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러는 것일까? 이것이, 블로그가 그의 인생을 불분명하고 선명한 듯 하지만 흐리고, 삶을 스토리가 아닌 수필이나 소셜 네트워크 포스팅처럼 단편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첫문장에서 '이러는' 이라고 쓰지 말고 그 자리에 <글을 최근에 더욱, 부쩍, 점점 무언가를 목적없이 그냥 쓰고 싶은> 이와 같은 또렷한 또박또박 정리된 설명문을 적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렇게 살아왔는데, 너무 명철하면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어쩌겠는가. 하던 데로 하는 수 밖에. 아무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현재 이런 심정이고 그리고 그것이 크게 부정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이러는>이 더 나은 것 같다. 굿걸.
원래는 이 연재편을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그렇다, 다시 극사실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그건 많이 나왔으니 극사실주의도 아주 조금 물린다. 흐름이 조변경을 하였으니 일단 어떤 내용이 나오든 이상하든 환상적이든 독자가 홀딱 반할 만한 이야기든 아니든 우선 나아가는 데로 내버려 둔다. 왜냐하면 앞편에서 이름이 많이, 제법 많이는 아니지만 비교적 급하게 그러면서 갑자기 그와 동시에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뜬금없이 몇몇이 태생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잊혀지도록, 모처럼 어쩌면 처음으로 대타로 나왔는데 내야 땅볼로 락커룸에 몰아 넣기에는 사람이 너무 몰인정하다는 야유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형편없는 재활용일지 얻어 걸린 행운 가운데 하나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살리고 살리고!
어쩌다 이름 몇 개 나와서 주절주절. 이 마당에 <젊은이여 꿈을 찾아라>느니, <젊음이여 이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 끝까지 날아가 보자>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나 손가락 펴기가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유명 콘서트 티켓 한두 장 가격을 훌쩍 넘는 화보집 또는 마티스의 소품, 샤갈의 스케치, 집 한 채, 당신의 대학생활 이런 걸 단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단언적으로 이 명사를 들 수 있고, 즉 단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는 궁금증을 살리자는 유보적인 태도에 어울리는 말은 수많은 후보군을 모두 뒤로 한 채 단연코 이 흔한 낱말을 첫 손 꼽을 수 있다. 비밀! 어찌보면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곡을 만들고, 또 다른 예술가는 여행을 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 끝없이 방황을 하는지도 모른다.
"신비만큼 오래가는 것은 없죠." 존 파울즈의 경중편 수수께끼에 나오는 말이다. 와, 장편이 아닌 단편에서도 하나의 인용문을 써먹었다. 백화점 고가 브랜드 파격세일 이벤트에서 알짜 물건을 하나 건진 것 같은 기분.
글쓴이가 옛날에는 인생이라는 무언가 거창한 왠지 진중한 단어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소설이 시작되어 지구가 태양을 약 반 바퀴 도는 동안 한 편의 소설에, 블로그에만 발표하는 비공식 소설에 무슨 설렘과 손잡고, 심지어 꼬마 숙녀의 귀여운 바램 마냥 어떻게 떨리는 기대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지만, 너무 많이 알면 원래 인생이란 고양이는 시무룩한 강아지 마냥 썩 흥미롭지 않는 법이다. 사람은 너무 아는 게 많으면 머리가 무겁고 고달퍼진다.
이제야 소설을 정식으로, 소설이 구색을 갖춘 제 궤도를 바라보며 펄럭이듯 태동할려는 것인가. 초현실주의까지는 아니더래도 어쨌든 닥치고 써야겠다.
저번 연재에서 나온 친구들을 그 이름들을 나열해 본다.
제임스, 닉, 하워드, 마크, 알렉스, 케빈(최근 찰스가 케빈으로 개명했다), 조니.
소설 습작이니 코메디니 크로스오버니 어떤 장르를 왔다 갔다 해도 정식은 생각만 해도 어렵다. 하지만 실패해도 된다. 무모한 시도로 점차 지루해지겠지만 그렇게 계속 재미없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누구의 백일몽이라느니 여류번역가 A가 쓰는 소설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대충 핑계대면 된다. 그렇지 않기를, 사람들이 꿈을 '잃지'가 아니라 '잊지' 않기를 바라지만. 선생과 학생, 제자와 교수, 남편과 부인, 앞집 주민과 옆집 노인... 사람들은 원래 모두 알면서 속아 준다. 삶은 곧 연기가 태반이다. 인생이 꼭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그런다. 그만큼을 살아보신 분이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 별거 없드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마음 편한 게 최고드라."
모든 소설 쓰는 전과정을 소설 안에 너무 복잡하고 걸리적거리게 마구 집어 넣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소설을 어느 정도 적지 않게 읽어보신 분들은 알고 있다. 그런 썰이 색다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별책 부록 같은 묘미라는 것을. 이른바 물 반 고기 반.
이럴 때 필요한 시의 적절한 설명에는 은유가 아니라 비유가 딱이다. 독자를 성적 호기심이 풍만한 힘이 절정인 청년으로 가정하고 소설가는 그의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요염한 처자? 물론 독자의 평균 연령층이 낮아지는 위험쯤은 결코 사소하지 않지만 감수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하지만 카피라이트풍으로 음악 틀고 영상 깔고 성우 목소리로 이 문장을 듣는다면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진정한 실력자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마초는 이걸 이렇게 둔탁하게 표현한다. 음악과 영상과 목소리 없이 또는 조급하게 대체해서. <쟤는 다 가진 놈이야!> 그렇다고 여자들이 말발과 목소리만 보고 어느 남자와 인생을 함께 살아간다면... 한 번 살아보시라. 겁주는 건 절대 아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후추 냄새를 맡는 것처럼 당장 흥분된다. 진한 블랙커피 때문에 일순간 도파민인지 아드레날린인지 엔돌핀인지 모를 뭔가가 나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살짝 기분 나쁘지 않은 긴장감이 감돈다. 일단~은 장르는 시트콤을 표방할 것 같다. 첩보 요원을 한 명 넣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돈을 벌고 희귀한 영화 주인공 제이슨이 되는 것일 테지만 그건 멀리서 봤을 때, 그럴 때만 멋지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어찌보면 더 낫다. 하루도 안 빼고 대부분 작품의 페이지나 단어, 어휘, 문법, 상징들을 모조리 외워버린 상태로 문학사의 거장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10년, 20년, 30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를 좁은 연습실 안에서 스누피와 루시와 슈로더와 매일 같이 날마다 똑같은 잔소리와 아이들 특유의 웃음소리... 한때는 명문대 작곡과를 나와서 '나에게 사사 받아라', '우리 업계로 와주시라', 현대판 드뷧시네 모차르트의 재래네, 누구를 뛰어넘을 재목이네 그랬는데... 이 분들 뿐만이 아니라 피터 드러커가 생전에 자원봉사자들로부터 닦달해서 받아낸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답변처럼 먹고 사는 일이, 직업 예술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것 만은 아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백수, 학생, 실업가, 소설가, 자영업자를 달랑 주인공으로 벌세웠지만 이젠 변화를 주어서 2:2 구도도 아니고, 원맨쇼도, 누구누구 토크 쇼도 아닌 멀티 캐스팅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그러면 재미있을 것 같다. 사실 시트콤의 기원은 인류 역사와 같이 흐른다. 뭐 민족설화와 동화를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한번 해 보는 거다. 일반인이 바라는 삶, 보통 사람들이 갈망하는 이상향, 잘 나가는 또는 꿈 많은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그저 애를 돌보고 있는 그녀(이건 아닌가?), 가보지 않은 길, 찡한 공짜 상상, 통제 및 제어할 수 없는 소망, 비현실적인 자유, 참을성을 무진장 요구하는 상투성은 꼭꼭 감춰두고 숨겨놓기······.
상어는 이미 폭풍과 태풍 속으로 진입해 버렸으니까 소설의 틀은 깨졌다. 그래야 한다.
너무 뒤죽박죽 중복되지는 않아야 하니까 엑셀 시트 같은 문서에 인물의 행적, 말, 프로파일등 쓴 내용을 기록해 놓고─이 인간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자기가 문예창작과 교수님이야? 어디서 소설쓰기를 가르쳐? 뭔 뚱딴지 같은 작품을 만들겠다고─뉴스와 지나간 인상적인 소식들을 떠올려 보면서 진부하고 뻔하고 식상하지 않은 새로움을 끊임없이 찾아야겠다.
인물 설정과 사건과 플롯을 다 짜논 후 쭉쭉 빼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듯이 쓰고 나서 따라할 꺼 한둘 챙겨서 복습하고, 어? 새로운 거 생겼다, 으잉? 무슨 일이 발생했다, 아? 어떤 프로필 업데이트, 멀쩡한 주변인물이나 족제비 같은 이방인 출연 같은 신규 컨텐츠를 차곡차곡 엑셀 시트에 기록하면서 행진하기. 슈퍼마리오보다 훨씬 느리게, 아예 슬로우 모션으로.
그리고 다음 연재편부터 홀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짝수는 기존의 형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고 절반은 뒤엎을려고 나름 노력하는, 무언가에 전혀 굶주리지 않은 듯 어떤 이미지를 몹시 꿈꾸는 듯 살고 있는 J의 이야기를 교차로 실어야겠다. 보통 이런 구성은 사전에 정확히 밝히는 게 아니라 책 제일 뒤에 문학평론가가, 어느 잡지나 언론 사이트에 비평가가 짠 하고 증권분석 리포트처럼 알려 주는 게 정석이고 폼이 나지만 그건 전문가들 좋으라고 구색을 잡는 것이고, 정직하고 순수한 일반인 독자를 위하여 이렇게 미리 실토하고 넘어가는 아량을 보여야만 대인배라는 말은 못 들어도 속 좁다는 핀잔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독자를 너무 알로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자연스럽고 스무스하게 쌩까는 게 좋다.
그러므로 이렇게만 해서 잘만 된다면 여행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는 노신사 낚시꾼의 레파토리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나이에 이제 더 무얼 바라겠나, 내 나이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등등등. 이런 말은 어쩌다 듣게 되면 괜찮지만 한 4,201번 듣는다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한다.
솔직히 10명중 9명은 회사가기 싫어한다. 굳이 월요일 아침에 사람들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그거 모르면 외계인이다. 10명 9명의 학생은 모험과 낭만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건 잡을 수 없는 뜬구름인 것만 같다. 10명중 9명의 주부, 그녀들은 슈퍼맘이나 원더우먼이나 지각한 스타는 바라지도 않고 또 지금 삶이 이렇게 정적일 줄은 그땐 정말 몰랐을 것이다. 그 누가 알았겠나, 어느 뛰어난 선구자가 내다볼 수나 있었겠나, 이렇게 살 게 될 줄. 10명중 9명의 노인,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거야, 코엘 맥카시의 작품들 원래 내가 다─전부 다─거의 완벽하게─코엘보다 훨 먼저─구상해 놓고 쓰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저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노인이 되버렸지 뭐야. 나도 한 때는 로버트 레드포드 부럽지 않을 만큼 잘 나갔는데 세월이 무상하구나, 나도 아직 마음은 더 멋진 삶을 바란단 말이야... 솔로-결혼-이혼-독신 생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일 있나. 이런 똥싸배기 (같은 놈).
괜히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고귀한 인품의 성인에게 다짜고짜 들이대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진상부리는 짓은 하면 안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닥치고 시도해 보아도 괜찮은 시기나 일이 있는 것 같다. 제목만으로 빛나는 책들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제목이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 까놓고 말해 그것만 해도 어딘가? 이를테면 <너무 잘 쓸려고 하지마라> 이것도 꼭 명대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