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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6. 15. 16:40

   1
 
   릴리와의 인연은 무도회에서 시작되어 몰래한 사랑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의 우정을 사교계에 나가 낙관론을 펼칠 만큼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연정을 이미 비비안에게 발설해버렸고, 비비안과의 친분을 릴리한테 떠벌린 거나 다름없었다. 고로 그녀들끼리의 친교가 내게 어떤 불이익을 가져다줄지 나는 너무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정말 알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결과만 말하자면 릴리와 비비안은 단짝이 됐다. 설마 릴리는 비비안에게 홀딱 빠졌고, 비비안은 릴리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을까? 누가 알겠나! 그와 별개로 내가 받은 카드는 무관심이었고, 난 결국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했다. 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막상 두 마리 다 놓친 거나 다름없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나의 인생관은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거였다. 그것만 보자면 나는 철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때문에 적어도 재밌기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처한 형편과 열띤 반응은 꽝이었다. 철들지 않기에 대해서는 성공했는데, 뭔가 잘못 성공한 거다. 빙고! 따라서 나는 진짜로 철들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었다. 요컨데, 비록 한심하다 할지라도 으쌰으샤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릴리와 비비안을 피해 다녔다. 릴리와 비비안이 나의 빚쟁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릴리-비비안 단짝과 거리두기에 여지없이 실패해버렸다. 왜냐하면 음악 페스티벌에서 그녀들과 딱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빠! 우리가 가자고~가자고 조를 땐 안간다고 했잖아? 딱 잡아 뗐잖아. 무정하게 말이야. 오빠가 어찌 그럴 수 있어? 어머나, 그런데 어떻게! 말씀 좀 해 주시지요! 뭘가 설명이 필요할 듯 하지 않나요? 이 오빠 혹시 허언증? 친애하는 오빠가 우릴 따돌릴 거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오빠 왜 그랬어? 응? 양심에 찔릴 것 없는 꽤 괜찮은 명분이나 그 흔한 핑계라도 대보란 말이야. 응?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게 말이야. 음, 그러니까 그게 있지. 어, 내 말은 뭐랄까... (딱) 아 그래. 다시 갈려고 스케쥴을 조정한 다음 전화를 했어. 바로 전화를 했다고. 가방이라면 몰라도 오빠가 콘서트 표를 살 마음은 있었거든. 그래. 정말이야. 믿어줘.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야. 진짜라구. 응? 오빠 알잖아!」
   「전화 안 왔는데. 넌 전화 왔니?」
   「아니. 하지만! 굳이 잘잘못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아! 있잖아. 응? 있잖아 조금 전에 말이야. 난 너네들을 못 알아봤어. 왜냐하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 물론 전에도 그 아름다움은 유명했지만,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우리가 서로 뜸한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예뻐질 수 있지? 막 그러면서 이건 분명 환상은 환상인데, 뭔가 잘못 구현된 환상이라고 판단했거든. 응? 정말이야! 게다가 얘네들이 날 비밀 정보원쯤으로 알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오해하면 어쩌나 싶은 심려. 그래도 조금은 친했는데 멀어지면 어떡하나 싶은 근심. 응? 겨우 이만큼 친해지는데 그 얼마나 가슴 조렸는지 알기는 아니? 그런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어? 한심하게도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시시한 남자가 되버렸지? 이건 완전 전에 없던 일인데.」
   나는 제대로 수모를 당했다. 어떻게 둘이 그처럼 친해졌냐고 추궁할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왜 오빠 마음을 흔들었냐고 힐난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들의 싱그러움을 치켜세우는 것뿐. 달리 내가 낭만을 지지하겠나, 나의 어떤 억울함을 호소하겠나. 그처럼 나는 그녀들의 시중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잘하는 일이자 좋아하는 일은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제발 아니기를! 그때 그때 다를 테니까. 그래서 난 깨달았다. 아, 1 대 1로 만날 때가 호시절이었구나 라고. 그처럼 내 기분은 완전 그것이었다. 용용 죽겠지!
   「우린 오빠가 꽃다발이라도 들고 나타날 줄 알았는데. 완전 의외인데! 조금은 실망이라고. 그치?」
   「응. 그래 그래. 정말 그래.」
   「오빠는 어쩜 낮이 아니라 밤에 만나야 하는 남자일까?」
   「오빠한텐 외람되지만 알 건 알아야 하니까. 너 혹시 나 몰래 오빠 만나...지는 않았지? 에이 설마!」
   「뭐가 설마야?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낮에 널 만나고, 밤에 오빠를 만났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얘가 얘가 누굴 멍청이 바보로 아나?」
   「뭐-뭐, 뭐가 어째?」
   「뭐가 어쩌긴 뭐? 딱 보니 날 바보 멍청이로 보는 거네. 누가 모를 줄 알아? 얘가 보자 보자 하니까」
   「뭐-뭐라고? 너 말 다 했니?」
   나는 안 그래도 옐로카드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데, 그녀들의 뾰족한 감정을 부드럽게 달래주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아 안돼 안돼. 그래서 난 소매를 걷어올리는 시늉을 하며 딱 중재에 나설려고 했다. 그런데!
   「오빠. 속았지? 그랬지?」
   「속았네. 완전 속았네.」
   「아아, 오빠 완전 순진하다.」
   「오오, 이 오빠 너무 착한 거 아니니?」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남자에게는 성격 좋고, 여자에게는 자상하고 친절하며 다정한데, 그런데 그 남자는 청교도적이거나 가난하다? 우정이 돈독해지는 거야 문제 없으나 사랑이 깊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만약 현실이 된다면 그녀는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를 일. 그러니까 얘네들은 날 진짜 친오빠쯤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이걸 받아들여, 받아들이지 말아? 나는 경건한 마음과 불순한 상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런데 다들, 이거 끝까지 볼 꺼야?」
   「단체로 왔다면 모를까, 그건 아니겠지!」
   「그렇지?」
   「그럼. 아, 오빠는?」
   「나?」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오랫만에 당구나 치러 가자. 왠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당구가 치고 싶어졌어. 오빤 어때?」
   「좋은데.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난 사실 시끄러운 음악 들으니까, 뭐랄까, 아마데우스나 들으며 가발 쓰고서 당구공이 굴러가는 걸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왜냐고? 나도 몰라!」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딱 그랬거든. 오빤 우리랑 완전 잘 통한다니까.」
   그래서 나는 얼렁뚱땅 릴리와 비비안의 조수인 듯 그녀들을 따라서 당구를 치러 갔다.



   2

   우리가 가까운 당구장에 도착해서 한 일은 좀 유별났다. 당구장에서 따끈한 피자를 시켜먹었고, 카드놀이를 했으며,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으니까. 게다가 그곳에선 정말로 쾨헬 152번 쾨헬 525번, 클라비코드로 연주되는 K.545번, 정격연주 버전의 K.550번 같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얘네들은 이처럼 분위기 고혹적인 사교 클럽을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걸까? 궁금했지만 어떻게 알았느냐고 막상 물어보자니 것도 좀 이상했다.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다.
   「오빠. 있잖아 오빠. 내가 아는 친한 언니가 있는데, 그런데 그 언니가 요즘 외롭거든. 어떻게, 사랑의 다리를 놔줄까? 응? 소개시켜줄까, 소개시켜주지 말까?」
   「아 맞다. 그 언니? 나오라고 해. 응? 은근 말이 통할 거 같은데! 안 그래? 그 언니 완전 코메디언이잖아. 몸매는 슈퍼모델. 얼굴은 영화배우? 설마 어디 가문이랄지 막 상속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도 또 몰라!」
   뭐라고? 나는 마침내 이상한 환상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바로, 시간이 무던히도 느려지는 현상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들뜨다 못해 마침내 나는 공중에 뜨고 말았다. 붕~! 명백한 빈말이자 뻔한 아첨이란 걸 누가 모를까.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완벽한 아부였다. 내가 판단했을 때는 그녀들끼리 친해진 건 어디까지나 나의 주선이었고, 그래서 설핏 미안해졌을지도 모른다. 난 2인자, 3인자 계속 밀려나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러든 어쩌든 나는 기분이 좋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흡족했고 기뻤다. 설레며 행복했다. 뿌잉뿌잉 반짝반짝에 나는 속으로 그랬다. 응애응애! 새콤달콤 딸랑딸랑에 난 그만 하마터면 겉으로 진짜 그럴 뻔 했다. 뭐라고? 삐악삐악이라고! 하지만 내가 세울 체면이 어디 있고, 잃을 평판이 그 얼마나 듬직하겠나. 걸출한 늦깎이 신인으로써의 욕심이 뭐 그렇게 대단하겠나 말이다. 고로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변덕쟁이가 되었다. 그러나 딱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나아가 거듭 내내 의아해하기만 할 정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서두를 건 없다고 말할려고 했다. 그런데 딱 그 순간! 
   「그냥, 미루자. 응? 그 언니는 원래 사랑의 약자이기를 자처하는 여자라서, 까딱하면 바람둥이한테 넘어갈 수가 있어. (뭐야 날 벌써 한량쯤으로 상정한 건가?) 그러니까, 우리 좀 더 괜찮은 대안을 생각해보자구. 괜히 서두를 꺼 없으니까. 괜찮지, 오빠?」 
   괜찮긴 뭐가? 나는, 너 같으면 괜찮겠니,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뭐야, 난 그러니까 대타 등번호도 뺐기고 2군으로 밀려난 거잖아? 이처럼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께 뭐랄까, 아마도 괜한 인연을 강권하진 않는 게 좋겠지? 오빠도 다 알고 있어. 내가 대타로 나갈 마음도 없고. 글쎄요. 바보짓이란 걸 내가 왜 몰라! 이게 다 순전히 장난이란 것까지. 안 그래? 표정이 왜 그래? 아 농담이야 농담!」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졌다. 이건 아마도 얘네들과 내가 대화하는 법, 그에 앞서 사고 방식에서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색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위기 전환에는 또 비비안께서 일가견이 있다. 그런데, 얘가 살짝 심도 있는 주제를 건드렸다. 그러므로 문단을 띄워서 그게 무엇인가 알아보자.



   3

   「오빠.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왜 그 짧은 분량으로 감동적인 막 그런 거 흔하잖아. 그런 걸 봤거든. 그런데 있잖아 거기서 그러더라고. 미녀와 야수의 멋진 사랑을 설명하면서 정말 잘 어울린다, 과정도 과정이지만 나중 잘 살더라, 남녀 사이란 저래야 하지 않냐, 라고 하더라고. 여자 보고 왜 결혼했냐, 라고 물으니까 여자 왈. 말할려고 결혼했다! 여자 보고 주군은 좋아요, 나빠요, 괜찮아요 라고 물으니까 여자 왈. 좋고 싫은 게 어딨어요, 잘 어울리느냐 잘 어울리지 않느냐 뿐이지. 라고 하더라고. 물론 그 얘기를 연설자 혼자서 다 얘기해줬지. 고맙게도 말이야. 그런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나도 모르게 끄덕끄덕하더란 말씀. 다 보고 나서는 나도 그랬다니까. 아 천생연분이구나 라고. 나도 그래야겠다 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자, 이쯤해서 오빠의 탁월한 고견을 말씀해주지 않겠소?」
   「얘가 못보던 사이에 은근 말발이 늘었네. 허허허허허. 그게 말이야. 음... 정말, 그렇겠니? 물론 정말 그렇기를 바래. 왜 아니겠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 그럼. 음... 그러니까 그 질문은즉슨,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알면서 묻기를 호칭하는 용어를 까먹었는데, 알면서 묻기. 그거 좋아. 그렇게 하면 돼. 아주 좋아. 잘하고 있어. 비꼬는 게 아니야. 매우 좋은 자세야. 우린 모두 삶의 연습생이자 아름다운 인생의 지망생이니까. 응? 아 뭘 물어봤지? 아, 좋은 만남의 특별한 사례. 어? 그런데 내가 뭘 말하려고 했지? 아, 큰 그림.
   오빠 속 좁은 남자 아니다. 알지? 하지만 대인배인가는 확실치 않아. 그런데 또 청순가련 스타일 숙녀의 호감을 마다할 리는 없겠지. 난 그처럼 단지 아차상을 편애하고, 깜짝 출연이랄지 선물을 선호하며, 찬사에 약하다고나 할까? 저런! 뭐야 이거. 그거 전형적인 속 좁은 남자잖아? 젠장! 아무튼,
   선-칭찬 후-꾸중, 후-칭찬 선-꾸중. 전자와 후자의 차이에 대한 전문용어를 까먹었는데 말이야. 오빠가 뭘 자꾸 까먹어. 허허허. 아무튼 오빠는 그 차이를 피해 갈께. 틈틈히 얘기할 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앞서 말한 얘기는 어떤 화법이다? 그렇지, 여성잡지2 방식! 여성잡지2가 그러니? 이를 테면 가설을 정하고, 측정할 수 있는 건 측정하며, 관찰과 관련된 이론을 전수조사해서 예상과의 차이를 공개하여 내 것과 비교하고, 추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처음의 예측은 타당했나, 표본은 합리적이었나, 그래서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 따라서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까지 우리에게 소상히 고자질할까? 아니겠지. 아닐 수 밖에 없지. 왜냐하면 그러면 그건 학술 논문이지 여성잡지2가 아닐 테니까. 여성잡지2를 폄하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집에서 TV를 보지 논문을 읽지는 않거든. 일평생 남편의 식습관을 감수했더니 어떻더라, 혹시나 둘 중 하나가 밤에 잘 때 이를 가니까 평생 그 소리를 감내하는 마음을 아시나요? 그런 얘기를 사람들은 TV, 라디오, 인터넷, 일상적인 대화로 하잖아. 좋은 거야. 좋은 거라고! 단지 내가 그 뭔가를 제어를 할 수 있느냐, 대화의 주도권과 인생의 통제권이 내게 얼마나 자애롭느냐는 따로 생각할 문제고. 응? 그러니까 귀가 펄럭펄럭해서 얻은 지식의 중요성을 따지고 감동의 지속성을 예견해보란 말일세. 내 말은 그거야. 사랑이란 뭐다? 그래~, 사랑은 모르는 거다! (딱)! 남녀가 사랑을 하더라도 그 사랑의 미래를 예견하면서 하느냐, 내일은 없다냐. 응? 다른 말로 하면 그거야. 첫째,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마음껏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며, 실컷 이성을 만나... 그건 넘어가고, 젊음이여 이상의 날개를 펼쳐 싱그런 꿈을 꾸자. 그리고 둘째, 막살자! 뭐, 막살라~? 허허허. 요컨대 첫째와 둘째의 차이가 뭘까? 내가 하면 첫째고 남이 하면 둘째일까? 그건 너무 이기적이니까, 아마도 아니겠지? 어쨌든 얘기가 곁으로 빠질려니까 다시 돌아가자구. 음. 그러면 돼. 잠시 한눈팔 수도 있으니까. 여자는 대화가 산만해도 되고 남자는 한눈팔면 안되느냐, 까지는 따지지 마세나 그려. 허허허허허. 아! 남자는 한눈팔고 남자가 여자 말 다 들어주고? 통과!
   얘기가 길어지는데 좀 더 간명하게 설명하는 게 좋겠군. 먼저 결론만 말하자면 이거야. 여성잡지2식 화술과 인문교양적 밑줄긋기의 차이를 바로 알라! 물론 인문교양 분야에서 관찰-분석-가설-추정-실험-사례 연구-이론화를 거친 확률은 꽤나 미미하겠지만.
   앞서 비비안이 인상적으로 느꼈던 얘기는 일리 있는 사례를 듣고, 믿고, 이해하며, 공감했던 거야. 물론 그건 틀리지 않지. 게다가 재밌지. 또 좋은 얘기야. 그게 어디 나쁜 얘기니? 아니거든. 나는 그런 설득력 높은 웅변의 능력을 높이 산다네. 딱 납득이 되거든. 응? 난 솔직히 그게 매우 부러워. 당연히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지. 응당 그러고 싶어. 하지만 고풍스러운 표현으로 말하자면 신은 내게 그런 재주를 주시지 않았다네. 달리 말하자면, 하늘은! 응? 음. 인간의 육신은 엑스맨이 아니니까. 그래서 중요한 게 이거야 (똑-똑-똑). 나는 미래에서 왔다, 나는 외계인다, 이거라고. (똑-똑-똑)! 뭐, 오빠 피는 초록색이냐구요? OK! 세계 3대 케찹 브랜드에 대해서 얘기해줘, 말어? 삼천포는 때 되면 갈 테니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세나. 흐흠. 그런데 부러운 게 지는 거면 인생 내내 우리는 대체 몇 번을 지는 걸까? 꼬맹이 장난 같은 얘기는 아동님들께 맡기세나. 그것까지 뺐으면 우리 어른들이 너무 없어보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다음을 얘기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건 1부터 10에서 2나 3 의 좋은 측면만 부각한 거야. 인생은, 세상은 말이야,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거든. X축의 일부분만 얘기한다고 끝? 그럴 리가 있나. Y축 Z축 계속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미녀와 야수의 연애에서 단지 좋은 장면만 말한다? 그 감상법은 크게 세 가지야. 첫째, 우리 비비안이 앞서 경험한 그런 방법. 둘째,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본다. 셋째, 나머지. 그거야. 다시 여기서 얘기는 비유적으로 흘러가야겠지. 그러니까 무엇으로? 그래~ 다큐멘터리로!
   내가 어디서든 막 나서기 좋아하지도 않고 밉상으로 찍히지 않게 중간은 가.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그냥 그만그만한 거야. 때문에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리비리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오빠가 그렇다고. 내가 꼭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걸 어쩌지! 어머나, 이미 말문이 트여버렸네? 그래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긴 얘기는 하지 않겠어. 단지 왜 맹수들이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는지만 빼놓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왜냐,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먹이감을 잡을 때─딱 고 순간─오직 그 때만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야. 딱 그 찰나에 집중하여 혼신을 힘을 기울여야, 그래야 겨우 먹고 사는 거라고. 그래도 확률은 썩 신통치 않아. 나도 재수없는 건 꺼림직하지 왜 안 그렇겠니. 그래서 차마 이런 말까지는 하고자 할 의도가 전혀 없었어. 응? 전혀!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말은 해야겠군. 그건 뭐냐면 앞서 말한 최선을 다한다는 게 뭐냐, 얼마나 드물 정도로 귀하냐, 그걸 말하고자 챙피를 무릅쓰고서 오빠가 총대를 매겠다 그거라네. 자, 이쯤하여 오빠의 쓰라린 패배담을 한번 들어보시겠나? OK! 내가 어디서 못됐다는 얘기도 안 듣지만, 그와 똑같이, 말발이 좋다는 말도 못들어. 전혀 듣지 못하지. 어디 근처에도 못 가니까. 내가 무슨 응석왕도 엄살의 2인자도 아니고 뭐,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일 있니? 더군다나 오빠는 있잖아 싸움도 못해. 어차피 그걸 진짜 잘하는 것보다 말로 이기는 게 낫거든. 져도 말로 푸는 게 낫지, 본인이 으쌰으쌰 바람 넣을 땐 언제고 지면 꿍하니 삐지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친구? (설레설레)! 남자들이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도 있어. 원래 그렇다거나, 우정에서 넘버3가 됐다거나, 연패든 뭐든 기분이 꿀꿀하다거나 그 때문에 말이야. 그럼. 걔다가 다 거기서 거기야. 우리가 뭐 선수도 아니고 법은 괜히 있니. 스포츠를 즐기는 건 괜찮은데 힘든 건 TV로 보면 돼. 그럼. 아울러 뭘 못하는 게, 비겁한 게 때로는 낫다는 걸 남자들은 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네. 남녀의 정, 가족의 사랑, 친구 사이 우정에서는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게 현명할 이치일 수 있어. 그렇지만 밖에서는 오히려 굽히고 져주는 게 나을 때가 꽤나 적지 않거든. 세상사란 게 원래 그래. 오빠가 전에 그랬나 안 그랬나. 어디 원뻔치 무슨 투터치? 그거 다 뻥이었어. 그래도 내 여자를 위한 기사도는 건재하고. 그래서 오빠가 포르토피노 몽키스패너와 친하다네. 저번에 봤지? 그 매가리 없이 잘생긴 친구. 걔가 걔야. 그걸로도 모자라, 라 페라리! 그렇지만 오빠가 키 빼고 다 가진 옛 친구를 버린 건 아니야. 내가 이래봬도 의리는 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모 아니면 도, 친구 아니면 적. 오빠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런 사람 뿐만 아니라 오빠 친구들 중에 또 우리는-화법의 대가들이 좀 많았겠니? 까마귀 가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라고도 하지만 또 그게 살아보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 변변치 못해도 작가 인생으로 보자면 내가 걔네들 추억을 무단으로 빼았기도 하니까 말이야. 뭐 사람 사는 게 그렇지. 흉내내고 배우고, 학습하며 가르치고, 속이고 속고. 아무튼 말발이라면 난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어. 그럼. 노력은 하는데 깐족도 잘 늘지 않고, 허풍도 늘 그자리. 인기를 바라는 욕심은 가난처럼 매양 루저 마인드와 한 쌍. 그러니까 오빠는 귀는 두 개, 입은 하나, 그림자도 하나! (딱) 사랑도 하나! 허허허허허. 그니까 동점이라고! 응? 무승부! 철들지 않으면 재밌고, 철들면 재미없고! 시시각각 변하는 둔갑술은 정말 드물 테고 말이야. 그처럼 오빤 딱 중간이야. 그런데 오빠가 어제를 돌아보면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아주 드물게 있었어. 그건 언제일까? (딱) 그래~ 술집에서! 그리고 여자에게. 그것도 남의 짝인 숙녀에게 말이야. 앙큼한 그녀에게 내가 아마 막 그렇게 보였나봐. 어떻게 화려한 언변으로 뭘 좀 어떻게 분위기를 좋게 가져가 볼까, (내 옆에 앉은) 내 파트너 얘를 어떻게 한번 해볼까 라는 늑대로 보였겠지. 에고머니나! 내 탐욕을 그녀에게 딱 들켜버렸네? 동심이 기본인 오빠의 본심이 흑심으로 돌변했던 아주 희귀한 순간이겠지. 그래서 그녀가 나 보고 그랬다고. 와, 저 오빠 말발 장난 아니다! 라고. 그렇지만 내가 그런 말을 평소에도 들을까? 아니지!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일까?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어쩌면 숨겨진 재능이랄지 타고난 소질이 뺀질뺀질 나설 적기를 탐색 중이다? 그럴 턱이 있나, 어림도 없지. 다시 말해, 내가 그 전에랄지 그 후로 또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과연 있을까? 오오 제발, 아아 있었으면, 그럼 정말 정말 좋겠네! 그거야. 그거라고. 결국 당시 그녀는 효과음을 들었구만 그래. 핑~! 먹이감을 포착한 맹수의 번득이는 눈빛 말이야. 나도 나야. 뭐랄까 전망이 좋았다고 할까? 귀엽고 치마 입었고 분위기 좋고, 나도 모르게 그냥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얘기했던 게 전부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아니, 생각나는 건 단지 몇 마디 정도. 하하하하하. 그게 다라고. 열이 좋다는 건 그런 걸 말한다네. 물론 좋은 계기이자 아름다운 만남이었다면 난 아마 분명히 다른 뭔가로 어필했을 테고 말이야. 사람은 있잖아 눈의 흰자위가 많기 때문에 내 감정을 타인에게 들키기 쉬워. 하지만 단점은 곧 장점. 나도 남의 감정을 읽고 친해질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어디서 뭐깨나 끼고 뭘로든 꽤 알아주는 사람들이 오히려 또 잘 속아. 그러니까 어떤 전문가들이 또 슥 접근하게 마련이지. 말이 쉽지 포커페이스? 그게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 그건 그렇고, 그런데 또 종이 한 장 차이로 자기가 자기 입으로 그러는 친구들이 있어. 자기는 여자를 (진지하게) 만날 때는 최선을 다한다 라고. (딱) 걘 어쩜 허당일 공산이 적지 않아! 아무래도 고수이긴 힘들다고. 평소에 허세로, 그것도 어설픈 허세로 힘 다 빼는데 진짜로 여자 앞에서? 최선을 다하긴 최선을 다해. 그건 맞아. 그런데 뭔가 잘못 최선을 다한다고나 할까? 그거야. 바로 그거지. 여자가 아무 데서나 흥분하지 않듯이 우리도 아무 때나 인상 팍 쓰지 않는다는 거. 살며시 알아주면 고맙겠군. 허허허허허. 가만 있어 봐. 뭐야. 뭐야 이거! 또 내 자랑이잖아? 이런, 젠장! 그런데 우리가 뭔 얘기하는 중이었지? 아, 그래. 늑대와 양의 사랑. 호랑이와 여우의 연애. 한참 신나게 그 얘기하던 중이었군 그래. 하던 얘기 마저 하자면 이래.
   세상 편하게 낮잠을 자는 사자. 뭐 재미난 일 없나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며 돌아다니는 표범. 3일 내내 굶어서 완전 배가 고픈 치타. 그곳의 생태계는 생존 경쟁으로 돌아가. 문명인의 생활보다는 비교적 전장에 더 가깝다고. 무엇을 감상하고 경험하며 삶을 즐기는 그런 평안하며 아늑하고 포근한 세계가 아니란 말일세. 그러니까 정말 굶주릴 대로 굶주린 하이에나라고 왜 없겠니? 그거거든. 그러니까 그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단지 엇그제 처음 만난, 즉 약간 평범하지 않은 하이에나와 지극히 유순한 임팔라가 첫눈에 반했다? 처음에 홀딱 반한 걸로도 모자라 영원한 사랑을 한다더라? 지금, 우리가, 동화를 얘기할 나이일까? 오빠가 억지로 애들 옷을 입으면 그건 웃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망측할 수도 있어. 응? 나이값은 해야 할 꺼 아니냐고. 개그나 인형극을 한다면 몰라도 말이야. 그거야. 그거라고. 그렇지만 오빠 얘기나 모습이 추접스럽진 않지? 혹시라도 만약 그렇다면 고갯짓을 하거나 발을 들어. 손을 들면 시선이 움직이니까. 응?
   1688년 1월 29일에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1772년... 몇 일이더라... 또 까먹었네. 어쨌든 런던에서 영면한 그분. 천국을 체험했다는 엠마누엘 스웨덴보리. 물론 그분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쟁쟁해. 플라톤, 아이작 뉴튼, 아리스토텔레스, 르네 데카르트. 또 누구와 친하고 무엇을 주장했으며 어떤 예지를 고안했다더라, 좋아 좋다구. 그러나 그건 쉽게 말해서 예언가야. 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그래. 물론 내가 뭔가를 잘못 알았다면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소 라고 해야겠지. 다시 말해 분야가 집중되지 않았고,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넓고 특별했어. 그러니까 스웨덴보리주의의 창시자지. 그렇지만 최면술과 신비학은 프란시스 베이컨, 갈릴레오 갈릴레이, 앙투안 라부아지에, 루이 파스퇴르 등이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실험의 정량 다음에 이론과 학문으로 이어지는 정식 학문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그러니까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을 대략 예견할 수 있겠지? 무슨 얘기인지 충분히 추론할 테니까 말이야. 왜 이렇게 오빠 얘기가 길어지게 됐는지 그 설계도를 관측해보면 좀 더 재미있을 꺼야. 그럼. 다시 말해 신비학, 환상론, 최면술 등등, 그게 있잖니,
   대학교 이전의 교과 과목에 그런 과목들이 있니? 없어~! 그럼, 대학교에 전공 과목은? 당연히 없지! 약간 걸쳤다랄지 엇비슷한 건 있을 수 있어. 적어도 학교에 모임이나 동호회는 있겠지. 점쟁이를 시피보는 게 아니야. 나도 때로는 점쟁이한테 기대고 싶다고. 친하고 싶단 말야. 그렇지만 운수를 점치는 기술이 종교의 아성을 훌쩍 넘은 사례가 있었다면 내게 살짝 귀뜸해주시면 고맙겠네. 아, 옛날에는...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세나. 허허허허허. 그러니까 여성잡지2는 뭐다? 오락산업에서 탄탄한 주류지. 그럼 지금은 단적으로 그와 비견하지만 비교 자체를 하지 않는 인문교양은? 그래~ 학문이야. 오빠가 너네들의 팬이자 지류이듯이. 그 차이라고. 말과 글의 차이도 살짝 비슷해. 물론 예술은 양쪽에 한 발씩 담그고 있을 테고. 다시 그건 오락산업이 좌지우지할 공산이 크고. 그거거든. 비비안이 들었던 얘기에서 시험 대상의 분포, 관찰의 기간, 측정 지표의 합리성, 추정치의 변화 정도, 따라서 결론은 뭐다, 라는 얘기가 나오니? 그게 나와? 그럴까? 아니지. 절대 아니지. 언뜻 들으면 비슷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나올 수가 없지. 왜냐하면 동기부여 강연회와 논문 발표회랑은 다른 거니까.
   맹수는 아무리 순결한 초식동물을 잡더라도 최선을 다해. 왜? 성공확률이 결코 높지 않으니까.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 이 아닌데도 그 정도야. 인기물이나 유행과 볼거리처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 아니란 말씀. 초식동물 입장 뿐만 아니라 맹수 쪽에서 봐도 죽느냐 사느냐거든. 안 그렇겠어? 연애할 때 뭔 말을 못해! 결혼해서도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 일부러 마누라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남자가 어딨겠나. 드물게 그런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말이 잘 통하느냐가 강조됐다,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단지 그것만 떼어서 보자면 좋아. 그렇지만 내 현실도 그와 같기는 힘들겠지. 그러니까, 그 반대 급부의 예를 들어볼까, 들어보지 말까? 말이 통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말만 통했다더라? 남자들은 바보가 아니야. 그렇다고 여자는 바보겠니? 아니거든. 이미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산다는 걸 익히 봤잖니, 응? 화병만 두둔하고 꽃과 과일을 편들지 않는 게 아니라고. 하나만 보고 혹해서? 인생이 무슨 복권이니! 만화영화에서는 코끼리가 꿈과 신통력 때문에 청력기관으로 하늘을 날 수 있어. 그러나 실제로 우주선이 태양계 안과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는 건 과학이라고. 응? 학문이자 상업이고 문명이자 지성의 위력이겠지. 말이 통한 남자가 나는 평생 딱 1명이었고 그분은 내 낭군님이시다? 원인을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곧 말이 안 통하게 생겼다는 건 왜 생각 안하는데! 말이 통한 남자는 일생 딱 1명이었는데, 아니 글쎄 그분은 '...나는 왜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냐' 라는 말이 목구멍에 턱 걸리는 남자라니! 우리는 살면서 운명을 탓할 수야 있지만, 최소한 우군으로써의 행운을 부정하지는 않지 않나? 남자는 바보가 아니야. 아니. 아니다. 그냥 남자가 바보인 걸로 하자고.
   그러므로 웃고 넘길 오락-교양-상식-농담-연예계-예기-잔지식-말발과 내 것으로 만들면 좋을 다아이몬드-명대사-포지셔닝-밑줄긋기-고품격. 전자와 후자는 구분할 줄 아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다 음악이 바뀌고 분위기도 차분해진 다음 5분쯤 지나서 릴리가 그랬다.
   「오빠. 이제, 가도 돼!」
   「응? 어. 안 그래도 약속을 잊고 있었네.」
   나는 없던 약속을 생각해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꼭 단물 빠진 풍선껌은 아니겠지만 신부들러리라는 역할을 망각해서는 안되었다. 지성의 전당에서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이야 얘기꽃을 피운다지만, 시간 강사는 시간이 남아돌지 않으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까. 뿐만 아니라 학계도 마냥 조용하고 모든 게 좋은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낙오를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을 내 편한대로, 순진하게, 솔직히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면서 서둘러 녀석들과 헤어졌다. 간신히 나의 부자연스러움은 들키지 않았지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오늘도 패자라는 걸 직감했다. 눈치 없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던 것이다. 어쩐지, 뭔가 잘 돌아간다 했다.
   그렇게 돌아서서 거리에 나와 내가 내뱉은 혼잣말은 이랬다.
   「목장을 탈출한 집토끼, 꼴 좋다.」
   또 혹시라도 그녀들이 이렇게 말할까 봐, 언뜻 기분이 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머, 별꼴이야.」



   4
 
   나는 일하기의 생산성을 추산했다. 그 결과 신나게 놀기의 가능성을 따져봄이 좋으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할 일을 유보한 채 할 말을 위해 여자를 만날까, 아니면 으쌰으쌰를 하러 남자를 만날 것인가를 고심했다. 일단 표면적인 목적은 그럴지라도 기대하고─기다리고─임박하며─경험하고 나면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을 깨닫게 될까? 듣고 듣고 또 듣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술 마시고 또 마시며 뭔 얘기를 했는지 도통 기억도 못하던가를!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 때문에 지금 시도해볼 만한 괜찮은 방도는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만남.
   둘째, 혼자 놀기.
   그러므로 나는 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가 논쟁할 필요 없이 그 두 가지 보기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는 그분의 욕구를 간파해냈다. 고로 나는 일타이피보다 1차, 2차 방식을 선호하기로 했다. 그것은 곧,
   두 번째는 극장에 가기였고,
   첫 번째는 '극비 외계인 현존설 설명회'라는 강연회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량의 기분 전환을 위한 구실치고는 너무 뻔한 명목이지만 왠지 재밌을 것 같았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건 손쉬운 일인데, 그런데 무슨 어떤 강연회? 처음에 나는 어느 벽보를 보고 그 행사를 알게 됐다. 황당무계하지만 하긴 예전부터 무척 궁금하긴 했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친구들이 그런 강연회에 참석하는지를.
   뜸 들이지 말고 이틀에 걸친 두 가지 임무의 결과만 말하자면 이랬다. 극장에서 영화 보기는 그런대로 재밌었고, 무슨 이상한 강연회는 때 맞춰서 가봤더니 아하 하면서 알게 됐다. 주제만 기괴하며 그럴싸했지 책과 CD를 팔고 회원 가입 받는 평범한 동기부여 강연회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괴짜이기를 사양한 채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심심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아차-싶다. 왜냐하면 거기서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다거나, 그곳으로 명랑하게 발길을 옮기는 내 모습을 어느 지인에게 들켰다면! 그럼 난,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됐겠지. 농담이고, 그렇다고 나는 그분들을 정말 그렇게 기인쯤으로 치부하는 건 아니다. 충분히 존중하고 또 비밀 단체나 무슨 다단계니 영화 같은 이야기도 그렇게 파생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행복한 글쓰기와 재밌게 놀기, 그 둘을 화해시키던가 두 마리 토끼를 일망타진하던가 해야만 하니까. 아니면 내가 그냥 희대의 플레이보이로 활약한다? 거 무슨 마음에도 없는 그런 실없는 얘기를!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그나저나, 윌과 폴과 핀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녀석들에게 전화했고 통화해서 만나기로 했다. 



   5
 
   윌, 폴, 핀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만났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그런데 왜 하필 그곳에서 만났을까? 왜냐하면 모두 꾸밀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 너냐!」
   「내 소원은 너가 여자랑 같이 나오는 걸 보는 거다. 응?」
   「쟤 몰라서 그런 말 하냐? 사람들 연애할 때 두 가지로 나뉘는 거 잘 알면서. 첫째 사귀는 사람 생기면 친구랑 연락을 딱 끊는 유형, 둘째 그렇지 않은 유형. 쟤는 첫째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가 아쉬운 건가?」
「섭하게 너무 그러지 말자. 난 너네들 밖에 없어.」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남자들 뿐이 없지?」
   「왠 줄 아니?」
   「왜 그러는데?」
   「왜냐하면 같은 술집이라도 여자들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법이거든. 주위를 둘러 봐. 한마디로 여긴 편하게 오는 데잖니. 그럼 도도한 숙녀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말했잖아. 입장할려면 갖춰 입고, 적당히 차분해야 하는 곳 말야. 응? 예약 먼저 그리고 왠지 까다로운 커트라인이 존재할 것만 같은 그런 데 말이야. 세련된 음악. 고상한 테이블 매너. 격조 높은 레스토랑의 이름은 진짜로 격조. 거기서 한번 들어보렴. 웨이터가 3개국어 완벽하게 하는 걸로도 모자라, 딱 봤는데? (설레설레)! 이 자식이... 쉿! 뭐랄까, 이 연애 오래 못 갈 꺼 같다 왠지 힘들 꺼 같다, 막 그런 느낌? 그래서 내가 그 뒤로 포도주 안 먹잖아. 아니. 지금은 괜찮아졌어. 그러니까 내가 포도주를 한동안 안 먹은 거네. 허허허. 게다가 자리가 자리인지라 싼 거 시킬 수도 없었어. 참 나. 아 말도 말어. 말도 마.」
   「그건 얘 말이 맞어. 정말 그런 데 가서 보면 90퍼센트가 여자야. 시간에 따라서 약간 다르긴 하지만 제일 바쁜 때 빼고는 대체로 그래.」
   「그럼 뭐 우린 뒷골목에서 달리고, 멋쟁이들은 고품격 사교 클럽에 드나들고? 우리도 상위 리그로 진출해야 하는 거 아닐까? 늦었으면 어때! 거기서 걔네들도 그럴 거 아니야? 남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 라고. 특히 멋진 남자. 응? 우리 아니냐고! 아닌가?」
   「하긴 그녀들은 만나자 해서 만나면 얘기가 길고, 우리는 만나자 해서 만나면 뭐 우리끼리 할 얘기도 많지 않고. 우리 정말 이런 조합으로 너무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너네들 지겹다. 너네들이라고 내가 얼마나 지겹겠니. 응? 말을 안해서 그렇지, 나도 다 내 주제를 안다네. 응? 너무 그처럼 빤히 쳐다보지 마세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우리 그만 보는 게 어때?」
   「넌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넌 빠지고. OK! 그럼 숫자 홀수니까 대타 불러서 짝수 맞추면? OK! 아주 좋아! 딱 좋아. 자, 우리끼리 좋은 데 갈까? 그럼 되겠네.」
   「뭐 임마? 이 자식이... 나도 데려가 줘! 응?」
   웃음.
   「여기서 난 먼저 일어날께.」
   「벌써?」
   「뭐가 벌써야? 해가 졌자나!」
   「아 이 친구야, 달이 떴지 않나! 응?」
   「작가다운 발언이시네. 오늘은 달릴 기분이 아니라네.」
   「내가 남의 일기 엿본 얘기 해줄려고 했는데. 듣고 싶지 않니?」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누누히 말했잖아. 그런 얘긴 우리가 아니라 여자한테, 응? 말이 아니라 글로!」
   「그래~ 그거야. 그런 거 말고, 응? 마돈나의 침실을 염탐했다거나 탐하던 '프리마돈나의 사생활'에 내가 엮였다거나. 응? 그런 걸 말하라고 이 바보야. 아무튼, 착각하지 마. 내가 프리마돈나를 탐했다는 게 아니고, 그분들의 사생활은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까. 다음에 꼭 그런 얘기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그 말이라고 내 말은. 아무튼 나 먼저 일어설께. 내일 소풍 갈 준비해야 되거든.」
   「너도?」
   「내가 아는 여동생들 소개시켜줄라고 했는데. 부르면 바로 와!」
   「혼자서 상대하시게. 건투를 비네.」
   「여자가 당황하는 최고의 장면 세 가지도 있어. 알고 싶지 않니?」
   「인터넷에 올려. 그렇지만 댓글은 없다는 거. (윙크)」
   「야! 좋은 데 간다며? 혹시 나만 빼놓고 너네들끼리 갈려는 거 아니야?」
   「어허. 우리가 아직도 그런 델 가야겠니?」
   「그래.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안녕.」
   「야! 야! 나이트! 나이트! 어? 나이트클럽!」
   뭐야? 애들은 얼굴 보자고 해서 만난 다음 진짜로 얼굴만 보고 헤어졌다. 그럼 나 혼자 오늘 기나긴 으쌰으쌰의 여정을 기대하며 상상했다는 건가? 뭐야 이거!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놀이가 이러면 일도 이럴 껀데. 난 걱정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기분이 꽝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가, 됐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막힌 쾌락이 무엇인가, 재밌는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울러 우리는 행운을 축복하고 사랑을 열망한다. 그러나 허구는 몰라도 삶은, 무턱대고 행복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 법이다. 왜냐하면 희망찬 내일은 오늘에 몰두함으로써 오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고, 바라는 건 신선한 새로움이다. 그리고 차선으로 익숙한 만족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노는 것이 으쌰으쌰라면, 나에게 일하기는 기막힌 전개의 창안이었다. 혹시라도 절망적인 절정과 실망스런 피날레가 끝판에 버티고 있다 할지라도 할 일은 거의 착상이 전부였다. 그런데 빠져드는 추리와 심취할 수 있는 영감이 아무 때나 친절하게 날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게 놀기는 곧 일하기가 되었다. 고로 오늘도 생각없이 막 놀자, 내일은 없다? '막살라'는 나이트클럽 웨이터 이름일 뿐. 관망이 어떻고 전망을 살피건 어쩌건 최소한 숙취는 괴롭다. 주위에 보면 꼭 그런 남자 있지 않냔 말이다. 여자 없으면 얼굴도 비추지 않는 친구. 하지만 난 적어도 그런 쫀쫀한 남자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일단 많은 걸 생각하지 말고 우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정이 또 쉬운 게 아니다. 옆문으로 들어가서 1.5군으로 만족할 것인가, 친구 파도타기로 알게 되어 뒷문으로 빠져나갈 것인가. 생각할 게 많다. 인간관계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래서 우선 나는 날 먼저 바로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또 공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철든 어른인가 영영 철들지 않는, 그럴 수 없는 풍운아인가? 라는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고나 할까! 뭐라고? 환장할 일이 따로 있지, 세상에! 말로만 고뇌하는 숙명론자에 이상을 꿈꾸는 몽상가? 하루는 심술쟁이 하루는 장난꾸러기라니. 괘씸한 응석쟁이가 따로 없구만 그래.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좋게 일이나 하자!



   6
 
   일과 놀이. 그 둘은 다정한 흥정 끝에 끈끈한 우정으로 성사됐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어쩌다 그렇게 됐을 뿐.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는 별님에게 물어봐야 할까, 바람에게 청탁해야 할까. 그러든 어쩌든 아직은 일과 놀이가 끝짱나는 흥행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런 몰입도라면 어쩌면 인기와 황금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아니다. 꼭 그런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행복은 물론 품위 유지와 척지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지인들과 친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내 삶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나는 사교로부터 드라마를 배우고 한량과의 친분으로 내 인생은 좀 더 즐거워질 것이다. 그래서 날 사모하는 아가씨들은 줄을 서서 대기하며, 당장 내일부터 피하고 숨어야 할 만큼 행복한 비명이 날 귀찮게 할 리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흥미로운 인생의 웃음꽃이 활찍 필 일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 심심한 발단 끝에 상상도 못했던 전개는 뜻밖에도 날 주인공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자상한 설명의 뜸을 들일까 말까? '난 또 뭐라고!' 만큼은 듣지 않아야 하니까 즉시 사연을 밝힙시다. 네. 도저히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새로움은 바로 스토킹이었다. 바로, 마라의 남자친구인 존티의 스토킹! 그러니까 존티가 날 따라다닌다고? 아니 왜!
   처음에 내가 최근 읽고 있는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 또 근래 봤던 오컬트 공포 영화 때문에 내가 뭔가 잘못 봤으리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난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때문에 난 혹시나 했다. 설마 존티가 날 영매의 능력자로 아는 걸까? 혹시 쟤에게는 내 안의 그분이 보이는 걸까? 나는 볼 수 없지만, 존티는 내 어깨를 밝고 서 있는 악령을 미리 스케치하지 않았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미행의 순간을 들키면 존티가 거북해할까 봐, 지나가는 척 하면서 돌발 행동으로 우연히 존티를 맞딱드렸다.
   「오 존티! 웬일이야?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야? 혹시 내가 너한테 돈을 안갚았다거나 크게 실수한 거라도 있니? 저번에 헤어지기 전에 그랬자나. 조만간 다시 모이자고. 왜, 빈말이었어? 내가 툭하면 인스타그램에 막 그런 말을 올리니까? 여심의 수습자는 방탕의 옹호자를 동정했다. 그런데 댓글은 안달리고! 한심해 보였을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럴 만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라를 골탕먹이고 싶은 고의적인 속셈을 내가 품고 있다는 걸 꼭 확인해야겠니?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은 멍청한 악당과 인기만 쫓는 허당들, 뻔한 이야기 천지야. 그 말은 곧, 나도 그렇고 그런 허당이란 말이지. 요컨대, 난 늬가 부러워! 심하게 좋아보이는 호사에 대한 간지럽게 부끄러운 질투심. 너만 보면 확 살아난다니까. 너도 알고 있지? 그렇지? 말 해. 응? 말하라구.」 
   아마 존티도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랬지? 존티는 날 정말 바보-멍청이-얼간이-밥통으로 알았을 꺼 아니냐고. 마라가 혹시 얘의 본모습을 알고서 좋아한다고 했을까? 막 그러면서! 그렇지만 이해심 넓고 아량이 넓기로 어디서 절대 빠지지 않는 멋진 남자 존티라면 어쩜 그렇게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요즘 연극배우 하기로 결심했을 거라고.
   그야 어쨌든 존티와 대화하면서 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이건 분명 마라를 만나서 물어봐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존티와 헤어진 다음 미스테리아로 갔다.



   7

   나는 환상문학 (격월간)잡지 미스테리아에 도착했다.
   「마라. 할 말 있어.」
   「할 말? 오빠가 할 말이라니. 긴장되는데. 심각한 거야?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허물없는 우리 사이, 뜬금없이 서먹서먹하게 만들지는 말자. 응? 오빠! 그러니까 그 할 말이란 게 대체 뭔데 그래?」
   「그건 말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유난 떠는 걸로 보여질 수도 있는데, 그런데 알게 된 이상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래서 널 찾아왔어.」
   「아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래?」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젖히고......)」
   「나 부루퉁한 거 안 보여? 봐 봐, 벌써 입이 튀어나왔자나. 잘하면 내가 오빠를 한 대 칠 수 있어. 그러니까, 어서, 말해. (딱)! (쉭─쉭)」
   「빙빙 돌리지 말고 당장 말할께. 혹시라도 듣고 나서, 응? 논리 없음이랄지 억지부리기로 치부하면 안된다. 그럼 정말 곤란해. 응? 자, 그걸 미리 염두에 두고 시작하자고. 그런데 굳이 대질심문까지는 필요치 않아. 영화 찍을 일 없으니까 말이야. 혹시라도 내 얘기를 글로 쓸 거라면 사양할께. 음,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마라에게 나는 의문투성이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나에게 넌 의뭉덩어리니까. 허허허허허. 하하하하하. 농담이고. 그러니까 내 말은 중압감을 내려놓으라는 말이야. 그렇다고 너무 보채지도 말고 말이야. 응? 너 지금 그 생각했지? 이 인간이 또 시작했네! 밑도 끝도 없이 아무 데서나 누구한테나 습관처럼 뜸을 들여? 이 녀석을 그냥 콱... 라고 생각했어. 확실해. 오오 오오, 웃었어 웃었어. 맞지? 맞지? 다 알고 있어. 그럼. 오오, 여차하면 눈에서 레이저 나가겠는데? 그럼 이제 우리도 마블 주인공 되는 거야? 응?」
   「그만. 아 쫌 그만! 이제나저제나 결론이 나오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네. 아 용건이 뭐야? 뭐, 골드바 그런 거 필요해? 어떻게, 하나 마련해 줘? 아님 회사 차원에서 그랑프리 트로피라도? 잡것! 어? 오빠도 보아하니 딱 그 꽈야.」
   「그-꽈? 뭔-꽈!」
   「입으로는 화염방사기, 눈에서는 레이저. 솔직히 말해 봐. 오빠의 숨겨진 취미는 혹시 셀프-세차장 가기 아니야? 맞지? 그렇지? 그러네. 딱 그러네. 그러니까 위는 화염방사기 아래는 세차장 뭐 그 거시기. 고로 어제는 난장판 오늘은 깽판? 추억이 어쩌느니 그날을 회상하고 이러쿵저러쿵. 그거 다 거짓말이었군 그래. 뭐야? 그럼 오빠들 으쌰으샤는, 설마, 개판?」
   「개...뭐? 아니야. 아니라고. 아 나 정말 이거 이거 존티가 도도한 숙녀의 고결한 마음을 너무 이상하게 물들여놨군 그래. 아 진짜 우리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응? 아가씨 입이 그렇게 거칠어서야 쓰나. 이거 정말 어떡하지?」
   「속물! 저 저 저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본심, 저 저 저 튀어보이고자 하는 욕망, 저 저 저 주목 받고 싶은 애원. 외로워질 명분 마련하지 말고, 지금 당장, 냉큼 말해!」
   「말할께. 어. 말한다구. 즉답! 어? 그래. 안 그래도 말할려고 했다고. 사실은 말이야. 존티가 날 미행해. 미행?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무슨 슈퍼스타도 아니고, 대체 왜? 왜 하필 존티는 새로운 취미가 스토킹이냐고! 내 말은 바로 그거야. 음. 그럼. 자, 마라의 설명도 좋고 해명이랄지 반박이랄지, 뭔가 알고 있다면 알려줘. 내게 말해 봐. 응? 사실의 논거가 내게는 없으니 너한테는 있다는 거잖아. 미약한 단서라도 좋으니, 그러니까 오빠한테 뭔가 넌지시 얘기를 해주지 않으렴?」
   「난 또 뭐라고. 오빠. 있잖아. 존티 왜 그래?」
   「존티가 뭐? 저번에 다퉜다가 화해했잖아?」
   「존티 원래 그래? 걔 완전 초딩이야!」
   「몰랐니?」
   「알긴 알았는데, 너무 심하니까 그러지.」
   「그게 왜 그러냐면, 내가 그랬어. 철들지 마라고. 푸하하하하하하. 웃지지... 그러니까 조금 더 길게 설명을, 음.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존티가 있잖아. 존티! 존티는 그래. 걔는 입만 열면 뻥이야. 절반은 거짓말이라고. 그건 뭐 나도 알고 있어. 적응됐고. 그런데 문제는 이거야. 그 인간은 내 말은 또 곧이곧대로 믿어. 심심하면 남을 속이면서 자긴 무턱대고 남을 믿네? 자기는 직접화법을 좋아한다면서 꼭 보면 중요한 판국에 가서는 간접화법에 딱 넘어간다니까. 아마도 존티가 여자의 의중을 빛의 속도로 얼른 눈치채더라도 설명 방식이 마음에 안들면 일부러 반대로 하는 것처럼, 사기꾼도 애초에 크게 벗겨먹을 생각은 없었던 거 아닐까? 처음부터 홈런이 목표일 리는 없어. 시작은 뻔트였을 꺼 아니냐고! 그런데 어머나 용케 순진한 양반이 걸렸네? 딱 져주고 신뢰 쌓으며, 친해지고 크게 가는 거지. 한방에, 훅~! 안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잔-뻔치만 날리면 뭘해, 딴 데서 한방 것도 큰 걸로 얻어맞는데! 안 그래? 평소에는 그래. 길고도 긴 수다를 잘 들어주고 분위기도 잘 맞춰줘. 자기 싫어하는 거랑 지는 비교에 대해서는 슬쩍 돌려서 얘기하는 걸 꺼려하더라도, 진득하니 듣고 기다리며 배려하지 왜 안하겠어. 나도 알아. 주관이 뚜렷하고 자의식 강건하며, 자존심 특히 센 사람들의 특징을 나라고 왜 몰라? 내가 당사자인데! 존티가 응? <넌 너 밖에 몰라!> 라는 말을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구. 내가 바로 그 당신이지, 왜 아니겠어? 다, 모두, 알아. 그럼. 그럼 일관되게 항상 그러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아. (딱)! 이거야. 이거라고. 자기는 괜찮은 음식점 가서 그래. 걔가 그 요리사랑 친해. 친한 건 좋아. 그리고 또 그 요리사 앞에서 요리사 띄워주는 것도 잘해. 그럼 뭘해? 어디는 뭘 어떻게 한다, 뭐는 어디 게 좋다, 이건 뭐가 단점이다, 어디는 값과 품질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나느니 뭐라느니, 어? 이게 뭐야! 대놓고 앞에서 있는 흉 없는 흉 다 보면서 꼬박꼬박 단골이라고? 젠장! 요리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가만 보면 옆에서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3부리그 응원단은 조마조마, 평판은 간당간당, 대망의 성취는 비리비리! 농담이고. 아 그래, 안 그래? 어? 나 좋을 때 간접화법, 나 싫을 땐 직접화법? 반대인가, 아니 맞네. 어허, 저런! 그게 뭐겠어? 사기당하기 딱 좋은 거 아니냐고. 정말로 꼭 보면 플레이보이의 3박자를 어느 정도 성취하고 인생의 굴곡을 잘 아는 친구들이 말이야, 가만 보면 그래서 빚쟁이가 되는 거 같아. 안 그래?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며 언변이 화려하고, 옷차림이 세련되며, 잔재주가 방대하면 뭘 해? 어설픈 농담에 딱 속아넘어가는데! 이 세상은, 호인에서 아차 하면 호구라니까. 응? 지가 무슨 스쳐지나갔을 뿐인 저질 스캔들의 주인공이야 뭐야? 나 원 참, 맙소사! 돈키호테 납시셨구만 그래. 나보고 햄릿형이라느니 뭐라느니, 자기는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둥 나는 마법사의 조수라는 둥. 그럼 뭘하냐고. 딱 속아넘어가는데! 자기가 그렇게 뻥이 심하면 남들도 그럴 꺼라고는, 응? 대체 왜 생각 못하는데! 못살아 정말. 말릴 수가 없다니까 그래. 사랑? 처녀의 비위를 끔찍하게도 잘 맞추는 재주가 좋으면 뭘해. 심심하면 한눈파는데! 아아, 나는 언제나 하늘을 보며 별님과 대화하고 저 하늘의 별을 따나! 내 이럴 게 아니라 그 인간을 확 그냥...」
   「워─워─워!」
   이건 뭐야! 난 혹시라도 막 그러면서 미스테리, 스릴러, 호러 드라마. 딱 그런 장르를 예감했는데, 결과는 유치한 장난도 아니고 부장님 개그도 아니고. 거 무슨 아 나 이런 젠장!
   어쨌든 이 허탈한 실정 때문에 좋은 점 하나와 나쁜 점 하나가 생겼다. 좋은 점은 그거였다. 마라가 존티한테 그랬다고 했단다. 난 나중 JS 오빠가 소개시켜주는, 딱 점지해주는 남자와 끝없는 사랑을 할 수도 있다고. 어머머, 뭐야 정말? 그리고 나쁜 점은 이미 말했듯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뚜껑을 열어보니 허당 존티의 실체뿐이란 점. 뚜껑을 열었는데, 차라리 또 다른 뚜껑이 나왔으면 몰라. 나 참! 아무튼 그로써 존티의 스토킹 그 뚱딴지 같은 해프닝은 마무리 됐다.



   8
  
   나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됐다. 그것은 화초 키우기. 마당 한쪽에 장미, 수선화, 카네이션, 팬지와 튤립을 키우기 시작했다. 칸나 씨앗은 대타이자 애장품으로 아껴뒀다. 꽃씨를 구했을 때 그런 생각 당연히 들었다. 이게 혹시 잭과 강남콩처럼 마구 커버리면 어떡하나 라는.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아는 동화래야 남들도 다 아는 정도였고, 나는 공상에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때문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한달쯤 꽃을 키웠나, 키우자마자 꽃은 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차라리 과일을 키울 걸 그랬나,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딴에는 유별난 애착을 보이며 애틋한 정성을 쏟았다. 딱히 한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꽃이 피면 얘기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일을 소셜 네트워크와 블로그에 자랑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식물학을 향한 지대한 관심과 조류학자라는 잊혀진 꿈, 가정적인 남자임을 뽐내고 싶었을 뿐이겠지. 그러므로 뭔가 결과는 있어야 하니까 나는 그동안 애정을 듬뿍 전하며 1일, 2일, 3일... 막 그렇게 사진도 찍어서 열심히 인터넷에 올렸다. 심지어 식물이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천국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겠니, 라면서 막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도 들려주었다. 더불어 아침-점심-저녁 틈틈히 꽃들과 사랑의 인사를 나눴다. 이따금 달콤한 탄산수도 주고 행복한 연애시마저 읊어주었다.
   그렇게 30일 속성 과정 끝에 드디여 꽃이 피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초급 정원사의 도둑놈 심보는 고배를 마셔야지 별수 있겠나. 그러나 유명인들의 노련한 경험담처럼 황금─인기─행복(주색인가?)이라는 허당의 3요소를 잊어버리니까 어느 날 요술처럼 내 앞에 그 뭔가가 나타나더라, 라는 막연한 예측은 가능했다. 그러니까 어떤 예측을 누가? 바로 꽃들의 아빠인 이 미련한 농부가! 꽃은 언제 피어도 필 테니까, 난 아마도 농부의 진짜 심정을 알고 싶었나 보다. 그처럼 어쩌면 나는 애초에 꽃씨를 뿌려서 화초를 키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작 품었던 농심은 아마도 흑심이고, 꽃밭은 여심일 것이며, 사랑 고백과 팬클럽 관리 대신에 하는 수 없이 진짜 꽃씨를 뿌렸다가 갸우뚱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과일을 키워서 황금 사과가 열리면 딱 따먹을까, 차마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꽃들이야 때 되면 자기들 알아서 피든 어쩌든 할 테니까, 차라리 화사한 꽃다발을 아는 동생들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난 단지 오빠라는 말만 딱 한 번 듣고 싶었을 뿐, 바라는 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냥 나를 향한 친교와 호혜주의, 사소한 선물하기 같은 다정한 사교의 일반론을 절대 모른 체 하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샐리에게 전화했다.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서 경리 일을 잘하고 있나 라는 관심을 애써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까. 참고로 저번에 마라를 만날 때 물어봤는데, 그땐 샐리가 출장갔다고 했다. 경리가 출장을? 그야 거기 편집장 소관이니까 뭐 그런 걸로. 아무튼, 그러니까 얘가 혹시 대망의 미완성을 망각한 채 현재의 탐욕만을 논평하며 발꼬락을 꼼지락꼼지락? 난 냉큼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뚜─ 뚜─ 뚜─!
   뭐 진짜로 바빠서 못 받았을 수도 있다. 꿈나라로 떠났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난 다시 아는 동생 도나에게 연락했다. 와, 그런데 받네! 그래서 어떤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글세,
   「싫은데!」
   하는 수 없지.
   그리고 나는 일부러 포르토피노의 동생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녀석은 나한테 넘버2가 아니라 꼭꼭 숨겨놓은 에이스 카드니까. 그러나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연락했다. 그리고 답변을 들었다. 그런데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포르토피노의 동생인 이브는 친구들이랑 캠핑 가서 놀고 있다고 했으니까.
   이쯤 되면 더 연락을 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무실로 향했다. 바로, 일하기 위해서.



   9
 
   나는 즐거운 인생에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뭘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거. 그게 다 행복한 사랑에 회의적이기 때문일까? 역으로 생각하자면, 이렇게 심심함의 호위를 받고 따분함의 애모를 듬뿍 받는 까닭은 아마도 영화로운 여복이 임박했기 때문 아닐까? 삶이 권태로운 이유가 어찌됐건 그건 어쩌면, 임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말을 들어도 쌀 만한 억측이다. 그러니까 이 뜻 모를 허전함의 원인이 대체 다 뭐란 말인가. 아! 복권을 사고 행운을 점치며 주색과 함께 도박에 빠지지 않아도 알 듯 모를 듯 하다. 거리에서 시선이 돌아가며 어떤 숙녀의 꽁무늬를 쫓아가고, 방탕과 퇴폐와 백치미에 흠뻑 젖지 않아도 감이 온다. 이제 알겠다. 그 느낌은 아마 흥분의 전조와 흥미진진한 징후일 것이다. 그래서 뜸 들이지 말고 냉큼 밝히자면 그 아리송할 만한 동기는 한마디로 길일, 역시 길일이다. 곧 내가 신기한 모험의 최적임자라는 사연과 명분은 필요치 않다는 말.
   따라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유니콘을 색출하고, 기쁨이란 불여우를 알현하며, 신비로움이란 페가수스의 흠모를 받는 일.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말하자면 때가 된 것이다. 공을 차든 야수성을 되찾든 아니면 기분파로 거듭나던, 열정을 쏟고 찌릿-짜릿함에 몰입할 수 있는 바로, 으쌰으쌰!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리던지 말던지, 클림트의 그림에 나올 법한 마담과의 약조를 파기하던 어쩌던, 나는 뭉크의 절규를 따라하며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만나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당장 모네의 그림 속 주인공 같은 여인과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또 여의치 않다. 왜냐하면 행복한 눈물을 흘릴 건지 말 건지, 즉 으쌰으쌰의 종목도 계획도 동지도 뭐 하나 정해진 건 없으니까.
   때문에 나는 불현듯 떠오른 김에 곧바로 출발했다. 그곳이 어디냐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들과 함께 방문했던 당구장으로. 고전음악과 당구, 완벽한 단짝이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궁합을 이제야 경험하다니. 나는 동행인은 필요 없고 혼자서 그곳에 다시 찾아갔다.
   당구장의 이름은, 블리자드! 그런데 블리자드가 뭔 뜻이었더라?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해서 알게 됐다. 아, 여기다! 내가 자주 들러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나는 알던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모험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곳으로 출근했다. 물론 나는 손님이었고 친분의 발화 대상은 사장님이 아닌 점원이었다.
   방문한지 1일, 2일, 3일이 지났다. 오늘이 며칠 째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점원1, 점원2, 점원3과 나의 교분이 두터워졌다는 것만 중요할 뿐. 나는 최근 판타지의 실행자, 미스테리한 관객, 로맨스 작가등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예고없이 찾아온 행복을 예감했다. 사랑이 싹트는 시절은 혹 지금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연정이 꽃피는 시간이었다. 단순히 좋아하고 속마음과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감정, 그 파릇한 감정에 눈 뜨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점원1-2-3과 친해진 걸로도 모자라 점원3의 (또렷또렷한? 낭랑한? 애처로운!) 대사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나는 그녀들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오빠가 멋진 남자 1-2-3을 소개시켜주겠다고. 그래서 그녀들은 뭐라고 반응했을까? 당연히 꺄악-하며 신나게 호응했다. 그런데 점원3이 보인 어색함은 전혀 사심 없는 내 태도를 떨리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신앙에 귀의한 늑대이자 마지막 사랑에 안착한 하이에나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서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정녕 수컷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략히 그곳에서 통하는 나의 애칭만 말하자면 이랬다. 나는 그녀들에게 이상한 신사로 불렸다. 왜냐하면 나처럼 혼자 오는 손님도 없었을 뿐더러 왠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진다면서 그녀들이 그냥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궁상맞은 신세 추잡스러운 행색도 아니었으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날이면 날마다 물어봤다.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냐고! 물론 꽃다발도 사서 들고 갔다. 어디 꽃다발만? 나는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큐피트로 변신한 것이다. 실없는 잡담으로 경계심을 무마시키고 나서 우리는 은근한 거리감마저 종식시켰다. 나는 노트북을 켜서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주로 내가 아는 동생들의 멋진 모습을 은근슬쩍 보여주었다. 어머 페라리가 보이네? 쟤는 언제 요트를 배웠지? 뭐야 저 후배가 언제 재즈 피아노를 배웠지? 하면서. 나는 그랬다. 몇 번이냐고. 찍으라고.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유들유들한 농담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의도는 요만큼도 없었다. 일단 그녀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점원3 왈!
   「난 이상한 신사 좋은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찔했다. 퐁~! 신비로운 효과음은 내게 오묘한 초음파로 다가와 부드러운 환희와 섬세한 사랑 그리고 놀라운 감동을 피어나게 했다. 핑~! 오랫만에 들어보는 너무도 충격적인 고백이니까,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면서 솔직하기가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안 그러게 생겼나! 휘리리릭~! 나는, 떨렸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주춤했다. 난 마치 정신병자처럼 환청을 실제로 듣고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렴, 네 오빠, 저기 선배님, (여동생인데) 형 형, (남자 후배들은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야 야 교수님 친구가 여기 뭐하러 왔데?, 아 술값내주로! 곧 있으면 그와 같은 배역이 나타나서 환청은 환각으로 발전할 것만 같았다. 딩동댕~! 나는 정말로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벌...뭐? 아 글쎄 마음이 심하게 설렜다고! 그러니까 난 지금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나? 이 떨리는 만족감을 대체 어떡한단 말이냐. 딱 맞춰 클레멘티의 소나티네라니. 이건 한 편의 서정시이자 발레극이었고 오묘한 사랑의 신호였다. 그러므로 나는 정신 나간 열애의 끝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정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단 말인가? 더 다가오든가, 아님 확실하게 멀어지든가! 암묵적인 호소 때문에 난 설렜고, 때문에 심심함은 말끔히 말소되어버렸다. 따라서 나는 그 다음의 뭔가를 제시해야만 했다. 어떡한담? 이제 어떡하지! 그러면 일단 그녀들 명단 역시 나의 엑셀 파일에 기록해서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걸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 아닐까? 더구나 그게 왜 나쁜가! (설마 나도 그렇게 어디서 관리되고 있나?) 나는 침체된 호기심이 마침내 자극 받았다. 플라토닉 환상과 확실한 신비가 발동할 듯 말 듯 행복의 기미가 엿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사랑의 화신이 된 듯 했다고 하여, 마냥 뿌듯해하면서 우쭐할 수 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애정의 신호를 문학으로 승화시킬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쉬웠다. 예전에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가 기억난다. 제복과 얼굴하며 치마 밑으로 광휘를 비췄던 대리석 다리가 생각난다. 유난히 뽀얀 피부. 그만. 당시 그녀와 사귈 걸 그랬나 싶었다. 진짜 그만. 당시 날 좋아했던 그녀... 뭐야 이거, 또 자랑이자나? 이런, 젠장!
   그래서 나는 쩨쩨한 남자가 아닌 씩씩한 사람이기로 했다. 당분간 절대, 혼자서는, 그곳에 들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한 편의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0
 
   남자가 소박한 기질을 좋아하고 털털한 성격을 칭찬한다고 하여, 여자가 당장 들뜨고 계속 설레며 자꾸자꾸 더더욱 수수해지고 오직 소탈함만 추구한다? 그래서는 좋은 다음을 보장 못함. 우정과 사랑은 거의 똑같다고 하니까 친구에게 하듯이 애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위인에게 내 사랑을 빼았기지나 않으면 다행!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만화영화가 아니고, 젊은 날의 사랑이 꼭 청춘 드라마인 것은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에 벌꿀의 부지런함이 반응하듯이, 여자의 애교에 농심이 동화되어 구애하는 건 애정의 신호. (참고로 벌굴의 성별은 어떻다고 하며 진짜 동물 늑대도 순애보를 뽐낸다고 함) 그러나 연애의 시작이 사랑의 완성일 순 없는 법. 사랑의 고귀함 그 절반은 뭐니 뭐니 해도 찐한 사랑이니까. 산을 올라가면 산을 내려와야 하니까. 누군 걸어도 걸어도 산은 저 멀리 있고, 누군 뭐 봉우리 몇 개를 손쉽게 점령했다더라 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세간의 익숙한 표어는 이렇다. 사랑은 다이아몬드, 행복은 페라리, 웨이터 이름은 에르메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속설과 속세에 파다한 풍문은 또 꼭 그렇지는 않음. 그러니까 어떻게 다를까? 바로 이렇게 다르다. 바텐더 이름은 막살자, 우정은 내 남자친구한테 껄떡대지마 이년아, 인생은 으쌰으쌰!
   자, 이쯤하여 까레라 세일즈맨의 연애술에 쓰윽 넘어간 숙녀의 육성 고백을 들어볼까, 들어보지 말까? 과감히 생략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의 전적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불만족스러운 걸까! 그도 아니면 이제 진짜로 가슴 절절한, 애절하다 못해 이름만 들어도 코 끝이 찡한,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 그런 사랑을 시작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내가 아무리 사랑론을 학습하고, 인생관을 고민하면 뭐하나. 친구1은 아티스트병에 친구2는 왕자병, 그럼 나도 이참에 신부들러리를 사양해야 하나? 안 그래도 외로운데 의리마저 잃으라고! 때문에 우리는 부러움을 인정하기 망설이며 단짝을 교체하고, 애인마저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오나, 우리는 허풍과 어복의 친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단순한 친절함과 돌쇠식 자상함은 어디까지나 하수의 기초. 바로 그래서 나는 남성잡지 사장인 내 친구 조지와 무도회에 갔다. <물 반 고기 반>은 고수에게 재미없는 게임이니까, 정말로 촌스런 그런 곳을 딱 골라서 행차했던 것이다. 굳이 몇 명이 가는 게 제일 좋은가, 까지는 생각하지 말고. 아무튼 한가한 일상은 TV, 신나는 젊음은 NC. 나는 전자에서 후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한마디로 성비가 꽝이었다. 어떻게 불균형이어도 그렇게 불균형할 수 있지? 너무도 의아했다. 그렇다고 정말로 얌전한 처녀와 풋사랑의 불장난을 꿈꾼 건 아닌데, 남모르는 흥분감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 오랫만에 작심 하고 왔는데, 그런데 참으로 인상적인 하루라니! 그럼 그렇지. 분홍빛 행복감에 볼모로 잡혔던 기대감은 결국 꽝으로 결론나고 말았다.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뭐, 라면서 체념하며 주책없는 아저씨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지와 나, 이렇게 단둘이서 나이트클럽은 절대 가지 말자고 암묵적으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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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랫만에 일기를 썼다.
   제목: 아 뭐하는 거야? 가만히 좀 있어.
   내용: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겁이 났다. 왜냐하면 화장실 거울로 매번 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어디 악동도 아닌데, 그렇다고 눈을 까는 것도 뭔가 이상한 듯 했다. 둘 다 어정쩡한 것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이랬다. 저게 어디 예술가의 얼굴인가! 일부러 딱 삼류들만 시샘하고, 짝사랑 받을 궁리에 남의 행복이나 가로채는 주제에, 응? 꼴에 예술 한다고, 흥! 라는 비웃음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일부는 실제로 듣기도 했다. 하긴 딱 봐도 영화배우감인데 빚쟁이 세일즈맨도 있다. 어디 가나 누굴 만나나 일단 얼굴로 먹고 들어가는 무서운 얼굴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완전 순둥이! 호인도 그런 호인이 없지. 적당히 친하며 이빨만 잘 까... 그분의 진가를 알아주고 숨겨진 열망을 한 수 앞서 극찬하면? 극진한 대접은 따논 당상인 순진한 마초. 그처럼 도시의 고독한 사냥꾼은 새고샜다.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인들은 날 가만놔두질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주위의 숙녀들이 내게서 기대하는 게 무엇인 줄 모를 수 없으니까. 심지어 새롭게 등장한 새 얼굴들은 마치 누군가 꼭 엄선이라도 미리 한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나에게 제7의 전성기가 돌아온 것일까? 전성기는 무슨! 그래 봐야 다 빛 좋은 개살구다. 왜냐하면─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일절 없지만─내가 그녀들의 사랑을 모두 받아 줄 수도─귀찮아 귀찮다고─한꺼번에 모두 데리고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프로젝트 같은 거 하면서 엇비슷하게 흉내나 내보자고 하더라도 난 딱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싫으니까. 으잉~, 노노노노노노노!
   그래서 나의 복안은 무엇일까? 뭐겠나, 집중이지. 흑심은 잠재웠지만 사심은 남았으니까. 고풍스런 친교마저 마다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측했던 그녀들의 고백은 다름 아니라 결혼식장에 같이 입장해서 자기 손을 신랑에게 인계해달라? 뭐가 어쩌고 어째! 어머머, 신부들러리를 그렇게나 잘 서신다면서요? 이거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웬걸, 따라서 나는 예술가의 자존심은 내일로 연기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흥겨워야 마땅하고, 때문에 작가의 허영심을 전면에 내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당분간 허영심을 괴롭히기로 했다. 일명 가택감금! 자칫하면, 들뜬 허영심의 유혹에 냉혹한 이성은 덥썩 덜미를 잡혔다, 가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허영심의 고삐를 바짝 움켜잡았던 것이다. 녀석은 그래서 일복이 넘쳐날 수 밖에 없었다. 어복이니 여복이니 잡은 물고기가 어쩌고저쩌고? 원 세상에! (설레설레) 어머나 망측해라. 자, 영심아? 상상해봐! 딸기와 복숭아를. 떠올려보라구. 맛난 바나나를 벗기는 장면을 말이야. 앗, 방금 그거 사과향 아니니? 그러니까, 당근 전문점과 사과 과수원을 통채로 샀으니까, 빠져나갈 생각일랑 말고 진득하니 일을 하자꾸나. 일을! 알겠니? 여복 대신 일복이라고.



   12
 
   공상이 습관이듯이 회상도 일이다. 그처럼 나는 일기로 소망을 구체화시키지 못한 점을 후회했다. 또 유치한 실연이든 사랑에 실망하든 멋진 연애의 부족함에 가슴 아파했다. 아울러 도전했던 꿈의 시시함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언제나 그렇다는 건 아니고 단지 일시적인 상념에 불과했다. 결단코, 나는 자랑하고 싶어서 작가가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때 보면 내가 하는 일은 꼭 그랬다. 늘 그렇다. 다름 아니라 두고 두고 지난 날을 아쉬워한다는 듯이 유난 떨기. 펄펄 뛸 듯이는 아니지만 은근 투정이 심하고 어영부영 어리광부리기. 아마도 그건 내 특기가 아닐런지. 내가 만약 평범한 여자로 태어냈다면 어디서 허영심으로 절대 빠지지 않는 떼쓰기 여장부가 됐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잔재주 대신 허세와 자존심이 남들보다 각별했다면 자의식 과잉을 주체하지 못했을 테고.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예쁜 척, 툭하면 잘난 척할 수야 없는 일. 고로 난 어쩌면 뭘 또 겸손하게 자랑할까, 내내 그 생각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못 봐줄 만큼 유치하면 어떤가? 못 견딜 정도로 솔직하면 또 어떻고! 때문에 값싼 허풍 일색인 '할 말'은 행복한 글쓰기인 '할 일'과 이미 친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이제부터, 뭐 언제는 안 그랬다고, 못 말릴 동심의 천진함과 측정하기 곤란한 열정의 돈독한 친교를 위해서 소환하기로 했다. 누구를? 2군에서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다크호스를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곧 그분의 등번호는 7번, 이름은 흑심을 이겨낸 낭만파 모험가! 왜냐하면 무턱대고 허당계에 씨를 뿌리는 플레이보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랑의 찬가를 부를 뻔 하다 한눈팔고, 기쁜 인생 신기한 세상의 설을 풀지 못해 끙끙대며 속앓이만 해서야 쓰겠나.
   그래서 나는 정말로,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비비안의 블로그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그녀 역시 비밀번호를 하나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로그인 성공.
   비비안의 블로그에 내 마음이 도착함.
   일기 부분으로 들어감.
   내용을 읽음.
   곧바로 나는 비비안의 최신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13

   희망을 노래하며 행복을 꿈꾼다. 친구는 많고 사랑은 흔하다. 고요한 밤 별님에게 기도하며, 책읽기를 시도한다. (누군가 말하길) 신사를 제대로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헨리 제임스 읽기를 포기하기. 그러나 다시 회심 후 꾹 참고 읽기를 계속 한다. 그러다 고전음악 듣기가 슬슬 지겨워지면 명화 속에 나올 법한 미남들이 즐비한 NC에 행차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꾸미고 준비하고 이동하며, 웃고 떠들며 신나게 놀기? 아무래도 귀찮다! 무도회장을 나오는 어떤 기분은 너무도 익숙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잡지를 읽거나 TV를 켠다. 초대 받은 수영장 파티가 따분해서, 이미 여러 번 속았으니까, 바쁜 척 거짓말도 했다. 그제 했던 젊음의 행진은 피곤하기만 했고, 어제 시도했던 해변의 질주와 낯선 타인에게 말 걸기?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더럽게 재미없었다. 왜 여자가 먼저 말 걸면 못쓴다는 무슨 성문헌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무튼 뒷모습 하나는 최고였는데, 저기요! 꿈이라면 때리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되니까, 교양을 갖추어 길을 물어봤다.
   내가 찾던 환상은 결국 가짜였고, 복권에 대한 기대는 역시 언제나 상술의 환영. 그래서 나의 허영심은 미스테리─판타지─스릴러 때로는 어드벤처와 액션 장르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뿐. 그러나 수심 가득한 투정은 일기장에. 그리고 고상한 작품 구상은 내일로 미뤄야 한다. 왜냐하면 내 친구들? 아는 오빠들? 내게 바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분들과의 약속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수다 3시간? 이번에 정신 차리라고 똑부러지게 얘기를 해줄까, 해주지 말까? 그러니까 늬가 남자친구가 없는 거라고! 만약 그랬다가는 감당 못할 토라짐에 이어 나의 사교 생활은 공룡들이 살았던 쥐라기 시대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꾹 참고 귀여운 동생, 예쁘장한 숙녀, 상큼한 후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약속을 잡았다. 극장 앞에서 오빠들을 만나기로 했다. 1차 커피, 2차 영화 쥬라기 공원 관람, 3차 드라이브. 지갑은 빵빵하지 못했을지언정 계획은 완벽했다. 새로운 애교도 준비했다. 그러므로 입 튀어나온 집토끼는, 드디여 본격적으로 물 만난 플레이보이로 대변신을? 대변신은 무슨!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아아, 그렇게 개인전 및 실내 스포츠에 대한 욕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4
 
   나는 비비안의 읽기를 읽자마자 번득이는 착상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미지의 낙원을 동경하든 황홀한 자유를 갈망하든, 내 몸은 나도 모르게 비비안으로 빙의되어버렸다. 뭐랄까 비비안의 마음과 동화되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왜! 왜냐하면 솔깃한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빠져나가지 못했으니까. 곧 비비안의 일기를 읽었는데 내 안의 그분은 그야말로, 느낀 거지! 그것도 제대로. 곧 불러도 불러도 꿈쩍을 않는 호기심도, 부드럽지만 쓸모없는 감수성도 깊은 잠에서 깨어난 거다. 나는 내 주인님의 기지개를 만류할 수 없었다. 조금은 그녀의 무책임한 고백이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지적 호기심이 반응했고, 그녀는 동심이 춤을 추고.
   자, 그럼 반박의 여지가 없는 내게 최적화된 운명론이 무엇이라는 그녀의 수다를 잠시만 들어볼까? 난 벌써 손에 땀이 나며 무자비한 환상을 예상했다. 오오, 이건 정말 초유의 느낌 곧 난생 처음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숙주로써 내 몸을 그녀에게 내어주게 됐다. 물론 나는 남다른 고상함을 바탕으로 걸핏하면 세련된 궤변을 들먹이는 만담가는 아니지만, 그녀는, 그녀는 날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딱히 마음에 쏘옥 들진 않지만 그런대로, 아쉬우니까, 쓸만 했던 거지. 이건 바로 내가 내 안의 신비로운 정체성에게 신비한 사랑의 의뢰인이기를 자처한 결과였다. 예언가가 웅변하는 쾌청한 희망이니, 불행한 운명이 낭만적 환상을 만나다느니, 긴말 필요없고 당장 그녀가 미친듯이 어떤 일기를 쓰는가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도 비비안의 블로그에 말이다. 칸만 띄워서 곧바로 그것을 옮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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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되지 않는 아티스트병을 앓는 삼류 주제에 나는 과연 뼛속까지 작가인 것일까? 결과만 봐서는 답하기 썩 애매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난 단지 위선자요 연기자며 사색가일 뿐이니까. 나는 인문교양서와의 타협에 실패했고, 희망하던 추리소설은 서두조차 쓰지 못했다. 게다가 칼럼니스트로써 신망을 잃었으며,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조차 의문스러운 팬들은 낙담한지 오래다. 그럼 난 이 불행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 상금이랄지 우연히 찾아온 보물 보따리로 마음껏 소비하며 신나게 놀 궁리, 그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을 먼저 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뚜껑 없는 파란색 애마를 타고서 이탈리아 남부 해안선을 드라이브하는 건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대체해야 한다. 다정하고 섬세한 경리의 사랑과 버거킹이나 스타벅스 점원으로부터 짝사랑 받기, 허영심 쩌는 특급 미녀와 그것도 저급한 연애를? 이제는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에 대한 무분별한 미련을 버릴 때도 됐다.
   고로 이제 그만 가난한 예술가이자 의뭉스러운 몽상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자. 작명가는 내 천운, 작가는 내 천직, 허무맹랑함은 내 천성. 친구, 있다. 아름다운 꿈? 매일 꾼다. 어쩜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 아닌가 착각할 만한 천사와의 떨리는 사랑? 단지 희망찬 미래로 연기했을 뿐이다. 슬럼프는 기회고 심심함은 행복이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 마냥 그 뚱한 표정은 대체 뭘 뜻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삐악삐악 병아리인가, 아님 응애응애 꼬맹이인가. 아 그러니까 인형극을 찍을 것도 아닌데 커다란 탈과 눈물이 무슨 색정증 환자의 그것 마냥 뿜는 장난감은 왜 사고 난리인가.
   어쨌든 미녀 대회는 남의 집 잔치고, 난 허풍 대회 출전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반신반의할 필요없다. 이제부터 진짜로 행복해지면 된다. 생상스의 백조를 들으며 행복한 글쓰기, 나중 값비싼 포도주와 20세기 희대의 명화로 보답할 것이다. 밤의 제왕이라는 목적은 과욕일망정 여기서의 밤은, 곧 찬란한 목표는 새로움의 끝이었다.
   그러나 낮의 기쁨은 밤의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바나나는 노랗고, 노란색은 페라리, 페라리 하면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가 떠오른다. 곧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 공부가 제일 쉽고 일할 때 노는 것처럼 재밌을려면, 정말 그럴려면 혼자서 고독을 즐겨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못할 거도 없다. 아르키메데스도, 아르테미스도 난봉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다망함은 약간의 식탐, 약간의 낭만, 약간의 들뜬 분위기를 찾아 소풍을 떠났다. 그것은 요정들이 깜짝 놀랄 만한 뭐 그런 대단한 나들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16

   나는 다시 정체성2에서 정체성1로 복귀했다. 그리고 오늘은 주말이다.
   주말만 되면 찾아오는 모험에 대한 막연한 욕구. 이번 주말도 약속 없음은 어김없이 내 마음에 노크했다. 때문에 내 배알은 긴장했다. 넉살도 약해졌다. 심정은 은연중 아마 뭐랄까, 맹해졌다고나 할까? 역시나, 미지의 신비를 향한 동경심은 번득였다. 그러나 한가함에 대한 푸념만 공허할 뿐. 그래서 나는 혼자서 3부 리그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물론 가기 전에 당연히 망설였다. 왜냐하면 객관식 문제처럼 내게는 3가지 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바로 이렇다.
   첫째, 단편영화를 찍는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번화가를 돌아다니기. 그러면서 이색적인 발상과 신들린 영감을 찾고, 색다른 장면을 기억에 담으며, 하나도 새롭지 않은 일상을 잔상에 남기기. 둘째는 동물원 셋째는 미술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 후보군을 퇴짜놨고 뻔트를 댔다. 그리하여 축구 경기를 보고 온 결과만 말하자면, 그냥 그랬다. 차라리 집에서 축구 게임을 할 걸 그랬나, 아니면 (자칭)훌리건 '조마조마' 친구들에게 연락할 걸 그랬나, 그도 아니면 경기장에 무심코 난입하여 제지당하든 체포당하든 그럴 걸 그랬나 싶었다. 물론 농담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시는 3부 리그 경기를 보러 가나 봐라, 라고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때문에 황금 같은 주말이 또 이처럼 흐지부지 지나가는구나 라면서 조바심이 일었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면서 뭔가 생산적이고, 뭔가 새로우면서, 뭔가 신기한 경험을 하고 싶은 외향적 충동은 알력 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누구와? 집에서 편히 평균율이나 듣고, 좋게 백마의 기사나 읽고, 발가락을 만지던 손으로 과자를 집어먹으며 (자빠져) TV나 보자는 내성적인 성정과!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괜히 기분 좋은 주말이 그냥 지나가버리면 너무도 섭섭할 것만 같았다.
   따라서 나는 칠판에 적었다. 미리미리 이럴 때를 대비해 칠판을 준비해 놓음. 뭐라고 적었냐면 바로 이렇게 적었다.
   1.소원
   2.갈망
   3.애증
   달랑 명사만 쓰면 즐거운 여행과 숙녀들의 짝사랑 때문에 행복한 고민과 달콤한 골머리를 앓아야 한단 말이냐, 하면 꼭 그건 아니다. 하지만 글로 적어서 주말을 재밌고 보람차게 보내고 싶은 심난한 욕심을 구체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끝끝내 결실을 맺었다.
   고로 나의 행동은 소기의 성과를 가져왔다. 생각해보니까 저건 다른 말로 변환이 가능했다. 그건 이와 같다.
   1번은 소비
   2번은 해변에서 일광욕
   3번은 새롭던지 지겹던지 어쨌던 만남이었다.
   (딱)! 이거다. 바로 이거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부딪혀보기로 했다. 내가 18살 미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좌우지간 저 1-2-3 카운트다운의 결과는 갔다와서 옮기던가, 별볼일 없으면 일기에나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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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악마의 약혼녀 같은 칼럼은 다 잊고 깔끔하게 새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타성을 따돌렸고 권태와 싸워 승리했다. 솔직히 나는 그 녀석과 다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쾌락이 절대 강자라는 걸 잘 아니까. 그러나 한판 뜨자며 자꾸 내 주위에서 알짱대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녀석을 덥썩 껴안고 와락 키스를? 하도 귀찮게 하길래 나는 녀석을 가뿐히 쓰러트렸다. 만약 녀석과 다투지 않고 적당히 협상했다면 난 분명 이랬을 것이다. 지겹고 미루고 따분하다 못해 딴청 피우며, 투정에 불만에 한눈팔기! 다른 말로 매너리즘? 안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남자답게(이 표현이 어째 뭔가 망설여지는군) 녀석과 정면 승부를 펼치기로 했다. 결과는 나의 낙승. 한판 붙어보니 내 상대도 안되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데 틈만나면 아무 때나 불현듯 출연하고, 어디서나 불쑥 나타나는 불청객. 별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응? 유명인에게 연예인병이 있다면 일반인에게는 권태가 있다. 그런데 그 구분은 명확치 않다는 걸 살다보면 알게 된다. 조증도 궁금증도, 이기심도 시기심도, 오손도손 우리와 교분이 두텁다. 허당이 허풍을 끊겠나, 똥개가 영역 표시를 끊겠나. 왜냐하면 심리학적으로 우린 모두 광대이자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권태는 내 앞에서 권세를 뽐내다가 큰코다쳤다.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으하하하하하하!
   그런데 그 말은 다 뻥이다. 순 거짓말이란 말이다. 나는 타성에게 완패했다. 또 졌다. 왜 안지나 했다. 질 걸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이트클럽의 미러볼이란 약발이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청순한 숙녀가 상큼한 어조 그 낭랑한 목소리로 우리 상남자들 심금을 울리는 <오빠>를 듣고 싶어서 그랬을까. 나는 그게 아마도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상태가 좀 안 좋아졌을 것이다, 라고 짐작했다.
   따라서 나는 이 시점에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해야만 했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조커인 줄 알았는데 꽝이었다. 곧 친구에게 한턱낼려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았는데, 그런데 듣게 된 말은 점원 왈!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손님 (체크카드) 잔고 부족인데요, 혹시 다른...!
   말하자면 나는 놀 수 있는 경비가 부족했다. 모델비가 없어서 자화상을 그렸다는 화가처럼, 칼럼 왜 안 쓰냐는 마라의 보챔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아리아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싸움닭은 야생마로 변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뿐이 모르던 경주마는 마침내 미친 개가 되어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여행의 분류는 세 가지다.
   첫째, 놀러간다
   둘째, 쉬러간다
   셋째, 기분 전환 및 겸사겸사
   여행까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타인의 빈말에 동조하려고 친구들은 모두 커플인 여행에 정말 마지 못해 솔로가 응했다가 어떻게 됐다더라, 같은 일도 있다. 그처럼 아마 내 여행의 목적은 네 번째였을 것이다. 이를 테면 빠삐용의 휴가라고나 할까. 살짝 과장하자면 떠나서 7주 동안 이어질 쾌활함과 7개월 동안 지속될 활기를 내 덜덜대는 체력과 바꿀 생각이었다. 그렇게 될려나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갔다 와서 여행기는 흥미롭다고 느꼈을 때만 쓸 것이다. 재미없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지도 않은 것처럼 모른 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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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두까기 인형, 사면 된다. 우피치 미술관? 책이나 TV로 보면 된다. 가 봐도 별거 없다. 요즘 떠오르는 상큼한 숙녀 누구? 화장 지우면 다 똑같다. 서머싯 몸의 조언은 잊을 수 없지만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여자도 말한다. 남자를 보며,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동률이다. 인기 있는 그녀들의 연애사를 연구하고, 허영심을 탐구하며, 궁극적 욕망을 알고 나면? 어쩜 실망할지도 모른다. 뭐, 대실망? (설레설레) 아니기를! 어디 가 봤냐, 뭐 해 봤냐, 무언가 괜찮은 걸 써 봤냐, 사지 마 하지 마 왜냐하면 막상 갖고 나면 별로니까, 원래 욕구란 그런 거거든, 차라리 헛된 충동을 달래던 그 시절이 낫긴 나았어! 라~며 허세로 유난 떠는 친구?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반갑다. 보고 싶어도 볼 시간도 없다. 그러니까 봐 주고 우정을 2.0으로 발전시켜도 어차피 나중 각자 인생을 즐기느라 자주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일찍 알수록 좋다. 무엇을? 바로 우리에게 자랑은 중증이고, 질투는 본능이며, 나보다 자존심이 센 사람 찾기는 일도 아니라는 점을! 병적일 정도로 잘난 척 하는 위인 역시 결코 드물지 않다는 것을!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자의식이 고위급인 두 사람이 만나면 그 결과를. 자존심왕 둘이 만나면 보기는 이와 같다. 첫째 친해진다, 둘째 싸운다, 셋째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한다, 넷째 나머지. 그러나 결국 그분의 본심은 그것이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다고! 물론 당신은 멋진 남자니까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깎아내리지 말라고 한다.
   따라서 어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바로 인생은 학예회라는 것을. 세상은 그처럼 천재들의 경연장이다. 질문을 받으면 말을 돌리고, 말 돌리면 말 돌리는 거 싫어한다고 압박하며, 이유를 말할 때 습관적으로 뜸을 들이고, 관계를 지속시킬 때 자꾸만 애태우는 일. 우정으로부터 사랑을 가로채지는 않더라도 말은 툭하면 맞받아치기. 기분 나빠하지 않게 넌지시 돌려서 말했더니 글쎄, 직접화법이 아니라며 상남자 뚜껑 열리는 일. 모두, 우리의, 일상이다. 은색 플룻과 금빛 트럼펫이 딱 있다고 치자. 그럼 꼭 그런 사람이 있다. 부를 줄도 모르면서 독학이 어떻다느니, 내 관심사와의 유사점을 찾고 없어도 만들어서 화제를 축구로 슬며시 돌리는 양반! 있다, 없다? 있다! 적지도 않다. 웃기는! 어머나 최고급 테니스 채가 보이네? 들을 말은 뻔하다. 어떻게 응~ 테니스 채 잡을 줄이나 알어, 라면서 대결은 시작되고 억지로 져줄 때까지 승부는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 진짜로 그래서 10년 내내 일 빼놓고는 그것만 했다는 사람, 왜 없겠나. 그분들께서 놀 때는 그래도 또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그 흔한 인문교양서와 장편소설의 기술과 속임수는 그것이다. 곧, TV 채널 돌리기! 따라서 생산자와 카피라이터 그리고 오락산업이 우리에게 채널을 돌리는 만능의 권한을 부과하는 일, 그건 즉 당근이자 채찍이다. 우리가 무슨 집토끼인가 산토끼인가, 아니면 자칭 플레이보이? 술꾼은 술 좀 작작 마시라며 아동이 타이르고, 허풍꾼은 뻥의 수준을 높이길 애호가가 기원한다. 다시 말해 어른들이 잘 속고, 또 무슨 일이든 슬쩍 한 발만 담그는 이유는 그것이다. 하수는 고수 따라하기, 고수는 하수 주니어 길들이기, 다시 얄개들은 이기주의자로써 애청하며 이용하고 나중엔 결국 쓰다 버리기! 뭐? 결국 물고 물리는 접전이구만 그래! 그러므로 행복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유익한 속셈의 승리와 유복한 재능의 부재를 극복함, 뚜렷한 자의식과 선명한 주관의 멋진 행동주의! 요컨대 그것은 단 두 가지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다. 즉 TV 채널을 맘대로 돌리느냐, TV를 내 맘대로 켜거나 끄거나냐!
   말하자면 우리는 후자보다 전자가 우위를 점하는 능력이라고 날 달래고, 다독이며, 긍정하는 건 어닐런지! 하지만 1.2 정도 수준의 준-단짝을 영입하고, 새로운 취미를 즐기는 일이 과연 어느 버튼인가는 꽤 애매하기만 하다.
   끝으로 하나 고백하자면 최근 겪은 일을 기록한 건 모두 진짜다. 딱 하나만 빼고. 나는 비비안의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녀를 제대로 알아야 큐피트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면서,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차마 시도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번에는 우연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느 선을 능동적으로 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특한 일일까? 아니다. 칭찬 받아야 마땅할까? 전혀 아니다. 당연한 일일뿐. 하지만 그거 빼고는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그런데 가상으로 들어가본 비비안의 내면 세계는 부인할 수 없이 완전한 환상이었다. 분위기가 딱 좋았고, 가슴이 뿌듯했으며, 기분이 우쭐했다. 마음이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나는 비밀의 상속자가 된 듯 했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갑자기 성공하거나 유명해지면 세상과 타협하거나 불의에 굴복거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먹듯이, 나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는 것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렇듯 일은 몰라도 놀이에 대해서라면 난 지금 (알량할지는 몰라도) 요령이 생겨 시간도 벌고 재미도 배가됐다. 하지만 아직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열정에 따라 행동하며, 최선의 성과를 생산하는지를. 세상을 차차 알아가고, 인생의 비밀을 종종 탐구하며, 사랑의 원리를 왕왕 추적할 수 밖에. 아침을 흑심으로 시작한다랄지 거리에서 뭔가에 눈독을 들이며 혼자 법석을 떨 수는 있다. 상냥한 여심에 몰지각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쓸 수도 있고. 그러나 나는 낙천적인 운명론자로써 현실과 꿈과 희망을 빤히 응시할 것이다. 언제까지라도. 아무리 뻔할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의 의미를 알고 행복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말은 그래 놓고, 오늘도 번듯하게 반나체 여인의 사진을 감상할지, 감상하지 않을지 선뜻 자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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