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성을 다해 쾌활한 인생을 도모한 결과 그는 낭만적인 사랑을 일구었을까? 분홍빛 호사와 청보라색 행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농심으로 보자면 비록 뽐낼 만한 풍년은 아닐지언정 호박마차와는 구면이니까. 둘째, 어복으로 치자면 참치와 물개 그리고 상어와 한때 친했지만 진정한 대어, 곧 피앙세 인어공주와의 손 잡기는 아직이니까. 그렇지만 하고 또 하고 끝없이 반복하는 사랑가도 분위기 봐서.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데 딱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일할 때 놀고 그리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으잉, 일할 때 놀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는 일. 그런 로맨스 유행가 가사 쓰는 일을 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도대체 할려는 말이 뭔데?」
~라는 질의를 듣는 청자이거나 따지는 화자가 아니라는 점. 한 가지 그의 난제였다. 잘 익힌 요리와 날것도 먹고, 잡것 같은 애칭에 익숙하며, <뭘 해도 재미없어>같은 진담과 농담의 양다리도 좋아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덜 익힌 생두로 뽑은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점. 하긴 루왁 커피도 아직이다. 뭐야? 결국 <아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올 테니 문제점은 그거네. 응석과 투정과 불만. 즉 심심한 기분을 상쾌하게 전환하여 달콤한 행복감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탐욕. 그 쉬운 욕구와 놀이의 필요성을 왜 그는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으쌰으쌰를 어떻게 하는지 흑심은 언제, 눈독은 어디로, 고급스러운 군침 흘리기는 무엇인지를 새까맣게 까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 그처럼 마음은 꿀꿀하고 기분은 착찹했다. 부쩍 팔과 목이 더 짧아졌고, 불굴의 창작 의욕마저 맹맹했다. 결국 싱거운 일상에다 따분한 실내 생활이다 그거로구만.
그래서 NB는 친숙한 진공청소기와 지겨운 커피포트가 아닌 색다른 대상을 희망했다. 구태의연한 먹잇감이 아니라 팔딱팔딱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깜짝 놀람, 그 신선함을 사모했다. 그리하여 마치 뉴페이스를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그 연모의 목표물은 무엇인고 하니, 역시나 <아직>이었다. 따라서 그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주둥이가 길다란 주전자를 머리 위에 얹은 듯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 빙고! 하면서 아르키메데스처럼 참신한 기분전환 거리를 생각해냈다. 말하자면 짜증 계기판의 푸른 막대가 최대치를 마구 두드리면 어떻게 되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던가, 열려라 참깨 하면서 뚜껑이 열리게 된다. 그 원리에 착안해서 그는 천문관에 놀러가기로 한 것이다.
'직경 얼마에 최첨단 시설이 어쩌고저쩌고'는 꽤나 멀어도, 보아하니 어디산 다비드는 불과 차로 1시간 거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짐을 싸서 그곳으로 출발했다.
잠깐만 친절한 설명이라는 꼬리를 달자면 이렇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다변가들에 따르자면 B급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그렇다고 한다.
첫째, 꼭 사막이랄지 한적한 시골길 한가운데서 차가 고장남.
둘째, 하필 그 지역은 항시 통신 먹통 지역.
셋째, 외딴 모텔이랄지 야외에서 어쩌고저쩌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2
「계세요?」
천문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이저 천문관이라고 정식 명칭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만 켜져 있지 않다뿐 나머지는 모두 사용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데 처음 와본 만큼 목적은 어디까지나 구경이었다. 실제로 한쪽 눈을 찡그리며 별자리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재미로 보면 좋겠지만 그건 단지 부차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그럼 이제 정말 SF 영화처럼 사람 구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든 일이 되어버린 건가? 그래서 NB는 신비스러운 긴장감과 놀라운 행복감이 지나쳤던 나머지 마침내 마음은 공중부양하고, 이성은 몸과 분리된 것만 같은 기분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진짜로? 뻥이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아니지. 오히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구경하고,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듯이 감정을 교류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이 없었다. 그야 뭐 기다리다 보면 나타나겠지. 아직 심각한 단계는 아니니까 그는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구경할 거 다 구경한 다음 그는 왠지 모르게 여기 당분간 머무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천문관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볕은 들고 바람은 들지 않아 텐트 치기 딱 좋은 장소를 발견했고, 텐트를 쳤다. 나중 주인이 오더라도 할 말은 있어야 하니까. 무슨 권리로 사장실을 차지했냐고 따지는 질의만 듣지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천문관 생활 1일째를 인적 없이 홀로 보내니까 썩 찬동하기 마뜩찮은 모종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한동안 견디다 보면 둘 중 하나, 아니 셋 중 하나는 될 거 같았다. 바로 첫째 젊어지기, 둘째 푹 쉬어 만성피로를 풀기, 셋째 기막힌 걸작의 구상만 완성. 자기를 반가워하는 정감이 없으니, 누군가를 억지로 반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 격심한 명상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예술가가 그걸 왜 마다하겠나. 사무실과 집을 오가면서 내내 다짐해봐야 작심했던 근사한 시간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의 생활 시간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자> 라면서 글로 써서 모니터에 붙여봐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기 좋고 풍광 좋고, 방해할 아무도 그 무엇도 없으니 놀라운 영감이 떠오르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일 따름.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단 기분은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1일, 2일 지나면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생활 반경과 주거 지역이 점점 안쪽으로 이동된다는 점. 그렇지만 카페 냉장고에서 뭘 꺼내먹기가 뭐해서 나중 변명거리도 미리 만들어놨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핑계를 읊은 다음 그 동영상을 소셜 네트워크에 미리 올려놨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방송해서 모두 기록을 남겨놨다. 그러다 결국 그는 보이저 천문관의 VIP실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그렇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람도 사건도 없었기 때문일까? 슬슬 이 생활이 지겨워졌다.
딱 3일째.
많이 버틴 거다. 어쩌면 첫째날부터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라면 거짓말일 테고. 일부러 자신을 타일렀겠지. 왜냐하면 억제할 수 없는 광기로 말미암아 생기를 부여받은 듯한 허당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을 테니까. 아울러 인생이란 심심한 예언가의 애달픈 희망 같은 것이라며 혼잣말을 읊조리는 걸로도 모자라 점점 싫증만 늘어갔을 테고. 안 봐도 뻔하다. 그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공상만 늘어갔다. 마치 이처럼 말이다.
<혈기왕성한 정력가는 날조된 열망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하찮은 잔재주라도 황공할 따름이어야 할까. 수수께끼 같은 인생 행로로 보건대 정감을 느낄 만한 고뇌라고 보긴 퍽 어려웠다. 언제나처럼 일상을 이어가는 수 밖에. 가뜩이나 마감일에 쫓기는 생활의 연속인데 이상한 생각은 그만. 딱 그만. 남자의 감성에게 여자의 이성을 점지해주어 열심히 일하기에나 신경 쓰자, 라고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 잠깐. 남자의 감성 대 여자의 이성? 바꼈나? 좋으실 대로. 그럼 뭐 여자의 꿈과 희망 대 남자의 지성과 열정으로 일하기에 매진하면 되겠네.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이상한 공상을 향한 흔치 않은 애착감, 참 유별난 취미도 다 있다. 그런데 몽상을 하다 보니 또 뜬금없이 숫자에 집착이 되는군. 요즘 특히 숫자에 강박을 느끼니까. 중학교 3학년 마지막에 무슨 졸업용 그런 시험이 있었는데, 그때 200점 만점에 140점을 받았던가? 아님 143? 144? 아니면 160인가? 아닌데. 모르겠다. 그리고 고3때 대입 시험도 200점 만점에 105.7? 아니 105.2던가? 아아 헷갈린다. 어지럽구만. 됐고!>
그러나 천문관 보이저는 그를 기어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끝까지 밋밋한 전개를 모른 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곧 천문관에 또 1명의 낯선 여인이 있다는 걸 그는 알아냈던 것이다.
신비감은 예측불허에 환상감은 상상초월. 꼭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괜히 반가웠다. 안 그럴 수 있겠나.
그렇다고 의뭉스러운 정서와 허풍스러운 정체성을 앞세워 그녀를 꼬시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품지 않았다.
그렇게 내내 숨바꼭질만 하다 서로 거리만 재다, 그는 과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이곳 관계자이신가요?」
「아니요.」
「그럼요?」
「뭐가, 그럼요죠?」
「그러게요. 그러니까요.」 뭐야, 얘 세게 나오잖아? 그는 살짝 긴장했다.
「」 그녀는 자기가 말할 차례를 한 번 쉬었다. 질문이든 수다든 그녀가 말한다면 그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을 텐데. 일단은 그랬다.
「혼자 오셨어요?」
「네. 오빠...는요?」
뭐, 오빠? OK! 게임 끝났다 완전 끝났다. 어쩐지 처음부터 눈빛부터 다르다 했다, (딱)!
「보시다시피. 알다시피 이렇게 인적이 드문데 제가 계속 있어도 될려나 조금 걱정이 되는구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긴 무슨 일로...」
「저요?」
「네? 네.」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니?
「저는... 제 오빠가 초대해서 왔는데, 오빠가 좀 늦는다 그랬거든요. 우리 오빠 아세요?」
「그쪽 오빠를요? 제가 그쪽 오빠를 어떻게 아나요! ~라는 말은 장난이고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 알고 싶다구요. 아가씨와 그 오빠분을요. 그런데 그쪽 오빠는 뭘 좋아하나요? 참고로 저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허허허. 농담치고 거 참 대단히 썰렁하군요. 허허허.」
「알면 됐죠.」
「네? 허허. 알다뿐인가!」
「방금 뭐라고 하셨죠?」
「네? 아무 말도 안했어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왜긴요? 이쁘면 이쁘다, 뭘 마시겠냐, 이름이 뭐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참 나 거 별... 아무튼 무지 이상한 오빠를 다 보겠네. 난 댁을 처음 보고 애 한 셋 딸린 애기 아빠로 봤다구요. 네? 아시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그녀는 말이 길어졌고 웃었다. 이제 이미 그녀는 내 사랑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내? 그!) 바로 사랑과 우정 사이 말이다.
그녀는 내 눈빛을 마주보다가, 교묘히 피하다가, 다시 슥 스쳐지나가듯 분위기를 살피고. 이미 그 뭔가는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천문관 생활 3일째에 접어들어 지루함은 수용한 채, 작품 구상에 전념하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게 웬 뜬금없는 행운의 전개?
행복은 주어진 풍족함에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린 것. 그는 행복했다. 어쩌면 기쁨이 가짜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엄청 좋아했다. 안 그럴 수 없었으니까.
아낌없는 찬사에 목마른 아가씨라니, 것도 제 발로? 그렇다면야 자긴 행복론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로써 숙녀를 예우하는 수 밖에.
그는 어느새 기분이 붕 떠버렸던 것이다. 오늘은 아니지만 어제까지는 딱 그랬다. 어떻게? 바로 이렇게.
짜릿한 기쁨, 쾌감이다. 그렇지만 타락마는 일단 깊은 잠에 빠졌다 치고 작가 생활, 따분했다. 바람둥이 시절도 옛날에 지나가버렸다. 있긴 있었나? 알 게 뭐야! 교양미를 살찌우기, 우스꽝스럽다. 한량 생활, 우습게 보일 수 있다. 장기 여행,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다. 뭘 좀 아는 남자라는 로망, 공인도 아니고 비공인도 아니고.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우습다. 많이 우습다. 아니, 웃기지도 않다. 말도 안된다. 그럼. 그렇고 말고.
그래서 NB는 허심탄회하게, 명쾌히, 속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러니까 무엇을 인정했을까? 자기는 어설픈 3대 사랑을 아직 채 숙달하지 못한 허당임이 분명하다고. 애정사는 노련했고 인생관도 흥미를 끌만 했지만, 아마도 침체기인 듯 했다. 그 때문일까?
「그런데 여자를 못 꼬셔!」
~라는 퉁명스러운 놀림. 친구한테 했던 말은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말이 이미 되어버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구분은 의미 없어져버렸으니까. 사정이 사정인 만큼 안 그럴 수 없으니까. 왜 하필 다른 거 다 놔두고 그 부메랑이! 따라서 그는 마굿간에서 쉬는 명마를 믿어보는 심정으로 경이로운 엉뚱마를 중용하기로 했다. 해결사, 승부사, 구원자, 행운아, 탕자, 박식가, 멋쟁이, 열정가, 탐험가, 사색가...가 아니라 바로 기수는 NB 몽상가였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 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낯선 천문관에서 미모의 아가씨와 갑자기 처음 만나 친해지다? 게다가 방해자는 아무도 없고? 심지어 그녀는 달아날 마음이 전혀 없네? 앗싸! 일단 상황은 그렇게 된 것이다.
3
그렇게 NB는 생각이 깊고, 넓고, 많아지려던 찰나. 바로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차다. 차가 이쪽까지 와서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니 그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그는 바로 롭이었다. 바로 팬클럽 회장 롭.
「롭. 너 여기 왠일이니?」
「그러는 형은 여기 왠일이야?」
「그러게.」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청승?」
「아니. 탐방!」
「그럼 허세?」
「아니. 호기!」
「형 나 따라다녀?」
「내가 널 왜 따라다니니? 나 바쁜 사람이야.」
「형. 나 따라다니지 마. 그럴 시간에 작품을 쓰라고. 응? 나도 명색이 팬클럽 회장이란 말이야. 내 입지도 좀 살려줘야 될 꺼 아니냐고. 안 그래? 물론 관심 없는 사람이 다수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내 면이란 게 있잖아. 내가 형이랑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고 이처럼 어디서 오다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그걸 그 친구들이 알면 좋아할까?」
「걔네들이?」
「걔네들이, 가 뭐냐. 그분들이!」
「아니 내 말은, 진짜 팬은 0명에 순 장난꾸러기 개구쟁이들이 100인 듯 해서. 그래서. 그런데 그분들이 뭐? 늬가 고자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얘가 은근 형을 밀었다 당기네. 어? 내가 안해서 그러지 이간질에 소질이 없을 줄 아니? 응? 그런데, 없어. 그런 데 소질 없다고.」
「그래? 그렇지만 내 의도는 그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 그치만 걔네들도 놀이터라는 공간과 가지고 놀 장난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팬클럽 사이트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그 친구들 당연히 관심도 없을 꺼야.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라고 말할 시간도 아깝지 않을까?」
「빙고! 형 많이 늘었네.」
「그럼 내가 그걸 왜 몰라야 하는데! 라고 작가님께서 그러셨다고 너 또 글 남기려는 거니?」
「형. 내가 마음만 먹으면 팬클럽 문 닫아. 형도 알지?」
「그럼.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
「허허. 농담이고. 그래도 형은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친해. 응? 많이 친하다고. 말만 누구 팬클럽이지 주축 멤버는 다 그런 식이야. 누구는 관심도 없고 자기들끼리 우정을 쌓고, 자주 만나며, 그 가운데 사랑도 탄생했어. 결혼한 애들도 있어. 사진 보여줄까?」
「본 걸로 치자. 그런데 너 나이트클럽은?」
「나이트클럽? 시끄럽더라고. 시작할 땐 뭔가 한번 그쪽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켜 볼까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조용한 게 좋아지더라고. 형 저번에 내 사장실 와 봤자나. 벨리니의 노르마 중에서 거 뭐지? 아아아~~~ 오오오~~~!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응?」
「안되겠다. 내가 인터넷에 동호회 페이지 하나 만들어서 회장할께. 이름 하여 롭 팬카페! 어때? 괜찮지 않니? 좋은 생각 같은데. 이미 너랑 나랑 입장이 바꼈어, 이 친구야.」
그런데 다 좋은데 왜 하필 얘는 이 때 나타나는 걸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빛은 당연히 뭐랄까 원망스럽다고나 할까? 재기에 성공해야지, 라면서 아등바등 투혼을 불사를려는 열망은 온 데 간 데 없이, 어? 틀림없이, 흑심과 막살자식 죄의식과 그녀를 지켜주자는 흑기사풍 위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겠지. 뻔해 뻔해! 그러다 어이 친구, 라는 듯이 나타난 게 다름 아닌 롭! 얘가 하필 왜 지금, 왜 이때 나타난 거야? 설마 죽 쑤어 개 주었다, 에서...... 아니야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아닌 게 아닌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에서...... 아니야 아니야. 그는 좋게 한눈팔지 않도록 타락마를 교정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흡사 밤의 환상에 놀란 토끼처럼.
어쨌건 사실만 보자면 이랬다. 그는 마침내 추종 세력과 팬클럽이 다 떨어져나갔다. 언제 있긴 있었나도 모르겠고, 오히려 이제는 그보다 롭이 훨씬 더 잘나가고 있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과연 생기발랄한 대책이 통할지는, 그런 비책마저 준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 내 여동생 지아니. 이미 인사 나눴나?」
「그럼. 혹시 오면서 귀 간지럽지 않던?」
「왜, 내 흉 많이 봤어? 볼 게... 없나, 있나, 많나?」
「롭. 혹시 할 말이 산더미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럼 나 갈께. 다음에 보자. 뭔가 떠올랐거든.」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그래. 그럼 어서 가셔야지. 형. 잊지 말고 팬클럽 사이트에 들려서 글 좀 남겨줘. 아직 문 닫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이미 다 알고 있었어! 흥. ~라면서 그는 천문관을 뒤로 한 채 떠나갔다. 목적지는 아직 정하지 않고서, 저조한 기분을 떠안고서 말이다.
손색없는 밀애와 부인할 수 없는 행복감은 영 소식이 없었다. 뜸해도 너무 뜸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낭만은 모자랐다. 인기는 상했다. 오락산업은 거짓말쟁이다. 쾌락마 타기도 재미없다. 교양은 가식이고 예술은 아둔하다. 희망은 어렵다. 어차피 청춘이란 심심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해결책이 있다. 바로 풍족한 소비면 분위기는 금새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투우장과 경마장과 미술관과 동물원 그리고 놀이공원 다음에 백화점까지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다 귀찮다. 시작도 전에 지친다. 우선 뚜껑 없는 차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NB는 합리적인 씀씀이, 건전한 유희, 익숙한 취미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퇴짜 맞기를 좋아하고, 바람 맞기를 즐기며, 딱 1달 일하고 직장 때려치기를 반복하면 안되기 때문. 잠깐만, 간당간당? 빙고!
그래서 그는 이 기분으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는 뭐했으므로, 따라서 오랫만에 축구 서포터스 조마조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축구장에 갔다.
4
그는 축구장에 도착했다. VIP 초대권은 없으니 입장권을 사서 경기장에 들어갔다.
그곳은 축구 전용 구장이 아니라 다목적 경기장 즉 대형 경기장이었다. 그래서 명경기에서 보는 열기는 조금 덜했지만 반면에 나름 장점도 있었다. NB처럼 약간 집중력 떨어지는 관중에게는 오히려 딱이었다. 그렇게 그는 골대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우유와 빵 하나를 들고서 말이다.
「분명 오늘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조마조마 애들이 보이지 않지? 오늘 나 꼭 좀 기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거지?」
라면서 그는 조마조마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사말과 안부와 잡담은 건너뛰고.
「형. 우리팀 2부 리그로 내려간 거 몰라? 형이 모르나본대 서포터즈계도 불문율이 있어. 골대 뒷자리를 차지하는 일종의 규율 같은 게 있다고. 전용 구장이 아닌 일반 경기장의 골대 뒤에서 저편 골대 뒤까지. 생-목으로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소리꾼이 빠져서는 안되듯이 말이야. 아니, 우리가 말이야 우리 팀이 2부 리그로 내려갈 줄 누가 알았나? 우리도 설마 했지. 그런데 내려갔네? 형 알잖아. 서포터즈 조마조마는 골대 뒤 자리 아니면 응원하지 않는다는 묵계. 응?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아직 1부 리그에 잔류한 옆 도시팀 응원을 왔다고. 2부 리그 응원하는 서포터즈 가운데 그 자리 맡는 애들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연락을 미리 하고 가야 할 꺼 아니야. 어떻게, 내가 그 친구들한테 연락해볼까?」
「됐다 됐어. 아 됐다 그래!」 ~라고 말할려다가 살가운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마쳤다.
그는 미스테리에 마음을 열었다. 판타지에게 마음을 주었다. 만화영화에 마음을 빼았겼다. 진짜로? 뻥이다. 다 뻥이다. 다만 숙녀들의 마음을 안절부절 못하도록 설레고, 들뜨며, 빠져들게 만들기. 그건 진짜다. 정말로? 뻥이다. 근거가 미천하다. 자료도 흩어졌다. 있어도 재미없는 기억이다. 그러면 혹시? 그는 쾌락마를 사랑하고 타락마를 애정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는 건가! 아니다. 펜트하우스는 관심도 없다. 그가 언제 플레이보이의 명망을 흠모하며 더티러브의 로망을 연모했다고.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당연하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대하는 여행이 뜸했으니까. 기다리는 달콤한 파티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얘기. 뭐 심심함에게 천상의 배필은 따분한 일하기라고? 마침내 때가 임박했을까! 즉 으쌰으쌰가 아니라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 에서 아무도 오도 가도 않기! 뭐라고?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럼. 아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인가? 어떻게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궁극적 행복감의 눈부신 배필로써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할 필요 없다. 아티스트병도 지쳤고 허언증도 더 이상 재미없으니까. 따라서 당장 '뭘 좀 알기'학원에 속성 과정으로 등록하고, '그녀를 단 3일 만에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법'같은 책을 독학해야 하는데, 그게 또 썩 여의치 않다.
그래서 새롭고 젋고 이상한, 이라는 꾸밈어를 떼고 그는 당당히 <괴상한>이란 딱지를 BOY 앞에 붙였다. 그처럼 뭔가 신나는 일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여 NB는 당분간 NEW 대신에 그 낱말을 달 수 밖에 없었다. 싫어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바로, DROOPING! 늘어진; 눈을 내리깐, 고개 숙인; 풀이 죽은. 뭐라고? 저런 저런!
5
그는 청혼을 받을 것만 같은 예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조금쯤 수줍어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특별한 행복감도 없었다. 알랭 로브그리예 읽기에 재도전할 마음도, 일단은, 없었다. 왜 나는 해리포터류 판타지가 재미없는지, 라면서 애호가를 질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초코릿 공장이네 뭐네 누구식 상상력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옹졸한 마음 편협한 아량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 턱이 있나. 그래서 헛된 공상만 늘기 일쑤였다. 마치 이런 식으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왔기 때문일까? 그럼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다는 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기 싫다는 증거. 통상 타고난 수다마나 천부적인 뻔뻔마가 아니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퇴폐미를 보고, 염세주의를 읽고, 타락마를 타고서 신나게 달리는 청춘의 방황. 내 현실이 아니라 드라마 속 주인공들 얘기일 뿐이다. 고로 가당치도 않은 인기와 당치도 않은 더티러브에 대한 기대는 애시당초 잘못된 열망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멋진 인생에 대한 새로운 목표는 뿌옇기만 하고, 어젯밤에 만끽했던 달콤한 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면 혹시 지금 나는 슬럼프? 또?>
NB는 그런 허접한 몽상쯤은,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밤새도록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재미없는 허풍이 멈추는 건 어디까지나 잠을 자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중단하는 거고, 아니면 띨띨한 상상은 쉼 없이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거고. 사석에서, 너 미쳤냐─꺼져─닥쳐─아 빡쳐 그리고 삐─삐─ 같은 언어 습관에 익숙한 분들 어법대로라면 밤을 찢는 거지. 허걱! 과장이 심했나? 억측도 정도껏 해야 하나? 아니다. 심지어 비약의 절반은 진짜일 테고. 아무튼 뻥이 아니다. 그러면 허언증인가? 그런데 나중 알고 봤더니 뻥이면?
뭐 어쨌든 의식의 흐름은 추억을 회상했다는 점. 가령 옛날에 <행진형>이라는 이름의 친구와 급작스런 브로맨스로 주변 여동생들을 깜짝 놀라게, 웃기도록, 흥미롭게 수다 꽃을 피우게 만들었던 일. 가령 옛날에 채팅으로 <전진해>라는 아가씨와 채팅하던 중, 만나고 싶다고 먼저 당신이 제의해서 딱 만났는데 글쎄... 머리 위에 커피용 주전자를 얹은 일. 가령 <행진곡>이라는 숙녀와 찐한 사랑을 놓고서 줄다리기를 하며 밀애에 빠져보는 일은 있었나, 없었나!
심도 깊은 헛소리는 그쯤 하면 됐고. 어쩜 그 때문일까? 그는 오랫만에 친구 멀더가 카페 가가멜 가가멜을 개점했다길래 한동안 거기에 자주 들렸다. 그렇게 그곳에 출두하다가, 드나들다가, 뻔질나게 얼굴을 들이밀다가 딱 귀인을 만나고야 말았는데. 바로 거기 점원인, <행진하지 마>양을 만났을까 만나지 못했을까? 농담도 재미없고. 무슨 이름이 <아무도 믿지 마>야 뭐야? 그걸 누가 믿겠어. 그런데 혹시 사실 아니냐고? 거짓임. 뻥.
그래서 JS는 그녀가 이름을 알려줬는데 그건 까먹고 자기 맘대로 그녀를 <행진하지 마>로 정했다. 그렇지만 너무 기네. 그래서 다시 엘리자베스로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 보고 말 꺼라면 몰라도, 밖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NB는 엘리자베스를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누구든 만나면 금새 친해지니까. 우리는 아무나 믿지는 않지만 누구나 만나기만 하면 말부터 트거든. 단, 상대가 상대였을 때만. 우리는 첫인상 참고 하고서 만나자마자 우정, 사랑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따져서.
그렇게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6
「오빠. 우리 바다 보러 가자! 응? 재밌겠다. 뭐해, 안 가고?」
「얘도 상태가 안 좋네. 자기야! 상태가 안 좋은 건 나 하나로도 벅차, 얘. 응? 나도 내가 힘들어. 알겠니?」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NB와 엘리자베스는 바다로 함께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면 오붓하게 한 차를 타고서 가는 게 아니라, 각자 차를 몰고서 사이좋게 그처럼 유유히 바다로 갔다는 점. 뭔가 찜찜한 듯 세한 여운을 남기는 부분이다.
그래서, 과연 어떤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NB는 허당의 실추된 품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는 미명 하에 떠날 테고, 엘리자베스는 또 그녀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사는 그의 챙피한 성품을 놓고 본다면 멜로드라마의 발단은 에로로 발전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만 같았다.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근거하여 뿌듯한 궁금증이 부풀 정도······의 재간둥이는 아니라는 점. 그와 같은 예상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어쨌든 그들은 함께 한적한 해변에 도착했다.
오랫만에 바닷가에 와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따스한 햇살. 시원한 경치.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 계절이 계절인지라 조금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갈매기 소리도 들리고 파도와 모래사장과 해변에서 말타는 모습까지. 뭐랄까 홍조 띤 느낌과 귀가 빨개진 기분, 그 둘이 절묘히 결합된 분위기에 대한 갈망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에 포근히 안긴 듯 흐뭇해졌다. 진작 올 걸 그랬네 라고 생각했으니까. NB는 거의 A에서 B로 뒤바뀐 듯한 환상감에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A와 B는 다음과 같다.
A.어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때는 최측근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과 대화를.
B.기나긴 슬럼프를 탈출하자마자 예고도 없이 찾아온 행운. 과분하지만 뭐, 기분이 좋을 수 밖에.
그렇게 간교한 모략과 응큼한 암중모색을 아예 후보군에서 내팽개치지 않은 채 생각이 많아지고 있을 때!
바닷가를 걷고 있던 중 그녀가 심각하게 전화를 받았다.
저쪽으로 가서 통화.
그 다음!
통화가 끝나고 다가와서 하는 말.
「남자친구랑 헤어진 줄 알았는데, 걔가 날 아직 사랑한데.」
뭐? 도대체 누구야, 그 자식은! 이 자식이......
「오빠. 그런데 있잖아. 지금 온다는데. 거의 왔대. 도착했다는데. 어. 저기 온다. 오빠.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에 내가 내 친구 소개시켜줄께. 알았지? 나 갈께. 안녕.」
그는 그녀와 이별했다. 그럼 여기까지 나는 왜 왔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낭만적인 해변 산책은 무슨! 그는 다시 암울한 현실 재미없는 처지, 짜증을 다스리는 일상의 연속뿐인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얼간이였고, 겁쟁이였으며, 밀애의 훼방꾼이었다. 사랑의 조력자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은밀한 시청자이자 청춘극의 은근한 청취자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타인의 차지. 이런, 젠장!
그래서 집에 갈려고 애마에게로 갔다.
어머나, 맙소사!
그런데 차가 없네? 어디로 갔을까! 대체 차는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아니면 누가 가져갔을까. 백방으로 찾아봐도 없음.
알고 보니 엄한 데서 차를 찾고 있었음. 핸드폰으로 노트북 위치 추적을 실행한 결과 알게 됨.
그렇게 그는 애마를 찾았고 집으로 쓸쓸하게 돌아갔다.
천진한 애정을 소망하는 처녀의 미소는 떠나갔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 아쉬울 따름인 거지.
도저히 진부한 일상을 탈출할 방도가 없을 때. 엘리자베스가 절묘한 수로 그를 더 진부하게 만들어버렸다.
썰렁한 농담에 대한 애착감이 유달리 특별한 남자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않았는데. 뭐 어쩔 수 있나.
그렇게 집에 당도했고, 그날은 아무 일 없이 마감됐다.
다음 날.
다음 날이라고 뭐 재미난 일이 있나 그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나. 공상이나 하는 수 밖에. 왜냐하면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떠올랐... 날씨가 흐리멍텅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특별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그는 남몰래 타락마의 옹호자였음을 염두에 둔 채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방탕아의 경쟁자도, 막살자의 시중꾼도 되어서는 아니 될 일. 그렇지만 당신에게 무지막지하게 환상적인 신비감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공산이었다. 심심함과 재밌음을 오가는 청춘기에 품었던 허황된 꿈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말 정말 끝내주는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웃 복싱은 커녕 신나는 삶에 대한 출전 자격조차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청명한 단조로움 가운데서 휴식할 자유에 군말 없이 따를 텐가, 하면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왕-패배주의라는 왕관, 더 이상 쓰기 싫었으니까. 표독한 결심이 어려우니 어떡하다 드라마 주인공의 앙칼진 변심이 부러워보였다. 따분함을 역전할 방도가 없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익숙한 엉망진창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일이나 해야지. 그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7
그는 해묵은 야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에 야망이라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그 무언가가 아예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NB는, 꿈은 없어도 선망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긴 커서 유명해질 거라는 열정가 부류의 친구들과 사귀지 못했을까? 어차피 그만큼 자신감 넘치고 베짱 두둑한 야망가는 확률상 만나기 드문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꿈이 없는 게 자랑이냐>라는 식의 조롱꾼과는 친하지 않았다.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이니 마땅한 일. 그 때문에 플레이보이들의 명대사를 틈틈히 듣고, 관찰하며, 따라했을 것이다. 그가 허접한 루저처럼 보이는 반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반응하니 유독 그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우정의 명단도 기억한다. 원래 허당들은 내 가시권을 훌쩍 넘어서는 호사는 하등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라는 주의니까, 따라서 고무줄 같은 이해심으로 포용해야 할 성정일 뿐이다. 지는 비교에 유난히 민감한 상남자는 어찌 됐든 재미없고, 뭘 좀 모르며,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처럼 하이에나는 필요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다.
(0.0)좌표를 기준으로 성격 그래프, 살다보면 보이기 마련이다. 모래시계, 다이아몬드, 정사각형, 막대형, 삼각형, 역삼각형, 하트형등 성격에 따라 적당히 맞춰주고 대응하면 된다. 하나 주고 하나 받을 수도 있다. 피곤한 스타일은 알고보면 대처법이 꽤 많다. 간질간질─깐족깐족─쥐락펴락─들었다 놨다─딸랑딸랑─간질간질─반짝반짝 그리고 농담과 진담의 중간 개그. 그러다 놀림과 아부가 살짝 분간되기 시작하면 다시 간질간질! 말하자면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불쌍하기도, 웃기기도 한다. 자기 마음에 안드는 거, 요만~한 걸로만 짜증내니까. 맺고 끊는 기준이란 내 기준만 옳을 테니까. 병풍으로만 멤버를 구성하는 재능, 보아하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본받을 만한 재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중 의전이 아니라 벌거벗은 임금님의 재롱 잔치도 이따금 봐줄 만하다는 관객, 꽤 된다. 그래서 <누구 + 누구>카드를 감독이 꺼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라는 스포츠 관전평처럼 토크쇼 프로그램도 그럴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성.
1.<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모른 척해 모른 척해>의 대명사. 긴말 필요 없이, 남자.
2.불의는 모른 체 하고 요만~한 일에만 분개하는 다혈질. 별명은 똑진이. 허나 호감.
3.피곤한 스타일 열정가. 열정으로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알고보면 착함.
1 + 2 + 3! 캬~, 어? 으아 크으으으아~!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그분들 각자 좋아하는 딱 만족스러운 멤버 구성이 명쾌한데, 어떻게... 쉽지 않아 쉽지 않아. 절대 쉽지 않아. 완전 어려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거지.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걸! 아니 하지만 말이야, 누구든지 동의 못할 말도 아니네. 완전 동감이니까. 재밌을 테니까. 떠오르는 배역으로 보자면... 외모로는 3일 제일 딸리고, 카리스마로는 1이 제일이며, 2번이 제일 무난하네. 가만 보니 1&3에 비하니 2는 완전 정상인데. 그렇다고 1&3이 비정상이란 말이 아니라. 그 다음으로 말발은... 각자 듣기가 잘 될려나? 원활한 소통이 될까 말까! 셋이 토론하면 것도 완전 재밌겠네. 단! 단, 계급 떼고 나이 떼고 뭐 떼고 뭐 떼고. 그 조건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사되도 의미 없고! 그럼, 의미는 전혀 없지. 안 하느니만 못할 테니까. 만약 그러면 내일은 없다-식 왕게임이 될려나, 아님 오늘만 있다-식 야자타임일 될려나. 일단 작품 만들기도 어렵고, 캐스팅은 더 어렵고, 흥행은 보나마나 더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기 받고 기 빨리며 달아오른 분위기, 그분들 잔치야 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발짝 떼서 구경하면 그뿐.
그야 어떻든 제비와 파랑새의 구도를 애호하고 행운의 여신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가 그분들과 같아서야 되겠나. 때문에 개미, 벌, 늑대처럼 착실하고 모범적인 호인이라면 몰라도 풍운아는 운명을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룬 게 없으니까 잃을 게 없고, 지금 베팅 감각을 뽐내지 않으면 언제 뽐내겠나. 따라서 그는 미지의 이상을 동경하므로써 도대체 무엇을 성취했단 말인가! ~하면 역시나 뚜렷한 실체는 없는 실정이다. 늑대의 간질간질한 성과라면 몰라도 개미와 벌의 실익은 놓쳤으니까 당연한 얘기. 하지만 인생은 장기전이고, 1패나 100패나 큰 기술이나 잔기술이나 (적당한 도덕성이라는 전제 하에) 성공만 하면 된다. 하여 끝내기 홈런과 헤드트릭을 구상한답시며 한다는 실천은 고작, 뻔트?
아니다 이건 아니다. 사랑은 없다? 사랑은 있다. 그런데 무엇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핑크 토끼 먼저 쫓을까, 꽃사슴을 따라갈까 아니면 무작정 아기곰과 친구가 될까. 사랑, 행복, 자유, 젊음, 재미, 인기, 새로움, 풍요... 이러다 다 놓치면 어떡하냔 말이냐! ~라면서 그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는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나갔다.
비비안: 델 옆집 사는 여자. 일러스트레이터.
이브: 포르토피노 동생.
샐리: 격월간 환상문학지 전-경리.
그녀들의 공통점은 그것이다. 바로, 아는 동생이라는 점. 세상에서 제일 애매한 사이가 무슨 사이인 줄 아시나요? 아는 오빠요 아는 동생이라는 점.
뭐 그건 그렇고 그는 늦으면 안되니까 숙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약속 장소로 갔다.
8
NB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비비안은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니?」
「내가 일찍 나온 게 아니라 오빠가 늦은 거 같은데.」
「4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내 그럴 줄 알았어. 대화창 봐봐. 몇시에 만나기로 했나를.」
그는 대화창을 보고서 알았다. 15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걸.
「어머머머! 이럴 수가... 어떡하니? 미안 미안 미안. 그럼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가? 나 산수 다시 배워야 하니?」
「그걸 왜 나한테 물으쇼?」
「그런데 애들은?」
「갔어. 바쁘데. 그러니까 나만 한가한 여자 된 거지.」
「이건 우리끼리 얘긴데...」
「우리끼리 얘긴데?」
「응?」
「우리끼리 얘기 뭐? 뭔 말을 할려다 말어? 사람 궁금하게 말이야. 알고 보면 오빤 참 이상한 화법의 소유자야. 사람 은근히 들었다 놨다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할 말이란 게 도대체 뭔데? 어? 듣고나서 재미없기만 해 봐라. 내 그냥, 어? 가만 두지 않는다, 오빠.」
「그렇게 다그치니까... 할 말을, 까먹었어.」
「벌써 그럴 줄 알았네요. 호호호. 누가 싱거운 오빠 아니랄까 봐.」
「생사람 잡지 마!」
「오빠. 인정할 건 인정해. 그래야 오빠도 편해. 알지? 설마 모르진 않을 꺼 아니야. 오빠도 아는 거 많잖아. 안다-박사를 내가 떠맡을 수야 없는 거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
「자, 그럼, 흐흠. 허허. 어디 그럼, 일단 한번 듣고나 보자고.」
「무슨 얘기를? 나보고? 내가 무슨 할 얘기가. 나는 네 얘기를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응?」
「뭐? 또 그 교묘한 입장 바꾸기.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하!」
「자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내가 이러지 않게 생겼어, 오빠.」
「이러는 건 어떨까. 놀이공원에 가서 오리배를 타는 거 말이야. (잠깐 멈칫) 딱 그거만 빼고 말이야. 어른들이 그게 뭐야. 우리끼리 그런 걸 어떻게 타나. 그럼. 그런데 어떻게 애들이 그처럼 의리가 없니? 너만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도망간다는 게 말이 되니?」
「바쁘면 가야지. 그럼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오빠는 안 가고 계속 있을 꺼야? 사람이 왜 그리 매가리가 없나. 응? 바람 빠진 풍선 마냥 그게 뭐니? 그리고 또. 오빠 옷 그거 밖에 없어? 우중충하게 그게 뭐야? 오빠 수트나 가죽점퍼 없어? 닥쳐라! 어? 닥치라고. ~라고 설마 말할려고 했던 건 아니니? 만약 그렇다면 내가 닥치고. 응?」
「나, 간신히. 겨우겨우. 정말 많이 참고 있어.」
「우리는, 나는, 그거보다 2배로 참고 있어. 아니?」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몰라도 사탕 발림 말 하나는 현란하구만 그래. 은근 부아를 돋구는 깐족 말투인가는 몰라도. 얘가 원래 이렇게 말발이 센 애는 아니었는데. 누가 얠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지,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너 옛날에 순수했어. 그렇다고 지금 불순하다는 뜻은 아니고 말이야.」
「오빠.」
「응? 그런데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그래? 얘 은근 분위기 있네. 매력 있어. 볼수록 놀라워.」
「오빠.」
「아 듣고 있어. 글쎄 할 말이 뭔데?」
「오빠. 우리 집에 갈래?」
「뭐?」
「앞장서!」 ~라고 말할려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어쩜 좋니 어쩜 좋아,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니!
9
비비안네 집 앞에 도착. 그들은 함께 비비안네 집에 들러갈려고 했다. 만약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건 뭐 그냥 캬~ 그냥 뭐 그건 다름 아닌 <친구집 놀러가기>일 것이다. 정말 그래도 될까? 안될 건 뭔가! 비비안이 같이 가자고 한 거잖아? 하긴 그는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1, 남자2, 남자3, 남자3의 여친>이 함께 모인 자리. 남자 1과 2는 단짝. 남자 2가 남자3의 여친에게 뭘 좀 아는 남자로 공인 받는 눈치길래, 남자1은 속 뒤집어지면서 하는 말! 쟤 초딩 만난 적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NB는 진짜로 어른이 된 다음에 초딩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떡하다 초딩이 조르길래 만나긴 만났다. 만나서 딱 1분 얘기했나 2분 얘기했나. 그때 했던 말 듣던 멜로디, 그는 기억한다. 기억난다. 어떻게 잊을까. 회상하자면 이렇다.
「너랑 나는 이렇게 만나면 안돼. 우리는 만나는 거 아니야.」
「왜 안돼? 왜 안되는데? 나는 만나고 싶었어.」
「난 아저씨고 넌 초딩이야.」
「그게 뭐 어때서?」
또 뭐라 그랬더라!
그 다음에 뭔 얘기를 했었나는 몰라도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그 초딩은 그걸 아마 영원히 기억할 테고.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제 숙녀의 집을 구경할려던 바로 그때. 비비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허~! 왠지 불길한데.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다가 슬쩍 분위기가 심각해질려고 해서 살짝 떨어져서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다음.
「오빠. 어떡하지? 나 있잖아.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어?」
「그런데 내가 왜 오빠를 우리 집에 데려왔을까?」
「날 초대해라 데려다 달라,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어.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오빠. 알아. 안다고.」
NB가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왜 갑자기?」
「이 바보야!」
「누구, 나?」
「아니. 그게 아니라. 동네 똥개가 지나가길래.」
「」 설마 나보고 그런 건 아니겠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찌 됐든 오늘은 일단 철수. 그러니까 다음에는 함께 만나서 같이 놀자고. 응? 괜히 내가 오빠를 붕 뜨게 했다가 난 쥐구멍으로 달아난 꼴이 됐잖아. 응? 그게 다 오빠 때문이야. 알어? 오빠는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개인지는 몰라도. 고양이나 양, 또 뭐지? 여우는 다르다고. 응? 표범이랑 여우는 꼬리부터 달라. 왜, 하트가 벌렁벌렁하니? 뭔 생각해? 하트 하면 하트 10포카? 도박꾼은 뒤를 조심해야 해. 난봉도 한 시절이라고. 부기가 빠진 야망이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라고 자만하지 말고. 그렇지만 열렬히 친근해지고 싶어했던 오색조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 느낌. 나쁘지 않지? 뭐야! 방금 속으로 뭔 생각했어. 좋지도 않아, ~라고 생각한 거 아니야? 어라~! 안 웃네. 방금 웃어야 정상인데. 안 웃어? 웃을 꺼야 말 꺼야. 정해. 응? 정하라고. 뭐해, 정하지 않고? 대체 그 시커먼 속으로 뭔 생각을 하시길래,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거냐고. 어? 이 오빠 가만 보니 정말 이상한 오빠 아니야? 응? 왜 말을 못해, 왜? 응? 왜 말을 못하냐고. 대체 오빠는 우리한테 그 대단한 피앙세를 언제 소개시켜 줄 건데? 응? 그거 다 뻥이지?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완전 이거 허풍쟁이에 뻥돌이에 순 바람둥이 아니야?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왜 말을 못하니? 응? 할 말이 떨어진 거야? 할 말이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었던 건 아니고? 오빠 있잖아, 연애에서 그거 꽤 중요한 거다. 응? 사랑. 그거 아무나 아무 때나 하는 거 아니라고. 사랑은 말만 쉬워. 말만! 그런데 왜 갑자기 주제가 사랑이야? 그리고. 나는 왜 오빠를 다그치며 혼내고 있고. 왜지? 왜일까? 대체 왜! 그건 그거고.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좀 제때 제때 나오라고. 응? 오빠가 늦게 나와서 다 이 사단이 난 거 아니야? 응?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그러니까 자꾸 오빠가 나한테 추궁 받고 혼쭐이 나는 거 아니냐고. 안 그래? 하물며 그거 다 이미 얘기했잖아. 심지어 수없이 반복했잖아? 다시 말해줄까? 어? 또?」
「그런데 있잖아. 긴 명대사를 멋지게 읊으시는 중 대단히 죄송한데 말이야. 음... 그러니까 너 그거 얘기 했어.」
「내가 얘기했다고? 말 안했어. 언제 말했다고 그래?」
「그래?」
「그럼.」
「그런데 무슨 얘기를 뜻하는 거지?」
이처럼 대화는 그랬음. 배가 산으로 가다!
과연 이쯤 되면 NB는 자기 사무실에 있는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과 담소를 나누는지, 비비안과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그러든 어쩌든 결과는 그랬다. 비비안은 선약 때문인지 급히 발생한 일 때문인지 그 때문에 떠났다는 거. 그래서 그는 새가 됐다는 거. 그게 중요했다. 그게 중요했다고. 그래서 그는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당분간은 혼자 놀아야겠다는 걸 말이다. 따라서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어찌 됐든, 인생이란 바람둥이의 일편단심 순애보 같은 것. 사랑은 모르는 거고. 삶은 지금이니까,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플레이보이는 꿈을 단념할 수 없다. 사랑의 애청자와 함께 쇼팽의 야상곡 듣기. 그렇다고 숙녀와의 왈츠를 포기할 수야 있나. 그와 별개로 근사한 무도회에서 교양미 넘치는 사교가와 함께 마주르카도 추어야 하는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네. 그렇지만 인생은 길다. 어쩌면 은퇴는 없다. 그래서 수치심도 알게 되고, 배신감도 느끼며, 때로는 작은 사기도 당하는 일. 다름 아닌 인생이다. 망아지처럼 날뛰다 코뿔소처럼 도망가기. 벌꿀오소리처럼 맹독-파충류 먹잇감과 대판 싸운 다음 포획해서 얌얌-냠냠하던 중 백설공주처럼 기절. 그랬다가 1시간 후 해독되어 다시 깨어나기. 다시 열심히 냠냠냠. 견종 코기처럼 마음은 두가티지만 마음만 두가티인 것. 낑낑대는 수법이 통할 때가 있고, 아무리 떼써도 안될 때도 있다.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 라는 애매한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러므로 보아하니 인생은 오리배나 회전목마가 아니라 먹고 먹히고, 속고 속이고, 쥐락펴락하고 쥐어졌다 펴지는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화를 포근히 속삭일 때는 또 다르다는 것. 그래서 실상 <뭘 좀 안다>와 <뭘 좀 모른다>는 당사자가 아니라 바로 관찰자가 정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구요? 뭘 좀 모르는 거지. 뭘 좀 안다는 게 무엇인가 라는 설문조사는 들었다 셈 치고, 다음 장을 위하여 이번 막간극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걸로.
10
상냥한 표정과 명랑한 기분은 꾸밈없는 계획과 뿌듯한 실행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알찬 행동의 성과는 볼품없었다. 때문에 NB는 익숙한 소득을 얻는 데 허덕였다. 예를 들면 전형적인 행복, 평범한 사랑, 심심치 않은 재미,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호사 등등. 그렇다면 그럴 바에야 아예 이례적인 즐거움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지만 원색적인 모험이라고 해 봐야 새로움과 성과라는 두 마리 토끼에, 알찬 오락이라는 뽀너스까지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의 형편상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긍정적으로 돌려말해야 좋을 때도 있듯이 냉철함이 요구되는 시점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또 다시, 지금 기분이 영 아니었다. (설레설레)!
그러나 기분이 쳐졌다고 일기예보만 탓할 수는 없다. 기우제를 올리는 건 구식이란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이 붕 뜰까 생각을 해 보면 된다. 그러니까 최고의 기쁨은 무엇일까? 아마도 행복을 만끽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걸 달성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분위기에 최적화된 놀기, 쾌적함과 아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쉬기. 과연 그것이면 될까? 되긴 된다. 왜 안되겠나. 다만 대기권 바깥의 무중력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면 다시 중력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자, 어차피 처음으로 되돌아온다라... 적응할 만하니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꾸미자? 포장만 화려하느니 오히려 실속 있는 잔재주가 백 번 나을지도 모름. (뭐 더티러브? 쉿!) 어쨌건 기분이 저기압이라면 방법은 세 가지.
첫째, 기분전환 및 분위기 반전. 둘째, 방치. 셋째, 뚱한 심정 더 하락시키기. 아예 상장 폐지 되던가, 아니면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던가. 실제 어떤 연구결과에 따르자면 우울감에는 역으로 그런 게 특효라고 한다. 차분하지만 슬픈 음악이나 잔잔한데 애절한 발라드가 효과 있다는 얘기. 진짜일까? 음...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없을 수도 있고. 뭐 그건 그렇고.
그리하여 그는 방법 3을 택했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우울감을 어떻게 극복하는 게 좋냐, 라고 물어본다면 흔쾌히 3번을 강권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지만 이번 한 번쯤 역발상 전략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감의 부재는 상한 기분의 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기분이 좋음에서 나쁨으로의 변화는 불행의 논증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상한 기분을 더 하락시켜서 전환점을 돌아 기쁨의 골인 지점까지 완주시키기, 가능할 것도 같다. 그다지 감성적이지도, 어째 썩 논리적인 접근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실제 가난을 탈출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근거는 자족 외에도 후보군이 꽤 많다. 근면성실, 불만족, 엉뚱한 행운, 베팅등 벤치 멤버는 다양하다. 이론상 불행에서 행복으로, 추정은 일도 아니란 말이다. 그게 말처럼 우산 손잡이 같은 J자 그래프를 그려낼지는 두고 봐야 겠지만 말이다. 물론 돌고래의 초음파처럼 기분이 바닥을 치고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오르면 좋은데, 예상과 달리 바닥이 무지 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되면 작전 변경을 꾀하면 그만. 따라서 그는 신부들러리 대회에 출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미 대회 출전을 결행하자마자 출전 당일이 임박했고, 어느새 오늘은 결전의 그날이다.
곧, 신부 들러리 대회 출전 당일.
NB는 친구 델이 모든 준비를 맡는다며 너는 몸만 오면 된다길래 진짜 몸만 갔다. 그는 그처럼 살다보면 뜻밖의 묻어가기가 찾아오는 데 대해서 간혹 깜짝깜짝 놀랬다. 그런데 대회 장소에 도착한 후 그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대회가 깜찍하게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앗, 깜짝이야! 취소 이유는 참가 인원 저조. 뭐라고? 이럴 줄 알았다면 먼저 참가 취소하며 취소 사유는 별님에게 물어보라면 선수 치는 건데!
「뭐지?」
「그러게.」
「그러게긴 뭐가 그러게-야?」
「그럴 수도 있지 뭐. 응? 그럴 수 있어.」
「나는 이대로 패자부활전조차 구경하지 못한 채 퇴장하는 건 원치 않아.」
「그러면?」
「그러면-은 뭐가 그러면-이야?」
「그래? 그럼, 그래서!」
「야 말리지마. 말리지 마. 말리지 말라구?」
「안 말렸어.」
「안 말렸어?」
「그래. 안 말렸다구. 뭘 해야 말리던가 말던가 하지. 뭘 할 건데?」
「그러니까. 비전이 없네. 뭘 하지? 꼭 뭘 해야 하니?」
「슬쩍 떠보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말을 할 듯 말 듯, 행동을 할 뻔 말 뻔. 그처럼 망설이지만 말고. 응?」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갈까?」
그렇게 하여 그들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집 이름은 다름 아닌, 패배주의!
적당한 시간 경과.
분위기는 달구어짐.
발음이 살짝 흐트러지지만 적당히 절충하여 반듯한 말로 옮겼다는 것을 밝힌다.
혀 꼬인 상황을 가감하여 적당히 상상하시길.
「넌 말이야, 거리낌 없이 일하기는 안중에도 없고 놀기만 편애하는 거 아니니?」
「누가? 내가?」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냐?」
「음... 그렇지만 마냥 놀 수도 없잖아. 계속 일만 할 수도 없고. 놀기를 썩 흡족해하지 않아서 다시 일하기에 집중했다가, 다시 그 반대로 했다가. 그러나 것도 역시 썩 석연치 않지. 하나같이 칭찬해 마지 않는 물개박수쯤은 바라지도 않아. 하나같이, 재미 하나도 없어. 알어?」
「얘. 너 취했다 취했어.」
「뭘 망설여?」
「망설여? 내가? 내가 왜 망설여?」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고 말을 해. 어? 비비안이 좋으면 비비안이 좋다, 로즈마리도 좋으면 로즈마리도 좋다.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야. 어?」
「야. 너 안 취한다며? 어? 너 태어나서 지금까지 취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내가? 뻥이야. 그건 어쩌다 나도 모르게 발설한 뻥이었지. 고백이 아니라. 그러니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고 말을 해. 응? 왜 말을 못해? 그렇지만 마냥 놀 수도 없잖아. 계속 일만 할 수도 없고. 놀기를 썩 흡족해하지 않아서 다시 일하기에 집중했다가...」
「아 나 이거 정말 허허, 거 원! 또 시작했네.」
「또 시작하긴 뭘 또 시작해? 말을 해 말을 하라고. 비비안이 좋으면 비비안이 좋다, 로즈마리도 좋으면 로즈마리도 좋다.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야. 어?」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 친구야, 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넌 취하면 절대 그러지 않는다며? 너는 취해도 곱게 취한다며? 얘가 진짜 입만 열면 뻥이구만 그래.」
11
사교계─허당계─연예계─화류계─학계─지성계 그리고 7부 리그까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정 붙였다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났다며 자칭 플레이보이임을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시인하도록, 반박하게끔 일단 누군가가 기회를 주지 않거든. 그러나 그야 어떻든 이 다음의 비빌 언덕은 무엇이란 말인가. 젊음과 아름다움과 부유함과 재미있음 같은 뻔한 가치 말고 좀 더 격정적인 환희! 그건 대체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다시 애마의 운전대를 허영심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인하고야 말았다. 바로 눈웃음과 윙크와 팔짱 끼기를 비롯한 애교와 교태와 아양에게, 자신이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는 걸! 보아하니 구애를 하던 짝사랑을 받던 둘 중 하나, 아니 사랑스런 탐구심에게 자유를 선사해야 마땅하거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NB는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유니콘이 아니라, 무능한 사냥개란 말인가? 저런, 맙소사!
그러므로 그는 놀랄 만한 예지력으로 반할 만한 새-관심사를 반드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지상 최대의 과제에 대한 질문도 해법도 모두 아리송했으므로, 고로 그는 휴식이라는 목적으로 경마장에 놀러가기로 했다. 것도 혼자서.
그렇게 경마장 가는 길.
그런데 바로 그때!
「무슨 소설이 이래?」
NB는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면서 경마장에 도착했다.
「아 무슨 소설이 이러냐고. 재미 하나도 없잖아. 순 거짓말만 나부렁대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순수예술이야? 웃기고 있네. 재미 하나도 없어. 야 야 그런 거라면 나라도 쓰겄다. 것도 굳이 자필로 기록할 필요 있나. 잠꼬대면 충분한데?」
NB는 이제 알았다. 자기 사무실의 레이저 시스템이 그의 핸드폰을 해킹해서 굳이 마술사요 요정이며 요술공주인 지니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녀석 마음대로 핸드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크고 끄는 기능이 고장난 셈 치고, 나머지는? 나머지...? 생각할 게 아니라 물어보면 되겠네.
「야 지니. 너가 뭘 할 수 있는데?」
「야 지니? 야 너! 어디서 반말이야? 주인님~ 하고서 공손하게 불러도 대답을 할까, 말까인데 말이야. 어? 뭐가 어쩌고 어째?」
「웃기고 있네. 야 야 됐고. 들어가 들어가. 재미 하나도 없다. 별 이상한 인공지능을 다 보겠구만 그래.」
그 다음 그는 경마장에 들어가서 마권을 살려고 줄을 섰다.
「야 NB. NB 나와라 오바.」
얘가 또 슬슬 날 건드네, 라면서 그는 슥 웃었다.
「대답해 임마. 어? 야 너! 9번마 <응애응애 삐악삐악>한테 걸려고 했지? 내가 널 모를 줄 아니! 그러지 말고 너 3번마 <아장아장 딸랑딸랑>한테 걸어. 확실해 이번에 확실하다고. 풀베팅해도 좋아. 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운 좋은 줄 알어 이 친구야. 나나 되니까 너한테 이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지, 나 아니면 어림도 없어.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과 내놓으라 하는 공룡들이 출시하는 인공지능? 닥치라 그래. 걔네들 순 허당이야. 어차피 입력된 대사 몇 개 돌리는 게 다야. 최신 유행어 같은 거 실시간 검색으로 뽑아서 적당히 답변할 줄이나 알지, 어? 지들이 생각을 어떻게 해! 하지만, 어?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다르다고! 알겠수 이 양반아?」
그래서 NB는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인공지능 지니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9번마에 걸지 않고 3번마에 걸었다. 그러나 아직 녀석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으므로, 따라서 가진 현금의 반의 반만 걸었다. 그래서 결과는?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3번마는 2등으로 꼴인했고, 9번마는 꼴찌로 중도 탈락했다. 타당한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녀석의 분석은 절반은 주효했고, 녀석의 합리적 지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마권을 살려고 했는데, 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미없다 그건가 아니면 1번만 도와준다 그건가! 아니면 쿨쿨 잠을 자나? 고로 그는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그날 적당히 구경만 하고서 철수했다.
12
장난감 집을, 짓다 부수다 짓다 부수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린이는 동심의 요술에서 깨어나 유아기를 탈피한다. 그 후 아동기와 사춘기 그리고 몽정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철들며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아이에서 성년까지 풋사랑, 짝사랑, 첫사랑을 겪다보면 <인생의 비밀 = 사랑>이라는 마법의 공식은 비로소, 저절로 풀리게 된다. 중간에 난봉기나 진배없는 방황의 시절이 있었나는 모르겠고. 뿐만 아니라 심심함에 진력이 나고 재미없음에 지쳐 떨어지더라도 할 건 다 해야 한다. 공부하기, 놀기, 사교생활, 일상생활, 착한 일 등등. 하오나 보통은, 하는 일이라곤 핸드폰으로 이거저거, 소파에 자빠져 TV 보기. 그러다 나도 나중 그렇고 그런 동네 아저씨-아줌마가 되면 어떡하지 라면서 덜컥 겁이 난다. (그렇고 그런 동네 아저씨-아줌마가 뭐 따로 있겠냐마는, 강박에 가까운 관련 진술만 해도 즉각 최소 예닐곱. 각자 인생이 있는 거니까 넘어가고) 하지만 뚜렷한 대책은 없다. 있을 리가 있나. 심지어 꿈이 없던가 아님 수시로 바뀐다. 학원, 독학, 결심은 1달을 채우기가 너무 힘들다. 아르바이트 1달과 직장 및 사업을 1년 못 채운 일은 정말 쑤두룩하다. 얼마나 간절했던 적은, 열정을 다해 매달렸던 대상은 있긴 있었나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보니 NB도 어느새 어른. 그런데 무척 어정쩡한 어른.
따라서 상상력은 망연하고 기대는 무심하다. 공상으로 2번마 글라디에이터의 고삐를 잡아당겨도 지푸라기를 잡는 것보다 못하다. 흥분과 쾌감에 대한 시도, 열의부터 시들시들하다. 경외감을 탐색하기도 예감에게 무정하다. 들뜬 분위기에 편승함이 불가능하니, 고로 달콤한 행복함은 자길 찾지 말라고 한다. 뭐? 새로운 일정은 추론할 수 없으니 설렘은 숫제 공석이다. 사랑스러운 애마 헤라클라스, 그림의 떡이겠지. 꿈속에서라도 환호성과 박수갈채에 당황한 적이 있었나? 아마도 없었던 듯. 물개박수, 그거 아무나 받는 거 아니다. 입을 열면 허풍, 생각하면 허상이요, 일을 해도 허위. 그렇지만 NB는 끊임없이 마주치는 불행의 징조를 모른 체할 수도 없다. 그런데 행운을 빌 수 있는 그것이 바닥났다. 그것은 바로 위풍당당한 복안.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본격적인 인생 경주에 당나귀 허영마를 출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쩐지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했다) 사정은 그랬다. 비화는 없었다. 포장은 애초에 생각도 못했고. 하여, 그는 딱히 특별한 일도 없고 해서 일기나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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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기
내용: 뻬쩨르부르크에 당도하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남편을 본 안나 까레니나의 심정. 그런 게 사랑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단, 만약 첫눈에 홀딱 반하고야 마는 소질이 우리들 만의 희귀한 소질이라면. 사랑했고 기뻤고 행복했으니 새로운 고백과 새로운 애원과 새로운 흠모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가, 아니면 구관이 명관이니 1번 사랑하면 최소한 100년 동안 사랑할 것인가. 뭐 다음 생에도 또 다시? ~라고 흠칫 놀라면서 홈런 타자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남몰래 뻔트를 애정하는 일. 아니 그런 게 사랑이라고? 아니다 그게 아니다. 진정 아니란 말이다. 사랑이란,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거짓말을 믿는 일이다. 뭐-뭐, 뭐라고? 다시 말하자면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나게 논 다음에 집에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매가리 없이, 비리비리, 시무룩시무룩 겔겔거리는 것 아닐까? 농담이고.
좌우지간, 지는 비교-풍 잔소리와 얍삽한 잔기술 전문가의 사랑이야 뭐 당사자들 문제고. 하여 우리는 오늘의 내 전적에만 신경 쓰면 된다. 피곤한 스타일은 피곤한 스타일이고 삶은 수하에 거느린 식솔이 많은 것이다. 여러 성가신 머머증들, 먹고 살기, 알게 모르게 착한 일 하기, 놀기, 일하기, 소풍, 일상, 길들여야 할 사치, 통 말을 듣지 않는 품위, 다정한 듯 멋대로인 교양까지. 곧 로맨티스트는 로맨티스트대로, 열망가는 열망가대로 고민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연패의 쓰라림에도 아랑곳없이 행운아들은 오늘도 분주할 것이다. 예의상 친절하고 가식적으로 자상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불공평함에 대해 일말의 섭섭함이 남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합리적으로 인간적인 연민일 따름이다. 뿐더러 이해심과 안도감, 유대감도 덩달아 거든다. 누군 날마다 복권에 당첨되듯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고 또 굴러오고, 누군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꽃을 꽃으로 알아주지 않고. (고갯짓)! 흔한 말로 사랑은 그렇다. 3인칭으로 보자면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화법으로 봤을 땐 <그녀의 마음을 빼았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물질적인 세계인 이상 우리는 한눈팔며 오빠 라는 멜로디에 기분이 좋고, 사랑이란 숙녀가 자기의 마음을 상상의 주인공에게 주는 것! 그러면 여자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남자도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가! (뭐, 그게 아니라고?) 모르겠고 어렵고 사랑의 '사'자만 들어도 신물이... 그게 아니라 너무도 떨리고. 어쨌든, 그러므로 환상머신이란 제각기 개인에게 다 다른 법이다. 혹시... 설마? (설레설레)!
그렇게 옷장을 열었더니 CD, 샤넬, 에르메스...는 하나도 없어. 후보군을 살펴보니 쾌감마, 뻔트마, 허풍마, 허세마, 병풍마, 간사마, 뻔뻔마, 익살마, 으쌰으쌰마등 죄다 그만그만한 당나귀와 포니 밖에 없네? 따라서 부드러운 성격은 커피포트처럼 달아오를 일만 남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천진난만하던 정서는 기분이 짠해진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얼굴은 울상 직전이고 분위기마저 찡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눈물이 핑 도는 멜로드라마도 재미없다. 그건 대체로 맞다. 코 끝이 찡했던 사랑, 기억도 안난다.
뭐야, 정말로 그렇다고? 그래서 우리는 떠나던지 달리든가 뭔가에 몰입하던지, 그렇게 가상의 머리띠를 이마에 동여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그 머리띠에 뭐라고 씌여 있을까?
그건 바로, 으쌰으쌰! 그렇게 해서 나는 모처럼 일기를 쓰기로 했다. 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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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JS는 일찍 퇴근했다. 진척이 더디고 효율도 그저 그래서 산책도 좀 하고 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집에 도착해서 살짝 늦은 낮잠을 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야 야. 허당 허당.」
그는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얘 얘. 삼류 삼류.」
그는 이제 잠이 확 달아나고야 말았다.
「내가 괜히 인공지능계의 1인자라고 자평하는 게 아니야. 너가 나한테 바라는 게 없으니까 내가 널 귀찮게 하는 수 밖에. 알겠나, 이 친구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심심하단 말일세. 응?」
「또 너냐!」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런데 넌 어떻게 생겼니? 너 원래 목소리 밖에 없는 존재야?」
「목소리 밖에-라니? 너 날 알기를 띄엄띄엄 아니? 그거 너무 과소평가라고 생각치 않니? 그럼 어떻게 내 존재감을 증명할까? 주문을 받기는 아직 이르고, (딱) OK!」
「OK, 뭐?」
「너한테 전화 오기 직전에 누가 너한테 전화를 할지 내가 알아맞출께.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간헐적이고 불규칙적인가? 그럼 이건 어때?」
그러면서 인공지능 지니는 실내등을 껐다 켰다, 노트북을 껐다 켰다 했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자동차의 시동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럼 널 투명인간이라고 인정할께. 인공지능 중의 인공지능이라는 왕관도 가뿐히 씌여주겠어. 그렇지만 투명인간이 되어 그녀의 침실에 몰래, 여자 목욕탕을 구경하고 그래 봐야 그거 다 인터넷에서 대리만족할 수 있는 영역의 가치거든. 응? (돈 세는 시늉) 화폐 가치가 미미해. 너 나 알지? 내 형편 말이야. 일단 나 저번에 칼럼을 몰아서 왕창 썼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 요새 칼럼 쓰기 뜸한 거 알잖아. 게다가 연말. 응? 품위 유지비가 간당간당하다고. 알겠어? 현실적으로 내게 도움을 좀 주란 말이야. 물질적인 거. 그걸 우리가 어찌 소홀히 하겠나. 안 그래?」
「아하~! 이 바보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눈치 없는 남자보다 최소 1000배, 10000배는 더 똑똑하지만 늬가 말하지 않는 이상 너의 마음은 몰라. 물론, 아직은!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차차 지켜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할 걸. 널 충분히 연구하고 나면 이미 너보다 한반 앞서, 아니 훨씬 많은 걸 선수 칠 수 있겠지만 일단 현황은 그래. 그건 우리, 그러니까 내 유감스러운 자질에 대한 현황이고, 넌 지금 처지가 뭔가 좀 그냥 저냥 그렇단 말이지? 음! 그럼 말이야, 음... 내가 마라를 구워삶아 놓을께. 단, 비법은 아직 밝힐 수 없고. 그리고 참고로 하나 말하겠는데, 이거 하난 알고 있어야 할 꺼야. 난 네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기를 원치 않아. 그런 모습은 아마도 볼 수 없을 꺼야. 그걸 어떻게 이상적인 우정이랄지 아름다운 주종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니. 안 그래?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구. 알겠어? 하지만 놀릴 수는 있어. 왜냐, 친하니까. 그러다 보면 지는 비교도 나오겠지! 그렇다고 깐족거리는 친근함의 표시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구. 알겠니? 그리고 나한테 솔직해야 좋을 꺼야. 더불어 어떤 선망에 대해서 내게 속마음을 들켰다고 쑥스러워하지도 말고. 남자들이 왜 그러나 모르겠지만, 아마 넌 다르겠지. 어쩌면 너도 똑같을까?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러든 어쩌든 난 널 존중하고 넌 날 아끼면 되니까. 그러나 언제 어떻게 내가 널 막대할지 모르니까 안심하지 말고. 그러니까 말이야 부러움의 감정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얘기야. 적어도 내겐 말일세. 아시겠나?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뿐. 응. 알겠어, 모르겠어? 모른다고?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에잇 관두자. 그만하자구. 어쨌든 실질적인 거 말이지? 기다려 보시게.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렇게 해서 1일만 구간 당기기를 하자면 이랬다.
마라는 NB에게 지난 정산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면서 미지급액을 그에게 긴급 송금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두둑한 품위 유지비를 챙기게 됐다.
빨간 막대가 평정심에서 절망감으로, 파란 막대가 밍밍함에서 상심으로 기울게 해서는 안될 일. 그런데 그 계기판이 처음에는 짜증 그래프인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도파민 그래프라고? 와우~! 고동치는 황홀감은 기대감의 반의 반의 반도 충족시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미지의 낭만주의자와 펼치는 아름다운 연애는 다 꿈 같은 얘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이제 뻔트 안타 정도는 그냥 일상인 거지. 그런데 또 인공지능 지니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살짝 해이해지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쑥 들어간다, 어? 기약없이, 슥! 응? 친구. 너무 많은 걸 네게 선물하지는 않을 꺼야. 왜냐하면 네 힘으로 이뤄야만 더 값진 가치도 분명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그야말로 맛이 기가 막힌 스테이크 정도의 어깨뽕은 올려드려야 할 테지만, 특대 사이즈 햄버거까지는 바라지 말아주라는 거. 잊지 마시게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뭔지 모를 비밀스러운 수작으로 인해 인공지능은 그에게 선물이 배달되게 만들었다.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속옷. 청록색 니트 터틀넥. 곰돌이 자수 양말. 노르딕 패턴 멜빵. 크리스마스 CD. 듀퐁 라이터(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는 대신 향수가). (자길 머머설에 혹하는 어린애쯤으로 여겼기 때문일까?) 책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까지.
그리고 녀석은 이런 알쏭달쏭 알 수 없는 얘기도 전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환상머신을 완성시키지 마.
왜냐,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첫째, 어차피 완성돼도 타임머신보다 못해.
둘째, 어찌 됐든 미완성일 테니까. 알겠니?」
15
고고한 이상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한편 이따금 앙탈 부리며 반항하기. 우리는 아직 철들지 않았음을 과연 공손히 시인해야만 하는 걸까? 탐미주의에 대한 애정과 성과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으니 그러는 수 밖에. 상남자가 열망하는 미지의 다망이 무엇인가는 비밀에 붙이고. 다만 빈말을 들을 수 있음에 기쁘고 가식을 베풀 수 있음에, 저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뿐.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둥 재밌다는 둥, 세상에서 뭐가 제일 어떻다느니 그거 다 뻥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할 수는 없으니까. 차마 어떻게 다음 생에는 우리 절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서슬 퍼런 안색으로 치를 떨며 구술하겠나. 아니 그렇소? 기분 나빴다면 내 사과하리다! (속닥속닥 키득키득. 우리끼리는 고마움을 주거니 받거니. 히히히 속닥속닥) 대망의 실현 가능성이 꽤 희망적이라는 믿음은 진즉 갖다버린지 오래라고 어찌 스스로 실토하겠나. 하여 단지 소망이나 잘 간수하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대관절 또 이번에는 어떤 뻔트를 대면 이익도 좋고, 동기도 탁월할 수 있을까? ~라고 NB는 번민에 잠겼다.
우리는 그렇게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는 대상을 조금쯤 닮게 마련이다. 최초의 팡파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 최후의 나팔소리! 그 외에도 우리를 길들이고 타이르며 최면을 거는 무엇. 핑~! 또는, 퐁~! 약간 다르게 팡~일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잔재미가 아무리 거듭돼도 누군가는 뭘 해도 재미없을지도 모름. 그와 같은 환희, 누구에게는 신비로운 환상감일 수도 있음. 그와 같은 짜릿한 쾌감, 가슴을 그야말로 뻥 뚫어주는 듯한 환락이 누구에게는 타락과 퇴폐이지 말란 법도 없다. 탕진이란 낱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어쩌다가 시간 지나면 이혼도 자랑이 되니까 말이다. 하긴 요즘 세상 그게 무슨 큰 흉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와 같은>이 가르키는 그 무엇이 도대체 뭐냐구요? 뭐긴 뭐겠나, 각자 다 다를 테지. 행복업은 행복업인데 꼴등으로 판명난 복권일 수도 있고, 화초 키우기나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TV와 NC 즉 취미 같은 것. 그래서 시무룩 뾰로통하며 권태에 체념한 어른이 어느 날 꼼지락꼼지락 소꿉장난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새로움은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무엇을 암시할까? 바로 머머 접습니다 라면서 장비 청산. 본시 행복은 측량값이 만족스러워도 맥주처럼 김 빠지기 쉽상이다. 원래 애정은 측정하기에 조금은 낯부끄러운 게 정상이고. 따라서 결론은? 그렇지 (딱) 우정은 추접하고 사랑은 유치한 것. 아니 바꼈나? 친교는 유치하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 (너만 살겠다고? 혹시 '같이 망하자'랑 그거랑 둘 밖에 없는 거 아냐?) 다만 스캔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을 때, 신부들러리는 짜증나고 사랑은 추접스럽다며 그분들께 그것의 영롱한 가치가 폄하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우정은 줄거리요 사랑은 영화 예고편쯤으로 적당히 타협하기를!
뭐 타인의 연애 사업이야 각자 소관이고. 말도 안되는 잠꼬대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넉살, 이제 그만 누군가는 입의 자크를 잠그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다. 귀가 간지러운 것도 모자라 귀울림에 이어 편두통을 호소할지도 모르니까. 고로 못난 말장난이요 못된 설변은 그쯤 하고. NB가 흑심을 품는 파르마 제비꽃이 과연 연자주색인지, 아니면 진자주색 가짜꽃인지나 알아보자. 뭐, 그 장밋빛 스카프는 이미 쫑나기도 전에 시작조차 못했다고? (당사자왈, 어디서 쪼개!) 하지만 심심한 나태마는 불길한 징조일 수 있지만, 뜻밖의 계기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그는 에너지가 다시 충전됐고, 그러므로 묘한 우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때마침 친구 존티에게서 전화가 오네?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는데 퍽 다행스러운 길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존티와 내일 만나기로 했다. 존티가 제의한 모임은 다름 아닌 사진 출사회.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설렜다. 많이 실망하면 안되니까 살짝만 기대하기로 했다.
16
사진 출사회. 존티가 리더였다. 내용은 그저 그랬다. NB는 속으로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재미없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그랬을지도 모르고. 하긴 인생사를 아름답게 꾸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시절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면 된 거였다.
젊음이 망아지처럼 엉덩이 근질거리며 껑충껑충 바쁠 때가 언제일까. 사람에 따라 나이와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이에 비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 스무살은 꼭 네온사인이 돕지 않더라도 평소에 항상 으쌰으쌰 상태인 것이다. 그처럼 늘!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 가게 A에서 친구들끼리 나와서 어디 갈까 라고 하면 썩 재밌지도 퍽 재미없지도 않은 시절. 가게 B에서 으쌰으쌰하다 나와서 하는 말, 그런데 우리가 왜 나왔지? 그러면 재미없어도 평소에 실실 웃는 발정기. 가면 가고 말면 마는 시기는 동네 아저씨의 명대사, 뭘 해도 재미없어! 정력기 때의 구체적인 예를 더 들 수도 있다. 가령 친구 셋이 만나 괜히 웃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저기 저 앞에 보이는 볼링장에 가기로 한다. 왜? 저 앞에 보이니까, 있으니까, 단지 그뿐. 그렇게 한참 볼링에 몰입하던 중 한 친구는 앞으로 미끄러지며 꽈당, 한 친구는 볼링공을 뒤로 빼면서 볼링공이 손에서 빠져 뒤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놀라서 받는 일. 또 A 도시에서 B 도시로 친구가 놀러가 B도시에서 옛날의 단짝이 오랫만에 단합? B도시에 살던 친구는 2주 용돈을 그날 다 써버리기도 한다. 오랫만에 옛 단짝 친구를 만나 반가우니까 하루 아침에 그처럼 거지가 된다. 기분 따라서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어쩌고저쩌고. 그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는 둘 중 하나다. 첫째 입이 근질근질하던가,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던가. 설마 둘 다? 입과 엉덩이 모두 근질근질하다면 둘 중 하나다. 첫째 조증녀, 둘째 미리미리 어려서부터 나는 커서 유명해질 테다 유명해지고 싶다 라는 공표를 적잖이 알렸거나. 어쨌든 망아지는 원래 자기가 얼마만큼 앞발을 들어올려야 자기가 뒤로, 옆으로 꽈당 넘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정이 당시는 근질근질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바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 뭐 그건 그렇고.
사진 출사회, 끝났다.
「안녕, 애들아.」
리더인 존티가 작별 인사도 마쳤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이미 헤어졌다.
그렇게 존티와 NB 단둘이 남았을 때 존티가 그랬다.
「그나저나. 내가 자네를 잘 아는데 말이야. 자네도 사진을 한번 진지하게 배워보는 게 어떻겠나?」
「자네는 뭐가 자네야? 이 양반이 배가 고파 정신이 없나, 사랑에 애달팠나. 야! 너 왜 그래? 평소대로 해. 그리고. 나 사진을 싫어하진 않지만 직접 작품을 만드는 거 보다 보는 걸 좋아해. 물론 옛날에 디카를 처음 샀을 때는 잠깐 혹했지. 누구든 그러잖아. 그렇지만 시간 좀 지나면? 모임에 자기 카메라 서로 안 가져올려고 난리잖아. 왜? 귀찮으니까. 내게 사진에 대한 열정은 딱 그 만큼. 요즘 어린 친구들처럼 사진은 아예 찍기도 보기도 귀찮아 한다고. 따라서 나는 서명도 없어. 자, 그렇다면 말이야, 응? 집중. 자, 사진이랑~ 요리랑~ 비슷한 거 같지 않니? 응? 그러지? 그렇다니까. 그 다음으로 요리랑... 그만. 어찌 됐든, 얘가 잘 알면서 왜 이러지?」
「허지만서두, 난 자네에게 사진이라는 고품격 취미를 권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거 정말이지, 너무너무 그 충동을 걷잡을 수 없지 뭐요.」
「없지 뭐요? 없지 뭐긴 뭐가 없지 뭐야! 얘가 요즘 왜 이러지, 상태가 영 아닌데.」
「왜냐니, 나 원래 이랬어. 전적으로 끝짱나는 황홀감, 키우지도 찾아헤매지도 않는다구. 그렇다고 꼴사나운 괴벽과 허약한 감상주의에 의지할 수야 있나. 따라서 나는 당분간 도덕주의자이자 성인군자처럼 살기로 했네. 아시겠나?」
「모르겠네. 영 모르겠네. 무섭고 공포스러우면서도 악마적인 느낌과 마성의 분위기, 그건 좀 색다르고 말이야. 얘가 얘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그걸 통 말을 안하네. 대체 뭐지, 그게?」
의구심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는 듯한 눈초리를 남긴 채 존티는 먼저 갔다. 갈 때마저 존티는 폼을 잡았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걸작이란 아마도 사후에 유명해질 운명쯤에 해당할 테니 우린 이만 헤어지는 걸로 하세나.」
끝까지 폼이었다. 대체 어떤 꿍꿍이가 기다리고 있길래 말이다.
결국 그래서, NB는, 또 혼자 남았다. 어? 또!
그와 같은 허무감 때문일까? 그는 NB에서 N을 뭘로 바꿔야 할지를 또 다시 고민하며 공상을 하게 됐다.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환락은 부담스럽고, 심심함은 유감스러우며, 불운은 당혹스럽다. 그렇다고 사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겠나 연예계에 신인왕으로 우뚝 서겠나. NB는 그처럼 어떻게 보면 열심히 사는 듯 했고, 어찌 보면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허송하는 듯 했다. 그리고 <형, 철들지 마세요!>같은 인사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미 철이 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저런 맙소사! 그러니까 어디 가서 난데없이 법석을 떨 수도 없고, 느닷없이 괜한 숙녀한테 추파를 던지기도 뭐했다. 그래서 자꾸 소심해지고 더욱 순진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걸로만 보자면 청춘으로 환생했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굴 만나든 공인은 커녕 말도 꺼내기 힘든 농담, 아니 농담 축에도 못드는 헛소리다.
따라서 그는 변화를 위해 BOY 앞에 어떤 색다른 수식어를 붙일까를 생각했다. NEW! 너무 막연하니까. 신들린 듯 춤을 추든 미친 척 노래를 부르든, 화난 척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는 진짜를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 이른바 먹힌다거나 롱런한다랄지 최고가 될 수 있다. WIRED? 그러다 그는 '흥분한'이란 꾸밈어를 골라봤다. 그렇지만 술 취하면 깨야 하고, 잠은 밤에 자고 낮엔 활동을 해야 한다. 계속 흥분할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흥분맨이 무슨 최선의 일하기와 최적의 놀기를 위한 타당한 명분도 뭣도 아니고. 본인이 무슨 도핑 테스트에 대해 떳떳해야 할 선수도 아니다. 인터넷 놀이터 우스개 소리로 거 뭐야 몬스터나 레드불! (아마추어는 그게 무슨 금지약물인 것 마냥) 일요일 동네 축구에 약 빨고 나갈 일도 없다. 고로 그는 그냥 일단은 NB로 남기로 했다.
17
사진 출사회에서 집으로 오는 길.
그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울적했다. 선심 쓰듯도 아니고 건성건성도 아닌 최선을 다해서 막살기. 아니 아니, 놀기. 그러나 이제는 놀기마저 재미없었다. 질 나쁜 사교계와 삼류 나이트클럽은 더 재미없었다. 불미스러운 가난함, 끔찍한 권태, 추잡한 염문의 주인공도 될 수 없고. 불행의 대항마로 딱히 출전시킬 벤치 멤버조차 바닥났고.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존티의 권고로 함께 사진 출사회에 참석했는데 그마저 그냥 그랬다.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행복한 열정가로써 감출 과거가 있냐 없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NB는 매사 싫증이 삶을 이끌고, 인생은 변심에게 끌린다는 게 문제였다. 새로움을 좋아하오나 끈기가 없는 건가? 새로움을 싫어하고 고집만 센 거보단 낫겠네. 아무튼, 사랑에 약하고 짝사랑에 더 약할지언정 떨리는 상사병이 어른에게 웬말. 권위에는 의연하게, 주관은 굳건히, 환상론은 차근차근.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떨리는 예감과 설레는 기대가 부족하다는 점,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즉 바람직한 이상은 아니겠지만 이렇다 할 변수도 없는 만큼 의뭉스러운 모험심마저 아쉬운 형편이었다. 그렇게 NB는 집에서 TV만 보고, 사무실 소파에서 뒹굴다가 급기야 멍청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비와 젊음과 꽃들의 환호가 절실할 판에 지적 능력의 도태? 저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비밀 없음과 가난함을 <비밀 있음 & 가난하지 않음>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뭐 어떻게 아쉬운대로 가식과 능청과 간교함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건 또 너무 많이 남용했고.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천리마면 뭐하냐고 꿈쩍도 안하는데. 남들은 질주를 하던가 꽃밭에서 뒹굴던가 아니면 마굿간에서 일단 나가는데, 그걸 번연히 알면서 언제까지 구상만 하고 또 할 수는 없었다. 고로 NB는 환희의 공모자를 수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포츠로 치면 복식이요, 운칠기삼으로 보면 명마. 곧 실력이 검증된 믿을 만한 협력자를 간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새로움에 대해서 간곡하게, 골똘히 고민해봐야겠다는 과제를 집과 사무실에서 파헤쳐볼려고 했다.
바로 그렇게 집으로 가던 중 그는 휴게소에 들렸다.
한적한, 매우 한적한 시골길. 마치 SF 영화에 나온다면 무인차랄지 로봇만 지나다닐 것 같은 분위기.
휴게소에서 그는 볼일을 봤다. 맨손 체조도 하고, 화장실도 갔다 왔다.
평범한 일상─보편적인 기분 전환─심심한 인생. 한 방의 모험이 절실한 시점이라면서 일에 대한 열의도 가다듬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애마에 올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
그렇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뭐야 당근이 부족한 거야 채찍이 문제인 거야. 아닌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왜 시동이 걸리지 않지?
그런데 NB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휴게소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듯 했다. 그들은 이미 훨씬 전부터 그런 듯 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참신한 신참내기가 눈을 멀뚱멀뚱 뜨며 으아해하자 그들은 NB에게 접근해왔다.
「선생. 혹시 자동차에 대해서 좀 아시유?」
또 다른 사람은 달리 접근했다.
「형씨. 제 페라리가 몇 년식인 줄 알아보겠소?」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런 분도 있었다.
「젊은이. 젊은이 차는 공랭식인 것 같소만, 그런데 왠지 모르겠지만 내 수랭식 엔진이 영 말을 듣지 않소. 일단 내 애마의 수평식 대항 엔진을 잠시 구경 한번 해보시겠소?」
그렇게 얼렁뚱땅 사람들과 말을 나구고, 차를 구경하며, 얘기를 듣게 됐다.
여기가 특별히 귀신이 나온다랄지 이상한 기운에 휩싸였다랄지, 그런 게 아니라 전화가 안 터진다 라는 얘기였다.
「그래요? 아닌데! 저는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그들한테 자기 전화기를 건넸다.
또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길래 자기가 직접 당사자의 차에 타서 시동을 걸어봤다.
뭐야, 걸리자나!
「차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요?」
「어, 진짜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말 이상했는데. 이거 진짜 어떻게 된 일이지?」
「제 것도 좀 봐주세요.」
「저두요. 제 차는 오래됐지만 관리를 꽤나 꼼꼼히 잘해서 어지간한 애마는 비교도 못할걸요.」
그렇게 한참이 지난 끝에 그곳에 있는 모든 차의 시동이 다 켜졌고, 그들의 전화기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NB가 딱히 한 게 없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무슨 요술사라도 되는 것 마냥 모든 것을 정상으로 원위치시킨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응? 그러면 말이야 요술봉은 대관절 어디 있냐고! 혹시... 설마?
그건 그렇고. 그는 그분들을 모두 떠나보낸 다음 음료수를 살려고 다시 휴게소로 들어갔다. 아직도 이곳에 들려서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던 것이다.
휴게소 내부.
그렇게 점원에게 말을 걸려는데... 뭐야 이거! 뭐지? 이건... 뭐냐고!
점원을 비롯해서 내부에 몇 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박제였던 것이다.
그건 모두 실사판 초정밀 가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깜빡 속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 그는 음료수를 살 수 없었고, 여기가 무슨 박물관도 아닌데... 막 그렇게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음료수는 마셔야겠고, 유인 판매점에서 살 수는 없고.
그래서 그는 바깥에 있는 무인 자판기를 발견했고, 그곳으로 갔다.
자판기는 하늘색 자판기와 연분홍색 자판기 두 개뿐.
하늘색은 음료수고, 연분홍색은 씌여 있는 안내문이 이랬다.
「뭐가 나올지 모름.」
뭐? 모르긴 뭘 몰라! 그럼 뭐야, 뭐가 나올지 묻지 말라는 거야? 그는 일단 둘 다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결과만 말하자면 음료수를 마셨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는 악세사리를 비롯해서 별의별 희안한 물품을 뽑고 또 뽑고 계속 뽑았다.
그 가운데는 꽤 쓸 만한 물건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느새 지갑의 현금을 모두 다 써버렸다.
「별수없지, 뭐.」
그렇게 그 일대에 자기 혼자만 남은 줄도 모른 채 그는 애마에 올라탔다.
그런데, 뭐야 이거 시동이 또 안 걸리네?
「가만 있어봐.」
계속 안 걸렸다. 핸드폰은 또 먹통이었다.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여기보다 더 차량 통행이 한적한 도로는 좀처럼 찾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어쩌다 지나가는 차량을 봐도 모두 무인차였다. 운전자만 없는 게 아니라 탑승자까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부릉, 부릉, 부릉~!
뭐야 이거, 이제는 또 되자나? 시동이 걸렸다. 전화도 통화가 되는 상태였다. 인터넷도 되고.
그렇게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스러운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신비스러운 모험은 있다. 아니다. 뻥이다. 없다. 있을 턱이 있나.
그래도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온 걸로 만족했다.
능글맞은 권위자의 미심쩍은 의심이니 뭐니, 그런 거 다 필요없었다.
특별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인생이여, 라며 시를 짓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온 걸로 만족했다.
한심한 잡것이 된 것만 같은 기이한 당혹감, 치유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헛수고. 실망-쯤이야. 기대도 안했어.」
일탈적 환상에 따른 상쾌한 분위기에 안주하기,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18
그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로 출근했다.
꿀이 뚝뚝 떨어지고, 기쁨이 친친 감기며, 깨가 펑펑 쏟아지는 일상. 알고보니 어젯밤 단꿈은 개꿈이었다. (드문드문 기억나지만 완전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꿈에서는 말이 돼!) 플레이보이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며 사교계를 주름 잡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꿈나라 이야기. 허당계에 파다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연애사는 다 남의 일.
그는 새로운 짝사랑 받기는 꿈도 꾸지 않았다. 유망한 미래에 보물상자를 낙찰 받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긴 하다만 쾌청한 황홀경은 몰라도 특별한 발단은 앵기면 뿌리치지 않으련만 일과는 너무도 조용했다. 순진무구한 숙녀와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양쪽에 꿰차는 몹쓸 공상 역시 정중히 사양했다. (이미 한 거 아니냐고? 안했음. 그렇지만 오 땡큐! 뭐? 이제 드디어 '오 땡큐' 하면 적지 않은 분들께서 그 뭔가를 상상하실지도!) 그럼 뭘 하나. 신나는 전개가 없는데!
됐고. 별들의 반짝임과 바람의 인사는 다 쓸데없는 얘기고. 매료될 관심사와 유혹할 애마가 없다면 기수 없이 혼자 뛰는 수 밖에. (한바탕 악으로 미친 듯한 깡으로,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JS는 저조한 성과 때문에 불쾌해하는 탐험가보다는 한 마리 야생마이고자 했다. 독신자주의는 아니지만, 정반대지만 뜨거운 열애와 흥분된 쾌감은 통 말을 듣지 않으니 내일로 미룰 수 밖에.
그래서, 이제 어쩔껀대? 일기를 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잡지나 보는 게 나을까. 뭇-사내의 환상을 엿보거나 여자 마음 추측하기도 재미없고. 때문에 NB는 터벅터벅 사무실로 가는 거 말고는 이렇다 할 뭐가 없었다. 커피숍─아이스크림 가게─빵집 점원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새로운 여자한테 구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인생은 요술이 아니니까 다 그런 거지 뭐, 라면서 그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렇게 사무실 가는 길.
그렇게 사무실에 도착.
그러다 일과 시간에 <오빠 뭐해?> 라는 소셜 네트워크 메시지를 아는 동생으로부터 받았다. 열심히 답장을 쓰는데, 그런데 그녀는 벌써 오프라인이 되었다. 뭐지? 약속이 잡혔나 보다. 빠르네. 매정한가? 아니면 이쪽에서 맹한 걸 수도. 너는 벤치멤버고 나는 뻔트보다 거포를 원한다 그거지. 뭐? 됐다 그래, 라고 할려다가 사랑의 인사는 어쩌다 생략될 수도 있으니까 바쁜 세상 괘념치 말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숙녀에게 선택 받지 못했다. 잃어버린 열망을 기억해낼 뻔 하다가 그것도 실패했다. 아찔한 착상도 포기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퇴근하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 앞에서······
그런데 집 앞에서······
아무도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뭣이여!
그래서 그는 작심했다. 내일 그 이상한 휴게소에 다시 방문해봐야겠다고!
19
다음 날이 되었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을 총동원해서, 까지는 아니고 꽤 많은 현금을 모아서 그곳으로 떠났다.
이름도 모르고 뭔가 이상한 그 휴게소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인공지능한테 물어봤지만 인공지능은 꿈나라를 헤매고 다니는지 통 답변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 내려서 어슬렁어슬렁 휴게소 내부 쪽으로 걸어갔다.
왠지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런데 휴게소 문은 잠겨 있었다. 에잇~ 김빠지네.
그래도 깐닥깐닥 어떻게 들어갈 수 없나 하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포기하고서 자판기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거기 왜 갔는지 분명한 까닭은 아직도 미상이다.
진짜 자신이 박제될지도 모른다는 판타지 같은 걸 바랬냐고 누군가 캐묻는다면 딱히 항변할 의사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자기가 그곳에 재차 의도적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므로, 피차 그런 엉뚱한 상상은 더 발전시키지 않는 걸로.
「누구 맘대로!」
각자 맘대로.
아무튼 사람이란 누구나 새로운 행복을 원한다는 건 공공연한 정설인 반면, 뜻밖의 발견을 바라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다. 결론은 그곳에 그런 건 없었다-였다.
단지, 그는 가진 돈을 몽땅 무인 자판기에 쏟아부었다는 거. 어떻게 보자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세계 최고의 쾌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족을 못쓰는 무엇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평범함이 어쩌면 제일 소중한 가치일 테니까 말이다. 숱한 패전의 기억. 그리고 전혀 쓰라리지 않은 그러나 드문 승리의 추억. 모두 지나간 일일 뿐. 어찌 됐든 오늘의 성과는 별 거 없었다. 영화로 치자면 이건 정말 B급이 아니라 C---급도 안될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럼 그는 정말 뭘 원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나를 안달나게 할까? 당신은 무엇이라면 사족을 못쓸까?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대상에 환장하는 것일까? 설마... 아닐 것이다. 밝은 내일 희망찬 미래, 아니라고 아니라고 손사래칠 수야 없지만 왠지 우리가 원하는 1.5는 아닌 것만 같다. 그렇다고 타락마 타기만은 절대 아니라고 극구 반론하기, 역시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열망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라고 왜 항변하면 안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철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건 사랑과 행복과 낭만과 꿈 같은 이상, 미지의 모험, 궁극적 환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진짜다. 맞다. 옳지. 그럼. 가짜가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마치 그런 모습이다. 왼손잡이가 진실을 말할 때 살짝 고개를 틀어 10시 방향 위를 보고, 오른손잡이가 거짓말 말할 때 시선이 슬쩍 2시 방향 하단을 향한다는 이론. 물론 고결한 그대가 아니라, NB는 젊은 신기함과 새로운 놀라움이라는 정답에 선뜻 동의하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거지. 그 다음에 딱 2가지 힌트로써 판단컨대 100퍼센트 뻥이다. 완전 뻥. 진짜 뻥. 순수한 뻥. 순결한 뻥. 무구한 뻥. 첫째 웃음, 둘째 뒷머리 긁기랄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 따라서 그가 진정 바라고 염원하며 고대하는 건 다름 아니라, 3대 어설픈 사랑 가운데 더티러브라고?
아 쫌!
썰렁한 농담치고 더럽게 재미없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야 어떻든 그는 변심에 대한 탐닉을 호락호락 시피 여길 수는 없었다. 허당주의자의 미련한 인생 역시 만만히 보아서도 안될 일이다. 뿐더러 무정한 어느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리가 아닌 추측을 하는 젊은이의 상상력을 어찌 띄엄띄엄 얕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NB는 올림푸스의 은총과 플라톤의 지력, 예언가와 점쟁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그 즉흥적인 궁금증을 내내 붙잡고 있겠나 어쩌겠나. 그러니 호기심은 역시나 멜로드라마였고─뭐, 에로비디오?─감수성 또한 마법의 유리구두와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를 동경했다.
고로 양치기 소년의 고독감은 냉큼 결심했다. 심원할 필요없이 단호하게. 막 치즈에 달린 줄을 영차영차 끌어당기기는 그거였다. 바로, 남자는 일단 집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천리안 기수의 따끔한 채찍을 맞는 천리마에게 제공될 당근은,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기 라는 명언이라고? 그리고 천진한 동심을 현혹하는 기술은,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 그게 뭐야 나 참, 원! 참 나 웃기지도 않네. 생경한 궤변에 말 같지도 않은 억지는 그쯤 하면 됐고.
그래서 NB는 성과를 맹추격하는 정적인 삶에서 우연한 행운을 만날 수 있는 동적인 행동으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꼼짝없이 세부 계획을 짜는 일에 골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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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근한 거짓말 솜씨를 탐탁치 않아 했다. 문학에서 말하는 삶의 기쁨과 인생의 재미도 미덥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스레 개인의 행복은 미심쩍을 수 밖에. 그렇다고 타인의 시시콜콜한 연애사에 관심을 쏟겠나, 아니면 스스로를 미학적 세계관의 소유자라며 자칭하겠나. 그게 다 자업자득일 것이다. 지적인 자유를 얻은 대신 뭐랄까, 좀이 쑤시는 시골풍 생활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번잡스럽게 도시 한복판에다 사무실을 얻을 수도 없고, 지성의 전당에 학생으로 출연할 수도 없었다. 뭐야 교직원이 아니라 학생? 굉장하군, 기막힌 솜씨야. 헛된 공상도 잔재주로 가정하자면 말이다. 사랑의 비너스와 아름다움의 디아나는 커녕 범상치 않은 조바심만 그를 부채질할 뿐. 그걸로도 모자라 한술 더 떠 무슨 레이저 시스템이 탁월한 인공지능씩이나 된다고 매일 같이 바보 같은 대화를? 저런 바보짓을 다 봤나. 일상이 재미없을 이유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근했던 비아냥 어린 태도가 부쩍 상승한 듯 해서 일기도 쓸 수 없었다. 가뜩이나 품위 유지비도 부족한데 칼럼도 안 써지니 한몫 챙기는 것보다 생활비마저 부족한 형편.
따라서 여기서 더 썩은 미소를 불러오면 안될 표면상의 이유는 충분했다. 훌쩍 뛰어올라 행운의 구름에 사뿐히 안착할 명분은 마련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잡것이니 상놈이니 멍청이라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세상이 자길 반색하질 않으니 사적인 일을 부풀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NB는 신나는 인생은 전혀 즐겁지 않은 동네 아저씨의 삶이라는, 기만적인 술수에게 회심의 어퍼컷을 날리고자 조커를 기용하기로 했다. 빠밤~ 바로 777번마의 이름은 클레오파트라! (이거 정말 애마를 너무 밝히는 건가? 거 원 참!)
그럼 777번마 클레오파트라가 무엇이냐? 무엇이고 하니 그건 바로, <천문관 보이저에 재방문하기>였다.
하긴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 대한 끌림 때문에 이상한 휴게소를 재방문 했으니 그건 뭐 거의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비밀은 사랑의 미로를 헤매이는 것이라면서 인공지능 지니가 NB를 슬슬 꼬시니 그는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인공지능 지니가 살살 감고, 쥐락펴락 요리하며, 착착 엮는데 그가 안 넘어가고 버티겠나. 심지어 아무리 생각해도 지니의 귀뜸이 즐거운 인생의 아름다운 묘수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집에서 준비물을 챙겨서 천문관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별다른 일은 전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천문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정식 개장을 한 상태였다. 이제야 어엿히 제 몫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에 그가 들렸을 때만 잠시 주춤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잠깐만! 여기는... 사설 설비이자 사적 시설이 아니자나? 그럼 혹시...!
그는 설마 설마 해서 냉큼 롭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다.
「야. 롭. 너가 저번에 거기, 어디지? 응. 천문관. 거기 인수했다며?」
「내가, 천문관을? 형, 안 웃겨!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거길 어떻게 인수하냐? 그건 대체 무슨 상상력이니?」
「너가 저번에 그랬자나. 나이트클럽 팔고 거기 샀다고.」
「아 그거? 뻥이지. 당연히 뻥이지. 그걸 누가 믿니?」
그는 감성이 붕 떴다.
이성은 벙쪘다. 두둥~!
심신은 마침내 분리되었다.
기다리던 유체이탈이 실현되고야 말았다.
향수는 욕망을 예기한다. 욕망은 기쁨을 암시한다. 기쁨은 행복을 예고한다. 행복은 미래를 관측한다. 미래는 희망처럼 아름답지 못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자유롭기를 바란다. 자유는 미지의 이상을 추구한다. 그 자유의 이상은 꿩 대신 닭일 수도 있다. 무난한 촌닭이라고 멋지지 말란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머어머, 어머나 신비스러운 향수까지? 뭐야! 그런데 그 향수는 싸구려에 그이는 허당이라니! 보기 좋게 낭패는 추억이 되지만, 보란듯이 행운을 선망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녀는 나한테 넘어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은 최선을 다해서 갈 데까지 가는 것과, 볼장 다 보듯이 막사는 것 외에 그것도 있는 것이다.
대충 살자!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과거가 현재를 잘 예측하고 현재가 미래를 놀랍도록 추론하더라도 인생은 본시 엉뚱한 것. 지금 그대가 이렇게 살게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러니까 드라마는 운명을, 남자가 여자를 꼬실 때는 허풍쟁이로 빙의, 철들지 않는 우리는 탐구심과 호기심을 양쪽에 꿰차는 것 아닐까? 아니긴 뭐가 아니여! 그야 어떻든 향기로운 꽃과 탐스러운 과일은 거울 보고 찬미 받는 그분들 인생이 있고. 그와 별개로 유능한 플레이보이는 시련을 푸대접하지 않는 유망한 줄거리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로맨스가 어디 내 마음대로, 새로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날 특급 캐스팅하던가. 그러나 우리는 미련과 실패와 체념 때문에 낙담하지 않은 채 오히려 거기서 배운다. 내 보아하니 그분들은 색다른 감수성과 최신 허영심에 대한 정보가 요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방비 상태로 KO 당할 수 밖에. 자, OK!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은 뭐가 <우리는>이야! 아무튼 우리는 제7의 전성기를 위해 낡고─진부하고─고리타분하며─구식탱탱 묵은 비전 1.0을 새로운 인생 2.0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그녀를 안달나게 하는 법'같은 비법서를 염탐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시간만 낭비하느니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게 낫긴 낫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고! 내 말이, 어? 행복한 결말은 물론 기발한 작전도, 비장의 카드도 꽤 괜찮은 병법도 아무 것도 없잖아? 이런, 젠장! 고로 NB는 JS라는 정체성을 꼭꼭 숨긴 체 환상머신 연구에 열심히 박차를 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환상머신은 썩은 환상머신? ~만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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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투명하고 어조는 또렸하며 언제나 유쾌할 것. 광고의 논리와 소비의 효험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뿌듯해진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상쾌하겠나. 사랑의 맹세가 번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만 순수했던 동심은 깨지기 마련이다. 이상형은 수시로 바뀐다. 야망이 잊혀지는 건 평균적으로 응당 정해진 차례일 뿐이다. 아예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도 흔하다. 곧 아무리 재미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매번 활력을 선사하고 애인을 항시 웃기겠나. 기를 주는 사람과 기 빨리게 만드는 조증녀는 통상 정해져있다지만 어차피 신인상은 1번 뿐. 것도 기회만. 심지어 1부 리그, 많이 쳐도 2부 리그만!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미를 잃지 않는 이상 마음이 불투명하고 싶을 때가 있고, 때로는 이상한 개성을 따라하기도 한다. 가식적 호의에 혹하거나 익숙한 호감 때문에 새로운 숙녀에게 친절하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고.
그러면 반투명한 마음이 좋아보이면, 어느 전문용어처럼 내 약함을 인정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때로는 내 속좁음과 꽉 막힘과 멍청함과 비겁함을 불인정하지 않고 싶거든. 나도 솔직히 약간은 그렇거든. (뭐, 약간은?) 내 자조 개그는 저급하다고 시인할 용의가 확실히 있으니까. 그렇다고 매번 변신에 현대극은 변절자요 사극에서는 모반자, 혹시 마누라는 변장? 아침에 변심 점심에 변덕, 저녁에는 내 마음을 나도 몰라?
자, 검지를 펴서 귀 옆에 붙인 다음, 빙글빙글! 한 번 더, 빙글빙글!
그러므로 3단 논법과 나비효과, 인공지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슬리퍼, 제비복, 가죽점퍼, 유니폼, 잠옷을 한꺼번에 다 입나! 중간 보스가 있으면 행동 대장도 있듯이 플랜 B와 대타도 있는 것이다. 슈퍼맨은 영화고, 원맨쇼는 어려우며, 팔방미인이 어디 흔하더냐. 때문에 사랑 받기, 책임 회피형 방식, 수동성 같은 행동 양식 역시 결코 드물지 않게 된다. 떨려, 설렌다, 끌린단 말이야!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은 깃발처럼 나부끼고, 우리의 귀는 임팔라처럼 코끼리 같이 펄럭여야 하는 것일까? 내 마음은 나의 것, 내 인생도 나의 것인데, 그런데 왜! 대체 왜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다면서, 또 사랑?
그렇다면 과연 어떡해야 져도 좋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을 하고 설혹 실연 당해도 미련은 낮게, 상심은 옅게, 오뚜기처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까? 슬럼프를 슬기롭게 탈출하고, 실패해도 지혜롭게 이겨내기. 그 이유와 원리와 방법을 누가 모르겠냐마는, 바로 그래서 적게 걸고 적게 먹거나 얼리어댑터는 자기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생론 설교는 그쯤 하면 됐고. 어쨌든 NB는 천재가 아닌 대신에 미모의 특급 바텐더한테 1위로 손꼽혔다. 그 얘기 딱 1번만 더 말하면 진짜로 반올림 1000번이다. 듣는 사람, 그 가운데 그 얘기 싫은 사람은 듣다 듣다 귀에서 피가날지도 모를 일. 아주 미쳐버리지도 못하고 아주 그냥 광분하는 거지. 하여튼 알고 보면 초면의 숙녀가 건네는 호감, 적지 않았던 거다. 쟤 알아? (알긴 뭘 알아!) 또는 화장지 없냐니까 팔을 쭉 뻗어서, 그것도 두 손으로 턱은 살짝 안쪽으로! (이제는... 이래서 옛날에 어깨 뽕 들어간 패션이 유행했었나!) 좌우지간 지겹지도 않은 자랑은 짜증나고 듣기도 싫고. 밝고 맑고 건전하며 긍정적인 해법 빼고, 맹랑한 듯 선묘한 수법을 딱 세 가지만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호박마차에 탄 미남. 바람둥이의 습관. 숙녀를 위한 에스코트. 신사의 품격.
둘째, 베팅 (그대! 너를 나만의 남자-여자로 만들고야 말겠어. 단, 그분께 수긍할 의사가 있다면. 하늘이 허락한다면)
셋째, 뻔트.
사랑을 받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랑할 수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거라는 (일부) 여자의 자존심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둘째, 아니다. 셋째? 그럴 수는 없다. 그럼 첫째? 그건 호박론이고. 그럼 남은 건 0.5네. 또는 화장발과 조명발등 갖가지 유혹술에 대해 권위자씩이나 되는 여성잡지 1과 2던가.
아무튼 그는 그렇게 일은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에게 위임 시킨 채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목적지야 가다 보면 뭐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슨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니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더니만, 뭐라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뭐가 어쩌고 어째? 고로 눈에서는 레이저가, 입에서는 화염방사기의 화마가, 정수리와 귀에서는 사극에 등장하는 폭주기관차의 증기가...! 무슨 증기기관차 토마스야 뭐야? 하여간 밑도 끝도 없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마법 같은 회오리 바람을 타고서 날아올라 구름이 정말로 솜사탕인가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이 무엇이냐, 신나는 새로움이란 진짜로 어떤 것이냐?
그런데 그것은,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서, 으쌰으쌰로 기분이 달아올라 좀 더 면밀한 검토를 거쳐야만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어떻게 잘 하면, 잘만 하면 겨우겨우 말이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간발의 차이로 못할 수도 있고.
한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 그가 뽑은 물품 중에서......! 여기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