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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5. 31. 18:18

   1
 
   사랑의 목표는 다정한 인사가 아니다. 그 목적이 어떠하건 사랑의 완성과 별개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본론은 다양하다. 다채롭고, 변화가 심하며, 신비롭다. 쉽게 말해 사랑은 욕망의 충족, 본능의 발화, 인생의 축복, 소망의 실현, 운명의 장난, 달콤한 속삭임, 종족 보존 본능의 구현, 추억 만들기, 행복한 연애등 어렴풋하고 불투명하다. <나는 왜 사랑을 하는가?> 그리고 <좋아하니까 사랑한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단순하게 수학적인 등호 성립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나 사랑하던 당시를 떠나 시간이 오래 지나서 봤을 때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이 일단 달달하고, 향긋하며, 한없이 애매하기만 하다. 때문에 애정이든 어정쩡한 우정이든 섣부른 뻔트든, 아니면 진실한 사랑이든 그 모두를 우리는 그냥 사랑이라고 통칭하는 것이다. 1번이든 9번이든 그냥 다 사랑. 어느 청순한 아가씨가 절대 잊지 못하는 그런 유일한 사랑과 웬 플레이보이의 스무 번째 사랑을 견준다면 그건 너무 짠하고, 애잔하며, 통속적이지 않냐는 거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이라 명명해도 썩 어색하지 않은 은밀한 오묘함의 신호와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이와 같다. 미소, 눈인사, 환한 웃음, 들뜬 마음, 일편단심, 유혹, 윙크, 똑똑 마음에 노크, 팔짱, 애교, 최면을 거는 키스의 몸짓 손짓 눈짓, 하트 뿅뿅! 뭐 처음부터 빽허그? 큰일날 소리! 그러든 어쩌든 수채화 같은 연한 사랑이든, 오다 가다 만난 풋사랑이든, 그도 아니면 값비싼 명화 같은 찐한 사랑이든 사랑의 시작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스케치다! 빈센트 반 고흐가 까마귀와 태양을 대충 그렸을까? 그럴 리는 없다. 베토벤은 괴팍한 성격에다 연습벌레였고, 유명한 현대 작가들의 계기는 이랬을 수도 있다.
   첫째, 리더스 다이제스트 읽기
   둘째, 킨제이 리포트
   셋째, 52주 소설가 되기 같은 입문서를 우연히 발견.
   여기서 첫째는 생활이고, 둘째는 운명이며, 셋째는 뭐냐 하면 그건 다름 아닌 뻔트다. 맞다. 진짜 그렇다. 그래서 사랑도, 기본은 쨉이고 원리도 뻔트가 전부다. 드물게 지독한 예술혼과 미친 인생, 한량의 질주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처럼 뻔트는 닐이 대고, JS는 뻔트 사인만 보냈다. 물론 이미 닐은 그의 친구들 인맥에 섭렵됐다. 그네들 우정에 엮였단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 같지가 않은 법.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개가 받는다고 릴리의 마음은 누가 뭐래도 여자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욕심이 부엉이와 같을지언정 장비발에서 포르토피노에게 턱없이 밀렸다. 열세도 그냥 열세가 아닐 테지. 그래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의도도 그렇고 저의는 물론 순수한 마음까지 그의 역할은 사랑의 다리를 놓는 거였다. 그런데 어쩌다 사랑의 훼방꾼? 두고 볼일이다.



   2

   그는 릴리와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가 일하는 미술관으로 찾아갔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를 꼭 다급히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절박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약간의 심술이라고나 할까? 정작 포르토피노를 릴리에게 소개시켜준 사람이 누군데 사랑이 되든 추문이 되든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옳은 모범, 일반적인 수순은 그래야 했다. 그러나 닐과 릴리의 우정이 또 내내 마음에 걸렸다. 행여나 닐과 릴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포르토피노는 신부들러리도 뭣도 아니게 되니까. 설마 릴리와 포르토피노가 어정쩡한 사이라는 협정을 맺었을 리는 없고, 이 일을 어떡한담!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랑한 현실주의자였으나 한순간에 푸념의 실행자로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상황을 허세 예찬자와 몽매한 사랑꾼의 연애로 몰고 가겠다고? 아니면 자신은 뭣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뭘 좀 아는 남자를 한 명 더 끌여들여 상큼한 청춘 드라마를 더럽히겠다는 내막이라도 품은 것일까? 하지만 아직 사랑의 피날레에 대한 징조는 전무하다. 전개가 방방 뛸듯이 기쁘든, 절정이 속수무책으로 응~ 꼼짝없이 사랑의 환희에 굴복할 정도든, 아직은 그에 대한 근거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쨌든 JS는 공손한 전언자이자 사랑의 대변인 역할에는 뾰로통한 심정으로 거부 의사를 밝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와 릴리는 만났다. 가까운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면서 간단히 공복을 건너뛰었다. 그 다음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견디기 어려운 행복을 예감케 하는 방문자시네?」
   「응? 릴리가 요즘 뭘 읽고 있지? 아니면 유행하는 멜로드라마에 빠지기라도 하신 건가? 견디기 어려운 행복... 뭐라고? 오빠 부담스럽게 그러기야? 믿을 수 없는 행운을 선물하는 선구자 같으니라고. 얄미운 여주인공! (윙크)」
   「계속, 이렇게 가자는 거야? 응, 오빠.」
   「아니. 그건 아니고. 널 어린애 취급할 수야 없는 것 아니겠니? 그리고 말장난은 릴리가 먼저 시작했잖아. 오빠가 뭔가 긴요히 할 말이 있었는데 너 때문에 잊어먹었단 말이야.」
   「뭐! 뭔데? 응? 뭔데 뭔데? 오빠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고백이야 아님 폭로야? 아니면 뭐, 내 나이 스무 살, 그런 깜짝 선언?」
   「오빠가 용기를 발휘해 볼까? 그런데 그건 안돼. 왜냐하면 난 네게 용서 받아야 하니까.」
   「뭐라고? 왜, 오빠가 내 비밀이라도 캐낸 거니? 뭔데 벌써부터 안도의 한숨이야? 아 정말 궁금하네.」
   「그런데 있잖아. 나 떨려. 너무 망설여져.」
   「잡것!」
   「어?」
   「아니야. 아무 말도 안했어.」
   「......」
   그는 하는 수 없이 못 들은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빠. 숙녀 앞에서 위기를 모면할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오빠의 할 말을 듣고 뭐 오빠를 경멸이라도 하겠니, 아니면 오빨 때리겠니? 안 그래?」
   「응? 응!」
   릴리의 턱짓.
   그는 눈썹을 위로.
   릴리는 어깨 으쓱.
   그는 엄지와 검지로 C 모양을, 또 이어서 모든 손가락을 한 점에 모은 듯이 부르르 떨면서...
   「지금 수화 하니? 아님 뻔트 사이이니? 나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거 안 보이세요?」
   그는 릴리의 전례 없는 애원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쇠뿔을 단김에 빼기로 했다.
   「릴리, 있잖아. 그게 말이야. 음. 저번에 내가 잠깐. 너의 일기를. 읽었어.」
   「뭐?」
   엄지 척!
   릴리의 샐쭉한 표정.
   흥분의 열기.
   「아 그건 깜짝 놀랄 만한 우연의 장난 같은 일이었어. 난 또 톰이 쓴 건 줄 알고 말이야. 미안. 미안. 정말 미안.」
   그때 흐르는 J.C. 바흐의 오르간 듀엣 작품 번호 18번이 왠지 슬프게 들렸다. 그리고 릴리는 불현듯 어린아이 같은 쾌활함을 회복했다. 아주 잠깐 제이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욕망의 대가는 애통하다고. 그런데 어떤 고비라도 넘은 것일까? 릴리의 얼굴은 싱글벙글 제이크는 히죽히죽!
   「할 수 없지.」
   「릴리. 오빠... 때릴려는 거 아니지? 그렇지? 오빠... 용서하는 거다!」
   「듣기 싫다.」
   「이쁘면 다니?」
   「바보!」
   「내가? 그럼 넌 공주. 아, 진짜라니까. 정말이야. 응? 여기서도 릴리 저기서도 릴리.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지금 막 응? 장난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당신은 사람 설레게 하는 데 뭐 있군요!」
   「아, 그게, 음, 그, 어... 어떻게 입이 떡 벌어지는 비밀이라도 대령할가요, 아가씨? 분부만 내려주십시요. 책사는 제 천직이고, 지는 선망의 계획자이자 운명의 집행자랍니다. 전 어쩜 공주님을 위해서 태어났다고나 할까요?」
   「아 됐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 의뭉스러움 다분한 표정, 괴상함 가득한 분위기. 작품으로 감상한다면 모를까 직접 체험하기엔 영 달갑지 않은 기분.
   「보여줘.」
   멈칫멈칫.
   「정말로?」
   「응. 정말로!」
   머뭇머뭇.
   「여기서?」
   「응. 여기서!」
   「그런데, 어디를?」
   「뭐?」
   「아, 무엇을?」
   「뭐긴 뭐야 오빠 일기지.」
   「내 일기? 나 일기 안 쓰는데.」
   「그래서 안 보여주시겠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오빠.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렴!」
   뭔 소리지? 제이크는 잠시 착각에 빠졌다. 왜냐하면 추궁의 위력과 명분의 선명함 때문에 릴리가 잠시 남자로 보였으니까. 옅은 환상에 밑도 끝도 없이 돌입해버린 거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패배의 예감을 떠올렸다.
    멋진 농담과 뜬구름 잡는 허풍 때문이었을까? 너무나도 재밌고 웃겨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어야 옳은 일이었다. 듣는 사람이 평생 미소도, 여자도, 분위기도 모르는 목석 같은 남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저 심각한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재미없다면 그뿐. 지나간 사랑이야 아름다웠다지만 유감스럽게도 제2의 농담과 제3의 허풍은 타석에 들어서야만 하는 운명. 그 희망 찬 결과가 비록 쓰리뻔트 아웃이든 삼구삼진일지라도.
   그런데 릴리의 나직한 발언은 제이크의 환각을 쨍그랑~ 깨트리고 말았다.
   「써!」
   「뭘 써?」  라고 반문할려는 찰나!
   릴리는 노트북을 펼쳐서 그에게 들이밀었다.
   「오빠. 써!」
   「뭐, 그러니까 닥치고?」  라고 물어볼려다가 다음과 같이 물어봤다.
   「릴리가, 오빠 마음을 마침내 읽었구나.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는데.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릴리는 팔짱을 낀 채 제이크의 썩은 미소를 만끽했다. 그리고 제이크는 인간의 비애를 통감했다. 처녀의 마음을 몰래 엿본 죗값으로 뭐, 재능 기부? 이건 아마도 사랑의 시작 아닐까? 가슴 뛰는 사랑, 못 견디게 기쁜 인생의 노래. 그런데 앞에는 악마의 조소. 제이크는 숙명의 순종자.
   그는 왼팔에 새겨진 가짜 문신, 화살에 찔린 심장 문양을 매만진 다음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아. 카페 음악을 다른 걸로 신청하는 게 어떨까?」
   릴리는 말없이 노트북에서 프란츠 자버 리히터의 D장조 트럼펫 협주곡을 틀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폰을 낀 채 칼럼인지 일기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3

   내가 좋아하는 일들의 수효는 항상 풍년이었다. 관심 가는 대상 역시 언제나 만선이었으며,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꿈 또한 적지 않았다. 호기심과 감수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번갈아가며 날 들볶았다. 판타지에 대한 동경심이라고 왜 빠지겠나. 또한 낭만을 향한 춘몽 역시 언제나 아첨 일색이었다. 어떤 숙녀가 자길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간파할 때도 훨씬 지났다. 그러나 나는 허세를 떠받들질지는 않았다. 다만 허영심과 영합했다 뿐이지 뻥이 심하거나 허풍을 남발한 것도 아니었다. 남들 만큼만 열심히 살았고 큰 슬럼프가 있었지만 손가락질 받은 일 딱히 없었다. (거포여, 골-세러모니는 잠시만 자제해다오. 다 똑같은 쇼맨쉽과 환호성, 너무 단조롭지 않냔 말이오) 그러니까, 그래서 결국 남은 건 단지 부러움뿐? 그렇다고 내 인생에서 플레이보이의 3요소가 영 불만족스러웠다고 누굴 탓하랴! 친구 때문에 부정의 구름을 탔네 세상이 날 도와주지 않았네, 라면 그건 나이키와 아마존께서 기가 찰 노릇일 테니까. 그러면 헤르메스와의 우정은 깨지고 큐피트는 도망갈 테니까. 그처럼 대망은 커녕 소망마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였고, 푸념과 소원으로 가득 채울 일기마저 쓰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정답은 아마도 자책일 것이다. 그러니까, 과연 무엇이 문제였나 왜 나는 뻔질나게 사랑을 추종했지만 여복은 내게 턱없이 부족했나, 그래 봐야 연구 결과는 썩 신통치 않을 뿐. NC 같은 환상관에 출입하며, 어설프게 어른 흉내나 내고, 인생론을 펼쳐보며 사랑을 고민해 봐도 나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감이 아니었다. 점쟁이를 닦달해서 인생이 활짝 꽃 피며 출세할 수만 있다면 철학관으로 당장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나. 끈기 대신 변심이, 인내력보다 변덕이 앞서니까, 통상 겉멋만 따라하다 포기하며 단념은 쉬웠을 뿐이니까, 그래서 수박 겉 핥기 같은 인생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한눈팔기는 지금 더 흔하고. 하긴, 호감에서 비관으로 흐르지 않고 또 다른 호감 내지 심심함으로 가는 게 미덕이자 낙관적인 삶의 자세인 건 맞다. 다만 큰 재주 하나 없이 잔재주와 잔지식만 늘리며 장비에 대한 선망만 부푸는 게 문제겠지만. 그걸 혹시 이 세상에서는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알고 보니, 뭐랄까 나는 평균 이상이라고 하면 재수없으니까, 확인은 중요하지 않지만 일단 남들 만큼에 해당하는 허당의 3박자를 경험했다는 걸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됨. 적어도 냄새를 마약탐지견처럼 정말 귀신 같이 킁킁 맡던가, 바텐더 대회 세계 챔피언의 칵테일을 시음한 정도라고, 관대함을 배려할 이유가 왜 없겠냔 말이오. 최소한 패배는 많았으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일확천금을 주고도 불가능한 값진 인생 경험은 일종의 배우 수업 아니었을까? 물론 딱히 어디서 공증 받지는 못하겠지만, 얼렁뚱땅 어떤 전문가로 입봉할 수도 없을 테지만. 하오나 최소한 몇몇 분야에서는 명실공히 열정이 작게나마, 응? 잠시라도 충분했다. 더구나 타인의 호언은 거짓말이 적어도 반틈, 보통은 배보다 더 큰 배꼽 마냥 사은품이 더 비싼 잡지처럼 뻥이 다란 것도 진작 깨달았다. 그래서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라는 사춘기 소년 같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없었고, 응석도 하루 이틀이지 참말로, 뜬금없이 몽정기 정력가로 환생한 듯한 사랑만 맹목적으로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하물며 동물들도 낮잠을 자는데 무슨 탐정이라도 된 것 마냥 어설픈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는 일을, 그것도 내가? 직업인의 할 일을 빼았다가 자칫하면 상도덕 얘기가 나오게 됨. 바나나 껍질을 밝고 넘어지거나 새똥을 맞는 봉변은 어쩌면 다 그 때문임. 그와 같이 나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애인의 이름이 희망인 건 맞지만 뒤늦게 유치원복을 입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릴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릴리에게 포르토피노가 대체 어떤 인간인지 그 실체를 낱낱히 보고할 테다. 뿐인가? 닐의 온갖 비밀과 추문과 단점을 낱낱히, 아조 소상히 아뢰올 것이다. 누구에게? 아 릴리에게! 오오, 릴리가 보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건, 내가 릴리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것! 으윽~~! 하지만 이 내 순정을 어떻게 하겠나. 그래서 나는 당장 릴리와 만날 약속을 잡았고, 지금 그녀를 만나러 집을 나선다.



   4

   자칼이 나타났다. 자-뭐? 자칼!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읽었으면서 잘못 읽었나 시치미 떼지는 말자. 어른의 어리광은 아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심각한 월권 행위이니까. 자칼. 늑대과이면서 코요테처럼 생겼고 아마도 개와 비슷한 동물. 그런데 자칼이 한적한 동네에 왜? 그건 바로 JS가 사는 블록에 월이란 친구가 이사왔는데, 그가 키우는 자칼이 그곳을 탈출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칼이 사건의 발단을 암시하는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단지 보기 드문 특별한 친구일 뿐. 다른 건 없었다. 잠깐, 자칼이 나타났다? 비슷한 말이 있다. 바로, 늑대가 나타났다! 똑같네. 주어만 빼고 완전 똑같네. 그러고 보면 양치기 목동은 어쩌면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소년인 듯 하다. 왜냐하면 대충 봐도 최소로 잡았을 때 양치기견 1마리에 양 100마리, 그리고 푸른 초원과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로는 만족을 못한다는 말이니까. 안 그런가? 글쎄유! 그러니까 아름다운 부인 1명에 행복한 가정을 경영하며 자그마치 애마 100대를 보유한 유명인에 대한 스캔들은 이따금 오락산업을 떠들썩하게 도배하고, 미녀들의 수다와 한량들의 관심을 쥐락펴락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결국 가짜 뉴스로 판명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한편, 릴리는 제이크가 쓴 일기를 읽으면서 흐뭇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핸드백을 뒤지더니 지갑을 놓고 왔다면서 제이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는 기꺼이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그 찰나를 틈타 릴리는 제이크가 쓴 일기를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다. 나 오늘 고백 받았다나 뭐라나!
   제이크는 릴리와 헤어졌다. 물론 릴리와의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뭐야 또 어정쩡하게 아는 오빠와 아는 동생? 참 나!



   5

   다시 그는 따분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지? 꼭 뭔가를 해야 하나? 해야 함. 그처럼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야생마의 자유를 동경했고, 영문도 모른 체 경주마의 청춘을 갈망했다. 부푼 열망으로 충만한 인생관을 바람직한 인생과 일치시키고 싶은 막연한 욕구를 어떻게 길들이지 못한 체, 역으로 자기가 고삐를 잡혀버렸으니까. 그 세련된 기술을 보유한 기수가 대체 누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는 자기 사무실에서 자신의 팬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 웹페이지에 방문해보니 거긴 없어지지 않았더라. 자신의 팬페이지는 아담하고 깨물어줄 만큼 앙증맞을지언정 한마디로 건재했다. 유쾌한 수선화, 젊은 장미, 사랑스러운 연분홍색 작약꽃,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북숭아빛 카라, 아기자기한 발랄함과 귀여운 생기가 풍성한 들국화는 물론 데이지, 팬지, 히아신스, 베고니아, 과꽃... 그리고 은은하며 수줍고 은근 어여쁜 안개꽃 등등. 그처럼 사람을 식물로 비유하자면 거긴 꽃밭 일색이었다. 그러나 꽃처럼 아름다운 숙녀들로 대만원인 가운데 그의 팬클럽은 멈춘지 오래였다. 실은 회원수도 별로였다. 완연한 꽃밭인데도 불구하고 꽃밭은 꽃밭인데 그건 단지 허상에 불과한 꽃밭이었다. 꽃향기는 허사였고, 꽃들의 파릇한 실체는 허망이었으며, 꽃들의 기척과 자취는 허랑한 흔적에 지나지 않을 뿐. 그는 괜히 팬클럽에 방문했던 것이다. 인기에 대한 갈망은 실망과 절망과 책망으로 끝났으니까.
   그렇듯 일과표는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심심한 날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6
 
   JS는 한동안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라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야 마라의 개인사지만 왠지 마라의 전문가다운 면모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고나 할까, 사랑의 천재 앞에 연애에서 문외한이 나타나면 실례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단지 핑계에 지나지 않고, 아마도 새색시의 홍조를 빗대어 작품 속에서 가상 인물을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성숙한 숙녀티가 물씬 풍기는 샐리와 헤라 같은 마라, 그 둘이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해서 그는 미스테리아에 오랫만에 방문했다. 그런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마라가 남자친구 존티와 싸운 듯 했다. 샐리도 딱 보니 남자를 잘 모른 것 같고. 샐리는 겉으로 힐끗 봐선 첫인상이 완전... 아니 어릴 때 모범생과 썩 친하지 않았을 듯 보이지만 그녀는 연애 감정이 마음 속에 가득한 숙녀였다. 괴팍한 구애를 뿌리치느라 여전히 여성잡지1만 애독하는. 실은 그 때문에 뭔가가 더 꼬일 테지만. 아무튼,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보니 싸울 만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슬쩍 대화에 참여했고, 졸고 있는 미친 개의 꼬리를 밟는 당혹스런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함께 고민했다.
   「어디서 다퉜는데? 혹시 패밀리 레스토랑 그런 데 아니니?」
   「맞아. 거기야. 밝은 분위기였다고. 오빠. 그런데 싸웠어.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그 인간 머리끄댕이를 잡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라는 대사는 우리 엄마 꺼지만, 나도 그렇게 변하면 정말 어쩌지 라는 생각에 그만 울컥했어. 샐리. 너 뭐 하니? 티슈 하나 건네주는 센스, 몰라?」
   「어. 어. 여기. 여기. 그런데 언니 눈물 하나도 안 나네. 언니 핸드백에 있는 점안액 갖다 줄까?」
   「뭐라고? 그럼 이 상황에 코피가 나야겠니? 그러니까 늬가 남자가 없는 거야. 응? 이 상황에...」
   「그건 말이야. 음. 내가 봤을 때 서로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뭐가 중요한데?」
   「왜 내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 인간은 화부터 내냔 말이지, 내 말은.」
   「맞아. 그거야. 그거라고. 딱 그거야.」
   「혹시 존티가 내내 TV 본다고 뭐라고 했니?」
   「어머머. 맞아. 그거야. 그거라고. 오빠. 어떻게 알았어?」
   「그런데 넌 그 말을 1번 꼬고 2번 꼬며 빙빙 돌려서 말했지? OK! 또 2시 방향에서 생일 축하 노래 부르고 있었지?」
   「방향은 다르지만 그랬긴 그랬지.」
   「아마도 그랬을 꺼야. 존티는 그날 슬리퍼를 신었고, 마라는 모짜르트의 쾨헬 467번 2악장이 은은하게 들리는 그런 곳에서, 응? 격식을 갖춘 복장의 신사 숙녀들만 모인 데서 식사를 하고 싶었을 꺼라고. 생각만 해도 설레는 데이트? 그거 말이야. 그렇지 않니? 그런데 어머나 존티는 왠지 그날따라 피곤한 듯 하네? 어젯밤에 나 몰래 으쌰으쌰라도 있었나 싶게 말이야. 그래서 연인은 눈높이를 낮췄고, 애인은 삐졌으며, 결국 남자가 화내니까 싸웠네. 맞지?」
   「어머머. 어떻게 알았니? 딱 그랬어. 누가 아니래!」
   「심지어 존티는 그런 유형 아니니? 음 존티가 왼손잡이니까 스테이크가 나오면 나이프를 왼손, 포크는 오른손. 그렇게 스테이크를 먼저 다 잘라놓은 다음,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포크를 왼손으로 옮겨서 본격적으로 (딱)! 맞지?」
   「맞아. 그거야. 그거라고. 완전 그래.」
   「언니. 그런데 있잖아. 난 아까부터 이해할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왜 싸웠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하나도. 통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당신은 아시나요?」
   「아 보면 모르겠니? 그날 서로 장르부터 달랐잖니. 복장부터 달랐구만. 마라가 그날 어땠을까 생각을 좀 해 볼까? 옆에는 쇼팽 스페셜리스트, 앞 테이블에는 운동화 유명 브랜드의 디자이너 출신 무슨 본부장. 또 주위 손님들로 자본가에 조명 예술가니 학자에 과학자와 유명인들로 즐비하기를 꼭 바라지는 않았을 꺼야.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잖아. 그와는 정반대로 자칭 밤의 세계 실력자니 사랑의 해결사니 또 무직자에─무직자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괜히 혼자 멈칫하는 건 자존감이 내려갔다는 신호이니까─야심가와, 바텐더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혼자 말하고 혼자 박수 치는 어느 귀인. 그리고 이상하게 그날따라 이런 거지. 동네에서 유명한 주색가 한 분과 그 동네에 놀러온 그의 친구 색마의 행차. 응? 이미 상황이 불안불안했구만 그래.」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우리 마라가 존티를 어떻게 다그쳤는데, 설득? 인색한 야심가다운 태도? 인문학적 어조? 아마도 시작은 다정했을 거라고. 그럴 꺼야. 그러나 고양이가 말하면 강아지가 알아 듣니? 자꾸 고개만 갸우뚱갸우뚱 하던가, 아니면 짖거나 쫓게 마련이야. 그렇잖아? 또는 개보다 고양이가 더 크면? 그걸 뭐라 하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지! 사치품 광고를 보세요. 표범이나 치타를 바로 그래서 고급 브랜드에서 귀찮게 하는 거야. 출연료도 주지 않고서 말이야. 사치품이라, 그 말도 사회지도층이랑 똑같은 말이군. 전자는 소득 하위 기준, 후자는 옛날 기준이니까. 아무튼, 그렇지만 그 애정은 마라가 정말 오래 기다렸던 사랑이라고. 응? 그렇고 그런 연인이 되긴 싫었겠지. 누군들 안 그렇겠어? 그래서 마라는 어떤 화법을 구사했을까? (딱) 나름 상위 리그로 올라간다는 게 그만 여성잡지2 방식 화법이겠지. 왜? 엄마와 아빠를 참 오랫동안 지켜봤으니까. 맞지? 문제는 거기서부터야. 응? 거기서부터라고. 마라가 만약 진정한 여성잡지2의 타켓 연령층이었다면 아예 손을 놨을지도 모르지. 포기할려면 일찍 포기하는 게 현명할 수도 있으니까. 남자는, 남자는 문학적으로 설명하며 새로운 트로이아의 목마를 연상시키면 시선은 돌아가고 관심은 산으로 가게 마련이야. 그래서, 딴 여자 쳐다보지 말라고 하면 쳐다보지 않던? 아니거든! 응?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여자가 세이렌에 약한 것처럼 남자에게는 대놓고 인문교양서처럼 직접적으로 말해야 된단 말이야. 물론 간접적으로 띄워주면 왜 마다하겠나! 그런데 내가 어디서 들었네, TV에서 뭘 봤네, 어떤 교양서를 읽었는데 이런 얘기가 있더라, 내 친구 누구는 어쨌다더라, 또 어떻게 아는 언니가 이랬는데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응? 그게 이기는 비교가 아니라 결국 지는 비교야. 그럼 남자는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네. 물론 인내력이 대단한 마초나 아찔한 지성의 소유자도 있겠지. 하지만 막 그때가 되면 내 남자가 객관식 몇 번인가쯤은 아는 게 좋지 않겠니? 1번 참는다, 2번 경청한다, 3번 딴청 피운다, 4번 말을 돌린다, 5번 말을 빼았는다, 6번 짜증내거나 화낸다, 올커니 7번 웃긴다 등등. (뭐 놀고 있네?) 존티는 잘해줄 때 한없이 잘해주지만 막판에 아쉽게도 6번이란 말이지. OK, 빙고! 빙빙 돌며 간질간질 그렇게 알라딘의 램프와 마녀의 요술구슬을 슥삭슥삭 애무했는데, 그런데 글쎄 알고 봤더니 그건 하이에나의 발바닥이라거나 사자의 코털이더라? 그거라고! 응? 그거야~! 그게 아니라 딱 찍어서 머머하지마, 머머해라, 머머하지 않으면 안된다, 머머는 머머다, 머머증은 머머로 치료해라, 우리 머머하자, 라고 말하는 게 좋지 않냐 이 말이야. 한마디로 식사할 때 TV 보지 마, 찐한 사랑할 때 말하지 않기, 소풍 가서 일하지 않기, 그렇게. 그처럼 딱 직설적으로 말하면 될 걸 가지고, 빙빙 돌며 1번 꼬고 2번 꼬고 3번 채워서 꼬며, 틀고 비틀며, 그래서 아무리 듣고 참다 참다 끝까지 들어도 결론이 없네? 짜잔~! 두둥~! 커피포트는 발동이 걸리다 못해 부글부글 날 좀 봐주라며 절규를 할 수도 있단 말일세. 응? 그게 뭐냐, 뭐겠나 변신이지. 여자가 심신 분리가 된다면 남자는 변신을 하니까. 허허허허허.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연인이 가까워지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해 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다는 둥 어쩐다는 둥, 그럴 게 아니라. 응? 내가 아는 언니의 친구의 누구는 남자의 식사 예절이 어떻길래 훗날 어쨌다가 끝내 어쨌다더라? 직설적인 남자가, 상황도 상황인 데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이만저만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것도 연인과 동격이 아닌 상황에 뭔가 열세에 몰리고 또 몰리면 욱하는 거지 그냥. 왜 나는 이러쿵저러쿵, 왜 너는 어쩌고저쩌고, 그 시작부터 끝까지를 죄다 말하려고 하지 말고. 응? 딱 결론만! 핵심, 요점만 말이야. 정말 긴~ 수다를 들어줄 분위기는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그날 보니 마라가 슬슬 존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구만 그래. 존티도 알고 보면 멋진 남자잖아? 그런데 왜?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신경 쓰이는 쨉이 쉬지 않고 계속 날라왔으니까. 매에는 장사가 없는 거거든. 그때 그때 다르긴 하겠지만, 존티가 비교적 싫어하는 거 세 가지를 알려줄까, 알려주지 말까? 알려줄께. 것도 공짜로! 응? 오빠나 되니까 이런 얘기도 해주는 거야!
   첫째 간접, 둘째 간섭, 셋째 지는 비교!
   그런데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정반대로 얘기했던 걸로도 모자라 그날따라 존티를 유혹하는 숙녀들은 자꾸 그의 시선을 빼았네? 결국 존티 뚜껑만 열리는 결과를 가져왔군 그래. 짜증은 존티가 내고 상처는 마라가 받고! 그래, 안 그래? 응? 아, 그래 안 그래? 마라도 아마 알고 있었을 걸. 존티의 짜증 지수가 슬슬 상승한다는 걸. 전두엽 측두엽처럼 사람 얼굴 표정만 분석하는 뇌 부위가 바빠졌겠지, 왜 아니겠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다만 김 빠진 맥주처럼 본인 기분이 고개를 숙였으니까 명백한 계산 착오. 꼬리 아홉 개에 눈치 빠른 마라가 전조를 얕잡아봤군 그래. 그 분위기에선 TV도 보고 떠들며 약삭빠르기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안 그래? 존티는 참다 참다 50, 60, 70 계속 올라가는데 마라는 상심한 기대 때문에 10, 20, 30으로 잘못 판단한 결과가 아닐런지. 왜냐하면 완전한 '갑자기'는 드무니까 말이야. 결국 마라는 울고 존티는 미안했을 테지만, 마라 대신 뻔트 전문 대타가 나섰다면, 즉 남자들끼리 으샤으쌰였다면 얘긴 달라. 많이 다르겠지. 그럴 거라구. 슬그머니 간지럽히고 살살 깐족대며 꾹꾹 부아를 돋군다면! 그럼 아마 존티는 그랬을지도 몰라. 으쌰으쌰 잘 나가다 지갑을 땅바닥에 집어던졌을 수도 있다고. 그거야. 그거라고. 그래도 애정이 있고 사랑이 뜨거우니까 티격태격이라도 하지. 엄마들 봐 봐! 그거야. 사랑이 그렇다니까. 한때 나이트클럽 이름으로 괜히 그게 유명했겠니? 엄마한테 말하지 마! 뭐? 그럼 또 웃긴 모텔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통과!
   남자는 당근 아니면 채찍이야. 응? 줄 달린 치즈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서 줄을 살살 끌어당기든가, 아니면 줄을 꼬아서 묶고 던져서 걸리면 영차영차 끌어당겨야 한다고. 농심을 꼬신다고 끝이 아니지. 여심도 방심하면 안돼. 왜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칠 게 아니라 밀었다 당겼다,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그래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러면 나중 어떻게 된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참고 참고 또 참고 도를 닦고 하다 하다 기도까지 했던 남자는, 바로 떠나야지. 어디로? 파도를 타러! 뭐하러? 게임기 앞에던가, 공을 차고 어디다 넣고 때리고 소리 지르며 마시고 달리며 으쌰으쌰하러! 한 번씩 풀어주던지 스스로 참고 또 참았던 울분을 풀러 나들이를 갔다 돌아와야 하는 거라고. 엄마의 잔소리를 평생 들었는데 애인 말이라고 항상 축사로 들릴 리는 없단 말일세. 인생에서 내내 패자였는데 애인 앞에서 또 패자로써 버릇처럼 주늑들라고? 게다가 축사가 도통 길어야지. 안 그렇소, 상남자들이여? 내 말이 틀렸소? (손을 귀에)! 들린다 들린다, 오오, 통곡이 들린다. 손차양을 만들어 천리안으로 남정네들의 원성을 살피고 나니, 뭐 진짜 그렇다고? 집이도? 댁두? 형씨마저? 믿었던 선생까지 말이오? 이 세상의 뭇남성들이여, 예? 우리 모두 다 함께...... 하오나 괜히 또 으쌰으쌰에 나갔다가 외로울 수 있으니, 워─워─워! 아무튼 너무 길어. 너무 길다고. 심지어 결론이 뭔지도 모르겠어. 즐거운 청춘 시원한 바람 푸른 바다, 오오, 그대여 우리 함께 케익처럼 부드러운 사랑과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행복을 위해 다채로운 카네이션 꽃밭에서 운수 좋은 날 만나요? 뭐야 그게! 뭐냐고? 내가 옛날 어느 여름 날 바닷가에서 어떤 여인네를 꼬실 때 써먹다가 퇴짜 맞은 바로 그 방법이잖아, 낭자 어쩌고저쩌고. 아아, 뒷목! 오오, (눈을 지긋이 감고서 검지와 엄지를 미간에)! 얘가 얘가 날 여자로 아나,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그게 말이야, 응? 그게 말이야, 시적인 느낌인 건 맞지만 요청에 화답하는 결과는 상남자의 펑퍼짐한 불평이라고. 응? 간결하게 콕 찍어서, 언제 어디서 만나자. 얼마나 좋아? 처음에야 나도 나도 막 그러면서 머머한 척 그게 남자란 거, 잘 알잖니! 사랑은 '나도'로 시작했다가 '나는'으로 바뀌는 게 사랑이란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댈 어떻게 한 번 해 보겠다, 그게 사랑이지 왜 사랑이 아니겠어! 다만 행복이 너무 짧아서 문제겠지만. 사랑의 미로여,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사랑아, 어쩌고저쩌고 남녀의 사랑은 오묘한 것 신비한 마술 이러쿵저러쿵? 남자와 여자는 사랑이기도 하지만 앙숙도 그런 앙숙이 없지. 아, 그래 안 그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렇지만 또 숙녀의 기분을 맞춰준다고 허풍 대회 3관왕의 강력한 후보자답게 우리의 존티는 고고한 희망에게 결례를 범하는 일과 정략적인 친화가 부끄러운 까닭, 황금빛 리본 얘기를, 그녀에게, 살며시? 만약 그렇다면 그녀께서 퍽이나 좋아하시겠네! 응? 정녕 여자의 변심은 무죄인 걸까! 그러니까 어떤 남자에게 여자는 해괴한 미스테리일 테고, 또 다른 남자에게 사랑은 인생의 목표가 되는 거라고. 방탕에 대한 애착과 퇴폐에 약한 본능을 업계에서, 또 매가리 없이 생긴 미남과 내 말 잘 들을 것 같은 사랑의 바보를 상큼한 숙녀들께서 가만 놔둘 리가 없다고. 응? 반짝반짝 뿌잉뿌잉 샤방샤방 새콤달콤, 어떻게 꼬시고 어떻게 넘어왔든 일단 내 애인이 됐으면, 응? 어디서 물어왔든 내 남자가 됐으면 그 남자를 귀여운 허영심의 적임자로 낙찰시켰으면 말이야, 난 원숙한 조련사가 되어서 그때부터는 여성잡지1과 2도 좋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때로는 인문교양서처럼 말하는 법을 알아야 한단 말일세 이 친구야. 흐흠!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말이야, 다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말일세.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7
 
   말 한마디 없이 가난한 청춘에서 행복한 점잖음, 인자한 유복함으로 옮겨간 어느 부자들은 지구 한쪽에서 그런다. 우리에게 세금을 더 걷어달라고! (법이 뒤에서 우리를 든든히 받춰주는 우군의 역할이냐, 아니면 법은 현실이 잘 따라오기 벅찰 만큼 앞서 가는 리더이어야 하냐, 라는 주제는 논외로 하고) 그런데 다시 지구 반대편에서는 나의 만족을 빼앗길까 봐, 나의 다망함이 흠집날까 봐, 오직 부유함의 존속에 유익한 정당과 정치인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일도 있다. 그것도 일평생. 값진 부를 쟁취해서 난 이미 양반이니, 우정을 봐라, 수평은 해변에나 가서 보라는 세상이다. 씨를 누가 뿌렸든, 사과나무의 주인은 바로 나, 나머지는 둘 중 하나다. 동화의 나라에 살던가,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시장경제의 지배를 받아 돈을 쫓고 사과나무 그늘에 누워 입 벌린 체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윤리는 모르겠고 도덕은 초등학교에서나 배우는 과목일 뿐, 정의는 지나가는 개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다. 과장이 심했다. 괜히 중산층에게 미안해진다. 그래도 생각이 꽉꽉 막힌 어른과 구식 탱탱 묵은 사고방식으로 여자에게 뭔가를 가르칠려고만 하는 남자는 좋아할 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하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생, 험한 세상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고가 만인의 심연에 팽배하는 걸, 미네르바가 뭐라 하겠나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따지겠나.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늘 같은 서방 곧 남편에게 (절대) 복종한다, 어디서 여자가, 라는 구식 탱탱 묵은 사고 방식. 결코 옛날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진보인 척 차선으로 보수이자 속으로는 첩들이 즐비했던 과거를 동경하는 남자, 그분은 앞뒤 보지 않고 어떤 텃밭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다. 적어도 마음은 그런 실정이다. 여기서 보수라면 때로는 최선이거나 때로는 차선의 보수인지, 아니면 사극에서 하인과 노비와 애첩을 거느렸던 보수인지, 전자와 후자의 구분이 퍽 애매하다. 왜냐하면 내가 진짜 보수라는 외침이 쇼맨쉽이자 오락이고, 유행이자 마케팅이며, 건실한 포지셔닝일 테니까. 왜냐하면 내 친구 중에도 밤의 제왕은 있으니까. 왜 그런 현상이 드물지 않을까? 왜냐하면 현재 기준으로 보수인 구-정치성과 구-정체성으로 살아오신 '아빠 따라하기' 때문이다. 즉 자녀의, 아빠 따라하기! 동생이 그런다. 형의 세세한 습관 하며 형 뒷모습을 딱 보니까 완전 아빠랑 똑같네 라고. 그럼 형은 그럴 테지. 뭐라고!
   「뭐 임마?」
   핑~! 난 장래 절대 아빠처럼 살지는 않을 테다, 라는 사람을 제외하고(그런데 살아보니 웬걸?) 정치 관념은 후세에게 첫째 아빠, 둘째 현재성 그 둘을 오락가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아빠는 어쩌면 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첫째 평생 이상한 사람들에게 표를 행사하고 매번 후회했거나, 둘째 사는 동안 놀랍도록 돈을 못 버셨거나. 결국 우리들의 아빠도 선량하고 착하지만 말만 하이에나에 적당치 허세만 늑대였지 정글에서 단지 쥐과에 지나지 않은 것만 같다. 너무 측은한 진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딱 그런 실정이 절대 아니라고 그 누가 부인하겠나. 우리의 아빠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사셨길래 생각이 옛날에 머무르기 쉬운 것일까? 사고체계가 구식이라는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라, 미래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은 이상 무릇 사람은 내 생각과 행동의 양식 그 보편적 결과가 아주 진보적이기는 거의 어렵다는 뜻이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그래서 아빠는 어쩌면 여전히 30년, 40년, 50년 전의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이 그게 좋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옳은 일이다. 다만 타인이 그 옆에 가까이 가면 불편할 뿐. 괜히 착하고 점잖으신 어르신만 오해할 게 아니라, 주변의 우리 친구들만 둘러봐도 된다. 우리의 친구들 중에 어느 자리에 가서, 자기가 제일 말을 많이 하고 돋보이며 분위기를 주름잡지 못하면, 그러면 토라지고 삐져서 중간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버리는 친구는 없을 수가 없다. 내가 주인공 1등이 아니면 쌩하니 혼자서 집에 가는 남자! 우리 주위에 있다, 없다? 있다! 분명 있다. 그렇게 기가 꺾이면 한동안 꿍해서 연락도 안한다. 꼴아도 이만 저만 꼴은 게 아니겠지. 그러니까 어째서? 왜냐하면 내가 하면 분위기 좋게 띄우는 건데, 남이 하면 나대고 설치는 거니까. 안다-박사님의 마음에 안드니까. 내가 조명 받지 못했으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딱 그거다. 그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포커페이스도 일부러 안한다. 모든 걸 다 내게 맞추라는 뜻이니까. 내 마음에 안드는 걸 예의상 웃어주고 어쩌고 그런 허례허식 다 필요없다는 말이다. 무슨 사람이 금본위주의인가, 좋으면 남고 싫으면 떠날 수 밖에. 남아도 좋아서 남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분께서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 1인자로 주목 받지 못하면 얼굴 표정은, 아 말 말자. 만약 그런 분들이 어느 모임에 2명 이상이다, 싸움 난다. 분야가 어디다?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지도 모름. 그분이 요청하는 단짝 우정을 거절한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거다. 고상함이란 것도 그렇다. 난 우아함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머나 글쎄, 능글맞다니! 허세 지수 100, 승부욕 지수 100, 경쟁에만 특화된 우정, 마음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나중 잘살 수도 있는데 훗날 삐걱대는 사랑, 모두 같은 이치다. 원래 그런 유형이었다가 직간접 경험으로 수치를 낮추기도 한다. 스스로 겪어보니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절대 아니란 걸 깨닫게 되니까. 그런데 내 인생이 어디 남의 건가? 그런 분이 미꾸라지처럼 승승장구하다가 아 글쎄 자기는 비교도 안되는 지수 200을 만났다? 하수가 조용히 잊혀지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일 수도 있다. 고수도 미끼를 물면 낚이는 거다. 사이코머시기도 마찬가지다. 1퍼센트가 있으면 0.1, 0.01... 차원이 다른 분은 오히려 조용한 법이다. 그래서 비슷한 친구를 만나게 되거나, 아예 주변에 예스맨만 두거나 하는 그런 몇몇 사례가 있다. 그건 타고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사람 착해 보이길래 결혼에 골인했는데 나중 알았다? 원래 남녀는 판이하게 다른데, 그분이 특별한 분이라니. 부부끼리 어디를 가더라도 거리를 두거나 모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다 그런 거다. 특별한 음식의 은-뚜껑을 열었는데 어떻다거나, 포장을 풀러 박스를 열었는데 스프링 달린 권투 글러브 하며, 각각 비슷하면서 다를 테지만 프로의 세계란 알고 보면 적지 않게 그런 식이다. 1등은 몰라도 아차상과 인기상과 신인상 역시 드물 테니까, 때문에 프로의 세계란 냉정한 거다. 그러므로 그곳은 치열하다 못해 비열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때로는 행복한 개인이자 때로는 지금 인기 방영중인 대하드라마, 그리고 미래인이 보는 사극에서 불쌍한 민초는 말로만 쥐락펴락한다. 어떻게? 머머계라고도 했다가 머머판이라고도 했다가! 친구에게는 놀고 있네, 남자친구나 남편에게는 잘 한다 잘 해, 건너편을 보며 잘들 논다, 어딜 보며 하는 말은 또 그런다. 참 잘 돌아간다고! 그러나 미운정 때문일까 동종업계 직업 의식 때문일까. 삐그덕거리는 것 같아 보여도 지켜보면 어떻게 어떻게 또 잘 넘어가고 잘 돌아간다. 그 심한 예는 그거다. 야구에서 벤치클리어링! 지켜보는 관중은 동공이 확대되며 사태를 지켜본다. 어떠면서? 팝콘을 우걱우걱 막 씹어먹고 맥주를 캬~ 연거푸 마시면서! 경기장에서 멀리 보이건 집에서 편안히 TV로 보건 장면은 난동이다. 일단은 난장판이고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러나 카메라 기술이 좀 좋나. 잘 보면 그런다. 삐─ 삐─ 악역의 선봉은 이름값 되고 서열이 낮은 분 먼저. 신삥은 분위기 잡기. 아이스하키에서는 아예 역할이 정해져 있다. 그렇지만 그분들 사이에서 중진과 원로는 복화술은 언제 배우셨는지 글쎄 눈치껏 속삭인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 자 자 우린 동업자다 뭐다, 뭐 적당히 하고 들어가자고 말이다. 설마, 여기서 끝을 보자? 대인배라는 데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실까. 그 허세 다 어디 갔나요! 다혈질이 알고 보면 귀엽다. 리모콘 버튼 누른 사람은 따로 있는데 뭐야 난 로보트? 그분께서는 야구를 하실 게 아니라.. 역시나, 어디서 스카웃 제의 임박한 거다. 그처럼 프로가 절반은 쇼고, 그 쇼의 자본은 오락산업이 굴리며, 오락산업의 규제는 표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만든다. 때문에 표를 많이 얻기 위한 삶과 정치학과를 졸업한 이른 출발, 뭘하든 초심을 잃지 않는 인생, 인기가 식었을 때 평점들이 근소하게 일치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이다. 비단 정치 뿐만이 아니라 프로의 세계란 게 그렇다. 일에서는 매정하고, 사랑에 대해서 다소 무정하거나, 일 외엔 무심해야 할 만큼 알고 보면 냉혹하다는 점. 체력과 마음 모두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질 수 밖에. 그런데 전성기는 롱런하기 쉽지 않고, 슬럼프는 귀하지 않으며, 열화와 같은 2군과 꿈나무들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데다 한눈팔기 쉬운 유혹도 많고, 명성이 쟁쟁한 현역들이라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 왜 없겠나. 그래도 놀이보다는 일이니까, 비전문가가 아니라 전문가니까, 물 들어왔는데 노를 젓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냉정할 수 밖에. 어디 그 뿐이랴, 꼬마들도 속은 다 있다. 그분들이라고 세상 살이가 쉽지 않다는 걸 왜 모를까.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아마추어의 세계에 남는 일도 있다. 또는 원했던 프로 진출이 좌절되면 합리화하거나 다른 방도를 모색하던가, 곧 그 다음이란 게 있다. 아마추어의 대표적인 예가 무엇인가, 올림픽이다. 프로의 예는 스포츠 프로 리그와 스포츠 복권과 외교, 아마추어는 올림픽과 우정과 사랑?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속 깊은 어른들이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그렇다고 아마추어 리그라고 언제나 깨끗하고 고결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더 나은 진짜 기쁨은 아마도 취미다. 취미의 끝이 무엇일까? 영원한 환희도 드물게 있겠지만 보통은 그거다. 머머 접습니다! 그런데 장비 얘기가 뜬금없이 왜 나왔지? 아무튼, 어느 분야의 속성을 지켜보면,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면 알게 된다. 유난히 자주 무의식적으로 애용하는 몸짓이 뭐다, 유별나게 자주 반복하는 말이 뭔지는 1범주 안쪽으로 접근하면 금새 파악된다. 내가 봤을 때는, 늬 말마따나, (대답할 때) 예-예-예-예-예. 왜 그런 말이 유독 자주 쓰이고 돋보이는지,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다. 아 진짜 그런 분 못 보셨습니까? 자기는 신부들러리나 병풍 아니면 절대로 상대 안하는 사람요? 웃기는! 허걱, 뜨끔? 물론 그 자체로 죄악은 아니다. 단지 허세 지수처럼 골목대장 증세가 50 근처냐 아니냐, 완전 심하다면 자기 병수발 드는 딸랑이와 깔깔이들을 위해서 나머지에서 응분의 보상을 실행하는가가 중요할 뿐. 연예인병은 연예인만 걸리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 역시 운명일 테고. 그러니까, 저 친구가 여기에 뭘 타고 왔지? 가만보자, 뭐야 저런 아니 페라리잖아, 이런 젠장! 흐흠, 자네 학교는 어딜 나왔는가? H 나왔습니다, C 에서 무얼 전공했습니다, 뭐-뭐...뭐라고! 이 자식이... 허허허허허! 뭘 모르는 남자, 속 좁은 남자, 생각이 구식 탱탱인 남자, 그 3가지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일까. 흐흠, 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하게 자부하긴 아마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인생 선배인 이상 내가 최소한 따듯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고, 어디서 고루한 부장님 취급 받으면 당연히 내 기분이 편치 않다는 것. 그건 결코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또 장래 나는 딸의 남자친구에게 '너네 부모님 뭐하시니?' 라고 묻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야 멋진 남자가 되고 싶은 청춘들의 자연스러운 욕심이다. 그래서 은연중 어떤 배경을 말하게끔 하는 것보다는 딸이 스스로 잘 알아서? 그 정도 이기심이야 인간적인 감정이자 돈독한 유대감이 왜 아니겠나.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우리가 중심을 잡고 무분별한 변화를 경계하며, 잠룡을 선발하고, 하늘이 내린 대권을 견제하며 보좌하지 않는다면! 만약 우리마저 딸랑딸랑 언제나 물개 박수만 친다면 사회는 10년이랄지 1세기를 앞서갈려고 하며, 폭주하던가 어지럽던가 혼란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만 보수고, 나만 진정한 보수이며, 우리야말로 격조 높은 일관성과 탄탄한 보수성을 견지한다는 논리네! 단지, 우리만! 분석하면 90퍼센트는 다 그래프에서 제1범주에 해당하는데, 따따부따 따따부따 (설레설레)! 주입식 교육을 받고 폐쇄적이고 과도하게 통제된 사회에서 성장하여 재밌는 지옥과 심심한 천국은 어떻다는 농을 하건, 그 반대의 교육 방식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서 더 재밌는 인간계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건, 아빠는 아빠 스타일일 수 밖에 없다. 아울러 A에서 보수가 B에서는 표면적으로 진보에 가까운 듯 보일 수도 있고, B에서 보수가 A에서는 0.5세기 전의 사고방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A와 B의 차이가 어디 적은 차이일까. A에서 보수는 그냥 보수인데, B에서 보수는 '보수의 보수'를 보수라고 하는 걸 내내 지켜봐야 하는 일. 피곤한 사회이지 않을 수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이 있다. 국사는 어쩔 수 없었고, 세계사는 틀렸다는 생각! 혹시 그건 옹졸하고 편협한 시각 아닐까? 이른바 큰일 한다는 사람이 속이 그렇게 좁아서야 쓰나. 무슨 상남자들 으쌰으샤도 아니고, 어리석고 쩨쩨하며 시시한 허당 대회라도 출전할 일 있나. 애들 배우는 산수 같은 그런 관념대로라면 그 역의 논리 역시 합당하지 않을 이유 왜 없겠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학자와 정치외교학과 교수요? 정치인 비서의 졸개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애들 장난 같다. 야 우익수 나 대신 늬가 우리 회사 출근해라, 그 말과 똑같다. 무엇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대의의 잇속에 내가 포함된다는 가정하에서만, 나는 그 일리가 옳다고 생각한다 라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게 옳다? 현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당사자가 되어보니까 그게 어디 마냥 기쁘고 한없이 즐겁웁디까? 보수의 보수의 관점이 방종이 아니라 자유라면 그 선수 역시 대를 위해 희생되는 소가 될 수도 있다, 라는 명제도 성립한다. 다른 대의를 위해서는 그 자유가 드라큘라의 만찬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사극으로 적잖이 증명됐고, 가상으로써는 허구로 무수히 재현됐다. 더군다나 인간은 시간의 기원도 알아냈고, 인류의 시초도 명문화했으며, 생물학과 천문학처럼 신의 영역에도 근접했다. 살면서 그런 일을 간혹 구경하기도 한다. 정치 중심지에 살거나 어쩌다 그곳에 갈 일이 생겨서 거리에 내가 떴는데, 어머나, 무신호로 특급 의전 및 호위와 함께 기나긴 자동차 행렬이 지나가는 일. 국빈이나 누군가 방문했구나 라고 예상한다. 그건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옛날에 고을의 경찰서장만 되도 그랬다. 그분의 출퇴근 시간에 말단 경찰관은 그야말로 비상이다. 왜냐하면 직속상관의 출퇴근이 무신호로 완수되어야 하니까.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그때를 회상하며 오늘 술잔을 드는 당시 삥바리들, 기억이 새록새록할 것이다. 물론 옛날 일이다. 그런데 그걸 뭐라 하냐, 법이 아니라 관례라고 한다. 현재가 아닌 언제적 관례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래야 한다? 세상에! 언제적 사고방식으로 지금을 사시는 분이길래... (설레설레)! 실제 사극만 봐도, 유럽 역사만 봐도 지금의 주지사-도지사-시장-군수 정도면 명칭부터 달랐다. 도대체 뭐라 불렀을까? 왕이라고 불렀다, 왕! 왕은 직책이 왕이니까, 그러므로 왕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렇다고 작은 단위에 왕은 딱 하나, 끝? 그럴 리가 있나. 몇몇만 빼놓고 왕과 똑같은 권세를 누린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그 세세한 권력이 어땠나를 문학으로 보자면 빅토르 위고를 읽어보시길. 뿐인가? 지역에 따라서는 암행어사라는 제도도 있었겠지. 당시 다수였던 피라미드의 저층은 정말 죽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극만 봐도 돌쇠의 사랑이 뭐 어떻게 됐다거나, 테스 같은 여자 하며, 돌쇠와 마님의 불륜이 사랑인가 에로인가는 허허허 참 어중간하다. 지금의 사극이 당시는 현실이었으니까. 물론 교왕의 권한이 막강했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교황이 그날따라 적당히 청결하게 꾸민 빈자의 맨발을 씻겨준다. 구식은 다 나쁘고 전통은 모두 고루하다는 말이 아니라, 변화의 바람은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자연스러웠단 뜻이다. 옛날이 좋았던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제1전성기가 만료된 고전음악, 무슨파 무슨파 명화의 부흥기, 익히 아시는 문사들 하며! 쉽게 말해 옛날에는 마차의 시대였다. 마차나 가마가 길을 가면 길을 비켜야 했다. 누구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자동차와 인간, 누가 힘이 센가? 당연히 자동차가 세다. 따라서 자동차가 간다 길을 비켜라? 자동차는 강자이고 인간은 약자니까 고로 인간아 길을 비켜라? 각자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만, 약자만을 위한 세상이 되서도 않되겠지만, 비교적 시대적으로 지금은 약자를 챙겨야 하는 세상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고 최면을 걸며 따따부따 외쳐야만 하는 옛날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아마도 주입식 교육의 단점이 그래서 특히 부각된 것만 같다. 그런데도 난 싫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보고 듣고 외치겠다, 인간의 일이든 만들어진 신화든 전설의 고향도 다 싫다? 거 참 말 많네! 그러나 대체 어디까지가 수용 가능한 극단의 쇼고 표출 가능한 사견이냐, 그 또한 분명치는 않다. 그건 어쩜 문명의 발전 속도에 의식이 발빠르게 적응하기 벅찬 이유를 깨우치게끔 우리의 의표를 찌르며 옆구리를 건드리는 하늘의 기표일 수도 있다. 첫째 다양한 생각과 다채로운 인성, 둘째 강제성이 있는 법, 셋째 강제성이 없는 신앙. 여기서 이 셋의 한계가 무엇인가는 명확해보인다. 때문에 미래는 달라야 한다. 고로 그 셋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지의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라는 합리적 의문 역시 타당한 이치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는 타임머신이다. 그래서 내일을 긍정해야 하는 건 맞지만 때가 되면 어떤 철이 가까와 오고, 사람들은 황금을 쫓으며, 행복은 나비처럼 시시각각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좌우지간, 하물며 <가마와 화살과 칼>에서 <호박마차와 총과 산업혁명>의 시기를 건너뛴 채 현재에 이른 지역의 정치권, 광대와 마술사와 협잡꾼에 상인으로 대성할 자질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유독 그 업계에 많이 진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가난한 예술가는 어른들의 특징에서는 생각의 완고함 대신 놀라운 통찰력과 슬기로운 지성만, 청춘에서 배운다면 으쌰으쌰가 응애응애로 들릴지라도 꿈을 향한 열망과 사랑과 인생을 고민하는 앳된 기상, 또 어린애로부터 천진난만함과 하나를 가르켜주면 열을 아는 천재성과 말랑말랑한 호기심을 본받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아빠의 DNA를 물려받은 나는 최소한 반틈은 아빠와 판박이일지도 모른다. 아빠의 생각과 말과 지혜와 사상이 그대로 내게 전해진 것으로도 모자로 평생 보고 배운 거지. 심지어 먹고 사는 문제와 더불어 아마도 2군에 내려가 있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야망마저 계산에 넣는다면? 나이 들면서 정치에 등 돌리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경우는 그래서 생긴다. 애국심이란 단어가 왜 나쁘겠냐마는 보수란 단어의 어감이 왜 그처럼 들리는 것일까? 나는 보수고 너는 보수가 아니다 라고! 내가 진짜다 라고! 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보지 마 보지 마! 애들이나 어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공공연히 퍼졌던 동성연애만 해도 그 주제를 그럭저럭 편히, 단지 말을 꺼내는 데만 200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머머설은 일상이며,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타임머신을 동경함도 자유자 교양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이다. 예술이요 문화이자 매스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딱 그렇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그 원인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각박한 현실과 동화되기는 어쩜 힘겨울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지망하는 이상은 복잡한 세계와 약간은 가는 길이 다를 것이므로, 따라서 아차-하면 민중은 옛날 말로 사회지도층 곧 돈과 권력의 선도자에게 (은밀히? 정당하게!) 조종될지도 모른다는 것. 적어도 광고와 오락산업에는 길들여지니까 말이다. 보수라는 낱말도 사랑처럼 애매한 명칭이 되어버린 오래다. 간접 정치의 한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이 먼저인 건 맞겠지만, 하나 같이 양반과 백작과 신사와 (부유한) 보수킹만 바라면 대체 나머지는 누가 하나? 1세기 전의 보수는 틀리고, 반 세기 전의 보수킹은 옳다? 모순! 왜냐하면 그 시각으로 보자면 옳은 후자가 틀린 전자에 속했으니까. 사실만 봐도 시대적 정치성은 미래가 아닌 사극으로 역주행했으니까. 일관성은 필요없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보고, 듣고, 말하고 싶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과거는 과거지, 일부 과거는 어쩔 수 없고 일부 과거는 미화하는 건 지혜롭고 현명한 관점이 아니다. 보수의 보수에서도 나름 인품을 갖추고 호감 가는 분도 있다. 저분이 득세한다면 나중 지켜보고 싶다, 그런 인물도 찾아보면 있지 왜 없겠나. 그런데 꼭 어쩌다 보면 이방 역할이랄지 내시, 탐관오리를 연상케 하는 건 아닐까 같은 일이? 뭐 대하드라마 찍나! (설레설레)! 하긴 이방과는 내 주변에도, 내 친구 중에도, 우리 주변에도 있다. 이 비율과 그 비율이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이방과 코메디언은 어쩜 종이 한 장 두께 차이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절대 쉽지 않은 분야, 그게 바로 정치다. 특히, 현대 정치! 넌 임마 어떻게 된 녀석이 그것도 못하냐, 야 나와 나와, 이런 멍충이 같으니라고. (그런 다음 본인이 해 보니까...) 효과음~~! (누가 시켜줄 리도 없겠지만 그냥 웃자고 하는 말로) 쉽게 생각해도 연예인, 유명인, 예술가... 이런 거 하라면 하겠는데, 그런데 정치가? (갸우뚱갸우뚱) (설레설레)! 그 만큼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역할이 막중하니까 유혹과 죄인과 논란도 많을 수 밖에. 아무리 그래도, 연예인 자질이 돋보이는 일부 정치인들은 그래서 자기가 무슨 스티브 발머인 줄 안다. 일부는 시끄러울 행동과 말이 무엇인가 골라서, 그 가치를 따져서 그것만 한다. 30년 전 활약했던 보수에게 큰 절을 하고 걸핏하면 옛날 얘기를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심심하면 박물관을 들먹이고 걸핏하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같은 편마저 면박을 주기 일쑤다. 하루라도 험담을 듣지 않으면 잠을 못자는 사람도 뭐 있을 수는 있겠지. 그러니까, 소음은 튀는-마가 제일이다. 괜히 그분들 때문에 어려운 길 가는, 한 자리수 지지도 직업인들마저 한 푸대에 담는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못 들겠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생쥐였다면 콱 그냥... 워─워─워! 게다가 미래의 주인공이 누구인데 젊은이는 정치에 무관심이요 오히려 노인의 최대 관심사가 그것이다. 사극에서 사회지도층의 연기가 인상적으로야 보인다지만 그건 당시 백분율로 1퍼센트의 1퍼센트의 2퍼센트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피라미드의 최상층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하겠지만, 쉽게 말해 부자는 누가 득세해도 큰 상관없다. 별다른 걱정이 없다. 차라리 유니폼 입은 사람들이 힘들다면 몰라도. 피라미드의 판을 짜는 건 옛날 말로 사회지도층이고, 그 설계도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은 평민들이 한다. 그 중간에 누가 있냐? 졸부가 있고, 한량이 있으며, 그런 데 관심 하나 없는 평범한 낙천주의자가 있다. 이것 또한 모순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과 지식과 상식이 풍부하며 부유한 교양주의자는 세상을 아니까 정치를 논하며 내 세금을 더 걷어달라고 해야 하는데, 실정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이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물론 그게 권리고 자유이자 평등이지만. 그런데 역으로 선량하고 성실하지만 옛날 말로 평민은 시키면 시킨대로 (결과적으로 보자면) 다할 수도 있고, 아예 관심이 없던가, 아니면 (성-머시기 그런 뜻이 아니라) 착한 여자는 온순하고 순진하며 어떤 장르를 좋아하니까 말하면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 왜 지구가 타임머신이겠나, 지금도 어느 시골에 가면 어느 집에 앤디 워홀의 자화상이 걸려있지 않을까? (과정과 원리가 그렇다 뿐이지 이걸 만약 비꼬는 걸로 받아들인다면 몹시 섭섭하고 서운한 일) 옛날에는 신분이라도 따졌고 오늘 날 사석에서 인품을 거론한다지만, 다만 졸부면 그만인 세상. 부디 나까지? 이건 아니다. 정녕 이건 아니야. 자, 그래서 나도 덩달아 인기와 황금만을 추종하자? 이번엔 선동말고 딴 걸 해 볼까! 그래도 일단 밤의 방탕과 탕자의 타락은 피하고 보자. 그러나 문명의 이기와 호사의 목마름, 풍요로운 대망을 실현한 행운아들의 가르침이 차고 넘치는 세계.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바다로 떠나기도 귀찮다. 북극곰을 살리는 좋은 일은 이미 누군가 하고 있다. 그러면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JS는 생각했다. 고로 그는 깨달았다. 난 아직 더 배워야 한다고. 난 아직 뭔가를 더 보고 듣고 느끼며, 믿은 다음에 더 속아봐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그래서 그는 동물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 델을 만나러 갔다.
   그는 델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화상 통화로 델의 변화를 보니 뭐야 이거! 지금이 어느 땐데 그 옛날 히피를 흉내내는 걸까? 상태가 이거 원...! 델은 약속을 깜빡 잊은 채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며 자기 집에서 푹 쉬었다 가라고 했다. 뭐든지 마음껏 쓰고 보고 먹고 입으라며 자기 살림을 거덜내도 된다고 했다. 누가 거덜내라면 못 거덜낼 줄 알어? 허허허허허! 그건 그렇고, 애지중지 돌보던 동물들은 통 보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잡아먹었을 리는 없고, 델이 동물로 변했을 리도 없고.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튼 그는 델의 집을 통채로 차지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으나 당분간 휴가를 떠난 델을 대신해서 그곳에서 정박하기로 했다.
   그날 하루는 델의 집 냉장고가 탐욕의 돌파구였고, 별다른 일 없이 하루를 마감할 것처럼 시작은 순조로워 보였다.



   8
 
   암만해도, 그는 천재 예술가다. 그런데 그가 간직한 재능은 이랬다. 화가의 권태, 음악가의 타성, 작가의 나태, 허당계의 유혹, 플레이보이의 무명, 칼럼니스트의 가난까지. 그러나 실연은 어제 얘기. 내일은 다를 것이다. 그러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오늘의 꿈과 희망을 위해 '행복한 일하기'와 '재미있는 놀기' 사이에서 항상 갈팡질팡하기 때문. 하지만 환상의 추산을 탐지하며 행운의 발명을 추측하는 일로 내내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놀기 싫어서 델의 집에 놀러온 것이다. 그런데 델은 부재중? 빈집에서 델이 된 듯 살아보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은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몇 시간이 마치 며칠인 것처럼 델의 공간을 염탐하며 그는 알게 됐다.
   첫째, 이 일이 은근 아니 딱 완전, 막 진짜 진짜 재밌다는 것.
   둘째, 델은 심약한 풍운아이자 감성적인 로맨티스트라는 것.
   그의 책상 위에 막 덕지덕지 포스트잇과 사진들이 붙여져 있으니까. 거기 씌여진 문장은 이랬다.
   꿈의 쾌청함을 요망하고 행복의 탐탁함을 소망하자.
   뭐라고?
   또 집에서 혼자 술 마시고 쓴 게 아닐까 의심스런 낙서도 보였다.
    진짜 꿈은 평생 놀고 먹기요, 가짜 꿈은 열망으로 똘똘 뭉친 광마일 테지만, 보아하니 멋지게 사는 둥 마는 둥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 이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누구한테 선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아 기록이 있구나. 귀여운 친구 세라가 선물함 이라고. 녀석 이젠 연애도 하는군, 라고 그는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델이 시집을 읽는다? 해가 이미 서쪽에서 뜨고 있는 건 아닐까? 이번 여름에는 진짜로 남반구에 가서 살아봐야 할까 보다.
   어머나, 이건 또 뭐야? 시집에다 낙서도 적어놨네!
    1.인생이란 패배에 익숙해지고, 연애를 학습하며, 떠오르는 공상을 말이든 행동이든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그러다 황당한 신비주의를 믿고 사람에 속고, 대망을 거의 정말 잡을 뻔 말 뻔 하다 결국 놓치는 것.
   2.사랑을 위한 사랑이 꼭 아름다운 사랑의 성공작만큼 행복의 현현을 보장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창창한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핑크빛 성에 너무 일찍 눈을 떴거나 때 이르게 조숙했던 어른들은 때론 이처럼 조언할 테니까. 인생에서 사랑에 지각하는 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3.내가 좋아하는 D는 여심의 생동감과 여체의 아름다움에 너무 애착한 나머지, 그는 결국 흑심과 밀착하고야 말았다. 어저면 사랑마저 집착에 지나지 않을까 라고 의심할 경지에 이르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쭈! 이것 봐라. 푸하하하하하하. 아이고! 얘 알고 보니 아 글쎄, 낭만주의자? 그래요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어요. 하긴 우리들끼리 진지한 얘기를 한 적이 뭐 얼마나 있었나?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델에게 문학적인 재주가? 맙소사! 그 마초가? 세상에나!
   반나체 여인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벽에 떡하니 붙어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 의외였다. 그는 정말 델의 핀잔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걸 몰랐어? 어떻게 모를 수 있지!」
   그야 뭐, 세상사를 논하고 사랑을 점치며 아름다운 문학을 꿈꾸는 건, 델의 사생활이고! 델의 새로운 정체성을 탐색하며 은밀한 즐거움에 도취하는 건 내 자유다? 살짝 미안했지만 언제까지라도 함구해야 만할 비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제이크의 그 거리낌없는 탐닉 행각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아마도 오늘 잠 다 잔 건가?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음.
   그는 한두 가지만 구경하고 그만둘려고 했다. 처음에는 진짜 그랬다.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심결에 빠져들어서 깔깔, 낄낄, 껄껄 뜻밖의 기쁨과 신선한 발견의 흥분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의외의 놀라움이 뻥뻥 터졌고, 순수한 기쁨이 빵빵 터졌다. 도무지 멈출 래야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델은 나처럼 자기 안의 그분을 흠모하는 게 아니라, 델은 때때로 둔갑술이라도 부리는 것만 같았다. 혼자 놀면 심심하니까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델이 인형이나 여성잡지나 화장하기에 기대겠나. 아 정말 고독한 그 마음을 에로비디오에만 의탁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이크는 이미 치졸함의 경지를 너머서서 우정의 파탄 그 조마조마한 경계에까지 근접하고야 말았다. 그야 예의상 하는 말이고 그것도 이해 못하는 우정이라면 진작 여장을 하는 게 낫긴 낫을 꺼다.
   아닌가? 아니다! 여자가 속이 좁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비유가 세련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여자는 속 좁은 여우고 남자만 대인배일까? 그럴 리가 있나. 그럴 턱이 있겠나. 만약 여자는 속 좁고 남자는 대인배라면, 대인배는 왜 그렇게 뚜껑이 자주 열리나! 아 글쎄 대인배라면서? 포커페이스는 뭐 진짜로 포커할 때만 필요한 건가! 지는 비교가 대인배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니까, 그래서 대인배는 비교 자체를 싫어할까? 속된 말로 솔직히 까놓... 리본 풀고 포장을 연 다음 말해서, 대인배는 이기는 비교에 환장한다. 대관절 다혈질이 하는 일이 뭐냐, 속 좁은 여우들 꽁무늬나 쫓아다니는 일 아니냐구요. (떡!) 이 세상의 모든 숙녀들이여, 내 말이 틀렸소? 아 말이야 바른 말 아니냔 말이오.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네? 이러고서도 우리 인간들이 만물의 영장이라며 큰소리칠 수 있냐, 그래도 되느냐 이겁니다, 제 말은. 이러고서도 남자로 비유되는 동물들인 늑대와 하이에나와 개에게 우리가 챙피해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이러고서도 여자로 의인화되는 여우와 양과 고양이 앞에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떳떳한 척 군림해도 좋은가, 이 말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아니예요. (쿵!) 숙녀여, 이게 어디 그냥 조용조용히 묵과할 일에 지나지 않을까요? 네? 우리는, 우리는 이 중차대한 일을 그냥 보고만 넘어갈 순 없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되니까.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땅!)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뭐 보자기로 아시나! 이게 어디 쉬쉬하며 넘어갈 문제냐, 제 말은 그 말입니다. 우리는, 대인배의 소심함을, 대인배의 말 같지도 않은 허세와 말도 안되는 허풍을, 절대,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요. 그렇다고 꼭 허영의 왕국을 건립하자, 그런 얘긴 아닙니다만, 이제 드디여 때가 되었습니다. (빡!) 우리는 많이 기다렸습니다. (빡!) 우리는 오래 지켜봤습니다. (뻑!) 우리는,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럼요. 어디 이래서야 아름다운 세계─즐거운 인생─신비한 사랑, 그게 가당키나 하겠냔 말이오, 네? 그러니까 사랑 노래를 부르면 뭐합니까? 풋사랑만 사랑인 줄 아는데! 안 그렇수? 안되겠소. 여러분! 이 얘기를 듣는다면 그대 여자들이여, 우리 행동합시다. 네? 아 이참에 우리 모두 다 함께......
   워─워─워!
   으쌰으쌰 다음의 경우의 수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어쨌든 주제는 그게 아니니까, 위스키 3병이냐 수다 3시간이냐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일단 넘어가자. 통과!
   나도 무선 마우스를 쓰는데 얘도 무선 마우스를 쓰네? 아 그래도 노트북은 너무 깔끔한데! 원래대로라면 델은 노트북 겉에 덕지덕지 스티커로 도배를 해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연애하는 델이라면... 그는 마음 놓고 델의 사생활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처럼 그는 델의 집에 몰래 침입한 곰이자 자칼이며 너구리였다. 그러나 분명코 델에게 허락을 받았고, 결단코 델의 마음을 녹일 수단은 무궁무진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괜찮다는 말!
   그러다 제이크는 끝내 소파 구석에서 웬 스타킹을 발견했고, 거실 구석에서 호피 무늬 블라우스를, 심지어 패션쇼에나 나올 법한 여자의 대리석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마당에서 보게 됐다.



   9

   어라~! 설마. 녀석이 결혼까지...?
   그건 그렇고 그는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으로 델의 노트북만 딱 구경하고 탐색을 끝마치기로 했다. 특별한 경험은 그만하면 충분했고, 궁금증이란 마법도 한밑천 해소되었다. 그런데 델의 노트북은 상표가 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델은 팔짜의 개척자란 말이군. 그야 어쨌든 백조의 노래는 대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승리의 포도주에 도취한 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노트북에 귀하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이상한 영상 때문에 뭐 군침이라도 흘린다는 뜻은 아니고.
   뭐야, 이건!
   델의 노트북은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는 그냥 노트북을 덮을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딱 한 번만, 진짜로 딱 한 번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는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빈칸에 입력했다.
   「난비밀번호」
   룰루랄라~ 환상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인님!
   델은 정말로 비밀번호를 그렇게 설정해놨고, OS는 켜졌으며, 델이 특별히 설정해놓은 인사말에 그는 코 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핑 돌 뻔 하다 말았던 것이다.
   그는 며칠 전 이런 일을 겪었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어두운 방에다 병 따개를 놓으러 갔는데 어두껌껌한 방에서 스탠드 옷걸이를 유령으로 착각해서 기겁을 했었다. 와, 소름이 소름이... 장난 아니었다. 그런데 딱 그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전율감은 제이크를 가만놔두질 않았던 것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 누나의 책상 서랍 안을 구경하며 신비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좀 더 성장하여 중학생 때는 형이 자기 책상 서랍 안을 검사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얘가 뭔가 이상야릇한 걸 숨기고 있지 않을까 라는 듯이. 그런데 당시 그는 우리 반 친구에게 빌렸나 어쨌나, 야한 잡지를 어떻게 구해다가 책상 서랍 안인가 밑인가에 숨겨놨었다. 그때 형한테 걸릴지 어떨지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되어 그는 이제 다시 초딩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동이 되어 미지의 희망을 꿈꾸고,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기분을 되찼았던 것이다. 오오, 그러니까 부활! 이를테면 우주는 신비요 지구는 과학에다 시간의 기원은 신화이자 사랑이 기적이라면, 이와 같은 짜릿한 탐정 따라하기는 환생 아닐까?
   그래서, 은근히 궁금했던 어떤 이상한 영상 파일 같은 게, 쑤두룩하더라? 그런 일은 없었다. 컴퓨터는 대단히 깔끔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별다른 게 없었다. 즐겨찾기도 몇 개 되지 않았고, 회사일에 관련된 파일들만 많았다. 그렇게 별다른 게 없길래 그는 컴퓨터를 끌려고 했다. 그는 솔직히 실망했다. 그러다 딱 하나 뭔가를 발견해냈다. 그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델의 일기였던 것이다. 이건 뭐랄까 제이크는 직업이니까 글이 안써지는 걸 예민하게 생각하는데, 델은 글이 멈추지 않는 걸 고민하는 느낌이랄까. 뭔가 그런 게 있었다. 읽어보니 말이다. 자기는 글을 쓰기 싫다고, 나 일 안해, 라며 강짜를 부릴 수는 없으니까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델은 알고 보니 괴물 신인급에 해당하는 글쓰기 소질이 있다고? 그는 끙끙대며 전전긍긍함이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좀 괜찮은 수준의 글을 찾아냈다.



   10
 
   젊음의 거리는 아름다운 환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기분파 숙녀는 나이트클럽에 입장하고, 낭만파 연예인은 TV에 나오며, 가난한 예술가는 단지 한발 늦게 토끼처럼 유행을 뒤쫓는다. 투우장에 목마는 없고, F사 P사등 애마는 턱없이 비싸다. 장밋빛 로맨스는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한 박자 늦고, 산책하는 강아지는 냄새 맡느라 중년의 주인을 무시하기 바쁘다. 젊은 그대의 마음은 아마도 광고 속에 있고, 플라톤의 이름만 아는 이 시대에 사랑은 즉흥적이다. 그리고 행복은 노는 건지 입는 건지,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건지 자꾸 헷갈린다. 환상관과 도박장과 경마장 그리고 무도회에서 사람들의 기분은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다. 소비와 함께 하는 현대에 새콤달콤 키스는 다양한 환희며, 뿌잉뿌잉 윙크는 짜릿한 쾌락이고, 등번호는 가짜에 가슴 뭉클 빽허그는 다름 아닌 주색이다. 별로인가? 별로다! 다시 시작하자. 아니다. 재미없다. 환상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는 사랑의 바보가 인생을 알겠나, 사랑과 친하겠나. 세상에서 보고 배운 게 뭐 대단하다고. 그런 천치에 백치며 머저리는 초딩이고, 그의 사랑은 사춘긴가?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나 머리에 꽃 한 송이 꼿았다-네. 재수 좋다. 아니, 재수 없어. 염치 있네. 아니, 염치 없군. 그러니까 말이야, 허영의 탐구자와 자유로운 교양가는 물론 아가씨 꽁무늬만 졸졸 쫓아다니는 늑대들마저 깨물어 베어 먹은 사과 모양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런 무늬 브랜드의 노트북을 쓴다고? 그래도 된다. 왜 안되겠나. 나만 쓰라는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건 바로 오디세우스가 헬레네에게 준 수정구슬, 곧 미래를 보는 눈을 뜻한다. 또 다른 의미도 있고. 그렇지만 실은 나도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식임을 고백하고 싶다.
   라~고 나는 천진난만한 감상주의자처럼 공상했다. 소상히 아뢰옵자면, 벅찬 젊음 치사한 꿈 비뚤어진 인생 아니꼬운 세상, 라며 불평하는 유치한 천덕꾸러기는 사양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델의 생일 날 델에게 델표 노트북을 선물했다. 그러나 오빠는 통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내가 별로인 건가? 아닌데. 델은 특히나 내 뒷모습을 보면 획 도는데! 아니면 델에게 또 다른 여자가? 하긴 델이 미인계에 약하지. 선녀라도 잘만 꾸며놓으면 아마 꺼뻑 넘어갈 걸? 왜 아니겠어! 그는 참말로 사랑이라면 환장하는 인간 남자니까. 한마디로, 정상! 그래도 그렇지 날 아직까지 고이 놔두다니.. 그 인간을 그냥 당장...! 어쨌든 나는 더 연구해야 한다. 델을 더 탐구하며 그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지 심도 있게 고심해야만 한다. 왜? 왜냐하면 그 녀석은 내 꺼가 되어야 하니까. 그러나 또 모른다. 그가 나한테 딱 넘어온 다음부터 내 마음이 바뀔지 말이다. 실상 나는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델은 다를 꺼라며 안심했다. 그런데 왠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세-하다. 그러니까 델도 드라마네. 난 원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 어쩌다 관심 가는 드라마가 생겨도 처음에만 혹하다가 몰입도가 처참히 하향한다. 그래서 몇 편 보다 말기 일쑤다. 그러면 델도 롤러코스터 같은 남자가 아니란 말인가? 하긴 난 롤러코스터 같은 남자는 사양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회전목마 같은 남자니까. 만약 델이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난 그의 마음만 받을까, 아니면 그의 키스만 이끌어낼까, 것도 아니면 백허그 딱 한 번으로 만족하고 끝낼까.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날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남자가 자기 속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는데, 그 인간들이 말이야, 어? 다들 숙녀를 어떻게 한 번 해 볼 생각이나 하니까 그게 진짜 문제라고. 설마 델도 지금 발정기란 말이야? 뭐 언젠 아니었겠어! 하긴 델의 여자 관계를 보아하니 1단계, 2단계, 3단계로 딱 정해져 있단 말이야. 뭐야, 지금 그 인간 혹시 딴 여자 만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델도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를 이미 어느 정도 너머선 게 분명해. 만화영화 같은 상상을 좋아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림책은 그만큼 동경하지 않는 낙천주의자라지만, 응? 아무리 봐도 내가 아까워! 응? 내가 훨씬 아깝다고! 그동안,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참았는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구보다, 무엇보다, 적어도 델보다 내가 많이 아까워! 그럼. 더군다나 난 남자를 좋아하는데 델은 이제 보니 델이 좋아하는 건 여자가 아니라 바로 동물이네. 그러니까 내가 넘버2도 아니고 그 인간에게서 2군으로 밀려났던 게로군. 이럴 수가! 내가 어쩌다 이렇게 감이 떨어졌지? 그게 다 누구 때문이다? 심심하면 사랑에 들떠 사교계에 드나들며, 치료되지 않는 아티스트병 때문에 무턱대고 스타의 후임자에 이름을 올렸던 과거의 나 때문이다. 맞다.
   결론은 나왔다. 나도 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제 작전명은 정해졌다. 일명, 거울! 부제는 반사. 델의 친분 만큼만, 내 친화력은 델과 동일하게, 그것이다. 이미 글러먹은 연애는 아니지만 이런 어정쩡한 연애, 어떤 기승전결이 펼쳐질지 이미 다 아는 나니까. 내가 뭐 남자 밝히는 응큼한 숙녀도 아니고 말이야. 안되겠다. 움츠러든 자존감을 올려야겠다. 자, 이제 무도회에 얼굴을 비춰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 가자. 요한 쉬트라우스 3세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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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이건!
   그럼 아까 책꽂이에서 봤던 무슨 명문 여학교의 졸업 앨범은 델의 여자친구 게 아니었다고? 속옷과 스타킹과 롱부츠 하며... 그럼 이 집은 델의 집이 아니고, 이 노트북도 이 일기마저 델이 쓴 게 아니란 말이네! 그런데 이 기분은 도대체 뭐지? 오오 이런 느낌 처음이야! 제이크는 이 미지의 아가씨 때문에 그녀를 더 알고 싶은 애정에 포근히 빠져버렸다. 신비로운 요술에 홀린 듯한 사랑에 빠졌고,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걸 사랑이라고 해도 된다면!
   그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런!
   아마도 집주인이 들어올려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물품들을 챙겨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갈팡질팡하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원래 이랬다. 탐나는 매력을 간직한 새콤달콤 깜찍-숙녀와의 사랑을 꿈꿨다. 동시에 신나는 모험을 간구했고, 언제나 행복한 이상을 탐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결과는 그와 같은 이상적 애인의 그림자만 품게 됐다는 것. 황홀한 꿈 속에 앙증맞게 빛나던 소원, 어쩐지 어쩐지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게로군. 그런데 실현되긴 실현됐는데, 어째 거 왜 영 뭔가 잘못 실현된 기분.
   그는 여차여차해서, 어쩔 수 없이 톰과 제리에 나오는 바로 그 톰처럼 이러이러해서 옆집으로 건너갔다.
   참으로 빨리도 델의 집에 입주한 것이다.



   12
 
   그는 인생을 배우고, 사랑을 믿었으며, 행복을 누렸다. 환상을 꿈꾸고, 신비를 상상했으며, 낭만을 추구했다. 희망의 찬가를 좋아했고, 열정의 대상은 매번 바꼈다. 그러나 노래 부르고 춤 추는 즐거움도,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기쁨도, (돈을) 쓰는 쾌감과 소비하는 쾌락을 뛰어넘기는 힘들었다. 꽃들이 반기고 별들이 노래하는 조증은, 탐스런 과일이 풍성한 인생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허풍은 통 늘지를 않았고, 허세는 불행했으며, 허영심만 미풍과 풍문을 양쪽에 꿰찰 뿐이었다. 그러면서 오빠라는 말에는 늘 귀가 쫑끗! 열광스런 황금마차는 동화책에나 나오는 것. 그러니까 선동가냐 허당이냐, 작가냐 한량이냐 라는 정체성만 의심스러울 뿐. 신나는 전개가 펼쳐질 수 있는 그런 뚜렷한 대책은 항상 부재중. 이 일을 과연 어쩌면 좋을꼬! 그런데 문득 '열려라 참깨!' 와도 흡사한 그런 놀라운 일이 그에게 발생했다?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델의 집에서 행복한 기분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호기심이 자유로워야만 했다. 그런데 결과는 1박 2일 도둑놈 신세였다니!
   그는 따분함이라는 복병은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런데 문제는 범법자가 됐다는 점. 하지만 달리 큰 소란은 없었다는 것까지. 이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시련이었다. 아니다. 완전 재밌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판이 뒤집어진 거지. 가슴이 두근두근 딱 좋았는데, 드라마의 장르가 느닷없이 바꼈으니까. 그는 어쨌든 얼굴을 모르는 어느 숙녀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천하에 둘도 없을 행복과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의 애틋함을 그녀 몰래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실토한다? 쉽지 않았다. 델과 자기는 우정인데, 어쩌면 델과 그녀는 사랑인데,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델의 친구가 도둑놈?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딩~동!
   아, 그녀다!
   나가보니 진짜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오오, 실망스럽지 않았다. 전혀!
   아마도 이건 숙명일 것이다. 여기서 도망가면 남자도 아닌 거지.
   「어머머! 델... 오빠는요?」
   「아, 전 델의 친구입니다. 델이 없는 동안 집을 지켜주기로 해서...」
   「그렇구나. 델 오빠의 친구. 그럼 오빠라고 불러야겠군요? 맞잖아요! 아빠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죠.」
   「오빠. 저 좀 도와주세요. 집에 누가 들어온 것 같아요. 어서요!」
   그렇게 해서 제이크는 낯선 여인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과거의 자신 그 유령의 정체와 흡혈귀의 흔적을 탐지하는, 현재의 자신이라니! 그렇다고 솔직히 전후좌우 어떻게 된 일이라며 사정을 전부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릴리의 일기를 읽고 또 자기의 일기를 릴리에게 선물하고 그 정도의 윤곽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이크는 그녀의 일기를 읽었고... 그는 그녀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이만저만 옹삭한 게 아닌 아주 까다로운 빚. 고분고분하게 해명하고 차분한 어조로 침착하게 잘 설명을 하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처음 만난 여인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조목조목 사려 깊게 설명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럴려면 자기의 과오를 전부 내 탓이라고 밝혀야만 했다. 왜 눈치없이 멈추지 못했는가 까지 설명할 수는 있는데, 그녀가 이해해줄지는 미지수였다.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델의 입장이 또 이상하게 되어버린다. 이건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였다.
   아아 나는 세상만사에 능통한 속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바보였다니! 저런 머저리 같은 놈!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새 서로 정이 들었나?
   결국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고, 그녀를 잘 설득시켰다. 웬 괴짜가 낯선 여행지를 여행하다가 술 취해서 빈 집에 몰래 잠깐 들렀다 갔을 거라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무엇으로? 애타는 애정 속태우는 사랑, 애처로운 여심 딴청 피우는 농심으로. 델을 핑계로 그는 그녀와 급속도로 가까와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이었다. 비비안? 속옷 브랜드 이름인지 값비싼 옷 명칭인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델은 필요없었다. 델은 허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푼수고 신부들러리를 하기에도 변변치 못한 놈이었다. 사색가에게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는 모험욕은 언제나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고비를 넘겼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흥정하는 모험가로써 괜찮은 주인공으로 낙점 받았다. 또 스타로 환대되는 현몽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델의 정력을 측정할 일은 없겠지만 비비안의 애정은 측량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벌써부터 희망 찬 운명관을 발전시키는 행복한 분위기. 곧 그는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럼 이제 항구의 하늘에 사는 별들의 이상을 탐지해야 할까, 그녀의 마음을 빼았아야 할까. 그것만 남게 된 것이다.



   13
 
   사랑은 너무 많고, 황금과는 친하지 않으며, 다정한 여복은 남의 얘기다. 이상의 무지개는 모르겠고,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상쾌한 멜로디는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그는 에메랄드빛 지중해로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날씨가 별로였다. 그러므로 떠나지 말기로 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집에서 수영장 파티를 열 것인가, 유쾌한 소풍을 떠날 텐가, 아니면 일광욕과 파도타기를 즐길 것인가로. 그 결과 고심 끝에 결정했다. 추근댐과 집적거림이 아닌 상쾌한 전망이 있고, 여유로운 관망이 좋은 해변으로 떠나야 겠다고. 즉 3번이 간발의 차이로 낙찰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하지만 일광욕은 지루했고 해변 분위기도 그만그만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 반대로 떠났다. 멀리 떠나지는 않았다. 교환 일기를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릴리를 만나러 미술관에 갔고, 또 우연히 지나가는 척 하면서 비비안을 만나러 갔다.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틈틈히 들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자기 팬사이트 회장인 롭이 언제 만나자고 했지만, 언제 밥 한 번 먹자며 만남을 살며시 미뤘다. 남성잡지 사장인 조지의 칼럼 청탁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더라도 아무 까닭도 없이 내내 바깥으로만 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최근 어떤 삶을 살았는가. 아침에는 동심, 오전엔 열정, 4시의 권태, 이어서 저녁에는 향락을 뿌리치기. 그리고 밤에는 흑심. 그 다음에 꿈은 야한 꿈? 언제쯤 사랑의 시를 짓고, 누구와 멋진 인생을 논할 것인가! 그는 다시 일하기 위해서 사무실로 출근했던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음표들이 떠다녔고 시상이 웃음꽃을 피웠으며, 귀여운 아기 천사는 꽃밭에서 상큼한 요정들을 유혹하는 몸짓으로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 반대였다. 일상은 다시 심심한 발단으로 복귀한 것이다. 잃어버린 꿈, 이루지 못한 대망, 한물간 취향 그런 것들.
   그 순간 전화가 왔다.
   「늬 집 앞에 누가 와 있던데. 지나가다 봤어. 몰랐니? 뭐라더라. 약혼녀라고 하던가? 아닌가? 아니, 이혼녀라고 했나 과부라고 했나. 아무튼 누가 널 찾아왔다구.」
   그는 비비안과의 데이트는 나중으로 미룬 채 급히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뭐야, 아무도 없잖아!
   그는 깨달았다. 속았다는 걸.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칼을 사육하는 월에게 비슷한 장난을 친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뭐야 그러니까 달콤한 복수? 그는 미리미리 릴리와 친한 숙녀들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기로 했다.
   집에서 허탕을 친 다음, 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이 잠궈지지 않았네? 자기가 깜빡 잊고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했다. 그러든 어쩌든 사무실은 그대로였다.
   단, 책상 위에 새 일기장이 놓여진 것만 빼면!
   이건 혹시 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누가? 설마 비비안일 리는 없고. 일단 넘어가자 라고 그는 생각했다.



   14
 
   그 후 아무 일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델에게 연락이 왔다.
   「비비안과 인사했지? 그런데 있잖아. 비비안이 집에 도둑이 들었데. 없어진 건 전혀 없는데, 비비안이 뭔가 찝집해서 탐정을 고용했나 봐. 곧 있으면 지문 감식 결과가 나온다던가, 아마 그런 것 같아.」
   「뭐? 정말이야?」
   「아니! 뻥이야! 푸하하하하. 재밌지?」
   「아, 장난치지 말고. 진짜냐고.」
   「농담이야. 장난이라고. 그런데 왜 정색하고 그래 이 친구야? 아무래도 너의 반응이 수상한데. 왜 그래? 웃거나 시큰둥해야 정상인데, 왜 반짝 성을 냈지? 너가 진짜 비비안네 집에 몰래 들어간 거 아니니? 에이, 설마! 아닐 꺼야. 그럴 리가.」
   「뭔 소리야? 그만 놀려. 만나기로 해 놓고 내뺀 건 너라구. 그냥 넘어갈 생각 마. 응?」
   「알았어 임마. 내가 그렇게 쫀쫀한 놈은 또 아니잖냐. 아, 그런데 있잖아. 비비안이 널 몹시 보고 싶다고 하던데.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의 마음을 빼았은 거니? 나한테도 좀 알려줘. 어떻게 해야 여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지를 말이야. 응?」
   그는 델과의 통화를 마쳤다. 상상은 자유이긴 하지만 공상은 병이었다. 신기한 인연 및 놀라운 만남이 혹시 쇠고랑으로? 소심한 열정 대담한 실행 그건 모두 델이 시킨 거나 다름없는 건데... 혹시 다 델이 작전을 짠 거 아니야? 뒤틀린 심사는 다시 그를 한없는 불안 속으로 내몰았다. 그는 정말 사서 걱정하기엔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나의 사랑은 결코 허언이 아니며 내 인생 역시 허풍이 아니다. 고로 나는 허당이 아니다? 아니긴! 그는 벌써 델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지? 우연 치고는 너무 치밀한 엇갈림인 것만 같았다. 참 딱하다 아니 할 수 없는 인기와 빌털털이 신세를 절대 외면해선 안된다며 그는 스스로에게 일침을 가해도 모자를 판국에, 누명이 아니라, 명백한 범법이라...! 어떡하지?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델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는 다시 몽상가가 되어 코끼리 날개를 펄럭이며 저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이카루스가 됐다. 그랬다가 이카루스의 생애가 해피엔딩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가면무도회를 상상했다.
   뭇남성들이라 하면 새로운 숙녀에게 친절함과 다정함과 찬미를 선물하기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어떤 인간적이고도 숙명적이자 뭔가 타고난 듯한 슬픔을 기억하기 때문. 왜냐하면 첫사랑의 소네트와 아름다운 사랑의 세레나데를 (곧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시적이냐 아니냐, 습관적이냐 아니냐, 그에 따라 바람둥이와 뭘 모르는 남자로 구분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는 플레이보이의 3박자가 굳건히 자리잡을 테고. 그건 마치 빛의 3원색처럼 만사에, 만물에, 만인에게 공통된 본능일 뿐. 다른 말로 하면 페라리를 탄 큐피트, 에르메스를 입은 비너스, 무대에 선 박카스인 것처럼. 그러나 최고의 사랑은 오직 딱 하나. 곧 현재의 사랑과 현재의 행복인 것. 그래서 우리는 CD 패션모델과 까레라를 어떻게 한번 양쪽에 꿰차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안델센과 라 트라비아타와 상대성 원리도 좋지만 1등은 1번에 1인이니까 가벼운 유희와 즐거운 오락을 가까이 해야만 한다. 가령 그 중에 두 가지. 첫째 복권업의 행운, 둘째 점쟁이의 세계관. 고로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든 JS는 새파란 청춘이 광속으로 성숙해지기 전에 철없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모한 도전 끝에 미남의 사인을 받는다고 시작이 전부였다. 그처럼 그가 이번에 선택한 색다름은 그랬다. 바로, 릴리와 비비안의 대면! 자기만 쏙 빠지고 여자들끼리 결판을 지으라는 무대책 작전.
   유능한 야망가의 천재적인 재주가 없다면 노력만이 살길이다. 그는 릴리에게 갖은 공을 들였고, 비비안도 애타게 연락과 선물 공세와 섬세한 마음으로 소셜 네트워크까지 공략했다. 아울러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그는 우정의 다리가 되어 릴리와 비비안의 친교를 설정해놨다. 있었는지도 모를 전성기의 부흥은 꿈도 꿀 수 없고, 지금은 비비안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그러다 그는 신기한 묘안을 하나 생각해냈다.
   그는 낑낑거리며 고민한 끝에 간단히 최근의 불안불안한 고뇌를 해결한 듯 하여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 어떤 열렬한 애정이든 행복한 미소─아름다운 육체─어여쁜 마음의 정복이든 그는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방심으로 시작된 소심한 모험은 의심으로 변했다. 그건 델의 농담으로 다시 상심으로 바꼈고, 그는 그녀들의 변심을 놓고 자신의 연애운을 점쳐보기로 한 것이다. 딱히 좋은 방법이라거나 지극히 합당한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지성의 아찔함을 느낄 수도 없었고, 단지 얄팍한 (개?)수작일 뿐이었다. 그러고서도 공상하기의 천재라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또 썩 그렇게 나쁜 방도도 아닌 듯 했다. 아무래도 릴리와 정분이 나든 비비안과 애정 행각을 펼치든, 그건 그에게 과분한 사랑일 테니까. 결국 릴리 말마따나 제이크는 <잡것>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들의 사랑을 애타게 기대하며 기다리는 후보들 쑤두룩한데, 참 잘 돌아가는 드라마였다. 하긴 점잔 빼며 어정쩡하게 어장 관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쁜 노래 젊은 희망 꽃 피는 봄날, 아무리 그래도 결을 봐야 궁금증은 해소될 테니까. 베팅하며 판을 키우고 박자가 바꼈으면, 판을 엎을 게 아니라 결과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바라는 게 애틋한 간청일지 아닐지, 우리가 좋아하는 게 천상의 행복과 닮았는지 아닌지, 어쨌든 육체의 고귀함이 대리석 때문인지 아닌지를 알고 봐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일기인지 연애 편지인지 애매한 손편지를 릴리와 비비안 앞으로 보냈다. 물론 릴리에게는 편지 안에 비비안 이름을 넣었고, 비비안에게는 릴리의 이름을 적었다. 그래서 약속 장소에 나오면 그녀들끼리 담판을 짓는 거고, 아니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도 아니면 그녀들은 작정하고 그의 넘버1이 되기 위해 장기전에 돌입할 테고.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하!



   15

   릴리(비비안)에게.
   마음은 꽃 피는 춘삼월, 의욕은 계절의 여왕 5월, 환히 웃는 기대는 연분홍색 장미요, 뭔가 쎄한 예감마저 헤비메탈 그룹이 노래하는 락-발라드 11월 겨울비였다. 그런데 뭐야, 결과는 강아지가 탐내며 애지중지 정성을 들여서 단물 다 빠진 웬 개뼉따귀? 이런, 젠장!
   그러고 보니 나 제이크는 인생에서 성과가 빈약했다. 보아하니 발단 항상 발단이었다. 말하자면 시작하자마자 해피엔딩인 셈이지. 다시 시작이다. 이제부터 꿈을 기억하며, 사랑을 기록하고, 애정을 믿고, 이상을 구체화하면 된다. 일이든 놀이든 둘 중 하나가 잘되면 다른 하나도 잘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할 말이 떨어졌어도 나는 할 일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미리 겁먹지 말고 결과야 어떻든 나는 그러기로 했다. 소처럼 일하고, 꿀벌처럼 난봉을 부리기로. 단, 후자는 뭔가 애매하니까 그 열정이 향할 분야는 차차 정하는 걸로! 그러나 아직 정해진 계획표는 없었다. 그러니까,
   로맨스와 신비로 가득한 기쁨의 행진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꽝이 뻔한 복권 사기, 보고 또 본 다큐멘터리와 심심한 오락과 식상한 영화뿐인 TV 보기. 결론 뻔한 나이트클럽, 결말은 애초에 다 아는 으쌰으쌰. 그런 익숙한 레파토리 말고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일상이 이어지던 중 나는 한 여인을 알게 됐다. 그녀를 알게 된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너무도 떨려 눈 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눈부신 요정이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 비너스의 현시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거야말로 한없이 보고 듣고 상상만 하던 바로 그 사랑이란 말인가? 하늘은 내 은밀한 소망을 들어주신 걸까? 어떻게 이런 매혹적인 존재가 지금 내 앞에! 오오 주피터여! 사랑은 유일한 축복, 행복은 달콤한 인사. 릴리(비비안)를 알게 되어 너무도 기쁘다. 방방 뛸 듯이 즐겁다. 이제 진짜로 내 인생이 재미있게 행운의 황금마차를 타고서 저 놀라운 내일로 달려갈 것만 같았다. 릴리(비비안)와 함께 하는 시간은 지고의 천국이 분명했다. 릴리(비비안)를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듣고, 읽고, 생각하면 떨리는 그 이름 릴리(비비안)! 오오, 영혼의 고결함이여! 아아, 사랑의 신비로움이여! 달콤한 공상 탐스런 단꿈, 그것은 릴리(비비안)와의 만남으로 환희의 낙원 같은 현실로 실현되었다. 릴리(비비안)에 대한 내 마음은 아마 저 하늘이 가장 잘 알겠지? 아니야. 저 바다도 저 하늘도 저 신비로운 별님들도 내 마음을 모르실 꺼야. 아아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를 보고 싶다. 안되겠다. 릴리(비비안)를 만나러 가야겠다. 지금 당장!
   난 진정 릴리(비비안)을 만나기 전에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린 애인 사이니까. 오오 대리석 대리석!
   그녀가 온다 온다. 눈빛이 마주친다 마주친다. 껴안는다 껴안는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아아 그만 이제 그만!
   아무튼 그녀의 이름은 릴리(비비안)이다. 다시 불러본다. 가만히, 릴리(비비안)이라고!
   그렇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은 더없이 초라했다. 완전 재미없었고 완전 심심했다. 어떻게? 바로 이처럼!
   다음은 내가 그녀를 만나기 전에 쓴 낙서다. 예전부터 이걸 그녀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시간에는 젊음이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회상 속에 추억이 있듯이 요술 수정구슬 속에는 미래가 있다. 그러면 아름다운 시절인 지금 우리 가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그분의 이름은 심심함이다. 그래서 즐거운 열정으로 뭔가를 해 볼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또 여의치 않다. 바텐더의 친절함으로 패배주의를 확인하고, 호기심은 실망하기 일쑤며, 장비에 대한 욕심은 언제나 우리를 놀리고 약 올리며 불편하게 만들기 좋아한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도 통 재밌지가 않다. 그 빈도가 비교적 느는 걸 나이들었다고 하고.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너무 적극적으로 추구하다가 뭔가를 탕진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극에서 제왕이 단정한 취미를 편애하고, 신선한 애첩을 발굴하며, 각별한 예술을 총애하듯이 새로움은 늘 우리에게 손짓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수성은 곧 영원한 청춘이며, 허영심과 허풍은 우정을 대신하고 사랑을 대체하는 진정 신기한 좌청룡 우백호인 것이다. 그러던 중 뜻밖의 색다른 기쁨과 유별난 행복은 어느새 나에게 바닥나버렸다. 일명, 깡통! 다른 말로 꽝! 얍~ 하며 주문을 외워서 짠~하며 변신했는데 하필 생쥐인 거지!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하이라이트를 들으며 난 어딘가로 정처없이 떠났다. 그처럼 내가 향한 곳이 어디냐, 그곳은 바로 릴리(비비안)의 마음이다.
   추신.
   1.릴리(비비안) 우리 어디서 만날까?
   2.참고로 난 우리가 운명적으로 거기서, 언제 만났으면 좋겠어.
   3.애끓는 내 마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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