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는 침착하게 한숨을 쉬고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매번, 매일, 항상 그렇듯이 책을 읽었다.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색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는 평범한 보통내기인지라 그것 하나는 일상 가운데서 꼬박꼬박 쉬지 않는 일과의 하나였다. 또 다른 이유를 하나 꼽자면 아이디어도 있지만 책 한권을 정독하거나 대충 보더래도 틈틈히 써먹고 싶은, 사용하고 싶은 표현이 하나 둘 눈에 띄인다는 것이다. 꼭 고급스러운 기법이나 어휘, 문구는 아니더래도 오히려 흔하면서도 괜찮은 그러면서도 짧은 말. 더없이 좋은 손쉬운 본보기다. 땀 흘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쓰는 것도 좋지만 본인이 그런 타입의 작가였다면 이렇게 나이 먹고 뒤늦게 휴양지에 와서 거창하게 소설 쓴다고 폼 잡지 않고 이미 옛날에 책 여러 권 냈을 것이다. 그것도 스테디셀러로.
최근 S가 읽은 책에서 꼿힌 표현은 이거다. 뭐하며 뭐. 일상 대화에서 응용하면 A하면 B, B하면 A, A는 B 빼면 시체다. 또 빡빡하다는 말. 이 글이 빡빡하거나 글쓴이가 빡빡하거나, 혹은 독자? 이렇게 쓰이는 말은 핸드메이드 최고급 햄버거 문체로 씌여진 소설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또 최근 소설 제목만 보고 기를 받았다. 아무래도 서점에서의 그 일이 자꾸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에 아주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은 채로 서서히 기억 속에서 색이 옅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 그 책은 호텔리어에 관한 아마존 베스트셀러였다. S는 그랬다. 왜 작가는 그 책을 소설로 쓰지 않았을까? 그건 작가 맘이니까 더 궁금해 하지는 않고 책 제목을 보고 힌트를 얻어서 지금 기거하고 있는 호텔을 옮겨 보기로 했다. 사람은 한곳에 진득이 머무르는 것도 좋지만 공간 이동도 적절히 필요한 법이다. 또 혹시 모른다. 새로 옮긴 호텔이 미스테리인지. 해저 대륙간 망의 엄청난 데이터를 세계 각처의 거물들에게 규칙적으로 베스트오퍼로 넘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위장 호텔이라거나 무슨 단체에 속한 올드보이들을 주로 상대하는 목적의 호텔일지도 모를 일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렇게 S는 바로 짐을 싸서 일단 호텔을 옮겼다.
뚝딱, 시간도 금새, 어떤 사건 사고도 없이 신기하고도 특이한 우연이 여러 번 연속으로 일어나는, 완전 희박한 드문 확률인 일련의 해프닝은 호텔 이동 중에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중간에 딱 한 번 본인의 불확실한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겉으로는 모른 채 자연스럽게 무시하면서도 속으로는 걷잡을 수 없게 슬픔의 의식이 확연해지는 우연이 있었다. 첫째, 옛날에 친구들과 놀러갔던 스키장에서 가벼운 뇌진탕을 겪고 나서 시나브로 본인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혼자 추측할 수 있는) 신종 증후군에 걸렸다는 것. 둘째, 존 파울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괴상한 단체가 의뭉스러운 재단이 실재 명맥을 유지하며 시대를 건너왔다는 사실과 본인이 어찌어찌하여 그곳의 실험 대상에 뽑혔다는 점, 그것도 과거 사례가 없는 매우 이례적으로 초장기적 실험 및 분석, 퍼포먼스 천연기념물 대상이 되었다는 점. 셋째, 두번째의 집단에 의해 거대한 유산을 상속 받고 첫번째의 원인에 의해 가족이랄지, 친구, 주거지, 과거의 모든 굴레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일. 어디선가 갑자기 음산한 효과음이 더해진 합창이 들리지 않는가? "절대 뒤돌아보지마."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악몽과도 같은 울버린의 불완전한 일시적 망령을 떨쳐버리기 위해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사와 구경을 뒤로 하고 S는 당분간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러면서 텀블러에 올리기에는 약하지만 몇몇 괜찮은 문장들을 포스트 잇에 옮겨 적어 거울과 TV와 옷장 등에 붙여 놓았다. 그 밑줄 긋기는 다음과 같다.
찰스 디킨스/어려운 시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더 좋아하는 게 없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조금치의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확언합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권태를 겪은 결과, 어떠한 의견이든 다른 의견과 마찬가지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확신(확신이란 단어가 이런 문제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게으른 감정에 비해 지나치게 부지런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을 갖게 되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멋진 이딸리아 표어를 가훈으로 삼고 있는 영국인 집안이 있습니다..."
D.H.로렌스/아들과 연인 그녀는 과거에는 〈그대〉라고 불렸던 적이 전혀 없었다. 다음해 크리스마스에 그들은 결혼했고 세 달간 그녀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다음 여섯 달 동안은 대단히 행복했다.
세스 노터봄/의식 p.66 "그리고 자네는 직장을 그만두게나. 내 생각에 그 일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자네는 일 년가량 그냥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게나. 자네는 누구 밑에 예속되는 게 어울리지 않아."
오 그대 신비로운 주술사의 요술 수정과도 같은 판타지와 신화에만 존재하는 블루&핑크 드래곤의 여의주와 동급의 그것도 아니라면 기네스 캔맥주와 시세이도 선크림 안에 잇는 구슬 만큼은 영롱한 영혼을 지닌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대 독자는, 왜 작가가 첫째 둘째 셋째 같은 억지를 막 갖다 붙였을지 궁금해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우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이건 소설 초반에 밝혔듯이 명백히 섬이름을 확정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독자 한명, 한명, 한명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환영을 주입하기 위한 목적과도 같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영화의 명대사, 드라마의 웃기거나 감동적인 장면들을 무수히 기억하고 즉시 대화에 인용하면서 관련된 자동차를 마주하고 살아간다. 폭스바겐 투아렉...? 벤츠 E클래스 왕눈이...? 또 뭐 뭐 뭐. 보통 사람들은 모두 예리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설 속의 절대절명의 순간이나 기막힌 반전, 명문장, 꼭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가 일상의 대화에서 써먹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마도 거의 없다. 양철북 초반에 나오는 커다란 드레스에 숨겨진 도망자, 드라마로 응용만 된다. 누군가가 끝까지 읽지 못한 어느 소설에 나오는 가슴골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여자 또 어느 영국 소설에 나오는 열기구, 비행기 조종사가 태양을 2번 연이어 보는 장면이나 적절한 예를 (능력껏) 들지는 못하지만 그런 경향이 많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와 텔레비전에서는 싱크대에 오줌 누는 외과 의사, 세면대에 오줌 누는 청년, 영화 The Master (2012)의 세면대 그것도 아니면 자동차 엔블럼에 오줌 누기는 못봤고 자동차 타이어에 오줌 누는 장면은 어느 상 받은 영화에서 봤다.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활자 예술에 비해서 영상 작품이 더 사람들의 전두엽에 각인되게 만들 수 있는 최대 장점이다. 그래서 묵직한 소설에 비해서 스토리 위주의 소설들은 사건을 죽 나열해서 우연 + 우연 + 우연...같은 (실현 확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기법과 스토리를 많이 선보인다. 그래야 흥미롭다.
그러면, 그렇다면, 그러니까 일반 독자들은 소설과 영화를 보고 그걸 따라할 수가 없다. 기억하기 힘들다. 흉내내어선 안되는 것 투성이다. 똑같이 재현했다가는 큰일 난다. 그래서 억지를 막 갖다 붙이지는 않더래도 간혹 그 억지가 필요한 이유는 따라하기, 모방, 흉내내기, 귀감, 알리고 싶은 것, 재미난 것, '이런 거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야', '이런 글 나도 쓰겠다' 같은 질투에만 기반하지 않는 감수성이라는 인간 본능에 근거한 이타심 자극하기, 상상력 넛지, 창작 욕구 발화, 진짜 공유할 만한 것, 신기하고 특이한 그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왜 최근 들어 여성작가의 글을 그렇게 안 내켜하는지 그만 생각해야 하니까 음악을 들어야겠다. 그래도 남성 작가 소설도 처음 읽을 때가 기분이 가장 좋다. 처음의 감동 그건 재차 만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일회성 때문에 더더욱 감동의 섬광이 타오르는 것일까? 젊은이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른의 솔직한 속마음이 그렇지 않은 고매한 인격을 지니신 분은 이와 다를 수도 있다. 나중에 읽으면 더 좋다,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어야 한다, 나중 다시 봤드니 어떻드라, 고전이란 그런 것이다 등등등. 그런 거짓말은 못 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진짜 그런가 보다. 곧 본인의 사상이 더없이 고상했으면 좋겠고 다시 읽으면 또 다르고 좋지만 그 대상은 무척 드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기간은 상당히 소원해야 하지 않나, 첫느낌은 (어쩌면) 각별하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한다. 이 다음엔 스토리 중간 중간에 어떤 절규가 이어질려나. 자메 드 라비! 이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얼른 디베르티멘토를 듣던가 땀을 흠뻑 흘리고 운동을 하면 좋을 것이다. 쇼핑이나 다른 무엇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