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조니다.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나의 애마는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다. 어느 날 광고를 보고 덜컥 구입을 결정했다. 어차피 메르세데즈 S63 급이 아니라면 성능은 모두 심하게 말해서 그만그만하다. 광고와 더불어 내가 얘를 산 결정적인 이유는 외양과 내면의 극명한 차이 때문이다. 여자를 예로 들면... 어... 말 말자. 그 광고에서 표어는 괜찮더라. Live The ART. 차 뒤로 보이는 배경이 마음에 들어 덥썩 사버렸다. 그 차를 타고서 세계에서 유명한 자전거 대회에 구경가 삼지창을 들고서 응원할 것이다. 그러려면 삼지창을 만들고 뿔 2개 달린 모자와 복장도 챙겨야 한다.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다음 연도 나의 목표다. 목표는 하나가 아니다. 또 목표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전보다 지금 이후로 양복을 더 자주 입을 것이다. 구두를 더 자주 신고 싶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하지만 너무 과도하면 행동이나 생각에 각이 잡히고 발도 피곤하니까 너무 자주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지는 않을 것이다. Elegance is an Attitude. 문득 말의 볼과 엉덩이를 쓰다듬고 싶다. 망아지와 대형견과 함께 뛰어놀고 싶다. 가죽 옷도 입어보고 싶다. 뭔가 터프해 보이는 옷차림. 가끔은 버번 위스키도 홀짝이는 여유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참고로 나는 버번 위스키의 '버'자도 모른다. 나이 들수록 겉멋도 좋지만 힘을 빼고 지적으로 성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는 김에 집에 진열된 읽지 않은 책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시계. 사실 사람들에게는 이제 손목에 차는 시계가 필요없다. 그러나 걸작, 특별함, 품위, 우아한 곡선미, 아름다움, 광채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시계를 찬다. 나도 귀찮지만 1주일에 하루는 시계를 차야겠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스타일와 품성까지 완벽한 사람들은 손목시계를 좋아한다고 한다. 근거는 없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멋진 손목시계를 보면 저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지만 드물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긴 한다. 즉 시계는 좀 의뭉스럽지만 사람의 외모와, 남자의 가냘픈 지적 수준과 연결된다. 시각이 청각과 이어진 것처럼.
예전에는 몰랐는데 수필을 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일은 더 즐거운 일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과 소설을 쓰는 일, 전자와 후자를 왜 비교하고 엮는지 모르겠다. 왜 전자와 후자를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로 이어서 문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가. 알 게 뭐야. 그걸 알아내고 파고드는 것보다 무드와 낭만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게 나의 포지셔닝이다. 마음 설레는 로맨스를 할머니가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 같나? 할아버지는 쫙 빼입고 베레모를 쓰고서 컨버터블을 타지 말란 법이 있냔 말이다. 오라, 그럼 나도 이번 주말엔 집시처럼 어딘가로 떠나야겠다. 계절이 바뀌면 좀 그럴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
나는 스무살 초반 청춘시절에 멋도 모르고 반짝이는 십자가 모양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큐빅으로 장식된 번쩍거리는 목걸이.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약을 하고 별난 기행을 하는 것 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져 그러다 말았다. 그렇다고 립스틱을 태어나서 1번이라도 발라본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누나가 내게 그걸 크레파스 대신 칠했나, 잘 모르겠다. 새빨간 립스틱. 오랜 결혼생활에 무뎌진 남편이 뜬금없이 부인에게 뭐 잡아먹었냐고 건넬 수 있을 법한 그런 빨간색. 차로 시작해서 옷차림과 시계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건너왔다. 하나도 연결이 안 된다. 이런! 그렇지만 다 그런 이유가 있다. 엎어진 카드를 뒤집지는 않겠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뒷면의 모양이 이쁘다. 실망하기 싫단 말이다. 타인 위주로 관점을 바꾸자면 미리 낙담시켜드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다음주에 나는 친구들을 만난다.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겠지. 궁금하다. 보고 싶다.
친구들은 친구들이고 요즘 난 이사갈까 생각 중이다. 동네에 들어서는 새로운 집들이 너무 촌스럽기 때문이다. 그 돈을 들이는데 왜······ 그렇게...... 그런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인근의 어느 새 도심지 공원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느 해외 뉴스를 보니 그걸 뭐 활성화 어쩌고저쩌고 해서 뭐 나름 집, 건축, 경제로 그 범위를 넓히고 키워서 보는 시각이 있다는 걸 보도한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말은 된다.
아차, 차를 바꿨으니 드라이빙 슈즈도 하나 마련해야겠다. 이런 젠장! 소설 쓰고 있는데 순전 뭘 하고 싶다, 뭐 사고 싶다, 뭐 샀다, 시시콜콜 수다떠는 것 같다. 30년째 글을 쓰는 작가인데 그동안 필력이 제자리를 지키는 매우 고집 센 양반같다. 지금 남 얘기할 때가 아니다.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아, 향수. 향수는 섹시함의 아이콘이다. 참자. 지성과 격조. 차라리 한 편의 시를 읽겠다. 사람들은 시를 안 읽는다. 시인은 가난하다. 가난해도 좋으니 나도 시를 쓸 수 있는, 잘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 그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돈이라도 많아야 하나?
사실 이건 마누라가 쓴 글이다. 내가 이런 형편없는 습작소설을 쓸 리는 없다. 게다가 그걸 수첩에 그리고 싸구려 플라스틱 볼펜으로? 어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뻥이다. 이 말만 뻥일까? 이번엔 여기까지만 쓰고 다음 번에는 좀 더 사색을 다듬고 사유를 발전시키고 지성을 드높여서 훨씬 고급스러운 글을 쓸 것이다. 반드시! 이 말은 진담이고 예언이다. 예언이여, 들어 맞아라. 딱 맞게 실현되기를 빈다. 아, 그리고 나는 마누라를 사랑한다. 언제 어느 때라도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은 절대 별하지 않는다. 절대, 절대, 절대, 절대. 한 번 더 절대! 그녀가 혹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완성되면 그녀가 몰래 법정 대리인으로 출판 계약을 맺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 부인의 약점을 하나 캐내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실은 자신이 없다.
나는 케빈이다. 케빈은 나다. 나는 요즘 소설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제임스 때문에 어떤 알 수 없는 영향을 받아서 친구들 가운데 어쩌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 친구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나 요즘 글 써, 라고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건실한 놈으로 일단 하나를 완성한 후에 발표해서 애들을 깜작 놀래켜주고 싶다. 우린 꿈에도 몰랐다, 언제 그런 일을 꾸몄니, 첫 소설인데 장난이 아니네, 혹시 걔가 걔니, 그 행위는 진짜 따라한 것이었냐, 같은 다정한 말을 듣는 걸로 시작해서 기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소설을 발표하면 아무래도 속마음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헛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내 인생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하나 더하는 게 급선무다. 게다가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타자를 위한 일, 즉 작품성이 손톱만큼 더해지고 사춘기 소년의 삶에, 꿈 많은 소녀의 먼 미래에 뭔지 모를 작은 보탬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소설 쓰는 일이 나의 삶에 크나큰 낙이 되었다. 실패하면 낙담할지도 모르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골방 한구석에 꿈을 쳐박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더 낙담해서 괜한 데다 분풀이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실패한다고 해도 매해 말일 날 샴페인을 터트리고 자축할 것이다. 새해에는 재도전할 것을 다짐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 주제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 거다. 그래서 생각하다 종이에 썼다가 그 종이를 찢어서 구겨서 집어던지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다가, 에라 이렇게 된거 모르겠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영부영 작문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그 콩만한 것이 달만한 창작욕으로 변해버린 거다. 그러다가, 소설 남자의 미래를 바꾸다, 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르면서, 번개처럼, <아! 이거다> 라는 깨달음을 필두로 거창한 글쓰기가 시작됐다. 장비든 뭐든 몽땅 갖추고 일을 크게 벌리고 뭘 시작하는 그 습성이 도진 거다. 그게 내 스타일인데 뭐 어쩌겠나. 나는 그게 좋다.
소설을 쓰는 데 특별한 비법은 없다. 그걸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설 쓰는 법, 소설의 기술, 문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 도움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쉽게도 난 그 축에 못낀다는 걸 금방 운 좋게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했다. 지금도 골똘히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놀랍고도 재미난 소설을 쓸 것인가를. 그래서 난 마침내 한량이 되버린 느낌이다. 종내는 승려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랑을 쟁취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내면의 감정이 꼬일지라도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결코. 그 전에도 그랬지만 뭔가 예전 보다는 사람이 더 진중해지고, 내 안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그냥 출퇴근에 게임하고 TV보고 술 마시고, 그것도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느낌, 뭔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칼을 뺐으면 호박이라도 찔러 봐야 한다고. 운동과 여행과 낭만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소설이 다가왔다.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꼬시듯이, 부분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하듯이 그렇게 안정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보편성을 벗어난 소설이란 명제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 쓰기, 이것으로 삶의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 이야기만으로는, 쉽게 말해 주황색에 한정된 명도와 채도만으로는 제한적일 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전에도 알기는 알았지만,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누가 잘 들어주는 걸 좋아한다. 최소한 그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많지 않아도 자기 글을 꼬박꼬박 읽어주고 음반을 사고 간헐적인 전시회 관람을 잊지 않는 애호가를 어느 예술가가 싫어하겠나. 그 바닥과 일반인 생활, 다를 거 없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남 얘기를 잘 들어주니까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호감도가 올라가서 평판도 좋아지고 내 기분마저 덩달아 좋아진다. 물론 자아의 색깔이 옅어지거나 개성이 조금은 희미해질 수 있다는 반작용도 약간 있을 수 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즐거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장미에 대해서만 장황설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장미꽃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장미 가시에 한번이라도 찔려본 다음에 인생을 논하라는 충고를 넌지시 건네며 뭔가를 아는 척,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가 나올지, 뭔가 나오겠지, 하면서 자꾸자꾸 읽고 싶게 만들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향수를 불어일으키고, 추억을 되살리고, 때로는 따끔한 일침을 놓으면서 껄끄로운 일마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버거운 길마저 마다하면 안 된다. 그냥 해보는 것은 없다니 하냐 안 하냐만 있나니, 그것도, 그냥 한번 해 본다는 것도 안아서 그냥 해보는 게 왜 중요한가를 정말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서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는 독학처럼 기초 서적부터 최고급 과정까지, 아동용 판타지와 청소년 소설부터 인생이 이 경험도 저 경험도 두루 알려준 어른을 위한 내용까지 모두 포함한 소설, 그것을 써야 한다. 그러면 괴물이든 실패작이든 뭔가 나오겠지. 헉,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고 왜 등장인물들이 안 나오고 대화도 없는 거지? 등장도 안 했는데 엄청 심약하고 소심하며 완전 말 수 없는 그런 사람들 두서넛 나오는 소설, 그런 건 딱 이곳의 목표와 반대되는 부류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라도 잘 시작하고 싶다.
인문-교양서에 주로 나오는 뭐뭐 하라, 뭐뭐 하지마라, 딱 이것과 확연히 다르게 소설에서는 사람을, 사람에 대해 알려야 한다. 범위의 테두리를 불명확하게 만들고 조금은 간접적으로. 그래야 사건이든 발단이든 절정이든 생기게 된다. 처음부터 이건 뭐다, 저건 뭐다, 라고 단정짓고 가는 건 아는 게 많고 지성이 받쳐줘야 한다. 사람의 분석, 그럼 그것은 뭘로 다가가야 하나. 치밀한 논리와 도표와 수치와 반전과 상징? 아니다. 딱 문장 하나면 된다. 바로,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 바로 이것이다. 특히, 자아가 흐리거나 억압되고 주관이 희미한 사람들께서는 충분히 새겨들을 말이다. 나는 아니지만, 나와 친분이 있는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은 이걸 아는데 무려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어떻게, 40년씩이나! 연애를 시작할려면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그녀는 달아난다. 그녀를 여러 호색한과 색마와 멋쟁이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 블로그를 시작해서 여심을 공략하든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포섭하든 우선은 날 드러내야 한다. 챙피하고 수줍은 느낌이 들어도 할 건 해야 한다. 그대여 가면을 벗어라. 그리고 그것을 짓이기고 뭉개고 구겨서 버려라. 진짜 삶을 살란 말이다. 껍데기는 저멀리 던져버리자. 그러든 어쩌든 대화나 사건이나 뭔가가 안 나오고 설만 푸니 참 슬픈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내 얘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나는 최근에 차를 바꿨다. 난 원래 차를 여러 대 가지고 이 차 저 차 막 타는 성격이 아니다. 그럴 여유가 되어도 안 그런다. 하나를 짥고 강렬하게 사랑하면서 그 다음 그 다음 콩콩 건너뛴다. 차는 그렇지만 연애는 안 그런다. 이번에 바꾼 차는 애스턴 마틴 라피드S다. 내가 이 차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얘와 함께라면 행복하니까 둘째, 여자들에게 먹힌다. 앗, 좀 멋드러지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야 하는데 간혹 까먹는다. 여성분들의 숨겨진 은밀한 동경심과 은근한 낭만적 추구 성향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그다지 향그러운 설명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셋째, 이걸 타면 현실과 꿈, 영화, 촬영 보조 그 가운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분간이 안 된다. 그 떠도는 아련함과 표리부동한 자아, 그런 게 참 좋다. 성능이나 미션, 뒤쳐진 몇몇 사양과 투박한 옵션들 모두 그냥, 괜찮다.
우선은 여기까지 쓰고 환상관에 다녀온 후에 다음 이야기 구상에 들어가야겠다. 이건 장편소설의 챕터 하나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감이 없잖아 있다. 자고로 남자란 치고 빠질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안녕. 내 이름은 알렉스야. 알파벳 A, 내 이름의 첫 글자. 여자친구는 나를 카푸치노 같은 남자라고 해.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이유를 댈 수는 없어. 그게 다야. 그게 뭐냐고? 그게 뭐냐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다. 꼭 정신지체, 지적장애, 뭐, 그런 말이 떠오른다는 거 다 알아. 그게 뭐냐는 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야. 그러니 그 좋은 말을 한 번만 듣고 멈출 수는 없지. 한 번 더 가야지. 그래. 사람이 미래를 장담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난 내 여자친구의 주근깨가 너무 좋아. 언제까지라도 그럴 꺼 같아. 카푸치노와 주근깨가 뭔 상관이냐고, 말하지 않아도 네 맘 다 알아. 그러나 어쩌겠어, 이상하게 그게 좋은 걸. 내가 너무 애 같은가? 아닐 껄. 난 평균이야. 그럼.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에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을 자주 만나니까 자꾸 친구들이 나를 놀리는 그런 취미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난 그게 빈정대는 농담이 아니라 참말인줄 알았다. 즉 난 친구들 때문에 내가 여자 꼬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줄 알았다. 물론 친구들끼리 장난치고 으쌰으쌰할 때만. 어찌됐든 그동안 알았던 여자들도 지금 다시 잘 생각해 보니 그녀들의 덫에 걸려들거나 미끼에 혹하거나 어떻게든 요사스런 유혹에 끌린 게 대부분이었다. 누가? 내가. 하지만 그건 과거다. 지금은 현재고. 이런 내 앞에 미래가 있다.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내가 왜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냐면 어느 날 문득 평생 너무 말만 하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고 연기를 할 수도 있는데 살면서 난 너무 말만 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 순간 내가 어디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원에서 낙엽을 밝고 쓸쓸히 걷다가 그랬나, 술 취해서 집에 휘청거리면서 들어오다가 혼자 노래를 부르던 그곳이었나, 잘 모르겠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 깨달음이 있고 난 후 쉬는 날이면 강변을 걷거나 동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놀러가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구경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째 저렇게 사람들은 그리고 남자들은 음, 그럴까, 그런 생각을 했다. 축구 골대에 공을 넣을려고만 하고, 농구 골대에 농구공을, 야구공을 때리고, 테스스공을 직장 상사의 얼굴이라 착각하면서 스매싱을 하고, 앞으로 계속 달리고, 모여서 자꾸 어디를 가고, 술집을 전전하고, 산을 정복하러 산에 오른다. 정복은 뭔 정복. 그리고 부릉부릉 하면서 목적없이 스포츠카 동호회 일주를 즐기는 모습들이 보인다. 똑같은 자동차들이 일렬로 여러 대 질주하는 장면, 그건 경기도 아니고 어디까지 중요한 일을 치르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디까지 갔다가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게 다다. 그 구간이 멀다면 그리고 그 행위를 이끄는 리더가 자동차 튜닝 가게 사장이라면 한번씩 그렇게 나갔다 오면 자기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다. 당연히 동호회 회원들에게 술 한잔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곧 이렇게 몸으로 부딪히고 달리고 공을 넣고 아니면 웅변하고 허풍에 술 마시고 취하고 여자 꼬시고, 그게 과연 타인 삶의 전부인가, 그게 진정 남자의 진면목인가, 그게 바로 내게도 동일시되고 동기화되는 현상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 단순하지 않나, 이건 좀 뭔가 대단한 게 없다, 어떤 진실한 즐거운 환희를 느껴보고 싶다, 그런 의문과 욕망 때문에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머머하라, 머머하지 마라, 그런 인문-교양서 보다는 항상 설을 푸는 게 내 생활이었으니까 다른 걸 하고 싶었다. 그 다른 게 소설이었다. 아이이자 어른이고, 남자이면서 여성일 수도 있으며 하루는 여행가, 내일은 애마부인, 그런 다면적인 이상한 가상의 주인공을 바로 소설 속에서 만들어 내고 싶은 열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그게 능동적인 사고였다면 음, 재수없다.
소설 쓰기의 발단은 그랬는데 그 잠재된 욕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게 된 동기는 다름 아닌 시시콜콜한 TV 연예 뉴스였다.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가 있어 지금이 있다. 책을 읽는 독자가 있으니 작가가 있는 것이고, 그대가 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소설을 쓰고,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소설가다. 뭔 말이냐면 어느 날 연예 뉴스에 유명 연예인의 결혼소식이 나왔다. 쉽게 말해 최고 스타의 결혼, 그런 특종 말이다. 그 유명 배우가 신부로 맞이한 여인도 연예인이었다. 한때 가수. 그런데 그녀의 이름 이니셜이 SJ였다. S─J. 오, S─J! 내 친구 제임스는 이것과 반대로 이름과 성의 이니셜이 JS다. 제임스가 딱 밝히지 않는 신비한 진주귀걸이를 닮은 그녀, 그녀 이름의 이니셜도 JS라고 한다. 그녀가 옛날에 <못생겼네!>라는 말을 들었다나 뭐라나. 정리하면 연예계 특종으로 알려진 결혼 소식에서 신부될 여인의 (이름) 이니셜이 SJ, 제임스는 (이름과 성) 이니셜이 JS, 제임스가 술 취해서 언뜻 속삭였던 그 녀석 꿈 속의 그녀 (이름) 이니셜도 JS. 뭐가 막 복잡하지만 여기서 SJ만 남기면 되고, 서두가 긴 이유가 있다. 두근-두근-두근, 전주곡이 반드시 필요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 S─J, 그 기억을 나는 평생 안고 산다. 원래 사람의 인생은 그렇다. 누구나. 그게 나에게도 있다는 거다. 물론 당신에게도. 아무튼 SJ라는 이니셜을 들으면, 듣지 않아도 옛날 그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뉴스에서 특종, 하면서 종소리가 울린 거다. 뭔 일이냐면, 일단 문단을 바꿔야겠다.
뭔 일이냐 하면 시골에 있는 3류 대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지명이나 도시명은 가상이다.) 그 학교는 대충 텍사스 어느 촌구석에 있었다. 나는 그 학교가 생긴지 2년째가 되었을 때 그곳에 입학했다. 지금 이야기가 있던 시간은 내가 학교에 들어간지 6년째던가 7년째던가, 그렇다. 중간에 난 특수부대에서 약 2년을 보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학교에서 나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또 그때 제일 친한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겪은 일이다. 그 친구는 걸음이 굉장히 빠르다. 그보다 더 빠른 걸음걸이, 아직 못 본 거 같다. 말도 빨랐다. 게다가 말이 막히지도 않는다. 언변도 훌륭하다. 전형적인 재담가다. 그런데 좀, 많이 횡성수설이다. 대화 내용 수준도 좀 그렇다. 키는 매우 작다. 얼굴은 처키 인형을 닮았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 녀석이 여자를 꼬시기는 힘들었다. 얘는 운동은 못한다. 아예 안 한다. 글도 읽지 않는다.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인 성격. 어려운 하나를 막 파고들지 않고 공부 못하고. 게임은 좋아함. 쉽고 단순한 것만. 그는 누드사진 동호회 회원이었다. 동호인 모임에 나가 야외에서 누드모델의 눈부신 나신도 실제로 봤다. 처키는 가짜 웃음의 권위자다. 나 같은 너털웃음으로 일관한 아재들이 시급히 보고 배워야 할 그 거짓 미소. 그리고 척키는 여자친구가, 지금의 부인인 그녀가 녀석보다 넉넉히 키가 컸다. 힐을 신으면 좀 더 훌쩍. 또 어깨동무도 그녀가 먼저 한다. 그랬다. 녀석은 당시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인간도 자유인이다. 그리고 그때 인터넷 채팅이 유행이었다. 나는 못하는 외국어로 Yahoo.com에서 베네주엘라 처녀와 룩셈부르크 아가씨와 그쪽 언어로 신기해 하며 막 채팅하고 그랬다. 그러나 내 단짝 처키는 국내 채팅에만 열중했다. 물론 처키도 나를 신기하게 봤다. 그렇게 처키는 사이버 세계에서는 카사노바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기숙사에 살다가 주말이면 달라스에 있는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다시 학교에 왔다. 처키는 집이 멀어서 언제나 기숙사에서 살았다. 녀석 집은 시애틀인가 플로리다던가? 입만 열면 뻥이라서 잘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처키가 채팅이 잘 되어서 껀수를 잡았다. 녀석이 채팅으로 약속을 잡은 장소는 내 집이 있는 도시 달라스였다. 약속 시간은 주말이었다. 그래서 처키가 나에게 대타로 나가라고 했다. 그냥 심심해서 채팅하다가 뭔가 걸렸고, 별거 없겠지 그랬나 보다. 그리하여 나는 주말에 뭐 별 생각없이 그 자리에 나갔다. 그날 나는 검정색 ARMANI EXCHANGE 니트에 청바지는 DKNY, 구두는 KENZO 그리고 GUCCI가 아니라 어떤 향수를 뿌리고 나갔다. 그때 Calvin Klein Collection 외투는 사기 전이었다. 줄무늬나 베이지색 Calvin Klein Collection 수트를 사고 싶었는데. 그때 그걸 보고서 완전 홀딱 반했다. 그걸 입수했다고 해도 입고서 딱히 어디 갈 자리가 없었다. 혼자 거울만 봤겠지. 그리고 첫사랑을 처음 만났던 카페에는 KENZO 니트에 저 DKNY를 입었음. 지금은 좀 대중...신비감이 폭등하진 않은 듯 하지만 그 당시 kenzo.com에 흐르던 음악, 으으으. 내가 개였다면 아마도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만. 그때 삶의 스트레스를 신용카드 사용하는 걸로 풀었다. 그렇게 과소비에 빠져들어 당도한 엄청난 파국에 대해서는 할 애기가 많지만 아니 어두워서 밝힐 수 없지만─일반인은 잘 안다. 그 늪에 빠진다면 보봐리 부인을 반추해? 내 앞이 캄캄한데 그럴 수는 없다. 저항하기엔 어쩜 너무 무기력하고 음성적인 '어차피 이런 게 된 거' 효과와 신고 나면 자동적으로 불가능한 무도가 현실적으로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어쩜 좋아'라면서 추는 춤을 절대 멈출 수 없다는 동화에 나오는 그 구두와도 닮은 가속도 앞에서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일도 있다지만─지금은 삼천포로 빠지지 않겠다. 그날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막 밝고 화사하게 딱 그렇지는 않았지만 또 분위기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를 처음 만나서 둘이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베스킨라빈스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또 영화를 봤다. 그때는 미니 극장이 유행이었다. 인터넷 채팅이 유행이었듯이. 1번째 영화는 뭘 봤나 기억이 안 난다. 2번째 본 영화는 제목이 '섬'이었다. 그건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의 초기작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호감이랄까, 첫만남에 대한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아무 일 없는 따분한 일상의 삶과 그것의 별 기대없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뭔지 모를 막연한 기다림과 어쩌면 설렘의 감정이 그 자리에 함께 했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2번째로 본 섬이란 제목의 영화와 함께 에구머니나, 뭔 교감이 있었다. 수수께끼에 휩싸인 그런 거. 그날 나는 비로소 여자의 어떤 오묘한 불가사의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난 내가 파가니니인줄 알았다. 나는 그날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전의 나는 그냥 동네 꼬마였다. 땅꼬마. 그녀는 정녕 미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신비라는 이름의 놀이동산에 있는 천국행 은하수 열차의 승객이었단 말인가? 우주를 여행하는 비행선에 탑승한 특별 손님? 피임은 생각도 못했다. 그때는! 이런 단어조차 말하는 게 무척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걸 털어놓기에 그러므로, 왜 유수의 영화제나 명망 높은 문학상 같은 데서 괴롭고 불편하고 쓰디쓴 주제나 언짢은 내용과 사건과 모순된 애매함을 다룬 작품들이 아마도 반쯤은 그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또 그래야 하는가, 그런 적어도 내게 있어서 평범함 저쪽에 있는 관념적인 냉엄한 경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도 경험을 해봐야지만 꽁꽁 눌러서 내면의 무의식 몇 번 방에 잠자고 있는 그것을 꺼내 봐야지만 그 절심함과 사소하지 않음에 아차,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날 나는 그녀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고 처키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 날이 지났다. 전화로 그 안개에 가득한 내막을 듣고서 처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에 빠졌던 걸일까, 오, 오, 오! 그게 화근이었다. 월요일이 되어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갔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강의실에서 녀석의 갈굼은 시작되었다. 뭔지 모를 눈빛과 이심전심까지도. 그때 단짝 처키에게서. 들들 볶고 웃고, 웃기며...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호인이 받는다? 그런 속담 있지 않나. 채팅은 누가 해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데 금단의 열매인 탐스런 선악과는 정작 엄한 놈이 따먹었던 것일까. 별일 아니지만 큼직한 골드바 5개 짜리 값어치인 판도라의 상자 열쇠를 얼렁뚱땅 말발에 속아서? 잃어버리고 실수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니. 부아가 치밀고 억울하며 화딱지 나서 그 갈굼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결국 못 견디고 얼마 후에 두번째 만남의 장소에는 내가 아닌 처키가 나가게 됐다. 그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다른 곳에 살며 다른 학교에 다니고 각자 다른 생활을 하느라. 두번째 만남에서 녀석이 청춘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걸일까, 문제는 그게 아닌 것일까. 그날 그녀는 결국 울고불고 야단나고, 처키는 기숙사로 낙담하고 많이 실망해서 돌아오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했고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울분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이름 이니셜이 SJ였다. TV 뉴스에 나온 연예게 초-특종 대스타의 아름다운 신부 이름과 똑같은. 철없는 사나이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철학과 이상과 꿈과 모험에 굶주린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 표범? 고독한 도시의 사냥꾼.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없다. 왜냐하면 처키와 나는 또 다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 문단을 띄우고, 문단을 띄우고? 아하! 그러기엔 뭔가 아쉽다. 왜냐하면 그때 대체 뭔 일이 있었나 더 듣고 싶어하시는 독자가 분명 있긴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 당신 친구 같은 사람. 웃고 있는 그대. 바로 그런 데서 인생의 갈림길이 갈리고, 생애의 판도가 뒤바뀌는 건데 그저 세부적인 그림과 사실주의만 신봉하고 젊을 때 열정을 불태우고 꿈을 쫓고 해야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뭘 망설이냐고, 속시원히 말해달라고, 알려달라고, 풀어놓으라고 떼쓰고 조르는 뭘 좀 의아해 하시는 일부 젊은이에게 이젠 나도 한소리 하고 싶어졌다. 그래, 그게 노파심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래도 일단 읽고나 보자. 앞서 그때 대관절 뭔 일이 있었나 더 세밀히 여기서 뭔가를 더더욱 자세히 묘사하는 건 에로비디오의 재생버튼을 눌르는 것과 같다. 장르가 에로면 그나마 다행이고. 고전적인 카메라 각도를 무시하고, 고풍스런 음악도 뒤로 빠지고, 어떻게 해서 연정에 이르게 되었다는 낭만의 과정과 있어 보이는 대사와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비로움 그건 다 포기하고, 단일 구도로 실제 상황을 찍은 듯한 그래서 극도로 사실적인 직접 화법. 비디오 킬 더 레디오스타, TV 다음에 INTERNET, 전자에서 후자로 오면서 비밀이 없는 세상에서 미스테리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더 커졌다. 지루함과 심심함과 권태는 물론 예술과 상업이 발달한 것처럼. 그뿐만 아니라 영상 예술 또한 그랬고. 그 한쪽에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도 있을 것이다. 세네카의 작품이나 금욕주의 그런 범위까지는 건너가지 말자. 방대한 양의 어떤 영상들이 범람한 시조에 그와 비슷한 글은 뭘 좀 모르는 남자 같다. 그쪽에 집중하고 그쪽에 빠지면 언제 멈추어야 하느냐, 도 애매해지고 다른 쪽에 할당될 에너지도 그쪽으로 몰릴 것이다. 그 길만 가게 되는 거다. 인생처럼. 삶에서도 통속극 작가에게도. 하지만 그것도 환상이다. 명백히 사랑의 일부분 아니 크나큰 요체요, 핵심에 관계된 거다. 사랑은 관능도 플라토닉러브도 육체적 사랑도 모두 포용한다. 당연히, 후생인류학에서 말하는 종족보존 본능의 근간인 정념의 불꽃과 정염의 흥취까지도. 추억의 신청곡도 몸이라는 물아를 전제로 노래한 것이다. 청춘을 돌려다오. 못다 핀 꽃 한 송이. 그러나 저 환상과 그 어떤 환상은 똑같은 환상이 아니다. 말초적인 동영상과 생물학과 예술을 혼합하여 말로 풀면 반가운 입질과 확실한 손맛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팀 보울러식 동화풍 성장소설은 못 읽고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이제 팀 보울러를 읽을 수 없다. 읽을 수는 있는데 감상은 못한다. 그 시기를 지나버렸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 늦었더라도 청소년문학상 후보작이라도 읽고 나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이따금 하곤 한다. 마틴 핸드포드를 찍고 제프 키니를 거쳐 앤서니 브라운을 독파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어른도 기회는 있다. 애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잠들거나 귀찮아서 읽어줄까 말까 뭐라고 핑계댈까 고민할 시기는 늦어도, 거치게 된다. 아니면 홀가분하게 독신 생활을 즐기면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애들과 강아지와 완구 용품과 회전목마를 보면서 웃음지으면 그만. 무뚝뚝함으로 위장할지언정. 어떤 단위와 배경이 작게 시작되었더라도 그래서 더더욱 그래프는 드라마틱할 수 있다. 제 시기에 걸맞는, 시간 보내기에 유용한 보기들을 제시하고 안내하고 도와주고, 주변에는 그런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이제야 보인다고 하면 딱 훈시 어구 같지만 그냥 지나처버리기에는 미련이 남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많이 남는다 미련이. 그 뒤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에로비디오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지금도 뭔가 망설인다. 내 친구는 임신한 부인에게 핀잔을 들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뭔 이상한, 자꾸 어떤 이상한 걸 혼자서 막 자주 본다고, 자주.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가 동심을 숙련하고 득달하여 새로운 어른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뭐 어쩌겠는가. 사랑을 기다리는 동안 나를 가꾸던가 그녀를 감동시키는 비법을 익히던가 해야지. 그러나 남자는 어른이 되기 전에 괴물의 시기를 (꼭) 거치게 된다. 그것이 통과의례인가는 비뇨기과 의사가 아니라 인지심리학자가 주도한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몇 번 방의 문을 꼭 잠궈놓고 공개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고. (멈칫) 그래, 말하자면 내 책상 3번째 서랍에는 볼펜으로 조그맣게 써놨다. 판도라라고. 그래, 난 이렇게 산다. 어차피 크면, 어른이 되면 의무방어전은 챔피언만 치르는 드문 일이 아니란 것을 다 알게 된다. 또 자기 인생은 자신이 설계하여 만들고 살아가면서 챔피언도 되었다가 때로는 좌절도 겪고 다시 아카디아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과 왕성한 지식욕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교묘한 화술로, 환상적인 사랑으로, 화사한 예술로 또 그 무엇으로도 승화시키는 법을 일찍 깨우쳐서 원숙한 인생 경험을 서둘러 취득할 수도 있다. 그건 노력이고 행운이지만 그런 쪽으로 조숙하지 않다고 하여 불행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쉬운 대로 번드르르한 언변과 세심한 눈치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또 타인은 뭘 바라고 기대하고 원하는가, 표출되지 않는 그 의중과 내 욕구와 우리의 취향과 인간사에 대한 해박한 이치에 관하여 후천적으로 더디게 터득할 수도 있다. 조금 늦어도 된다.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제 발로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그냥 걷어찰 것인가, 과...연 그것이 정답인가 차선인가 차악인가, 그건 퍽 까다로운 문제이지만 적어도 여기서 그리고 쉽게 결론내리는 것이 심히 부적절한 처사라는 것은 꽤 타당한 일일 것이다. 진리와 지혜는 글 속에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승에 있고, 따라서 사랑은 탐미적인 육신과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의 아름다움은 유한성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없을까? 좋은 남자도 없을까? 철들면 안 될까? 이쯤 하면 됐다. 자, 이제 진짜 문단을 띄우고,
기분이 괜시리 훵한 어느 날이었다. 맑거나 흐린 낮이 지나고 저녁이 찾아왔다. 바람이 살살 불고 장소는 바닷가 방파제였다. 기숙사에서 선배와 후배와 친구들이 모두 함께 방파제 바다 낚시를 갔다. 낚시하는 사람은 하고 술 먹는 사람은 먹고 처키와 나는 따로 둘이 놀았다. 방파제 이쪽을 가봤다가 저쪽을 가봤다가, 술자리에도 낚시하는 데도 기웃거렸다가. 그러다가 처키와 나는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킥보드를 그날 누가 가져왔다. 그래서 처키가 킥보드를 타고 나는 그냥 뛰고, 그렇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달리기로 했다. 연인처럼. 아니 어린애처럼. 누가 빨리가나 시합을 시작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둘이 엉켜 넘어졌다. 나는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는데 처키는, 처키는 일어나지를 않았다. 엄청 괴로워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다가 잠시 후 이렇게 소리쳤다. 담배, 알렉스, 담배! 처키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진 거다. 기숙사에서 나는 꼬박꼬박 우유를 사서 마셨는데 처키는 맨날 인스턴트 식품만 먹더니만.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 처키는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녀석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양치질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내 껌만 씹었다. 나는 자주 문병가서 위로하며 달래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간호사가 녀석을 찾아올 때마다 침대에는 내가 누워 있고, 옆에 보호자 의자에는 처키가 앉아 있었다. 왠지 환자의 침대에 누워보고 싶었다. 내가 환자가 되고 싶었나? 아님 그냥 생활 자체가 환자? 그것도 아니면 간호사에게 흑심을? 일주일인가 있다가 퇴원했다. 병원비는 반땅이었다. 아니다. 내가 조금 더 냈던 거 같다. 나의 신용카드는 그렇게 달리고 또 계속 달렸다. 녀석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기숙사에서 같이 샤워하면서 붕대에 감싸인 처키의 손을 다시 비닐로 감싸서 서로 비누를 칠하네 마네 엄청 다퉜다. 한두 번, 여러 번 도와주고 그랬는데 슬슬 또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된 거다. 자주자주 막 삐졌다가 풀어지고 잔뜩 토라졌다 잘 안 풀리고, 그 전이나 그 후에나 뭐 비슷했지만 그땐 좀 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경전의 파수병, 은은한 노란색 CLINIQUE 로션을 듬뿍 퍼줄껄 그랬다, 처키에게. 그러다 새끼손가락의 철심을 빼고 슬슬 녀석의 뼈부러짐은 회복되어 갔다.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 후로,
기숙사 시절에 척키가 또 다른 껀수를 잡기도 했다. 응, 채팅으로. 다른 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3명. 학과성적 상위 1등, 2등, 3등. 셋이 친구. 그 가운데 한 명을 척키가 채팅으로 꼬셔서 3:3으로 만나기도 했다. 결과가 좋았겠나, 걔네들도 공부만 잘했지 낭만을 몰랐어. 다 시골살고 거기서 거기였다. 척키는 그런 놈이다. 여자친구가 아닌 단짝인 내게도 뜬금없이 꼿히면 전화를 받을 때까지 40통, 70통 연속으로 거는 녀석이다. 그건 한동안 못보다가 뉴욕에서 연락이 닫아서 만날까, 하던 그때 그랬다. 얘는 그후 해외 어디로 유학가서 꽤 수상쩍은 시기를 보냈다. 또 얘는 영화상의 브루스 윌리스급 골초다. 그런데 술은 못 마셔. 그래서 어쩌다 술자리에 껴서 술 마시면 토한다. 그래서 술은 잘 안 먹고, 주로 설만 푼다. 다 헛소리. 논리 필요없다. 원래 논리적인 친구가 아니다. 여기저기 먼저 연락은 많이 하는데 딱 회신은 많이 없는, 그런, 음 그런 꽈다. 돌아보면 이처럼 단짝이 한동안 있다가 뜸했다가, 있다가 혼자였다가, 쭉 짝궁이 없다가 있다가 그랬다. 뭘 해도 항상 같이 하는 그런 1번 말이다. 또 그런 1번들 가운데는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토한 입으로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 실패한 친구도 있었다. 그 녀석은 한때 등번호 1번이기는 했는데 언제던가 또 그런 얘기를 했었다. 넌 나의 1번이 아니라 2번이라고. 뭔 영구결번도 아니고 말야. 그 뒤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다른 데서 몇 번 더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도 다 그렇다. 선수들처럼 등번호를 줄곧 일관되게 유지하고 공개하기엔 사람의 삶은 뭔가 너무 까다롭다. 뭐 대단한 발견이나 깨달음은 아니지만 인기가 많으면 피곤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견제, 시기 뭐 그런 걸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처키와 나는 (지금은 그 이름이 사라진) 3류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또 쳐키가 실력 발휘를 했다. 녀석이 채팅을 해서 여자를 꼬셨다. 그녀는 학생이었다. 실력이 많이 줄었는지 1명만 꼬셨다. 그녀를 같이 만났다. 2 대 1로. 처음보는 그녀와 처키와 나. 어허! 불온한 상상은 마시라.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전에도 거의 다 뭔 일 없었다. 난 다만 청춘시절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처키 역시 그랬을 것이다. 물론 둘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안 그래도 된다. 난 아직 늙지 않았다. 아니 늙었다. 그냥 나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오 이런, 엄마가 항상 난 늙었어, TV를 보시며, 쟤도 늙었어, 라고 하시면 난 그때마다 펄쩍 뛰곤 그랬는데, 워워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중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새 소설을 쓰게 될지 지금 쓰는 장편 소설을 그때까지도 계속 쓰고 있을지 딱히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처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번에 통화했을 때는 애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았다. 처키는 어쩌면 지금도 간혹 채팅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다른 뭔가를 하긴 할 것 같다. 아, 맞다! 아아 맞어! 오오 하마터면 잊고 넘어갈 뻔 했다. 와, 깜짝이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으쌰으쌰, 물 빠지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 비밀은 마저 털고 가자. 빠샤, 추억을 간직하고 새 희망의 내일을 맞이하자. 그렇다. 그때 3류 대학교 기숙사 4인실에서 같이 합숙할 때 오, 아아 그건 숙명이었을까? 그때 척키를 좋아하는 후배가 있었다. 여자 후배. 그런데 문제는 그녀도 척키 인형을 완전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삐─ 삐─ 그렇게 감탄사가 나올 만큼. 진짜! 오차, 거의 없이. 어쩜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런 신기함에 현기증이 일어서 넘어질 뻔 하다가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어떤 실례를 해서 겨우 안 넘어질 것 같은, 그 정도로 빼닮은 외모였다. 척키를 좋아했던,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여자 후배는. 이른바 척키 2! 뭐 영화 제목도 아니고 지성의 전당에서 그것도 잘못된 만남? 척키 1과 척키 2의 불륜? 왜냐하면 척키 2가 처키 1의 여자친구에게 전화해서 따지네 마네 둘이 데이트하고 있을 때 척키 1의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척키 2는 뿔나서 막 울긋불긋. 척키 1은 척키 2를 설득하고 세뇌시키고 마성을 주입하고 감성을 자극했으니까. 자주. 또 나는 척키 2와 장난으로 핸드폰 문자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여행갈 의도 일절 없이 전혀 없이 같이 여행가자는 장난스런 말을 건넸었다. 그 삼각관계는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연락이 먼저 와서, 뻔하니까 척키 1을 궁금해할 테니까, 장난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척키 1이 어떻게 사나를 쫑알쫑알 알려주기 귀찮아서. 척키 1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그런 적은 없지만 오다가다 편하게 보고 웃고 그랬으니까. 진짜로 척키 2와 단둘이 여행을? 할 상상이 있고 못 할 상상이 있다. 주부 10단이 아닌 대학생이더라도 그런 꼬이고 꼬이는 장르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그런데 척키 2는 정말 사랑에 빠졌는지 그게 장난인지 진담인지 구분은 설마 했겠지만 척키 1을 못잊겠다는 건지 이건 이제 더이상 몰래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인지, 그녀가 척키 1에게 나를 불한당쯤으로 보고를 했었다. 그랬으니까 척키 1이 그걸 또 내게 알렸음. 척키 1이 척키 2를 어떻게 한번 해볼려고 했는데 잘 됐었나 잘 안 됐었나 어쨌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척키 1과의 추억이 많았다. 척키 1은 나의 첫사랑을 알고 있었고, 중간에서 도움을 줄려고도 했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이 척키 2가 나타나서 뭔 풋사랑도 아니고 순애보도 아닌 듯 이상한 감정을 들고서 (척키 1의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 장거리 연애와 교내 우정, 브로맨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랑은 무엇일까 를 고민하는 지성인들이 공부하고 연애도 하는 꿈의 둥지에서 교란과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척키 2는 척키 1의 볼수록 매력있는 어떤 매혹에 매료되어 사랑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서 척키 2가 인정하긴 싫을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게 사랑이란 것이다.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적어도 척키 2에게는! 정말 그녀는, 척키 2는 현-본부인 즉 당시 척키 1의 여자친구로부터 척키 1을 빼앗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선수 교체라고나 할까 교통정리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게 정말 그런 굳은 의지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사태가 흘러가지는 않았다. 척키 1은 여자친구로부터 꼬박꼬박 꾸중을 얻어들었으니까. 거미줄 작전 펼치지 말라고. 어장관리 때려치우라고. 늬가 거미냐고 스파이더맨인 줄 아냐고. 오빠가 어부고 오빠가 뭐 어촌 계장이라도 되냐고. 정신 좀 차리라고. 제발 철 좀 들라고. 그걸 보고 나는 아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드물겠지만 머리끄댕이 잡고 불미스런 줄거리나 조마조마한 사건은 정말 가능한 일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미 아는 일이겠지만. 사랑에 빠지고 일이 커지며 그건 걷잡을 수 없이 되는구나, 그런 현실에서의 인간의 사랑은 바로 서사 민요로구나, 그 과정을 알게 됐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가까이 또 멀리 직접 보거나 듣게 되는 치정, 그게 모두 사랑 때문이로구나 그런 깨우침이 있었다. 저런, 척키 2는 경호학과였다. 학교에서 제복을 입고 다녔다. 그후 경호원이나 탐정이나 요원 또는 경찰이 되었는가 못되었는가, 는 잘 모르겠지만. 됐으면 여경, 못 됐으면 그냥 언제까지나 척키 2? 지금쯤 그녀가 여자 경찰이 되었다면 그녀는 공부도 잘 했을까? 척키 2는 척키 1과 달리 할 때 하는 강단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러니까 그 후 여경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일이니까 선을 그어야겠다. 원래는 척키 1만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척키 2는 음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워낙 진짜 워낙 너무너무 척키 인형을 빼닮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된다. 혹시 그때 척키 1과 척키 2가... 아... 저런! 쉿, 그만! 이게 또 이상한 게 거리에서 경찰을 보면 척키 2가 생각나겠구나. 척키 1로도 모자라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막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데, 그냥 놔둬야지. 그분들을 생각하면 음, 우끼다. 웃을 일이 있다는 건 나쁜 게 아니다. 허나 그 때문에 어떤 고상함과 숙달된 듯한 세련됨의 기운과 고급스러운 농담을 바탕으로 한 고품격 교양미는 청바지 물이 빠지듯 싹 빠져버렸다. 아 미치겠다. 이러니 내가 가짜 웃음이 늘 리가 있나. 아무리 유명인들의 바디랭귀지를 흉내내고, 말발을 탐구하며 따라하고, 아재개그도 알아보고 부장님 개그도 연구해보지만 그거 다 쓸데없는 짓에 불과한 것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어쨌든 이런 말, 뒷담화 같지만 오히려 하고 싶다. 할 수도 있다. 왜, 친하니까. 왜? 친했으니까. 친구니까. 게다가 추억이니까. 심지어 엄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재미있었으니까. 만에하나 취미로 시작했다가 소명에 가까울 직업이 아니라 천명의 빛을 띨 뻔 하다 미끄러져 타성에 젖는 삐에로를 닮은 광대가 된다면, 혹시라도 앞으로 무명 블로그가 유명해진다면 그래서 척키 1이 이걸 알게 된다면 이젠 연락을 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속좁은 녀석으로 판명나는 거지. 원래 녀석에겐 그런 구석이 다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그는 대인배라고!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처키가 보고 싶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친구에게, 가족에게, 지인에게 전화 한 번 드리자. 연락 한번 하잔 말이다.
그래서 저번에 하워드 집 앞 하천에서 종이배 놀이를 할 때 나는 처키 인형을 가지고 나간 것이다. 맞다. 처키의 (이름과 성씨) 이니셜은 더블 S다. 뭐야, 더블에스? 초딩 2때 우연히 봤던 새하얀 엉덩이의 주인공인 그녀도 더블에스다. 달덩이처럼 뽀얀─최고급 푸딩처럼 탱글탱글한─TV처럼 시선을 끌고 핸드폰처럼 인력이 특출난 그러나 (일단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나서, 그 낭군님께는 미안하지만 어린시절 향수니까 뭐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혹 언젠가 아마 조금은 쳐질지도 모르는, 바로 그 새하얀. 무심결에 떠올랐다. 잊을 수 없으니까. 이름과 얼굴. 크큭. 또 처키, 그 녀석이 우리 대학 동창 여자애들을 건드리다가 자제했다나 뭐라나 그 얘기도 들려주었다. 남자들은 대체로 그런 얘기를 서로 공유한다. 안 그런 남자도 있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처키가 손가락이 쑤신다는데 지금은 어쩌나 모르겠다. 아, 갑자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사만다가 제임스던가 누군던가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만다 맞나? 어쨌든.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녀에게 미안하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잘 살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부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적어도 사랑받는 여자이기를.
나는 마크다. 내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은 토끼다. 나는 토끼가 좋다. 토끼를 좋아한다. 토끼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토끼를 키우게 된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나 운명이다. 왜냐하면, 왜지? 모르겠다. 그 숙명의 까닭은 모르지만 내가 왜 토끼를 키우게 되었는지는 안다. 그것은 내가 옛날에 존 업다이크의 소설 '달려라 토끼'를 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소설은 더럽게 재미없었다. 옛날에 다 읽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많이 호명하거나 기억하는 어떤 작가들의 작품도 생각해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폴 오스터의 희곡집은 하나 읽어봤다. 끝까지 읽기를 실패한 그의 작품을 놓고 하여간 소설 더럽게 재미없네, 라고 말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크나큰 실례다. 무례이고 낭패며 돌이킬 수 없는 결례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험담을 싫어한다. 그리고 비교적 해피엔딩을 선호한다. 그냥 근소하게 비교적으로. 그건 그렇고 혹시 독자 중에 업다이크의 팬이나 그 분야 학자, 혈연이나 지연, 학연등 관계가 있거나 난 정말 그걸 허벌라게 재미있게 읽었다, 라는 분이 계신다면 미안한 말씀이지만 송구스럽지만 앞에 쓴 말은 절대 취소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들께는 죄송하다. 내가 나중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존 업다이크 생가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즉 나는 그 책을 더럽게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책이 좋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와 같은 라이트모티프나 키치, 짧은 단상등은 많다. 누구나 다 그렇다. 누구나 다. 아, 맞다. '달려라 토끼'는 TV 단막극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그 책을 들고 있어서 알게 되었다. 뭐야? 결국 토끼는 TV에서 책 제목에서 보고 키우게 되었다는 말이네.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요즘 나는 사는 게 재미없다. 생각을 좀 해보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뭔가 부족한 게 끝짱나게 재밌는 것보다 조금은 나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끝짱나게 재미있게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그 미지의 가능성 때문에. 좀 가난해도 괜찮단 말이다. 즐거운 인생이자 신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사는 게 재미없다. 왜 그러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제임스 본드, 그 전설적인 주인공의 최근 배역 배우가 광고모델로 나오는 그 시계를 사서 찰까? 그러면 재미있어질려나? 일단 그건 보류한다. 시계 하나 차서 인생이 즐거워진다면 세상에 기쁘지 않은 사람 한 명도 없겠다. 즐거운 하루, 재밌는 일주일, 밝고 흥미롭고 희망찬 학창시절, 시간가는 줄 모르는 찬란한 직장 생활, 내내 달콤하고 기쁘기만한 결혼 생활? 그런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게 과연 있기는 있을까? 맹목적인 환상과 괜한 기대, 그건 잡지에나 나온 말인가? 어느 로맨스 소설이 어떻게 1억 2,500만부가 팔리지? 지금은 더 훨씬 더 팔렸을 꺼 아냐. 나는 나름대로 삶의 무궁무진한 아름다움과 비현실적인 로맨스, 광고 표지 같은 인생, 우아한 취향, 끝끝내 잃지 않고 포기해버릴 수 없는 동심, 별과 바람과 순수와 고결함 그런 뭔가 풍성한 단어들이 내게 적격이라고, 날 설명하기에 모자라지만 아쉬운 듯 부족하지만 나름 근접은 했다고 생각하기에 막 2시간 3시간 짜리 판타지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간다. 그렇게 극장에서 판타지 영화를 보면 보통 최소 3번은 자다 깬다. 자기 코고는 소리에 자기 자신이 덥썩 놀라 깨는 장면, 간혹 그것도 여지없이 극장에서 재현된다. 그럴 때 참 민망하다. 최근에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다 코를 심하게 크게 골다 깨서 챙피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러던 내게 그저 그런 일상에 삶의 기적이 일어났다. 어느 여자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이름만 불러도 그 이름이 상처받지 않을까, 그녀의 사진만 보아도 내 두눈이 시퍼렇게 멍들지나 않을까, 그녀가 그것을 알고 가슴 아파하지 않을까, 그녀를 생각만 해도 손에 진땀이 나고 엉덩이 쪽에도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많이는 아니다.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까, 연락을 기다릴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전할까, 꽃다발을 선사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녀를 지금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지금 만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랑을 지금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다소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남의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리라. 자신에게. 나는, 많이는 아니고 지금도 가슴이 가끔 울컥한다. 그렇다. 이게 그렇게나 사람들이 말하고 노래부르고 뭐라 뭐라 표현하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게 부를 수는 없다. 나중에 어딘가 모르게 그것이 흔적도 없이 기억할 수 없도록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변색되지 않을까, 그 감정의 이름이 바뀐다면 난 어떡하란 말인가, 그런 의문과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너무 이야기가 뭐해지니까 이건 여기서 멈춘다.
가만 있자. 최근 내 일정표 스케쥴이 어떻게 되지? 난 핸드폰이나 구글캘린더나 일정 수첩에 일일이 계획하고 기록하고 깨알같이 적고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삶이 좀 평이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저번 주에 나는 고물차 뱅거 레이싱에 참가했다. 뱅거 레이싱은 폐차되기 직전의 고물 자동차나 그럭저럭 얼렁뚱땅 만든 고철 자동차로 경주를 펼치는 경기다. 그곳에는 우체부, 햄버거 가게 사장, 간병인, 대학생 그리고 나처럼 투자자? 작가? 백수도 참가한다. 여기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딱 1번만 하고 그만하기로 했다. 그 생각도 많이 하면 안 된다. 중단 선언을 번복할 위험이 있다. 그 얘긴 그만해야겠다.
문단이 바꼈다. 앞의 문단과 이번 문단이 매끄럽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면 좋겠지만 바랠 껄 바래야지, 지금 그럴만한 정신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일관된 글쓰기가 아닌 순간 퍼뜩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기록하고 모으고 막 써서 그걸 소설로 묶고 그 글이 반짝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가? 정말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집어치워야겠다. 위선과 가식은 집어던지고 가끔은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렇다고 험하고 지독한 그런 내용이 아니라 2시 방향에서 10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바나나 껍질을 밝고 넘어져, 그가 무의식적으로 옆에 걷던 아가씨의 스커트를 잡아채고, 그러면 남자는 어느 큰 인형 위로 넘어지고, 여자는 팬티가 노출되어 바로 그것이 내 눈에 딱 띄는 거지, 이런 상상 말이다. 또는 알고 지내는 여자애가 연락해서 만났는데 같이 술 마시다가 그녀가 이러는 거지,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갈래! 이런 거? 별로 관심없다. 그건 내 취향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약점을 노출시키고 싶기도 하다. 통제력이 풀리는 시기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고 모차르트를 듣고, 시집을 읽고, 서점에 일주일에 한두 번 들리는 생활을 반복하고 지속하다 보면 불평을 그만하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에서 보는 노인이든 무서운 인상의 젊은이든 모두 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귀엽게 말하고 춤을 추던 애기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마치 점쟁이처럼 남의 과거를 투명하게 들여다 보고 또 예언가처럼 내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이런 사실을 여기 남기면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소설이란 분야 자체가 형식에 제한이 없는 게 매력이지 않나. 물론 소설만 그렇지는 않지만. 즉 집필 동기는 바로 친구들끼리 모여서 야, 우리 문학지 한번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라는 제의가 점점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만 보는 문학지 그런 거 말이다. 격주간이든 월간, 계간이든. 게다가 십대 시절에 이미 우리는 그와 비슷한 놀이를 했었다. 그때는 이런 걸 다뤘다. 손글씨로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누가 저번주에 뭐 했다, 다음주에 우리가 뭘 하네, 그런 소식 위주. 그것이 어느새 어른이 된 지금은 시나 소설과 희곡 같은 글 위주의 학문 곧 문학으로 바뀌었다. 아직 시작이지만 또 변할지도 모른다. 또 당시에는 원본을 복사하고, 스템플러로 붙인 후 직접 만나서 모여서 한 부씩 나누어 주고 한자리에서 같이 보면서 웃고 얘기 나눴다면 지금은 웹사이트를 만들고, 그곳에 각자 완성 작품을 올리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된다. 게다가 그땐 농구와 소식지가 중심인 반면 지금은 즐기고 체험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대상이 훨씬 다양하고 넓게 확장됐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중간에 흐지부지될지언정 뭔가를, 어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잠자고 있는 동심에 기초한 작은 소망과 협착하여 어떤 중요한 일을 은근히 꾸미고 있다는 별거 아닌 긴장감 때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 친구들끼리 만들기로 한 블로그의 이름. 그래서 지금은 일단 무명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뭐였드라,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모임이 시작된 농구단 이름이 무명이었다. 나는 그 무명 농구단과 가끔 친선 경기를 하는 다른 팀 일원이었고, 그때는 중학생이었으며, 고딩이 되어 새롭게 멤버를 짜서 뭉친 것이다. 물론 멤버가 너무 좋고 실력도 좋았지만 노는데 집착하느라 지역대회에 나갔다가 예선 탈락했다.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어이없이 예선 탈락했다. 그날 몇몇은 울고 막 화내고 그러다 괜히 뜬금없게도 지나가는 모범생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난 친구들 달래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 다가올 제1회 무명 문학제가 열리면, www에서, 첫 편집본이 웹에서 완성되어 발표된다면 서로들 누가누가 재밌고, 누구는 신인상, 누구는 특별상 그러면서 웃고 술 한잔 마시면서 단체 블로그이자 문학제인 그것의 태동과 탄생을 축하할 것이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어딘가에 외쳐야 할지 끝까지 꿍꿍이로 남겨야 할지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상이 하나 있다. 말...할까? 들어주실까, 그분이? (여기서 그분은 당신이고 그대이면서 만인이다) 까짓것 말하자. 그것은 바로, 인-기-상!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알렉스가 걸린다. 때문에 아쉽게 놓칠 수도 있지만 서운하겠지만 그냥 미리 포기한다. 거의 그건 알렉스가 따논 당상, 이미 찜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뭐다? 그건, 그건 주목할 만한 시선상! 오, 괜찮은데! 흔히 말하는 자기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중 친구들 가운데 한 명쯤은 3류 소설가, 두엇은 본격적인 허풍쟁이, 또 누군가는 개인 블로그만 운영하므로써 분명 어딘가에서 러브콜이 폭주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내가 뭔 작품 만들었나 다시 읽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뭔 소설을 구상하며 쓰고 있을지 궁금하다. 군침이 돈다. 아마도 이걸로 삶이 아주 조금은 재미있어졌다. 아 수동태 문장이니까 능동태로 말하자면 요컨데, 음, 어쩌면 난 지금 멋지고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 쑥스럽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서 분량이 너무 유별나면 어색하니까, 처음이니까 첫 작품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독자이신 그대와 오늘은 여기서 작별하고 자, 다음 작품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쿵쿵쿵!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대를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슥샥슥샥! 굽실굽실!)
나는 하워드다.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 수는 없다. 간질간질하게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옷벗기 게임을 하는 날, 나는 벗어도 벗어도 절대 알몸을 내보이지 못할 만큼 많은 옷을 챙겨 입는 성향으로 태어나서 그런 성격을 보완하고 연마하여 비로소 이젠 제법 마술까지 어느 정도 손에 익혀 그 어느 속임수도 떡 주무르듯 할 수 있기 때문에 보일 듯 말 듯한 게 그나마 가장 근접한 설명일 것 같다. 즉 엎어지고 일어섰다가 모순에 반전을 겪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하지만 나는 간혹 화끈하게 내가 가진 판돈을 되받지 못할 것을 미리 알면서도 흔쾌히 건네주는 담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이 크다, 원하는 건 가져야 한다, 책에서 읽든 사람들 얘기를 듣든 TV에서 보고 손가락으로 찍든 한 번 마음먹으면 이루고 말거나 원하는 순간 보물상자가 내것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단언하는 위인도 되지 못한다. 차라리 호구에 가깝지. 그것도 국가대표로. 그래서 소설 초반이지만 조금은 힘이 빠진다. 그러므로 짐작하시겠지만 내 입에서 연애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결혼하고 이혼하기, 뭐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마시라. 한 여자와 일평생 아니 영원한 사랑을 할 것이라고? 어떻게 험담 가운데서도 그런 섬뜩한 험담을 하시나. 아, 농담이다. 꼭 말을 하고 제낄 건 제껴야만 알아 듣고 만족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근래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조그만 소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그곳에서 열심히 배우의 길을 걸어 나중 대성하여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슈퍼스타가 될 가망성은 확률 제로다. 나도 그걸 원치 않는다. 단지 할 일 없이 심심하던 어느 날 오후 3시 무작정 혼자서 연극을 보러갔는데 소극장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삶이 왠지 모르게 낭만적일 꺼 같아서 그들이 가난하고 근근히 살아갈 것을 충분히 예상하지만 나도 모르게 털끝 만큼도 생각이 없는 극단의 일원으로 지원한 것이다. 그렇게 극단 가입을 신청했는데 어떻게 고기 못 잡아 혈안이 된, 대물에 환장한 낚시꾼의 낚시 바늘에 낚인 것처럼 가입 신청 하자마자 그날 바로 극단의 신입배우로 환영한다는 환대를 받고 그날 바로 연극 끝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 가기로 한다. 그렇다. 내가 노린 건 뒤풀이다. 그리고 여배우들을 노렸다. 여배우의 몸이 아니라 같이 그냥 기념사진 찍기를. 그렇게 극단에 주말마다 몇 번 나가다가 극단 사무실의 여직원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금새 친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적으로 너무 많이 친해졌다는 거다. 안 그래도 극단 사람들 눈치가 빠른데,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그 여직원을 사모하는 남자 배우와 따라다니는 남자 관객들이 많았나 보다. 극단 동호인도 막 가세하드라. 괜히 몇몇 이상 징후들이 보이고, 페이스북에 누가 경고성 메시지도 보내고, 내 자동차 타이어에 누가 오줌을 싸놓고, 엔블럼에 뭔 오물이 투척되어 있어서 자의 반 타의 반, 뭐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극단 생활을 그만두고 그녀와도 헤어졌다. 짧은 만남이었다. 멀어질 땐 말없이, 뭐 그렇게 된거네. 그래서 나는 다시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입닥쳐! (아, 오해하지 마시라. 글쓴이의 다중인격체 중에서 상당히 독특한 친구, 항상 조용했는데 요즘 부쩍 말수가 늘어난 녀석이 있어서 소설에 대한 걔의 짧은 소감은 될 수 있으면 기록하고 지나갈려고 한다. 나중 봤을 때 많이 이상하다면 지워버리면 그만이고, 뭔가 의미가 있다면, 꼭 그렇진 않드래도 의도하지 않은 색다른 효력이 발생한다면 그냥 그대로 둘 생각이다.)
나는 특별히 신나는 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을 모른 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야박하고 음침한 놈이 아니다. 우리 같이 심심해 하자. 아니면 같이 웃고 같이 떠들잔 말이다. 심각하게 인상 팍 쓰고 진지한 얘기만 하고 어려운 작품만 잡고 씨름하지 말잔 말이다. 오늘을 잡아라? 잠시 쉬어라. 당신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은 사건 해결 일지도 아니고 부케도 아니며 콘써트 티켓도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를 위한, 결국은 읽는 즐거움을 위해 소비되는 옷과 구두와 신용카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머머 해야 한다, 는 부담감을 내려 놓자. 나 지금 내 귀중한 시간 쪼개서 소설 읽고 있다구, 극도의 즐거움이든 감명이든 교훈이든 뭔가 내놓으란 말이야, 그러면 서로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둘 다, 그대와 그대의 똘만이, 즉 소설가 이렇게 두 사람이서 1 대 1로 놀자는 말이다. 그렇게 놀아보셨나? 잘됐네, 아직이니. 그럼 뭐하고 놀까? 레슬링? 그것보다는 시공을 초월한 지적 게임 어떨까? 너무 어려워도 곤란할 것이다. 음 있다 있어. 자, 진실게임 한 번 해보는 게 어떤가? 당신은 다음 문장을 선서하듯이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는다. 또박또박 소리내어 다음 문장을 읽는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여자친구를 좋아하겠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랑을, 또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반복하고 싶다. 간절히?> 간절히, 는 빼자. 선언이 끝났다. 음 기분이 어떤가, 현재 분위기가 어떠신가. 먼 산을 쳐다보는 게 낫겠다. 그대의 연인은 이렇게 애처로운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고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1년 후 어떤 깜짝스러운 탄식을 안겨줄지까지도. 뭐? 갑자기 이 소설이 싫어진다고? 포커페이스가 그렇게 힘드시나. 당신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마음을 녹이고 쥐었다 푸는 것 모두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이럴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그녀의 방 그 창문 밑에서 가곡을 부르며, 널 처음 봤을 때, 너에게 나는, 나에게 당신이란, 내게 소원이 있다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아가씨~ 풍문으로 들었소, 라고 고백하면서 그녀의 뒷-꽁무늬를 쫓아다니지 않겠다, 내 아내는 나처럼 쪼잔하고 제멋데로인 탕아를 만나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훨씬 친절하고 자상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한다, 까지는 좋은데 그럭저럭 괜찮은데...... 나는 조그만 장난감 병정 나팔수가 되어 뭔지 모를 이국적인 정서를 풍기는 달콤한 발라드 한 편을 들려주는 것, 내 특기야. 그 버릇 어디 가겠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그 망할 놈의 사랑까지 들먹이며 막판에 그녀를 근사하게 띄워주는 것까지 다 돼. 다 된다구. 좀 부풀리지 않아도 너끈히 식은 죽 먹기야. 아조 뿅가게 만들지. 그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자꾸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속내를 드러내는 자잘한 웃음 같은데서 걸린다고, 뒤돌아서서 밤중에 혼자 부엌이나 거실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마시다가 취해서 많이 취해서 흠뻑 취해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고? 그래 사랑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명언은 꺼내지 말자. 꼭 보면 그렇게 말을 빼는 범상한 평균치가 많다. 비범하게 가잔 말이다. 노란색이든 빨간색이든 끝끝내 동심이라는 이름의 카드는 깊숙히 남겨 놓자. 그냥 끝까지 상남자로 남자. 그게 낫겠다. 비록 연기력이 출중해도 막판에, 중요한 순간에는 들통나는데 이제 와서 독심술을 배워 뭐하겠나. 밑지고 들어가는 게 속 편하다. 그런데 뭔 장난이 이렇게 얄궃은 것일까? 이상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분이 내려오셨나? 잘못 내려오신 거 아닌가. 아님 뭔가에 씌였나. 거-참-나.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상상은 좀 힘들다. 엄청 힘 빠진다. 화자와 청자 모두. 약간이 아니라 많이. 마음에 안드는 답변이나 몸짓을 보기가 당황스럽고 난감하단 말이다.
시간아 너는 왜 우리를 기다려 주질 않니? 그러면 소설에 대한 막연하고도 허황된 기대를 결국에는 져버릴 수 없자나.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 쪽에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개그맨의 길을 알아볼 걸 그랬다. 어딘가 틈새 시장이 있을 것인데 이제 와서 그걸 찾아도 괜찮은 건가. 찾았다 치고 10년 공들였다 쳐, 공들인 탑이 안 무너진다는 속담이 언제나 참은 아니다. 아마도 분야를 잘못 골랐을 것이다. 그래. 다시 소설로 돌아간다.
나는 최근에 재미난 일이 없어서 느닷없이 결정했다. 라틴어를 배우기로. 언어에 관한 책을 보면 어족이 비슷한 언어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칼 사람들은 거기서 태어나 평생 고향에만 살면서 외국사람도 별로 만나보지 않았을지라도 스페인 말을 들으면 3분의 2나 80%는 대충 알아듣는다고 한다. 그 말이 진짜인가는 기회되면 박사님들께 여쭤보고 일단 색다른 무엇을 새로 배운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우선 기분이 좋다. 물론 시작은 독학이다. 그것이 내 인생 철학이다. 독학! 언제들어도 반가운 말. 무심코 떠올려도 정다운 이름. 괜히 웃음 짓게 만드는 재간둥이. 지나치게 식물성 유형인 거 같아 구식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독학 때문에 난 여기까지 달려왔고 좀처럼 뭔가에 대해 주기적으로 독학을 하지 않으면 몹시 께름직해서 참을 수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난 그냥 연기하러 태어난 것 같다, 일을 빼놓고는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지만 그것이 내 경우엔 독학인 거 같다. 어느새 이 녀석과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교분을 쌓아버렸다. 정분이 넘치고 넘친다. 독학을 하는 순간에는 말라깽이와 글래머가 영혼과 육신이 결합하여 뒤에서 나를 백허그하는 느낌이 든다. 소신의 3급 비밀을 알려 드리자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탄복할만한 환상 그것은 바로 독학이다. 당신은 이따금 실패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당신의 마음을 이리 줘 봐. 그래. 바로 그거야. 자, 뭐가 떠오른가? 그거라구. 모범답안은 상상에 맡길께요. 행운을 빌어요. 독학은 이렇게 영락없이 헛소리를 발설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느낌이 좋다. 마침 이번에 배운 라틴어에 이런 단어가 나왔다. <외모 밝히는 사람> 그 옛날에 이 말이 진짜 있었을까? 이 말에서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있나 없나는 모르겠고, 하나 고백하자면(고백을 너무 자주 하나? 나 양치기?) 나는 거리에서 무섭게 생긴 사람을 보게 되면 지나치면서 꼭 한 번 더 보게 된다. 드물게는 어쩌다 두 번. 목에 힘 빡 주고 안 볼라고 하는데도 자동적으로 시선이 쓱 돌아간다. 그래서 간혹 미녀들이 그들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것일까? 그건 그녀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또 그 친구들은 자신에게 호감있는 이성에게 어쩌다 한 번 잘해줘도 그 효과가 딴 사람보다 월등히 크다. 뭐야, 그럼 무섭게 생긴 사람들은 남자들에게도 덕망이 두텁고, 여자들에게도 니치 마켓에서 먹힌다고? 오, 개뿔!
나는 다시 라틴어 학습을 포기했다. 나는 포기가 빠르다. 안 되는 거 잡고 있어 봐야 답 안 나온다. 그것을 잘 해봐야 써먹을 데도 없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뭔가에 써먹을 만한 걸로 새로 배울 무엇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여차하면 바다보러 떠날 수도 있다. 책도 사놨다. (어느 섬 이름) 여행백서. 물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써야 한다. 여행지에서도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글이 잘 안 써진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허세의 상징인 두꺼운 금목걸이를 매고 펑크 스타일로 꾸며야겠다. 일단 경박함에 빠져 있으면 악흥이 떠오를 수도 있다. 나도 무서운 인상과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앗는 흡입력을 풍겼으면 좋겠다. 젠장, 참으면 안되겠다. 나 오늘 당장 검정색 가죽 점퍼 산다.
앗! 착상이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자, 여기서 안녕.
귀뜸 하나 하자면 친구들끼리 블로그에 연재소설을 같이 따로따로 올리기로 했는데 내가 너무 잘 쓰면 시샘을 받을 수도 있다. 분량도 길고 매번 완성도가 너무 높으면 그 녀석들은 매번 매주 신부 들러리 서서 부케 받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질시, 안 할 테니 최대한 많이많이 쓰라는 어떤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다. 미개봉된 첩보 영화같이 내 머리 속에 특수 칩이 심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하다.
나는 닉이다. 이번에 친구들끼리 문학 블로그를 만들어서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낯간지럽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 이번주까지 나의 첫 소설을 발표해야 한다. 처음엔 대범하게 시원스레 그러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손해보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산문 쓰기는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이번에는 내가 접어주고 다음에는 유행가 가사나 짧은 웹 드라마를 찍어서 그 블로그에 올리자고 제안해야겠다.
최근 케빈이 차를 라피드 S로 바꿨다. 조니도 지금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를 타고 다닌다. 알렉스의 카이엔 터보는 언제봐도 이쁘다. 마크의 까레라는 말할 것도 없고, 아, 한숨이 절로 난다. 저번에 사막에서 엉겹결에 몰아본 파나메라를 혼자 타고 그냥 도망가버릴 껄 그랬나. 너무 비싼 차 얘기만 한다고 뭐라 하지 말아주시길. 또 언제 걷거나 자전거타기로 바뀔지도 모른다. 나는 대중교통을 친구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한다. 게다가 사실 나는 스마트 포투를 너무 좋아한다. 아직도 그곳에는 그녀의 체취가 묻어 있다. 녀석을 몰면, 보기만 해도 그녀가 떠오른다. 그럼. 그렇지. 남자들은 원래 차도 좋아하고 말도 좋아한다. 개도 좋아하고 경마장도 좋아한다.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에게도 친하면 친할수록 경쟁 심리란 게 있다. 있기는 있다. 호승심도 있다. 있기는 있다. 친하니까. 아, 맞다. 심리학과 교수나 정신과 의사가 이 블로그를 볼 수도 있겠구나. 아무리 내 전공이 아닐지라도 좀 기품이 엿보이는 글을 써야겠다. 첫 작품이라서 좀 더 특별하지만 그래서 가슴이 설레어 학교 숙제하는 것처럼 어디서 베끼거나 막 짜집기라도 하고 싶은 콩알만한 마음이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냥 이번에는 우수상이니 특별상이니 다 애들에게 양보하고 이번에 나는 실험 컨셉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그랑프리를 노려야겠다. 말이라면 자신 있는데 글이라서 값싼 단어를 막 쓸 수도 없고, 딱 술술 풀리지도 않고 상당히 난감하다. 말로는 생쥐처럼 어디로나 빠져나가고, 대부호가 되었다가 천하의 카사노바도 문제없고, 말 한마디로 장벽이란 필요없고 모든 게 가능하다. 10분이면 끝난다. 나는 10분이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꼬실 수 있다. 멋진 차로 인한 장비발, 감싸여 있는 책과 악보등 지성미, 꺼뻑 넘어가는 영화배우 빰치는 외모, 다 필요없다. 말발이 있으니까. 10분도 많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완벽한 허당이다. 은근 허당이 아닌 순도 100% 허당. 너무 쉬우면 재미없다. 문하생은 받지 않는다. 기술 전수 사절. 아무튼 말은 자신 있는데 이건 말이 아니라 글의 문제다. 아, 미치겠다. 다른 애들도 지금 이러고 있을까? 옆길로 새면 안 된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촌각을 다퉈 마감일을 지켜야 한다. 지금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란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친구들과 그 결정을 했을 때는 어쩜 완전 거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만장일치의 결정이었다. 나도 그렇게 요술을 느끼고 신기루를 보는 듯 해서 막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지금이 아닌 그때는. 그때는 그랬다. 우리, 변하지 말자고. 우리, 이 마음을 이어가자고. 그 결정이 무엇인가는 직접적으로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아, 방금 적었구나. 그러니까 음, 더 절절한 사연에 대해서는 동료 작가의 작품을 읽으시면 알게 되실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드는 생각이지만 내 꿈은, 내 꿈은 과거나 미래에 갔다 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가보는 것도 아니다. 벼락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르주 심농을 능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왜? 눈치없긴. 내 꿈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작업실을 몰래 엿보고 외계과학자의 정신을 쏙 빨아들여서 내것으로 흡수하는 것도 아니다. 다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술에 취해서 생각해 봤는데 내 꿈은 그런 것 같다. 꿈의 벤치멤버 수없이 교체되었다. 꿈의 변경, 할 만큼 했다. 꿈다운 꿈, 그것은, 나의 그것은, 내 꿈은 점쟁이다. 특수한 점쟁이. 말만 번드르르한 말만 막 던지는 그런 가짜말고, 진─짜 점쟁이! 정말 그 영험한 경지에 올라서 마법을 터득한다면 내가 예언하는 대로 내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그것, 즉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기는 꿈을 바꾸고, 꿈을 꽃꽃이 하고 재수정하며, 꿈을 뻥 차고, 꿈과 팔짱을 끼는 그 온갖 변덕과 생동감, 그 총체 그것이 진짜 꿈 아닐까? 꿈도 그렇고 그만치나 궁극적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단어, 사랑도, 그것이 그것인가는,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미친 놈! (소설 중간에 하이드가 잠깐씩 끼여드니 이해하시라.)
그래서 나는 지금 소설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쓰는가? 쓰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왜 읽는가? 무엇을! 어차피 사람은 둘 중 하나로 나뉜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으로. 안아 줘, 키스해 줘,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줘, 나만 봐, 라고 하는(또는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사람과 안아야 할 때 적시에(적시에만!) 안고 무언중에 지금이라고 느낄 때 '키스해도 돼?' 라고 묻지 않고 키스하며 그녀를 푹신한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솜사탕처럼 입이 아닌 눈보다 더 은근한 상상력을 호사시키는 어딘가로 그녀를 데려가면서 음 어때 음 달콤해 오오 생각만 해도 멋져 음 그런데 아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어색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독실한 그만의 관습에 따라 부르는 사람으로. 그런데 그 이름이 남자나 여자 이름이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수영복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보통의 해수욕장에서 나체로 수영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으로. 물론 더 세부적으로 나뉘고 이리저리 얽힐 수 있다. 그렇다 치고, 자,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 그냥 생각없이 다짜고짜 덮치는 스타일? 뭐시여,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만. 그러다 잡혀가. 구속된다구. 고소당해. 이 양반이 지금 어디에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시여? 집중하라고, 집중. 너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어, 소설.
뭔 설명은 장난 아닌데, 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런 머저리 같은 놈. (From 하이드 비공인 수제자)
글이 안 써진다. 왜 안 써질까? 감정이 안 잡히니까! 왜 감정이 안 잡히는가? 연기자가 아니니까! 연기자가 아니어도 글이 잘 써질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좋겠지만 몰입되어 정신을 쏟고 영감을 받고 글을 쓸려면 그분이 내려오셔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그분은 누구인데? 나도 그분이 누구인지 잘 몰라!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린다고? 응, 그래야 하니까! 그분은 왜 안 내려오시는데? 나도 몰라! 이제 그만 물어!
무엇을 쓸까. 사랑의 종류와 사랑의 행위와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새벽에 문득 깨어나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영화에 보면 그런 거 나오잖아. 정신과 의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드물게 환자가 인생을 이야기하고 그와 얘가 사랑에 빠진다거나 그런 거. 그런 거? 그런 건 이야기가 아니라 공상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허영. 질투. 절반의 존경. 선망. 동경. 경외. 몽상. 추리 말고 추측. 상상 계속 상상. 그래서 생각한 건데 정말 잘 짜여진 이야기를 쓸 게 아니라면 독자를 연애 상대로도 봤다가 날 쫓아다니는 정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짝사랑에 빠진 조수로도 봤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정신없이 하다가 마침내 뭔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는데 나중 끝나고 나니 대충 이야기는 되는 약간만 탐탁치 않은 그런 거,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살면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열렬하게 구애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 얘도 아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그런 일련의 일관된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는 것, 역시 아니야.
글이 안 써질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럼, 그동안 널 지켜봤으니까, 널 연구했다고, 내 전공이 너야!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몰라서 물어, 난 너의 내면의 목소리야, 제2의 자아라구, 감정이 안 잡힌다며, 연기자가 아니라며, 그럼 작가가 되면 될 꺼 아니야!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나, 신문에 글 한 편 실리면 언론인이고, 관광지를 단체로 여행하다가 혼자 길을 잃어서 헤매던 곳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올리면 그 즉시 탐험가되고, 아무나 예술가하고 누구나 학자가 되게? 뭔가 뭔질 모르겠네, 이게 뭔 모노로그 연극도 아니고, 그냥 딱부러지게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든가! 왜 그걸 알고 싶으실까, 왜 그걸 알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지금 장난해,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자, 자, 그거야, 지금 그 감정이 뭐라고 생각해, 지금 그 상태, 지금 그 변화, 세포분열, 환상을 깨야지만 여명이 밝아오듯 서서히 나타나는 환상, 비밀의 문을 어렵게 활짝 열었을 때 바야흐로 드러나는 또 다른 비밀의 기미, 신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두 애들 장난 같은 거라고 돌맹이 보듯 도외시하며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신비라는 마에스트로가 몰래 당신의 곁으로 다가와 뒤에 있었는데 돌아보면 보이지 않듯 관심을 보이는 그런 신비, 보통의 지각으로 알아낼 수 없는 그것,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걸 붙잡아서 구체화시키란 말야, 왜 그걸 못해, 왜? 못하긴 뭘 못해, 아직도 여태 그분이 오시질 않았다니까 그러네, 아 미치겄다, 너 때문에!
이렇게 닉의 첫 소설은, 밑도 끝도 없는 추상적이고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소설은 급작스럽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끝을 맺는다.