일을 하면 안되고, 진짜는 광고를 할 필요가 없는 거겠죠. 이러니까 우리 같은 도사들은 자꾸자꾸 숨을 수 밖에 없다니까 정말. 아무튼 선생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직 뻔트만 대셨군요. 눈치 보고, 사인을 훔치며, 잇속을 관측하며, 승산을 따지고, 간질간질 응애응애 삐악삐악? 언제까지 바에서 바텐더를 괴롭히며 TV로 뻥-축구만 볼겁니까? 원터치 슛에 질려서 또 다른 리그를 봤더니 정말 고집스럽게 중앙 돌파만? 그러지 말고 우리 이참에 통쾌한 역전 드라마 하나 만듭시다, 네? 우리 같이 말입니다. 리시브─토스─스파이크! (빡)! 기억하세요. 막판엔 후위 공격입니다. 잊으면 안됩니다. 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언제까지 인생론을 들먹이고, 환상머신에 속고, 판타지에 짜증내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참다 못해 사랑이란 나비에 맨날 차여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축구공입니까 배구공입니까? 안 그래요? 인생이 무슨 장난입니까? 소심한 열정─순진한 사랑─신비한 환상─낭만적 모험─엄선된 쾌락까지, 좋아요 다 좋다구요. 그렇지만 미켈란젤로가 무엇을 그렸고, 스피노자가 팬지 같은 희망에 대해서 어떤 글을 썼으며, 영화에서 간혹 우연찮게 만나는 추억의 유행가가 우리에게 손짓하는 무언의 정결함을 이제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러나 순결한 인사, 다정한 열정, 격렬한 사랑도 좋습니다. 나쁠 리가 없지요. 그럼요. 하지만 이제 정말 우리가 반전에 놀라고 우주의 광활함에 신기해 하며 인간의 운명에 황홀해했다가 끝에 가서는 무뎌지는 진짜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우리가 언제까지, 네? 인생이 한낱 허당의 쾌적한 3박자인지 한량의 대단한 4대 요소인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때 그때 다른 거니까! 라~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내 이 두 귀가 솔깃해야 하냐, 네? 우리가 무슨 부채도 아닌데 왜 우리만 휘둘려야 하냐, 제 절규는 바로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자, 마침내 시간이 가까와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리시브입니다. 네? 리시브! 따라서 해보세요. 리시브!
   네, 유감스럽게도 명랑한 우정과 청순한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시느라 힘드셨다는 것 다 압니다. 잘 알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리스브만요.
   그러나! 내일 혹시 전개와 절정이 한꺼번에 공개될지도 모르니, 긴장하셔야 합니다. 꼭요! 허허허허허.」
   그 다음에 그는 티셔츠를 벗더니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곧 티셔츠를 벗었는데 또 티셔츠가 있었고, 그 새하얀 티셔츠의 중앙에는 정사각형으로 작은 화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게 뭐야? 이런 허접한 돌팔이 약장수를 내가 믿을 줄 알어? 라는 생각이 오늘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JS는 그 미심쩍은 마술사의 이름도 듣자마자 잊어먹었다. 그분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면 된 거고, JS는 이브를 피해서 잠시 시간을 벌었으면 된 거다. 하나 주고 하나 받은 거였다. 기브 앤 테이크! 그러든 어쩌든 그것은 JS와 MG 곧 멜 게이츠의 첫 만남이었다.
   설마 그 둘의 만남이 TV로 생중계될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친구가 되어 나중 또 모른다. 함께 NC에 갈 정도로 굳건한 우정을 쌓을지도. 내일은 우리에게 미지수이니까.
   미래는 사랑처럼 모르는 거니까.



   8

   사랑이란 무엇일까? 남부럽지 않은 사랑은 혹시 염치없는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것. 짧은 사랑과 어중간한 연정은 논외로 하고,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환상에 빠져 정신없이 신비로운 상태. 그러나 사랑의 절정감은 인생의 꽃이니 만큼 기승전결은 없을 수가 없다. 어쩌면 천사를 희롱하는 게 아닌가 라는 기쁨은 악마를 조롱하는 듯한 상심으로 선회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미리 사랑의 절망감에 겁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의 의무는 아마도 사랑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살면서 사랑 받기만 기다리다가는 꽃은 시들고, 과일은 벌레가 먼저 먹으며, 황금 물고기는 웬 꾀죄죄한 허당이─찌질한 마초가─재수없는 영심이가 냉큼 채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딸랑딸랑 아부와 새콤달콤 찬미, 반짝반짝 인기, 뿌잉뿌잉 칭찬, 보글보글 재미만이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신기한 숙명, 머머증을 이겨낸 환생감, 암담한 슬럼프를 극복한 부활, 찬란한 내 님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내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가 방문한 장소는 예상 밖이었다. 사교계, 무도회, 오페라 극장, 투우장, 경마장, 도박장, 미술관, 동물원도 아니고 하물며 술집도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어디긴 어디겠나. 미스테리아 사무실이었다. (이런, 젠장?) 왜냐하면 아직은 작품 구상 중이었기 때문에 자기 사무실로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스테리아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이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인사를 나눈 다음 샐리와 함께 자리에 없는 마라의 흉을 보던가, 그 반대던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제의 기억은 그의 발길을 저절로 옆 사무실로 끌게 했다. 그러지 않을려고 했는데 정말로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살살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딱 물고기였고, 줄 달린 치즈였던 것이다.
   오늘은 두번 째 날이었다. 리시브─토스─스파이크 그리고 (빡)!에서 토스 차례! JS와 MG는 만나서 담소를 나눴다. 얘기는 많지 않았고 차만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리시브─토스─스파이크! 에서 토스의 날이란 걸 서로 확인했을 뿐 별다른 사건은 없었따. 아 (빡)!이 빠졌음.
   내내 지루할지라도 기어이 그는 MG가 뚱딴지 멍청이이자 허접한 약장수요 즉흥적인 쾌락에나 몰두하는 미련곰탱이란 걸 확인하고만 싶었다. 왠지 모르게 그걸 확인해야만 속이 시원한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셋째 날 무슨 영문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로 환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어설픈 반전을 만난다면 대중이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짜증 아니면 신경질. 물론 감탄도 드물게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토스는 비리비리할지라도 어떻게 갑자기 얼렁뚱땅 후위에 있던 선수가 공중으로 뛰어올라서 어찌된 셈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마술을? 그런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확실히 없다. 있을 수가 없으니까.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런 느낌 처음이야? 그는 기어코 MG가 허당이란 걸 확인해야만 밤에 두발 뻣고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처럼 둘째 날은 뭔 일 없이 헤어졌다. 아, 아니다. 뭔 속임수인지는 몰라도 마술이 있긴 있었다. 그건 바로,
   복부에 정사각형으로 빈공간을 보여주는 마술이었다.
   어제 그분이 가슴에 화분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보여줬다. 그건 오늘 일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가 똑같은 장면을 보여줬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의 차이점은 분명했다.
   즉 어제는 티셔츠에 프린팅된 화분 사진이었고, 오늘은 그의 가슴에 정사각형으로 구멍이 뚤려서 그의 뒤에 있는 화분이 그 뚫린 구멍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JS는 일단 저급한 마술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닌 척 하면서 살짝 박수만 쳤다. 속으로는 꽤 놀랐다. 많이 놀랐다. 솔직히 다리에 힘이 풀렸고 오줌을 지릴 뻔 했다. 도대체 어떤 속임수인지 코앞에서 보고도 감을 잡을 수 없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MG는 그에게 요청했다. 그래서 JS는 손을 그 안으로 넣어봤다. 진짜 넣어졌다.
   말도 안돼! 아니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게다가 그의 몸에 뚤린 빈 공간의 정사각형 둘레에는 인체의 생물학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손을 넣은 다음 다른 손으로 그 손을 잡아봤다. 그래서 잡혔다. 자기가 잡은 손은 남의 손이 아니었다. 이건... 뭐지?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절할 수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미래의 흥분감일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감수성이 합세했다. 그런데 그건 악마의 호기심과 괴물의 감수성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선망의 대상이자 욕망의 상징이며 허영심의 표적, 애교로 유혹하고 교태로 떨리게 만들며, 사랑으로 꼬셔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남자는, 원래대로라면 바로 포르토피노였다. 그런데 포르토피노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MG가 최고였다. 왜 아니겠어? 기가 막혀서!
   그는 마침내 셋째 날을 기대하게 되었다. 벌써 고대하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예감이 실망으로 결판나더라도 이제는 염원했던 셋째 날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못살 것만 같았다.



   9

   그렇게 둘째 날은 마감되었다.
   그는 그날 집으로 가서 수갑을 입수했다. 어떻게 어떻게 구했고, 제일 싼 것보다 최저가에서 2단계 위로 샀다. 그러나 적당히 구실을 하고 기능은 가능했다. 그거면 됐다. 준비는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셋째 날이 되었다. 그는 그곳으로 갔다.
   도착했다. JS는 MG를 만났다. 자, 드디어 셋째 날! 그래서?
   그래서 탐욕스러운 호기심의 대단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뇌하는 꾀돌이 양반이 진짜로 뭔가를 보여줬을까? 그 냥반이 짜잔~ 얍! 그런 건 없으니까 또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듯이 수다로 때울려는 속셈일까? 그러니까 지금은 의뭉스러운 논리주의자와 밑도 끝도 없는 요술쟁이의 대결 구도인가? 그러든가 말든가! 결과야 어쨌든 결과를 보는 일만 남았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억제할 수 없는 탐구심은 그 값을 치뤄야 할 테고, 리시브─토스─스파이크인지 허당의 3요소인지 뭔지도 다 쓸데없는 수작이란 걸 확인하게 될 게 뻔했다.
   그야 어쨋든 스파이크 곧 셋째 날은 둘째 날과 똑같았다. 멜은 어제 했던 마술을 오늘도 재현했다. 이제 신공이 바닥난 거지. 더 보여줄 게 없었던 거다. 그럼 그렇지! 그는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JS는 오늘도 그의 몸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곧바로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서 자신의 양손에 스스로 수갑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윽고 감미로운 쾌감을 음미하며 달콤한 행복을 만끽했다. 왜냐하면 그 속임수가 어떤 원리로 가능했는가를 곧 있으면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아마 순진한 생각이었는가는 몰라도 어쩌면 이브와 이 냥반은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점, 간과하고 넘어가기에는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 않았다. 뭐라고? 그가 짝사랑 받는 낌새를 느끼며 은근히 기뻐했지만 보아하니 목적은 딴 데 있었고, 그처럼 이브는 마법사의 조수였으며, MG의 최면은 성공했다더라? 아직은 몰랐다. 아직은 몰랐다. 그렇다면 나의 조력자는 누구일까, 샐리일까 마라일까. 포르토피노는 주연이면 몰라도 조연감은 아닌데! 라면서 그는 현황과 내일의 전개에 대해서 심하게 헷갈려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상하게 JS는 실실 졸음이 왔고, 멜이 뭔 얘기를 하는데 뭔 얘기를 하는지 통 종잡을 수 없었으며, 그의 말이 점점 느려지다가 그는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10

   그는 미스테리아 사무실 소파에서 깨어났다. 그의 왼손과 샐리의 오른손에 장난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마라는 그의 오른손에 또 다른 장난감 수갑을 채울려는 찰나였다. 이 일이 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들에게 물어봐도 난 사랑을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라는 눈치였다. 그러다 그는 생각이 났다. 리시브─토스─스파이크 다음에 빡이! 
   「빡!은?」
   「뭐? 뭔 빡?」
   「아니... 그... 빡이 등장할 차례였는데...」
   「오빠 그게 대체 뭔 소리야?」
   「그러니까. 빡이라니! 빡이 뭐지?」
   「몰라. 빡? 빡이 뭐야. 오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뭐야? 빡은 어디 갔어? 빡! 아 나 이거 진짜 빡치겠구만, 라는 속마음을 그는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런 빡 같은 일이 다 있나, 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옆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분명 귀신에 홀린 일이나 다름없었다. 굶주린 까마귀 가엾은 너구리처럼 그는 꺼벙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지만 샐리와 마라를 모른 체 할 수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일은 일단 관망으로 넘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샐리와 마라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로 그는 다시 캐릭터가 변했고 장르가 바껴버렸다.



   11

   동심은 어린이의 미덕, 허영심은 흑심의 악덕?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글쎄요. 왜냐하면 그건 친한 어른들끼리 사석에서 웃고 떠들기에 꽤 괜찮은 화제일 테니까요. 따라서 허당에게 허세는 타고난 본능일 뿐이고, 허풍은 어떻게든 늘 수 밖에 없다는 거네. 고로 어른 세상은 순 거짓말쟁이들의 잔치라는 것. 그건 바로 오락산업이 승승장구하는 타당한 이유. 그러므로 사랑이 영원할 거란 믿음과 비밀스런 흠모의 연정은 어쩌면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과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의 종류를 예견하고, 본심을 가늠할 수 있는 독심술을 깨우쳐야만 한다. 남몰래 만나 세월이 야속한 그런 말없는 사랑인지, 수줍은 풋사랑이 아니라 짧은 행복과 극적인 뻔트에 대만족하는 풋사랑인지, 그도 아니면 풀꽃 반지도 좋고 다이아몬드도 굳이 극력히 마다하지 않는 사랑인지를! 자, 그럼 누구... 아 맞다. 샐리와 이브. 그녀들 사랑의 미래를 예견해보면 되겠네. 하지만 그건 전망을 보아하니 초라한 복비를 핑계댄다 치고, 그러니까 살짝 요술 수정구에 비치는 사랑의 예고편만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일의 영상에 비치는 두 남자, 누군지 몰라도 그분들의 흑심을 측량해봤더니 아 글쎄? 그 애정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불결하다고 해야 할지 꽤 아리송하군 그래.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그는 오늘도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세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음을 바꿨다. 자기의 개인 사무실에 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꿨다. 거긴 내일 가기로 했다. 언제나 순수한 기쁨과 쾌활한 생기를 선사하는 여자, 또 여자, 아아 여자에게 얽매이다가 사랑과 야망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라며 헛소리를 하기엔 오늘은 너무 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 일의 핵심은 그거였다. 마술사의 뚫린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자기의 다른 손과 수갑을 채운 일. 아예 그 기억이 훌러덩 날아가버린 일. 시간을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일 말이다. 아무튼 도둑 맞은 당사자는 자기였고, 그 소중한 속임수를 갖고 떠나간 도망자를 찾는 일은 새로운 임무였다.
   그는 일단 오늘은 쉬고 심기일전한 후 내일 뭔가를 하더라도 뭔가를 하기로 했다.



   12
 
   다음 날 그는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 도착했다. 샐리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오늘따라 어딘가 모르게 그는 샐리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사무실에서 그는 혼자 일하며 하늘색 티셔츠를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환각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무슨 증상? 그는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가슴이 어쩌다가 훵하면 습관처럼 쳐다봤으며, 그러다 어느 때는 자신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간혹 정말로 가슴부터 배꼽 정도까지 빈 공간이 보이기도 했다. 완전한 환상이자 완벽한 환각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구입한 하늘색 티셔츠에 인쇄된 사진은 애플 맥북 사진이었다. 노트북 겉면에는 백설공주가 탐스러운 사과를 정색하며 집을려는 모습이 그려진.
   그렇게 3일쯤 지나서 JS는 맥북 사진이 정사각형으로 인쇄된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서 샐리를 만나기 위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곳에는 샐리가 젤리라는 친구와 함께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하필 샐리의 친구 젤리가 JS와 똑같은 그림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티셔츠의 색상은 달랐고. 그녀가 입은 티셔츠는 바탕색이 살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손을 젤리의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그걸 넘어서 손은 통과하지 못하고 옷을 살짝 매만지게 됐다.
   「어머, 어머머! 오빠 왜 이러세요?」
   상황은 얼렁뚱땅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원래 그는 쾌락의 열정에는 무심했고, 연애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개인사는 지금 하나도 힘을 쓰지 못했다. 완전 무용지물이었고 지금은 환각 증상이 그를 지배했다. 곧바로 옆 테이블에서 어느 손님이 맥북을 007 가방에 담는 장면을 보자마자 그는 환상에 빠졌다. 그래서 카페에서 나갈려는 손님을 붙잡고서 그랬다.
   「제 블럭을 돌려주세요...」
   역시 그 상황도 얼렁뚱땅 넘어갔다. 그 뒤로 샐리 그리고 샐리의 친구 젤리와 헤어졌다.
   그는 집에서 또 사무실에서 혼자 장난감 수갑으로 곰인형과 자신을 묶어놓기도 했고, 미스테리아 사무실에서 그 놀이를 같이 하자고 조를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포르토피노에게 연락이 왔다. 락 페트시발에 같이 가자는 거였다. 이미 약속도 다 정해놨고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했다. JS는 몸만 오면 되고 샐리도 이브도 다 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썰렁한 분위기를 타파하여 친분을 쌓자는 목적이었다. 록 페스티벌? 축제 분위기는 엉뚱한 청춘에게 호소력을 행사했다. 무기력하게 행복한 밤의 왕국에서 방황할 수도 없고, 무정한 여심을 다정한 허영심으로 바꿀 줄 아는 재주도 바닥났으니 이제 할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는 곧바로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갔다.
   결과만 말하자면 그들은 만났고, 록 페스티벌은 멋진 음악회였다. 드넓은 야외에서 한꺼번에 수많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 풀밭에서 얘기하며 먹고 마시고, 연인들끼리 목마 태우며 사진 찍고 행복한 낙원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아뿔사!
   하필 록그룹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칙칙폭폭놀이까지! 심지어 말뚝박기 놀이까지 목도했다. 그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환각이 도져서 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놀며 추억을 만들고 우정을 키울려고 했는데, 혹 뗄려다 뿔을 붙인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가 사교 생활이 문란한가 건전한가, 건실한 희망을 꿈꾸나 좋은 차를 몰고 막 돌아당기며 막사는 젊음을 원하나, 그건 몰랐지만 사랑이라는 달콤한 환희의 예식은 남의 잔치였다. 열광적인 갈채도 타인의 차지였고, 욕심 많은 귀염둥이도 남의 별명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기쁜데, 기절했다 깨어난 다음, 자신만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살다 살다 별의별 환각을 다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13
 
   「왜 말 안 했어? 아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한테 물었어야지, 이 친구야! 혼자서 많이 고생했겠네? 어쩜 좋아. 응?」
   포르토피노는 역시나 좋은 친구였다. 록 페스티발 모임은 끝났고, 다음 날 포르토피노의 집에서 단둘이 차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포르토피노는 자기가 그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겠다고 장담했다. 심지어 그 요술까지 숙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많이 나간 거 치고는 너무 자신만만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그런데 알고 보니 포르토피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책임감도 없이 막 내뱉은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인상 깊은 우연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그렇게 JS의 마음을 뺐어버린 마술사는 바로 포르토피노의 옆집에 살았던 것이다.
   인생은 무상하고, 사랑은 변하기 쉬우며, 성공은 어렵다. 그러면 뭘 해도 재밌고, 사랑 받는 귀염둥이로써 인기에 시달릴 정도로 출세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할까! 포르토피노 같은 친구를 만나면 된다. 일명 포르토피노마 타기! (뭐? 놀고 있네!)
   그야 어쨌든, JS는 천박함에 부정적이었고 저속한 걸 싫어했다. 그러나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얘기였다. 소망의 떠나감은 불만일 수도 있고, 탐구심에 대한 애착도 그때그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포르토피노와의 우정은 굳건했고, 우정의 2인자로 마술사까지 자신의 알찬 인맥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에 환각은 이미 치유되어버렸다. 그들은 함께 옆집으로 갔다. 그리고 마술사를 만났다.
   「반갑습니다. 눈빛으로 판단하건대 저와는 가는 길이 다르신 것 같군요. 그렇죠? 설마 제 요술을 믿으신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곳이 유토피아가 아니듯이 저는 영화에나 나오는 그런 황당한 요술사가 아니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인간 세상에서 만화영화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혹시 방금 전에 심즌가족이라도 보신 건 아니겠죠? 현역이었다면 몰라도 저는 은퇴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뭘 숨기고 어쩌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럼요. 아, 그 소식 들으셨죠? 세기의 마술사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까다로운 소송에 발목잡혔다는 뉴스 말입니다. 아 그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 저와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많이 컸죠. 그럼요. 실은 그때 제가 많이 봐줬어요. 하는 말도 그렇고 수법도 그렇고 꽤 귀여웠기 때문이죠. 속으로 응큼한 생각을 많이 하는 친구였어요. 갖가지 욕망도 듬뿍 넘쳤구요. 실은 그게 아니라, 제가 그의 조수를 짝사랑했기 때문이죠. 유명한 요술사나 권위적인 도박사, 냉철한 승부사까지 우리끼리만 아는 어떤 비밀 하나를 알려드릴까요? 그건 바로 마술사 조수의 미모, 도박사의 사생활, 승부사의 재산 내역과 실력이랄지 유명세는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점이죠. 때문에 저는 커퍼필드의 조수에게 홀딱 반하고 말게 된 것이죠. 네 그럼요. 한번 걸려드니까 거 정말 빠져나올 수가 없더라구요.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원래는 제가 당시에 더 알아줬는데, 그냥 은근슬쩍 제가 슥 2인자로 내려왔었죠. 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죠. 제가 만약 그때 빡하며 고집부렸다면 녀석은 내내 제 빛에 가려서 투정이나 늘었겠죠 뭐. 정 서운하면 제 엉덩이에 키스라도 하든가 했을 테구요. 그건 그렇고 간략히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행복한 결혼 생활이 얼마간 계속된 다음 우린 운명적으로 결별을 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린 서로 행복한 미래를 기원해주는 사이로 남았구요.......」 
   포르토피노와 JS는 마술사의 집을 나와서 다시 포르토피노의 집으로 돌아왔다. 마술사는 은퇴했고 더군다나 부인과 이혼했다? JS는 결코 눈속임 마술을 가르쳐주라고 조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있잖아. 마술사의 전부인이 말이야, 남자였데!」
   뭐?
   그는 이제 남은 일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건 무엇일까? 뭐겠나, 따라하기지! 상대는 마라였다. 제일 맹한 여자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1차로 마라에게 최면이 통하느냐, 마느냐! 그에 따라 그 정체 모를 신공이 나에게도 가능할 것인가가 달려있었다. 그것이 성공해야지만 샐리에게 또 이브에게 시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슬슬 작전을 실행했는데, 결과는?
   작전 대실패! 그는 거의 맞을 뻔 했다. 내용은 이랬다. 첫 번째 날 리시브는 더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상대는 걸려들래야 걸려들 수가 없었고, 그에 앞서 티셔츠는 그냥 티셔츠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건 마치 아는 형이나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14

   「여자랑 얘기하니까 어때, 재밌지?」
   그 말을 듣기 전에 그처럼 느꼈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을 통채로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는데, 그런데 그 다음이 없다는 거. 이게 바로 허당의 특징이다. 그 다음이 없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남는 건 뭘까, 허세 밖에 없다. 만약 허풍에 일가견이 없다면, 3박자인지 4대 요소가 충족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허영심 뚜껑 열리게 만드는 바로 그것. 뭔가 있는 듯 해서 듣고 봤더니 글쎄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런데? 그러나 그 다음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 있어도 때리고 싶게 만드는 결과 뿐.
   하긴 그는 자기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던 걸 떠올렸다. 형이 꼬셔줄께 어쩔께 큰소리 뻥뻥-쳤다가, 남자 후배랑 둘이서 먼 길을 걷다 걷다 지쳐서 후배는 따지고 사이는 서먹해진 일.
   「형이 말 건다면서요? 아 꼬셔준다면서요!」
   그것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파도 소리 들리는 해변가라면 어떻게 뭔 배짱으로 미녀도 아닌 적당한 선녀를 골라서─그게 더 어쩐다고? 워-워-워!─아가씨 아름답소 어쩌고저쩌고 했을 텐데. 그런데 이건 뭐 분위기도 없고 차가운 회색 도시에서 맨땅에 헤딩을... 그건 도저히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밤도 아니고 대낮에. 보이는 건 전부, (설레설레)! 결국 본인도 허당이란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언제까지라도 영원한 허당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왜, 대관절 어째서?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실제 없으니까. 그래. 맨발의 청춘!
   둘째, 원래 없는 걸 좋아하니까.
   사랑은? 없어! 으쌰으쌰의 의리는? 없어! 참말의 목적, 의도, 목표점? 없어! 돈 욕심 없고 차 욕심도 없고, 또 뭐가 없지? 멋진 옷, 좋은 구두, 그럴싸한 호사? 싹 다 필요 없어.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식으로 봤을 땐 적어도 그렇다. 그래서 그건 단지 의식주요 이동수단일 뿐, 호모 사피엔스가 옷을 걸쳤을 뿐 그게 뭐 대단하다고? 단, 오직 취득 불가능할 때에만! 가능성에서 내 능력 밖이면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음. 그처럼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라는 속담을 실천하는 건 합리적인 행동일 수도 있지만 <꼬끼요꼬꼬댁>일 수도 있다. 일단 앞면을 보자면 맞는 말이다. 광고에 나오는 모든 곳에 직접 가고, 광고에 나오는 좋은 소비재를 다 사며, 아름다운 숙녀를 모두 사랑하며 죄다 데리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뒷면을 보자면 쩨쩨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부러우면 진다 라는 허세가 허영심의 이상형일 리는 없으니까. 참고로 바나나는 까서 먹는 재미로 먹는다. 그런데 벌써 알몸을 드러낸 바나나? 재미없다! 깐 바나나 또 까는 것도 아니고, 참 나! 하오나 바나나가 피망이나 브로콜리가 아닌 이상 그 본래 맛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요? 만화영화 주인공들이야 애인이 있고 싸워야 할 악당도 존재하지만, 고독한 도시의 남자에게 아프로디테는 어쩔 수 없는 그림의 떡! 그렇다고 돌아온 싱글 일명 돌씽에게 수업을 받는다? 자존심이 허락치 않음. 아마도 형편없는 낭설에 불과하겠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라이벌 누구는 이미 바나나 다음에 코코넛을? 오오, 저런! 바나나 껍질을 밟을 뻔 밟을 뻔 하다 용케 피했는데, 뭐야 이거, 머피의 법칙? 살다 살다 내가 다 새똥을 맞다니, 요즘엔 새들도 사람 가려 가며 실례를 하시나! 사정이야 딱하지만 지엄한 형편이 그러하니, 그러니까, 미녀를 다른 누가 아닌 내가 만날 수 없다면? 그녀들은 말하면 속고 아는 건 그만그만한, (딱!) 백치가 된다. 장난하냐 내가 어디 사는데 거기 지리 내가 제일 잘 알아, 라며 시지프스를 프로메테우스로 잘못 알은 체 인상 팍─팍 쓰며 빡─빡 우기는 상남자가 나중 어떻게 손바닥을 뒤집을까? 와~ 말도 못한다! (설레설레) 한마디로 역대급! 그건 명백히 '아는 척' 강박증이다. '잘난 척' 증후군에 대해 특히 웃긴 경우는 그거다. 10살 20살까지 어항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어 넓은 세상을 알게 된 부류. 어항의 예법 곧 '잘난 척 하지 않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하면 꿈을 펼치는 거고 남이 하면 꼴불견에 잘난 체 한다니, 주의할 점은 그거니까. 개그맨 보고 '웃겨 봐!', 은행원 보고 '돈 세 봐!' 라면 그건 무례다. 농담이라고 주장하는 술꾼에게 쓱 말리면 말린 사람도 생각 좀 해 볼 문제다. 진짜로 웃기고 진짜로 돈을 세서 만인을 웃기는 현자가 최고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고. 이미 세 바꾸 반 돈 선량한 호기에 대항해 냉철한 이성에 입각하여 디오니소스 대 헤라클래스 구도를? 어디 가 봤어 너 뭐 해 봤냐 라는 허세가 아니라, 진짜로 어디이자 격조의 한복판인 격조 레스토랑에서는 그런다. 할리우드의 신성이네 고전음악계의 거장이네 골프계의 전설, 테니스 세계 몇 위?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한다. 아예 쳐다 보지도 않는다! 싼 게 비지떡이네 싸구려가 합리주의일 수도 있네 라는 말도 과감히 생략된다. 괜히 지방에서 일반인이 유명인에게 같이 사진 찍어요 사인해주라, 해서 불가피하게 어쩌다 거절당하면 참지 못하고 뭔가 한 마디 톡 쏘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통화를 갑자기 뚝 끊는다? 우리 마누라에요, 내 여자친구네! 내게 유리하면 프라이버시, 내게 불리하면 유명인의 도덕성? 하긴 나도 언제 갑자기 치사해질지 결코 장담할 수가 없다는 걸 왜 모르겠나. 뭐 그건 그렇고, 말하자면 엎드려 절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못 말리는 행운아가 왜 마다하겠나! 계기랄지 한방 또는 회심의 역전 드라마는 바로 그런 데서 싹트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종이 한 장 차이다. 친구가 공판장에서 일하는 건 아는데, 어판장의 그 뭐라 그러지 아하 경매 수신호를 늬가 정말로 할 줄 안다고? 너 웃겨 봐 야 돈 세 봐, 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기해서 한번 해 보라고 요구하는 건 친구의 특권이고, 다시 그 특권을 슥 무시하며 말을 돌리는 것도 우정의 속성이다.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잘 아는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서 나중 대성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부자로 출세하더라도 사람 좋고 재밌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차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까 출발선부터 신사인 계층과의 차이를 무마할 수 있는 게 뭐냐, 자질이고 학습이며 사극과 고품격에 대한 안목이다. 옛날 말로 가정교육, 다른 말로 공감능력, 신기한 상상력, 놀라운 친화력도 같은 이치다. 후천적인 감식안, 갈고 닦은 변별력, 나중 촌스런 취향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 봐야 타율이 낮아지면 낮아졌지 절대 높아지기는 힘들다. 귀족성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묘사, 그것에 절반은 실패했다고 하는 헨리씨 정도면 그나마 양반일 것이다. 그래도 알고 보면 촌닭이 재밌긴 재밌다. 인기는 진공청소기가 독차지할지라도 분위기는 촌닭이 띠우니까. 다만 말수가 적은 편인데, 속에 싸인 건 많은 반면 야망의 실현은 적잖이 불만족인 촌닭은 꽤 애매모호함. 모두 제각각인 이기주의 100, 1000, 10000이 만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동물농장의 세상만사에서 제1의 대망에 대하여 나는 뒤쳐졌다, 고로 나는 슬프다 난 불행하다? 성공의 가치는 거기도 있지만,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제2의 꿈과 제3의 행복을 찾는 것이 진짜 인생이다. 그리고 여자는 촌년이 비교적 근소하게 착한 반면 대신에 시녀는 할 말이 많다. 왜냐하면 싸인 게 많으니까. 싸여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니까. 말이 통했던 남자는 일평생 넓게 쳐서 손으로 꼽고, 향기로운 꽃이 피었는데 나비가 다 웬말이냐, 파리마저 날리지 않는다? 옆 테이블에서 야 야 가서 말 걸어봐 뭐라고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냐 에이 못생겼네, 라는 말이 다 들릴 만큼 내 귀가 밝다? 오늘은 달리는 수 밖에 없다. 어느 장르를 너무 밝히는 게 아니라 내 귀가 너무 밝으니까 건강하니까 청순하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음악이 멈추지 않는 2박자 무도회에 가야 하는 것이다. 아 글쎄 지금 안 그러게 생겼나? 그래서 남자들이 양주 3병일 때 그녀들은 수다 3시간이다. 그렇다고 여자라고 모두 비너스요 모나리자에 아를르의 여인이 아님. 말 몇 마디 섞어보면, 아이고~아이고 끄덕끄덕! 남녀 둘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아아, 그런데 너무 멀리 갔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내가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정말 어디까지 간지조차 모르겠다. 아무튼, 거 참 말 많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또 뭐가 없을까? 즉, '없다'는 또 뭐가 있을까? 아하, 사랑하면 찐한 사랑이지. 그럼 사랑에 대한 욕망도 없겠네? (딱)! '없다'의 예가 벌써 끝날 리가 있나. 예술 생활을 위한 명분과 교양인을 위한 문화? 필요 없어! 낭만적인 선망 그리고 꿈과 희망? 없어! 세상에 공짜가? 없지! 남녀 사이의 끝은? 있겠어요?! 우리에게 동심이? 맞을래! (남녀의) 우정? 있을 턱이 있나!
   간혹 우리 동기들은 굳건한 우애와 멜로드라마풍 감성, 플라톤 사상의 논의도 가능함과 동시에 플라토닉에 대한 공감, 종교적인 신뢰, 뿐만 아니라 큐피트의 역할이니 뭐니 뭔 말을 하더라도 알고 보면, 어? 알고 보면 사랑의 화살표는 난무하고 그 가운데는 승자도, 패자도, 떠돌이도 각양각색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만 바보인 거지. 눈치 없게 말이다. 말은 사랑의 신호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데, 몸은 언제나 흑심! 누군가 객관적인 제3의 인물이 머머 몇기 최고의 동기들을 각자 대면 상담을 하고서 실상을 알고 나면, 말도 못하는 거지. 남녀가 혼재된 동기 사이에서만 그런 게 아님. 일단 동성일지라도 셋, 넷을 넘어가면 편은 생길 수 밖에 없는 운명. 셋, 넷까지는 (적어도 그때 당시는) 끈끈한 우정으로 으쌰으쌰할 수 있는데 그게 그리 길게 가기 힘듦.
   첫째는 뭐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살면 된다, 그러든 어쩌든 첫째는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런데 둘째는 뭐냐, 그건 어? 그건 정말 아니다? 순진하시긴! 빈말과 참말의 비율을 화자와 청자가 자꾸 혼동한다는 것, 어른 세상의 논리를 굳이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얘기 하나도 재미없는데 요 앞에 서커스단이나 구경 갔다 올까? 에이 가지 말자.」
   근사한 인문교양서를 쓴단지가 언젠데 말만, 말만 그냥 미래학자가 따로 없다. 그렇지만 그런 분들이 또 타석감은 좋다. 타율이 다음과 같기는 힘들겠지만. 정말 다음처럼 뻥뻥 터트리는 달변가와 감동도 웃음도 뭐든지 다 안겨주는 홈런왕이 있다면 그 재주를 유명세와 연애사에 쓰지 어설픈 술자리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않는다. 시간 남으면 밑밥을 뿌리는 건 취미고. 동물의 왕국에서 맹수들이 느그적느그적 내내 자고, 놀고, 쉬고, 걷고, 헤매며 사냥에 실패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거든.
   「너 요즘 책이, 특히 소설이 왜 안 팔리는지 아니? 왜냐하면 매체의 고유 영역에 대한 수준 그 나아갈 길을 잊어버렸기,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너 한번 생각해 봐. 상남자들이 좋아하는 게 뭐야, 그래 <없다>야. 응? <없어>라고. 니체가 뭐랬니? 원래 마초가 없다는 걸 좋아하는데, 니체는 뭐랬는지는 알고, 그런데 니체는 안 읽었고, 오락산업이 퍼트리는 제목들만 알아. 그가 동전의 앞뒷면 같은 창조와 파괴에 대해 뭐라 설파했는지 어땠는지 관심이 없어. 응? 머머 접습니다 다음에 새로운 취미, 심심함 다음에 뜻밖의 행운, 이직과 이사, 또 이별 다음에 찾아오는 새로운 사랑이 과연 니체의 철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어?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그게 인생의 포지셔닝일 테니까 말이야. 그처럼 말이야, 왜 그 말이 탄생했는지는 모른 체 그 말을 했다는 상식만 아는 게 어느새 현대인의 교양이 되어버렸다고. 응? 그게 무슨 교양이니! 장난해? 아니잖아!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거랑 막사는 건 다른 거거든. 우정은 <내일은 없다>와 사랑은 <막살자>와? 어허, 이거 이거 큰일날 소리를! 설마...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지? 아닐 꺼야. 그런데 이 친구 왜 이렇게 좋아해? 아, 그만 웃어! 한때 놀았다, 그땐 나도 잘나갔다,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침없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젊음 그건 결과적으로 쨍한 사랑의 전적으로 남았다! 라~는 의미로 웃자고 말하는 막살자와 진짜로 막사는 것. 전자와 후자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니! 안 그래? 막산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지. <왜 팀을 엘리트로만 구성하면 안되는가> 라는 인문교양서의 흔한 주제, 한 번쯤은 들어봤지? 읽어 봤나는 몰라도 최소한 들어는 봤을 꺼야. 그러든 어쩌든 읽으나 마나 뭔 얘기할지 알잖나. 입바른 얘기, 기교가 뛰어난 글발, 뭔가 있어 보이는 이론 같은 거. 괴짜도 필요하고 똑같은 생각들만으로는 진전이 어렵다, 드물게 보면 문제아들이 일 낸다, 소속감이니 취약성이니 방향성이니 어쩌고저쩌고. 정말 그럴 것 같아? 아니야~. 천만의 말씀! 물론 그 말도 맞고, 옳고, 뛰어난 분석이지 왜 아니겠니. 그런데 있잖아, 그건 한마디로 포장이고 미화며 변명일 수도 있어. 스포츠리그를 봐 봐. 7부 리그가 잘하니 1부 리그가 잘 하니? 연봉 비리비리한 무명이 모두 나중 영웅 되니? 일류대 나온 친구가 똑똑하니, 삼류 대학에서 공부 안하고 겉돌며 막살았던 친구가 똑똑하니? 왜 숙녀는 멍청하다는 표현에 유독 민감하니? 경력이 어중간한 사람들과 일하는 것과 뭘로 봐도 최고인 사람들과 일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야. 팀워크가 어쩌고저쩌고 그건 다 갖다 붙인 이유일 뿐이고, 실제로 뭘로 봐도 최고만으로 구성원을 뽑고 드물게 예외를 두는 건 최고는 막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응? 아닌 말로 막사는 사람을 위한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데, 그런데 한번도 막살아보지 않은 최고들과 진짜로 막산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로 막사는 분들을 위해서> 뭔가를 만든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어. 확률로 따졌을 때 타율만 유지하면 되니까, 타석으로 승부하는 게 세상사의 법칙이니까. 응? 그러다 하나 얻어걸리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주가야 오르락내리락하는 거고. 달리 문제될 건 없다고. 그러나 경쟁은 치열한데 타율이 낮으면 밝은 내일은 기대하기 힘들 수 밖에 없겠지. 진짜로 막살았다가 전혀 다른 경로로 회사를 옆문으로 들어오고, 얼렁뚱땅 팀에 스카웃되고, 그런 인재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 책들은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와. 즉 정상적으로는 뭘로든 최고 인재가 훨씬 좋아. 천사요 요정이자 절세미녀인 정실 1명에 첩 100명. 응? 비유가 좀 그렇지만 일이란 건 그 반대로 최고 요원 100명을 뽑고 듬성듬성 최고가 아닌 유형도 뽑는 것,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회사는 별로 없어. 안 그래? 빈틈을 메꾸고, 최고들을 견재하며, 희안한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최고가 만든 게 진짜 최고냐며 따질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니까. 색다른 발상, 특이한 제안, 기묘한 상상력이 그렇게 만들어지니까. 그런데 4번 타자가 슬럼프에 빠져 비리비리하고 1군들이 맥을 못추면 뭐다? 연패라고 응? 연패! 딴 데 가면 일류로 대접 받을 2군들이 필요한 이유고, 극적인 드라마를 새롭게 쓰는 대타와 밑도 끝도 없이 뻔트로 홈런 치는 뻔트마가 절실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경쟁사에게 수싸움에 밀리거나 운 나쁘면 뭐겠냐고. 응? 주가 폭락이야! 영리하고 똑똑한 최고들로만 모였으면 대체로 일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고, 성과도 뛰어나. 그렇지만 그 말은 곧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일 수도 있다 그거거든. 막살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뭘 안다고 막산다는 건 뭐다, 내일은 없다가 뭔 줄 아세요, 사랑은 있을까 없을까, 따따부따 따따부따? 실소를 부를 일이지. 애들 장난 같은 일이니까.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응애응애 삐악삐악, 응? 너무 막산다 막살자, 말이 좀 그러니까 비유를 딴 걸로 들어도 돼. 이를 테면 십대, 십대를 위한 서비스! 또는 쟁쟁한 브랜드가 매출은 대부분 20대 이후로부터 거둬들이고 20대 미만에게 최면을 거는 일 같은 거. 최고들이 모여서 10대를 위해 최면을 건다면서 회의하고 연구하고 그래 봐야, 10대가 봤을 땐 그건 그냥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단 말이야. 어른들은 일단 꼰대거든. 화법과 말투, 쓰는 어휘는 다르겠지만 꽉 막힌 꼰대와 동경하는 꼰대가 나뉘긴 하겠지만, 어쨌든 아재는 아재고 꼰대는 꼰대야. 어른들이 세상을 살아보면 스무 살이 응애응애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걸 느끼는 것처럼, 젊은이 입장에서 봤을 때 어른의 말은 의도야 좋지만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거든. 자기는 그렇게 안 살았으면서, 자기의 생각은 그만의 것이고, 다른 사람은 다른 개성이 있는 거니까. 친구끼리야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그건 우정이고, 학예회에서야 연기자들이 깨물어줄 만큼 예뻐보이며 즐겁겠지만 큰 재주 1개와 잔재주 100개의 차이를 누가 모르겠니! 바로 그래서 극비에 진행하는 최고의 프로젝트를 엘리트로만 구성하면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거라고.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들도 그래서 나오는 거고. 갖다 붙인 이유와 화려한 수식어, 기가 막힌 미사여구, 지금이 소비의 시대라고 과장 광고마냥 인문교양서도 실패작의 양이 느는 만큼 명작이 늘지는 않아. 그건 그다지 비례하지 않는단 말일세. 학업을 포기하고 인생도 길을 잃고 사랑은 실종되며 그런 막사는 시절이 없었던 사람은, 막사는 게 뭐다에 대해서 말은 할 수 있지만 진짜로 막사는 게 뭔지 몰라. 말만 많지 하나도 몰라. 뭐라 설을 풀고 글로 유명하며 연예인 행세를? 에이 웃기지도 않는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막살았던 경험이 벼슬도 아니고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막산다는 본질이 뭐다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막살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꼴에 막사는 게 뭐다? 장난해? 어? 장난하냐고! 그분들은, 막산다는 것에 대해서, 눈꼽 만큼도 몰라. 응? 스포츠팬의 야유야 웃기고 그냥 넘길 일이겠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따따부따 따따부따? 난 말일세, 그건 정말로 누구 엉덩이에 키스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네. 자, 그럼 이제 누구 엉덩이에 키스를 하면 좋을까, 는 나중에 생각하고 아무튼! 그건 본인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일이나 다름없어. 왜? 왜냐하면 막산다는 직접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게 왜 우리 잘못이야? 하라는대로 했을 뿐인데, 우리 보고 뭘 어쩌라고!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은 법. 다 어른들 말을 듣고서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착했을 뿐이잖아. 맞잖니! 그렇지만, 너 모험 해 봤어? 안 해 봤잖아. 뭐 으쌰으쌰? 그게 무슨 모험이야! 참 나. 유명한 작가들이 고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쉽니? 아니거든 다 아니거든. 영화를 볼까 소설을 읽을까, 만화영화를 볼까 소설을 읽을까, 드라마를 볼까 문학과 친해질까, 나가서 놀까 아니면 여자친구를 위해서 연애시를 외울까, 책을 읽을까 술을 마실까, 최신 유행가를 들을까 하이든─브루크너─빌라로보스 또는 마리아 칼라스를 들을까? 뭘로 해도 안되거든. 아니 상대가 되야 뭔 말을 하던가 말든가 할 꺼 아니냐고. 안 그래? 그런데 신인 작가들은 절반이 그래. 기본의 '기'자도 몰라. 태반이 그래. 처음부터, 유명해지기 전부터 연예인병에 걸려 있어. 애초에 돈과 인기만 추종한다구.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학계와 업계가 한 우물에 혼재되니까 어쩔 수가 없어. 문학도 결국은, 나중은 모르겠지만, 기초 학문일 뿐이라구. 지금 세상에서는 말이야. 18세기, 19세기를 봐 봐. 지금보다 만 분의 1, 100만 분의 1 만큼 밖에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수준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냐, 다 돈 때문 아니겠냐고! 지금 모차르트가 나오니, 피카소가 태어나니? 예술의 전성기는, 없어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취향 만큼이나, 한마디로, 끝났어. 응? 말만 예술이고 절반은 오락이자 게임일 뿐이야. 다른 말로 시간 때우기! 요즘 친구들이 히포크라테스를 얘기하니 유벤타스를 아니? 베아트리체나 타이스의 명상곡 그런 거 관심 하나도 없어. 역시나 여기서도 '없어'가 인기라고. 안 그래? 왜? 머리만 아프거든. 따분하거든. 재미가 없거든~! 실상 별 도움도 안되고 그런 얘기하면 따분한 사람이란 시선을 받게 되거든. 사람들도 원하는 건 다름 아닌 쾌락인 경우가 많고, 오락산업도 쾌감에 따른 뇌과학을 기반으로 우리를 길들일 뿐이라구. 그래서 애들 말할 때 잘 들어보면 강하고 압축된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아. 머머가 없다, 머머하면 끝이다 끝난다, 끝짱이다-이건 옛날 건가? 또 빡친다 어쩐다 등등. 말도 줄여. 개구리도 올챙이 때 똑같았어. 두더지가 개구리로 변신하는 게 아니라 똑같이 올챙이 시절을 거쳤을 뿐 다른 건 없다고. 뭐? 또 없다네. 없다 강박증 없다 트라우마! 아무튼 그런데 어른들은 그분들을 위해서 뭔가를 또 계속 만들어야 해. 그분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노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분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을 말이야.
   그렇지만! 그 말은 곧 뭐야, 지금은 허당들이 뜰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는 것. 위기는 곧 기회야. 지금 만큼 허당이 떵떵거리며 유명세를 얻을 기회는 돌아보면 한 번도 없었지 않을까?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는 거야. 소질을 잘 찾아서 재능을 키우고, 실력을 발휘하여, 행운을 내 편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잘 하면 한 분야에서 인기도 얻고 돈도 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말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일석이조. 응? 얼마나 좋아! 아 그렇잖아? 그렇게만 된다면 (간접적으로) 난 돈 욕심 없어, (직접적으로)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니니? 난 관점만 바꿨을 뿐인데, 세상을 바꾸고 싶은 심오한 포부 같은 건 일절 없었는데, 어쩌다 나의 삶과 인생이 바뀌는 일.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 말이야. 뭐 그건 그렇고,
   세상일은 그렇다 치고, 이참에 우리도 새로운 공기청정기 하나 장만할까? 옆집도 샀다며! 그렇다고 친구를 바꿀 순 없는 것 아니겠어? 아 정말 솔직히 말해서 우리 동기들 만큼 학벌 되고, 교양 있고, 옷 잘 입고, 뚜껑 없는 차는 세컨드고, 또 잘 놀고, 사교계에서 잘나가며, 품위와 급이 되는 친구들이 어디 흔하니?」 
   물론 인공지능이 뽑은 대화는 농담으로 넘기고, 허당의 현실을 돌아보자. 현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OK, 공기청정기를 주제로 정하자. 공기청정기? 진짜로 살 사람은 진짜로 사고, 안 살 사람은 말만 많다는 거! 아 말도 말어 말도 마. 세상일이 그렇다. 부자가 되는 사람, 애매한 사람, 머머하는 법 같은 책만 왕창 읽거나─책과는 담 쌓고 잔지식으로 무장하며 말발만 화려하거나 말수 없이 빈정거리거나─또는 동기 부여 강연회만 엄청 쫓아다니고 막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열만 왕성한 유형. 살면서 정직했고, 착실하며, 귀가 얇지도 않았는데 셋 중 3번인 부류도 있다는 것. 아니 그게 아니라 훨씬 많을까? 그럴지도 모름. 그런데 나는 돈 욕심 없다며 따따부따, 따따부따! 돈 뿐만이 아니다. 공부도 그렇고, 영화감독 되기도 그렇고, 작가 되기 머 하기 머머하지 않기, 연애하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결국 넷 중 하나네.
   첫째, 페라리를 산다.
   둘째, 페라리를 못산다. 그러나 사고 싶다. 솔직히 부럽다. 하지만 포르토피노 몽키스패너와 친하다.
   셋째, 말로만 요트를 샀다 팔았다 샀다 팔았다, 따따부따 깨방정! 에르메스 하나도 부럽지 않다.
   넷째, 침묵. 곧 듣기 먼저, 분위기 먼저, 전망 먼저.
   여기서 관심 없어는 응당 3번. 그런데 라 페라리를 샀다가 망한 건 뭐냐구요? 빡! 하지만 구태여 합리화하자면 입이라도 살아 있어야지 안 그러면 재미도 없고, 열도 가라앉으며, 로또 복권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꽝된다. 고로, 결론은 <없다>다. 대세는 <없다>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형, 철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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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나는 대체 왜 안되는 것일까 라는 자책과 의구심, 열망, 동경심, 신비감과 소망은 JS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리시브─토스─스파이크 그렇게 3박자를 흉내내야 하는데... 빡이 뭔지를 느껴야 하는데... 그런데 남은 건 허당의 3박자인지 4대 요소조차 어림없으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런, 젠장! 그러면 혹시 모르니까 이번에는 다르게 가볼까? 투수처럼 오랜 기간 준비해서 대망을 실현시킬까? 그런데 마구는 남들도 다 던진다. 게다가 기본기를 어느 세월에 익히나. 축구의 플레이메이커니 배구의 세터니 그는 아무리 봐도 한마디로 헤드라인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생이 거포냐 뻔트냐, 둘 중에서 당연히 뻔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 재주냐 뻔트냐, 올인이냐 액면이냐! 재주는 많은데 그런데 다 잔재주뿐! 큰 재능 딱 하나와 10분이 다 뭐냐는 말솜씨도 없이 말이다. 심지어 돈도 없고! 그렇다고 우정의 수준은? 친구 파도타기는 둘 중 하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원숭이가 받는다 곧 꼼지락꼼지락, 그리고 오늘도 허세 언제나 허당!
   그가 기쁨에 흥분하는 상큼한 숙녀와 애교 넘치고 수줍어하는 처녀를 양쪽에 거느리고 싶어했는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막살기를 원했나, 밤의 제왕으로 핑크빛 사교계에서 군림하기를 바랬나? 그것도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나. 것도 아니면 따분한 삶에 싫증내며 가난한 인생에 불쾌해 했을까? 아니다. 정반대였다. 그는 심심함의 무한함과 무안함에 하나도 지겨워하지 않았고, 인기 없음에 지긋지긋하다는 투정도, 뭘 해도 재미없다며 그 무료함에 신물이 난다고 응석부리지도 않았다. 단지 예술을 좋아했고, 오락을 즐겼으며, 문화를 애호했다. 정말로? 진짜로! 그런데 그 뭔지 알 수 없는 허전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본인도 알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속시원히 머머증이랄지 어떤 증후군이라며 진단해줄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조증이란 카드는 바닥났고, 불리하다 싶으면 대타 허언증을 부를 수 밖에! 좌우지간 궁극적으로 막판의 후속책은 하나였다. 이제 남은 일은 바로, 닥치고 쓰기!



   16

   그에게 남은 일은 이제 본업 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처음에는 미친듯이 썼다. 바로 이렇게.
   시작.
   사랑은 유치해서 행복하다.
   청춘은 심심해서 재미없다.
   낭만은 드물기 때문에 값지다.
   허영심은 선망을 탐애한다.
   인생은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일기는 소녀의 기쁨이고, 소년은 일찍부터 으쌰으쌰에 열중한다.
   어른은 블로그 같은 나만의 몰입감에 애착을 느낀다.
   인간의 3대 기본욕구니 매슬로우의 5단계 인간 욕구니 그도 좋지만 세상을 알게 되면
   인간의 인생에 대한 욕망을 내가 새롭게 개편할 수 있다는 걸, 그래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바로 이렇게!
   꿈, 취미, 호기심, 행복에 대한 열망, 아니면 뭘 해도 재미없다거나 나 돈 욕심 있다는 솔직함으로!
   완성도니 결점이니 지적은 다 블로킹 된다. 왜냐하면 어지간한 건 행복에 대한 열망이나 솔직함에 다 때려넣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미지의 열망은 불행한 내일마저 질투한다.
   유쾌한 꿈은 은밀한 희망을 동경한다.
   그러나 만족은 멀리에 있고, 인기는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잡힐 듯 말 듯, 안길 뻔 말 뻔도 아니다.
   내가 타인을 쥐락펴락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들었다 놨다 밀었다 당겼다-한다.
   황금은 오직 상상에 현혹될 뿐 나와 친하지 않은 것이다.
   끝.
   바로 이런 생각들이 JS를 괴롭히고 있었다. 공상가는 그의 운명이니까.
   뭐, 그러니까 상념과 권태 그리고 타성?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그는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물어뜯어 뭉쳐서 던졌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 썼다.
   시작.
   열정을 지향했으나 허영만 남았고, 건강한 쾌락을 갈망했지만 잠깐의 관능감 다음에는 역시나 체념이었다. 그럼 이제 방황과 고난은 충분할 테니까 행복을 예감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숙명이 허락치 않을 테니까. 따라서 다음 투수는 사랑, 그것도 가련한 사랑이었다. 몽상가의 다망과 다몽증, 다정과 허언증 그리고 내 친구 공상은 영 쓸데없는 것 같아보여도 그건 행운을 부르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망은 불투명했다. 기쁨의 기대는 선명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이제......?
   끝.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행동, 성과, 실천에 대한 다음도 없었고 새로움도 없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그는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물어뜯어 뭉쳐서 던졌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 썼다.
   시작.
   쾌락의 날개를 펼친 사랑의 뭉개구름이 향하는 종착지는 과연 행복일까, 절망일까? 그 황홀한 낙원은 기쁜 인생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원망스런 카드값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귀여운 아동은 촉망 받는 청춘이 되어 꺼뻑 반할 만한 숙녀와 홀딱 사랑에 빠졌는데, 결국 노상 낭만의 대가는 미리 당겨 쓴 황금의 독촉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별한 결과, 사랑의 전리품은 쓰디쓴 카드빛이라면... 청춘은 짠한 것이 되나? 오늘은 돈을 내일은 사랑을, 라는 낙서는 한 편의 시가 될지도 모를 일. 지금은 몰라도 어쩌면 그 또한 더 나은 미래와 더 아름다운 사랑과 더 재밌는 인생을 위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니, 실망은 절제를 불러야 할 것이다. 아닌 말로 젊음의 이별이 중년의 이혼보단 나을 테니까. 그렇지만 알고보면 돌싱의 모험이야말로 진정 즐거운 인생이더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원래 인생이란 무책임한 예언가와 애꿎은 점쟁이의 우정인지 사랑인지, 그런 꽤나 아리송한 친교 같은 것 아니더냐.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진짜로 그러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허당의 3박자와 한량의 4대 요소를 기꺼이 탐구하는 노력은 기본 중의 기본일 것. 그러니까 누구에게? 오오 남자에게! 응? 캬~, 남자! 왜냐하면 남자의 인생은 뭐니 뭐니 해도 허당의 3박자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로 얼마간 축약되어 평가될 수 있느냐가 즐거운 인생의 중요한 척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누굴 만나서 너는 허당의 3박자를 얼마나 갖췄냐, 당신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가 뭔지 아세요 라고 눈치없이 물어보면 곤란함. 많이 곤란함. 그러나 무슨 3박자니 4대 요소니 그거 결코 만만히 볼 거 아니다. 한창때 남아의 기상에 대한 그와 같은 숙연한 진리를 대체 그 누가 알려주겠나! 호메로스가? 자고로 호메로스가 시성으로 불렸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허나 단점도 있다. 바로, 품위가 있어도 보면 졸린다는 점. 젊잖은 신사여서 호메로스를 가까이 하는지, 호메로스를 가까이 했기 때문에 점잖고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으로 허당의 3박자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를 단테가 가르쳐줄까? 단테를 끌어내리지 말고 선생께서 올라가시지! 그도 아니면 친한 친구가? 친구의 자존심과 열과 기 살려주기 놀이도 재미없다. 그건 바로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삼류 작가나 되니까 알려주는 인생의 비밀인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어디서 투표하며 공론화하지는 말 것.
   끝.
   그러니까 서두로 이렇게 낚아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풀어간다라... 식상했다. 재미없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그는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물어뜯어 뭉쳐서 던졌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 썼다.
   시작.
   인생이란, 뭇남성들로부터 따끔한 시선을 받는 아가씨의 심정이 웬 허풍꾼을 만나 허풍꾼 2세를 낳는 것? 별로 그럴싸하지 않네. 다시! 인생이란 미니스커트를 입은 숙녀의 기분과 전재산을 털어 뚜껑 없는 자동차를 산 허당의 운명적 만남 같은 것! 그나마 좀 낫군. 뭐, 다시? 인생은 바나나껍질, 사랑은 선물 상자를 열면 튀어나오는 스프링 달린 권투 글러브, 광고는 악마의 속삭임, 거짓말은 천사의 실수! 뭐, 다~시? 안 해. 안 해. 안한다고!
   끝.
   아아, 인생이란? 긴 말 필요 있나. 인생론은 없다-지! 뭐, 막살자? 듣자 듣자 하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그는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물어뜯어 뭉쳐서 던졌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붙잡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접었다. 안될 때는 다른 일을 하는 게 정답이니까.



   17

   그는 하는 수 없이 마법사를 찾아갔다. 날 수제자로 받아줄 때까지 그분의 집 앞에서 텐트치고 살테다 라는 각오를 품고서.
   그렇게 마법사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그분은 이미 이사를 갔고 종적을 감춘 다음이었다.
   저런!
   이제 정말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OK 빠져들었다? 그런데 빠져들긴 빠져들었는데 이미 빠져나왔다!
   그는 신기한 마술이 진짜라는 걸 아는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결코 그 신비한 환상을 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발걸음을 서점으로 옮기게 되었다. 독학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웬 낯선 숙녀를 탐하며 말을 걸고 환심을 사며 수작을 거는 MG의 진면목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일단 책 10권부터 사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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