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이야기를 해야 겠다. 예전에 조금 썸을 탔던 그 남자는 옛날에 세상이 떠들썩 했던 슬픈 공주 사건을, 들려온 소식을 들으니 최근에는 조지 클루니 결혼식을 취재했던 특종-전문-기자, 특파원 생활을 하며 여행기와 에세이, 소설을 쓰는 여러 직함을 가진 남자였다. 그가 쓴 어느 소설 겉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씌여 있었다. (그 남자 이름)는 앵글로 색슨 제일의 문장가다! 맞다, 그녀석 엑스트라로도 활약-했단다. 뭔 요즘에는 연예 프로그램에도 나오니까 집에서 TV를 틀어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 얼굴을 보게 된다. 서점에 가도 틈틈히 수준이 애매한 그의 책이 간간히 등장한다. 뒷목이 땡긴다. 그는 지금은 모르지만 그 때는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다스리기 위해 운동을 했는데 그 힘이 그래서 더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끝내 명상과 요가를 했다. 불끈 불끈! 그는 고전소설과 고전음악 그리고 패션을 모르는지 싫어하는지 뭔 맨날 맨시리즈 영화만 보고 로맨틱은 커녕 뭔 말만 나오면 '나는...'이 자동으로 나오는 남자, 입만 열면 '나는...'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유치한 애 어른, 그곳이 뽈록 튀어나온 남자, 그들끼리는 그게 당연하고 내가 너가 누가 제일인가 그러는 행동이 예의이고 생리라지만, 일기장에 또는 출판한 에세이와 소설에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딱 몇 개를 꼽을 수 있는 타입이었다. 그의 글은 어떤 주제와 어떤 묘사, 감수성이 그쪽으로만 풍부한 딱 그 꽈다. 그래도 너무 좋은 말을 생략해서 그렇지 그의 글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고 그에게도 추억과 사랑과 그리고 미래도 있다. 주니어는 아직.
헤어진 후 업계 지인을 통해 뜻하지 않게 우연히 원치 않았던 그의 소식을 들으니 그는 영화 Gone Girl (2014)의 주인공이 되기 직전에 작전인지 연기인지 모르지만 철이 들었다고 한다. '기억의 저주'까지는 아니지만 종이 한 장 차이가 중요하다. 우주를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나 티끌이자 초광학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지금 이 시점에 종이 한 장 차이가 무얼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 설마 당신은 그럴 리 없을테니 찰떡같이 믿고, 이번 한 번만 특별히 그 명대사를 적용하지 않고, 혹시 주위에 심각한 독불장군이나 눈치 없는 남자 또는 그냥 그 차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나 주의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오케이, 지금 당신 옆 사람 씩 웃고 있다. 몹시 수상한 요주의 인물, 그렇게 관심 받고 싶었을까, 조금 슬프다.
종이 한 장, 얇은 소설 책 같은 종이가 아니라 설마 파리나 어디에 있는 대형 가방 모형물처럼 두꺼운 종이 아니야? 그건 모를 일이다. 사람따라 기호와 취향이 다 다르다.
그 인간은 왜 내 삶의 한 페이지에 끼어들어서 내 젊음의 노트를 더럽히고 연애의 품격을 훼방놓았는지, 사랑이 다 같은 사랑인가. <오직 100m 육상만, 결단코 레슬링만>이 그들의 표어란 말인가.
SF 소설은 막 곧장 이야기가 떠오르고 카페든 잔디밭이든 배에서나 비행기에서나 맥북에 노트에 또는 베토벤이 아닌 모차르트처럼 머리 속에 완벽하게, 춤을 멈출 수 없는 마법 구두를 신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신들린 듯 언제라도 어렵지 않게 웃으면서 놀면서 편안히 고민하지 않고, 그리고 너무 잘 써져서 오히려 괴로워하면서 썼는데, 지금 쓰는 통속소설은─속으로는 나름 야심작이라고 처음에는 순수문학 별거 아니라는 기풍으로 시작했지만─통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괜히 쓰기 시작했나, 누가 쓰라고 시켰나? 안 쓰면 안되나? 어떻게 쓰게 되기 시작했지? 뭔가 누군가 알 수 없는 거대함이 그런 대세가 나를 막 조종하는 것 같다. 최근 본 어느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넌 이게 재미있나 보구나."
그 표정, 몸짓, 눈빛, 억양, 목소리, 눈매, 풍모, 뉘앙스, 분위기, 여운, 음률, 연민... 참 그러고 보니 쉼표를 과도하게 사용해도 누군가는 나와 같은 감정을 품겠구나, 에휴.
뭔 얘기 하던 중이었지? 하긴 옛날에도 이랬다. 친구들은 댄스 파티에 나는 버스 동호회 모임과 펭귄 보호단체 활동, 또 친구들이 연극 연습에 패션쇼에 구경가면 나는 학교나 어느 교회에 가서 따분하게 고풍스러운 독학으로 익힌 바흐의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이탈리아 협주곡, 모차르트 론도, 베토벤, 쇼팽을 연습하고 남자들도 이상하게 잘 따르질 않았다. 너무 예뻐서 그래서 풍요 속 빈곤이었던 것일까. 이런 젠체하는 척함을 고급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이런 의견에 그럴싸하게 포장되기도 한다.
지가 무슨 무라카미 류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남들 어렸을 때 다 배우고 넘어간 그 악기를 뒤늦게 나이에 안 어울리게 다 큰 어른이 되서 배운답시고 먼 난리치고 과시하는거야. 지가 무슨 클라라 슈만이야 마르타 아르헤리치야? 난 그러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소설 블로그 좋아하시네, 자기가 탐 피터스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럼 나는 세스 고딘이다! 뭔 브랜드 이름에 환장한 놈 같으니라고. (탐 피터스가 말하면 명언, 일반인이 말하면 삐─삐─)
겸손한 자랑. 참 이상한 표현이다. 피상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지만 유행으로만 봐도 명백한 반칙에 가까운 표현이다. 사실 이렇게 양립할 수 없는 어법은 그 사례야 부지기수로 많고 방법이야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래서 둘 다 착하고 너그롭고 인자한 저쪽 사람과 쩌쪽 사람이 같은 언어인데 다른 언어로 대화할 때 튀는 오해와 발생하는 착각을 직접 또는 에둘러 또는 착상을 얻어 만든 작품에서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하다. 절대 좋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이건 혹시 Guilty Pleasure?
당연히 옛날에 나는 남들과 똑같이 베스킨 라빈스, 던킨 도넛, 별 몇개 호텔, 택시 드라이버, 크리스피 도넛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꼭 나만 특별히 나만 희한하게 나만 희귀하게 그런 여러가지 일을 한 듯이 보일까봐 다음 문장을 쓰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나만 해본 게 아니라 누구나 그 정도는 다 경험한다.
타고난 재주가 좋거나 후천적으로 성실한 노력형이면 그런 거 한두 개, 짧은 연애 하나, 풋사랑 한두 개 가지고도 소설 한 편이 나오지만 소설가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지만 엄연히 SF 소설이 내 분야이고 젊은이를 위한 가벼운 성장 소설─사람은 어떻게 보면 나이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성장한다고 할 수 있고, 실재로 뇌는 다른 신체와 달리 계속 그래프 선이 올라간다고 하니, 내려갈 수도 있을려나─은 아직 이렇게 애기 발걸음마 수준이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옛날보다 얼굴 피부가 조금 두꺼워진 느낌이다.
어디까지 얘기했드라. 음 생각을 정리하고 지난 일을 되새겨 보려고, SF 장르를 잠시 쉴려고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가장 즉흥적으로 퇴고를 간소화하고 어떤 대위법과도 같이 선율이 쭉쭉 뻗는 대신 성부는 독자가 잘 구분하지 못하게 하면서.
나는 그러고 보니 직업도 여럿 겪었고 특이한 일도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세계 1위 게임 회사의 말단 사원으로 일하던 중 '이건 아니야, 삶이 재미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인생이 아니야.' 라면서 직장에─그래도 어엿한 이름인 Yahoo UK인데─대책없이 울컥하며 앞뒤 안 보고 사표를 내고 나와서 무작정 어이없이 비공식 루트를 통해 MI6에 들어갔다.
독자님, 주의를 기울여 달라. 나는 그때 비공식 루트를 통해 MI6에 들어갔다. 그대가 말로만 듣던, 뉴스로만 읽었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기만 했던 그 MI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