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이는 술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고, 누구는 노후 자금을 모으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소설 주인공처럼 무작정 가출을 하지 않고 직장에 나가며, J같은 어정쩡한 인물이라면 어느 날 우연히 백화점에서 구경한 기계식 키포드! 고급 기계식 키보드를 갖고 싶다는 마음에 그것을 두드려서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의해 싸구려 볼펜을 쥐고 조그만 수첩에 나름 뭔가를 적는 의도를 실현할 것이다. 물론 값싼 볼펜이 제일 마음 편하다. 비싼 한정판 펜으로 글을 쓴다면 예술혼이 살아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아마도 일부 전문가들은 손글씨로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정작 기계식 키보드를 마련했는데 창작력이 바닥치면 어떡하지? 그럼 뭐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거지. 모두 제각기 짜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듯 원인 다음에 결과가 이어지고 결실에 앞서 노력이 요구되며 북반구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남반구에서는 겨울-가을-여름-봄 이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가보지 않아서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다.
소설이 시작되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극사실주의에서 약간 영화 같은 작위적인 전개로 바뀌었다. 마구 이유도 모르고 처음부터 쫓기고 쫓고 꿈과 모험을 찾아 떠나고 우연 플러스 한 번 더 우연 그리고 계속 우연, 이 환상적인 초현실적인 방법을 처음부터 써먹지 않고 뒤로 오면서 그 분량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갔기 때문에 약간은 어떤 그래프 기울기가 먹혀들지 않았나, 뻔하지만 똑같은 클리쉐지만 덜 상투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이걸 중독이라고 하거나 서서히 덥혀진다고 말한다. 나쁜 중독은 아니니 안심하시라, 혹시 중독됐다면. J는 지금 혼자 스스로 자신이 독자라 가정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눈 감고 휘둘렀는데 장외 홈런이라고. 단, 초반의 극사실주의에 비한다면. 초반에 무던히도 얼빵하고 끝없이 한심하며 덜떨어졌다고 자인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래프 곡선을 올리고 작법의 패턴을 바꾸는 게 긴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현재-진행형 생각하기. 고리타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상할 것이다 라는 의도로 쓴 우아할 것이다 라는 목표로 시도한 예언적 문체도 많이 다듬어졌다. (서사적으로) 비교적 그렇다. 자기도 모르게 간결하고 짧은 수제 햄버거 글쓰기 스타일로─아니면 피자체? 파스타체? 아무거나 갖다 붙이자면─상당히 변했다. 어떤 레벨의 수제 햄버거인가는 그 판단은 먼 미래로 무작정 미룬다. 먼저 쓰고 따라하고 여기에 더해서 언제 무엇을 했고 그것을 떠올려 소설로 쓰고 변형하고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뒤섞고 지금까지 그랬다면 이제는, 이제는 본인이 걸어다니는 소설이 되기 위해 저 세상으로, 아 흔히 말하는 다음 세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굉장히 협소한 단촐한 생활 반경과 경험을 넓힌다는 의미로, 저 세상으로 나아가서 자신이 즉, 걸어다니는 소설이 거동하여 실시간으로 그의 의식을 투명인간처럼 아무대나 들이대어 걸어다니는 소설의 문학적 의미를 늘리기로 한다. 재수없게도 지는 지가 이미 걸어다니는 소설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애쓴다. 하지만 썩 어이없는 시도라고 쉽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머머 사고 싶어-하고 싶어-먹고 싶어-보고 싶어-(차를) 타고 싶어 같은 1차적인 욕구보다 더 나은, 저처럼 되고 싶어-누구를 닮고 싶어-사고 싶은 상품의 모델이 되고 싶어 같은 차원보다는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살아있는 교양 소설, 걸어다니는 예술품, 처음부터 끝까지 퍼포먼스라고도 어찌보면 그럴 듯이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말리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그나마 완전 답답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게 어디란 말인가. 커오면서 꿈이 없든지 작거나 자주 변해서 그랬을까? 극 속의 공작 같은 그 상태의 세계가 궁금해서? 원래 어른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꿈이 없거나 작거나 자주 변한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예술 작품이나 TV나 인터넷이나 어른들은 너는 왜 꿈이 없냐고, 왜 되고 싶은 게 없냐고, 왜 꿈이 작냐고, 너는 어떻게 된 게 애가 그 모양이냐고, 말은 교양스럽게 돌려서 하지만 내심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기분 좋으시면 또 꿈이 바뀌었냐고 속으로 흐뭇해 하시기도 한다. 당연히 자기 커오는 동안 행적을 아니까 그에 비추어서 도움되라고 그러시겠지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작은 도릿에서의 귀부인의 말이나 그보다 좀 덜한 노는 데 일생을 즐기는 데 열중한 채털리 부인의 귀족 아버지 같은 말을 어디 하기 싫겠나? 그건 아니야. 글로 쓰기도 어려운데 말로 어떻게 해. 소설이나 되니까 가능한 얘기지. 어찌 보면 그래서 태도가 전부야. 대공 좋아하시네 다 공작새 같은 얘기야. 책꽂이에 가만히 있는 책이 뭔 잘못이라고 밑줄 그은 페이지들을 하루에 1장씩 초코-쿠키 먹듯 사람들 보라고 혹은 절대 따라해서는 안된다고 또는 혼자만 아는 기막힌 특수 비법이라며 비밀스럽게 밑줄 그은 종이들을 잘근잘근 깨물어 먹었다면 참 답 안 나올 것이다. 좋게 보자면 이건 멜로드라마적 사고법이다. 이건 뭐야, 지가 영화와 동격이라고? 말이 안 나온다. 어안이 벙벙하고 소설을 읽다 소설가를 때리고 싶어진다. 참~내, 언제는 문체가 변했다며...
최고로 쾌적한 본인에게 최적의 환경이 제공되는 휴양지에 가지 않아도 온갖 교통수단을 모두 이용하여 천상의 파라다이스에 초대 받아 놀러가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삶의 격을 올리는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장소의 이동을 들 수 있다. 황홀한 재즈나 최신 인기곡이나 가늘고 길게 인기를 유지하는 팝송, 고전 음악이나 발레 공연을 적합한 장소에 가서 듣고 보면 기분 끝내준다. J가 자신의 의식을 좌충우돌 아무데로나 파장을 넓힌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젠 몸, 의식이 아닌, 의식과 밀접한 몸을 이동할려나 보다. 그 대상 후보들 가운데 간택받은 곳은 운 좋게도 미술관이다. 미술관! 웰빙의 법칙은 정말 손쉽고 놀랍도록 간단하다. 동물원에는 나중에 놀러가자. 그럽시다. 혹시 미술관, 싫어하시나?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대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미술관 가운데서도 이왕이면 고급스런 딱 그렇게 보이는 미술관으로 정하자. J는 정했다. 어 저기. 지금 간다. 출발. 음 도착했다. 너무 오랜 여정을 거치는 것도 뭐하지만 뚝딱 도착하는 것도 그러고 보니 좀 방정맞다. 하지만 일단 도착했다.
물론 그가 미술관에 가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007 가방을 구해서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가서 무작정 기다리면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멋진 사람이 접선하러 접근해 오지 않을까? 혹여 오지 않는다면 자신과 비슷한 띨띨한 생각을 갖고 그곳에 도착한 우스꽝스런 인물을 구경할지도 몰라, 그러다가 공상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낸다. 그가 초딩도 아니고 이런 혼잣말이 예상되니까. 뭔 놈의 007 가방 종류가 이렇게 많아?
대체로 미술관은 밝다. 깨끗하다. 교양미가 넘친다. 부티가 난다. 그리고 그곳에는 혼자 들른 여자들이 많으면서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 여행자, 이중 국적을 추측케 하는 외국인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서로 간 다정한 사이에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싸우고 사고 치고 미술관에 들르지는 않는다. 그가 들린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은 고인의 작품이다. 소설 초반에 왜 섬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가? 라는 설명을 잊지 않는 독자, 그대를 도저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다. 바로 전시중인 작품은 독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상당히 머나 먼 나라의 상당히 옛날에 살았던 명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채색 원피스와 극도로 포멀한 (보일 듯 말 듯한 스트라이프가 들어가고 버튼이 많고 꽤 모던하면서 클래식한) 수트, 익숙하지 않은 뭔가를 상기시키는 향수 내음, 이미 팔린 예약된 작품이라고 붙여진 쪽지, 같이 와서 작품을 감상중인 아이에게 건네는 엄마의 다정한 말 한마디 "이건 누구의 작품이란다. 수잔, 어떠니? 차분히 감상해보렴." 어조와 여운, 음률, 태도만 잘 어울린다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무척 준수한 미술 애호가처럼 보이는 법이다. 여간해서는 어렵지만 또한 코믹한 분위기와 정다운 세련미와 빈틈 어린 인간미와 고결한 지성이 모두 같이 뒤섞이기는 조금 어렵겠지만 말이다. 워 이런, 이 어감 꼭 말발 같다. 작문의 긴장감이 텐트를 친다. 텐트를 왜 쳐, 한 번도 안 친 남자 어디 없나. 공룡처럼 멸종 안 한 게 어딘데!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드니 보따리 내 놔라, 마치 이 말 같다. 누군가의 그들의 생각을 읽었어, 오케이.
"일정한 일을 해서는 그림을 별로 못 그려요. 그림 그리는 것이 제일 목적이고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거거든요. 그러니까 살기 위해 뭔가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작가를 못해요." 같은 외우기 어려운 작가의 말과 암기하기 쉬운 짧은 글도 있었다. "만족하면 작가는 그만이다." 그렇게 그림과 글을, 글과 그림을 주로 그림을 보면서 뭔지 모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무언가는 아무래도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닮았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발검음 소리가 들린다. 아는 사람은 바로 안다. 즉시 느낀다. 청아한 구두굽 소리.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관람객이 붐비지 않아서일까? 컬러를 쏙 뺀 듯한 그리고 장신구와 옷의 모든 생산 연도와 브랜드가 근소히 차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썩 일관된 컨셉으로 흠을 잡기 힘든 차림새의 아가씨가 J에게 다가와 천천히 말을 건넨다. 반듯한 성장 환경과 이것과 저것이 예상되는 감이 든다. 아 그리고 안경줄도 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안경줄 촌스러운 안경줄 하지만 마치 멜빵처럼 잘 매칭만 한다면 정말 괜찮은 흔하지 않게 보이는 그런 안경줄을 하고 있다. 옛날 사람과 현대인의 차이 가운데 가장 극명한 하나는 이런 것이다. 모자 같은. 하지만 모자를 항상 쓰면 갑갑하고 머리카락이 눌린다. 게다가 그런 외관과 더불어 티아라도 반짝인다. 심지어 면사포도 쓰고 있다. 미술관 가운데는 부케가 놓여있다. 뭐 마술봉? 그건 없다. 이곳이 유치원 학예회도 아니고. 그리고 결혼식장이 아니니까 최소한 장소에 맞게 웨딩 드레스는 입지 않았다.
「저.. 혹시 ( ) 교수님 제자 되시나요?」
<교수? 나는 알고 지내는 교수는 없는데 왠일이지. 아리따운 아가씨가.>
「어머 아니신가 보구나. 죄송해요. 들고 계시는 책 표지가 전시중인 작가님 제자이신 ( ) 교수님의 저서와 비슷했거든요.」
<뭐야 내가 들고 있는 이 책은... 이 아가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것 참 아가씨의 첫사랑을 물어볼 수도 없고 딱히 답하기 난처한 물음인데.>
화술의 기본은 듣기, 침묵, 앵무새 흉내내기, 추임새 그리고 그리고 표정이다. 표정이 그 얼마나 중요한데. 모르긴 몰라도 딱 보니 청자인 그는 오직 표정 하나 만으로 상호 대화의 전과정을 모두 소화할 거 같은 모습이다. 일단 두고 봐야 한다. 사람 목소리 너머로 잔잔히 들릴락 말락 매우 조용히 복고풍 음반 소리가 섞인 어느 명테너의 오페라 아리아가 들린다. 매우 조용히. 그녀는 베르디라면 바리톤 보다 테너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나 보다. 여기서 너무 깊게 들어가는 남자, 그다지 인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중견 큐레이터이다 보니 눈치는 일단 귀신 같이 빠를 것이다. 상대방의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고도 그냥 무덤덤한 때문인지 최소 시간을 위해서인지 위장술인지 하나만 봐도 열을 아는 타입처럼 보인다.
「아 세간에는 교수님이 전시중인 작가님 제자라는 사실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죠.」
「추상파 좋아하시면 다음 전시도 괜찮으니.. 조금..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켜졌나, 켜질려다 꺼졌나. 뭐 이리 금새 깜박거리다 꺼져. 그를 가지고 논 거야? 하지만 무심히 그냥 몇마디 건네고 지나쳤을 리는 없다. 원래 이런 때 말 수는 중요하지 않는 법이다. 절대 이런 상황이라면 말 수가 많아서는 그래서는 안 되고 안 되고 또 안 된다. 애석하지만 결과가 초장에 정해진 경우가 현실 세계에서는 제법 많다. 다만 매우 놀라운 한가지는 이 아가씨는 그가 말을 하기 위해 호흡을 정확히 들이 쉬는 순간에 얘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아주 정확히 딱 그 순간에. 신기하게 그 타이밍을 일부러 잡아서만 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가씨가 말하는 찰나에 그가 저절로 말할려다 자기 말을 먹는 것일까? 그는 한마디쯤 하려다가 말을 삼키고 말을 삼키고... 참으로 이상한 들숨이다. 기분도 이상해진다. 어디에서나 썩 빠지지 않는 코메디 기법임에 분명하다.
「저기 교수님께서는 위층에 있는 연주홀 앞에서 손님들과 만나고 계실거에요. 있다.. 시간 나시면 음악회 구경하셔도 괜찮으실 꺼구요.」
아닌 걸 알면서도 교수의 제자로 끝내 상정하는 말투, 애써 미련을 버리지는 못하고 더는 다가설 수 없고 애매하고 은근하게 여지를 두는 상냥한 말씨.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듯한, 실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원래 상류 사회든 예술계든 퍼포먼스계든 어디나 이런 미세한 감정의 교류가 존재하게 되어 있다. 좀 무디면 그런 상남자라면 몇 년 지나서 혼자 집에서 술 먹다가 그 신호의 선명함이나 빛깔과 뉘앙스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게 다행일 수도 있고.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 살며시 갸웃, 눈인사 그리고 가벼운 담소, 잠시만 눈을 마주치다가 시선을 작품으로 옮기고 그럼과 동시에 청자의 귀를 아주 약간 화자에게 기우는 듯한 몸짓,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고 팔짱을 끼었다 풀고 입술을, 자신의 입술을 잠시 만졌다가 손을 내리고 이거 뭐하는 짓인가. 그런데 그러다가 처음의 짐작처럼 정말로 대화가 끝났다. 듣는 사람의 말 한마디 없이 대화가 끝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미리 내다본 대로 실현됐다. 전지적 작가 시점, 괜찮네. 그런 가운데 조용하게 작품이 관람객들에게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지 약간 불투명 아니 반투명하고 어색한 기운이 으스스하게 감돈다.
그렇게 그는 어떤 드라마를 기억하며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즐겼으며 내심 더 멀리 상상 속으로 혼자 이런저런 장면도 여럿 그려 보고서 미술관을 나가려 한다. 그러다가 입구에 다다러서 깜짝 놀라 발을 헛딛는다. 왠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 한마리가 얌전하게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미술관 안에 강아지라, 그것도 골든 리트리버 아니 비슷한 종인가, 뭐지? 이 친구에게 다가가다가 그 앞에서 그는 또 한 번 놀랜다. 뭐야 이거 실사 동상이자나. 장면 장면 시간은 짧지만 보통 삶은 놀라움, 낯섬, 생소함, 생경함, 긴장감 이런 감정들이 잊혀지지 않게 등장해야지만 지루해지지 않는 것일까? 정적이고 수동적인 생활 자세를 견지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불확실함이 오히려 무언가를 다 알아버렸을 때의 허공과 맞선 맥없는 빈가슴과 쭈삣함보다 좀 더 낭만적인 편안함에 한껏 가까웁게 그리고 따스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에 비해 나중에 들어 동사의 명사화가 부쩍 눈에 띄며 빈도수가 늘어나는 데 별 느낌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영화는 2시간 그리고 2년이나 20년 후 회상, 책은 1주일 연애는 얼마... 그런데 미술관 구경은 어떻게 보면 조금 슬프다. 인기 없는 쓸쓸한 조용한 곳이라면 좀 더, 그곳에서 처연한 모습으로 연상하고 추측하고 몽상하기와 더불어 상상을 즐기는 외로운 큐레이터와 고독한 화가, 가난한 관람객이라면 얘기는 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한 권의 시집을 외우듯이 읽는 것처럼 두어 시간 동안 미술품을 사지도 않을 꺼면서 공짜로 구경하는 것도 뭐라 말하기 옹삭하다. 두어 시간 동안!
J는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는 입장도 아니고 약속도 없고 어디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없어서 2층 공연장으로 갔다. 공연장 앞에 도착했다. 그는 원래 이런 클래식 공연을 구경하고 싶어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얼마에 한 번쯤 관람하기를 좋아한다. 보아하니 연주자가 해외에서 오래 공부하고 돌아온 귀국 기념 연주회였다. 바이올린 독주회. 이 연주자는 청춘을 음악 공부와 함께 보낸 것이구나. 그럼 남자와의 연애는 많이 해보지 않았을려나. 아 팜플렛에 웃고 있는 사진은 여성이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연애를 바이올린과, 아니면? 여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좋게 느낀다랄까. 남자가 애를 낳을 수는 없으니까. 롤이 다른 것 뿐이니까. 애프터 유, 얼마나 좋아! 그런데 반주자 약력이 그야말로 휘황 찬란하다. 오히려 너무 화려해서 연주자에게 미안해야 할 지경이다. 오 공연 기대되는데. 설마 힌데미트나 하차투리안 일색은 아니겠지. 연주시간 내내 가만히 서 있다가 퇴장했다는 쇤 베르크던가 그런 공연만 아니면 된다. 그는 쇤 베르크도 좋아한다. 연주 프로그램은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국민주의, 현대음악 정확히 균등하게 골고루 포함되어 짜여있다. 아쉽게도 알프레드 슈니트케의 작품 연주에 어느 유명 영화배우의 에르네스토 사바토 소설 낭독 공연은 다음 일정으로 잡혀 있다. 이 현재형 글쓰기 스타일은 어떤 화법이나 문체가 아니라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이스 레코더에 모든 떠오르는 생각들을 녹음하는 기록자의 독백 같다. 왜 그럴까? 질문형이 아닌 회의형 의문문이니 안심한다. 교수이면서 거장의 제자였으며 미술관 일도 하면서 음악회장을 간혹 찾는 큐레이터 조련술이 뛰어난 그리고 클래식 카를 타고 다니는, 그 클래식 카 돈 주고 샀냐는 푸념도 흔쾌히 감내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그런..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미 옛날에 체념한 그런 교수로 보이는 행색의 인물은 연주회장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 다행스럽지만 보이지 않으니 또 뭔가 허전하달까.
자, 공연도 모두 끝났다. 연미복도 아름다웠고 제일 앞자리에서 주시한 연주자들의 호흡과 안색, 눈빛, 몸짓도 모두 괜찮았다. 연주중 핸드폰 벨소리도 없었고 안다 박수도 나오지 않았으며 코고는 소리도 없었고 헛기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서 상당히 조용했다. 바이올린은 과르네리 같았다. 음색이 1710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나 2005년산 로베르트 레가치와 아주 미세하게 비슷했지만 흥미로운 차이가 있었다.
정~말 과-르-네-리? 합리적 추론은 믿거나 말거나, 권고 사항은 믿음이 가는 걸로. 왜냐하면 한마디로 찍은 거니까. 틀릴 수는 있지만 섣불리 재미삼아 내다본 건 맞고, 어느 대도시 지하철역에서 뭔 실험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도? 일반인은 궁금해 하니까. 일반인은 그 비싼 악기를 갖고 싶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의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가격 흥정 없이 경매에서 거액 내고 단번에 낙찰받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번화가에서 잃어버린 비싼 악기를 주인에게 찾아주어 뉴스에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보통 사람은 바로 이게 의문이다. 도대체 그 명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미스테리한 소리가 어떻다는 것인지. 그래서 옆에서 실제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글로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그 소리의 차이점을 직접 그리고 최고급 오디오로 듣고 간접으로 느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나. 무반주 파르티타를 바로 옆에서 듣고 나서 아 어떻구나, 시간이 지나서 아 어떻드라, 그런 후 나중 소설을 쓸 때 아마티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마티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고 실신하는 줄 알았다, 라면서 직접 체험의 감동을 한껏 과장시켜 뭔가 있어 보이는 듯이 남의 청각과 공감각과 지각을 자극시키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공연에 앞서, 공연이 끝나서 그리고 공연 중에 아주 잠시 은밀히 이와 같은 얘기를 같이 관람온 친구들끼리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거장의 연주를 들어보자나? 그럼 너네는 아마 기절할지도 몰라. 꺼뻑 정신이 혼미해진다니까. 영화에서 봤던 파가니니 연주회에서 눈 뒤집어지는 귀부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나 할까. 오 그 황홀경이여, 아 다시 듣고 싶다, 그 소리.」
말하는 사람 즉 화자의 꿈꾸는 듯 몽상하는 모습은 대화 장소에 드뷧시의 음악을 자동 연주시킨다. 반면 듣는 친구 즉 청자의 심상에는 어느 경지에 올라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상상의 나래를 타며 푸쉭푸쉭 공기 주입되고 가스밸브가 열린다. 두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어느 오빠와 같이 협연하고 뭇남성들로부터 러브콜 폭주. 이 말발에 걸려들면 바로 카드 결재 들어간다. 바이올린 12개월 (무이자) 할부 구입 후 12년째 창고에 방치되거나 36개월 낮은 금리 할부로 끊으면 3내지 6개월 만에 중고로 내놓을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K.365를 연주하는 꽃미남 실내악단에 서브 멤버로 입단하는 꿈은, 베토벤의 로망스 작품번호 50번 연주는 물 건너 아득히 멀어지겠지만 위와 같은 너스레와 직접 들어보니 그다지.. 어떻드라, 옆에서 듣고 보니 영~ 형편없드라 가운데 무엇이 더 인간적인지, 사람은 어떤 사안에 대해 때로 어때야 하는지 그 판단은 스스로 자문해 보기로 한다.
「얘 이마 짚어바. 열 있나 보게.」
「열이 아니라 보니까 유난히 헤어가 빨리 자라는 것 같은데.」
「정말인데 맞아, 저번에 컷트 했는데.. 뭔 발모제를 바를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지?」
「오 정말~ 왠일이니. 삼손이니 아니 삼손은 남자인데. 거장 연주를 바로 옆에서 안 들어도 정신이 혼미하다야. 털어놔. 너의 머리카락이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그래, 어서 고백해.」
「실토해.」
「어서 말하란 말이야.」
「아니야. 나 요즘 일하느라 바빠서 음악도 안 듣고 어디 신경 쓸 겨를도 없어.」
「정말이야.」
「믿어줘.」
「제발.」
「따라다니던 몇몇 남자들도 모두 예전에 자취를 감췄고 이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거 너네도 다 알잖아.」
「한번 만 봐줘. 원래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어.」
「깊이 반성하고 있어.」
「미안해..」
「나 요즘 이상한 그림책을.. 보는 게 아니라, 요상한 동영상을 보는 게 아니라.. 나 사랑에 빠졌나봐.」
「요염한 기집애 같으니라고.」 친구들 가운데는 멘트가 센 친구도 있다.
「응큼한 것!」 친구들 가운데는 멘트가 더 센 친구도 있다.
「음탕한 년!」 친구들 가운데는 멘트가 제일 센 친구도 있다.
「분명 엉덩이에 뿔났을 꺼야.」
「얘 가방 뒤져봐.」
「어서 지갑 꺼내봐. 넌 지금 뭔가 숨기고 있어.」
삐─ 삐─ 삐─는 모두 아는 세계니까 생략한다.
「알았으니까 다음부터는 띄엄띄엄 말하지 말고 대사 한 번에 쳐. 이게 만일 소설이라면 읽는 사람 자꾸 헷갈릴 꺼 아냐. 사람이 몇 명인데 자꾸 돌아가면서 딴소리한다고. 대체 누가 뭔 말 하는 거냐고.」
「너 혹시 귀에 뭐 꼽고 누가 지시내리는 데로 말 따라하는 거 아냐? 혹시 이 가운데 타켓이 있는 거니? 그런거야? 아니지?」
「어머 웬일이니? 너 요즘 드라마 너무 많이 봤어~ 전에도 날이면 날마다 영화만 보더니만 걱정된다 했어, 내가.」
「그래도 그렇게 말을 띄엄띄엄 뭔가 있는 듯이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했어. 자꾸 귀 기울이게 만들잖아. 재주도 좋아.」
「너가 대사 한 번에 안 치니까 그러니까 유난히 헤어가 빨리 자라는 째가 잘 안 읽히는 소설을 보다가 누가 어떤 대사를 말하는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얘기도 지루하며 그래서 소설을 보기 힘들고 재미없으니까 째는 명쾌히 누가 무슨 말 하는지 확실히 구분된 희곡을 읽어. 그런데 희곡을 읽어봐. 읽어보면 어떠니? 그래서 사람들이 책보다 드라마나 영화를 더 가까이 하고 쉬운 책을 더 선호하게 돼. 생각을 할려고, 새로운 생각을 할려고, 생각을 단순화할려고, 기존의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찾고 발견하고 내 생각과 비교 할려고, 일관된 생각을 할려고, 살아온 쌓아온 인생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만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타성과 관성에 따라 반응하고 해석하고 감상하고 내다보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데 그러기 위해서 책을 읽는데 그러다가 결국 에너지가 정말 많이 드는 책읽기 보다는 다른 형태의 예능과 예술과 놀이에 집중하는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책 읽는 건 정말 어려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사람들은 프라모델을 만들고 암벽 등반을 하고 바둑을 두고 운동 중독에 빠져 살면서 그게 왜 좋냐는 물음에 아무 생각도 안해서 좋다고 하지만 그 답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1가지 생각만 하니까, 사람이 단순해지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듯 해. 물론 캐셔나 공장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건 그와 달라. 그니까 그들이 많이 벌고 행복한 세상에 대해 19세기 소설들이 그렇게 얘기했지. 여러가지 생각이 아닌, 수동적인 자동적인 동화나 순응이 아닌, 딱 1가지 생각.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 듣고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 말하고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 책을 읽고 그리고 온갖 다양한 생각이 가득한 채로 데이트 하고?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가만히 명상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1분이나 10분만 참아보는 거야. 그럼 그게 잘 안 돼.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요즘 무슨 책 읽니, 운전 많이 하지 말고 자주 움직이고 걷는 게 좋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무언가를 대충대충 하지말고 완전히 미쳐라 미쳐 같은 말에 거부감을 느끼고 피곤해 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건 아마도 계속 잘 해왔는데 세상일이 너무 복잡하니까 자꾸 하나만 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러는 것 같아. 애들처럼! 강아지처럼! 고양이처럼! 쉬고 놀고 또 심심해 하고 싶은 거야. 어른들은 자주 그래. 자, 많은 생각, 쉬운 생각, 없는 생각이 아닌 새로운 생각, 일관된 생각, 다채로운 생각... 그녀가 이제 1가지 생각만 한다네. 워워~ 반겨할 일이군.」
「너처럼 대사 길게 쳐도 사람들 소설 읽다가 별로 안 좋아해!」
「맞아. 정말 그래.」
「우리 얘기하는 이 시간과 공간이 소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야. 소설이나 영화였어봐 어땠겠어? 책 쓴 사람은 책 안 팔린다고 난리고 작은 출판사 사장은 괜히 그 인간 말발에 속아서 출간했다가 본전도 못 뽑은다고 투덜거릴 게 뻔하고 독자들은 뭔 죄야?」
「그럼. 그러니까 상담이나 질문 같은 경우에도 답변 너무 길게 하는 거 아니야. 연애 컨설턴트도 봐봐. 성심성의껏 열심히 도와주고 싶어서 친절하게 얘기해 주면 또 그러잖아. 별로 좀 그렇다고. 다른 속 시원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답변 없냐고. 원래 사람들은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하고 또 대부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알면서 묻고, 답이 뻔하니까 답이 없으니까 답이 하나니까 묻고, 그냥 확인할려고 묻는 경우가 대다수잖아.」
「미안. 내가 대사 한 번에 안 치니까 사람들이 책을 안 읽고, 내가 대사 한 번에 안 치니까 사람들이 쉽게 살고, 내가 대사 한 번에 안 치니까 한 친구를 교수님으로 나머지 친구들을 학생으로 만들었구나. 다음부터는 주의할께.. 그렇지만 얘 말마따나 현실에서 너처럼 대사 길게 치는 사람도 거의 없어 얘~ 너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 머리 아프잖아.」
「그래? 그럼 정리할께. 첫째, 대사를 한 번에 안 치면 사람들이 소설을 안 읽고 쉽게 쉽게 산다. 둘째, 한 사람이 대사를 엄청 길게 독점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고 융통성이 바닥나며 사회성을 내다버린 좀 부족한 사람으로 비추어져 주변에서 반겨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고 쉽게 쉽게 살게 된다. 그러므로 말을 띄엄띄엄 하지도 하품이 나오도록 길게 하지도 말자. 끝!」
「그러니까 사람 띄엄띄엄 볼 일 아니네.」
「오케이 정리 됐다. 박사님들 나셨네. 그녀가 이제 1가지 생각만 한다고 반겨할 일이래드니 마냥 반겨할 일 만은 아닌 것 같구나. 아무튼 이만 헤어지고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
괜히 그녀는 헤어가 빨리 자라서 이 소란을 피우게 했다. 그런데 왜 헤어가 빨리 자라는 것일까? 그냥 발육이 좋아서? 그저 기초대사가 잘 이루어져서? 그 때문은 아닐 것이고.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야? 왜?
삼천포 과르네리 대화에서 줄거리로 다시 돌아와서, 그가 나오면서 보니 누가 생수를 바닥에 흘렸는지 어느 좌석 밑에는 물이 흥건했다. 그는 공연장을 나온다. 주로 지인들과 은사님과 제자들이 많아서인지 바깥에는 가벼운 다과 세트가 차려져 있다. Fly me to the Moon 같은 음악이 나오는데 생음악 같다. 그런데 연주자들은 안 보인다. 오디오가 좋은가 보다. 바로 트랜지스터 앰프로 도달 가능한 최고봉에 일년에 단 1개 겨우 제작 가능한 스피커의 조합! 아마추어 일반인과 취미 동호인들의 최고의 기쁨 가운데 하나는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장비발 얘기다. 마라톤 운동화도, 사이클 부품도, 야구 방망이도. 월드 클래스 축구 선수가 싸구려 축구화 신고 경기하지는 않는다. 마리아 샤라포바가 입문용 테니스채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설 리는 없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한때 최고는 타이거 우즈였다. 그도 마찬가지다. 조랑말을 타고 상금킹 선수가 경마 경기에 나선다면─경마 룰은 잘 모르겠다만 급한데로 말이 경기 전날 햄버거 먹고 체한 걸로 한다─무수한 상남자들이 울상을 지으면서 여유 자금과 마이너스 통장까지 잃겠지만─그분들의 기분 말 말자─과르네리도 마찬가지 이치다. 나는 비가 오면 SUV를 타지(마초 클럽), 나는 어쩐지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170수 울팬티를 입어(고급 울팬티 동호회일까?) 같은 얘기다. 그 재미는 당연 인정하기 싫지만 교집합에서 나는 발을 빼고 싶지만 탑클래스가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삼천포에서 진짜 돌아와서, 그는 나비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다과상이 차려진 것처럼 손님이지만 생일 잔치 당사자인 것처럼 인식하면서 천천히 음식을 맛보며 품평하고 와인을 몇 잔 마신다. 약간 출출하던 차인데 잘 되었다는 듯이 정신없이 눈치보지 않고 먹고 있다. 그렇게 대형 슈퍼마켓의 시식 코너에서 배를 채우는 것처럼 엉겹결에 식사를 하고 나섰다. 나오는 길에 안내장을 하나 받아든다. 윗층에서 끝내주게 웃기는 토크쇼가 있는데 방청은 무료라고 한다. 무료의 힘, 대단하다.
제목하여 누구 쇼! 인기도 좋은 쇼다. 평판도 괜찮다. 방청? TV로 보는 것과는 딴 세상이다. 설마 혹시 이 빌딩도 과거 성장기에 까페 사장을 꿈꾸다가 그 꿈이 업그레이드 되어 1층에 뭐, 2층에 뭐, 3층에 뭐 그렇게 꿈을 소박하게 이룬 누군가의 건물일까? 그렇건 아니건 큰 상관없다. 있어도 관리하기 귀찮다. 없는 건 원래부터 없었다. 어딘가 다른 세상에는 또 단위나 스케일이 다르다. 빌딩? 레고 블럭이다. 그분들에게는. 어린 손과 발과 얼굴과 키가 마음이 모두 작으신 분들 말이다. 모든 어른은 그분들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던 어른은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실연했어도, 괴롭거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 그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 카페 사장! 어느 카페에 들리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타인에게, 어딘가에 멈추기만 하면 물 좋은가 둘러보며 꼼지락꼼지락 있지도 않은 밧줄 매듭을 매는 새늉을 하는 개그맨에게 그리고 거의 모든 일반인에게 기쁨과 만족과 낭만을 안겨줄 수 있는 카페 사장. 어느 청춘들의 많은 젊은이들의 꿈 까페 사장. 어떤 까페 사장은 아무리 연이은 폐업이 계속되더래도 자영업 아니면 다른 일 못한다는, 그들끼리만 즐기려고 시트콤 아지트처럼 으시시한 찾기 어려운 장소에도 사람을 모이게 하는 카페, 그곳의 사장, 만만히 볼 게 아니다. 꿈의 이상화의 실증적 구현의 단계에서 한 번은 거쳐가야 할 중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토크 쇼 방청석에 어느새 그가 번개처럼 도착해서 앉아 있다. 토크쇼는 카드 뒤집어서 게스트와 호스트가 서로 컵의 물 끼얹기, 평범한 만담 때로는 진지한 심도 있는 토로, 쇼 시작전 담당 PD의 막춤, 코끼리 발씨름, 가위-바위-보 해서 초딩 키 만큼 크고 두터운 손 모형을 장갑처럼 끼고서 상대방 뺨 때리기, 미스터 빈 흉내내기, 톰과 제리 연기하기, 립 싱크 배틀, 성당식 고해성사, 보드카 빨리먹기, 상대방 약 올리고 깐죽거리기, 옷벗기 게임, 야자 타임등 갖가지 볼거리가 풍성했다. 그러다가 토크쇼는 끝났다. 갑자기 저 앞에서 보도 듣도 못한 밑도 끝도 없이 막춤을 췄던 담당 PD가 다가온다. 혹시 들뜨기 좋아하는 부끄럼 잘 타는 초딩이나 말 수가 없고 매사에 소극적인 청소년이라면 내가 커서 나중 저렇게 남 앞에서 춤춰야 하거나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떡하지? 라면서 이런... 이렇게 걱정을 하실 수도 있지만 별로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때라면 못추면 못출 수록 박수는 커지고 환호성은 실로 드라마틱~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를 너무 잘 선보이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암묵적인 동의도 물밑에선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법이다. (예비) 청춘들이 내다보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 아까 막춤을 신나게 선보였던 담당 PD는 사자머리에 헤비메탈 락커 스타일로 상의 밑으로 삐져나온 레이스 무늬 속옷 차림새와 고운 머리핀을 보아 하니 평소에는 고상한 아가씨인가 보다. 왼쪽 다리에는 철갑 장신구도 하고 있다. 그녀가 다가와서 J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 윗층 연극 공연장에서 토크쇼 방청객 초청 이벤트가 있으니 시간 괜찮으신 분들만 잠시 재미난 공연 보고 가시라고 말한다. 수작 걸로 다가온 게 아니었다.
드디어 한 층을 또 올라갔다. 컷트 할 만 하면 공짜랜다. 한 층 올라가서 그는 연극 공연장에 들어간다. 게임에서도 레벨은 업그레이드된다. 폭삭 망하거나 사기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열심히 살면서 저축하고 서점에도 들리고 일주일이나 한달, 일년 주기로 주변의 지인들과 연락하고 만나고 가끔 여행도 떠난다. 그것과 똑같이 J는 한층 한층 계속 올라가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이러다 빌딩 끝까지 올라가는 것일까? 도시 안의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 한층 한층 올라간다고 언짫아 하시는 독자께서는 빌딩이나 종합 유락 시설이 아닌 대부호의 거대한 섬이라고 가정하시면 된다. 이미 무수한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하신 독자시니까 스케일 늘리고 뭐 조이고 줄이고 다듬고 다 가능하다. 적당히 숲을 보고 큰 흐름을 읽으신다. 공연 제목은 스스로 정하기. 독자의 고품격 취향은 무척 까다롭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겹치는 연이은 행운에 따라 집중하면서 계속 예술에 빠져들어 그런지 그는 슬며시 체력이 고갈되어 간다. 당연히 그럴 만 하다. 그림 구경하고, 클래식 공연 긴장해서 내내 눈 빡 뜨고 보고, 난데없이 토크숏 보면서 웃고 긴장 풀고 그러다가 연극을 보았으니 어쩌면 막다른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거다. 보통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 2편만 연짝으로 봐도 적잖이 피곤해 한다. 그러니 당연하지. 그래서 정작 재미있다는 연극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꿈나라로 떠나신다. 다른 사람이 최면을 걸어 말려든 게 아니라 스스로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거다. 어떻게 보면 혹시 모르는데 또 한 층 더 올라갈지도 모르는데 또 뭐가 기다릴지 궁금한데 연극 공연은 체력 문제 때문으로 자리만 채운 걸로 만족해야 한다. 옆에 앉은 어린 왕자 복장의 꼬마 신사와 갑자기 친해지고 그래서 그 친구 옆에 놓여 있는 적외선 카메라 B612를 써보며 가지고 놀다 잠에 빠진 게 아니라 피곤해서 아주아주 깊은 명상에 빠진다. 문체가 머머 했다 머머 한다 머머 했다 머머 한다, 오히려 안 헷갈리고 약간 재미있다.
꿈을 2개쯤 꾼 거 같은데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추상적인 꿈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커다란 미지의 섬에서 떠돌고 있었는데 그 섬 전체가 빌딩식으로 층층별로 구조되어 섬 위에 또 섬이 또 섬이 있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개꿈이었다. 이런 뭐야 이거, 꿈꾸다가 공연이 끝났다. 공연이 끝나니까 딱 잠이 깬다. 뭔 숲 속의 공주인가, 신데렐라인가, 오즈의 마법사인가, 사오정도 있다. 공짜 공연이기는 하지만 좀 억울하다. 잠이야 집에서 실컷 자면 되는데 왜 여기까지 와서 잠을 자는 건지 이곳이 공연장이 아니라 무슨 특급 호텔 스위트룸이야? 하긴 그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분께서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 묵는다면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위스키 몇 병 때리고 뻗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가 잠든 사이 공연은 끝나버렸다.
공연이 끝나고 그가 최면이 풀리듯이 잠에서 깬다. 주위에서 공연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다.
조명이 마술을 부리며 배우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그 연기와 무대와 음악이 모두 공존하는 영화의 화면 안으로 내가 퐁당 빠져서 투명인간으로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정말 가슴 뭉클했다고, 클라이막스에서 음악 나올 때 눈빛에 말에 조명에 찡했다, 떨렸다, 마지막 반전에 소름 돋았다고 그들은 그랬지만 그는 그걸 다 놓쳤다. 무엇보다 옆에 있던 관객들은 배우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 순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 가장 좋았다! 쫄았다! 와 이거구나! 자기는 저절로 대답을 했네, 무시하고 인상썼네, 쌩깠네, 있잖아~ 이상하게 나는 그 눈을 계속 마주보지 못하겠드라, 어머 너도 그랬니, 눈이 마주치니 그것 참 신기하데..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할까.. 별다른 교감이야 없겠지만 왠지 ET처럼 배우와 내가 검지 손가락을 맞다은 느낌이랄까, 나도 깜짝 놀랬어~ 시선이 내쪽으로 올 뻔 하다가 쓱~ 비켜 가드라구.. 그래서 오 살았다 그랬지, 난 순간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뭘 잘못하진 않았을까.. 뜨끔하더라구, 나는 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 설마 동화에 나오는 그 마법의 구두인 걸까.. 가슴이 울렁울렁..., 배우가 말하지 않는 그 눈빛은 무엇일까, 대사가 아닌 눈빛으로 내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일까, 최근에... 최근에 저와 비슷한 눈빛을 본 기억이 있어 그리고.. 그리고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났는데 막을 내리기 전에 특별 이벤트라는 게 있었다. 관람객 1명을 무대 위로 불러서 스타 트랙처럼 그 사람을 순간 이동시켜 4차원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뭔 쇼인지 뭔 상황인지 재빨리 감을 잡고 있는데 J가 공연 내내 깊숙히 주무시길래 연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그가 지목된다. 순간 이동? 좋지. 순간 이동 하면 되지. 게다가 잠도 아직 덜 깼다. 그렇게 그는 무대 위로 올라간다. 뭐 물어보고 답하고 자시고 거두절미하고 짠 하고 순식간에 마술을 부렸다. 순간 그가 진짜 사라졌다. 사라진 그를 빼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미 너무너무 식상하다는 듯이 관심없어 하며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근처 어디로? 무대 뒤로? 과거로? 미래로? 소설 속으로? 그렇지만 뭔가 찜찜하다.
그는 무대 밑에 설치된 봅슬레이식 장거리 슬라이딩 레일를 타고 1층의 처음에 들렀던 미술관의 리셉션 룸 소파로 떨어졌다. 떨어진 즉시 감을 잡았던 것은 아니다. "Welcome to the FUTURE World!" 같은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온 마음과 몸에 착 감기는 환영의 인사말과 효과음 그리고 배경음악 또한 당연히 없었다. 일단 주위를 둘러 보니 파란색 알약과 밀가루처럼 하얀가루가 담긴 투명 비닐 봉지, 짧은 빨대가 보인다. 약국인가? 아니다. 그 옆으로 가방에 들어있는 뭔 벨트도 보인다. 그는 태어나서 그 물건을 한 번도 실제 보지 못했으니 그것이 가터벨트인지 감을 잡는데 약간 반박자 늦었지만 가방 바깥으로 살며시 살짝만 삐져 나온 발레복 비슷한 옷가지를 보고 그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옆으로 벽에 걸린 그림은 아무래도 그 뒤에 비밀 금고가 있을 듯이 말을 아끼고 있는 듯 한 앙리 마티스의 작품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욱 마티니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미술관 리셉션 룸인지 관장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철가면도 놓여있고 날개 달린 에어 조던 운동화도 보이고 처음 보는 빛깔의 밍크 코트도 보인다. 약간은 미술관 분위기와 동떨어진 언발란스한 실내 정경이었다. 그래도 고가의 미술품들 거래하고 사인하며 밀담을 나누는 고급 미술관의 내실인 것 만은 분명해 보였다. 미끄러지는 동안 어디서 고양이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화면도 보이는 듯 했으며 감각이 매우 혼란스러워 어디로 가는지 왜 떨어지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른 채 이동했으며 약간 공룡알에 들어있다는 느낌, 자궁 속에 포근히 담긴 듯한 기분도 느꼈다. 그의 마음도 이상하고 몸도 예사롭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다가 이게 왠 날벼락인가. 미술관 구경했어. 클래식 공연을 관람했어. 토크쇼를 봤어. 연극 배우들을 비웃듯이 코골면서 잤어. 물론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그러다 갑자기 무대로 불려가서 어딘가로 떨어졌어.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처음의 미술관이야. 마지막에 연극 무대에서 쓱~ 미끄러져 빨려간 후에 처음에 들린 미술관에 도착했다니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뭐야 이거?
무작정 소파에 퍼질러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으니까 그는 왠지 열고 싶은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새하얀 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 문을 열었다. 그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새하얀 외부의 미지의 공간을 마주하고 숨쉬면서, 숨쉬면서 수영을 하여 어느 제 3세계로 나가는 것일려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문을 여니 아까 처음의 1층 미술관이었다. 그 때 봤던 미술품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때 저만치에서 아까처럼 그 분이 걸어오신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아까는 청아한 구두굽 소리였는데 지금은 좀 뭐랄까, 괴기스럽기도 하다. 그 분은 아까처럼 그대로 면사포, 티아라, 무채색 옷차림, 안경줄, 엘레강스... 그리고 아까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다. 생전 처음 그를 본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처음처럼 그에게 말을 건넨다. 주변인물들은 조금 바뀐 듯 하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엑스트라인지 감도 못 잡고 있는 자작과 팅커, 테일러들도 있을 것이다.
「저.. 혹시 ( ) 교수님 제자 되시나요?」
이렇게 된 마당에 J의 머리 속은 복잡하다. 이런 젠장 무한 루프에 빠지라고? 내가 그렇게 어리숙한줄 알아? 사람을 뭘로 보고 이래? 이거 어디서 개수작이야? 물론 속으로 그렇게 조금은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는 앞뒤 안 보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자꾸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것도 같고 미세한 기운이 자기를 잡아 끄는 것도 같았다. 이야기가 너무 평이하다, 사건이 없다, 대화도 없다, 주인공이 볼품없다, 등장인물도 없다, 없는 것 투성이다, 넘 빈약하다, 이게 뭔 소설이냐 라면서 소설 초반에 불평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독자와 똑같은 평범한 유형이다. 그러니 오히려 독자가 몰입하기에 역으로 유리할 수 있다 이렇게 설득시키고 독려하고 토닥이듯 정중히 독자를 꾀엿던 게 이제야 빛을 보는 것일까? 뭔지 모를 의욕과 알 수 없는 활기, 믿기지 않는 사랑과도 같은 신기한 경험에 초현실주의 감각이 충만하여 그는 뛰어서 집으로 내달렸지만 집에 거의 도착해서는 반듯하게 평상심을 되찾고 평소처럼 걸어서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쉬이 그 경이로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이 배고픈 줄도 모르고, 뭔가에 집중할 수도 없고, 멍하게 그저 멍하게 한동안 가만히 서있기도 하다가 앉아도 봤다가 누워서 마음을 비울려고도 했다. 이제 슬슬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걸 쓰면 된다. 겪은 그대로, 그대로만 쓰면 되는 거야. 이제 먹고 사는 걱정 모두 끝난 거야. 장미빛 부의 예견도 예견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런 경탄스러움에 마음이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영화에서만 봤던 일이었으니까. 혹시 설마 자기가 연극 공연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후 연극 주최 측에서 꼭 빼 닮은 사람을 객석 제일 뒤에 등장시켜 헤드라이트를 쏘았던 건 아닐까? 순간 이동 마술이라고. 적당히 어리버리하고 가장 일치하는 외모를 지녔고 뒤탈도 없을 것 같고 포섭하기 쉬운 상대로 내가 미리 선정됐고, 그렇게 하여 마술 공연이 재공연이 이어지고 더블 캐스팅 생활 연기가 실제 삶이 되는 것일까?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렇게 동화 같은 일이 발생할 리는 없어. 내가 봤을 때는 아무래도 이런 시나리오가 가장 그럴듯 해. 공간 이동 봅슬레이는 프로포즈용으로 의심되는 미술관 관장의 작품이고 그 세트는 평소에는 감추어져 작동하지 않았다가 버튼을 눌러야만 세팅이 되는 거지. 즉 원래는 공연장 무대 뒤편 연습실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미술관이나 공연장 직원 신입이 여기 저기 뚤레뚤레 하다가 뭔가를 잘못 건드린 거야. 그래서 연극 관계자들도 지금쯤 그를 찾고 있을 거야. 이 인간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난리 난 거지. 실종 신고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일을 대체 어떡하냐고. 어, CCTV에 기록도 안 남았자나? 하면서.
으하하하하하. 일단 이 일을 소설로 쓰기 전에 관장과 협상을 해야 하나. 협상? 어려운데 그런거 잘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른들이나 하는 건데. 이거 아무래도 실로 커다란 대가에 해당하는 엄청난 일을 치를 것 같은데...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해 올 텐데, 남몰래 조용히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지고 가라고 압박을 해올 수도 있을 거야. 영화나 소설과 드라마에 비슷한 작품들이 뭐가 있었지. 아니야 아니야. 즉시 온라인 소설로 발표하는 거야. 조회수 대박나고 출판사와 계약하고 대형출판사가 그 계약 파기하고 위약금 다 물어주고 더 많은 판권 얹혀서 딜 하고 책 불티나게 팔려나가서 앞으로 더 벌지 않아도 될 만큼 억~수로 많은 인세를 획득할 꺼야. 기계식 키보드도 살 수 있어. 오, 너무 흥분하면 안돼. 우선, 이런 그림같은 스토리는 믿을 수 없으니 그는 일단 몇 없는 친구들의 의견을 묻기로 한다. 초장에 대박날 것 같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템포 쉬어 가기로 한다. 전화로 어느 친구에게 연락하니 왜 그리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냐 뭐라뭐라, 다른 친구들을 만났드니 넌 왜 그리 얼굴이 못쓰게 됐냐, 아주(아조) 팍삭 맛이 갔네,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냐, 뭔 일 있는 건 아니냐 이러쿵저러쿵. 자꾸 걷도는 이야기만 하고 도무지 본론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겨우 기회를 잡아서 드디어 말을 했다. 이렇게 이렇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신기하지 않냐고, 대단하지 않냐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 그냥 마냥 좋아해도 괜찮냐고.
「야이 멍충아~ 넌 그것도 몰랐냐? 그거 이미 파다하게 소문나서 드라마로, 영화로, 소설로, 뮤지컬로, 여행 상품으로 뭐로 뭐로 닥치는 대로 마구 쏟아지고 있는데 뭔 소리하고 있어. 설마 그걸 이제야 알았다는 건 아니지? 너 어디 깊은 산 속에서 살다가 내려온 거 아니야?」
「얘 봐라. 넌 뉴스도 안 봐? 신문은 읽자나. SNS도 안 봐? 사람들과 대화 안 해? 얘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예 정말 맛이 갔네 갔어.」
「지금 완전 난리 났다니까~ 이 친구 딱 로빈슨 크루소네. 제이슨 본이 따로 없구만(먼). 정말 몰랐던 거야? 솔직히 말해봐. 우리 웃겨줄려고 일부러 모른 척 한거지?」 뒷북도 적당해야 봐주지, 그만 좀 하라고 인상쓰는데 분위기 심각해진다.
「이런 누가 혹시 J를 때린 거 아냐? 멀쩡한 애가 이렇게 망가질 리가 없잖아?」 칙칙폭폭 칙칙폭폭 스팀 만빵. 우악스러운 분위기에서 이제는 비꼴 차례다.
「놀랍도록 신선한데! 잠깐 너무 핀잔주지 말아봐. 아무래도 얘 진짜 같은데. 아까 처음에 말했던 거... 오 얘 표정봐봐 표정봐봐. 워워 진짜야 진짜.」
「온몸이 오그라들어. 나는 말이야 이처럼 오글거리는데 이상하게 뭔가 이 녀석이 측은하고 안 됐다는 감정도 느낀단 말야, 대체 뭐지 이 느낌?」
「그만 해라 무안하다야. 그럼 그렇지. 늬가 하는 일이 항상 이런 식이지.」
핀잔을 듣고만 있다가는 더 상황이 안 좋아질 게 뻔하다. 그가 받아친다. 능청꾸러기. 티나도 창피해도 어쩔 수 없다.
「야 야 적당히 해. 속아주는 것 치고 너무 진지하다야. 그냥 너네들 웃길려고 한 번 해본 소리야. 애들이 소심하게 왜 그렇게 심각해. 너네들 요즘 욕구불만이야. 꼭 탐정처럼 왜 그래? 아직까지 현실 속의 영화 주인공 꿈을 버리지 못한 거야? 정신차려~ 나는 진작에 그 망상 내다 버렸으니까.」
친구들이 아직 못 믿는 눈치라서 다시 덧붙여서 한마디 더 한다.
「에이 그냥 한 번 연기해 본거야. 짜식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
그는 확 깨버린 감정을 어떻게 다잡을 수가 없다. 참 허무한가 보다. 이런 말을 남기는 걸 보면 그도 이제 그들과 비슷해졌나 보다.
「절~대 따라하지마!」
<맞다~ 소극장에서 연극이 끝나고 잠이 깨어 무대 위로 걸어올라 갈 때 사람들이 모두 소란스럽고 걷돌고 얘기하고 핸드폰 켜고 나갈 준비만 했어. 다 안다는 듯이 무관심했어. 맞다, 그랬어. 에이 좋다 말았네.>
<그럼 연극 공연장에서 꾼 꿈은 뭐였지? 그 꿈은 쉽게 예를 들면 1층 캥거루 랜드와 사하라 사막, 아마존 강이 혼합된 공간이었고 2층은 아프리카와 남미 분위기 3층은 아틀란티스 4층이 쥬라기 공원이었는데, 애니메이션에서나 가능한 꿈이었는데 일종의 예지몽인데 꿈의 뒷부분이 생각나지 않으니 해몽도 어렵고 뭐지 이거.>
<신삥 직원이 실수로 뚤레뚤레 하다가 실수로 버튼을 건드린 지가 얼마나 오래된 거지. 도통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 미스테리야. 그 특수 버튼은 또 얼마나 허술하게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고. 게다가 지금까지 나는 왜 몰랐던 거야. 이런~ 뭔 이런 일이 다 있어. 어떻게 깜쪽같이 그럴 수 있냔 말이야. 잠재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인의 말처럼 신문이 끊기자 새들에게 둘러싸이고, 수도가 끊기자 계곡을 내려오는 물이 되고, 사람이 끊기자 해바라기에 내려앉는 비둘기가 되며 이해가 끊기자 스스로 대기권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럼 특급 요원으로 은퇴 후 평범하게 한적한 전원 생활을 하던 전설적인 요원이 어떤 지령에 의해 (이제 완전 감-떨어졌는데) 은퇴 번복하는 건 다 (개)뻥이란 얘기야? 믿을 사람 하나 없네.>
그럼 그렇지 그런 행운이 그 인간에게 안겨질 리가 없다. 어디 평범한 사람들 당첨되는 로또도 아니고. 인생이 온통 뒷북이구먼. 뒷북 전문이야. 언제까지 뒷북을 쳐야 하는지 답답한 그 심정.
시시하게 건물 층층에서 뭐하는 짓이냐는 비판이 있다면 건물 대신에 섬이나 시골 마을로 설정해서 영화 만들면 시리즈물로 딱 알맞을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집에 있는 체스판의 2번 나이트를 잘 살펴보시라. 돌려도 보고 냄새로 맡아 보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밀을 숨기고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좋아할까. 소설을 왜 읽을까?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뭔가를 기대하는 걸까?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감추는 거 좋아하면 끝까지 비밀로 하든가, 꼭 남이 알아주길 캐내주길 바라는 듯 하단 말야. 그러고서 또 드러나면 그렇게 다 드러내는 법이 어딨냐며 왜 그렇게 사람이 융통성이 없냐고 시시하고 재미 하나도 없다면서 뭐라 하겠지. 정말 난세다. 그래봐야 까보면 원페어 꺽 해야 투페어인데. 하지만 인간의 삶에 이런 재미, 꼭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한다. 우울해져도 원페어를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인간이다. 개중에 진짜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면, 우연히 찾아냈을 때 그 기분에 또 풀리는 게 사람들 삶이다. 뭔가 있어 뭔가 있어 하다가 이렇게 이번 챕터가 끝났다. 걸어다니는 소설이 어쩌고저쩌고 하드니만 결국 이렇게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