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위대하고 훌륭한 역사상의 인물이 있어, 그렇다면 그건 100% 남자다, 왜 그런가, 왜 위대한 여자 예술가는 없는가, 여성의 자의식은 어떠한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이번 챕터에서 J는 블로그에 포스트를 쓰듯이 세간의 평가가 조금 상당히 문학과 철학, 인문학에 뒤떨어지는 하나의 수필을 작성한다. 꼭 말은 생전 처음 수필을 쓰는 것인 양 설명했는데 그건 설명이 과장된 것이다. 설명보다는 그가 무엇에 대해 쓰는가, 이 문제에 집중하는 성숙함을 발휘하자. 제목은 무제로 빈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빈칸을 마우스로 Drag&Drop 해보았드니 딱 글씨가 드러났다. 뭘 어설프게 숨기고 싶다고 그랬을까. 그 문장은 이렇다. <왜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남자인가?> 뭔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또 막상 읽어보면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을 듯한 제목으로 아무래도 그 글은 1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쓰였으니까 글을 조금 읽다보면 약간 뭐랄까 장터에서 구경꾼을 모아 놓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웅변가나 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바람을 잡는 사기꾼이나 약장수를 대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일부러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니까 딱히 중간에 불합리한 정중함으로 시작해서 기분이 고조되어 뭐야 이거 라고 흥분하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사전에 그 약효를 밝혀두는 바이다. 자, 그럼 시작한다.
순수 미술계에서 작품량 어쩌면 1위, 작품 금액의 총합 아마도 1위 파블로 피카소. 자상하고 인기있는 남자라면 그에 대한 많은 얘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전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무엇보다 죽음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파란이 끊이지 않고 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대화의 소재로 쓰이게 되면 그냥 파란 줄무늬 티셔츠 정도만 떠올리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이 뭔가를 더 듣고 싶어 한다, 그랬을 때 드라마적으로 말한다 하면 이 정도가 괜찮다. "잭슨 폴락이 이렇게 말했지. 나쁜 놈, 단 한 가지도 건드리지 않은 게 없어." 그렇지 않는 사람이라면 브랜드 로고와 마크, 가격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날 좀 알아주라고 보채는 상남자가 된다. 격식을 갖추어 말해도 다 티가 난다. 그래서 결혼 전후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이다. 드라마가 아니라면 통찰이 아니라 지식과 사실만, 오직 지식과 사실만 따따부따 쫑알쫑알 듣게 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많다. 도표, 그래프, 현존 작가 최고가, 기록, 1등, 뉴스, 최고, 최선, 최대... 그러면 그렇다면 많은 것을 말하고 싶고 알아야 할 미술계 이야기가 많을 테지만 아마 가만히 듣고 있는 고상한 그대와 안 맞을 꺼야. 수퍼스타 쿼터백이 아닌 먼데이 쿼터백, 운동화..는 스티브 잡스, 기쁜 일이 아니다. 뭔가 발언을 유발하면 정확하게 나도 어디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하는 듯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 그대는 모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의중을 완벽히 감추지 못하고 낯빛의 변화를 드러내는 실수, 그것에 대한 무시 다음에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조용히 흔적이 묘연해지는 이런 모모스의 속삭임을. 그거 아세요? 피카소라는 대명사를 남발하는 사람 가운데 90퍼센트는 ...라는 거! 그러면 아인슈타인이 태어나던 해에 누가 고인이 되었는지는 아세요? 피카소가 세상을 떠났을 때 누가 태어난 줄은 아시냐구요? 난 몰라요! 끝까지 비밀로 할래요. 우리 귀여운 달마시안에게는 말해주었지만. 품위라는 단어에 빈정상하신 기억이 있으실까. 그러지 마시고 자주 가시는 카페 피카소에(카페 이름이 '카페 피카소') 밀린 외상값이나 값으시죠, 좋은 말 할 때!
(누구는 그랬다, 어느 책에서 누가 어떤 말을 했드라, 왜 그랬을까, 왜 갑자기 그의 말이 생각났을까, 라고 자연스럽게 품위를 갖추어 인용문을 쓰면 뭔가 있어 보이는데─도대체 뭐가 있어 보인다고 맨날 그 타령이야─따옴표로 정확한 인용문을 제시하는 건 인문-교양서 때문인지 사람들이 요약문과 헤드라인, 결론, 본론, 용건, 목적, 성과, 성적, 요점, 목적, 방법, 효과, 효율등을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걸 보아왔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버릇을 예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이 자라서 위인이 되면 괜찮아. 항상 화법이 거들먹거려도 그래도 평판이 괜찮고 먹고 살만하면 또한 괜찮아. 그분들이 고약한 성미의 늙은이로 나이 들어도 상관없어. 개개인의 인생이니까. 다만 극중에서 보는 게 낫지 그분들이 직장 옆자리 동료라거나 처제의 남편이야, 어떻게든 얼굴을 보는 관계라면... 오오 이런. 만약 평생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산다면 어떨까? 같이 사는 사람은 말발이 절대 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이론은 빠삭한데 아는 것도 너무 많아, 그래서 그걸 반드시 말로 해야 해. 걷으로 꼭 표출해야만 해.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계속 들으면 피곤해. 얼굴이 잘 생기면 배우라도 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나면 그 길로 나가고,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처럼 동성애 감성과 능력을 지녔다면 예술가가 되고, 노래를 잘 부르면 가수라도 꿈꿔 볼 텐데 단지 말발에만 발군의 재주를 보인다면 거 참 애매한 일이다. 폴 그레이엄의 비즈니스 강의 동영상을 보니 Microsoft도 Facebook도 모두 작게 시작했다고 하는데 항상 공룡이라도 때려 잡을 듯, 은하계를 저글링, 말로는 쥬라기 공원 이미 접수. 앞모습 정중앙 가운데 부분이 뽈록.
그렇지만, 하지만 주로 위대한 예술가라면 100% 남자다. 물이 끓는 정확한 온도처럼 99.몇 퍼센트도 아니다. 딱 떨어지게 100%. 위대한 예술가 사전 같은 책을 보면 더러 여성도 등장하지만 그건 그곳 기준이고 여기서는 깔끔하게 100, 완벽하게 100, 더도 덜도 없이 100이다. 정말 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아니라면 말들이 있겠지만 그런 얘기를 왜 쉬쉬하는지 또는 어쩌다 지금 이 마당에 불문율이 되었는지 조금은 의문이다. 그러나 그건 명확한 답을 필요로 하는 궁금증은 아니다. 약간 이상하게 만인의 공감과 태도와 생활 방식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주는 일종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DJ 멘트와 흡사한 짧은 생각이다. 왜 레이디 레이디 하는지, 따라서 100%에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포함되는 남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물음을 굳이 해소하고 싶지는 않고 아는 듯 모르는 듯 아는 체 하기 싫어하는 것이 뭔가 원만할 것 같다. 새가슴 맞네, 혹시 이게 블로그 포스트 제목의 답일까? 아닌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나 어느 기인이나 유명인의 집과 동네를 구경한다면 쟁쟁한 배경과 호화 생활이 지겨워서 어딘가를 떠도는 상류층 뿐만 아니라 삶에 허덕이는 보통 사람도 대개는 걷으로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은 그렇게 썩 볼거리는 없다고 느낄 것이다. 실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중 크게 될 또는 딱히 별 꿈이 없는 친구라면 달리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말야. 이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이곳도 다른 곳과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이런 생활 반경에서 성장했다고, 이 환경에서 이런 인생을 살았다고. 관점의 차이, 그래 이거다! 이런 설명이 <주로 위대한 예술가라면 왜 100% 남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는 당연히 없다. 남자 누드 모델이 어려운 포즈를 취하고, 위대한 여자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 어딘가 불안정한 구도 같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은 조금 심심하고 다소 지루하며 얼마간 어렵고, 너무 진중하고 재미없다. 그래서 잠이 오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딴생각이 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러 여자들은 대중 작품에 더 치중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만 짧게 생각해 보고 더 들어가는 피곤한 일은 벌이지 않는 게 편하다. 남들처럼 TV보고, 운전하고, 여행가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운동하면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삶, 그걸로 그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한 어른, 인기는 보장되지 않는다.
비즈니스 세계에도 철칙이 있다. 주로 수컷들이 모여 야생의 형태에서 학문과 상업을 모두 종합해서 담판이 나는 정확한 공식이 통용되는 비즈니스 세계. 무언가를 잘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라면 자기의 취향을 알릴 수 있는 미술이나 문학가와 사상가 이름이나 제품 브랜드를 거론할 때는, 격식있는 모임에서 접대 목적으로 노래를 부를 때는, 우량주식을 사야 한다면, (때때로 희소성이 필요하거나 사전 정보가 있다는 예외도 있지만) 누구나 다 아는 종목을 사고, 누구나 다 아는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다 아는 이름을 먼저 거론하라는 것이다. 남자들 세계에서 또는 어른들 세상에서 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여자가~, 여자가 말이야, 어디 여자가, 여자 아니랄까 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비즈니스맨도 철저히 신봉하는 상식이다. 존 커린, 매우 값비싼 제품을 파는 곳에서 단 몇마디 대화로 어울리는 브랜드다. 죄르지 리게티, 고급스러운 사교 모임에서 짧게 언급할 때 적절히 유용하다. 헬무트 뉴튼, 20세기 3대 패션 사진작가로 손꼽히는데 그 이름을 듣게 되면 반기면서 되묻는 사람은 실상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외 작가 누구, 행위예술가 누구, 감독이나 배우 누구를 말하면 단 몇 단어만으로 내가 특별해 보이고 남과 나의 차이점을 극명히 알릴 수 있지만 그건 친구나 연인에게 그리고 블로그나 집에서 그리고 혼자 예술할 때나 적합한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비즈니스 말아먹겠다는 베짱인 것이다. 친구에게 말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주식 종목, 말하기 곤란하다. 물론 반대의 상황이나 사석에서라면 최고-최대-최선-최상-최단이나 TOP 10만을 말한다면 그 친구가 최고이며 특별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난 촌스러운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다. 하기는 레스토랑에서 그놈의 은은한 고개 각도와 아이 컨택으로 항상 점원을 부르고 싶어하지만 그 어느 개패를 가든지 이상하게 점원들이 자신과는 눈빛을 마주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그다지 운이 잘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긴 있다. 그런데 정말 눈에 잘 띄는 그 분의 눈빛은 도대체 왜 웨이터와 웨이트레스의 시선과 만나지 않는 것일까? 왜 굳이 두성과 청각을 원시적으로 사용하게 만드느냔 말이다. 정말.. 그 정도란 말인가? 웃자고 한 얘기다. 안 좋게만 볼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럼 여성이 강한 분야는 뭘까? 뭔가 있겠지. 이런 글을 읽고 흥분하지 않는 여자들이, 그들의 횡성수설을 잘 제어하고 조정하고 뭔가로 승화시킬 줄 아시는 여자들이 잘 하는 어떤 분야. 그 종목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퍼뜩 떠오르지 않지만 잘 생각해보면 있겠지만 아마도 골프는 아닐 것이다. 골프는 기본적으로 거리와의 싸움이고 무엇보다 자신과의 승부인 멘탈 스포츠이면서 경쟁하지 않는 친교의 행위 즉 신사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나 봐봐. 골프장 필드를 단 1번도 안 밟아 봤는데 골프에 대해서 이렇게 아는 체 하잖아. 실내 골프장에서만 골프채를 부러트리기나 하고 말이야. 그것도 백스윙으로. 다른 구기 종목도 뭔가 말썽이 발생할 소지가 많다. 인생에서 잠이 중요하듯 백스윙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골프는 뭐다, 장비발이 어떻다... 이렇게 아는 척! 아는 체 하는 모습이 가장 뭐해 보일 때가 언제일까? 그건 바로 어렸을 때다. 원래 지식과 사실을 주로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사람이 뭔가 모르게, 왠지 이상하게, 어딘가 궁금하게 자신도 아는 체를 하고 싶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건 이런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첫째, 생각이 어려진 거다. 둘째, 그러고 싶은 거다. 셋째, 그냥 대화를 바라거나 멍멍 하면서 짓고 싶은 것이다. 또는 둘이나 셋 다 일 수도 있다.
여자들은 이런 말을 매우 드물게 한다. 똑같이 글로도 어떻게 잘 표현하기도 한다. "남편은 지금가지 내가 쓴 책(들)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꿈을 많이 꾼다. 잠잘 때 꾸는 꿈 말이다. 그리고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꿈꾸면 행복하다. 안 그런가?" 그리고 그런 글을 말로 똑같이 자주 계속 되풀이 한다. 꼭 멋진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어떤이처럼. 출처는 밝힐 수 없다.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야지만 특별하고 고고한 그러나 희귀한 무엇, 알 수 없는 신비로움 그것에 가까와지니까. 이와 같은 성격으로 <나는>으로 시작하는 짧은 소설 도입부를 예시로 잠깐 써보겠다. 포스트의 주제에 대해 상당히 어색한 방법으로 그 답을 짐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글이다.
나는 잠깐 할 얘기가 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럴 기회가 없었고,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 같다. 즉 찻집의 수다가 (찻집) 창 밖의 여자의 글이 되 버린 것이다. 내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서 지금 내가 할려는 얘기가 나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모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나만 그렇다고 가정하고 시작한다. 그래야 구술이 가능하다. 이게 내 전공이다. 막 던지는 거.
어느 인문-교양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연애는 두번째가 오히려 멋질지도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북대서양을 두번째로 단독 비행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쩌면 두번째 사람이 더 뛰어난 비행사였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두번째도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나는 에베레스트급 심해를 첫번째로 잠수한 사람을 이 나이 먹도록 그가 누군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두번째로 그 깊은 바다에 들어간 사람은 누군인지 얼굴은 거리에서 만나면 몰라 볼 수 있지만(잡지나 TV, Internet으로 잘 안봤으니 기억에 안 남는다. 다만 이름은 각인됐다) 이름은 제대로 알고 있다. 정확한 기록은 모르지만 최저 깊이라면 첫번째일 수도 있지만 달에서 직립 보행을 해본 사람처럼 에베레스트급 심해에 갔다온 기록으로는 두번째, 사람으로는 세번째다. 마초라면 이런다. "11,000미터? 그거.. 단위를 바꾸면 11km잖아, 에이 이런 뭐야 그게." 11km가 지구에서 가장 깊은 수중 바닥인데 무슨 물밑으로 땅 뚫고 마그마까지 들어갈 기세다. 지구가 얼마나 큰 줄 아시나 보다. 그건 그렇고 첫인상을 만들 기회는 한 번 뿐이라지만 이 세상은 살아보니까 처음이 다가 아니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얘기지만 정말 그런 것 같다. 아 두번째를 얘기하고 있었다. 두번째도 의미가 있다고. 내가 십대에 처음으로 산 콤팩트 디스크는 TESLA였다. 생애 처음으로 산 CD가 두번째의 대명사 TESLA였다. 알고 보면 뛰어난 과학자이자 록그룹 그리고 전기 자동차 회사 이름인 TESLA. 어떻게 전기 하면 에디슨이고 TESLA는 덜 알려졌는지 영화나 소설이나 항간의 이야기로 더 이름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옛날 이야기나 소문은 그렇다. 그렇게 CD 수집과 음악듣기라는 맹목적이며 개인적인 동시에 그 나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중독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CD구입이나 콘서트에 잘 안 가지만 옛날에 CD와 TAPE, RECORD를 구입하느라 부은 돈 엄청 많았다. 옛날에는 닥치는 대로 샀으니 음악 산업에 (그때는) 일조한 거다. 그리고 몇~년 후 처음으로 구입한 소형 CD 플레이어는 P로 시작하는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10몇년 지나서 더 나이가 든 어른이 되어, 어른의 기준이 모호하지만, 구입한 첫번째 디지털 카메라의 브랜드도 고민하다가 어쩌다 사고 보니 똑같은 브랜드였다. 곧 그것이 두번째 대문자 P다. 물론 나중 P로 시작하는 차도 타고 싶은 것은 우연의 일치다. 사람들은 모두 기억한다. 언제 처음 P를 보았는지도. 막 갖다 붙여서 우연, 한 번 더 우연, 계속 우연.
그렇게 이어진 우연 때문인지 그 시절 음원의 환상 때문인지 그래서 나는 최근 크리스찬 디올 광고에, 이니셜 또한 CD라서 그것에 감명 받고 초단편 소설을 썼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명백한 하나의 독립 또는 작은 하나의 작품이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나 혼자 인정하니까. 솔직히 옛날에는 몰랐다. 프라이드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최소한의 자뻑? 바꿔 말하면 자존감이 최소한으로 있긴 있어야 뭔가 유지하고 이어서 나아가는,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 단어, 그런 단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듣긴 들었겠지만 영화 대사처럼 멋지지 않았거나 책에서도 읽었겠지만 딱히 와 닿지는 않았나 보다. 그땐 몰랐겠지. 바로크 메탈의 거봉,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거성 잉위 맘스틴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날 아끼는데 어떻게 남을 존중하지 않으리, 그 말이 그 말이라는 걸. 또한 크리스찬 디올 남성복을 입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연의 서사를 거슬러 오르면 한도 끝도 없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약어와 알파벳, 철자, 숫자에 관한 기억은 당연히 사랑과도 연관된다. 아니라면 서운하겠지. 내 첫사랑의 이름은 한 문자로 알파벳 J다. 그리고 첫 경험에 대해서는 언제던가 수줍게 의학적으로 밝혔다. 첫 뭐? 언제가 처음이냐고? 이런 젠장~ 삐─삐─ 미치고 까무러치겠네. 허나 이런 얘기 못 할 이유도 없지. 흔히 말하는 블로그 수준이니까.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의 이니셜도 J로 시작한다. 그 뒤로 만나는 이성의 이름에 무의식적으로 연연했었던 듯 하다. 마치 거짓말처럼 나중 보니까 그 알파벳 J가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사례들이 매우 많았다. 꼭 당시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중 생각해보니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제일 나중에 종착되는 J가 있었다. 그 제일 나중의 J는 미들 네임 또한 S로 시작했다. 19세기 소설 주인공들처럼 편지를 오래도록 낭만적으로 주고 받았던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어느 동화 속 섬나라에 살았던 연담의 귀인 이름의 이니셜 첫문자인 S. 그렇게 JS, 약자로 진상? 그건 아니고. 불러보고 싶은 이름, 보고파지는 얼굴 J. 마지막이라고 후세엔 재수없게 기억될 수도 있지만 충분히 유난떨면서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의 그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어려서는 J라는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했다면 J라는 소설을 읽고 나도 그처럼 멋진 소설을 쓰고 싶어, 그와 같은 삶을 인생을 살고 싶어 라고 느낀다. 나만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직 번역이 안되서 그 책은 안 읽어봤다. 특수부대에서 누나에게 소포로 받아 그곳에서 한 번도 듣지 못하고 구경만 했던 CD 두개 가운데 하나도 가수 이름이 J였다. 비밀번호도 여러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유서 깊은 비밀번호도 J로 시작한다.
사람들과 말을 하거나 어떤 글을 읽을 때 <나는> 으로 시작해서 <나는> 으로 끝마치게 되는 상황에 맞닥드리면 나는 아주 잠시 숨이 턱 막힌다. 그게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떡하다 우연처럼 나만 그런 경우가 살면서 좀 많았던 듯 하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의지에 반해서 일상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어딘가에 가서 어느 식에 참석하는 가운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음 물론 알지만 모르고 싶네.> 라고 불현듯 의식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감정을 나는 자주 느낀다. 모든 사람들이 숱하게 그런 경우를 겪고 뭔가 세상에 많이 닳아진다면 또 그럭저럭 세상은 원래 그렇구나 라면서 잘 살아가게 된다. 그런 사람을 인간계에서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어른.
그리고 나는 운동화에 구멍이 나면 자꾸 왼편 운동화의 왼쪽 앞부분에 구멍이 나고, 교통사고가 날 때도 이상하게 그냥 우연일 뿐이겠지만 자동차의 왼쪽 뒷부분이 들이받혔던 것은 오직 나만 간직하는 징크스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내 이야기니까 내 얘기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보통 <나는 뭐뭐 했다>를 틈틈히 나레이션으로 깔아주는 제작 기법의 영화를 보면 괜찮은데 그 정도를 넘어서는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데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만 그것을 종이 한 장 차이로 교묘히 푸는 것은 말발이다.
처음의 기억은 강렬하다. 짜릿한 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처음을 다 기억한다. 또한 처음이 나중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다. 독자여 그대의 기억을 떠올려보시라. 처음 술에 취해서 천장이 그리고 하늘이 빙빙 돌던 때를. 그 뒤로 술을 마실 때도 그렇게 천장이 하늘이 똑같이 빙빙 돌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를, 솔직히, 정말 그만큼 환상적으로 빙빙 돌 때가 있었는가? 어딘가에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나 뇌리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읽었던, 봤던> 그 단어를 만나서 그 실체와 함께 살지라도, 그 단어가 희망인가? 만족인가? 아니면 몰입인가? 발언은 그에 비해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앞서 더 솔직해야 할 단 한 사람, 바로 스스로에게만 조용히 말해보자. 처음과 나중이 어떻게 다른지를. 처음 담배를 피우던 때를, 약을(감기약을) 섭취했던 순간을 그리고 또 다른 처음들을. 나중이 처음보다 나은 과목도 있는데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물론 뭐가 더 낫고 덜 낫고, 나으면 뭐해 라고 따지지 않는 게 알맞거나 더 좋은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친구와─어디 친구 뿐이겠나─그 단어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듣고 얘기한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마는 그게 사실인 걸! 이게 말이야 고백이야 글이야? 다 아니고 정확한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다. 그럼 난 아마도 평균이니까, 물론 평균이라는 허들을 뛰어넘는 게 훨씬 고귀하겠지만, 여자의 평균은 다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말 아닌가? 그게 정상이다. 순수든 대중이든 예술이 아닌 현실에서는 그렇게 낯부끄러운 일이다. 예술 작품과 상업 상품들은 현실과의 괴리가 어쩌다 그렇게 창대해졌는지 원래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과장된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만. 나는 그것에 대해 대화해 본 적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는데, 그것에 대한 얘기는 정말 물과 진짜 공기와 딱 의식주 같은 존재였어, 그렇다면 그 만큼 핵심적으로 삶에 중요한 요소였다는 얘기인데, 어쩜 그럴 수 있지? 난 그 동안 헛살았단 말인가? 그걸 어떻게 이제야 깨달았지? 생각해 보니 이것도 신기한 일이다. 반올림 40년을 산 사람의 평균이 이 모양이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정말 조용히 오랫동안 단 하나만 오직 하나만 끈질기게 태양처럼 바라보며 나아가는 그 뭔가, 그 뭔가와 소설 10권 분량의 연애사를 장황하게 소문낼 것인가, 둘 중에서 고르라면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전자를 고르겠다. 못 다한 말이 뭐 그리 많다고, 이걸 꼭 알려야겠다 라는 사명감이 뭔지도 모르고, 사람들의 삶에 무슨 큰 영향을 미치겠다고, 뭔 제품 가격과 브랜드가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난 10억명 가운데 1명이라고 노래를 부를 것까지야 있겠냐마는 그냥 예전부터 이것을 세상에서는 천성이나 성정 또는 개인차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그걸 권하는 바는 아니다.
자,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의 습관과 우연과 운명 그리고 징크스에 대한 소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준비되셨나? 지금부터 나는 남을 위해 설을 풀어놓겠다.
글을 이런 식으로 쓰면 한마디로 B급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을 많이 쓰니까 불편하고 습관될까 봐 무섭다. 이 세상에 글이 A와 B 단 두가지만 있다고 했을 때, 대개 상은 그랑프리는 A에게 주어지지만 인기는 B가 나을 수도 있다. 간혹 A가 그 둘을 독식한다면 상 받는 배우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A는 B에게 그 무엇과 은공을 돌려야 하리라. 물론 서로 뒤바뀔 수도 있다. 별 의미 있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는 두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서 <왜 사람들은 이와 같은......>라는 생각의 사각지대에는 짐짓 (득의양양하게) 뭔가 안심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 완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치 유명인이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어떻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기사 1위에 오를 수 있나, 그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냥 무덤덤해지거나 유머로 돌리거나 하는 일과도 약간은 비슷하다. 시간만 나면 뉴스를 읽고 보거나 어느 책을 읽고 고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유명한 조각상과 '그런 책 좋아하시는구나' 라고 짐작하는 모습, 똑같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뉴스 기사,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 그리고 희소성을 좋아하고 독점에 대한 욕구, 어느 날 거리에 나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타고 싶어하는 차만 모두 다 타고 다니며,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다 연예인에 유명인이고 세상이 단지 말이 아니라 진짜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또한 달의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가장 흡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슈퍼스타라고 부른다. 지나가는 아가씨도 그러신다. I don't actually like superstar. 누구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고품격 소설 전성시대가 온다면 완전 피곤해질 것 또한 뻔하다. 오면 안 된다. 꼭 안될 것 까지야 없지만. 글을 이런 식으로 쓰면 어쩌다 베스트셀러에 등장할 수도 있지만─위도와 경도에 따라서는 완전 안 먹히거나, 정확하게 사장되기 딱 좋을 수도 있지만─그런 글을 쓴 지은이가 여자라면 또 결혼했다면 남편은 그녀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읽겠나! 어른들은 독사과를 먹고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도, 입맞춤으로 변신 마법을 풀어주길 바라며 공주를 기다리는 개구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이 되었는데 어린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동요를 부르고, 동화를 읽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아이에게 알려주고 대화하며 가르칠 뿐이다. 직장에 출근하고, 공중도덕을 지키며, 어른의 삶을 살면서 유치원 학예회에 어린이 연극을 관람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위에 씌여진 잘못된 운명과도 같은 놀라운 우연의 예는 그 글을 쓴 사람 뿐만 아니라 만인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전혀 신기하지 않는 과학이기 때문이다. 과학, 과학, 과학이라고! 그것은 딱 떨어지는 통계니까,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뭔가 슬픈 것 같은 데이터 기법인 까닭이다. 언제인가는 알게 될 테니 살면서 한동안 모르는 게 더 속편하거나 혼자 두근거려서 좋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연구 결과는 책으로 논문으로 쇼와 예술로 이미 까마득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P가 어떻고 J를 뭐한다고? 어른들 나가떨어질 일이다. 남편 환장할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룡처럼 멸망하지 않고 의연하게 종족번식이 잘 되어 지금의 지구 문명에 이르러서 안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젊은이들이 결혼을 꺼려한다는 뉴스를 보면 또 꼭 뭐가 원인이네 남자 어쩌고 여자 어쩌네, 다 부질없는 얘기 같다. 방대하게 쌓인 기존 연구에 더해 일평생 이것만 연구하고 몰두하며 사는 학자도 있고, 지금도 TV 채널을 돌리면 고대 방식으로 살고 있는 부족이 나오니 말이다. 어느 나이가 되면 옷차림이나 주변을 꾸미는 것이 취향 기준에서 돈이나 여건 위주로 바뀌는 것처럼 인류의 확실한 미스테리, 남과 여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게 된다. 젊은이의 마음처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그건 한편이고 본편은 작가인 부인의 글을 읽지 않은 남편이 실제로 있을 것이다. 당사자가 알면 기분 별로겠지만, 그래서 비밀은 지켜야겠지만 그리고 난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기혼자라면 아마 누구나 뭔 말인지 즉시 알아먹고 씩 웃을 만한 일이다. 어딘가에는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허나 어딘가에는 몇 명 웃게 만들었다, 패스는 성공한 거다, 손쉬운 기습 키스 같은 숏 패스. 뭐 땅 짚고 헤엄치기 라고? 퍽! 추측컨데 그건 셋 중 하나가 아닐런지 조심스럽게 내다본다. 1.부부싸움을 흉내내는 앵무새(앵무새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재주를 지녔다) 2.쉽게 말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부 3.그 중간. 대부분은 3번인데 간혹 1번의 불순물(?)이 섞이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해 봐서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럼 대여섯번 하신 분들은 1번을 무척 꺼려해서 사전에 미리 차단한 케이스인가. 정답은 없다. 결혼생활은 무한한 세상일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라는 건 분명한데, 그런데 할아버지-할머니 싸우시는 거 오오 앵무새라도 어디서 데려오고 싶다. 그렇지만 하던 얘기를 계속 하자면 도형과 그래프와 리포트로 얼마의 기간 동안 몇 명을 조사해 보니 어떻드라, 데이터가 말을 해주는데 어떻게 신사답고 마냥 호의로운 남편이 부인의 책을 신경 빡 세운 체 고도로 집중하면서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겠는가? 다정한 남편으로써 부인의 작품을 안 읽거나 또는 부인의 책을 읽고 근엄하고 무뚝뚝하다거나, 아니면 둘 다? 맙소사 어렵다. 하지만 초조하게 기다리며 읽고 싶어하는, 애틋함을 아는 남편도 드물게 있다. 그 남편 같은 작자라면 다른 여자의 글은 앞으로 아예 읽지 않더래도 부인의 글은 반드시 읽고 싶어할 것이다. 아니면 부인이 글을 많이 쓰지 않기를 바라거나? 자기는 앞으로 이 세상에서 여자의 글이라면 단 한 명의 여자 글만 읽겠다, 바로 그런 다짐이나 몽상을 하는 듯 어벙하게 입술을 앙-벌리고, 그렇다면 100에서 99.9무한대로 낮춰졌으니 그거면 된거라고, 뭘 더 바라겠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꺼야! 언제까지 남 눈치만 보고 살란 말이야! 누군 뭐 남의 말만 듣고 살란 법 있어? 라면서 어딘가를 쳐다보며 표정짓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또 모른다. 나중 살아보니 어떻드라, 생각처럼 그게 잘 안되드라, 그럴지도, 하지만 현재가 중요하다. <왜 여자는 과학을 숙명과 우연으로 보는 것일까?> 알면서 모르는 체 애써 그러고 싶어하는 것일까? 왜 그저 그런 인간사를 로맨틱 코메디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냥 여자이니까! 오오 여자여.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했기에 <때로는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 적도 있었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다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그러지 옛날에는 다 목숨 걸고 애를 낳았을 것 아닌가. 동굴이나 움막이나 그런,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그런데서. 간혹 자기는 알에서 태어났다, 자기는 외계에서 왔다 그런 돌아이도 있지만, 사람이 오리나 돌고래, 캥거루도 아니고 어디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는 게 보통 일이겠나. 아무튼 남편은 슈퍼맨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이 슈퍼맨이 아닌 것과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도 모르는 아내도 있다. 나는 그와 같은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난 남자이니까! 더 나아가 과학이라는 학문이 우연성을 만나고, <나는, 나는, 나는>에 신경쓰면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제한되고 화폭이 작아지니까, 수필보다는 인문-교양서와 소설의 사이에 세워진 담벼락 위에서 외줄타기 서커스를 선보이는 게 어쩌면 하나의 새로움일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각의 생각에, 느낌의 느낌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가만 보니까 남자만 난 게르니카야, 뭐가 1등이야, 나는 켄타우루스야, 난 유니콘이야(알고 보면 이 글처럼 팝콘이지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여자들도 방정식이 달라서 그렇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업적과 삶이야 그렇다 쳐도 취향이나 기호는 2명중 1명의 일반인들과 별로 맞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새로운 방정식은 많아야 백 년에 한 번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상대성 이론이 쏟아진다, 그러면 혁신의 가치도 떨어지고 뭔가가 탈 나게 되며 그럴 수도 없다. 행복이 뭐 별건가, 인생 별거 있나,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의 우유만 마셔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럼 자랑을 친구에게 하지 대체 누구에게 하겠냐마는 성격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 속마음을 사람에게 하거나 동물에게 애정을 쏟거나 글로 쓰거나 음악으로 만들고 상업용 제품에 열의를 바치는 차이인 것 같다. 즉 난 나야, 그대는 그대고, 우리는 우리야 라는 의식에 있어서는, 사실 <우리>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 일은 딱히 드물다거나 일부러 언급을 피하는 어린이거나 변신 같은 카프카적 작품을 쓰는 모두들 드디어 한 어른일 뿐인 것이다. 그 말은 나는 몸도 마음도 어른이지만 결국 난 아이처럼 살고 싶다, 난 늙지 않았어, 몸은 지치고 병들고 쇠약해질지라도 마음은 그러기 싫다, 그런 구석과도 조금 비슷하다. 많이도 안 바란다. 사는 동안, 바흐와 헨델과 하이든이 좋은 건 죄다 해먹어 버렸잖아! 라고 투덜대지 않았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간결함만으로 완벽했던 K.545같은 쉬운 C-메이저 소설을 쓰고 싶다. 많이도 안 바란다?
별 볼 일 없는 남자, 여자가 아닌, 그저 블로그 쓰는 남자 J의 블로그 포스트는 이랬다. 뭔 탐정소설에 나오는 편지도 뭣도 아니고 정~말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자신은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의 악흥의 순간과 유럽 중세 시대의 도시와 시골을 떠올리면서 상당히 도회적인 인상을 풍길려고 노력했지만 노력만 하다 끝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