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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6. 3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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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는 행복한 마음으로 기쁘게 일하기, 일과가 끝나면 다정한 눈빛으로 사랑을 노래하며 놀기.
   전자와 후자가 반복되는 타성은 그에게 뭔지 모를 따분함을 안겨주었다. 때문에 청년다운 심심함은 그 축 쳐지는 눅눅함을 선명한 휴식이랄지 달콤한 놀이로 바꾸고 싶어졌다. 유난히 떠나고 싶은 충동은 심하지 않았고 딱히 축하 받을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운명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하오나 달리 애원할 새로움은 없었으니 놀러갈 약혼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긴 남의 집 잔치는 재미없다. 차려입기도 귀찮다. 흔히 보면 꼭 약혼식 같은 거창한 예식장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어른들이 딱 이와 같은 하찮은 투정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고서 인터넷에서 드라마에서 또 본 건 있어가지고 과장된 허영심으로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에 또 뭔가 얘깃거리를 만들어 올린다. 타인의 투정을 평가하고 현대인의 불만을 풍자한다. 그것도 절반쯤 놀이니까. 그렇지만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일도 있긴 하지만, 현대를 사는 행복의 전파자로써 그 모두를 썩 불건전한 생활 방식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좌우지간, 그러다 그는 문득 도나가 생각났다.
   그렇지. 도나가 있었지. 특유의 발랄한 태도 때문에 그는 친구 도나가 보고 싶어졌다. 그 해맑은 웃음. 그 쾌활한 명랑함. 때로는 정숙하고 도도하며, 어쩌다 조증에 허언증까지. 천진하게 재잘대는 그 모습. 그건 어떻게 보자면 요정이고 어떻게 보면 순정만화 주인공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본인이 백번 양보해서 호의를 보이고, 환심을 사며, 주변에서 집적거림이 옳은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오빠니까. 더구나 그녀가 그런 구도를 바랄 테니까. 그래도 사랑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최소한 좋은 남자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마다할 수 없다. 아무튼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은근 기묘한 친분은 이미 쌓여버린 것이다. 그처럼 그녀는 그에게 잠시나마 동화 속 공주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딱 도나에게 연락할려고 했다. 그런데 묘한 우연의 일치처럼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마침 연정의 텔레파시가 통한 것일까? 그치만 그녀의 어조로 판단하건대 썩 희망적이진 않았다.
   「오빠 뭐해?」
   「응. 난 있지...」
   그녀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벨! 문 안 열어? 오늘 오빠 당번이야. 지나가다 봤어. 오빠! 벌금 또 낼 꺼야? 조, 너 지금 뭔 생각하는데? 뭐 하고 있었어, 오빠! 뭔 생각하다 잊어먹은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상한데. 단란한 유흥의 몰입자 같으니라고. 오빠. 베를리오즈 신경 좀 쓰자. 응? 게다가 내가 일부러 오빠 끌어들인 거도 아니다. 어쨌든 내가 오늘 친구들 데리고 들릴 수도 있어. 내가 특별히 오빠 생각해서 상속녀 아니면 이혼녀, 둘 중 하나는 데리고 갈께. 둘 다 데려갈 수도 있고. 그런데 못 갈 수도 있어. 농담이고, 어서 가보시게나. 알았지 오빠? 그럼 끊는다. 청소 내 마음에 들면 깜짝 선물 생각해볼께.」
   뚝-!
   도나는 조의 마누라가 아니다. 그런데 꼭 오래 같이 산 여편네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래서 조는 겨우 그녀의 목소리만 들었다. 하지만 달리 만감이 교차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 벨! 벨은 베를리오즈의 약칭이다. 베를리오즈는 조를 포함해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결성한 아지트 이름이다. 사설 카페니까 뭔가 있어 보일려면 입구에 수트 입은 8 대 2 가르마 아저씨와 가죽점퍼 입은 단발머리 락커를 최소 2명 이상 배치해야 하는데, 그건 일단 연기한 상태다. 이러다 흐지부지될지도 모르지만 엄연히 지금은 당번을 돌아가면서 맡아야 했다. 출자는 20명 정도였고, 운영비는 출자비로 사둔 주식의 배당과 일부 주식 매매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영화 찍을 일이 추억이라면 이런 아지트 놀이는 놀림감도, 불운의 화근도 아닐 것이다. 물론 시작은 으쌰으샤였다. 그런데 초심의 의도와는 달리 살짝 삐걱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쓸 만한 아지트였다.
   조는 아지트로 갔다.
   멀지도 않았다. 벌써 도착했으니까.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오늘따라 너무도 한가했다. 다들 바쁘나 보지 뭐.
   와, 그런데 이게 뭐야?
   그는 어떤 숙녀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보관하고 돌려줄 수 있으니까 어쩌다가 공책을 펼쳐보게 됐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 딱 감고 딱 1쪽만 읽어버렸다. 그 일기는 다음과 같다.



   2
 
   제목: 일기
   내용: 날짜는 쓰기 싫음. 날씨는 흐림.
   처음 만나 손을 잡고 연애를 시작하여 기념일을 암기했는데, 어느덧 혼자서 이별가를 부르는 일. 만약 마음이 오고 갔다면 그건 어쩌면 사랑일 것이다. 미처 내 마음이 선심인지 애정인지 아니면 흑심뿐인지 잘 모르겠다면 이제는 전-애인이나 풋사랑 둘 중 하나일 테고. 오래 지나서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떠올리며 전화번호를 잊지 못하니까 사랑했다, 사랑 받지 못했다? 아마도 확률은 우리 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해석은 내 마음대로일 테고 무의식은 고집이 세니까. 그런데 사석에서 오가는 우정의 대화를 모를 만큼 세상은 우리를 마냥 순진하도록 가만 놔두질 않는다. 허당의 친구들조차 도저히 그러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심으로 기분을 맞추고, 괜찮은 유행가를 생음악으로 불러서 분위기를 띄우면 어떨까? 참 좋을 때다! 즉 아름다운 시절. 비꼬는 게 아니다. 꼭 창창한 젊음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만인에게 공평하니까. 그러나 큐피트가 우릴 도와줄지 어쩔지 한발 앞서 예상하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까 사랑도 조금은 뭐랄까, 재밌는 익살꾼의 스포츠 응원이 점차 아유로 바뀌는 것처럼 살짝 결과론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은 놀이로 시작해서 일이 될지, 아님 그 반대처럼 진행될지 아리송할 뿐. 아무튼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 단순히 따라했을지도 모르고. 그야 어떻든, 다만 이처럼 마땅한 문제 제기는 지극히 합당한 일. 그러든 어쩌든 사랑이란 주제는 오락산업에서 만고불변의 1인자. 고로 신기한 사랑으로 행복한 인생에 도달하는, 아하, 놀라운 사랑론이라는 책이나 써볼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꽤 유명해지면 적잖이 피곤해질 텐데... 그냥 그러지 말자! 내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오늘 누군가는 그 남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잡을 듯 잡을 듯 거의 여심을 잡았으나, 여체는 잡을 뻔 잡을 뻔 하다 끝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골머리를 끙끙 앓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그야 어떻든 그분들 인생이고 타인의 팔자 소관. 그러니까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참 나! 일하기가 잘되면 놀기가 안 풀리고, 허언증이 완치되니 불면증이 도지고. (설레설레)! 인생은 쉬운 게 아니듯 사랑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다만 뭐는 아무나 피우는 게 아니다, 의 뭐는 생각치 말자.
   결론은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측은한 늑대의 마음은 대략 세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첫째, 잠을 자야 하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둘째, 오-땡큐! 는 그만 잊자. 완전히 잊자. 끝까지 잊자.
   셋째,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 순정의 사랑을 측량하는 상상.
   그런데 사랑의 감정과 열매가 그 얼마나 달콤하다고, 그 얼마나 신비롭다고, 그 얼마나 적나라하다고 또 다시 사랑을 들먹인단 말인가. 행복한 내일로 떠나는 꿈나라의 티켓 하며 참 유난스럽다. 쯧쯧쯧!



   3
 
   이번 만큼은 궁금증이 발생했으면 군말 없이 선뜻 이실직고하기로 하죠. 왜냐하면 듣고 싶어요 선생님 첫날밤(첫사랑인가 첫키스던가) 얘기해주세요, 에 대한 노림수는 소녀의 애원이 아니라 기분파의 귀여운 저주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
   요점만 말하자면 아지트 베를리오즈는 조용했다. 마침 진짜로 다들 바쁜 듯 했다. 그리고 그날 들린다고 했던 빈말을 도나는 지켰다. 도나는 B에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왔다. 그럼 한 명은 상속녀 한 명은 이혼녀? 중의적인 추정을 멋 모르고 아낌없이 발설하면 맞이할 결과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그래서 조는 힘겹게 인사만 나눈 후 꾹 참고 함구했다.
   「오빠. 일기장 같은 거 못봤어? 아, 저기 있다. 그래. 그렇다니까. 내가 봤다니까. 오빠 그 일기 얘가 쓴 거야. (눈인사) 다 읽었어? 시간 넉넉했을 텐데! 농담이고, 안 봤지? 그럴 꺼야. 그렇지만 봐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그거 책으로 만들어 팔 거니까. 하긴 글 먼저 읽고 막 멋대로 화사한 풍경을 바탕으로 눈부신 아가씨의 미모를 상상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어떡하지? 실망이 이만저만하지 않을 텐데!」
   그러면서 그녀들끼리 꺄르르 웃으며 즐거운 분위기 일색이었다. 뭐 어떻든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는 도나의 의견에 반론을 표명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체념했다는 뜻은 아니고. 어떻게 더 친해질 가능성이야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남녀 사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정녕 뭔가 애매한 숙녀가 볼수록 매력인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여성잡지1의 절반이 괜히 화장술과 변장술인 게 아니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빠가 한 남자를 알거든. 친구들까지 하면 그쪽도 삼총사야. 아무튼 그 친구가 일기 하나는 정말 끝장나게 잘 써. 크아! 막, 사랑의 나라는 바보의 세계라며 아아~ (설레설레) 말도 마. 그런데, 어떻게 오빠가 그 친구 소개시켜줄까? 말만 해. 정말 괜찮은 친구들이라니까.」
   「오빠. 남자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내 행운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챙겨야 하는데, 난 그 기쁨의 파도타기에 물의를 일으킨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난 그녀들에게 내가 비운의 노력파란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4

   그는 이랬다. 날씨가 맑았다가 흐렸다가, 분위기가 밝았다가 흐려졌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즐거운 일하기는 특별히 기쁘지도 딱히 싫지도 않았다. 이따금 사는 낙이 없다거나 일상이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일하기가 순조롭고 언제나 몰입할 정도로 신났느냐, 하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곧 간사한 기분처럼 조금은 지겨운 일하기 역시, 좋았다가 나빴다가, 딱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도 일일 수 있듯이 놀기도 그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농사꾼에게는 나쁜 땅이 없다고 대어를 향한 열망은 변치 않았다. 부귀영화에 묻어가는 인복도 필요치 않았고, 기쁜 여복도 정중히 사양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는가, 하면 그럴 리가 있겠나. 그는 플레이보이의 3박자에 대한 칼럼을 쓰다가 마침내 진짜로 토끼를 키우기까지 했다. 내 마법으로 너에게 날개를 달아주마 라며 밑도 끝도 없이 모성애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토끼가 사람일 수 없듯이 어떻게 토끼로부터 대리만족을 듬뿍 바라겠나. 단지 기분전환이라면 몰라도. 게다가 토끼가 어느새 주인 행색을 하며 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토끼를 모방했다. 그래서 그는 토끼를 분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깨달았다. 자기는 일하기를 너무 심하게 좋아하는 건 아니다 라는 진실을. 곧 그 역시 행운을 타며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운명선이 있음을 알게 됐다. 쾌조의 출발이 막판 대역전과 다정한 한짝이기는 여간 해선 어렵듯이. 따라서 새로운 작전은 명확해졌다.
   일은 잘될 때까지 기다리기. 복덩이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올 때까지 버티기. 못 견디게 아름다운 사랑은 기다리는 즐거움을 위하여 애절하게 그리워하기. 고로 오늘만 있는 것처럼 재밌게 놀기가 최고라는 결론이 옳았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 밑 빠진 독 마냥 부족한 품위 유지비는? 그래서 JS는 여느 때처럼 늠름히 발걸음을 사무실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지긋지긋하지도 않았고, 팔짜가 유난스레 밉지도 않았다. 그가 변치 않는 심심한 분위기에 신물이 날 리가 있나. 긍정 대 부정의 몇 대 몇 비율이 어떻다는 이론을 잘 아니까. 그래서 일상적인 불쾌감이 썩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로 가는 길에 조는 전화를 받게 됐다.
   그건 톰의 전화였다.
   「조, 잘 지내? 자주 연락하지 못하네. 저번에 만나기로 하고서 내가 약속 어기고. 미안 미안. 일이 자꾸 그렇게 되네 친구. 나중 한꺼번에 갚을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아. 그런데 정작 나중에 가서 내가 널 실망시키면 어쩌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늬가 내게 3 대 3 소개팅을 주선해주면 되겠다. 에이, 괜히 걱정했잖아. 별일도 아닌데 말이야. 허허허. 어떻게 된 게 말이야, 오랫만에 연락해 놓고 나 혼자 쓸데없는 얘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군. 아차, 내 정신 좀 봐.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라구. 친구. 놀이공원에 같이 놀러가자는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너 지금 웃기는 웃는데 그거 썩은 미소지? 우리끼리 그러기야? 안 봐도 뻔하다야. 아, 맞다. 너가 저번에 쓴 칼럼 나도 읽었어. 와, 이제 곧 축구 저널리스트 하는 거야?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딱 골라서 썼니? 우린 뭔가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그런데 혹시 3부 리그에서 연락오지 않았니? 그거 읽고 나서 감동 받았다며 우리 팀 감독을 맡아달라고 말이야. 조! 우리 있잖아, 그분들 밥그릇은 건드리지 말자구. 너도 알잖아. 내가 경기장 가서 응원하다 보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말이야.
   그나저나 얘기 들었지? 나 실연당한 거 말이야. 게다가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나 회사 그만뒀어. 어차피 회사 옮길 때가 됐거든. 나도 뭐랄까 말단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나 할까? 말로만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언제 한번 만나자. 우리들 으쌰으쌰한지도 오래 됐잖아? 언제 한번 달려야지. 응? 아 그런데 나 통화 길게 못하겠다. 갑자기 스카우터와 약속이 잡혀버렸거든.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꺼 아니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음에 내가 하늘의 별을 따주든 공룡이나 고래를 잡아주던지, 선물도 하고 너 끔찍하게 챙길께. 그럼. 너 사냥 안 해 봤지? 투우장도 안 가봤지? 형이 일정 다 준비해놨거든. 그러니까 이번 딱 한 번만 베를리오즈 당번 대타 부탁한다. 응? 너도 알잖아. 내가 부탁할 사람이 어디 있니? 내 친한 친구라고 해 봐야 세 명 밖에 더 있니? 불쌍한 친구 동냥하는 셈 치고 이번 한번만 당번 부탁할께. 너가 어려울 때 내 사정 봐주는데 내가 나중 장외 홈런 치면 어떻게 널 모른 체 할 수 있겠니? 나 나중에 그럴 꺼야. 인터뷰할 때 늬 존재를 알릴 거라구. OK?
   형이 항상 늬 생각하고 있는 거 알지? 정 붙일 데 없고, 사는 낙도 그저 그렇고, 사랑마저 아직인 남자. 그러나, 여자들의 영원한 이상형! 캬~!
   내가 굳이 이런 얘기까지는 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음 그게 있잖아,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말씀 드리자면 이와 같다네. 너 시향에 누구 아는 사람 있니? 형이 또 거기 골드-회원이잖냐. 그렇다고 콧대 높은 제2바이올린 수석이나 도도한 쳄발리스트와 만나자는 얘기가 아니야. 어차피 화장 지우면 다 똑같아.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니, 어? 아지트 베를리오즈에서 환상교향곡을 듣는 게 아니라 대망의 뻔트를 논하는 친구들 아니니! 응? 그러니까 모나리자 미소의 추종자로써 내가 시향 사무실 경리 아가씨 두 명이랑 2 대 2 소개팅 준비해뒀다. 푸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 허허허허허. 잔치상은 다 차려진 거나 마찬가지야. 넌 그냥 슥 숟가락만 얹으면 돼. 알겠니?」
   와! 그는 톰이 이렇게나 말 많은 친구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야 어쨌든,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야망이 어떻고 허풍에 대한 신심이 어떻건 그는 발길을 아지트 B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5

   미지의 행복감. 가슴 뭉클한 사랑. 눈부신 흥미와 다정한 재미에 둘러싸인 빡빡한 일정. 그리고 처음 알게 된 기막힌 비밀. 친애하는 사교와 귀찮은 인기 하며 놀라운 호사와 신기한 사치! 그는 덧없는 꿈 같은 헛된 상상에서 그만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베네치아 무슨 광장에 놀러간다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급 소매치기를 만날지도 모른다. 어쩌다 앤트워프에서 이방인으로써 외롭거나 리스본에서 뜬금없이 스토커로 추궁 받느니 좋게 집에서 블로그나 하는 게 낫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나는 탐험을 좋아하고 뜬금없는 전개에 말리고 엮이는 주인공 심리? 떼도 옛날에 뗏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가택감금에 사무실에서 과거의 비운에 조소를, 타인의 비범함에 질투를, 자신의 평범함에 절망을? 아니 될 일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라고 결정했다. 고로 그는 오늘은 사무실로 출근할 게 아니라 식물원에 구경가자고 생각했다.
   딱 그처럼 식물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순간 포르토피노 동생인 이브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오빠. 사랑하는 내 오빠. 아 글쎄 릴리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 줄 알아? 어떻게... 걔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아시나요, 오라버니! 체. 말도 안 나온 다니까. 하도 흉하게 하고 다니길래 내가 아는 여성잡지1식 자식을 모조리 전수해주고, 여성잡지2에서 미쳐 못 다룬 특종을 특별히 걔한테만 조심스레 알려줬는데, 그런데 뭐라고? 허 참 나! 내가 아는 오빠들 은밀히 전부 소개시켜줬더니 아 글쎄, 뭐가 어쩌고 어째? 얘가 은근 사람을 들었다 놓고 그러네. 허! 어이 없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다니까. 글쎄 릴리가 뭐라고 그랬냐면, 오빠. 오빠가 객관적으로 누구 잘못인지 판단을 내려줘. 걔가 나 보고 그랬다니까.
   뭐,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내가 그 정도로 잘난 척─아는 척─멋진 척이라고? 오빠, 그게 말이 돼?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누구보다 오빠가 날 잘 알잖아.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걔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응? 오빠. 친구로써 그게 할 말이니? 참 나! 또 뭐라더라? 맞다! 언제 어디서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내가 뭐 재수없다나? 내가 유난 떨기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신념을 지녔다나? 그 못생긴 년이 잘한다 잘한다 챙겨줬더니, 이제 와서 뭐라고? 별꼴이야 정말! 아 이쁜 척은 지가 다 하면서, 뭐라고? 아 그래 안 그래? 오빠. 이러니 내가 열 받지 않게 생겼니?
   릴리 그것이 은근 맹한 거 같아도 꼭 보면 조목조목 할 말은 다 한다니까. 자기 실속은 절대 놓치지 않아. 눈치를 줘도 일부러 따박따박 딴소리하고. 꼴 보기 싫어. 게다가 걔 얼마나 응큼한 줄 알아, 오빠? 꼬리는 또 얼마나, 하! 말도 마 말도 마셔. 애교는 내가 걔보다 한 수 위지만, 객관적으로 그건 오빠도 인정하는 거니까. 그런데 있잖아 오빠, 내숭은 내가 걔 따라가지도 못해. 그러니까 오빠도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좋을 꺼야. 뭐야! 오빠 지금 그 생각했지? 둘이 싸우는 모습 정말 볼 만하겠다 라고.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내가 걔 가만 둘 거 같아? 어림없어!
   이런 말 하기는 차마 부끄럽지만 말이 나온김에 하자면 이래. 말하자면 내가 언제 한번 오빠들 앞에서, 아무튼 자세한 걸 차마 말할 수는 없고. 음, 오빤 그냥 내 설레발 만으로 짐작만 하고 있어. 그런데 오빠! 오빠 책 나왔어? 응? 난 친구들한테 벌써 자랑해놨는데. 그런데 아직이면 어떡해! 내 전-남자친구는 히포크라테스의 후예, 친구는 큐레이터, 동생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저널리스트, 오빠는 바람둥이, 그리고 구색을 갖출려면 소설가도 한 명쯤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오빠도 알잖아. 말상 아나운서에 원숭이상 관상가, 개상인 동화작가와 고양이상인 회사원등 내가 아는 친구들이 좀 많니? 게다가 그 친구들이 얼마나 잘나가는데. 심지어 후작이랑 백작도 있어. 난 끼지도 못해. 여자들 모이면 어떻다는 거 오빠도 모르진 않을 꺼야. 뭐, 다이아몬드? 어떻게 무리해서...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 나도 루쏘로 확 바꿔버릴까? 그래도 더 이상 허영심의 애정은 감당이 안돼. 인기 없는 허세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농담이고, 오빠 책 나오면 자필 싸인 1호는 나다 오빠? 알지? 그러니까, 설마 오라버니께서 정숙한 처녀의 마음을 몰라주시지는 않겠지요. 아닐 꺼야. 오빠가 그렇게 막돼먹은 한량은 아니니까 말이야. 오빠는 말이야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로 성격이 좋거든. 호호호. 더군다나 오빠는 나대는 탕자도, 돌아온 싱글도, 설치는 험담가도 다 아니고, (딱)! 내 오빠니까. 더구나, 젊은 게 한밑천인데 좀 가난하면 어때? 원래 크게 될려면 한때 비리비리하고 고생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 그림이 딱 나온다니까. 오빠도 잘 알잖아? 내가 오빠 관상만 대충 봐도 대성할 부류라니까 그러네. 걱정 마, 응? 오빠. 오빠 방금 봤어? 내 윙크 말야. 오빠 천리안이잖아. 아아, 부끄러웠구나. 이해할께. 호호호. 호호호호호.
   오빠. 그런데 있잖아. 우리가 만날 수 없었다면 오빤 어쩔 뻔 했어? 하긴 내가 좀 예쁘긴 하지. 내가 특별히 오빠니까 친구 흉도 보고 내 자랑도 맘 편히 허고 그러는 거라고. 알겠수? 우리 오빠가 왜 모르겠어! 그런데 오빠 또 뜬금없이 막 그런 말 할려는 거 아니지?
   타인의 인생론은 타인의 인생론에 불과하단다. 완전한 네 것이 아니면 그때 뿐인 거지. 물론 뭘 좀 모르다는 가정 하에서만!
   어때? 오빠 성대 모사 좀 비슷했어? 정말로 비슷했냐고? 응?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있잖아, 막 그러거든. 뭘 좀 아는 남자 가운데 몇몇은 귀여운 숙녀가 남자 흉내내며 남자처럼 말하는 걸 완전 좋아하거든. 물론 좋은 얘기도 삼 세 번이라고 특기를 남발하면 안되겠지. 그런데 내가 뭔 얘기를 할려다가 여기까지 왔지? 대체 여긴 어디야! 오빠한테 분명 할 말이 있었는데... 뭐였지? 뭐였더라?
   아 맞다. 생각났다. 그거였구나. 오빠 있잖아. 내가 친한 친구 약혼식이 있다는 걸 깜빡했지 뭐니? 그래서 말인데......」
   겨우 이 정도로 조의 뚜껑이 열릴 수는 없었다. 아직 간의 기별도 안 찼으니까. 어림도 없지. 고작 이런 웃음과 간지러운 뻔트 정도로 조가 한마디 한다? 꿈에서는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대사를!
   「와, 정말 너네들 가지 가지 한다!」
   결국 그가 가진 카드 패는 약간 시든 청춘이었고, 그건 낙장불입 때문에 노심초사 매사 망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심지어 이브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오늘도 아지트 베를리오즈로 향했다. 마치 식물원은 애초에 가기 싫었다는 것처럼.



   6

   변덕스러운 성정. 툭하면 싫증내기 좋아하는 성미.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발랄함. 게다가 남의 흉 보는 걸 싫어한다는 자평과 모순되는 행동들. 그리고 사랑의 전적. 우정에 대한 활약상. 그 밖에 소원. 일기. 대망. 그리고 행복한 인생. 때로는 불운까지 속속들이 나를 알 수 있는 예술적 실체를 말 이외의 것으로 구체화하기.
   열거한 내용은 무엇일까? 성격 테스트 결과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 꺼려하는 목록도 아니고 도전해야 할 새로움도 아니다. 이건 단지 비슷한 것들끼리 질서 있게 그룹 편성을 할려다가 미뤄둔 메모일 뿐이다. 곧 JS에게 할 말은 외로움과 생각하기에서 발생했고, 그것은 다시 저런 목록과 같은 할 일의 자료로 발전했다. 그런데 항상 그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여의치 않게 사교가 길어지거나 남의 집 잔치에 들러리를 서거나, 아니면 일과표가 지켜지지 않아 선율이 뚝 뚝 끊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 그는 때로는 색다른 발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일하기 싫어졌다. 물론 놀고 싶은 욕구는 그 모두를 가뿐히 압도했다. 그렇다고 마냥 놀아도 되느냐, 하면 놀 수는 있는데 그러면 안된다. 어린애들은 노는 게 일이지만 어른은 다르니까. 따라서 그는 책사의 지략을 갈망했다. 그러나 당나귀의 잔머리도 아쉬울 뿐. 그렇지만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든 여심에 살며시 노크하던 어쩌던지 타석은 기회와 만나는 법. 허허허, 어찌나 딴생각이 많았는지, 허허허. 하지만 재미도 없는데 내내 타석에 들어서다 슬럼프에 빠지느니, 차라리 일이 안 풀릴 때 놀거나 쉬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일 수 있다. 여복이 자칫하면 방탕이란 샛길로 빠질 수 있듯이 일복은 밑도 끝도 없이 꾀병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장소에서 일하며 신선한 발상을 얻기 위해 하워드의 친구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이미 사전에 얘기를 마쳐서 언제 가기로 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딱 발걸음을 내딛던 찰나, 샐리가 그를 찾아왔다. 조는 집 앞에서 샐리를 만났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오빠 얼굴에 뭐라고 씌여있는 줄 알아?」
   「뭐라고 읽었는데? 한번 들어나보자. 재밌겠는데.」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날 좀 내버려둬요. 제발요!」
   「뭐야? 이제 점성술은 숙달했고 독심술 차례니? 우리는-화법은 도저히 안되겠으니 건너뛰고, 연애시를 외우기는 귀찮고, 응? 과학 지식을 숙지할 수는 없다. 고로 남의 마음이나 엿보자?」
   「아이 참! 오라버니. 혹시 마술에 걸리신 거 아니에요? 오빠는 말 많은 남자도, 까칠한 캐릭터도, 속 좁은 남자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우스꽝스런 깜짝숀데? 혹시 저번에 말한 그 마술사 만난 거 아냐? 그 왜 있잖아, 오빠가 손을 그 사람 가슴 속으로 집어넣어서 다른 손과 수갑을 채웠다는 그... 속임술? 최면? 아닌데. 뭐지? 어쨌든, 오빠 눈빛이 거 어째 너무 응큼한 거 있지? 요염함은 여자 껀데 어떻게... 혹시, 설마...」
   「뭔 소리야? 너가 정말 날것의 살아생전 당시 본능이 뭔 줄 알기는 아니? 어? 너 아프리카 가 봤어?」
   「아프리카? 아니! 그럼 오빠는 가 봤니?」
   「아니.」
   「난 또! 그럼 그렇지. 그렇게나 훌륭하신 분이 비비안의 집에 몰래 침입하셨다?」
   「뭐?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농담이야 농담. 오빠 진짜로 비비안 좋아해?」
   「좋아하긴 뭘 좋아해! 그런데 너가 어떻게 알아? 내가 비비안 블로그에 들어간 거!」
   「뭐, 오빠가 비비안 블로그에 들어갔다고?」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우리 아지트 베를리오즈를 말했던 거라고. 지금 말이 헛 나왔다 오빠가. 아무튼, 얘가 지금 오빠를 뭘로 보고. 허 참!」
   「혹시... 오빠 내 일기 읽은 거 아니지?」
   「내가 늬 속옷 무늬를 어떻게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뭐-뭐... 뭔 소리야? 내가 늬 일기를 왜 읽어? 내 일기 쓰기도 옛날에 귀찮았는데.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너 혹시 나 좋아하니, 라고 오빠한테 물어볼려고 오진 않았을 테고. 그게 아니면 오빠 내 마음 알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손은 이미 잡았자나. 키스도 했잖아. 포옹까지 뜨거웠어. 분위기 좋았다구. 그런데 왜 그렇게 뜸을 들이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데? 라~고 따질려고 온 것도 아닐 테고. 거 뭐, 거뜬히 빠져나오기는 좀처럼 어려운 음모라도 있는 거니? 정말 그래?」
   「흥! 뭐가 어째?」
   「와! 너 그거 아니? 너 째려볼 때, 완전 이뻐! 끝장 멋져! 장난 아니야. 응? 나 있잖아? 막 떨려! (끔뻑끔뻑) (엄지 척!)」
   「오빠 지금 나 놀리는 거니?」
   「내가 지금 널 놀리냐고?」
   「아 나 이런 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질문을 들었으면 답을 해야지 질문을 따라하면 어떡해? 오빠가 앵무새니? 우리 지금 드라마 찍냐고!」
   「어머나. 내가 그랬나? 지금이라도 정상으로 돌아가면 되지 뭐. 드라마가 날 이렇게 만들었나 봐. 그런데 뭐라고 물어봤지? 뭐였드라...」
   「아 됐어! 다 됐고. 오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뭐-뭐-뭐, 뭔-탁? 아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정말 너네들 가지 가지 한다!) 나 오늘 장례식 가야 해. 갑자기 발생한 일이야. 그래서 말인데, 오빠가 베를리오즈 내 당번 딱 한번만 대타로 나서줘. 왜, 내가 이런 부탁하면 안 돼? 내가 지금까지 오빠한테 들인 정성이 얼만데? 어? 어디 한번 읊어볼까? 심지어 내가 아는 오빠의 비밀은 또 어떻고! 어? 나보다 더 오빠 비밀을 잘 지켜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진짜로 있으면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내 앞으로 당당히 나와보란 말이야! 어? 난, 자신 있어! 그게 말이야... 음... 내가 어디다 적어놨더라, 파일이 따로 있을 텐데. 파일명은...」
   「이거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오빠가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니? 넌 오빠를 그렇게 밖에 안 봤니? 오빠 대인배인 줄 알잖니! 어? 오빠 몰라? 안 그래도 나 방금 딱 거기 갈려던 참이었어. 오히려 잘됐네. 안 그래도 최근에 말이야. 오빠가 유독 거기만 가면 글이 잘 써져. 일이 잘 된다구. 게다가 베를리오즈에서 누가 데려온 쪽집게 예언가도 만났어.」
   「어머, 정말이야? 다음에 나 한번 소개시켜줘. 어쨌든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나 먼저 갈께. 다음에 꼭 밥 한번 같이 먹자. 아님 한잔 꺾던가. 응?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선물이 나을까? 아, 저번에 오빠가 그랬지? 뭐 갖고 싶다고. 그게 좋겠다. 그런데 그게 뭐였지?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아님 다른 데서 들은 건가? 어쨌뜬 뭐 하나 생각해나 오빠. 내 마음 알지? (윙크) 그럼 안녕.」
   그는 결국 샐리의 청탁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냥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딱 그렇게 되어버렸다. 묘한 뒷맛이 남지만 중간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지금 다시 샐리를 불러서 나도 급한 약속이 있다면서 사정 딱한 건 알겠지만...이라면서 따따부따 떠들 수도 없었다. 심지어 샐리가 약속한 적절한 보답이 무엇일지 그 설레는 예감이 벌써부터 자길 들었다 놨다 했다.
   웬일일까! 그는 정말 B로 가고 싶어졌다.



   7
 
   스코트랜드의 한적한 최고급 휴양지에서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으며 새로운 인문교양서를 구상하느냐. 아니면 애들에게 끌려가서 해리포터 박물관에서 길을 잃은 채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느냐. 그는 기로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일하기냐 놀기냐, 사무실이냐 베를리오즈냐, 뻔트냐 홈런이냐! 자신은 그러니까 대형 스트라이커일까 아니면 퇴출을 앞둔 리베로일까. 우익수일까, 아니면 우익수 뒤통수를 쳐다보는 그냥 동네 아저씨일 뿐일까. 그도 아니면 그러기는 싫은데, 어릴 땐 거포를 꿈꿨지만 인생은 뻔트도 쉽지 않다는 걸 뒤늦게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갑자기 미래가 궁금해졌다. 그 희망찬 내일이 꼭 찬란한 미래일 꺼란 보장은 없지만 뭔가 어떤 새로움 2.0이 필요했다. 절실했다. 지금 이 판국에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앞날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점쟁이 말을 들으면 기분은 좋다만 그는 또 그런 데 혼자 가는 건 싫어했다. 혼자 가면 재미없으니까.
   그러니까, 과거를 감안하고 자질을 자문하며 탐욕을 관찰하면, 그럼 내 미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삼류 점쟁이에게 복비를 상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합리적인 의구심은 타당할지언정 그렇다고 일일이 직접 경험으로 그 뭔가를 깨우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모두 다 알면 재미없을 테니까.
   그러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제 드디어 베를리오즈로 자진 출근!
   감을 믿어본 것이다.
   앙심-양심-선심 가운데 우리의 친구는 복수가 아니다. 동심도 옛날 얘기다. 흑심은 야만성도 문명도 예술도 문화도 사랑도, 그 모두에 거미줄을 걸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질투심도 크리스마스 카드도 아니고 대체 뭐지? 인생의 제1우정이 뻔트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궁극적 환희가 오직 쾌락뿐일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되니까. 그렇든 어쩌든 제2의 행복감과 제3의 모험심은 누가 뭐래도 줄 달린 치즈를 끌어당기는 열정과, 줄 달린 치즈에 끌릴 수 밖에 없는 친화력인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저기요? 쉿!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어쨌든 그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왜 최근 이런 일이 끊이질 않고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졌다. 뭔가 느낌이 세했다. 1번은 기본이고, 2번은 우연이며, 3번은 인내다. 그런데 대타 4번 연속? 쓰리 뻔트 아웃도 아니고 뭐야 이거! 그건 한마디로 무언의 예고일 것이다. 누가 자기한테 승부를 거는 신호가 틀림없다고, 이런 노골적인 암시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기가 그 정도까지 바닥은 아니라고 자신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들의 아지트 베를리오즈로 갔다.
   베를리오즈로 가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조는 마침내 그곳에 거의 도착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딱)! OK! 이거야. 이거라고. 이거라니까. 바로 이런 거지! 쉭─쉭─쉭! 
   「완전 대박!」
   이게 대체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정체를 모르는 상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부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숨겨논 보석 같은 잠재적인 비밀은 대체 무엇일까? 그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번에 진짜로 드라큘라를 만나고 유령을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생애 최초로? 그러다가 자신이 좀비로 변신하는 일이 있더래도 이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안 그래도 의무방어전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는 그 어떤 꿈과 희망과 전야제는 생각도 안 했는데, 그런데 손에 진땀나는 대결이라니!
   그래서 그는 오늘은 케익을 사서 혼자 먹고, 이튿 날 향수-옷-지갑-슬리퍼-복권-행운권-트럼프 카드-양말등을 잔뜩 사서 포장한 다음 리본을 묶고 자신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마 이건 장기전이 될 것 같다는 떨리는 예감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오늘도 포르토피노의 B 대타 부탁을 들어주었다.



   8
 
   그처럼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는 아지트 B의 당번 부탁을 매일 들어주게 됐다. 그래서 그는 오늘로 7일 연속 B에 출근하게 됐다.
   물론 그의 혼잣말은 차츰차츰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와, 정말 너네들 가지 가지 한다!」
   그 다음에는
   「어쭈 이것 봐라!」
   또 다음에는
   「OK! 이건, 분명, 뭔가 있어!」
   그렇게 7일째 연속 출근하게 됐다. 그런데 오늘은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아지트 베를리오즈에서 파티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 함께 모이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당번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과장하자면 그의 기분은 이랬다. 다리가 엄청 후들거림! 장난 아님! 얘네들이 과연 오늘 내게 어떤 비밀을 실토할까? 아니면 계속 모른 체 할까? 뭔가를 말한다면 그건 고백일까 증거일까 조짐일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건 결코 예측하기 힘들었다. 악마적 상상력도 스포츠처럼 결국 결과론에 불과할지도 모를 수식어이자 농담에다 예의일 테니까.
   그렇게 아지트 베를리오즈의 파티는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기분 좋은 음악이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다채로운 구경거리와 얘깃거리가 즐비했다. 그녀들의 멋진 복장 때문에 조는 눈이 다 호강했다. 그래서 이 다음 그 어떤 2탄에 대한 기대감은 쉴 새 없이 쇄도하다. 그런데 너무 긴장했기 때문일까? 그의 감수성은 배겨나질 못했고, 추리력마저 처량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바로 그때 친구들의 솔깃한 대화가 들렸다.
   「우리 그냥 아지트 접는 게 어떨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오빠도?」
   「여기서 그 생각 안 해본 사람 있으면 손!」  
   어디에 가면 두 명 중 한명은 진짜로 이름이 '손'으로 끝난다. 머머스키도 똑같고 내가 아는 실바만 도대체 몇 명이냐고.
   「내가 있잖아, 우리처럼 친한 친구들 모이는 클럽에 저번에 갔다 왔거든. 우리랑 비슷해. 사교 모임이지. 아지트를 운영하는 거도 똑같아. 그런데 가서 보니까 뭐랄까 우리랑 너무 다른 거 있지? 일단 우리처럼 당번제가 아니야. 거긴 진짜로 입구에 떡대 좋은 아저씨들이 딱 지키고 있어. 귀에다 뭐 꼽고. 헤어스타일도 완벽한 8 대 2 가르마. 그 업계 하수가 아니라며 딱 얼굴에 씌어 있더라고. 난 그 다음 들어가서 분위기 보고 느꼈지. 아, 회원비 장난 아니겠구나 라고. 따라서 아무나 받아주지 않겠구나 라고 느꼈지. 특히나 여긴 입이 가볍고 싼 위인은 절대 없겠다는 그런 뭐랄까 동경심이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더라니까. 거긴 음악도 우리처럼 이런 유행가가 아니야. 재즈도 아니고 클럽 음악도 아니야. 2중주 3중주 4중주, 게다가 생음악. 그것도 예식 같은 데서 연주하시는 분들도 아니야. 그분들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지만, 아마도 회원의 친구분들인 것 같더라고. 거기 회원 친구면, 음, 대충 예상이 되더라고. 더구나 대화는 어찌나 고상한지. 나 그날 괜히 따라간 거 같았어. 내가 그날 마음 먹고 꾸미지 않았다면 그날 난 마음이 꿇려서 울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거기서 갑자기 친해진 누군가에게 난 진짜로 물어볼 뻔 했다니까. 너 원래 말을 그렇게 세련되게 하냐고. 본심을 드러내라고. 어? 넌 근사한 사람 아니면 원래 상대하지 않는 거냐고. 그러다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조금 취했을 때 먼저 나왔어. 내가 있을 곳은 아닌 듯한 그런 뭔가가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아지트를 그렇게 즐길 게 아니라면 이렇게 형식적으로 당번 맡기 싫어서 서로 미루면서까지, 어? 꼭 그렇게까지 베를리오즈를 운영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난 완전 동의해.」
   「나도 적극 동조.」
   「대-찬성.」
   「아마도 뭔가 변화는 필요해.」
   「우정을 걸고 판돈을 키우는 건 왠지 불안한 건 있어. 그래. 뭔가 비정상적이란 거 나도 알고 있었다구. 누군들 안 그렇겠어? 누가 곗돈 갖고 튀었다는 어르신들 이야기네, 소란스러운 파혼에 한때 최고의 사랑이었는데 10년 소송으로 이어지는 게 다 뭐겠니? 그래, 돈이야! 돈이라구. 우린 지금 어쩌면 소녀의 사교 생활과 소년의 야망을 뒤늦게 흉내내느라 정작 내 인생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일을 아웃소싱하지도 못한 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구. 그렇다고 정말 불필요한 사교이자 허접한 가식이란 말은 아니고.」
   「난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불규칙적으로 시시각각 다르게 어울리는 게 낫다고. 약간은 TV 시트콤과 다르게 말이야. 우리가 억지로 지속하는 아지트는 아마도 너무 초보 같아. 그래, 하수! 아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유소년의 어른 흉내도 아니며, 어른들의 철들지 않는 으쌰으쌰 그런 잊혀진 열망에 대한 투정도 아니고. 이건 정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여기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웃음. 그 가운데 웃지 않는 사람은 딱 한 명 밖에 없었다. 물론 그분도 웃긴 웃었는데 환한 웃음은 아니라는 거!
   그러다 조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됐다.
   「무슨 소리야? 너가 베를리오즈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자청했잖아?」
   또 다른 친구는 이랬다.
   「내가? 아니 뭐야, 뭘 트집 잡고 싶어서 그렇게 고단수를 쓰는데? 그런다고 내가 짜증낼 거 같니?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직접 화법 아니라고 내가 뚜껑이라도 열릴 것 같아?」
   그러니까 그는 대번에 깨달았다. 엇그제 만나서 당번 대타를 부탁한 샐리만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전화로 가짜 부탁을 했다고. 또 가짜로 자기 전화를 받았다고.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바로 이렇게.
   「아! 내 사무실이 오래 비었구나!」 
   조는 곧바로 애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사무실로 갔다.
   가서 브로커를 만나던 뭔가 변화를 감지하던, 그 뻔트에 사용된 방망이가 금-방망이인지 솜-방망이인지 뭔가를 캐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9
 
   그는 자기 사무실이 보이는 가로수 밑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다스베이더를 만난다? 마침 저 앞에 웬 지팡이가 보였다. 어느 노인께서 버린 건지 아니면 동네 똥개가 물어다 놨을지 모르지만 그는 꼭 그게 필요했다. 뭔가 악마적인 술수가 절박했지만 뚜렷한 대책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부딪혀보는 수 밖에. 맨발의 청춘에게 거창한 준비는 왠지 모르게 반칙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는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서 문을 열었다.
   핑~! 신비한 효과음이 들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뭔가 애매한 느낌 때문에 불안불안했다.
   그런데 웬 대형 물안경 같은 게 대롱대롱 문 바로 앞에 매달려 있네? 그는 그걸 착용했다.
   보였다. 드디여 보였다. 마침내 영화에서만 보던 그 파란색 레이저 선을 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암스테르담에서 대도에게 뭔가가 털렸다, 코펜하겐 시립 미술관에서 무엇이 단 몇 분 만에 도둑맞았다, 라는 소식을 살면서 한 번쯤 듣게 된다. 그것과 약간 다른 얘기지만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살면서 뒤늦게 베트남 국수에 꼿혀서 한 달 내내 베트남 국수만 먹던가, 헬싱키에 땅을 사놓고 룩셈부르크에 세금을 내며, 우르과이를 응원한 김에 몬테비데오로 여행을 떠나고,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특급 사교계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여행지에서 사랑을 할 수도 있지만 운명 교향곡이 어떻게 탄생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 삼천궁녀는 TV 보기로 대체하면 되는 것이지 꼭 몰몬교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어쨌든 영화에서 우리는 보게 된다. 어떤 명화를 훔치는 장면을. 무수히 봤고 익히 감상했다. 그럼 관계자들은 도둑님께서 편히 가져가시라고 어설프게 대처할까? 그럴 리가 있나. 특수 레이저 설비가 가동되고, 원자력 무슨 그런 감지 장치에, 기계식이네 전자식이네 별의별 첨단 장비가 총동원된다. 그래서 얼마 이상의 명작들은 대부분 무조건 가택감금이다. 그분들은 여행을 싫어하신다. 그런데 바로 그 이렇게 저렇게 불규칙적으로 구성된 파란색 선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오오, 세상에나!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당연히 파란색 선 하면 빨간색 선이 떠오른다. 그건 뭘까? 뭐겠나! 우리들이 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특수부대 작전 장면에 대한 고급-저급의 감별은 눈에 훤하다. 그걸로만 보자면 우린 모두 최선의 연애술사다. 그걸로만 보자면 우린 모두 잔지식이 꽤 어중간한 신비주의자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던 차악의 연애 상대다. 아울러 그걸로만 보자면 우린 모두 내놓으라 하는 당대 최고의 다이아몬드 감정사인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와, 이건 한마디로 천사의 기쁨과 악마의 환희였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가 바로 피렌체 지하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거물이었다. 적어도 기분만 따지자면 그는 당장 세계 500대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플레이보이의 천국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그는 한마디로 3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플레이보이계의 전설이었다.
   그러니까 시방 누군가 자기를 어떤 신흥 단체의 후계자로 지목했으며, 그 명맥은 유서 깊고, 저기 보이는 '황금 마네킹 상점'은 진품으로 바꼈다? 아무리 어깨뽕이 튀어나온 걸 감안하더라도 그건 너무 심했다. 정말 그랬다. 자긴 무슨 거창한 후계자감도 아닐 테고, 저 그림이 진품으로 바뀔 리도 없고, 게다가 파란색 선들... 이건 분명 꿈 아니면 장난일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저기 걸린 그림은 '황금 마네킹 상점'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화가 이름도 작품명도 까먹은 대단한 명화였다. 다시 말하자면 황금...도 고귀지지만 (다만 현물 가치로만 따져서) 거기서 한두 계단 더 올라간 것이다. 저 끝내주는 걸작의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사무실의 그림까지 바꿔치기 했다고? 그럴 수가!
   이걸 누구한테 의뢰하지? 조가 아는 탐정은 없었다. 그럼 인맥을 보자면 마라나 포르토피노나 몇몇 친구들한테 부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들한테 들을 말은 뻔했다.
   「나한테 맡겨! 라고 할 줄 알았니? 꿈 깨 이 친구야!」
   또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면서!」
   아무튼 이건 돌아가는 일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란 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잠깐 공상도 했다가, 자기가 사무실에서 대체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돌이켜봤다. 그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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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에 탐닉하는 습관, 허풍에 혹하는 태도, 미지의 동경심을 추적하는 자세. 추리소설에 대실망하고 세상만사에 속고 또 속아도 그 버릇은 좀처럼 버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쉽게 들뜨고, 흔히 혹하며, 간혹 내 몸에서 공중으로 떴다가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퐁~! 만약 곧잘 그런다면 그건 셋 중 하나다. 첫째 아티스트병, 둘째 상사병, 셋째 난봉꾼. 아! 넷째도 있겠구나. 바로, 여자의 마음! 또 있다. 상남자의 으쌰으쌰. 그건 아닌가? 아무튼 그건 결코 흔치 않은 일. 그래서 우리는 천재적인 악상을 일반적으로 외부에서 찾게 된다. 어떤 생명수를 마시고 무슨 신비론을 믿으면, 엎드려 잘 때 아침마다 몸이 공중으로 30센티미터 뜰 것이다? 귀가 쫑긋쫑긋 기대감이 똘망똘망 눈빛이 초롱초롱! 청순한 임팔라를 눈독 들이는 흑심 명단은 화려한 걸로도 모자라 치밀하게 빼곡하여 빈틈이란 차마 찾아볼 수가 없는 법이다. 따라서 고결한 선망은 무해하고 불가해한 허영심은 삶의 기쁨을 부풀리지만, 결국 인생은 이기주의자들의 다큐멘터리다. 속느냐 속이느냐, (추위에 덜덜) 떠느냐 (사랑의 예감에) 떨리느냐, (타인의 손바닥 위에서 내가) 쥐어졌다 펴지느냐 아니면 내가 직접 쥐락펴락하느냐! 고로 인생이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절반쯤은 전적이나 다름없다. 단기전도 거의 뻔하다. 뻔하지 않은 반전도 꽤 괜찮은 건 드물다. 더군다나 심하게 남발된다. 물론 고혹적인 인생과 아름다운 사랑, 고르고 또 고르다 향기로운 꽃이 시들어가는 일편단심 순애보랄지 헛똑똑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 뭘 하나! 익히 아는 친구들은 물론 새로운 얼굴은 항상 그의 환심을 사며, JS는 TV만 보면 NC 생각이 났고, 언제나 바나나─망고─사과─오렌지─딸기─포도─파인애플 쩜쩜쩜 과일 생각 뿐인데!
   그러므로 그는 이제야말로 정물화를 본격적으로 그릴 시기라고 각성했다. 그가 사무실에 걸어둔 그림, 제목에 마네킹이 들어가는 명화의 모작도 그래서 샀던 것이다. 저 그림 속의 마네킹에게 생명력을 부여해주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마침내 환상론에 대한 구상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뭐야, 그림이 바꼈네? 전에 걸 도둑맞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건 모작이니까 일단 넘어가고, 새롭게 대타가 등장했는데, 지금 장난해? 그는 이렇게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내가 과연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그렇다고 다른 분들은 헛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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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옆 사무실 주인이시죠?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제라드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하는 일은 행위예술이구요. 아 참 ! 그 특수안경 써보시니까 어떤가요? 멋지죠? 내 그럴 줄 알았어요. 허허허허허.」
   오 이런!
   아 그럼 여긴 조의 사무실이 아니라 그 옆 사무실이었단 말이군. 저런! 환상극의 생리가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그럼 원래 사랑과 인생과 세상도? 사무실 착각만 해도 받아들여 진정할려면 한숨이 몇 번 필요하니 그건 다음 기회에. 왜냐하면 헛되든 값지든 결과가 실망이든 체념이든 기대와 기다림, 추측, 관망을 빼면 통 재미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진정한 신비 그 미지의 낙원이 코 앞, 곧 진짜 행복한 세계의 목전에 다다른 줄 알았는데, 아뿔사! 그런데 그 마술사 아저씨의 복귀? 뭐야, 그런데 아저씨가 몰라보게 젊어졌는데?
   「안녕하세요. 조라고 합니다. 깜빡 하다가 제 사무실인 줄 알고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버렸네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에이 무슨! 제가 진작 초대할려고 했는데 미처 기회가 없었다 뿐이죠. 너무 바쁘셔서 그런지 통 얼굴을 뵙기 힘들더라구요. 허허허허허.」
   「그런데 제라드. 전에 제가 알던 그 마술사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긴 듯 하면서 아닌 거도 같고. 아니라고 하긴엔 너무 닮았고. 솔직히 약간 당황스럽습니다. 어떻게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젊어지신 것인지 무척 의아하군요. 혹시 제가 아는 그분 맞나 여쭤봐도 될까요?」
   「아! 일전에 아빠가 신기술을 선보이신 분인가 보군요. 아쉽지만 저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아빠는 새로운 마술을 터득하시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고 있구요. 가슴 속에 손을 넣고 어쩌고! 저는 마술 자체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돈버는 재주가 조금 있어서 이처럼 꼭 하는 일이 뭔지 의심스러울 만큼은 여유롭게 산답니다. 허허허허허. 방금 특수안경을 써보시니까 어때요? (벽면의 버튼을 누름) 안경을 벗어도 이렇게 어두운 상태에서 파란색 레이저가 보이게 할 수도 있죠. 그렇다고 레이저 때문에 인체가 손상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 옵션은 꽤 비싸더라구요. 물론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딩동~) 이처럼 제 핸드폰으로 바로 연락이 오죠. 당연히 파란색 레이저를 안 보이게 할 수도 있구요. 그러니까 지금 이 마당에 궁금한 건 두 가지시군요. 첫째, 대체 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기기를 여기에 설치했냐, 뭐 값나가는 보물이라도 있냐. 둘째, 이 파란색 레이저 시스템의 가격은 얼마냐! 첫째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첫째는 차차 우리의 친교가 돈독해지면 그때 가서 알려드리죠.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리고 둘째는 저거 얼마 안 해요. 네. 그럼요. 단돈 십 만원입니다. 허허허. 제 사무실에 신기한 게 정말 너무나도 많은데 하나씩 구경해볼까요?」
   「아, 너무 일찍 진도를 빼는 건 저도 썩 어색하군요. 손도 잡고 백허그도 하고, 미술관이랑 동물원도 같이 가 보고 싶어요. 아 물론 그러고 싶은 숙녀 명단이 공책 세 권이라 그 말씀입니다. 허허허허허. 아무리 저급할지언정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시면 사정 참 딱하게 급변하겠죠. 허허허허허. 뭐 어쩌다 저도 벌써 형씨의 가짜 웃음을 따라하고 있군요. 제가 원래 따라하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서둘러 흉내내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이거 정말 무척 당황스럽군요. 실은 독학 그만둔지 한참 됐거든요. 그런데 선생께서는 왕년에... 과거가 잘 보이진 않는군요. 허허허. 오늘의 기는 이미 어디서 다 빨려버렸나 봅니다. 허허허. 어쨌든 우리는 초면인데, 그런데 설마 절 풋사랑만 좋아하는 한량으로 보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니까 뻔트로 롱런하기? 성급한 사랑은 오히려 제 전공입니다. 허허허허허. 이거 이거 당숙과 몇 마디 나눠보니 꽤 말이 통하는 거 같군요. 뭐 아무튼 그렇죠. 심심한 발단과 궁금한 전개도 없이 미완의 절정? 재미없죠. 굳이 제발로 오겠다면야 마다하진 않겠지만 말이죠. 허허허허허.」
   조는 마술사 아빠의 아들인 제라드와 헤어진 다음 두 가지 일을 했다.
   첫째, 사무실에 명패를 달았다.
   둘째, 파란색 레이저 기기의 가격을 알아봤다.
   그러고 보니 조의 사무실은 몇 호실이다, 사무실 이름은 뭐다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B라고 간략히 정했다. 임시로 정했을 수도 있고 한동안 변치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왜 그렇게 즉흥적으로 이름을 지었냐, 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이와 같다. 그는 뭔가 반투명한 예감이 거의 적중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친구들과 좋은 듯 싫은 듯 유지하고 있는 아지트 베를리오즈가 얼마 안 가서 문 닫을 것 같다는 예상이었다. 결말은 거의 가까이 온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 아지트가 존속한다, 사라진다에 내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짜 이름을 대충 짓듯이 그는 책상 위 작은 달력을 쭉 찢어서 흰 면에 B라고 써서 사무실 문짝에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에 대해서는 3군데 공산품 판매장에 직접 방문해서 알아봤다. 그건 제라드의 얘기와 달랐다. 제라드가 농담했는지 어쨌는지 0을 하나 빼먹은 듯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얼마 안 한다고? 단돈 십 만원이라고? 알아보니 그건 백 만원이었다. 그것도 최저가가. 나머지는 모두 거기서 0을 하나 또 붙였다. 말하자면 최저가라고 할지라도 적당한 위스키 한병 값이 아니라 노트북 한대 값. 그는 괜히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일주일 경과.
   그들의 아지트 베를리오즈는 정말로 그 시점으로 프로젝트는 종료됐다.



   12
 
   꿈을 예비하고 사랑을 기다리며 열정을 아끼기. 그렇게 정작 내일의 행복을 추측만 하다 설레는 기대는 제풀에 지쳐 낙담하기? 차라리 그럼 다행이게? 반-재산을 탕진하기는 어제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또 달콤한 예감이 발목을 잡네? 이걸 베팅을 해, 말어!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재산 목록 1-2-3호 모두 변변치 않음. 한밑천이었던 멋진 인생에 대한 기특한 열망도 이제는 흐리멍텅함. 그래서 때를 기다려야 할까? 하지만 파랑새가 어깨 위에 앉고 행운의 구름을 탈 기회가 어디 자주 오나! 큐피트와 솔로몬은 우군이고 아르테미스도 비너스도 모두 내게 사모의 손짓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 그러니까 플레이보이의 3박자는 청신호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그는 플레이보이 그림자 언저리에도 못갔다. 그렇다고 벌써 절망을? 그러기엔 그동안의 시도와 방황과 고민도, 공상마저 아까울 뿐. 곧 인문교양적 단념도 문학적 무모함도 여의치 않다면 타협책은 있다.
   따라서 후궁은 뻔트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그건 곧 새로운 시도. 그렇게 열의를 다 바쳐 헤밍웨이의 노인이 놓쳤던 대물을 딱 거의, 정말 거의, 조금만 더 거의 잡을 듯한 중요한 순간! 그런데 막판에 죽 쑤어 개 주는 일이? 이런, 젠장! 그래서 그는 다 됐고, 딱 정직해지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꿈의 간곡한 부탁을 모른 체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1차 시도한 결과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뭐 도와줄 일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지트 베를리오즈는 문을 닫았지만 대타 생활의 습관 때문에 뭔가 너무 허전했기 때문이다. 속고 또 속고 구워삶아지고 구워삶아지다보면 습관이되고, 생활로 정착하며, 그러다 인생이 된다. 사랑이 시작된 건지 끝난건지 거 어째 그런 뭐랄까, 어찌 딱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그런 심정 있지 않나.
   「핀. 나 뭔가 허전한데 혹시 나만 그럴까?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거란 거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없으니까 왠지 짠해. 넌 안 그래? 어 안 그래, 라고만 답하지 말아줘.」
   「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안 그래도 전화 할려고 했는데, 연락을 받았으면 답을 줘야 할 꺼 아니야. 애들이 핸드폰 메신저로 연락도 하고, 전화도 했고, 또... 찾아가진 않았네. 뭐야! 수소문하고 어쩌고 그거 다 뻥이었어?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우정이네 뭐네 그래도 전화 안 받으면 끝이란 말 아니야? 그렇다고 쫓아다니면 귀찮아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말이네? 이 시대의 사랑은 그처럼 너무 멋이 없어. 기다릴 줄 몰라. 전부 타석주의라고. 남의 집 잔치는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는데, 너도 나도 모두 다 숟가락 올릴 궁리만 하고 있는 식이지. 안 그래? 제라늄에게 마음이 있으면 의사를 타진하고, 취향을 비교해보며, 연애의 줄거리를 추론해봐야 하는데, 오래 기다리며 그리움을 애틋하게 키우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남남이 된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제 갈길 가는 거야. 이미 전부터 프리지아와 들국화는 물론 들장미까지 후보군에 있었으니까. 없어도 어떻게 만들고 어디 가면 쉽게 만나.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라면서 떠들석한 헤드라인 뽑더래도 팬들이 거포를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봐. 다들 뻔트, 대타, 2군, 차선 등등 다 속으로 딴 생각만 하고 있어. 왜? 왜냐하면 플레이보이의 3박자 그 규모가 옛날과 비교도 안될 만큼 커졌으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널 벌 세우고 뭔 얘기를 하고 있지? 내 정신 좀 봐!
   아무튼 어서 우편함이나 확인해 봐. 저번에 말했던 회원제 아지트에 우리 모두 초대 받았으니까. 아 뭐해 이 친구야? 정신 차려.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니까!」
   뭐야 이거! 이제 진짜로 미칠듯이 즐겁고 너무도 재밌고, 도대체 그곳은 어떤 신비감을 아름답게 포장하는지 궁금했던 그들만의 잔치. 그 회원제 아지트라는 축제의 현장에 초대된 것이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바보 상자와 노는 때, 배보다 더 큰 배꼽인 보너스는 인터넷이라며 가택감금을 합리화했던 발단은 드디여 판이 다른 사교계로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진짜로 그곳은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일까? 정말로 8 대 2 가르마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덩치 큰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을까? 알고 보면 그분들도 수트발에 기세만 그런 건 아닐까? 어떻게 애들한테 말해서 그분들 신상 명세를 말하게끔 유도해볼까? 아니면 내가 직접 호기를 부려서 살살 긁고, 방방 나대며, 뻥뻥 웃음을 터트리다가 살짝 깐족으로 건드리면! 그러니까 한번은 이타심을, 한번은 자존심을, 또 한번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꿈의 좌절에게 팔짱 끼기. 그처럼 꼭꼭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어떻게든 끌어내볼까?
   조는 벌써부터 헛바람이 잔뜩 주입되고 있었다.



   13
 
   그는 일하기에 다정했고 놀기에겐 무례했다. 오히려 형편이 그에게 무정하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꿈은 현실에 무심했다. 그리고 허세와 허영심은 친하지 않았고 서로 불편해했다. 때문에 남은 건 불쾌감, 심심함, 우물쭈물하다가 미스터 막살라조차 만나지 못했다 라는 묘비명을 공상하는 것뿐. 고로 그는 성과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은 바보에게 유리할 수도 있는데, 곧 행복한 일하기는 둔재에게 불친절했다. 그러니까 채찍만 남고 당근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너구리에게 빼았겼을까, 다람쥐가 가로채 갔을까! 줄이 달렸을지라도 황금 같은 치즈를 구경이라도 해 봤으면. 하긴 그가 살면서 추구했던 노선은 늘 그랬다. 이기고 기분 좋고 살짝 미안해하기 보다, 지고 기분 나쁘고 속 편하기. 합리화하고 띄워주며 트로피를 거머쥐어도 마땅찮은 이 마당에 할 말은 아니지만─아니지만? 뻔트면 대만족 아닐까!─지면 당연하고 이기면 행운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절실함을 반틈만 거는 열망은 비겁한 거다. 다른 말로 맥없는 인생. 번역하면 꿈은 없다?
   맙소사!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달리 가기로 했다. 작게 걸고 작게 잃는 뻔트보다 왕창 걸로 왕창 따는 한방으로! 왕창 걸면 왕창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겠냐마는, 모험이란 게 별건가. 그래도 그러다 진짜로 훅-가면 어떡하지? 그런 소심함과 순진함 때문에 혹시라도 짜리몽땅할지도 모를 명검을 검집에서 슥 뺄려다가 다시 넣었다. 살짝 폼만 잡다 만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서? 저런! 악역도 모르고, 작전은 없고, 목표마저 없다라! 대략 난감하다. 한숨이 다 나온다. 이러다 뭔가 불길한 까마귀 울음 소리라도 듣는다면 기분 싸해지다 못해 괜히 슬퍼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는 더 심심해지기 전에 미리 선수치기로 했다. 바로 사설 클럽에 놀러가는 것. 괜히 예비 후보를 가만 놔두고서 엄한 데서 괴물 신인을 찾았구만 그래. 어쨌든 회원제 아지트에 초대 받았는데, 이미 잔칫상은 차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멋진 영화에 나오듯이 너무 아름다운 예식에 참석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남녀가 짧게 한마디씩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비교되던 어쩌던 알고 깨우치며 믿음이 다가 아니란 걸 느껴야만 했다.
   조는 그곳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조는 회원제 클럽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정말로 와! 결코 허술하지 않은 전문 보디가드 몇 분께서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어떻게 까다로운 진입 과정을 거친 다음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다음 어떻게 놀고 무엇을 구경했으며 왜 놀랄 수 밖에 없었나, 에 대해서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한마디로 그곳은 기대 만큼은 아니었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형식이지만 단지 좀 더 세련되고, 살짝 우아하며, 조금 고상할 뿐. 월등하게 근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둘 중에 어떤 물에서 놀고 싶냐 라고 사람들에게 고르라고 한다면 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될 테고.
   무엇보다 저번에 누가 그랬나. 고전음악 그것도 실내악을 생음악으로 연주하네 어쩌네? 그런 데도 있겠지만 여긴 오늘 어떤 기획 때문인가는 몰라도 음악이 중간에 멈췄다. 흔히 아는 클럽 음악이 하나, 그리고 파란색 레이저 쇼와 함께 하는 영화음악이 다른 하나. 그랬다.
   그런데, 어머나!
   조는 자기 옆 사무실에 입주한 제라드와 꼭 빼닮은 사람을 보게 됐다.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는 제라드거나, 또는 내가 취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봐도 그는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러니까 파란색 레이저와 제라드라...! 이건 정말 예사롭지 않은 전개였다. 그건 어쩌면 믿음직한 수확일 것이다. 별볼일 없는 뻔한 오락성만 성행하는 현실에서 유달리 신기한 환상의 기별이? 나중에 속든 당하든 몇 푼 잃든 어쩌든, 지금은 짜여진 각본에 시달리고 봐야 했다. 그게 옳았다. 그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임에 꽉 붙들렸고 자기도 모르게 그 기묘함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버린 이건 뭐랄까, 막판의 반전이 단단히 일러주는 힌트였다. 그럼 힌트가 날 안아주세요 하면서 알몸으로 구애하는데, 그걸 모른 체 한다? 그건 행운아의 임무를 방기하는 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뻔트를 댈 차례인 것이다. 그것도 최적의 시기이자 절호의 찬스! 그래서 환희에 도달하면 좋고, 만일 허무를 부화한다면 묵묵히 받아들이면 그만이며, 하다 못해 확실한 줄거리를 깨우친다면 그 또한 꽤 괜찮은 서곡과 본극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하게 흥분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일까...!



   14

   최근 줄거리를 간추려보자면 이렇다.
   아지트 베를리오즈의 당번을 서로 미뤘다. 그러다 나는 대타 전문 요원이 되었다. 그런데 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 정체불명의 조커는 조이스틱을 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삐에로가 된 척 연기하며 이 납득이 어려운 작전의 설계도를 미리 상상해봤다. 따라서 리모콘은 조가 쥔 셈이 되었다. 그런데 그 브로커는 예상보다 강력한 상대다. 그러다 사무실에서 한번 속았다. 그것도 제대로 속았다. 그리고 제라드를 만났다. 그렇게 1막은 마감했고 다시 2막이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2막부터는 지휘자가 바꼈다? 그는 제라드일까? 그러든 어쩌든 지금은 이래야 한다. 저번에 아지트 베를리오즈에서 괜히 잔머리를 굴리다가 사무실로 가서 깜빡 속았지만, 이번에는 한번 더 꼬아야만 한다.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한다. 따라서 그는 결론을 내렸다. OK!
   자, 이번에는 폐막한 아지트 베를리오즈로 가야 한다고!



   15
 
   조는 문 닫은 아지트 베를리오즈에 도착했다.
   외관상 특별히 이상한 점은 포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소리가 안 들리고, 불빛이 없었다 뿐이지 내부에서는 뭔가 요란스레 파티가 열리는 듯 했다. 꼭 그건 뭐랄까 바쁘게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고 자기들끼리 막 폭소를 참고 히히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별안간 아찔해졌다. 얘네들은 내 친구들인데, 앞서 사설 클럽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은 뭐지? 그는 끽소리 없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공포감을 붙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결말의 실마리는 멀고도 멀었다. 어떻게 하지?
   다시 한번 몰래 바깥에서 그들을 관찰하니 이번에 새로운 뭔가가 보였다. 얘네들의 시선이 정상적이지 않고 촛점이 흐렸던 것이다. 게다가 모두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티셔츠 중앙에 정사각형으로 그림이 있었다. 저번의 환각 증상이 기억났다. 심지어 그는 갑자기 자신의 허벅지에 미세한 통증을 느꼈다. 설마, 앞뒤 하나도 안가리고 맨살이 대리석을 바뀔려고 그러나? 그는 켄타우루스도 아니고 그리핀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광마도 광견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 좀비 같은 인물들은 대체 뭐고, 내 다리의 통증은 또 뭐란 말인가! 뭐 하나 뚜렷하게 이해할 수도 없었고, 뭐 하나 속 시원히 설명이 가능한 일도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설 클럽에서 이국적인 정취 하며 분위기 좋았는데, 왜 갑자기 장르가 바꼈버렸을까? 게다가 주인공은 조. 그런데 조연도 없고 너무도 쓸쓸했다. 이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러나 뭐가 뭔지는 알고 넘어가야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할 희귀한 소질은 내게 없다. 고로 조는 조력자를 필요로 했다. 평범한 운명 그런데 남다른 사랑,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3막이 어떻게 되던 어쩌던 그는 브로커 제라드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는 서둘러 자기 사무실로 피신했다.



   16
 
   그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옆 사무실에 제라드도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제라드에게 말했다.
   「제라드. 같이 갈 데가 있어요. 같이... 가 줄 거죠?」
   「네? 지금 저와 고스터 버스터즈 놀이를 하자는 겁니까? 못할 거도 없죠!」
   물론 처음에 살짝 의심이 들긴 했다. 여기의 제라드와 사설 클럽에서의 제라드는 동일 인물인가 라는. 아마도 둘 중 하나가 분신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순간 이동도 아닐 테지. 그렇다고 조가 유체이탈을 해서야 쓰나. 그는 일단 제라드와 한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제라드와 함께 아지트 베를리오즈로 갔다. 물론 조는 속으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자긴 아니라고 해도 제라드도 마술사 아빠의 2세다. 따라서 썩어도 준치란 말이다. 그래서 뭔가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어? 납들할 만한 설명. 가슴을 뻥 뚫어줄 만한 진단. 막힘없는 해법. 사뭇 존경스러운 복안. 그 동안의 재미없음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그 뭔가를 꺼내놓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그 무언가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명일지라도 그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상의 비웃음쯤은 두렵지 않았다. 이 안타까운 심정이 애절하다면 그건 해피엔딩을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이 아지트 베를리오즈에 도착해서 어떤 비밀을 알게 됐을까?
   결과야 어떻든 제라드에게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은 흑마술이 아니라 장비였다.
   곧 그는 특수안경을 챙겨간 것이다.
   제라드는 조에게 특수안경을 주었다.
   그는 특수안경을 쓰고서 아지트의 내부를 살폈다.
   그걸 착용한 채 내부를 보니 다들 어두컴컴한데 음악도 없이 춤을 추고 논다니. 정말 이상한 건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미러볼과 정반대식으로 작은 여러 개의 불빛이 개개인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불빛은 파란색 레이저가 아니라 빨간색 레이저였다. 바로 우리가 영화에서 숱하게 봤던 바로 그 불빛.
   「아시겠어요?」
   「...」
   「봤죠?」
   「뭐죠?」
   「뭐긴요. 좀비지!」
   「됐다 그래.」   라고 조는 말할려다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말소리를 듣고 좀비가 쫓아오면 어떡하나. 또 제라드의 헛수고를 실망시키면 어떡하나.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좔좔좔. 제라드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서 이상한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놀자고? 시작은 그가 했지만 제라드는 본론을 즐기고 있네? 결국 조는 외롭게 혼자서 속으로만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그분들은 좀비가 아니다. 또 조가 사설 클럽에서 착각한 일 때문에 괜히 자기 친구들의 분신이 여기서 노는 줄 알고 괜히 제라드를 끌어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지트 베를리오즈는 이미 사무실 주인이 바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파티를 열고 있었다. 아 나 이런 진짜! 뭐 그가 제라드를 데려오기 전에 혼자서 그들을 볼 때 뭐 어쨌다고? 얘네들의 시선이 정상적이지 않고 촛점이 흐렸던 것이다? 원래 사람들은 술 취하면 긴장감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그처럼 된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은 남았다. 예전의 그 당번 대타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17
 
   그는 사무실에서 일기를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탕발림 악마의 꾀임은 광고다. 오락산업의 유혹을 참아내느라 고생한 당신, 에메랄드빛 해변으로 떠나라? 어쩜 마지막에 딱 속아 넘어가는 게 더 바보란 말인가! 그런데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신 얌전한 고양이님의 인생론을 들어보자면 꼭 그렇지는 않음. 사적인 허세와 공적인 농담은 살짝 다른 거니까. 그렇듯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도 있고, 영화에는 시간 여행이 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손꼽을 만한 환상과 기막힌 전개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정말로 거의 없다. 있어도 절반은 뻥이고 대부분 과장이다. 그처럼 현실에서 신비를 원하는 것보다는 기대치를 살짝 낮추는 게 낫다. 그처럼 현명함은 비싸지 않다. 다만 쾌락이 강할 뿐. 그런데 축제의 노래는 흥겹고 분위기 좋은 장미꽃밭은 날 애타게 기다리는데, 친구의 기분을 외면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건 정녕 로맨티스트답지 않은 일. 그래서 우선 배짱이처럼 놀고, 과연 내일도 또 놀 것인가는 그 다음에 봅시다? 당장 기쁘고 행복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심심함의 고급 해결책과 인생의 비밀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익숙함보다 지금은 환상극이라는 허구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실익은 이를 테면 품위 유지비의 발생이다. 또 분홍빛 예감 같은 간접적인 효과는, 뭐랄까, 복리랄지 아마도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일 것이다. 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별반 나을 것 없는 사교보다 어쩌면 행복한 일하기가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는 최적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나는 해도 해도 무명에 내가 만든 극 중에서 주인공은 무능, 무도장은 폐업? 보아하니 말을 타기는 탔는데 뭔가 잘못 탄 거 아닌가! 근사한 문학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오오, 아티스트병에 걸린 걸로도 모자라 상태가 몹시 안 좋은 조랑말? 심지어 치유 불가 치료 불능! 나는 단지 허풍대회에 재미로 참가하고자 했는데, 출전하고 봤더니 글쎄 로데오 경기? 거 참 나 미치고 환장하겠구만 그래.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말이 최대의 기쁨은 뻔트고, 지금이 좋을 때라고 한다. (물론 후자는 익히 아시겠지만 전자는 글쎄요...!)
   자, 우리의 어려운 결심이 과연 흥미진진한 호시절인지 아닌지 탐구하며 알아보는 노력은 최소한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몰입하는 할 일, 좋아하는 취미, 하고 싶은 할 말, 신경써도 별거 없는 핸드폰, 기다려지는 일정, 멋내고 꾸며봐야 그만그만한 자화상, 예뻐할 새로움을 찾기, 뻔한 만남 지겨운 일상 등등등. 아무리 그래도 천상의 기쁨보다 지상의 인생이 적어도 더 극적일 테니까!



   18

   조는 집에서 칼럼을 썼다. 제목은 정하지 않았다. 내용은 이렇고.
   행복한 미래를 꿈꿈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제라면 구리빛 자랑 은색 겸손을, 오늘은 금빛 내일을 향한 열망을! 따라서 낙관주의란 그런 것이다. 눈부신 대어는 언제나 상상 속에서 현존하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을지도 모른다는 점. 고로 건강하고 밝고 자신감 뿌듯한 긍정은 장밋빛 인생과 부합하는 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상살이 내 마음과 같기는 결코 쉽지 않은 법. 마침내 영화로움 끝장인 영원한 사랑에 사뿐히 안착했는데, 그런데 그때서야 여복이? 아니 그럴 꺼면 풍년이 내게 좀 일찍 오든가, 아니면 환상마─신비마─낭만마─교태마─그냥 애마 등등 헛것에 현혹되지 않던가! 하지만 그건 배부른 투정. 왜냐하면 그러니까 늬가 여자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라고, 라는 말을 곧잘 들을 것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 하니까. 뭐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러므로 세상만사 우리네 인생은 스피노자의 사과나무가 있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천운보다 노력이 선행되는 게 좋고, 어복보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젓는 '일복에 대한 성의'가 먼저일 것이다. 그렇다고 복잡하니까 난 다 모르겠고, 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자칫 잘못하면 그분께 딱 발목 잡힐지도 모른다. 쉬쉬하는 가운데 어쩌다 저명해지신 그분의 존함은 바로, 쾌락마! 짜잔~! 그래서 얄밉지만, 아쉬우니까, 숙녀에게 천사표라는 말을 실제 들어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럴 꺼면 그분은 진작 클라우드 나인에 입성하셨을 테다. 그렇게 해서 야망을 성취할 수 있다면 대체 뭐가 문제겠나. 자질부터 속 좁은 남자는 많은 반면 말이 통하는 남자, 뭘 좀 아는 남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니까 그럴 수 밖에. 그래서 남은 형편은 이러함. 자존심 고급, 어설퍼도 허세는 상급, 허풍은 미완성, 허영심은 여성잡지와 드라마를 양쪽에 궤차기!
   고로 사랑의 비밀과 인생의 마법은 본인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안 그런가?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얘기는 다 거기서 거기, 유명인들은 태반이 허당에 내가 모르는 지식이 어딨고, 왜 나는 대체......? 워─워─워!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최고는 무슨! 그래서 오늘부터 손글씨로 일기를 쓰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노는 힘을 덜어 블로그 운영하기. 글이라면 고전을 읽고 말이라면 우리는-화법을 터득하기. TV는 채널만 잘 돌릴 게 아니라 끄고 켜기를, 곧 치고 빠지기. 무엇보다 NC는 '이 밤을 찢어버리자' 라는 자세로 입장해서는 곤란함.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어른들이 모르면 누가 알겠나. 신부들러리들의 축제란 바로 그런 거니까. 기쁨의 아리아가 울려퍼지고 가면을 쓰며 축배를 드는 사교 클럽이 진짜라더라? '여심이란 무엇인가'는 진짜로 화초를 키워보면 깨닫게 된다. 크든 말든 방임하며 나만 막 놀기 바쁘면 화분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도 하는데, 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고 화병이 꽃을 먼저 쫓는 것이다. 연애는 꽃이 줄 달린 치즈로 화병을 유혹하는 격이다. 그렇다고 사과가 뉴튼을 만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러든 어쩌든 고수는 호박을 제발로 움직이게 만드는 피리 부는 사나이! 하수는 에너지 낭비 돈 낭비, 우정도 사랑도 그만그만에 독박 쓰기? 그야 뭐 짚신도 제 짝이 있고 각자 숙명을 위해 노력할 뿐. 그런데 잠깐만. 뭐야 그럼 값비싼 정물화는 큰 의미가 없는 건가? 드물게 가짜도 있고 그래서 모조품도 흔한 건가? 과일은 꼬리가 아홉이듯이, 꽃병 위에 꽃 아니냐 이 말이다. 그러니까 어르신께서 애첩이 즐비했던 사극을 즐겨보시는지도.
   어쨌든 속성 숙달도 좋고 천재의 독학도 대단하지만, 기본이 최고다. 남자는 폼이라는 둥 인생 한방이라는 둥? 그건 한마디로 농담이다. 행운의 여신도 기본을 찾아다니시는 것이다. 메트로놈, 쨉, 가랑비, 일과표, 슬로건, 마음가짐 같은 것. 사랑도 행복도 그분들을 결코 싫어하고, 싫증내며, 실망시키지는 않는 법이다. 단, 여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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