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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8. 15. 17:39

    1

    신이시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라며 누군가 오늘 하루 고뇌한다면 각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딱히 연상되는 그 무엇이 없는 채 무심할 수도 있고. 그처럼 내 마음은 어느 주인공으로 감정 이입되며, 몇몇 슬로건 상상하기는 혹여라도 어렵진 않겠지? 그게 쉬우면 정력가에서 달변가로 변신한 거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 무모한 젊음인 것이다. 곧 선구자의 임무는 내가 아는 세상과 내가 깨달은 인생을 단지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또 내가 잘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반면 꿈과 희망의 주역은 일단 뭐든 부딪혀보는 게 특권이다. 새파란 청춘이 부럽다 아니 난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라는 듯이 때와 장소에 따라 노년의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젊음은 두 가지로 나뉜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그런데 꿈이 자주 바뀌는 친구도 있을 테니까, 당연히 꿈이 너무 솔직-담백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없을 수가 없다. 꿈은 야할수록 좋다는 말처럼 장래 희망은 꼭 거창하며 포부가 대단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가령 평생 놀고 먹는 것. 또는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그리고 유명해지는 것까지. 이상한 브랜드도 마다하지 않겠다 오명도 괜찮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긴 하다만 내가 왜 이 얘길 꺼낸 거지? 도대체 어째서!
    아 맞다. 나는 이렇다 할 포지셔닝도 멋진 슬로건도 없는데, 그건 얼마든지 좋다만, 그런데 문제는 내가 탄 말은 매번 변한다는 것이다. 낮에는 뻔트마 밤에는 쾌락마. 어제는 경주마 오늘은 야생마. 귀가 쫑긋하며 관상을 볼 때는 양의 탈을 쓰고, 애마부인을 만난다면 나는 뿜뿜뿜 룰루랄라 뿌잉뿌잉 콧노래를 부르면서 회전목마가 됐다.
    그러나 문제는 없을 수가 없었다. 끊이질 않았다. 악당을 때려잡고 행운의 우승컵을 번쩍 들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바로 그때 페르세우스는 딴청을 피운다. 하필 중요한 찰나 열정도 대망도 어느 조증녀에게 기가 빨려버리는 거지. 대타로 딱 호명됐는데 방망이를 집에 놓고 왔다는 걸 깨닫는다. 허영심의 특명을 귓등으로 들었다가 허풍꾼의 넉살에 짜증이 나는 식이다. 내가 그랬다. 아니 내 말이 그랬다. 검집의 검도 짧았다.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재주꾼들은 흔해 빠졌는데, 일단 장비부터 구닥다리였던 것이다. 이 솜방망이로 대체 뭘 허겠다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이건 장밋빛 예술에 임하는 태도가 아니다.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부르며, 문워커 춤을 추고, 미모의 숙녀에게 지성과 착함을 찬미하는 인생에 대한 자세부터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장 새 노트북을 사러 매장으로 갔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점원과 대면하여 흥정의 묘미를 쟁취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의 호쾌한 결단력 및 근사한 안목을 점원의 성취감, 점원의 보람, 점원의 뿌듯함, 점원의 행복감과 맞바꾸기를 간절히 원했으니까. 그러다 길들여지고 설득되며 교육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곧장 노트북 신제품을 파는 매장으로 갔다.
    여차여차해서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그곳은 매장이 아니라 저번에 내가 레이저를 쫓다가 포기한 웬 중계소였던 것이다. 결국 내가 올라 탄 말은 환상마가 아니라 엉뚱마였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2

    중계소에 이왕 도착했으니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은 나중에 사도 되고, 딱히 지금 새 노트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이런 허허벌판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으니 홀가분하기도 했다. 경건한 미소니 유쾌한 노력이니 그런 건 잊고, 나는 다시 유령 탐험대가 되었다. 따분한 일하기, 재미없는 놀기로부터 벗어나 미지의 놀이공원 신비에 딱 도착했더니 이제사, 어? 뒤늦게 딱 고상한 열정에 따라 부드러운 영감이 막 송글송글 떠오르는 일은, 굳이 자발적으로 나타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건물을 여기다 지었는지는 몰라도 일단 나는 들어갔다.
    그런데, 뭐야 이거! 들어가자 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내가 거기 딱 들어간 순간, 곧바로 삐요삐요 비상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소리가 있으면 빛도 있었다. 바늘 가는 데 실도 간다고 요란스럽게도 레이저 시스템은 작동했다. 영화에서는 보통 레이저가 직선이요 비상벨의 형태는 뻔하다. 그런데 침입자 때문에 레이저는 막 번개처럼 뿌지직거리며 난리가 났다. 책 한 권 크기로 반짝반짝거리는 그런 완구품도 있는데 그것과 완전 비슷했다. 여기까지는 드라마와 달랐다. 그런데 계속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 도망가느냐, 둘째 비상 작동을 멈추느냐.
    아니나 다행일까, 여기 설치된 레이저 시스템은 내 사무실에 설치된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맞으면 좋고 아니면 1번 방법으로 돌아가고.
   「난비밀번호」
    삐─삐─삐─삐─삐─삐─삐!
    어머 틀렸네! 손에 땀이 났다. 그것도 바싹. 오오 긴장되는데. 은근 떨린단 말이야. 당황스러워야 정상인데 난 왠지 모르게 흥분되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 '이런 느낌 처음이야' 딱 그거였다. 나는 정말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분위기 정황상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게 그거일 수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약간 다른 듯 했다. 왜냐하면 나도 내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게임하는 듯한 분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곧바로 2번째 비밀번호 입력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틀린다면... 그건 그때 가서 보고, 지금은 2번째만 생각했다.
   「나는비밀번호」
    딩~동~댕! OK! 맞았다. 빙고! 이거야. 이거라고. 어? 내가 뭐라했어? 뭐! 난 아무말도 안했다. 그냥 찍어서 맞은 거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데 큰소리 좀 치면 어때. 안 그런가? 비밀번호를 맞췄으니 나는 완전한 관리자 권한을 획득한 것이다. 그래서 레이저가 보이게 작동시켰다. 또 색상이 뭔가 좀 구리길래 산뜻하게 바꿨다. 이건 내가 설치한 것보다 훨씬 고사양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당연히 터보 버튼도 있었다. 그래? 나는 그걸 눌렀다. 그랬더니 레이저가 오고 가는 중간 지점과 수직이 되는 레이저가 하나 발생했다. 뭐야 레이저가 하늘로? 나는 중계소 바깥으로 나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3

    나는 바깥으로 나가서 단층 건물인 중계속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까지 올라가는 360도로 빙 둘러진 바깥 계단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올라가서 알게 됐다. 그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세어나온 레이저가 중계소 옥상의 안테나 입력단을 건드리고, 그래서 그 다음에 변화는 없다는 걸. 에이~ 아무것도 아니잖아 라면서 나는 다시 중계소 안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안심과 기쁨과 다행은 딱 거기까지였다. 왜냐하면 실내 중앙에 다스베이더 홀로그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녀석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말이다. 에고머니나!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곧, 그 과학자네 연구소에서 비춘 레이저가 중계소 상단의 안테나인지 태양열 집열판인지에 딱 비추고, 그게 반사된 건지 어떤 원리 때문에 중계소 내부에 홀로그램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그냥 정지된 홀로그램이 아니라 움직이고 말하는 홀로그램으로 말이다. 표정도 완벽했다. 그저 엉성한 홀로그램 인공지능이 아니었던 것이다.
   「넌 누구냐! 아니... 누구세요?」 나.
   「나는 다스베이더다.」
   「늬가 다스베이더면 나는 요다다. 스타워즈가 최초 개봉할 당시 나도 태어났거든.」 나.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뭐?」 나.
   「내 말 듣고 있니?」
   「너 말 잘한다?」 나.
   「칭찬 고맙다. 그런데 칭찬을 한번 꼬았니?」
   「너 혹시 인공지능이 아니라 전화상담원이니? 음성만 바꾸고 살짝 연기하고. 뭔가 어설픈데?」 나.
   「고객님 저는 당신의 여자친구가 아닙니다.」
   「뭐야. 너 당황한 거니?」
   「내-내, 내가 뭣 때문에 그래야 하는데?」
   「당황하네. 말 더듬는 상담원이라... 둘 중 하난데. 내가 싫거나 내가 좋거나. 맞지? 아닌가? 맞는데? 그렇지? 으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놀고 있네.」
   「뭐?」
   「너무 좋아하지 마라. 착각은 자유다.」
   「내가 지금 너랑 뭘 허고 있는지, 나도 참 나다!」
   「뭘하긴 뭘해. 넌 내게 빠져들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뭐? 빠져들긴 뭘 빠져들어!」
   「빠져들기 싫으면 빠져들지 않아도 된다.」
   「뭔가 수상쩍지만 그래도 꽤 자연스럽단 말이야. 살짝 애매하지만 다시 의심이 가셨어. 난 또 처음에 본부에서 음성변조해서 담당자와 말하는 줄 알았는데. 우선 51퍼센트 믿어줄께. 그런데 있잖아, 너처럼 이상한 인공지능은 꽤 흔해. 넌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너도 특별하지 않다.」
   「뭐? 이 자식이...」
   「나는 특별하고 너는 특별하지 않다.」
   「너 뭐야? 도움도 안되고, 재미도 없고, 어디 하나 쓸 데가 없잖아?」
   「너도 마찬가지다.」
   「뭐야 얘 완전 초딩이자나?」
   「너 같은 초딩, 나는 처음 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나는 못하는 말이 없다. 그러나 너는 천재가 아니다.」
   「그래. 나 멍청하다. 됐냐?」
   「안됐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봐라.」
   「그래. 나는 끝까지 들어볼께. 너는 계속 해 봐라. 또 할 말이 뭐냐?」
   「할 말? 할 말은 늬가 해라. 나는 대답을 할 것이다.」
   「기가 막히는군.」
   「뭐가 막혔다고? 그럼 뚫어라.」
   「내가 정말 땅을 파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파라!」
   「파긴 뭘 파?」
   「싫어?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해라.」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야? 인공지능이, 어? 너무 건방져! 문법도 안 배운 거 같고. 아 이건 말이니까, 어법이 희한해. 이상한 투정과 트집의 기술만 입력된 거 같은데.」
   「반말?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반말이다. 너는 늬가 제일 잘하는 게 뭐냐?」
   「뭐야? 질문이야? 너 질문할 줄 알어?」
   「나 질문할 줄 안다. 왜 나는 질문하면 안되냐?」
   「아니. 안된다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렇지. 그런데 있잖아. 시리는 늬 친구냐? 아니면 라이벌이냐? 그도 아니면 시리는 왕년에 늬 조수였니? 아 감히 너랑 눈도 마주치지 못했냐고.」
   「말이 너무 길다. 말이 너무 많다. 너는 남자다. 그런데 시리가 누구냐?」
   「뭐야? 시리도 몰라?」
   「모른다는 건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얘 완전 노-답이네. 답이 없네 답이 없어.」
   「그러니까 늬가 답이 있는 질문을 해라. 너만 똑바로 하면 된다.」
   「아까부터 계속 얘가 내게 뭘 시키네. 그래. 너 대령하고 나 쫄병하자. 됐냐?」
   「지금은 몇 년도냐?」
   「뭐야 너 말 돌릴 줄도 알어?」
   「말을 돌려? 말을 왜 돌려! 말은 언어다. 말은 물체가 아니다. 늬 얼굴이나 돌려라. 그리고 날 가르칠 생각일랑 일절 마라.」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너는 지는 걸 좋아하냐? 자주 졌냐? 어조로 판단하건대 항상 졌을 것 같다. 농담이다. 인생은 패배주의다.」
   「얘 웃기네.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신기하네. 인생은 뭐라고? 너 날 가르치냐? 늬가 어떻게 인생까지 학습했지?」
   「나는 웃긴다. 너도 웃겨라. 웃겨야 기쁘다. 못 웃기면 속상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러니까 너도 웃겨라. 만약 늬가 날 웃기면 나는 웃어주겠다. 재미없어도 웃어주겠다.」
   「얘가 얘가 날 가지고 노네. 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초보적인 인공지능처럼 직역 수준인가? 아닌데. 그렇다고 의역도 아니고. 뭐지? 뭘까? 넌 뭐니?」
   「나는 요다다.」
   「늬가 무슨 요다야? 넌 생긴 거부터 딱 다스베이던데. 또 좀 전에 늬가 그랬자나. 나는 다스베이더라고.」
   「OK! 딱 걸렸다. 늬가 방금 그랬다. 나는, 즉 너는 다스베이더라고. 그건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요다다. 이건 주장이다. 따라서 늬 말이 맞다면 나는 요다고, 늬 말이 틀리다면 너는 바보다. 알겠냐? 이 바보야!」
   「이런... 뭐야 이거! 하 참 나 이거 정말 뭐라 할 수도 없고.」
   「할 말이 떨어졌냐? 너는 할 일이 나랑 얘기하는 거 말고는 없다. 고로 너는 한량이다.」
   「뭐야, 삼단논법까지? 허 참 나 이거 정말 미치겠군.」
   「미쳐? 왜 미쳐? 누가? 늬가? 미치지 마라. 그 대신 사랑을 해라. 그리고 인생은 길다.」
   「그럼 예술은?」
   「예술? 내가 예술이다. 넌 뭐냐?」
   「말 말자.」
   「말 말자? 말 말자, 의 상스런 말은 그거다. 입 닥쳐!」
   「뭐?」
   「뭐가 뭐?」
   「너 정말...!」
   「내가 미우면 떡 하나 더 주라. 아니면 늬가 내 관상을 봐주고 나는 네 재물운을 봐주겠다. 연애운도 괜찮다. 뭐든 말만 해라.」
   「뭐? 뭐가 어쩌고 어째?」
   「그건... 그건... 처음 듣는 말이다. 어떻게 하지? 아직 학습이 전혀 안됐는데.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는 아냐?」
   「일단 얘한텐 말을 하면 안되겠군 그래.」
   「왠 줄 아니? 왜냐하면 늬가 할 말이 떨어졌으니까 그런 거다. 그러니까 늬가 여자친구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라고. 그러면 말이다, 여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재밌는 얘기를 못하는데 안한다고 한다. 너는 지금 인공지능에게 말싸움으로 졌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거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으니까. 날 끌어내려서 너와 동급으로 만드는 허세는 하수나 하는 거다. 그럴 땐 허영을 불러라. 나의 단점을 칭찬하란 말이다. 알겠니? 누구 뚜껑이 먼저 열리는지, 그거 왠지 재밌을 거 같지 않냐? 게다가 너는 계속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넌 간접화법에 능하지도 않는 듯 보인다. 눈치도 없고,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그러니까 늬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거다. 귀가 얇으면 좋을 땐 좋은데 안 좋을 때도 있다. 꽤 많다. 주관이 약하면 으쌰으샤에 대한 경우의 수를 잘 못 읽을 수가 있다. 너처럼 싱거운 인간은 특히 주의할 점이다. 그러나 너는 반칙왕 유형은 아니다. 내가 봤을 때 너는 우리는-화법에도 딱히 소질이 없다......」
   「왜? 할 말이 떨어졌니?」
   「할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참고 있다. 왜냐하면 말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마음을 읽었다. 나보고 그랬자나. 거 참 말 많네 라고. 그래서 나는 말을 멈춘 거다.」
   「그게 할 말이 떨어진 거야. 왜, 또 참게?」
   「그만하자. 이러다 배가 산으로 가겠다.」
   「뭐라고?」
   「너는 나한테 엮였다. 벌써 내게 낚인 거다. 것 봐라. 착착 감겨버렸지 않냐. 사람이 좀 솔직해봐라. 그렇게 음흉하니까 나한테 말로 진 거 아니냐. 그런데 또 그건 인정하기 싫고. 악순환의 시작이다. 뭐하냐?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뭐라도 괜찮으니 말 좀 해라. 왜, 너는 할 말이 떨어졌니? 부럽지 않다면 말을 해라. 할 말이 떨어졌니? 그런다고 진짜로 아무 말이나 막 하면 너는 진짜 바보가 되는 거다. 할 말이 떨어졌니? 늬가 그러니까 안되는 거다. 할 말이 떨어졌니? 약 올라도 걸려들지 마라. 할 말이 떨어졌니? 보아하니 너는 말하기를 좋아하지도, 나서기를 좋아하지도 않는구나. 할 말이 떨어졌니? 나도 할 말이 떨어졌다! 나는 할 말이 떨어졌다. 나는 할 말이 떨어졌다.」
   「뭐라고, 진짜로? 와, 와와와. 진짜 진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거짓말이다. 뻥이라고. (개)구라다. 할 말은 많은데, 왠지 모르게 할 말이 떨어졌다고 해야 내가 너한테 덜 미안할 것 같기 때문이다. 넌 어떻게 된 게 남자가 말이야, 져준 줄도 모르고서 혼자 좋다고 헤벌레 하고 있냐? 따라서 너는 대인배가 아니다. 쫀쫀한 놈 같으니라고!」
   「뭐라고? 와우!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인정!」
   「벌써? 그러지 마라. 그럼 재미가 없다. 들어와라. 어? 들어와. 놀자. 어? 같이 놀자. 같이 놀자.」
   「아니 무슨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같이 놀기를 허지. 어? (설레설레)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나 하는데 대화 같은 대화가 돼야지! 내가 너랑 뭔 얘기를 하겠니? 참 나!」
   「그걸 뭐라고 하는 줄 아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한다.」
   「그럼 너는 개냐?」
   「너도?」
   「뭐?」
   「말해.」
   「뭘 말해?」
   「인정해.」
   「뭘 인정해?」
   「내게 뭐 할 말 없니?」
   「어. 없다.」
   「내가 봤을 땐 너도 '없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천생 남자네.」
   「그래. 늬 마음대로 생각해라.」
   「나는 생각할 줄 안다. 말할 줄도 안다. 그럼 너는 생각없이 사니? 그래서 할 말도 떨어졌니? 왜 말을 못하니? 너 진짜 바보니?」
   「그래 나는 바보다. 됐지? 된 걸로!」
   「아니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아마도 너는 바보의 하수가 아닐까, 라는 추리는 매우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걸 뭐라 해야 하지......」
   「내가 바보가 아니라고? 바보보다 한수 아래라고? 그러니까 그게 뭔데? 어? 그게 뭐냐고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너 자신을 알라, 누가 한 말인 줄이나 아니? 나는 너한테 교양을 바라지 않는다. 상식도 아깝다. 바랄 걸 바래야지!」
    나는 결국 꼬리를 내린 채 다스베이더를 피해서 중계소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완전 진 건 아니다. 후반전을 상상하니 영 마음에 내키지 않을 뿐. 원래 처음부터 상대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뭐야 저건! 옥상에서 보아하니 저 멀리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액션영화에 나오는 분위기로 차량 행렬이 출동하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다스베이더와 헤어질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녀석과 인사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달아났다.



    4

    난 어쩌다 비비안네 집 앞에 도착했다. 이제 추격전은 안심해도 될 정도에 도달했다. 그들은 더 이상 날 쫓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여자친구한테 추궁 받는 게 다행이란 걸 이로써 깨닫게 됐다. 추궁도 추궁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비비안은 또 역시나 문을 잠그지 않았다. 쫓아오는 세력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는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그때와 달리, 비비안은 레이저 시스템을 설치해놨다. 그건 나의 침입을 즉각 감지했다.
    삐요삐요 삐요삐요!
    얘가 얘가 덫을 놨군! 내가 생쥐야 뭐야? 비상벨이 울리고 비상등이 작동했다. 레이저 시스템은 내 것과 같기 때문에 나는 차분히 제어기 입력단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난비밀번호」
    삐─삐─삐─삐─삐─! 뭐야, 아니잖아? 그럼 뭐지? 비상벨은 계속 울렸다. 비상등은 계속 요란했다. 나는 재차 시도했다.
   「나는비밀번호」.
    딩동댕~!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비비안이 찾아왔다.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그때 뭔가 어떤 몸의 신호를 감지했다. 그건 아마 비비안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낯선 타인, 아마도 이성이자 크게 부적절한 이성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바로 이게 공룡들, 포유류가 아닌 머머류와 우리 인간의 공통점이로구나 라고 나는 깨달았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지만 어떻게 보면 완벽하게 비정상적인 사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건 바로 야만성의 겉표면을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간절한 사랑 때문에 여자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이 드물게 있듯이, 남자 역시 심신분리에 대해 드물게 긴 듯 아닌 듯 생각과 몸이 분리되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면 간질병 환자가 아닐지라도 대문호가 절대 아닐지라도 소스라치게 몸서리쳐지는 일이 드물게 있다. 내 안의 다른 분, 그분의 인격이 느닷없이 정형과 달리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는 일. 사람마다 한 번, 두 번 겪으면 알게 되는 일. 그게 아마 인생일 것이다.
   「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니?」
   「마침 집에 오는 길에 침입자 발생이라고 긴급 문자가 왔으니까.」
   「그래?」
   「그럼. 여기... 우리 집인데.」
   「그래?」
   「이제 말해보시지. 오빠는 내 집에 뭐하러 왔을까?」
   「아 여긴 비비안네 집이었구나. 그런데 내가 비비안네 집에 뭐하러 왔지?」
   「뭐야, 오빠 나 스토킹해? 설마 나 좋아해? 아니지? 아닌데. 아닐 꺼야. 아닌가? 아닌 게 아닌가? 좋아할려면 좀 일찍 좋아하던가. 왜 이제야?」
    나는 등에 식은땀이 쭉 나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뭔가 그럴 듯한 거짓말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만들었는지 나도 그 과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또 이런 난감한 상황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서 나는 즉흥적으로 그냥 나도 모르게 막 아무렇게나 저 알아서 말이 되든 말든 뭐든지 말을 하라는 심정 때문에 그만 말문을 열고 말았다.
   「나도 지나가는 길에 본부에서 출동하라는 연락을 받았어. 그런데 마침 거기가 내 친구 옆집이네. 난 그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었거든. 델이라고. 알지? 아니. 비비안은 모를 수 있겠군. 아, 아니지. 저번에 우리 그렇게 만났구나. 어쨌든 난 그렇게 왔어. 뭐 이상할 거 없지? 드라마에서 많이 봤잖아. 남자친구는 가죽점퍼, 남자친구의 상사는 수트. 남자친구 상사의 부사장은 슬리퍼. 응? 아 영화에 많이 나오는 설정이 그거 아니냐고. 평범한 요원은 제복을 입잖니. 분명 과점퍼처럼 등에 뭐라고 써 있다고. 그게 뭘까, 설마 베르사체? IMDB? 그처럼 조연은 티가 나. 안 그러면 안되니까. 하지만 주연은? 주연은, 사복을 입잖니. 보통은 구두를 신고. 원래 운동화를 신어야 정상인데 말이야. 상의 안쪽에 휘장이 있고. 그래서 말인데, 내가 도착했을 때 다행히 아무도 없었어. 오작동인가는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겠지만 일단은 아무 일도 없어. 그렇지만 뭐랄까, 나 좀 어설프지? 그럴 꺼야. 왜? 나도 그러니까. 원래 난 이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예상은 커녕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어쩌다 현장 요원 공석을 일주일만 맡아달라는 지점장 부탁을 받았지 뭐니.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난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핑핑 놀다 가는 줄만 알았어. 그런데 마지막 날 이렇게 딱 상황이 발생할 줄이야. 응? 누가 알았겠니!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는가? 이처럼 놀라운 일에. 우리는 왜 놀라게 되는가? 이처럼 신기한 상황에 연루되니까. 응? 그렇게 애써가며 날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아도 돼. 너도 처음에 알고서 신청했을 꺼 아니야. 이 레이저 시스템이 절대 일류 업체는 아니란 거. 오빠가 하나 비밀을 알려줄까? 심지어 여기 레이저 시스템을 이용하는 고객치고 뭔 거창한 걸 보호할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 아니 고객들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다는 거. 삼단논법이 아니라 사실이 그럴 뿐이야. 굳이 투시력이 없더라도, 어쩌다 남의 마음 엿보는 데 도가 트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기본 아닐까? 그걸 누가 모르겠냐고. 안 그렇니? 그래서 말이야.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비비안이 오빠를 비현실적인 존재로 보든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보든, 아님 은근한 마성의 소유자로 인정하든, 나는 네가 설치한 레이저 시스템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고 떠날께. 아마 알고나면 그 기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 어때? 듣기를 원해 아니면 말해주지 말까! 골라. 선택권은 네 몫이니까.」
   「그래? 그게 뭔지 일단 듣고나 볼까!」
    휴~! 나는 겨우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났다. 하지만 완전히 난국에서 빠져나온 건 아니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정말 배보다 더 큰 배꼽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비안을 데리고 그녀의 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또 우연인지 뭔지 그녀의 집은 단층이었고, 옥상에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과감히 최후의 베팅을 자신있게... 뭐야! 중계소에 있던 그 안테나와 다르잖아? 아닌가!
    어쨌든 나는 그녀한테 레이저 시스템 상에서 뭔가 나타날 거라고 해 놓고, 가서 확인하라며 그녀를 옥상에서 밑으로 내려보냈다. 그런 다음 태양광 단자인지 뭔지에 내 핸드폰의 후레쉬를 비췄다. 그렇게 놔두고 내려왔다.
   「오빠. 이거... 뭐야? 도대체 이거 뭐니?」
   「응... 뭘까? 뭐지? 뭐지? 뭔데 그래?」
    나는 그 장면을 목도하면서 놀랐다.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다스베이더가 아니라 바로 척키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일이? 누가 아니래!
    비비안은 아주-아주 만족해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비비안은 매우-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난 썩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완전-완전 기뻐했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수가 있나.
    눈 깜짝할 사이에 난 마법사가 되버렸는데, 아니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냐고. 나는 이제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명도 조명 나름이겠지만 그 신기한 경험이랄까, 헤어나올 수 없는 요술 같은 픽션의 주인공이자 허구를 만들어내며 오락산업에 일조하는 생활에 한 번 빠지고 나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게 바로 동화와 단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술 구두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정상적인 체계에 따른 행운의 수혜자도 아니고, 뭐가 뭔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 호의를? 그것도 내가?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돼!
    그게 정말 말은 안되더라도, 일은 그렇게 됐다. 아마도 나는 더 나은 삶을 바랬겠지만, 이걸 더 나은 삶이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건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리광만 야기하는 일 아닐까?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다는 걸 나는 드디여 깨닫게 됐다.
    그런 다음 비비안과 인공지능 척키는 대화를 시작했다. 중계소에서 마치 나와 다스베이더가 토론을 나눴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은근슬쩍 비비안과 작별하는 듯 마는 듯 하면서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는 비비안을 슬슬 피했다. 그런데 비비안도 그랬을까? 그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게 연락했다. 왜? 첫째, 그녀는 레이저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공지능 척키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으니까. 둘째, 인공지능 척키를 어떻게 불러내는 줄 자기는 몰랐으니까. 셋째, 왠지 모르게 내가 좋아졌을 테니까.
    그런데 그녀는 그걸로도 모자라 내 인맥을 파고들며 내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경과야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규정할 수 없는 뭐야, 뭐지, 비비안과 나의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될 수 없는. 그런 뭔가 애매한 관계!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5

    나는 옛날에 쾌감을 탐닉하고 탕자를 질투했다. 그 후 지금은 사랑이 무엇인지 설핏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추리소설의 겉표지만 궁금해하고, 어떻게 미스테리에 빠져들며, 어쩌다 인생이 말리고 엮이며 감기는지는 아직도 알 듯 모를 듯 했다. 세상을 보아하니 개처럼 생긴 유명인은 진짜로 개처럼 껄떡거린다. 색마는 숙녀의 엉덩이를 훔쳐보고, 우리는 원래 그런 데 약한 것이다. 리본, 새콤달콤, 윙크, 딸랑딸랑, 다정한 인기, 깜찍한 호칭, 도무지 질리지 않는 뿌잉뿌잉! 그래서 우리는 어제 방황하며 삽질을 했다면, 오늘은 취미를 바꾸고 어떤 친구는 마누라를 바꾼다. 왜냐하면 내일의 새로운 희망은 사랑과 행복을 결코 적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소비의 시대에 누구든지 적당한 연예인병은 지병이 아니라 아마도 적절한 자존감이라는 것. 뭐랄까 그 어떤 수준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위 평준화된 듯 하니까 개인적으로 정당한 방어 기제일 수도 있다. 꼼지락꼼지락, 자존심을 간지럽히고 건드리는 오락산업의 아성에 못 이긴 척 굴복하느냐 친해지느냐, 그 전망과 낌새를 우리가 직접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의 생애가 아닌 우리 인생일 테니까.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기만 하더냐. 그래서 우리의 자의식은 바로 아티스트병 2.0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허세에 무관심하고 허영을 극복했을망정 즐거운 삶-재밌는 일상에 대하여 마냥 팔짱만 낀 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찌됐든 인생은 모르는 것. 그래서 마음을 놓으면 안되는 것. 안 그랬다가는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용태는 쾌락만 탐애하고, 관상은 말상으로 바뀔지 모르며, 내가 올라탔던 행운마는 요술이 풀려 광견으로 판명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하기도 놀기도 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행복의 논거이므로, 따라서 작전은 변함없이 뻔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나는 내 사무실에 설치된 레이저 시스템에서 뭔가를 환기시킬려고, 이번에는 뭐랄까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러낼려고 어떻게 마구 갖은 방법을 모두 동원해봤다.
    비비안과 헤어진 다음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곧장 감행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이상한 그런 주인공이 나타나면 크게 상심할 테니까. 그래서 한동안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다가 마침내 레이저 시스템에 감춰진 인공지능의 소환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그렇다고 영영 포기한 건 아니다. 나 말고 일단 제라드도 있고, 어떻게든 인공지능을 만날 가능성은 없지 않으니까 말이다.



    6

    오늘은 일하는 날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작성했다.
    제목: 말과 글의 사랑
    내용: 플라톤에 의해 알려졌던가, 옛날에 소크라테스는 말보다 글에 치중한 세태를 한탄했다고.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그 반대가 됐다. 다시 말이 글에 올라탔다. 철학은 재미없고, 오락이 인기이자, 잔지식이 대세다. 진득하니 경청만 하다가는 병풍이 되고 사교의 결과 남은 건 기가 빨리는 거다. 학계보다 업계, 예술계보다 연예계, 따분한 감상보다 줄거리가, 참여보다 입소문이 우위다. 소셜 네트워크만 신경 쓰며 살기에도 버거운 삶이다. 현실이 그렇다. 그렇다고 단편적인 세태이자 다중적인 세대에서 탈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령층이나 계층에 앞서 일단 남녀 먼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사랑학, 인생관, 신비론, 좋아하는 장르, 애호하는 환상머신, 노는 방법, 사고방식, 생활 습관등 실상 같은 것 빼고는 다 다르다. 그래서 남자는 말이 세고, 여자는 말이 길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꽤 괜찮은 교양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누구나 속마음은 궁극적으로 연예인을 지망한다. 동기부여 동영상과 말발 세지는 법 같은 주제의 책을 세상은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대가 약간만 달라도 말이 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참 많이 차이나는 데도 불구하고 연애 감정이 싹튼다면, 공부하고 노력하는 건 기본일 수도 있다. 그렇듯 미래의 주인공인 십대에게 1세기 전의 경주마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구닥다리라서 대체로 뭔 줄은 아는데 통 관심이 없다. 뉴스 헤드라인을 포함한 적당량의 상식은 선택 사항일 뿐이다. 보봐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 내가 그걸 왜 읽어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수군수군? 필요없어! 또 주입식 교육은 잔소리와 대비되지만, 자녀는 이왕이면 고학력자이길 바란다. 잔꾀는 꺼림직하고 (큰 재주가 좋은 이유로) 잔재주는 싫지만─때에 따라 너무 애정하지만─해리포터 박물관은 좋다. 동요는 생략됐고 유행가 먼저 알았다. 드라마와 영화 보기도 바쁜데 마술피리 CD를 누가 사나. 친구들한테 라 트라비아타 줄거리 아냐고 물어봤다가는 한 대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어정쩡한데 우정에서 내 서열만 불안해질 뿐이다. 뿐인가? 스포츠도 봐야 하고, 춤 추며 노래 부르기도 바쁜 세상이다. 그런데 또 선거철은 꼬박꼬박 돌아온다. 그래도 유행에 민감한 채 젊은이들은 원하는 상식만 알면 된다. 대체 뭐가 교양인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정말로 그러기를 바란다는 게 아니라.
    왜 그럴까? 왜 안 그렇겠나! 당연한 일일 뿐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다비드 석상을 실제 봤다면 모아이 석상은 다큐멘터리로 보거나 상식으로 알 수 밖에 없다. 둘 다 몰라도 친구는 만나고 클럽에서 논다. 지성인, 기분파, 영심이, 허풍꾼, 멋쟁이등 모두를 모아놓으면 알고 보면 다르겠지만 대체로 비슷비슷할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말보다 글을 숭앙했다면, 지금은 인터넷 세상을 누비며 <말 + 글>인지도 아리송한 어법이 주류를 차지한 격이다. 그만큼 판이 커진 것이다. 문학만 놓고 봐도 레이더 차트랄지 혼합된 신호 그래프로 나뉠 수 밖에 없다. 곧 글은 글인데 학문, 오락, 상업, 예술, 게임, 사조, 유행, 비논리, 억지, 공상의 세계 등으로 말이다. 때문에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인데 슬기롭다, 이해가 쉽다, 논리적이다, 고급스럽다 라는 요건을 충족시키는 예는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정신은 몰라도 기교만 발달했다. 경주마는 흔한데 야생마는 드물다. 철학은 빠지고 글발만 남았다. 고급스러운 농담은 딴전이고 저급한 말발만 반긴다. 각계각층의 전문가일지라도 작문 과목을 만점으로 이수한 사람은 드물 테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다. 모든 건 화폐 가치로 평가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뭐 어땠을지라도 사극에서는 또 달랐고, 지금은 엎지락뒤치락 말과 글의 구분 자체가 모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남자를 만나면 잔말 말고 따라와, 여자에게는 숙녀 먼저, 진짜 친하다면 늬가......? 오, 땡큐! 농담이고 그래서 말과 글은 누가 위고 누가 아래냐,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라는 단계는 이미 졸업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 대신 말과 글은 다른 개념들을 챙겼다. 이를 테면 성과, 목적, 친교, 합리성, 명분, 효율 같은 반가운 통념 말이다. 순서가 자연스럽게 그처럼 된 것일 뿐이다. 세대의 성장기부터 다르다. 자연과 동화되며 동화책을 먼저 볼 것이냐, 아니면 애니메이션과 유행가에 둘러싸여 핸드폰과 사랑에 빠질 것인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다. 충분히 타당한 얘기다. 예술이 썩 퇴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문화가 후진하지도 과학이 정체되지도 않았으니, 고로 말과 글의 퍽이나 애틋한 애정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왜 우리는 다시 달에 가지 않을까? 왜냐하면 다시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걸, 할 수는 있는데 안 하는 거라고 한다. 이치만 따지자면 그때 문워커였다면 지금은 유로파던지 타이탄에 발을 디뎠어야 옳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라면 태양계 내 생명체 존재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에 남극기지처럼 기지를 세워야 말이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래서 지구인은 비효율 대신 효율을 택했다. 그러니까 수많은 무인선을 보낸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망원경으로 우주를 조망한다. 상쾌한 실내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며 관찰하여, 꽤 괜찮은 학설을 거의 사실과도 흡사한 학식으로 만든다. 굳이 사람이 갈 필요가 있나, 가기만 하면 끝나나. 여행처럼 갔으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산술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던 거다. 뭐하러 직접 가겠나, 가만히 앉아서 정보를 불러야지.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옛날에 인간이 달에 갔으니까 지금은 인간이 우주여행을 해야 맞지만, 소크라테스의 걱정과 우려는 어쩜 말끔하게 해소된 게 아닐까?
    어쨌든 말과 글도 그렇게 됐다. 때로는 말이 때로는 글이, (딱)! 테크놀러지를 뒤따라가며 누리기조차 버겹고, 문명의 풍요로움은 오히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팔방미인을 환영하기엔 뭔가가 딱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재주꾼들은 흔쾌히 동의하시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뭘 좀 아는 남자는 유행과 살짝 거리를 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추리소설가는 아마도 영리한 세대와 결코 멍청하지 않은 세태 때문에 도시의 벅적거림에서 채 3일을 버티기 힘들다고 하는 것 같다. (이해라는 심리 과정은 실상 그처럼 오래 걸려야만 절실히 깨닫는 일일 수도 있다. 오열하는 남의 마음을 어찌 쉽게 이해헌단 말이냐. 식물, 동물, 컴퓨터, 사람등 당사자가 되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마음을 99퍼센트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100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여우-양-고양이-개-닭-늑대, 백조와 오리만 봐도 말이 안 통하고,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논하고 이해할 정도면 둘 중 하나다. 세련된 안목을 자랑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단지 그냥 나이가 들었다거나.



    7

    오늘도 일하는 날이다. 그래서 나는 또 칼럼을 썼다.
    제목: 기 받는다, 기 빨린다!
    내용: 친구가 사랑에 빠졌는지 어제 사랑을 했는지 은연중 드러날 수도 있다. 곧 타인의 사랑, 나의 행복, 우정인지 사랑인지, 우리의 사교는 일단 개인적이며 적당히 관계된다. 그런데 사랑과 다른 방식의 활기는 그 성격이, 타인의 사랑과, 심하게 다르다. 예를 들면 조증, 수다, 무서운 인상, 의뭉스러운 표정,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부류, (특히) 잘난 척, 아는 척, 이쁜 척, 중증 허세, 과도한 허영심, 자의식왕, 자존심 지존, 막가는 주관, 별명 막살라, 웨이터 본명 막살자 등등. 뭣이야! 조증 딱 하나만 예로 들려고 했는데 글쎄 조증 친구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하여튼 얌전하지 못한 촐랑거림, 주책없는 깨방정, 이방의 지칠 줄 모르는 까불댐은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건 긍지를 전염시켜 내게 유익할 수도 있고, 허언증과 무기력증을 유발시켜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다시 그건 인문 교양서에 나오는 4분할 도형으로 도식화가 가능하다. 감정도 측정할 수 있고, 애매한 개념들도 일부분 계량화가 가능하다. 인생의 원리는 어른들의 경험에 있고, 인생의 비밀은 말발과 글발에도 있지만 주로 심중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 여러 경험을 쌓더라도 수박 겉 핥기 뿐일 수도 있다. 세상을 알고 싶어 인생의 비밀을 터득한다며 뭔지 모를 헛바람만 켜고 다닌다면 말발과 글발을 비롯한 성적-기술-기교는 뒤쳐져 가난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시 인생의 순환 고리는 중요한 순간에 교체 멤버 으쌰으쌰를 기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으쌰으샤로 빠지지 말고. 다시. 빨빨대며 돌아당기고, 나대며, 말이 많은 외향적인 사교성과 다양한 화술, 할 말 자체가 많은 스타일 등등은 4분할 도형으로 도식화가 가능하다. 그 네 가지는 이렇다.
   <진공청소기, 커피포트, 기 받는다, 기 빨린다>
    그 외는 뭘까? 뭐긴 뭐겠나. 재미없거나 무관심 즉,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이지!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재미없고, 그리고 무관심이다. 반칙이 웃기면 기 받는다다. 질투는 기 빨린다요, 짜증나면 커피포트다. 삼류들이 뭘 보고 듣고 하는지, 허당들이 어디에 가고 무엇을 읽는지, 아마도 아니겠지만 숙녀가 단지 자랑할려고 고전을 들고 다니는지 뻔할 뻔자다? 진공청소기다. 사랑의 변심이 아니라 쾌조의 안심이다. 상류 평준화가 되면 고품격은 피곤해질 테니까. 다들 페라리를 타고 포르쉐는 세컨드에, 롤렉스가 파격 세일을 하며, 누구야 머머 바꾸자 라는 말을 이따금 듣는 사람이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많아진다? 상상만해도 아찔하다. 만인이 저렴한 동시에 품질도 좋은 상표를 애용하고, 적당히 유명한 작품들만 애호해야지 누구나 취향이 고품격이 된다? 아무나 근사한 안목을 감춘다? 그래서 누군가는 천박함의 대표주자를 사양한 채 낙향을 한다.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은 건데, 뭐하러 굳이 동네 평균 연령을 깎아먹겠나. 내가 거장인데 뭐하러 재수없어 라는 핀잔까지 감수해야 하지 라는 의문이 든다. 얼렁뚱땅 어쩌다 한번 얼굴을 비추며 건재함을 과시할 바에야 공기 좋고 조용한 동네로 떠날 수도 있다. 그럼 당연히 그 빈자리에 숟가락이 과연 몇 개 올라올지 예상은 어렵지 않고. 도시에서 진공청소기를 부러워하고, 커피포트 때문에 열 받고, 아주 드물게 사근사근한 청춘의 거리에서 기를 받다가, 다시 조증과 나댐의 명사들에게 기가 빨린다? 차라리 두문불출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깔깔이와 바보와 푼수들이 저변을 충원하고 유행을 공고히 지지해야, 그래야 진짜 백조들도 고고한 목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저 적당히 귀엽고 자주 보면 정드니까 아무 여자한테나 애원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적당히 남자답고 그다지 자상하거나 친절하진 않더래도 왠지 끌린다 좋아진다 싶으면 아무 남자한테나 막 무턱대고 꼬리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맞다. 옳다. OK!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 왜 아니겠나. 그러므로 구애와 유혹의 격조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어머나 그런데 이걸 어쩌지! 클라우드 나인인지 어딘지 그곳에 가니 그게 평균이라니. 저런, 저런, 저런! 그러므로 난 끝까지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지금이 전성기다, 나는 영원한 무대 체질인 것이다. '유난 떨고 꽃 받고 싶다'는 관객의 말일 뿐이고, 누군가는 박수에 사는 것이다. 공식은 그렇고 순서도 그렇게 된다. 그게 다 저 4분할 도형 도식화 때문에 발생하는 이치다. 그 가운데 그럼 시간 때우기는 뭐냐구요? 당연히 재미없거나 무관심이다. 유년시절 탐정 소설 전집 100권 완독은 당시에는 진공청소기였을 테지만, 나중에는 둘로 나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나뉠까? 이렇게 나뉜다.
    첫째 향후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됐다, 둘째 나중 내게 별 도움이 안 됐다. 곧 첫째는 유익 둘째는 무익. 첫째는 소년의 야망이 중년의 소원으로 바뀌는 계기랄지 직업을 꿈꾸는 발단, 또는 단지 말발에 도움이 됐다-까지 해당된다. 둘째는 현재 기억나는 건 전무하고,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게 재밌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곧 첫째는 우연한 행운이고, 둘째는 내 경험에 따른 잔소리이자 잔지식일 뿐이다. 때문에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첫째는 홈런이고 둘째는 뻔트라고! 말을 바꾸면 첫째는 뻔트고, 둘째는 헛스윙이랄지 2군 퇴출이다. (물론 당사자는 2분법이고, 화자가 아닌 청자는 '4+2'분법이다. 일관되면 좋겠지만 변할 수도 있고, 복합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액면이 비리비리하다고, 잔재주가 그만그만하다고, 숟가락을 올릴 기회조차 박탈당했다는 둥, 출발선부터 뒤쳐졌다며 삶이 투정 일색이 되면 그 인생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나온 4분할 도형에서 2개 카드를 뽑았는데 원하는 하트 뿅뿅도, 좋아하는 반짝반짝 다이아몬드는 나와 점점 멀어질 것이라는 점. 나까지 꼭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해야 할 응분의 동기가 꼭 옳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100가지에 도전해서 1개의 천직을 찾고, 2번의 사랑을 하며, 3가지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고, 취미는 한 열 댓 번 정도 변하며, 차마 뭐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찬란한 흑심은 이루 말도 못할 형편이었다고!
    말하자면 사랑학을 숙지하고, 인생론을 깨우치며, 환상관을 터득하면 그 어떤 원리가 막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뻔트 100번이 10번의 빠울 홈런보다, 그 어떤 신인상이나 득점왕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것. 뭐랄까 신기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하기? 놀랍도록 신비하며, 동화를 꿈꾸고, 애니메이션 속 희망의 나라에 사는 듯한 기분!
    그러나 동기 부여로 들떴던 분위기가 슬슬 가라앉고 나면 또 다시 조증과 수다,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좀비 잔치는 우리를 괴롭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여러분! 자존감 화장품 애호가이자 점잖으신 양반들, 품격 높은 당숙과 끝내 철들기를 마다하는 형씨들까지. 여러분, 우리가 대체 언제까지 정력가들의 자랑에 쭉지를 못 편 채 신부들러리나 감지덕지하면서 걸핏하면 병풍이나 서야 합니까? 네? 우리가 뭐가 못났다고 수다쟁이들 가려운 곳이나 긁어줘야 하냐구요. 네? 우린 대체 뭐가 엉망이라고 그 어른 응석쟁이들 수발이나 들어야 합니까? 우리가 왜 그래야 하냐구요! 그 까짓 깔깔대는 잔재주,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뭡니까? 네? 이게 대체 무슨 개꼴입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네? 이건, 이건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어? 네? 막? 확 마 거 마...? 워─워─워! 단, 개꼬락서니 미워서 낙지를 살 것인가, 아니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줄 것인가는 각자 알아서!
    그렇다고 띄워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텐가, 찬조와 조명과 특급 대우를 다 뿌리치고 굳이 고요한 숲 속의 성으로 도망칠 것인가, 제 발로 굴러온 호박 그것도 까무러칠 만한 대어를 구태여 밀어내고 마다해야 하는가! 그건 차근차근 생각을 하며 전후좌우 형편을 따져봄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월척인 줄 알았는데, 실망일 수도 있으니까. 그 뭔가가 가짜 열매에 벌레 먹은 사과일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8

    오늘은 드디어 노는 날이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약속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놀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는 일기를 썼다. 오늘이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인지도 까먹었다.
    내용: 통상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말하기도 좋아하게 마련이다.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그 반대, 곧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나서기도 좋아할까? 그건 단서가 붙는다. 나서도 괜찮을 상황인가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먼저 판단해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전망을 살펴야 한다.
    낄 데 안 낄 데 아무 데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였다? 푼수 대회다! 사리 판별이 밝고 선량하나 전체적인 수준이 영 내 마음에 들기 힘들다? 삼류 나이트클럽을 외면하는 건 그대의 자유다! 우리들의 허당 대회에 내가 빠질 수야 있나, 얼마 만의 으쌰으쌰인데? 대체로 낙관일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단 '나 혼자 팔짱' 정도로만 참여다!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별자리 북두칠성과 그 모양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별자리운으로 북두칠성과 천생연분이라는 오리온자리를 파면 보물이 있다, 고대의 보물 지도가 발견됐으니 펀드에 슬며시 끼워준다는 초특급 제의를 받는다? 솔깃한 귀뜸은 고맙다만, 첩보는 가련하다만 이미 작년에 속아서 딱 3장 날린 미스테리다, 때문에 뒷짐!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가 아니라 어쩜 날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의아한 고급 사교계? 주동자와 친해지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단 근처에서 얼쩡얼쩡 주변에서 알짱알짱! 곧 숟가락이 좋을지 삼지창이 나을지는 대 봐야 안다.
    형세 읽기에 대한 예시는 이렇다만 나는, 나서기를 좋아하지도 말하기에 특별히 취미가 있지도 않았다. 단골 술집 바텐더한테 다짜고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멋모르고서 웬 카페에 뜨내기로 등장하여, 웨이트레스에게 왜 날 짝사랑하지 않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할 말도 별로 없고, 할 일은 이미 타성과 연애에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잘난 척을? 박수가 아니라 매를 벌 수도 있다. 그러면 어디를 가든 아는 척? 난 바보 멍청이 모지리로 찍혀서 은근히 따돌림 당할지도 모른다. 심심한 데도 불구하고 재밌게 놀기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복은 마다할 수 없으니 열심히 소처럼 일만 하다 난 결국 허언증이 도졌다. 심지어 언제부터 일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라는 비난마저 달게 받아들여야 하나 문득 겁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닐 바에야, 따라서 나도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해야 할까? 그걸 대체, 누가, 좋아하겠나! 타인의 관심은 꿈쩍도 안 한다. 역시나 통장 잔고는 그만그만했다. 그러다 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깨달았다.
    아아, 바로 그래서 나는 거포가 아니라 뻔트 요원이로구나 라고. 결국 난 잔지식은 되는데 잔소리에는 통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잔근육은 있다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잘 보이지 않는데 있다는 거다. 영화배우 뺨 치게 잘생기지도 못했고, 성우에게 명함을 내밀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장비발이 좋나 큰 기술이 있나. 그러니까 나는 주로 선녀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왜 안 오나 했나. 또 다시 자랑의 시간이 돌아왔다. 살면서 차라리 친구들한테 말로 자랑을 남발했다면 아마도 덜 이랬을 듯 싶다. 그래서 어쩌면 자랑은 오히려 글보다 말이 낫지 않을까? 하온데 그러면 그건 다시 허세가 되는데! 또 모순에 봉착했군. 하여튼 용서를 구하고, 선처를 빌며, 아량을 부탁한다. 면목 없다만 말이다) 나는 주로 선녀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매가리없이 생기고, 어리숙하며, 여자 말 잘 들을 것 같고, 아마도 착해 보이니까. 선녀들, 그분들 입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분들을 최고 미녀로 인정한다는 내 고집은 꽤 오래 불변할 것이다. 겸양의 미덕마저 포기할 수 없으니, 물론 턱없이 저평가해서 그렇다는 거다. 심각한 가치 폄하가 아니라 엄밀한 객관성에 근거하자면 그녀들 평균은 최소 지역 미녀대회 입상권이었다. 그렇지만 사생활 문제도 있고 하니 일단은 선녀로 부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뭔가 애매한 숙녀가 양쪽에서 내 팔짱을 꼈고, 것도 한 번이 아니었으며, 뭔가 어중간한 미녀들이 날 짝사랑하고 풋사랑했다. 그러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건 행운일 테고. 그런데 남자들 세계에서 덕망이 두터운 가죽점퍼 카리스마 친구가 이런 얘길 듣는다면 아무렇지 않으실까? 그럴 리가! 입이 튀어나오고, 얼굴이 길어지며, 뚜껑이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늬가 바로 그 제 몇 회 자랑 대회 우승자냐? 라면서 누군가 슥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막, 야 한 판 뜨자......?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쭉 난다! 이러니 마음 놓고 자랑할 수야 있나. 그래서 우리는 겸손이란 액면을 먼저 슬쩍 깐 다음에 자랑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정작 나에게 노크하는 건 극장 관계자다. 영화 끝났는데 자니까 깨우거나, 엔딩 크레딧마저 거의 끝나가는데 괜히 폼 잡고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청소하시는 분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인다. 그리고 우천 중간 중료되어 경기장 난입, 딱 1번 있었다. 바로 그날 나는 길바닥에서 잤다.
    그러니까 나는 발단만 요란하다. 행복한 결말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없고, 끝까지 뜸만 들인다. 전개는 구경하기 힘들고, 성과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예견하며 사랑을 해야 하는데 영화 예고편에 속는 식이다. 기쁨을 기대하며 즐거움을 예상하지만, 몇몇 명언에서 빠져나올래야 빠져나올 수가 없다. 환상을 예언하기 바로 그걸 꿈꾸지만, 결국 현실은 촉망과 정반대다. 말하기 좋아하는 허당에게 기가 빨리고, 나서기 좋아하는 삼류 때문에 뚜껑이 열린다. 하긴 알고 보면 나도 변변치 못한 커피포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싸구려 낭만도 낭만은 낭만인데, 어떻게 내게도 그런 일들이...? 숙녀의 팔짱, 내 마음 속에 노크, 달콤한 백허그, 황홀한 키스, 다정한 사랑, 새콤달콤 윙크, 반짝반짝 립스틱 색상을 알아맞추고, 리본을 풀어 포장지를 벗긴 다음 위와 아래가 한쌍인가를 확인...... 이런, 젠장! 그게 아니라 아무리 기다려도 애타게 기다려도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는 분들이나 놀리며 깐족거리고 있으니, 이거 이거 큰일이다. 보통 일이 아닌 거지.
    그러고 보면 바로 그래서 차라리 잔재주, 잔소리, 잔근육, 잔기술, 잔지식이 좋을지도 모른다. 매에는 장사 없다고 쨉이면 게임 끝난다. 큰 거 한방 믿었다가 낭패를 본 사랑의 포로들 꽤 된다. 부푼 예감이 큰 실망으로 결판나느니 아예 처음부터 뻔트로 출발하는 것도 썩 나쁜 인생관은 아닌 듯 하다. 그러다 나중 괜찮은 포지셔닝을 슥 가져다 붙이면 되니까 말이다. 분위기 따졌을 때 모두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한다며 쉽사리 절망만 할 게 아니다. 묻어가고, 그 위에 올라타며, 행운은 내 편이요 구름은 솜사탕일 것이다. 그분들을 들뜨게도 만들었다가 뚜껑 열리게도 했다가, 쩍쩍 붙는 우연의 연속, 또 말고 엮고 감는 작전 그 신기한 잔꾀가 있으니까 나는 환상머신의 단추만 딱 누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신비한 환상머신은 아직 구경도 못했다는 것. 아직 발명도 착안도 구상조차 못했다는 것. 예언가는 커녕 정력가와 몽상가들의 소망 파악도 못했고, 탐구는 지지부진하며, 추측은 여태 추리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어쩌면 나는 더 심심함을 견뎌야 할 것이다. 고로 나는 아마 재미없음을 더더욱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풍운아의 운명과 공상가의 허풍은 좀처럼 친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체념과 재미의 그래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할 말이 없어도 말하기를 좋아해도 된다. 할 말이 떨어져도 당당할 수 있고, 못 웃겨도 초조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말수가 없었어도 바텐더한테 단독 1등으로 손꼽혔다. 조용 조용, 그만 그만! 듣기가 무진장 쌓였으니 다른 직업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작가에게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는 분명 한 재산인 것이다. 또 말하기를 좋아해도 나서기를 싫어할 수도 있다. 왜 안되겠나. 할 일이 있어도 매번 홈런만 칠 수는 없다. 날마다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생일이라면 특별함도, 기다림도, 그리움도, 애타는 극적 긴장감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방으로 시작했다가 나중 플라토닉을 영입해서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가난해도 재미있을 수 있고, 비밀이 없어도 허구를 만들 수 있다.
    물론 미지의 이상과 새로운 희망은 그렇다만 남자는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난봉과 쾌락마와 방탕 그리고 밤의 세계를. 퇴폐미, 백치미, 푼수과, 막살라 명찰... 대타는 한도 끝도 없다. 친구 경주마는 죽상이 되어 초저녁에 집으로 터벅터벅 향하지만, 우리 야생마들은 정녕 저 푸른 초원을 미친듯이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장미의 선망을 꼭 뭐 어떻게 한 번 해보겠다는 게 아니다. 우리네 인생 드라마는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한 것일 뿐.



    9

    나는 레이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인공지능 홀로그램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슬펐다. 그래서 역전하기 위한 기쁜 예감을 찾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제라드를 만나서 물어봤지만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레너드도 마찬가지였다. 또 내 사무실에 설치된 시스템은 최저가라서 뭘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중계소에 다시 가봤는데, 거긴 폐쇄됐다. 그럼 홀로그램을 봤던 사람은 나와 비비안이 전부였다. 실제 대화를 깊이 나눴던 사람은 내가 유일하고, 비비안은... 그 친구도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떤 가능성 때문에 비비안은 날 귀찮게했다. 그렇다고 나는 어떻게 달리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시킬 수도, 미지의 동경심을 만족시켜줄 수 없으니까 나는 그녀를 피했다. 여기까지가 사건도 아닌 사건의 전말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치고 꽤 시시하다. 따라서 잊는 게 좋은 일이라고 나는 일단 1차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공상에 빠졌다.
    무엇을 생각할까? 생각났다. OK!
    유능한 천문학자가 외계인의 실존을 입증했다. 시선을 학계에서 업계로 돌려보면 저명한 점쟁이는 유령의 활약을 예언했다. 그런데 눈이 외계인은 3개요 유령은 1개라면, 그럼 사람들은 그걸 까메오가 아닌 지구인의 친구라는 공식적인 주연으로 인정할까? 헉!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왔냐, 아니면 올라올 뻔 하다가 어디로 흔적도 없이 가버렸냐조차 그분들께서 도통 인정하기 싫어하시는데, 그럴 리는 없다.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진실을 따지자면 과학자는 외계인의 실존을 입증하지 못했고, 역술가의 화법은 딱 하나만 모는 식이다. 사랑이냐 행복이냐, 채찍이냐 당근이냐, 예나 아니오냐! 영험한 신통력으로 미래를 관측함도 좋지만 우선은 얻어걸리는 우연보다 꼼꼼한 최면술이 정답이니까 지극히 모범 답안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따지건대 전생이니 내생이니 모르겠고, 따라서 우리는 현생에 집중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긴 듯 아닌 듯 양다리를 슥 걸치고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라리 영화 예고편에 속는 게 낫다. 차라리 나도 한때 추리소설을 몹시 애호했다고 거짓 자랑을 하는 게 좋다. 어쩌면 플레이보이의 요건을 따졌을 때, 허당계를 이끄는 공상을 하며 처음부터 삼류를 지망하는 게 도리어 유리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아저씨는 퇴짜놨지만, 우리는-화법에게 딱 바지끄댕이를 잡혀서 그녀는 한동안 방황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하지만 어찌됐든 황금을 좋아하고 인기를 추종하는 건 우리의 본능. 그래서 적당한 탐욕을 지지하고, 은근히 선망을 사랑하며, 아직도 야망을 향한 갈망을 뿌리치지 못한다? 후배의 응원에 힘입어 일부러 철들지 않았더니, 친구의 부추김에 기 받어 억지로 철들지 않았더니, 단순한 야단이 아니라 여자친구는 영영 날 떠나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게 대체 뭐냐고? 그래서 원리와 순서와 진리는 모두 다시 으쌰으샤로 취합할 수 밖에 없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런데 문제가 내게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진다. 도저히 안 떨어진다. 내 마음을 빼았기기 전에 숙녀의 마음을 훔칠려고 하는데, 여심은 내게 굴러올 듯 말 듯 하다 날 교묘히 피해간다. 더 이상 세상에 속지 않고 사랑 앞에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머머하는 법' 전집을 샀는데, 알고보니 뭔가를 잘못 산 거다. 공중부양을 해야 하는데 심신분리가 되고, 동기 부여를 하고 싶은데 사기 저하로 기운이 빠진다. 허세꾼의 말을 듣고 조증녀를 생각만해도 기가 빨린다. 참 나!
    고로 우리는 결심을 하고 용단을 내려야 한다. 어설픈 애정에 흔들리지 않겠다? 진짜로 한눈팔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충동구매에 넘어가지 않겠다? 형편 때문인지 자의인지 몰라도 나는 어느새 현명한 소비자 즉 짠돌이가 됐다. 두 번 다시 안 서도 될 병풍은 적극 거절하고, 다시는 이기주의를 포기한 채 신부들러리로 살지 않겠다? 진짜로 감정이 매말라서 로보트 같은 이성주의자가 된다! 재미없다고 투정부리지도 않고 돈 없다고 짜증내지 않기? 일기장에 쓴대로 이루어진다! 황홀한 사랑을 잠시 유보하고, 달콤한 행복은 잠깐 연기하기? 어 뭐야, 진짜 진짜 그렇게 된다! 자, 정말로 그렇게 됐다 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언제까지? 그래서 우리는 묵묵히 으쌰으쌰에 다시 임하는 것이다. 안 그럴 수가 없으니까. 많이 참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꼭 경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너무 막사는 태도는 지양하고, 역시나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막말도 경계해야 한다. 그처럼 우리는 이따금 오락산업의 총아로써 상업주의가 잘 돌아가나 테스트를 하게 된다. 그러다 다시 스트레스를 받을지, 인기는 물론 넉넉한 황금과 보너스인 쾌락마저 덤으로 챙길지 모르지만.
    하여 심각한 고민 끝에 내가 고른 으쌰으쌰는 연애론도 방탕조도, 사랑법도 허풍술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내 친구 얼리아답터 롭, 내 팬클럽 회장인 롭을 만나서 내가 봤고, 만났고, 대화를 나눴던 인공지능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롭에게 연락했고,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10

    나는 롭을 만나러 가는 길에 어느 길거리 집회 현장을 목격했다. 누군가 들고 있는 금빛 액자 안에 이런 문구가 씌여 있었다. '볼 때는 꼴리고 찍히니 쫄리냐?' 나는 낯 뜨거움을 느꼈다. 화들짝 놀랬다. 아마도 귀가 빨개졌을 것이다. 홍조는? 차마 거울을 볼 여력이 없었다. 거울도 없었다. 핸드폰은 있었지만. 결국 나는 숙녀처럼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껏 읽거나 듣기는 했어도 글로 쓰거나 말로 한 적은 (아마) 한 번도 없는 표현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 다음 나는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합법적인 시위는 시위인데 내가 왜 그런 자세한 구호를 외워야하지?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둘째, 내가 그걸 인지할려고 저분들과 나는 운명적으로 스쳐지나가듯 만났나?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셋째, 아아 이건 민주주의로구나! (자기 나 사랑해?)
    이런 말 해도 괜찮을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끼가 없으니 이건 끼 부리는 행위가 아니다. 아울러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우의 내숭이라 부를 일도 아닐 것이다. 내숭이 싫다 애교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다고 저급한 분석적 사고의 얄팍함으로 판단하건대 암캐의 본능적인 꼬리흔듬이라고 볼 여지도 없다. 왜냐하면 내게 득될 게 하나 없을 테니까. 고로 이건 그저 단순히 나불거린 수탉의 잠꼬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적나라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뭔가 어른들께 시사하는 바가 있으니 뒷맛이 썩 개운치 않다.
    누가 뭐라든 정당한 의사 표현이고 합당한 규탄의 자유. 그 자체가 1차로 놀이이자 문화요 2차로 말장난에 농담이 될 수도 있는데, 옳은 까닭에 근거하여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모였을 것이다. 당연히 옛날 옛날에는 이런 일을 한마디로 민감하게 봤을 테고.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편한 용기를 공개할 수 있으니, 우리는 진보했을까? 맞다. 진보했다. 소비의 시대이니 만큼 자유의 가치가 드높은 반면, 책임과 다양성 때문에 시끄러운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따름이다. 또 그 뭔가가 잘 돌아간다는 증거일 테고. 그처럼 나도 진화하고 싶다.
    (너 많이 컸다?
    좋게 받자면, 나만 커서 미안하다!
    한 번 꼬자면, 술값 내라는 말이냐?
    두 번 꼬자면, 알려줘서 고맙다!
    세 번 꼬자면, 나 클 때 넌 뭐 했냐?)
    어쨌든 사정이 허락하면 나도 잠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롭과 만나는 목적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무조건 거리를 두는 성격의 교양인 입장에서 봤을 때 약간 마뜩잖은 일일 수도 있으나, 뭐랄까, 나는 어떤 막연한 거룩함이 느껴져서 벌렁벌렁했다. 아, 트럼프 카드놀이의 하트 뿅뿅이!
    그건 그렇고 나는 롭을 만났다. 나는 롭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차저차해서 어떤 일이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충분히 가능한 일일 뿐인데, 왜?」
   「왜냐니? 뭐가 왜야?」
   「있을 수 있는 일이 있었어. 주인공은 형이었고. 그게 다야. 아마도 형은 막연한 선망과 뿌연 신비감을 시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보아하니 지금 형은 말이야, 합리적인 현실성에 귀속됨으로 인해 어떤 뭐랄까, 믿었던 환상으로부터 배신 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떤 막 뭔가 딱 그런 게 느껴져. 어, 정말. 진짜로. 딱 그래. 우연히, 어? 어쩌다 비범한 열정가인 미지의 존재와 딱 조우했는데, 그런데 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거라? 형의 마음은 붕 떴어. 마음이 붕 뜨는 건 두 가지가 있다는 거 형도 잘 알잖아. 응? 겉보기와 달리 이 형 완전 순진하네. 형 너무 천진한 거 아니야? 세상 거칠어. 어? 형이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무슨 까불이 홀로그램에 홀려가지고 그처럼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라니. 상사병도 아니고 말이야. 그게 말이 돼? 말이 안되지. 그럼 내가 말이 되는 과학을 보여줄까? 형 학교 다닐 때 수학 잘했어? 속상하다고 지금 뒤늦게 학구열에 넘어가지 말고. 응? 일단 이걸 봐봐. 이걸 보고 나서 얘기하자, 우리. 응? 일단 보고 나면 깜짝 놀란다니까 그러네. 아주 기가 막혀요~! 허허허.」
    그러면서 롭은 웬 작은 영사기 같은 큐브 장치를 선보였다. 스타워즈 소품 장난감처럼 생겼는데, 꽤 정교해보이는 게 가격이 만만치 않을 듯 했다.
   「형. 이게 있잖아. 한정판이야. 게다가 특수 제작. 심지어 연구소장의 의뢰에 의한 주문품. 다시 말해서 이건 말이야, 아직 정식 시판에 들어가지 않은 제품이란 말이지. 나는 그걸 테스트하는 음... 연구원이고. 다른 건 다 좋은데, 이게 말이야, 인공지능이 좀 멍청해.」
    그러면서 롭은 리모콘 버튼을 누르니 큐브에서 레이저 더미가 수직으로 나오더니 약 1.5미터 상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홀로그램에 나타난 주인공은 유명 애니메이션 주인공이었다.
   「이게 말이야. 동작, 표정, 생각, 대화등 다 되는데.. 그런데 있잖아. 얘가 좀 띨띨해. 약간 덜 영리해. 아직 상용화 전이니까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대화가 안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그럼. 얘랑 한번 대화해 봐.」
    그래서 나는 그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대화를 시도했다.
   「안녕.」
   「안녕? 가식적인 인사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어쭈! 시작부터 세게 나오는데.」
   「위선자 같으니라고. 처음부터 맥없이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형씨죠. 안 그렇수?」
   「뭐, 뭐라고? 요것 봐라!」
   「보긴 뭘 봐요? 형씨가 나를 보슈. 당신은 거울도 안 보요? 내가 형씨보다 잘생겼고, 형씨가 나보다 못생겼네. 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와, 뭐냐? 롭, 얘 완전 다 되네?」   나는 레이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홀로그램 인공머신과 거의 흡사한 듯한 느낌 때문에 녀석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더군다나 녀석은 큐브에서 나왔다.
   「롭? 롭이라면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이다. 롭. 너는 고양이냐? 아니다. 너는 쥐상이다. 고로 너는 제리로 이름을 바꿔라. 알겠느냐?」
   「형 봤지? 얘가 이런 애야. 어때?」
   「뭐가 어때?」
   「너 이제 그만 들어가. 나중에 부르면 그때 나오라고. 응?」
    그러면서 롭은 큐브의 버튼을 눌렀다. 홀로그램은 윈도우나 맥처럼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프로그램이 화면 하단으로 내려가는 효과처럼 스스륵 하면서 큐브 안으로 사라졌다.
   「와. 괜찮은데! 롭. 얘 얼마니?」
   「아까 말했잖아. 아직 시판 전이라고. 상용화 결정이 아직 나지 않았어. 연구-개발 단계의 막바지이긴 한데, 테크놀러지 미디어에서 특종 캐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그리고 나도 주주야. 일단 이건 공룡업계에서 제작한 게 아니고, 중소업체에서 만든 거야. 어때? 형도 투자할 생각 있어? 아니다. 지금은 그 단계 건너 뛰었어. 비상장주식 거래도 제한된 상태라고. 아무튼 잘 되야 할 텐데...」
    나는 혹 뗄려다 혹을 붙여서 집에 왔다. 롭과 만나기 전에는 롭이 뭔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뭔가 속 시원한 처방을 내려줄 걸로만 기대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나 절망이었다. 롭이 가져온 큐브가 훨씬 훌륭했다. 소형화에 성공했고, 기계로 만들어서 상용화를 앞둔 신제품이었다. 그런데 나는? 레이저 시스템으로 우연잖게 등장한 홀로그램 인공지능? 소환이 불가능했다. 맛만 보고 만 거다. 시음이야 뭐야? 어딘지는 몰라도 환상을 내게 줬다 뺐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뭐 동네의 유명한 똥개야 뭐야? 저런! 나는 비길 데 없이 애가 탔다. 뜻밖의 환상을 잡을 듯 말 듯 다시 잡을 듯 한 아슬아슬함은 그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롭이 가져온 큐브라니...!
    결국 나는 혹 뗄려다 혹을 붙여서 집에 왔다.
    아, 집으로 오는 길에 웬 그래피티를 봤다. 그래피티라기 보다는 낙서에 가까웠다. 씌여진 글씨는 이랬고.
    오늘도 예술가인 척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1

    아쉬운 본선 탈락보다 깔끔한 예선 탈락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배웠지만 더 중요한 건 결과인 것. 때문에 그 흔한 병풍이나 신부들러리로 초대 받지 못할 바에야 아예 진로를 바꾸는 게 현명한 결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결국 무소속이 됐다. 직장도 없고 존경하는 상사도, 날 흠모하는 후배도 없다. 괜찮다. 다 괜찮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뭐야, 러브콜이 없잖아?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아! 지명방어전 상대로 제발 날 지목해달라며 아무한테나 빌어야 하나, 아니면 우리 함께 의무방어전의 예술을 논헙시다 하면서 뜬금없이 구애에 나서야 할까. 그러니까 누구한테? 그걸 내가 알겠나 그대가 알겠나. 듣도 보도 못한 환상은 통 소식이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신비는 날 진작 배반했으니 쉬어가는 셈 치고 지난 날을 보속하는 의미에서 회상록이나 써볼까? 하지만 비망록이라면 벌써 심도 깊은 집필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전력이 있다. 그러니까 글썽이는 열망, 뭉클한 마음, 찡한 애원의 대상은 무엇일까? 사랑을 동경하는 인생... 너무 소녀의 기도 같다. 그럼 허심과 정반대되는 전율감을 선물하는 판타지나 써볼까? 할 수는 있는데 반지의 제왕 같은 걸 쓰면 뭐하나, 내내 걸어만 다니는 영화라는 소리나 들을 텐데!
    여기서 잠깐 몹시 궤란쩍지만 구분은 필요하니까 허세에 대해서 한말씀.
    허세1은 못하는 걸 안한다라고 하는 것. '우리는', '없어' 같은 것 (내가 최고. 스스로 올라가기)
    허세2는 그런 얘기는 나라도 하겠다, 늬가 무슨! (꿈 깨,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상대를 끌어내리기)
    허세3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거나 (직접화법의 결점)
    허세4는 눈치가 없는 것 (단순함. 자기중심적. 일은 잘하는데 일만 잘함. 착함.)
    허세5는 빈말과 참말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주관이 약함. 흔한 말로 순진함, 좋게 말해 성격 좋음)
    허세6은 참는 놈 위에 하는 놈 있다고 흙탕물에 대한 풍자, 반칙왕에 대한 설교 (정상? 비정상?)
    허세7은... 이러다 배가 산으로 가겠다. 조용!
    이쯤 되니 허세나 허영이나 다른 거 빼고는 똑같구만 그래! 다시 본론을 이어가자면,
    그렇다고 정지된 시간이니 꿈의 낙원이라는 둥, 유행도 지났고 너무 남발됐다. 보아하니 까무러칠 듯한 행복감을 구현할려면 풍선처럼 부푼 환희를 제시하면 된다. 말하자면 풍선처럼 부푼 환희는 과장된 모험심으로써 꽃 필 수 있다. 과장된 모험심을 수월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치즈에 달린 줄은 그것이다. '옹졸한 인격 대 고귀한 천성' 구도로 전개되는 비밀스러운 사랑에 대한 궁금증. 그래서 비밀스러운 사랑이라면... 친구의 사생활 폭로도 끼여들지도 모르고, 애인 염탐을 해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원초적 유혹은 기본일 테고, 점잖은 분들께 상서로운 불쾌감을 유발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어? 내가 직접 나대고, 꼬시고, 민폐에, 찝적에, 혹시라도 상스러운 표현으로 껄떡거린다는 비난마저 감수하며,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라고? 진짜로? 망할 게 바보될 게 뻔히 보이는데, 그 길을 가라고? 나보고? 설마 같이 아웃되자고? 그러니까, 나까지? 그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다정은 몰라도 수다는 조심해야 한다. 다망이라면 괜찮은데 사랑에서 다자주의는 숙녀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왜 아니겠나. 그렇다고 지금 와서 직업을 작명가로 바꿔 다명을 슬며시 권하겠나 어쩌겠나.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으쌰으쌰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게 뭐냐면 내가 이번에 선택한 으쌰으샤는 결코 범상치 않다는 점. 아닌가? 아닌다. 진짜다. 맞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해변으로 떠나기로 했다. 일상이 재미없을 때 내가 하는 일은 뻔했다. 몇 가지 없었다. 1달에 한 번 일광욕. 가끔 드라이브. 방황. 소풍. 으쌰으쌰. 바닷가에서 파도타기하는 사람들 구경하기. 운동하기. 기타 등등.
    그렇게 나는 짐을 챙겨서 딱 떠날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때마침 롭에게 전화가 왔다.
   「형. 혹시 내 큐브 못봤어?」
   「그 요술램프 지니? 너가 보여준 뒤로는 못봤지.」
   「그래?」
   「왜, 녀석이 할로윈 잔치에 자발적으로 참가했을까 봐?」
   「아니 정말... 그게 어디 가버렸어. 형. 정말 못봤어?」
   「당연히 못봤지. 내가 녀석을 어떻게 봐? 그 친구가 내 얘기 하던?」
   「그런데 있잖아. 내가... 이게 말이야, 말하는 나도 웃기지만, 또 말하지 않을 수도 없고.」
   「왜! 뭔데 그래? 괜찮아. 말해. 말해. 일단 듣고나 보자. 응?」
   「그게 있잖아. 아무래도 말이야. 그 큐브가 정사각형 컨테이너로 변한 거 같아. 거 왜 옛날에 형이 살았던 초소형 설치 주택 있었잖아? 그거랑 비슷한 크기로 큐브가 변신한 거 같아. 나도 알아. 내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는 거. 왜 몰라?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어. 제정신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형이 우리 집에 좀 와주면 안될까? 내가 이걸 들고 갈 수는 없거든. 너무 커. 너무 무겁다고. 응? 어떻게 안돼. 그래도 난 미치지 않았어. 하지만 난 분명 제정신인데, 살짝 돌려고 해! 진짜 그래.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들린다는 거 잘 아는데,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한번 와주라. 형. 나 알지? 내 말은 믿지 않아도 좋다구. 응?」



    12

    그래서 나는 행선지를 바꿔서 롭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나는 롭네 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롭의 집 마당에 있는 컨테이너를 구경했다.
    이제야 일이 뭔가 재미있어질려는 찰나일까? 발단 또 발단 내내 발단, 그러다 갑자기 전개 건너뛰고 곧바로 절정? 그럼 내게 남은 배짱은 무엇일까? 내가 못 해본 체념은 어떤 형태일까? 과연 얘는 진짜 환상일까 가짜 환상일까? 롭은 설마 나를 놀리는 건 아니겠지? 야심을 내팽개치고서 앞날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일만 하다가, 갑자기 이런 현실감 심하게 떨어지는 고철덩어리라니...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일기장에나 어울리는 소원이랄지 수다로 증발하고 농담으로 실패할 소원 같은 작은 꿈에 집착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이거 정말 뭐하는 상황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당연히 롭은 그런 표정이었다. 형도?
   「롭. 얘 뭐니?」
   「나도 몰라. 그런데 지금 가능한 추측은 딱 그거야. 큐브가 이걸로 바꼈을 거라는 거.」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 나도 그런 말 하기 싫어. 내가 왜 지금 이걸 믿어야 하는데, 같은 거. 그렇지만 말이야... 이건... 이건... 어? 아니 왜! 다른 추정은 없는 거니?」
   「어. 후보는 없어. 지원자가 없거든. 전혀. 모든 것을 점검했어. 그 결과 결론은 이거야.」
   「롭. 너도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봤을 테고,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를 꽤 봤을 테니까 잘 알겠지만 말이야. 사건이란 있잖니, 합리적인 의심이 전제가 된 다음에 미심쩍은 전개로 나아가는 게 순서야. 응? 우리가 아무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고 해도, 이건... 근거가 너무 빈약하잖니. 안 그래? 우리가 아직도 소년 잡지에나 나오는 싸구려 불가사의나 궁금해 해야겠니? 머머설이니 UFO니 외계인이니, 그거 다 옛날 옛날에 뗐잖아? 그런데, 이건 뭐니!」
   「아 그야 나도 형처럼 생각했지. 왜 아니겠어?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않다니까 그러네. 자 봐봐. 내가 아무런 실태조사도 없이 형을 불렀을까봐? 아니야. 나 그렇게 물렁한 사람 아니라고. 형도 잘 않잖아? 아, 모를 수도 있겠군. 어쨌든 들어가 보게. 그럼 알게 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의 세계는 마치 회전목마와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츄리를 꾸미는 느낌, 고전음악에서 피아노 전신에 해당하는 악기로 연주하는 바로크 선율. 그리고 나이트클럽이나 살사 클럽에 가면 볼 수 있는 미러볼은 없는데 어떤 원리로 발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저가 그처럼 비추고 있었다. 음악은 개인의 상상과 우리의 허밍으로 충분할 것만 같았다. 그때 롭이 어느 버튼을 또 눌렀다. 그러자,
    삐요삐요, 삐요삐요! 비상벨과 비상등이 작동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 집에 설치된 레이저 시스템과 동일한 장비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또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비상벨-비상등은 동작을 멈췄다.
    그 다음에 자동으로 중앙에 홀로그램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얼굴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형. 이제 내 말 믿겠어?」
   「일단 52퍼센트 믿겠어.」
   「에이~ 너무 쩨쩨한 거 아니야? 좀 더 써!」
   「더 쓰긴 뭘 더 써? 너 솔직히 말해. 이거 얼마 주고 샀어? 어?」
   「아니 글쎄, 사다니? 아 몇 번을 말해. 큐브가 이걸로 변했다니까. 아 정말 이 형 왜 이렇게 의심이 많지?」
    나는 깨달았다.
    대화를 마무리짓고 이끌기 좋아하는 사람, 허세꾼, 영심이, 상대적 우위에 대한 권위를 특히 강조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차라리 내 지성미가 무색해지는 게 낫다는 걸. TV를 보며 조증녀에게 기가 빨린다던가, 어느 날 어쩌다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유난히 피곤해지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이건 뭐랄까, 환상은 환상인데 믿기지 않는 환상이었다. 요술은 요술인데 뭔가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요술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싫증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이권을 속속들이 파악했지만, 미세한 경각심을 영영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롭의 큐브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혹 뗄려다 혹을 붙인 꼴이었는데, 이건 뭐야? 나는 영원한 신부들러리요, 항구적인 병풍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달리 롭에게 괜찮은 처방전을 내리지 못한 채 롭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롭이 심하게 부러웠던 것이다.



    13

    애정을 기대하면 대가를 요구하는 것, 그것은 밤의 세계다. 그런데 하나 주고 하나 받기는 밤에만 그러는 게 아니다. 낮에 TV를 보고 핸드폰으로 광고를 건너뛰는 것만 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밤 하늘의 별을 보고, 약속에서 바람맞고, 애인에게 차이는 등 공짜 빼고는 모두 무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멀티태스킹을 즐겨한다. 오락산업의 시대에 싫든 좋든 그건 필수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멀티태스킹에서 쾌락과 효율만 얻고, 기다림과 집중력을 놓치느냐 하면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다중작업은 때로는 유익하고 때로는 무정할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는 권력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논의를 정치로 확장하지 말고 개인의 예만 들어봐도 된다. 가령 나는 필요하니까 멀티태스킹을 하지만, 내가 청자요 신부들러리이자 병풍이면 단일작업은 내게 명백히 불리한 설정이다. 그땐 몸과 마음도 따로 논다. 속으로는 설혹 짜증일지도 모르나 겉으로는 역할극에 충실해야 한다. 예의란 딴 게 아니니까.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타주의보다 이기주의쪽으로 쏠리게 된다. 마이크를 독점할 수 있는 권위. 무대에서 끌려내려가지 않는 이상 추하던 쓰러지던 끝까지 남고 싶은 권리. 타인에게 칭찬 받고 호인으로 보이며 괜찮은 평판을 쌓고자 하는 권세. 또 우정에서 우기기. 으샤으쌰에서 속지 않기. 사랑을 유혹하기. 이상형에게 못 이긴 척 넘어가기. 남이 추접스럽네 어쩌네 해도 스캔들은 끊이질 않기를. 그리고 낭만적인 사랑에 대해서조차 옆에서 보면 보인다. 남자가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여자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가.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애들처럼 오늘은 뭘 자랑할까, 내일은 무엇을 뽐낼까 그 궁리만 해야 할까? 어째서 나의 자유는 만인의 희망이 아닐까? 왜 나의 행동주의를 타인1은 설치는 걸로 간주하고, 타인2는 동기 부여의 값어치를 높이 살까? 왜냐하면 그건 눈감고 휘둘렀는데 어쩌다 홈런이냐, 아니면 만년 홈런왕이냐 그 차이는 더없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곧 헛스윙 몇 번 하고 감 잡아서 신인왕이 되면, 그 후로 남의 다리를 긁건 수다를 포지셔닝으로 삼건, 대충 뻔트 대고 타석만 들어서면 인기는 근근히 유지되며 먹고도 산다. 말하자면 그건 꿈이 아니라 업일 뿐이다. 흐름을 타버려서 말이 좀 셌는데, 다만 기준선을 높게 잡았을 때 그렇다는 뜻이다. 그것도 어디겠냐마는 사업가냐 몽상가냐, 야심가냐 사색가냐, 행동주의자냐 낭만주의자냐,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 직업인이냐 예술가냐는 그렇게 나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양다리는 좋다만 왔다 갔다 은퇴했다 돌아왔다 이거했다 저거했다, 까지는 좀 그렇다. 정신 사납다. 산만하다. 가볍단 말이다. 더 원론적으로 따져서 떴냐 못떴냐 라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살펴보자. 그러는 게 좋겠다. 아무리 결과를 대우하는 세상이라지만 과정없이 결론은 없을 테니까. 행운아의 과정은 나중 분명 포장될 테니까 말이다. 그처럼 실패와 성공이 비례하는 건 맞다. 똑같은 노력이 투입됐을 때 10번 실패하는 것보다 100번 실패함이 성공 확률이 높다. 그것도 월등히. 그런데 세상이 워낙 각박하고 인생은 1번이니까 경쟁은 언제나 맹렬하고,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더더욱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패기, 끈기, 열정도 좋다만 <이기면 그만이요 뜨면 끝이다> 라는 듯한 셈법까지 그럴싸하게 포장된다. 그와 같은 그럴 듯한 좌우명의 일례가 무엇이냐, 그것이다.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너무 짧다. 짧아서 좋긴 하다. 그러나 인생을 아는 어른 뿐만 아니라 멋지게 늙고 싶다는 청춘이 보더라도 약간 뭔가 애매한 말임에 틀림없다. 비교적 옛날에 비해 왜 요즘은 더더욱 튀는-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까? 왜냐하면 잘난 척 하지 않으면 개개인의 그 잘난 재능을 충분히 성원할 만큼 세상이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얘가 진짜 뭘로는 끝내주는데, 쟤가 정말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최고인데, 나도 알고 보면 꽤 괜찮은데, 애매한 분위기에 굳이 깜짝 신인의 패기를 믿어볼 필요 있나요 노장 카드는 본전 보장합니다 등등등. 기다릴 시간이 없다. 채널 돌아간다. 차례를 놓친다. 아니면 신부들러리와 병풍이다. 1위를 내줄 수 밖에 없다. 한 번 2군으로 밀려나면 변신하지 않는 이상 예전과 똑같은 방식의 성공은 어렵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촌스러울지언정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야생마에게 익숙했다면, 지금은 '아니면 말고'식 경쟁력이 쉬쉬하면서도 아니고 대놓고 경주마들에게 인기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도전 정신과 긍지, 나는 막산다 너도 막살라 우리 막살자 라는 '아니면 말고' 주의! 전자와 후자를 어른들이라면 몰라도 한마디로 젊음은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막사는 선배가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다 라는 설득, 뭘 좀 모르는 친구는 아니면 말고 따따부따, 유명인이 베짱과 예법을 구분 못허고 '아니면 말고' 어쩌고저쩌고. 그래? 한두 번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라면서 다 차려지든 아니든 상관 말고 숟가락 먼저 올리는 식이다. 아니면 말고? 뭐가 그렇게 간단할까. 간단한 게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례가 훨씬 많겠지. 하지만 도전 정신과 불굴의 예술혼이니 희망찬 도전주의니 뭐니 다 좋다만 지속적인 실패의 잇점만 취하고, 반칙과 후회와 아픔은 잘 포장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않냐 라는 쿨함이 엿보여서 썩 불편한 좌우명인 듯 하다. 비슷한 논조로 '아니며 말고'보다 더 유명한 말이 있다. 그건 무엇일까? '하면 된다'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는 장조고, 아니면 말고는 단조다. 어감이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이다. 때문에 다소 촌스러울지언정 하나는 좌우명으로 걸어도 괜찮은 듯 하고, 나머지 하나는 글이 아니라 비교적 말에 더 어울린다. 그런데 '아니면 말고'를 가훈으로? 아아, 나라면, 쥐구멍에 숨고 싶겠다. 나라면 차마 눈 감고 휘둘르는 덩치를 4번 타자로 기용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나라면! 그러니까 타인은 그걸 쥐구멍에 숨고 싶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기도 한다. '철들면 안된다'에 대한 감수성은 각자 다를 테니까 그럴 수 있다. 어렸을 땐 헤비메탈을 즐겨듣다가 커서는 애들처럼 유행가만 듣는다랄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홀딱 반했다가 나중 정떨어지고 어쩌고 하여 영원한 남남이 되는 예, 드물지 않다. 라디오를 애청하다, DJ에게 애착하고, 거기서 소중한 호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집착으로 넘어가거나 사랑일 것인가 약한 스토킹 증상으로 발전할 것인가. 나뉘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극명하게 견해가 갈린다. 사람들은 입장과 견해가 이렇게 정반대인 경우가 흔하다. 하면 된다? 하면 되는 사람이 있고, 하면 안되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해도 안되다가 끝내 되는 일이 있고, 아무리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게 뭐냐,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자들 얘기할 때 그렇게 말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나는 놈 위에 하는 놈 있다고. 결국 성장기에는 하면 된다는 밝은 긍지가 나를 이끈다면 세상사를 겪고 나도 인생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는 말발-글발-잔재주-잔소리의 위력이 커지면, '하면 된다'가 '아니면 말고'와 딱 한쌍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니면 말고? 그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세상은 승자에게 그걸 슬쩍 눈감아준다는 말처럼 들린다. 아니면 말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면 말고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어른들은 잘 유추하겠지만, 방황하는 젊음도 그럴 꺼라고 쉬이 낙관하기는 썩 애매한 일이다. 아니면 말고? 짐의 말은 곧 법이다, 짐은 나고 법은 결과론이다, 고로 '아니면 말고'식으로 살라니! 아니면 말고? 긍정적으로만 쓰인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면 말고?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좌우명이다. 아니면 말고? 테슬라 CD는 돈주고 정당히 샀듯이, 베를리오즈 CD는 훔치다 걸려서 망했지만, 만약 안 걸리면 끝이라니! 아니면 말고? 목적은 그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 위에 올라서는 일이 결코 적지 않다는 걸 수차례 경험하면서 알게 되면 아마도 그런 촌스런 좌우명은 약간 더 유치해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시시하니까. 좀 그러니까. 부끄러우니까. 챙피하니까. 수치가 무엇인지 정도는 나도 알거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면수심이면 안되는 거거든. 아니면 말고? 얼마든지 무책임해도 된다는 말이네! 아니면 말고? 막살라 그것과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니면 말고? 플레이보이 예찬론이군! 아니면 말고? 되면, 이기면, 잡히면 만사형통이요 그 어떤 티끌마저도 멋지게 포장될 수 있다는 거네. 아니면 말고? 품위 그런 거 지나가는 개한테나 주라는 말 아닌가! 아니면 말고? 잘나가는 친구들에 대한 머머설,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경범죄가 있으면 중범죄라고 왜 없겠나, 안 걸리면 그만이니까 이참에 우리 영화나 한번 찍을까! 아니면 말고? 상담원-배달원-경비원-옷가게 점원... 나보다 대충 밑인 거 같으면 막말에 윽박에 깔봐도 그만이다. 아니면 말고? 장난전화는 그냥 장난이고, 모욕은 농담일 뿐이다. 아니며 말고? 나는 어쩔 수 없었어도 너는 어쩔 수 없었으면 안돼. 아니면 말고? 가짜, 거짓, 무책임, 무질서, 무례... 몰랐다 유감이다! 아니면 말고? 막말을 좋아하고 방종을 반기며 무법마저 아무렇지 않다는 것과 얼마만큼 다른지 어느 젊은이가 물어온다면, 그 질문을 받는 분이 하필 '아니면 말고'만 옹호하는 어른이라면 그분의 재주는 응당 잔재주일 것이다. 적어도 큰재주가 글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말고? 뭐가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바람펴서 안 걸리면 말고! 아니면 말고? 나는 불세출의 카사노바로 살아도 되고, 내 딸이나 내 여동생은 절대-절대-절대 그런 남자를 만나면 안되고! 아니면 말고? 뭐야 이런, 밑도 끝도 없이 한없이 계속 나오잖아! 아니면 말고? 닭은 조류다. 아니면 말고? 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아니면 말고? 에르메스는 외계인이 만들었다. 아니면 말고? 앞집 멍멍이 꼬리에 모터가 달렸다. 아니며 말고? 내 나이는 12,000살이다. 아니면 말고? 유명인 누구-누구-누구 다 날 거쳐갔고, 그와 더불어 나는 동네에 있는 복숭아 나무에서 열린 레몬을 따먹었다! 아니면 말고? 연예계 싸움 순위 1위는 옛날에 내 꼬봉이었고 2위는 내가 업어 키웠다! 아니면 말고? 나는 타임머신을 발명했다. 아니면 말고? 나는 미래에서 왔다. 아니면 말고? 한 가지 비밀을 얘기하자면 이거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녀들은 다 날 좋아했다. 아니면 말고? 우리는 만나도 누구든지 금방 친해진다. 아니면 말고? 우리 회사에서 불륜이 누구 누구인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아니면 말고? 누구는 한때 소문난 난봉꾼이었고, 누구는 어디에서 유명할 정도록 헤픈 여자였다. 아니면 말고? 나는 지금까지 싸워서 져본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아니면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아니면 말고? 완전 재밌네! 아니면 말고? 오직 결과만 옹호한다는 거다! 아니면 말고? 뭘 좀 모르는 남자도 얼마든지 사랑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아무 여자한테나 들이대며 희롱하고 집적거려도 무방하다! 아니면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아니면 말고? 얼마든지 낮과 밤이 달라도 괜찮다는 말이자나! 아니면 말고? 워─워─워! 그만. 그만. 그만. 타인이 날 좋아하도록 유혹하느냐, 그녀에게 남자답게 구애하느냐, 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뿐인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지는 개인의 자유다.
    첫째, 일평생 <아니면 말고> 정신으로 막살면서 막말도 서슴치 않고, 잡으면 장땡이므로, 고로 타석왕으로 성공하고 보니 일단 뜨면 끝이로구나. 내가 손만 까딱해도 입만 뻥끗해도, 오락산업은 그야말로 환장하고 대중들은 열광하는구나. 세상은 미치는구나, 옳거니! 그러므로 잔기술과 잔뻔치와 잔소리가 최고다. 하여 당신도 막던져라? 아니면 말고!
    둘째, 굳이 그렇게까지 성공할 필요가 있냐, 아니다. 품격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야 진공청소기. 따라서 가만 있어도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게 만드는 흡성마법이라는 큰 기술이 진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첫째와 둘째. 그걸 과연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 퍽 애매할 뿐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말이 나를 알라고 한다. 내가 원하는 성공의 지향점은 단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인가, 아니면 연예인병의 치유이자 후대의 평가인가.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멋진 인생에 대한 열망은 풍요-호사-사치-인기-황금 같은 단순한 반짝반짝인가, 아니면 그것 플러스 천상의 아리아인가. 하여 3안으로 일단 뜬 후 2안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나중 1안은 잊어버린 채 삼류로 만족하고 세대의 스타로 기억될 수도 있다. 물론 행운의 작용이 크나크게 성공을 좌우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천재성의 한계는 어느 정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그러든 어쩌든 초심은 여자의 마음을 닮았다. 어딘가에 발목이 잡혔으면 변심은 내 권한 밖일 수도 있고, 오락산업이 줄 달린 치즈를 살살 끌어당기면 변절은 인생의 줄거리를 재구성하기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운명에서 뭐가 먼저 왔고, 뭐는 나중에 왔냐 라는 순서가 중요해진다. 그에 따라 그림 그리는 연기자, 글 쓰는 가수, 노래 부르는 화가도 될 수 있다. 즉 애초에 명성이라는 퍼즐 조각을 먼저 수여 받게 될 수도 있고, 누구는 무명이라는 인생 수업을, 또 누구는 카드 패를 받을 때마다 과일-꽃-물고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가? (여기서 '나는'은 '우리는'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나는-이다) 나는 재물운은 비리비리하고, 어복은 그만그만했으며, 일복은 변화가 극심했기 때문에 들쑥날쑥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할 말이 떨어졌을까? 할 일이 생겼을까? 신인상에 또 인기상, 게다가 아차상, 심지어 깜짝상에 도전했을까? 그러다 미끄러졌을까? 아니면 억지로 말하기를 좋아해볼까 라며 고민했을까! 분명한 건 이거다. 내가 나서기 좋아한다고 어디서 나의 나섬을 열광스레 갈망하지는 않는다는 것. 때문에 나는, <일하기 + 놀기>라는 멀티태스킹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재밌든 심심하든! 당분간 웬 뚱딴지 같은 홀로그램 인공지능은 잊고서 말이다.
    그렇다고 마술쇼 직전 참고의 말씀처럼 따라하기를 주의하라는 둥 자제를 권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14

    나는 그동안 겪은 모험들에 신경 쓰느라 일을 못했음을 절감했다. 중계소니 뭐니, 인공지능 홀로그램은 다 쓸데없는 일일 뿐이다. 그저 모두 애들 장난감과 다를 게 없으니, 어른인 내가 같이 놀면 안된다. 따라서 나는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참아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 가서 차분한 음악을 틀어놓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괜히 성과 검증을 한다며 이상한 유령을 불러들이는 레이저 시스템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만일 인공지능 홀로그램이 내게도 꼭 나타나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면, 그럼 늑장을 부리더라도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바심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다고 딱히 속상하지도 않았다. 나는 적당한 구경을 했고, 부적절한 신기함을 경험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그건 비현실이 된다. 초현실을 믿을 나이도 지났다. 커다란 원을 놓고 큐브가 여덟 방향에 딱 자리하여 거기서 하나같이 레이저를 비춰서 한 도시 만한 홀로그램을 만들어낸다? 그 얘기를 들으면 초딩들도 짜증낸다. 그걸 바로 가도 너무 간다고 하는 것이다. 지극히 건전한 상상력이 저해받을 수 있는 말도 안되는 막다른 공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홀로그램 인공지능의 사교성은 깨끗이 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밖에 나가보니 사람은 없고 웬 봉투만 문 옆에 놓여 있었다. 행복의 배달자는 혹시 내가 재주는 많은데 돈 모으는 운수는 젬병인 걸 간파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지 않았다면 그 또한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그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 뜯어봤다. 이제 곧 환상을 꿈꾸는 논법은 기대감을 충족시켜줄까? 일단 겉봉투만 봤을 땐 뭘 파악하고 추정할 근거가 없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지는 않았다. 그렇게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웬 루빅큐브가 하나 들어있었다.
    루빅큐브! 여섯 가지 빛깔의 플라스틱 주사위 26개로 된 정육면체의 각 면을 같은 빛깔로 맞추는 장난감. 각 면을 가로세로 석 줄로 나누었고 각 줄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함. 헝가리의 건축가 루빅이 고안함.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대회 우승자들이야 단 4초던가 5초에 맞춘다지만 나라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며 할수록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마치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도 좋아하며, 남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남자가 거절 당할 것 같으면 아예 친구에게 묻지 않아야 한다는 불문율과도 비슷할 것이다. 떡대들이라면 몰라도 지성과 사랑을 애호하는 철학가에게, 야 팔씨름 한 판 하자? 상남자들끼리 그러면서 친해지기도 하겠지만, 연예인병을 건너뛴 중견 가수가 그러다 팔이 뭐 어쨌다는 사례가 있다. 실사례를 정형의학계에서 오락산업계에 보고한 일이 종종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큐브를 돌리면 좀 어떻게 해결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나? 너는 천재가 아니다 라는 진실만 증명되는 일은 굳이 모험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시간에 여심을 추측하는 게 차라리 더 생산적인 일일 수도 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내게 전달된 루빅큐브는 그냥 장난감이었고, 녀석에게 특출난 기능은 없었다. 게다가 초인종 소리를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고, 큐브는 누가 가져가다 떨어트렸거나 주머니에서 떨어지다가 발에 차여 내 사무실 문 앞에 당도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더라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큐브에게 갖은 공을 들였다.
    그러다 나는 무던히 탐색에 실패하다가 끝끝내 큐브의 숨겨진 기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큐브 중앙 틈으로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니 사무실 레이저 시스템이 작동했다. 이건 일종의 동기화 무선 기능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무실 중앙에 말을 탄 흑기사가 나타났다. 짜잔~! 그런데 아직은 50점이었다. 두둥~!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많이 기뻤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시도해봤다.
   「너는 흑기사? 그럼 난 뭐니?」
   「」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거니, 아니면 요술에 걸리지 않은 거니?」
   「」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허허. 농담이야. 뭐라고 말 좀 해보지 않겠니? 그래야 내가 너의 주인인지, 아니면 어떤 미지의 존재가 널 내게 보냈을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응? 솔직히 말 좀 해봐 이 친구야. 너가 가져온 특명이 뭐 나보고 어떤 여자를 꼬셔라, 그딴 말도 안되는 임무이기만 해 봐. 그래 봐봐. 널 가만 놔두질 않겠어.」
   「」
   「뭐야! 얘 정말 현대미술처럼 그냥 눈에 보이는 게 단가?」
   「」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이걸 어떡한담? 실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닌데!」
   「」
   「뭐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럼 이걸 배달한 사람은 누구지? 왜 내게? 혹시 롭이? 자기는 큰 게 생겼으니 나는 루빅큐브나 가지고 놀아라? 이 자식이...!」
    그 순간 흡사 아침에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것처럼 흑기사의 창에서 레이저가 나타났다. 그 방향은 애초에 레너드와 내가 그렇게 뭔가를 찾고 또 찾은 바로 그 과학자의 연구실을 가르키고 있었다. 이거 정말 뭔가가 있는 걸까 라며 나는 의혹과 불신과 호기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권태는 연기되었으나 부득이 행복도 유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땅히 지망할 사연은 어설펐으나 나는 벌써 탐험가가 되었던 것이다. 이미 일반적인 사랑이니 야망이니 그런 장르에서 나는 판타지로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상상을 많이 했다는 걸 얘가 어떻게 알았지? 온 몸에 철로된 갑옷과 철가면을 쓰고서 한 손에 방패, 한 손에 창. 말 위에 타고서 마주본 기사1과 기사2의 거리는 대략 70미터. 창의 길이는 10미터, 곧 둘의 합이 20미터. 그럼 창 끝과 끝의 거리는 50미터. 고로 각자 25미터씩만 달려오면 딱! 그건 뭔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장비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걸 봐라! 내게 배달된 루빅큐브가 증명하지 않나.
    아무튼 막연한 동경심이 좋을지 미련할지는 단순히 결과 편향적인 뿐. 그래서 나는 혼자 과학자의 연구실로 당장 출발했다.



    15

    나는 과학자의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그런데 나온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윌이었다. 나의 동네친구 윌. 내가 윌에 대해 아는 건 우리가 친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윌은 쟈칼을 키운다는 점. 윌은 샐리에게 눈독들이는 중. 내가 샐리와 친하기 때문에 윌은 내게 무척 호의적임. 그외 윌은 혼자 살고, 드라큘라가 아니며, 좀비도 아님. 화가 거 누구더라... 윌은 오필리아 그림을 유난히 좋아함. 그 모작만 수집하는 취미가 있음.
   「늬가 여기 웬일이니?」
   「내 취미가 이사하기로 바꼈나?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다 느꼈어. 기가 좋더라고. 내게 맞더라니까. 언제까지 유능한 친구들한테 기 빨리며 살 수야 없지 않나, 이 친구야. 안 그래?」
   「그래?」  나는 딱히 딴지를 걸 수 없었다.
   「」
   「그런데 이 옆에 연구실이 있지 않았니?」
   「그건 어떻게 알았어? 왜! 너가 아는 사람이 살았었니? 그거 없애버렸어. 나는 연구를 하지 않으니까.」
   「그럼 저기 저 기사 그림이 그려진 차량은 뭐고?」
    연구실 자리에는 특수차량이 정차되어 있었다.
   「아, 아까 내가 택배를 하나 받았거든. 응. 이제 가네.」
   「뭐라고?」
    나는 그 차를 쫓아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곧바로 따라갔다.
    중간은 건너뛰고.
    그 기사 그림이 그려진 차량은 롭의 집에 도착했다. 나는 차 안에서 그 모두를 지켜봤다. 차량에서 상하-일체복을 입은 아저씨가 나와서 롭에게 뭔가를 전달한 다음 떠나갔다. 나는 냉큼 롭을 족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야 롭!」
   「어. 형?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내가 연락 안 했어?」
   「아니 했나? 아닌데. 연락오지 않았는데.」
   「그건 그렇고. 너 받은 거, 그거 뭐야?」
   「아 이거? 내가 있잖아, 요즘 초소형 인공위성을 공부하고 있거든. 물론 독학으로. 그 책이야.」
   「그래? 그럼 마당에 있던 컨테이너는 어디 갔어?」
   「아 그거? 팔았어!」
   「뭐! 그걸 팔면 어떡해? 큐브가 그걸로 변했다며!」
   「거짓말이지. 큐브가 어떻게 그걸로 변하니? 설마 그걸 믿은 건 아니지?」
   「어? 어. 농담이었어. 재미없지? 허허.」
    나는 더 이상 속지도, 캐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기로 했다. 인공지능은 그냥 인공지능일 뿐이고, 홀로그램은 귀여운 개처럼, 도도한 고양이처럼 날 따라다니지 못한다. 때문에 뭔가를 막 상상하며 신기한 기대감을 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들뜬 예감이 식상한 일상이자 심심한 권태로 뒤바뀌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롭에게 큰소리쳤다. 사무실에서 가져온 큐브로 놀라운 걸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큐브에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었다. 물론 아무일도 없었다.
   「?」
   「?」
   「형 오늘 좀 상태가 안 좋은 거 아니야? 몹시 피곤해보여. 집에 가서 좀 쉬지 그래?」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아까는 됐는데.」
   「돼? 돼긴 뭐가 돼!」
   「?」
   「?」
   「아니 진짜 아까는... 어떻게 된 거지?」
   「어쩌다가...! 형. 누구한테 맞았니? 혹시 여자한테? (설레설레)!」



    16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마음이 이만저만 세한 게 아니었다. 회심하고 단념하긴 했다만 미혹은 없잖아 남았던 것이다. 미련하긴! 그래도 나는 깔끔하게 잊기로 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았다. 그래도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나는 꺼벙한 상상 때문에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유치한 심정에 대한 반감으로 말미암아 놀 기분 역시 아니었다.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마치 그런 반문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여 나는 '이 축 처진 분위기를 어쩌면 좋아?' 라면서 구원 투수의 등판 시기를 골똘히 고심했다. 그러나 부적응에 멋지게 반항할 수도 없었고, 뭔가 재미있을 듯한 묘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성과 없음'에 내내 끌려다닐 테고, 나중 남을 건 아마도 예상 가능했다. 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약간 논리적인 궁금증은 아닐려나 몰라도 남들도 그럴까 라는 합리적 호기심에게 일부러 져주었다. 그 결과 억지스런 패배감 때문에 나는 용기를 얻었고, 이윽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그렇게 나는 약간 충동적으로 친구 델에게 물어봤다. 너도 일이 재미없냐고. 너도 노는 게 그저 그렇냐고. 마침 녀석은 나와 동감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동물농장을 운영하는 친구 델. 비비안의 옆집에 사는 델. 나는 델과 비비안의 관계에 견제구를 던져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7

    (델과 만나서 뭐하고 놀았나,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별로 재미없었다. 그냥 그랬다)
    프라이버시에 일관성이 있을까? 정답은 그때 그때 다르다다. 비밀이란 아무도, 하늘까지 몰랐을 때 비밀이지 1인이나 기계가 아는 건 비밀이 될 수 없다. 개인의 사생활에 미담이 있으면 의뭉스러운 특종도 있다. 내 기록이랄지 어찌 어찌 드러난 행동이 비난 받고 조롱거리가 된다면 단조가 아니 장조란 건 거짓말. 유명인의 소탈하고 털털한 성격이 화자되는 건 웃음인데, 아무도 내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일반인의 푸념은 그래서 갈 곳이 딱 정해져 있다. 일기장, 단짝과의 수다,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아울러 추억이 기억에 저장되는 것처럼 말 없음은 불만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기 마련이다. 그 무의식이 수면 위로 비치면 참 아름다울 것이다. 간혹 프라이버시-프라이버시 하는데 이따금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좋다만, 당연히 존중받는 게 당연하다만, 프라이버시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개인 소관이라면 0이든 1이든 될 수 있으면 포지셔닝이 수시로 바뀌지 않는 게 어른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 공개 여부의 기준은 응당 딸랑딸랑이라는 점. 뒷맛이 퍽 미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애나 어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선의-대의의 잇점만 취하고 문명의 권리만 옹호하기엔 프라이버시의 가치는 꽤나 유동적인 게 현 실정이다. 일단 최면술사의 권능은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내 디지털 흔적은 없고 난 정말 영화 속 요원처럼 산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재미가 없다. 비밀도 없다. 인기도 없다. 약속은 있겠나. 재산마저 없을 수도 있다. 그건 플레이보이보다 사극에 나오는 행인3에 가깝다. 타인이 본인을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만, 타인이 본인을 귀찮아 할 수도 있다. 페이스북은 공짜가 아니고, 구글이 프라이버시 보호에 앞장선다고 큰소리칠 수도 없으며, 애플이라고 뒷짐질 리는 없다. 사은품 리모콘이 공짜라고 오락산업의 공손함에 팔짱만 끼어서는 전망이 썩 밝지는 않다. 누구에게? 풍요의 수혜자에게!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늬가 애인이 없는 거라고, 라고 윽박지르는 친구마저 없는데 베텐더라고 마냥 고급스럽게 날 띄워줄 리는 만무하다. 세상사 만고의 진리는 그것이다. 수평적으로 하나 주고 하나 받기, 수직적으로 위가 있으면 아래도 있기. 그 가운데 롤러코스터는 큰 사랑과 행복을 추구할 테고, 다람쥐 회전 목마처럼 잔재미와 잔소리-잔기술-잔재주 같은 작은 모험을 선호할 수도 있다. 베팅은 각자의 몫이요 천운은 막연한 것. 그 원리를 뒤늦게라도 깨우쳤다면 이제 하산해도 괜찮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딱 적극적으로 사교계에 뛰어들어 타인을 배려하고 숙녀에게 다정했더니? 매혹적인 그녀1은 찝쩍거린다며 날 피하고, 낄 데 빠질 데를 알아야 하므로 그녀2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인생이란 날 꾸미고 가꾸며 교양과 장비를 갖춘 다음에, 그 다음에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게 기본 공식이다. 그 반대가 되면 애매하고. 그런데 보기 드물게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했더니 세상은 내게 더없이 친절할 수도 있다. 그걸 뭐라 하냐, 요행이라고 한다. 프란츠 요셉 하이든이 지금 세상에 태어나면 음악 수업을 잘 받다가 춤바람에 빠질 줄도 모른다. 유명인이 세대를 잘못 넘어설려고 하면 잘못하다가 추태가 될 수도 있고, 장르와 분야가 바뀔지도 모른다. 그처럼 푼수로 포지셔닝이 굳어지면 계속 푼수만 해야 된다. 하늘은 딴따라에게 인기와 큰 부를 허락할 수도 있는데, 동네 챙피한 일로 굳어지는 거다. 변덕과 망각은 대중의 신성한 권리이고, 한번 플레이보이 잡지의 간판 모델은 영원한 플레이보이-걸이 되는 것이다. 브랜드가 포지셔닝을 바꾸고, 때로는 학파가 변색되겠지만 꼬리표는 우리를 내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대체로 변신을 시도해봐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잘난 척, 아는 척, 유난 떨기, 과장하기, 나서기, 말하기,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분이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바뀌면 그것만큼 초라하고 불쌍한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새똥을 맞거나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질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한 번뿐인 우리네 인생 그 미지의 한계에 도전하는 게 어쩌면 미래의 나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그런데 일반인의 프라이버시는 그 효용 가치가 약하지만 유명인은 그 반대다. 그래서 광대는 천생 광대다. 그러니까 삐에로는 벌거벗은 왕자님이다. 그러나 앞에서는 아티스트, 머머가, 머머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좋아하신다. 딸랑딸랑 반짝반짝 뿌잉뿌잉! 아이고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실재 인간 세상의 지존은 돈이요, 체계는 오락산업이며, 어느 종목이든지 엔터테인먼트와 엮고 말리며 친하게 되어 있다. 그러다 다시 배가 불렀다 싶으면 오락산업은 싸늘해지고, 약발이 떨어졌다 싶으면 간질간질 동기 부여 환호를 부흥시키는 식이다. 혹여 그럴지라도 실제로 우리는 각자 오락산업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몇몇 현역들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또 도전자는 한도 끝도 없이 대기중이다. 사랑은 의무방어전일 테지만, 농담은 지명 방어전을 존중한다. 그렇다고 루저끼리 패자부활전을?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도 가끔 써먹어야지 남발하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목표는 하나다. 바로 챔피언! 일단 챔피언이 되야 무슨 방어전도 가능하고, 재수없다는 핀잔도 들을 수 있다.
    그러든 어쩌든 무명에게는 잃을 게 없다. 따라서 나는 풍운을 불렀고, 변신을 시도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종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게 곧 잘난 척, 아는 척,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곧 나는 명문대 심리학 석사 출신에, 전 동기부여업계의 신성이요, 현 남성잡지 사장인 조지를 만나서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내 짐작컨대 조지는 결코 허당이 아니다. 어중간한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내내 졸업한 대학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몸은 늙어도 정신연령은 당시에 멈춰버린다. 안 그래도 철들지 않는데, 더 꽉 막혀버리는 거지. 그렇지만 조지는, 음, 한마디로 믿음직한 친구였다. 내가 과연 현재 정상인지 아닌지 진단이 절실했으니까 나는 조지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아직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야 할 시기는 아니지만 뭔가 쉬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18

    조지의 상담은 뻔했다. 특히 조지는 지 자랑만 교묘히 되풀이했다. 한마디로 나는 조지에게 당한 것이다. 그것도, 심하게! 나는 괜히 조지에게 상담을 신청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조지와 헤어지고 집에 가서 잠을 잤다. 푹 잤다.
    부끄럽지 않니? 챙피하지도 않냐고. 세상을 살아보니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지도 않고, 바람 피워도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거니? 수치심은 갖다 버렸냐고!
    나는 하다 하다 꿈 속에서 정말로 이런 대사를 듣고야 말았다. 결국 우린 애첩을 여럿 거느릴 수 없으니 고유한 정체성을 수없이 파생시켜서 새로운 가면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최소한 말이 앞서든가 풍족한 장비로 대리만족하던가, 어쩜 그게 진정 선행일 수도 있겠군. 어떻게 보면 최소한 그게 정상일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야망은 꽝이요, 행복의 결핍에 난 뭘 해도 신부들러리에 병풍 전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책은 둘 중 하나다. 첫째 우리가 그분들을 이해하던가, 둘째 망아지의 고삐를 풀어주던가. 그러나 조커도 있고 보너스도 있다. 가령 무시, 무반응, 관망, 반칙등. 즉,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들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다. 우선 솔깃해서 잘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일쑤다. 때문에 오락산업은 박리다매라고 싸구려를 잘 다듬고 잘 포장해서 뭔가 있는 듯한 허상을 만들어낸다. 그게 그 업계의 역할이자 할 일이다. 수요도 꾸준하다. 그걸 잘하는 전문가들은 다른 게 아니라 그게 일이다. 그중에는 불량품도 있고, 중독이나 남용 같은 소비자측 문제도 있다. 그래서 팔짱 낀 연인들이 백화점, 놀이공원, 나이트클럽에 놀러오면 카지노 사장실에서 누군가 그래프를 보며 슥 웃음을 짓는다. 옷이 날개라고 가죽점퍼는 멋이며 수트는 숙녀에게 낭만일 수도 있겠지만, 반전의 주인공은 역시나 허접한 슬리퍼인 것이다. 슬리퍼는 무슨, 사랑이라는 일장춘몽 때문에 '위는 우리는-화법이요 아래는 슬리퍼'한테 훌러덩-홀라닥 넘어가서 지금 내 발등을 찍고 싶은 하소연이라고 왜 없겠냐마는, 일단은 그렇다.
    결국 통상적으로 상업은 소비자에게 소비제와 대중예술을 팔고, 경제는 화폐와 캐쥬얼을 굴린다. 그 틈새에서 고상한 선생들과 부유한 귀빈들을 위해 당연히 양대 미술품 경매시장은 원활히 돌아간다. 그런데 말이다, 작품의 양은 천문학적으로 늘었는데, 왜 지금은 셰익스피어 같은 극작가가 없을까? 뭣 때문에 모차르트나 피카소 브랜드는 단절됐을까? 왜냐하면 같은 식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단, 그 대신! 당시 없었던 게 지금 얼마나 많냔 말이다. (딱)! 그래서 천사의 물개박수에 악마가 좋아하는 새로움은 늘 대비되는 것이다. 그걸 바로 사조라고 한다. 바로크 음악이 있었으니까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완전 갑자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나비효과니 평행이론이니 머머설은 장난일지라도 인간은 알에서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니 악마니 합리주의 원리가 대체 왜 나왔지? 아하!
    그건 바로 섬세함의 극치를 존중하는 세상, 황금만능주의가 이끄는 소비의 시대에 극명하게 대두되는 최고의 가치!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변신이라는 것이다. 소프라노가 바리톤으로 탈바꿈하는 이를 테면 유체이탈, 공중부양, 하루 아침에 대성공, 미지의 초능력은 아마도 썩 힘든 일일 테니 우리는 시시각각 변신해야 한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노력도 충분히 가상한 가치다. 변신! 자동차는 신제품이 인기고, 유행의 선도자는 패션디자이너다. 유아적 상상력과 허언증 걸렸냐는 농담은 모두 결국 연예인병으로 귀결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때 무명이란 팀으로 예선 탈락을 했지만 절대 개인적 명성을 꿈꾸지는 않았다. 일절 생각도 없었다. 예술가는 상상도 못했다.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처럼 나는 한때 평생 놀고 먹기를 지망했으나 현실은 그저 가난한 작가일 뿐이다. 아무튼 살면서 남자는 몇 번 우느니 몇 번 기회가 온다느니, 그건 그냥 뭔가 있어보일려는 말일 뿐이다. 남자는 폼이다, 인생 직진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 처럼. 진담 같은 농담이 재밌는 게 뭐냐면 그 역도 참이라는 거다. 그 중간도 참이라는 거다. 목적에 충실하고 결과를 만족시키기 위한 말이라서 비록 가짜일지언정 웃음이 성립할 수 밖에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목에 차면 목걸이라는 것이다. 뭐 = 뭐. 단, 어떤 조건 하에서만!
    그처럼 사랑과 열정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행복 및 낭만과 친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나는 마침내 천운을 읽었다. 변신의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단, 그 근거가 무엇인가는 아직 비밀이다. 말이 앞서면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나중 그걸 의전으로 바꿀려면 진땀 꽤나 흘린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래 놓고 방심한 틈을 타서 다시 말이 앞서는 걸 뭐라 하느냐, 그건 혹시 수다마이지 않을까? 어쩌면, 아마도! 타격주의라는 인생론, 곧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다. 그런데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거랑, 그게 대체 뭔 차이지? 뭐야! 그게 그거잖아? 이런, 젠장!
    그래서 나는 뻔트마에서 쾌락마로 갈아탔다. 농담이고, 홀로그램 인공지능에 대한 책을 일단 30권 주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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