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낮에는 범생이요 밤에는 놈팽이인 걸까. 썩 달갑지 않은 비유다. 그럼 뭐 내가 정말 그랬을까. 낮에는, 트집 잡기의 명수가 (가짜)보이스카우트 입단식에서 곤욕을 치르는 허구를 구상하기. 그러다 밤 하늘에 너의 별과 나의 별이 반짝반짝 빛나면, 숙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란한 기교를 놀리지 않을 궁리 끝에 사교계에 행차하기.
오만 가지 기분 좋은 상상은 개꿈에게 양보하고, 나는 용단을 내려야만 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어엿한 후보군들로 치자면 가령 남부럽지 않은 호사, 남부끄럽지 않은 취미, 엔간히 질렸을 법한 괴벽, 색다른 관심사, 새로운 연정등일 테지.
보아하니 난 결국 또다시 떨구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어디에? 그래, 없어-에! 말하자면 안색은 유쾌하지 않고, 기분은 쾌활하지 않으며, 분위기는 상큼하지 않음. 기쁘다, 가 아니라 또 기쁘지 않다 라니.
(딱) 말 시작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딱) 말 중간마다,
어? 응? 어?
그렇다면 다시 심심함이라는 얘기인데... 정작 원하는 건 그거 아니란 말인가. 곧,
(딱) 말 끝마다, 오빠!
아니면 시작도 중간도 끝도, 밑도 끝도 없이 오빠? 항상 오빠 언제나 오빠? 뭐야 그게! 하여간 그 말을 듣고 싶다는 말을 왜 하지 못하나, 참 나!
1번마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다'가 선두권에서 뛰쳐나갑니다. 그런데 2번마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가 기분이 나빴을까요? 2번마가 1번마를 곧바로 따라붙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또 뭡니까! 3번마 '뭘 해도 재미없어'께서 선두 대열에 번개처럼 합류했습니다. 그러니까 문득 뜻밖의 3인방이 결성됐군요. 별로 친해보이진 않지만 일단 두고 봐야겠죠. 어머나,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4번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가 그 모두를 제치고 단독 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 점점 재미있어지는군요. 그나저나 5번마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만 불쌍하게 꼴찌로 쳐졌군요. 사정 참 딱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6번마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가 드디어 봉기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뭐 그러마 말겠죠. 원래 제가 저 말과 기수를 좀 아는데, 가끔 미칠 때를 빼놓고 평소에 비리비리하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벌써 살짝 지친 기색이 역력하군요. 그래서 사람들은 웬만하면 6번마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에 승부를 잘 걸지 않죠. 그럼요.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요. 6번마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가 미친듯이 질주하드니 마침내 단독 1등을 차지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요. 그 누구도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건 정상이 아니죠. 어떡하지, 쟤가 1등하면 짱돈을 잃는데, 그 비상금 모으느라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아 잠시 옆에서 뭐라하는 잡음이 들렸군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 6번마가 미치지 않는 이상 1등은 이상한 현상임에 틀림없죠. 그럼요. 혹시 기수가 정상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말이 약을 먹은 걸까요. 그야 뭐 나중 조사하면 나오겠죠.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그러나! 진정 승부는 이제야 시작이군요. 왜냐하면 이윽고 7번마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소'가 막판 스퍼트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 재밌게 진행되는군요. 짜릿한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참으로 진땀 나는 경기라 아니 할 수 없겠죠? 진행자도 등에 식은땀이 빠싹 나는군요. 제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걸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할 수 없죠 뭐.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송하군요. 7번마가 어떻게, 7번마가 어떻게 저걸 위해 지금까지 허접하게 연기하며 꼴찌를 도맡았던 걸까요? 그야 뭐 경기 끝나고 말에게 여쭤보면 알겠죠. 한편 저건... 몇 번 마죠? 경주표에 등록되지 않은 말인데 느닷없이 경기장에 난입했군요. 더군다나 압도적인 속력으로 단박에 관중의 주목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뭐야! 기수와 말이 분리됐어요. '번호 인식 불가'마와 그 기수가 분리... 뭐야 이런! 저거 인형이잖아? 이런 젠장! 웬 비장의 조커랄지 숨겨진 에이스인 줄 알았더니, 저건 결국 그레이하운드자나? 뭐야 저거!
.....
에잇~! 혼자 놀기도 재미없다. 혹시라도 누가 들었다면 재수 없는 걸로도 모자라, 한소리 했을까? 저런 머저리 같은 놈! 이라고. 어쨌든 이처럼 쓸쓸하고 허탈하며 나른한 적은 일찍이 없던 일이다. 정말로? 뻥이다. 당연하지. 좌우지간 이렇게 이상한 말만 나부리느라 상태가 안 좋아진 적도 없었고, 따라서 이런 기분 처음이다. 진짜로? 뻥이다. 뭐야 그거! 심심함을 만끽하며 기뻐서 쾌재를 부르고, 신나니까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지경이군 그래. 진짜로? 뻥이다. 별의별 투정을 다듣겠어.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별꼴이라니까 증말. 꺼벙해 빠져가지고 말이야. 심심하면 재미없다, 툭하면 심심하다며 징징거릴 줄이나 알지, 원.
서론은 이만하면 됐고!
그러므로 나는 조용한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남자의 명언을 따르기로 했다.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꼭 신용하는 철칙까지는 아니지만 때에 따라 썩은 웃음이 필요할 땐 한번 기용해볼 만한 충고 카드라는 점. 부인할 수 없음. 고로 나는 겁 없이 비장의 카드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터넷에서 꼼꼼히 알아봤다. 바로, 과점퍼 구입을.
어쩌고저쩌고......!
대충 적당한 거 골라서 입금했고 배달만 받으면 된다.
그런데 판매자한테 연락이 왔다. 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지금 직접 전달해주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나는 검색해봤다. 그분의 아이디를. 그런데 이거 뭐야...... 아이디는 특별했고 숙녀였으며 아름다웠다.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당장 만나기로 했다. 이게 웬 떡이야 라는 어감은 꼭꼭 숨긴 채 말이다.
2
어느 날 몽정기에 홀라당 사로잡힌 친구들이 왜 성공한 어른들의 삶이 궁금하겠나. 왜냐하면 그분들의 환락과 향락에 대한 직접 경험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에 따라 아닐 수도 있고. 그렇지만 뭔가 어중간한 어른은 반대로 추억의 영화처럼 학창시절이 그립다. 왜냐하면 그때 드라마 주인공처럼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으니까. 또는 당시가 전성기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젊음은 꿈꾸며 기다리고 나를 알아가지만, 어른들은 이미 너무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것이다. 가령, 여성잡지1에서 여성잡지2로. 그래서 중년은 어제를 회상하고, 오늘을 고심하며, 앞날을 예상한다. 내게도 최선을 다하자 같은 동심이 있었는데. 내게도 대충 살자 라는 사심이 있었나? 막살자 라는 흑심은 대체 언제부터 날 잠식한 걸까 라면서!
바로 그렇게 해서 과점퍼를 팔고 싶어하는 청춘과 그것을 사고자 하는 나, 그 둘은 만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만나기 전에 검색한 정보로 알기에는 어땠는데, 그와 정반대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 자식이...!
그분이 만나자고 한 장소는 웬 조정 경기장 근처 찻집이었다. 만나자마자 뭐 바쁜 일 있냐면서 일단 차부터 마시자길래, 나는 깔끔하게 거래만 하자고 응수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걸 카리스마라고 하는 걸까?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난 그와 함께 카페로 들어갔고, 주문을 한 다음, 함께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날 발견했다. 그러든 어쩌든 나는 초면에 괜한 질문, 이를 테면 육체적 사랑의 욕구는 최근 어떠신지,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 과점퍼는 어딨냐고 물어봤다.
「과점퍼요? 아! 그거 동생 아이디인데.」
「네?」
「아, 저기 오네요.」
그 순간 나는 천상의 멜로디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우람한 황홀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저분과 나는 친해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일 테니까. 그래서 우리가 친해지면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날 더 이상 짝사랑하지 말라며 다그칠 테고, 곧이어 착실히 또 심각하게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바로, 난 그녀를 누구한테 소개시켜줘야 하나 고민해야 한다는 수순이 화급히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오빠는 판도라 피스토리우스요, 동생은 포니 피스토리우스였다. 그래? 판도라 피스토리우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았다. 그런데 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판도라 피스토리우스인가 뭔가는 관심 없고, 나는 그의 여동생인 포니 피스토리우스와 어떻게 친해질지 궁리가 많아졌다. 우리 함께 나이트클럽을 시찰하고 카지노를 순방하기를? 됐고,
「혹시 나이트클럽 생각하신 거 아닌가요?」
뜨아~!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아 그게 있잖아요. 제 친구 중에 꼭 그런 친구가 있거든요. 얼굴 표정이 화사해지면 꼭 그 생각을 하는 친구요. 더군다나 그 녀석은 무척 단순해서 가는 데와 노는 데, 친한 바텐더와 좋아하는 웨이트레스가 딱 정해져 있어요. 취향이 그리 까다롭지도 않아요. 네 그럼요. 그래서 전혀 어렵지 않은 친구죠.」
「아 그렇군요.」
설마 독심술사는 아닐 테고. 우연이라고? 나는 안심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덜컥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 그런데 나도 나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난 귀가 빨개진 듯 했다. 그래서 발생한 묘한 홍조 때문에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곧 가설은 그것. 색마는 약삭빠른 탐욕을 언제쯤 싫증낼 것인가. 그는 아마 오늘도 어떻게 하면 익숙한 다정함과 생소한 찬미로 숙녀의 마음을 뒤흔들 궁리만 하고 있겠지. 보나마나 뻔해! 그런데, 설마 그가 나? 그럴 리가. 에이 그럴 리가. 맙소사!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럼. 바로 그때 분위기 그윽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건 바로,
안토니오 비발디의 오페라 <그리셀다> 2막 2장 중에서 아리아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Agitata da due venti).
미친 척 열정에 몸을 맡길까, 아니면 바보인 척 모른체 할까. 그런데 그건 대체 무슨 열정일 것이며, 모른체 할 친분을 처음 만나 어떻게! 그래서 나는 우리의 용건만 간단히 정리하고, 헤어지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과점퍼는 어떻게... 입금은 마쳤거든요.」
「아, 그거요? 포니. 너 그 과점퍼 어디 뒀니?」
「그거? 레이스 보트에.」
「거기 두면 어떡하니? 내가 말 안했어? 남은 거 하나 팔 거라고.」
「오빠가 언제 말해?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오빠 뭐해? 소개시켜주지 않고. (핸드폰 메시지 확인 후) 아니다. 야 판도라. 지금 바로 경기 시작한다는데?」
「그래? 그럼 같이 가시죠. 바로 전달해드리면 되겠네요.」
「판도라. 그런데 있잖아. 타수가 결석했어.」
「그걸 왜 이제 말해?」
「뭘 이제 말해? 아까 말했잖아.」
「그래?」
그렇게 해서 나는 얼렁뚱땅 조정 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8명의 조수는 워낙 팀웍이 잘맞어서 실은 타수가 필요없으니, 나는 자리에 앉아만 있으라고 했다.
중간은 건너뛰고.
약 1시간 경과 후.
그렇게 해서 아마추어 경기가 끝났다.
그래서 이제는 진짜로 용건을 간단히 끝낸 다음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말했다.
「과점퍼는 어떻게...?」
「포니. 너 과점퍼 어디 뒀어?」
「집에.」
「그걸 집에 두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 꺼니까 집에 뒀지.」
「그거 늬 꺼야? 난 남는 건 줄 알고 이분께 팔았는데.」
「그걸 팔면 어떡하니, 내 껀데. 그럼 방법은 두 가지야. 첫째 처음으로 되돌린다, 둘째 이렇게 셋이 우리 집까지 가서 내 과점퍼를 오빠한테 선물한다.」
나는 그처럼 벌써 포니 피스토리우스와 오빠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셋이서 피스토리우스 남매네 집으로 출발했다.
3
나와 판도라 피스토리우스. 포니 피스토리우스. 이렇게 셋은 각자 차를 타고서 피스토리우스네 집에 도착했다.
규모는 상상에 맡긴다. 듣던대로, 아니 들은 풍월이 없으니 보이는대로! 말하자면 긴말 필요없이 압권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어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설픈 위스키 동호회는 때려치고, 차라리 발랄한 샴페인 동호회에 기웃거리면 어떨까? 라~고! 그런데 오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야~ 이거라고~ 이거라니까~! 라면서 나 혼자만 들떴고 흥분했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어떡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야 하고, 난 또 얘네들 친구들을 파도타기로 알게 된 다음, 그런 한편 나는 레이저 설비 시스템에 대해 아는 체할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상상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부풀지 않게 생겼나. (딱) 새로운 관심사는 썰렁했고, 취미 없음의 기세 또한 무변화에 깍뜻했는데 마침 잘됐다! 라면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왠지 모르게 신났고 어딘가 모르게 막 나는, <하늘이 내려주신 사랑은 순애보의 은신처> 라는 신기루에 당도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오빠. 여기 있어 과점퍼!」
난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과점퍼를 받기만 했을 뿐. 침착한 분위기를 파악해보건대 포니의 의중은 대충 이런 듯 했다.
용건은 해결됨, 목적 달성, 그런데 뭐 더 할 말 있어, 오빠?
진짜로 그렇게 말할 듯 말 듯 한 걸로도 모자라, 그녀는 마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자기 볼 일을 봤다. 게다가 판도라는 어디로 간 줄도 모르게 가버렸다. 그럼 나라고 여기서 좀 더 친한 척 할 수 있겠나, 뭔가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내겠나. 아니면 생소한 화제를 끄집어내서 그녀를 웃겨주겠나. 나도 다 속이 있고 눈치가 있다. 내가 뭐한다고 상대방 기분 뻔히 아는데 그녀의 바지끄댕이를 물고 늘어지겠나. 나는 그 흔한 동네 똥개가 아니란 말이다. 더군다나 나도 그런 말 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차마 그 말 만큼은 떠안기 싫었다. 그게 뭐냐, 그거-였다.
오빠. 안 가고 뭐해?
그런데도 나는 혼자서 일말이라도 사랑의 정의를 떠올렸고,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조차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감미로운 과즙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탐닉. 아름다운 꽃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열정. 어쩌면 행복은 항상 미완하며, 아마도 미지의 사랑은 쉼 없이 신비와 환상을 동경하는 것. 그래서 순정은 추잡한 사랑을 피하고, 풋사랑과 한때 친했다가, 둘 중 하나에 도달할 것이다. 그 둘은 무엇? 바로 나비와 나방.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꿀벌도 파랑새도 제비도 펭귄도 아닌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바로, 날파리! 아닌 게 아니라 이게 더 나쁜 거였다. 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상황이 그렇지 않나. 무슨 드라마 한 편 찍을 것처럼 조정 경기 대타 출전 다음에 과점퍼 밀거래를 빌미삼아 날 이 으리으리한 공간까지 끌어들여놓고서, 뭐, 이제 구경 다했으면 그만 작별하자? 뭐야 그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터벅터벅 혼자서 얼른 저택을 빠져나왔고, 더욱 쓸쓸하게 구닥다리 웨건을 몰고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미성숙한 본심이 지대하면 뭘 하나. 행복의 조건도 무심하시지. 유심히 떠올려보면 조촐한 소망도 있긴 있었을 텐데. 그런데 현실은 살짝 주뼛대며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메롱!」
뭐? 참말로 뻘쭘하구만 그래.
무심한 야망마. 지친 쾌락마. 싫증난 열불마. 그러면 무정한 으쌰으쌰마 대신 이번에는 무지한 뻔트마를 믿어볼까? 썩 신용할 만하진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성공 확률이 제일 높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살다 보니 경황없는 틈에 녀석이 인생의 4번 타자를 꿰찬 것이다. 하루는 신경과민증, 하루는 수전증, 하루는 성욕과도증, 그러다 갑자기 넌 조증 난 허언증. 그런 촌스런 취향과 천박한 비유를 꼭 인생이라 부를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볼 장 다 본 사랑보다는 그 언제나 짝사랑 받을 수 있는 가망성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보면 썩 심사가 뒤틀릴 일은 아니다. 자존심이 알량하건 자존감이 유감이건 삶이란 그렇다. 욕망을 숨기지 말며, 재능을 감추지 말 것이며, 꿈─이상─희망이라는 삼두마차를 거침없이 채찍질 하는 것. 그러다 늑장 부리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대충 살게 된다는 것. 그래 봤자, 주제넘은 푸념이고 상스러운 인생론이다.
다 모르겠고, 질투 따윈 두렵지 않은 인생. 떠나는 거다. 자, 떠나면 된다. 뭐가 어렵나.
바로 그처럼 뭔가를 해야 한다는 헛생각만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어디로 떠날 것이냐는 기쁜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말이다.
4
나는 허당계의 총아로써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 끝에 플레이보이계를 은퇴하지 못했을까? 뻥이다. 무슨 총아니 염문이니, 그거 다 누가 믿겠나. 나라도 코웃음 칠 일.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저런! 하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워낙에 매력적인 로맨티스트는 영웅담을 입 아프게 굳이 자기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닌가? 아니면! 아닌 게 아닌가? 모르겠고.
따지고 보면 내가 타고 싶은 말은 아마도 행운마일 테지만, 내가 탈 수 있는 말은 둘 중 하나였다. 회전목마 아니면 오리배. 뭐라고? 이런 젠장! 그러니까 내게 어복과 여복은 그만하면 됐고, 잔머머와 뻔트와 일복만 떠안으라고? 사사로운 잡담은 여기까지. 사랑의 주문을 암송해도 모자를 판에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처지가 웬 말인가. 운신의 폭이 이처럼 참으로 넓을 줄이야, 예전에 난 미처 몰랐네. 깨물어주고 싶은 그 어떤 대담한 책략이 있다 라면서 시시덕거리기나 할 뿐, 내가 진정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하~ 이제 알았다. 나는 다시 슬럼프에 빠져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기는 허했고 놀기마저 실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맹위를 떨치는 권태와 반응이 무덤덤한 타성,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를 슬럼프를 어서 빨리 탈출하기를 바랬다. 제발, 부디!
그렇지만 그렇다고 뭐 뾰족한 대책이 있나, 없었다. 그래서 바람도 쐴 겸 기분 전환도 할 겸 나는 친구 윌과 통화한 다음 곧바로 만나기로 했다.
1시간 경과 후 우리는 시내 찻집에서 만났다. 나는 유기농 에스프레소를, 윌은 오렌지 쥬스를 시켰다.
「야, 너!」
「나?」
「그래 너. 너, 왜 날 피해?」
「누가? 내가? 내가 널 왜 피해? 어? 피하긴 누가 피했다고 그래?」
「그럼 넌 빼고.」
「왜, 다들 널 피하는 것 같니?」
「응.」
「그럼 방법이 있어.」
「뭔데?」
「첫째, 베풀어. 둘째, 너도 같이 피해. 그럼 돼.」
「그래?」
「응. 어떤 걸로 할래? 첫재 아니면 둘째.」
「셋째는 없니?」
「셋째?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그래? 참 나! 늬가 그래서 여자가 없는 거야. 어? 늬가 그래서 안되는 거라고. 알어?」
「알긴 뭘 알어! 그럼 넌 뭐 얼마나 잘나가니? 바텐더한테 1등 한번 먹었다고 이러기야? 증말 어지간히 유세부려라. 어? 어지간히 우려먹으라고! 지겹지도 않냐? 어? 넌 꿈도 없니?」
「꿈? 어른은 원래 그런 거 없어. 그럼 넌 있냐? 넌 꿈이 뭔데?」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우리끼리 그런 얘기를 언제 해 봤어야지. 안 그래?」
「내 꿈은.」
「어, 니 꿈은.」
「내 꿈은, 없어.」
「뭐 없다고? 또 없다-야? 이런, 젠장!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늬 인생 늬가 사는 거지, 내가 뭐 이래라 어째라 하겠냐.」
「그래도 어째 기분이 좀 그렇다. 어? 친구가 꿈이 없다고 하면 좀 입바른 소리도 하고, 옆에서 뭔가 거들어줄 생각은 안하고.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왜? 우리들 불문율이 그거 아니냐. 오늘만 말하기. 사랑은 모르기. 안 그래?」
「야! 내일도 있어.」
「그걸 누가 몰라? 내일은 해가 떠오르던가 아니면 찌푸둥하던가. 둘 중 하나겠지. 관건은 바쁘냐 한가하냐일 테고. 그래, 안그래? 꿈이란 건 말이야 소년이라면 모르겠지만 자고로 어른이라면 그건 일종의 재산 같은 거야. 응? 재산이 뭐니, 자본이거든. 다들 말로 돈. 자, 동산과 부동산이 있어. 그치만 어디 그것만? 마이너스도 있겠지, 일명 빚. 통장이 적금만 있니, 마이너스 통장도 있거든. 그래서 재산이라는 건 말이야 둘 중 하나야. 불어나느냐 줄어드느냐. 그런데 또 재밌는 게 뭐냐면 베팅파가 있으면 관망파가 있듯이, 치고 빠지는 데 둔하지 않고 감각이 있어야 그나마 근근히 돈이 돈을 불러온다는 점. 따라서 그래프로 보자면 재산이란 건 둘 중 하나야. 첫째 재산이 큰 재산이 되느냐, 둘째 탕진하느냐! (딱) 알겠니? 물론 과장된 얘기지만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이 흐릿하면 평생 돈한테 끌려다닐 수 있으니, 미리미리 조심하라는 뜻인 거지. 돈! 얼마나 좋고 깨끗하고 감미로운 낱말인데. 그런데 왜 돈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놔두고 자본 같은 점잖은 말이 더 많이 사용될까? 왜냐하면 말을 어렵게 해야지 밑에서 잘 모를 테니까. 응? 비슷한 예는 많아. 요컨대, 성! 그래, 육체적 사랑. 그 얼마나 고결하며 사랑스럽고 멋진 일이니. 응? 그런데 왜?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뭔가, 그 뭔가가 이상했다는 뜻이거든. 응? 내가 아까 뭐랬니, 꿈은 재산과 같은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꿈은 어렸을 땐 있고 어른이 되면 없는 게 일반적인 거야. 왜? 사람들이 복권을 괜히 사는 게 아니거든. 알겠니?」
「이런 느낌 처음이야.」
「처음이긴 뭐가 처음이야! 뭐가 이런 느낌 처음이야? 아 나 정말 얘 안되겠네.」
「그런가? 아닌가!」
「넌 눈치없이 뭐하러 그런 걸 묻고 그러니?」
「늬가 먼저 물었자나. 아닌가?」
「어쨌든, 늬가 더 미워. 응?」
「뭐라고? 넌 배드보이야. 알어? 난 영보이고.」
「이 자식이... 내가 영보이고 넌 올드보이야. 아니. 넌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늬가 더 이상해. 알어?」
「몰라. 아 모른다고. 됐냐? 어?」
「우리 이제 이런 얘기 그만하자. 그만할 때도 됐다. 응? 남들이 보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냐. 바보도 저런 바보가 없다고 손가락질 할꺼 아니야.」
「골세러모니일 수도 있잖아.」
「(말 따라하기) 골세러모니일 수도 있잖아. 아휴~ 답답하다 답답해. 어? 너만 보면 답답해.」
「너도 마찬가지야. 넌 뭐 얼마나 멋진 줄 아냐?」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법. 여렵지도 쉽지도 않고, 아예 지겹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라도 기분을 달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지는 않더라도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윌을 괜히 만났다고 생각했다. 재미없고 꿀꿀했는데 기분이 더 이상해져버렸다.
바로 이때! 윌은 새로 만나는 듯한 아가씨한테 연락이 와서 간지럽고, 느끼하며, 오그라드는 사랑의 밀담을 전화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 어정쩡한 시간 동안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선약에 집중하는 시간에 맥락을 끊는 통화를 길게 한다는 걸 실례로 여길 만큼 윌은 자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동심이 흑심의 환심을 사는 일. (경우의 수 4가지는 넘어가고) 그렇게 욕망에 눈을 뜨게 되어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 사랑에 속고, 염문을 믿으며, 호기심과 감수성의 쌍두마차가 가고자 하는 비상의 목적지를 알게 되는 일. 그러다 미지의 행복을 정복할 수도 있고, 불운과 친구가 될 수도 있음에 무뎌지는 것.
그런데, 얘는, 아직도, 통화하네?
그래서 난 또 다시 몽상가의 습관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번득이는 흑심. 부지런한 눈독. 성실한 눈치. 신중한 선망. 조심스런 군침. 일종의 행복감과 모종의 쾌감을 동시에 양쪽에 꽤찬 듯한 공상. 거기에 핀잔 받아 마땅한 환청까지. 이것이 바로 당사자들께 허락 받지 않아도 되는, 바로 몽상가의 습관일 것일까. 아닐까. 때때로 다를까.
그런데, 얘는, 아직도, 통화하네?
하긴 친구랑 대화를 해야 하는데, 고개 푹 숙이고서 핸드폰만 쳐다보는 일. 누구나 익숙한 일이다. 그렇지만 매일 만나는 친구라면 몰라도 가끔 만나는 친구 앞에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 한마디로 뭘 모르는 남자다. 뭘 모르는 걸로도 모자라... 그만.
그래서 난 또 다시 무엇을 상상했을까! 무엇을 상상하긴. 눈이 돌아갔다. 아까도 돌아갔지만 매번 하는 일이 이거니까. 자기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생각하고 사람들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고도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다. 좋아하는 배우냐, 호감 가는 조연이냐, 입길에 오를 만한 얘기냐 눈길을 줘도 아깝지 않은 자태냐! 사람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대개는 비슷하다. 남자들? 남자들은 재색을 겸비한 여자를 좋아하지 그냥 무작정 눈초리를 어느 뒷꽁무늬로 향하는 게 아니다. 단, 실험해 보자는 제안은 미리 사양하겠음. 그건 그거고, 아 이제야 통화가 끝났구나.
「나 있잖아. 사랑에 빠졌어. 그런데 있잖아. 얘가 지금 만나제. 왜? 날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대. 먼저 갈께. 미안. 다음에 만나서 한번 달리자. 응? 오늘은 왠지 술 마실 기분도 아니었잖니. 나 먼저 간다. 연락할께.」
의리 없는 놈. 그렇게 윌은 훌쩍 가버렸다. 저런!
그렇다고 대타를 불러내느냐,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5
A.케케묵은 구식 잔소리.
B.근사한 교양미와 고혹적인 고전미.
왜 A는 B가 될 수 없을까? 왜냐하면 A는 '하면 된다'와 '아니면 말고'의 차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알아도 모른 척 능청맞기 때문이다. 애들처럼 마음이 활짝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 얇은 친구처럼 남 얘기에 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장점도 많지만 단점은 뭐겠나, 꽉 막혔을지도 모른다는 점. 주관이 뚜렷하니까 동조성은 낮고, 다정하긴 하나 표면적으로 다정하고. 헤어질 때 하는 말,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이별하며 참지 못하는 명대사, 넌 너 밖에 몰라! 그렇다고 절대로 안 그럴 같은 남자를 유혹해보시라. 사귀면 결혼해야 할 것만 같아서 겁이 나니까, 저 목석 같은 남자는 통 넘어오지를 않네? 나 원 참!
아름다운 뒷모습이라는 유종의 미, 이별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박수칠 때 떠나는 은퇴식, 무도회는 들썩거리고 사교계는 들뜨며 오락산업은 바쁜데! 그런데 관료의 이취임식은 그렇다쳐도, 우리는 늙은 허당들의 심심한 수다와 한물간 삼류들의 밍밍한 잡담에 물개박수나 선사할 만큼 그리 한가하지 않다. 학생은 업계로 진출하고, 한시절 반짝했으면 유행도 바껴야 한다. 나 잘난 맛에 살며 나 행복하기도 벅차니까, 일단 어른들은 욕심꾸러기다. 애들의 응석도 우리 꺼, 인생의 불만도 우리 꺼, 선녀의 투정도 우리 꺼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신부들러리는 환영 받고 병풍은 있어도 있어도 부족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살면서 자꾸 잊어버린다. 내게 꿈이 있었는지, 사랑관과 행복론을 고민하긴 했는지를. 그리고 자존심-허세와 자존감-허영만을 중용하며 죄책감과 수치심은 벤치 신세로 천대하지 않았는지를. 그러니까 하수는 고급스런 농담이 절실할 때 말도 안되는 허풍을 시도하며 헛스윙을 하고 또 한다. 그러다 숙녀들의 심중과 오손도손 흥겨운 분위기와 좌중의 기분을 무시한 채, 그분들은 무리수를 두고 또 둔다. 그러다 호시절이 지나가면 깨우칠 수도 있고, 끝까지 잔머머로 일관할 수도 있다.
설마, 내가 저렇게 설쳤다고? 진짜로, 내가 저처럼 나댔다고? 내가 정말 재수없도록 말하기 좋아하고, 눈꼴시릴 정도로 나서기 좋아했다고? 진짜로? 그렇다고 지금 와서 어떡하겠나. 그러니까 끝까지 뻔뻔마를 타고, 간사마는 상시 대기시키며, 잠을 자도 튄다마 위에서 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숙녀에게 뭘 좀 아시네 라는 말을 통 들어보지 못한 남자, 이따금 성격 좋다 라는 언급은 남 얘기에 호박들의 호감이 애달프게 그리운 마초는 그나마 낫다. 단지 일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독설도 내 꺼고, 악담 듣기도 내 꺼여야 하며, 시도 때도 없이 아는 척─잘난 척─센 척? 못 말린다! '오늘을 살자'와 '내일은 없다'의 차이? 한 번은 묻지마요, 한 번은 알아도 모른 척이다. 그래서 으쌰으쌰마를 타고 철들지 않는 요술옷을 입은 우리들을, 그녀들은, 애라고 부르는 것이다.
뭐야 그럼! 어른이 젊음한테 애라고 하고, 부인이 남편 보고, 어른마저 알고 보면 애들한테 어리광으로 지기 싫어한다고? 여성잡지2식 잔소리로써 선망과 낭만을 양쪽에 꿰찬 귀부인들은 상식을 얘기하고 또 하는데? 결국 누구나 다 애기고, 누구든지 우리는 이기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탈을 쓴 늑대는 감히 운명을 논해도 되고, 연가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의 탈을 쓴 고양이도 알고 보면 미리미리 속옷의 위와 아래를 결정적으로 사전에 조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운이 부족한 로맨티스트는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사기꾼의 농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고, 플레이보이의 꼬임과 숙녀의 유혹에 대해서도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나는 로맨티스트일까 아닐까? 그걸 누가 궁금해하겠나. 그런 허황된 유난 떨기 보다 좀 더 생산적인 성과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 그러니까 좋게 나는 설혹 나중 듣게 될지도 모를 <재수 없어!>라는 핀잔쯤은 과감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뭘 하고 놀면 재밌게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던 중 톰한테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는 톰을 만나러 나갔다.
6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뭐라고?」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라고 물었네.」
「왜, 누가 널 띄엄띄엄 안다는 거니?」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런데 왜!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이제 드라마 그만 봐. 응? 그럴 거지? 적당함이 좋은데 넌 지나쳤어. 그거 악습이야.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친구한테 차일 때 그런 말이나 듣지. 그거 사랑 아니고 집착이라고. 내가 봤을 때는 그래. 넌 최근 일을 너무 많이 했거나, 아니면 그동안 너무 많이 놀았어. 플레이보이의 웬만한 명대사는 다 꿰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넌 그냥 심심함에 복종해. 알겠니? 사건이나 모험 없이도 재밌을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뭐가 문제야? 가을 타니?」
「뭐? 우리끼리 그런 악담. 너무한다고 생각치 않니?」
「또, 또! 늬가 너무한다고 생각치 않니? 것 봐. 넌 또 배역 따라하기를 하고 있잖아. 이렇게 앵무새나 흉내내고 딱따구리를 본뜨고. 그처럼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있잖아. 안 그래? 응? 그래, 안 그래? 」
「늬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그러긴 뭐가 또 그래. 하여간!」
「그러긴 뭐가 또 그래. 하여간!」
「또. 이번에는 아동극이니 뭐니? 참 나, 가지가지 한다 증말!」
「또. 이번에는 아동극이니 뭐니? 참 나, 가지가지 한다 증말!」
「난 바보다.」
「어?」
「이건 왜 안 따라하는데?」
「너 같으면 따라하겠니,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곧 있으면 노발대발할 거니?」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그러지 마, 그러면.」
「그렇다고 너무 마음 놓치말고. 응?」
「어?」
「농담이야. 그런데. 너 나 믿니?」
「드라마 대사 흉내내지 말라며 이젠 늬가 따라하냐?」
「앞만 보지 말라니까 그러네. 난 처음부터 너가 '난 바보다'를 따라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거든. 어째 갑자기 등이 가렵지 않니?」
「이런! 뭐야 이거. (등에 붙여진 포스트잇을 떼어보더니) 난 바보다?」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요즘 친구들 말로, 나는 빡돌아야 정상이니? 웬걸! 듣는 사람 없지? 아 빡쳐!」
톰이나 나나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녀석을 괜히 만났다고 생각했고,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허접하고 멍청한 날 거들어준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자기가 대인배로써 넓은 마음으로 소중한 시간 내서 놀아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설마 진짜로 그러지는 않기를 바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만 각자 철수하기로 했다.
7
A.찐한 사랑을 갈망하는 것.
B.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
A와 B를 꼭 다르다고만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인생은 밝은 기대와 고운 희망이 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부지리도 있고 뻔트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화법의 대가들은 말한다. 남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남자는 절대 집에 얌전히 있으면 안된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우리는 틈만나면 우리는! 그런 중간 보스는 얼굴도 모르는 어떤 별명이 떨군 특명을 어렵싸리 수행한다. 곧 전면에 나서지 않는 그분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첫째 수트발이요, 둘째 학교 다닐 때 범생이.
곧 실내에서 기본을 연마하지 않은 채 바깥으로만 돌면 잔기술─잔지식─잔머머만 느는 법이다. 그렇다고 집에서 잔소리만 듣고 여성잡지만 애독하며 화장술만 익히라는 말이 아니고.
따라서 환경의 제약과 천부적인 재능의 한계는 분명하니만큼 노력만이 능사는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20번 실패 후 겨우 먹고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보다는, 단 두 번 만에! 즉 한 번은 져주고, 한 번은 기권한 다음에 바로 출세하는 게 낫기는 더 낫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 위치가 되고 나면 나는 지금까지 져본 적인 한 번도 없다는 허풍마저 고급스러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세상은 그런 거니까.
고로 객관적인 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계획에 없던 행운이 날 이끌고, 상상도 못했던 개꿈 같은 우연이 날 든든히 받춰주는 일. 그건 어쩌면 판돈도 아끼고 에너지도 아끼는 1석2조 같은 일일 것이다.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고, 와는 또 다른.
그런데 지금 나의 문제는 이랬다. 판돈은 떨어지고 에너지도 흐리멍텅하다는 점. 때문에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죽점퍼 입은 '우리는'도 아니고, 칠흑처럼 검은 최고급 세무구두를 신은 배후의 그림자도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슬리퍼는 대체로 실력자도 아니고, 해결사도 행운아도 아니다.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뭐야 이거? 이런, 젠장!
그러므로 나는 뭐라도 하긴 해야 했다. 잔머리를 더 쓰면 안된다. 이제는 결연히 행동할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학교 다닐 때처럼 꼭 친구랑 함께 움직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뭘 하든지 어떻게 꼭 2명 이상이서 한단 말인가. 그러면 제약이 너무 많다. 나는 내 과점퍼를 입고서 혼자서 카페로 갔다. 일단 일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8
나는 카페에서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막상 일하기가 즉각 될 리가 있나. 그래서 나는 카페 내부를 둘러봤다.
저쪽에 앉은 친구는 그래 보였다.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자와 남자 밖에 모르는 여자. (무슨 주의자들에게 검열 받은 다음에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니 여자 대신 남자를, 남자 대신 여자로 얼마든지 치환해도 됨) 그러니까 저분들이 각자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헤아려봤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여자들 우정에서 악착스러운 허영심이 50점이듯 한 친구는 자존감이고, 한 친구는 드라마퀸 같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로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자와 남자 밖에 모르는 여자가 친구라고? 그야 사람은 누구나 이기주의자니까 자연스러운 일일 테고 문제는 그것. 즉 그 두 가지 특징이 한사람에게 극심하도록 겹쳤였을 때! 진짜로? 아아 글쎄요! 즉각 떠오르는 드라마 캐릭터가 누구라는 건 여자들이 훤히 꿰고 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솔직히 그렇게 사는 걸 좋아할 수도 있고, 반면 그런 여자라면 여자가 제일 싫어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또는 드라마에서! 하긴 남자라고 뭐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남자들은 여자들 세계의 생리를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남자 대 여자. (사람에 따라) 각자 화장실에서, 뒷골목에서 어떤 정도까지 대화한다는 걸 알면 모두 뒷목잡을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 높이가 내려가듯이, 여자도 똑같다. 남자랑 대화하다가 남자가 0명이 되면, 그분은 여자일까 라는 점.
단, 천동설과 지동설이라는 사고방식의 차이는 존재하니 만큼 그건 있다. 촌닭과 촌년의 사랑은 남존여비가 아닌 것. 일반적으로, 늑대의 배필은 여우이자 고양이의 천생연분은 강아지라는 점. 그런 한편, 보필함을 양치기의 순수한 우정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 외교야 뭐 정치외교학 전공자들께 조언을 구하면 되고. 그외 어떤 항목에 핸디캡을 적용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 다시 나 혼자 있던 카페로 돌아가서,
그런데 바로 그때 저쪽에 롭이 혼자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롭을 불렀고 우리는 만났다.
「롭. 너 여기서 뭐해?」
「형은 여기 웬일이야? 여기 커피맛 구려. 게다가 이곳은 천박하기로 이름난 곳이야. 심지어 여기는 허영덩어리들의 명소라고. 그런데 형이 여긴 왜? 일 안 해?」
「일 해. 그런데 내가 여기 왜 왔냐! 왜냐하면 나는 천박하니까. 나 원래 그런 커피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 어딘가에서 흘낏 읽었는데 덜 익힌 원두로 커피를 뽑는 게 유행이라길래 그래서 왔지. 그러니까 여기가 허영덩어리들의 명소라고? 너 알잖아. 너 나 알지! 나 지기 싫어한다는 거. 아니 반대로 말했나? 농담이고. 기나긴 연패에서 벗어나는 기분, 너 그게 어떤지 정말 알기는 아니?」
「하긴 형은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루저왕이긴 해. 그건 인정. 그렇지만 정말로 형이 그런 커피가 궁금했다고? 어디 산에서 내려온 거야? 그러니까 형이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형이 인기가 없는 거라고. 알아? 수많은 여심이 집중된다는 것은 곧 로맨티스트의 치명적인 결점이긴 해. 그렇지만 형도 잘 알잖아. 그냥 허당과 은근 허당의 차이. 자고로 형은 그냥 허당과 은근 허당의 중간이란 말이지. 그게 좋은 점이지 어떻게 결점이냐고? 그러니까 그분들은 안되는 거야. 응? 그러니까 그분들이 안되는 거라고. 알아?」
「이 자식이... 알아. 알지 왜 몰라?」
「그렇게 나오면... 내 입장이 이상해지는데. 난 말이야. 그렇게 농담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직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형씨. 알면 혹시 가르쳐주겠수?」
「그걸 내가 아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니? 너도 참! 늬가 보기엔 내가 아직도 쾌락에는 과격파 심심함에는 소심파로 보이니? 아니면 뭐 우정에는 기분파 사랑에는 낭만파? 재미없다 재미없어. 누가 뒤에서 두 손으로 갑자기 눈을 가리며, 나 누구게? 우웨~ 뭐야 그게, 아 유치해! 그런데 이거 뭐야, 손이 영 보드랍지 않네? 돌아봤더니 글쎄 음성과 행동이 나뉘었구만 그래. 언제적 영화도 아니고 참 나!」
「형. 지금 혼잣말 하니? 지금 나랑 대화하는 거 잊었어? 날 믿지 못하는 거야? 아니면 날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야? 형. 어디 아퍼? 그런 거야? 정말 그래?」
「아 미안. 잠깐 딴 생각하느라 그랬어. 이를 테면 이런 거. 박식가로써 잔소리만 늘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몽상가로써 뜬구름 잡는 공상에 빠져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정력가로써 성과를 뒤쫓아 유감없이 허당 중의 상허당이라는 별명을 꿰찰 것인가.」
「형. 그런데 그 옷은 또 뭐야?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니까. 뜻밖이라서 그래. 비꼬는 거 아니고.」
「너도 알잖아. 형이 원래 대충 입는다는 거. 그런데 그게 요즘 들어서 더 심해졌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형. 그러지 말고. 우리 거기나 놀러가자.」
「어디?」
「이 근처에서 호박왕 뽑는 대회가 열린다는데? 굴러다니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진짜 호박. 농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갖은 연구 끝에 호박을 키워서 그 대회에 출전한다고 하던데! 메달권이면 호박 1덩이에 거의 1000kg 된다던가. 어때?」
그래서 우리는 함께 근처 호박왕 대회장으로 갔다.
9
우리는 호박왕 대회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흥미로움은 찾을 수 없었고, 구경꾼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랬다. 왜 도시와 시골의 인구 비율이 어쩐지 같은 느낌. 그렇지만 난 이런 한가함도 좋아하고, 그렇지만 이를 테면 그건 있다. B급 아저씨가 A급 나이트클럽에 가서 퇴짜 맞으면 기분이 영 뭐하고, C급 카바레에 가면 가자고 우긴 친구에게 뭐라 한소리 한다는 거. 그래서 롭도 내게 그랬다.
「형. 가자. 에이 뭐야 이거. 괜히 왔다.」
「어? 어.」
「아 맞다. 형 슬럼프라 그랬지?」
「응.」
「그럼 거기 가보는 건 어때?」
그러면서 롭은 아는 여자 동생들이 하도 성화길래 만나기로 했다면서 떠나갔다. 막상 작별인사를 하긴 했는데, 나는 자칫 잘못했으면 그럴 뻔 했다.
「롭. 형도 어떻게 거기 꼽사리꾼으로 끼면 안될까?」
물론 하마터면 그럴 뻔 했지만 나는 잘 참았다. 인간관계가 꼭 매정한 건 아니지만, 뭐랄까, 지금은 낙엽이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이었던 것이다.
혹독한 시련과 미련한 고뇌. 그것은 어쩌면 미래의 행운을 착복하지 않은 채, 내일의 불행을 미리 차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꾀죄죄한 품위, 허접한 인기, 초라한 애정, 볼품없는 일정 없음쯤은 참아줄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심심하고 재미없고 따분하다며 절망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념은 인생 경험이고, 실망도 배우 수업일 뿐이다. 따라서 사랑의 바보가 되고 일하기에 천재가 아니어도 괜찮다. 심지어 가난하니까 눈총 받을 일도 없고, 지성을 살찌우니만큼 오만해질 여력도 부족하다. 다만 마권이 제발 꽝만은 좀 면했으면. 꼴등에서 2번째, 얼마나 좋아? 뭐 어떻게 어쩌다 나이트클럽 사장실에도 초대 받고!
뭐, 뭐라고? 그래 맞다. 나는 솔직히 카지노에도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뭐 꾀죄죄하고 허접하고 재미없어도 괜찮다고? 거짓말이네 순 거짓말이네. 다 뻥이구만 그래. 사랑 받지 못하고, 둔재에 눌변이며, 지지리 궁색하고 가련한 예술가로 보여져도 상관없다? 순전 뻥이네, (개)뻥! 맞다. 그렇다. 나는 속물이자 가식덩어리요 푼수인 것이다. 거기다 못 미더운 허풍꾼에, 전성기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플레이보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극도의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뾰족한 묘수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 복안이 새롭지도, 전혀 찬란하지도, 많이 엉성할지라도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롭이 소개시켜준 빈 직업실로 출발했다.
10
달콤한 과일과 아름다운 꽃. 즐거운 인생과 신나는 모험. 기쁜 행복과 포근한 사랑.
과실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신화적인 선악과. 정령들의 천도복숭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알았다면 애호했을 망고와 파인애플. 천사를 반기는 들장미. 메두사의 상징이 아닌 디오니소스의 포도 열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처럼 희망의 사과나무를 심기.
- 사과나무 밑으로 가서 아이작 뉴턴처럼 법칙을 창안하기.
- 사과나무 밑에서 쉬기-놀기-구직-공부하기.
- 과일을 사기 위해 쥐꼬리만한 봉급을 버는 방법.
-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기. (호박에게 재량권을?)
1번은 농부요, 2번은 전문가이며, 3번은 노코멘트요, 4번은 평범한 봉급쟁이고, 5번은 플레이보이다.
그외 이러이러한 원리로 위스키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엔진이 개발됐으니 투자하시요! 그러듯이 잔꾀 많은 자칼처럼 여러 흑심을 현혹하는 건 사기꾼이다. 그러든 어쩌든 현자의 전형적인 인생론은 결국 잡은 물고기한테, 1.0이냐 1.5냐를 따져서, 밥을 줘야 한다는 것. 일단 그 가운데 나는 어디쯤일까를 알기 위해서는 그 구분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 그 구분은 어떻게 차이나는지 찬찬히 살펴보자.
1-2-3은 일단 제외하고. 4는 돈 버는 기계인데 반해 5는 진공청소기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괜히 타성에 젖고 권태와 다투는 게 아니다. 아이는 싫증을 자주 느끼고, 숙녀의 기분은 변심과 친하듯이. 누구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할 수는 있지만 그 작곡가일 수는 없는 법. 머머를 접고 장비병에 걸리며 애인에게 바람 맞는 이유다. 다비드는 다비든데 어디산 다비드면 뭐하나, 십중팔구 허당인 걸. 5번 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기 라고. 좋다 나도 좋다. 싫어하지 않는다. 왜 나쁘겠나. 반대하지 않는다. 은근한 걸 좋아하는 숙녀를 좋아하는 우리가 뭐하러 그 흔한 진리를 부정하겠나. 우리도 여심을 쫓고 이상을 꿈꾸며 사랑의 춤을 추고 싶다. 진정 그러고 싶다. 허~나! 하오나, 일단 여자가 나한테 오지를 않는데? 그런데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이냐. 어? 남자는 나이가 들면 뭐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고? 올라오기는 올라오는데, 올라오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종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티끌 만한 흔적도 없단 말이다. 응? 5번은 공기청정기요 에어컨이자 안마머신인데 우린 뭐 언제나 커피포트만 전담하란 말이냐 뭐냐. 어? 그래서 되는 놈은 뭘 해도 되고, 안되는 놈은 뭘 해도 안된다 라는 속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호박은 다 날 피해가고, 복권은 사는 족족 꽝이며,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라고 4번은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예술가는 가난하고, 종교인은 재미없고, 회사원은 더 재미없어 하기 일쑤다. 그러니까 삶은 개처럼 종잡을 수 없고,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 줄 모르며, 이 세상은 고양이처럼 이기적인 것이다. 문명조차 안정기에 들어섰는데,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끝났는데 앞으로 어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재차 탄생할 수 있단 말인가. 탐험가들이 찾을 만한 보물섬은 다 찾았고, 과학자들이 발명할 만한 법칙은 거즘 다 발명했다. 틈새 시장을 공략해서 성공하면 행복이지만 실패하면 노이즈마케팅으로 떠들썩한 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1번이라는 풍년, 2번의 명성, 3번의 과정과 4번이라는 행복한 가정의 동심. 그리고 5번 타자의 농심. 1부터 5도 좋지만 우리는 그보다 <사는 방법>이라는 대타를 신뢰한다. 극적인 타율 때문에 그분을 첫손 꼽는다. 그것은 바로 일명, 소비! 화폐 가치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며 오락산업이 우리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이유다. 베토벤 같은 어느 장르 음악인은 초빙하면 그만이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은 사기에는 비싸니까 인쇄된 쟁반과 접시를 단지 사면 그뿐. 내가 직접 우주의 비밀을 밝히고자 한다면 좋긴 좋다만 아무래도 시간 낭비일 가망성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스티븐 호킹의 글을 읽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발표 당시만?) 과학자들도 잘 모르니까. 또 최고급 제품들은 적정 가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당하게 구입하면 된다. 멋진 풍광은 달력 사진도 있고, 에르메스는 웨이터 이름이다. 어른들은 원래 안델센 동화를 기억도 못하고, 걸리버여행기와 쥘 베른을 정독해 본 어른조차 비율로 따지자면 참담할 수도 있다.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대면 최근 연예계에서 뜨는 요리사 이름인지 뭔지 내 알게 뭐야, 까지만 가지 않기를. 그렇다고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서 교양과 상식을 선별해서 습득하자니 만사가 귀찮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사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뭐든지 정하기만 하면 다 살 수 있단 말인가. 비타인 A가 어떻고 C가 어떻고 미네랄이 뭐 어쩐다? 우리는 무엇보다 대망을 꿈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격언이 맞긴 맞는데, 어른으로써 애들에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최선을 다하자─대충 살자─막살자>의 황금비를 그분들께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은 불참시킨 채 그분들끼리 노는 시간이 재밌긴 재밌다는 거다. 아동 잔치에 때로는 아동들끼리 꼭 서열을 정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하이틴 드라마로 넘어가면 골목대장 놀이도 뭔지는 알아야 하니까. 버찌라는 록그룹 음악도 찾아 듣고, 친구들은 어른 흉내내기 바쁠 때 난 미리미리 테슬러와 베를리오즈 CD를 감상하며, 하다 하다 전기기타를 오귀스트 로댕처럼 조각하는 일. 그때 아니면 언제 하겠나. (다만 어떤 꼬마처럼 머머 운동은 일찍 시작하지 않으시길) 눈부신 광채로 동심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 꿈과 희망을 들었다 놨던, 휘영청 밝은 보름달처럼 뽀얗고 복숭아빛처럼 오묘한 아동 더블에스의 눈부신 엉덩이를 어찌 잊겠나. (세상일은 간단한 게 좋을 때가 있고, 꼼꼼&깐깐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 잠시 섬세함의 극치를 내려놓자면 내게 있어 엉덩이는 오직 둘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건 무엇이냐? 첫째, 세계3대 후라이팬에 덴 남자 어린이의 엉덩이. 둘째, 선홍빛? 다홍색 아동복 바지를 입은 여자 어린이의 눈부신 엉덩이. 쓸데없는 웅변은 이만 줄이고)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면 딸기처럼 산뜻한 립스틱과 바나나처럼 샛노란 자동차, 다시 말해 사랑과 행복이라는 쌍두마차에 대해 고민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망고냐 블랙베리냐, 칵테일이냐 커피냐. 둘 다 먹고 싶은데 세상은 우리네 인생에 참 참견이 많은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정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할 일과 할 말 그리고 놀기에 대해서 너무 막연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장르는 뭐고, 튤립을 편애할지 아몬드를 선호할지를. 그리하여 어떻게 했다, 는 다음 장에 나온다. 이상 잠깐 쉬어가는 틈에 사는 얘기 몇 자 적어본 것 뿐이다. 왜냐하면 환상문학 잡지에서도 통 원고 청탁이 없고 그랬기 때문에. 허구와 실화와 각종 장르를 애정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논픽션과 말장난을 각별히 아끼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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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 눈이 호강하고 오빠라는 아양에 귀가 즐거운 향락의 시절. 너도 나도 행복이라는 벌꿀을 쫓는 사냥개. 그렇지만 너나 나나 오직 황금만을 추종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시시해진다. 때문에 우리는 기쁜 세상을 위해서 청순한 양과 도도한 고양이, 뿐만 아니라 깜찍한 여우의 꽁무늬를 쪼르륵 따라가고 또 따라가는 것일까? 앗, 깜짝이야! 그러다 우리는 골대 앞의 심상치 않은 골키퍼를 보며 단념하기 일쑤다. 코요테 같은 숙녀 옆에 어떻게 저런 덩치 각 나오는 괴물이... 그럼 난 뭐 너구리란 말이야 뭐야. 넘어가고. 그처럼 우리는 그런다. 어제는 작별했고 오늘은, 사랑은 믿을 게 못된다면서 역시나 절망한다. 그 다음으로 하는 생각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렇다.
뭐 재미난 일 없나?
라~는 떼쓰기가 붉어지기 전!
나는 즉각 롭이 소개시켜준 작업실로 출발했고, 도착했다.
새로운 작업실의 배경은 그랬다. 사랑의 예감은 파랑새의 다정한 밀고.
그 풍경은 인터넷과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멋진 정경이었다는 거다.
그럼 내 심경은? 그만 깜짝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 단지 손을 쓱싹쓱싹 하면서 먹잇감을 탐색하는 치타의 눈빛과, 바람으로부터 향기를 읽는 하이에나의 분연한 바쁨을 닮았을 뿐.
그렇지만 화자의 경거망동이던 신남이던 그건 관심 없고, 라디오 드라마 애청자와 월간잡지 애독자께서 궁금해하시는 건 보나마나 그거다. 전개!
그래? 알다마다!
나는 옆집 이웃과 인사를 나눴고, 시시콜콜한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또한 그분들의 귀염둥이인 그레이하운드와도 친해졌다. 그래서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친구도 생겼고, 일상의 시간표도 대충 마련된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면 옆집에서 부탁한 그레이하운드 산책시키기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마을을 대충 한 바퀴 돌던 중. 밑도 끝도 없이 포니 피스토리우스를 여기서 만나다니!
「오빠 여기 웬일이야?」
「어? 어.. 그게 말이야. 아-아-아마도 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다 포-포-포기한 채 어... 무작정 일하러 왔지. 치-친구가 빈 작업실...을 소개시켜줘서 잠-잠-잠-잠시 쉬었다 갈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더듬어?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 마냥. 난 오빠 반가운데. 보고 싶었어. 난 솔직한데 오빠는 솔직하면 안되는 무슨 은밀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얼굴 표정은 또 왜 그래? 마치 지옥문이라도 열린 것 마냥. 응?」
꼼꼼한 호기심과 사사로운 욕망. 미칠 것 같은 연정. 평온한 떨림과 이상한 호기심까지. 얘가 나한테 전부 안겨주고 있었다.
「말을 해 오빠. 왜 말을 못해. 누가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그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아니면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면 응큼하게 막 뭐야, 그러니까 뭐랄까, 주렁주렁 열린 탐스런 열매의 달콤한 유혹. 막 그런 거 상상하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그렇지? 그치?」
하고많은 만남 가운데 하필이면 포니라니. 내 마음을 띄우고, 들뜨게 만들어 설레는 순간 한 번 더 기분을 고조시키며, 그 다음에 그럴 거 아니냐고. 다음을 기대하게 하여 미치고 환장하게 만들고, 이 다음에 뭐가 등장할까를 예감하면서 깜짝 놀랄 준비를 딱 마쳤는데! 그런데 폴짝 뛸 만한 일정이 아니라, 눈빛으로 읽을 수 있는 그말.
오빠 안 가고 뭐해?
아니면,
오빠 아직 안 갔어?
참 나! 하여튼 누가 포니 아니랄 까봐! 아닌데. 아직 밝혀진 정보가 없으니 그런 말은 안 어울리지. 그럼 뭐 이제부터 차차 알아가볼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가까운 공원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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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영화 할로윈 1편 봤어? 안 봤겠지. 옛날 꺼니까. 굳이 찾아볼 만큼 매니아는 아닐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거기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존 카펜터거든. 거 어째 오빠가 그 사람을 많이 닮은 거 같아. 방금, 그래? 라고 할려고 했지? 그럼 뭘해. 그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검색할 수는 없고. 그냥 끄덕끄덕할 수 밖에. 그치? 그럼. 그런데 있잖아. 오빠 니콜라스 케이지 알아?」
「응. 알지. 영화배우.」
「나 방금 니콜라스 케이지 만나고 왔어.」
「와. 정말?」
「설마 방금 걔 한물 갔다고 말할려던 거 아니지?」
「아니지 아니라고. 나도 한물 갔다는 소리나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데 있잖아. 동명이인이야. 보면 아마 실망할 걸.」
뭐야 이거?
「오늘 술값은 오빠가 내.」
「응?」
「못들었어? 들었잖아. 그런데 왜? 설마 술값 내기 싫은 거 아니야? 아니면 나랑 술 마시기 싫어서? 에잇~ 그냥 우리 술 마시지 말자. 쓰디쓴 술을 뭐하러 마셔. 안 그래? 그러지 말고 우유에다 빵을 먹자. 그게 좋겠다.」
뭐야 이거? 좋다 말았자나!
「오빠 그런데 조정 배운다면서? 막 윈드 서핑 같은 거도 독학 시작한 거 아니야? 설마 나 때문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럼 안돼?」
「아 그게... 배워볼까 생각은 해봤는데. 그게 그러니까 너한테 직접 배우는 게 낫긴 나을 꺼 같아서. 그래서 미뤄뒀어.」
「그래? 잘했어. 그런데 어떡하니? 나 그거 관뒀어. 머머 접습니다 라면서 팔 장비도 없어. 진작에 공짜로 후배한테 선물했거든. 새 장비 선물하는 게 좋긴 하지만, 뭐 어쩌다 그렇게 됐어. 오빠 그런데 여기 웬일이야? 아 아까 말했지.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주다스 프리스트 공연이나 보러 갈까? 근처에서 한데. 시간도 곧 있으면 시작하겠네. 고별이라던가 은퇴 공연만 벌써 20년째야. 재밌다니까.」
「아, 주다스 프리스트?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이 근처에서 한다고?」
「그치만 우리, 가지 말자. 복잡해. 번잡하다고. 차 막혀. 응? 엄청 기다린다고. 줄 서서 말이야. 동네 꼬마 녀석들 무지하게 많이 올꺼 아니야. 안 그래? 그런데 오빠. 오빠 키스해봤어? 오빠 키스 잘해?」
「그걸 내가 어... 내가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니. 허허허.」
「뭐야? 그럼 잘한다는 말 아니야? 그 눈빛은 또 뭐고! 어허, 꿈도 꾸지마. 알았어? 그렇다고 또 그렇게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울상을 지으면 어떡하니? 아 나 이거 정말 못말린다니까.」
「그래. 늬 말이 맞는 거 같다.」
「오빠. 오빠. 아이 오빠. 응? 오빠!」
나는 살짝 삐질 뻔 했는데, 한바퀴 돌아서 마음이 녹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야?
어쨌든 그 다음으로,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나는 그렇게 그녀한테 끌려서 그녀의 친구 마리온을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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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라 라는 진부한 조언, 그냥 해 라는 용기를 북돋는 브랜드 슬로건. 그것에 이런 게 포함되면 어떨까? 질 나쁜 기행, 정다운 희망과 따뜻한 축복과 정반대되는 덕행. 그렇지만 온실 속의 화초가 있으면 벌판의 잡초도 있는 법. 곧 실패와 불행과 이별과 예선 탈락은 나중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는 행복감을 선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저급한 잔꾀와 형편없는 잔기술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대망은 하늘이 허락했더라도 행운의 마법이 다한다면 찡찡한 먹구름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 인생이란 햇빛 쨍한 날, 흐린 날, 눈비가 쏟아지며 바람 부는 날도 있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었다. 지금 내 인생은 몰라도 일상만 보자면 날씨가 그랬다는 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듯 시야는 찜찜하고, 청명함도 밍밍하며, 기분까지 불길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요령부득한 잔잔함을 개선하기 위해 롭이 알려준 비밀 작업실까지 왔는데. 그런데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아니라 말괄량이 시중들기였다.
「오빠. 그런데 있잖아. 마리온이 지금 분위기가 좀 심각한 거 같은데. 오빠는 빠져야겠는데? 실망한 거 아니지? 우리 다음에 만나자. 응? 상황이 그렇게 됐단 말이야. 이해 좀 해주소 형씨. 응? 오빠. 그럼 나 같다. 오빠 다음에 봐!」
뭐야 이거? 이런 젠장!
뭐냐고. 좋다 말았자나?
어쩐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했다. 그럼 그렇지.
그게 더 나뻤다. 난 이제 알았다. 늬가 더 미워! ~라는 핀잔을 내뱉는 화자의 심정이 어떻다는 걸. 나도 알게 됐다. 내가 더 싫다는 것을. 따라서 나는 요즘 친구들 말로 그렇게 됐다. 즉, 완전 빡쳤던 것이다! (올드보이가 아니라 YB식 대화법으로야 상스런 표현이 아닐 테니, 딱 한 번만 따라하자면) 겁나게 빡돈 거지. (뭐야, 재밌자나! 그래서? 농담 진짜 농담)
나 혼자 설레다니 그건 바보짓이었다. 잠자코 일이나 할 걸. 이게 뭔 초라한 행색이람. 나는 기분 상했다. 그것도 팍! 내가 무슨 막 오빠-오빠-오빠 와~ 환호성에 흥분에 모험에 열광한 것도 아닌데, 파티에 안달 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응? 이게 뭐냐고. 나 원 참, 맙소사! 괜히 들뜨게 만들더니 분위기만 이상하게 조장시켜 놓고서 내빼? 그래서 내 기분은 꽝이었다. 나는 과히 애통했다. 미심쩍은 등장 인물들의 동태 파악, 알 게 뭐야! 전혀 예측 불가능한 사랑 받기는 하이틴드라마에게나 어울리는 일일 뿐이다. 심심함을 타개할 기발한 제안이 어디 있냐고.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을 용기, 웃기지도 않다. 하잘것없는 소망과 저열한 대망, 말도 안된다. 수줍은 숙명 때문에 발생한 앳된 기쁨, 그게 웬말인가. 사랑 받고자 하는 맹렬한 열의, 그리고 행복하고 싶은 확고한 신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이상에 대한 동경심 어린 신뢰라니. 내가 아직도 판타지라면 일단 꺼뻑 넘어가고 마는 신비주의의 염탐꾼인 줄 알아? 난 애초에 판타지에 관심도 없었다고. 난 정말 그런 픽션을 어떻게 읽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못 하니까. 차라리 덜떨어진 공포영화나 한 편 보고 말지. 샘나는 잔기술과 탐나는 큰 재주의 부재에 대해서 일기나 끄적거리는 게 백번 낫겠다.
~라면서 나는 투덜거린 채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레이하운드는 다시 옆집으로 돌아갔고. 그러니까 이게 뭐야? 괜히 좋다 말았자나! 원,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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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불며 난리 법석에 징징거리며 떼를 쓰듯. 나는 어쩜 그렇게 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헷갈렸다. 왜냐하면 다년간의 기억을 돌이켜보건대 난 분명 일중독에 준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환상공포증은 경외감이요 허언증과는 단짝에 준하는 우정인가? 그러든 말든 모르겠고.
나는 무엇보다 싫증과 노-재미, 지루함과 따분함을 벗어던지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다고 연습장에 불행, 짜증, 가난, 인기 저조... 이런 낱말들을 기입한 다음 쭉 찢어서, 구기고 뭉쳐서 집어던지는 지극히 초보적인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신비주의 신드롬에 대한 환상머신의 설계도는 어디로 도망가버렸을까? 무슨 신드...... 뭐 또 환상머신?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서 TV나 보는 게 낫겠다. 그런데 내 이런 동경심으로 포장된, 장기 휴가를 떠나고 싶고 마냥 놀고 싶은 욕구가 만약 내 애인이라면! 그러면 그녀를 어깨에 훌쩍 들쳐매고서 (두툼한?) 엉덩이를 마구 때려줄 텐데. 그러면 그녀는 막 내려줘 내려줘, 오빠 오빠 내려달란 말이야 오빠 미워. 막 그렇게 앙탈을 부리고 또 부릴 텐데. 그런데 그렇게 들쳐멜려다가 실패한 채 엎어지면? 그거 완전 (개)망신 아니야!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내가 어쩌다...!
혹시라도 누가 들으면, 그분께서 순진한 심성의 소유자라면 내가 한때 꽤나 잘나갔는 줄 아시겠네. 그래서 한물간 B급 연예인이 그러는 걸까? 지금 최고로 잘나가는 A급 청춘 스타를 보며, 널 보면 꼭 나 바쁠 때─나 어릴 때─내가 한창 주가 높을 때를 보는 것만 같다고! (이때 A급 젊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할 뿐. 그저 웃기 밖에 더하시겠나) 노인을 존중함과 동시에 구시대적인 교훈은 교양으로 알고, 반면 구식 탱탱 묵은 꼰대식 발상이라면 신물이 나고! 결국 젊은이는 늙은이를 무시하지 않고, 늙은이도 젊은이를 맨발의 청춘이라며 깔보지 않는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팔 짧아지고 목 짧아지고, 얼굴이 커지며 동글동글해진 추억의 스타는 그런 직설법은 사양할 것이다. 그래야 하니까.
그러니까 어떤 얘기를?
A는 B다, B는 A다!
내가 너의 미래다, 너의 미래는 나다!
다만 그건 있다. 사랑하는 부부라도 연중 무휴로 함께 붙어있는 것도 좋겠지만, 만년 함께 한 채 자유가 없다 했을 때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 그래서 이왕이면 일하는 날에는 오전에 집을 나가서 행복도가 높아지는 시간부터 만남을 고대하기. 그게 여의치 않으면 오늘도 참는 부인. 그러니까 옆에서 이방은 속닥속닥 속삭인다. 너 솔직히 집에 들어가지 싫지? 라고! 여성잡지1에서 2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여자의 마음. 남자든 여자든 나이 들면 할 말은 많아지는데 반해 듣기는 더 어려워진다. 뿐만 아니라 노안에다 귀도 어두워진다. 나이듬이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12살짜리 팬 사이의 친분이 나쁠 리가 있나. 젊은 친구들은 술자리에 노교수와의 합석을 반기고, 중견 전문가도 대선배의 친한 척을 좋아한다. 다만, 그 공존의 시간이 짧은 것과 긴 것의 차이는 있다는 것. 곧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선생님은 미리 정해져 있고, 호박이 굴러가는 목적지와 방향은 초지일관 일정하다는 진실. 여성호르몬의 그윽한 목소리에 대한 호감은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떤 짠함? 슬픔? 환호? 노인과 바다는 친구인데 차이는 단지 그렇다는 것뿐.
젊음이 좋다는 게 그거다. 청춘에 근거한 아름다움이 그거다. 딸은 훗날 지금의 엄마처럼 될 테니까. 아들은 아마도 나중 아빠의 판박이가 될 테고.
그렇지만 마음이 말랑말랑한 중년이 있으면 고리타분한 성격의 청년도 있다. 나이 들어 힘이 밑에서 위로 제대로 올라온 노년이 있으면, 그냥 말만, 말수만 많아지는 어르신도 있다. 간혹, 참으로 신기하게도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말수가 느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어서 어째야지' 라고 스스로 매일 12번씩 말하기. 에이~ 여기 이제 오지 말자.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왜냐하면 늙으면 어째야지, 라는 말을 내가 하는 건 괜찮은데 타인으로부터 듣기는 싫으니까. 그 말을 내가 하면 농담, 내가 들으면 무례! 그 말을 듣고 또 듣고 또 듣는 제3자는, 고개를 15도 틀고 20도 꺾고 살며시 눈을 감으면, 수증기 부시시시시식~~~! 곧 어른들도 애다. 애처럼 인형도 내 꺼, 어리광도 내 꺼, 아는 척도 내 꺼, 웅변과 평가와 감상도 내 꺼. 왜냐하면 일평생 신부들러리와 병풍만 도맡았는데, 늙은 것도 원통한데,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까지 또 신부들러리와 병풍으로 손위 노년의 시중 들기를 좋아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전화 예절에서 뭔가 불쾌함을 떠안고 살아가는 일이 많다. 굉장히 흔하다. 통화할 때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끊기! 우리 마누라가 딱 그래요? 연애할 때는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바칠 것처럼 잘해주더니, 이제는 무슨 으쌰으샤도 아닌데 잔말 말고 따라와-식으로 또 앞서가다니! 그러니까 평소에 꽃을 선물하지 않다가 갑자기 꽃을 선물하면, 무슨 일 있냐고 되묻게 될 것이다. 우리 주제에... 이럴 꺼면 차라리 생선을 사오라고 한다. 부인이 자기보다 앞서 걸으면 냉큼 싫어한다는 걸 잘 아니까 매번 부인을 앞세웠는데, 괜히 뜬금없이 에스코트랄시고 의전식으로 한발 앞서가질 않나 안 하던 차 문 열어주기를 하지 않나? 즉각 치고 들어올 것이다. 듣자 하니 뭐라고? 뭐 캥기는 거 있냐고! ......(정적)...... 뭐, 너나 잘해? (젊음에서 늙음으로, 나이듬에 관한 연민)
그래서 여자를 만나면 최선을 다한다는 어느 고지식한 친구는 오늘도 어엿한 지성의 전당을 기어코 노인대학으로 전락시키고야 만다. (여급에게) 넌 몇 학번이니 넌 무슨 과니? 난 말이야...... (듣고 나서 재밌으면 좋은데 거 어째...!) 뭐 내가 3병맨이라고? 이런 젠장, 너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 그러니까 3병맨은 A와 B에서 서슴없이 B를 택한다. A는 제일 친한 친구의 평생 1번 뿐인 결혼식에서 진득하니 신부들러기 하기. B는 매주 1번 본인이 창단한 축구 동호회에서 전원 병풍들에게 1인자로 대우 받으면서 축구 하기. A와 B가 같은 날 겹쳤을 때. A에 얼굴만 비추고 화급히 B로 내빼기. 평생 1번이 중대한가 매주 1번이 막중할까. 내가 서열 1번인데 뭔 남자가 신부들러리야? 젠장, 필요 없어! 간단히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간단히 보면! 왜냐하면 개인이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 개성이자 천성이라고 치면 그만이니까. 어째야 직성이 풀린다는 점, 친구나 되니까 이해하지 누가 이해하겠나. 때문에 제일 친한 친구끼리의 우정을 1.0이라고 한다면 1.1이상은 1.0을 따라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 1.0이 있으니까 1.0의 성의를 넘어서지 않는 건 일종의 묵계. 제일 친한 친구가 내빼는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도 그 정도로 내려가진 않았거든. 나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거든.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라는 식의 단짝 우정에, 한두 번도 아니고 뜬금없이 혜성처럼 등장해 우정의 구도를 역삼각형으로 바꿔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 삐악삐악 참새 짹짹, 1등 해도 의미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음. 그런데 문제는 그것! <저게 사적이 아니라 공적일 때>. 만약 A와 B에서 서슴없이 B를 택한 인물이 업계의 리더가 된다면, 더군다나 그 업계는 구식 탱탱 묵은 관행을 중요시한다면. 그건 비교적 신식보다 구식 드라마다. 어쩌면 엄연한 현실일 수도 있고. 바로 그런 걸 관례라고 한다. 그러면 공평해야 할 생태계에서 속좁은 1인자의 뒤로 나머지가 줄을 서는 건 전혀 어렵지 않게 된다. 공정거래 위원회에서 담합 업체에 과징금 얼마 부과, 같은 뉴스도 엇비슷한 얘기다.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 들어보지 않으신 분 계시면 손을 들어보자.
「이거 왜 이래. 이 바닥 좁아! 알잖아? 혹시 잊었나 해서 가르쳐줬을 뿐이라구. 응? 나나 되니까... 에잇 그만 하자.」
또는
「그분께 등돌리고 이 바닥에서 여전할 수 있을지 무척 의문스럽네요. 과연 그런 선례가 있긴 있었는지 재차 묻고 싶단 말입니다.」
뭐야 그런데 들어보지 않으신 분 계시면 손을 들어야 하는데, 뭐 이렇게 하나같이 쌍수를 들고 계시나? 아하~ (딱) 거꾸로맨 회합이구나! 그래서 그런가? 3병맨은 팀장이 됐을 때, 자기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얘기하니까, 자기는 모든 권위를 내려놨다면서 구식 탱탱 묵은 관례를 모두 걷어치웠다고 했다. 그래서 회식 때 헹가래도 받고 1차-2차 으쌰으쌰 기분 좋은 채 헤어졌는데, 그런데 3차에서 6번 7번 팀원끼리 회심의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을 목격했다나 뭐라나. 그걸 이해하기가 어째 뭔가 어려웠다나 뭐라나. 하긴 추정은 할 수 있다. 자기 비하에 신세 한탄하며 나 이렇게 산다를 내가 하면 덕담이고, 친구가 하면 부정적인 악담이 되고. 뭘 해도 재미없어 뭐 재미난 일 없냐, 라는 평범한 말조차 들으면 짜증내고 내가 하면 농담. 오직 수직이냐 수평이냐 밖에 없다니. 게다가, 동네 바 빌라로보스! 똑같은 3병 먹고 가는 단골인데 왜 자기만 3병맨이라고 불려야 하냐는 거지! 똑같이 3병 먹는 저기 저 기생 오라비 같은 녀석이 받는 눈웃음과 홍조라는 특혜는 뭐고, 똑같이 3병 먹고 가는 내게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걸로도 모자라 어느 날 그래. 친구들을 데려갔더니 뭐 까도남? 까고 싶은 도시의 남자라니니 뭐라느니! 왜 나만 3병맨이냐고? 이런 젠장! 세상사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여심의 기준으로, 꽉 막힌 친구 얘기)
그러니까 친구의 우정이 아름다울 때도 있는데 때로는 추접스러운 것이다. 특급 바텐더 앞에 오랫만에 모인 남자 7명이 나란히 앉아 있네? 겉은 상남자인데 겉만 그렇다. 가면을 벗으면 닭, 새, 개, 자칼, 낙타, 말, 생선까지! (그럼 여-바텐더는 사랑의 카멜레온이야 뭐야? 여-바텐더 없는 바는 또 뭐고!) 그래서 추억이 겹치고 회상도 재밌고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찬찬히 들어보면 절반쯤 각자 딴 얘기를 한다. 멍멍, 짹짹, 삐악삐악, 히잉히잉, 야옹야옹, 개굴개굴, 소쩍소쩍, 으르렁으르렁...... 그런데 얘기가 잘 안 통할 것 같은데 또 어떻게 얼렁뚱땅 어울린다. 그런 한편, (여-바텐더의 직감에 따라 엄선된 납득할 수 없는 1등 선택을 듣고서) 뭐 우리 중에 쟤가 돈이 제일 많아 보일 것 같은 남자라고? 이런 젠장, 내가 쟤한테 술 한번 얻어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나 뭐라나! 친구들끼리 광분하기 딱 좋은 주제다. 분위기 단박에 달아오르니까. (남자의 우정)
뭐라는 거야!
어? 뭐래!
그런데 뭔 얘기중이었지? 아 그거구나. 일중독 ─> 일과 놀이의 균형 ─> 신세 한탄 ─> 젊음에서 늙음으로, 나이듬에 관한 연민 ─> 꽉 막힌 친구 얘기 ─> 남자의 우정까지. 무슨 개구리도 뭣도 아닌데 참 나, 이리저리 많이도 튀었네. 다시 처음의 주제인 일중독으로 돌아가서.
영보이냐 뉴보이냐. 어제는 그랬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심심해졌다. 일하는 데 지치고, 쉴려고 TV를 보다 조증녀한테 기가 빨렸다. 그러므로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결국 나는 앵그리 보이일까, 아니면 영-버드일까 라는 점. 뭐 올드보이? 이런, 젠장!
버드와이저라도 마셔야 하나? 안되겠다. 그냥 일이나 해야겠다.
15
날이면 날마다 지적 허영심과 성적 환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 쫓기.
물론 그 우스꽝스런 추격전이 흡족까지는 몰라도 뻔트라도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만년 벤치 신세를 면치 못헌다면! 그러면 삶은 딱하고, 자존감은 띵하며, 인생의 행복관과 꿈 같은 사랑론은 이상해질 수 밖에.
그러므로 나는 또 다시 으쌰으쌰의 명분이 두둑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혹스런 더티러브가 갈 데 까지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심심한 인생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언제 갑자기 1.0 ~ 1.5 사이의 목표가 뜬금없이 나타날지 안심할 수 없으니까. 뭐 몇 시 방향? 벽 밖에 안 보인다. 뭐 그게 너의 미래다? 이런 젠장!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괜히 간당간당한 품위 유지비에 빈정거리지 말고 화끈하게 행동을 하자고. 속 시원하게, 어? 미련없이 지든가, 아니면 행운마를 타고서 기쁨의 광시곡에 맞춰 춤을 추든가! 그런데 문제는 대상은 무엇이고, 목표 상대는 어디 있냐고. 악당이 없어서 스스로 악당 흉내를 내는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참 나!
그리하여, 나는 탐탁치 않은 혼자 놀기보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그녀들에게 그냥 아는 오빠3에 불과한지, 아니면 애원에 굴복 당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간지러운 친교의 어장 관리 대상인지. 입장을 확실히 하라고 아는 여자 동생들한테 당당하게 따지기. 적어도 그녀들은 어떻게 생각할려나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난 그녀들한테 썩 멀리하고 싶은 오빠는 절대 아니라고 봐도 된다고. 글쎄올씨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자신감? 나 혼자 베팅은 공상과 전혀 다른 놀이가 아니네.
그렇게 나는 소셜 네트워크로 그녀들을 툭툭 건드려봤다. 꼭 일부러 깐족거리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한동안 우리에게 그건 일상이었다. 당연히 숙녀가 받아들이기에 노크랄지 마음을 흔들고, 매력적인 제안과 달콤한 힌트로써 접근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 로즈마리야 그 소식 들었니, 포르토피노가 너 좋아한데! 또는. 비비안 오랫만이야, 그런데 참다 참다 정말 많이 참았는데 내가 더는 못 참겠어, 마라가 늬 험담하고 다니던데! 농담이고.
나는 그렇게 멀리까지 일하러왔는데, 작업실에서 노닥거리다가 쿵쾅쿵쾅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서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밖에는 어제 날 바람 맞힌 포니와 포니의 친구인 마리온이 있었다. 그녀들은 뚱한 안색으로 날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음하하하하하하. 깜찍한 것들. 그럼 그렇지!
16
「오빠 안녕. 얘 인사해. 그 오빠야.」
「오빠 안녕. 난 마리온. 오빠 얘기는 많이 들었어. 반가워 오빠.」
나는 어느새 내 마음의 냉소가 눈 녹듯이 녹는 걸 느꼈다. 내 기분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졌고 분위기 또한 솜사탕 같은 구름처럼 포근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제1차로 찻집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오늘 드디여 제7차 클럽까지 갈 수 있을려나 몰라도 일단은 조용조용히 서막을 열기로 한 것이다.
「오빠. 내가 마술 보여줄께.」
「늬가?」
「응. 내가 만약 실패하더라도 여기 2번 타자 마리온이 있잖아.」
「그래?」
「자, 시작한다. 겁 먹지 말고. 응? 오빠. 그렇지만 마음 놓진 마. 좀 떨란 말이야. 기쁜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은 반반일 테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어떻게 절차에 따라 그녀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내 가슴 속으로 집어 넣을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겠나? 당연히 실패지.
그런데 왜 난 기분이 뭐랄까 어째 뭔가 이상하지? 어서 난 말해야 하는데! 그처럼 노골적으로 숙녀의 손이 상남자의 가슴을 더듬으면 돼, 안 돼? 라고!
「어? 왜 안되지. 마리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거기서는 됐자나.」
「그러니까. 내가 한번 해볼께.」
그러면서 이번에는 마리온이 그 포근한 손으로 내 가슴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얘 얘 얘, 그렇게 대놓고 사내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면 어떡하니? 난 어쩌란 말이고! 뭐꼬? (설마... 신호가? 뭐시여! 농담이고)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교태와 가식을 불러일으키며 달콤한 쾌락과 애틋한 사랑까지 연상시키는 남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로 나는 곧바로 내 사무실의 레이저 시스템을 관리하는 앱을 켜서 핸드폰으로 특수 불빛을 포니의 가슴에 비췄다. 그러고서,
「자,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왼손은 왼편에 앉은 포니의 가슴을 통과하여 소파 뒷편을 만지작거렸다.
(추억의 만화도 아니고 말이야, 지가 무슨 가제트야 뭐야?)
그녀들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내친 김에 후레쉬를 오른편에 앉은 마리온에게 향하게 했다. 그러고서 내 오른손으로 마리온의 가슴을 통과하여 또 다시 소판 뒷편을 만지작거렸다.
뭐? 차라리 통과하지 않았으면 그건 어떠냐고?
그건... 이 양반이...... 오, 땡큐?
실력이 아주 녹슬지는 않았군. 허허허허허. 재밌는 인생을 위한 개구쟁이의 엉뚱한 실험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양손을 양측에 넣어놨는데? 그래서 옴짤달싹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들한테 부탁해서 핸드폰 앱을 꺼달라고 부탁했고, 내 손은 그녀들의 가슴에서 빠져나와 원위치될 수 있었다.
「오빠. 와~ 오빠. 막 사람이 달라보이는 거 있지?」
「뭐야? 그럼 전에는 날 삐리하고 바보에 얼간이로 알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와 아무튼, (엄지척)!」
「그치? 그치? 완전! 와, 소름! 어? 와, 소름! 오오오 우와, 소름!」
나는 이때 막 잘난 척하지 않고 눈빛은 저 멀리 향했다. 그게 더 재수없다고?
따라서 나는 어쩌면 바보로써 존경 받고 싶고, 푼수로써 물개박수를 마다하지 않고자 하는 욕심을 그녀들한테 들켜버렸다.
그래서 그녀들은 날 막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술 어떻게 하는 거냐고.
「이 세상에서 말이야. 이 요술은 딱 3명만 할 수 있어. 오직 그 3명만 말이야. 그 셋은 어쩌면 한날한시에 함께 만나면 안되는 운명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건 마치 평범한 남자와 순진한 여자가 운명적인 사랑을 하기 전에 뭐랄까, 3단계 사랑을 거치는 과정과 정반대되는 미스테리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첫째 풋사랑, 둘째 더티러브, 셋째 환상적인 사랑. 사랑학이야 뭐 이 다음에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아까 오빠가 뭐랬지? 아, 그 세 명이 누구냐! 바로 누구냐 하면 이렇지. 첫째 내 친구 제라드, 둘째 은둔형 실력자 자콥 커퍼필드, 셋째는 바로 나! 허허허허허. 푸하하하하하하.」
「뭐? 와! 우리 그 아저씨 아는데. 아까 뭐랬지? 제라... 그분은 모르겠고, 자콥 아저씨는 우리랑 친해.」
「그럼. 완전 허물없는 사이지. 그런데 오빠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
「뭐?」
이 자식이......!
나는 예술가병의 선례인 허언증이 도졌을까? 아니면 자콥 커퍼필드의 이름을 듣고 쫄았을까!
행복을 입증할 근거가 재밌는 모험이냐, 아니면 심심한 사랑일 것인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새 자콥 커퍼필드와 나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마수를 뻗친 거야? 원, 세상에나!
뭐 어쨌든, 부러움을 다스리고 휘날리는 귀의 경거망동을 차단하기에 급급한 삶. 우리는 자콥 커퍼필드의 새로운 은둔처인 별장에 놀러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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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사랑하기에 시치미 떼느냐, 다양한 쾌락을 추구하며 어떻게 하면 신나게 막살 수 있을까 골몰하기. 낭만적인 사색가는 전자니 후자니 모르겠고, 차라리 행복하게 '대충 살자'라는 패에 일찍부터 판돈을 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든 안 주든, 탐스런 열매를 따먹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발명. 창작. 선점. 선취점. 선동. 주동. 동참. 구경. 관망. 방관. 예선 탈락. 입장권 품절. 모른 체 잘난 척까지. 무턱대고 사랑의 나비만 쫓다가는 첫 끗발이 개 끗발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분들은 사랑이든 일이든 놀이든, 뭐가 됐든 판을 성과에 최적화시키는 걸 고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래야 한다. 수다의 꽃 3시간에, 어제는 병풍이요 오늘은 신부들러리 내일은 아부왕. 맥주 3병으로 인생의 쓴맛을 인내하기! 참고 견디며 때로는 경주를 즐길지라도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면 베팅을 하긴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쾌적한 시간이든, 불쾌한 기분이든, 만족스런 호사든 간에.
그러든 어쩌든 나는 엉겁결에 대타로 기용됐고, 큰 경기에서 싫지만 뻔트를 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큰맘 먹고 자콥 커퍼필드와 담판을 짓기로 하고서 그녀들과 함께 자콥 커퍼필드가 기거하는 별장에 도착했다.
딩~동!
딩~동!
딩~동!
뭐야 이거, 없나?
딩~동!
딩~동!
딩~동!
휴~ 이 자식이 눈치 채고 도망갔나? 그럼 그렇지. 허허허허허.
나는 속으로 진땀이 났다가 안심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게 아쉬워했다.
딩~동!
「자콥 아저씨 없나보다.」
「그러니까」
휴~!
그래서 순진무구한 동심의 열렬한 지지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빠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퍼?」
「어? 아니야 아니야. 내가 무슨.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에이 무슨.」
「아 맞다. 얘 포니. 자콥 아저씨 집은 대문이 파란색이 아니라 지붕이 파란색 아니니? 그렇지?」
「아 맞다. 그럼 이 집이 아니라 옆집이네. 어쩐지.」
뭐? 뭐라고?
꼼꼼한 놀기와 깐깐한 일하기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일까?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옆집, 그러니까 진짜 자콥 커퍼필드 집의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휴~!
나는 또 한 번 안심했고, 도합 두 번을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딱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저쪽에서 복고풍 롤스로이스... 아닌데. 저 차 이름이 뭐지? 웬 길다란 차 한 대가 우리쪽으로 접근해왔다.
「와, 아저씨다.」
그래서 차에서 내린 사람은,
「뭐야 이거. 니콜라스 케이지잖아?」
「아니야. 저분이 바로 자콥 커퍼필드야.」
「뭐? 그럼 내가 아는 자콥 커퍼필드와 너네들이 아는 자콥 커퍼필드가 다른 사람이라고? 어쨌든 잘된 거네. 휴~ 다행이구만 그래.」
「어?」
「아니야, 아무것도.」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콥 커퍼필드 아저씨네 댁에 마치 초대라도 받은 것 마냥 함께 들어가게 됐다.
18
우리는 함께 자콥 커퍼필드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워낙 스스럼없었기 때문일까? 그분은 따로 자기 볼일을 봤고, 그녀들은 자유롭게 집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포니. 어째 집안 분위기가 좀 음침한 것 같지 않니?」
「그건 모르겠는데, 왠지 오늘따라 오빠가 좀 피곤해보이네?」
「나? 아니야. 괜찮아. 그럼. 그런데 마리온은 어디 갔니?」
「아 아까 인사 못했구나. 갑자기 남자친구가 무슨 일 있다고 해서 갔어.」
「뭐? 걔 남자친구 있어?」
「응. 왜?」
「아니. 그냥. 응? 아니. 어? 그냥.」
「나보고 오빠한테 인사 못하고 간다고 전해주라고 하던데.」
「그래?」
「어머머머. 내 정신 좀 봐. 나 오늘 약속 있는 걸 깜빡했네. 어쩌지? 조정부 친구들이 송별회에 열어준다고 했거든. 그럼 있잖아. 오빠 여기서 놀다가 아저씨랑 친해지고 얘기도 좀 하고. 나 먼저 갈께. 다음에 봐 오빠. 나 간다.」
그렇게 포니와 마리온은 떠나고, 나만 혼자 덩그러니 자콥 커퍼필드 박사의 저택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또 어딜 간 거야?
남의 집에 나 혼자? 뭐야 이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알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거야? 그걸 누가 알겠나!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최근의 내 삶을 검토해보기로 했다.
요즘 들어 내 인생은 아마도 이런 듯 했다.
사냥개! 오전에는 최선을 다해 성과를 추격하는 사냥개.
감시견! 낮에는 지치고, 싫증나며, 기 빨리다 마침내 이렇게 대충 살아도 괜찮은 건지 살짝 고민되는 야망의 감시견.
그럼 저녁에는...
양치기견? 아니 양치기! 그렇게 해님과 달님의 교체 시기가 임박하면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슬슬 행복도가 상승한다.
그 다음으로는...
광견! 하여, 깜깜한 밤하늘에 별님이 등장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때로는 미친 개가 된다. 농담이 좀 심했나? 통과.
한편, '막살자'라는 핫한 애칭을 친구에게 은근슬쩍 떠넘기기. 만약 받지 않는다? 친한 웨이트레스한테 전가하기. 그러니까 숙녀는 그 남자의 이상한 사정을 아셔야 하는 걸까? 그러든가 말든가!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한다. 심지어 남들 다 은퇴할 때 뒤늦게 플레이보이계에 늦깎이 데뷔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도 있다. 걔는 남들 놀때 뭐했는지, 참 나! 그게 잘 될려나 모르겠다만, 얌전한 고양이로써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지도 못했고, 늦바람이 무섭다지만 도전만 하며 (개)이득이 없으면 뭘해! 가만 보면 꼭 돈 쓰고, 욕 먹고, 독박 쓰는 사람들이 있긴 있다. 그래서라도 웃는 거지. 어쨌든 토끼처럼 한눈팔든, 거북이처럼 부지런하든, 살다보면 반박자 늦을 수도 있다. 분위기 파악 못할지도 모르고,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빈말을 참말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처럼 사랑의 신호를 오해하거나, 유행의 막차와 호시절의 끝물에 나 혼자 들썩거리지 말란 법도 없다.
그래서 (늦잠 자서) 숙취와 함께 대낮부터 하루를 시작하게 되면, 눈 뜨고 보니 이미 해는 중천. 그러면 하루의 시작부터 '대충 살자'가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자, 가 아니라! 뭐 어쨌든 나는 그처럼 일에 몰입하여 환희에 젖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규칙적으로 시간표와 건전한 다짐을 엄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나는 오늘도 뻔트마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선수 교체된 듯 나의 앞에 등장한 최적의 쾌감마이자 깜짝마는, 날 버리고서 다들 지네들 살길 찾아 떠나간 것이다. 저런!
그건 그거고, 나는 집주인도 안 보이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어서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모두 잠겨있네? 아 나 정말 가지가지 한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이번에는 가택감금은 가택감금이었는데, 이번에는 남의 집에 가택감금이었던 것이다.
19
바람둥이의 본심은 제쳐두고 한량의 직분에 충실하자면 나는 그래야 했다. 사랑의 열망가, 에잇 그거 못해먹겠다고. 농담이고.
나는 일단 장밋빛 내일을 예측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연보라빛 낭만과 사모하는 호사, 흠모하는 사치에게 퇴짜 맞은 것이다.
「뭐야, 나 또 차였어!?」
왠지 유행어처럼 무척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 말을 어느새 내가 하고 있다니! 무심코 드는 생각은, 결국 따로 임자가 없는 말이로군. 그렇다고 약속 없음을 증오하겠나, 뜬금없이 여자의 마음을 탐문하겠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흑심을 사이렌 마법으로 개량하겠나. 난 뭐라도 해야 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어떤 새로움이 절실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속세에서 상놈이란 세칭을 덥썩 수락할 수야 없겠지만 '고놈 물건이네'란 말은 못들을지언정 미친놈처럼 돌아다녔던 방황의 시절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지금 문득 어느 아가씨의 뒷모습에 반해서 환장한 채 무작정 그녀의 행적을 쫓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오해 받기도 싫었다. 설혹 걷는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에 그냥 어쩌다 의도치 않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어떤 동선이 겹칠 수는 있다. 출근길과 퇴근길, 등교와 하교가 그런 것 아닌가. 도시에서 버스에 탄 사람들이 창밖으로 뭘 보겠나. 다만,
난 아니다 난 아니야!
정말로. 진짜로.
난 아니다 난 아니야!
그렇다고 산책이든 쇼핑이든 시내를 돌아다니다 어떡하다 동선이 겹치는 건 부도덕이 아니다. 그렇다만 만약 그랬을 때, 딱 그랬을 때, 그렇다만 막상 정면을, 정면을... 넘어가자. 아, 커피포트! 아무튼,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공주병의 특권인 허영심조차 반겨야만 했다. 가혹한 운명을 탓하겠나, 도박꾼 친구와 어울려 진땀 나는 승부에 집착하겠나.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뭐랄까, 클래식 기타 학원이라도 다녀볼까? 플라멩고 막 그런 기교를 연습하다가 기웃기웃하다 뭔가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 어떤 비율이 신통치 않을테니, 또 유쾌한 익살꾼은 달랑 1주일만 다니겠지. 보나마나 뻔해. 안될 일이다. 이미 많이 경험해본 일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세계 바텐더 대회에 나가기로. 그런데 그건 장기전이다. 아마 중도에 분명 포기할 것이다. 그럼 상쾌히 시작하느니 애초에 아니함만 못하다. 그러니 그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인가?
내가 원래 알던 자콥 커퍼필드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자콥 커퍼필드의 집에 갖혔는데?
나는 백방으로 뛰어보고 알아보며 비상 스위치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창고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소형 화면을 소파 앞에 있는 카지노 머신 뒷편에서 발견했다.
거길 보니 자콥 커퍼필드가 자기 자동차에다... 아니 글쎄 저가 증류주를 넣고 있었다.
뭐지? 뭐지? 이건 대체 뭐지?
아하~! 이제야 알겠다. 뭔가 느낌이 왔다. 잘은 몰라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곧 내가 알던 자콥 커퍼필드가 얼굴을 바꿔서 내가 모르는 자콥 커퍼필드가 된 거지. 저런!
어쩐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서 태평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인생에 대한 그럴듯한 훈계일랑 거부하고, 으쌰으샤에 대한 그럴싸한 명분을 더─더더─더더욱 그럴싸하게 꾸미고 아름답게 만들기.
나는 좀 더 면밀히 탈출구를 찾았다. 그래서 끝내 비상 버튼을 발견했고, 그걸 눌러서 자콥 커퍼필드의 별장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20
다음 날이 됐다. 먼 곳까지 작품을 쓰러와서 이게 뭐란 말인가. 꼭 (개)망신까지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남의 집에 가택감금이나 되고 겨우겨우 탈출이나 하다니. 내가 바란 건 원래 이런 공상이 기본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다음이 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이런-식이지.
언젠가 짝사랑을 고해하더니 사랑의 변심을 고백하는 일. 드라마의 흔한 소재요, 유행가 가사의 단골이자, 연애소설의 주전이다. 환상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고 신비감은 마땅히 증발하기 위해 우리를 현혹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알다가도 모를 감정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통속적인 경과라는 건 무릇 어떠하니, 차라리 황금을 흠모하고 사랑 받음을 맹신하는 게 나아보일 때도 간혹 있다. 없을 수 없을 테니까. 솔직히... 나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편적인 행복이란 아마도 1.5군일까? 그야 물론 2부 리그 붙박이 벤치 멤버로써 엉덩이가 근질거려본 선수들에게나 해당하는, 즐거운 투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어른인 이상 모를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낮과 밤이 모순되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낮에는 성과에 대한 열망을 구슬리면서, 성공은 몰라도 적어도 먹고 살기에 대한 열정에 봉사하기. 그러나 해가 지면 우리는 별님들의 밀담을 미리 엿들어서 아가씨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사랑을 믿고 운명을 기다린다고. 그녀가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그걸로도 모자라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않기. 그런데 친구들과 만나서 한다는 얘기가 글쎄
뭐, 뉴페이스?
어른들의 세상살이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짝저짝 교활하게 따져서 '왜 그 쉬운 걸 진작 몰랐을까?'라는 포지셔닝은 뚜렸해진다. 그것은 곧 사랑에는 바보가 되고, 놀기에는 천재가 되자고! 그럼 일하기는 뭐냐구요? 그건 '대충 살자'를 훨신 상회할지 아닐지, 각자 판단하기. 각자!
그야 어쨌든 미소년의 소원과 어른의 야망은 난 모르겠고. 말하자면 나는 즉흥적으로 설정한 짜릿한 목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무턱대고 끌리는 야릇한 대망을 신뢰하기로 했다. 하루 중 행복도가 가장 가파르게 상승한다는 해질녘 전의 기분을 좋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표라는 게 구체적이지 않은 점. 아울러 새로운 대망이란 게 너무나 막연하다는 것. 뭐? 그래서 청아한 스타카토와 신나는 멜로디는 또 다시 도돌이표를 만나서 애초의 심심함으로 복귀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께서 뭔가 이상한 상상력을 점지해주시기라도 한 것일까?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즉 내 가녀린 동심과 청초한 팔랑귀를 자극하는 주제는 거칠게, 막 거칠게 내 마음에 노크도 허락도 없이 들어와버린 것이다. 정말로? 뻥이다.
그처럼 롭이 소개시켜준 작업실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그래서 나는 다시 옆집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그레이하운드와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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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레이하운드와 함께 산책하면서 휴식의 시간을 만끽했다. 동네 아낙네들과 눈인사를 나눴고, 그레이하운드와 나는 숨김없이 우정을 쌓았다. 더구나 나는 이방인으로써 썩 모나지 않게 처신했다. 오싹한 공포감도 없었다. 모든 건 정상으로 복귀했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 명백한 증거이자 귀여운 힐책은 물론 그레이하운드의 꼬리 흔듬이었다. 무슨 환상머신이네 가련한 미스테리네,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했다. 가상의 연적도 필요 없었다. 가련한 객설과 듣기 싫은 푸념을 또? 지겨운 일이다. 새로운 꿈의 탐구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상상력이 넘쳐나도 부족할 판에 또 루저마인드? 이제 그만. 정말 그만!
그러다 나는 동네 인근 도로에서 말 만 마리가 행진하는 장광을 목격했다.
뭐야! 저건 인터넷 동영상으로 본 거잖아? TV 다큐멘터리로도 봤던가?
와~ 저런 행사도 있긴 있구나. 그러면서 입이 떡 벌어진 채 명장면을 눈앞에서 감상했다.
그런데 다 좋은데 냄새가...? 통과!
풍운아의 약점은 결국 간당간당한 품위 유지비인 것일까? 이런 푸념일랑 진작 증발해버렸다.
순수한 새로움 무딘 익숙함. 하나를 사면 하나는 관심에서 멀어지는 법인데 둘 다 챙긴 것만 같았다.
은근한 열정과 사색적인 자신감까지 샘솟았다. 싱그러움을 향해 환히 빛나는 열망은 마침내 싹이 돋았다.
그렇게 말들의 행진을 목도한 다음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런데, 아뿔사!
저건 또 뭐야!
또?
즉, 얼마 후에 이번에는 그레이하운드 천 마리의 산책을 만나게 됐다.
뭐야 이거? 이 동네는 증말로 자유의 왕국이자 욕망의 천당이란 말인가! 탐욕스러운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고양된 예리한 대망은 날 막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런 만족스런 경치를 보게 되자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베팅은 백일하에 불행이 입증될지라도 가난을 탈출할 한 가닥 희망 같은 것인데, 난 이미 부자가 되버린 듯한 현실감이라고나 할까? 이 정경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이런 뜻이 아닐까? 푼수의 표상인 절대적인 조증이 그대의 귓전을 때리는 한, 당신은 결코 늙지 않으리라. 그건가?
그런데, 기쁨의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건 바로 내가 산책시키는 옆집 그레이하운드가 내게서 도망가버린 것이다.
자기들 종족을 그것도 때거지로 만났으니 녀석도 흥분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그러나 이해는 하는데, 뭔 사연인 줄 알긴 알겠는데! 옆집 주인한테 뭐라 변명한단 말인가.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속이 탔다. 별나 보인다 싶을 정도로 난동을 부리며 녀석을 찾아헤맸다.
그러다 나는 롭에게 연락했고,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곧 그 녀석은 동네에서 파란색 지붕 근처를 좋아한다고.
뭐야 어제 겨우겨우 그 인간네 집에서 탈출했는데, 거기 또 가라고?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거기까지 갔고, 그레이하운드를 만났으며, 돌아와서 옆집 주인께 녀석을 칭찬하며 돌려보냈다.
다시는 옆집 그레이하운드를 산책시키지 말아야지, 라는 결심과 함께.
곧 문제 해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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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쾌락에 놀라고, 지고의 이상에 태연하기.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니면, 야한 쾌감에 무감각해지고, 교양스런 행복을 반기기. 오히려 그게 부자연스러운 일일까? 다 모르겠고!
어찌 되었든 귀여운 소원이든 막대한 야망이든, 뭐랄까, 욕망의 충족은 어떻게 보면 묘한 선착순 같은 개념일 것이다. 곧 그것은 꿩 대신 닭일 수도 있고, 노-세일을 고집하며 제1의 목표만 맹목적으로 쫓는 열정일 수도 있다. 그러다 얼렁뚱땅 추잡한 방탕도 스쳐지나가고, 때로는 골탕도 먹고, 어쩌다가 음란한 염문도 알게 되면 인생 경험은 풍부해지는 것. 그런데 아직까지 여태 마음은 버릇처럼 들뜨고, 귀는 참을성도-줏대도-주관도 없이 깃발처럼 펄럭인다는 점. 그러나 '대충 살자'와 '막살자'라는 쌍발마를 몰아본 우리들이 잘하는 게 뭔가? 곧 점잔 빼자면 직관이요, 제 딴에는 눈썰미. 다른 말로 촉은 여간해선 녹슬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비전!
따라서 나는 새로운 전망이 뿌였기 때문에 선명한 환희와 기발한 구상을 떠올리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혹시, 떠난다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들썩거리시는 분이? 장안의 내놓으라 하는 명마 가운데 싫증의 대항마로써 이만한 게 없다니! 그건 마치 역마살 낀 올빼미를 길들여 긴요한 작전 암시문을 발에 묶어 보내듯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일까? 분리는 무슨! 어쨌든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러니까 이쯤 해서 잠깐 가택감금을 풀기로 한 것이다.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속담을 빗대어) 수닭이 울면 어쩐다고?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된다 라는 속담을 빗대어) 이거 이거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 어? 뭐! 이 놈의 여편네가, 북어랑 마누라는 이틀에 한 번씩 뚜들어줘야...! 뭐 생선대가리, 생... 뭐? 보아하니 환청을 주거니 받거니, 가 지겨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딘가가 어디냐 하면, 바로 내 사무실이다. 난 아무래도 놀아도 집 근처에서 놀아야 마음이 편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하루 쉰 다음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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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기인이었다. 물론 연분홍색 들꽃, 풍성한 안개꽃, 발 달린 주홍색 호박, 하늘색 하늘 아래 양떼구름 같은 양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뭐라고나 할까,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결정적으로 지금 내가 뽐내고자 하는 건 그런 단순한 자랑이 아니다. 겸양도 싫다. 그 다음을 못하니까. 가식에 얽매이기에는 무대가 비좁다. 그래서 지금 내가 뽐내고자 하는 건 이거다. 바로, 나는 그분들에게 주로 인기인이었다는 점. ('나도 말 좀 하자'가 '나도 자랑 좀 하자'로 바껴버렸다니. 어떻게...! 으으으으으윽 오그라든다. 아아아아아 재수없어. 으웩~~~ 유치해! 완전 왕재수 아니야?) 그러니까 그분들에게 주로 인기인이었다니, 그분들? 대관절 그분들이 누구냐구요?
두그두그두그~~~~~~~
빰빠라밤~ 빰~빠~밤~빰~빠~밤~!
(딱) 허당과 삼류와 주당들! 뭐? (쉭─쉭─쉭) 허당과 삼류와 주당들!
(핑~) 팡파레가 울려퍼졌듯이 (퐁~) 나는 그분들에게 주로 인기인이었다.
밤무대의 이단아가 끊임없이 주창하는 포지셔닝이 뭔가, 막살자-다!
주색의 장타자가 쉴새없이 친애하는 슬로건은 무엇일까, 내일은 없다-다!
그게 다 그분들 작품 아닌가. 응? 그분들이 어디 보통 분들인가, 어?
멋진 좌우명, 길다.
근사한 인생 모토, 번잡하다.
지키지도 않을 거. 됐고. 짧게.
뻔-트!
SO COOL!
농담이고,
때문에 그 말은 곧 나는 병풍이자 신부들러리 전담 요원이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종이 한 장 두께 차이라는 게 이런 거다. 자랑은 자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 자랑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치고 미주알고주알 분석하기. 똥개가 미친듯이 땅을 마구 파고 또 파듯이. 깔깔거리더니 꼴 좋다, 가 아니라 그건 다름 아니라 자기 풍자였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1.5인자로 딱 좋은 거 아니냐고. 그러다 드물게 그런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내 IQ 몇이야' 수재-프로그래머는 여자친구 잔소리를 견디다 견디다 끝내 못 버티고서, 듣기 싫은 등쌀에 못이겨 <너 그럴려고 프로그래머 됐니>라는 레드라인마저 무시하기. 성격 좋다 라는 말을 곧잘 듣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거기다 많이 빠지면 안되고, 제법 잘나지도 않고, 그렇지만 뭘로 봐도 중간은 가며, 농구할 때도 만능 포지션이었으니 금상첨화네. 다른 말로 주연급은 절대 아니고 명품 조연도 아니지만, 뭐랄까 속된 말로 땜빵용으로 썩 부족하지 않다? 좀 더 후하게 쳐주자면 한마디로 말해서 대타로 딱인 거지. 아쉬운 대로 써먹을 만하니까. 맞네. 그러네. 대타로 딱 좋네! 여자로 치면 친구3을 우리파에 끌어들여서 화장술 갈켜주고, 변신술 알려주며, 애교와 내숭까지 전수해주지만 결정적으로 말이 통하는 남자는 절대로 소개시켜주지 않기. 어째서? 내 코가 석 자니까! 농담이고, 뭐 농담이 아니라고? (화들짝) 통과.
그래서, 아아, 그래서 내 친구들이 그렇게도 날 우정 파도타기로 적극 띄워준 건가?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사돈의 팔촌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는 그 지점을 누가 모르겠나. 그렇다고 진짜로 우정 파도타기에만 열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참말로 남자들이 날 막 미친듯이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는 여자를 좋아했고,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이상해졌다) 그렇지만 우정의 척도란 뭔가. 난 친구들과 친했고, 친구들도... 아니 친구들은 날 좋아했고, 우리는 의리로 뭉쳤다. 남자의 우정이란 닭살이니까! 나는 단짝 많기로 중급은 결코 성에 차지 않았다.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반드시 플레이보이의 3박자라는 목표 지점까지 1자로만 가란 법도 없다. 살다보면 S자로 갈 수도 있고, 목적지 자체가 변경되는 일도 꽤 흔하니까. 가죽점퍼를 입은 똑진이와 수트가 잘 어울리는 범생이가 친구일 수 있지만, 허허허허허 흐흐흐흐흐, 배후의 그분은 슬리퍼! 재미없고. 좌우지간, 그러니까 중간보스부터 코메디언에 영화배우에 뭐에 뭐에, 물론 그래봐야 언더그러운드지만, 어디서 말발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 결코 적지 않았던 건가. 거 원, 남자 여러명을 두고 숙녀에게 1번으로 공인 받는 일을 뒤집어 보면 우정에서 1.5역으로 딱 최적이라니.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영 모르겠네. 어쨌든 이 화제의 결론은 그거다.
숙녀에게 뭘 좀 아는 오빠요, 왕왕 '성격 좋다'라는 호평이 핀잔은 아닐 테고, 아는 여자 동생한테 남자의 우정에서 어떤 남자를 손꼽을래 라는 내기에 당당히 부동의 1위로 뽑혔다는 것. 그건 곧 남자 세계에서 좋은 친구요, 다른 말로 호구일 여지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유독 친구의 누나와 동네형의 누나한테 첫손 꼽혔다는 자랑을 엔간히, 무던히도 남발했었나? 백날 그 얘기! 어? 질리지도 않나 몰라. 어디 숙녀한테 그처럼 첫손 꼽혀보지 않은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뭐, 병 주고 약 주니? 오오 맙소사, 아아 진정 못 말린다니까!
사랑은 몽둥이찜질일까 아니면 인생은 솜방망이일까. 무슨 몽키스패너니 공포의 삼겹살이니 다비드는 다비든데 어디산 다비드니, 또 그 얘기? 그런데 신기하게도 별로 지겹지는 않네. 아무튼 여자가 선호하는 무언가가 남자 세계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집에서 혼자 외롭게 술잔을 독대하는 일. 어른이 되어서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바로 그러고 있더라! 어쩜 인생은 그런 것 아닐까? 위스키 스트레이트의 쓴맛과 인생의 애환을 비교하기. 뭐, 에스프레소라도 좀 어떻게 안되겠냐구요? 하여간 구식 탱탱 묵은 헛소리는 이만 하면 됐고.
보자, 부랴부랴 연애가 어쩌고 우물쭈물 다행스런 인생을 추측하더니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그럼 늦게라도 여자의 마음을 알았다 치고, 다음으로 상남자들의 신임을 얻는 데 지겨워졌단 말 아닌가? 싫어서 관뒀든 어쩌든 그것도 실패했다. 왜냐하면 여-바텐더의 오판 때문에. 따라서 나는 이짝저짝 신경 쓰다가 쩔쩔맨 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가 되느니, 차라리 나는 자유롭게 이상의 날개를 펼치고 희망을 꿈꿔야만 한다. 그럴려면 체면 따윈 동네 강아지한테 양보하고, 선망일랑 잊고, 고양이 안달나게 하기마저 연기한 채 나는 꿈의 파랑새를 찾으러 떠나야만 한다. 그렇지만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다'가 좋겠나 그 반대가 근사하겠나. 그래서 이왕이면 변덕스런 만족감, 비정상적인 질투심, 야릇한 놀라움이 혼재된 파티일지언정 초대 받는 게 모양새가 낫기는 낫다.
그런데 초대장은? 어설픈 8 대 2 가르마말고, 올백머리 특급 보디가드가 지키는 최고급 나이트클럽 잔치는? 1차 카페, 2차 술집, 3차 극장식 카바레, 4차 사설 클럽, 5차 특급 NC 다음으로 흐름을 살려, 6차 비밀 살롱에 이어 막판 스파트에 열을 올려, 제7차 끝짱나는 환상의 그 무언가는? 따라서 나는 또 다시 웃음기가 싹 가신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래서......>까지는 가지 말기로 하자. 요점은 이렇다. 군침의 애칭은 눈독이다. 욕망은 정직하지 않다. 사랑의 미래를 꿈꾸는 건, 로맨티스트에게 꽃다발을 받길 썩 싫어하지 않는 분들께! 미지의 이상은 철학과 학생에게로. 형이상학이야 뭐 똥개한테 일임하면 그만. 그대신, 그대신 나는 터무니없는 발단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고로 초미의 관심사를 나는 그냥 무턱대고 즉흥적으로 정해버렸다. 그건 무엇이냐? 바로 친구들과 칵테일 동호회랄지 새로운 뭔가를 찾아내기로 합심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잘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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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럽다. 영화는 뻥이고 복권은 꽝이다. 환상은 가짜고 신비는 속임수다. 눈물 글썽이고 가슴 뭉클하며 코끝이 찡한 연애는 대체로 가식이고, 아마도 위선이다. 애정이 가득했던 드라마 주인공을 오랫만에 TV로 보면 마음이 짠하다. 팔과 목이 짧아져서 외계인이 된 데다 늙었으니까. 그러나 야망은 야속할지언정 우리는 달려야 한다. 때로는 쉴 수도 있고. 반면 여인은 세월이 비켜갔다는 빈말을 좋아하면서, 쟤도 어쨌어 쟤도 어쨌어. 뭐? 아무튼 야망은 개꿈에 불과하고 타율은 악몽이다. 사랑이 꽃 피고 행복이 싹트는 꿈나라는 왜 그렇게 멀리 있냐고? 멀리 있지 않다. 다만 철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일상은 지루하고 놀기도 싫증난다는 것. 한눈팔기 조심하며 무정과 무심을 조심하더라도, 결국 사랑은 어쩌면 짝사랑 받기가 최고 아닐까? 왜냐하면 대등한 사랑은 제아무리 달콤하더라도 일종의 빚이자, 책임이며, 어떤 자유의 박탈이니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한 달은 버거킹, 한 달은 스타벅스, 한 달은 던킨 도넛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뭐하다. (너도 한달짜리구나!) 사는 건 뭘까. 세상살이가 꼭 뭐랄까, 개뼉다귀 같은 건 아니겠지만 인생은 결국 솜사탕도 아니고, 화사한 꽃다발도 리본으로 마무리된 최고급 케익도 아니다. 따라서 현재 점수는 그렇다는 거 아닌가. 선물은 주지도 받지도 말기.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가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러나 난 단지 좀 더 나은 삶을 바랬을 뿐이고.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여태 잘 모르겠고.
아니다. 안된다. 이건 아니다. 이대로 무덤덤한 일상에 순종한 채 신나는 모험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절대 안된다. 비록 우리가 쾌락의 노예는 아닐지언정 나는 그래서 썩 나쁘지 않은 쾌감을 탐구하고 싶어졌다. 그래야 하니까. 소망하는 사랑이 더러워지기 전에. 좋아하는 행복이 퇴색되지 않게. 꿈꾸는 인생이 아름다움은 몰라도 불행해지기 전에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랬다. 낮에는 소심하고 밤에는 경솔했다. 그 말은 곧 일하기는 심심하고, 놀기는 당돌하다는 뜻일까? 그러든가 말든가!
바로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건 결정적으로 비밀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