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마침내 열띤 권태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적당한 침체기가 과연 언제 끝날지를, 점심 내기로 예측하다 포기한지가 언젠데. 누구와? 누구긴 누군가 지니겠지. 걔 말고 누가 있어. 그럼 곧 있으면 허언증이 도질 차례일까? 허언증은 개뿔! 강단 있는 숙녀로부터 구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아부를 일삼는 아가씨들은 연락할 생각도 없고. 아는 여동생들도 다 떨어져나가고. 지들한테 교양미를 전수해준 스승님 은혜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야. 어? 그는 결정적으로 뭘 해도 재미없기 일쑤였다. 자존감 화장품도 안 쓰지 아예 화장품 냄새도 맡지 않고. 자존심은 미동도 않고. 그럼 뭐 고결한 허영심에 흠집이라도 난 건가? 밀고 당기는 흥미로운 연애처럼, 영악한 바람잡이의 감미로운 유혹처럼 뭔가 색다른 뭐랄까. 껀수? 새로운 개구멍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너구리굴을 어떻게 찾겠나, 무슨 재주로. 아첨과 교태와 애교! 그럼 혹시, 짝사랑 받기는 이제 영영 종료되어 버린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꺼야 그럼 쓰나, 절대 절대 안돼지! 그럼. 뜨거운 애정 공세를 구태여 마다하지 않는 건 남녀 공히 공통점. 남녀의 속마음은 절반쯤 똑같을 테니. 방식만 다를 테니까.
따라서 그럼 그녀들도 견딜 수 없는 심심함, 아니면 미칠 듯한 외로움에? 공상에 지칠 데로 지칠 상태도 이젠 지긋지긋 신물이 나는 구만. ~라고 NB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굴러온 호박을 반겨야 하는데 풍성했던 여복을 걷어차버린 형국이란 말이지. 거 참 나! 딴청 피우며 딴생각 못하도록, 뜬구름 잡듯 개꿈 꾸기식 흑심에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일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대충 일과를 보내던 중 그는 시간이 임박해서야 약속이 생각났다.
서둘러 그는 약속 장소로 갔다.
사랑과 우정 사이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숙녀를 만나러.
그는 그렇게 낮 2시에 에밀리와 만났다.
만나서 나눈 수다야 별 얘기 없었다.
「로즈마리한텐 한마디도 말해선 안돼. 알았지? 입도 뻥끗 마. 걔 소문 제조기란 거 알고 있지? 너 말하면 큰일난다. 응?」
「아니, 왜?」
「왜긴 왜야. 넌, 하지 말라고 해야 할 거 아니니? 안 그래?」
「안 그러긴 누가 안 그래!」
「맞잖아? 내가 널 모르니?」
「나 이제 철들었어. 정말이라고.」
「늬가, 철들어? 그걸 누가 믿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말이 되는 소리? 로즈마리가 늬 험담하고 다니더라. 뭐 그런 얘기?」
「재미없다 재미없어.」
「재미없기는 늬가 더 재미없어. 알어? 어? 그러니까 늬가, 됐다 됐어. 관둬 관둬.」
NB는 15시에 에밀리와 헤어졌고, 16시에 로즈마리와 만났다.
역시나 특별히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난 어떡하면 좋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러게.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물어봤지?」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몰라? 모르면 말고.」
「너랑 말을 섞으면 왠지 모르게 골탕먹는 것만 같다는 느낌. 넌 날 놀려먹는 무슨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 거니? 넌 정말 그걸로 뭔가 있다니까. 이야~ (절레절레)」
「그럼 어쩌란 말이니?」
「꼭 뭐 어쩌란 얘기는 아니야.」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 왜 이래?」
「왜 이러긴 뭘 왜 이래?」
「그게 뭐야.」
「난들 아니, 누가 아니!」
그는 그러다 17시에 로즈마리와 헤어졌다.
NB는 저녁 6시에 대충 혼자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
어쩐지 재밌을 거 같아서 햄버거를 절반 잘라서, 양쪽 어깨에 올려놓고 사진도 찍었다.
낯선 사람한테 부탁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걸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다. 물론 댓글은 0개. 이런... 그만.
그런 다음 저녁 7시에 아는 동생들을 만났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도록 키스해주세요. 라고 말할 줄 알았니?」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할까? 라는 말을 내가 아닌 너가 듣기를 바란 건 아니고?」
「뭐, 뭐가 어째?」
「왜들 그러니?」
「그건 그렇고. 얘랑 나랑 오늘 하루만 사귀기로 했어. 축하해줘. 그런데 내 여자친구 못생겼지? 그렇지?」
「장난하냐? 어? 장난해? 허당계에서 일컫기로, <형 내 여자친구 못생겼죠─누구씨 내 애인 못생겼죠?>라는 말을 해도 되는 처지는 딱 정해져 있어. 그렇다고. 여자들 세계에서 잘난 척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서 주동하며 빨빨거려도 괜찮은 여자와 안 괜찮은 여자가 딱 정해져 있듯이. 언제적 얘기를 듣고서 기분 좋았던 추억 때문에 그거까지 따라하니? 따라할 걸 좀 따라해라. 응? 아 유치해. 그게 뭐니? 쟤 좀 봐봐. 얼굴 울상인 거 안 보여? 그건 놀리는 거보다 심해. 응? 두 번 꼬아서 매기는 거보다 마음 아프단 말야. 알겠니? 어? 늬가 더 나뻐. 딴사람이 아니라 늬가 더 밉다고. 밉상 캐릭터 연구하니? 아니면 그거 정말 메소드 연기 뭐 그런 거니?」
「기분 풀어. 그냥 한번 해 본 말 가지고 말이야.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심각했어? 미안 미안. 난 가죽점퍼도 입지 않았고 수트도 입지 않았어. 난 캐쥬얼 입었다고. 어깨 위에 벽돌이나 햄버거도 올려놓지 않았어.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말이야, 뒷목이 심하게 뻐근한 걸 보니 내 위에 누가 올라가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 어제 생맥주 통을 들춰메고서 옮기다가 삐걱했나, 가전제품을 옮기다가 결렸나? 혹시 내 위에 누가 있니? 보이니, 안 보이니? 잘 봐봐!」
「너네 공포영화 찍니? 기분 세하게 왜들 그래?」
「진짜. 소름. 와, 대박! 끝장. 완전 신기해. 이럴~ 줄 알았니? 그만 해. 아 오싹해.」
그는 깨달았다. 역시나 자긴 1 대 1 스타일이라고. 이성과는 개인적으로, 이성이 아니면 아무래도 좋고.
그러다 마침내 심야가 되어서야 솔깃한 건수가 잡혔을까?
2
심야니 뭐니 전날은 시시했다. 아무일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평소대로 또 공상을 시작했다.
돌팔이 허당이 노상 떠들어대는 어설픈 사랑의 3박자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그게 그러니까 그냥 허당들 치를 떨게 만드는 황당한 환상론이라고? 정말로 호박은 은근 허당만 보면 마음이 저절로 기운다─끌린다─심신분리─설렌다고? 떤다, 가 아니라 떨린다고? 그분들의 씁쓸한 갈망에 따른 대망의 성과를 보아하니 어쩌면 꼭지가 돌만도 하다. 가만 보니 뚜껑이 열리면 닫아줘야겠네. 다독이며 달래야지 별수 있나. 아무튼 NB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만, 그는 신동이자 귀재보다는 올드보이쪽으로 성큼 다가서는 형세이니만큼. YB라고 우겨도 상관 없지만. 말하자면 그가 주장하는 사랑학은 썩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닌가? 어쨌든 그건 분명하다. 두 가지를 원한다는 것. 두 가지를 심하게 좋아한다는 것. 첫째 짝사랑 받기, 둘째 유혹 받기. 꽃 들고 기다리며 사랑을 하기가 아닌 뭐-뭐, 뭘 '받기'라니. 저런 저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심으로 미루어 추정컨대 숙녀가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화하는 것처럼 바람둥이의 연정도 결국 그걸로 귀결되는구만. 밖에서는 으쌰으쌰 <여-바텐더 없습니다. 바텐더 남자입니다> 다시 으쌰으쌰. 그러다 집에만 오면 그냥 시무룩시무룩 겔겔겔 쿨쿨.
「오빠 자?」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언제나 첫사랑이자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순정인 줄도 모른 체 어느덧 여성잡지1은 통달 및 숙달해버렸고. 스탕달의 연애론─한정판 향수─색연필과 일기장─아르뛰르 그뤼미오의 앵콜 소품집 CD─오페라 아리아 CD─향긋한 비누─세련된 귀걸이─초정밀 인형! 그녀들한테 선물하는 순서도 딱 정해져 있고. 그래서 그녀들은 남자친구-남편 흉보기에 오늘도 여념이 없다. 아니 아니, 없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행복한 인생이자 아름다운 사랑이기를 기원하니까. 아무튼,
참 나! 뭐야, 그게 대체 뭐냐고. 그러니까 어른들 말씀하기로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지. 그래서 화병과 꽃이 안 어울리지. 허접한 허당한테 넘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무서운 인상이 장기인 마초의 구애를 받아들인다고. 막대하다가 어쩌다 한번 잘해주면 그게 또 효과가 꽤 괜찮거든~! 진짜로 효험이 좋을까? 믿거나 말거나! 그녀들도 그녀들이다. 그걸로 보자면 사람들은 참 비슷하다. 정말 많이 비슷비슷. 화장도 비슷하고 원하는 이상도 비슷하고 이루고 싶은 욕망도 비슷하고. 바디랭귀지도 똑같다. 여자의 낭만적 소원이라고 하면 미남들의 열렬한 구애가 모두 나에게 집중하는 것일 테고, 남자의 야망이라면야 쉬쉬쉬-쉿. 아마도 남녀 공히 바라는 건 똑같네 똑같아. 남녀 모두 오빠&도톰한 목소리에 약함. 미인계와 미남의 출연에는 더 약함. 아니, 뭐가 먼저냐랄 것도 없이 뻔트면 대만족. 아부를 잘하든 못하든 딸랑딸랑 감언을 절대 기피하진 않음. 듣기로는 이 세상에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그럼 혹시 그도?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먹고는 살아야 하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는 진리.
따라서 그는 허한 심정 찡한 약속 없음에 과소비라는 방점을 찍고야 말았다. 만년필, 모자, 선그라스, 넥타이, 향수. 그러다 품위 유지비가 떨어지기 직전에 싫증이 났다. 또 금새 재미없어진 거지. 뭘 해도 이렇다니까. 언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새침한 허영심을 신나게 만족시키더니 언제 그냈냐는 듯이. 낭만적 감수성이 지적 호기심을 이긴 것일까? 아니면 부드럽고 섬세한 교양미가 놀기 좋아하는 심성에게 패한 것일까. 그야 어쨌든 은근한 허당의 입장에서야 볼썽사나운 연패만 아니라면 그뿐. 그런데 설마...! 사랑도 혹시 이런······식이면 곤란한데. 나쁜 남자들이란. 그야 그분들 사정이고. 바람둥이 주의보와 말괄량이 길들이기야 당사자들 소관이고.
그럼 그 다음은? 낭만파의 취미인 허영기마저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는 그 다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말해 봐 말해 봐, 어서 내게 말해 줘! 그 다음이 없었다. 차라리 할 말이 떨어진 연애가 낫고, 오히려 할 일이 없는 방학이 좋겠네. 악당이 없어서 벙찐 주인공 영웅이 더 재밌겠다고. 걔들도 쉬고 놀고 그래야지 무작정 날이면 날마다 달리 수야 없는 일이니까. 좌우지간, 시간이 정지된 거다. 애정이 식어버린 연애처럼 밍밍함을 방불케 했다. 할 일은 하기 싫고 엉덩이는 근질근질하고. 팬클럽 회원들을 열광케 하는 신기한 착상과 기발한 영감은 통 소식이 없고. 그걸로도 모자라 잔재주는 그대로인데 잔주름은 하루가 다르다는 거. 천상 그게 반대로 되야 하거늘. 세월은 어찌 그대만 비켜가는지 난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라고 찬미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공상병과 허언증이란 병세는 좀처럼 차도가 보이질 않네? 그러네? 어머머, 진짜로?
그러므로 그는 도망가기로 했다.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목적지도 필요없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출퇴근길에 어느 벽보를 보게 됐다.
<일명 패자부활전>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랬다.
<루저 대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쩌고저쩌고>.
그는 생각했다. 오히려 저런 데 정말로 고수들이 많을 수 있다고. 푼수랑 바보는 바쁠 테니까.
한번, 가 봐? 그럼 저분들 깜냥이나 관전해 볼까? 그럴까? 그거 썩 나쁘지 않은데? 괜찮을 듯 한데?
테리우스의 화려한 외출이 아니어도 괜찮아. 저거면 돼. 저거면 된다고. 탄복하지 않아도 좋아.
OK! 좋았어. 이거야. 좋다고. 뭘 고민해. 저거나 보러 갔다 오자. ~라면서 그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3
장면 전환.
날짜는 다음 날.
장소는 루저대회가 열린다는 카페.
음악은 장-바티스트 륄리의 코메디 발레 <서민 귀족> 모음곡 중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첫 번째 에어 : 사라방드.
NB는 그곳에서 액자로 걸려있는 '루저대회 벽보'를 보고 있다.
결국 그가 제대로 오긴 왔는데, 날짜를 잘못 봤던 것이다.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까지. 다 맞음. 다만, 그런데 1년 전.
그토록 고대해 마지않던 신비가 다 뭐고, 어찌 된 영문인지 통 추정할 수 없는 환상을 어디서 찾겠나.
「설마 길거리에 붙어있는 저런 벽보 보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죠? 그렇죠? 가만 보면 꼭 그런 손님들이 간혹 있다니까요. 참 나!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여길 다 찾아올 생각을 하시는지. 물론 저도 그런 때가 있긴 했으니까 이해는 하죠.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뭐 어쨌든 제가 이 카페를 인수해서 명색이 카페 사장입니다만. 거 어째 이상한 게 말이죠, 전 주인이 여길 헐값이 넘겼어요. 네? 거저요. 그럼 아무런 조건이 없었냐, 하면 아니죠. 그건 바로 저기 저 벽에 걸려있는 벽보. 무슨 저게 보물도 아니고 작품도 아닌데. 저렇게 고급스런 액자에 꼭 넣어서 보관 및 전시할 필요가 있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아, 그러니까 전 사장이 바로 저걸 보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을 테니, 저보고 대회 참가 신청서를 주면 받고 아니면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거 있죠? (검지를 펴서 귀옆에 대고, 빙글빙글) (몸짓) (손짓) (발짓). 저 안쪽 금고 안에 그 신청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어요. 무슨 추억의 콘서트장에 그 뭔가가 수북이 쌓였다나 뭐라나 그거도 아니고 말이죠. 허허허. 물론 전 주인이 받은 것만요. 그런데 쟤 얘기 재미없죠? 아무튼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손님께서 하도 저 벽보를 유심히 살펴보시길래 그냥 미술관에서 그림 설명하시는 분들처럼 안내 말씀 읊은 것 뿐이에요. 네. 그럼요. 허허.」
하긴 루저대회를 믿은 내가 바보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차마 눈뜨고 봐주기 힘든 꼴불견 드라마의 주인공이 혹시 나? 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는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적잖이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정말로 저 벽보를 거리에서 보고 왔다며 주인장한테 본인 입장을 밝힐 수도 없고. 자긴 이미 바보가 됐다는 걸 알아야만 하고.
바로 그때!
아아, 정말 오랫만이다.
사무실에 설치된 레이저 시스템이 사이렌을 울린 게 말이다. 즉각 핸드폰으로 알림이 왔다.
녀석이 곰탱이처럼 겨울잠을 잔 거도 아니고, 시퍼런 눈을 부릅뜬 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니.
일단 뭔 허당대회인지 뭔지도 무산됐으니, 그는 속히 사무실로 떠났다.
그는 자기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차에서 차분한 음악을 들었다. 바로,
헨델의 오페라 <아리오단테> HWV33 중에서 아리아 ‘사랑의 날개 활짝 펼치고’.
그렇게 사무실 앞에 도착했고. 일단 바로 들어가기는 그러니까 핸드폰 앱을 켜서 지니를 소환했다.
지니 나와라 지니 나와라, 오바.
지니는 깨어났다.
「늬가 예카테리나 2세야 누구야?」
「예카테리나 2세?」
「그래. 늬가 예카테리나 2세냐고?」
「예카테리나 2세가 누군데?」
「예카테리나 2세도 몰라?」
「어. 몰라. 모른다구.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누군데, 예카테리나 2세가?」
「모르면 넘어가.」
「뭐? 얘가 진짜!」
「그건 그렇고. 용건이 뭐야?」
「너 방금. 뭐야? 라고 했니?」
「흐흠. 허허. 뭐예요, 오빠!」
「뭐긴. 레이저 시스템이 가동됐으니까 딴일 다 제쳐두고 온 거지. 사무실에 나타난 게 누군데 그래?」
「사무실에? 아~ 사무실에 척키 인형이 혼자서 날아다니니까 레이저 시스템이 사냥개처럼 바빠진 거겠지.」
「뭐라고?」
NB는 사무실로 뛰어갔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정말로 척키 인형이 날아다니니는 않고 펄쩍펄쩍 뛸려다가 말고 막 그랬다.
그 척키 인형은 저번에 친구 지아니와 인형 교환하기로 말미암아 데려온 녀석이었다.
그런데 마침 지아니한테 전화가 걸려오네? 받았다.
지아니왈,
「기왕 털어놓는 김에 속에 담긴 못했던 얘기들. 속 시원히 말해봐. 내가 정말 못견딜만큼 좋은 거야?」
「뭔 소리야? 그리고. 설마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어? 그런 얘길 전화로 하면 어떡하니?」
「이 오빠 좀 봐 봐. 정말인가 보네? 응?」
「그런데 늬가 준 척키 인형. 그거 혼자 뛴다는 거 왜 얘기 안했니?」
「내가 말 안했어?」
「그럼 안했지.」
「오빠가 안 물어봤자나?」
「넌 참 오빠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특이한 재주를 지녔구나.」
「그건 그렇고. 오빠 뭐해? 바쁜 일 없음 넘어오시지. 그리고 오빠 지금 검정색 옷 입었지?」
「응.」
「머리카락 하나도 빗지 않았지?」
「응.」
「사무실에 007가방이 보이네?」
「뭐야. 정말로, 보여?」
「오빠 뒤 돌아봐.」
그는 뒤 돌아섰다.
「와 오빠 뒤통수에 뭐라고 써 있네.」
「내... 뭐라고 써 있는데.」
「난 바보!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아 쫌.」
「그런데 있잖아, 키보드는 아직도 기계식 쓰네? 노트북은 왜 아직 안 바꿨어? 그림도 저번에 바꾼다면서 아직 그대로고. 뭐야? 재미없게! 화분은 왜 그렇게 시들시들한데? 물 주는 거 또 까먹었니?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허구헌 날 허당이 당황할 만큼 격렬한 환희, 막 그런 거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수염 좀 깎고. 얼굴이 잔디밭이야 뭐야? 그리고 또. 오빠 어제 밀가루 음식 먹었어, 아님 술 마셨어? 얼굴이 왜 그렇게 부었어? 눈은 왜 그렇게 튀어나왔고. 오빠가 무슨 만화 주인공이야 뭐야? 이런 젠장. 허허. 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제기랄스. 뭐야, 뭐냐고. 젠장, 입도 튀어나왔잖아? 목젓도 튀어나왔고. 어머머머 배가, 점점 나오네? 팔은 짧아지고. 오빤 안 튀어나온 게 뭐야? 설마 오늘 아침에도 피노키오?」
「너 뭐야? 늬가 뭔데? 어? 늬까짓 게 뭔데? 장난치지 말고. 아 글쎄 농담하지 말고. 늬가 그걸 다 어떻게 알아? 아 진짜. 너 지금 나 보고 있니?」
「그럼 보고 있으니까 알지. 거기 척키 인형에 카메라 장착되어 있어.」
「진짜로?」
「아니. 뻥이야!」
「뭐라고?」
그렇게 해서 NB는 떠났다. 바로, 지아니 집으로.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조촐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4
NB가 쓰고자 하는 작품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랬다. <등장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색가의 다혈질 본능 + 기분파 로맨티스트의 근성 + 낭만주의자의 숨길 수 없는 열망까지. 그리고 악마에게 필적할 만한 주인공이 '질투의 화신이 총애하는 환상머신'을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겠나. 신나는 모험과 찐한 사랑 그리고 고급 사교계로부터의 러브콜까지 그 모두가 한꺼번에 폭주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게 어디 쉽겠나. 꿈결 같은 이상과 용한 한패를 이루는 다채로운 호사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악마가 귀뜸해주든 천사의 풍문이 들려오든 어쩌든.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그렇게 NB는 지아니가 초대한 숙녀들 파티에 참석하러 갔다.
중간 건너뛰고.
장면 전환.
파티장 도착.
딱히 거창함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예상보다 조촐함.
그래도 괜찮음.
피타장의 음악은 왜 하필 고전음악인지. 그건 이랬다.
헨델의 오페라 <쥴리오 체사레> 2막 2장 중에서 시저와 니레노의 레치타티보. ‘쉿, 조용히 해 보거라, 무슨 일입니까?’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 ‘아름다운 눈동자’.
아하! 아마도 이따 혹시 클럽행?
들뜬 예감은 몰래 감추고.
지아니 집에 모인 인원은 앙증맞았다. 그래도 파티는 파티.
그런데 얘네들이 여기 있네? 엇그제 낮에 만나서 헤어지고. 느즈막한 오후에 만나서 헤어지고.
그럼 지아니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아가씨들 만찬회에 별책부록으로 끼지 못했을 테니 지아니에게 감사해야 할 일.
어쨌든 그녀들과 NB는 어쩐지 말이 잘 섞이지 않는 듯 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다.
지아니와의 대화는 이랬다.
「밤 하늘에 마젤란 은하가 보이는 걸 보니, 내일은 행운이 우릴 찾아올려나 보군.」
「어머 얘. 너 별자리 잘 아니?」
「별자리? 관심없어.」
「그럼 마젤란 은하는 뭔 얘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마젤란은 무슨!」
에밀리가 콜라병을 못 따고 있길래.
「도와줄까?」
「아니. 사랑해줘.」
「뭐라고?」
「못들은 거야, 아님 못들은 척 하는 거야? 아마도 믿기지 않는 거겠지. 맞아. 오빠가 잘못 들었어.」
「나 잘 들어. 보고 듣고 먹고, 아무 지장 없다고. 내가 잘못 듣지 않았는데. 분명 그런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그건 그렇고. 오빠가 크리스티나 좋아한다며?」
「누가 그래?」
「누구긴. 크리스티나 그년이 소문내고 다니겠지. 보나마나 뻔해.」
「뭐, 진짜야?」
「진짜겠니. 뻥이야!」
「너, 진짜!」
그러다 그녀들은 NB만 쏙 빼놓은 채 자기들끼리 로즈마리가 쓴 일기를 들여다보면서 수다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들이 읽고 있는 로즈마리의 일기에 씌여진 내용은 무엇일까? 대충 들리는 내용을 읊어보자면 이런 내용 같았다.
<오오, 이 남자 깬다? 유혹해서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간접적으로 얼쩡얼쩡 알짱알짱 어떻게 좀 어떻게 유혹하고 노력해서 그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고. 중간에 싫증나면 인터넷 검색. 검색어는? 남자가 여자한테 싫증나게 하는 법! 남자랑 여자는 똑같다. 마음은 완전히 떴어도 아직은 애인. 왜? 없으면 허전하고 아쉬우니까. 부부도 이거 저거 다 따져서 이별하지 않는 거지, 각자 속사정들 들어보면 사랑은 결코 쉬운 게 아님. 사랑을 시작할 때는 여자가 먼저 꼬리를 흔들었고, 중간에 다투면 내가 너 때문에 이처럼 초라한 아낙네가 됐는데 어쩌고저쩌고. 여자는 만인이 자길 바라보길 원하고, 남자는 눈이 돌아가기 바쁘고. 아니다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더라도 나는 절대 아니다? 아니면 말고!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얘 있지. 나 재밌는 검색어 봤어.」
「뭔데?」
「뭔데 뭔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몇 번이나 뭐라더라? 몇 명의 촌년들이 신어봤을까-던가.」
「됐고. 분위기가 너무 침울한 거 같지 않니?」
「너도 그래?」
「좀 그렇지?」
「어때! 우리, 갈까?」
「클럽?」
「가자.」
「가야지. 클럽-해야지.」
「오빤 같이 가기 싫으면 가지 말고.」
「그래. 떠들썩한 데 뭐하러. 시끄럽잖아. 가기 싫으면 가지 마.」
「그래. 우릴 보낸 다음 보나마나 이렇게 투덜거리겠지. 그러든가 말든가! 그럴 꺼야. 그렇고 말고.」
「누가 싫데? 어?」
그렇게 네 친구들은 클럽으로 갔다.
5
장면 전환.
클럽.
분위기 좋고 젊음은 즐겁고.
그런데 NB는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기분 때문인가? 어딘가 모르게 시끄럽고 아직 취하지도 않았고.
2급 염탐꾼의 면밀한 탐지력이자 1급 관찰자의 탁월한 추리력으로 보건대 어쩐지 오늘은 끝이 좋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가끔 보면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꺼려하거나, 춤추기를 챙피하고 왠지 낯부끄러워하시는 분도 간혹 있긴 있다. 기질적으로 젊은이 시절에만, 아님 노신사가 되어서까지 일관된 경우도 있고. 그야 어떻든 YB가 OB로 변해가며 내 인생을 경영하다보면 알게 된다. 무엇을 알게 되냐구요? 바로, 일단 '입장을 하느냐 못하느냐' 그 때문에 누군가를 부럽지만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을. 20대들 주무대에 가서 남사스럽게 삼춘이, 고품격 30대 부자가 평균이 사교계에 당숙께서 나도 좀 끼워주세요!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물겠지만 집에서 TV 드라마로 깽판 장면을 보다 소파에서 히죽거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런데 개 100마리 1000마리 그처럼 개떼가 안무 없이 군무를 펼치는 "삐───" 5분전에 우리 어른들이 명함을 내밀 수는 없는 일. 그래서는 안되니까. 아무튼 춤? 그까이꺼 그냥 대충 옆사람이랑 비슷하게 흉내내면 그만. 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기면 그뿐. 단, 음악이 중간에 멈추는 식의 나이트클럽과 클럽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것만 알면 된다. OB께서 왕년에 좀 노셨다면, YB는 대충만 세어봐도 클럽에 100번 200번 가 봤을 테니까. 그런데 숙녀에게 클럽 몇 번 가봤냐고, 그분들은 대체 왜 물어봤을까. 도대체 왜 물어봤냐고. 굳이 여쭤보지 않아도 좋을 궁금함을 뭐하러. 설마 노파심? 아님 그 확연한 차이가 재밌다고 생각해서? 번호표 뽑는 기계에서 번호표를 배부받은 사람처럼, 로또 복권을 소소한 행복으로 사는 사람의 심정. 호박 터미널은 이해해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스무살 젊음을 응애응애 애로 보는 시선도 틀린 건 아니지만, 차라리 응애응애 애였으면! 됐고. 재미없고. 시시콜콜한 수다는 이쯤 줄이고.
그런데 잠시후.
아니나 다를까.
클럽 안에서 NB와 그녀들은 연락이 닫질 않았다.
전화해도 받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도 꺼져 있고.
어쩌면 괜찮은 남자들과 대담중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친한 누군가를 만났을지도 모르고.
그럼 NB만 팽당한 건가? 아님 알아서 빠져주게 된 거가. 그도 아님 원래 처음부터 껴들면 안되는 파티였는지도 모른다.
빈말에 또 넘어온 거지. 왜 아니겠나. 악마가 부러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만한 새로움. 그건 역시나 빈말을 참말로 듣는 능력이다.
역시 NB다. 누가 NB 아니랄까 봐. 클럽 이거 시끄럽기만 하지 하나도 재미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할 사람이 있어도 일단 말이 들리지도 않고.
밀실은 어두컴컴해서 어딘지도 모르겠고. 오늘 내가 살께, 라는 말 없이 조용히 계산하기. 그래서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생색내기도 안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기회를 안 주네 그래.
그런데 남자들은 오히려 '생색내기' 약간씩 나름 좋아하는데. 여자들은 왜 그러지? 그러면서 또 자기들끼리 티격태격.
「어머 얘~ 우리 남편 귀찮아 죽겠어. 그만 좀 괴롭혔으면 싶은데, 날 가만 놔두질 않아.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짐승. 딱 짐승. 완전 짐승. 지치지도 않나 봐. 지겹지도 않나 봐, 얘. 아 맞다. 얘 있지, 난 늬가 너무 부럽다. 진심. 응? 진짜로!」
뭐라고?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녀들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 좋아서일까, 싫어서일까. 어쨌든 그녀들 세계는 그녀들끼리 알아서 하는 거고.
그렇게 NB는 혼자서 클럽 밖으로 나왔다.
이건 말이야 특별히 울적하지도 않고 착찹하지도 않고.
차라리 편의점에서 값싼 위스키라도 사서 병나발이나 불고 싶은 심정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기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완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였다.
그 다음 그는 집으로 갈려고 했다. 그런데 지아니 집에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놓고 온 게 생각났다.
지아니 집 안이 아니라, 바깥에 놔두었기 때문에 특별히 지아니와 연락이 닫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지아니 집으로 갔다.
그는 저능아였고 오늘은 꽝이었다. 노잼. 중뿔난 존재. 소문에 듣자니 소문 자체가 없고. 물고 늘어질 건수도 없고.
중간 건너뛰고. 그는 지아니 집 정원에 놓여진 자기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갔다.
중간 건너뛰고. (그런데 그 가방이 정말 NB의 가방이었을까, 하면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행복감은 호황에 절망감은 불황인 여건일까? 그런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나 분명한 건 그거다.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랄지 <엉뚱한 누구 여기에 잠들다>라는 묘비명은 아직이라는 점.
거 참 바닥을 기는 발단, 더럽게 재미없구만 그래. 그러니 몽환적인 전개에 이은 찬란한 절정은 꿈도 못 꾸지. 잘한다 잘해.
6
웬만한 공상가의 착상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엉뚱한 전개, 아직이었다. 한사코 환상적인 발단을 거절할 의도는 없거늘.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만큼 듣고서 어른이 됐는데. 그런데 일하고 또 일하라고 누가 겁박하지도 않는데. 설마 그는 일을 좋아하는 걸까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하는 것일까. 하긴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런 철학적인 질문이 재미없기는 하니까 쓸데없는 의문점이다. 부질없는 진지함이다. 강박관념에 편집증에 일중독과 허언증 또 조증.
그러다 그는 어느 여행 광고를 보게 됐다. <공부하기 싫고 일하느라 지친 당신, 무료한 일상이 지겨운 당신. 자, 떠나세요 떠나. 제발 좀 떠나라고! 어?>. 아하! 문득, 그는 팬클럽 회장 롭이 권유한 작업실에 가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된 게 롭은 그런 별장을 참 많이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새로운 곳으로만 말이다. 만약 가서 재밌으면 좋고 재미없어도 기분전환하고. 일하기와 놀기를 동시에 할 수는 없지만, 거의 겹쳐질 수도 있다. 희박하게, 공부하는 게 즐거울 때도 있으니까. 그러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상황에 빠지더라도. 그러다 어중이떠중이로 전락할지라도. 그러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라는 사랑의 기쁨이, 기발한 쾌감을 거쳐 망신스런 이별로 끝날지라도. 그는 타석에 들어서기로 한 것이다. 쟤는 뭔데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기 대소사를 조명발 앞에서 발표하는 거야, 요즘 말로 관심종자 뭐 그런 거야? ~라는 의아함. 어차피 감수해야 마땅하니까. 일정한 비율이란 언제 어디서나 횡행하는 게 정상이니까. 안 그럼 속으로 더 할 테니까. 그분들 사정 듣고 형편 이해하면 건전한 취미 같은 게 없어서일 수도 있고. 원래 삐딱할 수도 있고. 아무튼 떠나서 글쓰기의 괴로움 때문에 난항을 겪건 상태가 맛이 가건 가야만 했다. 빈정거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험담가들의 야유를 신경 쓰고, 비꼬기로 어데서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조롱꾼들의 빈축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만 하다가는 기회는 도망가기 마련. 게임은 끝나고 세일도 끝나고. 짝사랑 받을 기회마저 떠나면 쓰나.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라는 관중의 야유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알아야 하는 법. 하오나 그건 무대 위 사람들 얘기. 현실은 덤덤하고 특별한 약속은 없고. 폭로전도 없고 스캔들도 없고. 또 없다 증후군? 허영기와 바람기와 푼수기를 떠안고 있어봐야 답은 없다. 웃음기는 바닥났다. 그래서 그는 당장 떠났다.
7
별장 도착. 별장의 이름은 없었다. 단지 주소뿐.
일단 간단히 청소를 마쳤다. 동네도 대충 둘러봤고.
아마도 내 인생은 장밋빛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지 않을 거라는 예감, 그걸 날려버리기 위해 음악도 틀었다.
쥬세페 삼마르티니의 오르간 협주곡 F장조 Op. 9 no. 2
그런데 웬 낯선 방문객이 집으로 찾아왔다.
「저기 있잖아요. 옆집이에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여기 사람이 살지 않던데.」
「아 네. 집주인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한 1주일 묵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허허. 거 참 인상이 좋으십니다. 왕년에 여자 깨나... 아니 그게 아니라.」
「허허. 선생 어째 보아하니 예술가처럼 보이시는데요? 제 눈썰미가 꽤나 적확한데, 아마도 틀리지 않은 듯 하온데. 어때요! 바쁘시지 않으면 함께 간단한 티타임이라도 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NB는 옆집으로 건너갔고 티타임을 함께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티타임이 아니라 술파티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뭔 얘기를 나눴고, 어쩌고저쩌고는 건너뛰고.
다시 말하자면,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NB가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고, 보안관도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 동네 순찰대도 있었다.
「형씨. 정신 차렸수?」
그는 눈망울만 멀뚱멀뚱.
「중간에 오해가 좀 있었소. 그건 기억나죠? 선생 가방에 귀한 술이 있으니 그거 가져다 같이 마시자고 말씀하신 거. 중요한 얘기 중이니, 얘가 대신 옆집에 가서 가방을 뒤졌고. 그런데 그 가방이 심상치 않았고. 여자들 물건만 잔뜩 나오니, 이거 뭔가 수상하다. 그래서 얘가 다시 이쪽으로 건너왔을 때. 그때 형씨는 술에 취해 쓰러지셨소. 생긴 것 마냥 술이 되게 약하시구만. 뭐 어쨌든 가방의 본 주인과 연락을 해서 형씨 신원도 확인하고 어쩌고. 오해는 풀렸소. 이거 괜히 소란스러웠소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네? 내일 다 같이 요 앞 강으로 낚시하러 가시는 게 어떻겠소?」
일단 첫째 날은 그처럼 얼렁뚱땅 정신없이 지나갔다.
8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잠자코 얌전히 때를 기다릴까? 아니다. 어제 옆집 상남자들과 약속을 했다. 함께 낚시하며 놀기로.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몇 시간 남았다. 관찰자로써 그저 보고 들은 세상 얘기를 시작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신나는 인생이 발동 걸릴 것만 같은 들뜸이 시작되었다. 기본 관상은 개상이자 말상인데, 표정은 딱 개가 기분 좋을 때이자 말이 흥분할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약속 시간이 됐고 그는 옆집으로 갔다.
그런데 뭐야! 문은 잠겼고 문에 이런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형씨. 미안하오. 도시에 다급한 일이 있어서 우린 볼일을 보러 가야겠소.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하니 나중 거하게 한잔 사리다. 뭐 먹고 싶으신 거나 하고 싶은 거 있음 구상해 놓으시오. 그럼 이만.」
뭐야 이거? 참나 그럼 그렇지.
<자랑스러운 건 빈약하고. 솔직히 부럽지만 부럽다고 해서는 안되고. 선망은 금지요 품위 유지비는 턱없이 부족. 신부들러리는 솔직히 짜증나고. 그러나 나는 백댄서조차 못 됐고. 내가 보기에 난 이 정도면 만족하고, 샤워한 다음 보면 진짜로 나는 잘생겼어. 그런데 누가 나보고 못생겼다고 하냐고. 어?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하니 난 잔재주도 비리비리. 또 친구 결혼식에 가서 울컥을 하나, TV를 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나. 갱년기가 되면 어른들이 뭐 어쩐다는데 이건 뭐 몽정기만 내내 지속되니, 거 참 나. 발정난 암코양이는 떠나기라도 한다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투덜거리는 습관을 복구하겠나, 이제와서 엉망진창 잔머머에 기분 나빠 독학에 열중하겠나. 어제나 오늘이나 지는 비교는 운명이고. 남자는 폼인데 호박은 다 날 피해다니고. 나만큼 말이 잘 통하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떵~떵 큰소리 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냐, 라는 울분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 뭘 좀 아는 남자 라는 칭찬을 미녀에게 듣지는 못해도.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는데, 할 말도 없고 할 일은 재미없고. 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러워야 재밌는데, 그게 반대로 된 건가? 연인들은 행복한 연놈들로 보이고, 친교라고 해 봐야 <이상한 놈, 꽉 막힌 놈, 재미없는 놈> 즉 루저 1-2-3이니 이거 원. 그럼 뭐야? 정말로, 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러워야 정상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랑은 추접스럽고 우정은 유치하고? 맞네 맞어. 정말로 맞네. 알고 보니 진짜로 그렇구만. 따라서 티격태격 으쌰으쌰 해 봐야 바텐더 표정도 별로고. 말하자면 웨이트레스도 마음을 여는 당사자는 다 따로 있는 거구먼. 난 아닌데 쟤는 만나자마자 <오빠>되고 보자마자 손 잡네? 자연스러운 스킨쉽, 아아 나도 하고 싶다. 그런데, 마음을 열어? 마음을 뺐든 말든 쾌락마야 나중에 실컷 원없이 탄다 치고. 탐스러운 열매를 따먹고 화사한 꽃다발을 그녀에게 선사하는 건 다음에 하고. 일단은. 우리도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붙잡지 않는다" 정도는 안다고. 알지 왜 몰라? 나는 개가 아니고. 우리는 미치지 않았거든. 그런데 통 오지를 않는데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냐고. 응? 그러니까 안 그래도 옹졸한 마음 속좁은 심성 꽉 막힌 의중, 때로는 콜라 없이 햄버거 먹기나 도전해야지 뭐 별수 있나. 보자, 형편이 이렇게나 불쌍하다니. 인생은 쥐구멍이고 사랑은 정녕 없는 건가?>
~라는 친구의 속마음을 어쩌다 NB는 이따금 엿보고야 말았다. 웬만한 최면술사보다 낫고 어지간한 점쟁이보다 사람 마음 간파하기에 능한 우리 어른들. 그도 그랬다. 애가 아니었다. 어른이었다. 철없이 아직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러나 주력은 예전 같지 않고. 주량은 형편없고. 아빠 술 좀 작작 마셔 라는 꼬마 천사의 귀여운 대사는 드라마로도 못 듣고. 드라마를 일절 안 보니까. 차림새는 한심하고. 몸가짐 마냥 마음가짐도 흑심으로 가득하고. 그런데 마음은 동심처럼 춤을 추며 자꾸 혼자 외출하는 것만 같고. 심신분리니 공중부양이니 뭐니. 뭘 해도 자꾸 목적을 잊고서 어쩌다 딴길로 가고 싶고. 그러나 심심함과 재미없음을 양쪽에 꿰차지 않기 위해서 방심은 금물이고. 자, 하는 수 없이 NB도 절반쯤 그랬으니. 실제로 생맥주도 아니고 콜라 원샷 게임을 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본인은 아니라지만 친구들은 확실하게 그랬으니. 그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자,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 말고는 말이다.
무작정 즉흥적으로 저지르든, 생각 끝낸 다음 움직이든. 성과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먹을 것인가. 아니면 따먹을 뻔 말 뻔 겨우 겨우 어떻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거의 거의 따먹을 뻔하다 실패하느냐. 아름다운 성공이냐 멋진 실패냐. 결국 그건 실행 다음 얘기. 그래서 그는 일단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채 바깥으로 나갔다.
9
NB는 애마에 올라타서 일단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분히, 요한 아돌프 하세의 C단조 미제레레를 틀고서.
마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심심함을 반긴다는 듯이.
편집광적인 극찬 일색이 평균 중의 평균. 허나 그걸 훌쩍 뛰어넘는 환호 받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그 남자를 오래 관찰했지만 낭만이라고는 코빼기도 못봤다더라. ~라는 연애도 다음으로 연기.
왜냐, 인생이란 언제나 사랑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는, 비밀스런 갈망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옆집 아저씨들은 자길, 먹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바닷가 드라이브나 하며 기분전환을 하고 올까 하다, 급히 방향을 돌렸다.
별장 옆집 아저씨들이랑 했던 약속, 혼자라고 못할 것도 없으니까.
물론 그 정도 기본 장비쯤이야 차에 상시 대기중.
곧바로 그는 강변으로 갔다.
NB는 그곳에 도착했다.
전망 살피고. 분위기 진단하며. 자리를 정하고.
그렇게 낚시를 시작할려고 했다.
그런데!
저건...... 저건······ 저건...... 뭐지? 저건 도대체 뭐야?
그가 별장 옆집 아저씨들과 약속한 소일거리를 굳이 혼자 하러 왔던 게 화근인 것일까?
NB는 완전,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어머머. 어머머머머머. 이런, 느낌, 처음이야!
다름 아니라 저쪽에서 바로 옆집 아저씨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아니─에밀리─로즈마리도 동석해 있네? 저 인간들이 내 팬클럽원들을 어떻게 꼬셨지?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야!
마성의 희롱에 그는 그만 아찔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쑥스러운 의혹감. 쩌릿쩌릿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랬다.
10
NB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분들 말투를 흉내내서 먼저 저자세로 시작했다.
「형씨. 여기서 뭐해유? 우리 같이 놀기로 약속했잖유? 안 그래유? 어제 형-동생 맺었고, 당숙이네 뭐네 오늘까지 분위기 이어가기로 했잖아유~! 시방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시지 않을래유.」
「어? 오빠!」
「와, 오빠다.」
「저 오빠. 갔는데 왜 또 와?」
「그러게. 당숙. 가셨는데 다시 오시면 어떡해유?」
「그러니까. 방금 전에 가셨잖아유?」
「제가요? 제가 가긴 어딜 가요? 약속 시간에 들르니까 오늘 낚시 못 간다고 메모 붙여져 있던데유. 참말로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이에유?」
「어떻게 된 일이냐니유. 그건 우리가 묻고 싶네유. 방금 전까정 우리랑 재밌게 놀고, 맛나게 먹고, 신나게 자랑하고. 사랑을 논하며 인생을 노래했잖유. 거 뭐여, 형씨 기타도 잘 치던만유. 왜 말 안했시유? 우리 같은 촌닭들은 따라가지도 못했것구먼유. 여자 깨나 아니, 고수네 고수여.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발에 채이는 게 여자였겄시유. 우리가 인정허면 인정되는 거구먼유. 안 그래유?」
「격 떨어지게 오빠 정말 이러기야?」
「우리 불러서 재밌게 놀았잖아. 이제 다시 꽁트하자는 거야, 뭐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뭐하긴 뭐해? 오빠야 말로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내가 못살아 정말~!」
별장 옆집 형씨들의 말마따나 그는 이미 다 함께 어울려 놀면서 연가도 부르고, 춤도 추고, 어쩌고저쩌고까지 다 해버렸다.
하물며 옆에는 지아니, 에밀리, 로즈마리. 그녀들은 뭐냐고! 알고 보니 걔네들도 NB가 불렀단다. 참 나!
「그랬군. 그랬어.」
그는 대충 짐작했다. 초정밀 척키 인형에게 매력을 느끼는 걸 인공지능 지니는 가만 보고 있질 못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단을 모두 다 지니가 꾸몄다고? 하고도 남았겠지!
「어! 저기 가네. 저 차 맞쥬?」
알고보니 진짜로 도플갱어의 소행이었다.
곧바로 추적은 시작됐다.
우짜다가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일이!
차세대 플레이보이 대 도플갱어 조연의 대결인가.
그러니까 최근 허당계의 내력인 지적 허영심만으로 뭔가 아쉽다 했더니.
입이 근질근질하지 않았어도 엉덩이는 꽤나 근질근질했는데. 너 마침 잘 걸렸다?
그런데 이건 추적은 추적은데, 장르가 이상했다. 왜냐하면 액션 영화의 추적이 아니라 코메디 영화의 추적 같았으니까.
암만해도 이상했다. 통상 추적은 도망자가 최선을 다해서 도망가고, 추격자는 최선을 다해야 하거늘. 그래도 놓치기 일쑤.
현실에서 추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거 절대 쉽지 않다고. 필자는 옛날에 단짝 사이였던 친구 녀석이─단짝이 겹치고 겹치고 또 겹치고─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전-남자친구를 추적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놈이 눈치가 하도 빨라서 새로운 첩자가 한 방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면서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추적 시작 5분이 뭐야, 3분 아니 2분도 힘들었음.
곧 실정은 그런데 앞서 가는 똑같은 볼보 웨건은 너무 빨리가지도 않고, 따라잡히도록 너무 늦게 가지도 않았다.
악마에 홀렸는지 귀신이 씌였는지, JS는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하다 하다 NB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6번 1악장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추적을 하는 자나 당하는 자나, 정말 가지가지 한다.
어쨌든 그렇게 추적의 막판 스파트도 별 볼 일 없었고.
도착지는 <여성 환상 1.5>사무실이었다.
11
그는 그럴 줄 알고서 미리 여성환상 1.5 편집장과 안면을 터 뒀다. 줄기찬 아부에 끈질긴 찬미 공세로도 모자라, 집요한 우연을 빙자한 작전까지.
NB는 서둘러 도플갱어를 따라갔다.
경리와 몇몇 직원들과 눈인사를 나눈 다음 곧바로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사라. 그 녀석 어딨어?」
「뭔 녀석. 왜 다시 돌아온 거니?」
「뭐?」
「뭐가 뭐야?」
「걔 도플갱어야.」
「뭔 갱어? 바보에겐 못 당하겠군.」
「아 그게 아니라. 아 정말. 여기 후문 있니?」
그렇게 NB는 서둘러 후문으로 가다가 창문으로 내다봤다.
「너 거기 안 서!」
녀석은 살짝 NB를 째려보다가 어떤 몸짓을 취했다.
처음에 그는 뭔가 잘못 본 거 같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통상 이럴 땐 가운데 손가락이랄지 뭔가 위협적인 몸짓이랄지 그런 게 어울리는데. 그런데 도플갱어는 검지를 펴서 귀 옆에 갖다댄 다음. 빙글빙글! 그랬으니까. 이 자식이...!
그 다음에 녀석은 그대로 토꼈다.
그래서 NB는 쫓아가봐야 별 의미없겠네 라면서 포기했다.
「이제 시시한 영화 좀 그만 찍지 그러니?」
「자세한 사정이야 나중 얘기해줄께.」
「그닥 듣고 싶지 않네.」
「들어줘. 듣고 싶다며 애걸복걸해달라고. 그게 뭐 어려워? 우리끼리 그 정도도 부탁하면 안되니?」
「널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랑 놀아주다간 내가 더 멍청해질까 봐 겁나서 그런다. 알겠니?」
「알긴 누가 알아? 그러지 말고. 밀린 칼럼 고료나 지금 챙겨주라, 사라.」
「방금 전에 받아갔잖아?」
「뭐라고?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어.」
「넌 어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수 있니?」
「사라. 너 헤어스타일 바꿨네? 헤어핀 그거 잘 어울리는데? 진작 바꾸지 그랬니!」
「그래? 흐흠. 뭐? 내 정신 좀 봐. 또 감길 뻔 했어. 또 또 넘어갈 뻔 했다고. 이제 다시는 안 속아. 아무튼, 우리 바보짓은 그만 하자. 이쯤에서 그만. 응?」
「사라. 넌 너무 쿨해.」
「그거 아니?」
「뭘?」
「마라가 그랬어. 너 조심하라고.」
「마라 이년을 그냥 콱...! 정말로? 정말 그랬어? 세상에나, 어찌 그런 일이.」
「자긴 정말 가만 보면 말이야. 있지, 너무 응큼해. 알긴 알어?」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긴 가져왔는데, 어차피 남들은 관심없는 NB와 지니. 그 둘의 감정 대립일 뿐이었던 것이다.
영감인지 뭔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영락없는 광마였는데. 베토벤이 괴팍한 열정으로 헝가리 광시곡을 작곡하는 것처럼. 베토벤과 헝가리 광시곡? 거 어째...!
어찌 됐든 푼수의 몽상, 허영심 가득한 변덕쟁이가 상상하는 황홀한 쾌락. 그런데 그 변덕쟁이는 알고보니 남자였다더라?
그는 하는 수 없는 지니와의 말다툼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당장 지니를 만나러 갔다.
12
로맨티스트의 반쪽짜리 사랑. 이상주의자의 미완성 행복. 그게 아니라 따분한 열망과 얼빠진 소원뿐이라니. 저런 저런. 미련퉁이 인생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아첨쟁이라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까? 유익하지 않으니까 하찮은 공상쯤은 집어치우고. 그러지 말고 떠나볼까? 그런데 어디로! 또, 가면 돌아와야 하고 귀찮고 중간에 퍼진단 말이야. 가지 말자 가자 말자고. 그러지 말고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TV로 다큐멘터리나 보는 게 낫겠네. 무해하고 돈 안들고 얼마나 좋아. 신나는 모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이익쯤은 감수해야 하니 떠안지 뭘. 그야 어쨌든 나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기주의자일 것인가, 아니면 꿈의 의해 발동이 걸리는 몽상가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가, 문제가 아닌가. 됐고. 장타자니 거포니 대형 스트라이커니, 청초한 희망 그런 거 모르겠고. 솔깃한 뻔트의 후보군이 무엇인지나 고민해보자.
~라고 NB는 생각했다. 말이 나서 하는 말이지만, 그는 순진한 어린이도 아니고 때 묻지 않은 처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 바엔 오히려 아는 동생들한테 초저녁에 연락해서 대뜸 이렇게 묻는 편이 나을지도. 자칭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를 거들먹거리는 본인한테는 그게 더 어울릴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견자는 또 그 나름 의견을 존중 받으면 되고. 그러니까 그 농담이 대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다 큰 처녀가 어딜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시나.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니, 라고 혹시 엄마가 걱정하시지 않으실까? 그렇다고 설마 또 거긴 아니지? NC 이름 하여, 엄마한테 말하지 마! 그러든 어쩌든 솔직히 심심한데 재밌는 척 자신을 속이지 말고. 아, 맞다. 그러지 말고 우리, 만날까? 그럴까?」
그런데 재밌는 게 뭔고 하니, 그렇게 안부를 묻고 빈말을 던졌는데 상대방은 진담으로 받았다는 점. 사인의 불일치가 기쁜 약속을 이끌어냈다는 점.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다. 내가 아는 숙녀들 중에 뭐 어떻다느니, 내가 만나본 아가씨들을 통틀어 어쩐다는 둥. 또 있다. 사진발─조명발─화장발로 도저히 설명 되지 않는 타고난 뭐라는 둥. 힘이 일시적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와서, 폼 잡고 객관적으로 분명 너저분한 멘트인테 알고 보니 식상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뭐 그건가? 수컷이야 뭐 그렇다 쳐도, 걔들도 거 참 나. 긍정 일색이던가 싫은 게 완전 많던가. 모 아니면 도 같은데 또 가만 보면 완전히 내 마음에 쏙 드는 1.0미만은 흔치 않아. 흔치 않다고. 이미 가졌는데 내꺼 하자─바꾸자─머머하자! 물건은 그럴 수 있는데, 사랑은? 게다가 변심과 친하고. 심지어 어디로 튈 줄도 몰라. 우리는 잘 예측하고 섬세하게 추론할 수 있다지만, 보통 남자들이야 그게 어디 쉽나. 그러니까 뭘 좀 모르는 늑대에게 그녀들은 일생 미스테리일 수 밖에. 경주마, 당나귀, 회전목마, 야생마, 경비견, 황금새, 팔색조 그리고 사냥개까지. 변신이 필수인데 고집불통 들개로 남으면 그럴 수 밖에. 돈 주앙이냐 애완견이냐, 둘 중 하나로 그녀의 마음을 놀랍도록 한발 앞서 딱 맞추지도 못한는데? 그야 뭐 당사자들 사정이고. 아무튼 통과.
그렇게 그는 아는 동생들을 만나러 어쩔 수 없이 환상문학잡지 미스테리아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애틋한 사랑이 이루어질 뻔 진짜 거의 더티러브 직전까지 갈 뻔 말 뻔했을지는 다음 이 시간에.
광고주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간주곡이 울려퍼지면 달변가들 침묵하시거나 험담가들 할 말 많아지실 테니.
커튼콜이야 몇 차례 반복된다지만 그건 명연주나 열연에 해당하는 얘기. 하여튼 굳이 이런 첨언까진 말씀드리지 않을려고 했는데, 끝나는 마당에 살짝만 덧붙이자면 이상한 기승전결이 내내 늘어지다 엉뚱하게 전개에서 발단으로 되돌아간 점. 본의 아니게 재미없었던 점. 반성하고 속죄하며 송구함을 금할 길 없다는 점 아뢰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