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대화를 잘 못한다. 말을 나눌 사람이 없고, 기회도 없으며, 굳이 속마음을 정돈하여 표출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다가, TV를 보다가, 말 많은 사람들을 보면 저분은 뭐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지? 꼭 날 바라 봐, 나 멋지지 않니, 난 나야, 난 어때, 난 뭐가 좋아, 난 어떡하고 싶어, 계속 그런 깊지 않은 짧은 수다만 무한정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잘재잘 삐악삐악. 딱 거기서 한 스푼 당분을 덜어내면 완벽한 풍자요 익살이며 해학일 텐데, 그런 욕심까지는 없나 봐,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안다. 이런 내 생각이 찌질한 투정임을. 그게 바로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일의 절반인 것을. 왜 사람들은 했던 얘기를 계속 또 할까? 난 모르겠다. 그냥 그래, 그게 다일 것이다. 딴 거 없다. 하지만 내게는 영역과 단위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된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도 들킬 것 같으면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액자에 끼인 그림과 TV 브라운관, 컴퓨터 모니터, 핸드폰 화면, 극장이나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만 있으면 어디든 옮겨다닐 수 있다. 비싸 보이는 유화가 아니라 인물화 스케치를 통한 공간 이동도 가능하다. 이 기술은 개인의 의지와 밀접히 결합하여 바로 순간 이동을 하기도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어디에 끌려간달까, 생각도 없었는데 괜히 주위에 그림이나 모니터가 있으면 거기에 빨려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즉 뜬금없이 내 이름이나 그와 비슷한 억양의 남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여기 있다가 갑자기 그림으로 빨려 들어가서 내 주위가 그곳 세상으로 환경이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2015년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모니터로 들어갔다가, 2008년 콜롭비아의 초코주에서 누군가의 핸드폰 화면으로 툭 튀어 나와서 괴기스러운 붉은 비를 맞았다. 즉 공간을 넘나드니 시간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 불가사의한 액체는 피와 같은 성분으로 판명났다. 참 희한한 일이지만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사례의 유형과 비슷하게 1794년 프랑스 랄랭 지역에서 야영하는 군인이 몰래 가지고 있던 수채화 엽서로 튀어나갔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꺼비 비도 맞았다. 참고로 하늘에서 이상한 게 떨어지는 현상 가운데 개구리와 두꺼비떼가 쏟아지는 것은 가장 흔한 일이라고 한다. 영화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이처럼 1890년 이탈리아에서 새들의 피를, 1981년 그리스 남부 나프폴리오에서 또 개구리 떼를, 1861년 싱가포르에서 길이 30cm 물고기 비를, 1996년 호주 태즈매니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확인 불가능한 끈적끈적한 물질도 맞아 보았다. 약간 어정쩡한 순간이동 능력이 있으면 이렇게 그 능력이 어정쩡한 만큼 삶이 고달프다. 떼돈이나 끝장나는 신기한 탐사, 미래에 사는 카사노바 모두와 관계없는 재능이다. 정말 못 해 먹을 노릇이다. 그 때문에 나는 영화 주인공처럼 터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산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영국 스톤헨지, 중국 나장의 자기 석탑, 불가리아의 고대 현존 도시 플로브디프,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지역들을 나열하니까 거기도 가봤겠네, 라고 예상하셨다면 이 글을 읽는 분께 실망을 안겨드린 셈이다. 차라리 사기 금액 역대 1위 사기꾼 버나드 매도프에게 착 달라 붙어서 폰지 사기 비법을 확실하게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이거와 그거를 맞바꿀 수 있으면 어쩜 더 나았을 수도 있을 텐데, 못하니까 아쉽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14가지 감각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희미하게만 구분될 뿐이다. 초능력, 통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방향감각, 속도감각, 색각, 광각, 균형감각, 온도감각, 운동감각. 이렇게 14가지 감각보다 이야기에 대한 인지력과 감정과 몽환이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나를 좌우한다. 그리고 나는 왕족의 일원이 되거나 일부다처제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말만 꺼네도 웃길 테니까 잘 활용하시길 바란다. 옛날 세상에서 노비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인 일이다. 에휴! 나는 잠도 자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걸 의식적으로 꿈을 조절하는 자각몽이라고 한다. 의식적으로? 그것이 아니라 그냥 삶이다, 내게는. 나는 웹사이트에 간단히 관련 모임도 만들었다. 그 비법 아닌 비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걷기, 읽기, 먹기와 똑같은 수준의 행위라고 밝힐 수는 없다. 번개 맞은 사람들, 이란 모임을 예전에 만들어서 막 던지는 뻥을 신나게 회원들에게 세뇌시키던 유쾌함을 못 잊기 때문에 또 한 번 놀아 볼려고 만들었다. 으아, 못하겠다. 도저히 못하겠다. 나는 뭐뭐 한다, 나는, 나는 뭐뭐 했다. 그걸 말이다. 하지만 (약간은) 재밌다. 그래서? 아~하! 고단계로 실력이 상승한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 이걸 잘 하려면 자의식이 굳건하거나 허풍이 세야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디 허풍을 늘려주는 학원이 있다면 다녀야 할 것 같다. 그건 아무래도 약간 타짜나 험담가와 비슷하겠지만 배울 것만 골라서 배우고 나머지는 흘리면 될 것이다. 나는 어쨌다, 뭐하다, 왜 그런 것일까? 사춘기, 청소년기에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없다는 의문,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맨날 TV만 보는 것일까? 그거와 똑같아. 늑대에게 키워진 소년이 인간 사회로 돌아오면 처음에 어떻드라, 무엇과 같은 행동을 보이더라, 딱 그것과 같다라고 보면 돼. 인간의 삶은 말하고 듣고 그것이라면, 살면서 그 균형이 안 맞았던 거야. 아닌가? 끝으로 이건 나의 꿈나라 일상이다. 뭐라고? 잠깐 스피커를 끄겠다. 소설은 계속 이어진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노력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성실은 성공의 열쇠다. 모두 양이라는 X축 바닥을 어느 만큼 바짝 엎드려 기고 계속 나아가면, 어떤 한계가 축적되면 언젠가는 Y축 기울기로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는 뜻의 속담들이다. 예쁜 그래프선을 자세히 보면, 정밀히 살펴 보면 예쁜 게 아니라 화소로 만들어진 뾰족뾰족 거북한 직선의 모음일 뿐이다. 왜냐하면 과정은 모양 빠져도 작품은 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했던 얘기지만 또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영감이 어디 있다고, 눈부신 모험담이 뚝딱 떠오르지 않지만 일단 써라, 닥치고 쓰라는 일종의 좌우명이랄지 살면서 수없이 듣고 읽었던 말과 글을 떠올린다면, '누구는 천재다.' 라는 말은 내가 남에게 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난 천재가 아니야.' 이건 굳이 말하지 않는 게 관습이자 태도이기 때문에 어린이나 당신이나 누군가는 우선 양을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전문가도 아니고 장비-발이나 선천적인 재능이 받춰주는 것도 아니니까 막 던져서 수없이 사진을 찍어대서 그리고 모든 것을 저장시키고 기억을 떠올리고 A와 B를 짜맞추고 합성하며 변형시켜서 쓸만한 것 하나를 건지는 방식도 글이 안 써질 때, 작품의 구상이 잡히지 않거나 무작정 내 사랑을 기다려야만 할 때 실전에 대입하여 적용해 보아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아무데로 그물이나 낚시줄을 막 던진다? 이건 약간 다른 얘기니까 살짝 제쳐 놓는 게 좋겠다.
소설가 J는 일관되지 않게 병렬로 인문학적 지식까지 억지로 꿰어 맞추어 글을 쓸려다 보니 자꾸 꿈에서 글을 쓰거나 이상한 영화 같은 꿈을 꾸게 된다. 위에 나온 내용은 그가 또 모든 사람들이 꾸는 꿈에 관한 내용의 한 예시다. 꿈은 기억나는 꿈도 있고 잘 생각나지 않는 꿈도 있다. 꿈은 또 현실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거나 현실과 반대되기도 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일반적이다. 흔히 알려진 초현실과 SF가 꿈에서는 실재이자 내 공간이며 <언젠가>가 아닌 바로 지금이자 이상이며 현실이자 꿈의 실현이 된다. 그렇다. 꿈 속에서 꿈의 실현, 그 말이란 말이다. 완전 말도 안 되는 꿈 같은 얘기니까 1인칭으로 표현해도 응당 소설 전체 분량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작고 또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 어른이 느끼는 감정과 고급 독자가 아동물 이야기를 읽고 빠져드는 기시감이 1%는 섞일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진화라고 부르든 역설이라거나 장편 소설 중간에 들어있는 막간 예능 액자? 초소형 소설이라 부른다면 허영의 불꽃이 일겠지만 이미 그렇게 진행됐으니까 그냥 지우지 않고 놔둔다.
어쨌든 그는 새 경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절판된 책을 중고품 파는 웹사이트에서 주문했다. 그 책의 제목은 <1.새 경험>이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봤던 어느 남성 잡지에서 신제품 카약을 봤다. 바로 <2.접이식 카약>. 무게는 약 12kg. 가방만한 크기로 접을 수 있다. 당연히 혹 하면서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면 그걸 집에 모셔만 놓겠나, 떠나고 싶어졌다. 그러면 접이식 카약은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거냐. 그것이 비싸 봐야 2주일 급여나 한달 봉급보다 비쌀 리는 없다. 약간 넘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 값싼 중고품을 구하면 된다. 비밀이 없는 것처럼 재산 또한 없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산 목록 1호, 2호, 3호로 순번을 매길만한 물건은 없지만 통장에 남아있는 잔고와 누나와 관련된 사업자에 등재된 사외이사, 그것의 어떤 체납금에 대해 받는 수상한 소액의 정기적 발생, 사이클 자전거 처분, 부모님에게 한 번에 단돈 얼마를 틈틈히 그리고 간간히 규칙적으로 받아서 모은 용돈, 게다가 딱 한 달만 일해도 여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돈 걱정 끝났다. 근심을 덜었으니 그러므로 1번과 2번, 새 경험과 접이식 카약을 결합하기로 한다. 접이식 카약 타고 떠나면 된다. 그것이 새 경험이다. 어느 날 갑자기 구부러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나 자신을 빼고 모든 게 바뀐다거나 낮잠자고 일어나서 대문을 열었드니 자기 집이 어느 신천지에 있더라는 <나 + 내 집>을 제외한 모든 게 변했다, 밑도 끝도 없이 마법사가 날 찾아오거나 급작스러운 실종과 추적, 모험은 있을 수 없다. 신기한 발견과 탐색, 변신, 구출, 수수께끼는 모두 거짓말이다. 어린이나 청소년, 정신연령이 낮거나 정신연령은 높은데 순수한 어른들이 읽는 환상극은 허구다. 모두! 다만 행동과 의식에 의해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는 있다. 하느냐 마느냐, 그 차이다. 꿈과 낭만과 이상과 모험을 언제까지나 드라마와 게임기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본격적인 공상 과학 소설에 절대 빠져들 수 없는 독자라면 따라서 그것을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픽션인 듯 아닌 듯한 현실과 거짓의 경계선에 있는 환상을. 그렇다. 그래, 그냥 떠나는 거다. 그가 환각으로 살다 왔던 어느 섬의 호텔, 그 신비로운 생활을 찾아서.
접이식 카약을 타고 집을 떠나 보이스카우트 같은 소년단 놀이? 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섬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푸르른 파라다이스에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반투명하게 예상되는 어려움을 안고서 떠나볼만한 일이다. 딱히 얽매인 직장도 처자식도 없으니 좋은 일이고, 만일 있다 해도 젊으니까 새파라니까 떠나지 더 나이 들면 체력이 딸려서라도 힘든 일이기에 골똘히 생각한 끝에 일찌감치 덜컥 즉흥적으로 마음을 정한거다, 정한거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완전 재밌는, 엄청 신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우며 게다가 눈물나게 만들었다가 흥분시키고, 어리둥절 할려다가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박수갈채를 보내게 만드는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 잠깐 출연하는 단역, 한순간 훅 가는 악역마저도 현실에서 실현되는 실제 사건에 캐스팅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짧은 인생 금방이니까 불미스럽지 않게 평범한 일상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적절한 찰나에 잘한 결정을 한 것이다, 것이다. 공산품을 만들고, 식품의 원재료를 키우며 커피를 팔고, 뭔가를 나르는 사람들이 왜 즐거운 인생과 섬뜩하리만치 덥석 부합하면 안 되느냐, 보아라, 지상낙원을 만들어 보자, 택시 운전사가 시를 스고, 서점 말단 직원이 스탠드업 코메디의 명인으로 우뚝 서서 이보다 더 기쁘게 살 수는 없다, 난 미망인이라도 훌륭한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 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그 비법을 귀뜸할 수 있는 비결을 연구하는 둥 마는 둥 하느니 자처해서 잘 떠난거다, 떠난거다. 이미 출발했다, 출발했다. 헛소리 작작 하며 그만 히죽거리고 이제 떠났으니 A.집 B.신비의 섬! A에서 B까지의 여정, 운이 따라주면 B에서의 새로운 인생, 그곳에서 보낸 한 철에 대해 차차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것이다. 좀 더 서두가 길었다면 독자님은 다른 SF 소설로 갈아타실 뻔 했다, 뻔 했다. 기분 상하시기 전에 잘 끊었다, 끊었다. 낌새가 썩 밝진 않지만 우선 떠나볼까, 떠나볼까. 음흉한 의미의 동사 반복 이제 그만, 이미 배가 떴으니. 자, 가자 요술의 섬으로!
그는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상한 주술에 빠진 것 같은 감정에 젖어든다. 바로 세계적인 국제 열기구 축제들에서 볼 수 있는 모양도 모두 제각각이고 색깔도 풍성하며 모두 특색있게 다르며 개성있는 열기구들을 떼거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 지역에 너무 넓어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아야 할 정도로 완전 많은 열기구들. 하늘 위에 족히 500개, 1000개는 될 듯 하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부유한 성장 환경을 보낸 말괄량이라면 진즉 어려서 배웠을 앨버키키 상자 현상도 띠리리리 하면서 전두엽에 각인된 정확한 기억을 냉큼 떠올릴 것이다. 열기구 모양들은 시계 인형 모양, 술독에서 고개를 내미는 해적 모양, 단순히 흰색 바탕에 글씨만 씌여진 것, 만화 캐릭터들, 동물, 통나무집, 동화 주인공, 동물, 성, 맥주 컵, 삐에로 등등 매우 다양하다.
기구를 타기는 무섭고 실지로 본 적은 없고, 눈 앞에서 구경이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이건 정말 두 눈으로 똑똑히 가까이서 봐야만 믿을 꺼야, 광대함이란 이런 거라니까, 라는 탄성과 비명을 지를려다가 순간 멋쩍어서 썰렁하여 멈칫한다. 그가 본 열기구는 진짜가 아니고, 강변 아니 아직 거기까지 안 갔으니까 천변 카페에서 내뿜는 매직 버블이었다. 대상 연령 4~5세, 자동 발사, 무지개 빛. 이런!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마술적 사실주의? 사실적 마술주의? 배가 고픈거야 캔 맥주가 땡기는 거야. 아니면 신나는 모험과 개고생을 구분하지 못하는 철부지란 말이야?
여자들이 실질적인 환상성에 비교적 빠져들기 쉽다면 남자는 환상적인 실제성에 더 열광하는 특징이 있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뒤바꼈을 수도 있고, 지금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활함, 거대함, 광막함, 무엇을 보고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어른은 어린이보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어마어마한 지식의 탑을 쌓았으며 애들 좋아하는 상상력 또한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부릴 수 있기 때문에 규모, 그것에 대한 기준이 아이보다는 높다. 게다가 내성과 의존성, 독성, 강화성, 중독성, 금단현상까지 몸과 마음으로 모두 터득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암스테르담 돛단배 축제에 가서 600척, 6000척 배를 한가득 보고 나면 범위와 한도, 크기, 짜임새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물론 어려서 본다면 더 좋을 것이고. 참고로 필자는 그런 행사가 있는 줄 이제야 알았다. 그걸 아는 사람조차 지구인 1%, 될려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지만 좀 늦어도 괜찮다. 설령 모르고 살아도 괜찮고, 달리 보자면 더 낫지 않을까? 깡섬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어른만, 난 끝없는 바다를 보면 가슴이 막 울렁울렁거려, 그분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동등하지만 꿈의 성격은 다 다르다. 남자 그리고 어른 그 교집합은 상남자다. 상남자는 걸리버 여행기를 좋아한다. 규모와 떼거지. 그래서 상업적으로 음악가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어느 지역 공연장에서는 떼창이 유행일 것이다. 성인 남자는 광장을 가득 채운 스타워즈 레고 세트만 봐도 즉시 미소 지으면서 눈동자가 흔들리고 뭐라 뭐라 한다. 뉴스에서 노르웨이의 한 도로 자전거 경주 중간에 탱크가 등장해 자전거 선수들과 나란히 정말 짤막한 구간을 같이 달렸다는 소식, 상남자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상남자는 애다. 애. 아이에게는 어떤 한계라는 게 없다. 고양이의 첫번째 감정이 호기심인 것처럼 그분들은 신기함으로 하루를 모두 보낸다. 모든 게 궁금하다. 왜, 왜, 왜 또 왜 그리고 왜 계속 왜. 하지만 아이도 속이 꽉 차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희노애락과 부모를 속이는 묘수 또한 알고 있다. 심지어 아침마다 마법에 걸린다. 아이도 상남자다. 딱 1회전 했다. 그럼 이제 계속 도는 일만 남았나? 남자, 어른, 상남자, 애 그리고 다시 남자! 약간 순서는 뒤죽박죽임.
노를 저어 가며 저 노을 끝까지 나아가자. 저 수평선 너머 신세계에 당도하리라. 지금껏 천변에서 강으로, 바다까지 어떻게 어떻게 나왔다. 중간에 낮은 둑이 강의 흐름을 막고 있는 곳에서는 물가에 카약을 대고, 카약을 들고 둑 너머로 이동해서 다시 카약을 타고 이동했다. 강변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도 보고, 야구하는 동호인들, 자동차를 강변도로에 세워 놓고 밀애를 즐기는 연인들도 보였다. 그렇게 집에서 떠나온 시간이 점점 지나갈수록 자꾸 불안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에잇, 괜히 나왔어,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을 걸, 이게 뭔 개고생이야, 엉덩이도 아프고 다른 카약들도 안 보이고 하나도 재미없네, 그러면서. 출발할 때 가지고 왔던 가방에 들어있던 에너지 바와 에너지 젤 그리고 에너지 음료도 먹었다. 중간에 강변 화장실에도 들렸다. 혹시 글이 써질까 하는 의구심에 그 근처 카페에 잠시 들려 차도 한 잔 마셨다. 몸에 땀이 났고, 약간 피곤했으며, 씻고 싶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건은 많지 않았다. 자외선 차단제, 수건 1장, 식음료, 핸드폰, 책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도플갱어 1권, 침낭, 구명조끼, 수첩 하나와 볼펜 1자루, 원터치 텐트, 바람막이 점퍼, 옷은 겉옷과 속옷을 여분으로 하나씩만 챙기고 들뜬 마음에 훌러덩 떠나온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니 침낭과 원터치 텐트는 무게와 부피 때문에 안 챙겼다. 몽블랑 톨스토이 에디션 만년필도 안 챙겼다. 아니 안 샀다. 있어도 쓸모가 없으니까. 자세 잡고 멋지게 글쓰기? 집어 치워랏! 이봐, 그건 명작가한테나 해당하는 일이라고. 어디서 초딩이 명작을 쓰겠다고.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삼각지에서 어느 환경 단체의 선박도 보았다. 이제 해가 저물어 간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포기할까 하는 갈등도 할 수 없다. 한 길 뿐이 없다. 운신의 폭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법썩을 떨다 지쳤고, 신나는 탐험 운운하다가 퍼졌으며, 슬슬 무모한 한계로 치닷고 있다. 어떡하지? 날씨는 이미 파악했다. 몇 년 내에 물결이 이만큼 평온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바다로 나와서 먼 바다로 떠나지 않고 고기잡이배 A에서 고기잡이배 B로, 낚시선 1에서 낚시선 2로, 놀러나온 요트 파란색에서 선홍색으로 그리고 해변과 수평선의 중간쯤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카약을 운전하고 있다. 멀리 노을이 보인다. 와 태양이 저렇게 크게 보이는 줄 몰랐다. 갈매기가 날아간다. 뭐라고 짓는다. 도요새인지 고니인지 백로인가? 뭔 기다란 새도 날아간다. 뭐라고 노래 부른다. 끼룩끼룩. 까마귀도 몇마리 보인다. 제비까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안 보인다. 혹시 저기 저건 인도 기러기? 고도 9.5km 정도로 높이 비행하면서 단 하루만에 1,600km를 이동한다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승객들이 창밖으로 그들을 보면서 연인처럼 눈을 마주친다는 바로 그 기러기. 그 옆에 있는 새는 북극 제비 갈매기? 새 중에 가장 멀리 가는 이 새는 몇 번만 쉴 뿐 극에서 극으로 54,700km를 계속 이주한다는 갈매기. 맞는지 틀린지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진짜 어딘가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그렇고 으, 으, 서서히 한계가 가까이 다가온다. 바짝 접근했다. 본디 야외 모험은 TV 다큐멘터리성 예능 방송이나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어울린다. 여행을 떠날 것이라면 190여개국 5천만명의 게스트, 5만 도시와 2천개의 성채에 있는 현지인들의 독특한 숙소를 예약해서 현지인 생활을 단박에 체험하는 숙박 공유 서비스도 좋지만(에어비앤비나 우버같은 서비스가 문제점도 있고 이렇다 저렇다 하지만) 샤넬풍 원피스든 흰색 단화에 청바지와 흰 티셔스만 입어도 모든 남자들의 눈길과 호의 그리고 흑심? 까지 유발할 수 있는 처자라면 그보다는 특급 호텔에서 쉬면서 트루먼 커포티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또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잠깐씩 마치 우연처럼 우발적 사건에 빠지는 듯이 편히 쉬며 우아하게 돌아다니고, 그 비율이 적절하며, 품위와 격조가 당신은 고귀한 존재이자 환영받을 손님이라며 칭송하는 것 같이 노래를 불러주어도 썩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대책없이 사표 쓰고, 무작정 컨버터블 빌려서 친구 3명이 떠나면서 도로에 핸드폰 집어 던져버리고, 술 깨보니 어디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고, 컨버터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고, 무서운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쫓고 쫓기며, 마술에 빠지고 요술을 부리며 점점 단계가 올라가는 일, 현실에서는 꿈 깨는 게 좋다. 대체로 나이와 여행 경비가 비례하고, 무수한 그래프와 도형에서 보듯이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한편 이 인간은 완전 퍼졌다. 뻗기 직전이다.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신비고 불가사의고 나발이고 모두 다 개한테나 갇다주라고 하고 싶어진다. 드디여 게임 단계가 바뀌고 드라마 장면이 변할 차례였는지 이상한 일이 거짓말처럼 귀신의 영혼처럼 닥쳐온다. 모든 것을 내 주문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생각하고, 로보트처럼 이상한 교주의 신도처럼 시키는 대로 모두 하면서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꼭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일단 따분한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떨어져 가면서 노를 저어 가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딱 고정되어서 카약이 노를 저어도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꼼작도 안 한다. 바다의 신, 이름이 뭐지? 혹시 지금 고래 위에 멈춰 있나? 자동 세차 기계처럼 모든 환경이 바뀌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날려나? 다 아니다. 어림없는 일이지. 그럴 리가 있나.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할리라고. 그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겠나?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냐고? 알면서 묻는 질문, 그 단어를 뭐라 하드라, 아무튼 한번 맞춰 보시라. 단 못 맞추시기만 한다면 청초한 아가씨라면 덥썩······ 헉······ 그리고 중년 신사분이시라면 음 쓸데없는 상상은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에도 불이익을 가져온다. 자, 예측하는 지능을 최적화해 보자.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 밖에 없다. 딱 1개.
왜 카약이 앞으로 안 가고 멈춰 있었냐 하면 앞에 두꺼운 천이, 옛날에는 그것 한 묶음이 1년간의 조세였다는 비단 결 같은, 값비싼 브랜드 옷의 실크 같기고 한 바다와 수평선과 하늘이 모두 그려진 천이었다. 재료는 단연 면 100%. 최고급 면. 다림질을 수십년 해보거나 괜찮은 옷을 오래 소장해 보면 알게 된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모든 옷감의 영원한 1번은 면 100일 것이다. 집에 신발이 10켤레, 100켤레 있는 사람도 있지만 검소한? 청소년이면 대개 1~2켤레를 주로 신고, 낡은 거는 신발장에서 깊은 잠을 잔다. 그 한 켤레의 인조 가죽은 완전 철갑이다. 삼천포는 증발되었다. 그 바다 그림이 그려진 천은 길이를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딱 붙어 있으니까. 정교하게도 그려놨다. 그것을 젖혀보니 카약이 들어갈만한 공간이 있다. 들어간다. 그가 탄 카약이 그 공간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사선으로 꼭 불꽃놀이로 만든 천국으로 가는 계단, 하늘로 쏘인 불꽃들이 모여 사다리를 구성하는 모습의 창작자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헌정했다는 어느 설치미술 작품처럼 푸르스름하면서도 따듯하며 시원한 느낌의 불빛이 계단 손잡이를 장식하고 있다. 딱 맞게 카약을 고정시키는 시설도 장치되어 있다. 카약을 고정시키고 배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다 올라갔다. 뭐가 보이는가. 뭐가 보이냐고? 뭐가 보일까? 아, 뭐가 보이냐면 굉장히 넓은 평지가 보인다. 바닥은 나무 같다. 뗏목의 바닥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아스팔트 도로 같은 느낌도 든다. 그나저나 상당히 넓다. 많이 넓다. 이런 삐── 끝이 안 보이자나. 꼭 배구 코트를 직렬로 2~3개 그리고 그걸 병렬로 20~30개 붙여놓은 크기 같다.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 잘 안 보여서 그렇지 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뭐야 이거! 이와 닮은 배는 동화에나 나오는 섬에서 탈출한 통나무 배, 그것뿐이 없다. 약간은 바다 속 모래 채취선 비슷한 느낌이 난다. 완전 이상하니까 아예 경이롭다. 이건 조금 작은 크기의 유조선처럼 생긴 배다. 오오! 단지 배 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완전 평지다. 배 내부에도 기계 설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다. 아아! 저 뒷편으로 전체의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작은 정육각형이 보인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나지막하게 텔레만의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이 들린다. 꼭 공원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기분 같다. 그 네모난 시설은 설치형 집이다. 아담하니 딱 귀여운 크기로 꼭 필요한 집기만 갖추고, 거추장스러운 부품과 공간은 모두 빼버린 쉬기 좋은 만화에 나오는 집 같은 네모 상자다. 도심지나 시골에 땅만 있다면 뚝 떼어다가 설치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예를 들면 www.microcompacthome.com 같은 사이트에서 간략히 보여주는 집이다. 문도 열려 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물고기 잡으러 갔나, 낚시 동향을 파악하러 근처로 떠난 것인가. 모르겠다. 에라 좀 뻔뻔해지자. 뭘 주저하나! 인생은 1번 뿐인데! 누군가 주인장이 나타나면 조난당할 뻔 했다고 엄한 핑계를 대면서 구차하게 해명을 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번만 봐주라는 식의 구실을 대면 그만이다. 다만 매우 정중한 예법을 갖추어서 그 상황 설명에 꺼뻑 넘어오도록 연기하는 건 기본이다. 최악의 상황을 감안해 봐도 크게 손해볼 건 없다. 어차피 잘된 일이다. 그 안에 누굴 닮은 선장이 있고, 그가 J보다 키가 작다면 어딘지 모르게 본능적으로 조금은 미안해질 텐데 그런 마음 씀씀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탄탄하며 미세한 유대감일 뿐이다. 220cm 거구 아저씨라면 살면서 자기보다 큰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평생 극미한 송구함을 안고 사시겠나 아니면 '쯔쯧 이런 에라 소인들' 하면서 살아갈까. 산 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운명의 헤라클레스? 프로메테우스? 바위를 산으로 굴려 올렸다는 벌을 받은 신이 누구더라, 누구지? 에잇 모르겠다, 몰라! OK, 좋다. 일단 샤워부터 하자. 샤워실에 들어가니 1811년, 추정에 따라 1815년 경에 지었다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이 자동으로 나온다. 왠지 불안하다.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귀빈으로 모신 후에 늑대와 돼지 3형제 동화 같은 뭔가 음습하고 어두우며 기괴한 뭔 일이 있을려나. 마치 어린 송아지의 눈망울이나 아기 돼지가 뛰어다니는 귀여움, 그런 인간과 친근한 생명체의 인생 중후반부? 어떤 뭔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예상과 모호한 징조, 불확실한 전조와 전율, 불암감도 살짝 떠오른다. 예감, 누구나 그러질 않나. 보통 남자들, 길을 걸으면서 어 저기 저 강렬한 인상의 험악한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마주쳐 지나가다가 날 때리면 어떡하지? 여자들은, 사람들 많은 곳을 지나가다가 치마의 실가닥이 많이 풀려서 팬티가 보이면 어떡해? 저기 다가오는 멋진 남자가 내게 고백해 오면 뭐라고 대답할까 했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불여우같은 기집애한테 말을 걸 때, 백화점에서 쇼핑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지름신과 접신하게 되면, 집에 가면서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와 똑같은 옷이나 똑같은 구두를 신은 사람을 보았을 때,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서 인생의 비밀을 뒤늦게 깨달아서 비밀이라고 부르기도 왠지 민망하고 성질나는 어느 '친구'에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비행기가 내 옆에 착륙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기우와 아무 쓰잘데기 없는 노파심, 강박증의 앞 단계, 그런 것!
어쨌든 그건 그거고 샤워는 샤워다. 바다는 바다고 하늘은 하늘이지 샤워실 한 번 빌리는 게 뭐 그리 잘못한 일이라고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불러오는 마법 거울이나 요술 구술 같은 엄청난 불난이라도 일으키겠어? 하면서 그냥 한다, 샤워를. 에라 샤워하면서 오페라든 유행곡이든 뭔가 불어야겠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라도. 내용은 어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어차피 그 내용이 다 그 내용이다.
샤워를 마친다.
아 개운하다. 뿌듯하면서 외롭고 또 홀가분하다. 뭔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 참 생소하다.
샤워를 마치고 샤워실에서 나와서 상자 집 바깥으로 나가봤다. 선주는 보이지 않는다. 똘만이도 없다. 개미 새끼 한마리도 안 보인다. 혹시 했는데. 잘 된건가? 처음에 카약을 이곳에 정박했던 장소는 전장 3분의 1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정육각형 상자로 걸어오면서 못 봤던 탁자가 보인다. 그 탁자 위에는 좀 식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파스타 한 접시와 스테이크 한 접시가 있다. 시중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특수한 스파클링 워터 한 잔까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건가? 어떻게 처신했을지는 밝히지 않겠다. 살짝만 공개하자면 그 순간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이 1800년대 초반에 작곡한 왈츠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1900년대 전반에 연주했던 음악이 지금, 2000년대 전반기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 거기까지.
정육각형 상자 집에 다시 들어와서 바로 앞에 침대에 잠깐 누웠다. 하루를 돌이켜 보던가 도시와 자연에 대해 명상을 한다던지 그럴 힘이나 정력은 바닥났다. 바로 옆에 작은 컵, 포도주가 담겨있는 컵이 있다. 음악도 나온다. 생상스의 백조. 딱이네, 마셔야지. 마셨다. 눈이 스스륵 감긴다. 아기처럼 잠에 빠져든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같이 깊이 잠들었다. 새록새록, 코오오, 꾸우웅. 달콤한 꿈나라. 동화 속 세상.
아마도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났을 것이다. 갑자기 쿵쿵쾅, 쿵쿵쾅, 쿵쿵쾅 소리가 들린다. 바깥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건 자면서 클로드 드뷧시의 음악을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고, 그러므로 뒤척이며 굉장히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REM 수면은 이미 지난 듯 하고, 차 지나다니는 소리, 뱃고동 소리, 파도 소리, 사람들 대화도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기계음도 들리면서 뭔지 몰라도 어느 공중 공간에 떠 있는 것 같다. 이제 잠 다 깼다. 꿈도 날아갔다. 뭔 꿈인지는 생각도 안 난다. 꿈을 조종한다? 마법이 풀린 것 같다. 망상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던가. 뭐지? 뭐지? 혹여나 지금 문을 열면 낭떠러지가 보일려나 겁이 덜컥 난다. 마땅히 그럴 순 없다. 문은 일단 손대면 안 된다. 일단 기다리자. 그래야 한다. 그러다 또 다시,
쿵-쾅-쾅! 단발음이 경쾌하게 울리고 끝났다. 이제 쾅쾅대는 소리도 멎었고, 공중부양하는 듯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선주에게 인사도 못 드렸다. 이쯤 나가 봐야 하지 않겠나, 가 아니라 얼른 튀어 나가는 게 예우일 것 같다. 그렇게 결심하고 초소형 주택의 문을 열었드니 그곳은 어느 섬의 항구였다. 그의 1번 목적지였던 샹그릴라 섬은 아니지만 차선책이자 2번 대안지인 전에 두어 번 들렸던 관광지로 유명한 섬이다. 그 섬에는 큰 항구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여객과 화물 위주, 또 하나는 고기잡이 배와 요트와 보트 중심인데 그곳은 후자인 항구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괜찮고 왠지 기분도 좋다. 초소형 주택은 대형 크레인이 배에 있는 걸 뜸어다가 포구에 내렸는데 최신식 크레인이 아니라 재래식 기중기로 보인다. 그래도 부드럽게 작동하여 안정적으로 착지했나 보다. 잠에서 벌떡 깸. 덜컥 일어남. 문을 열여보니 뭐 그나마 암담한 결과는 아닌가? 그는 나직히 소리쳐 본다. 그 단어! 숙─취? 시처럼! 행 오버? 바로 몸짓과 함께.
그는 배낭에서 캔 커피를 하나 꺼낸다. 아침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고 하지만 그날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해는 떴는데 회색 구름이 모두 커튼처럼 가려주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칙칙한 날씨라고 하시지만 대책없는 동경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철부지,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나이 들었지만 철들지 않을 꺼야, 간혹 이렇게 혼자 술주정하는 아저씨들과 톰보이들은 이런 날씨를 매우 좋아한다. 비가 올 걱정도 없다. 비가 와도 된다. 비를 맞으면 속이 다 후련할 것이다. 바람도 선선히 분다. 머리카락 날리고 어떻게 풀릴지는 몰라도 막 새로운 연애에 대한 기대감에 바람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붕붕 이미 떠다니고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예감이 들게 만드는 그런 날씨다. 날씨 얘기는 이제 그만. 컨버터블 타기에 가장 좋은 변덕스럽지 않은 기후라서 설명이 길어졌다.
이건 세기말 증후군인가 그냥 개폼인가. 캔 커피를 마시며 한 편의 뮤직 드라마 아니다, 가라오케용 좀 그런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살며시 가벼운 또 포근한 웃음을 짓다가 별안간 뜨~아, 외마디 탄성을 내지른다. 이상한 축구장 닮은 배에다가 접이식 카약을 놓고 온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쩌고저쩌고 필름을 빨리 돌려서 쫄망쫄망 뛰어가서 카약을 가져와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접이식이라서 5분만에 다 접었다. 선장은 얼굴도 모르고 누가 승무원인지도 모르니까 또 거기에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여 인사라도 드릴려다가 슬렁슬렁 돌아와버렸다. 자, 그렇게 육지에서 섬까지 어쩌다, 어떡하다 겨우겨우 오긴 왔다. 험난하든 쾌적했든 온 거면 됐다. 딱 됐다.
그가 서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 해변가, 그도 걸었고 그가 가는 그쪽으로 왠 나비넥타이 신사분과 꼬마 숙녀가 걸어왔다. 뒤로 연노란색 최신형 최고급 컨버터블이 보이고 그 옆에 접이식 자전거가 펼쳐져 있다. 삼각형의 꼭지점에서 만나 모두 잠깐 멈추어 바다를 바라본다. 노신사와 J가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가 은근슬쩍 마주친 그 상태에서 눈동자와 얼굴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눈의 촛점만 원거리로 이동하면서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마치 다시 만나서는 곤란한 어떤 남녀 관계였다는 듯이. 원래는 '연상하기'로 만나자마자 친해진 건데 실은 연상하기가 아니라 '끝말잇기'였다. 즉 이런 식이다. 오 바다, 라고 하면, 아 하늘, 다시 음 캔 맥주, 하면 으 캔 커피, 딱 탄성과 한 단어만 들릴락 말락 말하기, 그것이었는데 묘하게 그걸로 교감이 발생했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이어짐. 먼저 이쪽에서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혼자만 들릴만큼 말하면 또 저쪽 어르신께서 「자유로운 인간이여, 항상 바다를 사랑하라. 바다는 그대의 거울, 그대는 그대의 넋을 한없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 딱 거기까지만, 외웠던 게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알지만 일부러 그만둔건지 불명확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 같다. 다시 이쪽에서 「돌고래들아, 너희는 바다에서 놀건만, 날이면 날마다 파도는 쓰고 짜지. 어쩌다 음 어쩌다 어 어쩌다 음음...」 그럼 저쪽에서 「여기 빛나는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일어나 테라스를 어어 테라스를 아잇 테라스를...」 무작정 명시를 읊을려다 갑자기 경쟁심에 불이 붙었을까. 겸연쩍게 웃으면서 어느새 살다 보니 삶에 지쳐 수없이 외우고 또 외우고 밤새 외워서 이 아가씨와 저 부인에게 속삭여주던 시를 모조리 잊어버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1.5초쯤 눈빛을 마주쳤다가 실소를 터트린다. 참 남자들이란! 못 말려?
1개 언어에만 한정되어 통용되는 농담과 웃음. 같거나 비슷한 음률에 대한 발음과 해석. 사람들은 말하거나 들을 때 그 발언이 번역될 것이다, 라고 가정하면서 그것이 재밌냐, 재미있지 않냐, 라는 예상을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바보도 아니고.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약간 다른 문제다. 완전 웃기고 까무러치고 뒤집어져서 대박난 이야기, 번역된 걸 읽으면, 아니 도대체 뭐가 재밌다고 그러는 거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가 가끔, 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썰렁한 게 저기서는 배꼽 빠지게 웃길 수도 있고. 원래 1차적 유머는 하이개그에서 살릴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 언어가 바뀌면 사라지는 성질의 유형을 띄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면, 방금 노인과 J가 대화를 나누게 된 계기 또한 1차적 농이지만 이건 음, 반반일 것 같다. 어떤 뭔가에 대한 자신이 없다. 어렵다. 꼬였다. 그러나저러나 끝말잇기는 1개 언어, 연상하기는 다국어. 말로 표현이 어렵다만 1차, 1.5차, 2차... 이렇게 차근차근 층계를 올라가는 담소 때문에 금방 친해졌다고 하자. 아무튼,
시작은 그랬고 간단한 인사말과 처음 봤지만 이상하게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안부를 묻고 스스럼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정적은 노-신사, '노'자 빼버리자, 사석에서 어느 여사님은 늙은 것도 원통한데, 라고 하시니까. 신사분께서 어이없이 발생한 고요함을 깨트리신다.
「자네는 관상을 보니 음 약간 개상? 하관은 개구리상? 그런 거 같은데. 혹시 그런 얘기······ 들어보지 못했나?」
「강아지상 말씀인가요? 지금 썬그라스 쓰고 있는데 썬그라스를 벗어야 관상을 제대로 보는 거 아닌가요. 아 그럼 노인장 아니 아저씨께서는 신통한 투시력이 있으신 것이 되는군요. 대답하자면 입은 좀 돌출되어서 다른 동물에 비유되곤 합니다. 하관이 발달되었다면 조금 무섭고 강한 인상이 되었을 텐데 미소년과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에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껌이라도 씹어야 할까, 같은 쓰잘데기 없는 공상도 한답니다.」
「음 그래? 관상은... 내 전공이 아니네. 난 뭐랄까 과거나 현재, 사주, 재물운, 타로카드 이런 게 아니라 미래를 본달까? 아니 예언? 노스트라다무스나 누구 누구는 모두 다 허당이야. 그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던지고 보지. 그래, 안 그래? 하나도 모르면서 말이야. 순 거짓말. 다 구라야.」
「어르신께서 허당 같으신데요. 아니요 아니요. 연세 드신 분 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분이 드문데 완전 개그맨 뺨 치신다구요. 엄청 멋져요.」
「왠지 모르게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네만 아무튼 고맙네. 사람은 호의나 칭찬에 답하는 말에 인색하면 안 돼. 하지만 난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진 않아. 열불을 토하며 웅변을 한다 해도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화마가 나가지는 않고. 하지만 머머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르키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동공을 확장시킨 후, 부드럽고 다정하게 때론 살짝만 격정적으로, 그렇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내게 당기고, 끌어 안아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오우 이런 뭐야. 잠시 딴 생각에 빠졌네. 그럴 수도 있어.」
「하하하 어르신 말발이 아니 언변이 무척 뛰어나십니다. 왕년에 아니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오신 듯 보이네요. 나리께서 들으시기에 조금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도저히 외양과 언사가 일치하지 않는 듯 하여 여쭈어 봅니다만... 혹시 동년배 친구분들로부터 이런 꾸지람을 듣지는 않으신지요. '넌 말야 어떻게 된게 우리들은 모두 굽고 쭈글쭈글하고 기운도 없는데 도대체가 넌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싱글벙글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사냐? 너 혼자만 회춘하는 법이 어딨어? 이런 의리없는 놈 같으니라고. 대관절 집에서 뭘 퍼마마시길래 그래?' 어이쿠, 죄송합니다. 한번 뱉은 말은 절대 주워담을 수 없지만 꼭 이렇게 실수를 반복합니다. 넓은 아량으로 소인배 꽁생원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덕망과 선처를, 부끄럽지만 간절히 바래봅니다.」
「이 친구 술수가 장난이 아닌데. 늙은이 놀리면 못써. 그래도 기분이 참 좋아. 아주 뒷북 유머가 일품일세. 나중 생각하게 만드는 농담, 다음날 아침에 터지는 웃음, 먼데이 모닝 쿼터백 개그. 젊은이가 할아버지를 아주 회전목마와 바이킹에 태우는군. 쥐었다 펼줄 알아. 잘 컸어. 자네는 말이야 뭔가 어떤 재주를 살리면 될 것 같은데 미래가 뭔가 보일려다 흐려지다가 자꾸 그런단 말이야. 자네의 미래를 슬쩍 보아줄려고 했는데, 그건 음 진짜 미래를 봐도 실례고 그 미래가 밝다면 말을 안 하는 게 좋고, 어두침침하다면 그 또한 말하는 당사자도 언짢은 일이니 차라리 함구하는 게 낫지. 그래도 재미로 조금만 볼까 했는데 지금 잘 안 보여. 딱 다른 잡다한 생각 때문에 잘 보이지 않네. 그분이 내려왔을 때! 오! 그 순간에는 말이야 미래로 가는 문, 사무실이나 집에서 보는 평범한 손잡이가 달린 문, 그것이 갑자기 공중에 떡 하니 나타난다네. 그것 주위로 물론 후광이 비치면서 주위는 뿌옇게 안개가 끼고 쪼끔 어두워지지. 문을 열려면 공중으로 날아올라야 하지. 어디선가 들어봤을 꺼야, 공중부양, 공중부양. 이제 날아올라야지. 슬쩍 붕 떠올라서 문 앞에 딱 서. 딱 선단 말이야. 그 다음 문을 열면 화사한 밝은 빛이 비추어서 젊음의 기운에 휩싸인다네. 성우의 음성도 들리지. 정말 고운 목소리로 어린 꼬마인지 아가씨인지 잘 분간이 안되는 정말 아름다운 음성으로, 미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누구의 미래를 알고 싶은 건가요?, 주인님은 붙일 때도 있고 생략되기도 해. 음 그렇게. 아 자꾸 말하다가 얘기가 곁가지를 뻗는군. 이 친구가 딱 정신의 민감한 부위와 가려운 곳을 정확히 보고 살살 긁는 기술이 뛰어나. 말을 술술 하게 만들어. 영화에 나오는 뭐 그런 사람이야? 범죄 심리 분석가? 노망든 것도 아닌데 젊은이 앉혀놓고, 아니 세워 놓고 벌주는 거 같아. 그런데 젊은이, 자네 옆에 있는 카약이 혹시 접이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접이식 카약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신사의 시선으로 한껏 귀여움을 받는다. 접혀진 상태만 보고 즉시 카약인줄 알았나 보다.
노인과 신사, 라는 영화 제목이 있던가. 지금 대화와는 다소 관계없을 수도 있지만 이런 거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 완전! 맞다. 노인과 신사가 아니라 사관과 신사다. 아니? 아닌데, 아 맞다. 사관과 신사. 어르신께서 잠시 뜸을 들였다 한마디 건네신다.
「자네 혹시 노인과 바다 읽어 보았나?」
「아 그럼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어떻게 아셨죠? 역시 전설적인 은둔형 심령술사 맞으시군요. 아까 먼발치서 잠시 춘부장이 보이길래 제일 먼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막 그 소설이 떠올랐걸랑요.」
「오오 그럼 그 다음으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것까지 읽지는 않았겠지? 그럼, 그럴 꺼야. 암 그러면 못 써. 안 돼. 젊은 친구가 말야.」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영화까지 본 걸요. 죄송합니다. 조심스럽게 하나 여쭈어도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작정하고 이젠 제가 묻고 싶군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설마한들 읽으신 건 아니죠? 뭐니뭐니해도 또 뭐가 있죠? 아, 라스 채스트의 만화 에세이도 괜찮아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니?」, 「어떤 얘기? 우리? 아, 아 그럼 읽었지. 명작 중의 명작이지. 그럼.」 사람은 살면서 새하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잠시 쉬어 가는 분위기다. 다 쉬었다. 이어서,
「저...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해 해도 괜찮을까 걱정되네요.」
「어 그럼. 괜찮아 괜찮아. 얼마든지 뭐든지 언제라도 어떻게든 물어보시게. 대환영일세.」
「아저씨 화법이 참 특이하네요. 친구분들 가운데, 어느 지역과 분야에서 그걸로 지존이셨을 꺼 같아요. 아 궁금한 점은 이거에요. 어쩌면 그러지 않을까, 아까부터 내심 굉장한 의혹이 일었거든요. 혹시... 요원 아니세요? 앗 은퇴하셨을 테니 잠깐 현역을 도울 일이 있으시다거나 꼭 지금이 아니어도 분명 직감적으로 두더쥐 생활을 한동안 하셨을 꺼 같아요. 주로 책상에만 앉아 계셨거나 고위직만 거치셨다고 할지라도 왠지 모르게 첩보 업계에서 일하셨을 꺼 같은 오묘한 감이 퍼뜩 느껴졌다고 할까요? 솔직히 보자마자 즉시 떠오른 감정은 이랬어요.」 순간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얼굴에 한 수 당했다, 배웠다, 예리한데? 라는 당혹감과 얘 뭐지? 라는 일종의 신기함과 호기심이 반반 섞여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것, 그것조차 한박자 아니 한 세박자 반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런 일은 사는 동안 늘 셀 수 없이 겪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가장하며 답을 하신다. 「어이쿠, 말하면 안되지만 벌써 들켜버렸군. 맞다, 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음 젊은이 눈썰미가 대단한데? 어떻게 알았어? 아니 아닌데, 내가 이상한가? 푸하하하하. 참나, 내게 인생이 친절이 아닌 첩보와 스릴러를 선사하게 해준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들뜨네 그려. 맞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기분이 결코 나쁘지 않은데? 오 좋았어. 내 한가지 제안을 하지. 내가 갖고 있는 이 단순한 낚시대와 접이식 자전거 그리고 오리발, 조금 진열이 약하니까 음 뭐가 있더라... 어 그게 있었군. 해변가 근처에 있는 인터콘티넨탈 호텔 4박 5일 숙박권. 딱 이런 조합의 세트를 자네의 그 접이식 카약과 바꾸는 게 어떤가? 낚시대, 한정판 최고급이야. 자전거, 비밀이 숨겨져 있어. 버튼 잘못 눌러보면 깨달을 꺼야. 여관은 좀 촌스럽네만 꽤 괜찮은 호텔이야. 호텔 뒤로 골프장, 앞으로 해변이야. 그 골프장 누가 설계했는 줄 아나? 맞혀 봐. 누구드라? 나도 몰라. 백상어던가? 어떤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잊어버렸어. 나이 들면 이렇다니까. 싫으면 꼭 바꾸지 않아도 되구. 또 혹시 알아? 딱 보니 현지인이 아닌데 이곳에 놀러온 거면 가까운 시일 내에 우연히 다시 만나서 이 노인장과 드라이브도 같이 하고 넓고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골프장에서 한 게임 즐길지 누가 알겠나. 사람에 따라서는 좀 아니꼬워 보일 수도 있다지만 그건 딱 두가지 이유로 모두 날려버릴 수 있다네. 싹 발라버리면 그 누구도 암말도 안 할 꺼야. 첫째,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 쉽게 말해 자네나 (꼬마 숙녀) 이 녀석과 비교해서 내겐 남아 있는 살날이 그리 넉넉치 않아. 둘째, 난 그 접이식 카약을 지금 당장 타고 싶어. 또 이 자전거도 내게는 별로 필요없는 물건이야. 오히려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지.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붙여서 미안하네만 난 뭐든지 <사서 쓰고 버리고> 그것의 반복 즉 보관하고 뭘 쌓아 놓는 걸 싫어하는 성미라네. 그렇다고 중고품이나 고전적인 제품을 꺼려하지는 않아. 근검절약, 그걸 내가 실천하는 방법은, 착한 일을 하는 내 방식은 따로 있다네. 게다가 어릴적 친구들을 만날 때는 철두철미하게 기름기를 쫙 빼는 걸 잊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어쨌든 그렇다네. 왜? 지금 세상에 왠 물물거래냐고? 멋지자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직접 하거나, 찾거나, 반기지를 않고 온종일 날마다 낭만이 없다고들 난리야. 안 그런가? 또한 난 돈을 더 벌거나 모으면 안 된다네. 욕 먹어! 이미 넘치거든.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늙었는데 가끔 곡을 쓰거나 추상화를 그릴 때, 아 난 확고하게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이야, 그럴 때 곡이 잘 써지질 않는다거나 그림에 대한 착상이 한동안 떠오르지 않으면,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구나, 뭣 때문이지, 그러면서 그분이 오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네. 어찌하면 실마리를 잡고 사단을 낼까? 노을을 바라보며 브랜디를 한 잔 할 때? 음 더없이 기분은 좋겠지. 기분만. 누군가를 끝끝내 감동시켰을 때? 정말 딱 순수하게 상쾌함의 감정 그리고 곧바로 보람과 교감과 극렬한 희열감도 느끼겠지만 대체로 그보다는 잔잔한 시상이 마음을 물들인달까, 저기 저 파도 같은 잔잔한 출렁거림에 가깝겠지. 어떡하면 곡이 잘 써지고 그림이 잘 그려지겠나? 여행, 연애, 운동, 휴식, 봉사, 기부, 사람들과의 교류, 친목 다 아닐세. 최소한 내게는. 적어도 지금 말하는 주제로는 말이야. 그건 무엇이냐면, 때로는 내게 푼돈일 테지만 새로운 상품을 갖게 되었을 때야. 결국 새로움이지. 여행이든 연가든 뭔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는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을 걸세. 뒤늦게 성공한 예술가나 스포츠 선수 사례에서 간혹 말하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네 뭐하네, 그런 말들과는 다른 얘기지. 복권 당첨된 사람들도 대체로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누군가 그러다 쫄딱 망했다면 유별나게 그것만 커 보이는 현상들과 작품에서는 항상 모든 게 과장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돼. 새로운 상품에 따른 신선한 경험처럼 그저 잘 자고, 잘 먹고, 잘 즐기고 등등 한마디로 웰빙, 그것이 중요하다네. 그래서 반 고흐 같은 화가의 미술품도 좋지만 그 인생이 참 뭐라 말할 수 없게 구도적? 극적으로 보이지 않나. 그건 결코 거창하다거나 속물스럽다거나 어 유별난 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이야. 그러니 혹시 이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기 보이는 컨버터블의 트렁크를 열테니 조금이라도 끌리는 게 있다면 내 다 내줄꺼네. 자네에게. 아니 그렇게 하세. 이왕 마음 쓰는 거, 기왕에 하는 물물거래 기억에 남아야지. 그래 그거 좋겠네.」
「어쩜 그렇게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을 하시는지. 더 바랄 게 없네요. 할아버지와 손잡고 계시는 (손녀라고 할려다가) 꼬마 숙녀가 웃었으니 계약 완료된 겁니다. 나중 두말하시면 안됩니다. 안 그러실 꺼죠?」
저쪽에 보이는 컨버터블 조수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아한 아가씨가 지금에야 눈에 띈다. 또 설마하니 번쩍번쩍 하늘색(어? 아깐 노란색 같았는데?) 컨버터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처녀는 딸이 아니라 부인이고, 저기 저 아장아장 걷고 웃고 말하며 고양이를 껴안고 있는 손녀는 혹시 딸이 아니었을까? 첫째? 아니 한 넷째? 왜? 남의 일인데, 사랑일 텐데, 사랑에 왠 국경, 로미오와 줄리엔 안 봤어? 언제적 작품인데. 사랑에 국경이 어딨어, 가 아니라 그건 옛날 얘기며 진부한 말이고 그냥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끝.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사랑.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든 대박난 물물거래다. 가지고 다니기엔 좀 버거웠을 텐데 잘됐다. 접이식 카약은 11.3kg 패들 1.8kg 적지 않은 무게라서 차를 또 빌려야 하나 했는데 말끔히 해결되었다. 트렁크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희한한 물품들이 많았지만 그래서 눈이 정말 호사를 누렸지만 추가품으로 딱 하나, 고급 멜빵, 을 더할려다가 가냥 놔두고 오히려 오리발을 추가품에서 제외했다. 가지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깔끔하게 물물교환이 딱 끝났느냐, 그건 아니다. 딱히 뭔 사건이 터진 건 아니고, 서로 물품을 바꾸었는데 왠 분홍색 컨버터블이 저 멀리서 질주해 오는 걸 신사분이 급작스럽게 눈치 채고, 큰일났으니 그에게 차에 타라고 해서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 하여간 그 컨버터블에 얼른 탔다. 신사, 딸, 손녀 그리고 J 이렇게 네 명이서. 그렇게 신사에게 받은 4박 5일 숙박권을 사용할 수 있는 그 호텔까지 오게 되었다. 가던 중 눈치를 보아하니 아까 쫓아왔던 분홍색 컨버터블에는 신사의 본처가 타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딸로 보이던 아가씨는 내연녀였다. 손녀? 당연히 음 그 다음은 긴가민가하다. 아주 잠시 쫓고 쫓기는 흥분감과 긴장감에 짜릿한 전율과 반전까지 더군다나 밑지는 장사도 아니었다. 그렇게 정말 거짓말처럼 모험이 휴가로 바뀌게 되었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당연히 여행 일정이 굉장히 들뜨고 빨리가는 느낌 때문에 즐겁고 재밌으면서 시간까지 천천히 가는 삐─ 삐─ 욕먹을 사태는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재미있고 짜릿하며 시간도 느리고? 그것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나왔다 싶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반전도 한두 번이지 이 호텔 사장이 그 신사를 쫓아왔던 핑크 컨버터블 영부인? 에잇, 거기 엮이면 헤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차,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비밀이나 정보를 캐낼 때까지 한달이고 두달이고 그 객실에 계속 머물러주라고 도저히 사양할 수 없게끔 만들어서, 특급 호텔 생활 오래하면 정말 지겨운 게 이거구나, (진짜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혼잣말로) 에라 이짓도 못 해 먹겠다, 라는 반응을 이끌어낼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완전 좋겠지만. 또는 이름은 인터콘티넨탈 호텔 지점인데 뭔가 신출귀몰 건축가의 특수한 설계로 탄생했기 때문에 딱 1개 객실은 하루에 1번 방이 움직이는 그런 건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술 더 뜨면 하루가 지나서 다급하게 호텔을 포함한 인근 지역이나 섬 전체에 긴급 재난 지역이 선포될지 누가 알겠나. 전염병 뭐 그런 이유로.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극히 미미한 불안감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살면 그렇게 오래오래 산다면 또 그러저럭 적응해서 살게 된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퍽이나 들어 봤던 말, 이분은 도박을 저분은 주색을 당신은 소설을 나는 가난을 그렇게 사람에 따라 딱 1가지 주의해야 할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만 한다면 크게 부주의하지만 않는다면 당신도 꽤 괜찮은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분수 포동포동 꼬마에서 분자보다 분모가 작은 분수인 진분수로 훌쩍 커버린 중년이 될 때까지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 봤을 글, 어느 지역은 자연과 저곳은 역동성과 어딘가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을 또 다른 유적지에서는 사회나 경제 문제 가운데 제일 큰 건 뭐다, 라는 제각기 연관되면서도 다른 개인과 전체의 삶에 관한 좀 흔한 진술들.
그건 그때 가서 확인하고 이제 호텔과 가까운 해수욕장에서 낯선 그곳으로 치유 여행을 온, 애지중지 금지옥엽으로 성장한, 왕성하고 단정히 자라나서 불륨감 있고 인상도 괜찮은,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 푸는, 낮에는 따사롭고 인간적이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지만,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아가씨가 등에 오일을 발라 달라며 유혹하는 일만 남았나? 애초에 정한 여행의 목적이 힐링이냐 모험이냐, 그에 따라 실제 여정도 좌지우지되겠지만 처음에 우발적으로 떠나온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