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오랜동안 청춘 시절을 같이 고뇌하며 즐기면서 풍운을 함께 해온 단짝 친구들이 모두 나이 들어 각계 전문가가 되고 피앙세와 로맨스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그들끼리 가까운 섬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좋게 말해 아직 솔로 생활을 즐기는 단 한 명의 친구인 제임스는 한사코 같이 가기를 거절했지만 심약했던지 최근 외로웠던지 혹은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그냥 무신경하게 그 여행길에, 모두 다 커플인데 그만 솔로인 채로 동행하게 되었다.
이 침울하면서 옅디옅게 유쾌한 겨울 남자도 살면서 온갖 일을 겪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특히 어마어마한 빚을 졌지만 어떻게 해서 그 빚을 모두 갚고 어찌보면 제 2의 인생을 사는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이지만 왕위 계승 서열은 34위인 왕족여성과도 사귀어 보고─또는 그 아가씨가 나오는 소설을 쓴 귀부인의 친구의 조카인 숙녀와 잠깐 서신으로만 교제했거나, 이건 딱 여기까지만 울궈먹겠음─알카트라즈에도 가보았는가 하면 리하나 옆구리도 만져봤다. 이건 소설이다.
책도 어마어마하게 읽고─읽다 중간에 그만둔 책이 대다수지만─사랑과 야망도 있었지만─원래 야망은 없었지만 아무튼─단 하나(?) 부족한 부분은 남을 너무 잘 믿는다는 점이었다. 그 명대사가 왜 중요한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지, 왜 떠올라도 쉬이 마술처럼 사라져 버리는지 지금도 그래서 주로 읽는 책들은 이런 제목들을 하고 있다.
- 사기 당하지 않는 법
- 돈 빌려주지 않기
- 빌려준 돈 받아드립니다. (앗 이건... 책 맞나? 광고 아닌가)
고개 숙인 고독한 남자 제임스와 커플 가운데 한 남자와의 대화를 들여다본다.
「친구야, 뭐 재미난 일 없냐? 이번에 우리 ( ) 제도에나 놀러 갔다 오자.」
그는 제임스가 답변할 틈을 주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8촌이 살다가 번스타인의 단짝 동창이 그 후 코넌 오브라이언의 전-여자친구의 친한 고향친구가 살다가 내놓은 집이래. 직접 살았던 유명인도 있었다던데 이름이 지금 딱 생각이 안난다야. 하워드 발넓은 거 알지?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찔러보다가 '일주일만 살아보기'에 이름을 올려놨는데 글쎄 당첨됐다나- 뭐래니. 이미 준비 다 끝났데. 넌 몸만 오면 돼. 오랜만에 우리 뭉치자, 이번에 가서 아무 걱정없이 푹 쉬고 오는 거지.」
「미안, 알잖아. 너네들...」
즉시 바디랭귀지 동원된다. 그는 말발 지존의 책사이자 심복인가.
「에이~ 제임스! 하루이틀이냐? 잘 들어봐. 첫째, 우리애 여자애들 모두 다 너가 알잖아. 둘째, 여자애들과 모두 친하잖아. 셋째, 결국 이거 하나면 끝 아니겠냐, 나도 그렇고, 전에 우리들끼리 모두 솔로로 얘기할 때는 너를 모두 첫 손 꼽았잖아 1) 제일 멋진 여자친구가 생길 것 같은 사람 2) 제일 빨리 여친이 생길 것 같은 사람」
「닉,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께. 요즘 일도 일이고 이차저차 바쁘다야.」
「너 정말 이러기야? 제임스,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돼? 지난 시간은 다 뭐야, 그 모든 험난하고도 짜릿했던 함께했던 시간은 모두 우리에게만 추억이었어?」
「닉~ 나도 가고는 싶어. 그렇지만... 그렇잖아. 어떻게 그러니.」
「마크가 하이네켄 5ℓ 큰 통 알지, 그거 가져온데, 너 예전에 그거 마셔 보고 싶어했잖아. 알렉스 여자친구 부자인거 알지? 그녀 아버지꺼 초호화 요트 딱 준비 끝났잖아. 쟤네들 모두 웹사이트 일 하잖아. 야! 컨텐츠 만들어서 몇몇 사이트에 올렸다가 그 가운데 하나만 뜨면 넌 바로 캘빈 로즈 되는거야.」
「너의 말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너가 제일 가까워, 전설 속의 텐미닛 말야. 하지만 내 신조 알잖아. 난 사람에 대한 사람의 말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거.」
「넌 어떻게 된 게 애가 속고만 살았냐? 우리끼리만 갈꺼였으면 진작 찰스한테 말하라고 맡겼지, 괜히 내가 나섰겠냐?」
「......」
「야, 내가 이 얘기는 안 할려고 했는데, 여자애들끼리 그 얘기도 했다더라. 너가 몰표 받았데~ 만약 남자친구 새로 사귄다면 어떤 이성, 이를테면 누구이면 누구와 비슷했으면 누구와 가까왔으면 좋겠냐고?」
이거다...!
제임스는 피노키오처럼 귀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대책없이 귀가 초대형 텔레비젼 만큼 커진 것만 같았다. 스스로 뽀송뽀송 효과음을 내면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이를 어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음험한 유혹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나보고 바람직한 신뢰감을 우직하게 단칼에 져버리는 냉혈한이 되라는 말인가? 또 악역을 맡으라고? 언제까지나?
「제임스, 너도 알잖아. 이번에 그곳 영화에도 나오고 핫한 애들 많이 온다는 거. 조니 작업 멘트 알지? 게임 끝났어. 넌 우리가 책임질께. 딱 책임질께. 여자애들끼리 네 짝 구해 오기 내기 하면 되겠다. 뭐 일사천리다.」
이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제임스, 뉴스 봤지? 인터넷 난리난 거. 왠 잠수함이니? 꼭 뭔가 짜고 거기 나타난 거 같다는 냄새는 나는데... 심증뿐이고... 아무튼 재밌다니까.」
「너 거기 가서 쓰고 싶은 소설 구상해서 작품만 완성하면 직장 당장 때려쳐. 그까짓거 바로 때려쳐. 책 팔리기 시작하면 금방 유명해지고, 새로운 페이지 터너라는 별명은 따 놓은 당상이니까. 야, 그림 딱 나온다야.」
「내가 너네들이랑 놀아주느라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멈칫, 제임스는 아까 텐미닛 대사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었다. 차렷,
「내가 이제는 하다 하다 독심술도 익혔잖냐. 너가 하고 싶은 말 대신 했다. 넌 의리있는 놈이라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말 안해도 늬 마음 다 안다, 임마」
닉의 귀 뒷편으로 작은 땀방울이 하나 맺힌다.
「갈꺼지? 알잖아, 우리 모두 널 좋아한다는 거. 내가 특별히 삼촌꺼 벤틀리 빌려서 모시러 갈께. 혹시 안되면 스마트 포투 몰고 갈께.」
〈얘는 전전전생에 40,000 궁녀를 쥐었다 폈다 거느리는 제왕이었을지도 몰라.〉
〈얘 입담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괜히 학계와 예술계, 연예계는 물론 세간에 정평이 난 게 아니라니까, 내가 이 친구랑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어린이들이 쥐고 있는 가벼운 풍선으로 변장해버린다니까. 어딘가로 마구 뛰어갈려고 하는 강아지마냥 말야. 깜빡했으면, 자칫 잘못했으면 물어볼 뻔 했잖아. 스마트 포투에서 (운전하는) 자세 잘 나오냐고?〉
뭔 생각하십니까?
〈다만 얘 여자친구는 좀 피곤하겠다, 적잖이 아니면 슬플까? 다분히 그럴 여지도 없잖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갔던 여행지는 드라마틱한 풍경, 해안 절경, 지중해풍 생동감, 물 좋은 휴양지 무드, 어느 유명인이 이곳에 살았다드라, 여러 커플들이 다 같이 놀러오기에 안성맞춤인 분위기 등등이 모두 절묘히 결합된 펜트하우스였다.
그 저택의 거실에는 왠 FAZIOLI, 2층에는 YAMAHA Silent 까지 있고 없는 것이 없었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헨델의 HWV 427, 428 연주곡이 무인으로 자동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그날 스케쥴도 완벽했다. 그리고 모두들 거의 모두들 빈틈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더 재미있게 보내기는 아마도 거의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어떤 포도주와 놀이와 이벤트들이 모두 끝나고 커플들은 하나둘 모두 방으로 들어가고 제임스만 우두커니 거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여자의 마음, 그는 남자인데, 그 곡이 끝나고 또 다른 오페라 아리아를 냅다 꺼버린 후 찾아오는 묵직한 고요함. 그리고 거실에는 그와 더불어 비틀즈의 앤솔로지와 정교한 영화 주인공 가면들, 오보에, 선물 추첨 이벤트로 나왔던 색연필 세트와 화장품, 후라이팬, 운동화, The Originals CD, 침낭, 스티브 마틴의 어느 소설, 초극소량 생산 한정판 신경안정제, Polaroid Cube action Camera들이 있었다.
왜 갑자기 쇼펜 하우어의 어느 책이 생각나는지, 왜 덜컥 어느 겨울인가 멀리 가보았던 템플스테이가 떠오르는지, 문득 지구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우주는 언제 태어난거야 왜 태어난거야, 사는 건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 청력이 왜 이런 것이지, 영화 Man of Steel (2014)에 나오는 외계인인가, 짜라투스트라가 옛날에 뭐라 했지, 내일 해가 뜨면 떠날 것인가 아니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인가, 플라톤은 사르트르는 어떤 명언을 남겼더라...
거실의, 딱 거실 만의 정적 그리고 들려오는, 파도처럼 가만히 쉬지 않고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 하나, 둘, 셋... 내가 이렇게 귀가 밝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 귀가 갑자기 왜 이런 것이지... 설마 나에게 초능력이 생길 리는 없고. 이건 몰래 엿듣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여행가기 전 날 밤 동네에서 길가에 버려진 척키 인형을 보았다. 으 찜찜한 기억.
거실을 가득 채운 소리는 다음 두가지에 포함되거나 믹싱 또는 새로운 그 무엇일 수 있을거라고 예상해도 넉넉히 괜찮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멜러스의 길다란, 장황한 대사
- 그래프! 남자와 여자를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X축과 Y축으로 그린.
왜 이 인간은 딱 잡아떼는 걸 그렇게 못하나? 어떤 유부녀 같은 시치미, 어느 남자의 우스운 의미로 소름 돋는 차들의 상징이 아닌, 말 그대로 차가운 의미로 소름 돋는 시치미, 왜 그걸 못하느냔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이 문제의 남자가 누구인가는 여기서 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후 그 남성의 행보 또한. 조이스나 프루스트처럼 어렵게, 알아 먹기도 읽기도 힘들게, 대책없이 문제 내기 싫다, 능력없다, 못하겠소. 대신 헛점은 많다. 은은하게 눈여겨 보아야 할 보편적인 특이점은 이것이다. 첫째, 이 일을 실제로 겪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적지 않을 것이며 둘째, 앞으로 이런 일을 겪을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얼마나 많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제임스가 눈치와 촉은 빠르고 민감하지만 J, 그 만큼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아킬레스건이 그에게도 있어서 그는 더욱? 점점? 항상? 블로그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걸어볼까, 근저당이라도. 그런데 파우스트.. 맞나.
어느 날 그는 질투 예방이 아닌 예전부터 지속해온 목 주름 예방을 위해 벼개를 베지 않고 잤다가 잠에서 깨어난 후 그의 블로그를 보니 그의 블로그 글에 트랙백이 걸려 있었다. 뭐야 이거, 트랙백, 참으로 오랜 만에 듣는 말이겠다. 옛날에 옛날에만 유행했으니까. 그렇게 10대 청소년처럼 웹서핑을 하면서 몇몇 사이트를 북마크 했다. 어 이건 이 부분이 신선한 발상인데, 음 괜찮아 멋져, 굉장히 참신한 시각의 의견이구나, 와 이런 산뜻한 맑은 소식이 있었단 말야, 이야~ 이런 따뜻한 뉴스를 보니 세상은 참 살 만한 곳인가봐, 그래 맞아 이런다니까 그럼 나도 한번 해볼까, 오 이거 괜찮은데 나중에 돈 모아서 살까... 이런 생각이 대부분이었지만 두뇌 안쪽의 작은 틈새에는 이와 같은 생각도 들키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 녀석 뭔 시덥지 않게 이런 걸 다 올리고 난리야. 하나도 재미없구만, 에이 뭐야 이거, 그게 뭐야, 이거 봐봐... 뭐야~ 에이~'
와우, 그는 깜짝 놀랐다. 시끄러운 호프집이나 혼잡한 광장에서 몇 마디 증발해 버릴 말을 기록하다니. 본성은 유순하지만 시니컬하고 껄렁껄렁한 사춘기 소년이 일기장에 온통 불만과 투정과 욕만 쓰는 거랑 이게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 사춘기 소년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그의 부인이 남편의 사춘기 시절 일기장을 들쳐보면... 그렇다.
그러다 보니 막 길게 길다랗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 먹기 힘든 글이 아니라 고순도의 문학 작품에 의해 좋은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남에게 삘을 선사하는 글을, 이타심이든 창의성이든 뭔가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그런 글을 써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최소한 그와 같은 시도를 해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는 주로 대화중에 듣는 비중이 많았던 것 같다.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이 3단계가 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아서.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제 축척된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다 보니 사람들끼리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른들이 평소 그들-답거나, 어린애-처럼 천진하지만 때로는 좀 이상해지는 건,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뜻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듣고-생각하고-말하고, 듣고-생각하고-말하는 가운데 기성복과는 달리 다분히 중첩되지 않는 개개인의 생각하는 과정이 다소 위축되어 그렇지 않은가-라고 본인부터 자중해야 겠다고 정말 뜻밖에만, 비오는 날 먼지 나듯이, 내륙도시에 배가 들어오는 빈도로만 차분히 읊조린다. 오 멋진 말 같은데, 만약 지금 혼자있다면, 딱 2초 정도만 휘청거리면서 뭔가 신비한 아찔함을 살며시 느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